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탁상의 중앙을 가로막고 선 가림막이 천천히 열렸다. 고백자가 신관의 얼굴을 보며 말하길 원한다는 뜻이었다. 키릴은 급히 식은땀을 닦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주신전 고해실에서 고해 성사를 시작하려던 신자는 눈앞의 대신관의 외모에 깜짝 놀랐다. 그린 듯이 우아한 미인이 그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반짝이는 은발에 그가 누군지 알아챈 신자는 감격으로 눈을 빛냈다. 대신관 키릴이었다.
풍성한 흰 법복을 입은 대신관의 앉은 자세는 참으로 단정했다. 쉰 살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신자는 그 신성한 육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빤한 시선에 고아한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기분 탓인지 어딘가 애처롭게 느껴지는 미소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신자가 얼른 고해를 시작했다.
“…하여 저의 어리석은 마음을 고합니다.”
고백이 끝나고 알맞은 보속을 내린 뒤 주신을 향한 기도가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인사를 끝으로 고해실을 나서던 고백자는 막 방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금발에 하얀 기사복을 입은 눈부신 외모의 성기사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웃으며 우아한 태도로 신자를 배웅했다.
신자가 떠나고 출입문을 잠근 성기사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고해실로 향했다.
문 앞에서 손을 내밀자 키릴이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하얀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조금 힘겨운 태도로 일어선 키릴이 가만히 서서 심호흡하자 성기사가 자신에게 기대도록 몸을 바짝 붙였다.
“숙소로 가시겠습니까?”
“응. 부탁할게.”
성기사는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목적지까지 키릴을 호위했다. 기사의 손 위에 올려진 하얀 손이 이따금 떨렸지만, 성기사는 모른 척 천천히 걸음을 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여 등이 긴 의자에 앉은 키릴이 충직한 기사를 뒤로 물렸다.
“괜찮아. 이제 훈련 시간일 텐데 가 봐, 일리야.”
“…그럼 잠시 뒤 다시 오겠습니다.”
혼자 남은 키릴은 풍성한 가운을 벗고 순백의 코트도 마저 벗었다.
아직 셔츠와 두꺼운 튜닉이 남았으나 참지 못하고 두 손을 움직여 가슴을 더듬었다. 옷이 축축했다. 벌어진 튜닉 사이로 보이는 얇은 셔츠는 가슴께가 흠뻑 젖었다.
젖은 천이 살갗에 한 몸처럼 달라붙어 툭 튀어나온 살덩어리의 존재가 유독 도드라졌다. 키릴의 손이 그곳으로 향했다.
말캉한 여린 살과 발기한 유두를 사정없이 조이는 링, 그리고 젖구멍을 틀어막은 링과 연결된 작은 보석이 느껴졌다.
링과 보석 탓에 유두가 근질근질했다. 유두를 괴로울 정도로 비틀어 당기고 통통한 살을 마구 짓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소리를 지를 것 같아 참았다.
말캉한 살을 마구 긁어 대고 싶은 것을 참으며 손끝으로 살살 보석을 문질렀다. 순간 찌릿한 느낌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쫙 퍼졌다. 고작 보석을 통해 전해진 자극만으로 몸이 펄쩍 튕겨 올랐다.
“아…….”
키릴은 허리를 활처럼 휘며 저릿한 가슴을 스스로 꽉 움켜쥐었다. 보석 가장자리에서 희뿌연 액체가 새어 나왔다.
“흑……!”
미처 해소하지 못한 배출 욕구에 키릴은 가슴을 움켜쥐고 흐느꼈다.
오늘따라 유독 몸이 간지러웠다. 당장 링을 빼고 안에 있는 것을 죄다 쥐어짜고 싶었다. 아래쪽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키릴은 허벅지를 비비며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안 돼.’
키릴은 짙은 번민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몸을 웅크렸다. 여기서 더 욕구에 휩쓸렸다간 이후 일정이 엉망이 될 터였다.
조금 있으면 귀한 손님이 신전을 방문할 것이다. 대신관인 그라도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
키릴은 신의 총애를 받은 자였다. 교황 다음으로 많은 신성력을 보유한 자였으며, 대외적으로 선황제와 황제의 신뢰를 듬뿍 받는 사제였다.
하지만 신성한 법복에 감춰진 하얀 육신은 차마 밝히지 못할 비밀로 가득했다.
지금도 계속 옷 안이 젖어가는 중이다.
부풀어 오른 유두를 꽉 조인 링. 링과 연결된 작은 보석이 유두 끝을 막았으나 틈새에 뿌연 액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아랫구멍 역시 마찬가지. 흘리지 못하게 틀어막았으나 슬금슬금 삐져나온 애액으로 고해 시간이 끝난 지금은 속옷이 축축했다.
갈아입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또 젖을 것이니. 평범한 몸 상태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당연한 현상이기도 했다.
슬슬 졸리기 시작했다. 키릴이 조금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나른한 한숨을 흘렸다.
대신관의 배 속엔 짐승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
대신관은 홀로 몸을 씻고 정화 구슬로 다시 깨끗해진 옷을 입었다. 임신한 이후 하루에 몇 번이고 이것을 반복하는 중이다. 예민해진 육체는 쉽게 젖었고 늘 미약한 열감에 시달렸다.
발긋한 양 뺨은 달아오른 성감으로 인한 것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을 그저 보기 좋다며 가볍게 넘어갔다. 키릴의 젊은 외모 탓이다.
키릴의 나이도 어느덧 오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외모는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신성을 가진 자는 원래 노화가 느렸다. 특히 교황의 육신은 즉위 후 시간의 흐름이 비껴가듯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았다. 키릴이 그 같은 경우로 신관으로 임관될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준비가 끝나 숙소를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젊은 사제가 다가왔다.
“폐하께서 곧 오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휴식 중에 죄송합니다만, 폐하께서 늘 대신관님을 찾으시는 터라. 그런데 원래도 자주 오시지만, 최근엔 방문이 정말 잦으시네요.”
“잘 있는지 보려는 것입니다.”
키릴이 아닌, 배 속의 아이를 말이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의 몸에 있는 인공 자궁은 용이 타 종족을 수태시키고자 만든 물건이라 태아를 지키는 힘이 강했다. 약도 물리적 충격도 소용없었다. 임신 내내 격렬한 삽입 섹스를 한다 해도 태아에겐 아무런 해가 없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유산은 무리였다. 아이를 죽이고자 한다면 모체를 죽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키릴은 넘치는 신성 탓에 죽을 수도 없었다. 물론 죽을 생각도 없었다.
신의 종으로서 있어선 안 될 일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는 아이를 낳아야 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동족을 비롯하여 온갖 이들을 해하며 그 피로 자신의 쾌락을 채우던 그 폭군처럼 되지 않길.’
부디 배 속의 아이가 그 아비 같은 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키릴의 머릿속이 과거를 더듬었다. 고되었던 나날이었다.
모든 건 6개월 전 국경에서 일어난 분쟁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