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벌써 이곳에 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외유가 예상보다 더 길어질 것 같아 불안했다. 신전도 걱정이지만, 제국 황실도 그 못지않게 신경이 쓰였다.
그곳엔 키릴과 깊이 관련된 자들이 제법 있었다. 조력자는 자리를 비웠지만, 황제가 마음에 걸렸다.
젊은 황제는 주기적으로 신전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키릴을 찾았다. 부재가 길어지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눈치 빠른 자라 어쩌면 부재의 이유까지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키릴은 그래도 황제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근심거리는 황제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신전에 두고 온 이가 마음에 걸렸다.
홀로 떠난 키릴에게 화를 내면 차라리 다행이다. 키릴이 여기서 어떤 꼴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알게 된다면…. 무슨 돌발 행동을 할지 몰랐다. 20년 전 그 날처럼 말이다.
‘말려 줄 이는 다 자리를 비운 상태니……. 어서 끝내고 돌아가야 할 텐데.’
키릴은 얇은 천 하나만 몸에 걸친 자신의 상태를 내려다보았다. 여밈이 없어 가슴과 성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 상태로 거실 창문에 붙어 서서 야쿠치에게 피를 제공하는 중이었다.
등 뒤에 달라붙은 야쿠치의 이가 다시 키릴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윽! ……흐으…….”
전처럼 살점을 뜯어먹진 않았지만, 송곳니가 깊이 박혀 아팠다. 그래도 이미 두 차례 회복하고 난 뒤라서 고통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아파도 참을 만했다. 키릴이 생각을 이어나갈 만큼 말이다.
도대체 이번엔 키릴의 피로 또 무얼 하려는 걸까. 오늘 밤에 침대에서 자신의 정신을 앗아가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저번처럼 또 주변을 부추겨 난투극을 벌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싫었지만, 키릴은 후자가 더 고역이었다. 난투극이 벌어지면 사방에 역겨운 피 냄새가 감돌았다. 후각을 자극하는 혈향과 지독한 폭력을 목격한 영향으로 다른 수인들까지 평소보다 흉흉한 기운을 뿌리며 돌아다녔다. 그런 날은 꼭 누군가가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건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키릴은 피와 고성이 오가던 기억을 애써 떨쳤다. 그때 생각에 빠져 있던 키릴에게 야쿠치가 불쑥 말을 걸었다.
“이제 셋 남았던가?”
“……예?”
“너와 함께 이곳에 온 자들.”
“아. 예, 맞습니다. 셋이 남았습니다.”
키릴이 이곳에 함께 끌려온 이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덜미에서 입을 뗀 야쿠치가 은근한 목소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남은 것들도 풀어 주길 원해?”
키릴이 눈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짓궂은 야쿠치가 심술을 부릴까 걱정되는 눈치였다.
“내 요구를 잘 들어주면 하나씩 풀어 주지. 어때?”
“정말입니까?”
“그럼. 왜 거짓말을 하겠어?”
“…….”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 같은데.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키릴은 눈을 내리깔았다.
“무얼 원하는지 안 물어봐?”
“뭘 하면 될까요?”
“첩의 의무.”
“네?”
야쿠치가 입을 다물고 키릴을 빤히 보았다. 가만히 그 눈을 마주하던 키릴이 설마 하며 입술을 떼었다.
“그…… 우두머리 외에…….”
“그래, 잘 알고 있네. 나 말고도 내 수하들과도 잘 어울려 줘야지. 물론 내 명령이 있을 때만이다.”
“…….”
“어차피 성에 가면 네가 할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익숙해져야지. 안 그래?”
성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키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면 그분들을 풀어 주시는 겁니까?”
“네가 잘하면. 그러면 상을 주지.”
예상했던 일이다. 그래도 마음이 착잡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예, 그렇게 할게요.”
키릴은 야쿠치의 허리를 껴안고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주인님이 명하신다면요.”
일그러진 얼굴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