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72)

14.

전령을 보내고 나흘째 되던 날. 야쿠치가 욕실에 간 사이 침실에 몰래 침입한 자가 있었다. 큰 키와 체격의 남자는 무장까지 갖췄음에도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님, 키릴 님.”

익숙한 목소리에 키릴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반짝이는 환한 금빛이 들어찼다. 눈을 슴벅여 시야를 틔우자 가지런한 금발의 미남이 눈에 들어왔다. 키릴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일리야?”

우아한 눈매에 감싸인 보라색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키릴은 손을 뻗어 제 충직한 성기사의 얼굴을 더듬었다.

“왜 네가 여기에……. 꿈인가 보구나.”

뺨을 쓰다듬는 손을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움켜쥔 일리야가 남은 손으로 키릴의 이불 끝을 들쳤다. 흰 나신에 정사의 흔적이 가득한 것을 본 그의 눈빛이 짙어졌다.

키릴은 자신을 살피는 시선은 개의치 않고 그가 걸친 복장을 의아한 듯이 보았다. 흰 기사복이 아닌 검은 천으로 전신을 꽁꽁 싸맨 데다 후드가 달린 긴 재킷에 두꺼운 망토까지 걸치고 있었다. 마치 신분을 숨기고 외유를 나가는 것처럼. 키릴의 눈이 일리야의 한 손에 닿았다. 빛을 받아 번뜩이는 검날이 그곳에 있었다.

일리야의 복장과 손에 쥔 검을 본 순간. 키릴은 뒤늦게 이것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단번에 잠이 확 달아났다. 키릴이 다급히 허리를 일으켜 세우자 일리야가 망토를 풀어 하얀 나신을 가렸다. 전신은 물론 머리와 얼굴까지 천으로 싸매려는 걸 손을 들어서 막으며 키릴이 불안한 눈으로 욕실 쪽을 살폈다.

“설마, 너 혼자 온 거야?”

“아닙니다. 설명은 나중에 드릴 테니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그래.”

야쿠치가 언제 욕실에서 나올지 몰랐다. 그가 일리야를 발견하고 해코지하기 전에 이곳을 나가야 했다.

키릴의 얼굴과 머리를 꼼꼼하게 가린 일리야가 그를 안아 들고 일어섰다. 그때 막 야쿠치의 수하가 침실 문을 박차고 다급히 뛰어들었다.

“수장! 밖에, 웬 놈들……!”

“키릴 님, 눈 감고 계세요.”

“누구……!”

일리야의 한 손이 섬광처럼 움직였다. 검날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자 뒤늦게 수인의 목이 툭 떨어졌다. 키릴을 한 손으로 받쳐 안은 일리야가 남은 손으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코앞에 두었을 때.

“뭐가 이리 시끄러워?”

욕실에 있던 야쿠치가 머리를 털며 침실로 들어섰다.

“뭐야, 이 새끼는.”

일리야가 표정 없는 얼굴로 야쿠치를 돌아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긴장감이 방 안에 팽만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 속에서 야쿠치의 눈길이 일리야의 품 안과 빈 침대에 번갈아 닿았다.

시작은 야쿠치가 먼저 움직였다. 거구의 몸이 땅을 박차고 허공에 뜬 순간 순식간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야쿠치가 팔을 휘두르자 일리야가 걸음을 뒤로 물려 피했다. 한쪽 팔로 키릴을 안고 있었음에도 그 움직임에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야쿠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일리야의 품에 안겨 있던 키릴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망토에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공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혹시 일리야가 다치지 않을까 걱정된 키릴이 손을 꼭 쥐며 주신께 빌 때였다. 일리야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여상한 목소리로 키릴에게 물었다.

“원하시는 바는 이루셨습니까?”

키릴이 품 안에서 고개 끄덕이자, 일리야가 야쿠치를 힐끗 보았다.

“말씀만 하시면 제가 저것을 당신께 바쳤을 텐데요.”

“미친 새끼가.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야쿠치가 일리야의 품에 안긴 키릴을 보곤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도둑 새끼 주제에.”

비죽이 웃던 야쿠치가 갑자기 킁킁거리며 표정을 굳혔다. 여유롭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때 밖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단순한 납치범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야쿠치가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일리야를 노려보았다.

“너, 뭐 하는 놈이냐.”

일리야는 대답 없이 몇 걸음 물러서더니 키릴을 의자에 앉혔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키릴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야쿠치가 단검을 뽑아 날렸다. 순식간에 쏘아져 나간 단검을 검으로 쳐낸 일리야가 키릴의 앞을 막아섰다.

“디라, 이놈 뭐지? 하는 꼴을 보니 아는 사이 같은데. 같은 제국인인가?”

“네가 알 필요 없다.”

둘 사이에 서슬 퍼런 기운이 오갔다.

살기 가득한 기운에 서늘함을 느낀 키릴이 어깨를 움츠렸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이 기운은 얼마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키릴은 야쿠치의 손에 고깃덩이가 된 남자를 떠올리며 애써 불안을 억눌렀다.

일리야는 신전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그가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다. 일리야가 기사답게 체격이 좋아도 수인 중에서도 거구인 야쿠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 종족의 족장이자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른 자다.

계시를 받았을 때, 일리야가 화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도망치듯 홀로 이곳에 왔는데 그가 잘못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키릴을 가슴을 졸이며 언제든 치유 주문을 쓸 수 있도록 준비했다.

얼굴이 가려졌는데도 숨소리와 기색만으로 키릴의 생각을 눈치챈 야쿠치가 이를 드러냈다.

“이 새끼가……. 지금 저 자식을 걱정하는 건가?”

이를 갈던 야쿠치가 일리야의 전신을 훑어내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게 당연한 거겠지. 저런 허여멀건 새끼가 내 손에 갈기갈기 찢기지 않을까 걱정 꽤 들겠지. 풍기는 냄새가 성기사 같은데 고작 신의 종 따위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리야가 순식간에 야쿠치를 향해 쇄도하며 검을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팔을 휘두른 야쿠치는 길게 뻗어 나온 손톱 중 일부가 잘려 나간 것을 느꼈다. 야쿠치의 눈가가 떨렸다. 한순간이지만 짐승의 시력으로도 움직임을 잡지 못했다. 야쿠치는 설마 하며 근육을 팽창시키며 일리야에게 달려들었다.

바닥을 발로 꽝 찍고 허리를 돌리며 빠르게 뻗어 나간 주먹에서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리야가 노련하게 발을 놀려 주먹을 피하자 바로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려 들었다. 하지만 어느새 검 한 자루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쳇. 혀를 찬 야쿠치가 다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르게 공격을 강행했다. 잘 쓰지 않던 무기까지 집어 들어 휘두르고 던지며 괘씸한 불청객의 사지를 찢어버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반면 일리야는 피하기만 할 뿐인데도 여유가 느껴졌다. 그가 야쿠치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였기에 그리 보이는 것이다.

야쿠치 역시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처음 자신을 공격해 올 때도 그 움직임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손이 잘릴 뻔했다. 고작 성기사 주제에 알량한 신성을 믿고 겁도 없이 날뛴다고 여겼는데 조금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불길한 가정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마스터는 아니겠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저건 그저 흉내다!’

서 대륙에 둘밖에 없는 마스터가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성기사 따위가. 성기사는 가진 신성의 양에 따라 마스터의 경지를 흉내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검술 그 자체보다 신성을 우선했고 그 힘에 취한 자들은 하나같이 마스터의 경지에 닿지 못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긴 역사에서도 신전에서 배출한 마스터는 지금껏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니 절대 마스터는 아니다. 신성이 많아 착각했을 뿐. 그렇게 되뇌면서도 야쿠치는 근육을 부풀리며 극도로 긴장했다.

눈이 따라가기 힘든 공방이 이어졌다. 키릴은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일리야의 여유로운 태도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걱정으로 내내 마음을 졸이다 안도하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서 야쿠치를 때려눕히고 같이 신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그렇게 바라며 흐린 눈으로 둘의 공방을 지켜볼 때였다.

야쿠치의 눈동자 색이 변했다. 키릴이 황급히 눈을 돌렸다. 다행히 옆 모습이라 시선이 제대로 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야쿠치의 황금색 눈을 본 일리야의 무표정한 얼굴에 흉흉한 빛이 어렸다. 능력이 통했다고 생각한 야쿠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그때 일리야의 입술이 열렸다.

“설마 암시 능력인가?”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음산했다. 멈칫거리는 사이 순식간에 일리야의 검이 야쿠치 목에 닿았다. 야쿠치가 움찔했다. 지금까지와는 움직이는 속도가 달랐다. 처음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그때처럼 전혀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

‘설마, 이 새끼가, 날 상대로 재고 있었던 건…….’

자존심에 금이 간 야쿠치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일리야가 흠칫거리는 키릴을 힐끗 돌아보았다.

“살려놔야 합니까?”

“아……!”

입술을 떨던 키릴은 그 순간 일리야의 검에 하얗게 타오르는 신성을 발견했다.

키릴은 그제야 깨달았다. 왜 전이문이 다시 열리지 않았는지. 왜 뜬금없이 비상 연락책 만드는 꿈을 꾼 것인지 말이다. 전부 야쿠치를 처리할 자를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키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답을 확인한 일리야의 검이 단숨에 야쿠치의 목을 갈랐다.

툭. 야쿠치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부릅뜬 눈이 키릴을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키릴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돌렸다. 일리야가 다가와 키릴을 다시 꽁꽁 싸매고 안아 들었다.

“돌아가요, 키릴 님.”

그대로 밖으로 나서자 사방에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리야와 비슷한 행색이지만 얼굴을 가린 자들과 반란군으로 보이는 수인들이 합세하여 야쿠치 휘하의 수인들을 모조리 제압하는 중이었다.

살짝 천을 올려 주위를 본 키릴은 흑랑족 아이들이 쇠창살 밖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동족으로 보이는 어른이 그 곁에 선 것을 확인한 키릴이 안도하며 다시 천을 내렸다.

소란스러운 배경 속에서 일리야는 키릴을 안고 빠르게 대기하고 있던 전동차에 올랐다.

문을 닫자 떠들썩한 소리가 차단되었다.

“대신관께서 여기 계셨다는 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 ‘아무도’에 너와 황제는 예외겠지?”

“예.”

일리야의 낯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이곳에서 당신을 알던 이도. 이제 없습니다.”

“…….”

제 안에 성기를 처박고 헐떡이던 수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머리만 남아 자신을 노려보던 야쿠치의 그 눈빛도. 키릴의 손끝이 약하게 떨렸다.

일리야가 키릴의 손을 잡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힘주어 쥐곤 손을 제게로 가져갔다. 손등에 입술을 댄 채로 일리야가 속삭였다.

“주무세요, 키릴 님.”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잠이 쏟아졌다. 간신히 정신을 붙들며 키릴이 말했다.

“그런 거… 보여 주고 싶지…… 않았어.”

계시라고는 하나, 강압적인 관계에 발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제가 당신께 했던 말을 잊으셨습니까? 그런 당신도 ……한다고.”

키릴은 마지막 뒷말을 듣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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