소설리스트

51화 (52/72)

1.

‘마법사가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홀로 침실에 들어선 키릴이 망설이다 품에서 오늘 받은 상자를 꺼냈다.

열어보기가 무서웠지만 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쪽지 같은 것도 없었고, 상자 어디에도 키릴의 이름은 없었다. 그런데 보자마자 키릴의 것이란 걸 알았다니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무엇이기에.’

조심스럽게 상자를 여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안을 확인한 키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건…….”

상자 안에 든 것은 첫 임신 때 황제에게 받았던 선물과 같은 물건이었다. 백금이 아닌 노란 빛이 도는 금색 링엔 장식용 보석이 여러 개가 달려 있어 전보다 생김새가 요란했다. 더 불편하게 생긴 것은 둘째치고 당연한 듯이 두 번째 임신에 쓸 선물을 미리 준비해 둔 선황의 행동이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이걸 보고 나에게 줘야 할 것 같아서 챙겼다고?”

키릴은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 마법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혹시 선황과의 일을 아는 자가 태의 말고도 또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긴 귀를 가진 궁정 마법사를 본 것은 선황의 장례식 때가 처음이었다. 황실에서 지낼 때도 요정족 자체를 본 적이 없었다.

키릴은 다시 한번 상자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 선황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둔 것은 아닌지, 차라리 그러기를 바라며 샅샅이 살폈다.

“없어. 따로 글이라도 적어 두었다면 그것도 함께 주었을 텐데, 이 상자 하나만…….”

그렇다고 궁정 마법사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었다.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었다.

키릴은 일단 일리야에겐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 몰라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황의 목을 쥐고 숨통을 끊던 일리야의 모습이 떠올라 키릴이 눈을 꾹 감았다.

‘그건 안 돼. 일단…… 기다려 보자.’

무언가 의도가 있다면 상대가 먼저 움직일 것이다. 이 물건을 전해 준 궁정 마법사가 다음에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한 후 생각해도 될 것이다.

‘아직은 내 짐작일 뿐이지. 그래, 어쩌면 안의 내용물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고…….’

이렇게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짐작일 뿐. 온갖 억측이 생각을 좀먹고 점점 덩치를 키우며 불어났다. 침착하려 해도 조바심이 나서 마음을 다스리기 쉽지 않았다.

자리에 앉으려던 키릴이 다시 벌떡 일어나 방안을 초조하게 오갔다.

차가워진 손끝을 꾹꾹 누르며 마법사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면 그날 옷이 젖을 걸 보고 눈치챈 걸까? 보통 그렇게 바로 알 수가 없을 텐데……. 자궁의 존재를 알지 않는 한.’

불길한 예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릴은 안색을 굳히고 바로 상자를 치웠다. 가까이 있던 서랍 안에 상자를 넣고 닫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일리야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키릴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섬뜩함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키릴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일리야를 맞았다.

“오늘은 좀 늦는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빨리 일을 마치고 온 일리야가 가만히 키릴을 보며 서 있었다. 일리야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키릴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키릴은 그제야 제대로 된 미소를 지으며 그 앞에 다가갔다.

“일을 다 끝내고 온 거야?”

일리야가 웃으며 허리를 숙여 키릴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빤히 지켜보았다.

키릴은 민망한 듯 따라 웃다 충동적으로 그가 먼저 일리야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생각해야 할 건 많았지만 지금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아……!”

그때 가만히 있던 일리야의 손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일리야?”

키릴이 놀라 그를 불렀지만, 일리야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얇은 셔츠 위를 더듬거리던 손이 젖꼭지에 꽂힌 보석을 만지곤 멈칫했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툭 튀어나온 유두를 손끝으로 슬며시 짓눌렀다.

“으응……!”

저릿하게 피어오르는 성감에 키릴의 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직 괜찮은데. 이따가…… 이따가 해 줘.”

키릴은 낯부끄러워서 일리야를 밀며 말렸지만, 일리야는 태연히 키릴의 셔츠를 풀었다. 순식간에 키릴의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일리야의 시선이 키릴의 맨가슴에 꽂혔다.

“왜, 왜 그렇게 봐. 매일 보는데, 뭐가 그리 신기해서……. 보지 마.”

판판했던 가슴이 임신으로 인해 부풀어 올라 제법 그럴듯한 봉우리를 그렸다. 그 낮은 둔덕이 이상하게 아찔하여 일리야는 손끝으로 곡선을 더듬었다. 끔찍이도 부드러웠다.

키릴이 숨을 들이켜자, 쫑긋 솟은 유두가 흔들렸다. 같은 바깥 공기에 한층 더 높이 솟아오른 유두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것이 당장이라도 잡아당겨 비틀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으으응, 네 손, 조금 찬 것 같은데……. 아…….”

“…….”

“일리야?”

고개를 들기 무섭게 위로 그림자가 쏟아지고 푹신한 입술이 맞물렸다. 키릴은 당황하면서도 착실하게 입을 벌렸다.

물컹물컹한 살덩이가 입천장을 간지럽게 긁고 입 안을 집요하게 유영했다. 치열을 하나하나 샅샅이 훑고 입안의 점막을 전부 맛보려 드는 탓에 숨이 찼다. 키릴의 숨이 거칠어지자 마치 달래듯이 질척하게 혀를 비볐다.

타액이 이리 달콤했던가. 희미하게 나는 단맛이 이상하게 황홀했다. 어느새 키릴은 정신없이 일리야에게 매달려 그의 타액을 탐했다.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이 뽀얗게 부푼 살덩어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가슴살을 뭉그러뜨리는 거친 손길에 키릴의 숨소리가 습하게 젖어 들었다. 평소보다 손길이 거칠었다.

가축의 젖을 짜듯 손안에 부푼 살을 움켜쥐고 쥐어짜자 유두를 막은 보석이 튀어나온 것과 동시에 유백색 물줄기가 팍 뿜어져 나왔다. 일리야가 혀를 내밀어 입술 주변에 튄 흰 물을 핥으며 느른하게 미소 지었다.

“……일리야?”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키릴은 그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다고 느꼈다.

“역시…….”

고작 한 마디뿐이었지만, 목소리 또한 평소보다 낮고 굵었다.

분명 일리야가 맞는데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옷을 벗기는 손길이 조금 서투른 건 둘째치고 키릴의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달랐다. 손톱으로 유륜을 마구 긁고 비비며 자극하다 부어오른 살을 혀로 핥아 올리는 행동이 몹시 난폭했다.

한창 관계 중일 때면 모를까 일리야는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기 전엔 키릴을 부드럽게 대하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일리야, 무슨 일, 있… 었니?”

일리야는 대답 없이 키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깊고 나른한 한숨을 흘렸다. 숨결이 피부에 닿는 순간 선뜩하면서도 짜릿한 전율이 척추에 내리꽂혔다. 순식간에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고작 입김 하나만으로 하반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뭐지? 이거 이상…….’

오늘따라 이상했다. 그의 몸도, 일리야의 상태도.

키릴이 다시 물으려 입을 벌린 순간 일리야가 유두에 낀 링을 쥐고 당기는 바람에 말 대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자, 잠깐, 윽, 하지, 앗, 흐으윽……!”

일리야가 쭙쭙거리며 게걸스럽게 젖을 빨아 꿀떡꿀떡 마셨다. 양이 성에 차지 않는지 가슴을 세게 움켜쥐고 혀끝으로 젖구멍을 넓히려 들었다. 파헤치고 쥐어짜며 볼이 홀쭉해지도록 강하게 흡입했다.

축축한 입안에서 힘껏 빨리는 느낌이 뇌까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몰아치는 거센 자극에 온몸이 부들거렸다. 발끝이 곱아들고 몸이 휘청거렸다. 키릴은 일리야의 팔 안에 갇힌 채 속수무책으로 헐떡였다.

키릴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허리를 끈적하게 쓸어내린 손이 키릴의 바지 속을 파고들었다. 얇고 숱이 적은 음모를 문지르며 성기를 움켜쥔 순간 키릴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가쁘게 토해지는 숨소리에 비음이 섞여들었다. 키릴은 치솟는 흥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일리야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몸 안에 불길이 일었다.

아찔함에 눈앞이 자꾸 깜빡거리는 사이, 어느새 일리야에게 아이처럼 안겨 침실로 옮겨졌다.

일리야가 옷을 벗고 키릴의 허리 위에 올라탔다. 아래에 깔린 몸을 탐욕스럽게 훑어내리는 시선에 키릴은 평소와 달리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키릴이 제게 다가오는 일리야의 어깨를 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자, 잠깐만, 왜……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가만히 키릴을 쳐다보던 일리야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라색 눈동자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이상했다. 너무 이상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키릴이 불안함에 얼굴을 굳히자 일리야가 위로하려는 듯 볼을 핥으려 들었다.

키릴은 손을 들어서 막으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살갗이 닿는 것만으로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다.

머리는 이 상황을 멈추고 싶은데 몸은 절절할 정도로 상대를 원했다. 아까부터 벌벌 떨리던 허벅지가 질척질척했다. 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욱신거리다 못해 지금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웠다. 수백 마리의 벌레가 자궁 안에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안이, 아니, 이젠 온몸의 피부와 그 안의 속살까지 근질거렸다.

눈앞에 있는 이가 일리야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일이었지만, 느낌이 이상했다.

일리야가 아닌, 전혀 모르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렇게 인식한 순간 거부감이 확 올라왔다.

키릴은 그의 바지를 끌어 내리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순간, 상황에 맞지 않게 낮에 집무실에서 제가 저지른 일이 떠올라 흠칫했다. 키릴이 움찔한 순간 일리야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눈치챘니?”

“아……!”

일리야의 홍채가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그 눈을 본 순간 키릴은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자는 일리야가 아니었다.

용이었다. 용이 일리야를 흉내 내며 키릴에게 접근했다.

애초에 용의 씨를 받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 자궁이었다. 그의 눈길을 받자, 분명 거부감이 들었는데도 자궁 안이 욱신거리며 또 물을 뿜어냈다. 안이 젖는 느낌에 키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키릴이 뒤늦게 떨리는 팔을 들어 남자를 강하게 밀쳐냈다.

남자는 순순히 밀려났다. 하지만 키릴의 팔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더 문을 두드린 후, 손잡이가 돌아갔다.

문 여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키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일리야의 모습을 훔친 용이 그런 키릴을 내려다보며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

일리야가 이 상황을 본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용이었다. 키릴의 고개가 다급하게 돌아가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일리야가 들어섰다.

“키릴 님?”

“드디어 왔군.”

“……누구냐.”

키릴의 예상대로 일리야는 제 모습을 한 용을 보자마자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다리가 땅을 박차기도 전에 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 굳었다. 일리야를 단번에 제압한 용이 눈동자만 움직여 성기사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설마, 마스터급 성기사인가? ……아니, 아직 조금 모자라군. 성기사 주제에 대단한데?”

용이 태연하게 지껄였다. 검은 든 자세로 굳은 일리야 역시 유일하게 움직이는 눈을 굴려 상대를 살폈다.

‘……용족!’

자신을 흉내 낸 가짜의 진짜 정체를 알아챈 일리야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보라색 눈동자에 어린 금빛 기운을 본 용은 문득 주신의 검이라 불리던 남자를 떠올렸다.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오히려 용은 웃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그 어린 나이에 거기까지 닿다니. 내 신부의 눈이 상당하군, 그래.”

“그만. 일리야를 놔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키릴이 일리야에게 눈을 떼지 못하자 용은 그 얼굴을 관찰했다. 당황, 자책, 걱정, 슬픔, 공포. 그리고 분노.

“지금이라도 그를 무사히 놔주신다면, 이 무례는 넘어가겠습니다.”

목소리는 제법 그럴싸하게 냉정을 가장했지만, 겁에 질린 작은 동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제 기사를 보는 신관의 눈빛이 용이 보기에도 퍽 애처로워서 그는 장난을 그만두기로 했다.

용이 한 손을 휘젓자 일리야가 침대 옆 소파로 이동했다. 몸이 저절로 움직여 소파에 앉자 용이 경고했다.

“거기 앉아서 얌전히 내 얘기를 듣거라. 널 해할 생각은 없다. 난 간절하게 갈구하는 자들에겐 너그러우니.”

“…….”

“아침, 말을 못 하게 닫아놓았지. 미안하구나. 계속 그대로 있으렴.”

일리야의 기세가 한층 더 험악해지자 용이 키릴을 가리켰다.

“네 사제에 관련된 거다. 그러니 얌전히 들어.”

“…….”

“약속하마. 너희 둘을 해치지 않을 거야. 특히 너. 그리하다간 벽을 깨도 네 그릇의 토대가 버티지 못할 거다.”

자신을 묶은 기운을 뿌리치기 위해 끊임없이 내부의 힘을 강제로 터뜨리던 일리야가 흠칫했다. 하지만 들켰다는 생각에 놀라 잠시 멈췄을 뿐, 용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 일리야를 말린 건 키릴의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일리야는 얌전히 몸에서 힘을 뺐다. 다만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그것이 용이 보기엔 제 것을 지키려는 어린 맹수 같아서 분명 건방진데도 화도 나지 않았다.

문제는 일리야가 아니었다. 제게 눈을 떼지 못하는 어린 성기사와 달리 정작 중요한 신관은 용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까부터 시선을 피하기 급급해 보였다.

“왜 그래? 왜 날 보지 않지?”

“그 얼굴 좀…….”

키릴이 일리야와 똑같은 용의 얼굴을 지적하며 거부감을 내비쳤다.

“그런가. 호감을 주려고 이 얼굴을 선택한 건데. 역효과였나.”

거짓말. 용은 그 얼굴로 키릴을 품으려 했다. 다른 사람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대화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용이 키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용이 접근하기 전에 일단 내 기운을 묻혀놔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서 네가 불쾌할지도 모른단 걸 미처 고려하지 못했어. 내 불찰이다.”

용은 그 와중에도 입가에 내내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적의와 경계를 누그러뜨리고자 딴엔 노력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식이 글러 먹었지만 말이다.

용은 순식간에 일리야의 모습을 지우고 본래 쓰고 있던 껍데기를 다시 둘러썼다. 긴 귀와 목덜미를 덮는 짧은 흑발, 고전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한 미형의 얼굴. 아는 자였다. 선황의 장례식 전날 키릴에게 겉옷을 빌려주었고, 오늘은 문제의 선물을 주고 간 황실 마법사. 요정족인 줄 알았던 남자가 사실은 용이었다.

용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나 싫었니? 왜 이리 화가 났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면서도 그는 순순히 사과했다.

“내가 잘 몰라 실수한 것 같구나. 앞으론 같은 실수 하지 않도록 하마.”

‘앞으로’라니. 키릴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덜덜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제게 와서 이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용이 키릴의 배를 보며 말했다.

“죽은 황제의 아이를 낳았지? 널 찾고 있었다.”

“……!”

그 순간 키릴의 숨이 멈췄다. 키릴이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용을 보았다. 용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로 키릴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잠시 뒤,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짐승의 눈동자에 의문이 스쳤다. 키릴이 왜 저를 두려운 듯 쳐다보는지 의아한 듯했다.

용이 입꼬리를 한층 올렸다. 자신이 무서워 그런다고 생각해 그러지 않았으면 해서 한 행동이었다.

멍청한 용 같으니. 일리야가 그 모습에 탄식했다. 그러다 제 상태를 한탄했다. 말 한마디 뜻대로 내뱉을 수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신전에 든 후 두 번째로 느낀 무력감이다. 하필 두 번 모두 키릴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그가 느끼는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리야가 키릴을 걱정스럽게 살필 때, 키릴은 마구 떨리는 손끝을 말아쥐며 용에게 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모를 수가 있나. 내 동족이 만든 물건을 이렇게 안에 품고 있는데.”

“…….”

“네 몸 안에 있는 그것이 용을 품기 위한 물건이란 건 알고 있니?”

“……그런 말을 듣긴 했습니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키릴의 말에 용이 웃었다. 오늘 본 것 중 가장 진심 어린 미소였다. 용은 마치 우스갯소리를 들었다는 듯,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아이가 귀엽다는 듯 그리 웃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이 품을 씨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 네게 약을 먹인 선황조차 그랬다. 하지만 네겐 슬프게도 아니란다. 네 안에 그 물건이 자리 잡은 순간, 필히 이리될 것이었다.”

“그 말씀은…….”

키릴이 이젠 눈에 띄게 손을 떨며 제 배를 만졌다. 용이라니……!

“제가 용을…….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종족과 성별에 구애 없이 용을 수태시키기 위해 만들었지. 제 짝이 될 이에게 품게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걸 통해 짝을 찾기도 해. 그러니 네가 살아 있는 이상, 용을 피할 수는 없어. 나만 해도 이렇게 너를 찾아왔지 않니.”

“…….”

“아가, 숨은 쉬고 있니?”

“……네. 혹시, 피할 수는…….”

“없어. 내가 아니라도 다른 용이 너를 찾을 거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고작 두 번째 임신에 풍기는 향이 짙어. 내가 아닌 다른 용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거다. 장담한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용의 인공 자궁이니, 용을 낳기 위한 물건이 뭐니 떠들어도 진짜 용과 엮일 줄은 몰랐다. 상상도 못 한 일이 갑자기 현실에 들이닥치자 키릴은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안 됩니다!”

일리야가 용의 구속을 깨고 외쳤다. 용이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지만, 막아 둔 입이 뚫렸다.

“키릴 님을 둥지로 데려갈 생각 따윈 하지도 마십시오. 신께서, 그리고 교단이 절대 그리 두지 않을 것입니다.”

놀란 기색이 가득했던 용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용의 인공 자궁에 얽힌 진실을 풍문으로 받아들였던 키릴에게 짓던 미소와 결이 같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미소. 그를 보자 일리야는 더욱 분하다는 기색을 띠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용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는 내 짝을 둥지에 가둘 생각이 없단다.”

“둥지에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그래. 그래서 제안하려고 해. 내 짝이 되어 주지 않겠니?”

키릴이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용은 서운한 듯 입꼬리를 내렸다가 다시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들어 보거라. 나는 너를 둥지에 가두지 않아.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다른 용은 다르겠지.”

“…….”

“우리는 수인족과 다르다. 같은 동족과는 반려를 공유하지 않아. 네가 내 짝이 된다면 다른 용족은 네게 접근하지 않을 거다. 이건 네게 꽤 중요한 사실이란다.”

거기까지 말한 용이 일리야를 힐끗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 어린 것은 동족이 아니니 예외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키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짝 같은 게 될 생각은 없지만 다른 용이 접근하지 않는다는 말이 걸렸다. 불길함을 느낀 그가 용에게 물었다.

“짝이란 게 정확히 어떤 걸 말합니까?”

“짝은 말 그대로 짝이지. 인간으로 치면 내 신부가 되어 달라는 거다. 그들처럼 혼례를 올리는 건 아니야. 대신 함께 새끼를 만들지. 종족 수를 늘리는 건 용족의 의무고, 그것을 위해 그런 약까지 만들어 퍼뜨릴 정도로 우리에게 짝은 중요한 존재거든.”

단순히 번식을 위한 것만은 아니지만. 용은 말을 숨겼다. 이미 연인으로 보이는 자가 있는데 용의 특별한 존재 운운하면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거부감만 불러일으키겠지.

짝은 인간의 탈을 쓰고도 용으로서 교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완전한 결합은 특별한 정신적 교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 결과 그 상대는 용의 또 다른 심장이 된다. 괜히 용이 혈안이 되어 제 짝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종족 번식만을 위해서였다면 수인처럼 수태가 가능한 짝을 공유해서라도 귀찮은 짐을 던져버렸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갈라놓을 생각도 없고, 네가 이룩한 지금의 생활과 환경을 바꾸라고 하지도 않을 거다. 내가 네 삶에 끼어드는 것 외엔 딱히 바뀌는 건 없겠지. 아, 아이를 가지는 건 네가 원치 않아도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이번에 임신하면 다음은 십 년이나 이십 년 뒤에 노력하면 되니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렴. 참고로.”

용은 진득한 시선으로 키릴의 몸을 훑어내렸다.

“다른 녀석은 나와 아주 다를 거야.”

용이 키릴에서 다가가 아직 평평한 배를 만졌다. 키릴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피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키릴의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이것을 가진 자를 그냥 지나치는 용은 없어.”

어떻게 해서든 차지하려 들겠지. 그리 덧붙이는 용의 손이 닿는 순간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고통은 없었다. 오히려 안이 따스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간질거리고 쿡쿡 찔리는 것처럼 아릿하던 내벽까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심적인 거부감과는 별개로 기분이 좋아 당황스러웠다. 용만 자궁을 가진 자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궁을 가진 자 역시 용에게 반응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키릴은 공포마저 느꼈다.

그는 필사적으로 술렁이는 마음을 숨기고 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 미온 왕국에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지. 이 주변에도 있는 것 같고.”

키릴과 일리야의 표정이 굳었다.

“나를 받아들여 준다면 그대와 저 아이의 관계를 아무도 모르도록 도와주지. 그대는 물론이고 연인의 명예까지 지켜 주겠다는 말이다.”

“협박하는 겁니까?”

일리야의 말에 용이 짓궂게 웃었다.

“협박이라. 그래, 내가 아니면 다른 종족이 그대를 찾아내는 순간,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몰라. 두 번 다시 연인을 보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더는 신관으로 있을 수도 없겠지. 둥지로 끌고 가 그곳에 평생 가둬 둘 테니. 믿기 힘들겠지만, 그리되고도 남아.”

“그렇겠지요. 손쉽게 납치하고, 멋대로 상대의 인생을 뒤틀고…….”

“일리야?”

“그래도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상대와 그 주변마저 짓밟아 대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곤 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일리야가 용을 노려보았다. 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성기사를 용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키릴은 불안한 눈으로 일리야와 용을 살폈다. 다행히 용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집요히 상대를 관찰하다 피식 웃었다.

“너는 잃은 적이 있구나. 네게 박탈감을 안긴 존재가 혹시 내 동족이더냐?”

“…….”

“맞는 거 같구나. 그래, 이번에도 잃을까 두려웠나?”

일리야는 키릴을 보았다. 불안한 눈으로 둘을 지켜보던 키릴이 일리야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

“하신 말씀이 다 사실이고 진심이신지요.”

“네스토르.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

생각이 많은 얼굴을 보며 용, 네스토르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잘 생각해 보고 답을 알려 주렴. 황실에 연통을 주면 다시 찾아오마.”

할 말을 모두 마친 용은 일리야의 속박을 풀어 준 뒤 그대로 사라졌다.

*

일리야는 용이 돌아가자마자 머릿속으로 바삐 교단과 용의 전력을 비교해 보았다. 교단이 작정하고 움직이면 용 한 마리 사냥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대신 그럴 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납치된 이후엔 늦다. 그렇다면 그 전에 처리해야 하는데 교단은 키릴을 교황청에 숨기는 것으로 타협하려 들지 모른다. 무엇보다 설득을 위해선 자궁의 존재를 알려야 했다. 일리야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명분이야 주신이 교황청에 계시 하나만 내려도 충분했다. 주신은 절대 키릴을 제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일리야는 확신했다.

‘기도라도 올려야 하나. 안 되면 은퇴하고 싶어 하는 교황을 부추겨서…….’

현 교황은 오래전부터 은퇴하고자 했고 인제야 신성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랬다. 우연인지 키릴의 두 번째 임신과 시기가 비슷했다.

반면에 키릴은 아주 조금 신력이 늘었다. 이대로 가면 교단에서 가장 신력이 많은 자는 키릴이 될 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음 대 교황은 키릴이 될 수도 있었다. 키릴이 아직 추기경이 되지 못한 건, 아직 어린 그가 경험을 더 쌓길 기다리는 교단의 배려였을 뿐이다. 교황이 손을 보탠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키릴은 원치 않겠지만, 가장 많은 신성력을 가진 신관이란 특별한 것이니 설령 교황이 되지 못하더라도 교단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결국은 다 남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거구나. ……싫다.’

일리야가 주먹을 꽉 말아쥘 때였다.

“일리야.”

내내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키릴이 그를 불렀다.

“그 사람, 아니, 용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인 것 같니? 이게 있으면 정말 다른 용이 관심을 가질까?”

“……그럴 겁니다. 대부분은 둥지로 끌려갑니다. 하지만 키릴 님께서 교단의 보호를 받으면 막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일리야가 그렇게 말했지만, 키릴은 고개를 저었다.

“내 문제로 교단이 피해를 봐선 안 된다고 생각해.”

“애초에 계시로 인해 일어난 일입니다. 교단과 완전히 무관할 수 없습니다.”

키릴이 흐릿한 미소를 보였다.

“둘째는 계시도 교단도 상관없이 가졌어. 계시만 이루고 내가 조심했다면 용의 눈에 띄진 않았겠지.”

키릴이 창백하게 굳은 일리야의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후회하진 않아. 그리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으려면 교단의 다른 이들이 내 일에 휩쓸리지 않아야 해. 그건 너만으로 족해. 이미 과분해. 내 말, 이해해 주겠니?”

일리야는 말없이 키릴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키릴이 사랑스럽다는 듯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상대를 응시하던 키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이 아까 네게 잃은 적이 있다고 하던데. 용족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저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간 게 용입니다.”

“뭐?”

깜짝 놀란 키릴을 따라 일리야의 뺨을 쥔 손도 움찔 떨렸다. 떨어지려는 손을 잡아채 다시 제 뺨 위에 올리며 일리야가 말을 이었다.

“눈앞에서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용을 거부하진 않았어요.”

대신 제 눈을 피했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일리야는 알약을 삼키고 울부짖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씁쓸함을 삼켰다.

“어머니께서도 키릴 님과 같은 것을 가지셨을 겁니다. 그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

“그러니 첫째 아이니, 둘째 아이니 그런 건 상관없다고 봅니다만. 키릴 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차라리…….”

일리야가 고통스러운 듯 눈을 꾹 감았다.

“둥지, 둥지만은 안 됩니다. 저와 영원히 함께 있어 주시기로 하셨잖습니까.”

단단하게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끝에 가서 살짝 떨렸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강했다면, 좀 더 빨리 벽을 깼다면 이런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키릴을 잃을까 두려운 만큼 일리야는 자신이 싫었다.

키릴이 좋아하는 우아한 눈매가 고통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키릴이 남은 손으로 일리야의 눈가를 더듬었다. 애써 참는 듯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지만 잘게 떨리는 살갗이 마치 울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미안하게. 죄송하다 말하는 일리야가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

그런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서. 키릴은 뒷말을 삼켰다.

“키릴 님?”

“약에 대해 말했을 때 네 표정이 좋지 않아서 왜 그럴까 생각하면서도 그냥 넘겼는데. 그래서 그랬구나.”

버리지 말라고 말하던 일리야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때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불안해서 그런 말을 했던 거였어.”

키릴은 제 손등을 감싼 일리야의 손을 밀어내고 다시 맞잡아 깍지를 끼었다. 단단히 힘이 들어간 손길이 마치 떨어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일리야가 겹친 손을 들어 키릴의 손등에 입술을 문질렀다.

“예, 그때는 버텼지만, 당신을 잃으면 전 죽을 테니까요.”

키릴을 찾아 헤매다 미쳐 죽든, 숨이 막혀 죽든, 결국은 죽을 것이다.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하려던 키릴은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처연한 낯을 보니 꾸지람을 할 수 없었다. 대신 키릴은 일리야를 끌어안았다. 품 안 가득 차는 커다란 몸이 이상하게 연약하게 느껴져 마음이 심란했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막힌 곳인데도 사방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벽도 천장도 없이 이대로 비바람이 몰아친다면 그대로 젖어버릴 듯 그런 막막함을 느꼈다.

어찌해야 하나. 용이 남기고 간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용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 따윈 해 본 적도 없었건만, 하필 선황이 선택한 기물이 이런 것이라 결국 이리되었다.

키릴은 탄식을 흘렸다. 선황이 키릴에서 남긴 흔적이 이토록 끈질길 줄이야. 계시를 위해 치렀던 대가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용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지금은 최악을 피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일리야가 또다시 용에게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네스토르라는 용이라고 다를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그가 약속을 지킨다면 다른 용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키릴이 품 안의 일리야에게 속삭였다.

“미안해, 일리야.”

“……키릴 님?”

“제안을 받아들여야겠다.”

얌전히 안겨 있던 일리야가 흠칫하더니 바로 몸을 곧추세웠다. 형형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키릴이 다정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그와 거래할 거야.”

“…….”

“내가 용의 아이를 가지게 되더라도, 그런…….”

키릴이 머뭇거리다 애석한 미소를 지으며 일리야를 마주 보았다.

“그런 짓을 그와 하더라도, 네가 나와 함께 하겠다면.”

고통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린 일리야가 키릴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키릴이 작게 속삭였다.

“대신 너와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용에게 부탁할 거야.”

“……저 때문이라면 안 됩니다.”

“아니, 날 위해서 결정한 거야.”

키릴이 일리야 뺨을 만지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너와 헤어지기 싫어.”

놀란 시선을 받은 키릴이 민망한 듯 시선을 방황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이런 몸이라서 네가 없으면 곤란해.”

그가 곁에 없다는 걸 상상하면 가슴이 뻥 뚫린 듯, 고통스러운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키릴은 제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그에게 순정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제 어린 기사를 다시 품에 안았다. 저보다 훨씬 큰 몸은 제게 안기기 위해 한껏 몸을 구겨 웅크리고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도 얌전히 안겨 있는 모습이 애틋하기만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가 지금처럼 나와 계속 같이 있어 준다면 좋겠다.”

“……예.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키릴은 품 안의 일리야를 더욱 힘주어 안으며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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