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숨은 시다 6권 (외전) (8/8)

당신의 숨은 시다 6권 (외전)

외전

오전 열한 시 반, 하루 중 가장 집중이 어려운 시간.

“…하여, 인간에게는 적어도 두 개의 기억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다.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갇힌 듯 모든 것이 아득해져 가는 가운데, 정인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강의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나는 사람이나 사건에 관한 서술적 기억,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전거 타기나 악기 연주처럼 잠재의식의 영향을 받는 비서술적 기억이죠.”

그때, 문득 노트북 화면 구석에 팝업 창 하나가 떠올랐다.

* 실시간 인기 게시물 TOP3 *

1위 : 요즘 제일 부러운 유호진 인생 (스압).zip

2위 : 일주일 만에 주인을 만난 고양이의 반응

3위 : 동대구역 전설의 맛집 근황

도저히 클릭하지 않을 수가 없는 제목이었다. 정인은 슬그머니 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자그마치 실시간 인기 게시물 1위에 빛나는 애인의 이름을 클릭했다. 그러자 유치원 모자를 뒤집어쓴 유호진 어린이의 사진이 짠 하고 나타났다.

“헉…. 귀여워.”

팬이 작성한 게시물인지, 페이지 속에는 호진의 일대기가 주르륵 적혀 있었다.

스크롤을 따라 초, 중, 고등학생 유호진의 모습을 지나치자 곧 세상 모두가 아는 수영 국가 대표 유호진이 나타났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자신 있게 미소 짓는.

정인은 한눈에 그 사진을 알아보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소청 수영 대회 시상식. 즉, 정인과 호진이 막 연인 관계로 발전하던 시기에 찍힌 사진이었다.

드디어 눈물의 소청 왔다ㅠ

어깨 부상 이후로 한참 쉬다가 첫 출전한 경기인데, 솔직히 팬들은 부상 때문에 이때도 안 나가길 바랐음.

아니나다를까 금메달까지 땄는데도 기록 떨어졌다고 기레기들한테 일점사 당하고 오지게 욕먹음ㅠ 소청 시설이 너무 열악해서 다른 선수들도 똑같이 기록 떨어졌는데 호진 선수만 물고 늘어짐ㅎ….

소속사? 팬들이 pdf 따서 보내도 그냥 방치. 안 그래도 선수 생활 끝났다는 썰 돌면서 분위기 흉흉했는데, 선수가 걸레짝이 되도록 처 맞아도 입장표명 한 번을 안 해주더라ㅋㅋ

(참고로 당시 소속사=유호진 인센티브 빼먹다 걸린 한양스포츠)

소속사와의 불화, 극심한 중압감과 부상, 그것들과 함께 찾아온 트라우마까지.

어쩌면 생애 가장 힘든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진 속의 호진은 아픔이라곤 전혀 모르고 살아온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아팠다.

이제는 세상의 그 무엇도 감히 호진을 해하지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지난 과거에조차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정인은 한참 동안 화면 속의 호진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어지는 한 줄의 문장에 도로 미간이 구겨졌다.

심지어 지금은 화룡점정으로 대학교에서 재벌 3세 만나서 1년 넘게 연애 중ㄷㄷㄷ

글 아래에는 핸드폰 카메라로 연속 촬영한 사진 몇 장이 붙어 있었다. 칼바람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겨울, 학교 앞에서 찍힌 것이었다.

카메라를 등지고 있어 정인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호진의 모습은 아주 선명했다.

그는 정인을 발견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자신의 목도리부터 풀었다. 바람 하나 샐 틈 없이 매듭지어 정인의 목에 감은 다음에는 두 손으로 뺨을 녹여 주며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얼굴로 웃었다. 절대 학교 선후배나 친구라고는 얼버무릴 수 없는 수준의 눈빛이었다.

결국 이 사진은 ‘남자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 짓는 표정’이라는 제목을 단 채 순식간에 퍼져 버렸다.

“하….”

그때를 생각하니 또 식은땀이 났다.

두 사람의 관계를 굳이 숨기려 한 적은 없었으나, 주변 지인 몇몇이 아는 것과 온 세상 사람들이 전부 아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호진은 저로 인해 정인이 괜한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걱정하느라 식음을 전폐했고, 정인은 이 일로 행여나 호진의 선수 생활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느라 며칠 내내 밤잠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인의 신상을 털어 뿌릴 만큼 담이 큰 언론사는 없었고, 호진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방향을 택하자 소문은 기껏해야 ‘유호진이 재벌 3세와 연애를 한다더라’ 정도의 가십 수준에서 그쳤다. 집안에서 여론 조장에까지 관여했는지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의견도 대충 ‘대학생들 연애는 남들이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라는 쪽으로 귀결되며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물론 두 사람 다 정훈의 앞에 나란히 무릎 꿇고 앉아 몇 시간 동안 털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꽤 괜찮은 결말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게시물을 끌어 올리지만 않는다면, 아마 더는 집안에 ─ 정확히는 정훈에게 ─ 서릿바람이 몰아칠 일도 없겠지.

“씨….”

한창 평화로운 와중에 또 누가 이걸 끌어 올렸단 말인가. 딱히 어쩔 도리는 없어 속만 끓이는데, 별안간 주위가 부산스러워지더니 멀리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과제는 메일로 제출하도록 하세요.”

“어?”

정인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옆에 앉아 있던 동기를 붙들었다.

“준아, 미안한데 과제 뭐였어?”

“중다기억 시스템 관련 논문 한 편 정해서 요약하는 거요.”

아직 학기 초인데, 교양 과목에 무슨 놈의 과제가 이렇게 매주 있는지 모르겠다. 정인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기는 정인에게 불쑥 물었다.

“형, 저희랑 같이 점심 먹으러 가실래요? 새로 생긴 순대볶음집 엄청 맛있대서 거기 가려고요.”

스물둘 최정인이라면 대꾸조차 하지 않았을 제안이었다. 그러나 스물셋의 최정인은 칼 같은 거절보다도 다음을 기약하는 일에 조금 더 익숙해져 있었다.

“나 점심은 항상 애인이랑 같이 먹어서. 내일이나 모레 저녁에 시간 되면 그때 먹자.”

“좋아요.”

동기들은 그러자며 앞장서 걸었고, 정인은 그들과 함께 자연스레 인파에 섞여 들었다.

주차장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동기들은 수없이 화제를 바꿔 가며 떠들다. 어디의 무엇이 맛있었다느니, 지난 주말에는 어딜 가서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다느니. 그러다 수업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근데 좀 소름 돋지 않아요? 전두엽 절제술이 성행하던 때도 있었다는 게…. 뇌를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지금 같으면 바로 의사 면허 뺏길 걸요.”

“그렇지…. 지금의 우리가 하는 몇몇 짓들 중에도 아마 백년 후의 사람들이 보기엔 이상한 게 있을 거야. 매주 과제 나오는 교양수업 같은 것도 그중 하나겠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다 보니 어느샌가 갈림길이었다.

“그럼 내일 봬요.”

“그래, 들어가.”

동기들은 갈림길의 아랫쪽으로 내려갔고, 정인은 마침내 주차장에 도착했다.

유달리 볕이 좋은 날이었다. 정인은 바로 차 문을 열려다 말고 문득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마다 잔뜩 피어난 햇살에 눈이 부셨다.

“…날씨 되게 좋네.”

좋은 것을 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지금쯤 한창 물 밑을 헤엄치고 있을 호진을 떠올리며 정인은 작게 웃었다.

별것 아닌 햇살 한 줌에도 콩닥콩닥 설레는, 비로소 스물 셋의 봄이었다.

***

“Take your marks.”

고요히 일렁이는 수면 위, 스타팅 보드에 자리 잡은 호진은 익숙한 출발 신호를 따라 무게 중심을 바꿨다. 머지않아 실제 경기에서 쓰이는 것과 똑같은 버저음이 울리고, 하나로 모은 손끝이 거침없이 수면을 갈랐다.

하나, 둘, 셋, 넷. 다시 하나, 둘, 셋. 모든 동작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되는 가운데, 호진은 계획대로 눈 깜짝할 사이 반환점에 도달했다. 물론 출발선으로 돌아오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터치패드를 찍으며 제자리에 멈춰 서자 멀리 전광판에 백 미터 기록이 찍혔다.

“기록 좋아요.”

“하아, 하…. 감사합니다.”

매니저의 말대로 상당히 괜찮은 기록이었다. 내밀어 주는 손을 잡아 훌쩍 물을 벗어나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컨디셔닝 팀원들이 다가와 몸 상태를 체크했다.

“어깨 컨디션 괜찮았나요?”

“크게 이상 없었습니다.”

“25미터 지점에서 허리 불편하던 건 어땠어요?”

“오늘은 괜찮았습니다.”

그룹에서 세운 매니지먼트사는 이전의 소속사와 모든 면에서 달랐다. 대회 일정이 어떻게 되든 무조건적으로 선수 개개인의 컨디션을 우선하고,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권 실장의 판단하에 모든 훈련을 엄격히 통제했다. 물론 부상 히스토리가 있는 호진은 처음부터 아예 특별 관리 대상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다리는요? 무릎 열감 있던 건 좀 어때요?”

“아직 깨끗하진 않습니다.”

호진은 가능한 한 솔직하게 상태를 말했고,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쏟아지던 질문은 기나긴 체크리스트의 끝에 다다라서야 겨우 멈췄다.

“오후 훈련 전에 적외선 치료 예약해 둘게요. 야간 훈련 시간은 오후에 컨디션 봐서 조정하죠.”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호진은 직원들이 모두 돌아선 뒤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막 문가를 빠져나가려던 매니저가 말했다.

“아참, 호진 씨. 이번 주말에 페로몬 재조정 시술 예약 잡았어요.”

“벌써요?”

호진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 말고 멈춰 섰다.

본격적인 시즌에 돌입하기 전 페로몬을 최적의 상태로 세팅하는 것은 모든 이형질 선수들에게 권장되는 사항이다. 다만 의료진의 수가 늘 한정적이고, 하계 스포츠 선수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시술을 받다 보니 순번이 한두 달 밀리는 것쯤은 다반사였다.

심지어 호진의 경우에는 억제제 부작용과 페로몬 쇼크로 조정을 한 해 건너뛰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프로 운동선수의 2년 치 페로몬을 안전하게 다룰 수 있는 의사의 수 자체가 극도로 드물어서, 연초부터 예약을 시도했는데도 겨우겨우 받은 날짜가 6월 중순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게 석 달이나 당겨진 것이다.

“동유럽 쪽에서 일정 맞는 교수님을 찾았거든요. 내일 아침 비행기로 모신다고 확답 받았습니다.”

“헉….”

지구 반대편에서 그 정도 고급 인력을 쏙 뽑아 오다니, 굳이 묻지 않아도 TH 그룹의 작품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호진의 물음에 매니저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모시는 김에 우리 쪽 선수들 일정은 다 같이 당겼으니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아…. 감사합니다.”

부담스러운 것에서 끝나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송하다 못해 매 순간 손발이 달달 떨릴 지경이었다.

호진은 현재 TH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TH 코퍼레이션과 중흥건설은 물론이고 전자, 백화점, 통신. 심지어 리조트와 F&B까지 전부 대놓고 스폰서 로고를 박아 호진을 밀었다. 뒤에서 조용히 지원하는 다른 계열사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그룹 내의 모든 계열사가 유호진의 빽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비인기 종목 선수를 통틀어, 아니. 스포츠계 전반을 이 잡듯 뒤져도 이렇게까지 지원을 받는 선수는 찾을 수 없다. 물론 지금 호진이 훈련 중인 ‘임시 수영장’도 그 엄청난 지원의 일부였다.

중흥건설에서 시공을 맡은 종합 스포츠 센터는 규모가 너무 큰 나머지 아직도 본관 건물이 절반 정도밖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동안 호진은 바로 옆에 지어진 임시 수영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완공까지 우리 호진이 연습할 공간이 없어서 되겠느냐며 원경이 초고속으로 지어 준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말이 임시 수영장일 뿐 사실상 올림픽 규격이 완벽히 적용된 국내 최고 레벨 시설이었다.

“그럼 편히 쉬고, 오후 훈련 때 봐요.”

“넵, 수고하셨습니다.”

폴더 접듯 깍듯이 인사하고 호진은 개인 탈의실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미정이부터 찾아 꼭 안아 주었다.

“다녀왔어요, 형.”

매일 틈만 나면 만지작댔더니 이제는 인형의 등을 따라 반질반질 윤기가 돈다. 매일 이 시간쯤 날아오는 문자 한 통을 기대하며 핸드폰을 켰다. 역시나 전원을 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자 한 통이 뿅 날아왔다.

지금 출발해, 20분 후에 봐.

발신인은 물론, 한여름 눈송이보다도 귀한 호진의 정인이었다.

***

험악하기 그지없던 정인의 운전 스타일은 그동안 많이 변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우리 정인이가 달라졌어요’에 출연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저걸…. 진짜 심네요.”

모처럼 편안히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호진의 표정이 일순 창백해졌다. 도로를 따라 벚나무를 잔뜩 심고 있는 작업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뭐.”

정인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몰라서 아빠들한테 한번 물어봤는데, 어차피 지자체에서도 이쪽 근처에 체육공원 조성할 계획이었다더라고. 웬만하면 다들 벚꽃 좋아하니까 겸사겸사 좋은 일 한 셈 쳐.”

사건의 발단은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진이 지나가듯 ‘올해도 시간 나면 벚꽃 보러 갈까요’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정인은 즉시 스포츠 센터 부지 전체를 벚나무로 휘감아 버렸다. 물론 전부 공주의 묘목 농원에서 떼 온 것이었다.

“저 신호등은….”

“의외로 승인 금방 나더라. 진작 갖다 박을 걸 그랬어.”

하루아침에 뚝딱 설치된 보행자 신호등도 마찬가지로, ‘어두울 때 잘못하면 사람 다칠 수도 있겠어요’라는 호진의 말이 트리거였다.

“또 필요한 거 없어?”

정인이 물었다. 그야말로 말 한마디면 세상을 다 가져다줄 기세였다.

“형 말고는 세상에 필요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이제는 1년쯤 만났다고, 재벌 애인의 돈지랄을 제 힘으로 막는 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호진은 유들유들하고 밋밋한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정인은 썩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흠….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정인은 주기적으로 호진에게 뭔가를 해 주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듯했다.

언제 어떤 용도로 쓸지 모른다며 호진의 동선을 따라 부동산을 잔뜩 사들이고, 귀하다는 소문이 도는 물건이 나타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다 던져 주었다. 그런 식으로 얻게 된 한정판 명품과 장신구가 너무 많아 이제는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정 착용하기가 애매하면 그냥 어디 놔두고 구경이나 하라며, 한 번은 뜬금없이 영국 여왕의 브로치를 구해다 준 적까지 있었다.

그러는 동안 호진은 부정-타협-수용의 3단계를 착실히 거쳤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눈앞의 것들을 부정하다가, 제아무리 정인일지라도 가끔은 소비로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나름의 정신 승리를 하다가, 결국엔 살짝 해탈해 버린 것이다.

“이번 시즌에도 이래저래 해외 오갈 일 많을 텐데, 전용기는 안 필요해?”

“형, 그건 좀.”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정인이 킥킥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냥 해 본 소린데.”

그냥 해 본 소리에 벚꽃나무 길과 신호등을 얻게 된 상황이다. 무슨 말만 했다 하면 곧바로 이루어져 버리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형은…. 뭐 필요한 거 없어요?”

대답 대신 슬그머니 물었다. 정인에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은 호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인은 무심하게도 호진이 했던 말을 고대로 돌려줄 따름이었다.

“글쎄, 나도 너 말곤 딱히 필요한 거 없는데.”

차는 이윽고 호텔 주차장에 멈췄다. 정인은 주차 요원에게 발레파킹을 맡기고 먼저 로비로 들어섰다. 점심 시간이니 당연히 레스토랑으로 갈 줄 알았지만, 그의 걸음은 어째서인지 레스토랑의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호진은 마침내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선 뒤에야 질문을 던졌다.

“밥 먹는 거 아니었어요?”

“룸 서비스 시켜 먹자. 뭐 대단한 짓 하자는 건 아니고, 오후 훈련도 힘들 텐데 잠깐이라도 좀 편히 있었으면 해서 그래.”

정인은 당연하다는 듯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음….”

정인이 하는 말이라면 민트초콜릿 아이스크림으로 라면을 끓인대도 수긍하지만, 솔직히 말해 연애를 시작한 후로 단둘이 숙박업소에 들어가서 ‘편히 쉬기만 하고’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아버님들께서 아시게 되면 어쩌죠?”

페로몬 검사만 족히 수십 번은 한 마당이고, 이제 둘이 잠자리를 가진다는 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비밀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벌건 대낮부터 호텔을 들락거리는 건 조금 무리수인 것 같았다.

“효준이랑 다림이랑 저 밑에서 내 이름 대고 밥 먹는 중이야. 집에서야 그냥 너랑 밥 먹으러 온 줄 알겠지.”

“어….”

그럼 객실은요? 질문 하나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정인의 대답이 한발 더 빨랐다.

“객실 체크인은 변득구 씨 이름으로 해 놨으니까 걱정 마.”

“벼, 변득구요?”

혼자 세상 심각하던 호진은 그제야 하하 웃었다.

“도대체 어떻게 매번 이런 이름만 구해 오시는 거예요?”

“그게 중요해?”

“…아뇨. 하나도 안 중요해요.”

“그럼 이리 와.”

정인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호진은 기어이 못 이기는 척 정인에게로 끌려갔다.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어깨를 감싸 안고 눈을 맞추자 정인이 뒤꿈치를 살짝 들어 호진의 입술에 키스했다.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오후, 머리 위에서 딩동 울리는 벨마저도 천국의 종소리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

정인의 혈액 샘플이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간 건 작년 여름쯤의 일이다.

본딩 없이 페로몬 교환만으로 LGS 완치에 가까운 수치가 나왔다는 사실은 당연하게도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세계 각지의 기관에서 너도나도 그놈의 샘플을 요청하는 바람에 정인은 시시때때로 헌혈하듯 피를 뽑아야 했다. 물론 그것은 호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세상이 두 사람의 혈액을 분석하는 동안 정인은 한 걸음씩 완치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올 때마다 함께 찾아오던 격통은 진작에 사라졌고, 주기도 이제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한 범위 내로 들어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이형질들처럼 자유자재로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아마 그때쯤엔 더 이상 페로몬 장애 관리 대상으로 분류되지 않을 거라고도 들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굳이 걱정거리를 꼽자면, 건강이 나아지면 질수록 시시때때로 무슨 변태처럼 몸이 달곤 한다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

TV에서는 다큐멘터리가 한창이었다. 뽀얀 가슴 털을 부풀린 아기 펭귄이 살금살금 빙판 위를 걷는 가운데, 정인은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검은 베젤 구석에 비치는 호진의 가슴을.

“가슴….”

얇은 티셔츠 위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양감이 참으로 탐스러웠다.

겨울에도 지상 훈련을 계속하긴 하지만, 본격적인 시즌으로 접어들며 식단 관리까지 병행하니 도저히 같은 인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몸 선이 예뻐졌다. 마음 같아서는 오후 훈련이고 뭐고 지금 당장 자빠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아무것도 아니야. 펭귄 예쁘다고.”

신체 건강한 성인이라면 연인에게 성욕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깎아 놓은 듯 아름다운 몸을 가진 사람이 상대라면 더더욱 그럴 만도 하다. 그럼에도 사고의 퀄리티가 갈수록 너무 저급해지는 것 같아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별히 스스로를 고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1년 전의 최정인이라면 TV에 비치는 잔상으로 애인의 몸을 훔쳐보며 침이나 줄줄 흘리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신기하지 않아요? 아직 아기 같은데도 자기 가족들을 잘 찾아가네요.”

“그래, 신기하네.”

살 길 한번 찾아 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아기 펭귄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다큐멘터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한참 그렇게 화면 구석만 노려보는데,

“형, 혹시 몸 안 좋아요?”

문득 다가선 호진이 정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니. 왜?”

“얼굴이 좀 빨간 것 같아서요. 열은 없는데.”

꼼꼼하게 이마를 짚어 주는 손이 따뜻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인의 이마며 뺨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성적인 욕심을 담은 손길은 아니었지만, 이미 머릿속으로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던 정인에게는 충분한 타격이 되었다.

“그런 거 아니….”

조금 더 이렇게 있으면 정말 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고개를 떨어트린 순간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호진의 목 아래로 티셔츠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흰 피부 위로 짙은 음영을 남기며 쩍 갈라진 가슴과 복근, 반듯한 쇄골과 분홍빛 유두. 하다 못해 가는 줄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 놓은 커플링까지도 묘하게 야해 보였다.

“하.”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런 정인의 속을 모르는 호진은 그저 맑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 오늘은 그냥 쉬다가 보낼 생각이었는데,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미안, 키스만 하자.”

결국 정인은 참지 못하고 호진의 목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허공을 맴돌던 호진의 손이 정인의 등에 얹혔다. 정인은 말캉한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한 손으로 호진의 목을 쓸어내렸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벌어진 입술 사이를 헤집었다.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가볍던 입맞춤은 3초도 채 지나지 않아 끈적한 키스로 변해 버렸다.

“흐읏…. 호진아.”

빈틈없이 얽힌 혀 사이로 타액이 줄줄 새고, 등을 쓸어 주는 손길에 벌써부터 아래가 움찔거렸다. 정인은 발갛게 부은 눈을 하고 호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침대로 갈까요?”

대답을 하고 말고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인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그를 번쩍 안아들었다. 머지않아 정인의 등이 매트리스에 닿고, 스웨터 안으로는 뜨거운 손이 파고들었다.

“으응….”

절로 입술이 벌어지고 신음이 흘렀다. 허리와 배를 차례로 지나 온 열기는 곧 가슴팍에 머물렀다. 빳빳하게 일어난 유실을 스치듯 문지르다가 어느 순간에는 갈비뼈 사이사이를 꾹 눌러 주기도 했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통통하게 부푼 페니스가 호진의 허벅지에 비벼지고, 내내 상체에 머물러 있던 손은 곧 바지와 속옷을 한번에 헤집고 들어왔다. 엉덩이를 꽉 쥐었다가 놓고, 앞쪽으로 넘어갈 듯 말 듯 골반을 건드리는 손길이 집요했다.

“흐, 윽…. 호진, 아….”

정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다음의 단계가 착착 재생되고 있었다.

여린 살갗을 핥아 줄 때의 감각, 손가락의 마디에 걸린 입구가 움찔거리면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입맞춤, 몸을 열고 들어오는 기둥의 느낌. 그리고 깊숙이 찔릴 때마다 눈가가 화끈해질 만큼 기분 좋은 몸 안쪽의 어디.

“나, 이제…. 으응.”

선명한 감각들을 떠올리며 어설프게나마 페로몬을 풀었다.

아직 완벽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몰라서,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곤 턱없이 부족한 양의 페로몬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호진을 동하게 하기엔 충분했는지, 그는 정인의 냄새를 맡자마자 으드득 어금니를 씹더니 곧장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TV 베젤을 통해 내내 훔쳐보던 그 몸이었다.

목에는 작년에 정인이 선물한 반지가 걸려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목 잠깐 이렇게 해 보실래요?”

잔뜩 흥분한 와중에도 호진은 목걸이와 커플링부터 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섹스 도중 정인의 피부가 긁힐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렇게 모든 장신구를 치워 버린 다음에는 정인의 바지를 벗기고 잔뜩 발기한 것을 손으로 살며시 움켜쥐었다.

“읏…!”

손이 닿기 무섭게, 정인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울컥울컥 정액을 토해 냈다.

아직 본게임은 멀었는데 벌써부터 죽을 맛이다. 그리고 호진은 아직 사정의 여운도 가시지 않은 정인의 것을 입 안에 머금고 굴렸다.

“아직도 이렇게 예민해서 어떡해요.”

“아윽….”

눈앞에 별이 번쩍거렸다. 허리를 뒤틀어 무자비한 쾌감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골반이 단단히 잡혀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정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호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이윽고 굵은 손가락이 다물린 입구 위에 닿았다. 닫힌 곳을 꾹꾹 누르며 원을 그리는 동안에도 앞쪽을 핥아 대는 혀의 움직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 호진아….”

정인은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전에 정신 줄을 놓아 버린 정인과 달리, 호진은 아직도 퍽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체 이목구비가 깨끗하고 자세도 발라서 더더욱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벌어진 입가를 타고 줄줄 흐르는 체액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쿨쩍쿨쩍 울리는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 대비감이 주는 묘한 느낌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정신없이 정인의 앞을 빨던 호진이 문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아.”

“하윽….”

정인의 엉덩이 사이 부푼 점막 속으로 호진의 손가락이 쑥 들어왔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호진은 정인의 이마에 쪽쪽 입 맞추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하…. 어떻게, 이렇죠.”

하나이던 손가락은 곧 두 개로 늘어났다. 정인은 빠듯하게 차오르는 쾌감에 달달 떨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매번 열심히 풀어도, 하…. 매번 똑같이 좁아져요.”

호진이 느리게 페로몬을 흘렸다. 이미 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정인의 몸은 바로 반응을 내놓았다. 오메가 특유의 꽃향기가 온 천지에 진동하고, 앞뒤로 흐르는 점액의 농도가 조금씩 묽어졌다.

“이제 넣을게요.”

찌익, 비닐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호진은 포장을 뜯은 콘돔을 제 성기에 씌웠다. 두꺼운 기둥이 입구 위에 비벼졌다.

“아….”

호진은 끄트머리만 밀어 넣고 잠시 쉬며 정인의 상태를 살피다가, 잠깐 물러난 다음에는 곧바로 그의 두 배 깊이를 쿡 찌르고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 뿌리까지 삽입되어 있었다.

이미 정인의 구멍은 경련하듯 개폐를 반복하며 음수를 줄줄 흘리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호진은 잔떨림이 멎지 않는 정인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밀어를 속삭였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고, 정말이라고, 한순간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음을 부디 알아 달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정인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느린 피스톤질이 이어졌다. 기둥을 따라 굵게 돋아난 핏줄이 점막을 헤집을 때마다 안쪽의 샘이 부풀며 가뜩이나 좁은 입구가 더욱 팽팽해졌다.

“아, 너무 따뜻해요….”

두 사람은 극상의 쾌감에 절여진 채 위아래로 체액을 섞었다. 그리고 호진은 어느 순간부터 코어를 꽉 조이며 엉덩이 근육만을 사용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 누운 사람에게 실리는 체중이 적은 덕에, 정인이 느끼는 부담은 줄고 대신 쾌감이 증폭되었다. 정인은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 끄떡이는 앞을 제 손으로 움켜쥐고 버텼다.

속도를 높여 쑥쑥 드나드는 기둥이 느끼는 지점을 마구 찔러도 열심히 견뎠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본 체력차가 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힘이 달렸다. 쉬지도 않고 쿡쿡 찌르는 통에 머지않아 온몸의 힘이 풀려 버렸다.

“아, 아악…!”

꼿꼿하게 일어선 페니스가 소변을 뿜어내듯 묽은 정액을 쭉 토했다. 고스란히 정인의 얼굴에 튀어 버린 것들은 호진이 살뜰하게 핥아 주었다. 그마저도 지금의 정인에게는 지나친 자극이었다. 앞이 끄떡일 때마다 뒤쪽의 구멍도 불규칙하게 벌름거렸다.

“아….”

순식간에 기둥의 뿌리부터 끝까지를 꽉 짜인 호진은 낮게 신음하며 자세를 바꿨다. 세심하고 다정한 배려는 그쯤에서 끝났다. 그는 정인의 무릎이 어깨 위에 닿도록 누른 뒤, 그야말로 발정 난 개처럼 퍽퍽 쑤셔 박았다.

기둥이 드나들 때마다 정인은 앙앙 울며 음수를 뿜었다. 앞이고 뒤고 할 것 없이 전부 엉망이었다. 두꺼운 것이 처박히면 즉시 앞의 구멍으로 묽은 선액이 쏟아져 나오고, 빠져나가면 뒤의 구멍에서 미끄러운 것들이 질질 흘러 시트를 적셨다.

“아, 형….”

호진이 정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인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빨래판처럼 갈라진 복근 아래 정인의 페니스가 마구 뭉개졌다.

“호진아…. 흐응.”

“네, 형.”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파괴적인 욕심에 몸서리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풀어낸 페로몬이 얽히고설키며,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 이상의 것들을 불러오고 있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든 말든 그저 이대로 영영 굳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머지않아 절정이 찾아왔다. 이미 내보낼 수 있는 것을 전부 내보낸 정인의 페니스는 그저 바들바들 떨기만 했고, 대신 호진의 것을 머금은 구멍이 왈칵 하고 페로몬 덩어리를 흘렸다.

오메가의 축축하고 미끄러운 살 속에 전부를 묻은 채 기다리던 호진은 그 경련이 잦아든 후에야 사정했다. 손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정인의 몸은 알파의 체액을 한 방울이라도 더 받아먹겠다고 끝까지 안에 박힌 것을 쥐어짰다.

당장 노팅이 걸려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호진은 마지막 순간, 정인과 자신에게 남은 일정이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떠올려 냈다.

“윽….”

정신력으로 노팅을 참아 낸 호진은 기나긴 사정을 전부 끝낸 후에야 정인의 안에서 빠져나왔다. 사용한 콘돔을 묶어 처리하고는 돌아와 정인의 몸에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 가슴과 허리, 손과 발, 손가락의 마디와 손톱까지.

그렇게 마침내 모든 것이 가라앉을 무렵, 두 사람은 큭큭 웃으며 코끝을 마주 댔다.

“씻을까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호진은 녹은 찹쌀떡처럼 늘어진 정인의 몸을 추슬러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새하얀 피부 여기저기를 뒤집어 혹시라도 상처 난 곳이 없는지를 살폈다. 정신 줄 놓고 섹스를 하다 보면 이따금 부지불식간에 다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깨끗하네요.”

다행히도 오늘의 정인은 잔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그게 또 너무 기뻐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러자 정인은 웃는 얼굴이 예쁘다며 또 한 번 호진의 볼에 뽀뽀했다. 늘 그러하듯,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사랑이었다.

***

“아, 맞다. 이거 또 실시간 1위 했더라?”

빼 두었던 목걸이와 반지를 다시 나눠 착용하고, 룸서비스를 시켰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몸을 맞댄 채 뒤늦게야 일상을 공유했다.

“…죄송해요.”

자신의 직업 때문에 괜히 정인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얼른 사과하자 정인은 픽 웃었다.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닌데. 어쨌든 요샌 연예인들한테 연락 안 오지?”

“네.”

그의 말마따나 스캔들이 터진 후로는 개인적으로 연락해 오는 사람들의 수가 확실히 줄었다.

물론 정인과 사귀기 전에도 누군가와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을 통해 끊임없이 들어오는 연락을 일일이 거절하는 건 은근히 품이 드는 일이라,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알려진 뒤로는 적어도 그런 쪽으로 신경 쓸 일이 없어 좋았다.

“어렸을 때도 그렇게 연락 많이 왔어?”

정인이 물었다.

“고등학생 때 아시안 게임에서 이름 알리면서부터 조금씩 왔던 것 같아요.”

“그땐 그래도 좀 신기했을 텐데, 만나 본 사람은 없고?”

“전혀요. 아예 대꾸도 안 했는걸요.”

호진은 피식 웃었다.

“저 그렇게 착한 애 아니었어요. 머릿속이 온통 메달 생각으로만 가득해서….”

올림픽에서 메달 한 번을 따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고 믿던 시절이다. 그땐 전 소속사의 방침이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았다.

몸을, 마음을,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는 게 옳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사건과 사람에 신경 쓰지 않고, 시간과 계절을 잊고, 시야를 가려 놓은 말처럼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정인이 고삐를 잡아 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었겠지. 어쩌면 달리는 속도를 버티다 못해 진작에 고꾸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형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에요.”

그 말에 정인은 꼬물꼬물 호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더한, 유호진의 모든 지난 시간을 빠짐없이 감싸 주는 위로였다.

호진은 그의 머리카락에 소중히 입 맞추며 웃었다.

“형은 낮에 뭐 하셨어요?”

“아침에 잠깐 헬스장 갔다가, 수업 듣고…. 아, 학교 근처에 무슨 순대볶음집이 생겼는데 거기가 그렇게 맛있대.”

“누가요?”

“준이.”

정인이 심리학과 교양 과목을 들으며 친해졌다는 동기의 이름이었다.

“그 친구랑 요즘 자주 만나시네요.”

“수업 끝나고 잠깐 마주친 건데…. 뭐야, 질투해?”

“네. 질투해요.”

스물한 살 유호진이라면 끝끝내 숨겼을 감정이었다. 하지만 스물둘 유호진은 마음에 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저도 형이랑 같이 학교 다니고 싶은데….”

솔직히 질투보다는 부러움이 더 컸다. 정인과 함께 학교를 다니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한 해 앞두고 잔뜩 예정되어 있는 국제 대회에 참가하려면, 이번 시즌은 무슨 수를 써도 수업 일수를 맞출 수가 없다. 결국 한 학기는 휴학을 해야 했다.

호진에게는 참으로 속상한 일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나란히 발 맞춰 캠퍼스를 걷고, 해가 저물면 도서관 자판기에서 두 잔의 커피를 뽑아 마시고. 시시한 농담에 웃으며 계절이 지나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는 것. 그 모든 것을 반년이나 놓쳐야 하니까.

언젠가 정인에게 정식으로 청혼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도, 훈련장에 처박혀 있다 문득문득 정인이 생각날 때면 미안해질 때가 많았다.

이 좋은 날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하는 건 저뿐만이 아닐 것 같아서. 볕이 예쁜 오후에는 정인도 문득 걸음을 멈추고 저를 생각할 것 같아서.

“뭐 그런 얼굴을 해, 누가 보면 한 백 년쯤 떨어져 지내야 하는 줄 알겠어.”

“하루가 백 년 같아요, 정말….”

정인은 울상이 되어 버린 호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물조물했다.

“큰일이네.”

“그쵸, 큰일이죠. 저 이러다 속상해서 죽으면 어떡해요?”

호진은 일부러 정인에게 온몸을 기대며 칭얼거렸다. 터무니없는 어리광에 정인은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그럼 산재 처리 해야지.”

“이런 것도 산재 돼요?”

“안 돼도 되게 만들 수 있어.”

그 예쁜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금세 마음이 풀려서, 호진도 결국 따라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럼 오늘 저녁은 그 맛있다는 집에서 먹을까요? 형 순대볶음 좋아해요?”

“먹어 본 적 없어. 무슨 맛인데?”

“뭐라고 해야 하나…. 맵고 달고 짜요.”

호진은 핸드폰으로 순대볶음 사진을 찾아 정인에게 보여 주었다.

“오, 맛있게 생겼네.”

“음….”

학창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서인지 정인은 은근히 이런 향토적인 음식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역시나 사진을 보자마자 맛있겠다며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니 열정이 솟구쳤다. 호진은 얼른 황금 순대볶음 레시피를 떠올려 냈다.

“그냥 집에서 만들어 볼게요.”

“할 줄 알아?”

“네, 금방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순대만큼은 꼭 여기서 시켜야 해서….”

곧장 인터넷에 접속했다. 순대만 전문적으로 파는 사이트에서 막 주문 버튼을 누르려는데, 문득 화면 구석에 적힌 배송 예정일이 눈에 들어왔다.

3월 19일, 토요일.

“아참, 형. 저 이번 주말에 페로몬 재조정 시술 받기로 했는데.”

“그럼 다음에 먹지 뭐. 그런데 그거 6월에나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호진은 머쓱하게 웃었다.

“어른들께서 신경을 좀 써 주신 것 같아요. 외국에 계신 교수님 모실 수 있게 됐대요.”

“흐음, 그래? 작은 아빠 아니면 삼촌이겠네.”

정인은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별안간 제 핸드폰을 꺼내 원경과 현욱에게 똑같은 문자 메시지를 하나씩 보냈다. 별다른 내용은 없고 빨간 하트만 창 한가득 찍혀 있었다.

“위험하거나 아픈 건 아니지?”

“전혀요.”

묻는 말에 호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면 그냥 끝나요. 이번에는 2년 치 페로몬을 한 번에 건드리는 거라 부작용이 좀 있을 거라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잠깐. 부작용이라니?”

“마취 덜 깬 것처럼 며칠 멍하거나…. 운이 정말 나쁘면 잠깐 기억이 없어질 수도 있고요.”

“뭐?!”

그 말에 정인이 용수철 튀어오르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기억이 없어진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 별거 아니에요. 아무리 길어도 한두 달 안에는 회복된대요.”

호진은 얼른 그를 붙들어 앉혔다.

“아니, 그게 무슨 태평한 소리야. 만에 하나라도 안 돌아오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음…. 글쎄요?”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사례는 여태껏 간접적으로라도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럴 위험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호진은 어렴풋이 만일의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최정인이라는 사람을 모르고 살던 시절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 머물게 된다면….

“…….”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새까맣게 흐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정인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 않았다. 호진은 괜히 장난처럼 웃으며 정인의 볼을 감싸 쥐었다.

“부작용이 영구적으로 남는 경우는 잘 없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네 일이 되면 어떡해? 사람 뇌라는 게 생각보다 예민하고 연약하단 말이야. 나 안 그래도 오늘 뇌 다친 사람 얘기 잔뜩 듣고 왔는데…. 아, 씨.”

“정말로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에요.”

정인은 여전히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진은 그런 정인을 품에 꼭 안고 도닥였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불안해하지 않을까, 한참을 고민하는데 문득 테이블 위에 비치된 메모지로 눈길이 갔다.

“음, 그래도 정 불안하시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새하얀 종이 위에 정인의 이름부터 적어 넣었다.

***

기억이라는 건 뭘까.

냄새도 형상도 없는 주제에 한 사람을 무너지게도 만들 수 있고,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는 녀석이다.

정인은 한창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무렵의 스스로를 떠올렸다. 정신을 차렸다 하면 며칠이 지나 있고, 몸은 그대로인데 스스로의 존재는 나날이 희미해지던.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을 정말 최정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왔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확언할 수가 없다.

어쩌면 기억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대단한 감정일지라도 기억이 사라지면 모두 없던 일이 되고 마는 건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혹시라도 호진이 잘못될까 봐 다시 불안해졌다. 정인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수첩 한 권을 꺼냈다.

최정인, 스물세 살.

표지를 들추자마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정인의 이름이었다. 스카치테이프로 고정해 놓은 메모지 구석에 익숙한 모양의 호텔 로고가 찍혀 있었다.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재학 중, 올해 2학기 마치고 심리학과로 전과 예정.

자취방은 TH관 뒤편 한미르길 33-1 3층, 본가는 청담동.

월 21일에 태어나 아버님 두 분께 듬뿍 사랑받으며 자란 최씨 가문 외동아들. (참고 사항 : 유정인이 될 수도 있었는데, 아버님들께서 당시 무작위로 뽑아서 나온 게 최씨라 최정인이 된 거라고 함 ㅎㅎ)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그리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호진 애인♡♡♡

손바닥만 한 종이는 온통 정인에 대한 정보로 가득했다. 무엇을 얼마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쯤 일어나서 언제쯤 잠드는지, 심지어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까지 적혀 있었다. 불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정인을 달래기 위해 호진이 손수 적어 넣은 것들이었다.

혹시라도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정인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땐 이걸 보여 주라고, 그럼 분명 금세 떠올려 낼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수술방에 들어가기 직전, 정인에게 작은 수첩 한 권을 건넸다.

“이런 걸로…. 되겠냐고.”

다행히도 안전한 시술이라던 호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는 의사란 의사는 전부 붙들고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부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이 아니란다, 정인아’였고, 혹시 몰라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찾아봤지만 한 해에 수십만 건씩 집도되는 페로몬 조정술로 영구적인 뇌 손상을 입는 경우는 극단적으로 드물었다.

그래도 좀처럼 마음을 놓기가 힘들었다. 아예 모르는 것보다 어설프게 아는 게 더 위험하다고, 사람 뇌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조져질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게 일상인지라 자꾸만 최악의 사례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다못해 이제는 전혀 연관 없는 사고까지 전부 끌어 와 호진의 수술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미치겠네, 진짜.”

호진과 정인이 만남을 이어 온 지는 기껏해야 1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최근의 기억부터 날아가기 시작하는 기억 장애의 특성상, 만에 하나라도 뭔가가 잘못된다면 최정인은 무조건 유호진의 인생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게 너무 두려웠다.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인 것처럼 깔끔하게 모두 잊는 기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한 시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 불안의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데도 도저히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하.”

정인은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수첩을 한 장씩 넘겼다. 내용은 정인이 이번 학기에 수강 중인 과목명을 정리한 페이지에서 끝났다. 이제 더는 정인을 위로할 문장이 없었다.

수첩을 잘 갈무리해 가방에 넣고 한참 동안 복도를 서성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수술방의 불이 툭 꺼졌다. 정인은 그제야 번쩍 고개를 들었다. 머지않아 문이 열리고 호진이 침대에 실려 나왔다.

“호진아….”

아직 온전히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양인지, 그는 정인의 부름에 대답도 않고 의료진 한 명 한 명에게 감사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병실로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침대에 눕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어요.”

한국어를 모르는 체코인 의사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환자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통역사는 웃음을 꾹 참으며 호진의 말을 전달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반쯤 풀린 눈으로 끝까지 웅얼거리는 통에 또 한 번 웃음소리가 병실을 굴렀다. 오직 정인만이 수심 어린 표정이었다. 그를 알아본 간호사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무사히 끝났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금방 정신 들 거예요. 두 시간쯤 후에 선생님께서 한 번 더 오실 텐데, 그사이에 무슨 일 있으면 호출해 주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정인은 의료진이 모두 물러난 후에야 호진을 향해 다가섰다.

“…….”

병원에 누워 정신을 차리는 역할은 주로 정인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이토록 무방비하고 연약한 호진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호진아, 몸 좀 괜찮아? 정신이 들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정인을 쳐다보았다. 뭔가를 떠올리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마침내 떨어진 인사에 정인의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막상 호진이 저를 단박에 알아보지 못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저 지금…. 뭐 해야 되는 것 같은데. 아니, 하려고 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요. 뭐였을까요.”

“…….”

“…뭐였을까.”

호진은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햇살이 뿌옇게 번지는 하늘을 잠깐 쳐다보나 싶더니, 그마저도 피곤한지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곧 잠에 빠져들었고, 정인은 그의 목 위로 이불을 덮어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빌고 또 비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문가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호진아.”

조심스레 병실로 들어서는 사람은 호진의 아버지, 태산이었다. 놀란 정인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아이고, 정인이가 와 있었구나?”

그는 한달음에 다가와 정인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호진이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조정은 잘 됐다고 하고…. 부작용은 깨어나 봐야 알 것 같아요.”

“여태까지 별일 없었으니 이번에도 잘 넘어갈 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마음이 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인지, 그는 걱정 어린 눈을 하고 호진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정인은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늘 어른스럽기만 하던 호진도 아버지의 손길 아래 잠들어 있는 얼굴만큼은 영락없는 아기였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정인이 복숭아 잘 먹지? 그러잖아도 정인이 먹이려고 좀 챙겨 왔는데.”

한참 동안 그렇게 호진을 바라보던 태산이 문득 커다란 가방을 뒤져 복숭아와 과도를 꺼내 들었다. 이리 와서 앉으라며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험실에서 키운 놈이긴 한데, 새로 배합한 액비를 줬더니 당도가 금방 올라오더라고. 눈 감고 먹으면 여름에 농장에서 딴 거랑 구분하기 어려울 거야.”

정인이 얌전히 곁에 앉자 그는 말랑한 복숭아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휙휙 대충 돌려 깎는 것 같은데도 껍질이 한 번을 끊어지지 않았다.

“…호진이도 과일 되게 잘 깎는데, 아버님 닮았나 봐요.”

“그렇지? 어릴 적부터 뭐든 손으로 하는 건 곧잘 했어.”

정인은 그의 곁에서 복숭아를 한 조각씩 집어먹었다.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는 것이, 태산의 말마따나 웬만한 제철 복숭아 뺨치게 맛있었다. 단것이 입에 들어가니 가라앉아 있던 기분도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버님, 호진이는 어렸을 때 어떤 아이였어요?”

복숭아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지금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어. 고대로 컸지.”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뒤로 이어지는 평가는 정인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툭하면 똥고집 부리고, 아비 맘도 몰라주고…. 독불장군도 그런 독불장군이 없어, 아주.”

“네?”

태산은 땅이 꺼져라 한숨지으며 정인에게 복숭아 하나를 더 찍어 내밀었다. 그러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프고 힘든 티를 잘 안 내는 녀석이었거든.”

절대 숨길 수 없는 크기의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선수 생활을 하기 훨씬 전부터 쭉 그랬어. 늘 아무렇지 않은 척, 모든 게 잘 되어 가고 있는 척…. 상대를 사랑하면 할수록 더더욱 숨기고 싶어 해서, 아주 어렸을 땐 넘어져 까진 자리를 숨기다 덧난 적도 왕왕 있었지.”

“…….”

“그러다 서울로 올라가 살면서부터는 아프단 소리를 아주 입에 담지도 않더라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인은 며칠 전 인터넷에서 본 게시물을 떠올렸다. 앳된 호진의 모습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 부모 속 타들어가는 건 모르고, 어린 것이 담담한 척하는 걸 볼 때마다 그게 어찌나 야속하던지.”

한편으로는 어린 최정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를 상처 입히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던.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그게 틀렸다는 걸 정인에게 알려 준 사람이 다름 아닌 호진이었다.

그러니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그 말을 전하려 막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인이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러지를 않네.”

태산이 문득 말했다.

“어떤 날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서 오늘은 어디가 아팠다느니, 어딜 다쳤다느니 엄살을 피우고. 또 어떤 날은 배가 고프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감기에 걸렸다고 죽는소리를 하기도 하고….”

“…….”

“그게 너무 반갑더라고. 우리 호진이도 드디어 누군가에게 기대고 사는 법을 배워 가는구나 싶어서.”

호진과 똑 닮은 눈동자가 미소에 가늘어졌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호진이 걱정을 많이 덜게 됐지. 그렇게 가뿐히 살도록 도와준 사람이 정인이라는 것도 알아.”

그리고 태산은 환히 웃으며 덧붙였다.

“항상 네게 많이 고맙다, 정인아.”

“…….”

“호진이도 틀림없이 그럴 거야.”

그야말로 정인이 호진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벼웠다. 호진은 따갑게 내리쬐는 불빛을 따라 눈을 떴다.

“정신이 드세요?”

가물가물한 시야 속,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웬 외국인 의사였다. 호진의 눈가에 비추고 있던 플래시를 거둔 그는 곧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물었다. 통역사로 보이는 한국인이 곁에서 그의 말을 옮겨 주었다.

“이름과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유호진입니다. 나이는….”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호진은 기억을 더듬어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시안 게임에서 메달을 땄고, 스폰서 기업 두 군데와 새로 계약을 했고, 최근 갑자기 훈련 매뉴얼이 바뀌는 바람에 아쉽게도 다음 주 수학여행에는 가지 못하게 됐다.

“열여덟 살이요.”

“음…. 잠시만요.”

의사와의 짧은 대화 끝에, 통역사가 말했다.

“하나씩 설명드릴게요. 우선 지금 유호진 선수 나이는 스물둘이에요.”

“네?”

그야말로 듣던 중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호진이 어리둥절해 있자 통역사는 조금 더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조금 전에 페로몬 재조정 시술을 받았거든요. 2년 치 페로몬을 한 번에 조정한 부작용으로 당장은 머리가 멍하거나 기억이 흐릴 수도 있다고 하시네요. 몸 상태가 워낙 좋아서 금세 회복될 겁니다. 물론 페로몬 세팅은 완벽하게 끝났고요.”

“…네, 알겠습니다.”

가끔 이런 부작용이 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호진은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어찌 됐건 시술을 받았다면 지금쯤은 시즌 초입일 테니, 회복 기간 동안에는 컨디션을 끌어 올리는 데에나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의료진은 한 번 더 바이털을 체크한 뒤 병실을 빠져나갔고, 호진은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더 커진 듯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팔다리를 한 번 크게 휘둘러 보기도 했다.

“…와.”

힘과 유연성이 말도 안 되게 향상되어 있었다. 내친 김에 그대로 바닥에 손바닥을 붙이고 푸시업도 몇 번 해 보았다. 일부러 자극이 강하게 오도록 자세를 바꿔 봤지만,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 것을 보니 근지구력도 상당히 좋아진 듯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하니 온몸이 업그레이드 된 상황이었다.

“호진아, 정신 들었다며.”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태산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호진은 제 아버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아빠.”

“몸 괜찮고?”

“응, 그런데….”

태산의 등 뒤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로 흘끔 눈길이 갔다. 그곳에는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얼굴을 한 미인이 서 있었다. 호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헉.”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도 있는 건가.

조금 비현실적이다 싶을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너무 예쁘다 못해 가슴까지 다 저렸다. 이런 사람을 우연히라도 마주친 적이 있다면 분명 기억이 날 텐데, 아쉽게도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정인이 기억 안 나?”

“정인….”

이름까지 이렇게 예쁠 일인가. 저런 이름을 붙이고 불렀을 그의 부모님이 어떤 분들인지마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럴 게 아니라, 먹을 것 사 올 테니까 둘이 잠깐 얘기 좀 하고 있어. 배고프겠다.”

“아, 아빠. 잠깐만.”

이런 어마어마한 미인과 둘이 남겨진 다음에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당황한 호진이 손을 뻗어 봤지만, 태산은 이미 문 밖을 나선 뒤였다.

“…….”

호진은 결국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미인이 작게 한숨지었다.

예상대로 호진은 정인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길어야 한두 달 안에 회복된다는 말은 정말일까, 정인은 불안한 마음으로 호진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응.”

사람은 똑같고 기억만 뚝 잘려 나간 것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모습은 정인이 알고 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인이 다가서자마자 황급히 의자를 빼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부터가 그랬다.

“고마워.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정인의 존재가 어지간히도 어색한 모양이었다. 호진은 멀뚱멀뚱 서서 정인을 흘끔대더니, 별안간 제가 누웠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불의 끄트머리를 잡고 반듯하게 각을 맞추는 것마저도 그가 아침마다 반복하는 행동과 똑같았다.

“갑자기 그건 정리해서 뭐 하게?”

“다시 눕진 않을 것 같아서요.”

다만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에 비하면 확실히 어딘가 조금 날카롭고 예민한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근데 너 지금 몇 살이야?”

“…고2입니다.”

“세상에, 거기까지 돌아갔다고?”

몸은 스물두 살인데 정신은 미성년자라니. 정인은 입을 떡 벌렸다.

“4년 지난 건 알지?”

“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담담한 태도에 놀란 정인이 물었다.

“근데 뭐가 그렇게 자연스러워?”

“제가 뭘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웃었다.

“조금 더 지나면 어차피 기억도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진 제가 아는 방식으로 살아야겠죠.”

호진이 눈을 떠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면 세상이 무너진 듯 슬플 줄 알았는데, 이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저 멘탈이 너무나도 유호진 그 자체인지라 지금은 걱정보다도 신기함이 조금 더 크게 다가왔다.

“…그래. 그러자.”

한 달, 길어야 두 달. 그만큼만 버티면 된다.

내색하진 않지만 호진 자신이 가장 혼란스러울 테니, 지금은 든든하게 그의 곁을 지켜줘야 한다. 정인은 계속해서 치미는 불안을 밀어내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일단 고2 유호진이 어떤 애였는지 좀 볼게.”

어쨌든 이맘때의 호진과 정신 연령을 좀 맞춰 줘야 할 것 같았다. 핸드폰을 꺼내 지난번에 본 ‘실시간 1위 게시물’을 또 한 번 찾아냈다.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청소년 유호진의 얼굴 아래로는,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래…. 이때부터 연예인들이 건드렸단 말이지?”

“네?”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며.”

아예 테이블에 턱을 괸 채로 호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시선을 피해 살짝 고개를 내렸다. 아직은 정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쪽으로 신경 쓸 여유는 없는데요.”

“음. 그래?”

정인은 피식 웃으며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그는 임금님과 마주친 선비처럼 바짝 얼어 버렸다. 어찌나 긴장을 하는지, 무릎 위로 가지런히 늘어트린 손등에 핏줄이 돋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정인 씨는 저를 어떻게 아세요?”

“하하하.”

태산이 딱 한 번을 물었을 뿐인데 그새 정인의 이름을 기억한 듯했다. 수업 시간에 출석 부르는 걸 듣고 정인의 이름을 외웠다던 작년의 유호진처럼 말이다.

“나 네 애인이야.”

“네에?!”

정인의 대답에 호진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였다.

“만난 지는 1년쯤 됐고, 다음 올림픽에서 메달 따면 약혼도 할 거야. 사실 그런 거 없어도 어차피 하긴 할 건데….”

“야, 약혼이요? 정말요?”

하나하나 새삼스럽게도 놀라 주는 모습이 귀여웠다. 정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갑작스럽나?”

“아,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요. 음.”

“못 믿겠으면 그 옆에 서랍 열어 봐. 커플링 들어 있을 거야.”

호진은 부리나케 서랍을 열었다. 반지 하나와 목걸이 하나를 발견하더니 댕글댕글 눈을 굴렸다.

뭔가 말할 듯 말 듯, 한참을 끙끙대며 고민하기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조금 더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호진이 별안간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먼저 좋아했죠?”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질문이었다.

“더 먼저 좋아하고, 더 많이 좋아했을 것 같은데.”

바들바들 떨던 주먹이 풀렸다. 그는 커다란 손을 펼쳐 정인의 손등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차마 편하게 손을 잡지는 못하고 손끝으로만 살살 쓸어내리며, 호진이 조심스레 정인과 눈을 맞췄다.

“그런데…. 기억을 못 해서 속상하실까 봐요, 죄송해요.”

그러고는 미안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

청소년 유호진을 골려 먹는 재미에 킬킬대던 정인은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확 솟구칠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호진이 살짝 허리를 숙여 정인과 눈높이를 맞췄다.

“빨리 기억하고 싶은데. 어떤 분이신지 조금만 더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

열여덟 유호진은 생각보다 맹랑했다.

지금은 그런 쪽으로 신경 쓸 여유가 없다던 말은 도대체 뭐였는지, 막상 정인이 자신의 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정인에게 모든 것을 올인했다. 어디선가 크림 파스타를 포장해 온 태산이 밥을 먹자며 부르는데도, 정인과 산책을 나가야겠다며 굳이 굳이 그를 등지고 병실을 나선 것이다.

태산은 그럼 다녀오라 허허 웃으며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고, 상당한 클래스의 불효에 경악한 정인은 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불효자를 대신해 그에게 사죄해야 했다.

“와….”

나뭇잎 그림자가 살랑이는 자리였다. 정인은 문득 걸음을 멈춰 스물둘 유호진의 글자들이 담긴 수첩을 건넸고, 열여덟 유호진은 그것을 한 장씩 들춰 보며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저 한국대학교 들어갔어요?”

“그냥 들어간 게 아니라 전액 장학금 받고 들어갔지. 여기 말고도 모셔 가겠다는 학교나 실업팀 엄청 많았던 걸로 아는데, 어머니께서 권하셔서 이쪽으로 입학했을걸?”

“…저를 왜 모셔 가요?”

묻는 말에 정인은 픽 웃었다.

“너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땄거든.”

“…….”

“빅토르 크랄렌스키도 이겼고, 니콜라스 어거스타도 이겼어.”

금메달뿐이겠는가. 부상을 입기 전까진 출전한 모든 경기에서 늘 포디움에 들었다. 제대로 된 수영장 하나 지원받지 못해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도 기죽지 않고, 단 한 번을 흔들리지 않고.

“그렇게 대단해, 스물둘 유호진이.”

정인의 말에 호진은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한 미소를 지었다.

“…4년 뒤에는 그렇게 되는구나.”

그 목소리를 들으며 정인은 고등학생 유호진이 지나왔을 시간을 상상했다. 누구에게도 아프다 말하지 않던 시절이었으나 실은 매 순간 한계에 부딪쳐 가고 있던. 한 번의 메달을 따고 나면 전부 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쉴 틈 없이 달리기만 했던.

“그래. 4년만 지나면 전부 괜찮아져.”

마음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안아 주지 않을 수가 없다. 정인은 길게 팔을 둘러 그의 등을 꼭 안아 주었다.

“저는 괜찮은 어른이 됐나 보네요. 좋은 선수가 되고, 이렇게 멋있는 애인도 생기고.”

머리 위에서 호진이 낮게 웃었다.

“내가 멋있어?”

“네. 여기 쓰여 있잖아요.”

호진은 수첩을 펼쳐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문장을 짚었다.

“이제 그만 봐. 여기까지 봐서도 생각 안 나면 그냥 안 나는 거야.”

그걸 보고 있으니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서, 정인은 얼른 수첩을 덮고 호진의 손을 잡았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슬쩍 깍지를 껴 보려고도 했지만,

“잠깐만요. 손 이렇게 잡으면 안 되는데.”

호진은 귀신같이 손을 고쳐 잡았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정인은 그와 나란히 발을 맞췄다.

한여름을 향해 착실히 자라나는 초목의 냄새도, 황금빛으로 가라앉는 늦은 오후의 햇살도 좋았다. 시즌이 가까워지며 이제는 호진이 주말에도 훈련을 하기 때문에 이 시간대에 둘이 함께 걷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특별한 말이 필요한 사이가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해도 그 침묵 그대로 충분했다. 그렇게 이따금 눈을 맞추며 같은 방향을 향해 걷다 보니 어느샌가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만 올라가자.”

아무 생각 없이 호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호진이 갑자기 힘을 주고 버텼다.

“저…. 조금 밖에 있을 순 없을까요?”

“좀 있으면 해 질걸? 옷이 그래서 좀 추울지도 몰라.”

그는 얇은 환자복 차림이었다. 낮에는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도 간혹 있지만 본격적인 여름은 아직이라 저녁에 저 차림으로 돌아다니긴 힘들 것 같았다.

“오늘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 같아서요. 아까 마취 깨면서도 그 생각 했거든요, 정확히 뭔진 기억 안 나지만.”

그런 게 있었던가. 잠시 생각하던 정인은 얼마 전 호진이 순대볶음을 해 주기로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냈다.

“아, 순대볶음 말하는 건가?”

“순대볶음… 이요?”

“원래 주말에 해 준다고 했었는데, 시술 때문에 평일로 미뤘거든. 별거 아닌데 그게 그렇게 생각이 났어?”

호진은 여전히 아리송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닌 것 같은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재료 같은 건 어디 있어요?”

“그야 집에 있지.”

“누구 집이요?”

“너랑 나랑 같이…. 음, 원칙적으로는 같이 살면 안 되는데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는 집 있어.”

정인은 혹시라도 누군가 듣지는 않는지 주위를 살폈다. 재수 없게 정훈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정말 자취방 건물을 통째로 밀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가서 만들까요?”

“너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가서 그 중노동을 하겠다고?”

호진은 아랑곳 않고 정인의 손을 잡았다.

“중노동 아니에요. 그리고 원래 페로몬 재조정술 하고 나면 30분 누워 있다가 집에 가라고 해요. 이렇게 입원한 적 한 번도 없었어요.”

무정차 역을 지나는 KTX 같은 패기였다. 정인이 허허 웃어 버리자 그는 아예 껌딱지처럼 팔짱을 끼기까지 했다.

“…형이랑 둘이 조금 더 놀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 그러자.”

안 그래도 예쁜 애인이 애교까지 부리는데 녹아내리지 않을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정인은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그를 이끌며 가볍게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조금만 쉬다 오는 걸로 하자.”

***

탁탁 칼질하는 소리,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

“형, 저 공책 하나만 빌려 주시면 안 돼요?”

“왜?”

“자꾸 깜빡깜빡해서요. 언제 뭐 넣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불은 언제 켰는지도 모르겠고.”

“그럼 그만해도 돼.”

시키는 대로 얌전히 식탁에 앉아 그를 구경하던 정인은 얼른 다가가 호진의 등을 끌어안았다.

“힘들면 하지 마, 어차피 오늘 아니어도 매일 뭐 만들어 먹으니까.”

“한번 시작한 건 끝내야죠. 심지어 형이랑 약속도 했다면서요.”

호진의 눈이 이채를 띠며 번쩍였다.

“형. 저는 여태까지 저와의 약속을 한 번도….”

“알았어, 알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슬슬 미친 꽃사슴 눈빛이 나오려는 것을 확인한 정인은 한숨을 쉬며 새 노트 한 권과 펜을 가져다주었다. 일단 한번 저런 눈이 된 다음에는 최정인 열 명이 덤벼도 유 씨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호진은 바로 노트를 펼쳤다. 그런데 방향이 이상했다. 그는 어째서인지 노트를 반대로 뒤집어 맨 뒷장에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왜 뒷면부터 써?”

“아…. 원래 중요한 건 앞에, 덜 중요한 메모 같은 건 뒤에 쓰거든요.”

“그래?”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다. 정인은 흥미로운 눈길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호진은 자신이 손질한 재료의 이름과 가스렌지에 물을 얹은 시간 따위를 주르륵 적어 내려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는 메모한 페이지를 쭉 찢어 내더니 표지 쪽을 펼쳐 맨 앞장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톡톡 점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찢은 종이는 부엌에 둔 채, 노트와 펜을 달랑달랑 들고 와 정인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응?”

펼쳐 본 노트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딱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심심하실 것 같아서요. 이 점으로 모양 만들고 계세요ㅎ_ㅎㅋㅋ

페이지 한가득 콕콕 박힌 까만 점이 마치 별 같았다. 정인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뭐야, 진짜.”

세상에 귀여워도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열여덟 유호진을 알지 못하고 지나온 삶이 헛되이 느껴질 만큼 귀여웠다. 호진은 귀가 새빨개진 채로 멀리서 정인을 흘끔거렸고, 정인은 성심성의껏 점과 점 사이를 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별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집 비슷한 걸 그리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점이 바닥났다.

“음….”

정말로 심심해진 정인은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식탁 구석에 놓인 수첩을 발견했다. ‘최정인 스물세 살’로 시작되는 메모를 하나하나 읽어 내리다가, 별생각 없이 맨 뒷장도 한번 펼쳐 보았다.

“…어?”

그런데 하얗게 빈 페이지 한 장 뒤로 거뭇거뭇하게 글씨가 비쳤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황급히 그 페이지를 뒤집어 보았다. 앞쪽에 쓰인 것과는 조금 다른 류의 글이 보였다.

유호진에게.

이번에는 정인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다.

안녕, 나는 스물두 살 유호진이야. 조정은 잘 받았어?

운이 나쁘면 이번엔 잠깐 기억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메모 남긴다.

아무래도 이건 호진이 스스로에게 쓴 편지인 것 같았다. 맨 뒷장에 숨겨 놓은 것을 보니 정인에게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음 문장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묻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래 보였다.

아마 눈을 뜨자마자 말도 안 되게 예쁜 사람을 봤을 거야. 이 수첩도 그 사람한테 받았을 거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사람이 내 애인 최정인이야. 엄청나지?ㅎㅎ

이번 생은 정말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일단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우리 형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잘 나가다가 갑자기 급발진이라도 한 건지, 그 문장 아래로는 정인에 대한 찬양이 띄어쓰기도 없이 장장 아홉 줄이나 쓰여 있었다. 심지어 어떤 부분은 한 줄에 최대한 많은 내용을 욱여넣기 위해 글자 크기를 개미만 하게 줄여 놓기까지 했다.

“세상에…. 이게 뭐야.”

하다하다 종이로도 주접을 떨 수가 있는 거구나. 온통 저에 대한 칭찬뿐인 글을 읽다 보니 자꾸만 얼굴이 후끈거려서, 정인은 중간중간 손등으로 뺨의 열을 식혀야 했다.

…하여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다행히도 그는 곧 정신을 차린 듯했다. 줄이 바뀌며 그나마 정제된 문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가 먼저 좋아했어.

“…….”

첫눈에 반했고, 그날부터 오늘까지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좋아했어.

그럴 만한 사람이라는 걸 분명 너도 느꼈을 거야.

제가 먼저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더 많이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정인이 자신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토씨 하나 틀림없이 그렇게 묻던 호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 낯설 수도 있겠지만, 호진아.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사람은 곧 너의 모든 것이 될 사람이자 나의 전부야.

손끝으로 글자들을 따라가던 정인은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호진이 어떤 모습으로 이 글을 썼을지를 상상했다.

반듯하게 세운 허리, 차분한 숨소리, 깨끗한 뺨 위로 쏟아지는 스탠드 불빛.

신중히 단어를 골라 가다가 이따금은 미간을 좁히기도 했겠지. 그러다 정인이 방문을 두드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볼 것이다. 백 번을, 천 번을 두드려도 정인에게 인상 한 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정인이 아는 유호진이었다. 매사에 진중하고 성실해서, 사랑의 방식마저도 그러한.

그래서 나는 네가 그 사람에게 아주 많이 다정했으면 좋겠어.

아주 짧은 시간일지라도 부디 소중하게 대해 줘, 부탁할게.

고개를 들어 부엌의 호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함께한 시간을 전부 잊고도 그는 반듯하게 서서 정인을 위한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고는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었다. 조금 전 상상 속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어, 형.”

그때, 이쪽을 보고 있던 호진이 별안간 달려와 정인의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그는 손에 묻은 물기를 티셔츠에 문질러 닦고는 조심조심 정인의 뺨을 훔쳤고, 정인은 그제야 제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러세요?”

우유로 만든 것처럼 뽀얀 얼굴이 참 예뻤다. 정인은 웃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 예뻐서.”

기억이라는 건 뭘까.

냄새도 형상도 없는 주제에 한 사람을 무너지게도 만들 수 있고,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는 녀석이다.

그리하여 어쩌면 기억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전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감정일지라도 기억이 사라지면 모두 없던 일이 될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호진아.”

“네.”

그런데 이제 보니 사람을 이루는 건 기억뿐만이 아닌 것 같다.

“…호진아.”

“네.”

반짝이는 두 눈도, 따뜻하게 닿아오는 손길도, 이유 없는 부름조차 그냥 지나치지 않는 저 다정함마저도 모두 유호진이다.

혹시라도 그의 인생에서 지워져 버릴까 봐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던 스스로의 모습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졌다.

“너는 어떤 사람이야?”

호진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스물둘 유호진 말고, 열여덟 유호진 말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저는…. 그냥 유호진이죠.”

그는 이끄는 손을 따라 정인의 옆에 앉았다. 그저 석상처럼 앉아 있기만 하는 사람의 어깨에 먼저 머리를 기댄 것은 정인이었다.

“뭐 좋아하고, 뭐 싫어하는데.”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문제였다. 유호진은 요리하는 것을, 전통시장을, 고향의 개울가를, 파랑색을, 택배 박스에서 나오는 에어캡을, 주유소의 기름 냄새를, 그리고 최정인을 좋아한다. 그러나 열여덟 유호진은 아직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그를 바라보던 정인은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고민은?”

“어…. 요즘 들어 200미터 기록 자꾸 처지는 거였는데, 몸이 너무 좋아져서 이건 금방 해결될 것 같고요. 그리고….”

호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 뭔가를 생각하다가,

“지금 제일 고민인 건, 왜 형을 기억하지 못할까. 이거인 것 같아요.”

“하하하.”

정인이 소리 내 웃자, 내내 흐릿하던 호진의 얼굴에서 먹구름이 물러났다.

“아, 좋아하는 것도 생각났어요.”

“뭔데?”

솔직히 말하자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형이요.”

“진짜….”

어떻게 된 게 한 번을 비껴 나가는 법이 없다. 정인은 또 한 번 크게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호진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정인이 넘어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허리를 받쳐 주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이었다. 정인은 아무 생각 없이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마침내 입술이 맞닿기 직전,

“아, 이러면 안 되지.”

아직 호진의 정신은 아직 애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왜요?”

“죄짓는 것 같잖아. 너 지금 머리는 청소년 아니야?”

“몸은 어른인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 위로 두른 손에 힘을 줘 정인을 끌어당겼다. 손을 잡는 것조차 어려워 달달 떨던 게 고작 한두 시간 전의 일인데, 그새 익숙해졌는지 동작에 거침이 없었다.

“…저 이런 거 처음이긴 한데.”

“그런데?”

고것이 참으로 맹랑하게 느껴져 일부러 발을 뺐다. 그러나 호진은 이미 불이 붙어 버린 듯했다.

“…키스해도 돼요?”

돌직구가 확 꽂혔다. 이건 또 지금의 호진과 너무 다른 모습이라, 어이가 없어진 정인이 물었다.

“뭐야, 너 이런 애였어?”

“네.”

매사 조금 느리다 싶을 만큼 신중하던 유호진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게 썩 싫지는 않았다. 정인은 호진의 목에 매달렸고,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몸에 밴 습관은 습관인지 호진은 당연하다는 듯 정인의 등을 추슬렀다.

“형, 우리 키스 자주 했어요?”

가닥가닥 곧게 뻗은 속눈썹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리, 한 뼘도 되지 않는 작은 틈을 남겨 둔 채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어 호진이 물었다.

“…뭐, 응.”

키스만 자주 했겠는가. 차마 뭐라 설명하기도 어려울 만큼 난잡하게 뒹구는 게 거의 일상이었다.

“얼마나 자주 했어요?”

“…음.”

횟수를 세는 것도 무의미하다. 어떻게 해도 청소년 레벨에 맞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정인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호진은 그 와중에도 얼마나 궁금한 게 많은지 연신 이것저것 물어 댔다. 첫키스는 언제 어디서 했냐느니, 처음으로 손을 잡아 본 건 언제였냐느니. 슬슬 눈이 돌아가는 게 훤히 보이는데도 섹스 얘기까진 차마 제 입으로 하지 못하는 걸 보면 확실히 애는 애였다.

“처음으로 손 잡은 건 기억이 안 나네. 어쨌든 첫키스는 공주에 있는 개천에서 했어.”

“헉, 개천이요?!”

그는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같이 가려고 고향 내려갈 때도 일부러 빙 돌아 다녔는데, 그걸 기억을 못하다니….”

“그러니까 빨리 기억 찾아.”

정인은 웃으며 그의 뺨에 제 얼굴을 비볐다.

“날씨는 어땠어요?”

호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첫키스에 대해 물었다.

“비 오는 날이었어. 소나기였는데, 잠깐 비 피하려고 근처 원두막에 들어갔다가 그렇게 됐지.”

“누가 먼저 했어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정인은 호진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입술을 달싹이다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먼저.”

그날의 일들이 차근차근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산마루에 걸려 있던 소나기 구름, 한들한들 흔들리던 버드나무 가지.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 아래 그의 손을 잡고 훌쩍이며 걷던 길.

“소나기가 왔으면, 바람도 많이 불었겠네요.”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정인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보였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정인의 뺨을 감싸고,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제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을 것 같아요. 속삭이며, 호진이 정인의 입술 위에 입 맞췄다.

맞닿은 입술이 느리게 비벼졌다. 호진의 등허리로 손을 밀어 넣자 단단한 몸이 일순 긴장했다. 정인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굳어 있던 호진은 금세 적응해 혀를 얽어 왔다. 눌러 참던 호흡이 자연스러워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하….”

그는 어느샌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정인의 귀와 목, 머리카락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정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호진은 그렇지 않은지, 정인을 만지는 손길 곳곳에 미약한 떨림이 여전했다.

“…앉아 봐.”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였다. 호진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의자에 앉았고, 정인은 그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아, 형….”

턱과 귀가 만나는 지점에 입술을 붙이며 티셔츠 속의 피부를 만지니 낮은 신음과 함께 호진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정인은 살금살금 그의 표정을 확인하며 조금 더 깊숙이 손을 움직였다.

닿는 자리마다 뚜렷한 양감이 느껴졌다. 깎아 놓은 듯한 광배근과 복근을 차례로 지나 곧 가슴이었다. 그의 가슴은 다섯 손가락을 전부 펼쳐도 다 잡히지 않을 만큼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긴장할 때면 돌처럼 딱딱하게 굳고, 그러다 잠시 힘이 풀리면 말캉하게 손바닥 안에 감긴다. 그게 은근히 기분이 좋아 한참을 만지작대는데 문득 엉덩이에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정인은 그대로 손을 내려 그것을 확인했다. 이미 스웨트 팬츠를 찢어 버릴 듯한 기세로 발기한 것이 만져졌다.

왠지 장난기가 동해 엉덩이로 그의 페니스를 꾹 눌렀다. 그러잖아도 잔뜩 커져 있던 것이 조금 더 부풀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정인은 저도 모르게 호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호진은 정인의 허리를 안는가 싶더니 그대로 허리를 쳐 올렸다. 옷 사이를 뚫고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누르기도 하고, 미끄러지듯 스치며 앞뒤로 움직이기도 했다.

“아, 으응….”

두 사람은 빠르게 열기에 잠식되어 갔다. 아래를 비비며 엉망으로 혀를 섞고, 서로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만지고. 그러다 문득 눈이 맞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팔다리가 엉켰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둘 다 속옷만을 겨우 걸치고 있었다. 그마저도 정인의 것은 이미 애액에 흠뻑 젖었은 채였다. 팬티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만지던 호진의 손끝도 마찬가지로 금세 축축해졌다.

“…젖었어요.”

호진의 혀가 정인의 귓바퀴를 핥았다. 정인은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몸이 휙 들리나 싶더니 두 발이 공중에 떴다.

어린애 들듯 가볍게 정인을 안은 호진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정인을 침대 위에 눕혔다.

“가만히 있어 봐.”

정인은 본능대로 몸 위에 올라타려는 알파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속옷을 벗겼다. 어린애 팔뚝보다 굵은 것을 두 손으로 살살 만지며 귀두 끝을 핥았다. 길이도 길이지만 두께가 너무 두꺼워서 입 안에 넣는 게 조금 벅찼다.

“윽….”

페로몬을 풀어내려던 호진이 일순 호흡을 멈췄다. 몸이 약한 정인을 배려해 언제나 아주 옅은 농도에서 천천히 올려 가던 게 습관으로 굳어 버린 듯했다.

“괜찮아, 그냥 풀어도 돼.”

많이 긴장한 것 같으니 어쩌면 이쪽에서 먼저 페로몬을 풀어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정인은 낯선 감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손끝에 따끔한 바늘 하나가 들어오는 듯한 느낌에서 멈추려는데,

“허억….”

속에서 뭔가가 툭 걸리나 싶더니 뒤가 열리며 애액이 왈칵 쏟아졌다. 제가 뭘 했는지도 모른 채, 정인은 덜덜 떨며 호진의 위에 쓰러졌다. 시트를 쥐고 있던 호진이 황급히 손을 들어 정인을 끌어안았다.

지나치게 익숙한 향이었다. 호진은 품 안에서 달달 떨고 있는 정인의 목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 순간, 먹먹하게 흐려져 있던 머릿속이 확 개었다.

“아….”

마치 조각난 필름을 순차적으로 끼워 맞추는 듯한 감각이었다. 열여덟에 멈춰 있던 시간 위로 숱한 장면들이 덧씌워지고, 호진은 마침내 어느 봄날을 떠올려 냈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아래, 성큼 다가오는 사람에게서 꼭 이런 향을 맡았다. 여름 끝물의 꽃향기 같기도, 지금 막 반으로 가른 과일 향기 같기도 한.

“호진아, 아…. 윽.”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가운데, 정인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꽂혔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호진은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형….”

어떻게 이 사람을 잊을 수가 있을까. 혼자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많이 불안해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정인을 품에 안고 이마에 쪽쪽 입 맞췄다. 불과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마치 까마득한 시간을 건너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정인이 형.”

애타게 이름을 부르며 뺨을 만지자, 정인은 학학 밭은 숨을 내뱉는 와중에도 호진과 눈을 맞췄다.

“아, 흐윽…. 호진아…. 나, 기억나?”

“네, 다 기억나요.”

정인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호진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의 상태를 살폈다. 조금 전 실수로 지나치게 짙은 페로몬을 풀어 버리는 바람에 괴로워진 듯했다.

최대한 깊게 삽입해서 안쪽을 눌러 줘야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은 입구부터 제대로 풀어야 한다.

빠르게 자세를 바꿔 정인을 아래에 눕혔다. 늘 하고 다니는 반지와 목걸이를 풀어 멀찌감치 치운 다음에는 엉덩이 사이를 벌려 애액이 줄줄 흐르는 입구를 핥았다.

잔뜩 흥분해 뻐끔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혀끝에 느껴졌다. 하지만 호진의 것을 받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손가락 하나조차도 빡빡하게 끼어서, 지금 당장은 삽입으로 인해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흐읏, 으…. 응.”

몸이 달 대로 달아 버린 정인은 고통에 가까운 쾌감에 몸부림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호진은 살뜰히 그의 기색을 살피며 입구에 꽂은 손가락을 하나에서 두 개로 늘렸다. 너무 빠르지 않은 피스톤질 끝에는 안쪽에서 손가락을 벌려 틈을 만들고, 쏟아지는 애액을 윤활유 삼아 넓게 문질렀다. 그제야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콘돔을 착용하고, 입구 위에 페니스를 꾹 눌러 붙였다. 툭, 하고 머리가 들어간 순간이었다.

“아악!”

정인이 감전이라도 된 듯 벌벌 떨며 엄청난 양의 페로몬을 쏟아 냈다. 거의 히트 사이클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호진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이 뒤집혀 개처럼 달려들 것 같았다. 불과 한두 시간 전 최적의 상태로 세팅해 놓은 페로몬 레벨 때문이었다.

“…이제, 넣을게요.”

“으응, 으….”

최대한 느리게 안으로 진입했다. 쫀쫀한 내벽이 이물을 휘감고 꿈틀거렸다. 호진은 정인이 느끼는 자리를 누르며 조금씩 페로몬을 풀었다. 이미 만개해 넘실거리던 오메가의 페로몬은 기다렸다는 듯 호진의 것을 먹어 치웠다.

“아….”

단지 페로몬을 교환하기만 했을 뿐인데도 정신적 만족감이 상당했다. 물론 육체적 쾌락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본딩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어렴풋이 상상하며 허리를 움직였다. 호진의 것이 드나들 때마다 정인은 윽, 윽. 꽉 막힌 신음을 흘리며 실금하듯 프리컴을 토했다. 기둥이 끄떡일 때마다 안쪽이 같이 움찔거렸다. 그야말로 정신을 차렸더니 갑자기 홍콩에 떨어져 있는 격이었다.

“하앙, 하, 읏!”

정인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신 시트를 쥐어뜯었다. 혹시라도 손톱이 상할까 무서워 얼른 그 손을 잡자, 정인이 열에 달뜬 눈으로 호진을 올려다보았다.

“읍….”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벌어진 입가에 타액이 새든 말든 계속해서 페로몬을 섞었다.

눅진하게 풀린 결합부가 체액으로 미끈미끈하고, 성기가 가장 깊은 곳까지 맞물리면서부터는 철퍽철퍽 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고환까지 밀어 넣을 기세로 피스톤질을 하던 호진은 문득 정인의 몸을 추슬러 제 위에 앉혔다. 더욱 깊이 삽입하기 위함이었다.

“다리 더 넓게 벌려야 돼요.”

아무리 벌려 줘도 자꾸만 무릎이 안으로 모였다. 이러다 정말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결국에는 호진이 손으로 단단히 고정해야 했다.

삽입된 모습이 지나치게 잘 보이는 자세였다. 콘돔을 착용하고 있는데도 호진의 기둥에 선 핏대의 굴곡마다 정인의 애액이 뭉쳐 번들거렸다. 그걸 보고 있으니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아서 호진은 최대한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럼에도 생식기의 예민한 감각은 무뎌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으로 보지 않으니 더더욱 선명해질 따름이었다.

호진은 결국 삽입한 채로 정인을 눕히고야 말았다. 허리 아래에 베개를 받치고 체중까지 실어 퍽퍽 찍어 누르니 삽입이 깊어지며 뿌리까지 체액에 흠뻑 젖었다. 그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윽.”

바로 코앞에서 우성 오메가가 작정하고 페로몬을 흘리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 번 물갈이를 마친 호진의 페로몬은 쌩쌩하게 순환하다 못해 폭발 직전이었다.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호진의 이마를 따라 핏줄이 툭 불거지고,

“아, 형…. 죄송한데, 하….”

노팅할 것 같아요, 쥐어짜 내듯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호진의 아래쪽이 예고도 없이 주먹만 하게 부풀었다.

“아, 으, 으윽….”

정인은 허공에 매달린 채 어쩔 줄을 모르고 바르작거렸다. 제대로 노팅에 걸린 입구 안쪽은 이미 커다랗게 벌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박아 넣은 알파의 성기는 사정을 준비하며 울컥울컥 부풀었고, 구멍 입구는 강하게 조여들며 그 뿌리를 움켜쥐었다.

“허억….”

이제부터는 정말 육욕뿐이다. 본능대로 잔뜩 부푼 거대한 기둥이 페로몬 샘을 짓이기고, 정인은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새빨갛게 물든 페니스는 허공에서 애처롭게 떨며 찌익, 찍. 투명한 액체를 연신 뿜어 댔다. 물론 뒤쪽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내벽이 정신없이 요동치며 사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으윽…. 하, 으….”

호진은 정인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머지않아 사정이 시작되었다.

유전자에 새겨진 대로, 두 사람의 몸은 교미 중인 짝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빈틈없이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정액까지 전부 짜낼 때까지, 그 빠듯한 만족감에 몸서리치며 다시 한번 키스를 나눌 때까지.

“하아….”

“하….”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호진은 어김없이 늘어져 버린 정인을 침대에 눕히고, 아직도 안에 박혀 있는 성기를 조심스레 빼냈다. 하지만 노팅이 전부 가라앉지 않아 아직 계란 크기 정도의 멍울이 남아 있었다.

그는 최대한 천천히 제 몸을 빼냈다. 결합부가 동그랗게 부풀며 주름이 팽팽하게 당겨지나 싶더니, 조금 더 힘을 주자 마치 알을 낳듯 멍울이 쑥 뽑혀 나왔다. 그 뒤로는 거의 쏟아붓다시피 한 정액들이 콘돔 끄트머리에 뭉쳐 주르륵 딸려 나왔다.

“…….”

정인의 구멍은 계속된 마찰에 발갛게 달아오른 채 아직까지도 쾌감에 못 이겨 뻐끔거리고 있었다.

“…하.”

호진은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입구에서 눈을 돌려 정인과 시선을 맞췄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지 눈이 완전히 풀려 쌕쌕 숨만 쉬는 것을 쳐다보다가 하얀 등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한 번만 더 할게요.”

***

기억을 되찾아 버린 스물둘 유호진은 실로 대단했다. 원래도 체력차가 있어 가끔 따라가기가 버거운데, 페로몬 레벨까지 최적화해 놓고 나니 거의 짐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야 정인도 똑같이 몸이 달아 들러붙었다. 그러나 한 번만 더 하겠다던 것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자 몸이 견디질 못했다.

아무래도 후천적 변태는 타고 난 정력왕을 이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도 쥐어짜여서 더는 나올 게 없을 때쯤엔 정말로 생존을 위해 호진을 멈춰 세워야 했다. 아직 병원에 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냐고, 너 하나 보고 공주에서 여기까지 올라오셨는데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나 진짜 냄새 안 나지?”

“네…. 향수 냄새만 나요.”

그 짧은 사이에 페로몬을 갖고 난리법석을 떤 걸 들킬까 봐, 온몸의 구석구석을 전부 씻고 향수까지 뿌린 참이다. 그런데도 혹시 몰라 두 사람은 문앞에 서서 몇 번이나 서로의 냄새를 확인했다.

“아, 맞다.”

우여곡절 끝에 순대볶음을 꼭 안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축 늘어져 버린 정인을 대신해 운전하던 호진이 문득 차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 다녀올게요.”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길가의 꽃집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야 차로 돌아왔다. 손에는 보랏빛 꽃이 가득 담긴 꽃다발 하나를 달랑달랑 든 채였다.

“이게 뭐야?”

“생각 안 나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정신 들면 제일 먼저 형한테 이거 선물하고 싶었어요. 라벤더 꽃말 중에 ‘걱정하지 마세요’도 있다더라고요.”

그는 꽃다발을 안겨 주며 정인의 이마에 뽀뽀했다.

“많이 걱정하셨죠.”

정신도 채 들기 전부터 계속 뭔가 할 일이 있다며 중얼거리던 게 이거였던가. 정인은 끙끙대며 그를 끌어안았다.

“응, 어젯밤엔 정말 잠도 제대로 못 잤어. 네 기억이랑 같이 나도 네 인생에서 지워져 버릴까 봐.”

결국 쓸데없는 걱정인 것으로 판명나긴 했지만 말이다.

정인은 손끝을 세워 호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 아래 순하게 눈을 감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나저나 너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도 진짜 눈 마주치자마자 달달 떨더라. 내가 그렇게 좋던?”

“네.”

반쯤 장난이었다. 그러나 호진의 목소리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설령 백 번쯤 기억을 잃는대도, 백한 번째로 반할 거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

“밥 한 끼만 먹자고 조르고, 한 번만 더 만나 달라고 쫓아 다니고…. 꼭 그럴게요. 이번 생이 끝나고 다음 생이 와도요.”

참 고마운 말이었다. 정인은 품 속의 꽃다발보다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럴게.”

이제 더 이상 주어지는 사랑 앞에 의심하지 않는다.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넘치도록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고,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날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유호진이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과연 스물셋 최정인의 봄이 이토록 찬란했을까.

“다음 생의 그다음 생까지도 너 좋아할 거야,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호진의 손가락은 당연하다는 듯 정인의 손가락 위에 걸렸다.

느리게 다가오는 입술을 받아들이며 정인은 눈을 감았다. 첫키스는 언제 했느냐며 집요하게도 물어 오던 열여덟 유호진이 떠올라 자꾸만 웃음이 샜다.

***

한편, 태산은 고요한 병실에 앉아 반질반질한 복숭아를 깎고 있었다.

“…….”

정인과 함께 나간 호진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올 생각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서운하거나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둘이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겠거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질 따름이었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지…. 둘이 어쩌면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어.”

호진이야 제 자식이니 그렇다쳐도,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뽀얀 얼굴을 하고 호진의 곁에 서 있는 정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먹은 것 없이도 배가 부를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태산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었다. 미움이라곤 한 톨도 끼어들 틈 없이 그저 사랑으로만 가득한.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꼭 저만큼 예쁜 짝을 찾아왔으니 아비로서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아마 그 마음은, 태산의 곁에 앉아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요?”

토끼처럼 귀를 세워 깎아 놓은 복숭아를 내밀었다. 그러자 정훈은 이쑤시개로 복숭아를 콱 찍으며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손끝에서 핑크색 복숭아 껍질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수술한 지 세 시간도 안 된 몸으로 홀랑 빠져나간 녀석들이…. 예쁘긴 어디가 예쁩니까.”

“아유, 너무 그러지 마요. 때 되면 돌아오겄지.”

말은 이렇게 해도 결국 저 마음엔 걱정뿐이라는 것을, 태산은 이미 훤히 알고 있었다.

의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던 호진을 위해 손을 써 준 것도, 병원 한 층을 통째로 내준 것도 정훈이었다.

“사돈 잘 만나서 참 좋네요. 항상 고마워요.”

“사돈은 아직…. 음, 꽤 괜찮군요.”

“그쥬?”

쌀쌀맞게 대답하면서도 복숭아의 맛에 감탄하는 예비 사돈을 위해, 태산은 다시금 바삐 손을 놀렸다. 곧 손을 꼭 잡고 이곳으로 돌아올 어린 연인들의 모습을 그리며.

〈당신의 숨은 시다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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