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짐승의 왕(1)
1.
6개월 전.
국경이 소란스러웠다.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하필 그 외진 곳에…….”
“변경백의 영지가 아닌 그런 외진 곳이기에 우리 형제들이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던 거겠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건 저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국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황실에서 이대로 두고 보진 않을 겁니다.”
그날 이웃인 미온 왕국 수도 주신전과 제국 지방 주신전에서 동시에 서신이 날아왔다. 그리고 솔 제국의 수도 주신전이 발칵 뒤집혔다.
지방 신전의 신관 몇이 파견을 나갔다가 실종되었다. 장소는 볼그람과 인접한 국경 지역으로 분쟁이 잦은 곳이었다.
미온 왕국과 지방 신전에선 당연히 볼그람을 의심했다. 최근 볼그람이 국경에서 일으키는 문제가 심각했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솔 제국과 미온 왕국, 그리고 볼그람. 세 나라는 서로 국경이 접해 있었다.
인족의 나라인 솔 제국과 미온 왕국과 달리 볼그람은 수인족의 왕국이었다. 호전적인 수인족이 국경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자잘한 사건 사고는 있었어도 늘 수습 가능한 정도에서 그쳤기에 지금껏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볼그람의 수장이 교체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까지 수인족의 수장은 각 종족의 족장이 정당한 후보들을 모아 의회를 통해 선출했지만, 호족의 신족장이 그 과정을 무시하고 자력으로 수장의 자리를 찬탈했다. 반대하는 자들은 죽거나 옥에 갇히거나, 실종되었다.
거기까진 볼그람 내부의 사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년이 지난 지금, 수인족 내부의 혼란은 국경까지 번졌다.
고작 시비만 붙다 끝났던 과거와 달리, 얼마 전엔 처음으로 사상자까지 나왔다. 미온 왕국의 피해는 훨씬 컸다. 수탈과 화재가 끊이질 않는다고 했다.
기도실에 있던 키릴은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근심에 잠겼다.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대로 가다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서신에 담긴 글귀만으로 삼국을 둘러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피에 미친 짐승이자 폭력의 숭배자라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피와 폭력에 발정하여 군림하는 자.
단순히 피에 미쳐 날뛰는 것인지, 아니면 더 큰 판을 짜기 위한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수장의 곁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기이할 정도로 폭력적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설마, 혈계 능력은 아니겠지?’
수인족 중 핏줄로 이어지는 특이한 이능을 가진 자들이 드물게 나타났는데, 그들이 지닌 능력은 하나같이 괴이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서신에 적힌 수장의 이름을 내려다보던 키릴이 긴장감 섞인 한숨을 흘렸다.
어린 사제가 물었다.
“실종된 형제들은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만…….”
“제국이 나서 주지 않을까요?”
“글쎄…….”
제국이 국경의 일을 이유로 군을 보낸다면 그건 전쟁 선포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세 나라가 전쟁에 휘말릴지도 모른다.
전란이 커져선 안 되었다. 만약 볼그람의 고위인사 중 반수장파의 누군가가 개입한다면 조금 말이 달라질 테지만.
“나서더라도 들키지 않아야 한단다.”
“그럼 몰래 구하러 가면…….”
키릴은 쓴웃음을 지으며 사제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지금쯤 교단과 황실에서 한창 앞으로의 일을 논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목표로 잡을지는 아직 키릴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무사히 구할 수 있도록 먼저 기도하자꾸나.”
키릴은 사제와 함께 최초의 빛이자 번영의 신인 주신께 기도를 올렸다.
부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더 큰 피해 없이 혼란이 진정되길. 실종된 이들이 무사하길. 그래서 다시 우리의 품으로 데려올 수 있기를.
간절한 기도가 이어졌다. 그때였다. 총애하는 종의 청원을 들었음인지 돌연 두 사람의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주신 상 앞에 놓인 은그릇이 빛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기도 전 키릴이 그릇에 부어 둔 성수가 빛의 발원지였다.
“대신관님 저게 대체……!”
놀란 눈으로 보던 키릴이 바로 주신 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제 역시 뒤늦게 키릴을 따라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키릴이 눈앞의 성수를 내려다보자 기다렸다는 듯 그릇에 담긴 성수에 파문이 생겼다. 작게 소용돌이치듯 움직이던 물결이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성수에 글자가 떠올랐다.
야쿠치.
조금 전 전서에서 본 볼그람 수장의 이름이었다.
“맙소사, 이건……!”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일어난 작은 기적에 사제가 입을 쩍 벌렸다. 어린 얼굴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반면에 키릴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곧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성수 위에 떠 있던 글자가 사라지고 그 아래 희미한 형체가 비쳤다.
환영이 점점 뚜렷해졌다. 처음엔 국경을 가르는 성벽이 보였다. 다음엔 머리 색을 바꾼 키릴이 국경 근처로 보이는 마을을 둘러보고 있었다.
“대신관님?”
“…….”
계시였다. 이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때는……. 과거를 떠올린 키릴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대신관님! 지금 주신께서, 주신께서 이곳에 임하셨어요. 보셨지요?”
성수에 기도하는 키릴과 그 앞에 누워 있는 다른 신관의 모습이 비쳤다 사라졌다.
“대신관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분명 주신께서 이것을 저희에게 보여주신 뜻이 있으시겠지요?”
계시가 내렸다며, 키릴이 가면 분명 주신의 뜻을 알 수 있을 거라며 어린 사제가 조잘거렸다.
사제가 호들갑 떠는 중에도 창백하게 질린 키릴의 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앞에 기적에 온 정신을 빼앗긴 사제는 키릴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주신께서 보살피심이 분명합니다. 어서 이 소식을 위쪽에 알려야 해요!”
서둘러 달려 나가는 사제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환영이 사라지기 전, 무릎을 꿇고 앉은 키릴의 뒤에 선 검은 그림자를. 그리고 키릴이 혼자 남기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떠오른 환영 속 미래 역시도.
‘왜 하필…….’
굳게 맞잡은 손끝이 희게 질렸다. 키릴은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