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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6/8)

Chapter 3.

Your breath is poetry, truely it always has been (1)

예상대로 둘이서 별장을 청소하는 건 무리였다. 1층도 1층이었지만 지하실과 욕실, 심지어 테라스까지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콘돔만 전부 주워 불태워 버리고 섬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흘 만에 뭍으로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은 호진의 핸드폰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형, 저 잠시만요.”

전원을 켜기 무섭게 부재중 전화 알림과 메시지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호진은 핸드폰을 든 채 한숨을 쉬더니 골목 틈으로 사라졌다. 정인도 그제야 제 핸드폰을 켰다.

“…어?”

보통은 70퍼센트의 유호진과 30퍼센트의 스팸으로 이루어져 있던 통화 목록에 웬일인지 부재중 전화가 잔뜩 찍혀 있었다. 모두 정훈에게서 온 것이었다.

“뭐야, 아빠가 왜…?”

처음으로 전화가 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두 번째 전화는 정확히 24시간 후에 걸려 왔고, 그때부터는 약 2시간에 한 통꼴로 걸어 댄 것 같았다. 사이사이에 메시지도 끼어 있었다.

뭐 하니?

아들, 많이 바빠?

?

바쁜가 보네^^ 하루종일 아빠 전화도 안 받고.

마지막 메시지의 이모티콘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정인은 진땀을 삐질삐질 빼며 가장 최근에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안으로 연락 없으면 실종 신고 낸다.

“헉….”

하루만 더 늦게 나왔다간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정인은 곧바로 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정확히 두 번을 가고 끊어졌다. 여보세요, 들려오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아빠. 무슨 일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했어? 실종 신고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고?”

-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나 놀고 있었어….”

- 어디서.

골목 안에 서 있는 호진을 흘끔대며 머리를 굴렸다.

“어…. 제천에 있는 계곡인데, MT 왔거든.”

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인은 얼른 덧붙였다.

“그게, 친구들이 기말고사 보기 전에 리프레쉬 좀 하자고 해서.”

기말고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나흘 내내 애인을 끌어안고 엉망진창으로 뒹굴었지만 절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평소에 공부 열심히 했단 말이야. 사람이 어떻게 매일 공부만 해? 가끔은 좀 놀 수도 있는 거잖아. 안 그래?”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괜히 뜨끔해져서 똥배짱을 부리자 전화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어쨌든 별일 없다니 다행이네. 그나저나 작은 아빠 생일에 뭐 할래.

“헉, 맞다.”

깜짝 놀라 오늘의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원경의 생일이 당장 몇 주 뒤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빠는 뭐 할 건데?”

- 생각 중이야. 보아하니 우리 아드님께서는 아주 잊어버리신 것 같고.

정인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첫해에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잊어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날 선물 가지고 집으로 갈 테니까 같이 밥 먹자. 케이터링 부를 거야? 아니면 외식?”

- 그건 그날 작은 아빠 컨디션 봐서 결정하자.

“…일단 알겠어.”

작게 울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통화를 마친 호진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봐, 사랑해요 안녕.”

정인은 얼른 통화를 마무리했다. 급히 전화를 끊느라 ‘이따 보자’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뭐래?”

“어….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좀 쉬고 왔다고 했더니 다음부터는 말하고 가라고, 그냥 그 정도가 끝이었어요.”

“그래? 다행이네.”

“형은 무슨 통화 하신 거예요?”

“별거 아니야, 아빠한테 전화 왔었어.”

정인은 운전석의 손잡이를 쥐었다.

“형, 제가 할게요.”

호진이 부리나케 달려와 정인을 가로막았다.

“왜? 무서워서?”

“아뇨, 그게 아니라 형 힘들까 봐요.”

“웃기시네.”

“…가는 길에 볼 거 많아요. 운전은 제가 할 테니까 형은 그냥 편하게 앉아서 구경하세요.”

잠깐의 실랑이 끝에 운전석을 탈취하는 데에 성공한 호진은 잠시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더니 차에 올라탔다.

“아참, 그리고 저 다음 주에 고향에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친구가 청첩장 준대서.”

“…청첩장? 스물한 살인데 벌써 결혼을 해?”

“둘이 사귄 지 10년도 넘었거든요. 어려서부터 동네 사람들 다 아는 공인 커플이었어요. 마을에서 잔치한다는데….”

호진은 흐흐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그러고는 물었다.

“괜찮으시면 형도 같이 가실래요?”

“나?”

뜬금없는 소리였다.

“잔치도 잔치지만 오랜만에 부모님이랑도 만나는데, 형이랑 같이 있으면 좀 덜 무서울 것 같아서요.”

“부모님이 엄하셔?”

어쩐지 상상이 되지 않아 물었다.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무서워서 그래요. 최근 경기 여론 때문에….”

혹시라도 걱정하거나 슬퍼하실까 봐. 이어지는 말끝에 한숨이 따라붙었다.

“너무 어려서부터 떨어져 자라서 안 그래도 걱정 많이 하시거든요. 사실 이제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

톨게이트를 통과한 차는 곧 고속 도로로 들어섰다. 호진은 커다란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안정감 있게 차를 몰았다.

“다 커도 애기처럼 보이나 봐요, 부모님 눈에는.”

정인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봐.”

어두워져 가는 차창으로 스물둘 최정인의 얼굴이 비쳤다. 그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 커도 맨날 애기 같은가 봐.”

별일 없다니 다행이네, 안도감으로 가득하던 정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어느샌가 학교가 있는 거리에 접어들었다. 정인은 시트에 몸을 푹 묻고 휴게소에서 사 온 통감자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꼴랑 나흘밖에 안 지났는데 뭐 이렇게 낯설지?”

“그러게요.”

그의 말대로 여느 때와 똑같은 풍경인데도 어딘가가 낯설어 보였다.

아마 그 짧은 며칠 동안 주위를 둘러싼 많은 것이 변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정인과의 관계가 한층 깊어진 것도 그랬지만, 알게 모르게 자리 잡고 있던 부담감을 내려놓기로 결심한 것 또한 호진에게는 굉장히 큰 변화였다.

“어, 잠깐만.”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시트에 편안히 기대 있던 정인이 별안간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창문에 얼굴을 붙였다. 햄스터처럼 볼 한가득 통감자를 넣은 채였다.

“우웁, 이게 무슨 일이야….”

“왜 그러세요?”

차는 이제 막 자취방 앞 골목에 진입하고 있었다. 동태가 심상치 않아 묻는 말에 정인은 골목 끝을 가리켰다.

“호진아, 멈추지 말고 저 앞까지 쭉 가.”

“네?”

“절대 멈추지 마. 골목 끝까지, 아니다. 그냥 다음 블록까지 가 줘.”

일단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자취방으로부터 두 블록은 떨어진 먼 곳에 차를 멈춰 세우고야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인은 연신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꼼지락거리고 옷을 털어 댔다.

“호진아. 정말 미안한…. 아니, 너 예쁜데. 혹시 한 시간만 집에 들어오지 말고 어디 다른 곳에 있어 줄 수 있어?”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어질 때면 예뻐해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게 기쁘면서도 정인이 왜 이러는지가 궁금했다.

“왜 그러시는데요?”

“그게….”

때마침 정인의 핸드폰이 징징 울었다. 발신인을 확인한 정인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차에서 내렸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 줄게, 하여튼 너 정말 예뻐.”

“형.”

붙잡을 틈도 없었다. 정인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다가 종국에는 뛰기까지 했다. 사이드 미러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호진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지?”

의문투성이였지만 정인이 그러라는데 못할 것도 없다. 간단하게 운동을 하면 한 시간쯤은 금방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진은 체육관으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체육관까지 가려면 어쨌든 TH관 샛길로 가기는 해야 했다.

언제 박혔는지 모를 껌,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사, 종잇조각, 깨진 유리 조각…. 바닥에 널린 것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걷다 보니 어느샌가 TH관과 자취방의 사이였다. 멀리 정인의 등이 보였다.

“뭐 하는 거지?”

자취방 건물 앞에 낯선 차 한 대가 서 있고, 정인은 웬일인지 조수석 유리에 찰싹 달라붙어 차창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최정인.”

그때, 호진의 등 뒤에서 누군가 정인의 이름을 불렀다. 호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곳에는 칼같이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어딜 갔다 이제 와.”

그는 아예 호진의 존재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곁을 스쳐 갔다. 우성 알파 특유의 알싸하고 차가운 향과 함께였다.

“그….”

남자의 구둣발이 가까워질수록 정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정인을 향해 내달려 그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한데, 누구세요?”

“뭐?”

정인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정인이 호진의 옷자락을 콱 움켜쥐었다.

“호진아, 잠깐만.”

“아, 네가 유호진이구나?”

남자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선명한 적의가 느껴졌다. 호진은 크게 한 걸음을 떼 그에게로 다가섰다.

“대답부터 하죠.”

“…….”

“우리 형이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누구시냐고.”

묻는 말에 남자가 허, 하고 코웃음 치며 호진을 아래위로 훑었다. 호진은 차분히 숨을 내쉬며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남자는 선수인 호진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장신에 좀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얘 뭐야.”

가만히 호진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정인을 향해 슬쩍 고갯짓으로 물었다. 정인은 얼음처럼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호진은 아예 정인을 제 등 뒤로 숨겨 버렸다.

“대답할 이유가 있나?”

마찬가지로 적의를 드러냈다. 남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있지, 그럼.”

느리게 고개를 숙여 호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그동안 네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호진의 어깨 위로 남자의 손이 얹혔다. 가벼워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누르는 힘은 이가 절로 다물릴 만큼 강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했지.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어떤 날은 자다 깨서도 네 생각이 나더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자는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결정적인 순간에 달려들기 위해 숨을 죽이고 맴도는 맹수의 위장 같았다.

절대 정인이 이 남자와 단둘이 붙도록 둬서는 안 된다. 위험을 감지한 호진은 그가 돌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계산하며 정인의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

“너 쟤랑 무슨 사이야?”

남자가 픽 웃으며 물었다.

“말조심해요.”

정인을 하대하는 듯한 말투에 퓨즈가 나가 버린 호진은 으르렁거리며 제 어깨에 얹힌 손을 쳐 냈다.

“감히 얘, 쟤. 이딴 식으로 부를 만한 사람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덧붙였다.

“나 이 사람 애인이에요. 충분한 대답이 됐나?”

“…….”

“그러니까 아직 볼일 남았으면 나랑 얘기하고, 더 할 말 없으면 이쯤 하고 가던 길 가시죠.”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던 정인이 찰싹 소리가 나게 호진의 등짝을 때렸다.

“미쳤어, 진짜?!”

“악!”

온 신경을 남자에게 집중하고 있던 터라 등짝은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풀 파워로 스매싱당한 부위가 너무 아파 절로 몸이 뒤틀렸다. 그리고 호진이 종잇조각처럼 팔랑팔랑 흔들리는 사이 정인은 황급히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잠깐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모두 화를 가라앉히고 문화 시민답게 이성적인 대화를 하자. 응?”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고, 정인은 답지 않게 빠른 말투로 변명했다.

“그러니까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니거든? 사실은 누구보다도 착한 애야, 그런데 어떻게 된 거냐면…. 호진아, 너 뭐라고 말 좀…. 아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저 사람은 대체 누군데 세상에서 제일 귀한 우리 형을 절절매게 만드는 걸까, 정인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 끼어들려는데, 남자가 물었다.

“여태까지 이 새끼랑 있었니?”

“그게 아니라, 아빠….”

아빠?

호진은 순간적으로 제 귀를 의심했다.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니까 일단 좀 진정해. 일단 작은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고….”

“애인이라.”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정인은 한 번 더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남자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햇살처럼 웃었다.

“똑같은 말을 서너 번씩 하게 하는구나. 우리 아들이랑…. 자칭 내 아들의 애인이라는 놈이 말이야.”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호진은 야밤에 호랑이와 마주친 떡장수의 심정으로 일순 숨을 쉬는 법마저 잊고 말았다.

그리고 남자는 두통이 이는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꾹 누르더니, 고개를 돌려 돌처럼 굳어 있는 호진을 쳐다보았다.

“네가 설명해 봐.”

호진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간신히 그와 시선을 맞췄다.

“너 뭐 하는 놈이야?”

남자가 싸늘하게 물었다. 누가 봐도 터지기 일보 직전인 듯한 목소리였다. 억지로 끌어 올린 한쪽 입꼬리에는 작게 보조개가 파여 있었다. 유호진이 사랑해 마지않는 최정인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였다.

***

정인과 이틀이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는 말에도 원경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그리고 정인의 일이라면 언제나 눈을 뒤집고 달려들던 최현욱 회장마저도 좀 더 기다리면 알아서 돌아올 테니 실종 신고 따윈 하지 말라며 태평한 소리를 했다.

겨우 연락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다행히도 정인은 말짱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문제는 그 뒤를 따라온 알파였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자상하신 부모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한국 대학교 체육교육과 2학년에 재학 중이며 수영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고 있고, 주 종목은 자유형….”

“자기소개서 쓰나?”

문제의 알파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몰라뵙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누가 자네 아버님이야?”

그렇게 걱정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아주 바르고 선한 청년이라고.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원경의 말조차도 지금의 정훈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TV 속에서 정인을 끌어안고 있던 게 현역 수영 선수라는 것도, 맘만 먹으면 정인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체격이 좋은 우성 알파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런 와중에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과의 대화를 방해받고 견제까지 당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화는커녕 그저 헛웃음만 날 뿐이었다.

“최정인, 당장 짐 챙겨서 본가로 들어와.”

“아빠….”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청년에게서 나는 냄새는 분명 정인이 입원했던 날 병실을 맴돌던 미묘한 냄새와 똑같았다. 다시 말해 정인은 그때부터 이미 이 알파를 만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파 같은 거 만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페로몬은 사람이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훈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몸이 아프기까지 한 아이이니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가 없다. 수십 번 전화를 걸어도 연락이 되지 않던 게 이 알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말할 것 없어. 당장 짐부터 챙겨.”

“…싫어.”

그때였다. 울먹이던 정인이 홱 몸을 돌렸다.

“이러지 말고 일어나, 호진아.”

여전히 석고대죄 중인 유호진을 일으켜세우고 무릎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 주는가 싶더니 그의 손을 잡고 정훈을 바라보았다. 아기 병아리처럼 동그란 눈이었다.

“아빠, 인사 늦게 시켜서 미안해. 얘는 유호진이고….”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움켜쥔 손마디에 띵하고 뒷골이 울렸다.

“너 지금….”

“나한테 너무 잘해 주는 사람이야. 매일 맛있는 밥도 만들어 주고, 재미있는 곳에도 데려다주고, 같이 있으면 항상 행복해. 배울 점도 많고 세상에서 제일 착해. 방금 전에 아빠한테 못되게 군 것도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단 말이야.”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평생 금지옥엽으로 아낀 아들이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개뼈다귀를 비호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난 나흘간은…. 정말 MT 갔던 거 맞아. 효준이도 같이 갔었어, 못 믿겠으면 전화해 봐도 돼.”

그렇게 말하며 정인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스피커폰으로 걸어.”

정훈은 쌀쌀맞게 말했다. 그리고 정인은 호진의 손을 꼭 잡은 채 전화를 걸었다. 텅 빈 골목으로 송화음이 몇 번 울리고, 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개떡.

정훈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노려보았고, 정인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효준과 오랫동안 공유해 온 암호문을 읊었다.

“효준, 집에 잘 들어갔어? 저녁 소화 다 됐냐?”

‘밥 소화 다 됐냐’라는 말은 지금부터 나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달라는 둘만의 암호였다. 물론 정인이 써 보는 건 사실상 처음이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효준은 어, 하고 대답했다. 정인은 정훈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나 지금 큰 아빠랑 같이 있는데, 우리 같이 제천으로 MT 갔던 거 맞냐고 물어보셔서.”

정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너무 미안해서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당장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태워 죽일 것처럼 쳐다보는데, 나흘 내내 호진과 섬에 틀어박혀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알아 버리면 그다음에는 정말로 감당 불가의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았다.

- 음…. 그랬지. 그러고 보니 니 빤쓰 내 짐 가방에 들어 있더라. 나중에 들고 가라.

“그냥 버려. 그럼 나중에 보자.”

- 그런데 있잖아, 사랑하는 정인아.

효준이 불쑥 물었다.

- 너 지난주에 빌려 간 내 구두는 왜 안 주니?

“구두?”

- 톰포드 봄 신상 말야.

“이런 미….”

목숨을 건져 줬으니 그 값을 받아 가겠다는 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게거품을 물려던 정인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이런 미안할 데가 있나. 금요일까지 가져다줄게.”

- 그래. MT에서 놀았던 얘기는 그때 만나서 하자. 빠이!

얄미운 목소리가 툭 끊어졌다.

“이제 됐지?”

“…….”

정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정인은 슬금슬금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빠…. 화 풀어요. 응?”

무섭게 굳어 있던 얼굴이 순간 녹아 내렸다.

“호진아, 너도 다시 인사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중률 백 퍼센트의 최종 병기를 꺼냈다.

“여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두 대의 차가 한 곳에 멈춰 섰다. 호진과 정인이 같은 차에서 내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정훈이 내렸다. 그는 아직도 냉기를 풀풀 흘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남자 친구의 아버지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초대형 사고를 저질러 버린 호진은 정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들숨에 한 번 날숨에 한 번 사죄했고,

“글쎄, 내가 왜 자네 아버님이냐니까.”

사랑한다는 정인의 말에 기분이 풀린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호진이 아니꼬운 정훈은 끝까지 선을 그었다.

“나 배고파, 얼른 밥 먹자.”

그리고 정인은 내내 그 사이를 오가며 진땀을 뺐다.

마침내 들어선 곳은 깔끔한 한정식 전문점이었다. 밑반찬이 하나둘 깔리고 메인 요리가 하나씩 등장하는 가운데, 호진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정훈의 잔에 차를 따랐다.

“차 한잔 올리겠습니다.”

“…….”

정훈은 떨떠름하게 그를 받아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밥상을 뒤집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정인이 토끼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차마 그럴 수가 없는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와, 이거 아빠가 좋아하는 건데…. 아빠 많이 드세요, 알았지?”

정훈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정인은 고기 몇 점과 채소를 집어 그의 접시 위에 예쁘게 얹었다. 정훈의 얼굴이 또 한 번 사르륵 풀렸다.

“자네도 들지.”

그는 호진이 있는 쪽을 보지도 않고 툭 던지듯 말했다.

“…예.”

달그락달그락 수저 소리만 아득했다.

한풀 꺾인 듯한 분위기에 정인은 몰래 한숨을 쉬며 호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바른 자세로 앉아 깻잎장아찌에 젓가락을 가져가고 있었다. 여러 장이 겹쳐져 딸려 나오는 걸 보다가 문득 손을 들었다.

“잡아 줄게.”

통통하게 쌓여 있는 깻잎 간미를 꾹 눌러 준 순간이었다.

“최정인!”

정훈이 탁 소리나게 젓가락을 놓았다.

“내가 너 밥상머리에서 남의 반찬 수발이나 들라고 이날 이때껏 고운 것만 먹이고 입혀 키운 줄 알아!”

눌릴 대로 눌리다 못해 망가진 버튼이 기어이 터지고야 말았다.

알파의 페로몬을 잔뜩 뒤집어쓰고 나타나 난데없이 연애 선언을 하고, 심지어 효준을 이용해 감춰야 할 정도로 대단한 짓을 하고 오신 듯한 아드님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참고 또 참았다.

그런 와중에 제 밥은 먹지도 않고 싸가지 없는 개뼈다귀의 깻잎이나 떼 주고 있는 꼴이라니. 무너진 억장이 지하까지 푹 꺼지는 것 같았다.

“아, 깻잎 한 장 떼 주는 게 뭐가 어때서!”

하지만 깻잎 한 장에 제대로 터져 버린 것은 나름대로 꾹 참고 있던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라데이션 분노 유전자를 공유하는 부자간에 불꽃이 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인내심의 끈을 놓은 정인은 아예 대놓고 깻잎을 한 장씩 떼어 내 호진의 밥 위에 차곡차곡 얹어 주기 시작했다.

“계속 떼 줄 거야, 백 장도 천 장도 뗄 수 있어. 깻잎 다 떨어지면 시금치 떼 줄 거니까 어디 두고 봐!”

“너 이…. 이…. 당장 그만두지 못해!”

눈앞에 반찬이 날아다녔다. 심각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호진은 새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꽤나 노력해야 했다.

정말 의외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단정하고 똑 부러지던 정인이 제 아버지의 앞에서는 마냥 아이 같았다. 표정도 훨씬 편안해 보이고, 말의 높낮이도 다채로웠다.

“…….”

그걸 지켜보는 건 조금 슬펐다. 삶이 할퀴고 간 상처를 전부 거둬 내면 이런 모습만이 남겠구나. 이게 당신의 알맹이구나 싶어서.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건너며 마주할 수많은 모습 중의 하나를 미리 발견한 듯한 기분이라서.

“형.”

호진은 제 앞에 놓여 있던 차 주전자를 들고 정훈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앉자 정훈은 영 탐탁잖다는 표정으로 호진을 쳐다보았다.

“뭐 하자는 건가?”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호진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을 몰라뵙고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노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평생을 노력해도 아버님의 사랑에는 감히 미칠 수 없겠죠. 그렇게 아끼신 아들의 애인이라며 나타난 놈이 불손한 태도를 보이면 저라도 용납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고개를 들었을 땐 정훈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릇 속의 시금치를 전부 집어던질 기세이던 정인의 움직임마저 멈춘 채였다.

“그럼에도 아버님, 염치없지만 한 번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왜 그래야 하지?”

그 말에 호진은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매달렸다.

“정인이 형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께 저도 예쁨받고 싶어서 그럽니다.”

“허.”

그에 정훈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이라던 원경의 말에 코웃음을 쳤건만, 이제 보니 어째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대놓고 여우짓을 하는데 그게 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하는 짓은 아니다.. 맹랑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패기가 조금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형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곁에 있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바르게 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아직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주전자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마음으로만 대하고 항상 존중하며 예쁘게 만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요.”

정인도 새빨개진 얼굴로 부리나케 달려와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아빠….”

망울망울한 정인의 눈을 바라보며 정훈은 잠시 말이 없더니 피식 웃었다.

“허락하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애를 만나지 않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허락하실 때까지 빌고 또 빌 작정입니다.”

단단한 시선이 맞닿았다. 한참 그렇게 정인과 호진을 번갈아 바라보던 정훈은 골이 아파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당장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내 허락이 무슨 소용이야.”

“그럼….”

“둘이 알아서 지지고 볶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퉁명스러운 말에도 호진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며 주전자를 들었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유호진이라고 합니다.”

정훈은 그제야 호진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최정훈이다, 정인이 아빠 되는.”

***

“외박은 안 돼.”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랜덤하게 영상 통화 걸어서 리저너블한 사유 없이 외박 중이면 그땐 너희 둘 다 가만 안 둬.”

“…응.”

“늦은 밤에 단둘이 돌아다니는 것도 안 돼.”

“알았어.”

정훈은 고개를 홱 돌려 호진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왜 대답을 않나?”

“…알겠습니다.”

호진의 사과가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정훈은 그 이후로 호진에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물론 정인에게 하듯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더는 처음 같은 경계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따금은 고향이 어디인지, 선수 생활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등의 간단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럼 밥은 내가 살게.”

“형, 제가….”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정훈과 호진의 극적인 평화 협정으로 행복도가 999에 다다른 정인은 서버가 도착하기도 전에 계산서를 들고 방을 나섰다. 멀뚱멀뚱 남아 있던 정훈과 호진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먼저 나가 있는다.”

“…그럼 저도 같이 나가 있을게요.”

“응, 알았어.”

두 사람은 입구에 서 있는 정인을 지나쳐 식당을 빠져나왔다. 한적한 골목에 깔린 어둠 위로 나란히 발을 내디뎠다.

“내가….”

호진보다 한 걸음 앞서 걷던 정훈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후회하는 게 참 많은데.”

그는 고개를 돌려 식당 안쪽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정인의 모습이 보였다.

“죽을 때까지 벌만 받으며 살아야 할 것 같은 삶에도 가끔 과분한 선물이 주어지더라고.”

“…….”

“정인이와 정인이 작은 아빠가 나에게는 그런 존재야. 그리고 너무 귀한 것을 손에 가득 쥐고 있다 보면 세상 모든 게 위험으로 가득찬 듯 느껴질 때가 있지.”

그 시선을 따라 호진도 정인을 쳐다보았다. 계산 담당 직원과 아는 사이인지, 정인은 그와 대화를 나누며 크게 웃었다. 지켜보는 정훈과 호진의 얼굴 위로도 미소가 떠올랐다.

“목숨보다 귀한 아이라서,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까 아직도 이렇게 겁이 나고 마음이 쓰여. 자네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닌데, 조금 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더군.”

“아버님….”

호진은 그가 나름의 사과를 건네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보았다. 정훈은 곧 머쓱하게 웃었다.

“서운했겠지만 이해해 줄 수 있겠나?”

“이해라뇨, 가당치도 않습니다. 당연한 일인걸요.”

호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정인이 형은 여태까지 제가 살면서 본 그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크게 심려치 마시라고 말할 심산이었다. 무심코 정훈에게 눈길을 돌리는데, 불현듯 그의 얼굴 구석구석 정인과 똑 닮은 점이 보였다.

“…그런데 아버님.”

호진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에게 다가섰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정말 미남이십니다.”

“뭐?”

정훈은 어깨를 움찔 떨며 호진을 돌아보았다.

“흐흐.”

호진도 미친 꽃사슴처럼 선한 광기로 가득한 눈을 하고 웃었다. 확 돌아 버린 듯한 눈빛에 소름이 돋은 정훈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호진은 멀어진 만큼을 좁혀 다가섰다.

“이렇게 닮았는데 어떻게 몰라뵈었는지 모르겠어요. 코끝이 뾰족하고, 한쪽 입가에만 보조개가 있고, 눈매도 그려 놓은 듯 예쁘고…. 가만 보니 손가락이 긴 것도 아버님을 닮았나 봅니다.”

말을 하다 보니 제대로 시동이 걸렸다. 호진은 본격적인 예찬을 시작했다.

“지난번에 다른 아버님을 뵈었을 때도 너무 닮아서 놀랐는데, 이렇게 보니 아버님과도 판박이입니다. 제 판단이 턱없이 부족했네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하여튼 정인이 형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똑똑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잘생긴 거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길 가는 사람을 무작위로 백 명 뽑아 최정인이 잘생겼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백 명이 전부 그렇다고 할 거고, 혹시라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즉시 안과 진료를 받도록 조치해야 할 겁니다. 똑똑한 것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인데, 어떻게 아냐면 제가 형이랑 학교 수업도 몇 개 같이 듣거든요. 저는 강의 자료까지 전부 봐야 조금 이해될까 말까인 것들이 많던데, 형은 한 번만 들어도 다 이해하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게다가 형이 기본적으로 마음이 참 따뜻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판단력과 순발력이 워낙 좋다 보니 언제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적인 해답을 찾는 것 같습니다. 이건 선수로서도 정말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사에 상대를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면도 정말 최고입니다. 혹시 형이 하늘에서 실수로 떨어진 천사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백 번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잠깐, 숨 좀 쉬고 말하지.”

간신히 말을 끊었다.

“아, 죄송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달리 할 곳이 없다 보니…. 늘 저 혼자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하하.”

아무리 정훈일지라도 제 자식이 좋아 죽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호진은 슬그머니 다가와 정훈의 곁에 섰다. 커다란 눈을 굴려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애교를 부리듯 정훈의 손끝을 살살 쥐었다.

“하여튼 너무 심려치 마시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버님을 똑 닮아 그렇게나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니까요.”

놀랍게도 커다란 사내놈이 손을 조몰락거리는데 그게 딱히 징그럽지가 않았다. 훤칠하고 예쁘장하니 이쪽 부모님들도 아들을 볼 때마다 적잖이 배가 부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나저나 정인이 저 녀석은 아주 식당에서 살림을 차릴 생각인가.”

그새 호진에게 살짝 감겨 버린 정훈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빼냈다. 그러며 품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만 들어가 볼 테니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이쪽으로 연락하고.”

“감사합니다.”

호진은 정훈을 향해 구십 도로 고개를 숙였다. 정훈은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을 향해 몇 걸음인가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행여라도 마음 다치지 않게….”

여전히 유리문 너머에서 웃고 있는 정인을 애틋하게 돌아보며 한 번 더 당부했다.

“…꼭 좀 부탁한다.”

누구도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을 목소리였다.

“물론입니다. 살펴 가십시오.”

호진은 정훈의 차가 골목을 돌아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야 그가 주고 간 명함을 뒤집었다. 꽤나 눈에 익은 건설사의 로고가 제일 먼저 보였다. 별생각 없이 그 아래로 눈길을 내렸다.

“…헉.”

호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사장 최정훈

몇 번을 확인해도 똑같았다. 그의 이름 옆에 찍혀 있는 직함은 분명 차장도 짜장도 아닌 ‘사장’이었다.

***

섬 하나를 통째로 사들여 올린 별장과 최고급 요트.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별장 군데군데 자리한 미술품 중에는 호진이 이름을 아는 작가들의 작품도 더러 있었다. 단지 정인이 에둘러 말했을 뿐, 그 모든 것이 ‘적당히 넉넉하게 자란’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엄청난 부자일 줄은 몰랐다.

“으어….”

자그마치 중흥 건설 사장의 아들이었다니. 호진은 벽에 등을 대고 주르륵 미끄러지며 정훈에게 받은 명함을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여태까지 정인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가고 있었다.

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고 깔끔하기만 하던 차림새, 엄청난 규모의 저택을 제집처럼 자연스레 드나들던 모습, 대회가 끝나자마자 정인이 데려가 준 고급 레스토랑, 그리고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기품 있던 그의 아버지(들)….

“바보같이…. 왜 몰랐지?”

“뭘 몰랐는데?”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권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들어오라 손짓했고, 호진은 쪼르르 상담실로 들어가 앉았다. 권 실장은 검사 결과지를 내놓으며 중얼거렸다.

“한참 애기 때부터 봤는데 이게 참, 생각보다 싱숭생숭하네. 쉬는 동안 애인이랑 좋은 시간 보냈구나.”

“…네.”

이형질 선수인 이상 페로몬의 사용처를 추적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피를 뽑던 순간부터 무조건 들킬 거라고 각오하긴 했다. 그래도 막상 들으니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냥 적당히 좋은 시간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참, 선생님. 저 이상한 일이 좀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억제가 자꾸 풀렸다가 말았다가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호진은 정인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의 타임라인을 머릿속으로 쭉 늘어놓았다.

“제 애인을 처음 봤을 때 분명 페로몬 냄새를 맡았거든요. 그땐 향수인 줄 알고 넘겼는데 이번에 보니까…. 그때 느꼈던 게 정말로 그 사람 페로몬이 맞더라고요.”

“…그랬어?”

“네. 하지만 그 외에는 어디서도 오메가의 기척을 느낀 적이 없어요. 제 애인의 아버지가 오메가이신데, 그분을 뵀을 때마저도 오메가이신 걸 전혀 몰랐고요.”

원경을 만났을 때 뭐라도 느꼈다면 그가 정인처럼 남성 오메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원경에게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제 또 알파 쪽 아버지께 인사드렸는데, 그분은 만나자마자 알파이신 걸 알아봤어요. 이건 아마 이번에 페로몬이 고장 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벌써 애인 부모님한테 인사까지 다 했다고?”

권 실장이 입을 떡 벌렸다.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야?”

“저야 그러고 싶죠.”

묻는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매콤한 싸대기가 날아와 팔뚝을 찰싹 때렸다.

“아야….”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결혼을 하겠대? 아무리 빨라도 스물다섯까진 꿈도 꾸지 마.”

그렇게 말하며 권 실장은 검사 결과지를 가리켰다.

“네 생각이 아주 틀린 건 아냐. 처음 애인을 봤을 때 어떻게 페로몬을 느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억제 풀린 거 맞아.”

“…그게 가능한 건가요?”

“정말 희박한 확률이지만 절대 불가능은 아니지. 그나저나 이번에 페로몬이 좀 많이 튀었는데, 상대는 괜찮아?”

“네.”

“그건 정말 다행이네. 하여튼 왼쪽은 이전에 제출한 민감도 레벨 조정 대비 사전 검사 내역이고, 오른쪽은 오늘 나온 결과야.”

한쪽은 전부 그래프가 빨갛고, 다른 한쪽은 모두 초록색이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너는 분명 곧바로 민감도 레벨 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어. 기존에 먹던 약의 함량을 줄이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이론적으로 6개월은 더 붙여야 겨우 조정 프로그램에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였는데, 지금은 마치 16주짜리 프로그램을 다 끝내 버린 사람 같은 수치야.”

또 한 장의 종이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래프마다 타임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처음으로 페로몬에 문제가 터졌던 때의 예상 농도는 185 정도. 그리고 얼마 안 가서 100짜리가 한 번 더 터졌다고 나오는데, 다른 반응이 같이 일어난 걸로 봐서는 아마 이때가 진짜 러트였을 거야. 처음에 터진 건 약물 부작용인 것 같고.”

“아….”

“어쨌든 다시 말해 너는 300 정도, 그러니까 치사량에 해당하는 페로몬을 나흘 만에 전부 소화한 셈이야.”

“그럴 수도 있나요?”

권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얘기지. 아무리 대단한 러트를 보냈대도 이 정도 농도의 페로몬이 단 며칠 만에 풀리는 건 불가능해.”

“그럼…. 이게 뭔가요?”

“글쎄. 정확히 뭔지 알려면 네 애인이라는 애가 따로 검사를 받아 봐야 될 것 같은데.”

“제 애인이요?”

“응. LGS를 앓고 있다고 했던 걸로 봐서는…. 그냥 가정이긴 하지만 아마 쏟아지는 걸 그 애가 전부 받아서 소화시켜 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 처음 그 애를 만났을 때 억제가 무효화됐던 것도 연관이 없진 않을 거야.”

그녀는 키보드를 두드려 몇 장의 문서를 뽑아냈다. 전부 영어로 쓰여 있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어떤 기관의 소개 자료인 것 같았다. 호진은 띄엄띄엄 아는 단어를 읽었다. 국제, 환자, 이형질, 협약, 연구….

“운이 좋았어. 상대가 그 애가 아니었다면 너는 이번 쇼크로 죽었을지도 몰라.”

권 실장은 종이에 대고 직직 형광펜을 그었다. 웹 사이트의 URL과 이메일 주소가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애는 이쪽으로 한번 연락해 보는 게 좋겠다. 세계에서 이형질 연구로 가장 유명한 대학이야. 정확한 건 검사를 받아 봐야 알겠지만, 네 페로몬이 이렇게 풀렸다면 그 애의 페로몬 수치에도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고….”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호진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한국에서만 대충 얘기하고 끝낼 일이 아닌 게 되거든.”

***

“네? 정밀 검사라뇨.”

정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춘삼 씨, 일단 진정하시고요.”

의사가 말했다.

“이건 꼭 확인하셔야 하는데 저희 병원에서는 봐 드릴 수가 없어요. 큰 병원 의사 소견서 받아서 연구 기관까지 넘겨 봐야 확실한 결론이 나올 겁니다.”

“무슨 결론이요? 그래프 전부 초록색인데 그럼 별 이상 없는 거 아닌가요?”

“이상이야 없죠. 그래서 검사를 받으셔야 한다는 겁니다.”

이형질을 보는 병원 중 가장 큰 곳이 삼한 의료원이고, 그곳의 원장이 정인의 주치의다. 정밀검사 따위를 하게 된다면 정말 빼도 박도 못 하고 호진과 있었던 일을 모두에게 들키게 되는 셈이다.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한 번 더 못을 박으려는데,

“아직은 가정이지만, 춘삼 씨는 어쩌면 본딩 없이 LGS를 완치한 세계 최초의 사례가 될 수도 있어요.”

“네에?!”

날벼락 같은 소리에 또 한 번 입이 벌어졌다. 의사는 몇 개의 표를 뽑아 보여주었다. 날짜를 보니 마지막으로 이 병원에 왔을 때 받은 검사 내역인 듯했다.

“이때도 히트 사이클이 굉장히 빨리 끝나면서 안정적인 수치가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정상 범위 밖이었거든요?”

움직이는 펜촉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정상치 밑으로 떨어져 있어요. 이 상태가 일정 기간 이상 유지되면 완치 판정이 나오는 거고요.”

“말도 안 돼….”

6년간 별의별 검사를 다 받고 FDA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제일 먼저 신약을 받아먹어도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완치라니, 꿈에서도 상상한 적 없던 일 앞에 머리가 멍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데요?”

“그야 알 수 없죠. 여태까지 알려진 바로는 같은 형질과 본딩을 한 경우 극히 드물게 완치된 사례가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케이스 수가 너무 적으니 뭐가 정답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는 서류를 정리했다. 세절기 안으로 정인의 검사 결과지를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만약 정말 완치로 이어진다면 이번에 관계한 알파 분의 컨디션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해요. 살짝 페로몬 이상을 보였다고 하셨죠? 관계가 끝나고도 쭉 환각이 있었다고.”

“네.”

스르륵 빨려 들어간 종이는 이내 모습을 감췄다. 정인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대분이 치사량 이상의 페로몬을 견디면서 품고 있다가 장춘삼 씨에게 쏟아부었다면 이 정도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치사량이요?”

“서로 운이 좋았던 거죠.”

삑, 하는 기계음이 울렸다.

“두 분이 관계를 하지 않았다면 장춘삼 씨 페로몬은 여전히 불안정했을 거고, 상대분은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

“호진아.”

“안녕하십니까, 코치님.”

코치를 발견하자마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가볍게 호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휴가 보내고 오더니 기운이 좀 나? 안색 좋네.”

“편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담 팀에 일언반구도 않고 도망치듯 떠나 얻은 휴가였다.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이런 식의 돌발 행동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에,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이 없는데도 괜히 혼자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코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큰일도 아닌데 뭐. 일단 내 방으로 가자, 다음 스케줄 잡아야지.”

함께 코치의 방으로 들어섰다. 코치는 잔뜩 쌓여 있는 서류 더미 사이로 금세 호진의 파일을 찾아냈다.

“너 없는 사이 스폰서 네고도 어느 정도 마무리됐는데. 따로 확인할래, 아니면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할까?”

사실상 호진은 계약에 직접 관여한 적이 별로 없었다.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코치님 생각대로 진행해 주세요.”

“그럼 조만간 도장 찍는 걸로 하자. 얼라이드는 이렇게 하면 될 거고…. 아, 그러고 보니 TH 코퍼레이션 쪽에서는 네가 직접 와 줬으면 하는 눈치던데.”

“저를요? 왜요?”

“그야 모르지. 일단 그렇게 알고 있으렴.”

그는 곧 캘린더를 꺼내 들었다.

“이번 경기에서 어깨 멀쩡했으니까 작년에 얘기한 스케줄대로 가도 되겠지? 올해는 전지 훈련 하면서 솔트레이크 갔다가 빅토리아 챔피언십 찍고 전국 체전까지야. 금은 다섯 개 정도 생각하자.”

말문이 턱 막혔다. 최근 경기가 끝나는마자 어깨 통증을 호소했던 걸 아예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너무 당연하게 넘겨 버리니 뭐라 지적할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호진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코치는 한숨을 쉬었다.

“나흘이나 쉬었으면 이제 마음 잡아 줘야지. 내가 너 쉰 거 가지고 뭐라고 하니?”

“아닙니다. 하지만….”

호진은 조금 전 권 실장에게 받아 온 검사 결과지를 내밀었다.

“권 실장님 권고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지속적으로 추적 검사를 받아야 하고, 그동안은 민감도를 예전처럼 타이트하게 관리할 수가 없어서 세 개의 대회에 전부 참가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못 해?”

코치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검사 결과 다 정상이잖아. 결론적으로 지금은 문제없다는 거고, 그럼 현재 컨디션 기준으로 약 받아서 똑같은 상태만 유지하면 되는데 그게 어렵나?”

“코치님.”

호진은 난생처음으로 지도자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고군분투하며 온 코치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작은 생채기 하나마저도 마음에 걸려 아프지 말라 당부하던 정인과 너무 달랐다.

“이 상황에서 지금 바로 약을 복용하는 건 무리입니다. 빅토리아 때 관리를 시작하는 한이 있더라도 솔트레이크는 참가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언제부터 이랬는지, 돌이켜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단 한 번의 의문도 의심도 없이 언제나 그가 권하는 길만을 착실히 걸어왔기 때문이다.

“너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네 전성기가 생각보다 그렇게 길지 않아.”

그는 조금 전 호진이 내놓은 검사 결과지를 탁탁 두드렸다.

“네가 천년만년 이렇게 젊고 건강할 것 같니? 서른 넘어서도 지금처럼 나갔다 하면 메달 따고 그럴 것 같아? 길게 봐야 앞으로 올림픽 두 번인데 올해 상반기에 소청 하나 나가 놓고 미주를 건너뛰겠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코치님. 저는 아무것도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호진은 고개를 들어, 그림자도 밟은 적 없던 스승의 눈을 마주 보았다.

“설령 다음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올해 말씀하신 스케줄 중에 올림픽과 간접적으로나마 연관이 있는 대회는 체전뿐입니다. 나머지는 컨디션 악화를 무릅쓰면서까지 출전해야 하는 대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얘가 아주 크게 착각을 하고 있네. 대회 출전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코치가 웃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너 하나만 보잖아. 광고주, 연맹, 문체부도 네 금메달을 원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올해는 반드시 유호진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 줘야 하지 않겠니?”

그는 억제제 처방을 요청하는 공문에 도장을 찍어 내밀었다.

“너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야. 정말 잘해 줘야 한다, 그러면 설령 네가 은퇴하더라도 앞으로 네 후배들은 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수영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고는 유호진이라는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네가 여태까지 밟고 올라온 선수가 몇인데. 걔네 생각해서라도 너 이러면 안 돼.”

호진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정말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정밀 검사를 받는 순간 집안에 확성기를 대고 ‘나 섹스했소’ 광고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불치병이 치유될 수도 있다는 소식 자체에는 모두가 기뻐하겠지만, 가족들에게 성생활의 A to Z를 낱낱이 들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싫은 일이다. 게다가 정훈과 단지 마주친 것만으로도 호진을 반쯤 잡을 뻔했는데, 외박 금지령까지 떨어진 와중에 페로몬에 변화가 생길 정도로까지 난잡하게 뒹굴었다는 걸 어떻게 알리겠는가.

정인은 노트를 펼쳐 여러 개의 플랜을 하나하나 써 내려갔다.

Plan A. 아빠들에게 오늘 당장 직접 말한다.

장점 : 정공법이다. 깔끔하게 끝낼 수 있다.

단점 : 내가 너무 창피함. 큰 아빠 난리 칠 가능성 99%

Plan B. 작은 아빠 생일까지 기다렸다가 말한다.

장점 : 그날 하루만큼은 큰 아빠가 절대 화를 낼 수 없으니 무사히 넘어갈지도 모른다.

단점 : 하지만 생일날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작은 아빠는? 심지어 나는 그때도 창피할 듯.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인은 그대로 열람실 책상에 푹 엎어졌다. 콩 하는 소리에 곁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흘끔 이쪽을 돌아보았지만, 그러든 말든 엎드려 누운 채로 공책에 몇 자를 더 끄적였다.

Plan C. 삼촌한테 먼저 말한…다면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악의 결말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Plan D. 주영이 형에게 도움을 요청…해 봤자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재밌어하기야 하겠지.

Plan E. 조효준한테…. ㅅㅂ

심지어 아직 완치가 확정된 것도 아니다. 막상 검사를 해서 이게 완치도 뭣도 아닌 일시적 현상이라는 결과가 나와 버리면 이쪽은 무조건 손해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 꼴만 되는 거니까.

인생사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던데,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게 리스크만 미친 듯이 하이 하고 리턴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부글부글 속만 끓이는데, 문득 물기 송송 맺힌 사이다 한 캔이 볼 위로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고개를 든 곳에는 마스크를 쓴 호진이 서 있었다.

“아….”

배경처럼 흐려져 있던 세상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웃음부터 났다. 마찬가지로 눈동자가 사라지도록 눈웃음을 짓고 있던 호진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정인은 얼른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고, 호진은 열람실을 나서자마자 정인을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어디 가는데?”

“잠시만요.”

사람들이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그는 가방을 뒤적여 꽃다발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핸드타이드 꽃다발이었다.

“이게 뭐야?”

“너무 좋은 소식이라 오는 길에 급하게 샀어요. 완치라니….”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곧바로 정인을 끌어안았다. 정인은 조금 머쓱해졌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뭐.”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잖아요. 이제 정밀 검사만 받으면 되는 거죠?”

“그게…. 그렇지. 너도 검사 다 받은 거지? 코치는 뭐래?”

“가벼운 억제제 부작용이었대요.”

호진이 웃었다.

“지금은 모든 수치가 다 정상이라고 해서 다음 대회 일정 얘기 하고 왔어요.”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인에게까지 그가 위험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면 호진을 직접 검사한 쪽은 몇 번이나 뒤집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수한 선수를 케어하는 거야 그쪽에서 목숨 걸고 알아서 잘할 테니, 당장 호진에게 이상이 없다면 그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굳이 헤집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직 열려 있는 호진의 가방 틈으로 익숙한 약병 하나가 보였다.

“…이건 뭐야?”

보호 스티커를 뜯지도 않은 새 병이었다. 정인은 곧장 그것을 꺼내 들었다. 역시나 억제제 병이었다.

“억제제 부작용이 있었다는데 또 억제제를 먹으래?”

“좀 가까운 대회가 있어서요. 크게 별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괜찮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함량도 많이 낮췄고요.”

뭔가 이상했다. 정인은 약병을 쥐고 호진을 노려보았다.

“유호진. 너 똑바로 말해. 정말 별일 없었던 거 맞아? 나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형을 어떻게 걸어요.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말 돌리지 마.”

정인은 곧바로 받아쳤다.

“정말 그 새끼들이 그래? 너 아무 문제 없었다고?”

“…….”

“똑바로 말해.”

호진은 그제야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걸 왜 내줘?”

“상황이 좀…. 여유롭지가 않아서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후배들 생각도 해야 하고, 어차피 이 정도 함량이면 몸에 크게 무리가 가지는 않는대요.”

“이 씹….”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정인은 그대로 약통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호진은 놀란 토끼 눈으로 정인을 바라보았다.

“누가 그딴 소리 지껄였어.”

무식하게 몸을 갈아 가며 운동에만 매달리던 호진의 모습이 하나하나 스쳐 갔다. 그러다 마침내 지쳐 쓰러진 게 고작 며칠 전의 일이다.

이제 겨우 회복했다는 걸 모를 리 없으니 당연히 호진의 몸을 회복하는 과정이 우선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호진은 누군가에 의해 정반대의 길로 발을 튼 것 같았다.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다, 후배들 생각도 해야 한다, 이 정도 약은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전부 네 생각 아니지?”

우수한 선수이니 제대로 케어해 줄 거란 기대 자체가 허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호진은 정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됐다.

“…이 개새끼들 안 되겠네.”

정인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호진과 눈을 맞췄던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과연 호진의 매니지먼트사라는 곳은 여태까지 그에게 무슨 짓을 해 온 걸까.

한번 시작된 의문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커져 가고 있었다. 저택을 향해 차를 몰며, 정인은 찜찜한 점을 하나씩 되짚었다.

돌이켜 보면 볼수록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생각의 끈은 작년의 경기에 머물렀다. 호진이 출발하자마자 정신을 잃으며 실격 처리된.

“…….”

어깨에 부상을 입은 수영 선수가 1년도 채 쉬지 못하고 재활을 마치자마자 경기장에 끌려갔다. 여태까지는 호진 본인이 원한 출전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니 그마저도 믿기가 힘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의 대회에서도 호진은 금메달을 따고도 화살을 맞았다. 하지만 응당 그를 보호해야 할 사측은 아직까지도 호진을 위한 입장 한 번을 제대로 내놓지 않았다.

백발 양보해서 언론을 통제하는 것이 스포츠 매니지먼트사의 주 업무가 아니라 치자. 그렇다면 페로몬 문제로 죽을 뻔한 선수에게 다시 약을 먹여 경기에 내보내려는 태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후배들을 생각하라고 압박하는 저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개새끼들.”

평생을 참아 내다 겨우 힘들다는 말을 하며 울던 호진의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이가 갈렸다.

세상 모두가 등을 돌려도 믿을 만한 사람 몇은 늘 곁을 지켜 주었겠거니, 힘든 날 기댈 구석 정도는 있었겠거니 짐작했다. 그러나 하나씩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자꾸만 그게 아닌 것 같다. 환희의 순간에는 모든 영광을 빠짐없이 공유하려 하던 것들 중의 그 누구도 지금은 호진을 지켜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누굴 건드려, 씨발.”

치사량까지 솟은 페로몬을 견딘 사람을 불러들여 억제제를 쥐여 주고, 무조건 너의 젊음을 바치라 등 떠미는 것.

앓는 소리 한번 없이 묵묵하게 걸어온 대가가 이거다. 불모지에서 혜성같이 등장해 월드 랭킹을 뒤집어 놓은 보상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자들의 더는 곁에 호진을 두고 싶지 않았다. 정인은 현욱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목의 마지막 코너를 돌며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호진 선수 후원 건 계약 보류해 주세요.”

우선은 매니지먼트사에 들어가기로 예정된 돈줄부터 끊을 작정이었다.

변호사는 난감한 목소리로 TH와의 위약금에 대해 말했다. 물론 이미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된 정인에게 먹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제가 직접 협상하겠습니다. 나중에 서류 작업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삐익, 하는 소리를 내며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정인은 그대로 차를 몰아 현관을 향해 달렸다. 차창 밖으로 호진과 함께 만든 텃밭이 스쳐 지나갔다.

“어? 이 아침에 웬일이야?”

현관 앞에 엉망으로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누워 있던 주영이 미어캣처럼 고개만 쭉 빼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삼촌 어디 계세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을 하고 있는 주영에게 한 번 더 물으려는데,

“삼촌 여기 계시는데.”

2층으로 이어지는 층계 위에서 현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씩 웃었다.

“주영이 형 말에 대답부터 해야지, 이 시간에 웬일이냐고 묻잖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분명 성급하게 군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를 알아들은 정인은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주영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형. 삼촌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에이, 뭘 사과까지 하고 그래.”

주영이 다가와 정인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고는 현욱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얘기 끝나고 잠깐 나 좀 보고 가.

“네?”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기도 전이었다. 주영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정인의 등을 떠밀었다.

“편안히 말씀들 나누시지요.”

“…일단 올라와.”

현욱의 부름에 계단을 두 개씩 성큼성큼 뛰어올라 갔다. 그는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늘 정인의 자리였던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정인이 앉을 자리에 햇볕이 꽂힐까 블라인드를 내렸다.

“앉으렴.”

하지만 정인이 마음 편히 엉덩이를 붙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삼촌, 지난번에 했던 계약 기억하시죠.”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계약?”

“유호진 선수 스폰서 계약이요.”

“음…. 정인아.”

현욱이 웃었다.

“당분간 그 친구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어떨까.”

“아뇨, 꼭 지금이어야 해요.”

어째서 호진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 하는지 살필 겨를조차 없었다. 정인은 말을 이었다.

“방금 제 쪽에서 후원 건 보류했어요. 아직 얼라이드와 유호진 선수 사이의 계약은 아직 확정이 아닌 상태이니 이제 삼촌과 제 사이의 계약만 남아 있는데, 혹시 조건을 조금 변경하는 게 가능할까 싶어서요.”

“보류?”

내내 정인을 보며 웃고 있던 현욱의 표정이 별안간 무섭게 굳었다. 당장 누군가를 찢어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밀더니 갑자기 왜 이럴까. 그 짧은 사이에 우리 정인이 마음에 변화가 생길 만한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아닌 게 아니라 현욱은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상태였다. 나흘 내내 유호진과 섬에 단둘이 틀어박혀 버린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섬을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정인이 말을 바꿔 버리자 자연스레 둘 사이에 뭔가 부정적인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그건 아니고요. 지금 유호진 선수를 담당하고 있는 팀 문제예요.”

하지만 정인은 현욱의 기분이 상한 이유가 단지 계약이 어그러진 것 때문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제대로 된 케어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선수 컨디션이 떨어져 버리면 제 쪽에서도 손해고요.”

“제대로 된 케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근거가 뭔데?”

“최근 선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어요. 그런데 전담 팀 코치가 담당의의 권고사항을 어기고 또 약물을 처방한 것 같아요. 다음 경기 스케줄도 무리하게 잡은 것 같고.”

억제제, 페로몬, 러트 등등. 현욱의 눈을 뒤집을 만한 단어를 쏙쏙 빼고 포멀한 문장을 완성했다. 그러자 싸늘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선수만 빼 올 생각이에요. 그 선수 이름값이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좋은 스태프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법 유해진 반응에 정인은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특정 주제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것이 현욱이 쳐 놓은 덫이라는 사실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니 우선은 기존 매니지먼트사가 개입한 계약부터 끊고….”

“정인아. 삼촌한텐 그 말이 참 재미있게 들리는데. 네가 왜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니?”

현욱이 정인의 말을 끊었다.

“그건….”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는 예뻐 죽겠다는 듯한 눈으로 정인을 바라보며 한 걸음 다가섰다.

“가능성 있는 선수이니 후원하겠다, 그 정도 마음까지는 좋아. 하지만 내가 여기서 권리를 주장해 버리면 너는 빼도 박도 못 하고 삼성동 빌딩을 넘겨줘야 해. 다시 말해 그 선수를 걱정하는 네 마음의 값이 천억은 가뿐히 상회한다는 거지. 어떻게 생각하니?”

그제야 아차 싶었다. 진심으로 호진을 위해 빌딩 하나의 손해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 있었고, 언젠가부터 정인에게는 그 전제가 너무나도 당연했던지라 여기까지 연막을 치는 걸 잊고 있었다.

“…아.”

“그리고 스포츠 매니지먼트 팀은 그렇게 쉽게 꾸려지는 게 아니야. 이름난 지도자들은 단지 연봉을 높게 부르는 것만으로 움직이지 않아.”

정인은 입술을 깨물며 여태까지 나눈 대화를 복기했다. 조금을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다. 호진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을 빠져나갈 구멍 따윈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도움이 필요해질 텐데, 그건 어디서 구할 작정이고?”

현욱은 웃으며 정인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정인은 반듯하게 허리를 세웠다.

“삼촌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왜?”

“그 사람 일이 곧 제 일이기도 하니까요.”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궁지에 몰린 정인은 눈을 딱 감고 질러 버렸다.

“유호진 선수, 제 애인이에요.”

“…애인?”

기나긴 침묵 끝에 현욱이 물었다. 정인은 황급히 덧붙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가벼운 마음이 아니어야지. 1800억의 리스크를 짊어지겠다며?”

현욱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가고 있었다. 아직은 포커페이스에 가까웠지만, 평생 그 얼굴을 보고 자란 정인은 그의 기분이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음을 단박에 감지했다.

“제가 많이 좋아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샌가 가장 나쁜 플랜에 가까워져 있었다. 정인은 가감 없이 진심을 털어놓았다.

“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 주고 싶어요, 저에게는 과분할 만큼 좋은 사람이에요.”

“과분해?”

하지만 정인의 말은 간신히 참고 있던 현욱의 분노에 제대로 불을 당겼다. 둘 사이에 오가는 감정을 속속들이 알 리 없는 현욱에게 이 모든 것은 귀하디귀한 정인이 밑지고 들어가는 연애라도 하고 있다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감히 그 누구도 너에게 과분한 상대일 수는 없어. 너는 언젠가 TH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킬 후계자고, 생채기 하나 없이 이 자리에 앉는 날까지 내가 너의 뒷배가 될 테니까.”

그는 애틋함을 거두어 냉기만이 남은 시선으로 정인을 바라보았다.

“고작 반년도 만나지 않은 사람의 무엇을 믿는 거지? 유호진이라는 사람의 밑바닥 근처에라도 가 본 적은 있어?”

“…….”

“벌써부터 이렇게 무르게 구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유호진이 갑자기 돌변해 네 등에 칼을 꽂는다면 그땐 어떡할래?”

“꿈에서라도 그러지 못할 사람이에요.”

정인이 대답했다.

“악의를 품은 짐승은 반드시 기척을 감추고 접근하는 법이야.”

현욱은 가차 없이 말을 잘랐다.

“수천 번 서로를 검증하고 또 검증해도 이따금은 삐걱거리는 게 사람 사이야. 찰나에 불과한 연애 감정에 정신 못 차리고 끌려다니다 보면, 네가 잃어버린 주도권은 언젠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뒤통수를 칠 거야.”

“…….”

“지금이야 그마저도 전부 감수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정말로 상처받게 될 순간의 너는 유호진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품었던 네 믿음과 싸워야 해.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나는 네가 아파하는 꼴을 두 번 다시 볼 생각이 없어.”

그러고는 정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 내 손으로 약을 치면 되겠니?”

“절대 그러실 수 없을 거예요.”

정인은 지지 않고 그에게 맞섰다.

“제가 살기 위해선 반드시 호진이가 필요하니까요.”

“뭐?”

이렇게 된 이상 가진 패의 전부를 까는 것 말곤 답이 없는 것 같았다.

“저 LGS 완치될 수도 있대요. 어떻게 된 거냐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플랜 C를 실행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ㅡ!!

“아, 깜짝이야.”

잡지를 뒤적거리던 주영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좀처럼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현욱이 어째서인지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머지않아 정인이 후다닥 계단을 뛰어내려 왔다. 그러고는 2층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하여튼 그렇게 아세요! 미국에 좋은 코치 많다니까 참고하시고요!”

누가 봐도 뭔가 사고를 치고 도망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주영은 현관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가는 정인의 옷자락을 붙들어 세웠다.

“정인아, 무슨 일이야?”

“형, 저 빨리 도망가야 돼요. 잡히면 오늘은 진짜 뼈도 못 추려요.”

그때, 계단을 반쯤 내려온 현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최정인!”

“헉….”

정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주영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캐치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애기, 그럼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고 가.”

“뭔데요? 다 형 맘대로 하세요.”

“자미도에 있는 와인 중에 1억 2천 정도 하는 게 있거든? 그거 내가 실수로 마셔 버렸는데, 혹시 네가 마신 거라고 하면 안 돼?”

“네, 알겠어요.”

정인은 주영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갈게요!”

“어, 수고해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꼬셔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이렇게 쉽게 넘어가 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주영은 한들한들 손을 흔들었고, 정인은 쏜살같이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뒤이어 도착한 현욱은 곧장 대문 폐쇄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정인의 차는 이미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고, 주영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둘이 싸웠어?”

그 말에 현욱이 땅이 꺼져라 한숨지었다.

“싸웠다기보다도 일방적으로 당했지.”

절망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카 농사에 이런 식으로 흉작이 드네.”

***

이제 막 근력 훈련을 마친 참이었다. 티셔츠를 벗어 던지며 호진은 제 손바닥을 살폈다. 로프에 쓸린 자리가 쓰라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선 약을 꺼내 바르고, 손등으로 미정이의 머리를 조심조심 쓰다듬어 준 다음에는 습관처럼 억제제가 든 병을 꺼냈다. 약을 잃어버렸다는 소리에 코치가 새로 받아다 주고 간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알을 꺼내 삼키려다가,

“아, 맞다.”

약을 발견하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던 정인의 모습이 떠올라 도로 내려놓았다.

“호진아.”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매니저가 들어섰다. 한 손에는 웬 정장을 한 벌 든 채였다.

“훈련 끝나고 미안한데, 나랑 어디 좀 가야겠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이것부터 입어. 급하게 맞춰 온 거라 맞으려나 모르겠네….”

그는 호진이 벗어 놓은 옷을 착착 개 가방 속에 넣고 새 옷을 입혀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셔츠에서부터 어깨가 꽉 끼어 몸을 거의 구겨 넣다시피 해야 했다.

“좀 전에 이 얼라이드 계약 파투 났어, 이 녀석아.”

“예? 갑자기 왜요?”

“정확한 사유는 모르겠어, 그냥 일방적으로 엎어 버린 거라서.”

매니저는 한숨을 쉬며 타이를 매 주었다.

“심지어 그렇게 되자마자 TH 코퍼레이션에서도 연락 와서는 지금 바로 너 보내라는데, 아무래도 TH 내부에서 뭔가 말이 나온 것 같아.”

“…경기 기록 문제일까요?”

“그것도 지금은 모르겠다. 일단 가 봐야 알 것 같아.”

목이 갑갑하지 않도록 매듭을 조정한 다음에는 그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감독님도 같이 가실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신 있는 태도로만 임해 줘. 알겠지?”

“네.”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삐 탈의실을 나서는 그를 따라 로비로 내려가자 기다리고 있던 코치가 손짓했다. 그는 매니저와 함께 같은 차에 탔고, 호진은 제 차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정인의 향이 느껴졌다. 행여나 날아갈까 얼른 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 위에 떠오르는 병아리 이모티콘에 호진은 바보 같이 웃어 버렸다.

“흐흐…. 혀엉.”

- 호진아, 지금 어디야?

먼저 나가는 매니저의 밴을 따라 출발했다.

“갑자기 미팅이 하나 생겨서요. 형은 어디신데요?”

- 그거 언제 끝나는데?

정인이 대답 대신 물었다.

“글쎄요, 정확히 왜 하는 미팅인지도 몰라서…. 그래도 한두 시간 안에는 끝나지 않을까 해요.”

- 너 주말에 집 내려간다고 했지? 어차피 금요일인데 아예 오늘 내려가는 거 어때?

다급한 목소리였다. 호진은 곧장 차를 멈춰 세웠다.

“형, 무슨 일 있어요?

- 그건 아니고, 서울 좀 벗어나고 싶어서. 한 며칠 갔다 오면 좀 괜찮을 것 같아.

“…그래요?”

이미 입구를 빠져나간 매니저의 차가 빵, 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학교에 계시죠? 끝나고 바로 데리러 갈게요.”

- 알았어.

“그래도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때 되면 먼저 식사 하고 계세요, 야채 많이 드시고요. 그리고….”

호진은 잠깐 뜸을 들였다. 가지고 있는 가장 예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요, 형. 이따 봬요.”

단지 그 말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정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 원체 면역이 없는 사람이니 아마 지금쯤은 핸드폰을 붙잡고 혼자 보글보글 끓고 있을 것이다. 정인의 얼굴을 그리며 호진은 또 한 번 웃어 버렸다.

빌딩 숲으로 가득한 도로에 진입하자 통행량이 훌쩍 늘어났다. 매니저의 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쫓아가야 했다. 머지않아 으리으리한 건물 한 채가 나타났다.

“호진아, 잘 들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계약은 놓치면 안 돼.”

차에서 내리자마자 코치가 말했다. 매니저를 등진 채 두 사람은 로비 안쪽을 향해 걸었다.

“얼라이드와 무슨 얘기가 오갔는진 모르겠지만, 뭔가 바라는 게 있으니 자꾸 너에게 오라고 하는 거겠지. 그쪽에서 뭘 요구하든 무조건 하겠다고 해.”

“…코치님.”

호진은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고, 층수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야 합니까?”

“뭐?”

“여태까지 한 번도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보다 스폰서가 더 적었을 때도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라지 않으셨습니까.”

따져 묻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졌을 뿐이다.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게 다르잖니.”

코치가 대신 층수 버튼을 눌렀다. 호진은 재차 물었다.

“뭐가 다른 겁니까?”

“제발, 좀. 호진아!”

코치가 버럭 성을 냈다.

“너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나는 하루하루 바짝 속이 타들어 간다. 응?”

“…….”

“왜 스폰서의 말을 들어야 하냐고? 네가 컸으니까, 무조건 너를 키워야 하니까! 이런 인프라에서는 앞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너 같은 선수가 나올지 아무도 장담 못 해. 그걸 몰라서 물어?”

그러는 사이 문이 열렸다. 그러나 누구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바닥은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바닥도 없이 떨어져. 그런데 네가 지난 1년간 겪은 일들을 봐. 부상에, 실격에, 성적 부진까지. 상황이 최악의 최악으로만 치닫고 있잖아!”

“…….”

“변변한 수영장도 얼마 없는 이 판을 너 하나로 겨우 끌고 가고 있는데, 제발 잘 좀 해 주면 안 되겠니?!”

“…코치님.”

호진은 수많은 말들을 삼키고 그중의 하나를 겨우 꺼내 내밀었다.

“…저는, 기복이 있으면 안 되는 선수입니까?”

그렇다 대답해 버릴 것만 같아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때였다.

“안 될 건 없죠, 그게 정말 기복 정도라면.”

닫히려던 문이 도로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코치가 부리나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네, 안녕하세요.”

늘 뉴스나 신문에서만 보던 사람이었다. 호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우리 선수님이랑은 초면이네요.”

그리고 최현욱 회장은 그런 호진을 바라보며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언론을 통해 자주 본 인물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묘하게 낯이 익었다.

분명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호진아. 버릇없이 뭐 하는 거냐,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아, 안녕하십니까.”

한참을 생각하던 호진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폴더 접듯 허리를 숙였다. 그에 현욱은 소리 내 웃었다.

“그까짓 인사가 뭐라고 선수 기를 죽이십니까, 코치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그러면서도 형형한 두 눈은 오직 호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곧 텅 빈 회의실로 호진을 이끌었다.

“일단 들어가요. 그리고 이제 코치님은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회장님.”

그에 코치가 호진의 팔을 잡아 붙들었다.

“유호진 선수 계약 문제는 제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계약 관련해서 상의하실 게 있다면 저와 함께 이야기 나누시죠.”

“이상하네요, 내가 건 조건은 분명 유호진 선수 혼자 보내라는 거였는데.”

현욱이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하고 코치에게 물었다.

“혹시 우리 쪽 실수로 누락된 건가요?”

얼마든 꼬투리 잡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이만 꺼져 달라는 말의 가장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를 알아들은 코치는 입을 다물었고, 현욱은 내려간 엘리베이터를 도로 불러들였다.

“기사님께 댁까지 모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코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매니저 차로 돌아가겠습니다.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그러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살금살금 눈치만 보고 있던 호진은 현욱이 돌아선 후에야 그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섰다.

“앉아요.”

기다란 책상을 빙 둘러 상석에 앉은 그는 호진에게 가까운 자리를 권했다. 머지않아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 호진의 앞에만 다과상을 차려 주었다.

접시마다 온갖 종류의 디저트가 잔뜩 담겨 있고, 커피는 갓 내린 듯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각설탕이 담긴 유리병마저 예뻤다. 하지만 곧장 손을 댈 수는 없었다.

“혹시 단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내 조카도 선수님 또래라 그 애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 봤는데.”

멀뚱멀뚱 앉아만 있는 호진을 보며 현욱이 물었다.

“그게 아니라….”

어른이 들기 전에 먼저 뭔가를 먹는 건 유교 보이 유호진의 삶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심조심 타르트 하나를 접시에 올려 내밀었다.

“회장님 먼저 드십시오.”

“하하하, 난 식사 마치고 왔으니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들어요.”

코치를 대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조금 날카롭다 싶던 이미지가 서글서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에 완전히 가려졌다. 호진은 그제야 휘낭시에 하나를 야금야금 뜯어 먹었다.

참으로 애매한 분위기였다. 당장 들어오라 불러들여 놓고, 동행을 원하는 코치까지 단칼에 돌려보낸 현욱이 하는 것이라곤 그저 호진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

그 와중에도 단것을 먹고 있으니 자동으로 정인이 생각났다. 물도 안 마시고 살 사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있다가도 막상 입에 뭔가 들어가면 오물오물 열심히도 해치운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번졌다.

“우리 선수님, 보기보다 순진하시네요.”

그때, 내내 침묵을 지키던 현욱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내가 거기에 독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 딴생각을 하면서 먹어요?”

“하하….”

어차피 장난인 걸 알고 있는데도 어쩐지 느낌이 싸했다. 입에 든 것을 차마 삼키지도 못한 채 호진은 어색하게 웃었고, 현욱은 아예 턱을 괴고 호진을 쳐다보았다.

“호진 씨, 애인 있어요?”

“아…. 넵.”

“어떤 사람이에요?”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게…. 예쁜 사람입니다.”

평소였다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겠지만, 한없이 서늘하고 무서워 보이던 사람이 다정하게 웃어 주기 시작한 데다 단 음식까지 들어오니 서서히 경계심이 풀렸다.

“얼마나 예쁜데요?”

묻는 말에 입이 근질거렸다. 그간 갈고닦은 심폐 지구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숨도 쉬지 않고 정인의 장점을 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편해도 결국 미팅 자리인지라 정훈에게 했던 것처럼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 이름만 봐도 온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머릿속을 맴도는 수많은 문장들 중 그나마 가장 무난한 것을 골라 내놓았다.

“언제부터 만났어요?”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올해 3월쯤 알게 되었어요.”

그에 현욱이 흐음, 하며 물었다.

“혹시 그래서 기록 떨어진 거 아니에요?”

“…네?”

“그만큼이나 누가 좋아지면 당연히 마음과 시간을 쓰게 될 텐데, 이 연애가 호진 선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지 궁금해서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프로젝터를 켰다.

“참 대단한 커리어예요, 기복 한 번 없이 쭉 선두였네.”

모니터 한가득 떠오른 표에는 여태까지 호진이 참가한 대회와 그 기록, 함께 경쟁했던 선수들의 이름, 광고 선호도 조사 결과가 주르륵 떠 있었다.

“작년에 확 꺾여 버린 건 부상 때문이라 치고…. 유호진 선수를 언론이 죽자고 물어뜯기 시작한 건 이즈음. 연애도 이때부터 하게 됐다고 했죠?”

현욱은 레이저 포인터로 각각의 기록을 짚었다.

“정말 연애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건….”

“호진 씨, 나랑 한 10년쯤 계약하는 거 어때요?”

현욱이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 호진과 눈을 맞췄다. 불과 일 미터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거리였다. 훅 들어오는 질문 뒤로 엄청난 조건이 따라붙었다.

“원하는 건 전부 들어줄게요. 수영뿐만이 아니라 스포츠계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대우를 할 겁니다. 쓸데없는 광고, 행사 같은 데에 내보내지 않아요. 수영장을 지어 달라면 당장 유호진 씨 집 앞 건물을 싹 미는 한이 있더라도 지어 주고, 전담 팀도 최정예 멤버들로만 새로 꾸려 줄 거예요.”

“전담 팀이라니…. 저에게는 이미 담당해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까 코치 하는 말 못 들었어요?”

현욱이 픽 웃었다.

“하다 하다 인프라 열악한 것까지 뒤집어씌울 생각인 것 같던데, 세계 최정상급 선수 데려다 놓고 고작 앵벌이 따위나 시키려는 코치 밑에서 평생 썩고 싶은 건 아니죠?”

“회장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무리 모질어도 스승이다. 코치를 욕보이는 말에 호진은 얼굴을 굳혔다.

“솔직해져도 돼요, 우리 선수님 아직 어리고 욕심 많잖아. 기록경기 하는 사람인데 욕심이 없을 수가 없죠. 안 그래요?”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호진은 그제야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이 협상을 위한 밑밥이었음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현욱은 마침내 협상안을 제시했다.

“연애는 그만두는 조건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호진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 준다니까?”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시선은 전에 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골라 봐요. 지금 창밖에 보이는 저 빌딩 가질래요? 아니면 뭐, 작은 나라 하나라도 사 줄까? 뭘 줘야 그 연애를 그만둘래요?”

더는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과상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다만 계약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유호진.”

현욱이 호진의 이름을 불렀다.

“네 인생에 두 번은 없을 기회야, 똑똑하게 선택해.”

내내 웃음으로 가리고 있던 가면이 전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제 사람도 두 번은 없을 사람입니다.”

그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칼날 같은 시선으로 호진을 훑었다. 그리고 호진은 똑바로 그를 마주 보았다.

“제 인생에서 가장 똑똑했던 선택입니다. 죄송하지만 어떤 것을 제안하셔도 응할 마음이 없으니,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예를 갖춰 인사하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현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문을 나서면 너는 진창으로 돌아가는 거야.”

“…….”

“유일하게 믿고 있던 자금줄이 끊겼으니, 이제부터는 그저 모두가 너에게 책임을 떠넘기기에만 바쁘겠지.”

호진은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감수하겠습니다.”

그저 괜한 일로 정인을 기다리게 만든 것이 후회될 따름이었다.

“…….”

그리고 현욱은 호진이 회의실을 나선 뒤로도 한참 동안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호진이 앉아 있던 자리는 어느샌가 부스러기 하나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의자까지 말끔히 밀어 넣고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다가, 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하….”

수화기를 꽉 움켜쥔 손등 위로 핏줄이 돋았다. 네 자리의 내선 번호 중의 세 자리까지를 눌러 놓고도 차마 마지막 숫자를 누를 수가 없어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그러는 동안 몇 번이고 전화가 끊겼다.

결국 내선 번호를 전부 누르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전화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연결됐다.

“최현욱입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유호진 선수 후원 계약서 새로 준비해 주세요.”

***

호진을 기다리는 동안, 정인은 1분에 한 번꼴로 핸드폰을 체크했다. 미친 듯이 전화를 걸어 대던 현욱은 어느 순간 잠잠해졌고, 다행히 정훈에게서는 아직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아직은 현욱이 아무것도 알리지 않은 듯했다.

“하….”

물론 호진의 고향으로 도망친다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물은 엎질러졌고, 검사를 받기 위해서는 결국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 현욱이 당분간 비밀을 지켜 준대도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으니, 어차피 결말은 정해진 셈이다.

하지만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민망함도 민망함이지만, 정말로 정인을 두렵게 하는 건….

“…진짜 싫다.”

가족들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했다. 한숨을 쉬며 나무에 등을 기댔다. 곧 멀리서 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시동조차 끄지 않고 차에서 내린 호진은 정인의 앞에 서자마자 나뭇잎 사이로 드는 햇볕부터 막아 주었다.

“볕도 센데 왜 밖에 나와 계세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얼마 안 됐는데….”

미팅에 다녀왔다더니 오늘은 편안한 트레이닝복 대신 정장 차림이었다. 부드러운 윤기를 흘리던 머리카락도 반듯하게 정돈해 이마 위로 넘긴 채였다. 원체 인상이 깔끔한 사람이라 그런지 정장 특유의 곧은 선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예쁘네. 미팅은 잘 마쳤어?”

“아뇨.”

계속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일부러 말을 돌렸다. 호진은 떫은 감을 삼킨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없던 일인 셈 치려고요.”

그는 정인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타이를 당겨 풀었다. 비스듬하게 드러나는 턱선이 날카로웠다.

“그럼 이제 갈까요?”

내미는 손을 잡고 걸었다. 정인이 안전벨트를 매는 것까지 확인한 호진은 그제야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아참, 아버님께는 제가 연락드릴게요.”

“뭐? 갑자기 왜?”

펄쩍 뛰며 물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외박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잖아요. 미리 말씀드리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그냥 가자, 지금 은괜히 건드려서 좋을 거 없어. 영상 통화만 피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그럼 가 있는 내내 형 마음이 불안할 것 같아서요.”

호진이 정인의 손을 잡았다.

“숨겨야 할 만큼 잘못된 일은 아니니까 잘 말씀드려 볼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는 정인의 손등 위에 입 맞추며 웃었다.

“그래도 정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 혼자 빨리 다녀오면 돼요. 얼굴만 비추고 바로 돌아올 테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안 된다고 할 게 뻔한데.”

정인은 툴툴대며 시트에 납작 달라붙었고, 호진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걸었다. 곧 차내의 스피커를 통해 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아버님. 유호진입니다.”

호진은 간간히 정인의 모습을 살피며 차를 출발시켰다.

“주말 동안 고향에 내려갔다 올 생각인데, 혹시 정인이 형과 같이 가도 될까 해서 연락드렸어요.”

어차피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심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정인은 안전벨트를 꼭 움켜쥐었다. 정훈의 물음은 금세 돌아왔다.

- 댁에 어른들은 계시고?

“아…. 어머니는 아직 해외에 계셔서 집에는 아버지만 계세요. 주말 동안 저는 저희 아버지랑 같이 자고, 형은 손님방에서 재우려고요.”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 그렇게 해, 운전 피곤할 텐데 조심히 다녀오고.

“감사합….”

“정말?”

정인은 저도 모르게 스피커를 향해 몸을 숙였다.

“나 진짜 가도 돼?”

- 안 될 건 뭐야, 그쪽 어른께도 예의 있게 인사드려.

“아빠….”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전개라 그런지 감동이 두 배였다. 순식간에 행복해진 정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스피커를 향해 쪽 하는 소릴 냈다.

“선물 사 올게, 사랑해요 안녕!”

“하하하하.”

“…왜 웃어?”

호진은 전화가 끊기자마자 크게 소리 내 웃었고, 정인은 도끼눈을 떴다.

“그렇게 좋으세요?”

그는 길게 팔만 뻗어 정인을 끌어안았다. 꽉 안았다가 놓으며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형, 가족들이랑 통화할 땐 항상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에 끊으시는 거예요? 예전에도 한번 얼핏 들었던 것 같아서요.”

“아…. 응.”

머쓱하지만 이건 정인이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오래된 습관이었다. 아웅다웅 다퉈 서로 기분이 상한 날에도, 피곤해 죽을 것 같은 날에도, 자다 깨어나서도 꼭 마지막엔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그럼 이제 저한테도 그렇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정인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어….”

사실 끝인사를 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좋아한다는 말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어도, 호진에게 하는 사랑한다는 말은 가족들에게 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무언가인 것 같았다. 그래서 단박에 그러겠노라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담 주고 싶은 건 아니에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니까요.”

정인이 머뭇거리자 호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조금 침울해진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냥 부러워서 해 본 소리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

“형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아버님들께서는 얼마나 기쁘실까 싶어서….”

“아, 진짜. 사랑해, 호진아.”

차원이고 나발이고 호진이 우울해한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부터 바빠졌다. 정인은 황급히 고백했다. 그럼에도 호진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한 쓴웃음으로만 가득했다. 그를 바라보며 망설이지 않고 한 번 더 덧붙였다.

“진짜 진짜 사랑해, 정말이야.”

“…….”

“우리도 이제 전화 끊을 때마다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속상해하지 마, 응?”

“흡….”

호진은 별안간 입을 가리고 고개를 틀었다. 운전석 쪽으로 난 사이드 미러를 한참동안 바라보며 어깨를 움찔움찔 떨기도 했다. 놀란 정인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호진의 어깨를 콕 찔렀다.

“울어?”

“아, 조금 더 있으면 진짜 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잠시만요.”

딸꾹질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던 호진은 마침내 긴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웃었다.

“저도 사랑해요. 진짜 진짜 많이요.”

“…….”

딱히 손해를 본 건 없지만 어째서인지 사기를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정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다행이죠?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그러게.”

도시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쳐 갔다. 이따금 창밖이 짙은 녹음으로 물들 때마다 그 위로 호진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깔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고 차를 모는.

“넌 참 어른스러운 사람인 것 같아.”

정인은 문득 입을 열었다.

“나는…. 너처럼 그렇게 깔끔하게 부딪친 적이 별로 없어. 오히려 늘 도망치는 편에 가까웠지, 어린애처럼.”

“…….”

“뭐든 마주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피하는 쪽을 택했어. 언제부터 이랬는지 기억도 안 나.”

늘 그랬다. 보리가 죽었을 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마음 놓고 슬퍼하는 대신, 단지 사정이 있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처럼 행동했다. 보리가 눕던 방석 근처로는 다가가지도 않았고,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뚝 멈춰 버렸다. 마침내 모든 것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

그것은 원경과 정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사랑한다는 말을 하던 우리가 고작 일주일에 두어 번을 통화하는 사이로 남아 버린 건, 그저 내가 멀리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굴었다. 실은 그저 피하고 싶었던 거였으면서.

“가끔은 도망치는 게 최선일 때가 있잖아요.”

호진이 문득 말했다.

“처음으로 부상을 당했을 때, 저는 어쩌면 도망쳐야 했던 건지도 몰라요.”

정인은 그를 돌아보았다.

“끝까지 못 하겠다고 버티면서 조금 더 전략적으로 회복했다면 아직 그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적어도 경기 도중에 정신을 잃지는 않았을 거예요. 한계를 가늠하지 않고 무작정 돌파하겠다고 덤빈 건 확실히 좋은 방법이 아니었어요.”

“…….”

“하지만 덕분에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는 있게 됐어요. 좋은 방법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건 저에게 필요한 시행착오이기도 했던 거죠.”

호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형의 선택들도 그랬을 거예요. 최악이래 봤자 시행착오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하고, 저는 여전히 형의 모든 선택을 믿어요.”

그는 핸들을 붙잡지 않은 한 손으로 또 한 번 정인의 손을 잡았다.

“도망칠 만한 일이었기에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른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잠시 멈췄던 거라고. 그게 그 순간의 최선이었을 거라고.”

“…….”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다음번에는 다른 길로 걸으면 돼요, 오답을 많이 찾아내면 낼수록 결국 정답에 가까워질 테니까요.”

정인은 작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이마를 비볐다.

“…진짜 어른 같아.”

“흠, 그러면 저한테 형이라고 한 번 불러 보세요.”

호진이 헛기침을 했다.

“…뭐?”

“죄송해요, 이건 좀 너무 나간 것 같네요.”

정인은 혀를 끌끌 차며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차는 머지않아 눈에 익은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함께 보았던 벚꽃은 이미 모두 졌지만 실개천은 그날의 모습 그대로 반짝였다. 호진과 정인이 첫 키스를 한 원두막도 그대로였다. 조금을 더 들어가자 야트막한 단독 주택이 듬성듬성 모여 있는 이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오, 웬일로 자리가 있지?”

호진의 차는 유리창이 깨진 슈퍼마켓 앞에 멈춰 섰다.

“이런 데다 주차해도 돼? 가게 영업하는 거 아냐?”

“여긴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빈 땅 있으면 먼저 차 대는 사람이 임자예요.”

호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때였다.

“유호진!”

온 사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가 들렸다. 호진과 정인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 손에는 낫을, 다른 한 손에는 막 칼을 든 채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놀란 정인은 호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는 분이시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아빠.”

호진의 입술이 열렸다.

내내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서러움으로 물들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빠!”

“호진아, 아이고 내 아들!”

쨍그랑, 남자가 손에 든 것을 전부 집어 던졌다. 호진은 어린 아이처럼 신나는 걸음으로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는 품에 파묻혀 웃으며, 깊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흙 묻은 손으로 애틋하게 호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째 얼굴이 반쪽이 됐냐 그래….”

그러는 동안 정인은 몇 번이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가까이서 보니 누가 봐도 혈연간이었다.

정말이지 틀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똑 닮았다. 짙은 눈썹도, 반듯한 콧날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도, 조금은 느릿하다 싶게 차분한 말투까지도.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겨….”

“무지 잘 먹구 다니지, 허구헌 날 뭐 그리 걱정을 혀….”

“그럼 허지 안 혀…. 이쁜 내 새낀디….”

“아빠아….”

오는 내내 그렇게도 어른스럽던 호진은 아버지의 앞에 서자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늘 자신 있게 끝맺던 말꼬리를 늘이기도 하고, 몇 번이나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기도 했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비바람을 견디며 날아와 겨우 둥지에 도착한 새 같았다.

호진은 곧 환하게 웃으며 정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빠, 이쪽은 전에 말했던 내 애인이여.”

정인은 그제야 한 걸음을 뗐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최정인이라고 합니다.”

“아…. 유태산이라고 해요.”

구수하게 쏟아지던 사투리가 멎었다. 스위치를 켜듯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은 호진의 아버지는 손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 낸 뒤에야 정인에게 악수를 청했다.

단단한 손을 마주 잡으며 정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호진과 닮은 얼굴이 너무 신기해서, 실례임을 알면서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호진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잘 지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는 마치 평생 볕 좋은 날만을 살아온 사람 같아 보였다. 이형질 보유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다 큰 아들을 두고도 눈가에는 주름 하나 없었지만, 오랜 시간을 웃으며 지내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 눈동자는 맑은 온기로 가득했다. 그를 마주하니 유호진이 어떻게 유호진으로 나고 자랐는지를 알 것 같았다.

“먼 길 오느라 배고팠겠다,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일단 들어가요. 응?”

태산은 뿌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정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고는 조금 전 집어 던진 낫과 칼은 주울 생각도 않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정인은 뽈뽈 달려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저…. 아버님, 이건 어떻게 할까요?”

태산이 웃었다.

“아무 데나 던져 놔요. 어차피 내일 또 나갈 건데 가는 길에 주워 가지, 뭐.”

“아…. 네.”

그래도 차마 던질 수는 없어 길가에 조심스럽게 모아 두었다.

기다리고 있던 호진이 손을 내밀었다. 정인은 그의 손을 잡고 나란히 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산등성이에 드리운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오른편으로 쭉 뻗은 논두렁에는 낮게 가라앉은 태양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근데 아부지, 뭐 하고 계셨어?”

“지윤이네 막내가 글쎄 벌통을 깨 먹었다는 거 아녀…. 벌 다 날아갔다고 우는데 가서 고쳐 줘야지….”

“에이, 그게 고친다고 붙나…. 여왕벌은 아직 있구?”

“제일 먼저 도망갔지 뭐….”

사소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호진은 이따금 정인과 눈을 맞췄고, 정인은 커다란 논에 한가득 들어찬 물을 바라보며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길게 자란 담쟁이로 뒤덮인 돌담 앞이었다.

“들어와요, 문턱 조심하고.”

태산은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풍경에 정인은 제 눈을 의심했다.

“여기가…. 너희 집이야?”

“넵.”

농사를 짓는 집안이라던 호진의 말에 평범한 농가를 예상했지만, 정인의 눈앞에 나타난 건물은 암만 봐도 전문가가 공들여 설계한 것으로 보이는 현대식 한옥이었다.

곡선과 직선이 여유로우면서도 정교하게 맞물리고, 외벽을 따라 배치된 조명은 따스한 불을 밝혀 목재 특유의 우아함을 돋보이게 했다. 넓게 드리운 정원이 풍기는 분위기마저도 인테리어의 일부 같았다.

주기적으로 사람이 드나들며 관리하는 현욱의 정원과 반대로, 태산의 정원은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그대로 내버려 둔 듯 자연스러운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빛을 찾아 고개를 내민 새순들이 높은 자리에서 살랑거리고, 묵은 잎은 낮게 내려앉아 그늘을 만들었다. 그를 따라 눈길을 돌리니 커다란 유리 온실도 보였다.

“들어오세요, 형.”

처마 끝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 풍경이 딸랑딸랑 귀여운 소리를 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벽을 따라 늘어선 사진과 상장들이었다. 모두 호진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정인은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세상에, 이게 너야?”

말랑말랑 두부 같은 뺨을 붉힌 아이가 수영복을 입고 바닷가에 서 있었다. 반짝반짝 총기 어린 눈빛과 시원하게 웃는 입매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예요, 이건 5학년…. 이건 엄마랑 찍은 거예요.”

하나씩 짚어 주는 손끝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머지않아 뽀얗게 웃는 소년을 품에 꼭 끌어안은 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보니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단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호진에게 있는 따스하고 맑은 면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면, 강단 있고 곧은 면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 같았다.

호진은 꼭 사진 속의 소년처럼 웃으며 1층의 남은 공간들을 찬찬히 보여 주었다.

“저쪽이 부엌이고, 여긴 거실이에요. 옆에는 아버지 조직 배양실이고요.”

탁탁탁 칼질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부엌을 지나자 거실이 나타났다.

커다란 액자 속에는 올림픽 시상대에 선 호진의 모습이, 정인의 키만 한 유리장 안에는 온갖 트로피와 메달, 그리고 팬레터가 담긴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마치 이 건물 전체가 호진의 지나간 시간들을 기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거실을 전부 둘러본 뒤에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호진은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뒤를 돌아보며 정인이 발을 헛디디지 않는지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층계를 전부 올랐을 땐, 아래층에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트로피로 가득 찬 복도가 보였다.

“와…. 너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수영은 물론이고 태권도 대회나 고무 동력기 대회, 뜬금없는 사생 대회 트로피까지 있었다.

아래층에 있던 것이 성인이 된 후에 받은 것들이었다면 2층에 있는 상은 전부 어릴 적에 받은 건지 개중에는 유치원의 이름이 박혀 있는 것도 있었다.

“대견한 어린이 상…은 뭐야?”

“어…. 유치원에서 젖니가 빠졌거든요, 그때 안 울고 버텼더니 주셨어요.”

견딜 수 없이 귀여운 사연이었다. 정인은 그만 참지 못하고 호진을 답싹 끌어안았다. 터트릴 것처럼 꽉 안아 주며 등을 도닥였다.

“무서웠겠네.”

“맞아요, 사실은 이 흔들릴 때부터 좀 무서웠어요.”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한겨울 펭귄처럼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방 안으로 들어섰다. 노을 지는 논두렁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창가 앞에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필기도구를 바라보던 정인의 눈길은 선반 구석의 작은 바구니에도 머물렀다. 웬 편지 봉투가 수북이 담겨 있었다.

“앗, 그건…. 음.”

호진이 황급히 그 앞을 막아섰다.

“뭔데?”

“그…. 편지 받은 것들이에요.”

“무슨 편지?”

“…그냥, 팬레터 같은 것도 있고.”

“팬레터 상자는 아까 거실에 있던데?”

호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고, 정인은 장난스레 물었다.

“고백 편지 같은 거라도 돼?”

“하…. 죄송해요.”

호진이 곧바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형이랑 사귀게 되고 나서는 집에 온 적이 없어서 치울 생각을 못 했어요. 어차피 전부 거절했던 거지만…. 아니다, 그냥 지금 바로 치울게요.”

“그러지 마, 호진아.”

정인은 큰 소리로 웃었다. 정말로 상자를 내다 버릴 기세인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유호진은 누군가의 마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

“나는 너의 그런 면도 많이 좋아해.”

지금보다 더 어리고 여렸을 시절에도, 호진은 아마 이 편지들을 그냥 모르는 척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날 며칠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가장 다정한 거절의 말로만 신중히 답장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돌려줄 수 없는 마음에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부디 슬퍼하지 않길 바라며.

“…너라는 사람을 좋아했다는 건 누구에게나 참 좋은 추억일 거야.”

정인이 모르는 시간 속에서도 호진이 늘 한결같이 유호진이었다는 건 참 기쁜 일이었다. 굳이 모르는 시간을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의 호진을 바라보는 일이 곧 그의 지난 시간을 모두 바라보는 일이 되는 거니까.

여전한 금빛 햇살 속에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평온한 적막이 흘렀다. 정인은 손을 들었다. 반듯하게 넘긴 호진의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졌다.

“나에게도 그래, 호진아.”

정인은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로 약속했던 밤을 떠올렸다. 형을 좋아하게 되어 늘 영광스러웠다며 웃던 호진의 얼굴을.

“너를 좋아할 수 있게 돼서 영광이야, 내 첫사랑이 되어 줘서 고마워.”

그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이토록 진중하고 귀한 마음이 내려앉은 자리가 자신이라는 게 이 순간 견딜 수 없이 영광스러웠다.

“…너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는 게,”

정인은 비스듬히 책상에 기대어 있는 호진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사는 내내 나에게는 영원한 자랑일 것 같아.”

흰 뺨을 감싸 쥐고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 그는 정인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쿡쿡 웃으며 혀를 섞었다. 어느샌가 정신을 차려 보니 푹신한 침대에 등이 닿아 있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천천히 목으로 내려가는 호진의 입술을 살짝 떠밀었다.

“잠깐만, 밑에 아버지 계시잖아.”

호진은 아쉽다는 듯 정인의 손끝에 키스하며 물었다.

“그럼…. 밥 먹고 아빠 없는 데서 놀까요?”

그에 정인은 생각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하여튼 이 녀석도 보통 불효자는 아닌 것 같다고.

***

“아빠, 나 낚시 갔다 올게.”

식사를 마침과 거의 동시였다. 갑작스러운 호진의 말에 태산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해 다 졌는디 뭔 낚시여? 지금 가 봐야 맨 종이 쪼가리나 잔뜩 낚지.”

“아유…. 다 수가 있으니까 후라시 하나만 줘 봐유.”

“밤 늦게까지 있게?”

“고기가 영 안 잡히면 그래야지 뭐….”

그러며 슬그머니 정인의 눈치를 보았다. 그것이 지원 사격 요청임을 알아본 정인은 국어책을 읽는 듯한 어조로 그에 동조했다.

“…와아. 낚시 처음 해 보는데. 재밌겠다.”

“정인이 낚시가 처음이야? 그럼 가야지.”

태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 근처의 작은 방문을 여는가 싶더니 장화 한 켤레와 낚싯대, 플래시라이트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정인의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아 장화를 한 짝씩 신겨 주었다.

“어, 아버님….”

“요샌 까딱하면 비얌 물리는 수가 있어. 호진이야 알아서 하겠지만, 날 어두워지면 정인이한테는 뵈지도 않을 걸.”

속에 덧대어져 있던 천을 무릎까지 끌어 올려 준 뒤에는 장화를 탁탁 두드리며 씩 웃었다. 그 모습마저도 호진과 판박이였다.

“오랜만에 고기들한테 전화나 한번 해 봐야겠네, 정인이 낚싯대에 많이 좀 걸려 달라고.”

“…다녀오겠습니다.”

이토록 다정한 분께 거짓말을 하다니. 죄책감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그 속을 모를 태산은 씩 웃으며 정인에게 끝까지 조심히 다녀오라 인사했고, 두 사람은 그를 등진 채 나란히 손을 잡고 정원을 나섰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거 맞아?”

“뭐가요?”

“아버지한테 거짓말했잖아.”

“형, 저 21년간 사고 한 번 안 치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어요.”

호진은 뜬금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이 정도 선의의 거짓말은 나중에 염라대왕님 앞에 가서도 크게 감점 없을 거예요. 이 날을 위해 여태까지 바르게 살아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어, 그래.”

어이가 없을 만큼 맹랑한 자기 합리화였다.

어쨌든 이미 눈에 뵈는 게 없게 된 듯한 호진은 트렁크에 낚싯대와 플래시를 휙 던져 넣고는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그새 해가 많이 저물어 완연한 밤에 접어들고 있었다. 정인은 땅거미가 내린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은행과 우체국만 덩그러니 서 있는 사거리를 지나 조금 더 나가니 작은 번화가가 나타났다.

“어?”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구경하던 정인은 문득 어딘가를 가리켰다.

“야, 저거 뭐야?”

정인이 가리킨 것은 회전 교차로 한가운데에 우뚝 선 조각상이었다. 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정인은 창가에 답싹 달라붙어 그것을 살폈다. 한 팔을 번쩍 들어 올린 남자의 상반신 모양을 한 조각상 옆에 오륜기가 붙어 있었다. 역시나 그것은 호진이 금메달을 따던 순간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하하하하, 저거 너 아니야?”

조각상을 둘러싼 스포트라이트와 꽃들로 말미암아 이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유호진을 사랑하는지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인은 배가 찢어지도록 웃으며 호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최대한 빨리 회전 교차로에서 멀어지길 바라는지 엄청난 속도로 핸들을 돌려 댔다. 그러나 터미널에 가까워지자 인도를 빙 두른 펜스 사이사이로 수영을 하는 사람의 픽토그램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물론 역시나 그놈의 오륜기와 함께였다.

“이야, 공주의 아들. 아주 난리가 났는데?”

“흡….”

호진은 귀까지 새빨개진 채 몸을 떨었다. 민망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차는 머지않아 낮은 한옥으로 가득한 거리에 멈춰 섰다.

“너 이거 써야 되지 않아?”

정인은 호진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기 무섭게 마스크와 모자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선 네가 웬만한 연예인보다 유명한 것 같은데,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하악….”

민망함에 못 이겨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도 그는 얌전히 마스크와 모자를 받아 들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한옥촌 안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곳이었다. 호진의 집과 마찬가지로 겉은 완벽한 한옥이지만 내부는 모던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긴 어디야?”

“그냥…. 숙소요.”

뒷좌석에서 제 가방을 꺼내 어깨에 맨 호진이 앞장서고, 정인은 장화 발로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그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호진은 체크인 절차를 생략하고 그대로 안내 데스크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체크인 안 해?”

그를 붙들고 물었다. 호진은 가방끈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저었다.

“안 해도 돼요.”

“왜?”

띵, 하는 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호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리 예약한 곳이라서요.”

“뭐? 도대체 언제?”

게스트 룸에 정인을 재우겠다고 정훈에게 직접 보고한 게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이다.

그사이에 뒤로 이런 짓을 할 시간 따윈 없었다. 심지어 지금의 외출도 미리 계획한 게 아니라 어쩌다 분위기에 휩쓸려 말이 그렇게 나왔을 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유호진의 계획이었는지 상당히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잠깐, 너 그 가방에는 뭐 들었어.”

정인은 그를 노려보며 가방 지퍼를 열었….

“미쳤어?”

…다가 황급히 닫았다. 온갖 색깔로 찬란하게 빛나는 콘돔과 러브 젤을 발견해 버린 탓이었다. 심지어 콘돔은 못해도 열 박스가 넘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가히 성인용품 판매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규모였다.

행여나 누군가가 스타 수영 선수 유호진의 다크 시크릿을 목격한 건 아닐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로비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손님은 물론 주인마저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그 잠깐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호진이 말했다.

“통째로 빌렸으니까 오늘은 다른 사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허…. 그러세요?”

정인은 헛웃음 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와 호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곳이라 생각하자 묘한 긴장감에 마음이 울렁였다. 움직일 때마다 뽀짝뽀짝 이상한 소리가 나는 신발마저도 거슬려 미칠 것 같았다.

“…….”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시작하는 건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리 대단한 첫 경험을 치렀대도 그건 반쯤 페로몬에 휩쓸려 저지른 일이었다. 제대로 기억이 나지도 않는 데다가, 맨정신인 상태에서 ‘암묵적으로 그렇고 그런 짓을 하기 위해’ 어딘가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인은 슬슬 올라오는 긴장감에 연신 마른침을 삼켰고, 호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환기 좀 할게요.”

창밖으로 반짝반짝 불이 들어온 산성山城의 끝자락이 보였다. 낮은 창틀에 손을 짚은 채, 호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예쁘지 않아요?”

속이 시커먼 너구리처럼 굴어 놓고서는, 얼굴 한가득 노란 불빛을 묻히고 순하게 웃는 모습만큼은 또 말문이 막히게 예뻤다. 그러니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 대답할 도리도 없었다.

“응, 예쁘네.”

정인은 피식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태산이 신겨 준 장화를 벗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무리 잡아당겨도 벗겨지지가 않았다. 바닥에 철퍽 주저앉으려던 순간이었다.

“벗겨 드릴게요, 잠시만요.”

부리나케 달려온 호진이 뒤로 넘어가려던 정인의 허리를 받쳤다. 그러고는 장화 끝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미끈한 고무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떠는 호진의 손안에서 허망하게 미끄러졌다.

“아….”

“하하하, 뭐야.”

정인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적잖이 긴장되는 건 호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너 떨어?”

호진은 말이 없었다. 대신 쿡 찌르면 피가 날 것 같이 붉은 얼굴을 하고는 정인의 장화를 마저 벗겨 주었다. 이때다 싶어진 정인은 한껏 비아냥댔다.

“너 되게 웃긴다. 나 몰래 숙소 예약까지 해 놓고, 콘돔도 저렇게 많이 사다 놓고, 이제 와서?”

“…네.”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호진이 눈을 들었다.

“저 떨려 죽을 것 같아요, 형.”

지나치리만치 맑아 보이는 눈동자 앞에 숨이 턱 막혔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정인은 쿵쿵 뛰어 대는 스스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호진은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키스부터 하면 되는 거예요?”

세련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정직한 본론이었다.

“글쎄.”

하지만 세련되게 받아치지 못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정인은 입술을 달싹이며 그와 눈을 맞췄다.

“한번 해 볼까요?”

호진이 커다란 손바닥을 들어 정인의 턱과 귀를 한꺼번에 덮었다.

“…그럴까.”

천천히 입술을 맞댔다. 닿는 듯 마는 듯 쪽, 하고 떨어진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샜다. 말캉한 혀가 밀려 들어오고, 정인은 눈을 꼭 감아 그의 목에 매달렸다.

아무렇지 않게 정인을 번쩍 들어 올린 호진은 한 손을 내려 제 허리에 다리를 감게 했다. 머지않아 벽에 등이 닿았다. 떨린다 말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그는 급하게 한 손을 정인의 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정인의 표정을 확인했다.

“아….”

“못 견딜 것 같으면 꼭 말하셔야 돼요.”

“솔직히 말해 봐, 너 진짜 떨리는 거 맞아?”

정신없이 목에 입 맞추는 호진의 이마를 살짝 떠밀며 물었다. 호진은 정인의 입 안으로 깊게 혀를 얽어 뿌리까지 빨아들이더니 씩 웃었다.

“겉으로 티가 안 나서 다들 잘 모르나 봐요.”

내내 등 위에 머물던 호진의 손이 가슴팍으로 넘어왔다. 그는 손톱을 세워 유실을 긁으며 정인의 귓바퀴를 물었다.

“저 사실은 올림픽 결승 때도 엄청 떨었는데, 막상 나오니까 사람들은 제가 하나도 안 떤 줄 알더라고요.”

“흐…. 윽.”

한 음절씩 발음할 때마다 여린 살 위로 이가 스치며 소름이 돋았다. 금방 아래가 불편해졌지만 공중에 떠 있으니 도망칠 수가 없었다. 정인은 하는 수 없이 호진을 답싹 끌어안았고, 호진은 기다렸다는 듯 아래를 붙여 왔다. 빳빳하게 일어선 성기가 옷 너머로 생생히 느껴졌다.

“지금도 얼추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냥 겉으로 티가 안 나는 거지 되게 떨려요. 그래도….”

호진이 말했다.

“떨리는 건 떨리는 거고, 실전은 실전대로 최선을 다해 보려고요.”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자서전에 실려도 별 위화감이 없을 문장이었다.

분위기가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정인을 매트리스 위에 눕힌 호진은 내내 눌려 있던 페로몬을 조금씩 풀며 웃옷을 벗었다. 흠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가 어스름한 불빛 아래 드러났다.

정인은 홀린 듯 손을 들어 그의 몸을 만졌다. 두꺼운 근육으로 감싸인 어깨에서부터 커다란 가슴까지, 힘을 주지 않아도 불룩 튀어나와 있는 부분들을 따라 그리듯 살살 만지다 보니 어느샌가 쭉 갈라진 복근 위였다.

“…예뻐.”

숨을 쉴 때마다 깊게 오르내리는 배 위에 손바닥을 대고 잠시 멈췄다. 그러자 호진이 몸을 숙였다.

“마음에 드세요?”

생글생글 여우 같이 웃으며 쇄골 아래를 콱 물었다.

“읏…!”

“통째로 가지세요. 어차피 다 형 거예요.”

따끔하게 피어나는 감각에 미간이 좁혀 들었다.

“그럼 누워 봐.”

오기가 생긴 정인은 그대로 호진의 어깨를 떠밀었다.

얌전히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호진의 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야말로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형태였다. 어깨는 말할 것도 없이 거대하고 몸통도 두꺼운데, 그에 반해 허리와 손목, 발목은 얄쌍하고 매끈했다.

보다 보니 그의 무릎으로도 눈길이 갔다. 양 무릎 안쪽에 서너 줄씩, 희게 그어진 흉터가 보였다. 베인 흉터라 하기엔 깊이가 얕고, 긁힌 자리라 하기엔 궤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여긴 왜 이래?”

묻는 말에 호진은 흘끔 그쪽을 내려보는가 싶더니 아, 하며 웃었다.

“갑자기 키가 크면서 그렇게 됐어요.”

“…흉터가 남을 정도로 빨리 컸으면 많이 아팠겠는데.”

정인에게도 성장통이 있었다. 발현 뒤로 겪은 히트 사이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통증이었지만, 그래도 밤이면 은근히 거슬려 키가 크는 동안에는 종종 찜질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정인의 눈이 안쓰러운 기색을 띠자 호진은 장난처럼 대꾸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사실 진짜 아플 땐 조금 울기도 했어요.”

“그럼 대견한 어린이 상은 박탈해야겠네.”

정인은 그를 따라 웃었다.

“크느라고 수고 많았어.”

안타깝고도 사랑스러운 흔적 위로 입술을 붙이며 드로즈 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빳빳한 기둥이 손바닥 안에 잡혔다. 쪽, 입술을 떼고 자세를 바꿔 호진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속옷까지 벗겨 내자 새하얀 음부가 드러났다.

“여긴 원래 이랬고?”

음모가 있어야 할 자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아뇨, 운동 때문에.”

“따로 관리하는 거야?”

흉흉하게 충혈된 기둥을 손가락으로 감싸 쥐었다. 호진은 입술을 꽉 깨물고 한숨지었다.

“자주는 아니고…. 원래 체모가 별로 없는 편이라서요.”

“으응, 그래?”

정글 한복판에 내다 놓아도 혼자 너끈히 살아남을 듯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고작 아래를 잡힌 것만으로도 움찔거렸다. 그에 묘한 정복감이 들었다. 정인은 호진이 저에게 해 주던 것을 생각하며 그의 페니스를 살살 잡고 흔들었다. 딱딱하게 일어나 있던 것이 손안에서 조금 더 커졌다.

“이렇게 하는 거 맞지?”

“아뇨.”

호진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라고?”

“바지 벗어 보실래요?”

시키는 대로 바지를 벗었다. 절로 움츠러드는 무릎을 쥐고 벌린 호진은 꼿꼿하게 일어난 정인의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번 만져 보세요. 제대로 알려 드릴게요.”

“어…. 응.”

정인은 순순히 제 것을 쥐었다.

“조금 전에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시죠? 똑같이 해 보세요.”

어설프게 손을 움직였다.

“음….”

호진이 만져 줄 때처럼 말도 안 되게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만지다 보니 조금씩 쾌감이 올라왔다.

“하아…. 이제, 어떻게 하는 건데….”

“기분 좋아질 때까지 만지면 돼요.”

호진의 페이스에 제대로 말려든 정인은 제가 지금 연인의 앞에서 자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당장 주어지는 쾌감에 매몰되어 눈을 감고 제 것을 만지는 데에만 열중했다. 귀두부터 기둥까지를 느리게 쓸어내리는 동안 나름대로 요령도 붙었다. 그런데 별안간 축축한 입술이 다가와 정인의 페니스를 감쌌다.

“하윽….”

무방비 상태에서 가해진 쾌감에 눈물부터 고였다. 혀를 내밀어 기둥을 핥아 올린 호진은 훌쩍거리는 소리에 곧장 정인의 상태를 확인했다.

“싫으세요?”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아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인이 대답을 않자 호진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정인을 쳐다보았다.

“아, 흣…. 안 싫어.”

애가 타는 마음에 얼른 대답했다. 이미 자극을 받을 대로 받은 성기는 아무런 접촉 없이도 프리컴을 줄줄 흘려 댔다.

차라리 모르는 감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았겠으나, 정인의 몸은 이미 이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등골을 파고들던 쾌감의 맛을 떠올리자 입구가 반사적으로 오물거렸다. 꼿꼿하게 선 페니스도 덩달아 끄떡였다.

“그럼 계속할게요.”

호진은 정인의 가슴팍으로 입술을 내렸다. 피부를 전부 녹여 그 안의 뼈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끈질기게 갈비뼈 위를 핥고, 바짝 일어선 유두를 스치듯 간질였다.

“하아….”

대놓고 만지는 것보다 이게 더 힘들다. 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만 지나가는 쾌감에 정인의 아래가 아플 정도로 발기했다.

열기 어린 손바닥은 곧 정인의 다리를 훑었다. 호진은 손끝을 세워 허벅지의 크고 작은 근육 사이사이를 누르고, 정강이뼈 옆으로 붙은 전경골근을 만졌다. 발 전체를 감싸 쥐고 발목을 살살 풀어주기도 했다. 이따금 해 주곤 하던 마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미 쾌감의 스위치가 켜져 버린 탓에 그마저도 성적인 자극으로 느껴졌다. 정인은 어쩔 줄을 모르고 몸을 벌벌 떨었다.

“이쪽 근육이….”

허벅지 안쪽에 손이 닿았다. 말랑말랑 연한 살을 쓰다듬던 손바닥은 조금 위로 올라가 고간을 짚었다. 그렇게 주변만 눌러 대는가 싶더니, 페니스를 콱 움켜쥐었다.

“…결국 여기에도 영향을 주는 거거든요?”

정인은 비명 같은 교성을 질렀다. 세게 압력을 주어 위아래로 흔들며 호진이 웃었다.

“다리 쓰는 종목이라 그런가, 운동 오래 쉬었는데도 단단하네요.”

“미친…. 하윽, 아.”

그럼 평생 업으로 운동을 해 온 저는 어떻다는 건가. 물론 굳이 답을 구하려 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 전 만졌던 호진의 것은 전부 발기한 게 아닌데도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딱딱했으니까.

정인은 처음으로 호진의 것을 받아들였던 때를 떠올렸다. 뜨겁게 부푼 입구를 가르고 들어온 것이 깊숙한 곳에 닿으면, 한 번씩 쳐올릴 때마다 어마어마한 쾌감에 뇌가 절었다.

“흐윽….”

단지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도 뒤가 확 젖어 들었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왕창 쏟았다.

호진이 낮게 신음하며 정인의 뒤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점액으로 엉망이 된 입구는 어렵지 않게 이물을 집어삼켰다.

“흣….”

느릿하게 밀고 들어온 중지가 머지않아 뿌리까지 박혀 들었다. 촘촘하게 주름진 내벽이 긁히고, 젖은 소리와 함께 애액이 튀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창피해 얼굴을 가리자 호진이 정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러지 마세요.”

그는 젖은 손가락을 들어 보란 듯이 제 입 안에 넣었다. 애액에 번들거리는 것을 핥으며 정인과 시선을 맞췄다.

“오늘은 하나하나 다 기억하셔야 돼요, 우리가 뭘 어떻게 하는지.”

손가락이 한 개에서 두 개로 늘어났다. 찌걱찌걱 음란한 소리가 한참을 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대로 매달려 흔들리던 정인의 몸이 일순 경련했다. 느끼는 곳을 제대로 찔린 탓이었다.

“아….”

눈앞이 허옇게 번쩍였다. 그 짧은 순간을 잡아낸 호진은 작정한 듯 그곳을 찌르기 시작했다.

간지러움에 가깝던 쾌감이 요의로 변했다. 사정감과는 조금 다른 느낌에, 정인은 황급히 호진을 밀어 냈다.

“나, 잠깐, 진짜…. 진짜 화장실 가야 돼, 응?”

그러나 호진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고 세게 찔러 댈 뿐이었다. 결국 정인은 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허리를 말았다. 한 번 경련할 때마다 소변같이 묽은 액체가 쭉, 쭈욱 뿜어져 나와 호진의 가슴팍에 부딪쳤다.

“흐윽….”

“이제 안 가도 되죠?”

내내 안을 헤집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호진은 음수를 뒤집어쓰고도 개의치 않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듯 정인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고는 드로즈 안에서 제 것을 꺼내 흔들어 댔다.

“뭐야…. 내가, 했던 거랑…. 똑같이 하면서.”

깜빡깜빡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정인은 투덜거렸다.

“아, 그래요? 죄송해요.”

호진은 천연덕스럽게 사과하며 정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완전히 일어난 성기에 콘돔을 씌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꺼운 기둥이 엉덩이 골 사이로 문질러졌다. 정인은 곧 다가올 일을 막연히 기대하며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하지만 호진은 곧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폭신한 엉덩이 위를 찌르기도 하고, 구멍 위를 꾸욱 누르기도 하며 한참을 그렇게 애만 태웠다.

“호진아….”

기분 좋은 향기가 훌쩍 가까워졌다.

“나…. 해 줘.”

정인은 반쯤 울먹이며 그의 팔을 저에게로 잡아당겼다. 입구를 지분거리던 페니스가 귀두부터 쿡 치고 들어왔다.

억제제 부작간으로 정신을 잃고 덤벼들던 때와는 다르기를 바랐다.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상황이 맞물리며 약을 복용하지 않은 지가 꽤 된 탓에, 지금은 호진이 스스로 체감할 만큼 억제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생각으로만 한다는 게 자꾸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말에 정인은 눈을 꼭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예쁜 입술이 상할까 무서워 얼른 그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말캉한 혀끝이 스치며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인내심은 빠르게 바닥났다. 이미 갈 데까지 갔는데도 더 가고 싶어 애가 달았다.

얕게 진퇴를 반복했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이 움찔거리며 조여들었다.

정인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고, 푹 젖은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감정적인 눈물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걸 보는 게 쉽지 않았다.

“울지 마세요.”

축축한 뺨에 입술을 붙였다. 어쩔 수 없이 아래가 맞닿으며 삽입이 깊어졌다.

“하윽…!”

정인이 바들바들 떨며 사정했다. 호진은 정인이 완전히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깊게 제 것을 처넣었다. 꾹, 하고 누를 때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시트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달큼한 향이 피어올랐다.

“아…. 형.”

참지 못하고 정인을 끌어안았다. 이미 젖을 대로 젖었음에도 정인의 안은 여전히 좁았다. 자세가 틀어지면 다칠 것 같아서, 상체를 단단히 고정하고 아래만 움직였다.

“이거, 너무 야해요.”

도파민, 아드레날린, 옥시토신, 평생 익히고 배워 온 단어가 하나씩 지워졌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본능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는 쾌감뿐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노팅을 걸면 어떻게 되는 걸까, 본딩까지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직 해 보지 않은 일들을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호진은 빠르게 밑을 쳐올렸다.

“하윽, 호진아, 나 그만….”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호진의 가슴팍을 짚었다. 호진은 곧바로 정인에게서 물러났다. 쑥, 하고 성기를 빼내자 정인은 기다렸다는 듯 두 번째의 사정을 시작했다.

뒤로 받는 것이 힘든 듯하니 앞을 빨아 주는 건 괜찮을 것이다. 호진은 여전히 정액을 토해 내고 있는 정인의 것을 핥았다. 그는 악 소리를 내며 허리를 떨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꽉 붙들고 깊게 빨아들이자 정액도 무엇도 아닌 것이 호진의 입 안에서 분수처럼 솟구쳤다.

“아…!”

그리고 정인은 입을 크게 벌리며 바르작거렸다. 예민해진 귀두에 닿는 혀의 느낌이 견딜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더는 이 쾌감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바짝 굳은 채 간신히 숨만 내쉬었다.

“여기 만져 드릴게요.”

호진이 뒤로 손가락을 넣었다. 단박에 전립선을 찾아내고는 손끝을 굽혀 긁었다. 물론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정인의 페니스를 쥐고 있었다.

“아, 흣, 하아, 윽…!”

호진의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길게 붙은 근육이 힘을 받아 쭉 갈라졌다. 그는 일정한 속도로 계속해서 뒤를 쑤시고 앞을 흔들어 댔다. 결국 정인은 발가락을 오므라뜨리며 앞뒤로 음수를 질질 흘렸다.

“허억….”

이미 오르가즘의 역치를 넘은 채였다. 정인은 호진이 제 몸에서 손을 뗀 후로도 계속해서 극치감을 느꼈다. 이제 단지 시트에 살갗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울컥울컥 애액이 솟구쳤다.

눈이 뒤집히도록 강렬한 쾌감에 손발은 물론이고 혀끝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도저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청하듯 호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호진이 피식 웃으며 혀를 얽어 왔다. 폭력적인 오르가즘이 지나간 후에 마시는 알파의 페로몬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제 아래를 호진에게 비비며 그의 입술에 매달렸다. 혀를 내밀어 입천장을 핥고, 줄줄 흐르는 타액을 빨아 댔다. 그러나 호진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정인의 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너는…. 하아, 안 했네, 아직.”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호진의 기색을 살폈다. 아직 사정하지 않은 그의 성기는 여전히 거대하게 부푼 채 저 아래에서 끄떡이고 있었다. 그게 아플 것 같아, 정인은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하자.”

“꼭 사정하고 끝낼 필요 없어요.”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저 짐승 아니에요. 더 하면 형 피곤해요.”

하지만 정인은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단단하게 어깨를 안아 주는 팔을 밀어 내고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나는 짐승인 것 같은데.”

콘돔을 벗겨 내고 새것을 씌웠다. 돌돌 말려 있는 것을 한 번에 쑤욱 잡아 내리자 호진의 복근이 납작하게 수축했다. 윽, 하고 삼키는 신음 소리가 정인의 귀 안쪽을 긁었다.

정인은 호진의 배 위에 한 손을 얹었다. 빳빳하게 일어난 성기 끝에 구멍을 맞추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하윽….”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호진이 넣어 주는 것에 비하면 훨씬 힘들었다. 끄트머리만 간신히 걸친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호진이 허리를 붙들어 주었다.

“햄스트링 다쳐요. 무릎에 힘 빼고 바깥으로 벌리세요.”

“흐윽…. 너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하. 그딴 게 중요해?”

쏘아붙이면서도 그의 말을 따라 천천히 무릎을 벌렸다. 놀랍게도 무게 중심이 안정적으로 박히며 삽입이 조금 더 쉬워졌다. 마침내 그의 기둥을 중간까지 삼켰다. 막 숨을 돌리려는데,

“당연히 중요하죠.”

호진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줘 정인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전립선과 페로몬 분비샘이 한 번에 찔리며 정인은 세 번째로 사정해 버렸고, 그대로 무너지는 정인을 받아 안은 호진은 목을 끌어안은 채 아래를 쳐올렸다.

“세상에서, 하아…. 제일 중요하죠, 최정인이 안 다치는 게.”

“허억…. 으….”

뜨거운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정인은 호진의 목덜미에 입술을 박았다. 탄탄한 복근에 짓눌린 페니스가 발기하고, 자세 때문에 더욱 깊이 들어온 호진의 것은 배 속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호진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나무 냄새를 들이마시며, 정인은 첫 경험에서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손끝과 발끝에 바늘이 박히는 느낌, 그걸 어떻게 했더라….

“아, 씹….”

미친 듯이 뒤를 헤집던 호진의 동작이 일순 멎었다.

그는 정인의 안에 제 것을 처넣은 채로 다시금 정인을 뒤집어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엄청난 속도로 좆을 박아 댔다. 억제제 부작용으로 정신을 잃었던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정인은 흐느끼다시피 신음하며 계속해서 페로몬을 풀었다.

“하아…. 호진아. 읏….”

“아…. 형.”

그리고 호진은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다.

두 사람 다 의식하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페로몬을 배출하는 일에 서툰 정인은 거의 페로몬 샤워 수준으로 호진을 적셨고, 억제제의 도움조차 없이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을 뒤집어쓴 호진의 성기는 순식간에 노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저는 짐승이 아니라며 호기를 부리던 게 언제였냐는 듯, 호진은 정인을 먹어 치우는 일에만 열중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사람의 안에 체액을 부어 영원히 저를 새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

이게 짐승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호진은 급하게 정인의 안에서 제 것을 빼냈다. 살짝 부푼 뿌리가 부은 입구를 비집고 나오며 고여 있던 애액이 솟구쳤다.

호진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콘돔을 전부 뒤집어 빠르게 노팅용 콘돔을 찾아냈다. 급히 바꿔 끼우고 정인의 몸을 뒤집었다.

뭐 다른 말을 할 틈도 없었다. 마른 등을 껴안으며 곧바로 삽입하자 시트가 푹 젖어 들었다. 정액을 질질 흘리는 정인의 성기를 움켜쥔 채 헉헉대며 개처럼 박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가면.

“하윽…!”

조금씩 부풀어 오른 뿌리 부분이 마침내 정인의 페로몬 분비샘에 닿았다.

“…아.”

어린애 주먹만 한 크기로 부풀어 있던 것이 한순간에 확 팽창하며 노팅이 걸렸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꽉 다물렸다. 끝을 모르고 차오르는 둥근 덩어리가 내벽을 사정없이 짓이겼다. 쾌감을 느낄 만한 부위 전부를 눌린 채 정인은 엉엉 울어 댔고, 호진은 그를 꽉 끌어안아 젖은 눈가에 입 맞췄다. 기나긴 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더는 들어갈 수도 없이 깊은 곳에 닿고도 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호진은 이미 입구를 꽉 막은 성기를 자꾸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하아…. 형.”

죽을 것 같은 쾌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사랑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아, 아윽, 하….”

어차피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정인을 위주로 돌아가던 세상이다. 정인을 바라보는 호진의 마음은 언제나 따뜻한 봄이고 선선한 가을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정말 많이요.”

“흐윽….”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커지던 마음은 기어이 욕심이 되고야 말았다. 이제 최정인의 스물둘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남는 것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죽는 날까지 반드시 이 사람이어야 해.

“형도 저를 사랑해 주셔야 돼요.”

그렇게 호진은 누구에게도 바란 적 없던 것을 구하기 시작했다.

“항상 저만 예뻐해 주세요.”

끊임없이 스스로를 깎고 다듬던 것을 멈춰, 이제 전부를 받아들여 달라 떼를 쓰기 시작했다.

***

맹세컨대 호진도 정인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하, 흑….”

자정을 훌쩍 넘기도록 몇 시간 내내 박고 싸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정인이 흘리던 미끌미끌한 애액에 점성이 생겼다. 수없이 느낀 오르가즘 때문이었다.

체내에 사정하지 않았는데도, 반복적으로 한계치의 오르가즘을 느낀 정인의 몸은 이만하면 번식 행위가 끝났으리라 짐작하며 점액을 내보냈다. 알파의 체액이 몸 밖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변화를 먼저 눈치챈 건 호진이었다. 그는 질척해진 입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액체를 긁어냈다. 그러는 동안 아래가 또 발기해 왼손으로는 제 것을 흔들어 풀어야만 했다.

정인의 몸 안에서 사정할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우선 정인을 뒤로 한 번 보내고 저도 사정을 마치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호진은 이성을 차리자마자 정인을 일으켜 조심조심 씻기고 옷까지 전부 입혔다. 그러나 입구에서 신발을 신겨 주다가 발목에 손이 닿으며 또 한 번 눈이 맞았다. 결국 벽을 짚고 선 채로 한 번을 더 하고 말았다.

그대로 있다간 이성이고 나발이고 방 안에 가득 찬 페로몬 때문에 또 눈이 뒤집힐 게 분명했다. 호진은 얼른 새 타월을 꺼내 와 정인의 몸을 닦아 주었다. 정인은 기진맥진한 채 그의 품에 늘어져 방을 나섰다. 이제 정말로 더는 나올 것도 뭣도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었다.

“호진아.”

통행량이 훌쩍 줄어든 도로에 들어서자 어둑어둑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너나 할 것 없이 몸이 달았다.

“형, 우리 잠깐… 읍.”

더는 정인을 혹사시킬 생각이 없던 호진은 가벼운 키스를 예상하며 차를 멈춰 세웠다. 하지만 얌전한 고양이 최정인은 그때부터도 이미 부뚜막에 올라가다 못해 굴뚝까지 뽑아 불태울 생각뿐이었다.

정인은 차가 멈춰 서기 무섭게 호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먼저 키스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흐르는 서로의 타액을 핥고 혀를 섞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차 안에서 붙어먹는 중이었다.

“형…. 하, 너무 좋아요….”

인적 드문 개울가에 멈춰 선 차체가 덜컹덜컹 흔들리고, 창 안쪽으로는 뿌옇게 습기가 찼다. 정인의 허리는 한계까지 구부러져 어느샌가 발목이 머리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한 번씩 파고들 때마다 기둥에 솟은 힘줄이 따뜻하게 부푼 입구를 스치며 정인이 교성을 질렀다.

“흐응, 하, 읏…!”

“아…. 형.”

일단 호진이 추정하기로 작금의 상황은 노팅 때문인 것 같았다.

정인을 만나기 전까진 성적인 행위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섹스와 마찬가지로 노팅도 호진에게는 단지 이형질의 생리 현상을 다루는 책에서나 본 이론에 불과했다.

“형, 하…. 우리, 앞으로는 이거 진짜…. 좀 조심해야겠어요. 하….”

처음으로 몸을 섞었을 땐 온전히 억제제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에 노팅까지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막는 것 하나 없이 글자 그대로 ‘클린한’ 상태에서 노팅의 쾌감을 알아 버린 셈이었다. 늘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던 금욕의 레벨이 와장창 무너지며 호진은 진심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이쯤이 한계일 거라고 생각했던 쾌감의 끝이 말도 안 되는 크기로 확장해 버리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대회 전에 자위와 섹스를 하지 말라 권고하는지, 왜 이형질 선수들의 페로몬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관리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하, 으응…. 으윽…! 뭘, 어쩔…. 하아.”

그 광기 같은 성욕을 받아 내는 정인도 보통은 아니었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처음으로호진과 밤을 보낸 이후 페로몬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몸이 확 좋아진 덕에,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평소보다 체력이 꽤 많이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체력은 고스란히 호진과의 섹스를 하는 데에 쓰였고, 체력이 바닥난 후로는 몸의 한계를 넘어 정신력만으로 이 모든 것을 버티는 중이었다.

“아, 흑….”

“힘드세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정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진은 살짝 각도를 바꾸나 싶더니 구멍을 수직으로 찍어 내렸다. 찌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묽은 애액과 점액이 뒤섞여 시트 위로 튀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끝낼게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이제 정말 느낄 만큼 다 느꼈다고, 더는 자극해도 쥐어짜 낼 게 없다고 생각해도 결국 호진의 손이 닿으면 정인은 착실하게 새로운 쾌감을 느꼈다. 이러다 뇌가 망가져 버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 흐윽, 아, 아…!”

강하게 몰아붙이는 힘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샜다.

“하아….”

호진은 도톰하게 튀어나온 정인의 목젖에 입을 맞추며 제 것을 뿌리 끝까지 쑤셔 넣었다. 정인은 물처럼 묽어진 정액을 질질 흘리며 뒤를 조였고, 호진은 그 빠듯한 느낌에 신음하며 사정했다. 두꺼운 기둥이 맥박치듯 끄떡일 때마다 정인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하….”

호진은 정인의 이마에 새처럼 쪽쪽 입 맞추고는 사용한 콘돔을 벗겨 묶었다. 그러고는 물티슈를 꺼내 정인의 몸을 살살 닦아주었다.

“고생하셨어요.”

“흐읏….”

아직 민감한 정인의 몸은 그 얕은 스침에도 크게 반응했다.

“죄송해요, 진짜 조심할게요.”

장난이 아니라 이제 정말로 더는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호진은 가능한 한 자극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미끈한 것을 전부 닦아 냈다. 파르르 떠는 입술 사이로 물을 흘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요….”

정인의 옷에 달린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며 호진이 말했다.

“사실 이 차 사면서, 어차피 혼자 탈 건데 이렇게까지 큰 차가 필요한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잘 샀다 싶어요. 경차나 세단이었으면 좀 힘들었을 것 같아서.”

“무슨…. 하.”

정인은 힘없이 눈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조금씩 정신이 들며, 아주 엉망이 되어 버린 차 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너 이거 내부 세차 뭐라고 하면서 맡길래.”

그리고 묻는 말에 호진은 해맑게 대답했다.

“안 할 건데요.”

“…뭐?”

“차에 탈 때 형 냄새 나는 거 너무 좋거든요. 안 그래도 좀 날아가서 아쉬웠는데, 저야 횡재한 거죠.”

“…….”

헛소리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아까운 수준의 헛소리였다. 그러나 반박할 기운이 없었다. 그저 호진이 하는 것을 내버려 두며 시트에 축 늘어졌다.

“잠시만요, 손 조심하세요.”

“응….”

옷이 전부 입혀진 다음에는 젖혀져 있던 시트가 올라갔다.

“밤늦었으니까 조금 천천히 갈게요.”

정인은 호진이 안겨 준 생수병을 신줏단지처럼 끌어안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컴컴한 나무 그림자 위로 드리운 하늘에 깨소금처럼 박힌 별이 예뻤다.

“…별 많다.”

낭만적인 풍경에 홀린 정인은 살짝 창문을 내렸다. 호진은 정인이 오래도은 별을 볼 수 있도록 느리게 브레이크를 밟아 주었다. 적당한 속도로 서행하던 차는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신작로를 기어갔다.

“오늘은 날이 그렇게 좋진 않은데…. 맑은 날에 보면 더 많아요.”

“그래?”

“네, 내일이나 모레쯤 날씨 좋다니까 그때 한 번 더 봐요.”

가로등이 없는 자리를 지나갈 때마다 풀벌레 소리와 별의 빛깔이 동시에 짙어졌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정인이 창밖으로 한 손을 뻗은 순간,

꺄악ㅡ.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

꺄아악ㅡ.

“헉, 호진아.”

“네?”

이번엔 정말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산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분명 사람의 비명 소리였다.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아서, 정인은 황급히 호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놀랍도록 태평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방금 못 들었어? 방금, 사람이…. 저기 산속에….”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호진이 어둠 속에서 목만 스윽 돌려 정인을 바라보았다. 내비게이션의 퍼런 불빛이 그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그….”

어쩐지 무서워진 정인은 애써 담담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한 소리 났잖아. 못 들었어?”

“글쎄요.”

호진은 완전히 차를 멈춰 세웠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요.”

도자기 인형처럼 푸르스름한 낯빛으로 정인을 바라보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차가 멈춰 선 곳은 하필 가로등 불빛이 전혀 닿지 않는 자리였다.

컴컴한 어둠 속, 창백하게 빛나는 호진의 얼굴이 낯설었다. 묘하게 초점이 없는 눈과 파리하게 질린 안색, 마치 정인이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형.”

“왜, 왜?”

아아악ㅡ. 긁는 듯한 비명 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정인은 잔뜩 긴장한 채 시트에 등을 꼭 붙였다.

“여기 어떻게 왔는지 기억나요?”

“…뭐?”

“잘 생각해 봐요, 언제부터 이 차에 타고 있었는지.”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정인을 향해 스르륵 몸을 기울였다. 코어 힘이 좋은 사람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마저도 지금은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정인은 문손잡이를 꼭 쥐고 더듬더듬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호진이 빌린 숙소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 너무 많이 ─ 했고, 기진맥진한 채 밖으로 나왔고, 차에 탔고…. 잠깐, 차에는 어떻게 탔지?

정말 차에 탄 게 맞긴 한가?

“하하하하.”

서늘한 얼굴로 정인을 쳐다보던 호진이 별안간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에 정인은 완전히 겁을 먹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낭만적이던 시골길의 풍경은 어느샌가 공포 영화의 첫 장면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나가는 차라곤 한 대도 없이 캄캄하기만 한 숲길, 나에게만 들리는 의문의 비명 소리, 내내 그를 듣지 못하다가 제일 먼저 미쳐 버린 동료….

“흡….”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분위기에 압도되니 자꾸만 나쁜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매체에 따르면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귀신 들린 동료부터 해치워야 한다. 하지만 정인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호진을 해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떠오른 여러 개의 명장면들 속에서 그렇게 굳어 있는데,

“고라니 우는 거예요.”

호진이 정인의 코끝에 쪽 하고 뽀뽀했다. 정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고라니? Waterdeer?”

“아, 걔가 영어 이름이 그래요?”

그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차를 출발시켰다.

“여름이나 겨울 접어들기 직전이 고라니들 이동하는 철이거든요. 이 시기에는 많이 울어요. 도로에도 자주 나와서 밤에는 항상 서행해야 하고요.”

“…진짜 고라니 우는 소리 맞아? 분명 사람 소리 같았는데.”

정인의 심장은 아직도 벌컥벌컥 뛰어 대고 있었다. 묻는 말에 호진은 흘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음…. 저기서 난 소리면 설령 사람 소리여도 산 사람은 아닐걸요? 위에 묘지밖에 없어요.”

그것참 듣던 중 무서운 소리였다.

“빨리 집에 가자.”

제발 고라니였기를 바라며 정인은 가차 없이 창문을 올려 버렸고, 호진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그새 호진의 집이 있는 마을이었다. 환하게 가로등이 밝혀진 슈퍼마켓 앞에 도착하니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호진은 주차를 마치자마자 조수석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 주었다. 정인은 내밀어 주는 손을 잡고 땅에 발을 디디려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중심을 잃고 말았다.

“윽….”

“아이고, 우리 예쁜 형 깨질 뻔했네.”

호진은 황급히 정인을 받쳐 세우고는 돌아서 등을 내밀었다.

“업히세요.”

어서요, 한 번 더 채근하는 소리에 그제야 그의 목을 끌어안고 업혔다.

“귀신이 무서우세요?”

어린애를 둘러업듯 가뿐하게 정인을 추스른 호진이 물었다. 정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있을 거라고 믿어서 무서워.”

“헉…. 설마 보신 적 있어요?”

“실제로는 본 적 없고 영화로 많이 봤지. 공포 영화 자주 보는 편이거든.”

호진은 으,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귀신이 무서운데 공포 영화는 왜 보는 거예요?”

“음….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 둬야 실제로 봤을 때 당황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정인은 자조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좀 우습게 들리는 얘기겠지만…. 실은 만나고 싶은 귀신들이 있거든. 사람 귀신 한 명이랑, 동물 귀신 한 마리.”

늘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소리 내 말해 본 적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놀란 마음이 가라앉은 뒤라 그런지, 혹은 들어 주는 사람이 호진이기 때문인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둔 것들은 작게 난 구멍을 따라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람 귀신은 우리 할아버지고, 동물 귀신은…. 삼촌이 키우던 강아지 보리.”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가라앉아 버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느리게 뱉은 말꼬리가 닫히고 또 닫혀도 정인의 예상처럼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보리요? 금색 강아지였나 봐요?”

“아니, 회색 그레이하운드였어.”

정인은 어렴풋이 보리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보호소 문 앞에 네임 택까지 찬 채로 버려져 있었대. 그래서 왜 보리라고 지었는지는 아무도 모르…. 아니 근데 그 씹 새끼는 한겨울에 강아지 버려 놓고 잘살고 있을까? 보리는 죽든 살든 맘대로 하라고 버려 놓고, 자기는 살겠다고 그날도 아가리에 뜨신 밥 처넣었겠지?”

“혀엉…. 그, 그래서 보리는 어떤 강아지였어요?”

정인은 1초 만에 머리끝까지 돌아 버렸고, 그 상태를 알아챈 호진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진짜 똑똑한 강아지였어. 걔만큼 똑똑하고 영리한 강아지는 아마 세상에 다시 없을 거야.”

“그래요?”

“신문 좀 가져다 달라고 하면 바로 가져다주고, 집에 사람 없으면 몰래 간식 훔쳐 먹은 다음에 비닐까지 숨겨 놓고 모르는 척하고…. 개인기도 엄청 많았다? 하이 파이브는 내가 가르쳤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실제로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을 자랑하다 보니 마음이 따뜻하게 부풀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그리고 나 되게 어렸을 때 삼촌네 집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적도 있는데, 보리가 온몸으로 막아 줘서 살았어. 그래서 삼촌이 고맙다고 보리한테 매일 상어연골 주고 그랬는데.”

호진이 웃었다.

“기특한 강아지였네요.”

“그치? 그리고….”

정인은 호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꺼낼 차례였다.

“내가 발현하던 날 떠났어, 나 대신 죽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의 밑바닥에 달라붙은 것을 떼어 냈다. 가슴이 따끔따끔 아팠다.

“…형.”

“아니라는 거 알아. 그래도 그땐 어린 마음에 자꾸 그런 생각만 들더라고. 죽을 것처럼 아프다 깨어나니 멀쩡하게 살아있던 애는 가 버리고 나만 살아났다잖아.”

애써 웃음 지었다.

“마지막 인사도 못 해서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이제 보리는 나를 잊어버린 것 같아. 살아 있을 땐 아무리 멀리서도 보리야 하고 부르면 뛰어왔는데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꿈에 한 번을 나오는 법이 없어.”

“…….”

“할아버지가 되면 사람이든 강아지든 다 그렇게 되나 봐, 다 잊어버리고…. 하루아침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되는 건가 봐.”

동물은 죽으면 천국 입구에서 친구를 기다린다던데.

보리는 과연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먼저 찾아간 할아버지와 어디 좋은 곳에 가서 단둘이 살고 있을까.

당연히 후자이기를 바랐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은 살아서도 너무 많이 했던 강아지이니, 적어도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다릴 필요 없이 볕 좋은 곳에 누워 있다가, 때가 되면 재미있게 공놀이를 하다가, 배가 고파지면 맛있는 것을 잔뜩 먹고 잠들기를.

사는 내내 외로웠던 할아버지와 함께, 너무 어린 내가 미처 위로하지 못했던 그의 시간 위에 새로운 추억을 쌓아 올리며.

“기계로 짜 놓은 프로그램에도 가끔 오류가 나는데, 신의 일이라 한들 오류가 한 번 없을까.”

“…….”

“어쩌다 한 번은 나오겠지. 실수로 길을 잃어서라도 한 번쯤은 이승에 떨어지겠지. 우리 할아버지랑 보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귀신은 한 번쯤 볼 수 있지 않겠어? 나는 그때가 되면, 오류로 떨어진 귀신들한테….”

내내 즐겁게 이어지던 말문이 막혔다. 울컥 차오르는 것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혹시 우리 할아버지랑 보리 본 적 없냐고 물어보고 싶어.”

울지 않으려 열심히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보리의 이야기를 할 때는 간신히나마 참아 낼 수 있던 눈물이, 할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자 기어이 툭 떨어져 호진의 옷깃에 스몄다.

“그럼 이제 무서운 영화는 그만 봐도 될 것 같은데요.”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반짝이는 별 아래에서 듣기에 참 좋은 소리였다.

“한이 있어야 성불하지 못하고 귀신이 되는 거래요. 하지만 보리는 형이랑 친하게 지내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함께 재미있는 일도 많이 했잖아요.”

“…….”

“그러니 아마 꽤 멋진 견생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떠났을 거예요. 원한이라곤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정인은 기어이 그의 목에 매달려 울었다. 그러나 호진은 아는 체하지 않았다. 위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담담히 앞을 보고 걸으며 정인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줄 뿐이었다.

“할아버님도 그런 마음이시겠죠. 예쁜 손주가 아직까지도 이렇게나 당신을 사랑하고 또 기억한다는 걸 아시면, 그저 기쁘기만 하실 거예요.”

그는 정인의 몸을 한 번 추슬러 더욱 단단히 제 등에 붙였다.

“그럼 돌아다니는 귀신들한테 백 번을 물어봐야 소용없어요. 천국에 있는 양반들은 잘 모른다고만 할걸요?”

“하하하.”

일부러 농담을 건네주는 다정함이 좋았다. 정인은 손등으로 뺨을 닦아 내고 웃었다.

“…정말 그럴까?”

“그럼요.”

이미 오래 지나 버린 일이다. 무슨 짓을 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과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단지 다시 한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당분간을 멀쩡히 살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그래야겠다, 호진아.”

정인은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내 안에서 미결의 문영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단지 내가 마침표를 찍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아직 마침표를 찍을 용기는 없었다. 그럼에도 입을 열었다.

“나 이제 무서운 건 그만 볼래.”

다정한 온기에 기대어, 아주 오랫동안 열려 있던 문장 끝으로 별처럼 작은 쉼표 하나를 그려 넣었다.

***

아삭, 상쾌한 소리와 함께 배어나는 과즙은 달고 창가에 스미는 바람은 선선하다. 정말이지 천국이 따로 없었다.

별일 없이도 행복해진 정인은 사과를 오물거리며 웃었고, 그 모습에 애간장이 녹아 버린 호진은 정인의 어깨에 기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원에 드리운 나뭇가지는 사박사박 귀여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두 사람은 소파에 껌처럼 달라붙어 태산이 내주는 과일을 차례로 해치웠다. 그러다 해가 저물어 갈 즈음, 양 팔 한가득 커다란 바구니를 낀 채 부엌을 나서는 태산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아빠. 뭘 이렇게 많이 했어?”

얼른 다가가 잔치 음식을 받아든 호진이 묻자 태산이 대답했다.

“닭 삶은 거랑, 수육이랑 나물 뜯어 무친 거, 녹두전…. 그리고 알리오올리오.”

알리오올리오?

스무스하게 지나가는 메뉴 사이에 스파이가 하나 숨어 있었다. 정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풀벌레 우는 샛길을 가로지르자 멀리 불을 밝힌 집 한 채가 보였다. 벌써부터 시끌벅적한 것이 누가 봐도 잔칫집이었다.

“여기 국수 세 그릇만 내줘 봐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태산이 장난처럼 말했다. 커다란 상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 호진이 아니야?”

“유호진!”

호진의 또래쯤 되어 보이는 청년들이 우와악 소리를 지르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잘 지냈어, 이야, 우와, 으어.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호진의 머리를 만지기도 하고, 옆구리를 찌르기도 했다. 호진은 활짝 웃으며 그들을 꽉 끌어안았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라, 지켜보는 정인의 입가에도 곧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는 누구여? 이거 한입 먹어 봐.”

“안녕하세… 읍.”

그때였다. 소리조차 없이 나타난 노파가 정인의 입에 김치전 한 조각을 물려 주었다.

“헉….”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맛있었다. 정인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잊고 미각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상철이 아들이여?”

그리고 노파는 만난 지 10초 만에 정인의 헤리티지부터 파헤치려 했다.

“…네?”

“아녀? 그럼 누구 아들이여? 미랭이 아들이여?”

훌쩍 늘어난 인구 밀도와 충격적으로 맛있는 김치전, 그리고 노파가 던지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 정신이 혼미해진 정인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어…. 저는 최정훈이랑 유원경 아들인데요.”

“그게 누군디….”

여러 개의 물음표가 정인과 노파의 사이로 떠올랐다.

“아이고, 할머니.”

그리고 갑작스러운 소규모 혼돈사태를 중재한 것은 역시 호진이었다. 그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황급히 달려와 노파의 손을 잡았다.

“안녕히 계셨어요? 여기는 내 애인 되는 사람이여.”

“으응…. 호진이 색시여?”

“아녀, 신랑이여.”

“기여…? 신랑이 둘이여?”

거 신통하네…. 작게 속삭이며 노파는 태산이 만들어 온 수육을 집어 들었다. 호진은 한숨을 쉬며 정인과 눈을 맞췄다.

“결혼하는 친구 소개해 드릴게요, 가요.”

두 사람은 곧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유진아.”

“어?”

호진의 부름에, 어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여자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는 호진과 악수를 나누자마자 정인에게 손바닥만 한 꽃다발을 내밀었다.

“호진이 애인 맞죠? 같이 온다고 얘기 들었어요.”

소담스러운 들꽃이 감색 리본에 묶여 있었다. 정인이 그것을 받아 들자 여자는 구김 하나 없이 웃었다. 호진이 그녀를 소개했다.

“형, 이쪽은 유진이예요. 저랑 세 살 때부터 친구였고…. 저기 족발 들고 오는 애, 해영이랑 결혼해요. 그리고 유진아, 여기는 내 애인. 정인이 형이야.”

“안녕하세요. 이유진이예요.”

유진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최정인입니다. 결혼 축하드려요.”

가족과 호진을 제외한 누군가의 손을 잡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사람들과 접촉하는 게 싫어 어딜 가나 항상 사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유진의 손은 그저 따뜻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곧 그녀는 대단한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또래 중에는 호진이 안 좋아했던 여자애가 없거든요. 도대체 눈이 얼마나 높길래 여자친구 한 번을 안 만드나 다들 궁금해했는데, 정인 씨 보니까 알겠네. 얘 그냥 눈이 너무 높았던 거야.”

“유진아….”

호진이 정인의 눈치를 살피며 진땀을 뺐다. 정인은 꽃다발을 쥔 채 웃었다.

“하여튼 너 좋아하는 개떡 잔뜩 쪄 놨으니까 서울 올라갈 때 좀 갖고 가, 알았지?”

“알았어, 고마워.”

유진은 호진의 팔뚝을 톡톡 두드리고는 제 신랑에게로 달려갔다. 호진은 잔칫상의 빈자리를 찾아 정인을 이끌어 앉혔다.

향토적인 음식으로만 가득한 잔칫상 곳곳에 스파이가 숨어 있는 게 보였다.

“…저거 감바스 아니야?”

“오, 맞아요. 순덕이네서 해 왔나 보다.”

호진은 통통한 새우를 한 움큼 건져 접시에 덜고는 머리와 꼬리를 뗐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정인이 물었다.

“너 개떡 좋아해?”

“네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맘때쯤 만든 쑥개떡이 제일 좋아요. 유진이네가 3대째 떡집 하는데 진짜 맛있거든요? 형도 이따가 꼭 드셔 보세요.”

정인은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나 별명이 개떡인데.”

“예에?”

호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도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별명을 지어 놨어요? 그런 헛소리는 귀담아 두지도 마세요. 형이 얼마나….”

“우리 작은 아빠가 지었어.”

“정말 잘 어울리는 별명이네요.”

그는 손바닥 뒤집듯 스탠스를 바꿨다.

“진짜 귀엽고 창의적이에요, 별명이 개떡이라니 이렇게 독특할 데가…. 아버님께서 센스까지 탁월하신 줄은 미처 몰랐네요.”

“이미 늦었어.”

“…죄송해요.”

호진은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 개떡이 된 거예요?”

“아빠 배 속에 있을 때 내가 그것밖에 안 먹었다나 봐. 그래서 태명을 개떡이로 지었대.”

“으윽….”

호진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하고는 정인을 꼭 안았다. 너무 귀여워요, 부들부들 떨며 하는 말에 정인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정인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잔칫상 곳곳에 들어선 하얀 병이 보였다.

“어? 저거 그거 아냐?”

다짜의짜 병목을 움켜쥐었다. 역시나 라벨에는 ‘공주 알밤막걸리’라고 적혀 있었다. 정인은 입맛을 다시며 막걸리 병을 흔들었다. 호진이 뜨악한 눈으로 정인의 손목을 잡았다.

“형, 이건 조금만.”

“왜?”

“지난번에 기억 안 나요? 학교 앞에서 같이 술 마시고….”

“뭐 별일 있었나?”

정인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막걸리 뚜껑을 뜯었다.

“딱히 진상을 부린 것도 아니고, 크게 별거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 호진아.”

병을 기울이자 노란 막걸리가 콸콸 쏟아졌다.

“알아서 잘 조절할 테니까 걱정 마.”

정인이 픽 웃으며 막걸리 사발을 들이켰다.

***

자리는 순식간에 무르익었다. 동네 사람 모두가 동그랗게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눠 먹고 술잔을 기울였다. 해영과 유진의 결혼 소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인 만큼, 술을 가장 많이 받아먹은 사람은 신랑이 될 해영이었다.

“어으, 잘 살겠습니다….”

신부의 몫까지 전부 받아 마신 그는 해롱해롱 취한 채 어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실시간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예비 신랑을 부축하다 결국 그를 데리고 잔칫상 끄트머리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주인공이었던 신랑과 신부가 휴식 모드에 돌입하자 화제는 자연스레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호진에게 쏠렸다. 정확히는 호진이 데리고 온 ‘애인’에게.

“그러니까…. 호진이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고요?”

그새 맹하게 취한 정인은 입가에 흐른 막걸리를 슥 닦아 내며 눈을 껌뻑였다.

민망함에 진작 영혼부터 죽어 버린 호진은 그 옆에서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쥔 채 말이 없었고, 호진의 오랜 친구들은 신이 나서 정인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흘렸다.

“장난 아니었죠. 여기서 학교 다닌 건 초등학교 때까지가 다지만, 가끔 공주 왔다는 소문 나면 여자애들이 호진이 본다고 유구에서도 오고 신관에서도 오고 그랬어요.”

“맞아요. 얘 유명해면서부터는 무슨 연예인 찍는 카메라 같은 거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수진이 오징어 다리 하나를 집어 정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으응…. 그랬구나.”

정인은 오징어 다리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살 기회를 보고 있던 기태가 물었다.

“그런데 정인 씨랑 호진이는 어떻게 만났어요?”

호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반해서 만나 달라고 졸랐어.”

“넌 가만히 있어, 정인 씨한테 물어봤잖아.”

기태는 가볍게 호진을 무시하며 정인의 앞에 마요네즈 접시를 밀어 주었다.

“이거 찍어 먹어야 더 맛있어요. 하여튼 정인 씨는 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받아 준 거예요?”

“어…. 맘에 안 드는 데가 없는데. 예쁘고, 착하고…. 그냥 다 좋아요.”

친구들이 오오, 하며 눈을 빛냈다.

“그럼 정인 씨가 데리고 살아야겠네.”

“그러게, 여기 둘이도 식 올릴 날짜 잡아야겠다. 그치?”

호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야, 너희들 진짜….”

“그럴까요?”

그때였다. 정인이 초여름 복사꽃처럼 웃으며 호진을 돌아보았다.

“호진아아, 나랑 결혼할래?”

와악 터지는 함성 소리 속에서 호진은 멍하니 정인과 눈을 맞췄다.

취기에 하는 말임을 알면서도 이걸 덥석 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던 정인의 눈이 감겼다. 호진은 잔칫상을 향해 기우는 정인의 몸을 재빨리 받아 품에 안았다.

잔치는 밤이 꽤 늦어서야 끝났다. 마지막까지 남아 자리 정돈을 도와주고 돌아온 태산은 환하게 불이 밝혀진 아들의 방 앞에 멈춰 섰다. 똑똑, 노크를 하자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호진이 문가를 보며 웃었다.

“내년은 돼야 오는 줄 알았지…. 웬일로 벌써 왔대요?”

“아유, 아직 1년이 안 됐나 비지? 좀 더 있다 올 걸 그랬네.”

실없는 농담이 지나갔다.

“정인이는 자?”

호진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은 터벅터벅 걸어가 호진의 침대에 앉았다.

“막걸리를 그렇게 마셔서 탈 안 나려나 모르겠네. 아까 보니까 아주 지르박을 추면서 집에 가드만…. 상배네서 꿀 얻어다 놨으니까 일어나걸랑 타 맥여.”

그러고는 뭘 하는가 싶어 슬쩍 고개를 빼고 호진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았다. 모니터 위에는 웬 통장 잔고가 떠 있었다.

“그건 뭐 하러 틀어 놨어?”

“…그냥.”

호진은 노트북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굉장히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아부지는 내가 언제쯤 장가들었음 좋겠어?”

“그야…. 네가 가고 싶을 때 가는 거지.”

생전 연애 같은 데에는 관심도 없다가 애인을 데려오고, 제 앞으로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살던 녀석이 혼자 통장 잔고를 보고 있는 걸 보니 대충 감이 왔다. 태산은 씩 웃으며 호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정인이한테 장가 들려구?”

“그러고야 싶은디….”

호진은 태산의 품에 파묻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좀 못난 것 같아서.”

“못나긴? 세상에서 제일 잘났구만, 내 아들.”

이렇게나 몸이 커도 아직 태산의 눈에는 조막만 한 아기다. 단단한 등을 도닥여 주자 호진은 아예 태산의 허리를 끌어안고 웅얼거렸다.

“그냥…. 내가 수영도 좀 잘해 놓고 그랬음 얼마나 좋아. 이제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에 없는디 올해 이렇게 망쳐 놓으니까 맘이 영 좋지가 않어.”

“여기서 뭘 어떻게 잘하겠다구 그래, 이만하면 충분히 잘했지.”

안쓰러운 마음에 태산은 금세 속상해졌다.

한창 놀아야 할 시기 전부를 물속에서 보내고, 죽자 사자 매달려 금메달까지 떡하니 따 왔다. 하지만 세상은 제대로 낫지도 않은 어린 것의 등을 떠밀어 물에 처박아 놓고는 왜 더 잘하지 못했느냐며 화살을 쏟아부었다.

앓는 소리 힘든 내색 한 번을 안 해도 스물한 살짜리가 감당하기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속이 타들어 가도 끝내 만류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호진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여기까지라 생각하는 때가 오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접고 떠날 줄 아는 아이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다는 게 뭔 소리여, 가로수길 상가들이 들으면 섭섭해…. 오늘 당장 수영 그만둬도 네 증손주까지 먹고살 만큼은 있으니까 걱정을 하덜 말어.”

힘없이 웃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태산과 호진은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힘들면 언제든 아빠한테 얘기하구, 정 장가가 들고 싶거든 정인이 생년월일시나 좀 알아와 봐.”

“…응.”

태산은 마지막까지 호진을 다독이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호진은 태산이 1층으로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재차 노트북을 열었다. 여러 개의 은행 사이트를 닫자 제일 뒤에 열려 있던 자신의 프로필이 보였다.

기나긴 약력의 끝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아직 조금 더 남아 있는 여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창을 닫았다.

***

“으음….”

침대 위에 대 자로 뻗어 있던 정인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방 안으로 슬그머니 기어든 달빛이 발가락 끝에도 묻어 있었다.

얼마나 잔 건가 싶어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시간은 이제 막 새벽 두 시를 지나치고 있었다. 잔치에 가던 때가 일곱 시 무렵이고, 돌아온 건….

“뭐야, 나 언제 돌아왔지?”

언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알림을 확인했다. 여덟 시 무렵 호진에게서 날아온 문자 한 통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잤나보다.

좋은 꿈 꾸세요♥♥♥

어쨌든 문장 끝에 달린 까만 하트는 언제나처럼 귀여웠다.

꿈 하나도 안 꿨어. 잘 자♥♥♥

마찬가지로 까만 하트를 붙여 보냈다. 그러자 닫혀 있던 방문 너머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곧 호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 잤어?”

“네.”

호진은 터벅터벅 다가와 침대에 앉더니 정인의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열은 없네요. 머리 아프지 않아요?”

“어…. 별로.”

똑같이 필름이 끊겼던 지난번 막걸리 사태 때와 달리 지금은 몸이 가뿐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넌 왜 아직까지 안 자?”

“그냥요…. 그런데 형, 혹시 아까 있었던 일 기억나요?”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막걸리가 맛있었다는 것 말고는…. 나 무슨 실수 했어?”

“…아뇨, 실수 안 했어요. 그냥 친구들이랑 얘기 좀 하다가 집에 와서 바로 잤어요.”

호진은 정인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입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형, 지금 바로 잘 거예요?”

호진이 물었다. 까만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그건 아닌데….”

정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달빛 아래 드러나는 호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곤해요?”

“…그것도 아닌데.”

“몸 컨디션은요?”

“완전 괜찮아.”

“정말요? 그럼 우리 두어 시간만 같이 있을까요?”

호진이 활짝 웃었다. 정인은 내심 기대하며 침대 옆으로 살짝 비켜 호진이 누울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근데 좀, 조용히 해야 할 것 같긴 해.”

“네?”

호진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밑에 아버지 계시잖아.”

“어….”

어색한 침묵 끝에 호진이 입을 열었다.

“그, 별 보러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요. 오늘은 날이 좋아서 예쁜 별 많을 거거든요….”

“…….”

“아니면 차 타고 또 어디 나갈까요?”

“아니, 별 보러 가자.”

순식간에 목까지 빨개진 정인은 황급히 이불을 박차고 나섰다. 호진이 한 품에 정인을 가둬 안으며 쿡쿡댔다.

“아, 저 진짜 다른 데 나가는 것도 좋은데.”

“아니야. 제발 별 보러 가자. 제발 부탁이야.”

“그럼 그럴까요?”

“더 묻지 말고, 좀.”

“하하하.”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호진은 정인의 이마며 코끝에 쪽쪽 뽀뽀하고는 어디선가 커다란 외투 하나를 가져와 입혀 주었다.

“산 위는 조금 추울 거예요.”

바람 샐 틈 없이 여며 준 옷에서 호진의 냄새가 났다. 정인은 벌겋게 익은 얼굴로 호진을 따라나섰다.

호진은 건물 외벽에 달려 있던 초롱불 하나를 떼어 내 어둠 위로 드리웠다. 동그란 불빛이 내려앉은 자리마다 밤이슬 머금은 잔디가 반짝거렸다.

“…산에 가면 고라니 있는 거 아니야?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

정인의 물음에 호진은 낮게 웃었다.

“사람 물고 그러는 동물은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를 무서워했음 했지….”

“소리를 그렇게 지르는데 안 문다고?”

“그럼요. 고라니가 사람 물었단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고, 설령 물려도 제가 물릴 거예요. 형은 도망가서 119 불러 주세요.”

“…싫어. 네가 물리는데 내가 어떻게 도망가. 그냥 같이 죽자.”

정인은 호진의 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하하하하. 그럼 안 되죠, 정 둘이 있을 거라면 같이 살아 나가는 게 낫지 않아요?”

“하여튼 낭만이 없어,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을 하겠다는 거 아냐.”

“…저는 그냥 둘이 알콩달콩 잘 사는 게 더 좋은데.”

걷다 보니 어느샌가 야트막한 개울가였다. 하얗게 내린 달빛이 물결을 따라 반짝이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산 아래에 어우러졌다.

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 앞에 선 호진은 제 바짓단을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정인에게 등을 내밀었다.

“물이끼 껴서 미끄러워요, 저 앞까지만 업어 드릴게요.”

“어…. 응.”

이제 냉큼 그의 등에 올라타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호진은 가볍게 정인을 업었고, 정인은 호진이 들고 있던 초롱을 손에 들었다.

동그란 그림자가 징검다리 위로 드리웠다. 큰 걸음으로 물과 물 사이를 한 번씩 건너갈 때마다 몸이 크게 움직였다.

하지만 둘 중의 누구도 겁먹지 않았다. 호진은 정인을 등에 업음으로써 다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정인은 너른 등에 기대 그의 앞길을 밝혀 주기에 바빠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이제 내려 줘.”

개울을 건넌 뒤, 정인은 내려 달라며 호진의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호진은 아직 정인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지 야트막한 동산의 꼭대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냥 저 끝까지 이렇게 갔으면 좋겠는데….”

“나도 발 있거든?”

정인은 기어이 제 발로 땅에 내려섰다.

어둠이 드리운 동산의 초입으로 들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만들어 놓은 등산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좋았다. 정인이 걱정했던 것처럼 고라니가 튀어나와 호진의 팔다리를 으적으적 물어뜯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평화로운 적막 속을 걷는데,

“형, 이제 잠깐만 눈 좀 감아 보실래요?”

호진이 문득 들고 있던 초롱불을 껐다. 틱, 스위치를 내리자 사방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잠깐, 뭐야. 그거 진짜 불 아니었어?”

“기름 등은 이제 위험해서 잘 안 쓰죠.”

정인은 살짝 배신감을 느꼈다. 손으로 깎은 듯한 전통 문양 장식을 보고 당연히 불도 아날로그적인 방식이리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AA 배터리 2개 들어가요.”

“허, 참.”

호진은 등을 열어 내부를 보여 주었다. 안에는 실제 불의 움직임을 구현하도록 만들어진 불꽃 모양의 전구가 들어 있었다.

진짜 불이 든 줄 알고 개울을 건너는 내내 어찌나 신경썼는지 모른다. 억울해진 정인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다 됐다고 할 때까지 눈 뜨시면 안 돼요?”

호진이 정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알았어.”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 주겠다고 이러나. 피식 웃으며 호진이 이끄는 곳을 따라 걸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지만 호진과 함께 있으니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이제 세 걸음만 더 갈게요. 그다음에 눈 뜨세요.”

“응.”

느린 걸음이 조심조심 정인을 이끌었다. 하나, 둘, 셋.

“이제 눈 뜨세요.”

등이 나무 기둥에 닿았다.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정인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별처럼 반짝이는 호진의 눈동자 뒤로, 아름다운 은하수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가리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탁 트인 자리, 마을 구석구석 밝혀진 가로등이 작게 내다보였다.

빛이라곤 한 줌도 없는 하늘은 칠흑처럼 까맣고, 덕분에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은 별은 더없이 희게 빛났다. 마치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곱게 부숴 밤하늘에 흩뿌려 놓은 것만 같았다.

“…너무 예뻐.”

“그런데요, 형.”

꿈결 같은 풍경 속, 호진이 입을 열었다.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알아차린 정인은 단칼에 그의 말을 잘랐다.

“내가 더 예쁘다느니, 그런 말 할 거면 그냥 가만히 있어.”

“넵…. 여기 앉으세요.”

호진은 풀 죽은 얼굴로 주머니 속에서 보자기 하나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정인은 호진에게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뺨에 닿는 공기는 쌀쌀했지만 집을 떠나기 전 호진이 꽁꽁 여며 준 외투 덕에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하늘만 쳐다보는데, 저 멀리서 별똥별 하나가 기다란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어? 방금 별똥별 떨어졌는데, 봤어?”

“네. 형 소원 빌었어요?”

“무슨…. 0.5초 만에 사라지는데 소원 빌 시간이 어딨어?”

어이가 없어서 묻자 호진은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미리 생각해 둬야죠, 저는 빌었어요.”

“어이없네. 일단 알았어.”

정 룰이 그렇다면 승복하는 수밖에 없다. 정인은 다음번의 별똥별을 기다리며 하나둘 소원을 떠올렸다.

호진이가 다치지 않게 도와주세요, 나에게도 호진이처럼 평생을 걸어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와 보리가 편안히 쉬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삼촌과 주영이 형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조효준 사람 되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우리 큰 아빠는 요즘 바빠 보여요. 항상 무탈하고 편안하도록 도와주세요, 일도 조금만 덜 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작은 아빠….

“어? 또 떨어져요.”

간절히 기도할게요, 부디 나 때문에 다친 마음 낫게 해 주세요.

영원히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아빠는 이제 항상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빌었어.”

늘 텅 비어 있다고만 생각했던 가슴 속이 무수한 소원으로 빠듯하게 차올랐다.

“형, 저기 보이는 게 북두칠성이에요.”

호진은 정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는 고만고만 똑같아 보이는 별을 하나둘 손끝으로 이어 주었다.

“저건 국자 컵…. 저게 카시오페아. 저 사이에 있는 밝은 별은 작은곰자리래요.”

“정말 별걸 다 아네.”

정인은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별 하나 사 줄게, 제일 예쁜 걸로 골라 봐.”

“네?”

농담이 아니었다. 해외로 전지 훈련을 떠나도 어디서든 볼 수 있도록, 별을 하나 사서 호진의 이름을 붙여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웬만하면 좀 잘 보이는 걸로 찍어. 좌표 찾아야 되니까.”

잘 기억해 뒀다가 천문 연구원 쪽에 방향과 시간을 불러 주면 어떤 별이었는지 금세 알아낼 수 있을 테고, 그다음에는 미국 천문대에 인증서 발급을 요청하면 된다. 정인은 착착 계획을 세우며 가장 예쁜 별을 찾아 여기저기로 눈길을 돌렸다.

“음…. 그런 거 필요 없는데요.”

호진이 문득 한쪽 팔을 하늘로 쭉 뻗었다. 딱, 하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기더니 움켜쥔 손을 그대로 정인의 눈가에 가져와 마디를 펼쳤다.

“여기 있잖아요, 제일 예쁜 별.”

“…무슨, 뭐? 네가 아주 제정신이 아니구나.”

오소소 소름이 돋은 정인은 찰싹 소리 나게 그의 등을 후려쳤다. 뭐가 그리 좋은지 호진은 한 대 얻어맞고도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진짠데요.”

“아주 틈만 나면….”

정인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따뜻한 품에 얼굴을 묻었다. 쌀쌀한 밤공기를 막아 주는 가슴에 기대어, 아직은 알쏭달쏭하기만 한 별자리의 이름을 하나씩 되새겼다.

“형.”

뺨에 닿은 가슴을 통해 낮은 울림이 전해졌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형을 만난 순간 여태까지의 인생이 끝났는지도 모르겠다고.”

“뭐? 인생이 끝났다고?!”

“아, 나쁜 방식으로 끝장났다는 게 아니라요.”

깜짝 놀라 올려다보자 호진은 얼른 손사래 쳤다.

“힘들고 아팠던 거, 숨 막히고 싫었던 거…. 많이 버거웠던 거. 그 모든 시간이 형을 만나면서 챕터 하나로 묶여 마무리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정인과 이마를 맞댔다.

“그리고 두 번째 장은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아요. 이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싶어졌는데, 그마저도 형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니까 무겁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더라고요.”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라니, 그게 뭐야.”

정인은 장난스레 웃었다. 호진은 정인을 따라 웃었다.

“그런 게 있어요. 그냥…. 제가 앞으로 더 잘해 볼게요.”

“호진아.”

정인은 무릎을 세워 호진을 끌어안았다.

“ 너의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비는 소원의 내용에 뭔가를 더 잘하는 유호진 같은 건 없어.”

“…….”

“다치지만 마. 나는 정말로 그거면 돼.”

정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호진의 안녕과 행복뿐이었다. 그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대가도 조건도 없이 이 마음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순간,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모든 말이 멈췄다.

지나가는 바람마저 멎어 버린 듯한 고요 속에서 정인은 멍하니 자신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의 행복을 소원하는 것. 그저 상대가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비는 것.

“아….”

별안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이건 분명 정인이 받아 본 적 있는 마음이었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따라가 마침내 마주한 끝자락, 정인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는 모두가 이런 마음이었다면, 나는 도대체 여태까지 뭘 한 거지?

어째서 나의 무게가 그들을 아프게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

사실이라 믿었던 모든 게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 이건 처음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진정으로 그들의 마음을 지키고자 했다면, 최정인은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됐던 거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거였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형.”

호진이 내놓은 첫마디는 감사의 인사였다. 정인이 아직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려주지 못한.

“그 말을 들으니 더 용기가 나요. 절대 다치지 않고 저의 최선을 다할게요. 그리고 더 잘 해낼 거예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 앞에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거구나.

정인은 어설픈 깨달음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정인이 가야 할 길 위로 불을 밝힌 호진은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신이 하는 일이 구원을 내리는 일이라면 형은 제 하느님이고 부처님이에요. 형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호진이 말을 멈췄다.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정인 또한 그와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에 두려울 게 하나도 없어요. 설령 지옥 밑바닥에 떨어진대도, 거기에는 반드시 형이 내린 내 몫의 구원이 있을 것 같아요.”

별이 서서히 물러나고 달이 기울었다. 그 와중에도 정인을 향한 호진의 눈빛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바라보듯 사랑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나도 그래, 호진아. 나에게도 네가 하느님이고 부처님이야.”

밤은 이제 가장 어두운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인은 호진을 끌어안고 웃었다.

“그래도 우리 웬만하면 지옥에는 갈 일 없게 살자.”

곧 동쪽 하늘이 하얗게 밝아올 것을 알았다. 결코 영원하지 않을 어둠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호진의 입술 위에 키스했다.

평생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던 두 갈래의 길이 온전히 맞물리고 마침내 하늘이 밝기 시작했다. 비로소 새날을 향해 나아가는 첫 번째의 아침이었다.

***

이른 아침이었다. 긴 운전을 해야 하는 호진은 눈을 붙이러 방으로 들어갔고, 막걸리의 힘을 빌려 진작 숙면을 취한 정인은 산을 내려온 뒤로도 내내 깨어 있었다.

나무와 풀을 지켜보는 일에 질려 버린 정인은 해가 밝게 떠오를 때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섰다.

복도는 전도유망한 수영 선수가 되기 전의 유호진 어린이가 남긴 흔적들로 가득했다. 삐뚤빼뚤한 획으로 알차게도 적어 넣은 천자문, 유치원생의 실력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정교한 정물화, 환경 사랑 글짓기 대회 초등부 금상 상장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호진을 알고 있는 정인에게는 조금 낯선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유호진의 어린이의 장래 희망이 수영 선수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유호진의 장래 희망 : 우주 비행사>

정인은 뜬금없는 장래 희망 앞에 걸음을 멈췄다.

사인펜으로 직직 그어 놓은 듯 못난 글자. 빛바랜 사진 속에 파란 모자를 쓴 유치원생 유호진이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수영 선수가 되고 싶던 건 아니었구나….”

물론 이 시기의 꿈이 평생의 천직이 될 확률은 현저히 적다. 그럼에도 다섯 살 유호진은 아마도 스물한 살의 유호진을 퍽이나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대도 수영 선수라는 직업은 우주 비행사 못지않게 멋진 직업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섯 살 최정인은 스물두 살 최정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섯 살 최정인의 꿈이 ‘대충 숨만 붙어 사는 대학생’은 아니었겠지.

정인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나무에 가려 아직 볕이 들지 않는 거실은 어두웠다. 그러나 그 옆에 뚫려 있는 태산의 조직 배양실에서는 하얀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 아버님.”

조심스레 다가가 문을 두드리자, 현미경 너머로 무언가를 보고 있던 태산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정인이 일어났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속은 좀 괜찮어? 꿀물 타 줄까?”

“아…. 괜찮아요.”

“막걸리를 그렇게 마셨는데 어떻게 괜찮아, 가만있어 봐.”

태산은 빠른 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가 달그락거리는가 싶더니 월계수 이파리를 띄운 꿀물 한 잔을 내주었다.

“천천히 마셔, 급히 마셨다가 탈 날라.”

“…감사합니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애인의 가족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꿀물까지 얻어 마셔야 할 정도로 취하다니, 이미 이걸로 마이너스 1억 점은 깔고 들어가는 셈이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든 만회해야 할 것 같아, 얼른 꿀물을 전부 마셔 버리고 일부러 문가를 기웃거렸다.

“저…. 구경해도 될까요?”

“그럼. 이리 들어와 앉아.”

태산은 흔쾌히 옆자리를 내주었다.

방 하나 정도의 크기를 예상했지만 내부는 1층 전부를 합친 것만큼이나 넓었다.

정원의 유리 온실과 연결된 통로를 따라 덩굴 식물이 잔뜩 얽혀 있고, 벽면 또한 온갖 이름 모를 식물로 가득했다. 그리고 태산은 현미경으로 비커를 들여다보며 스포이트로 알 수 없는 액체를 한 방울씩 떨어트리고 있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잘 안 나는 놈들을 잘 나게 만드는 중이지.”

그렇게 말하며 유리병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손톱보다도 작은 크기의 뿌리 뭉치가 열 개쯤 들어 있었다.

“기존에 있던 품종을 튼튼하게 만들기도 하고, 귀한 품종을 잔뜩 복제해서 접근성을 높이기도 하고…. 이게 크면 저렇게 되는 거야.”

그가 가리킨 자리에 있는 건, 이파리 몇 장에 수백만 원이 넘는다며 주영이 아침저녁으로 애지중지 돌보는 식물이었다.

“어? 저거 본 적 있어요. 되게 귀한 거라고 들었는데.”

다만 주영의 식물은 어른의 얼굴보다 큰 이파리를 달고 있었다. 태산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같은 녀석일 거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터였다.

“신기해요. 얘도 어릴 때는 이렇게 작네요. 제가 본 건 엄청 컸는데.”

“그렇지? 웬만큼 커질 때까지 한참이야.”

태산이 웃으며 다른 병을 보여 주었다.

“이만큼 크는 데만 해도 두 달은 족히 걸렸지. 그나마도 절반은 적응을 하지 못해서 시들고.”

두 번째 병 안에 든 것들은 훨씬 많이 자라서 뿌리 위로 손가락만 한 이파리까지 나 있었다.

“무늬가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식물일수록 보통은 더 찬찬히 자라. 여기 있는 건 이파리에 흰 무늬가 많이 들어가 있지?”

“네.”

“색소가 없는 부분은 볕에도 약하고 물에도 약해서, 아마 이 녀석은 앞으로 자라는 동안 꽤 고생을 할 거야. 남들이 다 쑥쑥 크는 동안 혼자서만 아주 작은 이파리나 겨우 달고 살게 될지도 몰라.”

그는 작은 화분 하나를 꺼냈다. 흙과 돌 같은 것을 섞어 넣은 뒤에는 식물을 심고 쪼르륵 물을 뿌렸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뿌리는 자라니, 모든 걸 견뎌내고 성체가 되었을 땐 빨리 성장한 녀석들 못지않게 잘 자랄 거야. 그리고 느리게 만들어진 무늬 덕분에 더욱 귀하게 여겨지겠지.”

그러고는 완성된 화분을 정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편하게 키워 봐. 어떻게 키우는지 잘 모르겠다면 호진이한테 물어보고.”

너무나도 작고 여린 식물의 이파리를 손톱 끝으로 살짝 건드려보았다. 미약한 힘에도 으스러질 듯 기울었던 신엽은 손을 떼자마자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잘 키울 수 있을까요? 죽이면 어떡하죠?”

정인은 손에 든 것을 소중히 쥔 채 태산을 올려다보았다. 호진에게 처음으로 식물을 선물받았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절대 키울 수 없을 거란 말 대신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물론 생각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럴 땐 무른 뿌리와 이파리를 잘라 내고 새순이 날 때까지 기다리면 돼.”

그리고 태산은 호진과 꼭 닮은 미소로 정인에게 필요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처음부터 찬찬히, 얼마든 다시 할 수 있는 일이야.”

***

식물의 뿌리가 가득히 차올라 병을 메우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정인아.”

“안녕하세요.”

정인과 상담사는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언제나와 같이 간단한 인사가 이어지고, 상담사는 펜을 들었다.

“한 달은 못 본 것 같은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여기저기 많이 다녀왔어요. 서해안에 있는 섬에도 가고…. 주말에는 공주에도 다녀왔어요. 애인 고향이거든요.”

호진과 함께 보낸 시간을 차례로 떠올렸다. 붉은 노을이 너울거리던 바닷가와 푸르른 신록이 드리운 마을. 마음속에 하나둘 되살아나는 모든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상담사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애인? 혹시 지난번에 말했던 그 사람이니? 가까워지고 싶다던.”

“네.”

정인은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고민하고 망설인 시간이 아까울 만큼.”

수년간 상담을 했지만 이렇게 자진해서 말을 이어 가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호진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 사람인지를 자랑하고 싶어 마음이 들떴다.

“배울 점이 참 많아요. 잠깐 넘어지더라도 금세 일어날 줄 알고, 모두에게 다정하고…. 그 사람이랑 보낸 시간은 늘 즐거웠어요. 이번에 공주에서도 그랬고요.”

호진의 모습을 담은 동상, 따뜻하고 사랑스럽던 호진의 사람들, 함께 바라본 밤하늘, 그리고 태산이 건네준 작고 여린 식물에 이르기까지. 기억이 닿는 자리마다 따뜻한 온기가 어려 있었다.

“나쁜 거라곤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요. 별도 정말 많이 뜨더라고요. 세상에 그렇게 별이 많은 줄 몰랐어요. 그리고 별을 보면서….”

정인은 눈을 들어 상담사를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제가 조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떤 생각인데?”

너무 오래 묵은 불안인지라 단숨에 떨쳐 내기가 어려웠다. 가족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 아래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가족들을 위해 제가 사라져야만 한다는 생각이요.”

묻어 둔 기억들이 낚싯줄에 꿰인 수초처럼 줄줄 따라왔다. 정인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정말로 가족들을 위했다면 저는 그렇게…. 도망쳐선 안 되는 거였어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거죠.”

작은 불안의 씨앗 위로 물이 뿌려지고, 껍질이 부풀었다. 조금씩 싹을 틔우는 감정들의 모습이 너무도 익숙했다.

정인은 이대로 진창에 처박히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살짝만 삐끗해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어쩌면 또 며칠을 우울하게 이불 속에 숨어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고 싶지 않았다. 정인은 목 아래까지 올라온 불안을 겨우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못했던 것 같아요.”

문제가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내가 먼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각오였다.

“이왕이면 고치고 싶어요. 어디가 잘못됐는지를 알고 그것부터 해결하면 천천히 나아지는 거잖아요, 그렇죠?”

“…….”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요. 고칠 수 있긴 한 건지도.”

“정인아.”

상담사가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정말 네가 잘못했니?”

정인은 멍하니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열여섯 살 최정인이, 정말 그렇게 모든 걸 잘못했어?”

시계의 초침이 소리도 없이 돌아갔다. 상담사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고, 그것은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연 것은, 초침이 서너 번쯤 같은 자리를 지나쳐 간 후의 일이었다.

“…그건.”

고작 3분이었다. 정인의 눈앞에는 이미 지옥 같던 시절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 손안에 호진이 쥐여 준 용기가 남아 있었다. 아름다운 섬에서 본 노을과 쏟아질 것 같던 별들이 마음의 테두리를 따라 단단한 껍질을 이루고 있는 듯 느껴졌다.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열여섯 최정인을 눈앞에 불러냈다.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아이였다.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아이가 싫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할 수만 있다면 저 멀리로 영영 치워 버리고 싶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건 언젠가 호진이 던진 물음 때문이었다.

‘최정인한테 조금만 더 잘해 주시면 안 돼요?’

그 정도 보살핌받을 자격은 있는 사람이라 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으니 한 번만 더 그 마음을 알아봐 달라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목소리로 당부했었다.

“아뇨. 아닌 것 같아요.”

선전 포고를 하듯 마침표를 찍었다.

“…저 너무 힘들었단 말이에요.”

간신히 한마디를 토해 낸 정인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 울었다. 6년의 상담 기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계약서만 간단히 전하러 왔어요.”

센터 건너편에 위치한 카페였다. TH그룹에서 나온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호진에게 명함을 내밀었고, 호진은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 그의 직함과 이름을 확인한 뒤 지갑에 보관했다. 곧 호진의 앞에는 서류 봉투 하나가 놓였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

“저…. 부장님.”

회사 앞까지 찾아와 기다렸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잡았지만, 연애를 그만두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던 최현욱 회장의 말에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시 회장님께서 제안하신 조건 중에 제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회장님을 뵌 날에도 직접 계약 거부 의사를 밝힌 거고요.”

“아, 그 이야기를 할 거라고도 전달받았습니다.”

남자는 빙긋 웃으며 호진을 대신해 서류를 꺼내 주었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걱정하는 부분은 빠졌을 거라고 전해 달라시더군요.”

호진은 그제야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전의 계약서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평범한 문장들이 말하는 바는 뻔했다. 한마디로 호진에게 모든 것을 맞추겠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계약서의 첫 장에는 기존 후원사들이 제안하던 계약금의 다섯 배가 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계약서를 찬찬히 읽어 내리는 동안, 남자는 호진의 눈길이 닿는 곳곳을 짚으며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필요한 것을 요청하시면 아무리 늦어도 3주 안에는 집행이 될 겁니다. 계약서에 명시된 부분 외에도 뭐든 상한선 없이 지원 가능하고요. 추가나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 주세요.”

“…왜 저에게 이렇게까지 좋은 조건을 제안해 주시는 건가요?”

호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있던 후원사도 전부 떨어져 나가는 마당에, 갑자기 나타난 대기업이 이토록이나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데에야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미 최현욱 회장과의 미팅에서 싸한 기운을 느꼈기에 더더욱 그 속내가 궁금했다. 호진은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부상 이후로는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를 후원하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호진 선수의 가능성을 사는 겁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올림픽 첫 출전에서 예선 1위, 준결승 1위, 결승 1위를 차지한 선수예요. 그 직후에 부상 때문에 주춤했지만, 결국 올해 대회에서 1위를 하지 않았나요?”

“…….”

“부상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지역 대회에서 1위를 했다면 충분히 다음을 기대할 만하죠. 그리고 우리는 지난 대회에서 사람들이 던진 불필요한 비난을 역으로 이용할 계획입니다. 유호진 선수는 기존에 하던 대로 해 주면 되는 거고, 우리는 선수가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지나가는 데에 우리의 지지와 후원이 있었다는 걸 알리며 이익을 얻는 거예요.”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요?”

호진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두 번 다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런…. 애초에 운동선수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조건으로 계약을 제안하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죠. 혹시 여태까지 그렇게 계약했나요?”

“…….”

“큰 부상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합니다. 물론 좋은 성과를 낸다면 더더욱 좋겠지만요.”

여태까지 호진에게 주어졌던 말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것이 참 고맙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저희가 제시하는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지금 몸담고 있는 매니지먼트사와의 계약을 종료하는 거예요.”

“…네?”

“언론사 컨트롤은 물론이고, 소송 비용과 위약금까지도 저희가 모두 지원합니다. 호진 선수는 몸만 오면 돼요.”

호진은 정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많이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 다시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이러니까 더 욕심이 나네요.”

남자가 웃었다. 그는 계약서를 봉투에 넣어 호진에게 밀어 주었다.

“당장 오늘이 아니어도 좋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고, 언제든 마음이 변한다면 연락 주세요.”

“…네.”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말의 가장 완곡한 표현이었다. 호진은 하는 수 없이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남자가 먼저 자리를 뜨고, 호진은 가방 속에 계약서를 넣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횡단보도 너머에는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드나든 건물이 서 있었다.

신호는 금세 바뀌었고, 호진은 조금 전 남자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건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곧장 코치의 사무실로 향했다. 조금 전 받은 제안에 대해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코치님, 저 호진입니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호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앉으라는 소리도 없이 눈만 들어 호진을 바라보았다.

“주말 지상 훈련 스케줄 미뤘다며?”

“아…. 주말에는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매니저님께 미리 말씀드렸는데요.”

“나는 전달받은 게 없는데. 혹시 너희 둘이 짜고 나 엿 먹이는 거니?”

그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상관없어. 이제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스폰서도 다 떨어져 나갔는데 눈치 볼 게 뭐 있겠니.”

“코치님, 실은….”

가방에 든 계약서를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호진아.”

아직까지도 자리에 앉지 못한 호진은 우두커니 선 채 그를 바라보았다.

“작년부터 올해까지의 일을 쭉 생각하면, 요즘은 내가 너를 망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

“…….”

“이렇게 유약한 아이가 아니었잖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제 그만해도 좋다는 말이 나와도 제일 마지막까지 수영장에 남아 있었지. 부상을 당하고도 경기 준비에 매진했고 운동에 방해가 될 만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호진은 그렇게 살았었다. 인생 전부를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삶의 모든 부분을 잘라 내고 수영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지금 네 모습은 내가 알던 유호진과는 너무나도 달라. 무엇이 널 이렇게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유호진은 죽고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제 너에게 기대하는 게 없어.”

호진은 가방 속에 넣고 있던 손을 빼 아래로 늘어트렸다.

고향에서 만난 친구들의 얼굴이, 끝까지 도닥여 주던 아버지의 손길이, 정인의 말과 웃음이 떠올랐다. 절대 다치지 말라 그 하나만을 당부하던 목소리가 마치 유일한 해답처럼 눈앞을 맴돌았다.

“코치님.”

하다못해 오늘 처음 만난 사람마저도 유호진이라는 사람의 가능성을 말하지만, 그 힘든 시간을 함께 지나온 사람은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고 서운했다. 그러나 이런 말에 다치기엔 이 마음이 너무 값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는 안녕을 지키기 위해, 호진에게는 다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저, 많이 힘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쉬는 날 없이 매일 훈련하던 것도, 항상 수영장의 불을 끄고 혼자 나서던 것도 모두…. 쉽지 않았습니다. 부상을 당한 뒤에 경기 준비에 매진했던 건, 제대로 쉬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어요.”

메달의 개수로 한 해 한 해를 기록했다. 그해에 무엇을 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텅 빈 복도 구석에 서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새벽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지쳤다는 생각도, 힘들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내일의 일정을 그리며 하루를 끝내던.

“이제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가 꿈꾸는 메달 뒤로 남는 것이 어째서 공허함뿐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오로지 승리만을 구하라는 말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쓰임을 다한 기계를 버리듯, 하루하루를 그런 식으로 도려내야만 인정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코치님께서 알고 있는 유호진은 죽은 것 같습니다. 혹시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면 더 확실히 죽여 버릴 거예요.”

그 무자비한 유호진을 죽여야 앞으로의 삶이 있다.

메달의 개수만큼 늘어가는 공허함을 가슴에 담은 채 정인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정인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바람도 분명 그럴 테니까.

“너 아주 정신이 나갔구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더는 지지부진하게 망설이거나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단칼에 결론을 내린 호진은 비웃는 얼굴에 대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키워 주신 노고가 아깝지 않도록, 앞으로도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로써 끝이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이미 등진 길은 다시 돌아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

“…어?”

물조리개를 들고 텃밭을 오가던 정인이 문득 허리를 숙였다. 살랑거리는 이파리 사이에 둥근 열매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와, 미친. 조효준!”

곧바로 효준을 불렀다. 그는 목만 쭉 빼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왜?”

“빨리 와 봐, 이거 진짜 열매 생겼어.”

“어…. 그렇겠지. 열매 나라고 심은 거 아니야?”

아무래도 효준은 썩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직접 밭을 일구고 묘목을 심은 정인에게는 이 설익은 열매 하나가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예뻐 보였다.

정인은 밀짚모자를 고쳐 쓰며 고추 묘목들이 서 있는 쪽을 살폈다. 비록 바람에 쓸려 여기저기 쓰러져 있으나, 대부분의 묘목들이 대견하게도 초록색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비쩍 말라서 그냥 위로만 자란다고 생각했는데,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 이렇게나 많이 자란 걸 보니 말도 못 하게 뿌듯했다. 얼른 사진을 찍어 호진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잠금 화면 위에 알림이 잔뜩 떴다.

“음?”

‘유호진’을 주제로 기사가 나올 때마다 화면에 뜨도록 설정해 놓은 것이었다. 대회에 나간 것도 아닌데 무슨 알림이 이렇게 왔나 싶어, 정인은 장갑을 벗고 텃밭에 주저앉았다.

[단독] 유호진, TH 코퍼레이션과 전속 계약 체결

유호진, 김양선 코치와 결별… 불화설 재점화

‘파리의 연인’ 유호진, TH 업고 LA 올림픽 가나?

(스포츠) 유호진 매니지먼트사 계약 종료, 새로운 회사는 어디?

유호진 연봉 얼마? 하루 만에 유호진 따라잡는 법 (AHT 코인 신규 상장 일정)

“헉….”

“왜, 뭔데.”

어느샌가 다가온 효준이 옆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인은 곧바로 가장 조회 수가 높은 기사를 눌렀다.

[단독] 유호진, TH 코퍼레이션과 전속 계약 체결

파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호진 선수가 기존 매니지먼트사 ‘한양 스포츠’와의 계약을 종료했다. 유호진 선수와 새로 후원 계약을 맺은 TH 코퍼레이션 측은 “선수를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를 설립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한양 스포츠 컨디셔닝 팀 임직원 1인이 함께 움직이게 되었으며, 한양 스포츠 측은 선수와 해당 임직원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러나 TH 코퍼레이션 법무 팀은 “선수가 계약 종료에 따르는 책임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임직원의 이직은 법적 책임을 물을 요소가 전혀 없기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전했다.

“와…. 이거 작업 들어간 거 맞지?”

효준이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댓글 창을 가리켰다.

gse*** : 그렇게 성실한 척하더니ㅋㅋㅋ 결국 돈 보고 가나 보네

113*** : 니도 돈주면 갈거잖아 @@아ㅋㅋ 현실은 연봉 10원만 올려줘도 헐레벌떡 이직할 거면서

han*** : 유호진선수 응원합니다^^

the*** : gse 댓글모음 보니까 유호진 전 회사 알바인가보네요 흠..

호진에 대한 부정적인 댓글이 하나 올라올 때마다 그에 반박하는 댓글이 거의 매크로 수준의 속도로 몇 개씩 달리고 있었다.

“네가 진짜 갈 데까지 가는구나….”

효준이 말했다. 괜히 찔린 정인은 얼른 핸드폰을 내렸다.

“뭐, 왜, 뭐.”

“하긴. 이왕 다이아 수저 물고 났으면 그걸로 애인한테 꿀도 좀 떠먹여 주고 할 수도 있는 거지.”

그 말에 정인은 도끼눈을 떴다.

“어디서 들었어?”

“뭘?”

“얘가 내 애인인 거.”

“아이고, 개떡아. 이 요망한 것아.”

효준이 코웃음 쳤다.

“내가 너랑 똥 기저귀까지 같은 브랜드로 맞춰 차고 자랐는데 설마 그걸 모를까. 그래서 얘 진짜 네가 갖다 꽂은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아닌가, 맞나.”

사실 정인도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장 지금만 해도 현욱과 마주치지 않을 시간을 골라 텃밭에 왔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사이에 현욱에게서 이렇다 할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호진의 거취 문제는 원경의 생일날 본가에 가면서 정훈에게 슬쩍 말을 꺼내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일이 풀려 버리니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삼촌한테 한 번 부탁드리긴 했었어. 바로 잘려서 그렇지…. 이번에는 절대 안 도와주실 거라고 생각했거든.”

“왜?”

“그게…. 나중에 말해 줄게. 지금은 좀….”

차마 효준에게까지 성생활의 이모저모를 까발릴 엄두는 나지 않아 얼버무리자 그는 곧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든가. 하여튼 너 혜원이 파티 갈 거지? 연락 안 받는다고 엄청 속상해하더라.”

유치원부터 쭉 함께 나온 오랜 친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뭐야, 딱 한 번 부재중 전화 남겨 놨길래 왜 했냐고 문자 보내니까 그냥 읽씹 하던데?”

“요새 여기저기 연락 돌리느라 바빠서 그럴걸…. 나한텐 너 꼭 데리고 오라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

혜원도 효준과 마찬가지로 초중고 내내 비교적 점잖게 지내다가 성인이 되고부터 고삐가 풀려 버린 망나니였다. 물론 정인은 작년까지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여는 파티에 참석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건너 건너 아주 대단했다더라 하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할아버님 임기 중에는 그런 거 안 한다며?”

“그걸 믿냐. 난 처음부터 안 믿었어.”

대통령의 외손녀가 되었으니 딱 5년만 죽은 듯 얌전히 살겠다던 게 고작 1년 전의 일이다. 어이가 없어서 묻자 효준이 낄낄댔다.

“1년 쉬었더니 인생이 썩는 것 같대. 어차피 다들 한두 명씩 데리고 올 테니까 너도 갈 거면 유호진 데리고 가든가.”

“그런 데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정인은 며칠 전의 성대한 파티를 떠올렸다. 김치전과 녹두전, 알리오올리오와 감바스가 한 테이블에 놓여 있던.

화기애애한 웃음으로 가득하던 자리, 그저 재미있기만 하던 그 밤을 떠올리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는 일도 썩 괜찮게 느껴졌다. 자신의 오랜 친구들에게 호진을 소개하고, 함께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결심하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다.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삶의 색깔 속에서 정인은 활짝 웃었다.

***

“응, 유영아.”

시동을 끄자마자 유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호진은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는 정인의 방 창문을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

- 호진아, 오늘 뉴스 진짜야? 계약 해지해?

“…응, 그렇게 됐어.”

하루 종일 수십 통의 전화가 쏟아졌다. 아예 핸드폰을 꺼 놓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사이에 정인에게 연락이 올까 봐 차마 그러지 못했다. 호진은 피로가 어린 얼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먼저 말 못 해서 미안해, 상황이 많이 변하니까 정신이 없어서.”

- 미안하다니, 그 말이 더 섭섭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잘됐다 싶어.

“왜?”

- 그냥…. 너무 오래 있었기도 하고, 소청 때 너 욕먹는 거 그냥 보고만 있었던 것도 이상하고. 너 정도면 다른 데도 한번 가 볼 때 되긴 했지. 그나저나 주말에 뭐 해?

“애인이랑 있을 것 같아. 왜?”

- 다음 주에 파티 하나 있는데, 거기에 이적 경험 있는 선수들 몇 명 온다고 들었거든. 너도 같이 가서 얘기해 보면 앞으로 너 대응하는 데에도 좀 도움 될 것 같은데 어때?

솔직히 말하자면 파티고 나발이고 그저 정인과 단둘이 어딘가에 틀어박혀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유영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TH 측에서 커버를 해 준대도, 일정이 있는 곳마다 기자들이 따라다니는 이상 언젠가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당황하지 않고 모두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만한 대답을 내놓으려면 경험 있는 선수들의 조언이 필요하다. 호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다, 생각해 줘서 고마워.”

- 기죽지 말고. 어차피 하루 이틀 떠들다가 다 잊어버릴 일이야.

“…응. 알겠어. 쉬어.”

전화를 끊고 잠시 차 안에 머물러 바깥을 살폈다.

“하….”

골목에 주차된 차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아 보였다. 저 중에 몇이나 기자일까. 한숨을 쉬며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예상대로 몇몇 차에서 낯선 사람들이 따라 내렸다. 빠른 걸음으로 건물 입구를 향해 걸어갔지만, 이미 거기에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유호진 선수, 잠깐만 이야기 좀 가능할까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정말 잠깐이면 되는데요.”

매니지먼트사 없이 붕 떠 있는 상태라는 걸 알고 있는 기자들은 대놓고 호진의 팔을 붙들었다.

사람이 서 있는데 모르는 체할 수도 없고, 이유야 어쨌든 운동을 업으로 하는 입장에서 일반인에게 힘을 쓰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고.

고민하는 사이 차에서 내린 사람들도 호진을 에워쌌다. 결국 그들에게 붙들린 채 도로 한복판으로 끌려 나오고야 말았다.

“계약을 종료한 이유가 뭔가요?”

“정말 김양선 코치와 불화가 있었나요?”

한적하던 골목은 금세 북적였다.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는 게 예의도 아닌 것 같고요.”

“왜 예의가 아니죠? 혹시 불화에 유호진 선수의 책임이 있나요?”

“그건….”

어떻게 대답해도 이상하게 비춰질 만한 질문이었다. 호진은 난처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그런데 멀리서 빠앙ㅡ. 하고 경적이 울렸다. 호진과 기자들은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골목 을에는 새하얀 헤드라이트를 밝힌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차는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 대더니 별안간 속도를 높여 달려왔다.

“어, 뭐야.”

“어?”

먼저 그를 발견한 학생들이 길가로 물러섰다. 차는 길을 막는 사람 전부를 쳐 버릴 기세로 미친 듯이 속도를 높였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호진은 멍하니 차의 헤드라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기자들도 모두 길가를 향해 대피했다. 그리고 차는 곧 호진의 앞에 멈춰 섰다.

“뭐야, 미친 새끼 아니야?”

“뭐 하는 거야….”

웅성대는 틈으로 차주가 문을 열고 내렸다. 호진은 숨을 쉬는 것마저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뭐 해?”

정인이 물었다. 화살처럼 꽂히는 무수한 시선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계약을 체결했다는 뉴스만 떴을 뿐 당장은 뭔가 이루어질 단계가 아니다. 다시 말해, 공식적으로 유호진은 지금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무방비 상태라는 것이다.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결국 스물하나밖에 되지 않는 어린 선수다. 기자들은 당연히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테고, 무례하게 나오든 말든 일단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상 호진은 절대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멀뚱멀뚱 잡힌 채 끌려 나오고 있었겠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얼마 안 됐어요.”

“뭐 따로 말한 거 없지?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더는 세워 둘 필요가 없었다. 정인은 가차 없이 호진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형, 잠시만요.”

그는 몸을 돌려 정인이 노출되지 않도록 막아섰다.

“일단 차에 타 계세요. 얼른 마무리 짓고 갈게요.”

“왜 마무리를 지어야 되는데? 공식 일정이야?”

“…아뇨.”

그 말에 정인은 픽 웃었다.

“공식 일정도 아닌데 무슨 마무리를 지어?”

그때, 지척에서 찰칵 하고 셔터음 소리가 들렸다. 신경질이 난 정인은 소리를 낸 기자에게 다가가 카메라부터 빼앗았다.

“아니, 잠깐만. 학생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디다 대고 반말질이야, 당신 나 알아?”

저지하려는 기자의 손을 쳐내고 제가 나온 사진을 하나씩 삭제했다.

“그 짧은 사이에 많이도 찍었네.”

일말의 거리낌도 없는 태도에 벙찐 기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호진 선수, 지금 소속사만 없다 뿐이지 결국 TH 코퍼레이션 보호하에 있는 거 알지? 기사 쓸 때 참고해요. 저쪽 기자님들도 다 알아 두시라고 전하고.”

카메라를 돌려준 정인은 호진의 손목을 질질 끌어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호진은 눈만 껌뻑이며 정인이 이끄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머지않아 운전석으로 돌아온 정인은 핸들을 쥔 채 씨발, 하고 작게 읊조렸다. 그러고는 기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간 후에야 차를 멈춰 세웠다.

“혀엉….”

씩씩거리는 정인을 보며 호진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를 보니 더는 화를 내선 안 될 것 같았다. 정인은 몇 번인가 심호흡해 화를 가라앉힌 뒤에야 호진을 돌아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 개차반처럼 굴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가 잡으면 쳐 내고, 싫은 소리 같은 건 듣지도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 버리라고.

“앞으로는 좀 못되게 굴었으면 좋겠는데…. 아마 넌 죽어도 그런 짓 못 하겠지.”

하지만 유호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다른 거 안 바랄게, 그냥 너를 아껴 주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잘해 주려고 하지만 마.”

정인은 호진의 볼을 두 손에 넣고 꾹 눌렀다. 하얀 볼이 찐빵처럼 뭉개지는 와중에도 호진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죽어라 정인만 쳐다보고 있었다.

“예뻐 가지고.”

코끝과 입술 위에 차례로 뽀뽀를 쪽 했다.

“그런데 형…. 이 차, 형 거예요?”

“응.”

“언제쯤 샀어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개강하기 직전에 받았어. 그건 왜?”

“혹시 올해 개강하던 날에도 타고 오셨어요?”

“스무고개 해?”

아직도 손안에 갇혀 있는 호진의 얼굴을 조금 더 세게 눌렀다. 볼이 완전히 찌그러져 입술까지 뾰족하게 튀어나온 게 정말 못나고 귀여웠다. 정인은 쿡쿡 웃으며 개강 첫날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랬지. 학교 들어오자마자 정문 앞에서 사고 날 뻔했어.”

꼭 조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 어째서인지 사람들이 벌 떼같이 모여 있었고, 그러다 어떤 미친놈을 칠 뻔했고…. 거기까지 생각하니 간신히 가라앉힌 화가 재차 솟구쳤다.

“아니, 미친 새끼들이 정신 못 차리고 도로까지 나와 있잖아. 신호 받고 들어간 건데 그러다 치기라도 했어 봐, 나야 병원비 물어 주면 그만이지만 다친 사람은 교통사고 후유증 떠안고 살아야 하는 거 아냐? 다치면 무조건 본인 손해인데 왜들 그렇게 생각이 없나 몰라.”

“허억….”

호진이 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놀란 정인은 얼른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왜? 어디 안 좋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우리 운명인 것 같아서요.”

“…갑자기?”

호진은 그대로 정인을 당겨 품에 안았다.

“그날 사실 저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부상당하고 처음 등교한 거라 인터뷰한다고 교문 앞에 사람 많이 모였었거든요.”

“그게 너였어?”

정인은 반짝 고개를 들었다.

“네. 그날도 오늘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밖에 없었는데…. 어디서 미친 차가 나타나서 인터뷰 끊겼거든요. 그때 몰래 도망갔죠.”

“어…. 미친 차라서 미안하게 됐다.”

일부러 삐친 척 호진을 밀어 냈다. 호진은 흐흐 웃으며 정인에게 엉겨 붙었다.

“신기하죠, 그쵸.”

“그렇긴 하네.”

이번에는 밀어 내지 않았다.

“…매번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형.”

그땐 이렇게 행복해질 줄 몰랐어요. 작게 덧붙이는 말에 웃음이 났다. 그야말로 정인이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대답 대신 한 번 더 입 맞추고는 핸들을 잡았다.

“주말에 뭐 해?”

먹자골목이 있는 방향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아…. 친구가 파티 가자고 해서요.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파티?”

공교롭게도 호진의 일정은 정인이 제안하려던 것과 일치했다.

“누가 하는 건데?”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운동선수들 많이 온다고 해서, 그날 만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형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으세요? 저 그냥 약속 취소할까요?”

같은 날짜에 서로 다른 사람이 파티 비슷한 걸 여는 것쯤이야 얼마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유호진 정도 되는 톱클래스 선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돌릴 만한 곳인 데다, 비슷한 급의 운동선수들이 득시글거릴 예정이라면 굳이 더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나도 거기 가자고 하려고 했거든. 그거 아마 내 친구가 하는 파티일 거야.”

정인은 허탈하게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어, 정말요? 그럼 저 무조건 갈래요.”

코앞까지 다가왔던 밥집들이 멀어지자 호진은 토끼 눈을 떴다.

“…그런데 우리 밥 먹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형 배고프다면서요.”

“밥은 이따 먹고 일단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 가는데요?”

정인은 슬슬 붐비기 시작한 도로를 내다보며 대답했다.

“그냥, 뭐 좀 사려고.”

***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보여 주세요.”

멀뚱멀뚱 정인을 따라 걷다 보니 백화점 안이었다. 정인은 명품 브랜드가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서자마자 주위도 둘러보지 않고 어딘가의 매장으로 직행했다. 그러고는 신발이 진열되어 있는 쪽의 끝에서부터 끝까지를 가리켰다.

“너 발 사이즈 몇이지?”

“형, 잠깐만요. 저 신발 많아요.”

정인이 자신의 신발을 사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호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많아도 그냥 하나 더 받아. 44에서 45로 보여 주시면 돼요.”

정인은 눈대중으로 호진의 발 사이즈를 불렀다. 셀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장 뒤쪽으로 사라졌다.

“형….”

“지난번에 준 팔찌 아직 가지고 있지? 그럼 그건 됐고.”

정인은 손가락을 넓게 펼쳐 호진의 어깨 끝에서부터 한 뼘씩 너비를 가늠하더니 혀를 끌끌 찼다.

“…기성복은 안 되겠다. 상의는 그냥 다른 데로 가자.”

그러는 사이 셀러들이 신발을 들고 다가왔다. 호진은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아 새 신발을 하나씩 발에 끼워 넣었고, 정인은 맞은편에서 음료를 쪽쪽 빨며 호진이 신발을 신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옆에 거 한 번 신어 봐, 예쁘네.”

“네….”

호진은 순순히 정인이 고른 것을 집어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산할 때 제 카드를 내 버릴 작정이었다.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로퍼를 신고 정인을 향해 발을 쏙 들었다.

“예뻐요?”

“응.”

정인은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셀러를 향해 말했다.

“방금 전에 신어 본 거 전부 살게요. 결제는 지난 번에 두고 간 카드로 해 주세요.”

“네에?!”

아니 뭐 그딴 방식이 다 있단 말인가. 카드를 내밀 기회조차 잡지 못한 호진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정인을 바라보았고, 셀러들은 당연하다는 듯 호진이 신었던 신발 전부를 포장해 쇼핑백에 담아 내밀었다.

“아니, 잠깐만요. 이거 제가 계산할게요.”

“이걸 왜 네가 계산해? 내 취향대로 너 입히겠다는 건데.”

정인은 발걸음도 가볍게 매장을 나섰다. 호진은 낑낑대며 쇼핑백을 전부 들고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걸음은 시계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브랜드의 쇼윈도 앞에 멈춰 섰다. 시계판 위에 박힌 보석들이 조명을 받아 정인의 뺨 위에 찬란한 빛그림자를 남겼다.

“혀엉….”

부족하게 자라지는 않았지만 성격상 이런 사치품을 즐긴 적도 없다. 이미 5초 신발 사재기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충격을 받아 버린 호진은 허옇게 질린 안색으로 애원하듯 정인을 불렀다. 그리고 정인은 유리장 너머의 시계를 슬쩍 들여다보다가 매장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섰다.

“저 밖에 있는 거 보고 싶은데요.”

판매용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유리장 안의 시계를 내 달라 부탁하고는 호진을 향해 말했다.

“벌써부터 이렇게 일일이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

아직 한참은 더 남았다는 듯한 투였다.

정인이 물건을 구입하는 과정은 상당히 심플했다.

셀러가 제품을 추천하면 시계든 옷이든 일단 호진의 몸에 붙여 보고, 사이즈가 맞다 싶으면 곧장 포장을 맡겼다. 가격 같은 건 일절 묻지 않았고, 셀러들도 정인에게 따로 금액을 알리지 않았다.

“효준 씨 잘 지내시죠? 괜찮은 제품이 몇 점 들어왔는데 요즘은 통 만날 기회가 없어서요, 하하하.”

그리고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매장 직원이 정인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직급이 높을수록 더더욱 정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 거의 떠받들다시피 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정인은 마치 왕처럼 대우받으면서도 결코 오만하게 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똑바로 말하면서도 적당한 예의를 지켰고, 호진을 케어해 주는 직원에게는 잊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호진을 괴롭히던 기자들에게 하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찾으셨다고 꼭 전할게요. 오늘 많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남자는 여태까지의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정중한 인사를 건넸고, 정인은 호진의 두 손 가득 쇼핑백을 쥐여 주고는 매장을 나섰다.

“팔찌 하나 볼래?”

“형.”

건너편의 쇼윈도를 보며 스치듯 하는 말에, 호진은 얼른 정인의 앞을 막아섰다.

“이미 선물 많이 해 주셨어요, 이제 정말 더는….”

“응, 알았어. 그냥 보기만 해.”

정인은 가볍게 호진을 떠밀어 쥬얼리 매장으로 들여보냈다. 그러고는 셀러를 반걸음 정도 앞선 채 찬찬히 쇼케이스 너머를 살폈다.

“공주에서 말야, 우리 같이 개울 건넜던 거 기억나?”

“네.”

문득 묻는 말에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왜 나 업고 건너간 거야?”

“그야…. 당연한 일이니까요. 어둡고 추웠잖아요.”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설령 훤한 대낮이래도 정인의 발이 젖는 건 싫은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이라면 어떻겠는가.

“저는 그 길을 수천 번도 더 지나다녔어요. 형을 업고 건넌다 해서 특별히 힘들 것도 없는데, 굳이 형이 다칠 가능성을 만드는 건 바보 같은 짓이죠.”

“똑같은 거야.”

정인이 피식 웃으며 쇼케이스 안쪽의 몇몇 제품을 가리켰다.

“나를 업고 가는 게 네게 딱히 힘들지 않은 것처럼, 이런 물건 몇 개쯤 사 주는 것도 내게는 큰일이 아니야.”

이윽고 호진의 손목 위로 다이아몬드 팔찌가 감겼다. 정인이 눈을 들었다.

“당장 빌딩을 쥐여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래서 평생 어떡하려고 그래?”

“평생…이요.”

‘평생’이라는 말에 꽂혀 앞에 어마어마한 게 지나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호진은 헤벌쭉 웃었다.

“그러니까 제발 마음 편하게 받아. 이왕 돈 많은 애인 뒀으면 벗겨 먹을 줄도 좀 알아야지…. 이거 전부 주세요.”

세 개의 팔찌를 차례로 채워 준 정인은 고민하지도 않고 모든 제품을 결제했다. 그러더니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심드렁하게 말했다.

“근데 팔찌까지 할 거 생각하니까 아까 그 시계는 좀 별로인 것 같아.”

“그럼 가서 결제 취소하고 올게요.”

“굳이 그럴 필욘 없고.”

정인은 아무 생각 없는 병아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 산 건 나중에 정장 입을 일 있으면 쓰고, 파티에 하고 갈 건 내 집에 있는 것들 중에서 고르자.”

“…….”

호진이 대답을 않자 정인은 한숨을 쉬었다.

“웬만하면 순순히 좀 업혀 줄래? 개울 앞에서 입씨름하다 날 새겠어.”

“…네. 그렇게 해요.”

호진은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허허 웃었다.

“이제 집에 갈까요….”

“잠깐만. 저 이것도 보여 주세요.”

그때, 정인이 실처럼 가느다란 팔찌 하나를 가리켰다. 호진의 사이즈라기엔 조금 작아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자리에서부터 시작해 이음새의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꽤 마음에 드는지 작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예쁘네요. 이건 선물 포장 부탁드려요.”

당연히 정인 본인의 것이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잠금장치까지 확인한 정인은 착용해 보지도 않고 포장을 부탁했다.

“형이 할 거 아니에요?”

“아니, 선물하려고.”

건들면 툭 끊어질 듯 얇고 고운 팔찌는 이내 박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누구한테요?”

상자 귀퉁이에 붙은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정인이 피식 웃었다.

“…우리 작은 아빠.”

어쩐지 그 얼굴이 조금 서글퍼 보였다.

***

매년 원경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무엇을 줘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에, 1년 내내 이것저것 사들이면서도 결국 진짜 마음에 드는 선물을 찾지는 못하고 늘 엉뚱한 선물만 왕창 부치곤 했다. 이따금은 EMS 비용이 선물값보다 많이 나오는 해도 있었다.

“…또 쌓였네.”

손수건 한 장, 만년필 한 자루, 커프 링크스 한 세트, 캥거루 인형과 이상한 모양의 엽서.

원경이 생각날 때마다 작은 물건들을 모으다 보니 올해도 쓸데없는 쇼핑백만 잔뜩 쌓였다. 물론 오늘 산 팔찌도 그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다.

“형, 여긴 어디예요?”

호진은 오피스텔에 들어서는 내내 겁먹은 눈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인은 창가에 드리운 블라인드를 올렸다.

“자취방이라고 해야 하나, 집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내 집이야. 오래 살진 않았지만.”

귀국하고 두 달 정도를 살다 나온 게 고작이라 그런지 아직도 집 여기저기에 새 가구 냄새가 남아 있었다.

정인은 호진을 데리고 드레스 룸에 들어섰다. 아일랜드 서랍의 유리 안쪽으로 와인더 여러 대가 보였다.

“음…. 이거 한 번 차 봐.”

신중한 고민 끝에 정인이 집어 든 것은 올 초 현욱에게 선물받은 시계였다. 호진은 커다란 손으로 솜씨 좋게 시계의 밴드를 조였다.

“어때요?”

“예뻐.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정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취향으로 세팅된 호진을 끌어안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집에서 혼자 오래 산 거예요?”

“아니. 두 달도 안 살았어. 귀국하자마자 좀 지내다가 학교 앞에 있는 건물 사서 들어간 거거든.”

“…건물을 샀다고요?!”

평온하게 앉아 있던 호진이 펄쩍 뛰며 물었다.

“우리 사는 건물? 그거요?”

“응. 말 안 했나?”

“안 했죠. 그게 형 거였다고요?”

정인은 한쪽 눈썹을 찌그러트리며 호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네 방이 어디서 나온 줄 알았는데?”

“아니, 그야…. 저는 부동산이랑 계약했으니까 당연히 따로 주인이 있는 줄 알았죠.”

“계약서 쓰면서 임대인 이름 안 봤어?”

“…….”

“잠깐, 너 거기 월세 얼마인지는 알아?”

“그냥 자동 이체 걸어 놔서….”

호진은 고개를 저었고, 정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진짜 사기당해. 도장 찍으란다고 아무 데나 찍고 그러는 거 아니야.”

“흐으…. 이제 조심할게요.”

그는 바보 같이 웃으며 다시금 정인을 끌어안았다.

“…저는 왜 이렇게 나무꾼 같기만 할까요.”

“웬 나무꾼?”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인은 호진의 품에 완전히 기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헤드라이트가 새까만 세상 속을 별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형, 외국에 오래 있었어요?”

“응. 6년 동안 쭉 호주에 있었어. 한국에는 올해 처음 들어온 거고.”

“헉, 유학 다녀온 거예요?”

“글쎄. 그걸 유학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네.”

정인은 어렴풋이 호주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불과 반년 전까지 지내던 곳인데도 딱히 기억할만한 게 많지는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시간을 그저 견뎌 내기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대단하게 한 건 아니야. 글자 그대로 숨만 쉬면서 살았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주었던 상처가 생각나서. 차마 마주 볼 용기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버겁고 힘들어서. 나 혼자 살겠다고 그런 선택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싶던 열여섯 최정인이 전부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참으로 무책임하고 한심한 선택이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힘들진 않았어요?”

그리고 호진은 어김없이 제일 먼저 정인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열여섯이면 너무 아기인데…. 저는 고작 공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것마저도 조금 힘들었거든요.”

“너는 열네살에 집 떠난 거잖아.”

“겨우 두 살 차이면 그게 그거죠.”

“…그런가.”

정인은 호진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웃어 버렸다.

“너도 그만큼 힘들었어?”

“네. 무지 많이요.”

모양만 다를 뿐 결국 크기는 같았던 외로움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두 사람은 마치 한 덩어리가 된 것처럼 달라붙어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왜 그렇게 먼 나라로 갔던 거예요?”

“…납치당한 거 말고도 힘든 일이 많았거든.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정인은 깊이 숨겨 둔 이야기의 한 조각을 꺼내 들었다. 보여 주고 싶은 부분까지만을 보여 줘도 더는 조르지 않을 사람임을 알고 있기에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때 가족들한테 크게 상처를 줬는데…. 그걸 견디는 게 너무 힘들었어.”

심장에 박힌 가시 같은 화제였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그대로 혈관이 찢겨 죽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보리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 밤처럼, 오히려 조금 가볍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은 일이야. 비겁한 변명이라는 것도 알아. 그래도….”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전부를 드러내는 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해낼 수 있게 될까. 정말 그런 날이 올까.

“그때는 정말로 그게 최선인 줄 알았어.”

열여섯 최정인을 위한 생애 최초의 변론이었다.

***

마리나에 정박한 크루즈가 마침내 갱웨이를 내렸다. 우르르 쏟아져 들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온 효준은 곧바로 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개떡이 어디야?”

- 거의 도착했어. 너는?

“나야 진작부터 대기 타고 있었지. 근데 사람 너무 많아서…. 괜찮겠어?”

1년간 파티를 열지 못한 혜원의 한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규모였다.

할아버님의 임기 중인 만큼 제가 대놓고 나서지는 못하고, 일종의 바지 사장 느낌으로 초등학교 동창을 꼬신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 친구의 유흥 사랑이 혜원과 효준에게는 감히 비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영조가 개입한 거라서 오늘 좀 더럽게 놀 것 같아.”

기껏해야 친구 몇몇에 동반자 한둘 정도가 더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배우에 아이돌에 운동선수에, 얼굴 좀 알렸다 싶은 SNS 스타까지 전부 가세해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효준이야 딱히 불편할 게 없지만,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정인이 걱정이었다.

“좀 별로면 혜원이한텐 내가 알아서 말할 테니까 그냥….”

“얼마나 더럽게 노는데?”

누군가 톡톡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본 곳에는 정인이 서 있었다. 호진과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선배. 오랜만에 뵙네요.”

“어어, 네. 안녕하세요.”

호진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효준은 얼떨떨하게 손을 맞잡으며 그를 스캔했다.

촌스럽게 큰 로고나 패턴이 없어 얼핏 보면 그저 단정해 보이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이 전부 명품이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최정인의 세팅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호진 씨, 잠깐 시계 좀 볼게요.”

“네? 네.”

호진은 순순히 손목을 내놓았고, 그가 착용한 시계의 정체를 확인한 효준은 곧장 정인에게 삿대질을 했다.

“와, 이거 내가 그렇게 달라고 할 땐 콧방귀도 안 뀌더니! 애인 생겼다고 이걸 홀라당 줘 버리냐?!”

“사람 앞에 세워 두고 무안하게 무슨 짓이야. 손가락 안 내려?”

정인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한 표정으로 효준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애인 쉴드부터 나와?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20년인데?!”

“20년은 무슨…. 그중 25%는 한글도 제대로 못 쓰던 시절이었고, 50%는 자의식도 없었어.”

“평생의 참된 우정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네, 인성 터진 것 좀 봐….”

와아, 와아. 어이가 없어 감탄사만 연발하면서도 효준은 정인이 브릿지의 턱에 걸리지 않도록 팔을 살짝 잡아 주었다.

머지않아 갱웨이가 올라가고 배가 출발했다. 갑판은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비교적 이런 자리에 자주 나오는 효준을 알아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네고, 대한민국 국민 전부에게 알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호진 또한 무수한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정인에게 눈길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저 사람은 누군데?”

“몰라…. 처음 봐.”

귀국한 지 이제 겨우 반년을 넘긴 정인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한번 툭 건드리기만 해도 정인이 ‘그 대단한’ TH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사실은 금세 모두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어차피 오늘 밤 안으로 일어날 일이지만, 바람을 맞더라도 아군을 조금 만들어 둔 뒤에 맞는 편이 유리할 것 같았다. 효준은 호진에게 속삭였다.

“호진 씨, 우리 같이 있으니까 정인이한테 눈길이 너무 쏠리는데…. 이따가 분위기 좀 정리되면 만나러 올래요? 안에 들어가 있을게요.”

“네, 그렇게 할게요.”

호진은 씩 웃으며 정인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친구들 만나고 올게요, 이따 봐요.”

“응. 이따 봐.”

다정히 마주 보는 시선에서 꿀이 줄줄 흘러내렸다. 효준은 끝까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커플을 간신히 떼어놓고 캐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저만치서 정인아아악,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말도 안 돼…. 진짜 정인이 맞아?”

“잘 지냈어?”

혜원은 정인을 발견하자마자 터트릴 듯 꽉 끌어안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얼굴을 확인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도 안 나…. 정말이지 여전히 잘났구나, 내 새끼.”

“얘가 왜 네 새끼야? 아버님 두 분 멀쩡히 살아계시는데.”

“너는 초 치지 말고 딴 데 가서 놀아, 효준아.”

그렇게 말하며 혜원은 예고도 없이 정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야, 장혜원. 그렇게….”

깜짝 놀란 효준은 그를 저지하려 했다. 그때, 환한 불빛을 입은 정인이 문득 효준을 돌아보았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시선뿐이었다. 정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효준을 향해 웃었고,

“…….”

덜컥 마음이 놓인 효준도 정인을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누군가 곁을 스쳐 가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던 소년은 아무래도 영영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효준과 눈을 맞춰 오는 것은, 그 까마득한 어릴 적부터 효준이 알고 있던, 바로 그 최정인이었다.

***

한편 호진은 유영을 찾기 위해 거대한 갑판을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어디라고?”

- 옆에 AED 있어.

“어…. 내 옆에도 하나 있는데, 아니다. 두 개네.”

평생 운동만 하고 사느라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호진이나 유영이나 결국 마찬가지였다. 정작 파티에 와서도 그들은 사람의 무리보다도 사물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 무슨 갑판이 이렇게 넓어? 이 정도 되는 크루즈선 있으면 전지 훈련 갈 때마다 기구 좀 실어 놓고 오픈 워터 하면서 근력 같이 조지면 좋겠다.

“하하하, 재밌긴 하겠네. 그런데 배로 가면 어딜 가더라도 편도 일주일 이상 아냐?”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선수부를 향해 걸었다. 그러는 동안 호진을 알아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넸다.

“어, 유호진 선수 아니세요?”

“아…. 유영아, 나 잠시만. 안녕하세요.”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마주 인사하며 걷다 보니 먼발치에 손을 흔들고 있는 유영의 모습이 보였다.

호진은 진땀을 빼며 유영에게로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내일이나 돼야 만나는 줄 알았네….”

“그러게, 나도 이렇게 큰 데일 줄은 몰랐어.”

유영은 한숨을 쉬며 곁의 선수들에게 호진을 소개했다.

“수영은 다 알 거고…. 여기는 펜싱 김승혁 선수, 피겨 이정아, 이진욱 선수, 사격 김규희 선수, 태권도 임선주 선수.”

“안녕하세요. 이거 무알콜 칵테일인데 한 잔 드실래요?”

파티에, 파티에 의한, 파티를 위한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가 수더분한 운동선수들끼리 모이니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이 샘솟았다. 호진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들이 내어 주는 칵테일을 받아 들었다.

“이번에 TH 코퍼레이션으로 들어가신다면서요?”

“아…. 그렇게 됐어요.”

“전에 회사랑 무슨 문제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호진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고, 승혁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넌지시 물었다.

“…한양 스포츠 원래 좀 말 많지 않나요?”

“맞아,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다른 선수가 옆에서 거들었다.

“스폰서랑 선수 사이에서 커미션 챙긴다던데. 뭐 그냥 소문이긴 하지만요.”

“그럴 분들은 아니에요. 금전적인 문제로 이적을 결심한 것도 아니고요.”

호진은 얼른 그들을 변호했다.

“단지 지도부와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서였어요.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어차피 쫑난 거면 한번 알아봐서 나쁠 건 없잖아요. 커미션까지야 알아볼 방법이 없다 쳐도 인센티브 같은 건 제대로 들어왔는지 확인만이라도 해 보세요.”

“맞아요. 올림픽 한번 나갈 때마다 수명이 10년은 갈리는 것 같은데, 엄청난 대우까지는 안 바라도 계약서에 든 것만큼은 제대로 받아야죠.”

금전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선수들은 하나같이 도인이라도 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런 일이 많나요?”

“그럼요, 말도 안 되게 많죠. 같은 국대끼리도 잘 모르는데…. 외부에 드러나는 건 빙산의 일각 수준이에요. 이런 쪽으로는 어두운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까 따로 관리해주는 사람 없으면 그냥 막 채가는 것 같아요. 죄책감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운동 외의 일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아 잘 모르고 있었다. 연령대가 높은 선수들이 너도나도 내놓는 경험담을 주워들으며 호진은 10초에 한 번씩 경악했다.

한창 그렇게 누가 더 많이 떼먹혔냐를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워 가는데,

“호진아!”

등 뒤에서 누군가가 호진을 불렀다.

“어? 혜나 안녕.”

“너도 여기 있었어?”

그녀는 호진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선수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호진은 그들에게 혜나를 소개한 뒤 잠시 양해를 구하고 무리를 빠져나왔다.

“오랜만이야, 혜나야. 지난번에 대회 이후로 거의 처음이지?”

“그치.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하냐?”

“미안해. 요새 이래저래 좀 바빠서.”

혜나는 끌끌 혀를 차며 호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 친구들이랑 인사 한번 해. 너 궁금하다는 애들 되게 많아.”

“어….”

호진은 선수들이 모여 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서 다녀오라며 호진의 등을 떠밀었다.

“가서 인맥 좀 많이 만들어 오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혜나와 함께 갑판을 가로지르는 동안 걸음걸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연예인이었다. 혜나는 아주 익숙하게 그들에게 인사하며 캐빈으로 들어섰다.

“별별 사람들 다 와 있어. 장인겸 대통령 외손녀랑, 아이텍 차영조랑…. 지난번에 말한 세영 금융 그룹 효준 오빠 알지? 그 오빠가 TH 후계자까지 데리고 왔잖아. 넷이 어릴 적부터 친구였대.”

“그래?”

“이런 데 한 번도 안 나와서 개찐따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까 진짜 잘생겼더라고…. 아, 저깄다. 효준 오빠 옆에.”

늘 그랬듯이 재벌가의 사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호진은 아무 생각 없이 혜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웃음을 터트리는 정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혜나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최정인이래. 어떻게 저 오빠는 이름까지 예뻐?”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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