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낮의 태양이 커튼을 뚫고 안을 들추었다. 빛이 흐트러진 침대를 비추며 키릴의 멍한 얼굴을 훑었다. 키릴은 침대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반쯤 얼이 나가 있었다. 어쩌면 아침에 먹은 약 기운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 더 사고가 더딘지도 몰랐다. 흐릿한 정신 탓인지 오전부터 정오 내내 아침에 일어난 일을 되씹었다.
일리야에게 끌려가던 선황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그 뒤를 잇는 건 흰 제복에 묻어 있던 붉은 얼룩과 비릿한 피 냄새.
일리야는 키릴에게 선황이 죽어 슬프냐고 물었다.
키릴은 생각했다.
‘정말 죽은 걸까?’
죽어가던 선황의 모습을 다시 되돌려 본다. 그것이 현실임을, 정말로 그가 죽었다는 걸 자신에게 인식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당혹스럽고 놀라울 뿐. 되레 걱정되는 건 일리야였다. 선황의 죽음이나 죽을 것이란 언질을 받은 태의는 뒷전이었다.
선황을 딱히 좋아하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오늘 아침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두 사람과의 육체적 관계는 익숙해진 뒤라 거부감은 없었다. 식욕과 수면욕 같은 욕구 충족적인 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만 제 비밀을 틀어쥐고 뜻대로 휘두르려는 태도가 늘 두려움을 주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또다시 임신을 강요하던 것도 그랬다. 이렇게 끌려가다 벼랑 끝까지 몰릴 것 같았다. 딛고 있는 바닥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항상 가슴 한쪽에 자리했다.
그래서일까. 몸 정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 아쉽지도 않았다.
조금 속이 후련해지는 것도 같았다.
‘내가 미쳤나 보다.’
사람이 죽었는데. 자신 때문에 일리야가 살인까지 했는데.
스스로가 실망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변명을 되풀이했다.
키릴은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감췄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리고 이른 아침에 떠났던 일리야가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모습으로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제가 떠나기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키릴의 모습에 놀란 듯했다. 굽 소리가 빨라졌다.
“키릴 님, 설마 계속 그렇게 계셨던 겁니까?”
“넌, 괜찮은 거니?”
불안하게 흔들리는 파란 눈을 보며 일리야가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 황실에서 그자의 시신을 수습해 갔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밝혀졌습니다.”
정말로 일리야가 말한 대로 되었다.
“……태의는?”
“자살이 아닐까 했는데 제 주인의 죽음이 충격이었는지 지금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키릴은 일리야의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째선지 한기가 느껴져 어깨를 움츠리자 일리야가 바로 일어나서 키릴을 눕혔다. 키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시 일어나려 하자 가슴을 지그시 눌러 다시 눕힌 뒤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불 밖으로 힘없이 삐져나온 하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일리야가 조심스레 그 손을 양손으로 잡아 올렸다.
“키릴 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곧 있을 선황의 장례식을 제외하면 이제 그들과 엮일 일은 없을 테니.”
차마 키릴의 손에 닿지 못하고 그 손을 붙든 제 손에 이마를 가져다 대며 기도하듯 속삭였다.
“그러니 안심하고 편히 쉬시길.”
애처로운 속삭임에 키릴은 몸에서 힘이 빠졌다. 마음이 불안하고 복잡하여 몇 시간을 눕지도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문득 손에 닿은 체온이 달다고 느끼며 키릴은 눈을 감았다.
키릴의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확인한 일리야가 안도하며 침대 옆에 몸을 기댔다.
일리야는 청각을 곤두세웠다. 키릴의 숨소리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작 타인의 호흡에 불과한 저 숨결이 왜 이리도 탐이 나고,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지.
방안에서 키릴의 냄새가 났다. 키릴의 흔적이 가득한 방안에서 무방비하게 늘어진 키릴의 숨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좀 전까지 가슴 가득 채웠던 분노가 모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마주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특별한 날에만 가능했는데, 지금은 그 사람의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 그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제 곁에서 그가 안심하고 편히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다.
믿기 힘든 순간이라 그런 것일까. 이 시간이 꿈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