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72)

3. 암군(1)

“대신관님.”

사제의 목소리가 상념에 젖어 있던 키릴을 깨웠다.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몇 달 전의 일을 생각하던 키릴이 안색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슬슬 황제를 맞으러 나가야 했다.

호족 수장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안 황제는 아이가 잘 자라는지 확인하겠다며 종종 신전에 들렀다.

오늘도 선물을 가득 싣고 왔겠지.

황제가 자신의 이부동생을 위하는 건 아니다. 이용할 가치가 있기에 그에 맞는 투자를 하는 것뿐.

키릴은 그런 황제를 막을 수 없었다. 황제가 무엇을 하든, 그가 주신이 점지한 존재인 이상은.

죽은 선황제를 꼭 닮은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키릴은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첫 아이였다. 힘들게 배 속에 품었고 그 후 키릴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틀렸다.

신관 임관을 앞둔 어린 사제였던 그에게 그런 계시가 내리지 않았다면. 아니, 하다못해 대상이 그 선황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달아오른 몸을 티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대신관은 오래전 일을 회상했다.

벌써 28년 전의 일이다.

1.

28년 전, 선황제가 황위에 있던 솔 제국은 안과 밖으로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당시 황제는 원인 모를 잔병을 앓고 있었다. 이틀에 한 번은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고, 이따금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큰 병은 아니었으나 뜬금없이 시작된 근육 경련에 황제는 태자 시절부터 늘 품고 다니던 검을 손에서 놓았다. 하나 있던 아이도 병으로 잃었다.

황제의 나이는 어느덧 마흔이 되었으나 아직 후계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더 그를 미치게 했는지도 몰랐다. 이후 황제는 병적일 정도로 건강에 집착했다.

황제는 몸에 좋다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어떻게든 말이다.

그런데도 병에 차도가 없자 황제의 집착은 더욱 깊어졌다. 희한한 민간요법도 서슴지 않았기에 황제의 온갖 기행에 제국은 몸살을 앓았다. 그 탓에 전쟁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

당연히 안과 밖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황제는 눈치 보지 않았지만, 주위의 대신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눈물로 애원하며 차라리 종교에 빠지는 게 낫다 싶어 황제가 신전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그들의 유도는 성공했다. 성수를 물처럼 마셔 댔던 황제지만 정작 신전엔 관심이 없었는데, 기도회에 한 번 참석하더니 태도를 달리했다. 그는 제국 수도에 있는 주신전에 자기 개인 기도실을 만들라 요청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성년이 된 지 막 일 년이 된 키릴은 수도 신전의 신관으로 임관되기 직전이었다. 기도회 때 추기경을 보조하며 황제를 처음 보았다. 원래 대신관을 도와야 할 신관이 따로 있었으나 그가 신열로 몸져누워 키릴이 대신 맡게 된 것이다. 키릴이 가진 신성이 대신관급 이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일까. 황제가 자기 개인 기도를 보좌해 줄 이로 키릴을 지목했다.

키릴은 신성력만 독보적일 뿐, 아직 어린 사제에 불과했다. 신전에서 다른 대신관을 붙여 주겠다 하였으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황제의 고집에 결국, 키릴은 임관도 받기 전 신관으로서 일을 시작했다.

간단한 보조일 뿐이었으나 보조해야 할 이가 제국의 황제였기에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되는 만큼 처음 맡은 일에 설레기도 했다.

기도실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네 이름이 키릴이라 하였느냐.”

호화로운 기도실에서 황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어린 사제는 기이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을 보는 황제의 시선이 지나치게 사사로웠고 진득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줄곧 따라붙는 시선을 느낀 키릴이 동요를 숨기고 제단 앞으로 향했다. 촛불을 밝히고 준비해 온 성수를 성반에 담았다. 성화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 황제를 자줏빛 쿠션이 붙은 기도대로 이끌었다.

옆에서 함께 걷는 키릴을 향해 황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년이 된 지 일 년이 지났다 하였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 좋은 나이로구나.”

키릴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기도대 앞에 선 황제가 불쑥 팔을 뻗어 키릴의 귓불을 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키릴이 황제를 돌아보자 신의 은혜를 가까이 느끼고 싶다며 더 바짝 붙어왔다.

“곱구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소름이 쫙 끼쳤다. 키릴이 파드득거리며 몸을 피하자 황제가 비식거리며 웃었다.

“내 어린 너를 어여삐 여긴 것뿐이거늘. 무엇이 문제더냐. 그리고 기도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단다.”

짐의 기도를 도와야 하지 않느냐며 황제가 할 일을 하라 말하자 키릴은 머뭇거리며 기도대 앞에 섰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무서웠다. 신전 안에서 사제를 추행하진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상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고 온갖 기행을 일삼는 자였다. 내심 저 황제라면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몰라 신경이 곤두섰다.

“짐의 건강과 후계를 위한 기도를 할 거란다.”

다행히 더는 장난칠 생각이 없었는지 황제가 기도대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내심 안심한 키릴이 기도의 시작을 알릴 때였다.

“뭐지?”

번쩍. 성수를 담은 성반이 빛났다. 갑작스러운 빛에 놀란 키릴이 서둘러 제단으로 달려갔다. 황제 역시 난데없는 이변에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제단 앞에 도착한 순간, 빛을 머금은 성수에 파문이 생기고 그 속에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욕에 물든 얼굴로 황제가 남성의 골반을 움켜쥐고 정신없이 허리를 쳐올리고 있었다.

“이제 무슨……!”

낯 뜨거운 광경에 키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 뒤에 더 놀라운 장면이 이어졌다.

성수가 황제에 이어 아래에 누운 남자의 얼굴을 비쳤다. 목덜미를 덮는 짧은 은발이 땀에 푹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흰 얼굴이 익숙했다.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눈을 찡그리고 쾌감에 젖어 헐떡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창백하게 굳은 키릴은 안중에도 없이 성수는 다른 환영을 비추었다.

이번엔 어린아이가 나왔다. 금발에 파란 눈의 아이가 신성한 빛을 두르고 옥좌에 우뚝 서 있었다.

그 환영을 끝으로 빛이 사그라들었다.

“…….”

두 사람 사이에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탓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키릴과 달리 황제는 금세 평온한 낯으로 돌아왔다.

“계시인가.”

기이한 열망이 어린 목소리였다.

황제가 불쑥 키릴을 허리를 감싸고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폐하!”

“사제도 보지 않았나.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이야.”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모르는 척하려는 건가? 그대 신이 내린 예언을 말이야.”

신이 내린 예언이란 말에 황자의 팔을 밀어내던 두 손이 힘을 잃고 아래로 축 처졌다. 황제가 남은 손으로 키릴의 배를 쓰다듬었다.

“여기로 짐의 씨를 품으라는 신의 계시가 아니겠나. 신의 종으로서 그 뜻을 외면할 것이더냐?”

“폐하, 저는, 저는 남자입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걱정 말거라. 내 반드시 계시를 이룰 것이니.”

황제는 아직 후사가 없었다. 성수가 보여 준 환영에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계시는 그의 은밀한 바람을 충동질했다.

“마침 잘되었구나. 대신관이나 상급 성기사는 나이와 상관없이 늘 싱싱한 육신을 유지하지.”

황제의 목소리에 점점 열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신성을 가득 품은 인간과 교접하면 나 역시 그 은총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늘 그게 알고 싶었단다.”

자신의 건강에 집착하는 황제다운 호기심이었다. 교단의 눈치에 이제껏 실행해 볼 생각을 못 했으나 이젠 참지 않아도 되었다.

“이번 기회에 같이 시험해 보자꾸나.”

천금 같은 기회였다. 황제의 두 눈에 광기가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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