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숨은 시다 5권 (완결)
Chapter 3.
Your breath is poetry, truely it always has been (2)
갑자기 실내의 불이 꺼졌다. 와아, 하는 환호성 속에서 누군가가 테이블 위로 올라서고, 스포트라이트가 그 자리를 밝혔다.
“이거 살 사람?”
테이블에 올라선 여자의 손안에는 와인 한 병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럼 200부터 시작할게. 불러 봐.”
숫자는 삽시간에 치솟았다. 300, 500, 700. 천만 원까지 올라가는 데에는 고작 5초도 걸리지 않았다.
“1500!”
혜나가 번쩍 손을 들자 어딘가에서 받아치듯 1700을 불렀다. 혜나는 살짝 몸을 기울여 호진에게 말했다.
“방금 1700 부른 사람이 이 배 주인이야. 아이텍 차영조.”
“…응.”
호진의 시선은 오직 정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인은 경매 판을 등지고 효준과 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1700, 더 없어?”
멈춰 있던 랠리는 곧 재개됐다. 이천, 이천오백, 삼천. 마침내 삼천오백까지 가격이 치솟자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곧 효준이 손을 들어 오천을 불렀다.
“그럼 이거 효준이 꺼.”
여자는 박수를 짝짝 치며 효준에게 와인을 내밀었다.
효준은 곧바로 뚜껑을 따더니 주변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잔에 와인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정인은 효준이 채워 주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쇼핑을 할 때와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게 정인에게는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를 바라보며 호진은 멍하니 되물었다.
“…저 사람이, TH 후계자라고?”
“그러엄. 예정 같은 게 아니라 아예 확정이야.”
정인이 중흥 건설 사장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충격이었다.
“TH가 4남매 중에 자식 있는 집이 아직 중흥 건설밖에 없는데, 완전 왕자님이지. 누구랑 나눠 먹을 필요도 없이 앞으로 TH 그룹 전체가 저 오빠 거 되는 거야.”
“중흥 건설 사장님이….”
“TH가 둘째잖아. 몰랐어?”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호진이 아무 말도 않자 혜나는 자연스럽게 그 무리를 향해 호진을 이끌었다.
“최현욱 회장도 저 오빠 말이라면 뭐든 다 해 준대. 우리 학교에 있는 TH관도 저 오빠 학교 편하게 다니라고 지어 준 거라는 썰 있잖아.”
정인과 헤어질 것을 종용하던 현욱의 얼굴이 떠올랐다. 호진은 혜나를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이윽고 호진을 발견한 정인이 환하게 웃었다.
“호진아.”
“…형.”
정인이 먼저 아는 척을 하자 혜나가 입을 떡 벌렸다.
“뭐야? 호진이 너, 저 오빠랑 아는 사이였어?”
“…….”
차마 뭐라 대답할 수가 없어, 호진은 조용히 정인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정인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애인이야, 인사해.”
효준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언제부터 사귄 건데?”
“어떻게 만났어?”
온갖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사귄 지는 얼마 안 됐어, 학교에서 만났고.”
정인은 진땀을 빼며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흐윽…. 정인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그래도 결혼은 나랑 할 거지…. 그치, 흑.”
이미 머리끝까지 취해 버린 혜원은 정인의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함께 유치원에 다니던 때부터 반복되어 온 레퍼토리였다. 그를 만류한 것은 영조였다.
“혜원이 취했다, 객실 데려다줘야 할 것 같은데.”
“나랑 같이 가.”
정인은 영조를 따라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진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도와드릴게요, 형.”
“고마워.”
비교적 체격이 좋은 호진이 혜원을 업었다. 영조와 정인은 호진을 따라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버님들 잘 계시지? 학교 다니는 건 좀 어때?”
“그냥 그래. 영조 너는 바로 석사 할 거야?”
“졸업하고 나면 조금 쉬다가 미국 가 보려고. 혹시 넌 따로 계획 있어?”
“아직 잘 모르겠어. 이제 1학년이라 그런가….”
정인이 작게 웃었다. 영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인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딱히 생각나는 거 없으면 너도 그냥 나랑 같이 가자. 일이 년 정도 쉬는 셈 치면 되잖아. 우리 너무 오래 떨어져 있지 않았어? 어릴 땐 항상 붙어 다녔는데.”
“…이미 쉴 만큼 쉬었어. 이제는 사람 구실도 좀 해야지.”
“아, 난 진짜 너랑 같이 가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영조는 호진의 기색을 살폈다. 호진은 별다른 동요 없이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지금 학교 근처에 살지? 언제 시간 되면 같이 밥 먹자.”
“그럴까? 효준이랑 시간 맞춰 볼게.”
“음…. 효준이는 워낙 바빠서 그냥 우리 둘이 맞추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나는 너 시간 되면 언제든 괜찮아. 다음 주에 볼까?”
쾅ㅡ. 갑자기 굉음이 들렸다. 스위트 룸의 문을 부숴 버릴 듯 열어 젖히며 호진이 씩 웃었다.
“도착했는데요.”
“아…. 응, 고마워.”
정인은 얼른 혜원을 부축했다.
“말도 안 돼…. 정인아아, 나랑 결혼해…. 흐윽.”
“이제 그만해, 자리 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거 다 알아.”
눈물을 줄줄 흘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정인이 타이르듯 말했다.
“흑, 흐윽, 머리 컸다고 이제 속아 주지도 않네.”
그야말로 여배우 뺨치는 연기 실력이었다. 혜원은 언제 그렇게 통곡했냐는 듯 눈물을 쓱 닦아 내더니 침대에 대 자로 누워 버렸다.
“와, 씨. 이거 스케일을 너무 키웠어. 피곤해 죽는 줄 알았네…. 영조 네가 알아서 수습해.”
“그래.”
영조와 정인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근데 정인아. 너 진짜 이제 계속 한국에 있는 거야?”
“글쎄. 아직 아무것도 정한 게 없어서.”
정인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혜원과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영조는 호진을 향해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했다.
“둘이 오랜만에 얘기 좀 나누게 둬야 할 것 같아서요. 어릴 적부터 혜원이가 정인이 정말 좋아했거든요.”
호진은 그와 함께 스위트 룸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훤히 뚫린 문 너머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벽을 따라 수많은 캔버스가 흰 천을 덮고 서 있었다. 영조는 그것들을 하나씩 손끝으로 거둬 내며 물었다.
“진짜 정인이랑 사귀어요?”
“네.”
흰 천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화려한 색감의 그림들이 드러났다. 영조는 가장 커다란 캔버스 앞에 서서 호진을 돌아보았다.
“이 그림 어때요?”
호진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평범한 것 같은데요.”
“하하하. 역시 운동선수답게 거침없네요.”
제아무리 전설적인 선수래 봐야 결국 운동선수에 지나지 않는다. 정인이 진심으로 이런 상대와 거창한 미래를 꿈꿀 리가 없다. 내심 안도하며, 영조는 말을 이었다.
“이런 게 정인이 취향인데. 맞추기 좀 까다롭지 않겠어요?”
“…….”
“그냥 알아 두라고요. 최정인이랑 연애 한번 해 보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 대부분 이 정도는 맞춰 줄 수 있다는 거.”
“저기, 차영조 씨.”
영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호진이 문득 물었다.
“혹시 정인이 형한테 관심 있어요?”
“글쎄요.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고.”
영조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호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한번 가서 만나 보자고 말이나 해 보세요, 바로 옆방에 있는데.”
“네?”
그러고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서 말해 보라고, 이 씹 새끼야.”
“…뭐?”
영조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랑 저 사람이랑 만나는 거 뻔히 알면서 자꾸 들으라는 식으로 신경 거스르는데, 보기가 좀 딱해서 그래.”
호진은 여전히 천사처럼 담담하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직접 말할 용기는 없어서 나한테 대고 이딴 수작질이나 하는 거. 결국 게임 안 될 거 스스로도 잘 안다는 뜻 아닌가?”
“…….”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내가 당신이었으면 쪽팔려서 얼굴도 못 들었을 거야.”
눈을 완전히 접어 웃으며, 호진이 그림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캔버스의 이음새를 찾아 쭉 뜯어 버렸다. 한 점당 10억이 넘는 그림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다.
“야, 너 뭐 하는 짓이야!”
영조의 외침에 정인과 혜원이 후다닥 이쪽으로 달려왔다.
“왜 그러는데?”
“호진아. 너….”
“새로 한 점 보내 줄 테니까 연락처 남겨 놔요.”
호진은 찢어진 그림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 집 창고에 이 사람이 그린 그림 많거든.”
그러고는 그대로 모두를 지나쳐 객실을 빠져나갔다.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마침내 비상구의 문을 열자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열이 오른 머리를 식히기 위해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해 봤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호진은 새카만 바다를 등진 채 그림을 펼쳤다. 찢어진 캔버스 천이 바람을 따라 힘없이 흔들렸다. 비록 그림은 엉망이 되었지만, 화폭 끄트머리에 박힌 어머니의 서명은 다행히도 무사했다.
“하….”
정인의 취향을 들먹이며 비아냥대던 목소리, 복도를 걷는 내내 은근히 정인에게 추파를 던지던 모습. 그것들을 떠올리니 다시 화가 났다. 하지만 그의 말보다 아픈 건, 진심으로 그에 발끈했던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미워도 정인의 친구다. 충분히 참을 수 있는 일이었고, 또한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다. 어차피 순간을 견디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말, 못 들은 셈 치고 조용히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진짜 못났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저열하게 나오는 상대에게 똑같이 저열한 방법으로 응수해 버렸다. 정인과 어울리는 짝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게 그림 몇 점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작 열등감 따위를 이기지 못했다. 정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유치하게 화를 내 버린 것도, 엄마의 그림을 망쳐 놓은 것마저도 속상해 죽을 것 같았다. 호진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호진아.”
그때였다. 등 뒤에서 벌컥 문이 열리며 정인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영조랑 싸웠어?”
“…네.”
호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제가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모습 보여서 죄송해요.”
“왜 네가 사과를 해.”
정인은 호진을 안고 도닥여 주었다.
“분명 걔가 뭘 잘못했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그렇게 화를 낼 리가 없잖아.”
“…….”
“네 친구들은 날 만나자마자 꽃다발부터 줬는데, 내 친구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오지 말 걸 그랬어. 대신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형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런 말 마세요.”
정인의 등 뒤로 팔을 둘러 마주 안았다. 그렇게 서 있으니 차가운 바닷바람을 등지고 있는데도 춥지가 않았다.
“형, 제가 나무꾼처럼 느껴진다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호진은 곧 정인을 품에서 놓았다.
“저는 처음부터 늘 그런 마음이었어요. 저는 나무를 베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무꾼 같고, 형은 뭐든 다 할 줄 아는 선녀님 같고…. 아니, 남자니까 신선쯤 되나.”
그 말에 정인이 웃었다.
“보일러도 없는 시절에 나무꾼이면 나름 필수 산업 종사자인데, 나무 베는 거 말고 다른 걸 알 필요가 있나?”
“…….”
“그리고 원래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일 수록 다른 쪽으로는 어두운 경우가 많대.”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럼.”
정인은 호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난간에 기대섰고, 호진은 행여나 떨어질세라 정인의 손을 꼭 붙든 채 까만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선녀님 신랑이 되기에 나무꾼은 좀 부족한 게 맞는 것 같아요.”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그 동화를 읽을 때마다 항상 생각했거든요. 언젠가 선녀님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정말로 선녀님을 좋아한다면 어쩌다 날개옷을 줍게 돼도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주는 게 맞는 거라고….”
정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진짜 나쁜 짓이잖아요. 하늘나라에서 잘 먹고 잘 살던 선녀님 옷 훔쳐서 어디에도 못 가게 만드는 거, 애기를 셋이나 낳아 달라고 협박하는 거, 가진 거라곤 도끼 몇 자루밖에 없는 나무꾼의 색시가 되라고 조르는 거…. 너무 비겁하고 못된 짓인데.”
“…….”
“그런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저도 똑같은 마음이 들어요. 한참 부족한 거 알면서도 배짱부리고 싶어져요. 정말로 제 손에 날개옷 같은 게 있었다면 영영 불태워 버렸을지도 몰라요.”
호진은 완전히 정인을 향해 돌아섰다.
“저, 평생 운동만 해서 다른 건 잘 몰라요. 오늘 파티에 있던 사람들처럼 어마어마하게 배경이 좋은 것도, 손꼽히게 대단한 부자도 아니에요. 가끔은 오늘처럼 못난 짓을 하기도 하고요.”
하나하나 말하다 보니 자신의 모습이 더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꾹 참고 말을 이었다.
“이제 겨우 새 소속사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고, 적응하다 보면 또 시간 금방 가겠죠. 앞으로 메달을 몇 개나 따든, 형이 TH 그룹의 총수가 될 즈음에도 저는 아마 수많은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일 거예요.”
“…….”
“세상에는 저보다 대단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그중 몇은 당연히 형을 좋아하겠죠. 그 사람들이라면 형의 취향을 저보다 잘 알지도 몰라요. 형에게 훨씬 좋은 것들을 선물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다 알아요. 그래도….”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엉망으로 찢어진 그림을 정인에게 내밀었다.
“…저희 집에 진짜로 이런 그림 많은데.”
정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호진이 내민 그림을 받아 들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마저 애가 달도록 예쁘기만 했다.
“괜찮다는 말 듣고 싶어서 하는 얘기 맞아요. 이러면 형이 다독여 줄 거란 거 다 알고 머리 굴리는 거예요.”
“…….”
“절대 나를 버리라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을 거고, 형을 위해 떠난다며 위선 떨지도 않을 거예요. 계속 욕심부릴 거예요.”
세련되게 돌려 말하는 법 따윈 알지 못한다. 사는 내내 대부분의 문제를 정면 돌파해 왔고, 정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잡스러운 수를 부릴 의향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저를 좋아해 주세요.”
“…….”
“앞으로도 그냥 계속 못 이기는 척, 저만 좋아해 주세요.”
정인은 호진이 내놓은 날것의 마음 앞에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네?”
“대체 차영조가 무슨 말을 했길래 갑자기 이렇게 땅을 파나 궁금했는데, 네가 내 수준에 안 맞는다는 식으로 후려쳤나 보네. 맞지?”
정인의 얼굴 위로 새하얀 미소가 떠올랐다. 호진은 그의 분노 게이지가 급격하게 차오르고 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이 씨발 새끼, 지금 가서 대가리 깨고 올 테니까 5분만 기다려.”
“형. 잠깐만, 잠깐만요.”
호진이 붙들자 정인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런 말을 듣고 꼴랑 그림 한 장 찢어 온 게 다야? 어금니라도 뽑아 왔어야지!”
“아니, 그건 좀….”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말해 버리면, 그런 너를 보면서 마음 잡고 살아 보겠다고 애쓰는 나는 뭐가 돼? 너 지금 나까지 등신 만드는 거야, 알아?”
정인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호진은 어쩔 줄 모르고 벌벌 떨며 정인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형. 이제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당연히 안 그래야지.”
정인은 분을 못 이겨 씩씩대면서도 호진을 꼭 안아 주었다. 심각한 와중에도, 화가 난 정인의 숨소리가 귀밑에 부서지는 게 너무 귀여워서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아마 선녀는 날개옷 때문에 나무꾼이랑 결혼한 게 아닐 거야.”
불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만약 정말 그런 거였다면 제목은 〈선녀와 나무꾼〉이 아니라, 〈날개옷 사용자와 좀도둑〉이었겠지. 설마하니 선녀 정도 되는 대단한 존재가 그깟 옷 쪼가리 때문에 승천을 못 했겠어?”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호진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정인이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호진의 양 볼을 쭉 늘리며 웃었다.
“넌 앞으로도 나무만 열심히 하면 돼, 내가 바라는 건 그게 다야.”
전구 하나 없이 캄캄한 밤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눈부실까. 호진은 품 안의 정인에게서 시선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홀린 듯 입을 열었다.
“형. 만약에요.”
별처럼 빛나는 정인의 눈동자가 오롯이 저를 향해 있었다. 호진은 조심스럽게 그를 마주 보았다.
“정말 만약의 일이지만, 제가 또 한 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그러면 그때는.”
나올 듯 말 듯 목 안쪽에 걸려 있던 말을 간신히 토해 냈다.
“조금 더 깊은 사이가 되자고 말해도 괜찮을까요?”
정인의 눈 안에 뜬 별이 깜빡, 잠시 가려졌다.
“운이 좋다면 두 번째의 금메달을 딸 때의 저는 스물셋이고, 형은 스물넷이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가 스물일곱, 형이 스물여덟일 때의 얘기가 될 거예요.”
“…….”
“두 번 안에 반드시 메달 따 올게요.”
마지막 한 줄의 용기를 던지며 정인의 손을 잡았다.
“그때는 결혼을 전제로 만났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먼 얘기지만.”
어디선가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쩌면 심장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호진은 서서히 멍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어 정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정인의 대답은 호진의 예상 밖에 있었다.
“싫은데.”
“…네? 그게, 바로 결혼을 하자는 게 아니라…. 전제로만 하는 거고요…. 그냥, 어…. 네. 죄송해요.”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이 꼬였다. 정인은 큰 소리로 웃으며 호진의 목에 매달렸다.
“올림픽 2관왕쯤 되면 여기저기서 채 가려고 안달일 텐데, 바로 약혼부터 해야지.”
그러고는 장난스레 덧붙였다.
“따 올 수 있으면 한번 따 와 봐, 그럼 진지하게 고려해 볼게.”
“…정말요?”
“대신 절대 다치는 일 같은 건 없어야 해.”
조금이라도 다친다면 이 약속은 무효야. 이어지는 말에 호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정인에게 키스했다.
평생의 꿈을 이룬 뒤 한참을 비어 있던 공백 안으로, 인생을 걸고 달려 볼 만한 목표가 다시금 생겨나고 있었다.
***
“진짜 대가리 깨 버리려고 했어요. 형사에 민사까지 제대로 걸릴 각오 하고요.”
내놓은 말에 정적이 흘렀다. 정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호진이가 죽기 살기로 말리면서 그러더라고요.”
“뭐라고?”
“고작 말 몇 마디였을 뿐이라고, 거기에 흔들리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몇 마디 말은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제가 전에 한번 그런 말을 하긴 했거든요.”
그는 언젠가 정인이 패스트푸드점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말이 레퍼런스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일단은 참았죠.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 거예요. 제가 뭔데 감히 호진이한테 그런 소릴 해요?”
생각하다 보니 또 열이 뻗쳤다. 한창 씩씩대는데 상담사가 물었다.
“그래서 때렸니?”
“…겸사겸사였죠. 뭐라도 한마디 하려고 내려가 보니까, 차영조 이 새끼가 미친 짓을 해 놨더라고요.”
한사코 뜯어말리는 호진의 얼굴을 보며 끝까지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파티 홀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사달이 났다.
“무슨 짓?”
“…비밀 보장 되는 거죠?”
정인은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순차적으로 털어놓았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경호원을 데리고 시시때때로 캐빈을 순찰하던 혜원이 사라지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현직 대통령의 외손녀라는 안전핀이 빠진 채로 밤이 깊자, 숨어 있던 약쟁이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효준을 비롯해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은 약이 돌자마자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했고, 자의로 약에 취한 사람들은 룸에 틀어박혀 서로 뒤엉켰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를 궁금해하며 술을 홀짝였다. 여기까진 정말 낮은 확률이지만 간혹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그냥 술을 마시기만 한 사람들 중에서도 환각을 보는 사람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홀을 돌아다니던 출처 불명의 술이 원인이었다.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어요. 다 같이 빵살이라도 하자는 건가….”
신원 미상의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탑승 과정에서 모두의 신원을 확인했고, 심지어 배에 탄 사람의 절반 이상이 한자리한다는 집안의 아들딸이었다.
혜원의 감시하에 약을 들고 탈 만큼 간이 큰 인물 자체가 많지 않았고, 파티 홀로 들어가는 술에 접근 권한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
처음부터 배에 약이 실려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황상 모든 증거가 범인이 그 배의 주인임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배의 주인은 모두가 알다시피 차영조였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위험한데…. 막말로 호진이가 어쩌다 그 술을 마시기라도 했어 봐요, 이제 곧 경기 있는데 도핑 검사 하다 보면 당연히 약물 반응 나오겠죠.”
“그렇겠지.”
“그날로 인생 끝나는 거잖아요. 특히나 호진이 같은 사람은 더더욱 그렇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영영 국가 대표 자격 박탈되고, 전 세계 사람들한테 욕먹고. 그러다 간신히 복귀가 가능해져도 전성기는 이미 지났을 거예요. 어떻게 쌓아 온 삶인데…. 이 얘기는 기록하지 말아 주세요.”
열심히 받아 적어가던 상담사는 조금 전의 이야기 위로 줄을 직직 그었다.
“하여튼 배에는 호진이 같은 국가 대표 선수들도 여럿 타고 있었고, 그들 말고도 그런 일에 얽매이는 것만으로 다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데?”
“호진이가 저에게 그렇듯 그 사람들도 다 누군가의 소중한 존재일 거 아니에요?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정인은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기댄 채 상담사의 눈치를 살폈다.
“…죽을 만큼 팬 것도 아니고, 뺨 몇 대 친 게 다예요.”
라이터를 쥐고 주먹으로 쳤지만 말이다.
“그래서 기분은 좀 나아졌어?”
상담사의 태도는 이야기를 듣기 전과 마찬가지였다.
“…안 혼내세요?”
“나는 너를 혼내기 위해 여기 앉아 있는 게 아니야.”
그녀는 새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나저나 많이 달라졌네.”
“네?”
“분명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어. 너 자신에게도 그랬고. 마치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방관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거든?”
빈 종이 위로는 오늘의 날짜가 새로이 적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잖아. 방법은 결코 옳지 않았지만 말야.”
“…….”
“폭력을 행사한 데에 따르는 책임은 분명 네가 감수해야 할 몫이야.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 다칠 뻔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고, 그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 자체는 상당히 반갑네. 자발적으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려 했다는 점도 그렇고.”
이미 정인도 스스로 느끼고 있는 사실이었다.
호진의 고향에서 그의 친구들을 만났던 때만 해도 이미 낯선 사람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흐려져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번의 파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영조와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가 싫지 않았고, 낯선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것도 그렇게까지 불편하진 않았다.
“선생님, 저 혹시…. 인생을 날린 건 아닐까요?”
거기까지 생각하니 어쩐지 허탈해졌다.
“절대 괜찮아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정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지금 보니 처음부터 이럴 수 있었는데 그냥 제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회피했던 건 아닌가 싶어요. 시간도 삶도 그냥 낭비해 버린 거죠,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그렇지 않아.”
상담사는 곧바로 정인의 말을 부정했다.
“어린 최정인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잖아. 오늘의 네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일도 과거의 너에게는 충분히 어려웠을 수 있어. 과거의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현재의 네가 너무나도 잘 해내고 있을 뿐이야.”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니까요.”
이렇게 날려 버린 시간 속에는 소중한 사람들의 상처가 있다. 그들을 생각하자 또 착잡해졌다.
“제가 혼자만 담을 쌓고 지내는 동안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건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데….”
“어째서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해?”
아직 생각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물음이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얼마든 변할 수 있는 거야. 좋은 방향이든 그렇지 않든.”
“하지만…. 이제 와서 과연 뭐가 달라질까요?”
정인은 대답 대신 물었다.
“정식으로 사과를 하는 것도 생각해 봤어요. 하지만 그럼 괜히 상처를 들쑤시게 되는 거 아니에요? 모두 다 잘 잊고 살고 있는데, 괜히 건드려서 터져 버리기라도 하면….”
“정말 그럴까?”
삐빅, 정인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에서 정각을 알리는 비프음이 울렸다.
상담실에서 이 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시간을 다 채우기도 전에 도망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연습이 도움이 될 거야. 지금 네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면, 두 가지가 섞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상담사가 말했다.
“오늘의 날짜와 이 시계에 표시된 시간은 사실이야. 지금 네가 상담실에 앉아 있다는 것도, 파란색 옷을 입고 있다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과거에 다툼이 있었다는 것도,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감정에 변화를 겪는다는 것도. 모두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지.”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을 상처를 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영영 회복되지 않을 거란 건 추측에 가까워. 오직 너만이 그렇다고 믿고 있을 뿐, 확답을 받은 적이 없으니 아직까지는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인 거야.”
상담사는 파일을 닫으며 정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요즘 너무 잘하고 있어. 매일 30분만에 헤어지던 우리가 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도 그 증거 아닐까?”
“…….”
“하루아침에 모든 게 나아지지는 않아. 한 걸음씩 천천히 해 보자.”
“…네.”
정인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불현듯 유리병 안의 식물로 눈길이 갔다. 볼 때마다 조금씩 자라 있는 식물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또 한 번 터질 듯 빽빽하게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선생님, 그런데 쟤 있잖아요….”
항상 깨끗하고 안전한 물속에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물을 맞추지 못하면 금세 시들해지고, 가끔 흙 위로 벌레가 기어 다니기도 하지만, 그 모든 작은 불행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흙으로 가는 건 꽤나 해 볼 만한 도전이라는 걸.
“흙에 심어서 키우면 훨씬 잘 자라요.”
항상 어지럽게 얽혀 있던 마음의 구석에, 길게 뻗어나온 실마리 하나가 보였다.
“안녕히 계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확인해 보니 원경의 생일까지는 이제 딱 보름이 남아 있었다. 물론 아직도 선물은 정하지 못한 채였다.
***
호진은 작은 캔버스 여러 개를 품에 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약속 시간을 한참 넘겼는데도 영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 번 보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호진에게는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었다.
“안 올 생각인가….”
파티에 왔던 선수들에게 묻고 물어 영조의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만나기로 약속을 잡긴 했지만 실제로 그가 나타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한참 그렇게 서성이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호진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 그림 받아 갔다며?
이탈리아는 지금쯤 이른 새벽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졸음이 묻어 있었다.
- 무슨 일이야, 그게 왜 필요한데?
“그게…. 다른 사람이 엄마 그림을 갖고 있었는데, 내가 망쳐 버렸어.”
너덜너덜해진 천을 어떻게든 꿰매 보려고 했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그림을 영영 망치는 꼴이 될까 봐 끝끝내 바늘을 들 수가 없었다.
- 그래? 왜 그랬는데?
호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말하자면 길어요. 그래도…. 그래야 해서 그랬어.”
다른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그랬구나, 그럼 그럴 만한 일이었나 보네. 진짜 이유는 나중에 호진이가 말하고 싶을 때 말해 줘. 영영 잊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으응….”
호진은 그녀를 따라 웃었다.
“미안해요, 엄마가 힘들게 그린 그림인데.”
- 언제든 또 만들 수 있는 천 조각 따위에 마음 다칠 필요 없어. 신경 쓰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 알았지?
“응, 알았어요. 엄마도 밤에 늦게 주무시면 안 돼요.”
그러고는 정인을 따라 한마디를 더했다.
“…사랑해요, 안녕.”
전화를 끊을 무렵에는 어둑어둑 먹구름만 끼어 있던 마음이 밝아 있었다.
머지않아 저만치 영조의 모습이 보였다. 정인에게 대차게 얻어맞은 눈은 여전히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는 캔버스를 든 호진에게 다가오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진짜 이거 주려고 만나자고 했다고?”
“그럼 뭔 줄 알았는데?”
호진은 곧장 캔버스부터 넘겼다.
“다 합치면 내가 찢은 그림 하나 값은 될 테니까 알아서 해.”
영조는 천을 풀어 내부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아니, 하다못해 최정인한테 소송을 걸지 말아 달라든가, 언론에는 새 나가지 않게 조용히 해 달라든가. 뭐라도 부탁하려고 만나자는 거 아니었어?”
“너 어차피 정인이 형 못 이기잖아.”
큰 문제로 번질 뻔한 약물 이야기는 굳이 꺼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뭐?”
“그게 될 거였으면 벌써 했겠지. 며칠이 지나도록 조용히 있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러자 영조가 발끈했다.
“야, 이 새끼야.”
“먹히지도 않을 시비 걸지 말고 이거나 받아.”
호진은 그를 들은 체 만 체 하며 가방 속에서 찜질 팩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찜질이라도 해. 그냥 내버려 두면 더 보기 흉해지니까.”
“…….”
“그럼 나 간다.”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고 돌아섰다. 영조는 벙찐 표정으로 호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진은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자취방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자리를 잡고 앉은 두 사람은 테이블 위로 찢어진 그림부터 펼쳤다.
호진은 낮에 영조를 만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뭐?”
정인은 호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배를 잡고 웃었다. 호진은 딱 물고기 이모티콘처럼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는 정인을 쳐다보았다.
“아주 제대로 엿을 먹였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에….”
정말로 차영조에게 그림을 돌려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주제를 파악시키고 찜질 팩까지 쥐여 줬다니.
물론 순하디순한 호진에게야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을 것이나, 결과적으로 이건 차영조의 자존심을 짓밟다 못해 가루가 되도록 빻아 버리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정치인으로만 가득한 사교 모임에 데려가 혼자 놀도록 내버려 두어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예뻐 죽겠어, 하여튼.”
어디서 이렇게 완벽한 짝이 나타났을까. 정인은 테이블 너머로 몸을 기울여 호진을 꽉 안아 주었다. 상황이야 어찌 됐든 호진은 그저 정인이 안아 주는 게 좋은지 흐흐 웃기만 했다.
정인은 곧 테이블 위에 펼쳐진 그림을 살폈다.
“찢어진 방향이 나쁘진 않아서 복원업체 맡기면 금방일 것 같은데.”
“아니에요, 차라리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나아요.”
“왜?”
호진은 조심스럽게 찢어진 부위를 매만졌다.
“업체에 맡기면 누군가 그림 위로 덧칠을 하게 되잖아요. 이건 온전히 엄마 혼자 만든 작품이었는데….”
“음, 그런가?”
정인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번뜩 아이디어 하나가 스쳤다.
“아, 잠깐만. 이거 내가 살래. 나한테 팔아.”
“…네?”
우글우글하게 일어난 귀퉁이를 손끝으로 펼쳤다. 조금도 상하지 않은 작가의 서명이 보였다.
“이영 작가가 혼자 만든 게 아니라 파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호진이 같이 만든 작품이 되는 거잖아. 항상 캔버스가 온전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치야 씌우기 나름이지.”
상심한 호진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런 스토리텔링을 곁들여 삼한 아트 센터의 소장품 목록에 넣는다면 그림값은 곧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
“너만 괜찮다면 나한테 팔아 줘. 10년 보고 원가 5배 뻥튀기할 자신 있으니까.”
“형 가지고 싶으면 그냥 가지세요.”
호진은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지는 건 안 되지. 히스토리 때문에라도 대가는 줘야 돼.”
“으음….”
호진이 정인을 살짝 끌어당겼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코끝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냥 개인적으로 양도한 셈 치면 되잖아요. 어차피 저는 금메달 따올 거고, 당연히 형의 약혼자가 될 건데. 미래의 약혼자한테 엄마가 그린 그림 한 점 넘겨주는 게 문제가 될까요?”
“어…. 그것도 그렇긴 하네.”
호진답지 않게 빠른 계산이었다. 정인이 멍하니 있는 사이 호진은 살살 눈웃음을 치며 정인에게로 다가왔다.
“대신 저 뽀뽀 한 번 해 주시면 안 돼요?”
“뽀뽀만?”
정인은 호진의 입술을 앙 물었다.
“…다른 것도 하면 좋고요.”
뜨끈한 손이 목덜미 뒤를 쓰다듬었다. 호진은 가뿐하게 정인을 안아 들고 일어났다.
“어디 가는데? 난 다른 것도 한다고 안 했어.”
일부러 한번 걸어 본 장난에 호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나 싶더니 물었다.
“침실로 가도 돼요? 저 형이랑 야한 거 하고 싶….”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호진아.”
정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한 번 골려 보려다 되레 만신창이가 된 셈이었다.
“조용히 하고, 그냥 가자.”
“네에.”
호진은 사과같이 익은 정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소중하게 품에 안고 침실로 향했다.
이거 혹시 여우짓 하는 건가? 어쩐지 한방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인은 달랑달랑 그에게 매달려 가며 물었다.
“…너 혹시, 차영조한테도 일부러 그런 거야?”
“네? 뭐가요?”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쨌든 호진은 정인을 조심조심 침대에 눕혀 주었다. 1층에 있는 방과 달리 매트리스가 등에 닿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근데 이 건물 전체가 형 거였다는 건 아직도 안 믿겨요.”
“나는 네가 이영 작가 아들이었다는 게 더 안 믿겨.”
나란히 누워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왜 몰랐지?”
“그러게요, 왜 몰랐죠?”
서로가 보여 주는 것만으로 충분해 더는 알려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금세 답을 찾은 두 사람의 사이로 실없는 웃음이 지나갔다.
“나, 어렸을 때 너희 어머니 초기작 본 적 있어.”
“어디서요?”
정인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는 손에 눈을 감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몇 점 가지고 계셨거든.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미술품들을 떠올렸다. 회랑을 따라 걸음걸음 펼쳐지던 색깔들이 여전히 눈에 잡힐 듯 선명했다.
“할아버지…. 그럼 최우재 회장님이 형 할아버님… 되시는 거죠?”
“응.”
호진이 와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진짜 적응 안 돼요.”
“적응이 안 될 건 또 뭐야.”
정인은 피식 웃으며 눈을 떴다.
“저 삼한 장학 재단 인재 개발 프로그램 출신이라고 했었잖아요, 그 재단이 최우재 회장님 지시하에 만들어진 거라고 알고 있는데.”
“아…. 그랬지.”
정인은 기억하는 한 가장 선명하게 남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호진의 목 아래에 이마를 묻었다. 그의 품에서는 언제나처럼 단아한 나무 냄새가 풍겼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그다음에는 아주 먼 곳에서 정인이가 커 가는 모습을 쭉 지켜보다가….’
‘볕 좋은 봄이 오면, 정인이를 지킬 나무의 새싹을 보내 줄 거란다.’
“나무를 보내 주겠다고 했었거든, 할아버지가.”
“나무요?”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간절히 바라도 좀처럼 기억해 낼 수 없던 것,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어쩐지 곧 그 말을 떠올려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정인은 하얗게 드러난 호진의 목덜미 위로 입 맞췄다. 나무 냄새 위로 싱그러운 향이 덧씌워졌다. 마치 봄날 새잎이 돋아나는 모습을 옮겨 놓은 듯 기분 좋은 향이었다.
***
시간이 유난히도 빨리 흘렀다. 별일 없이 서로를 쳐다보기만 한 게 오늘 한 일의 전부인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달이 머리 꼭대기까지 떠오른 시간이다.
“이것 좀 봐.”
정인은 창가의 작은 화분을 집어 들었다.
“아버님이 주실 땐 잎이 두 개였거든. 그런데 이제 네 개나 돼.”
“금방 컸네요.”
어깨를 감싸 주는 호진의 손에 기대 식물의 이곳저곳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주영의 온실에 있는 식물에 비하면 아직 턱없이 작지만, 이파리에 든 무늬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예뻤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못 붙였네. 얘는 뭐라고 부르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개똥이 동생이니까 소똥이 어때? 최소똥. 나름 힙하지 않아?”
“아뇨.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정인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좋다고만 하는 호진이 단칼에 만류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별로인 듯했다. 그는 별 탈 없이 쑥쑥 크고 있는 싱고니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음, 하고 뜸을 들였다.
“사실…. 제가 생각해 둔 이름이 하나 있긴 한데.”
“뭔데?”
“그게….”
말을 할 듯 말 듯 우물거리던 호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솔잎이요’ 하고 대답했다.
“솔잎이? 얘는 소나무도 아닌데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딱히 뜻이 있어서 지은 이름은 정말 아니고, 그냥 저 혼자 생각한 거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딱히 뜻이 있어서 지은 이름이 아니라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걸 보니 거짓말인 듯했다. 호기심이 동한 정인은 본격적으로 호진을 볶았다.
“아, 뭔데.”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툼한 몸을 끌어안아 등부터 간질였다. 호진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가끔 개떡에 솔잎으로 장식을 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음, 그러니까…. 개떡이 배 위에 솔잎이 앉아 있으면 귀여우니까….”
그러고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며 실토했다.
“진짜 만약에, 아주 만약에요. 나중에 우리 사이에도 아기가 생긴다면 태명은 솔잎이가 어떨까 하고…. 생각만 해 봤…거든요.”
“미쳤어? 김칫국도 유분수지….”
정인은 입을 떡 벌리며 화분을 끌어안았다.
“너 벌써 그런 생각까지 해?”
“생각으론 뭔들 못하겠어요, 정말 그냥 생각만 해 본 거예요. 어차피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
“그야…. 알파는 임신을 못 하잖아요. 제가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안 돼요.”
호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정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실 다큐멘터리도 여러 개 봤는데…. 체력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부담이 많이 되는 일인 것 같더라고요.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상상만으로도 싫은지 금세 울상이 돼 버렸다.
“그사이에 별걸 다 알아보셨네.”
“당연히 그래야죠. 사소한 만약의 일조차도 다 미리 생각할 거예요, 형이랑 하는 일이면 뭐든.”
정인은 어이가 없어 허허 웃었다.
“그래서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아기 태명까지 생각해 두셨어요?”
“네에….”
이걸 기특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바보 같다고 해야 하는 건가. 정인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버렸다.
“넌 진짜 좀 대충 살 필요가 있어. 매사 그렇게 진지하면 안 힘들어? 나 같으면 진작에 신경 줄이 다 닳아 없어졌을 거야.”
“저는 어차피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밖에 못 하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힘을 전부 다 써도 괜찮아요.”
호진이 씩 웃었다.
“완전히 정반대네.”
“원래 반대가 끌리는 거래요.”
두 사람은 또 한 번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호진은 매크로처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말했다.
“…형은 어쩜 이렇게 예쁠까요.”
“그러게 말이다.”
이런 말도 계속 들으면 면역이 생기나보다. 정인은 성의 없이 대답하고는 호진의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내 눈에는 네가 훨씬 예뻐. 어쩌면 닮은 구석이 없어서 더 예뻐 보이는지도 모르지.”
깨끗한 옥돌을 거침없이 깎아 놓은 듯한 얼굴이 참 예뻤다. 그를 바라보며 있지도 않은 아이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호진을 닮아 눈썹이 짙고 피부는 하얗고, 웃을 땐 입꼬리가 시원하게 트이고. 물에 넣어 두면 물고기처럼 수면을 따라 호로록 흘러가기도 하고….
“…너를 닮으면 아기가 예쁘긴 하겠다.”
“형을 닮으면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예요.”
지지 않고 덧붙이는 말에 가족들이 떠올랐다. 원경은 늘 정인을 보며 정훈과의 닮은 점을 찾아냈고, 정훈은 자다가 일어나서도 정인의 어디가 원경과 닮았는지를 줄줄 외곤 했다. 그들을 생각하니 또 가슴이 답답해져서 긴 한숨을 쉬어야 했다.
“난…. 솔직히 자신 없어.”
“뭐가요?”
“아이 키우는 거 말야. 너는 분명 좋은 아빠가 되겠지만 난 그럴 수 없을 거야. 반쪽이 나라서 그 애가 행복하지 않으면 어떡해?”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라서도 결국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런 내가 다른 인간을 멀쩡히 키워 낼 수 있을 리 없다. 생각하며 정인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만약 아이를 낳는다 해도 절대 나를 닮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 나를 닮는다면…. 엇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럼 아이가 미워질 것 같으세요?”
호진이 물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든 호진의 한 부분을 닮았을 아이를 미워할 자신은 없었다. 결국 고개를 저어야 했다.
“무슨 짓을 하든 그럼에도 예쁘겠지, 너를 닮았을 테니까.”
“아마 아버님들도 같은 마음이실 거예요. 항상 형이 예쁘다고만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호진의 손이 느린 박자로 정인의 등을 도닥였다.
“그리고 아버님들이 형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도 분명 아이를 많이 사랑하는 아빠가 될 거예요.”
“뭐야…. 그런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네. 제 마음은 여전히 그래요.”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영영 아이 없이 둘이서만 살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일을 결정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형의 마음인데, 지금 제가 듣기엔 형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이유가 잘못된 것 같아서요.”
“…….”
“꼭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이유 안에 형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요.”
숨을 쉴 때마다 예쁘다고 말해 주는 사람과 있으니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래도 이제는 도저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뭐, 지금 생각하기엔 너무 먼일이긴 하지. 그럼 ‘어쩌면 태어날 수도 있는’ 우리 애 이름 좀 미리 빌려 쓸게.”
솔잎아 하고 불러 보았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저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조금 행복해졌다.
***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였다. 정인은 호진의 어깨를 떠밀며 숨을 골랐다.
“하아…. 너 집에 안 가?”
“가야죠. 조금 이따가.”
“벌써 열두 신데 언제 가게?”
“글쎄요.”
호진은 그렇게 말하며 정인의 입가에 흐른 타액을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살짝 맛이 간 눈빛으로 보건대 이미 스위치가 켜진 것 같았다.
그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 정인의 몸 구석구석을 물고 빨았다. 손가락에서부터 푸른 혈관이 비치는 발등까지 쪽쪽 입술을 붙이고는 곧장 제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며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만지며 정인의 것을 입 안에 머금었다. 무엇을 할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자극이 가해지니 허리부터 뒤로 꺾였다. 마치 그의 입 안으로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직이며 밭은 숨소리를 토해 냈다. 그러길 얼마나 반복했을까,
“호진아, 흐, 그만. 나 이제 할 것 같아.”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온 사정감에 호진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도망치려는 허벅지를 단단히 붙든 호진은 별안간 페로몬을 확 풀어 냈다.
목구멍 안쪽이 막히며 몸에 힘이 풀렸다. 간신히 참고 있던 아래쪽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인은 외마디 비명 한 번을 지르지 못하고 호진의 입 안에서 사정해 버리고 말았다.
마른 손가락이 시트를 움켜쥐었다. 호진은 손바닥을 넓게 펼쳐 정인의 손등을 덮었다. 달큼한 향이 풍기는 목덜미에서부터 어깨뼈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입술을 붙이며 피스톤질에 박차를 가했다.
정인의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세였다. 살짝만 스쳐도 붉어지는 여린 살갗 위에 호진이 남겨 놓은 자국들이 빽빽했다. 호진은 제 것을 받아먹고 있는 정인의 입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끄트머리나 겨우 들어갈 듯 좁던 곳도 어느샌가 녹진하게 풀려 있었다.
“형, 얼굴 보고 싶어요.”
찌걱, 찌걱. 젖은 소리를 들으며 정인의 가슴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침대에 납작하게 붙어 있던 상체가 일으켜 세워지고, 어두운 불빛 아래 나신이 드러났다.
“아, 호진아….”
자세가 바뀌며 천장을 보고 눕게 되자 정인은 꼿꼿하게 선 제 것을 가리려 반사적으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호진은 어림도 없다는 듯 정인의 손을 잡아 그 위에 키스했다.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정인의 손은 어쩔 수 없이 호진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호진은 정신없이 허리를 쳐올리며 다른 한 손으로 정인의 페니스를 쥐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착실히 느끼는지, 뿌리부터 끝까지를 딱 한 번만 쓸어 주어도 정인은 쾌감을 견디지 못해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 모습마저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딱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호진은 제 위에 누운 정인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탓에 한 번에 딱 한 군데에만 입을 맞출 수 있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정인의 혀, 손가락, 발가락, 무릎과 복사뼈. 발그레한 뺨과 속눈썹까지.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최정인이라는 사람을 통째로 입 안에 넣은 채 굴리며 살고 싶었다.
그 순간 정인이 호진의 팔을 꽉 붙들었다. 손이 닿은 자리를 타고 찌릿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그것을 신호 삼아 성기를 끝까지 뺐다가 한 번에 집어넣었다. 둥글게 부푼 내벽 안쪽이 툭 걸리며 정인이 소변을 지리듯 사정했다.
“하윽…!”
이미 너무 여러 번 사정해 정액이 많이 연해져 있었다. 묽은 액체가 쭉쭉 뽑힐 때마다 붉게 달아오른 기둥이 끄떡였다. 호진은 정인이 끝까지 갈 때까지를 기다린 후에야 참고 있던 마지막 절정을 터트렸다.
“하아, 하….”
한창 예민할 테니 이제부터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호진은 최대한 정인에게 자극이 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제 것을 빼냈다. 그러고는 웅덩이처럼 음수가 고인 자리를 피해 구석진 곳에 그를 눕혀 주었다.
사용한 콘돔을 처리하고 정인에게 돌아온 뒤에는 쪽쪽 소리가 나도록 열 손가락 끝에 한 번씩 뽀뽀했다. 정인은 푹 젖은 속눈썹을 몇 번 깜빡이는가 싶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 시트 또 다 젖었어.”
“빨면 되죠.”
그 말에 정인이 한숨을 쉬었다.
“벌써 세 장째야. 이제 세탁기에 더 들어갈 자리도 없을걸.”
“으흐. 그럼 그냥 내버려 두세요.”
호진은 바보같이 웃으며 정인을 꼭 끌어안았다. 따끈따끈 열이 올라 마치 만두를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너 진짜 방에 안 내려갈 생각이야?”
“가야죠.”
뽀얗고 작은 만두가 물었다. 호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 시트도 빨긴 빨아야 하니까 건조기 다 돌아가면 새걸로 갈아 놓고 내려갈게요.”
“…아까도 그 핑계로 붙어 있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그렇긴 하죠.”
섹스가 시작되자마자 시트 한 장을 대차게 버린 게 원흉이었다. 정인의 손가락이 세탁기 버튼에 닿는 꼴조차 두고 볼 수 없던 호진은 세탁이 끝날 때까지만 있겠다 말하며 버텼고, 나란히 붙어 앉아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 보니 또 입이 맞고 배가 맞았다.
결국 시트 한 장을 더 버렸고, 또 세탁을 해야 했고, 윙윙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를 들으며 겨우 영화 한 편을 틀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인 것이다.
“이번엔 진짜 갈게요. 기다리는 동안은 딱 영화만 보고요.”
어차피 밤이 늦었으니 더는 혹사시킬 수도 없다. 호진은 절대 정인을 건드리지 않겠다 단단히 마음먹었고, 정인은 영 못 미덥다는 듯한 눈으로 호진을 노려보며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영화는 아직 후반부에 멈춰 있었다.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장면이 바뀌며 천장에 드는 빛의 색깔이 변했다.
정인은 곧장 영화에 빠져들었고, 정인을 쳐다보는 데에 정신이 팔린 호진은 영화를 뒷전으로 한 채 내내 정인의 머리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러다 간간이 물잔을 건네주기도 했다.
“땀 많이 흘렸으니까 이거 한 컵은 다 마셔야 돼요.”
“거참…. 알았어, 고마워.”
정인은 투덜대면서도 결국 호진이 주는 물을 홀짝였다. 그때, 비명 소리가 길게 울리며 귀신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됐다.
“으…!”
하마터면 물컵을 집어 던질 뻔했다. 정인은 부들부들 떨며 귀신에게 삿대질했다.
“아니, 일본 귀신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뭐가요?”
“앞뒤가 없잖아, 앞뒤가. 딱히 저 귀신한테 뭔가를 잘못한 게 아니어도 그냥 지나가다가 재수 없으면 죽는 거란 말이야. 이거 이래서 어디 마음 놓고 살겠어? 어윽….”
하지만 정인이 화면 밖에서 비난을 하든 말든 귀신은 우연히 제 영역에 들어온 관광객1을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중이었다. 피 튀기는 화면을 볼 자신이 없어 질끈 눈을 감았다.
“귀신 나와도 제가 지켜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무슨 수로?”
정인은 실눈으로 호진을 노려보았다.
“쟤네는 운동선수라고 해서 봐주는 거 없어. 찢을 근육 많다고 좋아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다행히도 화면은 금세 밝아졌다. 카메라는 곧 평화로운 한낮의 거리를 걷는 주인공의 뒷모습을 비췄다. 재생 바에 달린 동그라미가 거의 끝자락에 다다라 있는 것을 보니 주인공은 이 밑도 끝도 없는 살육 파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듯했다.
“그래도 쟤는 사나 봐.”
“그러게요.”
한숨 놓으며 호진에게서 멀어지려던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주인공이 갑자기 귀신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어, 어어, 쟤 미쳤나 봐, 저기서 왜 저런 생각을 하는…. 아악, 씨발!”
곧바로 패닉에 빠져든 정인은 창피함도 잊고 소리를 지르며 이불 속에 파묻혔다. 호진은 한숨을 쉬며 정인을 안았고, 정인은 엔딩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그의 품에 파묻힌 채 덜덜 떨었다.
“하, 그래도 진짜 재밌었어.”
“재미요…? 손이 이렇게 차가워졌는데요?”
말은 호기롭게 했지만 영화가 완전히 끝난 뒤로도 심장이 벌렁거려 몇 번이나 찬물을 들이켜야 했다.
호진은 그새 싸늘하게 식어 버린 정인의 손을 주물러주었다. 온기가 돌아오며 손끝에 작게 전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의지와 관계없이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아프세요?”
호진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다정하기만 하던 손길에 다른 감정이 실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으려는데, 발끝에서 진동이 윙윙 울렸다. 정인의 핸드폰에서 난 소리였다.
“아 씨, 뭐야.”
와장창 깨져 버린 분위기에 짜증이 난 정인은 씩씩대며 핸드폰을 집었다.
“이 시간에 대체 어떤 또라…. 헉”
화면에는 ‘큰 아빠’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 심지어 그냥 전화도 아니고 영상 통화였다.
“미친, 미친. 내 옷 어딨어.”
“어어, 여기요.”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빨리 움직여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정인은 엄청난 속도로 옷을 주워 입고 책상을 향해 달려갔다. 물론 정인의 옷을 챙겨 주느라 제 옷을 미처 입지 못한 호진은 아직도 알몸이었다.
“호진아, 잠깐만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래?”
“넵.”
실로 공포 영화보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호진을 차가운 화장실로 보내는 게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면 구석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날로 둘 다 인생 종 치는 거니까.
“아무 소리도 내면 안 돼. 알았지?”
커다란 배스 타월을 던져 주며 신신당부했다. 호진은 화장실로 쏙 들어갔고, 정인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소파에 몸을 푹 묻고 있는 정훈의 모습이 보였다. 스탠드 불빛이 콧대 옆으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아빠, 안 자고 뭐 해?”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웬일인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정훈은 마주 손을 흔들어 주고는 곧장 말했다.
- 카메라 높이 들어 봐.
“으응.”
화면 속에 잡히는 사물을 하나하나 확인한 정훈은 그제야 씩 웃었다.
- 공부하고 있었나 보네.
일부러 글자가 많은 페이지를 펼쳐 둔 게 먹힌 듯했다.
“그, 내가 다른 거 할 게 뭐 있겠어…. 작은 아빠는 뭐 해?”
- 시간이 몇 신데, 진작 잠들었지.
그렇게 말하며 안방으로 걸어가 곤히 잠든 원경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히히 웃었고, 정훈은 행여나 원경이 잠에서 깰까 소리 죽여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근데 아빠는 왜 깨어 있어?”
- 잠깐 잠들었는데 꿈자리가 더러워서 깼다.
정훈이 말했다.
- 웬 물고기 같은 게 네 등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더라고.
“…그래?”
조금 전까지 물고기와 뒹굴다 온 입장에서야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정말 신기가 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인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기댔다.
“하여튼 나는 공부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알아. 그럼 난 이만. 사랑해요, 안녕!”
- 잠깐.
내내 뭔가 찜찜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훈이 문득 말했다.
-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 봐. 집 구경 좀 하게.
“가, 갑자기 왜?”
- 왜긴 왜야. 아들 사는 곳 좀 보겠다는데.
정인은 즉시 두뇌를 풀 가동했다.
보여 달라는 대로 보여 주자니 누가 봐도 세상 끝난 것처럼 뒹군 흔적으로 가득한 침실도 문제고, 알몸의 호진이 오들오들 떨고 있을 화장실도 문제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꺼리는 기색을 보였다간 정훈이 달려올지도 모른다.
“음…. 알았어.”
세탁기와 건조기 안에는 침대 시트가 각각 한 장씩 들어 있고, 지금 씌워져 있는 시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엉망이다. 그리고 교통량이 많지 않은 시간임을 감안해 본가에서 자취방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30분이다.
이 야밤에 시트 석 장을 빨고 있는 이유야 어떻게든 둘러댄다 쳐도 30분 안에 호진의 페로몬까지 전부 거둬 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빠, 내 벽지 좀 볼래? 하얀 벽지 같은데 자세히 보면 무늬도 있어.”
- 벽지는 됐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져 보았지만 역시나 이런 게 통할 리 만무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이제부터는 운의 영역이다. 포커페이스를 띄운 채 곁눈질로 스슥 바깥을 살폈다. 혹시라도 호진의 옷이나 가방이 보이진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도 그것들은 모두 침실에 있는 것 같았다. 부디 정훈이 침실을 비추라 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거실로 나섰다.
“여기가 거실이야. 창문 밖에는 별거 없고…. 밥은 여기서 먹고.”
- 컵이 왜 두 개야?
“어…. 낮에 호진이 왔다 갔었어.”
- …….
“낮에 왔다 갔다니까? 같이 놀지도 못해?”
- 웬만하면 밖에서 놀아.
정훈의 표정은 여전히 썩 밝지 않았다. 정인은 침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세탁실의 문을 열어 내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빨래하는 중이야. 실외기실도 구경할래?”
- 그건 됐고, 화장실에 불은 왜 켜 놨어?
정훈이 날카롭게 물었다. 황급히 화면 구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실금같이 빛이 새어 나오는 문가가 보였다.
“…까먹었나 봐.”
성큼성큼 다가가 불을 껐다.
- 불 켜고 문 열어 봐.
주여….
“근데 아빠, 나 오늘 있잖아.”
- 어서.
정인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를 바로 알아본 정훈이 힘주어 말했다.
- 열라고.
눈앞의 풍경이 샛노랗게 탈색되었다.
차라리 옷이라도 입고 있다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호진은 배스 타월 한 장을 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연의 상태 그대로였다.
우성 알파인 애인과 홀딱 벗고 할 수 있는 일의 가짓수가 세상에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텐데, 이건 도대체 뭐라고 하면서 수습해야 하는 걸까.
정인은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으로 불을 켜고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머지않아 문이 스르륵 열리며 화장실의 내부가 드러났다. 그러나 호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정인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헉….”
바닥에는 타월로 하체만 간신히 가린 호진이 납작 누워 있었다.
- 왜. 뭐 있어?
“아, 아니. 벌레 있는 줄 알았는데 머리카락 뭉치였어.”
화각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간 덕분에 호진의 모습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하여튼 제 화장실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선생님. 이제 궁금증이 좀 풀리셨나요?”
정인은 호진의 몸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신중하게 카메라의 각도를 유지했다. 그다음에는 행여나 침실까지 보자고 할까 봐 후다닥 방으로 달려가 책상 앞에 앉았다.
“나 내일 퀴즈 있어서 진짜 공부해야 돼. 아빠도 빨리 자.”
- 이번 주에 본가 오는 거지?
정훈이 물었다.
“그야…. 당연하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다. 원경의 생일을 직접 축하하지 못한 게 꼬박 6년이니까.
하지만 막상 그날의 풍경을 그리자니 덜컥 겁부터 났다. 크게 상처받고 꼭 그만큼 큰 상처를 던졌던 장소에서 원경을 마주하는 건, 여태까지 헤쳐 온 문제들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무언가인 것 같았다.
“…그럼 그때 봐. 사랑해요, 안녕.”
정말 괜찮을 수 있을까.
언제나와 같은 인사말을 뒤로 전화가 끊겼다. 정인은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호진을 일으켜 세웠다. 차디찬 타일 바닥에 붙어 있던 등이 온통 싸늘했다.
“아, 어떡해…. 추웠지.”
“아니에요, 하나도 안 추웠어요.”
어쩌면 조금 전의 몇 분은 온 세상이 사랑하는 금메달리스트 유호진의 생애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참한 몰골로 뒹굴게 만든 것이 미안해 얼른 호진의 등을 끌어안았다. 몸이 원체 크다 보니 두 팔을 아무리 길게 뻗어도 손끝이 닿지 않았다.
결국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같은 모습이 되어 우스꽝스러워졌다. 정인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그래도 너 방금 진짜 똑똑했어. 여기서 꼼짝없이 인생 마감하는 줄 알았는데.”
“흐…. 저 똑똑했어요?”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아진 듯한 호진은 으쌰 하고 정인을 둘러업었다. 그러고는 침대 위 푹신한 곳에 내려 준 뒤에야 티셔츠를 찾아 입었다.
“근데 호진아, 혹시 이번 주 주말에 훈련 있어?”
정인은 굼벵이처럼 온몸에 이불을 둘둘 감고 머리만 내밀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뇨, 새 담당 선생님께서 주말에는 웬만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하시더라고요. 왜요?”
정인은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괜찮으면 같이 우리 집 갈 수 있을까 해서. 작은 아빠 생일이라 밥만 먹고 올 거긴 해.”
“제가 가도 되는 자리예요?”
호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안 될 게 뭐 있겠어. 그리고…. 지난번에 네가 그랬잖아. 고향에 나랑 같이 가면 덜 무서울 것 같다고.”
꼬물꼬물 기어가 호진의 품에 안겼다. 익숙한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나도 그럴 것 같아서 그래.”
한숨처럼 내뱉자 호진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버님들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너무 좋죠. 가서 형네 집 말뚝에 절도 좀 하고.”
“뜬금없이 웬 말뚝?”
“원래 신랑이 예쁘면 그 집 말뚝에도 절을 하는 거래요.”
호진이 정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손길이 좋았다. 정인은 호진의 손에 머리를 기대다시피 한 채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나 게임 한 판만 해도 돼?”
“네에.”
몇 번인가 화면을 누르자 이윽고 형형색색의 캐릭터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이런 게임 좋아하세요?”
“좋아한다기보다도 이거 하고 있으면 잡생각이 안 나서 종종 해. 공포 영화 본 다음에도 꼭 하고. 안 그러면 십중팔구는 악몽 꾸거든.”
호진은 상단 바에 위치한 보석의 개수를 보더니 히익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저거…. 보석 너무 많아서 숫자 잘린 거 맞죠?”
“응. 고모가 예전에 만나던 사람이 이 회사 사장이었는데, 장난으로 보석 10억 개만 달라고 했더니 진짜 넣어 줘서 이렇게 됐어.”
정인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뿅뿅 소리가 났다. 미친 듯이 블록을 깨트리다 보니 시끄럽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여기 반짝거리는 초록색 블록 보이지? 얘를 깨면 보너스 게임처럼 뭐가 나와. 그럴 땐 이렇게 위아래로 움직이면 점수가 쌓이는데, 이렇게 구석에 있는 건 위로 밀고….”
마지막 블록을 누르며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
스테이지 클리어를 축하하는 배경음 속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화면이 아닌 정인을 바라보고 있던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알록달록한 블록의 색깔이 깨끗한 눈동자 안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부드럽게 휘는 눈꼬리 앞에 정인은 모든 말을 잊었고,
“…저 진짜 운 좋은 것 같아요.”
호진은 꿈이라도 꾸듯 달게 웃었다.
“내가 이런 사람 애인이라는 게, 아직도 가끔은 믿기지가 않을 때가 있어요.”
그 와중에도 화면 속의 게임은 끊임없이 귀여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까 물으셨죠, 귀신이 나오는데 무슨 수로 형을 지키겠느냐고….”
“…….”
“뭐라도 방법이 있겠죠. 부적을 쓰든 왕소금을 뿌리든 할 수 있는 건 전부 할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드릴게요.”
이윽고 호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대하듯 정인의 뺨 위에 뽀뽀했다.
“그러니까 형은…. 귀신이 백 마리쯤 나와도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꿈도 꾸지 마시고요. 덧붙이는 말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호진을 답싹 안고 물었다.
“넌 내가 그렇게 좋아?”
“네, 그렇게 좋아요.”
연애를 하다 보면 종종 밀당 같은 것도 하게 된다던데, 단 한 순간도 의심할 여지를 주지 않는 사람과 연애를 하니 그게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 같기만 하다. 넘치는 사랑을 받는 것이 자꾸만 당연해져서 그 외의 일들에는 빠르게 무뎌져 간다. 흔히 인용되는 시의 한 구절과 같이,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나도 네가 그렇게 좋아, 호진아.”
금세 걱정거리를 잊어버린 정인은 숨김없이 제 마음을 돌려주며 웃었다. 아무리 무서운 영화를 봐도, 사는 동안 어떤 일이 닥쳐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정말로 다시는 나쁜 꿈을 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정인은 두 손으로 총자루를 감싸 쥐었다.
단 한 번뿐일 기회, 연습도 실전처럼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어?”
허공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놀라울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돼.”
당황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당겨 보았지만 돌아오는 거라곤 틱틱 플라스틱 겉도는 소리뿐이었다.
이게 왜 이러나 싶어 설명서를 재차 살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문구 하나가 그제야 보였다.
현금을 너무 많이 넣지 마세요.
“뭐야….”
투덜대며 뚜껑을 여니 지폐가 후드득 떨어졌다. 플라스틱 통이 꽉 차도록 담겨 있던 것을 절반 가까이 거둬 내고 방아쇠를 당기니 그제야 지폐가 흩날렸다. 촤라락, 시원한 소리와 함께였다.
“…….”
일단 작동은 하는 것 같지만 어딘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
쏘다 만 용돈 총을 내려놓고 다른 택배 상자를 풀었다. 케이크 모양의 종이 상자를 따라 투명한 원통 여러 개가 붙어 있었다. 수표를 돌돌 말아 그곳에 끼워 넣었다.
“이 정도면…. 음.”
워낙 손재주가 없어 그런지 그 간단한 작업마저도 쉽지 않았다. 간신히 하나를 끼워 넣는 데에 성공하긴 했지만 끄트머리가 삐죽하게 튀어나와 보기 싫었다. 심지어 수습해 보겠다고 손을 댈 때마다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아, 진짜!”
결국 수표를 도로 뽑아 패대기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아직 주변에 널려 있는 지폐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턱없이 가벼운 종잇조각은 던지는 맛조차 없이 그저 팔랑팔랑 떨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힘이 쭉 빠졌다.
“어떡하지….”
당장 이번 주 주말이 원경의 생일인데, 아직까지도 이렇다 할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
틈이 날 때마다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사들였지만 기성품을 주는 건 어쩐지 성의가 없는 것 같아 망설여졌고, 그래서 정성을 좀 들여 보겠다고 요새 유행하는 용돈 총과 용돈 케이크 키트를 샀더니 요 모양 요 꼴이 됐다.
6년이면 강산이 0.6번은 바뀌었을 시간이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 이제는 원경이 정확히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학생 때 했던 것처럼 손편지만 달랑 선물하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이제는 무엇도 선뜻 선택할 수 없게 됐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한숨만 푹푹 쉬는데,
“혀엉.”
도어 록 누르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문이 열렸다.
“왔어?”
어차피 올 사람이라곤 호진뿐이다.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인사했다. 그는 늘 그렇듯 양손에 도시락통과 보온병을 바리바리 싸 든 채였다.
“…형, 지금 진짜 재벌 같아요.”
호진은 잠시 거실의 풍경을 살피나 싶더니 말했다. 엄청난 양의 현금 다발과 명품 쇼핑백 사이에 파묻혀 울상 짓던 정인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아침이에요.”
“으응, 좋은 아침.”
꼭 안아 주는 품에서 부드러운 비누 냄새가 났다. 금세 기분이 풀린 정인은 호진이 이끄는 대로 식탁에 앉았다.
“잘 먹을게, 고마워.”
된장찌개와 현미밥, 시금치무침과 쇠고기장조림.
정인은 호진이 착착 펼쳐 준 음식을 오물거렸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식사와 운동까지 마치고 온 호진은 정인이 집어 던진 것들을 도로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손쉽게 원통을 채워 나갔다.
“뭐야, 그게 그렇게 빨리 된다고?”
“그냥 돌돌 말아서 넣으면 되는 건데요.”
눈 깜짝할 사이에 케이크를 완성한 호진은 바닥을 대충 정리하고 개똥이와 솔잎이에게 물도 부어 주었다.
“그나저나 너 새 코치 구하는 건 어떻게 돼 가?”
“전지 훈련 갈 때 미팅 몇 개 해 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진 개인 훈련 위주로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갓 짠 오렌지주스를 정인의 앞에 놓아 주었다.
“사실 코칭 비는 동안 훈련량이 떨어질까 봐 좀 걱정했는데 딱히 처지는 것도 모르겠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마음이 편해서 좋아요. 다 형 덕분이에요.”
“그게 왜 내 덕이야? 네가 잘해서 그런 거지.”
“형이 도와주신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야.”
개인적으로 호진을 지원하려 한 건 사실이었지만, 정인이 알기로 애당초 호진에게 주어진 것은 얼라이드의 의류 모델 자리뿐이었다.
“…애초에 이건 내가 말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어.”
현욱은 정인이 호진과 사귀는 것 자체를 탐탁잖아 한다. 자폭 사건 이후로 아예 연락이 뚝 끊겨 버렸다는 것도 그 증거 중의 하나였다.
그런 현욱이 갑자기 호진을 위해 매니지먼트사 하나를 통째로 세워 주었다면 그에는 분명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인은 그 ‘이유’가 호진의 실력에 있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회 결과 좋았잖아. 부상 입고 복귀하자마자 금메달을 두 개나 땄는데 어딘들 널 탐내지 않겠어?”
“어…. 그때 들어온 거 아닌데요.”
호진이 말했다.
“계약 제의는 소청 나가기 한참 전에 들어왔어요. 원랜 얼라이드랑 TH 코퍼레이션 묶어서 계약하기로 했었거든요.”
뜻밖의 이야기에 정인은 고개를 들었다.
“분위기가 너무 안 좋던 시기라 어떻게 이런 계약이 들어왔는지 다들 좀 의아해하는 분위기였는데…. 돌이켜 보니 알겠더라고요, 누가 도와줬는지.”
“…….”
“그리고 미팅 자리에서 회장님이 형 얘기도 하셨어요.”
“뭐라고 했는데?”
그 말에 호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씩 웃었다.
“예쁜 다과상 차려 주시면서, 제 나이 또래의 조카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그게 다야?”
“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그저 모든 게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정인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책 몇 권을 챙겼다. 호진과 나란히 건물 밖으로 나서자 아침 햇볕이 따사롭게 쏟아졌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맞다, 형 혹시 고추 세우고 오셨어요?”
호진이 툭 물었다.
“뭐?”
“헉, 설마 아직도 안 세우셨어요?”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정인은 행여나 누군가 들었을까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아무리 늦어도 지금쯤…. 아니, 사실 지금도 좀 늦은 감이 있긴 해서 최대한 빨리 세워야 돼요.”
하지만 호진은 엄청나게 변태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안 그러면 여름 장마에 다 쓰러져요. 계속 누워 있으면 열매고 잎이고 다 먹어 버려서 쓸 수가 없어요.”
“…아. 그 고추.”
나만 변태였구나. 정인은 깊은 깨달음 끝에 창백하게 웃었다.
“걔넨 잘 있어. 열매도 조금 났고.”
“정말 다행이에요, 올해는 바람이 덜 불기에 망정이지 작년 같았으면 다 쓰러졌을 거예요.”
돌계단을 따라 오르는 동안 호진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뚝도 말뚝인데 이제 슬슬 가리 많이 든 걸로 시비도 하셔야 되고…. 끈도 두르고, 비닐도 좀 크게 뚫고 해야 돼요.”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럼 이따 가서 제가 좀 할까요?”
“너 시간 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걷는데,
“개떡!”
등 뒤에서 효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곳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어? 오랜만이에요, 정인 오빠.”
“안녕.”
정인의 얼굴을 알아본 혜나가 다가와 인사했다. 정인은 웃으며 그녀에게 마주 인사했고, 효준은 정인과 호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 아예 그냥 둘이 같이 다니기로 했냐?”
“남이사.”
“하여튼 인사해, 지영이만 우리 과고 혜나랑 민준이는 너랑 같은 과야. 다 네 선배.”
그는 저와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을 한 명씩 정인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얘는 내 불알친군데 1년 꿇었어.”
“하…. 최정인이에요.”
효준의 단어 선택 센스에 개탄하며 민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정인의 손을 마주 잡아 악수하며 말했다.
“저 사실 형 여러 번 봤어요. 1학년 과목 재수강하는 게 좀 많아서….”
“그랬어요?”
“호진이 애인 분이신 줄 알았으면 진작 아는 척해 볼 걸 그랬어요. 지난번에 경영학 개론 조별 과제 혼자 하셨죠?”
“아…. 네.”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는 저랑 같이해요. 제가 저 혼자 망하는 건 아무 생각 없어도 조별 과제 같은 건 나름 캐리 하거든요.”
“하하, 그래요?”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으며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전부 흩어지자 정인의 곁에는 호진만이 남았다.
“…….”
정인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과 몸이 닿을까 잔뜩 움츠린 채 벽을 따라 걷던, 누군가와 말을 섞는 것이 싫어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던 최정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갈까요?”
“응.”
나란히 걸어가 강의실 한가운데에 앉았다. 수업을 듣다 문득 창가로 고개를 돌렸을 땐, 겨울이 말끔히 물러난 자리마다 드리운 햇살에 눈이 부셨다.
***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위로 생고기 한 덩이가 휙 날아들었다. 정인은 고기가 담장 위 장식물에 꽂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셋을 셌다.
“이제 됐어!”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담벼락 너머에서 도움닫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지않아 호진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그를 받아주기 위해 두 팔을 벌렸다.
“조심해, 알았지?”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운동화의 뒤축이 콘크리트를 딛고 떠올라 까마득한 아래로 내려앉을 때까지.
곧 호진의 손이 먼저 다가와 정인의 머리와 어깨를 감싸고, 세상이 반 바퀴 빙글 돌며 그림자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기어이 시선이 마주쳐 웃음부터 났다. 마침내 모든 움직임이 멎을 때쯤엔 이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진짜 내가 받아 줘야 되는 거 맞아?”
“그럼요. 저 되게 무서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안아 주세요.”
커다란 몸이 거의 구겨지다시피 정인의 품에 안겼다.
“아, 이제 됐잖아.”
“아직 안 됐어요…..”
그는 한참을 더 비비적거리고 나서야 텃밭으로 향했다.
“이게 용케도 아직까지 안 넘어갔네요? 지지대만 세워 놓으면 올해는 어떻게든 되겠어요.”
호진이 입고 있던 트랙 톱은 곧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망치를 든 손이 크게 호선을 그릴 때마다 깡, 하는 쇳소리가 났다. 정인은 슬금슬금 그에게로 다가섰다.
“나도 해 보면 안 돼?”
“형이 하는 일에 안 되는 게 어딨어요.”
그는 하던 것을 멈추고 정인을 향해 섰다.
“좀 위험하긴 한데…. 일단 이쪽 잡아 보실래요?”
시키는 대로 한 손에는 망치를, 다른 한 손으로는 말뚝을 잡았다. 호진은 등 뒤로 다가와 정인을 안고 두 손을 겹쳐 쥐었다.
“…시도 때도 없이 끼를 부리시는구만.”
“이건 진짜 이렇게 해야 돼서요.”
그는 정인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잘 보세요, 하며 운을 뗐다.
“그냥 망치만 들 땐 별것 아닌 듯 느껴져도, 막상 내리칠 땐 궤도를 바꾸기가 힘들어요. 익숙해질 때까진 어딜 찍는지 정말 집중해서 보셔야 돼요.”
각도를 맞춰 준 다음에는 번개같이 정인의 볼에 뽀뽀했다.
“생각난 김에 끼도 한번 부려 보고요.”
“허….”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으며 망치를 들었다. 물론 호진에 비하면 한참 어설펐지만 몇 번 두드리다 보니 어느 정도 감이 생겼다. 호진은 정인이 이 일에 제법 익숙해졌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물러났다.
“망치 없어도 돼?”
맨손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며 물었다.
“전 그냥 짱돌로 찍어도 돼요.”
호진은 해맑게 미소 지으며 커다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누가 농사꾼 아니랄까봐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도록 움켜쥐고는 그대로 콱콱 내리찍는데, 정인이 낑낑대며 하나를 겨우 마무리하는 동안 족히 서너 개는 더 하는데도 고랑의 끝에 닿을 때까지 힘과 스피드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반면 정인은 빠르게 체력적 한계에 도달했다.
“아, 이거 씨…. 너무 힘든데.”
“내버려두세요, 제가 할게요.”
묘목을 심을 때와는 노동 강도의 차원이 달랐다. 망치질 몇 번 했다고 기운이 쭉 빠져 버려, 결국 네 개째에서 포기하고 흙바닥에 드러누워야만 했다.
“하아….”
옷이야 망가지든 말든 솔솔 부는 바람을 맞으며 누워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양이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대문 쪽에서 삐익ㅡ. 하는 버저음이 울렸다.
정인은 벌떡 몸을 일으켜 그쪽을 살폈다. 정원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진입하고 있었다.
“헉, 뭐야.”
분명 출발하기 전 현욱과 주영의 스케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주영은 해외 스케줄을 떠나 다음 주나 되어야 돌아올 예정이고, 공교롭게도 그와 같은 나라에 일정이 있던 현욱은 빨라야 오늘 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다고 들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눈을 씻고 봐도 차에서 내리는 것은 현욱이었다.
“호진아!”
정인은 재빨리 호진을 불렀다. 그는 구슬땀을 뚝뚝 흘리며 정인을 쳐다보았다.
나무에 걸려 있던 호진의 옷가지를 들고 달려갔다.
“이것부터 받아, 호진아. 너 지금 도망가야 돼.”
“네?”
그와 동시에, 담장 위에 걸려 있던 고기가 퍽 하는 소리를 내며 익었다. 전원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퇴로가 막히니 생각이 뚝뚝 끊어졌다. 정인은 호진의 손을 잡아 조경수 뒤로 숨겼다. 물론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둥은 얄팍하기 짝이 없어 호진의 몸을 전부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는 사이 현욱은 이미 몇 발짝 뒤까지 와 있었다.
“거기서 뭐 하니?”
다정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이미 망했다면 이제부터는 무조건 배짱 장사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을 느끼며, 정인은 두 팔 벌려 호진을 막아섰다.
“호진이 건드리시면 저 진짜 가만히 안 있어요.”
“가만히 안 있으면.”
현욱은 피곤기 어린 얼굴로 타이를 당겨 느슨히 풀었다.
“그…!”
“안녕하세요, 회장님.”
그때, 호진이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들어 현욱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호진 선수. 미팅 이후로 처음이죠?”
잠시 그를 지켜보던 현욱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네, 그렇습니다.”
“귀한 선수를 데려다 놓고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흙투성이가 됐으니 일단 들어가서 좀 씻죠.”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호진을 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조금 못마땅한 듯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정인은 호진의 손을 꼭 붙들고 저택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태피가 달려왔다. 목에는 저택이 빌 때마다 태피를 돌봐 주는 전담 훈련사의 메모를 달랑달랑 건 채였다.
현욱이 그를 확인하는 사이였다. 정인의 다리에 큰 몸을 비비며 한참 애교를 부리던 태피가 별안간 호진에게 달려가 그 앞에 엎드렸다.
“어어….”
엉덩이는 높이 들고 머리는 바닥에 붙인 것이 딱 봐도 놀자는 뜻이었다. 호진과 함께한 모든 공놀이의 만족도가 100퍼센트였던 것을 몸이 기억하는 듯했다.
“낯선 사람을 이렇게까지 따르는 친구가 아닌데, 신기하네요.”
“…….”
“자주 왔었나 봐요.”
아찔한 침묵 속, 강아지 헥헥거리는 소리만 우렁찼다.
“욕실은 우측 복도 끝에 있어요. 갈아입을 옷 준비해 두라 할게요.”
“아뇨, 제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인은 슬그머니 호진의 안색을 살폈다. 놀랍게도 그는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현욱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정훈을 대하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호진을 보내고, 정인과 현욱은 거실 소파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현욱의 호출에 뒤늦게 출근한 헬퍼들이 이따금 등 뒤로 스쳐 지쳐갔다.
“…삼촌.”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앉아 있으니 놀랐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며 용기가 생겼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정인은 간신히 첫마디를 뗐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현욱이 물었다.
“지난번에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제대로 사과하지 않은 것도…. 삼촌 허락 없이 호진이를 정원에 들여보낸 것도요.”
이판사판이다 싶어진 정인은 아예 속에 든 것을 전부 꺼내 버릴 기세로 말을 이었다.
“사실 자주 왔던 거 맞아요. 맨날 담 넘어 다녔어요.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텃밭 완성하겠다는 약속도 어겼고, 지난번에는 호진이랑 둘이 자미도에서 놀다 오기도 했어요. 고모 요트 훔쳐 썼고…. 아, 그냥 제가 다 잘못했어요.”
살짝 떠밀자마자 여죄까지 술술 불며 자폭해 버리는 조카의 모습에 현욱은 웃음을 꾹 참았다. 물론 정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대느라 그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저한테 화 많이 나신 거 알아요. 이제 문자도 전화도 안 하시잖아요. 어쨌든 저에게는 어떤 벌을 주셔도 상관없고, 엄청나게 화를 내셔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호진이한테는 그러지 마세요.”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들었다. 현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정인을 보고만 있었다. 그에 불쑥 조바심이 들었다.
“호진이 만나는 걸 반기지 않으신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저는 호진이가 너무 좋은데….”
“…….”
“제가 좋아하는 사람, 삼촌도 조금만 예뻐해 주시면 안 돼요?”
그 말에 현욱이 낮게 웃었다.
“네가 하는 부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을까.”
그러고는 헬퍼를 불러 정인의 앞에 다과상을 차려 주었다. 온통 정인이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가득한 트레이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 하지만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디저트들이 왠지 독 사과처럼 느껴져 선뜻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정인이 가만히 있자 그는 포장을 하나씩 뜯어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정인은 그제야 다쿠아즈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정인아. 너는 내가 네게 왜 이런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현욱은 정인이 과자 하나를 전부 삼킨 후에야 묘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너도 이제 스물둘이야. 어린 나이는 아니지.”
“…….”
“그런데도 네 말마따나 나는 틈만 나면 너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 네가 무사히 지내는지를 확인하고, 누굴 만나 어딜 가는지를 살피고, 아프지는 않은지 매사 마음을 졸이기도 해. 왜 그러는 것 같아?”
“그건 삼촌이 저를….”
저를 많이 사랑하시니까요.
제일 먼저 생각나는 대답을 내놓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혹시.”
그 마음을 이루는 게 정말 사랑뿐이었을까?
“제가 걱정돼서 그러세요?”
따져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책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뱉어 내고 나니 그만 아득해졌다.
너무 익숙한 상황이라 오랫동안 길이 든 대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나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구나, 하고.
“맞아요, 저 이제 그렇게 어린 나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때만큼 나약하거나 바보 같지 않아요,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지지도 않고….”
그래도 어떻게든 무마해 보겠다고 열심히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나름대로 이어 가던 자기변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더 이상 덧붙일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실체 없는 것들에 목매달고 버티는 동안에는 이 삶에 책임감 같은 것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말문이 막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 말하고 싶어도, 어른답게 이뤄 놓은 일이 없으니 그럴 도리가 없다. 결국 정인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형.”
그런데 등 뒤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뽀얗게 물기를 머금은 호진이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습관처럼 마음이 무너졌다. 조금도 자라지 못한 나를, 여전히 모두에게 짐이 되는 나를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지금 당장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분명 괜찮아질 테니까. 저 사람이 또 한 번 볕 드는 곳에 데려다줄 테니까.
이대로 도망치자 하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 해 줄 사람이다. 그러니 그의 손을 잡기만 하면 된다.
“…호진아.”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뿐이라는 걸.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아무리 두껍게 껴입어도, 스스로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어디에도 갈 수 없다는 걸.
“금방 얘기 끝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래?”
호진은 어두워 보이는 정인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나 싶더니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정인은 그의 등이 멀리 사라진 후에야 현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삼촌, 저 애새끼 맞아요.”
“…….”
“아직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호주에서도 한국에서도 제 또래들이 하루하루 바삐 살아가는 걸 그냥 지켜보기만 했어요. 아무 생각 없던 날이 더 많았던 거 인정할게요.”
그는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사히 잘 지내는지, 누굴 만나는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어린애 돌보듯 그렇게 일일이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마 제가 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일 거예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불안정하고 나약했으니까….”
정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현욱에게 뒤늦은 사과를 건넸다.
“항상 걱정해 주시는 마음 알아요. 그런데도 아직 이것밖에 안 돼서 정말 죄송해요.”
이것밖에 안 돼서 모두에게 참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단지 소리 내 말한 적이 없을 뿐, 실은 늘 가슴 속에 품고 살던 말이었다. 너무 오래 묵은 죄책감이라 그런지 토해 내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래도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앞으로 더 괜찮아질 거고요.”
정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여러 번 곱씹어 본 문장들이 아니었다.
“이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 혼자 청승 떨지 않아요. 낯선 게 싫지도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모르는 곳에 가 보는 것도 좋아졌어요. 아픈 걸 숨기면서 참거나 저 자신을 괴롭히는 일도 다신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주먹을 꼭 쥐었다. 싸늘하게 식어 있던 손안에는 이제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온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정인이 스스로 피워 낸 것이었다.
“이제 저를 보호하지 않으셔도 돼요.”
***
늘 나이답지 않게 공허하던 눈빛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금의 정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언젠가 유호진이라는 사람에게서 본 것과 비슷한 종류의 반짝임이었다. 완전히 여물지는 않았으나 단단하고, 서툴지만 그래서 더 반듯해 보이는.
“…이런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네가 좋아졌다니 기쁘네.”
눈 깜짝할 새 성장해 버린 정인의 모습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듯 위태롭던 모습을 벗은 것만으로도 크게 박수를 쳐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네가 뭘 잘하든 못하든 너는 변함없이 나에게 예쁜 조카야. 그렇게까지 뭔가를 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다만 현욱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항상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던 건, 그러지 않으면 너에게서 아무 말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어. 너는…. 모든 것이 목 끝까지 차도록 참는 법을 너무 잘 아는 아이니까.”
현욱은 손을 뻗어 정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정인아.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왜 항상 삼촌이어야 했을까. 이게 궁금했던 적은 없니?”
온전히 현욱의 욕심만을 부릴 수 있었다면 정인은 애초에 호주로 떠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설령 어떻게든 떠났다 해도 혼자 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며, 언제 돌변해 정인을 괴롭힐지 모를 낯선 알파가 주위를 맴도는 것마저도 끝끝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몇 일들에 사심을 섞었던 적이 있긴 하지…. 가끔은 독단적으로 과하게 나가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며 현욱은 호진이 있을 응접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쨌든 네가 무사히 지내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어. 다만 다친 너를 대놓고 움켜쥘 수 있는 사람이 그중에 나밖에 없었을 뿐이지.”
“…….”
“혹시라도 네가 더 아파할까 봐 말 한마디를 얹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어. 나는 그저 그들을 대신해 너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네 뒤에 서 있었을 뿐이야.”
정인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현욱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받아들이질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니 너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그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들려주는 게 좋겠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입만 벙긋거리던 정인이 문득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마 누구보다도 간절히 그 말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꽉 차올라 있던 눈물이 그제야 툭툭 떨어졌다. 그러자 멀리서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형….”
한달음에 달려온 호진은 현욱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정인의 앞에 무릎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작은 어깨를 끌어안아 오래도록 곁을 지켜 주었다.
***
높게 솟은 빌딩이 대로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좌회전 신호등이 켜지고, 정지선에 걸려 있던 잿빛 세단은 곧 중흥 건설의 지하 주차장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지하 주차장과 연결되는 엘리베이터 앞에는 때마침 출장에서 돌아온 사원 몇몇이 서 있었다. 세단은 그들을 지나쳐 기둥 어귀에 멈춰 섰고, 차에서 내린 이도 곧 건물 어귀에 사원증을 태그했다.
도통 내려올 생각을 않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투덜대던 직원들은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에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얼른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지부장님.”
조금 전 도착한 메시지에 눈길을 콕 박고 있던 원경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원경은 슬쩍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마주한 얼굴 위에는 한결 편안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좋은 일 있으세요?”
누군가 물었다. 원경은 쑥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주말에는 애가 집에 올 것 같아서요.”
***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양손에 웬 보따리를 하나씩 든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준비 다 하셨어요?”
“그렇긴 한데…. 이게 다 뭐야?”
“별건 아니고요.”
그는 주섬주섬 보자기를 풀어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기다란 병 안에 웬 식물의 뿌리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아빠 친구분 중에 담금주로 유명한 분이 계시거든요. 아버님들께서 이런 걸 좋아하실진 모르겠지만…. 어른들 선물로 인기 많다길래 아빠 통해서 사 왔어요.”
“잘 골랐어. 작은 아빠 은근히 술 좋아하거든.”
은근히 말술인 원경에 비해 주량은 한참 달리지만, 술을 좋아하는 것은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술에 금세 시선을 빼앗긴 정인은 병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관찰했고, 호진은 다른 보자기를 살짝 풀어 그 안에 든 것도 보여 주었다. 청자 수반 위에 손바닥만 한 분재 한 그루가 앉아 있었다.
“와…. 이건 아버님이 만드신 거지?”
“네.”
마치 수백 년 묵은 문화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것을 보는 눈이 없는 정인에게마저도 그 가치가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아름다웠다.
“뭐야, 네가 준비한 선물이 훨씬 좋잖아.”
반면 정인이 준비한 것은 흔해 빠진 기성품이 전부였다. 어쩐지 주눅이 들어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럼 이걸 형이 준비했다고 하는 건 어때요?”
“음…. 아니.”
현욱의 집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잠시 묻어 두었던 페로몬 정밀 검사에 대해 운을 떼며, 정인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 함구하겠다고 약속했다.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보다 나은 날은 없다. 그러므로 오늘은 반드시 가족들에게 페로몬 정밀 검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물론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호진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에둘러 말하는 시간도 거쳐야 할 것이다.
“하….”
단지 호진이 함께 간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정인이 준비한 다이너마이트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사람들이다. 정인은 지끈지끈 울리는 골을 탁 짚었다.
“생각만으로도 민망해 죽을 것 같은데…. 어쨌든 폭탄은 오늘 터져야만 해. 그러니까 웬만하면 너도 그때까지 최고로 예쁨받고 있어 봐.”
“…너무 민망하시면 저는 가지 말까요?”
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인은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삼촌 말 들었잖아. 장기적으로 보면 이번에 같이 가는 게 네 이미지에 훨씬 이득일 거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요.”
“그럼 가야지, 어쩌겠어.”
쇼핑백 몇 개와 용돈 총을 살뜰히 챙겨 집을 나섰다.
“그럼 운전은 내가….”
“제가 할게요. 대신 분재 좀 안아 주세요.”
호진은 정인이 운전석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정인은 작은 나무가 든 보자기를 조심조심 끌어안았다.
“…너희 부모님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차창 너머 심심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페로몬에 변화가 생길 만큼…. 그랬다는 걸 아시면, 아무리 아버님이어도 그냥 넘어가시진 않겠지?”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햇살처럼 환히 웃는 모습만이 눈앞을 아른거릴 뿐이었다.
“아직도 그 생각이에요?”
호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 상상 속에 등장한 태산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건 형에게 완치 가능성이 생겼다는 얘기잖아요. 분명 그걸 더 기뻐하실 거예요.”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원경이야 잠시 당황하다가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해 줄 것 같았다. 문제는 정훈이다. 그 성격에 혈압이 올라 쓰러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아, 씨. 그냥 오늘 얘기하지 말까? 나 혼자 가서 그냥 조용히 있다 오는 건 어때?”
“아뇨, 더는 검사 미루시면 안 돼요.”
수백 번 검산해 본 계획이 뿌리부터 흔들렸다. 호진은 그런 정인을 붙들었다.
“이미 선택했으니 이제는 뒤돌아보지 마세요. 오랫동안 고민해서 고른 길이잖아요. 그럼 그게 정답이겠죠.”
“…….”
“그 순간만 견디면 결국 오늘 하루도 지나갈 거예요. 며칠이 더 흐르면 이렇게 고민했다는 것마저 우스워질 거고요.”
그런 날을 많이 지나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정인은 내심 감탄하며 호진을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형이 선택한 사람이라 그래요.”
그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정인을 칭찬했다.
“저도 가끔 자신 없을 때가 있거든요. 아직 코칭 팀이 완성된 것도 아닌데 대회 날짜는 다가오고, 그러다 보니 훈련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막막해질 때도 있어요.”
창밖의 풍경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오래도록 떠나 있어도 눈에 익은 거리, 그 안에 호진이 들어앉아 있으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래서 정말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럴 때마다 제가 무슨 생각 하는 줄 아세요?”
“무슨 생각 하는데?”
이윽고 차는 지상 주차장에 멈췄다. 호진은 내리자마자 한 바퀴 빙 돌아와 조수석의 문부터 열어 주었다.
“뭐겠어요, 당연히 형 생각이죠.”
눈부신 햇살 속에서 호진이 손을 뻗었다.
“나는 최정인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니까 뭐든 잘 해낼 거라고. 그 생각 하면서 한 바퀴 더 돌면 더는 불안하지 않더라고요.”
“뭐야….”
대놓고 웃기엔 민망해서, 정인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목을 답싹 끌어안았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들을 양 손 가득 싸든 채 드높은 건물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 돌아왔지만, 어쨌든 이제 집까지는 딱 한 걸음이 남아 있었다.
“왔….”
비밀번호를 전부 다 누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정훈은 정인을 보자마자 온 얼굴을 무너트리며 웃다가,
“…구나. 들어오지.”
그 뒤에 서 있는 호진을 보고는 표정을 싹 가다듬었다.
정인은 현관으로 들어서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원경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아빠는?”
“과일 사러 간다고 잠깐 나갔다. 그나저나 너희 둘 다 대체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눈치를 보던 호진이 그 말에 주섬주섬 보자기를 풀었다.
“저…. 하수오 20년 담근 겁니다.”
“학생이 하기엔 좀 어려운 선물인 것 같은데. 아직은 이런 걸 주고받기에 조금 이르지 않나?”
10초 만에 감정을 마친 정훈이 물었다. 호진은 진땀을 빼며 그에 대답했다.
“그게, 저…. 연금을 열심히 저축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연봉도 많이 올랐고….”
“아, 그냥 좀 고맙다 하고 받으면 안 돼? 애가 성의껏 준비했다잖아.”
이 술 한 병 값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꿈에도 알지 못하는 정인만 씩씩 열을 냈다.
“최정인. 너 이게 한 병에 얼마인 줄이나 알아?”
“가격이 뭐가 중요해? 아빠 생각해서 가져왔다는데…. 싫으면 내가 다 마셔 버릴 테니까 나 주든가.”
그 말에 정훈은 아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대학 보내 놨더니 연애질에 술에 아주 그냥….”
“하, 내가 술을 대학 가서 처음 마신 줄 알지?”
“뭐?!”
화르륵 불길이 타올랐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현관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던 세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님.”
“아빠….”
“원경아.”
과일 상자를 안은 원경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여기서 뭐 해?”
“이제 막 도착해서요.”
호진은 잽싸게 그가 들고 있던 상자를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랜만이에요, 호진 씨. 오는데 힘들진 않았어요?”
“아닙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앉아요. 귀한 손님 모셔 놓고 마실 것 한 잔을 안 내줬네….”
원경은 우아하게 웃으며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정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호진은 재빨리 그 뒤를 따라 부엌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침내 현관에는 정인과 원경만이 남았다. 정인은 굳게 닫혀 있는 현관문과 원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됐어, 나가면 될 거 아냐.’
정확히 그 자리였다. 원경과 정훈의 가슴을 찢어 놓고 떠난.
그것을 깨닫자 가슴이 꽉 막힌 듯 갑갑해졌다. 정인은 황급히 돌아서서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아빠, 이거 아빠 선물이야.”
팔찌와 카디건, 시계와 구두. 아무리 펼쳐도 부족한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다른 것들도 있긴 한데…. 잠깐만, 호진이가 가져온 것도 있거든?”
고이 모셔 온 분재를 꺼내려는데, 가만히 정인을 보고 있던 원경이 한 걸음 다가섰다.
“잘 지냈어?”
그는 무엇도 필요 없다는 듯 웃으며 정인을 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보고 싶었어, 정인아.”
***
원두를 갈고, 템핑을 마치고, 머신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에스프레소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러는 동안 호진은 안절부절못하며 정훈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버님.”
“왜.”
그리고 정훈은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기척으로만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며칠 전의 영상 통화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정인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한고비 넘겼다 철석같이 믿은 정인이 신나게 여기저기를 비추던 그때, 정훈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 보고야 말았다. 아랫도리에 타월 한 장만 달랑 감은 채 화장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호진의 모습을.
“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없어.”
물론 이미 정훈의 안에서는 ‘운동을 하다 잠깐 들러 씻기만 했다’ 정도로 정신 승리가 끝난 일이었다.
언제 뭐가 고장나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낡은 건물이니 한여름에 수도가 터지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유일한 이웃사촌의 집에서 샤워실을 빌려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외의 경우는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냥 앉아 있어도 돼.”
이 커다란 친구가 죽을 자리를 알고 들어왔는지 모르고 딸려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원경이 그렇게 빨리 돌아오지만 않았다면 정인과 호진을 나란히 앉혀 두고 제대로 한 번 털었을 것이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그저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한숨만 푹푹 쉬며 세 잔째의 커피를 내리는데,
“아버님.”
정훈의 팔뚝 위로 커다란 손이 스륵 감겼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정훈은 굳어 버렸고, 일단 잡아 놓고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호진은 조심스럽게 정훈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러고는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정훈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아버님 다시 뵈니 너무 좋아서요.”
대놓고 쳐 내지 않으니 이때다 싶었는지, 호진은 찰떡처럼 더 가까이 달라붙어 거의 정훈을 끌어안다시피 했다.
“저 그럼 여기서 구경만 해도 돼요?”
이빨 들어갈 자리를 보고 무는 게 분명했다.
“…….”
구경만 하겠다는데 여기서 뭘 어쩌겠는가. 게다가 우유처럼 뽀얀 얼굴로 살살 웃으며 여우짓을 하는 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귀여운 것도 같았다.
“…이제 됐으니 가서 앉아.”
홀라당 넘어가기 직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정훈은 마지막으로 네 잔째의 커피를 다 내린 뒤에야 돌아섰다. 그러나 막상 돌아가 보니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다들 어딜…. 원경아.”
소리 높여 원경의 이름을 부르자 서재 안쪽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잠깐만 기다려요, 정인이랑 뭐 좀 찾고 있어서.”
결국 호진과 정훈은 또 한 번 단둘이 남고 말았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네 잔의 커피와 함께였다.
집 안의 모든 물건은 정인이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막 귀국하고 잠시 본가에 들렀을 땐 도망치듯 떠나느라 제대로 살피질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서재에 꽂힌 책들의 위치마저도 변함 없이 그대로였다.
“이걸 아직도 다 가지고 있어?”
정인은 책꽂이 구석에서 공룡 대백과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럼, 네가 그걸 얼마나 좋아했는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자기 전까지 수십 번을 읽어달라고 떼썼잖아. 사실상 읽을 거라곤 공룡 이름밖에 없는데 뭘 그렇게 계속 듣고 싶어 하는지….”
정인은 이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원경은 바로 어제 일을 이야기하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심지어 파트까지 따로 있었어. 트리케라톱스까지는 꼭 큰 아빠가 읽어 줘야 하고, 그다음부터는 작은 아빠가 읽어 줘야 하고. 그러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 달라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그는 곧 책장 구석에서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등까지 하나하나 살핀 뒤에야 손을 털었다.
“이상하네. 분명 서재에 뒀는데 왜 없지?”
“뭐 찾는데?”
“너 어릴 때 사진. 호진 씨 보여 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
원경은 정인을 데리고 집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는 사이 필연적으로 거실도 몇 번 지나치게 됐다. 호진과 정훈은 어느샌가 사이 좋게 붙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그쯤 할까 하고 있는데, 형이 딱 그러는 거예요. 목표를 제대로 설정해야 하는 거라고. 그 말이 얼마나 감동스럽던지…. 과장이 아니라 정말 제 인생 터닝 포인트가 그 지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
더 들으나 마나 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도저히 그대로 서서 들을 엄두는 나지 않아, 정인은 치를 떨며 돌아섰다.
그다음으로 원경의 걸음이 향한 곳은 정인의 방이었다. 원경은 스스럼없이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정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느리게 한 발을 뗐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정인의 방도 그대로였다. 원경의 어깨를 밀쳤던 침대,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직전 흘끗 바라보았던 책상까지도.
“…….”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저 아래 꿈틀거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말을 던지며 원경과 정훈을 지나쳐 갔던 그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도, 마주 보고 싶지도 않았던 그 모든 것들.
“…아빠는 호진이가 예뻐?”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아 일부러 딴소리를 했다.
“그럼, 예쁘지.”
원경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며 허리를 숙였다.
“너무너무 귀하고 고맙지. 어쩌다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
정인은 아픈 풍경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 원경의 등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서랍을 한 번씩 열어 보고, 책장의 구석을 살피고, 그 위에 놓여 있는 상장과 트로피의 무덤까지 한 번씩 뒤집어 보는 손길 어디에서도 이질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을 백 번도, 천 번도 더 해 본 사람처럼.
“여기도 없네…. 이건 너랑 효준이랑 중학교 입학식에서 찍은 사진이야. 알지?”
이쪽을 보지도 않고 원경이 액자를 하나 내밀었다.
정인은 사진 속에서 바보 같이 웃고 있는 저와 효준의 앳된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물건이었다. 하도 오래 들여다 봐서 등 뒤에 함께 찍힌 사람들의 위치와 차림새까지 욀 정도가 되었을 때쯤, 정인은 호주로 떠났었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아빠.”
그제야 원경을 불렀다. 원경은 선반의 꼭대기를 살피며 응, 하고 대답했다.
정인은 작은 액자의 귀퉁이를 꼭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간신히 입을 뗐다.
“…미안해.”
목구멍에 빠듯하게 걸린 말들을 애써 밀어 냈다. 마치 천 근의 추를 토해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 오래 지난 일이지만…. 정식으로 사과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서. 오늘은 꼭 얘기하고 싶었어.”
원경의 몸짓이 뚝 멎었다.
“정말 미안해.”
“…….”
“그때 이 방에서…. 그렇게 못된 말 한 거, 항상 후회했어. 죽을 만큼 후회하고 또 후회했는데.”
하얗게 비쳐 드는 햇살 속에서 원경이 정인을 향해 돌아섰다.
정인은 볕을 받아 여린 다갈색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거울 속에서 매일 보는 것과 놀랍도록 똑같은 빛깔이었다.
“이제야 겨우 용기가….”
“정인아.”
가만히 멈춰 서서 정인을 바라보고 있던 원경이 한 걸음을 뗐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느리게 다가서서, 정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사과했잖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정인의 뺨에 닿은 원경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사과했잖아, 정인아.”
차분하기만 하던 목소리의 끝 음절도 마찬가지였다.
“눈 뜨자마자 사과했잖아, 매일매일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했잖아.”
깊이 패인 눈 앞머리를 따라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착한 내 새끼, 낮게 되뇐 원경은 기어이 온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정인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정인이 자신의 눈물을 볼 수 없도록 머리를 감싸 품 안에 꼭 가두었다.
그해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는 밤이 유독 잦았다.
해도 달도 저물어 온 세상이 캄캄해질 즈음이면 원경은 정인을 안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면 서글프게 이어지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며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약 기운이 돈다는 신호였다.
‘아빠….’
정인은 종종 멍한 눈으로 원경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곤 했다. 그다음에는 원을 그리듯 동그랗게 그 위를 문질렀다.
배가 아프다며 투정을 부릴 때마다 원경이 저에게 해 주던 일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었다. 이 손은 약손이니 곧 전부 괜찮아질 거라고, 아팠던 기억마저 전부 잊고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꿀 거라고.
‘…아빠는 하나도 안 아파, 정인아.’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리며 원경은 매일 밤 수천 번을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한 번도 아픈 적 없었어. 정말이야.’
하지만 정인은 야속하게도 금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나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며 다시금 용서를 빌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정말로 진심이 아니었다고.
그 대상은 원경이 되기도 했고, 정훈이 되기도 했다. 이따금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와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현욱 씨.’
전화 너머의 현욱은 기나긴 침묵을 기꺼이 기다려 주었다. 덕분에 원경은 늘 조금 더 망설일 수 있었다.
‘저를 보는 게 힘든가 봐요, 정인이가 자꾸 우네요.’
‘…….’
‘많이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 안 될 것 같아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불필요한 죄책감으로부터 정인을 분리하려면 원경 자신에게서도 정인을 떼어 놓아야 했다.
‘우리 정인이, 현욱 씨가 잠깐만 데리고 있어 주면 안 될까요.’
‘…….’
‘부탁할게요.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현욱 씨가 우리 애기 좀…. 돌봐 주세요.’
한 음절씩 내뱉을 때마다 가슴 속의 어딘가가 함께 부서졌다.
‘정인이에게는 출장이라고 말해 둘게요. 며칠만 저택에서 지내 보고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아지면…. 내 옆이 아니어도, 아주 오랫동안 만날 수 없대도 괜찮으니까….’
다만 아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하나만을 가슴 깊숙이 바랄 뿐이었다.
‘정인이 잘 있었어?’
‘응….’
3일 만에 다시 만난 정인은 다행히도 한결 밝아져 있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자고, 한밤중에 일어나 울거나 괴로워하는 일도 없었다고 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아빠, 나 상담 갔다 올게. 삼촌이 데려다주신대.’
‘조심해서 다녀와. 삼촌 말씀 잘 듣고.’
가까워질수록 아파하는 아이를 위해, 원경과 정훈은 마침내 그림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해 현욱이 정인을 돌보기 시작하며 모든 것은 조금씩 나아져 갔다. 정인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에게 끊임없이 미안해하던 것을 멈췄고,
‘아빠, 나 오늘 효준이랑 좀비 영화 봤어.’
‘재미있었어?’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 들려주기도 하고,
‘아빠, 나 호주에서 좀 더 지내고 싶어.’
‘…응.’
그러던 어느 날엔가는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 원경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정인아, 조금 있으면 탑승 시작이래.’
‘벌써? 나 아직 이거 다 못 먹었는데…. 잠깐만, 노트북 충전기는 어디 갔지? 분명 여기 넣었는데.’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마지막 날.
정인은 공항에서 양상추와 햄이 든 샌드위치를 먹었다. 함께 시킨 콜라는 반도 비우지 못했고, 포도 맛이 나는 젤리는 커다란 배낭의 앞 주머니에 넣었다. 원경은 그날 지퍼를 잠그던 정인의 검지 손톱에 작은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고스란히 기억했다.
‘정인아!’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정인은 여권을 든 채 정훈과 원경을 돌아보았다.
‘…건강히 잘 다녀와야 해.’
언제 돌아올 거냐는 물음은 끝끝내 던지지 못했다. 그리고 정인은 곧 수천 킬로미터 너머로 떠났다.
그날부터 원경은 평소보다 조금 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면 꼭 저런 것을 타고 떠났을 정인을 떠올렸고, 달이 높이 떠오르는 날이면 멀리서 정인도 저 달을 쳐다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무리 지어 지나가는 또래의 학생들을 볼 때마다, 정인이 좋아하던 음식점 앞을 지날 때마다 정인을 생각했다. 어쩌다 TV에 호주의 풍경이 나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같은 장면을 돌려 보고 또 돌려 보다 잠들었다.
그 마음에 대가를 원한 적은 없었다. 사과 같은 건 꿈에도 바라지 않았다.
“아직도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어떡해….”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해도,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설령 수천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난대도 나는 아무 조건 없이 너를 사랑할 텐데.
“…아빠는 정말 하나도 안 아팠단 말이야.”
원망하듯 어깨를 두드리자,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 훌쩍 커 버린 아이가 팔을 길게 둘러 원경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미안해.”
그러고는 그 옛날 원경이 그리 해 주었던 것처럼, 가만히 등을 문질러 주었다.
“…항상 미안했어요. 늘 사과하고 싶었어.”
아물지 않은 생채기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원경과 정인은 똑 닮은 눈을 들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이제 와 사과하면 아빠가 또 그 말을 떠올려 버릴까 봐…. 그게 무서워서 여태까지 말할 엄두를 못 냈어.”
“…….”
“세상에서 아빠를 제일 사랑하니까. 아빠가 아프고 슬프면 나도 똑같이 아프고 슬프니까.”
엉켜 있던 실타래의 마지막 매듭을 푸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다. 정인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시간 속의 원경에게 닿기 위해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오늘은 절대 잊지 않을게. 몇 밤을 자고 일어나도 잊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용서해 주세요.”
진심을 담아 원경에게 사과했다. 가장 큰 두려움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아빠, 내가 잘못했어요.”
진작 했어야 할 말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용기를 냈다면 이렇게 멀리 돌아올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는 오래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은 내일보다 하루나 빠른 날이니까. 끊임없이 내일로 미뤄 오던 일을 마침내 해내 버린 첫 번째 날이니까.
“그리고…. 낳아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말에 원경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도 웃었다.
“아빠 덕분에 나는 이제 매일 예쁘고 좋은 것만 보고 살아요. 정말 멋진 사람도 만나게 됐고요.”
파랗게 흔들리는 나뭇잎과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한 열매, 시원한 나무 그늘과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숨을 쉴 때마다 사랑을 말해 주는 가족과 연인,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 일들이 기다리는 세상. 그런 세상을 선물해 준 사람에게 뒤늦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항상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가끔은 넘어지는 날도 있을 거고, 너무너무 슬프고 괴로워지는 때도 분명 오겠지만…. 그래도. 나 이제 이렇게 잘 지내잖아.”
영영 떠오를 수 없기만을 바라며 물 아래로 가라앉던 날들이 그저 까마득한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정인은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원경을 향해 미소 지었다.
“몇 번쯤 더 넘어진대도 얼마든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사는 동안 내가 가끔 넘어져도 아빠는….”
내가 마시고 내뱉는 숨마저 당신이 내린 선물인 것을, 이제야 알겠다.
“아빠는, 이제 정말로 내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선물을, 이제 더는 함부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받은 사랑의 크기만큼 귀히 여기고 아껴 좋은 것들로만 가득 채울 것을 다짐하며 다시 한번 원경을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정말 많이요.”
더는 세상의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단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
“잠깐, 그냥 그렇게 끝났다는 건가?”
한참 동안 호진의 이야기를 듣던 정훈이 툭 끼어들었다. 호진은 네, 하고 대답했다.
“제가 먼저 계약 사항을 위반했으니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을 생각이었는데…. 그 후로 별다른 소식은 없었습니다. 아마 오랜 시간 함께 지낸 것을 배려해 주시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배려? 자네는 도대체….”
소속사 이적에 관해 한마디씩 이어 갈 때마다 서서히 흐려지던 정훈의 표정은 끝내 완전히 구겨졌다. 그에 호진은 살살 눈치를 보았고, 정훈은 차마 말조차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몸만 컸지 속은 순두부 같은 것을 앉혀 놓고 성을 내 봤자 딱히 소용도 없을 것 같았다.
“하…. 일단은 운동만 열심히 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네에. 그리고 아버님, 강의 시간에 형이 필기하는 걸 보면 말이죠….”
호진은 생글생글 웃으며 정인과 함께 보낸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약하자면 둘이 산에 올라가 별을 본 적이 있고, 봄에는 함께 꽃을 보았으며, 강의 시간에는 종종 옆자리에 앉기도 한다는 이야기였다.
호진은 그 모든 일을 정인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것 같았다. 별과 꽃을 바라볼 때 정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정인이 쓰는 글자들의 어디가 얼마나 예뻤는지. 조곤조곤 들려주는 시간의 구석구석 애정이 배어 있으니 아버지로서 기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호진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는데, 저만치서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인과 원경이 드디어 방에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둘이 뭘 그렇게….”
무심코 돌아본 곳에는 눈과 코가 새빨개진 두 부자가 나란히 훌쩍거리고 있었다.
“원경아.”
“형!”
정훈과 호진은 동시에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얼굴이 왜 이래.”
정훈은 눈물에 푹 젖은 원경의 얼굴을 보자마자 싸늘하게 굳어 버렸고, 원경은 행여나 정인에게 불똥이 튈까 얼른 그의 팔을 잡아챘다.
“걱정 안 해도 돼요, 우리 정인이 너무 기특해서 그랬어.”
“…….”
원경과 정인 중 누구를 더 사랑한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반려는 아이를 위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견뎌 온 사람이었다. 그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했으니 원경을 먼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훈은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이제 당신도 좀 마음 놓아도 될 것 같아.”
원경은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픽 웃으며 한 번 더 정훈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나저나 정인이 어릴 적 앨범 못 봤어요? 분명 서재에서 봤는데….”
두리번거리며 묻는 말에 정훈은 짧게 혀를 차고는 침실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어디선가 앨범을 꺼내 들었다.
베드 테이블의 가장 아래 선반, 누운 채로 조금만 손을 뻗어도 잡히는 자리.
앨범은 정훈이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펼쳐 보고 넣어 둔 자리에 먼지 한 톨 없이 누워 있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밤들에 그러했듯이.
케이터링 업체에서 나온 직원들이 부엌과 현관을 바삐 오가고 있었다. 원경과 정훈이 마지막으로 음식을 고르는 사이, 호진과 정인은 사이좋게 소파에 붙어 앉아 앨범을 펼쳤다. 그리고 호진은 표지를 들추기 무섭게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앨범에 달라붙었다.
“허억….”
가장 첫 장에 붙어 있는 것은 노란 모자를 쓰고 해맑게 웃는 최정인 어린이의 사진이었다.
“혀, 형. 너무…. 너무 귀여워요.”
말도 안 되게 동그란 눈매에 빵빵한 볼, 꾹 누르면 멜로디라도 나올 것처럼 통통하고 귀여운 입술까지.
500미터 밖에서 봐도 왕자님이다. 밤이면 해바라기를 잔뜩 엮은 침대에서 잠들고, 간식으로는 진달래꽃을 야금야금 뜯어 먹을 것처럼 생긴 아이였다.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있는 지금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하다못해 수백 번은 돌려 본 ‘소담 초등학교 최정인 선수 경기 영상’ 속의 모습과도 많이 달랐다.
“형은 태어나서 한순간도 예쁘지 않았던 적이 없었나 봐요.”
“…너만 그렇게 생각해, 너만.”
대문짝만한 크기로 박혀 있는 유치원생의 사진을 넘겼다. 곧 새빨간 얼굴을 하고 있는 신생아가 나타났다. 기억조차 없는 시절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정인은 툴툴거렸다.
“이것 봐. 이때는 못났잖아.”
“그럴 리가요. 이 정도면 세계에서 제일 예쁜 신생아 대회 일등감이죠.”
사진이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아기가 조금씩 자랐다. 듬성듬성 가느다랗기만 하던 머리카락의 숱도 많아지고, 얼굴의 붉은 기도 많이 가셨다. 그러는 동안 원경과 정훈은 내내 정인과 함께였다.
“아버님들은 지금이랑 완전히 똑같으시네요.”
“그치?”
시시때때로 새로운 호르몬을 합성하고 분해하는 이형질 보유자들의 생체적 특성상, 그들에게서는 세월의 흔적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서른 즈음에서 시간이 멈춰 버린 듯했다. 안고 있는 아이가 계속 자라지만 않았다면 이 앨범 속의 모든 사진이 바로 어제 찍은 것들이래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흘렀다는 증거로 존재하는 게 자신의 모습뿐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묘했다. 그대로 몇 장을 더 넘기자 정인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다양해졌다. 아주 작을 때는 원경이나 정훈과 찍은 사진이 거의 전부였지만, 머리숱이 제법 인간의 형상을 띨 때쯤 되면서부터는 원경의 오랜 친구인 ‘당진 개떡 이모’와 ‘신사동 재연 이모’, 성필 삼촌의 모습도 종종 보였다.
그리고 친척들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조금 더 뒤, 정인이 일어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었다.
“회장님도 변함없으시네요. 여기 서 계신 분들도 모두 집안 어른이시죠?”
“응. 이쪽이 고모, 이쪽은 막냇삼촌. 되게 어색해 보이지?”
한없이 어색해 보이는 그들의 미소 앞에 정인은 피식 웃었다.
“나 어렸을 땐 아빠들이랑 썩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대.”
“왜요?”
“정확히는 모르는데, 내가 배 속에 있었을 때 큰 아빠가 한 번 심하게 다쳤었대. 그때 뭔가 일이 있어서 처음에는 작은 아빠가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는데…. 그래도 지금 다들 잘 지내는 걸 보면 그사이에 어른들끼리 뭔가 쇼부를 쳤겠지?”
정인이 조금씩 자라며 그들의 얼굴 위에 올라앉은 미소의 색깔도 서서히 변해 갔다. 그러다 마침내 모두가 편안히 웃고 있는 페이지가 나타났다. 그맘때부터는 정인이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똑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옷을 입고 모래사장을 구르는 효준과 정인, 수박즙으로 온통 범벅이 된 정인을 안고 해변가의 선 베드에 길게 누워 있는 고모, 예뻐 죽겠다는 듯한 눈을 하고 정인을 번쩍 안아 든 현욱의 모습까지.
다들 꿀이 떨어지는 가운데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정인은 간혹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울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나올 때마다 호진은 사진 속의 정인이 우는 것조차 견디지를 못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장을 더 넘기자,
“아….”
금방이라도 사진 밖으로 튀어나올 듯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이 보였다.
거대한 목련 나무 아래에는 어김없이 한 노인과 아이가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풀밭에 나른하게 눈을 감은 잿빛의 강아지와 함께였다.
햇살의 색깔마저 선명히 남은 사진이었다. 정인은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너무너무 선명해서, 이대로 조금만 더 쳐다보고 있으면 정말 저 때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할아버님이시죠?”
“응.”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겨우겨우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네모난 풍경 속에 멈춰 버린 소중한 존재들을 만졌다. 별것 없이 밋밋하기만 한 사진인데도 손끝이 스치는 자리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오랜만이다, 우리 할아버지.”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 한 번만 써 넣으면 얼마든 볼 수 있는 얼굴인데도, 일부러 찾아 보려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훈을 위해서, 그리고 또 정인 자신을 위해서.
손주에게는 좋은 할아버지였으나 아들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던 사람이다. 그는 유년기를 고즈넉한 햇살로 물들여 준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정훈의 유년기를 멍들게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사랑하지만 밉고, 원망스럽지만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 버린 사람. 너무나도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모습은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낯설기도 하고, 꼭 그만큼 그리워서 조금은 슬프게도 느껴졌다.
“정인이랑 호진 씨, 와서 식사해요.”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저를 부르는 원경의 소리를 들으며 정인은 몰래 그 사진을 빼냈다. 그러고는 정훈과 원경에게 보이지 않도록 주머니 속에 넣은 뒤에야 앨범을 닫았다.
“아버님, 이제 소원 비세요.”
“그럴까요?”
원경이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소원이 있는지, 그의 얼굴 위로는 이내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정인은 그가 촛불을 끄기만을 기다리다가 비장하게 용돈 총을 들어 올렸다.
“아빠, 생일 축하해.”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수표가 후두둑 떨어졌다.
“…하하하. 이런 것도 준비한 거야?”
원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
효도 선물로 인기가 많다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주문했지만, 역시 현금 부자들에게는 크게 감흥이 없는 듯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적지근한 반응에 풀이 죽어 버린 정인은 플라스틱 방아쇠를 몇 번 당기다 총을 내려놓았고, 떨떠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정훈은 별안간 짝짝 박수를 쳤다.
“재밌는 아이디어네, 요샌 이런 것도 나오나 보지?”
나름대로 정인을 응원해 주려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정인은 이제 속 빈 칭찬에 회복할 수 있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든 수습해 보겠다고 열심히 박수를 쳐 주는 아빠의 마음이 너무나도 눈물겨워,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쉴 뿐이었다.
“…미안. 내년에는 좀 더 오래 고민해 볼게.”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빠한텐 정인이가 선물이니까 그런 거 생각하지 마. 알았지?”
원경은 정인을 다독여 식탁에 앉혔다. 곧 음식들이 하나씩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정인은 달달한 음료를 홀짝이며 생일 선물 대실패의 충격으로부터 차츰 벗어났다. 곧 이상한 의문 하나가 스쳤다.
“…뭐가 이렇게 많지?”
정훈과 원경, 정인 중에서 그나마 뭘 좀 먹는다 싶은 사람은 정인뿐이다. 그나마도 최선을 다해 먹을 뿐 기본적으로 입이 짧은 편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음식에 썩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셰프들이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끝도 없이 내오고 있었다. 심지어 그 사이에 면 요리까지 끼어 있었다.
“흠….”
면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정훈은 면을 즐기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거의 적폐 세력 취급하는 축에 가까웠다. 하지만 저기 보이는 것은 아무리 봐도 버섯크림파스타가 분명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준비되는 음식인 만큼 주문 실수는 확률적으로 일어나기가 어렵고, 원경은 정훈의 음식 취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 면 요리를 주문하지 않는다. 정인 자신은 메뉴 선정에 입을 댄 바가 없으니 저것은 분명 정훈의 주문이었을 텐데.
그의 선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오늘의 변수는….
“형도 파스타 좀 드릴까요?”
신나게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섭취 중인 192cm짜리 운동선수, 유호진 하나뿐이다.
“하.”
기이한 현상을 해석하는 데에 성공한 정인은 저도 모르게 쾌재를 불렀다. 그러잖아도 슬슬 폭탄을 던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호진을 위해 그토록 싫어하는 면 요리까지 주문해 준 것을 보면 시작점이 아주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타이밍이 관건이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확실히 한국은 좀 더 보수적인 것 같아.”
슬슬 밑밥을 깔아야 할 시점이다. 정인은 호진이 퍼 준 파스타를 돌돌 말며 운을 뗐다.
“호주 친구들은 동거도 많이 하고, 결혼만 안 했다 뿐이지 아기까지 낳고 사는 애들도 많았거든. 그런데 한국은 그렇게 많지 않더라고. 해 봤자 건너 건너 몇 명….”
“안 돼.”
정훈은 칼같이 그를 차단했다.
“아니, 내가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사회 현상 얘기하는 거야. 스킨십 같은 것도 어느 정도는….”
“안 된다고 했어.”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듯한 반응이었다.
“스물둘이면 아직 아무것도 모를 나이야. 생활을 공유하는 데에는 서로에 대한 책임이 따르고, 타인에게 책임을 다하는 건 너 하나 건사하는 것을 잘 해낸 뒤의 일이지. 20대는 우선 삶에 집중하고, 함께 지내거나 가정을 꾸리는 일은 서른 넘어서 천천히 결정해도 늦지 않아.”
“…하.”
따지고 보면 원경이 아직 20대일 때 자신을 낳았으니 정훈이 할 말은 아니다. 게다가 둘이 함께 살게 되기까지의 스토리도 꽤나 파란만장했다고 들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그 시간의 모습이 지금 말하는 것처럼 안정적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호진이 보고 있으니 차마 대놓고 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는 게 한이다. 결국 정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시작도 전에 패배해 버린 셈이었다.
“누가 동거부터 한댔나….”
정인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맞은 정훈은 번개탄에 불붙이듯 화르르 타올랐다.
“동거부터 하는 게 아니면, 뭐부터 할 셈이었는데?”
“여보.”
호진이 구마 의식처럼 30분에 한 번꼴로 애교를 부려 풀어 놓긴 했지만, 사실상 정훈은 아직 영상 통화 사태로부터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정신 승리가 위태로운 마당에 갓 대학에 입학한 아들놈이 동거를 두고 슬금슬금 운을 떼고 있으니 환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탁 소리 나게 나이프를 내려놓고 말았다.
“자취 허락했더니 벌써부터 애인이랑 동거할 생각이나 하고.”
“동거할 생각 같은 거 없었다니까. 자꾸 이러면 나 진짜 내일 당장 확 결혼해 버린다?”
상대적으로 끓는점이 낮은 정인은 이미 부글부글 끓다 못해 김까지 내뿜고 있었다.
“결혼…. 너 지금 말 다 했지.”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아빠는 내가 결혼을 하고 말고에 왜 이렇게 집착해? 어릴 때부터 그러더니!”
“당연히 집착해야지! 네 평생이 걸린 일인데!”
원경이 듣는 자리인지라 가능한 한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하던 정훈은 마침내 이성의 끈을 놓았다.
“아하, 그럼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요! 어차피 약혼이고 결혼이고 무조건 해야 되거든?”
“왜!”
“아, 나 호진이랑 있으면 완치될 수도 있다고 했단 말이야!”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그럴싸한 빌드업도 없이 자폭해 버린 정인은 빠르게 눈을 굴려 아빠들의 눈치를 살폈다.
“정인아.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원경이 물었다.
“하…. 씨.”
정인은 바들바들 떨며 테이블 아래로 호진에게 손을 뻗었다. 호진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정인의 손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제대로 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이 순간을 견디면 모든 것이 우스워질 거라던 호진의 말에 기대 입을 열었다.
“들은 그대로야. 나 완치될 수도 있대. 호진이 만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
최대한 돌려 말한다고는 했지만 이게 한계인 것 같았다.
“호진이도 나랑 같은 R1 형이야. 본딩하고 완치된 사례가 두 건인가 있는데…. 나는 어쩌면 본딩 없이 완치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정말 세계적으로 처음 있는 케이스가 되는 거라….”
“…….”
“…국내에서 검사 한번 받고, 외국 기관에도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잔뜩 화가 난 상태 그대로 굳어 버린 정훈의 얼굴이 보였다.
“중요한 일이라 아빠들한테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눈 한번을 깜빡이지 않았다.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정훈의 분노를 제대로 목격한 적이 없는 정인에게는 그저 낯설게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게…. 어떡하겠어, 그래도 일단 나으면…. 좋은 거 아냐?”
애써 웃었다. 그때, 정훈이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늘한 냉기를 뚝뚝 흘리며 다가오는 모습에, 혹시 호진에게 해코지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진 정인은 얼른 호진을 막아섰다. 정훈은 그러는 동안에도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 발짝, 두 발짝, 그리고 마침내 한 발짝.
“아빠, 잠….”
미동조차 없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선 정훈이 문득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정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짧은 탄식이 한숨처럼 귓가에 닿고, 따뜻한 손바닥이 조심스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잔 떨림과 함께 다시 한번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알 수 없는 그 말은 한참동안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다. 최정훈이라는 사람이 아주 오랜 시간 홀로 지고 온 죄책감과 같은 깊이의 울림이었다.
정훈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정인을 안고 품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은 원경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정확히 호진의 말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단지 정인에게 완치 가능성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두 사람은 앞에 지나간 모든 말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자넨 뭔가?”
어느샌가 눈시울을 붉힌 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곳에는 처음부터 이 가족의 일부였다는 듯 자연스레 스며든 호진이 서 있었다. 기다란 팔로 원경과 정훈, 정인을 한 번에 끌어안은 채였다.
“고마워요, 정말 어떻게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복덩이가 세상에 어디 있어….”
정인이 희소식을 가져오기 훨씬 전부터 호진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던 원경은 호진을 꼭 끌어안았다. 호진은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원경의 눈가를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요, 언제라도 좋으니 편하게 연락하고요. 응?”
“아버님….”
그러는 사이 호진의 고향에서 탄생한 분재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술은 장식장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였다. 그 자리를 직접 고른 것은 정훈이었다.
“…아빠.”
부르는 소리에 정훈이 유리장을 닫고 돌아섰다. 훈훈하게 마무리된 분위기 속에서도 내심 후환이 마음에 걸렸던 정인은 쭈뼛쭈뼛 그에게로 다가섰다.
“…우리, 괜찮은 거 맞지?”
“뭐가 괜찮아.”
“내가 호진이랑….”
“정인아.”
그는 애틋한 눈으로 정인을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그렇게 말이 없다가, 언제 이렇게 컸냐는 듯 어깨를 몇 번 두드려보고, 그러다 곧 정인의 손가락을 하나씩 만져 보기도 했다.
“…이게 아직도 이렇게 신기해.”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넌 겨우 이만했거든. 손가락을 쭉 펼쳐 보여 주며 정훈이 피식 웃었다.
“이 녀석이 언젠가는 정말 사람 같은 모양이 되기도 하는 건가, 너무너무 작아서 매일 그런 생각만 했어.”
“…….”
“그런데 손가락도 다 있고, 발가락도 다 있고…. 자꾸만 키도 크고. 참 열심이다 싶었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성인 남자의 손가락인데도 뭐가 그리 신기한지, 좀처럼 눈길을 거둘 줄을 몰랐다.
그것이 어색하지 않은 건, 정훈 또한 원경과 마찬가지로 정인에게 직접 애정을 표현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든 손 내밀면 기꺼이 품에 안아 다독여 주었기 때문이다.
“아빠, 나는….”
오랫동안 먼저 손 내밀지 않아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다.
“…미안했어, 정인아.”
하지만 정훈의 목소리가 한발 더 빨랐다.
“아빠는, 정인이가 아플 때마다…. 대신 아파 주지 못하는 게 항상 죽을 만큼 미안했어.”
너무 오랫동안 속에서 삭이고 삭여, 마침내 언어가 되는 순간에는 파도가 가라앉은 바다처럼 고요해진 마음이었다.
그 커다란 마음 앞에 정인은 침묵했다. 먼저 손 내밀지 않았다는 사실 따위는 그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너와 네 아빠를 만난 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이야. 그렇게 소중한 아이인데….”
한참 동안 손가락의 마디마디를 쓸어내리던 정훈이 한 번 더 정인을 안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 정인이 했던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해 주었다.
“…네가 더는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앞에 무엇이 더 중요하겠니.”
호진과 원경이 있는 거실에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정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괜찮다 뿐이겠어? 오히려 반갑지. 생활 패턴이 규칙적인 사람을 만나면서 같이 닮아 갔다는 이야기잖아.”
“…응?”
“건강한 음식 잘 챙겨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제시간에 잘 잤나 보네.”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살짝 공허해 보였다. 정인은 혹시나 제가 한 말들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닌가 싶어 한 번 더 입을 뗐다.
“그게 아니라, 페로몬이….”
“앞으로도 운동은 꾸준히 하는 게 좋겠다. 건강한 음식도 많이 먹고.”
항상. 규칙적으로. 말야. 단어 단위로 끊기는 말의 구석구석에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제야 정훈의 마음을 알아차린 정인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규칙적으로 살게. 운동도 열심히 하고.”
“좋아. 그렇게 해.”
서로 암묵적으로만 알고 있자는 나름의 합의였다. 두 사람은 짧게 악수를 나누고 현관을 향해 돌아섰다.
호진은 이미 원경의 사랑을 독차지한 채 끝도 없이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아버님, 저 나중에 또 놀러 와도 될까요….”
“물론이지. 언제든 호진이가 들르고 싶을 때 들러 줘.”
어느샌가 호칭까지 ‘호진 씨’에서 ‘호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순식간에 집안사람들을 죄다 홀려 버린 호진은 마지막으로 정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그럼 이제 갈까요?”
“응.”
정인은 두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원경과 정훈은 그들이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주차장까지 따라나섰다.
호진은 언제나 그때던 것처럼 조수석의 문을 열어 정인을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확인한 뒤에야 돌아섰다.
“아빠들 안녕. 또 올게.”
정인이 창밖으로 머리만 쏙 내밀어 정훈과 원경을 돌아보았다.
“그래, 자네도 운전 조심하고.”
“가 보겠습니다.”
호진은 마지막까지 정훈과 원경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머지않아 바퀴가 굴러갔다.
정훈과 원경은 마침내 차가 저만치 멀어져갈 때까지 내내 손을 흔들며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다음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손을 단단히 마주 잡고 집으로 돌아가, 커피를 한 잔씩 든 채 소파에 앉았다.
TV를 트니 익숙한 아나운서의 얼굴이 보였다. 원경은 정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말 다행이에요.”
원경의 얼굴은 행복한 미소로 가득했다. 그것은 정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응, 정말 다행이야.”
빈틈없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언젠가 쏘아 올린 우주선이 이제 막 지구에 도착했다는 뉴스로 한창이었다.
***
“호진 씨. 안에 있죠?”
막 머리를 말리던 중이었다. 탈의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온 매니저는 호진에게 스케줄표 하나를 건넸다.
“전지 훈련 스케줄 초안 나왔어요. 미팅 하나가 밀려서 원래 계획보다 조금 더 길게 있게 될 것 같은데, 한번 보고 괜찮은지 말해 줄래요?”
“감사합니다.”
TH 코퍼레이션 산하의 매니지먼트사로 들어온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우선 정해진 훈련량을 초과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고, 휴식 시간에 다른 공식 스케줄을 잡거나 호진의 동의 없이 일정을 확정 지어 버리는 경우도 전혀 없었다. 몸이야 두말할 것 없이 편했지만, 평생 팀에서 짜 준 스케줄에 블록처럼 맞춰 들어가던 호진에게는 여전히 약간 어색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길어졌네요.”
작은 대회와 미팅을 포함해 8주 남짓으로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이 12주로 훌쩍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호진이 난색을 표하자 매니저는 캘린더 곳곳에 표시된 일정을 짚었다.
“가장 눈여겨본 코치님 스케줄이 꼬여서요. 이날이 아니면 내달 말이나 되어야 미팅이 가능하다는데 그때쯤 호진 씨는 미국으로 넘어가 있을 예정이라…. 차라리 현지에서 조금 더 일찍 훈련을 하고 만나는 게 어떨까 하는데.”
충분히 수긍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선뜻 그러겠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혹시 마음에 걸리는 거 있어요?”
“그게…. 너무 오래 한국을 떠나 있는 것 같아서요.”
이전 같았다면 크게 고민 없이 선택했을 스케줄이다. 하지만 정인과 석 달 가까이나 떨어져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쉽지가 않았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요. 편하게 생각해 보고…. 아참, 돌아와서부터는 부지도 좀 골라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부지요?”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다. 호진은 고개를 쭉 빼서 태블릿에 들어찬 자료를 흘끔거렸다. 그 안에는 서울 외곽에 위치한 토지의 리스트가 주르륵 떠올라 있었다.
“중흥 건설 쪽에서 호진 씨 개인 수영장 지원하겠다고 했거든요.”
***
혈액 검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인은 핸드폰을 들어 호진의 이름을 검색했다.
예전 소속사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표시되는 결괏값부터가 달랐다. 이전에는 끽해야 광고성 홍보 기사가 태반이었으나, TH와의 계약 이후로 나온 기사들은 하나같이 선수로서의 유호진과 그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고 있었다.
물론 댓글들의 상태도 상당히 흡족했다. 간혹 관심이 필요한 백수들이 나타나 밑도 끝도 없이 울부짖곤 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자에 의해 삭제됐다.
“…흐음.”
시간도 남았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까지 한번 뒤져 보았다. 역시나 호진의 부상 장면을 고스란히 담은 영상들은 이미 블라인드 처리된 지 오래였다.
그 깔끔하기 짝이 없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또 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터무니없이 작은 지역 축제에마저 내세워 호진을 골수까지 뽑아먹어 놓고, 고작 이렇게 간단한 작업조차 해 주지를 않아서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었단 말인가.
“이 새끼들을 어떻게 해야….”
“정인아.”
똑똑 벽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윤희가 서 있었다.
그녀는 정인이 태어나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모습을 지켜봐 온 주치의이자 삼한 의료원의 원장이었다. 정인은 손짓하는 그녀를 따라 원장실로 들어섰고, 윤희는 문을 열고 들어서서부터 자리에 앉을 때까지 사전검사 결과가 아주 좋다며 내내 기뻐했다.
“보이지? 불안정하던 수치 대부분이 이제 경계까지 들어와 있어.”
윤희의 말을 따라 대략적으로 결과지를 확인했다. 항상 문제가 되었던 수치들은 최근 다른 병원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대폭 낮아진 채 머물러 있었다.
“정밀 검사에 샘플 분석까지 마치려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고, 정확히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지만 그래도 이정도 수치가 유지되기만 해도 통증은 훨씬 덜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작은 상자 몇 개를 꺼내 정인의 앞에 놓아 주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논의를 해야 할 부분인데.”
“이게…. 뭔데요?”
“앞으로는 네 페로몬 변화를 지속적으로 추적할 거거든, 그러려면 이것들이 필요해.”
한쪽에는 주사기와 빈 앰플 병이, 다른 한쪽에는 알약이 놓여 있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알파랑 형질이 같다고 했지? 이쪽은 그 친구의 혈청을 이용해서 알파의 페로몬을 직접 주사하는 방식이고, 이쪽은….”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알약을 집어 들었다.
“별거 아닌 피임약. 약국에서 파는 거랑 같은 제품이야.”
“…피임약이요?”
“하….”
윤희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피만 안 섞였을 뿐 정인의 고모나 마찬가지인 그녀는 한 개인으로써 치미는 착잡함을 얼른 지워 버리고 다시 의료인으로 돌아왔다.
“성관계를 통한 고전적인 방식을 택하는 거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피임 기구 사용 없이 체내에 직접 페로몬을 받아야 해.”
“…….”
“효과가 나오는 건 복용 후 한 시간 이상이 지난 뒤부터야. 약효가 도는지를 확인하려면 같이 있는 검사지를 손목에 붙인 다음에 색깔이 변하는지 확인하면 돼. 그때부터 24시간까지가 한 사이클이고, 위험한 약은 아니지만 두 알을 먹는다고 해서 효과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루 한 알 이상은 복용할 필요 없어.”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태아 시절부터 자신을 봐 온 사람에게 성생활 컨설팅을 받게 되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알파의 페로몬이 너에게 얼마나 유의미한 작용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 너무 부끄러워할 것도 없어. 주사를 사용하든, 체내 사정을 하든 결국 결과는 같으니 편한 대로 결정해.”
“아니, 선생님. 고민할 게 있겠, 셉, 습니까, 요?”
너무 당황해 말까지 헛나왔다. 순식간에 온몸이 시뻘게진 정인은 곧바로 주사기를 움켜쥐었다.
“무조건 이걸로 해야죠. 이걸로 제 애인 피 뽑아 오면 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이건 그냥 이해를 돕기 위해 세팅한 거야. 그 친구를 직접 데려와야 해.”
“넵, 알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피임약이 있는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 가 볼게요, 선생님.”
윤희는 끝까지 인자한 미소로 응답했고, 정인은 빛의 속도로 원장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콱콱 눌렀다. 어찌나 당황을 했는지 얼굴에 벌겋게 오른 열은 일 층에 내려와서도 좀처럼 식지를 않았다.
볼이며 이마를 손등으로 꾹꾹 만지며 걷는데, 병원 후문 옆에 딱 붙어 있는 커다란 약국이 눈에 들어왔다.
“…해열제 하나만 사 먹을까.”
정말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해열제를 사 먹기 위해서다. 맹세컨대 해열제 말고 다른 걸 살 생각은 없다.
정인은 몇 번인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약국이 있는 방향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
“아, 윽….”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정인은 얕게 차오르는 숨을 내쉬며 호진을 올려다보았다. 그새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간지러웠다.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호진은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거두어 주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버티세요.”
“아…. 나 이제 안 될 것, 같, 하….”
“아뇨, 돼요. 버티세요.”
단호하기 그지없는 호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일 초, 이 초, 삼 초. 끝없이 늘어나는 시간 속에서 마침내 힘이 풀렸다. 다리 하나로 온몸을 지탱하고 있던 정인은 결국 호진의 품 안으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잘하셨어요, 아까보다 30초나 더 늘어났어요.”
“하아, 하아…. 뭐야, 30초나 더 시켰다고?”
호진은 정인을 바닥에 앉혀 주고는 이온 음료를 건넸다. 그러나 정인은 운동 시작 한 시간 만에 녹초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차마 그것을 마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배신감 어린 눈초리로 호진을 노려보았다.
“오랜만에 운동하는데 형 정도면, 하. 엄청 오래 버틴 거예요, 하…. 예전에 쓰던 근육들이, 아직도 다 기억하나 봐요.”
그는 정인의 운동을 봐주는 동안에도 40kg짜리 케틀 벨을 계속해서 장난감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가장 적은 동작으로 가장 힘들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사람처럼, 모든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정인은 결국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호진도 곧 하던 것을 멈추고 정인의 곁에 앉았다.
“수고하셨어요.”
“응, 너도.”
호진은 어디선가 주워 온 팸플릿을 접어 정인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아참, 호진아. 너 혹시 다음 주 수요일에 시간 돼?”
늘 그랬듯 당연히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호진은 말이 없었다. 정인은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금 침울해진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호진은 금세 시선을 내려 정인과 향해 웃었다.
“왜요?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요?”
“으응, 오늘 병원 갔다 왔는데 앞으로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거라고 하더라고. 네 피로 혈청 같은 걸 만들어서 나한테 주사하거나…. 뭐, 그렇게 해서 페로몬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해야 한대.”
그 말에 호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다행이다.”
“뭐가?”
“실은 전지 훈련 때문에 하루종일 고민했거든요.”
정인은 욱씬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앉았다.
“미팅 스케줄 때문에 기간이 많이 늘어났어요. 8주였던 걸 앞뒤로 붙여서 12주로 잡는다는데…. 형 없이 세 달 버티는 거, 솔직히 자신 없어요.”
“허….”
“가게 되면 당장 다음 주 출국이에요. 하지만 형 건강이랑 직결되는 문제가 있다면 더 고민할 가치도 없네요, 어떻게 되든 기존 일정대로 8주만 다녀오는 걸로 할게요.”
“아니, 아니, 잠깐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새로운 코치와의 미팅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아마 지금 호진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최선일 방향을 골라 주는 데에 도가 튼 사람들일 것이다.
“괜히 그렇게 일정을 짠 게 아닐 거야, 일단 다녀와서 생각하는 걸로 해.”
“선수로서의 삶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형보다 우선은 아니에요.”
단칼에 잘랐다. 그러나 호진은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호진아.”
“혈청 만들고, 혹시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닌지도 같이 지켜보고. 그 다음에 다시 일정 잡을게요.”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이걸 어떻게 꼬셔서 내보내야 하나, 정인은 머리를 굴렸다.
“…아.”
그러다 보니 체육관 한구석으로 눈길이 갔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기 전, 소지품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자리였다.
상의와 하의, 자동차 키와 지갑, 해열제. 그 아래에는 아마 약국을 나서기 직전 홀린 듯 구매한 알약이 함께 놓여 있을 것이다.
“흐음, 꼭 혈청 아니어도 된다고는 하던데….”
두 갈래의 선택지 중 ‘어쩔 수 없이’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이제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욕실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넓은 등이 보였다. 뭘 그리도 열심히 하는지, 호진은 한 손으로 펜을 쥔 채 전화 너머의 상대가 하는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정말 단 1퍼센트의 가능성도 없는 건가요?”
뭘 하나 싶어 흘끔 그의 어깨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책상 위에는 아니나 다를까 피임약 설명서가 펼쳐져 있었다.
문단 사이사이 밝혀 놓은 형광펜을 따라 빼곡한 메모가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부작용과 임신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글자들이었다.
“수건 주세요, 아직 물기 덜 닦였어요.”
머지않아 통화를 마친 호진은 정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정인은 너덜너덜한 설명서를 그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대체 누가 이걸 이렇게 열심히 봐.”
“제가요.”
그는 아직 남아 있는 물기를 꼼꼼히 훔쳐 주고는 정인을 꼭 끌어안았다.
“일단 LGS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약은 똑같이 듣는대요. 베타들이 먹는 피임약이랑 구조가 달라서 그렇지 효과 자체는 더 강하다니까 임신 가능성 같은 부분은 안심해도 될 것 같긴 한데….”
“한데?”
“낮은 확률이지만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여기 적혀 있는 거 전부 다요.”
호진이 가리킨 문단을 읽어 보았다. 낮은 확률로 발생할 수 있는 오한과 두통, 졸음이 어쩌고저쩌고. 사춘기 이후로 내내 온갖 약물에 시달리며 살아온 정인에게는 가소롭다 싶을 만큼 별것 아닌 것들이었다.
“야, 이 정도면 애들 먹는 감기약 수준이야.”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알약 하나를 까서 입에 넣자 호진이 기겁하며 정인의 턱을 붙들었다.
“형!”
“왜, 꺼내기라도 하게?”
물도 없이 꿀꺽 삼키려는데, 호진이 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정인의 등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래야죠.”
“읍….”
아차 하는 사이에 입술이 벌어지고, 맞닿은 코끝의 각도가 틀어졌다. 깊숙이 들어온 혀가 정인의 입 안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알약을 찾아낸 호진은 얼른 그것을 이로 물었다.
“그냥 피 뽑을게요. 약 먹는 거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요.”
“걱정해 주는 마음은 고마운데…. 솔직히 너 훈련 안 가고 뻗대는 꼴 보는 게 더 몸에 안 좋을 것 같거든?”
정인은 한숨을 쉬었다.
“큰 부작용 없을 거라고 여러 번 확인받았어. 그리고 네가 걱정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번에 새로 구할 코치랑 올림픽까지 같이 가는 거 아냐? 그렇게 중요한 일정을 고작 이런….”
그렇게 말하며 호진이 표시해 놓은 부분을 가리켰다.
“오만 명 중에 한 명꼴로 발생할 ‘수도 있는’ 미미한 부작용 때문에 망치면 안 되지.”
정인의 일이라면 언제든 걱정 인형이 되어 버리는 사람답게, 호진은 여전히 울먹울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풀어 줄 수 있을까, 정인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댔다. 그러다 마침 묘수가 떠올랐다.
“너 우리 결혼 조지고 싶어? 금메달 따면 청혼하겠다며.”
“결혼이요…. 흐흐.”
“그래, 결혼.”
제대로 적중한 듯했다. 헤실헤실 풀려 버린 표정을 보고 이때다 싶어진 정인은 얼른 새 약을 꺼내 삼켰다.
“그러니까 훈련은 최대한 잘 끝내고 오는 걸로 해. 12주가 됐든, 16주가 됐든.”
“하….”
호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핸드폰에 타이머를 띄웠다. 확정적으로 효과가 나온다는 시간보다 살짝 뒤에 알림을 세팅한 뒤에는 등 뒤에서 정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가기 싫은데.”
어깨 위로 콕콕, 호진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3개월을 떨어져 있는 거예요, 저 정말로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호진이 훈련을 두고 이렇게까지 어리광을 부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자신의 일에 관해서는 늘 똑 부러지던 사람이 말랑말랑 슬라임처럼 축 처져 있는 게 너무 귀여워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으으…. 바보야, 매일매일 통화할 수 있잖아, 딱 삼 개월만 견디면 되는 건데 그게 이렇게 걱정할 일이야?”
“형은 형이 얼마나 예쁜지 잘 모르시잖아요.”
그는 정인의 어깨에 깊숙이 코를 묻었다.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이 딱 그만큼이에요. 제가 형에게 반한 것처럼, 그사이에 또 다른 누군가가 형한테 반해 버리면 어떡해요.”
쪽, 하는 소리와 함께 티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배와 가슴을 지나 목 아래까지 쓰다듬은 호진은 이윽고 정인의 귓바퀴를 살살 깨물었다.
“예뻐 죽겠어요, 정말.”
상의가 말려 올라가고, 뜨끈한 열기를 머금은 손이 갈비뼈 위를 쓰다듬었다. 호진은 곧 앞으로 돌아와 정인을 마주 보고 섰다.
“누구든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 할 거예요.”
“너만 그렇게 생각해, 너만.”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에요.”
목과 가슴에 차례로 입을 맞추며 내려가다가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그러는 사이 정인의 등은 단단한 벽에 닿았다.
“너무 좋아서 자꾸 쳐다보고, 한 번이라도 더 말 붙여 보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몰래 손잡는 상상도 해 보고.”
호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정인의 고간에 얼굴을 묻었다. 얇은 면 위로 느껴지는 얼굴 뼈의 감촉과 뜨끈한 숨. 서서히 아래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다가 조금 더 가까워지면 이런 짓 저런 짓도 하고 싶고, 다들 그렇겠죠.”
“읏….”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팬티마저 끌어 내려졌다. 반쯤 발기한 페니스가 훤히 드러났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민망해 손으로 가리려 하자, 호진이 손을 붙들어 치우며 얼굴을 내렸다. 그러고는 곧장 정인의 것을 입에 넣었다.
“아, 윽….”
허리가 안으로 굽었다. 호진은 정인의 것을 문 채 혀를 놀렸다. 말캉한 혀가 한 번씩 스칠 때마다 페니스는 기다렸다는 듯 부피를 키웠다. 마침내 호진의 입 안을 빠듯하게 채울 때까지는 고작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
그래도 이제 조금 익숙해졌다고 예전처럼 자극이 오자마자 바로 사정해 버리지는 않았다.
질끈 눈을 감고 있던 정인은 내심 뿌듯한 심정으로 눈을 떴다. 하지만 호진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아래에 힘이 풀렸다.
“흐읏…!”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앉은 호진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정인이 절정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분 좋으세요?”
당연하다는 듯 정액을 꿀꺽 삼킨 그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이어서 손가락 하나를 제 입에 넣더니 입 안에 남아 있던 액체를 긁어 정인의 뒤로 가져갔다.
아직 사정의 여운이 남아 있는 탓에 구멍이 불규칙적으로 움찔거렸다. 다물린 주름 위로 미끈한 액체를 펴 바르며 호진은 다시 구음을 시작했다.
정액과 프리컴이 엉망으로 섞여 질질 흐르는데도 볼이 패도록 세게 빨아들이고, 그러다 힘이 풀리는 때를 기다려 손가락을 한 마디씩 안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이렇게 손가락을 넣어 안쪽을 휘젓고, 기나긴 전희를 지나는 동안 몇 번을 더 사정하고, 녹초가 된 채로 몸이 완전히 열리면 그때부터는 이성이 개입할 자리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다가올 일을 이미 알고 있는 몸은 착실하게 반응해 왔다. 구멍을 파고드는 호진의 손가락을 타고 음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정인은 침대에 등이 닿을 때까지도 벌벌 떨며 다음을 기다렸다.
“비비기만 할게요.”
호진은 단단히 곧추선 제 것을 정인의 아래에 대고 문질렀다.
완전히 발기한 성기 위로 무게가 실리자, 그러잖아도 질질 울고 있던 정인의 것은 울컥거리며 묽은 액체를 토했다. 정말로 실금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 흣…. 호진아.”
머릿속이 점점 뜨끈해져 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어 애타게 호진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호진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조금만 더요.”
그는 허리를 움직여 맞닿은 부분에 조금 더 압박을 가했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핏줄에 짓이겨진 귀두는 이제 아예 수도꼭지가 되어 조금의 자극에도 힘없이 선액을 흘렸다.
아, 아. 억눌린 신음성을 내뱉던 정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호진의 어깨를 떠밀었다. 그의 몸 위로 올라타기 위함이었다.
“하, 씨…. 언제까지 물고 빨기만 할 건데?”
평소에도 그렇지만 침대에서의 호진은 웬만해선 정인의 힘에 밀려 주는 편이었다. 살짝만 힘을 주어도 밀면 미는 대로, 눕히면 눕히는 대로 얌전히 정인의 뜻에 따랐다.
하지만 지금의 호진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한 팔로 제 몸을 받치고 엎드려 그저 정인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만요.”
그는 후, 하고 길게 한숨을 쉬더니 정인의 몸을 핥아 왔다. 손목과 발목, 무릎과 오금의 안쪽까지. 이러다 녹아 없어져도 이상할 게 없겠다 싶을 만큼 집요하게 핥으며 계속해서 열을 올렸다.
평소보다 배는 긴 듯한 전희에 정인의 몸은 이윽고 완전히 녹아내렸다. 의지와는 관계없이 페로몬이 새고, 부드럽게 풀린 구멍은 뻐끔거리며 삽입을 재촉했다.
“호진아, 나….”
“…….”
“이제 그냥 해 주면 안 돼?”
더듬더듬 묻는 말에 모든 동작이 멈췄다. 호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잠시 정인을 쳐다보더니,
“잠깐만 뒤로 누워 보실래요?”
등 뒤로 손을 밀어 넣어 간단히 정인을 돌려 눕혔다.
“아악, 흐, 윽…!”
그러고는 손가락 하나를 가차 없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쿨쩍, 하는 소리와 함께 허벅지 위로 묽은 애액이 튀고 페로몬이 확 풀렸다.
한 번 터져 나온 페로몬은 멈출 줄 모르고 사방으로 번졌다. 그에 절로 반응한 호진의 페로몬까지 가세하자 정신이 빠르게 흐려져 갔다.
손가락이 두 개까지 늘어나는 것조차도 모른 채 손가락이 박힐 때마다 앙앙 울었다. 결국 방 안은 섹스를 위한 소리만으로 가득 찼다. 마침내 삑삑 알람이 울릴 때까지.
“아악, 흐…. 흐응!”
손가락이 확 빠져나가며 분수처럼 애액이 솟구쳤다. 경련하며 쓰러지는 정인의 몸을 받쳐 든 호진은 손만 뻗어 피임약 안에 함께 들어 있던 검사지를 집어 들었다.
손목에 뭔가 닿는 것 같았다. 이미 정신이 나가 버린 정인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엉엉 울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넣을게요.”
정인의 몸 안으로 성난 것이 확 처박혔다.
아직 제대로 페로몬을 섞은 게 아닌데도 벌써부터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호진은 단번에 끝까지 처넣은 제 것을 느리게 앞뒤로 움직였다. 좁은 구멍 안을 가득 메운 여린 주름들이 불거진 핏줄 하나하나를 핥아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 씨발.”
성기에 전해지는 자극도 자극이지만, 실로 대단한 건 페로몬이 결합되면서 오는 충족감이었다.
공중에 떠도는 페로몬으로만 서로에게 반응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정인의 몸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 그대로 흡수되니 마치 정인을 통째로 삼킨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저도 이럴진대 정인은 어떻겠는가. 절대적으로 감각이 예민한 정인은 비명 한 번을 지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절정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한 번씩 찔릴 때마다 꼿꼿하게 선 분홍빛 성기가 정액을 쭉쭉 토하고, 통통한 고환이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올라붙을 때마다 구멍이 같이 움찔거렸다. 호진이 그에 덩달아 자극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형…. 하, 너무 좋아요.”
발정기가 아닌 시기에마저 이가 갈리도록 좋다. 그렇다면 진짜 발정기에 페로몬을 교환할 땐 어떨까. 제정신으로 그걸 버텨 내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아, 윽, 으….”
엉덩이를 위로 치켜든 정인은 시트에 머리를 묻은 채 히끅히끅 울었다. 그리고 호진은 동그란 엉덩이에 자국이 남도록 꽉 움켜쥐고 두 손으로 그 사이를 벌렸다. 크게 벌어져 제 것을 삼키고 있는 애널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였다.
기둥이 한 번씩 처박힐 때마다 얇은 피부가 막처럼 주위에 달라붙었다. 그것을 잠깐 쳐다보다 성기를 쑥 빼내고 정인의 몸을 뒤집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쾌감에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얕고 빠른 삽입을 계속하다가 한 번씩 깊게 찍어 누르면 끔찍할 만큼 달콤한 페로몬이 줄줄 샌다. 이런 짓을 하라고 만들어진 것들이니 감히 인간의 이지로 거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호진은 마지막으로 남은 자제력마저 내려놓고 온전히 정인의 몸을 탐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세 달을, 어떻게 버티죠.”
예쁜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를 끌어안았다. 페로몬이 조금씩 섞여 들 때마다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릿속이 흐트러졌다. 마지막까지 선명하게 남는 것은 욕심뿐이었다.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도록 영영 품 안에 가둬 버리고 싶다. 이 사람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나였으면 좋겠다.
“아, 허억….”
그때였다. 호진의 목에 매달려 있던 정인이 갑자기 몸을 떨며 페로몬을 왕창 쏟아 냈다.
하마터면 바로 사정할 뻔했다. 호진은 이를 악물어 사정을 참았다. 곧바로 정인의 기색을 살피려 고개를 내리는데,
“하아, 흐, 으응….”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련하던 정인이 손을 내려 호진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아직도 호진의 것이 박혀 있는 제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가늠할 새도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이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던 어느 순간,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하나 싶더니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
“아윽….”
조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히트 사이클은 아니다. 하지만 머리를 달구는 쾌감만큼은 마지막 히트 사이클에서 느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인은 제 위에 버티고 있는 호진의 몸을 끌어안은 채 스스로 움직였다. 반응할 수 있는 모든 곳이 커다란 성기에 꽉 짓눌려 있어, 조금만 움직여도 느끼는 지점 전부가 한 번에 긁혔다.
다리 사이로 흐른 음수가 시트 위에 짙은 얼룩을 남겼다. 짐승처럼 알파의 몸을 갈구하면서도 끊임없이 목 안쪽이 타올랐다. 어쩔 줄 모르고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호진아, 하아…. 나 이상해, 흑….”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쾌감은 올라올 데까지 올라와 있는데, 이상하게 조금도 충족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세 번째로 사정하고, 벌벌 떨며 호진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결박하듯 정인의 손마디를 움켜쥐고 입술을 내렸다.
무자비한 피스톤질과 함께 함께 혀가 얽히고, 이가 부딪쳤다. 젖은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타액과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호진에게서 흘러내리는 모든 것을 다 받아 마셔야만 할 것 같아 마음이 바빠졌다. 그리고 머지 않아,
“안에 할 거예요, 이제.”
어마어마한 양의 페로몬이 정인의 몸을 뒤덮으며 사정이 시작됐다.
몸 안에서 끄떡거리는 기둥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외설적이었다.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려 하자 이 사이로 호진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그것을 깨물었다. 아, 하고 울리는 낮은 신음에 온몸의 뼈가 울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낼 기세로 우물거리는 구멍은 정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자아라는 게 사라지는 듯한 감각 속에서, 입 안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을 핥으며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흐….”
제대로 생각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정인은 다시금 허리를 움직였고, 사정 직후임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은 호진의 것은 그에 맞춰 또 한 번 안쪽을 파고들었다. 결합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이 아니었다면 사정을 했다는 것조차 눈치챌 수 없을 것 같았다.
체위는 몇 번을 더 바뀌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옆으로 누워 박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호진이 침대에 무릎을 꿇고 정인을 허공에 들어 올리기도 했다.
더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멈췄다간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정인은 그의 목에 매달린 채 엉엉 울었다. 그럴 때마다 호진은 안타깝다는 듯 눈물을 핥아 주면서도 계속해서 제 것을 박아 댔다.
“잠깐만 이렇게 누워 보세요.”
그가 시키는 대로 등을 대고 누웠다. 그러자 호진이 별안간 정인의 목 아래에 베개를 받치더니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결국 뒷머리는 바닥에, 엉덩이와 다리는 허공에 뜬 상태가 되어 버렸다. 곧 호진의 것이 수직으로 쑤셔 박혔다. 잔뜩 휜 성기의 각도가 말도 안 되는 지점까지 기울어지며 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아, 아, 악!”
느끼는 지점을 제대로 찔려 눈앞이 허옇게 탈색됐다. 그와 동시에 정인의 얼굴 위로 정액이 뿌려졌다. 스스로의 것을 흠뻑 뒤집어쓴 정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고,
“아….”
그 모습을 제대로 목격한 호진은 두 번째로 사정했다.
울컥, 울컥. 내부에 정액이 뿌려지며 페로몬이 섞여 들었다. 그는 정인의 골반을 두 손으로 꽉 잡은 채 전부를 토해 낸 뒤에야 눈을 떴다.
하아, 하아. 거칠게 이어지는 숨소리 속에 정인의 다리가 바닥에 닿았다. 호진은 곧장 티슈를 들어 정인의 얼굴에 묻은 정액을 닦아 주었다.
“하아, 하…. 이제 좀 괜찮으세요?”
진이 다 빠져 버린 정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좀 이상했어, 히트 사이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제가 실수로 마킹한 것 같아요. 죄송해요.”
호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너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정인이 모르는 개념은 아니었다. 우성 알파들 중 일부는 일정 기간 동안 상대에게 자신의 페로몬을 남길 수도 있다고 들었다.
“저도 몰랐는데, 그런가 봐요.”
“그으래…. 이거 얼마나 가는데?”
“열성 오메가들은 일주일 정도고 우성은 하루 이틀 정도라고 했던 것 같아요.”
정인은 제 손목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마치 향수라도 뿌려 놓은 것처럼 살갗 위에 호진의 향기가 짙게 묻어 있었다. 썩 괜찮은 감각이었다.
“일단 나도 이론상으로는 우성이니까 하루 이틀은 가겠네.”
“하…. 진짜 죄송해요. 동의 없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호진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단단한 허벅지 위에 머리를 대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한 세 달쯤 갔으면 좋겠는데.”
손을 뻗어 호진의 뺨을 만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던 표정이 살짝 풀렸다.
“…너만 자신 없는 거 아니야, 호진아.”
정인은 나른하게 하품하며 웃었다.
“세 달이나 너 못 보는 거 나도 정말 싫어. 하지만…. 너에게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잖아.”
그런 일을 가진 호진이 조금은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지금이어야만 하는 일을 하고 돌아와. 그럼 또 아주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 있을 거야. 약속할게.”
아이들 장난치듯 손가락을 걸었다. 호진은 그제야 정인을 따라 웃었다.
“…네, 형.”
그럼 다녀올게요. 순순히 대답하며 고개를 내려 정인의 이마에 입 맞췄다. 훌쩍 가까워진 호진의 몸에도 어느샌가 정인의 향이 담뿍 묻어 있었다.
***
무심코 핸드폰을 열자마자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정인은 부산스러운 복도 한복판에 멈춰 섰다.
형 ㅎㅎ 저 이제 훈련 가요♥♥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여러 개의 하트 이모티콘을 붙여 보냈다. 곧바로 훈련을 떠났는지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손목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며칠간 남아 있던 호진의 향은 이제 씻은 듯 사라진 채였다. 그게 못내 서운해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누군데? 호진이?”
몇 걸음 앞서 걷던 효준이 뒷걸음질로 돌아왔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정인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뭐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석 달만 있으면 돌아온다며.”
“내가 뭐.”
“아주 죽을상을 해 가지고…. 네가 직접 봐.”
정인은 불 꺼진 액정화면 속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효준의 말마따나 큰 우환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간 지 한 열흘은 됐나?”
“…일주일도 안 됐어.”
일주일은커녕 고작 엿새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정인은 까마득하게 남아 있는 날짜를 헤아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한국 스태프들 몇몇이 동행한다기에 공항까지 배웅을 나가는 것은 참았지만, 적어도 떠나기 전에는 그럴싸한 인사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호진의 비행 스케줄은 이른 아침에 예정되어 있었고, 아침잠이 많은 정인은 결국 반쯤 잠든 채로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밤새울 걸 그랬어. 가는 것도 제대로 못 보고…. 호진이가 기다리는 쪽이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제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따뜻하게 안아 주던 팔, 그리고 이마에 닿던 입술의 감촉뿐이다.
이른 아침이면 현관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없다는 게, 마주 앉아 밥을 먹거나 이유 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웃을 수 없다는 게. 이렇게까지 허전한 일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때 조금만 더 힘내서 한 번만 안아 볼걸.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 정말 많이 좋아한다고 말할걸.
뒤늦게 후회해 봐야 호진은 이미 지구 반대편에 있으니 이제 와 어쩔 도리도 없다. 뒈져서도 잘 수 있는 잠을 조금 더 자겠다고 그걸 놓친 스스로가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아주 염병 천병을 떠는구나, 누가 보면 한 삼 년쯤 떨어져 지내야 되는 줄 알겠다.”
효준은 시무룩해진 정인을 타박했다.
“그리고 너 아까도 걔랑 영상 통화 했잖아. 수업 시간에도 내내 문자 하더니…. 이러다 아주 호주까지 따라가겠다?”
“집에서 종강하기 전까진 꿈도 꾸지 말래.”
당연히 그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낌새를 눈치챈 정훈에게 칼 같이 차단당하고야 말았다.
‘출결을 망쳐 가면서까지 애인을 보러 가고 싶은 학생은 그냥 학적에서 파 버리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며 싸늘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작은 아버님도 그러셔?”
“응, 둘이 한패더라고.”
정훈을 빠르게 손절하고 원경에게 달라붙어 되도 않는 애교를 떨어 봤으나 먹히지 않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학기가 끝난 뒤에 재협상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럼 회장님 전용기 띄우면 안 돼? 주말 끼고 슥 갔다 오면 되지.”
“…그게 되겠냐. 따지고 보면 내 졸업장에 제일 집착하는 사람이 삼촌인데, 말 꺼내자마자 가루가 되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투덜거리며 학생 식당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제 제법 조작에 익숙해진 키오스크 화면을 띡띡 눌러 효준과 저의 식사를 계산하려는데,
“어? 정인이 형.”
“점심 이제 드세요? 저희랑 같이 드실래요?”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동기들이 정인에게 알은척을 했다. 정인은 효준을 흘끔 돌아보며 눈짓으로 괜찮겠느냐 물었다. 그러자 효준이 입을 떡 벌렸다.
“나야 상관없긴 한데…. 밥을 같이 먹어 주는 친구가 나 말고 또 있어?”
“…하.”
그를 무시하고 우선 동기들의 식사까지 주문을 마쳤다. 그들은 식권을 들고 나란히 줄을 서서 기다리는 내내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커피는 저희가 살게요. 근데 형, 그거 알아요? 다음 주에 이진주 교수님 기습 퀴즈 낼 수도 있대요.”
“맞아요. 그리고 이거 엄청난 핫이슈인데, 과대 형이랑 예솔이랑 사귄대요. 대박이죠….”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사건들이 여러 번 지나갔다. 마침내 자리에 앉자, 정인의 식판을 흘끔거리던 동기 하나가 물었다.
“어, 형 수저 안 가지고 왔어요?”
“아…. 그렇네.”
정인은 그제야 자신이 수저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에도 이런 적 있는데.”
소스에 푹 파묻힌 돈가스와 나물을 멍청히 쳐다보며 자리에 앉아 있던 3월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당연하다는 듯 어디선가 수저를 들고 나타나 함께 밥을 먹어도 되겠느냐 묻던 호진의 모습도.
“금방 가져올게, 먼저 먹고 있어.”
정인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수저가 잔뜩 꽂혀 있는 곳까지 돌아가 뒤를 돌아보니, 정인을 기다리기 위해 아직까지도 숟가락을 들지 않은 효준과 동기들이 보였다.
재빨리 수저를 챙겨 그들에게로 돌아가는 길, 꼭 이만큼의 거리를 성큼 건너왔던 호진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졌다.
***
아직 남아 있는 호흡을 뱉어 내며 거리를 가늠했다. 이제 곧 700미터째의 반환점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무게 중심을 빠르게 이동시키며 팔을 뻗었다. 조금 전 만든 파문이 물살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를 감지하자마자 몸이 절로 움직여 가장 유리한 지점을 찾았다. 오차 없이 떨어지는 태엽의 이음새처럼, 모든 일이 정교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호진은 잠영을 마치고 나서자마자 스트로크를 시작했다. 평소 훈련하던 수영장과 규격에서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쉬는 날도 없이 훈련에만 매진하던 때보다 훨씬 좋은 효율을 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체력은 빠르게 고갈되어 갔다. 마지막 반 바퀴를 남겨 둘 때쯤에는 근육의 피로도가 많이 쌓여 거슬리는 부위가 하나둘 생겨났다. 그리고 호진은 몸이 힘들어지자 습관적으로 정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단지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선이 훌쩍 높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에 없이 가뿐한 마음으로 마지막 한 번의 스트로크를 때렸다.
“하아, 하아….”
물 밖으로 벗어나자 보조 코치가 타이머에 찍힌 시간을 불러 주었다. 썩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다. 잠시 레인을 비워 준 선수들은 호진이 수경을 올리기 무섭게 격려의 환호성을 보냈고, 호진은 뒤이어 훈련을 할 선수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풀을 벗어났다.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가 다가와 타월을 건넸다.
“수고했어요, 호진 씨.”
“감사합니다.”
그는 오후 일정을 하나씩 불러 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미팅 사이에 훈련과 휴식이 끼어 있는 것이 일과의 전부인 것 같았다.
“아 참, 그리고 한국에서 소송 관련해서도 묻던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소송이요….”
그를 떠올리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매니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휴게실이 있는 방향으로 호진을 이끌었다.
얼마 뒤에 있을 대회에 참가할 선수들이 이따금 복도를 지나쳐 갔다. 대부분이 국제 대회에서 한 번쯤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으면서도 호진의 머릿속은 조금 전 매니저가 언급한 소송 건으로 가득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횡령 사건이다. 정인과 함께 참석한 파티에서 다른 선수들이 말했던 것처럼, 여태까지의 소속사가 호진과 스폰서 사이에서 사익을 챙긴 정황이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물론 TH에서 꾸린 변호인단은 이미 모든 것을 전부 파악해 소송 준비까지 마친 채였다. 남은 것은 호진의 확인뿐이나, 차마 그 일을 진행하겠다 말할 자신은 없었다.
“…….”
그들이 얼마를 가져가든 호진은 처음부터 돈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마음이 시끄러운 것은, 여태까지 자신이 보고 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부상까지 무릅써 가며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일정을 소화해야 했던 이유가, 코치가 목숨을 걸고 스폰서에 매달려야만 했던 이유가 고작 몇 푼의 돈 때문이라는 사실이 참 아팠다.
수많은 유망주들 중의 하나이던 시절부터 마침내 금메달을 따기까지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숱한 고비를 함께 넘기며 왔다. 평생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관계의 끝은 어떻게든 받아들였어도, 완전한 마침표를 찍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대로 나만 견디면, 조금 참으면. 모두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매니저님, 혹시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매니저를 붙들고 물었다.
“이대로 없는 일처럼 묻어 버리면 조용히 끝낼 수도 있는 건가요.”
“호진 씨가 원하는 방향이 그렇다면 그렇게 처리해야죠.”
그는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권하고 싶지 않아요. 끝맺지 않고 덮어 두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에 남을 테니까요.”
“…….”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해 봐요.”
맨몸에 트랙 톱만 걸쳐 입고 매니저를 따라 수영장을 나섰다. 지상 훈련을 담당하는 트레이너들이 곧 따라붙어 수중 훈련의 성과를 분석했다.
그러는 동안 호진에게는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호진은 시간이 비자마자 곧바로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
정인이 보내온 메시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를 걸까 하다가. 지금 전화를 걸면 많이 보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도 그만두었다.
***
꽤 늦은 시간인데도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는 않았다. 정인은 노을 저무는 창가를 지나쳐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몇 되지 않는 필기구와 포스트잇이, 정면에 보이는 벽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히히 웃고 있는 최정인 어린이를 잠깐 들여다보다가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특별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고요가 새삼스럽게도 낯설었다. 호진을 만나기 전에는 매일같이 마주하던 것들이었는데도.
함께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혼자가 되니 이렇게 선명히 다가온다. 마치 늘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네가 홀로 남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아직 사람이 덜됐네.”
혼자서도 행복할 줄 알아야 진짜 행복한 사람이라던데, 어쩐지 혼자서는 별로 행복하지가 않은 것 같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누구도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를 떠올리니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사실은 엄청나게 외로웠던 거면서. 타인이 싫었던 게 아니라, 상처받는 게 두려워 비겁하게 꼭꼭 숨었던 거면서.
어쨌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세워 보기로 했다.
내일은 새로 알게 된 가게에서 점심을 먹어야지, 저녁에는 효준을 만나 쇼핑이든 뭐든 하고, 주말에 가족들과 외식까지 마치면 이번 주도 어떻게든 마무리될 것이다. 아직 호진을 만나려면 한참은 멀었지만 이런 식으로 하루씩 넘기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끝이 나지 않겠는가.
“어, 여보세요?”
열심히 플랜을 짜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정인은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 혀엉.
“호진아….”
분명 아침, 점심 통화에서 들은 목소리 그대로인데도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다고 면박하던 효준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체면을 차리기엔 정말로 호진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 저녁은요?
“아직이야, 너는? 훈련 다 끝난 거야?”
그는 시시콜콜 하루 일과를 보고했다. 아침에 말해 준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물론 그것은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서로 뻔히 아는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냥 그게 좋아서 온 마음이 말랑말랑 녹아내렸다.
- 너무 보고 싶어요, 형.
“…어차피 2주만 더 있으면 종강이야. 마지막 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갈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똑같이 보고 싶다고 말해 버리면 그의 마음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러자 호진이 웃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 뒤로 자동차 소리, 바람 소리가 지나쳐 갔다.
“밖이야?”
- 네, 바람 좀 쐬러 나왔어요.
어쩐지 조금 기운이 없는 듯한 목소리였다. 정인은 망설이다 물었다.
“목소리가 안 좋은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 있어?”
잠깐의 공백이 생겼다. 호진은 별일 아니라며 운을 뗐다.
- …소송 때문에요,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알아서 다 해 주실 건데.”
호진의 소송 건을 맡은 변호인단은 설령 그의 과실이 백 퍼센트래도 얼마든 뒤집을 수 있을 만큼 수준 높은 팀이다. 왜 그런 걸 사서 걱정하나 싶어 묻자, 호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소송까지 가게 되면, 전부 알게 될 것 같아서요. 그 사람들이 저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이었는지까지도.
정인은 말없이 그에 귀를 기울였다.
- 알아요, 해야 한다는 거.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래야 하고, 앞으로 비슷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를 후배들을 위해서도 어떻게든 끝까지 가는 게 옳겠죠. 그래도….
호진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게 가라앉았다.
- 저는 코치님의 진짜 마음을 모르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사실은 도망치고 싶어요. 되게 비겁하죠.
끝에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앉아 전화를 붙들고 있을 호진의 모습을. 그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 애가 달았다.
- 사람의 마음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호진이 물었다.
- 앞으로 또 이렇게 무언가에 실망하게 되는 날이 올까요?
“…응.”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호진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란 말을 해 주지 못하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정인 또한 온몸으로 그를 겪으며 지냈으니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 많이 실망하게 만드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엄청 슬픈 사건이 생길지도 몰라. 그래도…. 그건 결국 나중의 일일 테니까 지금은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정인은 피식 웃었다.
“네 말이 맞아. 그 좆같은 새끼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속속들이 다 알고 나면 너는 분명 상처받을 거야.”
누구보다도 따뜻한 사람이고, 세상을 비틀어 보지 않는 사람이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간다고 가정해 봐. 지금의 너는 괜찮겠지만 과연 먼 미래의 호진이도 괜찮다고 생각할까?”
정인은 물었다.
“너도 지도자가 될 거라며. 그럼 언젠가는 그 코치 새끼랑 같은 입장에 서게 될 거잖아.”
- …….
“그런 짓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잘해 줄 수 있었다는 걸 네 몸으로 증명해 내고 나면, 어린 선수 갈아서 제 배때지나 불리려던 새끼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겠어?”
정인도 언젠가 느껴 본 바가 있는 마음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일단 지금 이 상태를 견딜 수는 있으니 더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를 들쑤시지 않기만을 바라던 때가 있었다.
“내 말도 완벽한 정답은 아닐 거야. 하지만 만약 내가 너라면…. 힘들어도 지금 끊고 다음으로 넘어갈래. 다른 친구들이나 후배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 미래의 유호진을 위해서.”
정인은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반드시 네 곁에 있을 거야. 혼자 견딜 필요 없는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전화 너머의 호진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너한테 소송 어떻게 되는지 아예 말하지 말라고 할까? 그런 거 되나?”
공허한 바람 소리에 마음이 급해진 정인은 얼른 노트북을 켜 당장 오늘 출발하는 비행기 편을 찾았다.
“아, 씨발. 나 모르겠다. 그냥 지금 갈 테니까 기다려. 알았지?”
호진이 큰 소리로 웃었다.
- 절대 그러지 마세요. 내일모레가 시험인데 오늘 자 비행기 탔다간 앞으로 금메달 스무 개 따 가도 결혼 못 해요. 미래의 최정인은 이걸 더 골치 아파 할 거예요.
“네가 속상하잖아.”
- 훨씬 나아졌어요, 형이랑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웃는 소리를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정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졌다.
“종강할 때까지 잘 있어야 돼, 알았지?”
- 네, 그럴게요. 근데 2주도 너무 긴 것 같아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 이러다 형이 제 얼굴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죠?
“하하하, 무슨 그런 생각을 해.”
- 혹시 모르잖아요, 지금도 한 1년은 못 본 것 같은데 2주를 또 어떻게 기다리지…. 여기 햇볕도 센데 제가 그동안 새카맣게 타 버리면 또 어떡해요? 형이 절 잊어버리면요?
대놓고 어리광을 부리는 게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났다.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널 잊어버려.”
정인은 깨끗하게 정돈된 방 안의 풍경을 돌아보았다.
“나 이제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도 개고, 샐러드도 시켜 먹고, 심심하면 청소도 해. 자기 전에 솔잎이랑 개똥이한테 물 뿌려 주는 것도….”
그때였다. 불현듯 어떤 장면 하나가 눈앞에 확 떠올랐다.
‘내 눈에도, 손에도, 발에도 다 있어요.’
이게 뭐지? 언제 있었던 일이지?
잠깐 생각하던 정인은 다시 호진과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하여튼…. 내게 새로 생긴 습관은 대부분 너랑 같이 만든 거야. 그러니 세 달이 아니라 30년을 떨어져 지내야 한다고 해도 널 잊어버릴 순 없겠지.”
그에 호진은 쑥스럽게 웃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정인도 똑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이윽고 간지러운 인사가 이어졌다. 형 먼저 끊으세요, 아냐 너 먼저 끊어, 그럼 셋 하면 같이 끊을까요, 왜 아직 안 끊으셨어요. 끈질기게 서로의 목소리를 붙들고 늘어지다가 겨우겨우 전화를 끊은 후에는 방 안이 온통 어둠으로 가득했다.
“진짜 바보 같아….”
정인은 피식피식 웃으며 스탠드 불을 밝혔다.
이제 정말 공부를 할 생각으로 아까 펼쳐 둔 책을 끌어오는데, 정면에 붙은 사진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정인은 아무 생각 없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호진과의 통화 중에 떠오른 어떤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내 눈에도, 손에도….”
고장 난 TV 화면처럼, 지직거리는 잡음으로 가득한 기억을 되새기던 어느 순간이었다.
‘정인아.’
눈앞이 하얀 햇빛으로 물들었다.
반짝거리는 딸기가 콕콕 박힌 케이크와 흰색 플라스틱 포크, 바람을 따라 넘실거리는 잔디와 아직은 어리던 보리의 꼬리.
그리고 입가에 더덕더덕 생크림을 묻히고 올려다본 곳에, 해를 등지고 서 있던 누군가의 모습.
‘정인아, 아가야.’
다시 한번 부르는 소리에, 별안간 머릿속의 화면 위로 깨끗한 상이 맺히며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 눈에도, 손에도, 발에도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림자의 길이마저 선명했다.
불현듯 정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조부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날 할아버지가 내게 선물한 케이크는 마치 첫눈처럼 새하얀 생크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정인아.’
정말 예쁜 케이크였다. 손을 대면 망쳐 버릴까 봐 박스를 열어 놓고도 한참을 망설여야 했을 만큼.
어쩌면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날 그는 끝끝내 케이크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한참 동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정인이가 할아버지를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던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맨날 할아버지 만나러 올 건데요. 아니…. 일요일에만.’
매일매일 만나던 것이 이틀에 한 번, 나흘에 한 번으로 줄다가 결국엔 일요일 오후에만 겨우 한 시간 남짓을 만날 수 있게 되어 버릴 무렵의 일이다.
나는 매일 집에 가기 싫다며 떼를 썼고, 그를 보다 못한 비서가 다가와 다음 일정을 이야기할 때까지 오 분만, 딱 오 분만 더 함께 있자며 나를 달랬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헤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모두가 조용했다.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누구 하나 말리는 이가 없었다. 비서도, 아빠들도, 삼촌들과 고모도 마찬가지였다.
‘어쩌지, 다음 주 일요일부터는 정인이를 만날 수가 없는데.’
‘왜요?’
그는 이제부터 머나먼 나라를 차례로 여행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남반구, 겨울이면 끝도 없는 밤이 찾아오는 북반구. 얼음과 물을 차례로 건너 아주 먼 어딘가에 도착하면 그다음에는 아주 오랫동안 쉴 계획이라고.
‘이제 못 만난다고요? 그럼 어떻게 해요?’
‘아이고, 정인아….’
내가 케이크를 문 채로 울먹거리자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안아 주었다.
‘만나지 못해도 늘 정인이 곁에 있을 거야. 계절마다 제일 예쁜 엽서도 골라 보내마.’
‘엽서요…?’
그는 엽서를 보내 주겠다는 말에 울음을 뚝 그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마주한 눈동자 속에는 코끝이 빨갛게 부어 못생겨진 내가 쏙 들어 있었다.
봄 햇살은 금세 저물어 갔다. 내 어깨 위로는 폭신한 담요가 덮였고, 마침내 케이크 두 조각이 전부 사라질 즈음하여 그는 나를 등에 업었다.
‘우리 아가. 아빠들 말 잘 듣고, 반찬도 골고루 먹고, 친구들이랑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할아버지가 정인이를 많이 사랑했다는 걸 기억해 줄 수 있겠니?’
그래.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성큼 다가온 마지막 앞에 선 그와, 생의 출발선으로부터 몇 발짝 떼지 못한 나의 어린 시절은 그 순간부터 교차점을 지나 다른 방향을 향해 뻗어 가기 시작했다.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나는 그저 그의 등이 좋아 웃기만 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 아빠의 아가고, 우리 아빠는 할아버지의 아가니까요. 내 얼굴에는 아빠들이 준 사랑, 고모랑 삼촌들이 준 사랑, 할아버지가 준 사랑도 전부 들어 있어요. 거울을 보면 다 알아요.’
‘…….’
‘내 눈에도, 손에도, 발에도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그의 등에 업혀 느리게 정원을 걸었다. 뉘엿뉘엿 가라앉은 황금빛 햇살이 잔디를 온통 물들이고, 나무마다 드리운 그림자가 훌쩍훌쩍 길어질 때까지.
어느샌가 저택의 현관이 가까워졌다. 그 앞에는 하루 종일 나타나지 않았던 비서와 가족들이 서 있었다.
그는 그제야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바라보듯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가야, 크다 보면 언젠가 할애비가 많이 미워지는 날이 올 게다. 영영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다만….’
‘나 집에 가기 싫은데.’
그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나는 훌쩍 다가온 헤어짐을 느끼자마자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살다가 어느 순간 힘에 부치는 때가 오면, 아무리 미워도 한 번만 눈을 딱 감고 기대러 오렴.’
그는 힘주어 나를 끌어안았다. 머리에, 이마에 입 맞추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네게 진 빚의 일부를 돌려받아 그로써 다시 일어나거라.’
그다음에는 아직까지 내 입가에 묻어 있는 케이크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털어 내고, 구겨진 옷자락도 반듯하게 펴 주었다.
‘건강해라, 행복해라, 부디 넘치도록 사랑받으며 살아라.’
그게 당신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당신의 늘그막을 망쳐 버렸다고 믿어 왔으나,
‘천사 같은 정인아, 너는 내 생애 가장 눈부신 빛이었단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기억해 내지 못한 마지막 한마디는 바로 그것이었다.
***
새하얗게 아침이 밝았는데도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었다. 차에서 내려 제법 오래 걸었는데도 길 위에 있는 생명이라곤 오직 정인과 몇 마리의 산새가 전부였다.
마침내 추모 공원의 별관에 도착한 정인은 유리문 앞에 멈춰 섰다. 불현듯 정훈이 떠오른 탓이었다.
“…….”
조부에게 다녀와도 되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기꺼이 그러라 말하며 선영에 찾아가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원망이라곤 조금도 남지 않은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인은 새벽같이 먼 길을 달려와서도 차마 마지막 몇 걸음을 떼지 못하고 망설여야 했다.
손주를 한 번 안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수명이 깎여 나가는 것마저 개의치 않던 사람이, 자식에게는 그토록 모질었다고 들었다.
받아들이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구에 사는 모두가 언제나 달의 한쪽 면만 보고 사는 것처럼, 정인에게 그는 악역이던 적이 없었으므로.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한참 갈팡질팡하다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 지긋한 신사가 정인을 보고 물었다.
“…최우재 회장님 뵈러 왔습니다. 손주예요.”
얼떨결에 조부의 이름을 말하며 신분증을 내밀었다.
별관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이곳에 잠든 사람들이 이룬 업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사이에 조부의 이름도 보였다.
그걸 보면서도 크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단지 얼떨떨할 뿐이었다. 그것은 마침내 별실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그랬다.
“…….”
저만치 걸린 조부의 사진이 앞에서 정인은 또 한 번 망설였다. 지나가는 귀신을 붙잡아서라도 보고 싶었던 얼굴이지만 어째서인지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발을 뗄 수 있었다. 사진 속의 얼굴은 기억 속에 남은 모습 그대로였다.
“할아버지.”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수많은 감정이 오가고 있었다. 입을 열 때마다 마른 모래를 삼킨 듯 가슴이 버석거렸다.
“…나 하나 묻고 싶은 거 있는데.”
무엇도 꺼내 놓을 수가 없어, 정인은 이곳에 들어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을 붙들었다.
“우리 아빠 왜 그렇게 괴롭혔어요?”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치는 공간 속에서, 정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어? 나를 예뻐했던 것의 반만이라도 잘해 줄 수는 없었던 거예요?”
낮은 곳으로 가라앉은 모래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굴러다녔다. 어디서 생겨났는지도 모를 분노가 머릿속을 들이받았다.
“나한테는 왜 거짓말했어요?”
온 마음이 울렁거렸다. 크다 보면 언젠가는 할애비가 많이 미워질 거라던 예언이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멀리 가는 거 아니었잖아.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으면서 왜 얼굴 한 번 못 보게 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정인은 떠오르는 모든 이유를 전부 꺼내 집어 던졌다.
울지 말아야지, 울지 말아야지. 아무리 다짐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정인은 미끄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참을 울다가, 할아버지의 사진을 쳐다보다가, 또 울었다.
진작 했어야 할 일을 몰아서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간 억눌러 왔던 슬픔을 한 번에 전부 쏟아 내기라도 할 것처럼.
“어떻게 마지막 가는 모습도 못 보게 해, 나는…. 지구본 비슷한 것만 봐도 할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는데.”
당연하다는 듯 안아 주던 품은 이제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직접 몸으로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울음 섞인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정훈을 위해 꺼내 들지 않는 마음이라 믿고 살았다. 하지만 완벽한 착각이었다.
정인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은 오로지 정인 자신을 위해서였을 뿐이라는 걸.
“나는 너무 보고 싶었는데.”
모든 것을 알고 나서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정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차가운 유리 너머로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진짜, 너무 보고 싶었는데.”
아주 오래전의 그날처럼, 오늘도 그의 눈동자 안에는 못난 얼굴로 울고 있는 정인의 모습이 쏙 들어 있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마지막까지 정인의 가슴속에 남는 물음은 바로 그것이었다.
가까워질수록 내가 죽어 간다는 걸 알면서도 그 아이를 기꺼이 안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와의 이별을 정직하게 준비할 수 있었을까.
아직 죽음을 모르는 아이에게, 언젠가 자라 나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리라 믿을 그 어린것에게, 썩어 문드러져 가는 나를 보러 오라 말할 수 있었을까.
“…….”
사랑이라 하기에도, 욕심이라 하기에도 아팠다. 당장 답을 내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정인은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어렴풋이나마 그의 선택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마음은, 예쁜 딸기케이크가 상할까 봐 차마 포크를 찔러 넣지 못하고 한참 망설이던 어린 시절의 제 마음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아빠들이랑 화해도 했어.”
한참을 죽을 것처럼 울고 나니 마음이 많이 나아졌다. 오히려 억지로 누르며 가슴속에만 품고 살던 때보다 훨씬 편안했다. 어째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막연한 죄책감을 품고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나 애인도 생겼어요.”
하도 울어 벌겋게 열이 오른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눌러 식혔다.
“정말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할아버지도 아마 좋아했을 걸.”
딸기케이크를 먹던 날로부터의 일을 시시콜콜 늘어놓던 정인은 피식 웃었다.
“…이제 얘기 끝.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어요.”
듣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앉아 중얼거리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조금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인은 고개를 들어 유리장 너머의 유골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물으면, 그냥 내가 바보라서였다고 할게요.”
삶을 옭아매고 있던 마지막 올가미마저 끊어진 자리, 조금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항상 여기에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아주 많은 것들이 그랬던 것 같다. 평생 자신이 할아버지의 노년기를 망쳐 버렸다 믿어 의심치 않았고, 아빠들에게 영영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믿었고, 이대로 그 무엇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렇게 네모난 선을 그려 그 안에 갇혀 살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인 자신이었다.
“…나만 마음을 다르게 먹으면 다 괜찮아지는 일이었나 봐요.”
정인은 반질반질한 유리를 통해 거울처럼 비치는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생전의 조부가 사랑했던 동그란 아이는 이제 어디에도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최정인은 최정인이었다.
“이제 좀 더 똑똑하게 살아 볼게요.”
이제 정인은 알고 있다. 노란 햇살 속에서 웃던 아이는 언젠가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짜증을 내기도 하고, 누구를 미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누군가보다 스스로를 더 많이 미워하기도 할 거라는 걸.
“쓸데없이 미안해하지도, 혼자 울지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결국엔 여태까지 운 것들보다 더 많은 날을 웃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저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하고, 나와 화해하는 법을 배우며 서서히 어른이 될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최정인만의 마지막에 가까워져 가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건강할게요, 행복할게요. 그리고….”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럼에도 지금 정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넘치도록 사랑받으면서 살게요, 약속할 수 있어요.”
이번의 약속은 잊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정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또 올게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찾아올 수 있는 곳이다. 들어설 때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가벼운 걸음으로 별실을 빠져나왔다.
맡겨 둔 신분증을 찾기 위해 데스크 앞에 서자, 정인의 얼굴을 확인한 직원이 문득 말했다.
“잠시만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 네.”
정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안내한 곳에 들어가 앉았다.
데스크와 연결된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던 직원은 머지않아 나타났다. 양손에는 흰 장갑을, 품에는 나무 상자 하나를 안은 채였다.
어찌나 귀히 보관했는지, 상자는 이제 막 가공을 마친 듯 작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인에게 조심스럽게 상자를 내밀었다.
“최우재 회장님께서 최정인 군 앞으로 남기신 물건입니다.”
“…네?”
“본인께서 성년이 지난 후 찾아오시면 전달해드리는 조건으로, 2080년까지 저희가 보관하기로 계약되어 있던 물건입니다. 천천히 살펴보시지요.”
곧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정인은 상자의 양옆에 달려 있는 걸쇠를 달칵 밀어 올렸다.
내부에는 뜬금없는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정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손을 대면 바스러질 듯 바싹 마른 나뭇잎 한 장이었다.
“…아.”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엉성하게 만들어 놓은 가면 모양의 목련 나무 이파리.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릴 적 정인이 조부와 함께 만들어 가지고 놀던 나뭇잎 가면이었다.
“…….”
애써 밀어 넣은 눈물이 다시 솟구칠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인은 함께 담겨 있는 물건들을 찬찬히 살폈다.
페이지마다 크레파스로 낙서한 자국이 남아 있는 동화책 두어 권, 어째서인지 촛농 범벅이 되어 있는 만년필, 두꺼운 나뭇가지 하나, 몽당연필 여러 자루. 구멍 난 아이 양말 한 켤레.
하나같이 전부 정인의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서류 묶음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사라진 미술품과 보석들을 정인에게 양도하겠다는 내용의 상속 서류였다. 각각의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를 적은 문서도 함께 붙어 있었다.
‘살다가 어느 순간 힘에 부치는 때가 오면, 아무리 미워도 한 번만 눈을 딱 감고 기대러 오렴.’
‘내가 네게 진 빚의 일부를 돌려받아 그로써 다시 일어나거라.’
“…여기에 있었구나.”
곧 두 개의 서명을 써넣을 수 있는 자리가 나타났다. 한쪽에는 이미 조부의 서명이 날인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아직 공란이었다.
그 마지막 페이지를 뒤집자 사진 한 장이 나타났다. 커다란 그레이하운드를 안은 어린 정인과 그런 정인을 안은 조부의 모습이 한 장의 사진 안에 보이고, 뒷면에는 펜으로 흘려 쓴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
한참 동안 그 글자들을 눈에 담던 정인은 사진을 품에 꼭 안고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그 다음에는 꺼냈던 물건들을 다시 차례로 상자 안에 담아 단단히 걸쇠를 걸어 잠갔다.
별관을 빠져나왔을 때쯤엔 시간이 많이 흘러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아침의 고요함은 온데간데없고, 공원 여기저기는 사랑하는 이를 추억하러 온 사람들의 작은 발소리로 붐볐다.
정인은 그들의 사이를 지나쳐 자동차가 주차된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나무 상자를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채우고, 운전석으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그다음에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며, 조금은 때늦은 인사를 건넸다.
“사랑해요, 안녕.”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그러하듯이.
***
<‘사라진 유산’ 故 최우재 회장 컬렉션 15년 만에 발견… 시가 약 4,500억 상당>
[삼우파이낸스] 김진선 기자 = 고(故) 최우재 전 TH 그룹 회장의 사라진 컬렉션이 15년 만에 발견되었다.
오늘 오전 TH 그룹은 A 경제지를 통해, 추가적으로 발생한 유산의 상속세를 즉시 신고, 납부 처리하였음을 밝혔으며, 해당 컬렉션의 상속자는 고 최우재 회장의 손주인 최모 군인 것으로 알려졌다.
컬렉션에는 고 김영재 화백의 동양화 7점, 이영 화백의 서양화 10점과 스케치 등 고가 미술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까지 공개된 목록에 의하면 컬렉션에는 안젤라 클레이튼 대통령이 1995년 취임식에서 착용한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술품과 귀금속 일부는 올 9월 중순부터 삼한 아트 센터에 전시될 예정이다. 클레이튼 대통령의 목걸이는 현재 추정가 약 2천만 달러로, 한화로는….
“…200억?”
정말이지 볼 때마다 새삼스럽다.
돌아가신 할아버님의 유산을 찾았다는 사실은 이미 정인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규모는 조금 전 기사를 통해서 처음 알았다.
1억이라는 돈이 마치 남의 집 강아지 이름처럼 느껴지는 기사를 바라보며 호진은 입을 떡 벌렸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유리병을 놓치고 말았다.
“아, 아, 안 돼.”
퐁당, 소리를 내며 물 안으로 빠진 유리병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즉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풀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도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가라앉아 준 덕분에 찾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물 안에서 깨져 다른 선수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호진은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꼼꼼히 유리병을 살펴보고, 실금 하나 가지 않은 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큰일 날 뻔했네.”
일단 물에 들어온 김에 병 안에 수영장의 물을 조금 담았다. 그러고는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막아 가방 안에 조심조심 넣어 놓았다. 네임펜으로 오늘 훈련을 마친 경기장의 위치를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방 안에는 똑같은 유리병 몇 개가 더 담겨 있었다. 물론 병의 표면에 적힌 글자들은 모두 달랐다.
어떤 병에는 해안의 이름이 적혀 있고, 또 어떤 병에는 수영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호진이 한 번이라도 수영을 했던 곳의 물을 조금씩 담아 만든 것이었다.
“흠….”
핸드폰 화면 위에는 여전히 TH가의 컬렉션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사가 떠 있었다. 그것과 유리병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미국 전 대통령이 착용한 목걸이가 ‘포함된’ 컬렉션을 가진 사람에게 이런 선물을 주는 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
“흐흐.”
정인이라면 분명 기뻐해 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웃음부터 비죽비죽 기어 나왔다.
형ㅎㅎㅎ뭐 하세요
정인이 형 생각도 났겠다, 때마침 핸드폰도 들고 있겠다. 일단 문자부터 보냈다. 그 위에는 호진이 아침부터 하루 종일 틈날 때마다 보냈던 메시지들이 주르륵 널려 있었다.
저 이제 아침 훈련 가요ㅎㅎㅎㅎ
형 아직 자요?
저 이제 오후 훈련 가요 ㅎㅎㅎ
형 점심은요? 저는 고기 묵어요
시험공부 잘하고 계시죠?
오후 훈련 끝났어요 ㅎㅎㅎ이제 쉬는 시간이요
“…무슨 일 있나.”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늦어도 서너 시간 안에는 오던 답장이 오늘따라 유독 느린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몇 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연결은 되지 않았다.
“호진 씨, 이제 휴식 시간인데.”
유리문 콩콩 치는 소리와 함께 매니저가 나타났다. 그는 한 손에 든 샌드위치를 흔들며 호진을 보고 웃었다.
호진은 금방 정리하겠다 대답하고 가방을 챙겼다. 유리병들이 깨지지 않도록 수건을 둘둘 말아 넣고, 젖은 몸 위에는 대충 트랙 톱만 걸친 채 그를 따라나섰다.
“아 참, 한양 스포츠에 있던 선수들 이적도 이제 대부분이 마무리 단계까지 왔어요.”
“엉앙우?(정말요?)”
뜻밖의 희소식이었다. 우걱우걱 샌드위치를 베어 물면서도 호진은 화색을 띠었다.
“다들 곧 이쪽으로 넘어와 같이 훈련할 거예요. 선수 개개인의 피해 사실은 계약 마무리와 동시에 법무 팀에서 따로 조사할 거고…. 일이 조금 커질 수도 있어요, 이 점은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송을 결심한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아마 이번 소송 건은 여태까지의 호진이 겪어온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건이 될 것이다. 혼자 견디거나 참는다 하여 끝날 일이 아니니 누군가는 피해를 입기도 할 테고, 그 과정에서 한때 믿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되레 상처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호진은 정인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먼 훗날, 그들과 똑같이 지도자의 입장에 설 유호진의 마음을 생각하고, 그에게 누가 되지 않는 결정을 하라고.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미래의 유호진을 위해 그리하라고.
“…….”
호진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자고 일어나면 조금씩 키가 자라 있던 성장기는 이미 지나 버린 지 오래지만, 정인을 알게 된 후로는 매일 밤 마음의 키가 쑥쑥 자라는 것 같다. 오래도록 발아하지 못하고 굳어 있던 씨앗이 물을 만나 새순을 틔우듯.
“…보고 싶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빠앙-. 하는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호진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텅 빈 지상 주차장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스포츠카 한 대가 보였다.
차는 하고많은 자리를 지나쳐 호진이 타려던 밴 근처에 멈춰 섰다. 선루프가 전부 열리기도 전에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차에서 내렸다.
“…….”
꿈인가, 또 헛것을 보는 건가.
“호진아.”
현실을 미처 자각하기도 전이었다. 익숙한 향이 먼저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보고 싶었어, 호진아.”
호진은 숨을 쉬는 것마저 잊고 정인을 꼭 끌어안았다.
***
불과 반년 전에 떠나 온 곳이다. 눈을 감아도 어떤 거리에 어떤 가게가 있는지 그릴 수 있다. 정인은 도로를 달리는 동안 익숙한 풍경을 눈으로 훑었다.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반짝이는 은파가 넘실거리고, 꽤나 쌀쌀한 날씨임에도 서핑 보드를 발목에 묶은 사람들은 파도가 높은 자리마다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시험 기간 아니에요?”
“집에서는 그렇게 알지.”
공식적으로 정인은 현재 주영의 지방 촬영 스케줄을 따라 주말여행을 떠난 상태였다. 얼떨결에 손에 넣은 ‘자미도 와인 카드’ 덕분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와인 한 병을 몰래 마셨다 해서 현욱이 주영을 타박할 리가 없다. 그러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주영은 요 며칠간 현욱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고, 그 기류를 감지한 정인은 곧바로 카드를 사용했다. 와인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다무는 대신 호진과 함께 있는 동안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어쨌든 월요일 전까지는 돌아가야 해.”
“네?! 오자마자요?”
그 말에 호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한두 시간 거리도 아닌데…. 너무 피곤하잖아요. 오랫동안 하늘에 떠 있는 게 몸에 좋을 리도 없고요.”
“차라리 피곤해 죽는 게 백번 나아. 이렇게 계속 못 보다간 피 말라 죽는 게 먼저일걸.”
차는 곧 깔끔하게 길이 닦인 주택가에 진입했다.
정인은 차고에 주차를 마치자마자 기지개를 쭉 켰고, 어느샌가 조수석을 빙 돌아온 호진은 낮게 신음하며 또 한번 정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진짜 꿈 같아요.”
“으응. 그러게.”
듬성듬성 붙은 주택과 주택의 사이로 저만치 바다가 내다보였다. 정인은 붉게 부서지는 노을 속에서 호진의 입술 위에 입 맞췄고, 두 사람은 곧 집 안으로 들어섰다.
고작 2주 남짓을 보지 못했을 뿐인데도 그사이에 벌써 몸이 꽤 변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가슴과 허벅지가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손바닥 아래에 닿는 등과 어깨는 정인이 기억하던 것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하…. 호진아.”
짧게 자른 뒷머리를 쓰다듬자, 정인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던 호진은 곧장 입술을 물어 키스했다. 모든 동작이 호진답지 않게 급했다. 급한 거야 정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덤벼들고 있었다.
혀를 빨아들이고, 이를 샅샅이 핥고, 입술이 발갛게 부을 때까지 잘근잘근 씹다가 정인의 눈을 바라보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피스톤질을 했는지 모르겠다. 미끌미끌한 액체로 범벅이 된 아래를 한 번씩 찔릴 때마다 절로 발가락이 굽었다.
시작과 거의 동시에 서너 번 이상을 사정한 정인에게는 이제 더 이상 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끙끙대며 그의 어깨를 안으려 애썼지만 몸의 폭이 너무 넓어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형.”
호진은 힘없이 떨어지는 정인의 손을 잡아 제 허리에 둘렀다. 빠르게 하체가 움직이는 동안에도 상체는 단단하게 축을 박아 넣은 듯 흔들리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압박하듯 꽉 누르고 있으니 아무리 쾌감이 강해도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아, 으응….”
찔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감각이 더욱 선명해지며 구멍이 절로 움찔거렸다. 그나마 힘을 풀고 있안 땐 사정이 나았지만, 어쩌다 조이기라도 하면 내부가 확 좁아지며 안쪽 어딘가에 귀두가 걸렸다. 그럴 때마다 호진은 아, 하고 거칠게 목 안을 긁으며 제 것을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이제 더는 넣을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테이블 위의 핸드폰이 삑삑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와 동시에 호진의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아읏….”
“잠시만요.”
크게 들썩이는 정인의 몸을 꼭 안은 채, 호진이 페로몬 검사지를 꺼내 정인의 손목 위에 붙였다. 이럴 정신이 있다는 게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하…. 그래도 체력 많이 올라온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정도 하면 힘들어했던 것 같은데.”
검사지의 끄트머리까지 전부 물든 것을 확인한 후에는 콘돔을 벗어 처리하고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지금부터 한두 번 정도는 거뜬히 하실 수 있겠어요. 그렇죠?”
“아…. 윽.”
어차피 뭐라고 대답하든 계속할 거면서 묻긴 왜 묻는단 말인가. 어이가 없는 것도 잠시, 아무것도 덧씌우지 않은 기둥이 몸을 열고 들어오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곧 정인의 안에서 페로몬 덩어리가 뒤섞였다. 사실 둘 다 우성인지라 이 정도까지만 해도 병원에서 권장하는 페로몬 교환은 어느 정도 기준치를 넘긴 셈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온 방 안이 페로몬으로 가득 찰 때까지 계속해서 세우고 싸고를 반복했다.
콱콱 찍어 누르는 힘에 정인의 머리가 침대 헤드에 가까워지면 호진이 얼른 손을 들어 그 위를 막아 주었고, 정인을 안은 채로 호진이 서서 박을 땐 이곳저곳 위치한 가구나 튀어나온 못 같은 것들이 그의 몸에 닿지 않도록 정인이 막았다.
“아, 호진아, 아….”
그래도 이제 좀 익숙해졌다고, 정인은 순간순간 몰아치는 비정상적인 쾌감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감각에 집중하며 착실히 호진에게 휩쓸려 갈 뿐이었다.
“흐윽….”
허공에 매달린 채 호진을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저만치 걸린 거울 속의 모습이 두 눈에 생생하게 박혔다. 이제 체지방이라는 게 거의 남지 않게 된 호진의 피부 위로는 근육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비치고, 벌건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꽉 맞물린 접합부에서는 애액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곧 정인의 몸을 가뿐히 들어 올려 한참을 박아 대던 호진의 동작이 뚝 멈추고, 안에서 또 한 번 정액이 터지며 정인의 체액에 찐득한 점성이 생겼다.
쩌억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호진의 페니스가 끈적한 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이만큼 만족스러운 교미를 했으면 이제 더는 페로몬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정인의 몸이 알아서 판단했다는 근거였다. 그러나 육욕의 바닥까지 찍고 왔는데도 멈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호진은 난감하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더니 정인을 침대 위에 눕혔다. 침대 다리가 부서진 탓에 매트리스 위에 똑바로 누웠는데도 몸이 조금 기울었다.
2주간 이런 짓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정인의 머릿속은 오늘 아주 뽕을 뽑을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그러나 호진은 정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나서도 곧바로 삽입하지 않고 목이며 가슴을 물고 빨기만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명치에서 내려오는 선을 혀로 핥아대던 호진이 별안간 둥글게 부푼 가슴 사이로 정인의 것을 집어넣었다.
“아….”
땀과 정인의 애액에 반질거리는 가슴골 사이로 발딱 선 성기가 쑥 들어갔다. 단단하게 잡힌 가슴 근육이 꽉 조이며 기둥을 압박하고, 귀두에는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문질러졌다.
“저 이제 더 하면 안 되거든요…. 억제제 복용 스케줄 잡혀서요.”
손으로 해줄 때는 그나마 손가락을 써서 강약이라도 조절해 주었지만, 가슴 근육으로는 그런 게 불가능한지 잡는 힘이 너무 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정인은 바들거리며 음수를 뿜었고, 호진은 입술을 내밀어 그것을 핥으며 정인을 보고 웃었다. 지나가던 선비를 백 명쯤 잡아먹은 구미호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런 건 계속해 드릴 수 있어요.”
조금은 무자비하다 싶을 만큼 조이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안 정인은 몇 번이나 사정했다. 그럼에도 인정사정없이 예민해진 귀두를 비벼대는 탓에 결국엔 제발 그만하라고 엉엉 울면서 빌어야 할 정도였다.
“흐윽, 흐…. 나 이제 그만, 그만할래….”
호진은 그제야 정인의 눈가에 쪽쪽 입 맞추며 곁에 누웠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쪽 다리도 부서졌지만 넘어지지 않도록 꽉 잡아 준 덕분에 정인의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아, 하아. 숨소리가 천천히 가라앉는 동안 창밖은 새까맣게 물들었다. 정인의 눈앞에는 꼭 저만치 창밖의 밤 같은 눈동자가 버티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요사스러웠냐는 듯 순둥순둥 착한 강아지로 돌아온 눈빛을 보니 헛웃음이 났다.
“내 짐승 새끼, 잘 있었어?”
“네에, 잘 있었어요.”
호진은 정인의 품으로 파고들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턱 끝에, 코끝에 새처럼 뽀뽀하며 정인을 욕실로 옮겨 주었다.
따뜻한 물을 틀고, 커다란 욕조에 나란히 앉아 호진과 함께 바깥을 바라보았다.
늘 혼자이던 장소에 호진과 함께 앉아 있으니 새로이 보이는 것들이 참 많았다. 우중충하다고 생각했던 앞집의 녹색 지붕도, 쓸데없이 길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길가의 나뭇가지도 지금은 어쩐지 예뻐 보인다.
손바닥만큼 열린 창틈으로 스미는 바람마저도 그렇다. 어깨를 감싸 오는 팔 안에 안겨 맞는 찬바람은 더 이상 외롭거나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눈만 달라진 것이다. 할아버지가 잠들어 있던 장소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맥락의 감상이었다.
“호진아.”
정인은 책상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둔 사진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그 뒷면에 적혀 있던 글귀를.
“…나 말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
호진은 대답 없이 정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연한 일이니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다고,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어쩌면 나만 나를 미워했던 건지도 모르지.”
피식 웃으며 목욕 소금 한 움큼을 집어 들어 물에 넣었다.
“얘는 이렇게 잘 녹지만, 가끔 물에 녹지 않는 것들이 있잖아. 모래 같은 거, 아니면 쓰레기 같은 거….”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소금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 인생에 모래 같은 게 뿌려질 때마다 내가 모래 그 자체인 줄 알았어. 신이 어쩌다 실수 같은 걸 해서 나를 만든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지.”
“…….”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물이었던 건데.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모래만 떠 내면 다시 물이 되는 거였는데.”
호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모래였다는 생각 같은 거 안 하기로 했어.”
고개를 들자, 여전한 담담함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밤하늘 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 얘기를 너에게 제일 먼저 해 주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앞으로는 더 열심히 흘러가 볼 생각이야. 모래 찌꺼기 같은 것조차 남지 않게 될 때까지.”
따뜻한 적막이 지나갔다. 호진이 부드럽게 정인의 손을 잡았다.
“그 찌꺼기, 저도 같이 치우게 해 주세요.”
“…….”
“…형의 모래가 뭐였는지 하나씩 천천히 알려 주세요.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좋아요, 어차피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함께 있게 될 테니까요.”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정인에게 함께 하는 미래를 말했다.
그리고 정인은 어렵지 않게 입을 열었다. 사는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일들을 ‘하나씩 천천히’ 털어 놓으며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열려 있던 모든 문장 뒤로 마침표가 찍혔을 즈음, 호진은 아무 말 없이 정인을 안아 오래도록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웃집의 창가를 밝히던 불이 하나둘 꺼지고, 언젠가 함께 본 하늘처럼 캄캄한 어둠 위로 보석 같은 별들이 떠오를 때까지.
***
어제 오후, 호진이 시즌 첫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정인은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내내 핸드폰을 붙들고 앉아 생중계 댓글 창의 미친놈들과 혈투를 벌였다. 물론 내 애인이랑 붙을 놈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조의 예선까지 전부 지켜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험을 하루 남겨 놓은 시점이었지만 말이다.
“하….”
후회는 없다. 경기에 임하는 호진의 모습은 당연하게도 멋졌으니까. 곧 이어진 인터뷰를 통해 그 얼굴과 목소리를 4K 고화질로 만나 볼 수 있었다는 점도 더할 나위 없이 끝내줬다.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그 경기 영상과 인터뷰 영상을 딱 한 번만 보고 말았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눈이 시뻘게질 때까지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반복 재생했더니 아직까지 시야가 흐릿했다. 변명이 될진 모르겠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한 장씩 뒤로 넘겨주세요.”
휙휙 넘어오는 시험지를 받아 들고 빠르게 문제부터 살폈다. 시험지 끄트머리에 이상한 문제 세 개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뭐야…. 배점이 왜 이렇게 높아?”
정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펜을 들었다. 그러고는 벼락치기식으로 머릿속에 밀어 넣은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필사적으로 답안을 적어 넣었다.
호진의 경기에 미쳐서 날려 먹은 시간을 생각하면 꽤나 순조로운 흐름이었다. 손에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아는 것을 전부 써 재끼고, 잘 알지 못하는 것까지 대충 얼버무려 늘어놓으니 딱 10분 정도 여유 시간이 생겼다.
정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문제의 그 문제’로 돌아갔다.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10점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10점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 10점
학기 초에 받은 프린트물에 적혀 있던 것과 똑같은 문제였다.
출제자의 의도가 뭘까. 이 수업을 통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측정해 점수를 주는 건가. 그렇다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그나저나 내가 뭐라고 썼었지? 그때 나를 특정할 만한 정보를 적긴 했던가?
정인은 혼돈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해골을 굴려 봐도 어떤 답을 적어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거라곤 그 문제가 굉장히 쓸데없고 한심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그날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땐 이 간단하고도 이상한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던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누구냐는 물음에 고민해야 하는 마음을 조금은 알겠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 ‘나’라는 존재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더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것인 모양이었다.
“…….”
좋아하는 것은 가족, 애인, 세상의 모든 강아지, 집에서 키우는 식물들.
벚꽃이 예쁜 길, 바다에서 보는 노을, 날씨가 맑은 밤에 뜨는 별, 공포 영화 보기, 드라이브, 휴게소 통감자.
싫어하는 것은 도마뱀과 고수풀. 그리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사람.
망설임 없이 써 놓고도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 지울까 말까 몇 번을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지우지 않았다. 마침내 조교가 시험 시간이 끝났다며 큰 소리로 알릴 때까지.
그래도 좋아하는 것의 목록은 확실히 늘었을 테니 점수가 썩 나쁘게 나오진 않을 것이다. 막 가방을 챙겨 일어나려는데, 강의실 한구석에 앉아 있던 학생이 불현듯 손을 들고 물었다.
“마지막 세 문제는 채점 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정인은 학생의 시선을 따라 조교를 쳐다보았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
모두가 시험 기간이던 1, 2주 전에 비하면 확실히 대학로에 활기가 돈다.
아직 시험이 남은 사람들은 지친 얼굴로 카페인을 조달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지만, 일찌감치 모든 시험을 끝마친 사람들은 벌써부터 삼삼오오 술집에 모여 꽥꽥 소리를 질러 대는 중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시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술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게 분명했다. 마치 정인과 효준이 그러하듯이.
“이야, 개떡이 남친 잘나가네.”
효준은 한 손으로 주꾸미볶음을 뒤적이며 TV를 가리켰다. 정인은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네모난 TV 안으로 한창 경기 중인 수영 선수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 아래 자막으로 〈유호진, WA 챔피언십 100m, 200m, 400m 금메달〉이라는 글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미 수십 번은 돌려 본 영상이었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그 뒤에 호진이 뭐라고 인터뷰를 했는지까지 달달 욀 정도였다. 정인은 곧 바뀌는 인터뷰 화면 속의 호진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어깨 회복이 가장 걱정이었는데 큰 문제 없이 지나와서 지금은 그게 제일 기쁩니다. 앞으로 남은 대회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호진이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실실 났다. 정인은 호진의 모습이 사라지고 캐스터의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너무 티 나는 거 아니냐?”
효준이 물었다.
“뭐가.”
“스폰서 로고 좀 봐라. TH 코퍼레이션, TH 백화점, 중흥 건설에 퀸즈 아일랜드까지…. 그냥 아예 TH가에서 쟤 민다고 공개적으로 광고를 때리는 게 낫지 않니?”
“그게 뭐 어때서. 그룹에서 계열 매니지먼트사 선수 좀 미는 게 어디 책잡힐 일인가?”
정인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고, 효준은 정인의 잔을 채워 주었다.
“허허…. 백년해로하세요. 그래서 시험은 잘 보셨고?”
“벼락치기 한 것치고는 그냥저냥 괜찮게 봤어. 다음 주 것만 어떻게 잘 넘기면 평점이 못 봐줄 정도까지는 아닐 것….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여기서 너랑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인아. 1학년 1학기 시험은 좀 조져도 되는 거야. 사람이 낭만도 좀 있어야지.”
“낭만은 무슨 얼어 죽을….”
허공에서 잔이 부딪쳤다.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은 정인은 매콤한 쭈꾸미를 우물거렸다.
“근데 조효준, 나 오늘 좀 이상한 생각 했어.”
“왜.”
시험 시간에 마지막으로 들은 말을 떠올렸다.
“심리학과 교양 시험이었는데, 뒷장에 애매한 문제가 세 개 있었거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를 쓰라는 거야.”
“근데.”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해서 쓰고 냈어. 그런데 시험 끝나고 나서 누가 채점 기준 물어보니까 조교가 하는 말이, 정답이 없는 문제라 일단 쓰기만 하면 만점 나오는 거였대.”
“아, 그거?”
그 말에 효준은 ‘F 방지턱’의 개념에 대해 설명했다. 혹시라도 시험에 아예 낙제해 버리는 학생이 생길 것을 우려해 간혹 마음 약한 교수들이 끼워 넣는 쉬운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거기서 D가 나와 버리면 훗날 그것을 삭제하기 위해 재수강을 해야 하는 수가 있으므로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정인은 테이블을 젓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마치 삶을 그렇게 살라는 것처럼 느껴졌어. 살아있기만 해도 기본적으로 만점 깔고 들어가는 거니까 사소한 점수 같은 거엔 목숨 걸지도, 크게 걱정하지도 말라고. 그냥 주어진 삶을 살아가라고….”
어째서인지 눈이 마음대로 깜빡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교수님의 진짜 의도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나한텐 그렇게 들렸어.”
말을 하다 보니 얼굴이 너무 무거워 결국 한 손에 턱을 괴어야 했다. 정인은 사는 내내 쌍둥이별처럼 붙어 자라 온 친구를 바라보며 웃었다.
“효준이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얼마나 오래 돌아왔는지.”
“…….”
“아직은 그냥 생각만 해 보는 거야, 그냥 생각인데…. 나는 이제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오는 게 정답에 가까웠는지 조금 알 것 같거든.”
“…응.”
“그런 길은 빨리 빠져나올수록 좋은 거잖아. 예전의 나처럼 혼자 나오기 힘든 길에 갇힌 사람들이 있다면, 빨리 좋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아.”
소주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효준이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야…. 하여튼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점이라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 좀 괜찮을 것 같지 않아?”
정인은 그가 술 대신 쥐여 준 물잔을 홀짝이며 실실 웃었다.
“삼촌 은퇴하려면 아직 수십 년은 남았는데, 그중에 일이 년은 다른 공부 하다 와도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평소답지 않게 사고가 빠른 속도로 확장했다. 정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나 취했구나.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삶은 머지않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생각나는 것을 전부 지껄였다.
“교수 될까? 상담사 할까? 나 같은 새끼 만나면 어떡하지…. 하여튼 심리학과 가서 아들러랑 매슬로우 뺨치는 뭐가 될 거야. 그래, 내일 당장 자퇴해야겠어.”
“워, 워. 이 미친놈아. 너는 그 급발진 좀 어떻게 해야 돼. 갑자기 무슨 얘기가 자퇴까지 튀어?”
효준은 막 목이 뒤로 꺾이려는 정인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황급히 계산을 마치고 나서는 길,
“뭐…. 네가 하는 일에 안 되는 게 어딨겠냐.”
효준이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연인에게서 들었던 말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그치?”
정인은 흐흐 웃으며 비틀거리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잔뜩 취한 탓인지, 눈에 비치는 세상의 구석구석이 전에 없던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
길가에 차를 멈춰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 혀엉.
화면 속의 호진이 안녕 안녕 손을 흔들었다. 정인은 손바닥만큼 작아진 호진의 모습을 살폈다. 실내에 있는지 하얀 벽을 배경으로 두고 있어 시간을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손목에 백금 팔찌가 걸려 있는 것을 보니 훈련이 모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인 듯했다.
- 오늘도 물 조금 담아 왔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만 한 크기의 유리병을 보여 주었다. 정인의 머리맡에 진열된 것들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물론 모두 지난번 호주에서 만났을 때 받아 온 것들이었다.
누가 유호진 아니랄까 봐, 이제 새로운 수영장에 갈 때마다 정인에게 선물할 물을 모으는 것마저 루틴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 듯했다.
- 보고 싶어요, 형.
“보고 있잖아.”
-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어요. 저 지금 눈 깜빡이는 것도 아까워서 계속 눈 뜨고 있는 거 보이세요?
부릅뜬 눈이 크게 다가왔다. 정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까지 안 보여 줘도 돼.”
- 흐…. 운전 중이셨어요? 어디 가세요?
“성북동 가는 길이었어. 오늘 삼촌 귀국하니까 아빠들이랑 다 같이 점심 먹자고 하더라고. 오늘 만나면 다음 주에 너 보러 간다고 미리 얘기해야지, 그리고 이것도.”
정인은 조수석에 얹혀 있는 종이 뭉치를 들어 호진에게 보여 주었다. 방학 동안 심리학과에서 진행하는 4주짜리 특강 프로그램 참가 지원 서류였다.
- 특강 들으시게요?
“응. 아직은 생각뿐이지만, 어쩌면 전과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한번 상의해 보려고.”
당장은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으니, 한 번쯤 관심 가는 학문을 찍어 먹어 보는 것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심리학을 기업 경영과 접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른들과 상의하다 보면 이 문제 또한 어느 방향으로든 가닥이 잡힐 거라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어른들이 허락할지는 잘 모르겠어. 정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고…. 어떻게 됐는지는 이따 다시 얘기해 줄게, 일찍 잘 거지?”
빠르게 시차를 계산했다. 새벽 다섯 시면 칼같이 일어나는 사람이니 여기선 저녁 아홉 시쯤 전화를 걸면 될 것이다.
“이따 전화할게. 사랑해, 안녕.”
- 사랑해요, 안녕.
네모난 화면에 뽀뽀하고 전화를 끊었다. 모퉁이를 돌아 저택의 대문 앞에 멈춰 서자, 정인의 차 번호를 인식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차고 안에는 원경과 정훈의 차가 나란히 서 있었다. 정인은 곧장 저택으로 들어서는 대신 뙤약볕을 건너 텃밭으로 향했다.
호진이 알려 준 대로 틈이 날 때마다 물을 뿌리고 비료를 얹어 줬더니 하루하루 작물들이 커 가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이파리 틈으로 작은 바구니 하나를 끼고 들어갔다. 빨갛게 익은 고추 몇 알, 아직 덜 익었지만 그래도 좀 봐줄 만한 블루베리 몇 알. 적당히 자란 당근은 뿌리째 뽑고, 상추도 몇 장 뜯어 넣고, 같이 심은 고구마는 꺼내 봤다가 너무 작아서 도로 묻었다. 그렇게 한참을 낑낑대는데,
“정인아!”
멀리서 원경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부터였는지 현관에 서서 손을 흔드는 정훈과 원경의 모습이 보였다.
온갖 색깔의 채소가 풍성하게 담긴 바구니를 끼고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가까워지자 정훈이 먼저 나와 정인을 안아 주었다.
“잘 있었어?”
“…어제 저녁 같이 먹었잖아.”
“그러니까 오늘 하루 잘 있었냐고.”
하루를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보고 싶어하는데, 여태까지 그 오랜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어졌다.
“당연히 잘 있었지, 어떤 사람들 아들인데.”
정인은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정훈과 원경을 한 번씩 꼭 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거실로 들어가면서 슬슬 호진의 이야기로 운을 뗐다.
“아빠, 근데 호진이 이번에 또 금메달 딴 거 봤어?”
“…….”
정훈은 호진의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핸드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대놓고 딴청을 피우는 그를 대신해 대답한 건 원경이었다.
“당연히 봤지. 운동할 땐 다른 사람 같더라, 우리랑 있을 땐 순한 아기 같더니…. 호진이는 갓난아기 시절에도 순해서 잘 안 울었을 것 같아.”
“나는 어땠어?”
“너도 아주 작을 땐 조용했어, 그러다 말 시작하면서부터 성질부렸지.”
정인은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원경과 함께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학교에서 뭘 했는지, 누굴 만났는지, 혜원의 여름맞이 풀 파티에서 누가 어떤 추태를 부렸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창문 너머로 자동차 바퀴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삼촌 왔다.”
정인은 만지작거리던 상추를 내려놓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휙 돌려 창가를 내다보았다.
“아빠들, 나 종강하면 호진이 보러 가기로 한 거 안 잊었지? 비행기 빌려 달라고 할 거니까 이따가 내 편 좀 들어 줘.”
직접 운전을 했는지, 차에서 내린 현욱은 곧장 조수석으로 돌아가 잠에서 덜 깬 주영을 부축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말했다.
“꼭 편들어 줘야 돼. 작은 아빠가 말하면 뭐든 다 되잖아. 진짜 부탁이야…. 알았지?”
정훈과 원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편을 들어주지 않을 생각인가 싶어, 정인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아니, 왜 대답이 없어?”
그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인만이 영문을 모르고 씩씩댈 뿐이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현욱과 주영이 들어섰다. 주영은 시퍼렇게 피곤기 어린 얼굴로 정인에게 인사했다.
“정인이 왔네.”
그러나 정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머쓱하게 웃으며 들어서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해 버렸기 때문이다.
“…….”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분명 눈앞에 있는데 아무리 봐도 현실인 것 같지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도대체 무슨 수로 벌건 대낮에 나타났단 말인가.
정인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머뭇거리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호진아.”
귀신인지 뭔지 모를 존재가 네, 하고 대답했다.
“호진아!”
이제 저게 귀신이든 뭐든 상관없다.
한달음에 달려가 매달리자 호진이 정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정인은 저도 모르게 엉엉 울어 버렸다.
***
정훈은 현재 심기가 썩 불편했다. 그것은 현욱도 마찬가지였다.
금메달 포상 휴가를 받았다기에 차라리 손바닥 안에서 놀라고 호진을 미국에서 건져 왔더니, 정인은 애인이라는 놈을 보자마자 나라라도 잃은 사람처럼 대성통곡을 해 버렸다. 아빠와 삼촌이 보고 있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말이다.
“…좋다는데 어쩌겠어.”
“금이야 옥이야 키워 놨더니.”
정훈과 현욱은 어둑어둑한 그늘 아래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며 에스프레소를 연속으로 들이켜는 중이었다. 하지만 주영과 원경, 정인과 호진이 나란히 둘러앉은 테라스 아래는 달콤한 캐러멜라테에 알록달록한 디저트를 곁들인 티 파티가 한창이었다.
“저는 형이 배우님 팬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이렇게 봬서 영광이에요, 너무 멋있으셔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와요.”
“하하하, 말 잘하는구만 무슨…. 정인이가 왜 내 팬인 줄 알았는데?”
몸 좋고 잘생긴 사람이라면 무조건 점수를 후하게 쳐주는 주영은 이미 호진에게 10점 만점에 오천 점을 줘 버린 상태였다. 이미 호진을 ‘예쁜 내 새끼’의 카테고리 안에 넣어 버린 지 오래인 원경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서울에만 있을 게 아니라 호진이 아버님도 찾아뵈어야 하지 않아?”
“고향엔 안 가 봐도 될 것 같아요. 몇 주 전에 아버지도 어머니 보러 이탈리아로 가셨거든요.”
“그래?”
“그래도 아버님 뵈어서 너무 든든하고 좋아요. 정인이 형 만나면서 부모님 같은 어른들까지 알게 된 걸 보면 제가 진짜 복이 많긴 한가 봐요.”
“세상에, 호진아….”
견디지 못하고 호진을 꼭 안아 주는 원경의 모습에 정인은 허허 웃었다.
가만 보니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전부 고도의 계산을 거친 맞춤형 수작질이다. 혹시 나도 그 수작질에 홀랑 넘어간 것은 아니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는 듯했다.
“하여튼, 아빠랑 삼촌도 잠깐 이리 와 봐.”
정인은 어둠 속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침내 정훈과 현욱까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이제 하나씩 승부를 볼 시간이다.
“우선 첫째. 이제 자미도 내 거 되는 거 맞죠?”
물기가 송송 맺힌 채소 바구니를 야심 차게 내려놓으며 현욱과 주영을 바라보았다.
“둘째. 나 이제 호진이랑 놀러 가도 되지?”
그다음에는 정훈과 눈을 맞췄다.
“셋째. 나 하고 싶은 공부 생겼어.”
마지막으로는 원경의 앞에 특강 신청서를 내려놓았다.
“지금은 그냥 특강만 한 번 들어 보는 거예요. 그래도 들어 보고 맞는 것 같으면 몇 학기 더 듣고 전과할지도 몰라요. 물론 삼촌이랑 아빠들은 아마 내가 경영학을 계속하길 바랄 테고…. 경영이랑 심리학을 같이 가져갈 수 있는 방법도 잘 모르겠지만.”
말을 하다 보니 너무 대충 던지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러자 테이블 아래로 호진이 단단히 손을 잡아 주었다. 그 힘에 기대 입을 열었다.
“…당장 내일 승계를 받을 것도 아닌데, 한번 해 봐도 돼요?”
사람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정인은 슬그머니 모두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 이건 좀 아닌가, 생각한 순간이었다.
“물론이지, 정인아.”
원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네가 행복하다면 어떤 일이든 다 찬성이야.”
아빠는 정인이가, 로 시작하지 않는 문장이었다.
아빠의 아들이 아닌, 최정인이라는 개인을 존중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린 정인은 환히 웃었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가 비로소 저물어 가고 있었다.
***
알알이 빛나는 모래에 눈이 부셨다. 등에 모래가 전부 묻어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정인은 모래사장에 누워 호진을 끌어안았다. 직접 몰고 온 요트는 항구에 묶여 파도가 칠 때마다 너울거리고, 이따금 머리 위로는 갈매기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손목에 건 별장의 열쇠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짤랑거렸다. 어차피 도어 록을 사용하니 사실 크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섬이 자신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기에는 이만한 물건이 없었다.
“수영하러 가실래요?”
섬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백사장에 정인을 눕혀 한참 동안 물고 빨던 호진이 문득 몸을 일으켰다. 정인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부서지는 모래를 밟고 바다의 바로 앞까지 달려 나가니 저 멀리 작은 바위섬 하나가 보였다.
“이제부터는 천천히 들어갈게요.”
“으응.”
곧 찬물이 발등을 간질였다. 발목을, 무릎을 차례로 담근 뒤에는 호진이 시키는 대로 팔과 가슴에도 물을 묻혔다.
그렇게 서서히 서늘한 기운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힘없이 쓰러지는 대신, 들어설 자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더는 물살에 휩쓸리거나 되는 대로 아무 데나 흘러가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헤엄치다가 힘이 빠지면 물 위에 둥둥 떠서 조금 앞서가는 호진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그러다 기운이 차면 다시 섬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바위섬에 도착했을 때쯤엔 손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정인은 기진맥진해 그대로 늘어져 버렸고, 정인이 무사히 섬 위에 올라설 때까지 밑에서 받쳐 주고 있던 호진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쉽게 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지난번에도 이렇게 힘들었나?”
“이번에는 훨씬 빨리 왔잖아요. 기록으로 치면 절반 이상을 단축한 건데 힘든 게 당연하죠.”
아직 해가 지려면 조금 더 남았다. 정인은 판판한 부분을 찾아 등을 지졌고, 호진은 해녀처럼 매달고 온 커다란 주머니를 뒤졌다. 기껏해야 타월 한두 장 나올 거라 생각했던 주머니 안에서는 생수 몇 병과 선크림이 나왔다.
여태까지 저런 걸 매달고 바다 수영을 했단 말인가. 뜨악해진 정인이 물었다.
“…너 그거 안 무거워?”
“어차피 쉬는 날인데 놀면서 훈련까지 할 수 있으면 더 좋죠.”
호진은 그렇게 말하며 제 심박수 기록을 체크하더니 흡족한 듯 씩 웃었다.
“좋아하는 일이 일이 되면 좀 지겹지 않아?”
“그랬었는데, 형 만나면서부터는 더 좋아졌어요.”
물기를 닦고, 선크림을 나눠 발랐다. 거울이 없으니 허옇게 뭉친 부분은 서로의 손으로 풀어 줘야 했다. 킥킥거리며 얼굴을 만지작대다 입술이 붙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음….”
젖은 옷을 벗어 던지며 소금기 어린 입술을 핥았다. 그러는 사이 정인의 등 뒤로는 네모나게 접힌 타월이 깔렸다. 차갑게 식어 있던 허벅지 안쪽으로 열기가 오르고, 곧 속옷마저 벗겨졌다.
“하…. 누구 지나가면 어떡하죠?”
“이 근처로는 어선도 못 들어와.”
그렇게 말하면서도 너무 탁 트인 공간이라 은근히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 발짝만 더 가면 홍콩인데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없다. 정인은 곧장 호진의 목을 끌어안았고, 결국 성기가 맞닿았다.
아, 하는 신음과 함께 호진이 손안에 정인의 것과 제 것을 함께 움켜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호진의 페로몬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정인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틀며 쾌감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지점을 찾았다.
“아, 으응….”
두꺼운 기둥에 거의 짓눌리다시피 한 성기가 허연 정액을 울컥 토해 냈다. 호진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으로 정액을 긁어 정인의 뒤로 가져갔다.
“잠깐, 나 오늘….”
아직 약을 안 먹었다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호진이 콘돔의 포장지를 이로 뜯었다. 흉흉하게 일어선 페니스 위로 콘돔을 씌우는 것을 바라보며 정인은 입을 떡 벌렸다.
“야, 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그런 건 아닌데, 혹시 몰라서 가져왔어요.”
혹시 모르긴 뭘 모른단 말인가. 열린 주머니 안에는 여섯 개들이 콘돔 두 박스와 뜯지도 않은 러브 젤이 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작정하고 가져온 모양새였다.
“너…. 하윽.”
미끈한 손가락이 구멍을 열고 들어왔다. 두꺼운 마디가 예민한 입구를 쿨쩍거리며 쑤시는 감각에 정인은 호진에게 매달렸다.
“겨우 2주 못 만났다고 이렇게 좁아졌네요.”
거의 쏟아붓다시피 한 러브 젤 때문에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물감이 쾌감으로 변하며 애액이 뒤섞이자 그 소리는 더욱 음란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진은 내내 정인의 얼굴 곳곳에 키스하며 부드럽게 몸을 풀어 주었다. 마침내 열에 달뜬 얼굴로 정인이 먼저 삽입을 조를 때까지.
“등 배길 것 같은데, 형이 넣어 보실래요?”
“으응….”
어느샌가 해가 조금 기울어 있었다. 정인은 호진의 다리 위에 앉아 끄트머리를 입구에 맞췄다. 분명 호진이 손가락과 혀로 열심히 풀어 줬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몸이 많이 풀린 것 같은데 아무래도 크기가 크기라 그런지 쉽지가 않았다. 한참을 끙끙거리다 겨우 끄트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정인의 허리를 받친 채 호진이 엉덩이를 확 쳐올렸다.
“허억….”
눈앞이 새하얗게 질리며 두꺼운 성기가 단박에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다발적으로 퍼져 있는 신경을 한 번에 우드득 긁어 버린 탓에, 안쪽에서 애액이 왈칵 터졌다.
뭘 어쩌지도 못하고 거대한 가슴 위에 두 손을 얹었다. 한 번씩 기둥이 밀려왔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신음도 비명도 아닌 것이 파도 소리 사이로 섞여 들었다. 빨갛게 부은 정인의 페니스가 토해 낸 액체는 그대로 호진의 복근 위에 얇은 실을 남기며 뚝뚝 떨어졌다.
“흐윽, 하, 으….”
“형…. 하아.”
결국 정인은 호진의 몸 위로 쓰러졌다. 커다란 손이 뒷머리와 목을 한 번에 감싸 안아 받쳐 주었다.
빨래판처럼 갈라진 복근에 페니스가 짓눌리며 입이 벌어지자 호진의 혀가 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위아래를 전부 뒤섞은 채 한참을 그렇게 흔들리던 어느 순간,
“아.”
호진이 정인을 꽉 끌어안고 노팅을 걸어 버렸다. 내부에서 주먹만 한 크기로 훌쩍 부풀어 오르는 이물의 감각이 섬뜩했다.
“흐윽, 하….”
사정이 끝날 때까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저 이렇게 안겨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비정상적인 쾌감에 정인은 히끅 히끅 울면서도 호진의 혀를 찾았다. 그리고 호진은 커다랗게 부푼 것이 가라앉을 때까지 정인을 안고 다독였다.
이미 수영으로 한 번 기운을 빼 놓은 상태에서 노팅까지 하고 나니 그야말로 영혼의 밑바닥까지 전부 털린 듯 나른해졌다. 정인은 사정을 마친 호진의 페니스가 빠져나간 뒤로도 한참을 그의 몸 위에 누워 있었다.
“하…. 뭍까지는 어떻게 가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냥 매달려 계시면 돼요.”
호진은 정인을 일으켜 앉히고 타월을 둘러 주었다. 정인은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고개만 돌려 해가 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이야.”
뒤늦게서야 웃음이 터졌다. 열여섯 최정인이 상상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바위섬까지 헤엄쳐 가는 장면이 전부였을 것이다.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갑자기 눈이 맞아 애인과 섹스를 하고, 온몸에 끈적한 액체를 더덕더덕 묻힌 채 노을을 보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앞으로 이 바위섬 상상하면 오늘 했던 짓밖에 안 떠오를 것 같아.”
아마 앞으로도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새로운 기억에 덮여 점점 흐려지겠지. 붉게 물들어 가는 바다 위, 정인은 호진에게 기댄 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보이는 해변가에 한 소년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열여섯 최정인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는 것을.
“…그럴 거야.”
수고 많았어, 이제 그만 집에 가도 좋아.
마음 속으로 인사를 건네며 눈을 감았다. 더는 그 누구에게도 아프지 않은 노을 속이었다.
***
“형, 5분쯤 뒤에 내려오시면 될 것 같아요.”
똑똑, 노크하는 소리 뒤로 호진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열린 문틈을 타고 맛있는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아냐, 어차피 지금 씨름한다고 해서 될 게 아닌 것 같아.”
정인은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심히 두드리던 노트북 화면 위에는 쓰다 만 특강 신청서가 떠올라 있었다. 노트북을 통째로 들고 호진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갖가지 반찬이 올라앉은 식탁 한편에는 정인이 수확한 채소들이 싱그러운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상추 하나를 집어 아삭아삭 뜯어 먹으며 노트북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지원서 양식 아래로 빼곡히 적어 넣은 글자들이 보였다.
모든 것을 정확히 오픈하지는 않았지만, 한 페이지 남짓의 지원서 안에는 여태까지 정인이 겪어 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영영 이대로 그 무엇도 나아지지 않으리라 믿었던,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앞에 주저하고 망설였던,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을 돌아와야만 했던.
그러나 아무리 잘못된 길을 걸어도 언제나 살아있음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었던.
“제목만 정하면 되는데….”
도통 괜찮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한숨만 푹푹 쉬다가,
“…아.”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정인은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공백 위로 몇 개의 글자를 타이핑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앞으로 또 무수한 날들을 뜻밖의 일들로 넘어지겠지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보낸 시간을 똑같이 앓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 말을 전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뜨거워요, 조심하세요.”
“응.”
그때가 오면 흔들림 없이 전할 것이다.
나의 숨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당신의 숨 또한 그러리라는 것을.
때로는 알 수 없고 모호하지만 그렇기에 때때로 더욱 명료해지는,
〈당신의 숨은 시다〉
***
많은 사람들이 봄과 식물을 연관짓지만, 사실 식물이 가장 잘 자라는 계절은 여름이다. 겨울과 봄을 차례로 지나며 비축해 놓은 에너지가 최적의 습도와 온도를 만나 제대로 터져 버리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얼마 전 태산과의 통화에서 들었다.
“습도 너무 높은데….”
제습기의 LCD 창에 떠오른 습도를 바라보며, 정인은 호진이 모르게 침대 아래에 감춰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혹시라도 습기가 들어가 상할까 봐 말아 놓은 신문지와 지퍼백을 전부 여니 그제야 작은 상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반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하….”
졸업까지 체감상 10만 년 정도는 남았으니 결혼은 당연히 꿈도 못 꾸고, 약혼도 아직은 시기상조다. 그래도 하나뿐인 애인에게 다이아를 처바르고 싶어 효준을 붙잡고 한참을 상의한 결과물이 바로 이 커플링이었다.
유호진이라는 사람은 최정인이 주는 거라면 찢어진 양말 한 짝도 좋다고 모시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니 일단 주면 싫어할 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걸 주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결혼하자, 혹은 약혼하자 같은 거였다면 훨씬 쉬웠겠지만 이건 평범한 ‘커플링’이고, 그럼에도 반지라는 물건이 가지는 의미 자체가 워낙 거창한 데다, 둘 사이의 첫 반지이다 보니 어쩐지 오다 주웠다는 식으로 대충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할 말이 있을 법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호진의 경기가 있는.
“…넌 좋겠다, 습도 높아서.”
슬슬 손바닥 반만 한 이파리를 한 장씩 내놓기 시작한 솔잎이와, 조금 무섭다 싶을 만큼 크게 자라 버린 개똥이를 툭툭 털어 주었다. 잎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뚝 떨어져 화분 안으로 스몄다.
“하….”
반지를 주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다. 정인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는 잠들기 전까지 보다 만 논문 몇 권과 특강 자료가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구석으로 밀어 치우며 태블릿으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72.3%] 8월 18일 아케이드랩 데이터 분석 결과
첫 번째 메일은 사설 데이터 분석 센터에서 보내온 리포트였다. 그리고 메일 첫머리의 ’72.3’이라는 숫자가 나타내는 것은 지난 한 달간 ‘유호진’이라는 단어에 붙은 긍정 평가의 비율이었다.
호진이 호주와 미국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획득하며 긍정 평가 비율이 나날이 치솟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미 현욱과의 내기에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셈이다. 하지만 정인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나머지 27.7%는 대체 뭐 하는 새끼들이야?”
눈에 불을 켜고 경기 영상과 뉴스를 탐색했다. 호진에게 좋은 말을 해 주는 댓글만 쏙쏙 골라 따봉을 한 백 개쯤 누르다 보니 기계적인 동작이 감지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아이디가 일시 정지됐다.
“뭐야, 벌써?”
하도 당해서 이제는 별 감흥도 없는 일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풀려 있겠거니 생각하며 두 번째 메일도 확인했다. 그것은 페로몬 샘플이 시카고에 있는 연구소로 들어갔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
이제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는 히트 사이클 같은 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최근에는 히트 사이클이 주는 열감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사이클이 두어 번쯤은 돌았어야 할 시간이지만, 눈만 마주쳤다 하면 호진과 붙어먹으며 페로몬을 전부 풀어 버리니 결과적으로는 남는 게 없는 것이다.
LGS 증상이 어떻게 완화되었는지, 그 이유가 제대로 밝혀지려면 앞으로 또 꽤나 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완치 판정 자체도 일단은 추적 검사니 뭐니 하는 것들로 족히 1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지금 당장은 표면적으로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전의 최정인이었다면 딱히 동요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요즘의 정인은 단 하나의 사소한 성과에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말랑해져 있었다.
“응, 호진아.”
정인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사랑한다는 소리로 운을 뗐다. 그러고는 정인이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언제쯤 일어났는지를 물었다.
“일곱 시에 일어나서 샐러드 먹었어. 200미터 예선 두 시부터라고 했나?”
연구소에서 날아온 메일을 캡처해 정훈과 원경에게 메시지로 보내고, 자동차 키를 챙겼다. 폭염을 무사히 견뎌 낸 반지들을 신줏단지처럼 품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와…. 이러다 타 죽겠네.”
이제 더는 매일매일 물을 주거나 노심초사 불안해하지 않아도 식물이 절로 쑥쑥 자라나는 여름.
정인은 짧은 그림자를 매달고 볕 아래를 달렸다. 차에 올라탄 다음에는 호진에게 새로 배운 운전법을 떠올리며, 아주 느리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
한국에서 했던 마지막 경기가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무심코 시간을 헤아리던 호진은 그때로부터 이제 겨우 서너 달이 흘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이 안에 아주 오랫동안 살았던 감정들을 찬찬히 되돌아보았다. 썩 떠올리기에 유쾌한 날들은 아니었지만,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똑바로 마주하고 나면 늘 훌쩍 성장한 스스로의 모습이 조금 더 또렷하게 들여다보였다.
그래, 유호진이라는 인간은 정말 최선을 다해 성장했다. 하지만….
“…….”
아직 올림픽은커녕 세계 선수권까지도 한참은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걸 줘도 되는 걸까. 호진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전지 훈련과 국제 대회로 보낸 8주는 선수 유호진에게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인간 유호진에게는 생지옥 그 자체였다. 하루만 못 봐도 피눈물이 나는데, 설상가상으로 정인이 한국에서 특강을 들으면서부터는 볼 수 있는 날이 말도 안 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귀국하고 다시 정인과 함께 지내면서부터는 한결 심신이 안정되었지만, 몸 약한 사람이 자꾸 비행기를 타는 게 너무 마음 아파서 일부러 바쁘다며 만나지 않은 마지막 서너 주는 정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하….”
그때 생각난 게 이 반지였다. 정인이 선물한 팔찌를 항상 끼고 다니는 것과 별개로, 혹시 나중에 같은 상황이 온다면 늘 정인과 함께 같은 물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이걸 전해 주려면 오늘의 경기를 멋지게 해내야 한다. 모든 종목에서 꼴찌를 해 놓고 반지처럼 의미 있는 물건을 덥석 전해 주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다녀올게요.”
얼른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으로 가방 위에 앉아 있는 돌고래 인형을 꺼내 입 맞췄다.
가볍게 맴돌던 한 줌의 긴장마저 내뱉는 숨에 털어 버린 뒤 탈의실을 나서자 사방에서 카메라가 달려들었다.
“오늘 컨디션 어떠세요?”
“빅토리아, 유타 챔피언십 전 종목 금메달 획득 축하드립니다. 오늘도 올 금 자신 있으신가요?”
“이번 시즌 인센티브가 꽤 많이 쌓인 걸로 아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한양 스포츠 기존 계약 선수들 집단 소송 시작된 거 알고 계세요?”
TH 측에서 붙여 준 경호 인력은 즉시 그들을 제지해 호진을 경기장 입구까지 이끌었다. 덕분에 집중이 흐트러질 일도, 당황하거나 주춤할 일도 없었다. 호진은 저를 데려다준 경호원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야 돌아섰다.
“호진아.”
“네, 실장님.”
게이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코치와 권 실장은 유념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전달했다. 충분히 욕심을 내 볼 만한 경기임에도 그들의 당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였다. 절대 무리하지 말 것.
“체전까지 몸을 아껴야 하는 시점이고, 기록은 충분히 나와 있으니 더 욕심내지 않아도 좋아. 한국 대회에서의 기량을 측정하는 게 목적이니 혹시 모를 부상만 신경 쓰자.”
“네, 알겠습니다.”
호주인 코치는 끝까지 호진이 중압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호진의 성격과 경기 스타일을 완벽히 분석했기에 해 줄 수 있는 말이었다.
호진은 곧 다른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입구를 빠져나가자마자 알싸한 수영장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르고, 환호성이 먹먹하게 귀를 울렸다.
트랙 톱을 벗어 의자에 걸며 꽉 찬 관중석을 훑어보았다. 빠르게 2층을 훑던 시선은 5초도 채 지나지 않아 어딘가에 멈췄다.
굳이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절로 눈에 박히는 사람. 정인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손목에 걸린 팔찌를 풀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기분 좋은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4레인 유호진, 한국 대학교.”
세상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 속에서 스트레칭을 마쳤다. 일렁이는 수면 위로 곧 휘슬이 짧게 세 번 울렸다. 호진은 스타팅 보드에 올라 시퍼런 물을 노려보았다.
“…….”
당연하다는 듯 주어지던 계시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저 끝까지 어떻게 헤엄쳐야 할지,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더는 예전처럼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 볼 수 없다. 매 순간이 의혹이며 미지인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보아야 하는 것은 환상 같은 계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이니까.
이 한 번의 경기는 나의 무엇도 망가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사람이, 바로 저 위에 기다리고 있으니까.
삐익ㅡ.
버저음과 함께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늘 그래 왔듯 물은 아프도록 차갑고 또 무거웠다. 하지만 그것이 괴롭지는 않았다.
능히 견뎌 낼 수 있는 찰나임을,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
온 세상이 축제 분위기였다. 유호진이 시즌 열 번째의 금메달을 따냈기 따낸 덕분이었다. 소청 수영대회에서 하나, 빅토리아 챔피언십에서 두 개, 유타 챔피언십에서 네 개. 그리고 마지막 세 개는 오늘 인천에서 열린 성안 수영 대회에서 터졌다.
미디어는 앞다투어 유호진의 선전을 보도했고, 유호진의 얼굴이 박힌 모든 상품은 예정된 대박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기존에 유호진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던 스폰서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5분에 한 번씩 마케팅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대는 중이었다.
“…조금 걸을까요?”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든 말든, 스물한 살짜리 대학생 유호진은 현재 애인에게 줄 반지를 품은 채 덜덜 떠는 중이었다.
“그럴까?”
그것은 TH 그룹의 차기 후계자도 마찬가지였다.
천 팔백 억짜리 빌딩을 되찾고, 수천억 원에 달하는 유산이 전시회를 위해 아트센터로 착착 이동하는 중이었지만,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 최정인은 현재 몇 센티 되지도 않는 반지 두 알을 건네주는 순간의 멘트를 고민하느라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녁은 뭐 드실래요?”
“…너 먹고 싶은 거. 오늘 수고했으니까.”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별일 없이 자취방 건물 근처를 빙빙 돌았다. 가능한 한 으슥한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둘 다 마찬가지라,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샌가 학교 안이었다.
정인이 한 걸음씩 뗄 때마다 목에 건 금메달들이 쩔렁쩔렁 엄청난 소리를 냈다. 방학 끝물의 캠퍼스를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올해 또 외국 나가?”
돌계단을 발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정인이 물었다.
“웬만하면 안 나가려고요.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호진은 습한 날씨도 아랑곳 않고 정인의 손을 꼭 잡았다. 물론 깍지는 절대 끼지 않고.
“그래도 내년에 세계 선수권 준비하려면 또 몇 달은 나가 있어야 하고…. 올림픽 때도 그렇겠죠. 그땐 반년 정도요.”
“반년이나?”
작은 한숨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두 사람은 마침내 건물 옆으로 난 샛길에 들어섰다.
보조 출입구마다 달려 있는 전등 불빛에, 여름의 기운을 먹고 미친 듯이 자라난 나무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아, 여긴데.”
호진의 걸음이 어딘가에 멈춰 섰다. 여기서 우리 처음 만났어요, 작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어느 봄날의 풍경이 정인의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세상 모든 것에 대고 가시를 세우던 최정인과, 그럼에도 처음부터 다정하고 따뜻하기만 하던 유호진.
“호진아. 그날….”
나도 조금만 더 다정하게 대했다면 좋았을 걸. 그때를 생각하니 미안해져서 막 입을 열려는데,
“…대신 울어 주는 것 같았어요, 형이.”
호진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저도 그날 그랬어요. 너무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어서 힘들었는데, 고개를 드니까 저기 엄청 예쁜 사람이 서 있는 거예요, 꼭 제 마음 같은 얼굴을 하고.”
그는 고개를 들어 정인과 눈을 맞췄다.
“아, 저 사람도 그런 마음이구나.”
“…….”
“…그럼 비 맞게 하지 말아야겠다.”
순하디순한 눈동자 안에 정인의 모습이 맑게 비쳤다.
“이런 마음이라면 오늘 같은 날 우산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너무나도 유호진다운 말이었다. 정인은 웃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닿는 단단한 가슴 너머로 심장 뛰는 소리가 콩콩 울렸다. 그마저도 너무 사랑스러워 가슴이 온통 미어지듯 아팠다. 당장이라도 주머니에 든 반지를 건네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속이 터져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우산 씌워 줘서 고마워, 호진아.”
멋진 말이 아니어도, 그럴싸한 장면이 아니어도 지금이어야만 한다.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에 입 맞췄다. 그러고는 급히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마침내 정인이 반지 상자를 꺼냄과 거의 동시였다. 호진이 무언가를 정인의 앞에 내밀었다.
“음….”
“…아.”
별안간 생겨난 반지 상자 두 개를 두고 아찔한 침묵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곧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여름밤 위로 작은 웃음소리가 굴러갔다.
정인은 제 검지와 약지에 각각 다른 반지를 하나씩 끼워 넣었다. 이윽고 호진의 손가락에도 똑같이 반지 두 개가 걸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무 그늘 아래 입술을 맞댔다. 서로의 숨을 찾으며 느리게 눈을 감고, 조금 더 가까이 맞닿을 수 있도록 손을 바꿔 잡았다.
깨끗한 운동화. 햇살처럼 반짝이는 미소. 영영 바래지 않을 설렘과 끝을 모르고 자라나는 나뭇잎. 그야말로 한여름의 캠퍼스다운 모습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