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주신전으로 돌아온 키릴은 한동안 심신 안정을 핑계로 숙소에 틀어박혔다.
긴장감이 풀리자마자 그간 쌓인 피로와 억눌린 심적, 육체적 부담이 한 번에 밀려들어 그대로 뻗어버린 것이 이유였다.
물론 밝힐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젖이 나오기 시작했다. 옷으로 가리면 티도 나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몸이 과하게 민감해지고 불쑥불쑥 성욕이 치솟아 대외 활동이 부담스러웠다.
하반신은 물론이고 가슴이 근질거려 시도 때도 없이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몇 번이고 짐승에게 들쑤셔진 부위가 욱신거려 저도 모르게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허벅지를 비비기도 했다. 그때마다 곁에서 대기하던 일리야가 키릴을 달랬다. 익숙한 향기와 손길에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일리야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곁에 있어 준 덕분에 키릴은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평화는 길지 않았다.
황제가 키릴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도 대신관의 안위가 걱정되니 태의를 보내겠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스스로 치유가 가능한 신관에게 의원이라니. 키릴이 거절해도 황제는 그만두지 않았다.
아무래도 황제가 알아챈 것 같았다. 제국 주신전의 고위 신관들만 아는 계시에 관한 것이 황제 귀에 흘러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신전에서 아는 건 반쪽짜리 계시일 뿐이었지만.
‘하지만 황제라면…….’
조각난 정보만으로 야쿠치와 키릴을 묶어 키릴의 임신까지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라면 키릴이 직접 움직인 이유를 의심하고도 남았다. 실제로 태의를 언급하는 것만 봐도 의도가 뻔했다.
황제는 원래도 눈치가 빨랐지만, 이럴 땐 정말 여우 같았다. 키릴은 태의를 거절하는 대신 황제만 따로 불렀다.
그는 둘만 남자마자 키릴의 몸을 훑어보며 달라진 점을 찾았다. 신관복에 가려져 아무런 이상도 찾을 수 없자 당장 가운이라도 벗길 기세였다.
키릴은 그런 황제를 진정시킨 후 볼그람의 수장이 죽었고, 자신이 임신 중인 것을 알렸다. 아이의 부친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황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역시 다 알고 있었던 거다.
키릴의 굳은 얼굴을 본 황제가 어둑하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부끄러워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침묵하는 키릴에게 바짝 다가선 황제가 허리를 숙였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 않습니까.”
죽은 선황을 똑 닮은 황제가 키릴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어머니.”
키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의 말대로, 대신관의 임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애초에 용이 만든 자궁을 대신관에게 주입한 것은 죽은 수인족의 족장이 아니었다.
죽은 선황제가 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