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72)

3.

찬 바람이 불자 선황은 남궁으로 내려가기 위해 준비했다.

선황이 떠나기 전 키릴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태의가 달에 두 번 네 음액을 받으러 올라올 거다. 짐의 건강을 위한 것이니 잘 협조해 줘야 한다.”

“……네.”

사경을 헤맨 후 선황의 기이한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선황이 내려간 뒤 태의는 열흘에 한 번꼴로 신전에 들러 키릴의 애액과 정액을 받았다.

태의는 선황이 예전에 썼던 미약 크림을 키릴의 몸에 바르고 손가락과 장난감으로 안을 희롱했다. 키릴이 아무리 울고 밀쳐도 물처럼 애액이 흐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보존 마법이 걸린 병을 애액으로 다 채우면 그다음은 정액이었다. 묶어 둔 천을 풀고 유리병에 정액을 받으며 태의는 계속 손으로 키릴의 안을 들쑤시고 혀로 빨았다.

모든 병을 다 채우면 그때부터 태의는 미약에 절어 헐떡이는 키릴을 가지고 놀았다. 제 성기보다 큰 장난감으로 안을 쑤시며 약에 절어 달뜬 몸을 한 군데도 빠짐없이 핥고 유두가 헐 때까지 괴롭히며 키릴을 울렸다. 지나치게 감도가 좋은 몸은 이제 바르는 약만으로 자궁이 열릴 수 있기에 삽입하고픈 욕망을 참느라 더 난폭하게 굴었다.

키릴에겐 손가락을 밀어 넣든, 장난감을 넣든, 제 성기를 쑤셔 넣든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을 멋대로 휘젓고 희롱하는 건 똑같았다.

임신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약에 취하면 그런 생각은 희미해졌다.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 태의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조르기도 했다. 그것이 안을 가득 채울 때 얼마나 자극적인지 알기에 발정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태의는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키릴을 달랬다.

“미안합니다, 신관님. 저도 기꺼이 신관님 안에 제 것을 파묻고 싶지만 이대로는 임신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힘들겠지만 제 손만으로 참으세요.”

키릴은 그의 손과 장난감에 몇 번이고 절정을 맞이했다. 반쯤 기절한 상태로 잠들고 일어나면 태의는 돌아간 뒤였다.

변태 같은 행위였지만 몇 번 반복하자 그것마저 익숙해졌다. 몇 번이고 꿰뚫리며 싸지른 덕에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듯했다.

한 달에 두세 번 오던 태의는 이제 닷새 만에 한 번꼴로 방문했다. 태의는 점점 노골적으로 제 욕망을 드러냈다.

처음엔 허벅지에 성기를 끼우고 뒤에서 삽입하듯 제 하반신을 쳐 대던 태의는 성기를 뒷구멍 안에 반쯤 넣고 흔들며 키릴을 애타게 했다. 서로의 성기를 비비며 허리를 천박하게 흔들고, 입안에 성기를 처박거나 온몸에 제 성기를 문대고 정액을 뿌리기도 했다.

태의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뻐금거리며 유혹하는 구멍을 볼 때마다 삽입 욕구가 들끓어 괴로웠다. 약에 취해 정신이 흐릿한 키릴이 그를 붙들고 달뜬 몸을 비벼 대면 미칠 것 같았다.

“폐하께는 비밀이에요.”

참다못한 태의는 정액을 쏟지 못하게 귀두에 얇은 고무를 씌우고 키릴의 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폐하께 들키는 날엔 신관님을 남궁에 가두고 사내 좆만 받게 할지도 모르지요.”

“아……! 으응… 하으… 안이, 아, 빨리……!”

묵직한 귀두가 벌름거리는 구멍을 벌리고 꾸역꾸역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살아 있는 살덩이의 감각에 키릴이 몸서리쳤다. 이성이 사라진 키릴은 육체의 쾌락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기꺼이 다리를 벌려 태의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축축하고 끈적한 점막이 살기둥을 휘감고 철썩 들러붙었다.

“하아, 신관님 뒷보지가 자지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후우, 배가 고팠던 거예요, 아니면 제 자지가 맛있어서 그런 걸까요?”

“아, 앗! 아…… 아으, 응, 흐으…… 응!”

“후욱, 맛있어서 그랬다고 말해 봐요.”

우둘투둘 핏줄이 돋은 성기가 펄떡거리며 사정없이 안을 짓뭉개듯 쑤셔 댔다.

“아아! 흐윽……!”

태의는 키릴을 깔아뭉개고 과격할 정도로 강하게 허리를 박아 올렸다. 키릴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제 안을 꿰뚫고 엉망으로 휘저어 대는 남자에게 매달려 허덕였다.

“하, 하아, 으응, 아, 아, 아아……!”

“좋아요? 아, 좋은 거군요. 속살을 이리 떨면서 빨아 대는데. 얼마나 좋으면, 헉, 자지를 물고 놓지 않으려 밖에까지 따라 나왔겠어요?”

귀두만 남기고 성기를 뽑아내자 살갗에 달라붙은 빨간 점막이 딸려 나왔다. 욕심껏 기둥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속살을 보며 다시 성기를 처박자 접합부 주위로 흰 거품이 일었다. 그게 참으로 보기 좋으면서도 야해서 태의의 허릿짓이 점점 더 격렬해졌다.

“아! 아! 윽, 흐아, 학! 앙! 조, 좋아, 아으응!”

“저도 좋아요, 신관님. ……시발, 안에 처박고 싸고 싶은데……!”

키릴이 사정하는 순간 태의 역시 정액을 분출했다. 하지만 귀두가 막혀 정액은 한 방울도 키릴의 내벽에 닿지 못했다.

사정의 쾌감에 취해 키릴의 맨살에 한참 제 몸을 비벼댄 태의가 아쉽게 성기를 뽑아냈다. 키릴의 가슴 위에서 귀두를 막은 고무마개를 떼자 정액 덩어리가 떨어졌다.

울혈이 가득한 가슴에 뿌려진 희뿌연 점액이 마치 크림처럼 보며 먹음직스러웠다. 식욕과 함께 성욕이 들끓었다. 정액을 싸지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성기가 곧추서 꺼떡거렸다.

키릴의 아래를 보자 마치 그를 유혹하듯 크게 열린 구멍이 움찔거리며 개폐를 반복했다.

“구멍에서 제 좆물이 넘쳐흐르도록 싸 주고 싶은데. 하아, 신관님도 정액 싸 주는 거 좋아하는 거 제가 뻔히 아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멍한 눈동자를 마주 보며 태의가 안타까워했다.

생각 없이 싸지르다간 제 아이를 임신시킬지도 모른다. 선황은 태의가 키릴을 농락하는 걸 즐겼지만, 삽입만은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선황 몰래 키릴의 안에 제 좆을 쑤셔 대고 있지만 임신하기라도 하면 들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을 시키면서 삽입을 하지 말라니. 신관님에게도, 저에게도 그건 고문이지 않습니까.”

태의가 키릴의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내벽을 거침없이 헤집어 대며 애액이 핏핏 튀는 것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피임약이라도 구해야 하나.”

태의는 키릴의 가슴에서 정액을 손에 묻혀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회음부에 묻은 정액이 흘러내려 숨 쉬듯 벌름거리는 구멍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태의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태의는 다급하게 다시 키릴의 다리 사이에 제 것을 욱여넣고 안달하듯 안을 집요하게 쳐 댔다. 미약이 발린 몸은 어렵지 않게 자궁을 열고 성기를 품었다. 귀두가 자궁 입구에 걸린 순간, 태의의 입에서 쾌감에 흠뻑 젖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귀두를 잘라 먹으려는 듯한 압박감과 예민한 살갗에 가해지는 강한 진동에 전신의 신경이 오싹하게 곤두섰다. 극한 자극에 뇌에 전류가 튀는 느낌이 굉장했다.

처음 맛본 쾌감에 단번에 태의의 이성이 날아갔다. 그는 본능만 남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다물지 못하고 연신 헐떡이는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골반을 움켜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태의는 키릴의 몸을 터뜨릴 듯 강하게 움켜쥐고 짐승처럼 아랫도리를 들썩였다.

이른 밤부터 시작된 정사는 새벽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이후 태의는 약에 취한 키릴이 자신의 애무에 녹아내릴 때를 기다려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짐승처럼 안을 탐했다. 가끔 자궁이 열릴 때도 있었지만, 귀두가 막혀 자궁 안에 정액을 쏟진 않았다.

그때마다 태의는 다행이라고 말하면서도 매번 묘하게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약에 취한 키릴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약 기운이 가시면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태의가 귀두를 막지 않았다면 자칫 임신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한 관계가 몇 달이나 이어지자 키릴은 이제 태의의 시선이 몸에 닿기만 해도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선황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태의가 선황을 닮은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 선황이 키릴에게 그랬던 것처럼 감도를 더 올리고 싶어 했다.

불안해진 키릴이 더는 약을 쓰지 말라고 말해도 태의는 부득불 온갖 종류의 약을 들고 와 키릴의 몸에 발랐다. 빨리 통을 채워야 한다는 둥, 바르고 하면 매끄러워서 기분이 좋다는 등의 갖은 핑계를 갖다 대었다. 고집스럽고, 집요한 것까지 선황을 닮았다.

태의의 의도가 성공한 건지, 나중엔 태의가 키릴의 몸을 더듬으면 맥이 풀려 그가 제 몸에 무얼 바르든 막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키릴은 제 몸뚱이가 감당되지 않아 무서웠다. 몸이 수시로 후끈거리며 달아오를 때마다 발정기를 맞이하는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앞으로도 이러면……. 여기서 더 엉망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몰래 부도덕한 짓을 하면서도 키릴은 제게 주어진 책무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 주변을 곤란하게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지면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가끔 타인의 시선에서 전에는 몰랐던 성적인 의도를 느끼곤 했다.

신전 밖, 그리고 신전 안에서 건실한 신자들 틈에 숨어 신관의 몸을 눈으로 더듬는 자들이 있었다. 키릴은 그 시선에 담긴 진득한 욕망을 읽었다. 분명 7년 전이었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예전이었다면 시선의 의도를 안 순간 치를 떨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선황도 태의도 없이 혼자 수음으로 몸을 달래야 하는 때는 그 불손하기 그지없는 시선에 살짝 아래를 적시기도 했기 때문이다.

키릴은 애정 없는 관계에 익숙했다. 모르는 남자와도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없고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하지 않았을 뿐. 키릴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참담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 불손한 시선들은 본능적으로 키릴의 음탕함을 눈치챈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더 밖에선 몸가짐에 신경 썼다. 아무도 진짜 자신을 알지 못하도록, 저속해진 몸뚱이를 법복으로 꽁꽁 싸매고 정결한 신관의 탈을 썼다.

그러면서 뒤로는 태의와 변태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태의가 미약을 썼다지만 매번 정신을 놓고 그와 난잡하게 뒹굴 것을 알면서도 약을 거절하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키릴은 제가 얼마나 쾌락에 약한 인간인지 이젠 알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의 괴리감이 적지 않게 피곤했다. 마음이 심란해서일까. 이런 일에 익숙해졌다고 자포자기하면서도 이따금 울화처럼 이대로 모든 것을 다 위에 고하고 죽고 싶단 충동이 들었다.

키릴은 저도 모르는 사이 점점 지쳐 갔다. 그는 유일하게 의지하던 자신의 신에게조차 기대지 못했다. 계시가 있었을 때는 그의 뜻을 위해서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저를 지켜 줄 그 어떤 명분도 없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신의 흠집 같이 느껴져 고해실에 가는 것마저 힘들었다.

후원 파티도 초대를 모두 거절했다. 사람이 많고 은근히 부대낄 일이 많아서였다. 대신 기도회를 통해 기부금을 모으고 후원 기관에 지원하는 데 집중했다. 여러 기관 중 특히 보육원과 무료 교육소에 더 관심을 두었지만 기관을 방문하는 일은 오히려 전보다 줄었다.

식욕도 사라져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더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이대로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불쑥불쑥 드는 충동이 점점 잦아졌다.

하지만 신이 먼저 그를 놓지 않는 한, 키릴은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다. 신전 역시 모든 것을 알게 되더라도 그가 신성을 가진 한 결코 파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어떻게든 일을 조용히 수습하려고 들지 모른다.

키릴은 교황 다음으로 많은 신성을 품은 자였다. 주신이 내린 총애의 증거가 있는 이상 교단은 제 살을 깎아서라도 키릴을 지킬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뒤에선 교단의 수치라며 조롱거리로 입에 오르내릴 것이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휩쓸려 떠내려가는 무력함이 정신을 좀먹어 갔다. 모든 것이 피곤했다.

키릴은 모든 걸 놓아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병색이 완연했던 선황제가 키릴을 다시 만난 뒤 회복해 가는 것과 달리 키릴은 점점 야위어 갔다.

신전 사람들은 병환 중인 선황을 모시는 일이 그만큼 괴로웠냐고 의심하다가도 즉위 시절보다 유하게 변한 선황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최근 선황은 항상 웃는 낯이었고, 키릴의 신실함을 칭찬했다. 심지어는 고마움의 표시라며 키릴의 앞으로 막대한 기부금까지 냈다. 겉으로 보기에 이상한 점이 없었다.

키릴이 황제를 전담한 지 거의 7년이 되어간다. 황태자가 태어나기 전엔 황성으로 들어가 황제를 모시기까지 했다. 인제 와서 선황을 모시는 일이 힘들어 그렇다고 보기 어려웠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아무 일도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자신의 수양이 부족한 탓에 주변에 걱정을 끼친 것 같다며 그 이후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다.

수행 사제가 키릴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린 뒤에 식사는 제때 챙겼지만, 안색은 늘 시체처럼 창백했다.

오늘은 보다 못한 대신관이 권유를 가장한 애원을 하며 식사 후 바람이나 쐬러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한 걸음 뒤엔 수행 사제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키릴을 뒤따랐다.

키릴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햇빛을 쐬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날이 맑아 시야가 멀리까지 환히 닿았다. 멍하니 먼 산을 쳐다보다 고개를 내리자 화단 안에서 햇볕을 만끽하는 꽃이 보였다. 노란 꽃잎을 보는 순간 문득 햇살 같이 웃던 소년이 생각났다.

간혹 우울함이 치밀어 올라 급히 자신을 다독여야 할 때. 차마 부끄러움에 주신을 부를 수도 없는 날이면 몰래 그 얼굴을 떠올렸다.

‘힘들지만 제가 원해서 하는 거라 괜찮습니다.’

‘네! 열심히 해서 꼭 기사가 되고 싶어요!’

키릴은 충동적으로 훈련소로 걸음을 돌렸다. 훈련소에 간다고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

그리고 거짓말처럼. 단지 추억을 되새겨 보려 했을 뿐인데 가는 도중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도 키릴은 한눈에 아이를 알아봤다.

목덜미와 이마를 덮는 환한 금발, 크고 맑은 보라색 눈동자. 우아한 눈매. 언젠가 보았던 아이가 키릴을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릴 님?”

자신보다 훨씬 작던 아이가 못 본 사이 훌쩍 자랐다. 키도, 체구도 모두 이젠 키릴보다 컸다. 키릴도 작지 않은 키였는데 고개를 들어야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기사라 그런가?’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청년은 이제 수련생이 입는 훈련복이 아닌 정식 기사복을 입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이라며 환하게 웃던 어린 얼굴이 떠올라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키릴이 걸음을 서둘러 청년에게 다가섰다.

“정말 많이 컸구나.”

“키릴 님……. 절 기억해 주신 건가요?”

알은 척을 하자 청년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키릴은 그 모습이 마치 꽃 같다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좋아하는 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던 아이는 열심히 제 목표를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키릴은 기사복을 입은 청년이 대견했다. 마치 제 일처럼 뿌듯함마저 느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이젠 어엿한 기사가 되었구나. 축하한다.”

고개를 끄덕인 청년이 쑥스러운지 볼을 붉혔다. 햇볕 아래 훈련하는 사람치곤 피부가 하얘서 발긋하게 물든 눈가와 볼이 유독 도드라졌다.

체구는 자신보다 훨씬 커졌는데 그 모습이 귀엽기만 해서 키릴은 살포시 웃었다.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어린 사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훈련소로 가던 길이니?”

“네.”

“내가 너무 오래 잡아 둔 것 같구나. 가 보렴.”

“아…….”

청년의 하얀 얼굴에 일순 실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키릴은 이미 그 찰나의 변화를 보았다.

“왜, 훈련소에 가기 싫으니?”

“그게 아니라…… 아쉬워서요.”

“응?”

“오랜만에 나오셔서, 이렇게 뵙게 된 것이 기쁩니다. ……아쉬워요.”

키릴이 멈칫했다. 방긋 맺혀 있던 미소가 살짝 시들었다.

“내가 오랜만에 나온 걸 어떻게 알았지?”

혹시 자신의 소문을 들은 것일까. 무겁게 침잠하는 상념에 키릴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희미하게 사라지려 할 때였다.

“그간 저 길을 지나가실 때 멀리서 얼굴을 뵈었는데 근래엔 뵙지 못해서요.”

“아.”

키릴은 청년이 가리키는 곳을 보곤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키릴이 예배당과 침회실에 갈 때 이용하는 길이었다. 계시를 받은 이후 늘 고해실에서 혼자 신께 매달리듯 기도했는데 최근엔 통 찾지 않았다.

‘보고 있었던 건가?’

정작 키릴은 한 번도 아이, 아니, 청년을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많이 바쁘신 것 같아서… 기다렸, 아니,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쁩니다.”

내가 뭐라고 날 기다려.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급히 삼켰다.

“바빴던 게 아니야.”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어린 얼굴을 보며 키릴이 씁쓸함을 삼키고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마음이 좋지 못해서, 오히려 그럴수록 더 자주 찾아야 하는 곳인데 이상하게 발길이 가지 않았던 것뿐이란다.”

“그랬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자책하는 기색에 키릴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저 지나가다 한 번 본 사이에 불과한 사제를 청년이 왜 이리 애틋하게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다.

‘나야, 이 아이 덕분에 기운을 얻어서. 그게 고마워서 이리 만나 기뻤던 거지만. 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키릴의 당황한 표정에서 그 속마음을 읽어 내리기라도 한 듯 청년이 슬쩍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 키릴 님께서 수도 외곽에서 무료 진료를 하실 적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꼭 키릴 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수도 신전에 들어왔어요.”

“아, 그래서…….”

“예, 꼭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향한 경애의 눈빛에 키릴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지금의 자신은 저런 눈빛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눈가에 지친 기색이 어리자 어린 청년이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그때 그렇게 다짐했는데……. 정작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키릴 님의 힘이 되어드리지 못하네요.”

청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키릴 님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

“힘내셨으면, 아니, 힘내실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고 싶은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침울한 표정에 키릴은 저도 모르게 청년의 볼을 쓰다듬었다.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며 키릴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마음만으로 충분히 위안이 되었단다. 고맙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정말이야. 정말로 그렇대도?”

진심이었다.

“네 이름이? 나이는 어떻게 되니?”

“일리야입니다. 내후년에 성년이 되어요.”

“그래, 일리야.”

“네.”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수줍게 웃는 모습이 기꺼웠다.

“고맙구나. 이번에도 조금 더 힘내 볼게.”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는 얼굴에 키릴은 조금 마음이 따뜻해졌다.

저 밝은 얼굴에 조금 전과 같은 먹구름이 끼지 않길 바랐다. 키릴이 죽거나 추문에 휩싸여 추락하면 분명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이 아이가 자책하며 괴로워할 것 같았다. 정작 선황제는 제 욕심을 채워줄 이가 사라져 아쉬워할진 몰라도 죄책감 한 톨 느끼지 못할 텐데.

‘좀 더 버티자. 이미 되돌리기 늦었어도 좀 부끄럽고 수치스러우면 어때. 남한테 크게 피해를 준 건 아니잖아. 좋은 일…… 내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어쩌면 그러라고 신력을 그대로 두신 게 아닐까?’

무기력한 푸른 눈빛에 희미하게 생기가 돋아났다.

훈련소로 들어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키릴은 자신이 퍽 변덕스러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신실하고 정결한 사제가 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신의 계시를 이루려다 이런 몸이 되어, 쾌락 앞에 무너졌다. 계시를 이룬 이후에도 욕정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번민하다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음란하고 타인에게 휘둘리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 그것이 참으로 서러웠다.

그렇기에 그토록 괴로웠는데, 고작 몇 마디 말로 싫었던 일조차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동경했던 꿈은 이루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직 신이 그를 놓지 않았다.

‘이렇게 제멋대로 생각하고 또 살고자 하는데. 이런 저라도 정말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들자 머리 위에서 햇빛이 달려들듯 쏟아져 내렸다. 눈이 부셔 눈가를 좁히는 순간 예배당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거룩하고 따스하게 울려 퍼졌다. 몸 안의 신력이 연주에 화답하듯, 또는 키릴의 의문에 응답하듯 한차례 몸을 훑고 지나갔다. 눈가가 뜨거웠다.

“키릴 님?”

뒤에 있던 사제가 놀란 듯 그를 불렀다. 키릴은 물기 맺힌 눈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햇빛이 너무 눈에 부시어…… 너무 오래 올려다봤더니 눈부셔서 그런 거니, 괜찮아. 걱정 마렴.”

예전엔 죽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신성을 절망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젠 반대였다. 살아도 괜찮다고, 살아도 되는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의 햇빛이 반갑고, 지나쳤던 인연의 마주침이 감사하고, 다정한 말이 너무 따스해서.

키릴은 좀 더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아마 앞으로도 정결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이런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대신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만큼 더 열심히 자신의 의무에 임하자고 다짐했다.

어차피 그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은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키릴은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를 핑계로 죄책감을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지 않냐고, 키릴은 일리야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던 키릴이 천천히 고해실이 있는 건물로 발길을 옮겼다. 한결 밝아진 얼굴에 뒤에 있던 수행 사제가 안심하며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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