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돌아가야 했다.
벌이라며 짐승의 모습으로 키릴과 뒹군 야쿠치는 다음 날도 전신이 털로 뒤덮인 상태로 키릴과 잠자리를 가졌다.
이대로는 키릴의 정신이 버티질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자력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탈출은 어려웠다. 전이문이 다시 나타난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가능했다면 임신을 확인한 후 바로 돌려보내 주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야쿠치의 아이가 아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선뜩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키릴은 남자였다. 인공 자궁 덕에 임신할 수 있었지만,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일단 자궁을 열어야 했다. 그 안에 귀두를 찔러 넣고 사정하지 않으면 임신은 불가능했다. 몇 번이고 자궁을 열어 사정을 반복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내벽 깊은 곳에 정액을 가득 들이부어도 그것만으론 임신이 될 턱이 없었다.
자궁 안에 사정한 건 야쿠치 외엔 붉은 털의 시종이 유일했다. 임신 후 일주일이 지나야 유두에서 투명한 액이 나온다. 시기를 계산해 보면 그때 키릴의 자궁을 열고 사정한 이는 야쿠치뿐이었다.
술렁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키릴은 마지막 수단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머릿속에 쇠창살 안에 갇혀 있던 이들이 떠올랐다.
소동이 커질까 봐 저어했던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되려 그 소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한 모습으로 제 발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고민은 짧았다.
키릴은 비상 연락책 만드는 법을 떠올렸다. 어렵진 않은데 너무 어릴 때 배웠던 터라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며칠 전 꿈에서 수업 내용을 다시 보지 않았다면 아예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키릴은 작은 그릇에 깨끗한 물을 담고 숨겨 두었던 마석을 꺼냈다. 그리고 물과 마석에 신성을 쏟았다.
물의 양이 적어서일까. 가진 신성을 아낌없이 퍼부었더니 반나절 만에 성수가 되었다.
신성을 쏟아 넣은 마석을 성수에 담갔다. 그대로 하루 동안 창틀에 두고 커튼으로 가렸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키릴은 창틀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그릇 안엔 마석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하루 만에 마석이 성수를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보통 사흘은 걸리던데…….’
주신의 도움이 있지 않은 이상 이렇게 빨리 완성될 리가 없었다. 키릴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그릇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올리는 키릴의 하얀 등엔 밤새 야쿠치에게 시달린 흔적이 가득했다. 다리 사이로 끈적한 타인의 정액이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감사의 말을 올리던 키릴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키릴은 그제야 벌거벗은 제 모습을 깨닫곤 얼굴을 붉혔다. 아직 점성이 남은 흰 점액에 마른 정액이 섞여 계속 흘러나왔다. 허벅지가 절로 떨렸지만, 키릴은 마저 기도를 이었다. 감사와 부끄러운 행실에 대한 회개의 기도가 짧은 신음과 함께 이어졌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자 마석에 희미한 금빛이 떠돌았다.
키릴은 작은 마석에 신성력으로 주신의 문장을 그려 넣었다. 불그스름하던 광물이 곧 금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성공이었다.
마석을 들고 신성력을 주입하여 머릿속에 새의 모습을 떠올렸다. 은은한 금빛을 뿌리며 마석이 반투명한 흰 새로 변했다.
키릴은 조심스럽게 새를 손 위에 올리고 다시 신성력을 주입했다.
“이 정도면 왕복도 가능하겠지.”
키릴과 눈이 마주치자 새의 눈동자가 키릴과 같은 푸른색으로 변했다. 키릴은 머릿속으로 솔 제국 수도에 있는 주신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충직한 기사의 얼굴을 덧그렸다.
“어디로 갈지. 그리고 누구에게 갈지. 알겠지?”
새의 눈동자가 다시 검게 변했다. 새 부리가 열리자 키릴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곳의 상황과 짐작되는 위치를 전한 후 새 부리를 닫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키릴은 새를 몰래 날려 보냈다.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