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72)

16.

선황의 공식적인 장례식을 이틀 앞두고 황실에서 키릴을 불렀다.

예식 전날 밤 직계 가족의 기도식에 키릴이 참관했으면 한다고 했다. 거절하고 싶어도 황태자의 대부라는 이유로 응해야 했다. 먼저 와서 궁에서 지내라 했지만 좋은 기억이 없던 곳이라 그것만은 거절했다.

기도식이 있는 날, 키릴은 저녁을 먹은 뒤 일리야와 함께 전이문을 넘어 황궁에 도착했다.

짐을 풀자마자 섭정이 키릴을 불렀고 황실 사람들과 마주했다. 그중엔 어린 황태자도 있었다. 이제 7살이 된 아이는 또래보다 체구가 크고 어른스러웠다. 무엇보다 죽은 아비를 그대로 빼닮은 모습에 키릴은 내심 깜짝 놀랐다. 자랄수록 더 닮아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아이는 건강하고, 섭정께서 옆에 끼고 가르치신다고 하니…….’

죽은 황제와는 다를 거다. 키릴은 황태자에게서 겨우 눈을 떼고 마저 인사를 나눈 후 그대로 기도식까지 함께 했다.

일리야는 먼저 보냈다. 호위를 비롯한 기사들은 기도식 동안 모두 문밖에서 대기했다. 키릴은 일리야를 선황의 관이 있는 이곳에 세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호위를 물릴 수 없다며 거절하는 일리야를 애원하다시피 하여 돌려보냈다. 섭정과 태자가 함께하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자신을 보며 키릴이 선황에게 죄책감을 느낄까 우려를 했는지 일리야는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창밖이 까맣게 물들고 인공조명이 성을 한낮처럼 밝힐 때 기도식이 시작되었다. 경견한 오르골 소리와 기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릴은 마법 처리가 된 관 앞에서 같이 기도를 드렸다. 어쩌면 선황은 키릴이 이 자리에 있는 걸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태자를 제외하고 이곳에서 선황이 좋아했던 이가 몇이나 될까. 그는 부인인 섭정마저 달갑지 않아 했다.

‘당신을 원망했던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잊고 살도록 노력할 겁니다. 당신도 그곳에선 건강하시길. 놓았던 검도 다시 잡고, 먼저 간 아이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끝나고 키릴은 잠시 선황의 관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선황이 죽어 슬프긴커녕 해방감까지 맛보았는데 이리 관에 있는 모습을 보니 씁쓸했다. 키릴을 이렇게 만들고 정작 죽고 싶어 했던 그보다 먼저 죽었다.

선황의 관 앞에서 오래전 일을 떠올린 탓인지 몸이 근질거렸다. 죽은 선황이 옛날처럼 끈적한 손으로 그의 몸을 샅샅이 만져 대는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 몸이 축축해지는 듯했다.

늘 생각하지만 사제답지 않은 몸이었다. 몇 년간 선황의 손을 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니, 선황이 과하긴 했어도 차라리 동대륙의 것을 썼더라면 이보단 나았을 것을.’

키릴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만졌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거늘 더 생각해 봤자 뭐할까. 이젠 돌이킬 수도 없고, 이미 늦었지.’

키릴은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발길을 뗐다. 일리야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걸음을 서둘렀다. 막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을 때였다. 그보다 먼저 덜컥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 있던 시종이 놀라 펄쩍 뛰자 들고 있던 은쟁반에서 물이 튀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뒤따라 들어오던 남자가 키릴을 보며 물었다. 물을 쏟은 것도 아닌데 키릴의 윗옷이 제법 젖었다. 가운 대신 양쪽 가슴을 가려주던 띠를 제외하고 흰 제의에 길쭉한 얼룩이 생겼다. 키릴이 당황하자 뒤에 온 남자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키릴의 몸에 둘러 주었다.

“제 옷을 빌려드리지요.”

키릴은 그제야 남자를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요정족처럼 귀가 뾰족했고, 머리카락은 까마귀처럼 새까맸다. 고전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한 미남이었는데 겉옷을 장식한 화려한 장식으로 보아 궁정 마법사인 듯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키릴은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한 뒤 바로 방을 나섰다.

‘간지러워…….’

겉옷을 들치자 젖은 옷이 보였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더 젖은 것 같았다. 습기 때문인지 물에 닿은 부위가 근질거렸다. 키릴의 걸음이 빨라졌다.

숙소로 돌아가자 방엔 일리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던 일리야가 키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가운 미소가 어려 있던 얼굴이 키릴의 겉옷을 본 순간 의문으로 물들었다.

“문을 나서다 일하시던 분과 부딪힐 뻔해서 물이 조금 튀었어.”

겉옷을 벗어 정화한 뒤 잘 개어 탁자 위에 두었다.

“그건 키릴 님의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응. 빌려주신 거라 내일 돌려드리기로 했어.”

“그렇군요. 그럼 제가 대신 갖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려던 키릴은 일리야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옷을 누가 돌려줄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젖은 곳이 가려워서 긁고 싶었다. 키릴은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가슴을 긁었다. 물이 별로 튄 것 같지도 않은데 유독 가슴 부위가 습했다. 손톱을 세워 긁어도 여전히 근질거렸다. 키릴은 젖은 옷 때문이라 생각하고 상의부터 벗었다. 겉옷이 아까보다 더 젖은 것이 이상했지만 셔츠를 보자 그 생각을 잊었다.

“왜 이렇게……. 물이 튄 거라 겉이 더 젖어야 하는 거 아닌가?”

윗부분이 축축하게 젖은 셔츠를 보며 키릴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이걸 몰랐다는 게 이상했다. 특히 다른 곳에 비해 가슴 부분이 심하게 젖었다. 천이 살에 달라붙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을 내려다보던 키릴이 돌연 흠칫했다. 파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설마…….”

끔찍한 기시감이 들었다. 셔츠를 벗고 젖을 맨살을 내려다보다 떨리는 손을 들었다. 평평한 가슴을 쓸어 모으자마자 투명한 물줄기가 찍 쏟아졌다.

두 번째 임신이었다.

키릴은 아득함에 휘청이면서도 날짜를 세었다. 오늘이 칠 일째라면, 선황이 죽은 날 수정했다는 말이었다.

그날 키릴의 안에 사정한 이는 두 사람이었다. 선황과 일리야.

아침엔 선황이 자궁 안에 두어 번 토정하고 낮부터는 일리야가 선황의 씨가 꿀렁거리는 안에 거듭 정액을 퍼부었다. 둘 중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의 씨인지조차 모르다니, 얼마나 방탕한가. 키릴은 자조하며 웃었다. 하지만 임신한 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낳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이겼다.

그는 신관으로서 실격이었다.

황제와의 관계는 신의 내린 계시를 따르기 위한 고난의 일부였으나, 일리야는 아니었다. 신탁과는 무관한 키릴의 선택이었다.

성기사와 신관이 붙어먹다 임신까지 한다니. 대단한 추문이었다. 키릴은 이 아이가 차라리 선황의 아이이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내심 일리야의 아이가 아닌지 의심하며 숨기듯이 배를 감쌌다. 키릴은 죄책감과 함께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씻고 나온 키릴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일리야는 걱정스러운 듯했다. 내일이 장례였고, 오늘 기도식을 마치고 왔기에 그는 선황 때문이라 짐작하고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키릴을 품에 꼭 안고 재웠다.

하지만 잠든 척 눈을 감은 키릴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고, 그렇기에 일리야 또한 쉬이 잠들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새벽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수마를 맞이했다.

*

다음날, 엄숙한 분위기에서 식이 진행되었다. 키릴은 안장되는 관을 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차라리 당신이 바라던 대로 된 것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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