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리야(2)
8.
태의가 낮부터 보이지 않았다. 키릴은 피임약을 받지 못한 채로 그날 밤 선황이 내미는 약을 받아 마셨다.
관계하는 내내 불안함에 마음을 졸였다. 키릴은 빨리 끝나기를 원했지만 선황은 병색이 짙던 전과 달리 부쩍 회복된 자신의 체력을 과시하고자 했다.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될 만큼, 정사는 평소보다 길게 이어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선황은 다음 날 아침부터 키릴에게 약을 먹이더니 약 기운이 돌기도 전에 안을 파고들었다.
두 번을 연달아 사정한 선황이 지친 듯 키릴의 위에서 늘어졌다.
벌거벗은 하얀 몸은 선황과 태의가 몇 번이고 반복해 남긴 흔적으로 엉망이었다.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이 죄다 울긋불긋했다.
피임약을 먹는 중이라 치유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남긴 것을 선황은 저를 위해 지우지 않았다고 여기곤 더욱 흥분했다. 체력만 더 있었다면 오전 내내 여린 속살을 찍어 대며 빈틈없이 제 잇자국을 남기고 정액을 발라 주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약에 취한 키릴은 제가 어떤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지도 모르고, 힘이 빠진 성기를 끙끙거리며 계속 조였다. 그걸 느낀 선황이 비식거리며 협탁으로 팔을 뻗었다.
“구멍이 벌름거리지 못하게 막는 걸 잊었구나. 흘리면 안 되니 막아야겠지.”
성기를 뽑아내자 맑은 액이 주룩 흘러나왔다. 자궁이 이미 닫힌 뒤라 정액은 배 속에서 꿀렁거릴 뿐, 밖으로 새지 않았다. 그런데도 선황은 정액을 흘리면 안 된다는 허튼 핑계로 키릴의 안에 무언가를 또 쑤셔 넣으려 들었다.
협탁 서랍을 열어 길이가 짧은 마개를 찾은 선황이 그것을 막 쥐어들 때였다.
“윽!”
뒤에서 뻗어온 손이 우악스럽게 선황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뒤로 끌어당겼다.
“누, 누구냐, 누가 감히…… 컥!”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목덜미를 움켜쥔 손에 목이 졸렸다.
“컥, 억!”
침대에 있던 몸이 강제적으로 끌려갔다. 선황은 고통과 당황스러운 이전에 분노를 느꼈다. 누가 감히 황족을 이리 함부로 대한단 말인가.
설마 신전에서 이런 봉변을 당할 줄 몰랐던 선황은 문밖에 기사를 대기시키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이 순간 그를 도울 수 있는 건 잠들어 있는 신관 하나뿐이었다.
몸부림을 치던 선황이 잠들어 있는 키릴에게 손을 뻗자 목이 더욱 조여들었다.
불쑥 죽음의 문턱을 밟던 순간이 떠올랐다. 선황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사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라도 질러 보려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쥐어짜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날카로운 검날이 입을 찢고 목구멍을 꿰뚫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끔찍한 고통이 덮쳐왔다.
“커허……!”
그때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키릴이 움찔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 졸음이 가득 들어찬 눈을 굴리다 그대로 굳었다.
“어……?”
일리야가 선황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입안에 단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어으……! 흐어, 끅!”
눈을 까뒤집고 피거품을 문 선황이 사지를 부들거렸다. 일리야가 그 모습을 서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잠시 뒤 죽어가던 몸이 기력을 다한 듯 축 늘어졌다. 일리야는 선황의 머리채를 쥐고 계속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갔다.
키릴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약에 취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꿈인가.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광경이었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멍하니 굳어 있던 키릴은 일리야가 침실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시트를 몸에 두르고 서둘러 침실을 나섰다. 거실로 나와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건 목이 잘려 죽은 선황의 시신과 선황의 머리맡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일리야였다. 하얀 제복과 장갑에 묻은 핏자국이 지독하게 선명했다.
키릴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거…… 지금, 이게 무슨…….”
파랗게 질린 키릴이 시트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그곳으로 뛰어갔다.
“더러우니 오지 마세요.”
키릴을 발견한 일리야가 손을 내밀어 그를 멈춰 세웠다. 바닥에 떨어진 시트를 주워 우두커니 선 키릴의 맨어깨에 둘러 주며 그를 조심스레 뒤로 밀었다.
“방에서 쉬고 계세요.”
이런 상황에서 쉬라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숨죽인 채 시신과 일리야를 번갈아 보던 키릴이 휘청였다. 일리야가 급히 팔이 뻗어 키릴을 부여잡았다.
흰 장갑에 묻어 있던 피가 키릴의 어깨까지 번지자 일리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바로 정화를 해야 했는데.”
“왜 그랬어.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키릴이 창백한 손을 들어 일리야의 팔을 움켜쥐었다.
“왜 쓸데없이 피를 묻혀. 이런 짓을 한 게 알려지면 네가…….”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네 찬란한 앞길에 지저분한 얼룩이 묻는 게 아니냐고. 선황의 죽음보다 그게 더 두렵다는 걸 키릴은 말을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멈칫하는 키릴의 손을 잡아떼어낸 일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 문제 없이 처리할 테니……. 대신 이것만 도와주시겠습니까?”
일리야가 선황의 잘린 목을 다시 몸에 붙이고 키릴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을 부탁하는 건지 눈치챈 키릴이 조용히 신력을 움직였다. 키릴이 퍼뜨린 신력이 동강 난 시신을 이어 붙여 거짓말처럼 원상태로 되돌렸다. 하지만 시체가 되살아나진 않았다.
“선황께선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겁니다.”
“…….”
“선황을 지키지 못한 태의는 죄책감에 자살한 것이고요.”
자리에서 일어선 일리야가 장갑을 벗고 허리를 숙였다. 굳어 있는 키릴의 볼을 조심스레 쓸어내린 일리야가 물었다.
“저자가 죽어 슬프십니까?”
“……모르겠어.”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슬퍼할 새도 없었다. 키릴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아직 현실이 와닿지 않는 건지 슬프긴커녕 선황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반응이 예상보다 격렬해서, 제가 실수한 게 아닌가 했습니다.”
“실수가 아닌 건, 아니잖아. 왜, 왜 죽였어? 성기사가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건…….”
“키릴 님, 그들은 당연한 대가를 치른 것뿐입니다. 저는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우롱하고, 어리석은 욕망을 위해 당신께 목줄을 채워 이용하려 한 죄.
“치워야 할 폐기물을 치운 것뿐입니다. 주신께서도 눈감아 주실 겁니다.”
그 신이라면, 오히려 반기겠지. 일리야는 냉소 어린 생각을 하며 장갑을 다시 손에 끼웠다.
“키릴 님께서 선황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주셨다면 하지 않았을 테지만, 아니란 걸 아니까요.”
“그게 무슨……. 모르겠어.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 나중에. 그보다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혼란스러워하는 키릴을 내려다보며 일리야는 쓴웃음을 삼켰다.
일리야는 선황이 환락가의 포주처럼 키릴을 대신들에게 보내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다시 임신시키려 했다는 것도.
키릴이 알게 되면 괜한 자책을 할 것이 분명했다. 스스로 마음에 상처를 내고 무도한 자들의 어리석음마저 제 탓이라 끌어안고 웅크리겠지.
그럴 필요 없는 것을. 어차피 이젠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일리야는 키릴을 반강제로 침실로 밀어 넣은 뒤 정화 구슬로 살인의 흔적을 지웠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에 시신을 챙겨 선황의 침실이 있는 옆방으로 향했다.
선황의 침실에 시신을 팽개친 일리야가 남은 하나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툭, 툭. 장갑 낀 손이 의미심장하게 검집을 두드렸다.
*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전에서 몰래 벌이는 비밀스러운 놀이는 배덕한 만큼 참으로 달콤했다. 단정하고 기품 있는 신관이 제 밑에서 엉망으로 흐트러지는 꼴을 볼 때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얌전한 얼굴 뒤에 숨은 음탕함을 엿볼 때면 아랫도리가 쑤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태의는 선황의 복귀와 키릴과의 관계에서 고민했다.
선황은 신관을 다시 임신시켜 복귀를 위해 이용할 생각이었고 태의 역시 거기에 동참했다. 하지만 키릴이 임신을 원치 않았다. 태의는 홀린 듯이 피임약을 대가로 키릴의 몸을 탐했다.
키릴이 황태자를 배 속에 품고 있던 당시 제게 매몰차게 굴면서도 제 손가락에 한껏 자지러지던 때도 좋았지만, 선황 몰래 그와 흘레붙는 지금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태의는 진심으로 키릴을 임신시키고 싶어졌다.
선황은 제 아이를 낳게 할 셈이지만, 어차피 황위가 정해진 마당에 꼭 선황의 아이일 필요는 없었다. 선황과 키릴이 둘 사이의 아이라 믿기만 하면 앞으로 진행할 일에 차질은 없을 터였다.
키릴을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황의 복귀는 태의 역시 원하는 바였다. 뒷방 권력자의 측근과 제국을 손아귀에 쥔 자의 측근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었다. 축소된 권한은 마치 손발이 잘린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키릴이 태의와 관계를 이어 가는 이유는 피임약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임신을 미뤘다. 다른 놈이 그 몸을 취하기 전에 키릴이 제게 익숙해지기를 원했다. 굳이 약이 아니라도 선황에게 한 것처럼 기꺼이 제게 다리를 벌려 준다면. 그때 제 씨를 품게 할 생각이었다.
키릴의 안에 자리 잡은 그 괴이한 인공 자궁은 제가 품은 씨의 주인에게 유독 강하게 반응했다. 태의의 아이를 밴다면 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선황의 곁에서 누구보다 키릴을 가까이 접하며 그 몸을 아낌없이 먹어 치울 욕심에 태의는 들떴다.
선황은 그런 태의의 생각 따윈 꿈에도 모르고 그를 굳게 신용했다.
선황과 키릴, 태의만이 공유하는 비밀은 나아가 선황과 태의, 키릴과 태의, 그리고 태의만이 아는 비밀을 낳았다. 세 사람 외엔 그 누구도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태의는 어젯밤 잠들 때까지만 해도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는 어딘지 모를 창고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지금, 성기사 하나가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제 입이 멋대로 떠들고 있었다.
*
일리야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태의를 가둬 둔 곳으로 향했다.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침 재워 두었던 놈이 깨어나 있었다.
일리야는 품에서 일회용 마도구인 ‘진실의 목소리’를 꺼냈다. 귀한 물건이지만 아깝지 않았다. 죽지 않을 만큼 고통을 줘 입을 열게 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 있을 키릴이 마음에 걸려서 빨리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일리야는 바로 마도구를 사용했다.
‘설마 이렇게 될 걸 알고 준 건 아니겠지.’
성기사로 서임 받던 날 만났던 교황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생각은 잠시였다. 태의의 입이 강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 마법으로 풀려나온 진실을 귀담아들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일리야의 손이 자꾸 검집으로 향했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주신의 계시가 시작이었나.’
주신의 계시, 인공 자궁, 임신. 황태자가 키릴의 아이란 말에 어느 정도 예상하던 일인데도 적지 않게 놀랐다.
인간의 잣대로 신의 뜻을 알 순 없겠지만, 일리야는 시기가 참으로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선황이 제위에 있던 시절 국교를 바꾸려다 말았는데 계시는 그 후 몇 년 뒤에 내려왔다.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리야는 계시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면 그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계시대로 키릴은 황제의 아이를 가졌고 무사히 출산을 마쳤다.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자궁이 심어진 몸이고, 한껏 개발된 몸인지라 키릴이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란 말엔 선황이 한 짓거리가 생각나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것이 키릴이 원해서 한 결정이었다면 일리야는 옮고 그름을 떠나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제는 잠자리가 아니었다. 키릴은 사제였다. 아무리 정사가 격렬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몸이 축날 리가 없었다. 임신을 위한 약과 피임약을 같이 먹고 신성력으로 치유조차 못 하니 그렇게 힘들어했던 거다.
황위를 돌려받겠답시고 대신들을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키릴을 이용하려 했다는 말에는 다시 한번 살의가 들끓었다.
선황은 과거를 빌미로 키릴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수하인 태의는 선황의 짓거리를 빌미로 키릴을 움켜쥐려 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뒤 마도구의 효력이 끝나자 태의는 발악하듯 외쳤다.
“폐하께서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 폐하는 그쪽보다 먼저 떠났지만.”
일리야가 검지를 들어 위를 가리키자 태의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황족을, 아무리 네 놈이 성기사라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쪽도 곧 따라갈 거니 그리 놀랄 건 없어. ……자살로 처리하겠다는 건 취소해야겠군.”
일리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골이 으스스했다. 불길함을 느낀 태의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굽 소리가 울릴 때마다 태의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신관에게 손을 댄 게 문제라면 차라리 교단에 알려! 아니, 그 사제가 허락한 일인데 왜 네 놈이 이러는 거냐, 왜!”
악을 쓰듯 외쳤지만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일리야는 바닥을 기는 태의를 쓰레기 보듯 쳐다보더니 대뜸 그를 걷어찼다.
“컥!”
다시 굽 소리가 울렸다. 널브러진 몸을 스산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일리야가 태의의 한 손을 짓밟았다.
“이 손으로 만졌나?”
“악!”
“아니면 이쪽?”
으드득!
“아아악! 악! 크하악! 미, 미친 새끼가……! 아악!”
일리야는 태의의 손 관절을 죄다 으깨놓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태의가 조금 전 몸부림치던 선황과 한치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정신이 나가버릴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말이 되지 못한 욕설을 토하며 태의가 울부짖었다.
일리야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자는 어쩔 수 없이 빨리 처리해야 했지만. 너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이곳엔 키릴이 없었다. 그의 시선 밖에 있는 이상, 선황처럼 단번에 처리해야 할 이유 따윈 없었다.
‘감히? 기껏 권력을 탈환한답시고 환락가의 포주 같은 짓거리나 하려는 놈들 주제에 감히라니.’
벗은 몸을 드러내며 서글프게 웃던 키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하나 남은 그의 빛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 그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던 사람이었다. 순진한 그의 사제는 작은 일에도 한껏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 자신 역시 하나쯤은 그를 닮아 가는 것 같아 뿌듯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이왕이면 가까이서 그를 지켜 주는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 이상은 욕심낸 적이 없었다. 어떻게 감히 그럴까. 그저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족했다. 그래서 상급 성기사가 되려 했다. 훈련은 고되었지만, 언젠가 목표를 이룰 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힘든지도 몰랐다.
그런데. 거기에 이런 벌레 같은 것들이 들러붙어 있을 줄이야.
일리야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막 성인 된 나이에 맞지 않게 그에게 비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던 태의가 달라진 공기를 느끼고 흠칫 몸을 굳혔다. 눈치가 빠른 놈이라고 생각하며 일리야가 검을 내리꽂았다. 은색의 날이 태의의 허벅지를 단번에 꿰뚫었다.
푹-
“아악!”
푹-
뽑혀 나간 검날이 남자의 다리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울부짖던 태의가 피를 토하며 차라리 죽이라고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 곧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일리야가 품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냈다. 금빛으로 빛나는 고급 스크롤은 마수 토벌에 참여한 대가로 받은 보상 중 하나였다.
“이걸 여기서 쓸 생각은 없었고, 너는 원래 목을 매달아 줄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자살로 처리하면 양쪽 다 편했을 텐데.
“네가 해 준 이야기에 보답해야 할 것 같아서.”
원래는 그놈에게 해야 했을 보답이지만 이미 죽여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일리야는 죽은 선황을 떠올리며 스크롤을 찢었다.
곧 번쩍이는 빛과 함께 흑표범의 모습을 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 치워라. 흔적 하나 남기지 말고.”
일리야의 명이 떨어지자 그림자가 넝마가 되어 피 냄새를 뿌리는 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드득거리며 뼈와 살점을 씹어먹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소환수의 식사가 끝난 뒤, 일리야는 창고 안을 깨끗이 치운 후 기척을 지우고 그대로 창고를 떠났다.
잠시 뒤, 일리야의 신고로 숙소에서 선황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확인을 위해 황실에서 바로 전이문을 통해 궁정 마법사가 왔지만 그는 선황의 시신을 짧게 훑어본 후 더는 살피지 않았다. 오히려 선황의 전담 신관이었던 키릴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일리야의 거절로 키릴을 보는 것을 포기한 그는 선황의 시신을 챙겨 돌아갔다. 등장부터 퇴장까지 한 시간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일리야가 의도했던 대로 선황은 심장마비로 처리되었다. 태의에 관해선 묻지도 않았다. 따로 조사반이 만들어지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이상하게 처리가 빨랐고 설렁설렁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황실이 이번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챘다. 마법사나 따라온 관리들은 오히려 이 상황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관리가 삼 일 뒤에 장례가 치러질 예정이니, 참석하겠냐고 물었을 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릴 뻔했다.
아무도 타살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황족을 향한 테러를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그들은 고집스레 더는 조사할 필요가 없고 바로 장례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하며 돌아갔다.
선황이 공공연하게 섭정을 치우고 다시 황위를 되찾겠다고 말하고 다닌 탓에 내심 불안해하는 이들이 있다더니. 아마도 제국 수뇌부는 선황의 존재를 빨리 지워버리고 싶은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동안은 지켜봐야겠지.’
만약을 위해서였다.
아마도 그 만약이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