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숨은 시다 3권-Chapter 2.-Kiss me goodnight with your sour breath (2) (4/8)

당신의 숨은 시다 3권

지은이│오락

펴낸곳│비욘드

투고메일│[email protected]

ⓒ 오락, 2022

이 책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로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hapter 2.

Kiss me goodnight with your sour breath (2)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앉았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에 파묻혀,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다 먼저 물러난 것은 정인이었다.

“아, 잠깐….”

작은 틈을 남겨 둔 채 서로에게서 떨어진 사이였다. 급히 내뱉는 말을 전부 집어삼키며, 호진이 가느다란 목을 끌어당겼다. 곧 점막이 거칠게 비벼지며 혀끝이 맞닿았다.

“…흡.”

금방이라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숨을 참으려 하면 호진의 손이 등을 살살 쓸어내리고, 그 손길이 낯설어 허리를 바로 세우면 기다렸다는 듯 혀가 섞여 들었다.

도망칠 곳도 나아갈 곳도 없었다. 정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하아….”

뭐라 형용할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빈틈없이 맞물려 있던 입술이 멀어지면 곧 다가올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서로를 찾으며 서툴게 달라붙을 땐 마치 강아지풀에 찔리기라도 한 듯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형.”

쪽, 소리가 나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 맞춘 호진이 정인을 불렀다.

그새 소나기가 지나갔는지 사위는 어느샌가 고요한 침묵 속이었다. 정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웃음기 하나 없이 이쪽을 보고 있던 호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발끝에서부터 따끔한 작열감이 올라왔다. 히트 사이클의 통증을 만분의 일쯤으로 축소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

어느샌가 코앞에서 넘실거리고 있는 알파의 페로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놀란 정인은 불에 덴 듯 호진을 밀어 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나 지금 뭐 한 거지?

뒤늦게 몰아치는 현실감이 얼얼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자꾸만 몸이 기울었다.

“괜찮으세요?”

호진이 주저앉는 몸을 받쳐 주었다.

“응, 괜찮아. 괜찮으니까….”

정인은 호진을 밀어냈고, 그는 얌전히 정인이 밀어내는 방향으로 물러나 앉았다.

“…….”

알파와 이런 식으로 접촉해 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그게 싫지는 않았다. 세심하게 페로몬을 조절해 준 호진 덕분에 몸에 무리가 가지도 않았다. 딱히 나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인의 마음속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두려움 하나가 자라나고 있었다.

“…미안해, 실수였어.”

알파의 페로몬이 두려운 게 아니다. 지금 정인은 유호진이라는 사람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저는 실수 아니었어요.”

그러나 호진은 단단한 목소리로 정인을 붙들었다.

“형, 저는….”

“미안해, 호진아.”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정인은 단칼에 그를 잘라 냈다. 저 말을 듣고 나면 이 사람과의 관계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된 다음에는 돌이킬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정말 미안해.”

호진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사춘기 애새끼도 아니고, 나이는 처먹을 대로 처먹어 놓고 섣부른 충동을 참지 못해 기어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나 이제 집에 갈게. 오늘 고마웠어.”

연거푸 사과하며 물웅덩이 위로 걸음을 뗐다.

“신발 다 젖어요.”

호진이 정인의 손목을 잡았다.

이 순간까지도 그는 고작 정인의 신발이 젖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

그 말에 뜬금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정인은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았고, 지켜보던 호진은 이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어떻게 가시려고 그래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시잖아요.”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정인은 불현듯 상담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왜 그 사람과 더는 가까워질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거니?’

‘싫어요, 가까워지는 거.’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미련하도록 착한 사람이 끝없이 부어 주는 진심을, 이 고운 마음을.

그러나 늘 모르고 싶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내고 싶었다.

‘왜냐면, 그 애도….’

결코 내릴 수 없을 것만 같던 답이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 눈앞까지 밀려들어 와 있었다. 기어이 모습을 드러낸 해답 앞에 정인은 숨을 죽였다.

“데려다드릴게요, 가요.”

왜냐면, 그 애도.

그 애도 분명, 언젠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로 인해 슬퍼질 테니까요.

올라오는 차 안은 온통 적막으로 가득했다. 호진은 운전을 하면서도 간간이 고개를 돌려 정인의 기색을 살폈다.

“…….”

정인의 눈시울은 내내 붉었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따라 시시때때로 물안개 같은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마침내 떨어질 듯 고일 때가 되면, 그는 급하게 눈을 깜빡여 눈물을 도로 삼켜 버렸다. 많이 해 본 사람 같은 솜씨였다.

“다 왔어요.”

익숙한 건물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정인은 차마 호진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인사했다.

“…고마워, 갈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뭐가 그리도 마음에 걸리는지, 정인은 끝끝내 실수였다며 오늘의 일을 지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호진이 느낀 그 순간에 거짓 따윈 없었다.

정 혼란스러운 거라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정리하도록 배려하는 게 백번 맞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보내선 안 될 것 같았다. 기어이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내렸다.

“형.”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간 정인의 걸음은 호진의 부름에 어김없이 멎어 들었다. 호진은 젖은 거리를 한달음에 건너갔다. 역시나 정인은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이 바로 정인과의 관계를 판가름할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는 것을.

0.01초의 차이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바닥에서 평생을 보냈다. 목표 하나가 정해지면 모든 변수를 고려해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고 행하는 것이 유호진의 일이었다.

호진은 늘 해 왔던대로 순식간에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마침내 하나의 답을 찾아내는 것은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영원히 어떤 사이로 남자는 게 아니에요.”

“…….”

“지금 당장 결혼을 하자는 것도 본딩을 하자는 것도 아니에요.”

꾸며 낸 행동이나 번지르르한 말로는 절대 곁을 내주지 않을 사람이다. 지금은 무조건 직구로 밀어붙여야만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저는….”

“…….”

“형의 스물둘에 제가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고작 키스 한 번에 그런….”

정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 죽어 가는 눈을 하고서도 빳빳하게 가시를 세웠다.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그냥 실수였다고 했잖아.”

“그럼 한 번 더 시험해 봐요.”

그러나 호진도 지금만큼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한 번은 실수여도, 두 번부터는 아닐 테니까요.”

조심스레 걸음을 뗐다. 다행히도 정인은 도망치지 않았다.

“내키지 않으면 피하세요. 그리고,”

싸늘하게 식은 뺨을 감싸며 비 내리는 처마 아래 사이를 좁히자, 패악을 부릴 줄 모르는 미인이 순한 눈을 들었다. 그 안타까운 눈망울을 마주 보며 허락을 구하듯 속삭였다.

“이번에도 잘 모르시겠으면, 조금 더 기다릴게요.”

다만,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이 비가 어서 멎어 주기만을 바랐다.

***

얼마든 피할 수 있었다. 그만두라 말하면 깨끗하게 물러나 줄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더 이상 호진이 오해하지 않도록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는 걸 충분히 알면서도, 실은 피하고 싶지가 않았다.

“…….”

다가오는 입술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성급하게 밀어붙이거나 다음을 구하지 않았다.

갓 피어난 꽃을 다루듯 느리고 다정하기만 한 키스였다. 눈을 감아 그의 숨을 받아들이며 정인은 불쑥 제 안에서 몸피를 키워 가는 욕심을 느꼈다.

지금을 놓고 싶지 않다고. 조금만 더 이대로 머무르고 싶다고.

“…실수 맞는 것 같아.”

애써 억누르며 그를 밀어 냈다. 아쉬운 입맞춤은 저항 없이 떨어져 나갔다.

“갈게.”

그의 얼굴은 바라보지도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

철컥, 하고 문의 걸쇠가 잠겼다. 마침내 혼자가 되자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이 그제야 터졌다. 정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침대로 기어가 이불 속에 파묻혔다.

“…미친 새끼. 씨발, 멍청한 새끼.”

그러고는 스스로를 욕하기 시작했다.

“…짜증 나.”

사실은 좋아했다. 느리게 맞춰 주는 걸음을, 별것 아닌 말에도 웃어 주는 목소리를,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 주던 위로를.

못 이기는 척 휩쓸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가 주는 모든 것의 다음번을 은근히 바라기도 했다.

“이렇게 될 거 알았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하지만 나는 사랑하기에 썩 좋은 사람이 아니다. 아직까지도 내 마음 하나를 건사하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니,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담을 만한 그릇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끊어 냈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호진에게도 확실히 선을 그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만큼 아프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 같은 밤은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지워 낼 수 있을까, 생각하니 그만 아득해졌다.

“형. 저 들어가게 해 주세요.”

굳게 걸어 잠근 문 너머에서 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인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싫어.”

“형 울고 계시잖아요, 제발 들어가게 해 주세요.”

아무래도 호진은 이불 속에 파묻혀 우는 소리까지 들어 버린 듯했다. 조르는 말에 한숨 같은 눈물이 터졌다.

“…싫다고.”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자라난 블랙홀이다.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시한폭탄이고, 멈출 곳을 몰라 사방으로 솟구치는 칼날이다.

나를 대신해 죽은 보리를 떠올린다. 나로 인해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내가 내지른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기어이 나를 용서해 버린 아빠들을. 아무것도 아닌 일에 무너진 나를 보며 마음 졸이던 삼촌, 주영이 형, 효준이를. 그렇게 내가 괴롭힌 모든 사람들을 떠올린다.

“얼굴 한 번만 보여 주세요, 괜찮은지만 보고 갈게요.”

숱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모두가 그랬으니 너 또한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계속 곁에 둔다면, 너는 분명 언젠가 나로 인해 슬퍼하게 되겠지.

“…대답 없으시면 들어가요. 셋 세고 들어갈게요.”

나 진짜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닌데.

“하나.”

너만 상처받을 게 뻔한데.

“둘.”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이렇게 욕심을 부리고 싶을까.

“셋.”

망설이는 사이 카운트다운이 끝나 버렸다. 정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이불부터 뒤집어썼다. 곧 영영 닫혀 있을 것만 같던 문이 열렸다. 이미 비밀번호를 알고 있던 호진은 문을 망가뜨리지 않고도 손쉽게 걸쇠를 풀어냈다.

“형.”

마침내 활짝 열린 문틈으로, 한 번도 정인을 아프게 한 적이 없던 사람이 미련한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내내 끊이지 않던 울음소리는 호진이 방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자마자 거짓말처럼 멎어 들었다.

이불 속에 완전히 웅크린 정인은 이제 죽은 사람처럼 숨소리 한 번을 내지 않았다. 애써 억누르는 울음이 안타까워 이불 위로 손을 얹었다. 동그랗게 말린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형, 저 좀 봐 주세요.”

언젠가 한 번쯤 만나게 될 거라고 짐작은 했다. 하지만 단단한 껍데기 안의 알맹이가 이토록이나 여릴 줄은 몰랐다.

정인은 이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담을 쌓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기어이 못 이기는 척 문을 열도록 허락해 주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남겨 둔 은신처에서는 좀처럼 빠져나올 생각을 않았다.

호진은 조심조심 이불자락을 끌어 내렸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정인의 얼굴이 보였다.

“…형.”

깊게 파인 눈 앞머리를 따라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하루 종일 이렇게 울면 내일은 머리가 아플 텐데, 생각하며 호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정인이 내어 준 조금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이불을 젖혔다. 자꾸만 말리는 어깨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 그를 일으켜 앉혔다. 이제 반항할 힘도 없는지, 정인은 순순히 호진의 손을 따라 앉았다.

“이렇게 힘드실 일이 아니잖아요.”

뭐가 이리도 두렵고 불안할까. 어디서 이렇게 상처를 받아 왔을까.

눈과 코가 온통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상황을 온전히 밀어 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달달 떨고만 있는 게 안타까워 죽을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정인이 더는 아프지 않을까. 생각하며 손수건을 꺼내 그 이가를 살살 닦아 주었다. 그리고 정인은 또 한 번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네가 상처받을 거야. 이건 확률의 문제야.”

그러고는 불쑥 말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부 그랬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힘들어졌어.”

정인이 여태까지 했던 말 중 유일하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똑똑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힘들지 않을 리 만무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정인은 연신 흐느꼈다.

“그러니까….”

호진은 예쁜 눈꼬리를 따라 부드럽게 손수건을 눌러 붙였다. 푹 젖은 눈동자가 가려졌다.

“그러니까 너는 나 좋아하지 마.”

진심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좋아해 달라는 말로 들렸다.

혼자서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으니 제발 여기서 꺼내 달라고, 도와 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게 걱정이세요?”

호진은 피식 웃으며 정인의 손을 잡았다.

“제가 힘들어질까 봐, 그게 걱정이세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령 불구덩이 한가운데서 손을 뻗는다 해도 망설임 없이 그에게 뛰어들 자신이 있었다.

***

아무래도 어딘가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잘만 돌아가던 머리가 어째서인지 지금은 꿈쩍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평소처럼 그럴싸한 정답을 찾아내고 싶었지만 마음아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이렇게까지 스스로 컨트롤이 되지 않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쯤에서 호진을 밀어내는 것이 최선임을 알면서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천천히 숨 쉬어 보세요.”

호진은 조금 더 단단히 정인의 손을 붙들었다.

“형, 지금 많이 불안하고 힘들어 보여요. 저 때문이 아니라 제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이유로.”

그는 혼란스럽게 뻗어 나간 정인의 생각들을 단칼에 잘라 정리했다. 그 와중에도 다른 한 손으로는 정신없이 눈물을 훔쳐 주고 있었다.

“그 이유를 오늘 당장 알려 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그러니 조금만 진정하고 제 말 들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눈동자가 똑바로 이쪽을 향해 있었다. 그저 어딘가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삿된 것들을 쫓아낸다는 버드나무처럼,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저, 상처받을게요.”

조금의 떨림조차 없는 목소리로 호진이 말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형을 좋아하기 위해 반드시 상처받아야 한다면 저는 그거 그냥 받고 싶어요. 그리고.”

“…….”

“아무리 아프게 하셔도 저는 반드시 괜찮을 거라는 거 보여 드릴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그는 언제나처럼 환히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금이라도 아팠냐는 듯.

“태양을 보고 서면 반드시 발밑에 그림자가 지잖아요.”

엉망으로 어질러진 세상 속, 단 하나의 정답 같은 목소리였다.

“형을 좋아하는 건 아마 그런 일이었을 거예요.”

정인은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풀벌레들이 죽어 가듯 단박에 온몸이 타들어 갈 줄로만 알았지만, 놀랍게도 코앞까지 닥쳐온 빛은 그저 따뜻하기만 했다.

“형은 여태까지 모두에게 참 햇볕 같은 사람이었나 봐요.”

과분할 만큼 고운 말에 또 한 번 눈물이 터졌다. 그러자 호진이 아프게 웃으며 정인을 꼭 안아 주었다.

정인은 밀어 내지 않고 그의 어깨에 온전히 얼굴을 묻었다. 혼자 꾸역꾸역 이고 지고 온 짐이 한 몽땅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이쯤에서 쉬고 싶었다.

“괜찮아요, 형.”

다 괜찮아요. 다독이는 목소리에 기대 엉엉 소리 내 울었다.

6년을 지켜 온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정인은 어둠을 조준하고 있던 눈을 들어, 해일이 지나가고 난 마음의 어귀에 솟아오른 것을 바라보았다. 내내 눈길 닿지 않는 곳에 묻어 둔 상처가 어느샌가 휑하니 드러나 있었다.

단단히 등을 쓸어 주는 손길에 의지해, 처음으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 조금도 자라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던 어린 최정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상처투성이인 채로 바다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악을 지르고 있었다. 나를 좀 돌아봐 달라고, 내가 이렇게나 아프다고, 부디 모르는 척하지 말아 달라고, 제발 여기서 꺼내 달라고.

정인은 무릎까지 가라앉은 파도를 헤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잔뜩 상처 입은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아이의 손목을 잡고 뭍으로 끌어 올리자, 단 한 번도 귀 기울여 들을 생각을 않았던 말들이 뒤늦게야 밀려들었다.

상처를 줄까 봐 무서워, 상처 입을까 봐 무서워. 하지만 나도 한 번쯤은 행복해지고 싶은데.

“형, 저랑 만나 주세요.”

그리고 이 사람이랑 있으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흐윽….”

기어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내 정인을 안고 있던 호진이 몸을 일으켰다.

“정인이 형.”

그는 머리 숙여 정인의 손등 위에 입 맞췄다. 신에게 선물을 올리는 사제처럼 경건하고도 정갈한 움직임이었다.

“형을 좋아할 수 있게 되어서, 저는 늘 기쁘고 영광스러웠어요.”

한 번을 인정하니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정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토록 다정한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참 고맙고 좋았다.

“천천히 제 곁에 머무르다가, 언젠가는 저를 많이 좋아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호진이 정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그친 자리마다 온기가 스며 더는 춥지 않았다.

“제 첫사랑이 되어 주셔서 감사해요.”

달래듯 이마에 닿아 오는 입술에서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당겼다. 호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정인에게 다가와 입 맞췄다.

“…….”

부드럽게 맞물리는 입술을 받아들이며 정인은 생각했다.

정말 큰일이라고. 첫사랑은 반드시 망하는 거라던데, 둘 다 첫사랑을 시작하게 되어 버렸으니 어쩌면 우리는 두 배로 망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래도 태양을 보고 서기 위해 견뎌야 하는 게 고작 그림자 정도라면,

그까짓 거, 한번 해 보지 뭐.

***

애인이 생겼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상시 적용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긴 것이다.

“여기랑 여기에 서명하면 되고…. 가만 보자.”

물론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맞이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제의 최정인과 오늘의 최정인이 같으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또 아니다.

“여기도 서명해야겠다.”

분명 뭔가가 미묘하게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맛있는 도시락으로 든든하게 배낭을 채워 소풍 길에 나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정인아?”

“네?”

부르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이가 지긋한 회계사는 안경을 콧대까지 내려 쓰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니?”

“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인은 제 앞에 놓인 몇 장의 서류에 사인을 휘갈겼다. 현욱이 보내온 정중한 협박문에서부터 신탁 회사가 넘긴 동의서, 자신의 변호사가 피눈물로 적어 준 각서에 이르기까지.

한숨과 함께 펜을 놀리는데, 처음 보는 서류 한 장이 불쑥 나타났다.

“이건 뭐예요?”

“아, 이게 아직도 있었구나.”

폼만 그럴싸하지 핵심적인 내용은 빠져 있는 깡통 서류였다. 그리고 그 구석에는 정인과 조부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재작년쯤 혹시나 해서 만들어 두었던 건데…. 돌아가신 회장님 유산 상속 서류란다.”

“할아버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사라진 미술품이랑 보석들 말이다, 실은 모두가 그게 네 앞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유산 분배 과정에서 통째로 증발해 버린 수백억대의 컬렉션을 말하는 것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예술가들의 초기작도 몇 점 들어있으니 지금은 그 가치가 족히 서너 배 이상은 뛰었을 것이나, 그것들이 정확히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는 십수 년째 아무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이 사라진 것들이었다.

“네가 성인이 되면 발동하는 특별 조항이 신탁에 같이 들어 있을 거라고 믿었지.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가 없으니….”

“네, 기억나요.”

정인이 한창 타향살이에 적응해 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조부의 타계 이후 10년이 넘게 지난 어느 날, 한 기자가 사라진 컬렉션을 근거로 TH 그룹에 탈세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유산의 전체 규모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값을 매길 수 있는 것들의 세금 신고야 진작 마쳤다. 결국 집안 전체를 몇 번이나 털어도 나오는 게 없어 그대로 마무리되었지만 당시는 현욱의 경영권 싸움이 한창이던 시기였고, 그땐 모두가 한 번이라도 더 그를 물어뜯기 위해 혈안이었다. 당연히 이래저래 얹히는 말들도 많았다.

천하를 호령하던 대부호의 사라진 수집품. 그 흥미로운 타이틀에 홀린 사람들은 보물선 찾기에 몰두하듯 이런저런 가설을 들이밀었다.

장남 최현욱이 아무도 모르게 꿀꺽했다느니, 생전 고인이 예뻐했던 장녀 최예원이 진작 빼돌렸다느니. 그게 아니라면 경영권에 전혀 관심이 없는 막내 최성현에게 넘어갔거나, 혹은 사이가 소원한 편이었던 차남 최정훈에게 사과 조로 주어졌을 거라고.

하다못해 국세청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사위 유모 씨와 미리 짜고 자전 거래를 했을 거라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물론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

“아직 못 찾은 거죠?”

“그래.”

그리고 삼한 가의 사 남매가 모두 세무조사를 받는 동안 간간이 정인에게도 연락이 왔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생전에 너에게 뭔가 말씀하시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설령 정말로 그가 뭔가 말했다 해도 정인이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조부를 만났을 때의 정인은 차마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 어렸으니까.

“이제는 포기해야지. 신탁에 붙은 특별 조항 자체를 모두에게 숨기신 건 아닌가 기대도 했다만, 아직까지도 별일이 없잖니?”

그 말대로였다. 정인이 신탁의 소유권을 온전히 행사하게 된 지 한참은 지났는데도 유산을 찾아낼 방법 따윈 나타나지 않았다. 내부에서 가족들끼리 추측하던 것마저도 빗나가 버린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요.”

“글쎄다. 어딘지는 몰라도, 회장님께서 원하는 곳에 두셨지 않겠니.”

세무사는 웃으며 파일을 덮었다. 미소 띤 눈가를 따라 깊은 주름이 파였다.

“이것만 찾으면 나도 마음 편히 은퇴할 수 있을 텐데.”

씁쓸한 목소리가 지나갔다. 정인은 그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은퇴 못 하시는 거예요?”

“아니다,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는 농담처럼 대화를 닫았다.

“궁금한 것이야 훗날 다시 만나 뵈어 여쭈면 될 일이지, 그래도 정인이 너 장가드는 것까지는 보고 그만둘 생각이란다.”

이제 그만 은퇴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돌아보면 늘 그 자리다. 평생 친손주처럼 저를 살뜰히 아껴 준 마음을 알고 있는 정인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은퇴하신 다음엔 뭐 하실 거예요?”

“뭘 하면 좋겠니?”

정인은 병원 로비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던 TV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음…. 자연인 같은 거 하시는 건 어때요? 만족도가 꽤 높아 보이던데.”

“하하하, 그것도 기력이 있어야 하는 거지. 이 나이에 새 터를 일구는 게 어디 쉬운 일이니.”

이끄는 손길을 따라 일어났다. 그는 습관처럼 정인의 손에 박하사탕 두 알을 쥐여 주었다.

“그러는 정인이 넌 뭘 할 테냐?”

“네?”

“너야 젊으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니야. 말 그대로 자연인이 될 수도 있겠고, 도시에 더 오래 머물 수도 있겠고.”

정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운동을 그만둔 뒤로는 딱히 진로를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것마저도 삼촌의 의지였다. 근 몇 년간 정인이 자의로 결정한 거라곤ㅡ. 이제부터 호진과 서로를 애인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바로 그때뿐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처음으로 손 내밀어 쥐게 된 사람이 많이 보고 싶어졌다.

“정말 잘 모르겠어요.”

창창히 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인의 입가에는 어김없이 미소가 번졌다.

“괜찮다, 아가야. 천천히 고민해 보렴.”

그리고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시간을 먼저 지나 본 노인은 따스한 목소리로 정인을 향해 말했다.

“당장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쥔 것 하나 없이 새 길을 떠나도, 기력이 쇠하기 전에 반드시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을 나이야.”

참 좋은 시절이잖니, 덧붙이는 말에 정인은 그만 쑥스럽게 웃어 버렸다.

***

애인이 생겼다.

음, 그러니까….

“흐….”

아니, 그냥 다른 건 모르겠고 하여튼 애인이 생겼다. 심지어 그게 최정인이다.

“…흐흐.”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대회 준비와 논문 해석에 모든 시간을 바친 탓에 시험지에 적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C나 겨우 받을까 말까 한 수준의 졸문뿐이었지만, 그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현재 호진의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호진아.”

불쑥 누군가 옆에서 호진을 불렀다. 돌아본 곳에는 혜나가 서 있었다.

“어? 오랜만이다, 혜나야. 시험 보고 나오는 거야?”

“응, 완전 조졌어. 근데 너 왜 이렇게 얼굴이 좋아졌어?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게….”

사실은 정말 동네방네 떠벌리며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애인이 되어 준 사람을 보라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멋지고 똑똑하고…. 음, 하여튼 최정인을 보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혜나 너도 얼굴 좋아졌네.”

“싱겁기는.”

하지만 그저 마음뿐이다. 괜한 소문에 정인을 오르내리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자 혜나가 불쑥 물었다.

“그나저나 너 이번 주말에 시합 있지?”

“아, 응.”

어느샌가 대회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정인을 만나는 때를 제외한 시간은 전부 운동에 쏟아 부었고, 늦게 훈련을 시작한 것에 비해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심인성 통증이라 추측되던 어깨의 통증도 멎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무심결에 제 컨디션을 체크하던 호진은 새삼 놀랐다. 그러고 보니 정인을 처음 만나던 무렵 이후로는 어깨 통증에 크게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 그날 너 응원하러 가도 돼? 예지랑 민준이랑 같이.”

혜나의 물음에 호진은 머뭇거렸다. 사실 이번 대회에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족도, 가까운 친구도, 하다못해 정인마저도.

“나야 고맙지만…. 아마 오래 시간을 내긴 어려울 거야. 간단한 인사밖에 못 할지도 몰라.”

“괜찮아.”

“큰 대회도 아니고, 서울에서 먼 곳이라 오가기도 불편할 텐데.”

영 마음이 편치 않아 또 한번 은근히 회유했다.

“그 정도쯤이야 뭐. 어차피 민준이 운전시킬 거라 괜찮아.”

하지만 혜나는 꼭 경기를 보고 싶은 듯한 눈치였다. 이제 더는 그녀를 멈춰 세울 핑계가 없어, 호진은 웃으며 백기를 들었다.

“고마워, 그럼 그날 보자.”

막 돌아서려는데, 불현듯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호진은 그대로 뒷걸음질 쳐 혜나에게 돌아갔다.

“맞다, 혜나야. 지난번에 같이 본 조효준 선배 말야, 혹시 많이 친해?”

“효준 오빠? 왜?”

“그냥. 그분은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분명 정인은 별 사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인의 평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실 나도 잘은 몰라. 그 오빠 여기저기 잘 나오긴 하는데 은근히 사람 가리거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혜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 같이 가볍게 같이 노는 자리에는 자주 나오는데…. 아, TH 그룹 회장님 조카랑은 친하대.”

“그래?”

“그러고 보니 TH 그 오빠도 이번에 우리 학교 들어왔다던데,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 한 번을 못 봤네.”

“으음, 그렇구나.”

재벌가 자제들의 인맥은 호진의 관심사 밖의 일이었다. 결국 조효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요만큼도 캐내지 못했다.

“하여튼 고마워, 그럼 경기 날 보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알게 되겠거니 생각하며 혜나를 보내고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손안에서 길게 진동이 울렸다. 호진은 얼른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안에는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모양의 이모티콘 하나가 떠 있었다.

- 앞으로 쭉 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아래 선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절로 웃음이 번졌다.

“지금 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정인을 향해 달렸다. 다가올 일이야 어찌 되든, 지금은 그저 발에 날개라도 단 듯 기쁘기만 했다.

***

호진의 시험이 끝나면 내려가기 전에 잠깐 얼굴을 보기로 했다. 미리 도착해 약속 장소 근처를 맴돌던 정인의 걸음이 멈춘 것은, 멀리 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뒤의 일이었다.

호진은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인과 함께 서 있었다. 모두에게 그렇듯 그녀를 보며 예쁘게 웃기도 하고, 다정한 시선을 맞추기도 하고, 무언가를 묻기도 했다.

나무 아래 서서 멀뚱멀뚱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인은 곧 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채 한 번을 울리기도 전에 끊겼다.

“앞으로 쭉 와.”

- 지금 갈게요.

호진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형.”

“시험 잘 봤어?”

그 말에 그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망한 것 같아요.”

“…그래, 수고했어.”

대회 준비에 이래저래 바쁠 텐데 여기서 시험까지 잘 보라고 하는 건 무리다. 정인은 건물의 옆으로 딸린 샛길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방금 그 사람은 누구야?”

최대한 덤덤하게 물었다.

“대학교 와서 알게 된 친구예요. 조효준 선배 소개해 줬다는 친구 기억나시죠?”

“그게 저 사람이야?”

정인은 흘끔 고개를 돌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도 은근히 인간관계에 까다로운 편인 효준의 지인이라면 아마 높은 확률로 번듯한 집안의 자제일 것이다. 어쩌면 연예인일 수도 있겠고.

‘이때다 싶어서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노리는 애들도 꽤 있을걸.’

‘걸 그룹 에이트오 출신 예니 알지? 걔도 요새 유호진 연락처 딴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닌대.’

언젠가 주영이 했던 말이 떠올라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근데 형.”

“응?”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호진이 웃으며 길 끝을 가리켰다.

“사람 아무도 없는데, 여기서 저기까지만 손잡고 갈까요?”

이미 한 손은 정인을 향해 내민 채였다.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우리 사귀는 사이니까요.”

“아…. 그렇지, 참.”

잠들기 전에도, 자다가도, 자고 일어나서도. 하다못해 세무사 선생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잊을만하면 떠올라 몸을 가눌 수 없게 만들던 생각이다. 그런데도 막상 멍석을 깔아 놓고 뭔가 ‘애인 사이에서 할 법한’ 일을 하자니 엄청나게 어색했다.

키스도 몇 번이나 했는데 고작 손잡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생각하며 정인은 머뭇머뭇 손을 내밀어 호진의 손에 깍지를 꼈다.

“앗,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데 호진이 부리나케 손을 뗐다. 그러고는 정인의 손가락 전부를 감싸듯 조심스럽게 고쳐 잡았다.

“깍지 끼면 빨리 헤어진대요.”

“뭐? 그런 게 어딨어.”

조금의 논리도 근거도 없는 미신을 믿다니. 깡그리 무시하고 깍지를 끼자 호진은 모든 손가락을 뻣뻣하게 펼친 채 버텼다.

“이런….”

오기가 솟은 정인은 결국 다른 한 손까지 써 가며 호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굽혔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새끼손가락까지 붙을 때가 되자, 비교적 작은 정인의 손으로 미처 커버하지 못한 방향에서 검지가 팽팽히 솟아올랐다. 죽어도 모든 손가락을 깍지 끼지는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엿보였다.

“진짜 안 되는데.”

“허, 참.”

울상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손가락을 쫙 펴 힘을 주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징크스 같은 거 너무 믿지 마. 특정 조건을 유지하지 못하는 모든 순간에 괜히 불안하기만 하잖아.”

“이 정도 조건은 평생 유지할 수 있어요. 매일 이렇게 잡고 있으면 되죠.”

호진은 기어이 제가 원하는 모양대로 잡게 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모두가 외출한 사이 종이란 종이는 죄다 뜯어 놓고 헥헥 눈치만 보던 감돌이가 생각났다. 정인은 결국 소리 내 웃어 버렸다.

“도대체 이런 소리는 어디서 들은 거야?”

“이렇게 해서 형이랑 오래오래 잘 지낼 수 있다면 어디서 들은 얘기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줄줄 쏟아 내는 말과 달리 그는 굉장히 자신 없어 보이는 얼굴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봐. 어디서 들은 얘긴지 기억 안 나지?”

“…넵, 사실 기억 안 나요.”

예쁜 말로 어떻게든 넘겨 보려던 계획은 아무래도 실패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끝끝내 한 번을 더 치댔다.

“그래도요, 따르든 안 따르든 큰 손해가 없는 미신이라면 굳이 피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혹시 깍지 끼고 싶으세요?”

“아니.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고.”

“그럼 됐네요.”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걸었다. 해가 구름에 가릴 때마다 세상의 채도가 온순히 가라앉았다. 눈앞이 밝아질 땐 새하얀 풀씨가 팔랑팔랑 날아들고, 바람이 불면 겨우내 쌓인 낙엽이 요 앞까지 굴러오기도 했다.

“형.”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걷는 길이 견딜 수 없이 낯설어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정인은 흘끔 호진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게 처음이라 저는…. 그냥 다 너무 조심스러워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손 한 번을 잡는 일에도 눈 한 번을 맞추는 일에도 조심조심 마음을 써 주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게 처음인 건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이라 절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고, 빨리 익숙해지고 싶어요.”

“…….”

“열심히 연습할게요, 제 마음을 컨트롤하는 법도 열심히 익혀서 금방 익숙해질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조금 귀찮게 하고 유치하게 굴어도 그때까지만 참아 주세요.”

참 운동선수다운 말이라 정인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고, 호진은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지금은 좀 어려워요. 어젯밤엔 핸드폰에 형 이름 새로 저장하느라 두 시까지 잠도 못 잤고요, 오늘도 아침 운동 하면서 계속 형 생각밖에 안 했어요.”

“그런….”

대체 누가 그런 쓸데없는 일로 잠을 미룬단 말인가.

“…그래서 뭐라고 저장했는데?”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묻는 말에 호진은 핸드폰을 꺼내 보여 주었다. 정인의 번호 위에는 글자 대신 이모티콘 한 개가 덜렁 찍혀 있었다.

“이게 뭐야?”

“형이랑 닮아서요.”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왔는지, 반파된 계란 껍질 위에 노랑 병아리 한 마리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너는 무슨, 뭐만 하면 다 날 닮았대. 지난번엔 개똥이 닮았다고 하더니 이번엔 얘야?”

호진은 살짝 광기가 비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넵, 세상에 있는 예쁘고 귀여운 건 다 형 닮았어요. 그래도 형보다 예쁘고 귀엽진 않지만요.”

“헉….”

그 말에 소름이 돋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 했지만, 호진은 어림도 없다는 듯 정인을 꼭 붙들었다.

“형은 저 뭐라고 저장하셨는데요?”

“별거 없는데.”

굳이 그를 뿌리치지 않고 남은 한 손으로 열심히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유호진]

정직하게 이름 석 자만 딱 적혀 있었다.

“…아하.”

호진의 얼굴 위로 시무룩한 기색이 지나갔다. 정인은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다 이렇게 저장해 놨어.”

“이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는 입을 댓 발 내밀며 ‘국문과남신고수학’을 가리켰다. 개강 직후 우연히 마주쳐 번호까지 얻게 된 썰매 보이는 그 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해 이제 얼굴조차 가물가물했다. 정인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저장하면 되는데.”

“형이 붙여 주고 싶은 건 뭐든요, 설사 똥 그림을 붙여 주셔도 저는 그냥 다 좋아요.”

끝없이 나타나는 이모티콘을 휙휙 내렸다. 동식물로 가득한 탭 안에서 대충 돌고래 이모티콘 하나를 골라 붙여 주려는데, 돌고래의 바로 위에 정말 요상하게 생긴 물고기 한 마리가 보였다.

“하하하, 이것 좀 봐.”

동글동글 까만 눈을 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파란색 물고기였다. 정인은 망설임 없이 그 녀석을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얘 진짜 웃기게 생겼어, 안 그….”

언제부터였는지, 내내 정인만 바라보고 있던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

봄 햇살을 담뿍 묻힌 눈동자 안으로 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름이야 무엇이든 처음부터 관계없었다는 듯, 뭐가 어떻게 되든 하나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온전히 정인에게만 눈길을 두고 있던 호진은 시선이 마주치자 온 얼굴을 무너뜨리며 웃었다.

“…저는 형이 너무 좋아요.”

맥락도 논리도 없었다. 그럴싸한 기승전결도 없었다.

그저 이 순간 느껴지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호진이 정인을 꼭 끌어안았다.

“정말이에요.”

도저히 진심이 아니라곤 믿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정말로, 많이 많이 좋아해요.”

평소였다면 질색할 만한 이야기였지만, 꼭 안아 주는 가슴에 파묻히니 얼굴이 보이지 않아 부끄럽지도 않았다.

정인은 호진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어린 새가 모이를 받아먹듯 그의 마음을 꼭꼭 씹어 삼켰다. 뱃속이 따끈따끈 말랑하게 녹아내렸다.

“응….”

이렇게 해도 되는 거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꼭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아귀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구나.

조금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내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해도 큰일 나는 거 아니구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어쩌면 늘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닐지도 몰라.

“…고마워.”

자꾸만 부드럽고 예쁜 것들을 알려 주는 사람이 좋았다. 호진의 허리로 손을 둘러 마주 안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너무 달아서 금방이라도 이가 몽땅 썩어 버릴 것만 같았다.

***

오늘도 컨디셔닝 센터는 바쁘기 그지없었다. 본격적으로 시즌이 시작되면서 그간 잠잠히 사리고 있던 하계 스포츠 선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어딘가 다쳐 온 탓이었다.

“호진아.”

그것은 이제 막 연애에 눈을 떴다는 눈앞의 어린 선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권 실장은 말도 안 되는 수치가 찍혀 있는 결과지로부터 고개를 들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애인이 생겼다며 자랑부터 하던 호진은 여전히 꿀을 삼킨 듯한 얼굴로 실실 웃고 있었다.

한참 어릴 적부터 그를 담당해 온 권 실장의 눈에야 그 웃는 모습이 그냥 마냥 아기 같고 예쁠 뿐이었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나온 이상 오늘만큼은 그저 예뻐해 줄 수가 없었다.

“결과가 너무 안 좋은데,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아뇨….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요.”

호진은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한 후에야 웃는 낯을 거두었다. 그리고 권 실장은 결과지의 방향을 돌려 호진의 앞에 놓아 주었다.

늘 일정한 수준으로 관리되던 페로몬 안정도가 몇 주 전을 기점으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단지 애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기엔 어딘가 이상한 수치였다.

“일단 이건 나랑 얘기해서 될 게 아니고, 병원 넘어가서 검사받아야 할 것 같아. 그리고….”

권 실장은 오늘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화제에 올렸다.

“미안하지만 민감도 조정은 어렵겠다.”

“네? 하지만 선생님….”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호진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민감도 제어 레벨을 낮추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권 실장은 쐐기를 박듯 물었다.

“너 지금 사귄다는 애, 지난번에 말한 LGS 오메가 맞지?”

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을 뜻하는 침묵에 탄식이 터졌다.

“어쩌자고 이러니, 정말….”

연인이나 파트너와의 성관계에서 더 큰 쾌감을 얻기 위해 비시즌에만 민감도를 조정하는 선수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제 막 시즌이 시작된 참이고, 아주 어릴 적부터 호진의 컨디션을 담당해 온 권 실장이 판단하기로 유호진이라는 사람은 절대 약간의 쾌감 따위를 구하기 위해 시즌 한가운데에서 변수를 무릅쓸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는 LGS를 앓는 연인을 위해 자신을 이용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 마음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수치가 이렇게 나오는 와중에 언제 페로몬이 터질지 모를 LGS 오메가와 꾸준히 접촉하고 민감도까지 건드리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선생님.”

“아니, 안 돼.”

권 실장은 단칼에 잘라 냈다.

“정신 차려. 너 지금 툭 건드리면 러트 올 수도 있는 상태니까.”

평생 약물로 페로몬을 조절하는 이형질 선수들이 이따금 가벼운 호르몬 이상을 겪는 건 썩 드물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러트가 ‘가벼운 호르몬 이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히트 사이클도 러트도 모두 번식 본능의 부산물이다. 고대에야 여러 명의 파트너를 두고 원할 때마다 번식 행위에 몰두했지만, 인류가 진화하면서 아무 데서나 짐승처럼 붙어먹는 경우가 줄어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페로몬이 남아돌고, 그 잉여 페로몬은 간혹 몸에 이상을 일으키곤 했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이 바로 그의 일종이고, 상대적으로 페로몬 분비량이 적은 알파의 러트도 기본적인 원리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러트는 생애 몇 번 없는 일이기도 해서 한 번 터지면 평상시의 열 배 이상은 되는 페로몬이 줄줄 흘러내리는데, 신체적 고통의 역치가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선수들마저도 러트에는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작년에 야구에서 살인 사건 난 거 기억나지? 몸 관리하는 선수라고 러트 우습게 볼 게 아니야. 아니, 선수라서 더 위험해.”

아무리 약과 기술로 누르고 눌러도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라는 게 뭔지, 멀쩡히 잘 인사를 나누고 센터를 나갔다가도 바로 다음 날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실려 오거나 선수들 간에 뭔가 사고를 일으켜 입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시 이번 주 대회에 지장이 있을까요?”

“음, 일단 당장은 아닐 거야.”

권 실장은 떨떠름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회가 끝난다 해도 이 상태에서 페로몬을 건드리는 건 절대 안 돼, 적어도 6개월 정도는 잡고 천천히 수치를 복구하는 걸로 하자.”

“6개월이나요? 그러면….”

그 말에 호진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선생님. 러트라는 거, 결국 길어야 일주일만 어떻게든 버티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요?”

“뭐?”

권 실장이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며 말문을 닫은 사이, 호진은 무서울 만큼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살면서 러트를 한 번도 겪지 않는 알파도 있다지만 선수들은 다르니까요. 어차피 언젠가 한 번쯤은 작게든 크게든 이상이 생길 텐데…. 그렇다면 그게 지금이어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호진아. 일반적인 호르몬 이상과 러트가 주는 타격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어.”

권 실장은 그를 타일렀다.

“그리고 러트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사람 봐 가면서 오는 게 아니야. 아무리 네가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거고, 특히나 첫 러트라면 정말로 큰 문제에 휘말리게 될지도 몰라.”

그러나 호진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꾸준히 키트로 확인하고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이삼일 정도는 혼자 지낼게요. 다른 사람을 해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타인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자신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니, 조금 섬뜩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적어도 선비처럼 반듯하게 웃으며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유호진.”

“대회만 무사히 마친다면 그 후의 일은 크게 상관없어요.”

“…….”

“부탁드릴게요, 스케줄 잡아 주세요.”

권 실장은 한숨을 쉬었다. 웬만해선 반기를 드는 법이 없는 유호진이 이런 목소리로 말한다는 건 이미 그의 안에서 결론이 난 일이라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설령 권 실장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한 번 목표가 정해진 유호진은 절대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원하는 바를 이뤄 내고야 만다. 이전의 부상에서 억지로 출전을 감행했던 것처럼.

“너 혹시 운동 그만두고 싶어서 이러니?”

답답한 마음에 일부러 모진 말을 했다.

“어깨 부상도 분명 몇 번이나 경고했잖아. 회사에서 아무리 떠밀어도 네가 못 하겠다고 버텼어야지, 아파서 팔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진통제 놔 달라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어떻게 됐어. 응?”

그때, 권 실장은 호진이 일종의 자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쉴 틈 없이 주어지는 부담감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외부로 발산하지 못해서, 지나치리만치 가혹한 훈련으로 스스로를 해쳐 가며 겨우 버티고 있는 거라고. 누군가는 반드시 저 애를 멈춰 줘야 한다고.

물론 메달에 눈이 먼 감독은 그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부상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걱정되는 마음에 애인 위하는 거? 좋아, 그렇다 쳐. 그런데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시즌 중에 러트를 감수하겠다는 거야. 너 이번 시즌 정말 잘 넘겨야 되는 거 몰라?”

“…알아요.”

“안다는 애가 어떻게 이래. 10년을 속 한 번 안 썩이던 게 설마 이러려고 그랬던 거니?”

자꾸만 스스로를 태워 없애는 길로 들어서려 한다. 그게 느껴질 때마다 속상했다. 권 실장에게 호진은 유능한 선수이기 이전에, 너무 어린 나이에 홀로 고향을 떠나 선수 생활을 시작한 아이이기도 했다.

“호진아, 너도 애야. 아직 스물하나밖에 안 됐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아이였고, 더 자라서는 모두의 ‘좋은 사람’이 되었다. 어려움을 겪는 동료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웬만한 궂은일은 항상 제가 떠안으려 했다.

하지만 권 실장은 호진의 그런 면을 부추길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겨우 스물을 넘겼을 뿐인 아이가 온 세상 단맛 쓴맛 다 본 사람처럼 스스로를 죽이고 사는 건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니니까.

“네 또래 애들은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깎아 먹으면서 살지 않아. 적어도 네 나이에는 아프고 힘든 것 따위 모르고 사는 애들이 훨씬 많단 말이야.”

“…….”

“선수 생활 하다 보면 어차피 일정 부분은 포기하고 살 수밖에 없어. 그런데 굳이 너까지 나서서 너를 괴롭혀야 돼?”

한창 돌봄이 필요한 사춘기에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는 일부터 배웠고, 한 번쯤 엇나가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을 시기 전부를 바쳐 칼같이 반듯한 모습을 유지해 왔다.

그렇게 해서 모두의 귀감과 위로가 되고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나, 과연 그의 삶은 진정 행복으로 충만할까. 싫은 소리 한 번을 하지 않고 지나온 길 어귀에 아무도 모르게 화약이 쌓여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굴 구할 생각부터 하지 말고 너를 먼저 돌봐도 모자라. 네가 무슨 예수야? 부처라도 되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불안했다. 호진은 분명 센터 설립 이래 손에 꼽을 만큼 안정적인 선수이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풍기는 안정감의 이면에는 묘하게 공허한 분위기가 있었다. 때가 오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접고 단숨에 떠나 버릴 사람 같은.

“선생님, 제가 일주일 정도를 견디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만나는 사람은 그런 일주일을 수도 없이 겪었을 텐데, 그런데도 참 열심히 견디면서 살고 있단 말이에요.”

“…….”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게 해 주세요.”

목소리 구석구석 애틋함이 묻어났다.

“설령 정말로 러트가 온다고 해도 선생님 걱정하시지 않게 잘 넘길게요. 소청 다음에 또 다른 대회가 있다면 컨디션도 반드시 완벽하게 만들어 올 거예요. 저, 운동 말고 이렇게 뭘 원하게 된 건 처음이라 그래요.”

“…….”

“선생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병원에서는 문제 삼지 않을 테니까…. 제발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떼를 쓰는 게 하필이면 이런 내용이라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럼 하나만 약속해.”

정말로 러트를 혼자 버텨 내게 된다면 그다음에는 또 얼마나 잔인한 자신감을 얻게 될까. 이제부터는 무엇을 더 감수하겠다고 나서게 될까.

“러트가 터질 것 같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 줘.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더라도, 몇 시가 되더라도 좋으니 반드시.”

“정말요?”

그런 그녀의 속을 알 리 없는 호진은 햇살처럼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꼭 약속 지킬게요.”

***

물어볼까, 말까, 물어볼까, 말까.

호진의 대회가 당장 하루 앞까지 닥쳐왔다. 싱숭생숭해진 정인은 하루 종일 텃밭에 처박혀 쓸 데도 없는 땅을 몇 번이고 갈아 댔다. 덕분에 이제 커다란 자갈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었다.

“흠.”

대회 준비 막바지에 이른 호진은 많이 바빠졌다.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손을 잡고 걸은 이후로는 며칠 내내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고, 매일 전화며 문자를 주고받긴 했지만 시시콜콜 정인의 안부를 물으면서도 그는 끝내 대회에 와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번 대회는 호진에게 정말 중요한 대회이고, 자신이 경기장에 가게 된다면 호진이 어쩔 수 없이 부담감을 느끼게 될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경기에 앞서 가까운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 건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일이다. 원경과 정훈도 정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만사 제치고 경기장에 찾아왔고, 관중석에서 아빠들을 찾아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부담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가끔은 오버 페이스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몰래 보고 오는 건 좀…. 그런가.”

그럼에도 정인은 그의 경기를 직접 보고 싶었다. 선수로서 진지하게 임하는 호진의 모습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여태까진 영상으로만 겨우 봤을 뿐이고,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러하듯 수영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화면을 통해 보는 건 여러모로 느낌이 다를 것 같았다.

“오, 이제 모양 좀 난다?”

멍하니 앉아 맨손으로 흙만 주무르던 정인은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온 건지 나무 그늘 속에 효준이 서 있었다.

“이제 그냥 농사꾼 해도 되겠어. 혹시라도 산 같은 데 들어갈 생각 있으면 빌딩 같은 건 나 주고 가.”

그는 요즘 주기적으로 주영을 찾아가 소개해 줄 만한 배우가 없냐 물으며 껄떡대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효준까지 가세하니 힘이 쭉 빠졌다.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볼일이나 봐. 주영이 형 보러 온 거 아니야?”

“맞긴 한데, 그래도 20년 지기 불알을 안 보고 갈 수는 없지.”

“불, 뭐? 하여튼 천박하기는.”

점잖기 그지없는 세영 금영 그룹에서 도대체 어떻게 저런 놈이 나왔을까. 정인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노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종들을 살폈다.

불과 일이 주 전까지만 해도 볼품없는 이파리 몇 개만 간신히 달고 있던 녀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가지가 얇은 고추 모종은 불안불안하게나마 나름대로 잘 버텨 주었고, 블루베리는 가지마다 열심히 새잎을 내는 중이었다.

“야, 근데 너 어째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다?”

“또 뭐.”

짜증 어린 얼굴로 그를 돌아봄과 동시였다. 효준이 한 손으로 정인의 턱을 감싸 쥐었다.

“뭔데?”

“가만있어 봐, 좀.”

요리조리 돌려 가며 살피던 효준은 이내 답을 찾았는지 아, 하며 정인을 놓아주었다.

“개떡, 너 곱빼기 됐어.”

“…응?”

“볼살 오른 것 좀 봐라. 그동안 나 몰래 얼마나 맛있는 걸 처먹고 다녔길래 이렇게 됐니?”

정인은 두 손가락으로 제 볼을 쥐어 보았다. 스스로 느끼기엔 딱히 달라진 게 없었지만 눈썰미 좋은 효준이 그렇다는 데에야 아주 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근 몇 년을 하루에 한 끼나 겨우 챙겨 먹다가 호진과 어울리면서부터는 끝내주게 잘 먹고 다녔으니 어쩌면 정말 살이 쪘는지도 모른다.

“아, 씨.”

이런 건 무조건 주영에게 물어보는 게 직방이다. 정인은 장갑을 벗어 내팽개치고는 저택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뭐야, 어디 가는데?”

효준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문을 열자마자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고는 주영에게로 달려갔다.

“형!”

“악!”

심각한 표정으로 대본을 읽고 있던 주영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놀라셨어요?”

“괜찮아. 그런데…. 효준이는 또 왔네.”

주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정인이야 1학년이니 그렇다 쳐도 효준이 넌 3학년 아니야? 한창 바빠야 될 시기 아닌가?”

“학교 같은 데 다니는 것보다 형 뵙는 게 더 좋아서요.”

효준은 뻔뻔하게 미소 지으며 미끈한 얼굴을 치켜들었다.

“오늘도 정말 Flawless 하시네요. 그런데 혹시….”

“응, 남자 친구 찾는 애 없어. 부엌에 있는 과자나 먹고 가렴.”

“네.”

정말 꿀밤 한 대만 세게 때리고 싶었다. 효준을 보며 부글부글 끓던 정인은 곧 주영을 붙들고 늘어졌다.

“형, 근데 살은 어떻게 빼는 거예요?”

“왜?”

“그게…. 저 살찐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주영은 정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불쑥 티셔츠를 잡아 올렸다. 새하얀 배가 훤히 드러났다.

“아니, 형. 갑자기 이게 무슨….”

“얼굴 살만 조금 붙고 몸은 그대로잖아, 이렇게 뼈만 남아서는 어디 써먹지도 못해. 조금만 더 찌워서 근육 키우자.”

“근육…. 네.”

그러고 보니 운동을 안 한 지 너무 오래됐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정인은 옷 위로 제 배를 만지작거렸다.

“트레이너 소개해 줘?”

쿠키 박스를 안은 효준이 거실로 걸어 나오며 물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쿠키 하나를 집어 정인의 입에 넣어 주었고, 그러잖아도 당이 떨어져 있던 차에 잘됐다 싶어진 정인은 날름 그것을 받아먹었다.

“으응, 됐어. 어차피….”

대회가 끝나면 호진에게 운동을 조금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될 일이다, 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 맞다.”

정인은 다시금 본질적인 의문에 도달했다. 그래서 호진의 경기에 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있잖아요, 이건 내 친구 얘긴데….”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정리하며 말문을 열었다.

“친구가 애인이 생겼거든? 그 애인한테 내일 되게 중요한 행사가 있는데, 거기에 내 친구를 안 불렀어.”

그 말에 효준과 주영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주영이 물었다.

“음, 친구가 고민 중이래요. 자기는 가고 싶은데, 가면 애인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친구 애인은 뭐 하는 사람인데?”

얘기가 조금 딥하게 들어가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친구의 고민이라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 버릴까 봐, 정인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고 최대한 태연한 척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잘은 모르지만, 운동선수일걸요?”

“윽.”

효준이 갑자기 쿠키 박스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아 유심히 쳐다보자 주영이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찍었다.

“운동선수, 음. 좋지.”

효준만큼이나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주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웬만하면 직접 물어봐.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할 거라는 건 네…친구 생각이고, 혼자 삽질한다고 답 나오는 거 아니잖아. 그런 식으로 서로 오해하다 보면 싸움 나.”

“…그래요?”

역시 이런 연애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다웠다. 명쾌히 내려 주는 해답에 정인은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말릴 틈도 없었다. 정인이 쌩하고 사라진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주영과 효준은 석상이라도 된 듯 몸을 굳히고 있다가, 마침내 저만치서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 후에야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맞지?”

“맞죠?”

“맞네.”

“대박.”

이건 백 퍼센트 최정인 본인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난데없는 정인의 첫사랑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진 효준은 쿠키 박스를 치워 버리고 핸드폰부터 꺼냈다. 그리고 주영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 요리사인 줄 알았는데.”

“웬 요리사요?”

“요리 잘한대. 하여튼 빨리 찾아봐, 내일 경기나 행사 있는 운동 뭐 있어?”

“음….”

검색창에 몇몇 단어를 때려 박았다. 운동, 대회, 경기, 행사, 선수. 곧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대회의 이름이 뉴스 탭에 주르륵 떠올랐다.

“수영이네요.”

날짜는 정확히 내일을 가리키고 있었고, 모든 기사는 온통 유호진의 이름으로 도배된 채였다.

***

18:52호진아

형 답장 늦어서 죄송해요ㅠㅠ 훈련 중이었어요ㅎㅎㅎ

19:20

19:20밥은 먹었어?

이제 나가려고요ㅎㅎ 형은 뭐 드셨어요?

19:20

19:20나는 아직이야. 삼촌 집에서 먹으려고. 경기 준비는 잘돼 가?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려고요 ㅎㅎ

19:20

그런데요 형

19:21

연신 쏟아지던 호진의 메시지가 멈췄다. 정인은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저 잘할 수 있을까요?

19:25

누구도 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호진이라고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정인은 그를 도울 수 있을 말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19:26응, 잘할 거야.

그리고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내일 하루는 꼭 너만 생각했으면 좋겠어, 다른 건 하나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너만.

19:26

아...... 형 보고 싶어요ㅠㅠ

19:27

19:27호진아.

나 경기 보러 가도 돼?

나 경기 보러 가도 돼?

거기까지 적어 놓고, 정인은 대화 창을 올려 오늘의 대화를 한번 쭉 읽었다.

“…….”

조용히 혼자 가서 보고 올라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 같았다. 전부 지워 버리고 새 메시지를 보냈다.

19:33내일 대회 끝나고 보자, 힘내.

네ㅎㅎ 그리고 오늘 날씨 되게 좋아요ㅎㅎ

19:33

19:33?

아참 이제 날씨 좋다고 안 해도 되는데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19:34

무슨 소린지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 기다리자 곧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저 사실 형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마다 날씨 좋다고 했거든요ㅎㅎㅎ

19:35

“아, 뭐야….”

정인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비실비실 기어 나온 웃음을 어쩌지 못하고, 대화방의 검색창에 ‘날씨’를 적어 넣었다.

수십 개는 족히 되는 검색 결과가 우르르 쏟아졌다. 날씨가 좋아요, 형 오늘 날씨가 무지 좋아요, 내일도 날씨가 좋겠죠, 날씨 참 좋다, 형 오늘 날씨 진짜 좋네요, 형 그런데 혹시 어제 날씨 좋았던 거 아세요….

“…정말.”

몇 입 먹지도 않은 과자들이 배 속에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날씨도 좋고 형은 더 좋아요ㅎㅎ 식사 맛있게 하세요ㅎㅎㅎㅎ

19:36

이렇게 계속 부풀다 뻥 터져 버리면 어떡하나,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

시간이 멎은 듯한 고요 속이었다.

작게 뚫린 창을 통해 햇볕이 스미는 가운데, 호진은 마지막 심호흡을 마쳤다. 하늘색 돌고래 인형은 언제나처럼 가방 위에 얌전히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의식을 치르듯 인형의 머리에 입 맞추고 라커를 닫았다. 트랙 톱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며 탈의실을 빠져나오자, 이제 막 복도로 들어선 어린 선수들이 소리 높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쩌렁쩌렁 복도를 울리는 소리에 웃음으로 화답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런 호진의 등을 따라 선망으로 가득한 눈빛들이 우수수 따라붙었다.

호진은 가볍게 목과 손을 풀며 로비로 향했다. 대회 직전이면 으레 그러하듯 분위기는 다소 들떠 있었고, 선수 출입구 근처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기자들은 선수로 보이는 사람이란 사람은 다 잡아가며 여기저기 인터뷰에 한창이었다.

“어! 유호진 선수!”

로비로 한 발을 내밀기 무섭게 기자들이 비명처럼 호진의 이름을 외쳤다. 우르르 달려드는 인파와 함께 여러 대의 마이크가 일제히 호진을 향하고 조명이 올라갔다. 한마디라도 더 붙이기 위해 모두가 서로의 말꼬리를 밟으며 모여들고 있었다.

“사고 이후 첫 경기입니다. 오늘 소감이 어떠세요?”

“부상은 완벽히 회복된 건가요?”

호진은 연신 터져대는 플래시 너머로 로비를 드나드는 인파를 살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질문은 정신없이 쏟아졌다.

“오늘은 100미터, 400미터 두 종목만 출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랜만의 출전이라 다들 기대가 참 많은데요. 신기록 기대해 봐도 될까요? 팬분들께 한마디 해 주시겠어요?”

“먼 이야기지만 LA 올림픽에서 또 크랄렌스키 선수와 마주치게 될 것 같은데, 혹시 특별한 전략이 있을까요?”

바로 답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자연스럽게 대답을 버무리는 게 최선인 듯했다.

“오늘은 오늘의 경기에 집중하는 게 무엇보다도 우선인 것 같습니다. 오랜만의 출전인 만큼 최선을 다할 테니 많이 응원해 주세요.”

그때, 저 멀리서 기자 한 명이 소리쳤다.

“여자 친구 있으세요?”

무례한 질문에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모두가 언짢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것은 호진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일종의 이슈 거리로 생각한다는 사실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그런 질문을 받으니 어쩔 수 없이 입 안이 썼다. 호진은 허탈하게 웃음 지으며 인터뷰를 끝냈다.

“…그럼 경기 끝나고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상보다 짧아진 인터뷰에, 경기와 관련한 질문을 들고 기다리던 기자들은 무례한 질문을 던진 이를 노려보았다. 호진은 다소 피로한 심정으로 그 사이를 지나쳐 경기장으로 향했다.

한 발을 뗄 때마다 어디선가 찰칵찰칵 셔터음이 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말대로, 지금부터는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

경기장 안으로 한 발을 내딛자 알싸한 염소 냄새가 숨 속에 가득 들어찼다.

수면은 한창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이 만들어 낸 파문으로 일렁이고, 거의 꽉 차다시피 한 관중석 군데군데에는 호진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일 층에 쫙 깔린 기자들은 이따금 그것을 올려다보며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댔다.

호진의 출전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수영의 인기가 이렇게 높은 건지, 하여튼 유소년 육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활기가 넘치는 풍경이었다.

“잠시만 지나갈게요.”

혹시나 호진이 저를 알아볼까 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몰래 경기장을 찾은 정인은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누군가가 먹다 남긴 감자튀김 봉지를 발끝으로 저만치 치워 버리며 고개를 들자 경기장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어째서인지 호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물속에서 몸을 푸는 선수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확인했지만 전부 호진이 아니었다. 팸플릿을 펼쳐 경기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핸드폰을 꺼내 생중계 채널에 접속했다.

“잠시 후 남자 자유형 100미터 경기 시작됩니다, 유호진 선수 출전으로 관심이 뜨거운데요.”

“그렇습니다. 지난 시즌에 참 많은 일을 겪었죠. 올 시즌 첫 출전이라 예년 대회에 비해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최유영 선수와 한정우 선수도 이번에 함께 출전이죠? 뛰어난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는 경기다 보니 중고등부 선수들도 많이 나왔어요. 아쉽게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선수들도 모두 유호진 선수의 경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유호진 선수 등장합니다!”

아악, 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정인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까맣게 뚫린 입구를 통해 천천히 걸어 나오는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장내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오직 한 점에 모여 있었다. 그 무수한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내며 호진은 코치와 함께 레인을 향해 다가섰고,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린 선수들이 그를 향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정인이 알고 있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늘 강아지처럼 순하기만 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호진은 교전을 앞둔 무관처럼 서늘하고 단정한 기품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레인에 도착해 트랙 톱의 지퍼를 내려 의자 뒤에 걸었다. 팔을 양쪽으로 교차해 티셔츠까지 벗어 올리자 미끈한 근육이 완벽한 음영을 그리며 드러났다. 동시에 환호성이 조금 더 짙어졌다.

“아이고, 지금 채팅 창이 난리가 났어요. ‘호진아아악’ 님께서 메시지 보내 주셨습니다. 이게 나라다, 라고 하시네요.”

“몸 상태가 작년보다 훨씬 좋아 보입니다. 최대 근력을 많이 올렸다고 들었는데, 유호진 선수 레벨에서는 쉬운 일이 아닐 거거든요?”

“참 대단한 선수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이번 대회에서 또 개인 신기록을 세워 준다면 참 극적일 텐데요.”

“꾸준히 성장하는 선수다 보니 내심 기대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하하.”

“미쳤나, 무슨 신기록이야….”

부상을 딛고 출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격려받아야 할 사람에게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급격히 화가 난 정인은 정신없이 손가락을 놀렸다.

부담 좀 그만 줘 미친 새끼들아, 채팅 창에 써 넣고 정말로 엔터 키를 누르기 직전이었다. 채팅 창 바로 앞에 떠 있는 자신의 닉네임이 보였다.

“…허.”

중학생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닉네임은 자그마치 ‘쿠키런전국No.1최정인’이었다.

부리나케 글자들을 지웠다. 얼마든 돌려 볼 수 있는 방송이고 호진은 분명 모니터링을 할 텐데, 혹시라도 자신이 이런 부끄러운 닉네임을 달고 해설자들에게 악성 채팅을 날렸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 죽어 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호진아!”

그때였다. 서너 칸쯤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호진의 이름을 외쳤다. 묘하게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정인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늘씬하게 큰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그녀는 분명 며칠 전 호진의 곁에 서 있던 미인이었다.

그녀가 외치자 멀리서 몸을 풀고 있던 호진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눈이 마주칠까 봐 정인은 얼른 고개를 숙였고, 이어 여자는 함께 온 듯한 친구들과 파이팅을 외쳤다.

“…….”

저 사람한테는 경기에 와 달라고 한 건가?

“아냐, 넘겨짚지 말자.”

정인은 제 이마를 툭툭 때리며 습관처럼 감정을 눌러 죽였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저 사람이 그냥 알아서 찾아왔을 수도 있지. 경기를 보러 가도 되겠냐고 묻지 않은 건 나다. 대회 준비로 바쁠 텐데 어떻게 나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쓰겠어. 그래,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니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만하자. 기분 상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경기 시작됩니다.”

해설자의 목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제 레인을 찾아갔다. 호진은 가운데 레인에 서 있었다.

“1레인 이주원 선수, 2레인에 강민호 선수, 3레인 최유영 선수, 그리고 4레인에 유호진 선수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는 팔을 높이 한 번 들어 보이고는 한 번 더 손과 발을 털었다. 환호성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운데 모든 선수의 소개가 끝나고, 날카로운 휘슬이 짧게 세 번 울렸다.

장내가 일순 조용해지며 선수들이 일제히 출발대를 향해 돌아섰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호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그가 수경과 수모를 정리함과 동시에,

삐익ㅡ. 아득한 침묵 속으로 휘슬이 울렸다. 이번에는 꼬리가 긴 소리였다. 그에 호진은 다리를 들어 완전히 출발대 위로 올라섰다. 무심한 눈으로 물 너머를 한 번 내다보고는 허리를 완전히 숙여 손끝을 발등 위로 붙였다.

“Take your marks.”

모든 소음이 일순 잦아들었다. 먼 거리에서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선수들의 긴장감에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버저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울려 퍼졌고, 곧 모두가 허공으로 뛰어올라 첨벙 물살을 갈랐다.

“출발합니다.”

“스타트부터 유호진 선수, 치고 나갑니다.”

빠르게 물 밑을 건너간 호진은 당연하다는 듯 선두를 차지했다. 그가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물결이 새하얗게 부서졌다. 그다음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동영상으로 볼 때와는 그 속도감이 천지 차이였다.

시작하자마자 다른 선수들과 거리를 벌린 그는 아차 하는 사이에 레인 끝까지 도착했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몸을 돌려 마찬가지로 가장 먼저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50미터 기록을 알리는 전광판 속 호진의 이름 옆으로는 당연하다는 듯 1이라는 숫자가 박혔다.

와아ㅡ. 점점 열기를 더해가는 환호성 속에서 호진이 가장 먼저 패드를 터치했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1위였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역시 유호진 선수, 이변 없이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아주 좋았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는 경기를 마친 호진은 물속으로 푹 잠겼다 나오며 전광판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내내 켜 둔 핸드폰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기록 자체는 평소 유호진 선수가 내 주던 기록에 비해 살짝 떨어져 있긴 합니다만.”

“선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은 표정입니다.”

정인의 눈에 지금 호진의 표정은 이전의 대회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해설자들은 마치 호진이 정말로 경기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그런 그의 처지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의미가 참 큽니다, 부상 이후 첫 경기였기 때문에 사실은 출전 자체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많거든요?”

왜?

“그렇습니다. 400미터도 힘내 주기를 바랍니다.”

어째서?

“네, 유호진 선수. 지금은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하겠습니다.”

압도적인 차이로 일등을 했는데 왜 다들 이런 말을 하는 거야?

“400미터 기대하겠습니다.”

경기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유호진일까, 당신들일까.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물을 빠져나온 호진은 이제서야 겨우 거친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메달의 색깔 같은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거다.

“남자 400미터, 잠시 후 경기 시작됩니다.”

100미터 경기가 끝난 뒤로도 화면 속의 해설자들은 끊임없이 호진의 기록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터치에서 오른손을 썼다느니, 75미터 지점에서 살짝 스피드가 줄었다느니. 경기와 경기 사이에 텀이 뜰 때마다 몇 번이나 영상을 돌려 보며 초 단위로 그의 경기력을 분석하고 평가했다.

“어깨 부상은 거의 완벽하게 회복을 했다고 봐도 되겠고요, 400미터는 유호진 선수가 가장 자신 있게 해내는 종목이니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해 볼 수 있겠습니다.”

“부상을 감안하면 사실 100미터의 기록도 굉장히 잘해 준 거예요.”

전부 호진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러려니 하며 넘길 수가 없었다. 선심 쓰듯 던져 주는 칭찬이 한마디씩 나올 때마다, 여태까지 호진이 느껴 왔을 부담감의 무게가 정인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큰 착각을 했다. 사람들은 고작 금메달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금메달 획득은 아예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전제로 깔려 있었고, 빽빽하게 관중석을 메운 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유호진의 새로운 승리였다.

그리고 호진이 넘어서야 하는 상대는 바로, 가장 완벽한 컨디션 아래 생애 최고의 결과를 낸 과거의 자신이었다.

“…….”

운동을 그만둔 뒤로는 트랙을 돌아 본 적이 없으니 호진이 느끼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전부 이해한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인도 분명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더는 따라잡을 등이 없는 곳에서의 싸움을, 한없이 길고 외롭게만 느껴지는 그 마지막 순간을.

“1번 레인, 강원도청 김우석 선수. 2번 레인, 한국 체대 이상현 선수.”

경기장에 나타난 호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파랗게 질린 물 너머로 레인의 끝을 노려보고 있었다. 선수들이 소개될 때마다 관중석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4번 레인, 한국 대학교 유호진 선수.”

그리고 호진의 차례가 되자 이번에는 그야말로 천둥 같은 환호성이 내리꽂혔다.

호진은 100미터 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몸을 풀었다.

“남자 일반부 자유형 400미터 결승 3조,”

그때, 어디선가 흙먼지 냄새가 났다.

“출발합니다.”

낮은 톤으로 울리는 버저음이 마치 출발을 알리는 총성 같았다.

“…아.”

물가를 내다보던 정인의 머릿속에 문득 드넓은 트랙 하나가 펼쳐졌다.

새하얀 연기를 내뿜는 총구와 함께였다. 먼 곳까지 쭉 뻗은 직선 주로와 그를 따라 늘어선 폴대, 바람을 따라 한들한들 흔들리며 남은 거리를 알리는 깃발들. 사진처럼 뇌리에 남은 풍경이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입수 깔끔했고요, 초반 페이스 아주 좋습니다.”

50미터 지점을 돌아온 호진은 빠르게 차이를 벌렸다. 그리고 정인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자신이 달렸던 모든 길들을 선명히 떠올려 냈다.

“유호진 선수, 빠르게 선두권으로 진입합니다.”

남은 거리를 가늠하며 충분히 아껴 둔 체력, 아직은 뒤따르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거리.

한계치까지 오른 아드레날린이 내딛는 걸음마다 흩어지고 마침내 머릿속이 고요한 적막으로 잠겨 들면,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 출발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내내 천지를 흔들던 관중석의 환호성마저도 남의 일처럼 새하얗게 멀어질 뿐이다.

“이제 200미터 지나갑니다.”

절대 따라잡힐 리 없다. 확정적인 승리가 눈앞에 빛나고 있다. 하지만 경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닥 위에는 천장이 있고, 천장을 뚫고 올라가면 끝도 없이 뻗은 하늘이 버티고 있다. 이제부터는 누구를 넘어서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한참을 앞으로만 달려 나가야 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스퍼트 올리면서, 150미터 지점 돌아갑니다. 차이가 꽤 많이 나고 있어요. 작년 여름 기록보다는 1초 정도 느립니다.”

내뱉는 숨이 시고 그 자리에 들어차는 공기는 쓰다. 근육이 터질 듯 부풀고 심장의 박동은 아슬아슬하게 임계점을 스친다.

그럼에도 결승선은 단 한 발짝을 이쪽으로 와 주는 법이 없고, 그렇게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트랙 위를 달리다 보면 기어이 맞은 편에서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야속하고 원망스러워질 때가 있다. 이렇게 힘든 일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무용한 후회에 빠질 때도 있다.

“마지막 100미터 남았습니다, 유호진 선수. 압도적인 차이로 선두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스피드 올라가고요, 킥 떨어지지 않게 잘 유지하고 있는 모습 보입니다.”

하지만 호진아, 너도 분명 알고 있잖아. 이제 한고비만 더 넘기면 된다는 걸.

지금 당장은 죽을 것처럼 힘들고 외로워도, 몇 번의 들숨을 더 견디면 머지않아 모든 것이 끝난다는 걸.

“이제 50미터 턴입니다.”

지치지 않기를, 다치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며 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한 번의 스트로크를 마친 팔이 물의 무게를 견디며 솟았다. 망설임 없이 패드를 찍자 잘게 부서진 물방울이 벽 너머로 튀어 올랐다.

***

물속에서의 모든 순간, 호진은 오로지 정인만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오라던 언젠가의 한마디에, 설령 꼴찌를 해도 너는 변함없이 유호진이라던 그 다정한 말에 의지해 오늘의 전부를 견뎠다.

“유호진 선수, 무난히 1위로 들어왔습니다.”

커다란 환호성이 경기장의 천장을 들이받았다. 호진은 저 멀리의 전광판을 내다보았다. 제 이름 옆에 찍혀 있는 1이라는 숫자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하아….”

마지막 경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계시는 주어지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노력을 믿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고, 고맙게도 그것은 배신하지 않았다.

“…하.”

계시를 따라가지 않고 일궈 낸 첫 승리. 두말할 것 없이 뜻깊고 고마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양옆 레인의 선수들이 인사를 건넸다. 호진은 얼른 잡념을 거두고 그들과 악수를 나눴다. 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코치가 타월을 내밀었다.

“수고했다, 호진아.”

“감사합니다.”

경기 중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서서히 올라왔다.

낮은 수온에 익숙해져 있던 피부가 따갑고, 부상을 입은 쪽의 어깨도 뻐근했다. 한껏 긴장해 있던 신경이 가라앉으며 사고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마지막에 패드는 왜 그렇게 찍었니? 밑에서 한 번 더 돌리던데.”

그러나 코치는 벌써 경기 영상을 돌려 보고 있었다. 멍하니 수건으로 몸을 닦아 내던 호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손목 때문에요. 200미터 턴부터 척골 안쪽이 저릿저릿해서.”

“어깨는?”

“조금 뻐근하네요.”

그 말에 코치는 태블릿 위로 새 스케줄을 적어 넣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센터에서 보자, 우선 물리 치료부터 해야겠다.”

“…네.”

정말 끝이 없구나. 쓴웃음을 지으며 지친 걸음을 떼려는데,

“호진아.”

와글와글 들어찬 함성 사이로 절대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플래시가 피어나는 관중석의 어느 한 지점에 눈길이 머물렀다.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구석, 까만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정확히 이쪽을 향해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꽤 먼 거리였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들리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러니 조금 전의 나지막한 부름은 아마 환청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것도 헛것일까, 아니면 귀신일까. 누군가가 너무 보고 싶어지면 이렇게 정신이 나가기도 하는 걸까.

그때,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던 사람이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아….”

하얗게 비어 있던 머릿속으로 피가 확 돌았다. 호진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를 향해 달려갔다. 높은 계단을 두 개 세 개씩 성큼성큼 밟아 오르며,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한 곳만을 향해 보폭을 넓혔다. 마치 물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형.”

여전히 저를 향해 뻗어 있는 두 팔의 사이로 파고들어 정인을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팔이 등 위로 감겨들었다. 호진은 그제야 이게 꿈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정말 잘했어, 너무 고생했어.”

물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정인이 말했다.

“너무너무 수고했어, 네가 제일 잘했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호진은 힘없이 정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단단히 받쳐 주는 힘에 기대어 심장 속에 남은 마지막 화기를 한숨처럼 토해 냈다.

“금메달 축하해, 호진아.”

오늘 하루,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이 끊임없이 귓가에 반복되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언제부터 와 계셨어요.”

다 타고 남은 잿무덤까지 뒤집어 몇 번이고 불을 붙이는 것만 같던 하루였다. 그 긴 하루의 끝에 이런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온다고 말이라도 해 주시지, 너무 먼 길인데 혼자…. 정말 어떻게 여길 오실 생각을 했어요,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중요한 경기인데 집중력 흐트러질까 봐.”

그렇게 말하며 정인은 사과꽃처럼 웃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예쁘기만 하고 도무지 현실인 것 같지는 않아서,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더듬어 확인해야만 했다.

“오늘 너무 멋있었어, 정말로.”

정인이 재차 칭찬했다. 경기고 나발이고 흐물흐물 녹아 버린 호진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인을 꽉 안았다. 정말이지 이 자리에서 한 줌 흙이 되어 버린대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아 참, 이러면 안 되는데….”

“응?”

슬슬 정신이 돌아오며 그제야 정인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물이 잔뜩 묻은 채로 안아 버린 탓에 역시나 옷이 조금 젖어 있었다.

“걸칠 것 드릴 테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호진은 얼른 정인을 관중석 아래로 이끌었다.

“계단 높아요, 조심.”

“응.”

행여나 넘어질까 손을 잡아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러잖아도 정인에게 시선이 쏠려 있는데 여기서 더 기름을 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 호진아. 수고했다.”

“너도 수고 많았어.”

함께 경기한 선수들이 호진을 지나치며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그중에는 정우와 유영도 있었다.

“유호진. 오늘도 미정이 데리고 왔냐?”

정우는 호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고, 곁에 서 있던 유영도 면박을 줬다.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데리고 왔겠지, 이러다 아주 청첩장 날아오겠어.”

다들 긴장이 풀려 이제 아무 말이나 막 내던지는 것 같았다. 호진은 힘든 시간을 기꺼이 함께해 준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악수를 청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았다, 같이 출전해 줘서 고마워.”

“고마우면 인터뷰 끝나고 밥 같이 먹든가. 친구분도 같이 가실래요? 오리고기 먹을 건데.”

유영이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정인을 흘끔댔다. 그에 호진은 정인을 등 뒤로 쏙 감춰 버렸다.

“아, 멀리서 와 준 형이라 식사는 내가 따로 대접하려고. 다음에 같이 먹자.”

“그래, 그럼.”

가려 놓아도 누구의 눈에나 예쁜가보다. 호진은 손을 뻗어 정인의 모자를 조금 더 깊게 누르며 복도 안으로 들어섰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수많은 선수와 스탭들이 호진을 지나쳐 갔다. 그들에게 열심히 인사하며 텅 빈 탈의실에 들어섰다.

정인을 벤치에 앉혀 두고 일단 미정이부터 꺼냈다. 그다음에는 고이 접어 둔 옷들 중에서 가장 깨끗한 것을 골라 돌아섰다.

“어?”

그런데 어째서인지 정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깜짝 놀란 호진은 얼른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추워요? 몸 안 좋아요? 의료진 불러올까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호진은 재촉하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의 적막을 지나 정인이 내놓은 질문은, 호진의 예상 속에는 없던 것이었다.

“미정이가 누구야?”

***

이제 막 힘든 경기를 마친 사람에게 따져 물을 만한 것이 아니다. 다 큰 성인은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른스럽게 넘기기엔 아직 이 속이 너무 좁았다.

“그냥, 선수들이 하는 얘기 들으니까 많이 친한 사이 같기도 하고…. 궁금해서.”

선수들끼리 장난치듯 하는 말 같긴 했지만, 호진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까지 찾아온 그 늘씬한 미인이 바로 ‘미정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혹시 아까 백 미터 경기할 때 너한테 인사한 사람이야?”

“…….”

호진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정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니다, 미안. 대답하기 곤란하면 됐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온통 걱정으로만 가득 차 있던 호진의 표정이 별안간 무섭게 굳었다.

“그냥…. 읍.”

커다란 손이 훌쩍 다가와 허리를 감싸고, 그대로 몸을 숙인 호진이 정인에게 깊게 키스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입술에 놀라 등을 쭉 빼자 그는 그대로 그만큼을 좁혀 다가섰다. 그러면서도 정인이 뒤로 넘어지지 않도록 등을 단단하게 받친 채였다.

아직 경기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그는 평소보다 조금 급해 보였다. 고작해야 요 며칠 사이 두세 번 정도를 해 본 게 22년 인생 키스 경험의 전부이니 벌써부터 이렇다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만, 조심스럽기만 하던 이전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잡아먹을 듯 입 안을 샅샅이 훑어 내리고, 도망칠 틈도 없이 혀를 섞어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 호진아, 나 숨 못 쉬어….”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호진의 어깨를 살짝 떠밀었다. 그에 호진은 정인의 목을 쓸어내리며 숨을 고르나 싶더니,

“3초 정도면 되죠? 육상 하셨으니까.”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잠깐만, 잠깐만. 언제 적 얘길 하고 있어.”

정인은 얼른 그의 어깨를 떠밀었다. 그는 밀어내는 손에 곧장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는 정인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살짝 돌아 있었다.

“여기서 이런 짓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

게다가 너 이제 시상식도 있을 거고, 끝나고 인터뷰도 하잖아.”

“하…. 그렇죠.”

장난으로라도 정인의 앞에서 인상 한 번 찌푸리는 법이 없던 호진은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더니 반쯤 뒤로 넘어가 있던 정인을 일으켜 앉혀 주었다. 그러고는 별안간 등을 보이며 돌아앉았다.

“잠시만요.”

“왜?”

“그냥….”

크게 심호흡을 할 때마다 잔뜩 부푼 등 근육이 화라도 난 듯 움찔거렸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왠지 민망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벤치 구석에는 호진이 락커를 열자마자 꺼낸 인형이 놓여 있었다. 퀸즈 아일랜드에서 정인이 선물한 것이었다.

“걔가 미정이에요.”

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는지, 호진이 말했다. 정인은 인형의 꼬리 부분을 잡아 들어 올렸다. 얘? 하고 묻는 말에 단정한 뒤통수가 끄덕끄덕 위아래로 움직였다.

“미니 정인이요.”

“뭐?!”

이어지는 말에 소름이 쭉 돋았다. 정인은 푹신한 인형을 그의 등짝에 처박았다.

“무슨…. 아니, 진짜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리고 오늘 온 친구 이름은 박혜나예요.”

괴상한 이름을 붙여 놓은 인형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호진은 귀신같이 그를 캐치해 아랫배에 딱 붙이듯 안았다. 그러고는 그제야 정인을 향해 돌아 앉았다.

“혜나는 좋은 친구지만 형이 마음 불편해할 만한 사이는 결코 아니에요. 형과 부모님 외에 사적으로 연락하는 사람 단 한 명도 없어요. 그래도 그런 오해 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두 번 물을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확실하게 정리됐다. 그 깔끔하기 그지없는 말을 듣고 있으니 그래도 나름대로 형인데 너무 속 좁게 군 것 같아 더 창피해졌다.

“…네가 미안할 건 아니고.”

“왜 아니에요. 백 미터 할 때부터 신경 쓴 거면 못 해도 두 시간은 혼자 마음 불편했다는 건데.”

호진은 안쓰러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정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마저도 손바닥에 거칠게 일어난 굳은살이 피부를 긁을까 봐 걱정인지, 닿는 듯 마는 듯 스치기만 했다.

“형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한 거 없으니까, 앞으로는 절대 눈치 보지 마세요. 어떤 생각이든 생각 나는 그대로 다 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응.”

목소리가 우물우물 기어들어 갔다. 호진은 웃으며 커다란 트랙 톱과 제 자동차 키를 건네주었다.

“시상식 끝나면 인터뷰 다 끊고 바로 나갈게요. 먼저 차에 가 계세요.”

부들부들 좋은 향기가 나는 옷자락에 코를 묻으며 정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호진. 아까 보니까 너 무슨 찌라시 떴던데?”

단상 위는 고등부 시상식으로 한창이었다. 대열을 맞추느라 잠깐 틈이 난 동안, 유영이 호진을 옆구리를 툭 찌르며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찌라시?”

“지금 핸드폰이 없어서…. 하여튼 네가 무슨 눈 튀어나오는 부자랑 사귄다더라고.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면서.”

“아. 그거?”

어렵지 않게 인과를 유추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호진은 혜나를 떠올리며 씩 웃었다.

“오늘 학교 친구가 응원 와 줬거든, 그 친구 집안이 대대로 크게 사업하는 곳이라 그런 얘기 나왔나 봐.”

“뭐 얼마나 유명한 데길래?”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물류 쪽이었던 것 같아.”

“우와….”

유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진짜 너랑 사귀는 거 아니면 나 소개해 줘. 나 진짜 잘할 수 있다.”

“음, 그럼 일단 그 친구한테 소개받을 의사 있는지 먼저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연락 줄게.”

혜나도 유영도 좋은 사람들이니 서로 안면을 트고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 잘생겼다고도 해 줘.”

“하하하, 알겠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시상자가 나타났다. 유영과 호진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남자 일반부 자유형 400미터 3위, 경인 체육 대학교 최유영.”

유영이 먼저 단상에 서고, 2위를 차지한 정우도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호진의 이름이 불렸다.

“1위, 한국 대학교 유호진.”

영광스러운 박수갈채 속에서 단상에 올랐다. 오늘의 시상자는 대회가 열린 지역의 국회 의원이었다.

“수고가 많았어요, 호진 선수.”

내미는 손을 마주 잡고 막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호진의 팔을 도닥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결과에는 너무 연연하지 말고, 마음 잘 다잡아서 다음번을 위해 힘내 줬으면 해요.”

무엇을 연연하지 말란 말인가. 무엇을 다잡으란 말인가. 호진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예, 감사합니다.”

어쩌면 단상의 높이가 너무 높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높은 자리에 서서 땅을 내려다보니, 금방이라도 그 아래로 곤두박질칠 듯 눈앞이 울렁거렸다.

***

대회가 끝나자마자 터져 버린 지라시에, 정인은 시상식도 보지 못하고 대회장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새로 고침을 연타하자 아직 내려가지 않은 게시물 하나가 나타났다.

[펌] 5분 있다 삭제한다 수영 ㅇㅎㅈ 재벌 3세랑 사귈 수도 있음

믿고 말고는 니들 맘대로. 나도 아는 형님이 기자여서 알게 된 거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고ㅋㅋ

오늘 ㅇㅎㅈ이 대회에서 자기 보러 온 사람이랑 인사를 했거든?

근데 분위기가 그냥 아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서, 기자들끼리 누군지 알아내려고 사진 돌려 보다가 뜬금포로 재벌 3세 얘기가 나옴.

너무 어릴 때 사진만 있어서 처음에는 다들 긴가 민가 했는데, 경제지 쪽에서 짬 좀 있는 기자한테 보여 주니까 바로 알아보더래.

ㄹㅇ 웬만한 기업은 혼자 바르는 재벌인데 열두 살 때 추정 재산이 5천억 넘었다 함ㅋㅋㅋ 진짜 사귀는 거면 쟤 조만간 선수 때려칠 듯ㅋㅋ

댓글 (5)

스카너원챔8년차 : 열두살 5천억 실화냐ㄸㄷㄷ 지금쯤은 조 단위 됐겠네ㄷㄷㄷ

KingOfBenchPress : 이런 개소리를 믿는 흑우가 진짜있누ㅋ;; 그정도 급에 뭐가 아쉬워서 유호진을 만남? 동네 헬스장만 가도 저렇게 생긴 애들+피지컬 좋은 애들 널리고 널렬ㅆ는데ㅋㅋ

처갓집양념오골계 : 유호진 피지컬이 동네 헬스장?ㅋㅋ

훈이아빠 : 스폰일수도 있겠네요 ㅎ

대감마님 : $$$ 집에서할수있는 고수익알#바 $$$ 월 300만원 보장$$$ 클릭 ^^ https://1882281.sto.cc

“도대체 어떤 뱀 같은 새끼가….”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며 포문을 연 것치고는 내용이 아주 상세했다. 이 정도면 오늘 경기장에 왔던 기자 중 한 명이 최초 유포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선 여론부터 조장한 뒤 한창 시끌시끌할 때쯤 특종 삼아 보도해 버리면 책임을 묻기가 애매해진다는 걸 알고 한 짓 같았다. 굉장히 머리가 좋은 놈이었다.

“네, 선생님.”

타이밍 좋게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이삼일 내로 최초 유포자를 특정할 수 있을 거란 소식을 전했다.

“게시물 삭제도 제대로 처리되고 있는 거 맞나요? 아뇨, 합의는 없어요. 조금 복잡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갈 거예요.”

다시는 함부로 손가락을 놀리지 못하도록 초장에 씨를 말려 버릴 작정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일은 꼭 선생님만 알고 계셔야 해요, 꼭이요….”

이쯤 되니 경기를 보러 온 게 큰 실수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신으로 인해 추문에 휩싸인 호진도 걱정이고, 혹시라도 가족들이 알게 될까 봐 그것도 걱정이었다.

“…그냥 나가 죽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차창에 쿵쿵 이마를 박고 있는데,

“형,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조수석 문이 확 열렸다. 그대로 튕겨져 나갈 뻔한 것을 받아 준 것은 호진이었다.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홉뜬 눈에 서슬 퍼런 경악이 어려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잘 끝냈어?”

“잠깐만요.”

그는 곧바로 정인의 앞머리를 올려 이마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별다른 외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왜 그러신 거예요?”

“그냥.”

이건 사실 외국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발견한 정인 나름의 파훼법이었다. 조금 원시적인 것 같긴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거나 속이 너무 시끄러울 땐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괜찮아, 살살 박았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반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일단은 애가 좀 놀란 것 같으니 그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정인은 큰맘 먹고 호진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반듯한 이마에 살짝 입 맞추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호진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살살도 안 돼요. 형을 괴롭히는 건 형이어도 용납 못 해요.”

그 말에 정인은 피식 웃었다.

“용납 못 하면 어떡할 건데.”

“최정인 애인 권한으로 앞에 앉혀 놓고 알아들을 때까지 타일러야죠,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막연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국가 대표의 근성과 체력, 서당 출신의 꼰대력까지 모두 갖춘 이의 밤샘 설교는….

“알았어, 앞으로 안 그럴게.”

역시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약속이에요.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알겠다고.”

호진은 기어이 새끼손가락까지 걸어 한 번 더 확인을 받은 후에야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차 많이 빠졌네요.”

“응.”

이중 주차까지 불사하며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차들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우르르 빠져나갔다. 멀리 주차되어 있던 정인의 차도 대리 기사를 통해 진작 서울로 옮기는 중이었다. 정인은 드문드문 비어 가는 주차장을 바라보며 호진에게 물었다.

“대회 끝났으니까 오늘 저녁은 풀로 쉬는 거지?”

“네?”

호진은 차단기에 막 주차권을 넣으려다 말고 정인을 돌아보았다.

“너 컨디션 괜찮으면 연남동 가서 간단하게 밥 먹고 가자. 사람 많이 없는 곳 알아.”

“헉…. 설마.”

그 말에 호진이 부들부들 떨며 곰 같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제 생각 해서 식당까지 알아봐 주신 거예요?”

두 번 알아봤다간 비명이라도 지를 기세다. 정인은 번쩍이는 눈을 애써 무시했다.

“…밥은 꼭 오늘이 아니어도 언제든 같이 먹을 수 있는 거니까 최대한 네 몸에 무리 가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해. 피곤하면 바로 쉬고.”

“그럴 리가요, 하나도 안 피곤해요.”

호진은 황소 같은 기세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따가 센터도 가야 해서 중간에 밥 한 끼는 먹어야 돼요.”

“…또 어딜 간다고?”

이제 막 대회가 끝났는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그를 돌아보았다. 호진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정인을 보며 웃었다.

“코치님이랑 경기 디테일 보기로 했거든요. 아마…. 다음 대회 이야기도 나올 것 같고요.”

“호진아, 잠깐만 차 세워 봐.”

“네?”

정인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운전 내가 할게, 나랑 바꿔.”

대회가 끝나자마자 불러들여 경기를 분석하고 다음 대회 이야기까지 꺼낸다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인 걸까. 수영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니 차마 뭐라 입을 댈 수는 없지만, 하다못해 중등부 육상조차도 대회가 끝나면 선수는 무조건 쉬게 한다.

“저 괜찮은데….”

“호진아.”

왜 대회에 출전하기를 꺼리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머뭇거리다 내놓은 대답을 떠올렸다. 싫은 것 같다고. 힘들어서라고.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아하던 일이라 해도 이쯤 되면 넌더리가 날 것이다. 쇳덩이로 만들어진 기계도 이렇게 돌리면 반드시 오류가 나기 마련인데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이 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낼 수 없는 건, 이 길이 호진이 택한 길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섣불리 멈춰 세우거나 등 떠밀지 않아도 그가 스스로 균형을 잡으리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기 때문이다.

“나 지금 유호진 애인 권한으로 타이르는 거야, 알아들어 줘.”

이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해야 운전뿐이라니. 정인은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쥐었다. 한 겹 옷 너머로 군데군데 몸을 꽉 조여 놓은 테이프가 느껴졌다.

“…그렇죠.”

온몸이 넝마 조각처럼 너덜너덜할 텐데도, 호진은 웃으며 정인의 손등 위로 제 뺨을 비볐다.

“맞아요, 형이 제 애인이죠.”

이 와중에도 그저 그게 좋아 미치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정인은 아픈 부위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를 안아 주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네.”

조수석으로 돌아온 호진은 순순히 시트를 젖혔다. 파리한 피로가 드리운 눈이 정인을 향해 깜빡이나 싶더니 이내 스르륵 감겼다. 그리고 정인은 그가 완전히 잠에 빠져든 다음에야 살며시 핸들을 움켜쥐었다.

***

호진은 무교였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서 사탕을 받아먹기도 했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기도 했지만 진지하게 종교에 믿음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혀, 형. 옆에, 옆에, 옆에.”

“알아.”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정인이 한 번 차선을 바꿀 때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과 목탁 소리가 아련하게 울리고, 화물 트럭 하나를 추월할 때마다 동네 목사님의 인자한 웃음이 눈앞까지 확 다가왔다가 사라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생전 본 적도 없는 코란까지 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형, 그, 저기, 허억….”

“잠이나 자라니까, 글쎄.”

“아뇨, 그럴 수가…. 으윽. 으!”

대회가 끝난 직후면 으레 느껴지던 탈력감 따윈 없었다. 위로 아닌 위로에 복잡하던 머리마저도 텅 비어 버린 지 오래였다.

이 차를 몬 지 햇수로 2년은 되었지만 ESS1)가 작동하는 건 맹세컨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정말이지 평생 들을 ESS 경보는 오늘 다 듣는 것 같았다.

정인은 교묘하게 다른 차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미친 듯이 과속을 하고, 그를 감당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운전 습관을 더럽게 들였는지, 이따금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갈 때 아우토반 구간에서나 본 미친 차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여기는 아우토반이 아니라 제한속도가 100밖에 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고속 도로다.

“안 죽어.”

정인은 덜덜 떨고 있는 호진을 흘끔 바라보더니 놀라울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이러면 죽을 거예요.”

호진은 어시스트 그립을 꽉 움켜쥐었다. 운전자가 누구든 커버가 가능한 보험을 들어 둔 게 이 상황에서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제발 오늘만큼은 그 보험사에 연락할 일이 없길 바라며, 호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하반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그런 걸 다 외우고 다녀? 불교야?”

호진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저절로 생각나네요.”

정말로 호진 스스로조차도 자신이 이걸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막 깨달은 차였다.

차는 머지않아 웬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호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코너를 돌자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흰 손마디 사이로 스티어링 휠이 스르륵 풀렸다. 기가 막히게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직후에 보니 더 그랬다.

“수고…하셨어요.”

“그래.”

후덜덜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겨우 차를 벗어났다. 정말 다행히도 이번에는 가벼운 접촉 사고 하나 없이 왔지만, 앞으로 정인에게 운전대를 맡겨선 안 될 것 같았다.

“좀 어두울 거야, 발밑 조심해.”

정인은 건물의 주출입구를 그대로 지나쳐 그 옆의 작은 철문을 열었다. 곧 복도가 나타났다. 사방이 꽉 막혀 있는 통로였다.

“같이 가요, 형.”

어둡고 밀폐된 공간. 혹시라도 정인이 무서워할까 봐 호진은 얼른 그의 곁에 붙어섰다. 그러나 정인은 아무렇지 않게 어둠을 헤치고 나가 복도 끝의 문을 열었다.

캄캄하기만 하던 호진의 발아래까지 따스한 빛이 밀려들고, 빛과 어둠을 절반씩 머금고 있던 정인은 이내 온전히 빛 속으로 빠져들었다. 말문이 턱 막히도록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너무 빨리 지나가네.”

원경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생 바를 조금 더 앞으로 당겼다.

유호진 선수가 나온다는 소리에 연차까지 써 가며 경기를 챙겨 봤다. 작은 대회라 그런지 스포츠 전문 채널에서는 재방송도 없이 한 번만 보여 주고 마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다행히도 온라인에 생중계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제 여자 400미터 자유형 시작합니다.”

“이런.”

너무 많이 넘겼다. 미세하게 손가락을 컨트롤해 조금 더 앞의 장면을 살폈다. 대회 일정과 몇몇 기업의 광고 이미지 뒤로 스케치가 한 장면씩 지나갔다.

카메라는 정비가 한창인 대회장을, 경기 준비 중인 선수들의 모습을 한 번씩 비췄다. 그리고 해설자에게로 돌아가기 직전, 1초 남짓의 시간 동안 관중석의 전경을 크게 잡아 보여 주었다.

글자 그대로의 찰나였고 사람의 형상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작았다. 하지만 원경은 어김없이 그쯤에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아무리 작고 흐려도 배 아파 낳은 새끼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멀리서 잡은 관중석의 가장자리에는 까만 모자를 쓴 정인이 호진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벌써 열 번은 족히 본 모습인데도 너무 좋아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사귀는 사이인가?”

잠깐 떠돌았다는 찌라시의 내용을 떠올리며 원경은 실없이 웃었다.

최초 유포자는 현욱이 바로 잡아냈고, 잘 알아듣도록 타일러 보내는 일은 고맙게도 원경의 옛 동료들이 맡아 주었으니 아마 더는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간의 말을 혼자 짊어져야 하는 선수에게는 역시 부담이 될 것 같았다.

“많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창 즐겁기만 해야 할 나이에 그런 압박감을 느끼며 지낼 것을 생각하면 한없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괜히 제가 다 대견스럽기도 했다.

조직배양 전문가와 서양화가의 아들이라 했던가. 단지 친한 친구 사이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너무 멀리 나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선수의 부모님 되시는 분들이 궁금하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원경아.”

“헉.”

기척도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원경은 황급히 노트북을 닫았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귀신처럼 문가에 우뚝 서 있던 정훈과 눈이 마주쳤다.

“어, 어, 언제 왔어요? 왜 이렇게 일찍, 아니. 밖에서 저녁 식사 한다고 하지 않았나? 누구 만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천천히 다가와 원경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뭘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놀라?”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이 좀 남아서….”

노트북 뚜껑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원경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런데 정말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상대쪽 일정이 좀 꼬였어. 어차피 밥은 핑계고 하고 싶은 말이야 따로 있을 텐데, 급하면 연락하겠지.”

얼른 정훈을 이끌고 거실로 향했다. 그는 코트를 벗어 스타일러 안에 걸어 놓은 뒤에야 소파에 앉았다. 왠지 평소보다 조금 더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신경이 쓰인 원경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재수 없는 소리를 좀 들어서. 별건 아니야.”

재수 없는 소리?

설마 그 잠깐을 떠돈 찌라시가 정훈의 귀에도 들어갔나 싶어진 원경은 조용히 그의 기색을 살폈다. 별말 없이 뉴스를 트는 것을 보니 다행히도 그건 아닌 듯했다. 정말로 그런 얘길 들었다면 분명 뭐라도 사달이 났겠지.

“6년 전 달로 떠났던 무인 탐사선 NAAE 16-B호가 올여름 지구로 돌아옵니다. 예상 귀환 시기는 6월 말에서 7월경으로, 이번 귀환을 위해 개발된 유인 탐사선 22-A호에는 16호를 인양할 우주 비행사가 탑승합니다. 그간 수집한 토양 샘플과….”

뉴스 속의 세상은 여전히 번잡하고 바빴다. 누군가 멋진 기술을 개발했다느니, 몇 년 전 쏘아 올린 우주선이 곧 돌아올 예정이라느니.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원경은 정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편안하고 느긋하게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당연하다는 듯 손마디가 얽혔다. 그때였다.

“다음은 스포츠 소식입니다.”

화면이 바뀌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난데없는 공중파 방송의 습격에 원경은 숨을 멈췄다.

“오늘 낮 열린 소청 전국 수영 대회 출전한 세 명의 국가 대표 선수가 모두 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생중계 화면을 그대로 가져다 썼는지, 아니면 애초에 공중파 방송과의 공조였는지. 한창 물살을 가르는 호진의 모습 뒤로는 조금 전 원경이 보고 있던 것과 완전히 동일한 스케치 화면이 지나갔다.

온라인 동영상에 비해 쓸데없이 화질이 좋았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지만 이미 정인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고 있는 원경은 호진을 끌어안고 있는 정인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

다행히도 화면은 금세 바뀌어 인터뷰 중인 호진의 모습을 크게 잡았다.

“앞으로도 열심히 훈련에 임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못 봤겠지?

1초도 채 되지 않는 장면이고, 화면 속 정인의 모습은 면봉만큼 작았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뉴스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다. 약간의 희망을 담아 정훈을 돌아보았다. 그는 온화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지 마요.”

원경은 허탈하게 한숨 지었다. 평생 살을 맞대고 살아온 사람의 표정을 단숨에 읽어 버린 탓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냥 그러지 마요.”

장담하건대, 저건 분노로 눈이 뒤집히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

“…아.”

귀가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왜요? 어디 불편해요?”

정인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호진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인은 아직도 간지러운 귀를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툭툭 때리며 고개를 돌렸다.

드넓은 통창 너머로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잎이 큼지막한 식물들과 따뜻한 불빛이 어우러져 늦은 저녁에도 운치가 있었다.

“…예뻐요.”

호진이 말했다. 정인은 초에 불을 붙이며 그에 맞장구쳤다.

“여기 조용하고 괜찮아.”

“아…. 여기요?”

그는 사방에 가득한 관엽 식물과 조명을 한 번 성의 없이 훑고는 웃었다.

“그렇네요.”

왠지 불길했다. 설마설마 싶어진 정인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방금 전엔 형이 예쁘다는 거였어요.”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말이 쏟아졌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본격적으로 정인을 쳐다보았다. 집요하게 닿아오는 시선이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그런데요, 형도 형이 예쁜 거 아시는 거죠?”

“…뭐?”

장난기도 웃음기도 없이 진지하기만 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주 없는 칭찬에는 부끄럽지도 않잖아요.”

“…….”

“저는 그렇거든요. 운동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면 가끔 민망할 때도 있지만, 아예 해당 사항이 없는 칭찬은 정말 남의 일로만 느껴져서 감흥이 없어요.”

왠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정인은 찬물이 담긴 컵을 집었고, 호진은 그런 정인의 앞에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저녁이니까 따뜻한 거 드세요. 그리고 형은 누가 봐도 예쁜 사람 맞아요.”

“…….”

“듣는 사람 아무도 없이 우리 둘이서만 하는 얘긴데,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피차 다 아는 사실이니 민망해하실 거 없어요.”

정인은 손바닥으로 찻잔을 감싸 쥐고 툴툴거렸다.

“…그러는 너야말로 예쁘고 착한 수영 천재야.”

“네?”

“부상까지 입고도 시즌 첫 대회에서 금메달을 두 개나 땄잖아. 착하고 예쁜 데다 수영도 요리도 세상에서 제일 잘해. 이것도 너나 나나 다 아는 사실이지.”

똑같이 민망하게 만들어 줄 심산이었다.

“그래서 제가 좋으세요?”

그러나 호진은 여우 구슬 백 개를 삼킨 구미호처럼 요사스럽게 웃기만 했다.

“으….”

“예쁘고 착한 수영 천재라서, 형은 제가 좋으시냐고요.”

왠지 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정인은 부들부들 떨며 차 한 모금을 넘겼다. 그와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리며 아뮤즈부쉬가 차례로 나왔다. 조용히 식사하고 싶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 둔 덕에 서버는 조용히 음식만 내려놓고 나갔다.

고아한 적막 속, 정인은 트러플 향이 솔솔 올라오는 계란찜에 스푼을 찍어 넣었다. 그러고는 용기 내 지나간 질문에 답했다.

“…좋아.”

스푼을 든 손이 달달 떨렸다. 정인은 어서 제가 한 말이 휘발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호진은 그걸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잘 못 들었는데, 뭐라고 하셨어요?”

빙글빙글 웃으며 묻는 걸 보니 다 들었으면서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았다.

한 번 해 본 말이니 두 번이라고 어려울 게 있겠느냐 싶으면서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대단한 걸 뱉어 낸 것 같기도, 삼킨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입만 달싹이던 정인은 마지막 남은 기운까지 전부 끌어모아 한 번 더 말했다.

“…네가 좋다고.”

고작 다섯 글자밖에 되지 않는 말이 왜 이렇게 어색할까.

잠깐 생각해 보니 이게 처음이다. 사귀기로 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야 많아도 먼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모두 그가 깔끔한 선택지를 만들어 던져 준 덕이다.

만나 보자는 말에, 좋아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그는 늘 조금도 머리를 굴리지 않고 온전한 진심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 당연한 사실 앞에 정인은 조금 미안해졌다.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저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왜 여태까지 이 말을 해 주지 않았나 싶어서.

“한 번만 더 말해 주세요.”

연신 실실 웃고 있던 호진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었다. 정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다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못 이기는 척 따라가며 정인은 밀린 빚을 갚아 가듯 한 번 더 말했다. 그래도 두 번을 무사히 넘기고 나니 세 번째는 어렵지 않았다.

“네가 좋아.”

이마 위에서 쪽, 하는 소리가 울렸다. 주저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도 좋아해요.”

이제 겨우 아뮤즈부쉬의 첫술을 떴으니 애피타이저와 메인을 지나 디저트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 첫사랑도 마찬가지로 이제 겨우 첫술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배가 부르니 어쩌면 좋을까. 이러다 중간에 목이 막혀 죽는 건 아닐까.

달콤한 걱정에 골똘히 잠기며, 정인은 절대 깍지를 껴 주지 않는 사람의 손을 마주 잡았다.

***

하얗게 밝혀져 있던 실내등이 픽 꺼졌다. 이제 차 안을 가득 메우는 것은 드문드문 끊어지는 숨소리뿐이었다.

“흐, 읏….”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학교 앞 골목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분명 뭔가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호진의 품에 비스듬히 안긴 채였다.

급격히 어색해진 침묵 속에서 눈이 마주치자 호진은 당연하다는 듯 정인의 이마에 쪽쪽 입 맞췄고, 얼굴에 뽀뽀를 하는 것쯤은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해 내버려 두었더니 그는 곧 며칠 굶은 사람처럼 정인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세상사 대부분의 일들은 몇 번쯤 해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호진과의 키스는 어떻게 된 건지 몇 번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횟수가 늘어나면 날수록 점점 더 낯설어졌다.

“아….”

혀끝이 맞닿을 때마다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자꾸만 머리가 멍해졌다. 정말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여태까진 그냥 손발이 저릿저릿한 정도에서 끝났는데, 오늘은 한 번씩 입술이 떨어졌다 붙을 때마다 그 저림이 무릎을,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기어이 아랫배까지 울려 댔다.

정인은 화들짝 놀라 호진을 밀쳤다.

“나, 나 잠깐만….”

벌어진 입술을 타고 늘어진 실을 엄지손가락으로 거둬 내며 호진이 정인의 안색을 살폈다.

“이제 그만할까요?”

기분이 이상하긴 했지만 멈추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정인은 망설이다가 호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니,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

“어떻게 이상한데요?”

이런 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복잡한 과제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데드라인 직전에 발견한 순간의 아찔함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갖고 싶던 선물을 발견한 순간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마땅히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조바심이라 하자니 뭔가 이상하고, 설렘이라 이름 붙이기엔 조금 더 위험하고 거칠었다.

“…잘 모르겠어.”

그 말에 호진이 슬쩍 눈을 들었다.

“형, 혹시 이런 스킨십 저랑 처음이에요?”

답지 않게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허리를 받치고 있던 호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옷 위로 쓰다듬는 손길이 멀어지나 싶더니, 단단한 손가락이 끝을 세워 척추 사이사이를 눌렀다.

“뭐, 뭐 하는 거야?”

“갑자기 생각나서요. 오늘 멀리 오가느라 허리에 스트레스 좀 쌓였을 텐데, 여기 이렇게 눌러 주면 금방 풀리거든요.”

“그…. 읏.”

움푹 들어간 마디를 따라 둥글게 원을 그리는 손길에 아랫배가 저렸다. 당황한 정인은 저도 모르게 등을 구부렸다.

“다쳐요.”

호진은 가차 없이 정인의 허리 아래를 밀며 등을 바로 세워 놓았다. 그에 정인은 퍽 난감해졌다. 좋은 마음으로 마사지를 해 준다는데 뜬금없이 아래에 열이 오른 탓이었다.

나 진짜 변태 새낀가. 이러다간 정말 발기라도 하게 될 것 같아 얼른 옷자락을 잡아 내리며 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사정을 꿈에도 모를 호진은 그저 평소와 같이 선하고 깨끗한 얼굴로 정인을 보며 웃고만 있었다.

“어떻게 뼈까지 이렇게 예뻐요? 틀어진 데가 한 군데도 없네.”

딱딱한 뼈 위를 눌러 주던 손가락은 어느샌가 조금 옆으로 밀려나 근육을 짚고 있었다. 아픈 줄도 몰랐던 부위에 자극이 가며 입이 절로 벌어졌다. 아, 하고 흘리는 신음에 호진은 정인의 목을 살짝 끌어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많이 아프면 말하세요.”

얼마나 많이 아파야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범위에 들어가는 걸까. 아릿한 둔통을 견디며 정인은 호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성큼 가까워진 알파의 향이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던 숨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 없지만 분명 알고 있는 향이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어딘가의 숲속, 가장 커다란 그늘을 가진 나무에서 풍길 것 같은 냄새.

“…좋은 냄새 나.”

알파의 페로몬을 받는 게 여전히 조금 벅차긴 했지만 호진의 향이라 생각하니 견딜 만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정인은 무의식중에 그의 귀 아래로 이마를 비볐다.

그러자 호진의 향이 변했다. 구둣발로 가차 없이 풀잎을 짓이길 때의 것처럼 짙고 선명한 향이었다.

“그래요?”

고저 없는 물음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저는 아직 형한테서 무슨 냄새 나는지 모르는데.”

허리를 눌러 오던 손끝이 갈비뼈를 스쳤다. 별안간 아래가 너무 불편해졌다. 이제 정말로 조금만 더 건드리면 서 버릴 것 같았다. 너무 민망하고 창피해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정인은 얼른 그의 어깨를 떠밀었다.

“이제, 이제 진짜 그만.”

“…네.”

호진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떨어져 나갔다.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던 정인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사람들이 검게 틴팅된 차창 밖을 지나치고 있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차 문을 열었다. 닿아 오는 바람이 조금 싸늘하다 싶을 만큼 건조해서, 그제야 차내의 공기가 많이 습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찬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니 눅눅하게 녹아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이윽고 정인의 어깨 위로 호진의 옷이 덮였다.

“춥겠어요.”

“…고마워.”

망토처럼 옷을 둘러 주고 팔을 꽁꽁 묶어 매듭까지 지어 놓은 호진은 씩 웃으며 돌아섰다. 그를 따라 걸으며 정인이 물었다.

“그런데 너 정말 괜찮은 거야? 피곤하지 않아?”

“괜찮아요. 훈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해 봤자 물리 치료 정도가 다인데요, 뭐.”

호진은 먼저 건물로 들어가 센서 등을 밝혀 주었다. 이제 정말로 헤어질 시간이었다.

“맞다, 형.”

호진이 가방 안에서 커다란 상자 두 개를 꺼냈다. 찰칵하고 잠금쇠가 풀리며 금메달이 나타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메달을 꺼내 정인의 목에 걸어 주었다.

“이건 형이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뭐?”

“대회에 나가게 된 것도 무사히 마친 것도 형 덕분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정인은 펄쩍 뛰며 얼른 그것들을 풀어 호진의 목에 걸었다.

“대회에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도, 내내 책임을 짊어지고 있던 것도 너야. 결과도 당연히 네 거니까 절대 누구에게도 그 공을 돌리지 마. 게다가 이 메달은….”

모든 메달이 귀하고 값진 것이야 당연하지만, 50미터를 끝까지 완주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게 고작 몇 주 전의 일이다. 이번의 메달은 어쩌면 그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값진 메달로 남을지도 모른다.

“너무 힘들게 딴 메달이잖아.”

처음으로 맞닥뜨린 부상을 딛고 얻어 낸 성과. 모두가 작정하고 그의 끝을 읊어 대는 가운데 기어이 움켜쥐고야 만 도약의 증거. 그렇게 의미가 깊은 것을 넙죽 받아 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정 메달을 선물하고 싶다면 그건 나중에, 아주 먼 훗날이라도 좋으니 다른 메달로 줘. 이렇게 소중한 건 꼭 네가 간직했으면 좋겠어.”

정인은 리본의 꼬인 부분을 반듯하게 펼쳐 그 위를 톡톡 두드렸다. 호진의 눈길이 정인의 손등으로 향했다.

“다음….”

그는 조금 지친 듯한 표정으로 다음을 곱씹었다.

“응?”

그에 되레 놀란 건 정인이었다. 이렇게 씁쓸한 목소리를 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던가 싶어서.

하지만 호진은 머지않아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다시 정인이 알고 있는 유호진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저 뽀뽀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잘했으니까.”

“…또?”

“네. 또요.”

호진은 눈을 감고 제 뺨을 정인에게로 내밀었다. 여우같이 군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인은 그의 볼에 쪽 하고 입 맞췄다.

그러나 한 번만 뽀뽀를 해 달라던 말과 달리 호진은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다른 쪽에도 해 달라는 건가 싶어 이번에는 왼쪽 뺨에 한 번 더 뽀뽀해 주었다. 그래도 움직일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정인은 한숨을 쉬며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옥을 깎아 놓은 듯한 콧날에, 속눈썹 한 올까지 반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모든 게 너무 예뻐 보였다.

“…이제 그만 가지?”

“넵.”

괜히 민망해진 정인은 호진의 이마를 떠밀었다. 그의 가슴팍 아래에서 메달들이 짤랑짤랑 귀여운 소리를 냈다.

“오늘 피곤하셨을 텐데, 편히 쉬세요.”

“응. 너도 정말 수고 많았어.”

깔끔한 인사가 지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먼저 걸음을 뗄 생각을 않았다.

“먼저 들어가세요. 형 가는 거 보고 가게.”

입구부터 복도 안쪽까지 박혀있는 센서 등이 차례로 꺼지며 복도가 어둠에 물들었다.

“아니야, 너 먼저 가.”

“형 먼저요.”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복도 끝의 등마저 꺼졌다. 기어이 최 씨 고집을 꺾는 유 씨 고집 앞에서 정인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문을 열었다.

“안녕.”

“안녕히 주무세요.”

마지막 울림이 끊어진 뒤에야 문을 닫았다. 호진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만히 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인은 마침내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 후에야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왜 이래, 진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이에 이게 대체 무슨…. 하.”

차 안에서부터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한 속옷이 불편해 미칠 것 같았다.

***

간만에 공강이 있는 오후였다.

호진의 경기를 보기 위해 장거리 운전을 한 게 타격이 됐는지, 아니면 늦은 밤까지 속옷 빨래를 했기 때문인지. 정신이 든 것은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좀처럼 몸을 일으킬 엄두는 나지 않았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 버리기라도 한 듯 심신이 허해서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이제 아주 갈 데까지 가는구나.”

정인은 힘없이 눈만 들어 창가를 바라보았다. 늘 개똥이만의 자리였던 창가에는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속옷이 걸려 있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와서 속옷을 벗고 확인해 보니, 뭐가 어디서 샜는지도 모르게 아랫부분이 온통 끈적한 액으로 범벅이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속옷을 빠는 동안에는 엄청난 자괴감과 수치심에 시달려야 했다.

고작 키스 정도로도 이러는데, 더한 걸 한다면….

“…으으.”

상상하던 정인은 이내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버렸다. 그러나 난데없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내밀어야 했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지난달에 만난 인테리어 담당자였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강솔 인테리어 정해윤 대리입니다.

“네….”

그는 활기찬 목소리로 꼭대기 층의 인테리어 공사가 끝났다고 말했다. 벽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거슬려 시시때때로 인상을 찌푸리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꽤 지났나보다.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어차피 큼지막한 구조 변경 작업이야 성필이 감독했을 테고, 디테일 같은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니 굳이 두 번 확인할 필요까진 없다. 그냥 짐만 챙겨서 바로 올라가 살면 될 것 같았다.

마음이 복잡하니 일단 낮잠이라도 더 잘 요량으로 빠르게 통화를 마무리하고, 정인은 별것 없는 짐을 챙겼다.

자동차 키와 몇 권의 책,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를 캐리어에 쑤셔 넣으니 금세 방이 비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창가에 걸려 있는 속옷뿐이었다.

“…넌 그냥 여기 살아. 잘 있어.”

차마 그것을 챙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캐리어와 개똥이만 옆구리에 끼고 현관을 나섰다.

“어?”

현관에는 오랜만에 보는 비닐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걸 보니 이래저래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웃음부터 났다.

대회가 끝났으니 이제는 호진도 예전처럼 자취방을 오가며 지내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아마 지금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오후 훈련을 하고 있거나 수업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바쁠 테니, 이사 비슷한 걸 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저녁에 따로 만나서 해도 될 것 같았다.

“잘 먹을게, 고마워.”

텅 비어 있을 호진의 방에 대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개똥이를 든 손의 손목에 비닐 봉투를 걸고 층계를 하나하나 올랐다.

아무도 살지 않는 2층을 지나 3층까지 올라가니 깨끗한 대리석 타일이 정인을 반겼다. 그를 지나쳐 현관문을 열었다. 먼지 한 톨 없이 정리된 실내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세 개의 방을 하나로 합쳐 가로길이가 길게 트인 집이었다. 평면도를 볼 때만 해도 조금 갑갑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복도 면적까지 끌어다 놓으니 개방감이 좋았다.

중문을 열어 현관 어귀에 캐리어를 던져 놓고, 정인은 넓은 창문 밑에 자리한 식탁에 앉았다. 가리는 것 없이 하얗게 드는 햇볕이 노곤했다.

두말할 것 없이 1층보다 쾌적했다. 창 너머 시시때때로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가 울리는 일도 없었고, 가구와 가전제품은 물론 물컵 하나에서부터 화병에 이르기까지 자잘한 소품들마저 전부 정인의 취향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새 그 작고 낡은 방에 적응이라도 된 건지, 이전에 지내던 오피스텔과 비슷하게 꾸며 놓은 곳인데도 어딘가 조금 불편했다.

지내다 보면 나아지겠거니 생각하며, 정인은 호진이 만들어 준 요리를 하나하나 꺼내 펼쳤다. 그러고는 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쳐 넣었다.

“그럼 그렇지,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어딜 비벼.”

이미 깨끗하게 씨가 말라 버린 찌라시 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대회 직후라 그런지 기사 자체는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의기양양하게 기사 제목을 읽어 내려가던 정인의 눈이 둥글게 뜨였다.

“…뭐야, 이게?”

반찬 뚜껑을 열기 위해 움직이던 손이 멎었다. 정인은 얼른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이스포츠] ‘아쉬운 기록’ 유호진, 부상 후유증?

<칼럼> 한국 수영 간판 유호진, LA 올림픽 출전은 ‘글쎄’

(수영) 유호진 소청 전국 체육 대회 100m, 400m 금메달, 섭섭한 기록.

[양지SE] 유호진 인터뷰 거부, 부진한 성적 탓?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을 언급한 기사는 몇 되지 않고, 온통 호진의 성적이 부진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정인은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린 기사를 눌렀다.

[양지SE] 유호진 인터뷰 거부, 부진한 성적 탓?

입력 18:55 Sports&Entertainment

이호정 기자 = 파리 올림픽 2관왕 유호진(한국 대학교 2)이 19일 오후에 열린 소청 전국 수영 대회에서 100m, 400m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100m 경기 기록은 47초 33에 그쳤다. 파리 올림픽 출전 당시 유호진 선수가 작성한 세계신기록에 비하면 1초 이상이 늦어진 셈이다.

선수는 경기 시작 전 기자들의 질문에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고, 경기 후에도 믹스트 존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해설에 따르면 선수는 100미터 경기 직후 스스로의 기록에 만족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에 전문가들은 ‘선수가 부진한 성적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 상황’이라며….

“…….”

제아무리 대단한 선수여도, 모든 환경이 완벽히 갖추어진 국제 대회와 소규모 국내 대회의 경기력이 같을 수는 없다. 그걸 몰라서 하는 짓들이 아니다. 함께 출전한 다른 국가 대표 선수들도 똑같이 기록이 소폭 떨어졌지만, 그들에게는 별다른 말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기자들은 그저 완전히 호진을 찍어 누르고 싶어 하는 듯했다. 얼핏 생각해 보면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득이 될 것도 없을 것 같지만, 조회 수와 댓글 수를 보니 이해가 됐다.

부정적인 자극으로만 가득한 기사에 불나방처럼 달려든 대중은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클릭 한 번이 랭킹의 순위를 바꾸고, 그 순위를 근거로 광고의 급을 높일 수 있는 기자들의 입장에서는 늘 빈틈없이 우수하기만 했던 선수의 흠결만큼 맛있는 화제가 없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호진의 다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막 부상에서 회복했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댓글에 가장 공감이 많았고, 그다음으로 공감이 많은 건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은 응원의 말들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호진에게 저주 섞인 욕을 뱉는 사람도 있었고, 그럴 줄 알았다며 비아냥대는 댓글도 적지 않았다. 얼마나 콧대가 높으면 기다리는 기자들을 그렇게 성의 없이 대하냐느니, 작은 대회라고 설렁설렁 한 건 아니냐느니.

정인은 차마 댓글을 더 읽어 내려가지 못하고 창을 닫아 버렸다.

“하….”

인터뷰를 다 끊고 나오겠다던 호진의 말이 뒤늦게야 떠올랐다. 인터뷰를 빨리 끝냈다는 이유로도 이렇게까지 두들겨 맞고 있는 데에야 제 책임이 한 톨도 없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정인은 이마를 감싸 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호진이 만들어 준 요리를 하나하나 챙겨 봉투 안에 밀어 넣었다. 창가에 올려놓은 개똥이도 잊지 않고 챙겼다.

이사를 간다고 해 봐야 같은 건물의 두 층을 더 올라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가능한 한 호진과 가까운 곳에 있어 주고 싶었다.

“다음에 보자, 지금은 좀 아닌 것 같아.”

있을지 없을지 모를 귀신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덜거덕거리며 층계를 내려와 일 층의 방문을 열었다. 흐늘거리는 속옷 옆에 개똥이를 조심조심 모셔 두고 캐리어를 풀었다. 짐을 쌀 때와 마찬가지로 푸는 것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무너져 가는 책상 위에 반찬통을 올리고, 호진에게 연락을 할 요량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 앱 속에는 호진이 아침 일찍부터 보내온 메시지 하나가 떠 있었다.

형ㅎㅎㅎ 오늘은 고등어조림 했어요.

오이냉국, 새우젓 (청양고추 조금 매워요ㅜㅜ), 열무김치, 방울토마토 조금

디저트는 마카롱 (인데 이건 제가 지금 할 수가 없어서 편의점에서 사 왔어요ㅜ.ㅠ)

맛있게 드세요♥♥♥♥♥♥♥♥

05:30

새벽 다섯 시 반으로 찍혀 있는 발신 시간에 눈길이 갔다.

“…….”

하루가 참 길었겠네. 씁쓸히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언제 와?

비어 있는 메시지 창 위로 떠오른 글자들이 조금 밋밋해 보였다. 똑같이 까만 하트를 찍어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하나만 있으니 어쩐지 허전해 보였다. 정인은 까만 하트 버튼을 연타했다. 호진이 보내준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하트가 금세 입력창을 가득 채웠다.

♥♥♥♥♥♥♥♥♥♥

♥♥♥♥♥♥♥♥♥♥♥

머뭇거리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답장이 오지 않는 핸드폰을 멍하니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책상에 엎드렸다.

“하….”

가물가물 흐려지는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잠들면 조금 이상한 꿈을 꾸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수마는 자비 없이 들이닥쳤고, 정인은 정말로 밑도 끝도 없이 이상한 꿈을 꾸고 말았다.

커다란 칼로 가시덤불을 전부 베어 버리고, 불길이 치솟는 들판을 건너 마침내 높은 탑 꼭대기의 감옥에 도착하는. 그 안에 갇혀 서글피 우는 물고기를 구해 낸 다음에는, 예쁜 어항에 그를 담아 함께 초원으로 도망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의 꿈을.

***

이미 한 차례 전력 분석 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였다. 내내 창밖을 보고 서 있던 코치는 모두가 회의실을 빠져나간 뒤에야 호진을 돌아보았다.

“호진아.”

“예, 코치님.”

올림픽보다 확연히 떨어진 기록에 세상은 당연하다는 듯 호진을 비난하는 여론을 쏟아 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누군가는 화살받이가 되어야 했다.

실무로 바쁜 권 실장을 대신해 참석한 컨디셔닝 책임자와 의료진들은 수치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다 떠났다. 지상 훈련 담당자의 입장도 그와 별반 다를 바는 없는 듯했다. 근력은 끌어 올릴 대로 끌어 올렸고, 뒤늦게 대회 준비에 돌입한 것을 감안해도 절대적 훈련량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명확하게 문서로 남은 기록이 근거였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는 가운데 이제 남은 것은 코치와 호진뿐이다. 그리고 호진은 결국 이 책임이 향할 곳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윽고 테이블 위로는 한 장의 사진이 놓였다.

“혹시 너, 정말 얘랑 연애하니?”

모 일간지 기자가 찍었다는 사진 속에는 정인을 끌어안고 있는 호진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정인을 ‘얘’라고 칭한 것에 기분이 상했지만 정인에 대해 말을 얹어 좋을 상황이 아니었다. 호진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얘가 재벌 3세라는 것도 사실이야?”

“…그건 오해입니다. 경기장에 왔던 다른 친구와 헛갈린 것 같아요.”

그 말에 코치가 한숨을 쉬었다.

“우선 기사는 홍보실에서 다 막은 것 같다. 의외로 기자들이 순순히 나와 줘서 다행이긴 하다만…. 올림픽 2년 앞두고 연애라니.”

골치 아프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떻게든 네 이름에 기스 한번 내 보겠다고 안달인 새끼들이 밖에 널리고 널렸는데, 하필 이 시기에.”

흘리며 지나치는 말끝에는 금세 다른 질문이 실렸다.

“인터뷰는 왜 그렇게 급히 끊고 나갔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내놓을 수 있는 게 없었다.

“호진아, 내가 지금 네 기록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는 주먹을 쥐어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다른 선수들이야 어쩌다 한 번쯤 그럴 수 있다 쳐. 하지만 호진이 너는 이러면 안 되지. 좀 있으면 스폰서 계약도 두 건이나 있는데 모범을 보여야지 않겠니?”

코치가 하는 말에는 정확한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끊고 나간 태도가 문제라는 건지 스캔들을 낸 게 문제라는 건지, 하다못해 그가 보이라는 ‘모범’이 무엇인지조차 모호했다.

“얼라이드야 그렇다 쳐도 TH 코퍼레이션은 설렁설렁해서 대충 넘길 수 있는 데가 아니야. 삐끗하면 한 분기 겨우 넘기고 위약금만 조지게 무는 거라고.”

그럼 TH 코퍼레이션에서 만족할 만한 기록을 내라는 소리인 건가. 호진이 멍하니 침묵하자 코치는 땅이 꺼져라 한숨 지었다.

“지금 네 전담 팀에 있는 사람들 모셔 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데가 한둘이 아니야. TH 코퍼레이션보다 한참 급 떨어지는 스폰서라도 하나 잡겠다고 용쓰는 선수도 널리고 널렸어. 그런데 모든 걸 다 가진 네가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선수들 보기에 어떻겠니. 응?”

그의 말은 여전히 모호하기만 했다. 호진은 기계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음 대회 스케줄은 상태 봐서 잡을 테니 훈련은 하던 대로 계속해.”

“알겠습니다.”

“만난다는 애도 웬만하면 정리하는 방향으로 생각해라.”

가당치도 않은 마지막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 마뜩잖다는 듯 호진을 바라보던 코치는 이내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호진은 그의 발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병든 소처럼 테이블에 이마를 붙이며 늘어졌다. 아무 문제 없다던 어깨가 별안간 욱신거렸다.

“아….”

어젯밤 물리 치료를 받을 때도, 오늘 아침 훈련을 할 때도 멀쩡했으니 분명 진짜 통증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이놈의 뇌가 또 말썽을 부리는 듯했다.

모든 것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 오후 훈련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 아파서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도 가야지.”

일단은 다음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회의를 하는 내내 한 번도 뒤집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화면 위에는 정인의 이름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언제 와?

보낸 사람을 닮아 예쁘기만 한 글자들이 너무 애틋하고 소중했다. 조심조심 손끝으로 쓸어내리니 그 아래에 다른 메시지 두 개가 더 붙어 있는 게 보였다.

♥♥♥♥♥♥♥♥♥♥

♥♥♥♥♥♥♥♥♥♥♥

아직 하루가 길게 남아 있는데, 벌써부터 너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

정인이 보내 준 하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문자 너머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답장을 썼다.

형ㅎㅎㅎ

저 이제 오후 훈련 하러 학교 가요ㅎㅎㅎ 8시까지 끝내고 집 앞으로 갈게요ㅎㅎ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ㅎㅎㅎ

♥♥♥♥♥♥♥♥♥♥♥♥♥♥♥

♥♥♥♥♥♥♥♥♥♥♥♥♥♥♥

정인이 보내 준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하트를 붙여 보냈다. 한참을 그대로 멈춰 있던 화면은 머지않아 꺼졌다.

텅 빈 화면 속, 웃는지 우는지 모를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스로와 눈이 마주쳤다.

“…….”

도저히 더는 그를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서 도망치듯 눈을 감아 버렸다.

***

멀리서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체육관의 돌계단 위에 앉아 있던 정인은 목을 쭉 빼고 도롯가를 내다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호진의 차가 아니었다.

낯선 차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정인의 눈앞을 지나쳐 체육관 옆 건물 주차장에 멈춰 섰다. 그를 바라보다가 손바닥에 든 상자를 열었다. 빨간 상자 안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열 개를 세팅한 백금 팔찌가 들어 있었다. 실기스 하나 없이 매끈한 표면 위로 가로등 불빛이 어른거렸다.

“…이런 걸 정말 좋아할까.”

애인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가방이며 보석이며 일단 돈지랄부터 하던 효준의 모습에 착안해 구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품목이었다. 신장이 192cm나 되는 남자에게 손바닥만 한 체인 백을 선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늘 스마트워치를 차고 다니니 시계를 선물하기도 애매하다. 차 욕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벌써부터 부동산을 선물하는 건 조금 이상할 것 같아서 겨우 고른 게 이 팔찌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장신구를 선물해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었다. 선물 받는 사람의 피부 톤과 이미지를 묻는 셀러의 조언을 따라 가장 잘 나간다는 것을 픽업하긴 했지만, 실은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장신구를 주는 게 옳은 일이긴 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

지금이라도 그냥 다른 걸 사 올까. 팔찌 말고 목걸이…. 아니, 목걸이도 어차피 장신구이니 똑같은가.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도로 아래쪽에서 또 한 번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시끄럽던 마음속으로 딩동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호진의 차였다.

정인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얼른 돌계단 뒤의 빈틈으로 몸을 숨겼다. 호진이 체육관 근처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놀라게 해 줄 심산이었다.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기다리는 사이, 차가 체육관 앞에 멈춰 서고 호진이 내렸다. 정인은 머리만 내밀어 저 너머를 살폈다. 그러나 바로 건물을 향해 올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차 문을 닫고도 오랫동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뭘 하나 싶어 조금 더 눈을 가늘게 뜨자, 별안간 호진이 차체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늘 순하게 웃을 줄만 알던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았고, 절대 흐트러지는 법이 없던 자세도 엉망이었다. 지친 얼굴로 무릎을 짚고 있던 호진은 이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한쪽 어깨를 손으로 누르며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아, 씨발.”

긁는 듯 고통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호진….”

봐선 안 될 것을 봐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하마터면 그의 이름을 부를 뻔한 정인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낯선 모습에 놀란 건 둘째치고라도, 혼자가 되어서야 겨우 욕 한마디를 토해 내는 순간마저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호진은 쓰고 있던 마스크를 가방에 처박으며 걸음을 돌렸고, 정인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계단 뒤편의 빈틈으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머리 위로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땐 아무도 없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는 호진의 뒷모습이 점처럼 작아져 있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끝까지 모르는 척해야 할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함께 있어 줘야 하는 걸까.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정인은 손톱을 딱딱 뜯으며 제가 가장 힘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혼자 있길 원했었나, 아니면 누군가 함께 있어 주길 원했었나.

모두가 도와주겠다고 손을 뻗는 가운데, 완벽히 혼자가 되기 위해 도망친 건 분명 스스로 원해서 한 일이었다.

“…….”

하지만 그건, 끔찍하게 외로운 일이기도 했다.

“아….”

갈팡질팡하던 걸음이 멎었다. 정인은 빨간 상자를 꽉 움켜쥐고 체육관을 향해 달려갔다.

***

타이머가 울렸다. 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심박수부터 확인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지만 최대 심박까지는 아직 한참의 여유가 있었다.

대회가 끝나며 긴장이 풀렸는지 피로가 평소보다 빨리 올라왔다. 하지만 오늘 한 근력 운동은 많이 봐줘야 중강도 정도의 레벨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정신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쉬는 시간을 길게 가져갈 필요가 없다. 이 정도 스케줄이면 이론적으로 서너 시간 정도는 더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몸에 오른 열이 떨어지기 전에 샤워실로 들어선 호진은 미지근한 물을 맞으며 머릿속으로 남은 일들을 정리했다.

곧 다음 대회 일정이 잡힐 것이다. 기록이 많이 떨어졌으니 아마 훈련 프로그램의 강도도 훨씬 높아지겠지. 그를 소화하려면 앞으로 몸 관리에 더욱 철저히 신경 써야 한다.

일단 날이 밝으면 어깨 검사부터 받고, 다음 주부터는 식단도 조금 더 빡빡하게 관리하고, 운동 강도도 두 단계쯤 높여야지. 뭐든 도움이 될 만한 건….

“아….”

한창 생각을 정리하는데 별안간 눈앞이 핑 돌며 진이 빠졌다.

벽을 짚어 휘청이는 몸을 지탱했다. 그러자 코 밑으로 뭔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며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하루에 몇 번씩 코피가 나는 일에도 너무 익숙해졌다. 알아서 멎든지 말든지, 호진은 한숨을 쉬며 우드득 목을 돌렸다. 그러다 저만치 벽에 걸린 시계로 눈길이 갔다.

시계는 어느샌가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인을 만나기 한 시간 전이었다.

‘만난다는 애도 웬만하면 정리하는 방향으로 생각해라.’

코치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뒷골이 확 땅겼다.

“정리를 하라고?”

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범벅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는 스스로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기분 나쁜 모습이었다.

“…왜 이러지.”

섬뜩해진 호진은 얼른 얼굴의 핏물을 씻어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정인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줄 만한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정도는 선수의 커리어를 걱정하는 지도자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 잠시나마 평정심이라는 것을 아주 잃어버린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정신 차리자, 제발.”

몸도 몸이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감정 조절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듯하다. 쉼 없이 움직이는 초침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샤워실을 벗어났다.

수영장은 온통 적막에 잠겨 있었다. 수면을 따라 일렁이는 파문마저도 오늘만큼은 어딘가 심심해 보였다.

뚜벅뚜벅 레인에 선 호진은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그사이에 정인에게서 연락이 오진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화면은 온갖 뉴스 애플리케이션에서 쏘아 보낸 알림으로만 가득했다.

자신과 관련된 기사를 하나씩 눌러 보았다. 무엇에 그리도 화가 났는지, 댓글 속의 사람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분노를 쏘아 대고 있었다.

“…….”

무덤덤한 눈으로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훑어보다가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심호흡과 함께 출발대 위로 올라섰다. 쭉 뻗은 레인을 가로지르는 일이 조금 막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멈춰 설 명분이 없었다.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문을 걸고, 지체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수온이 온몸을 조여 왔다. 익숙한 소음 속에서 의미 없는 숫자를 되뇌며 잠영을 마쳤다. 물은 당연하다는 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지나간 자취를 따라 생겨난 공기 방울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대로 몸을 뒤집어 이번에는 천장을 보았다. 하얗게 일그러진 빛과 구조물이 시야를 스쳤다. 잠깐 배영을 하다 보니 순식간에 반환점이었다. 내내 귓가에 부서지는 물소리가 거슬렸다.

물속으로 잠겨 들어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또 한 번 코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른 선수들이야 어쩌다 한 번쯤 그럴 수 있다 쳐. 하지만 호진이 너는 이러면 안 되지.’

어깨의 인대가 툭 걸렸다. 바로 모든 동작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경을 머리 위로 올리자 시야가 트이며 밝은 빛이 눈 안으로 쏟아졌다.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어깨부터 확인했다. 다행히도 큰 이상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훈련을 재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호진은 천천히 등을 굽혔다. 숨을 꾹 참고, 새파랗게 질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

흐려진 눈을 들어 물속을 노려보았다.

저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 하나 끼어들 틈 없이 빼곡했다. 물로 가득 차 있으나 허공처럼 비어 있었다.

그에 불쑥 외로워졌다. 허공도 세상도 아닌 그 사이쯤 어딘가에 혼자 간신히 발을 걸치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숨을 쉬어야 할 것 같았다. 호진은 블랙아웃의 임계점을 한참 남겨 둔 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상하네.”

찰박찰박 목 아래를 들이받는 물의 무게가 유난히도 버거웠다.

“…오늘 왜 이렇게 힘들지.”

누구 하나 듣는 이 없는 곳으로 쓸쓸한 목소리가 울렸다. 간신히 로프에 매달려 팔 위로 턱을 올렸다.

“…….”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는데, 출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

물미역처럼 맥없이 떠 있던 호진은 몸을 바로 세웠다.

“형.”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정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 지었다.

***

정인이 살던 호주의 집 담벼락에는 가끔 도마뱀이 기어 다녔다.

습도가 낮은 곳이었다. 덕분에 한낮의 온도가 48도까지 치솟는 여름에도 그늘 아래만큼은 에어컨을 틀어 놓은 듯 시원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늘 그늘진 테라스에 앉아 담장만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새로 생기는 일이 없으니 머릿속을 지나치는 생각의 시점은 언제나 지나간 날들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간혹 나무 그림자 아래로 작은 도마뱀이 나타나곤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놀라 죽는 줄 알았다.

인형처럼 가만히 있다가도 곧 쏜살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도저히 살아있는 생물 같지가 않았다. 너무 소름이 끼쳐서 정말로 처음의 며칠 동안은 온 집 안의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근 채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빠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지웠다가. 다시 눌렀다가, 또 지웠다.

“…….”

정인은 고요하게 일렁이는 물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파문의 한가운데 무너진 등대처럼 누워 있는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짧은 고민 끝에 겨우 한 걸음을 뗐다. 물과 가까워질수록 맨발 아래의 타일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마침내 돌출 벽 위에 섰을 땐 발아래가 온통 젖었고 어느샌가 호진도 정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인은 타일에 앉으며 물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맨살에 닿는 찬물의 온도가 섬뜩했다. 그리고 그런 정인을 바라보며 호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저 정인의 옷이 젖어 드는 게 걱정인 사람이었다.

“…이리 와, 호진아.”

호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찰박찰박 새하얀 물그림자가 피부 위에 드리웠다. 그리고 그 부름에 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허리를 숙여 푸른 물 밑으로 빨려들어 갔다.

첨벙ㅡ. 내내 멈춰 있던 물길 위로 포말이 일었다. 유연하게 물 아래를 가로질러 온 호진은 이내 정인의 발아래 머리를 들었다. 예쁜 곡선을 그리며 휜 등 위로 물방울이 맺혔다.

“오셨어요?”

양손으로 벽을 붙들어 떠오른 호진은 정인을 향해 웃었다.

불순물이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열망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머나먼 바다 건너로 축제가 한창인 배를 발견한 인어 같은 모습이었다.

“예쁘네.”

정인은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물의 온도를 따라 내려앉은 체온이 손바닥 안에 감겼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만날 텐데,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어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동안에도 물방울은 눈물처럼 그의 턱선을 따라 굴러떨어졌다. 정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응,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

실은 그가 체육관에 들어선 뒤로 내내 쫓아다니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호진은 지나치게 무거워 보이는 바벨을 몇 번이나 들어 올리고, 팔 하나로 온몸의 무게를 지탱하며 한참을 버티고, 벗겨진 손바닥 안의 핏물을 닦아 내곤 다시 쇳덩이를 집어 들었다. 많이 힘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차마 말을 걸 용기를 내지 못한 건, 아무리 힘들어도 차마 입 한 번 벙긋할 수 없는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그럼, 오늘은 인터벌 400 한 번만 하고….”

“잠깐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정말로 호진이 그런 심정이라면, 지금쯤 그 마음속은 아마도 불길이 솟구치는 지옥 같을 테니까.

“…손 좀 보자.”

벽을 짚고 있는 호진의 손바닥을 조심조심 뒤집었다. 잔뜩 부풀어 오른 상처의 면면이 고스란히 눈에 담겼다. 여기저기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를 반복하는 동안 벗겨져 버린 살갗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정인은 자신을 만질 때면 늘 유난히도 조심스럽게 굴던 호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 벗겨졌잖아.”

매일매일 찢어지고 새로 붙는 상처에 행여나 긁힐까, 항상 닿는 듯 마는 듯 그저 스치기만 하던.

“별거 아니에요.”

“…이게 어떻게 별게 아니야.”

손을 맞잡을 때마다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져도, 운동을 하다 보면 그럴 수 있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제 와 새삼 그게 미안했다. 그런 게 생기려면 몇 번이고 생살을 벗겨 내야 한다는 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형.”

순한 걱정으로만 가득한 호진의 눈동자가 거울처럼 맑았다. 그 안으로 정인의 모습이 또렷하게 비쳤다. 그를 마주 보며 원망하듯 말했다.

“아프잖아.”

도마뱀이 쳐들어올까 봐 밤새 벌벌 떨면서도 끝끝내 발신 버튼을 누르지 못했던 여름밤이 자꾸만 눈앞을 아른거렸다.

“계속 따가웠을 거 아냐.”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던 말을 듣지 않았다. 원한다면 당장 지금이라도 좋으니 집으로 돌아오라던 말도 듣지 않았다.

해 지는 바다에 설 때마다 한국이 있는 방향부터 찾으면서도 외롭다 말하지 않았다. 낯선 음식이 싫고 모르는 사람으로만 가득한 세상이 무서워도 꾹 참고 견뎠다. 그것만이 모두를 망가트리지 않는 방법이라고 믿으며.

“이 손을 하고 어쩌자고 물에 들어가.”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정답이 아니었던 것 같다.

처음 도마뱀을 봤을 때 나를 데리러 와 달라 떼를 썼어야 했고, 컵라면 뚜껑 위의 한글에 눈물이 터졌을 때 전화를 걸었어야 했다. 적어도 괜찮다는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았어야 했다.

“형. 저 괜찮으니까,”

“호진아.”

아프고 힘들 것을 뻔히 아는데도 끝내 아프다 말하지 않는 상대를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제야 알겠다.

당장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도,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상상하는 게 더한 지옥이라는 걸. 이제야 진정으로 알겠다.

“하나도 안 괜찮잖아.”

차갑게 식은 얼굴을 양손에 감싸 쥐고 허리를 숙였다.

“너 오늘 많이 힘들었어.”

소리도 없이 입술이 맞닿고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목 끝까지 빠듯하게 차오른 감정을 도저히 내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지, 뭍으로 쫓겨난 물고기처럼 달싹이기만 하던 입술은 이윽고 정인에게로 엉겨 붙었다.

정인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서툰 위로를 전하듯 쓰다듬었다. 호진은 그제야 억눌려 있던 눈물을 툭툭 떨어트렸다. 소리도 없이 내린 비가 정인의 손 틈으로 스미고 있었다.

“…형.”

마주 닿아 있던 숨이 멀어진 사이였다. 호진이 고개를 들었다.

말없이 호진과 눈을 맞췄다. 맞닿은 시선 너머 착실히 부피를 키워 가는 슬픔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아직 저한테 바라는 게 남았나 봐요.”

이제 호진은 벼랑 끝에 선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정인을 보고는 웃지 않을 수가 없는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도 미련하게 웃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어떡하죠.”

어디에서도 흔들린 적 없던 목소리의 끝이 푹 꺼졌다.

“…이제 더는 나아질 수 없을 것 같은데.”

예, 아니오로 나뉘는 간단한 대답마저도 확신을 담아 말하던 사람이 어째서인지 지금은 지나가는 바람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 줌의 자취도 남기지 않고 당장 어딘가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릴 듯 공허하기만 한.

“알아요, 배부른 소리라는 거.”

스스로를 향하는 비난에 정인의 가슴이 쿵 하고 울었다. 그건 정인도 몇 번이고 삼켜 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놀란 정인은 호진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런 말이 어딨어.”

중력이 미치는 뭍에서는 누구보다도 반듯하고 강하던 사람이 물 안에서는 너무나도 손쉽게 흔들리고 당겨졌다.

그 가벼운 무게에 정인은 또 한 번 깨닫고야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리라는 믿음은 단지 편리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호진 또한 남들과 마찬가지로 얼마든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제가 잘나서 여기에 있는 게 아니거든요.”

다만 그렇다는 것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걸음걸이 하나조차도 어긋남이 없도록,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를 깎아 내고 또 감춰 왔을 뿐이다.

“모든 환경이 완벽히 갖춰졌고 모두가 배려해 주고 있어요. 그러니 저는 주어진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 하나를 못 하겠다고 징징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호진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끅끅 삼키던 울음은 곧 새된 숨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그는 정인의 품에 파묻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남들의 꿈을 먹고 커 놓고,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무너져 버리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

“저 상상 이상으로 무책임한 놈인가 봐요. 다 놓고 싶어요.”

자신의 몫이 아닌 것들까지 끌어안고 바둥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정인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호진이 처음으로 꺼내 든 상처가 무사히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실은 오래전부터 바랐어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아득한 적막 가운데, 정인은 호진이 내놓은 여린 부분을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진짜 끝이 오기 전에 이쯤에서 사라지고 싶었어.”

호진은 울다가, 웃다가, 또 울었다. 뱉은 말을 전부 삼켜 버릴 것처럼 말문을 닫기도 하고, 그래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지 이내 떠밀리듯 털어놓기도 했다.

“언제가 되든 올림픽 결승에 한 번만 나가고 나면, 운이 좋아 혹시라도 메달까지 따게 된다면…. 그다음엔 정말 영영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힘들어도 그때까지만 참자고, 몇 년만 더 견디자고.”

더듬더듬 이어지던 말이 멎었다.

“…아주 조금만 더 힘내자고, 할 수 있다고.”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는지, 먼 허공을 바라보는 눈동자 위로 쉴 틈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감히 그 시간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정인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가만히 손을 잡고 여기에 함께 머물러 주는 것뿐이었다.

“다음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그냥 저한텐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다음을 말해요, 다음 올림픽까지 2년이 남았대요.”

호진은 긴 한숨을 뱉으며 아이처럼 울먹였다.

“출전은 할 수 있을까요? 결승까지 갈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것도 자신할 수가 없는데.”

“…….”

“이 쓸모없는 새끼는 또 왜…. 이럴 거면 차라리 완전히 망가져 버리든가.”

그러고는 이를 악물며 제 어깨를 때려 댔다.

“뭘 어쩌자고 이렇게 애매하게 망가졌을까요, 나아질 수도 버려질 수도 없게.”

“그만해.”

정인은 얼른 그 손을 붙들었다. 호진은 물 안에 갇혀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으로 가려도 숨겨지지 않는 슬픔은 여과 없이 정인에게도 흘러들었다.

“너무 징그러워요, 형.”

호진은 아무래도 정인이 걸어온 길의 초입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응.”

마음을 너무 많이 삼키면 속에 딱딱하게 응어리가 진다.

그렇게 한 번 굳어 버린 것들은 절로 녹지 않는다. 내내 가슴 속을 굴러다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여린 곳을 파고들어 찌르고야 만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엎드릴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갈지.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상처받은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정인은 바닥에 엎드려 모든 것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었다.

“…조금만 쉬고 싶어요.”

사람의 마음은 풍선 같은 거라던 상담사의 말을 떠올렸다.

손쓸 수 없이 터져 나온 상처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정인은 조심조심 그의 등을 끌어안아 다독였다.

“그렇게 해, 이제부터는 뭐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해.”

다행히도 호진은 정인보다는 조금 더 용감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아프고 힘든 마음을 쏟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다친 마음을 고쳐 놓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이제 적어도 그 속이 더 부풀지는 않을 것이다.

“호진아.”

정인은 얼굴을 가린 호진의 손가락 위로 서툴게 입술을 붙였다. 엉망으로 젖어 든 눈이 구원을 구하듯 정인을 향했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럴까, 생각하며 정인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호진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랑 도망가자.”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평생을 고고하게 지켜온 자존심이 진창에 처박히고, 조금의 빈틈조차 허락한 적 없이 제련해 온 삶의 전부가 조각나는 가운데, 그를 온전히 받아 내고 있는 이에게 감히 몇 마디 번지르르한 말 따위를 건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곳을 알아. 며칠만 나랑 숨어 있어.”

다만 언젠가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뿌리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던 풀을, 어떻게든 살려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은 이 물에서 꺼내야 했다.

“네가 원한다면 영원히 도망칠 수도 있어, 이제부터는 네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

옷이 전부 젖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호진을 품에 안았다.

“내가 지켜 줄게.”

줄 수 있는 건 투박한 마음이 전부였다. 그에 어쩔 수 없이 효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꼭 누구라도 한 번은 만나 봐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소중한 마음을 더욱 능숙하게 지켜 낼 수 있는 거라고.

“내가….”

헛소리라 생각해 한 귀로 흘려보낸 그 말이 이제 와 이토록 사무친다.

너를 만나기 전에 누구라도 한 번쯤 사랑하고 왔다면, 지금쯤은 조금 더 멋들어진 위로를 건넬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다친 자리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가자.”

한 번 더 힘을 주어 그를 끌어당겼다. 드디어 무거운 물에서 벗어난 호진의 손을 꼭 잡고 먼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저만치 밝혀진 불빛을 향해 크게 걸음을 뗐다.

***

“시속 110km 과속 단속 구간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삑삑 울었다. 그를 무시하려던 정인은 이 차의 명의자가 호진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슬아슬하게 단속 지점을 통과한 뒤에는 곧바로 속도를 높였다. RPM이 솟구치며 묵직한 진동이 기분 좋게 발아래를 울렸다. 안전을 우위에 두고 설계한 차라기에 퍼포먼스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주인을 닮기라도 한 건지 밟으면 밟는 대로 쭉 나가면서도 흔들림은 매우 적었다.

“맞다, 호진아.”

“네, 네?”

정인은 조수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줘 봐. 부숴 버리게.”

“…부순다고요?”

호진은 빨갛게 부은 눈을 들어 정인을 바라보았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안전벨트를 꽉 붙든 채였다.

“도주에 앞서 핸드폰부터 처리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야. 갓길에서 부수고 가게 얼른 줘.”

“어…. 안 되는데요.”

“새거 사 줄게.”

“그게 아니라….”

호진은 소중하게 핸드폰을 쓰다듬었다.

“이건 우리 처음 썸 타고 사귀는 동안 계속 쓴 핸드폰이란 말이에요.”

죽을 때까지 품고 있을 거예요, 이어지는 말에 정인은 피식 웃었다.

“그럼 전화는 끄고 심 카드만 빼서 주든가.”

호진은 그제야 꾸물꾸물 움직였다. 뒷좌석에 던져둔 가방을 가져오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그 안에서 반짇고리를 꺼내 들었다.

“뭐야, 그런 것까지 들고 다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바늘의 뒷면으로 작은 구멍을 조심조심 쑤신 호진은 곧 심 카드를 꺼내 정인에게 바쳤다. 그리고 정인은 창문을 열어 그것을 휙 던져 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 보니 멀리 휴게소가 보였다. 천천히 속도를 줄여 휴게소로 진입했다.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닌데도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통감자가…. 닫았지.”

주영에게 특훈을 받는 동안 몸에 새겨진 본능은 휴게소에 들어서자마자 통감자를 향해 솟구쳤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스낵 코너는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통감자 먹고 싶으세요?”

“아니, 나는 감자 별로 안 좋아해.”

“그런데 왜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휴게소만 오면 그렇게 생각이 나더라고.”

마스크를 쓴 호진을 질질 끌고 식당가로 들어선 정인은 파리한 형광등 아래의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이 시간에는 식당가조차 별 볼 일이 없다. 혼자였다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훈련을 마치고 배가 고플 테니 호진에게는 뭐라도 먹여야 했다.

“돼지불백,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된장찌개. 넷 중에 골라야 돼. 여긴 그나마 된장이 제일….”

“누군데요?”

호진이 물었다.

“통감자 좋아한다는 사람이요. 누구예요?”

“아….”

정인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편의점 문에 붙은 탄산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망설임 없이 그 속의 인물을 가리켰다.

“저 사람.”

“…강주영이요? 연예인?”

어디가 웃긴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호진은 정인의 말에 큰 소리로 웃었다.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기사들이 이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럼 저 된장찌개 먹을래요.”

“그래.”

주문을 마치고 번호표를 받아들었다. 그사이 이미 정인의 물까지 떠 온 호진은 백반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냅킨을 펼쳐 그 위로 수저를 놓았다.

“형광 물질….”

“네?”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걸 전부 하게 해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정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던 거 마저 해.”

“넵.”

호진은 가지런히 끝을 맞춰 물컵과 수저를 정렬하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정인을 쳐다보았다.

“잘했어.”

별것 아닌 칭찬 한마디에도 그는 개구리처럼 팅팅 부은 눈을 하고서는 해맑게 웃었다.

“그나저나 손은 이제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럴 리가.”

정인은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뒤집었다. 그리고 둥그렇게 눈을 떴다. 분명 걸레 조각처럼 문드러져 있던 그의 손바닥은 그새 완벽히 아물어 이제 붉은 기만 겨우 남아 있었다.

“너 뭐야?”

혹시 사람이 아닌가?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요. 물에 불어서 더 커 보였던 거예요.”

호진이 낮게 웃었다. 한술 더 떠 상처가 있던 자리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뜯어내기까지 했다.

“원래 상처라는 게 다 그렇잖아요, 조금만 다쳐도 물에 불면 실제보다 더 크고 징그러워 보이는 거…. 결국 물 빠지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건데.”

스치는 듯한 목소리 뒤로 벨이 울렸다.

“어? 밥 나왔다.”

부리나케 고개를 든 호진은 말릴 틈도 없이 배식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인은 그가 조금 전 했던 말을 입에 담아 보았다. 물 빠지면 아무것도 아닌 건데.

“엄청 맛있게 생겼어요.”

순식간에 돌아온 호진은 정인의 앞으로 음식을 놓아 주었다.

“고마워.”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된장찌개 속의 두부를 쿡 찔렀다. 정인이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리던 호진도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호진아.”

“네?”

정인은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순간에 징그럽고 아픈 건 사실이잖아.”

잘게 쪼개진 두부가 숟가락을 피해 도망 다녔다. 정인은 집요하게 두부를 쫓아가 부수고 또 부쉈다. 마침내 형체조차 남지 않게 될 때까지.

“아픈 다마고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쁜 거라며. 너도 마찬가지야.”

“…….”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네가 나서서 말할 필요 없어. 어차피 괜찮아질 거란 거 다 알아도 그건 결국 나중의 일이고, 티끌만큼 다쳐도 아픈 건 아픈 거니까.”

내뱉는 말들이 고스란히 정인의 가슴 속으로 되돌아왔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던가. 저는 하지 못했던 일을 호진에게 하라 떠밀고 있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여태까지 걸어왔던 모든 길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시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음껏 싫어하고 징그러워하고 아픈 티도 팍팍 내. 그래도 돼.”

나도 내 딴에는 열심히 하겠다고 한 건데, 죽을힘을 다해서 견딘 건데.

만약 이게 전부 잘못된 거라면, 그럼 나는 뭐지?

“알았지?”

왠지 입 안이 썼다. 정인은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밥은 먹을 생각도 않고 멍하니 앉아 있던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 수저를 내려놓고 정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쥐었다. 그러나 별말은 않고 한참 동안 정인의 손등을 쓸어내리기만 했다.

“무슨 생각 해?”

“음…. 전생에 나는 뭐였을까, 그런 생각이요.”

돌아오는 것은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그런 거 믿어?”

“아뇨, 원랜 안 믿는데 지금은 믿고 싶어요.”

그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정인을 바라보며 또 한 번 햇살처럼 웃었다.

“전생에 뭘 그렇게 잘했길래 이번 생에 형을 만났는지가 너무 궁금해서요.”

“…….”

“그걸 알면 이번 생도 똑같이 살 자신 있는데…. 다음 생의 다음 생까지도 계속 그 일만 하면서 살 텐데.”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마치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두꺼운 책 속 수많은 글자들 중에 딱 한 줄, 형광펜으로 밝혀 놓은 예쁜 문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지 않으니 그저 쑥스럽기만 했다.

“정말이에요, 최정인 애인이 될 만한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건 아마 저였을 거예요.”

하지만 호진은 꿋꿋하게 정인과 눈을 맞췄다. 정인이 무슨 짓을 하면서 살았든, 지난날들을 얼마나 한심하게 보냈든.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확신으로만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 앞에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정인은 웃어 버렸다.

“전생에도 참 열심히 살았나 보네.”

“그렇죠?”

그럼 나도 그냥 더는 상관 안 해도 되는 거 아닐까.

설령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이 틀렸대도 굳이 스스로 오늘을 저당 잡을 필요까지는 없는 거 아닐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손등 위에 얹혀 있던 호진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의 빛깔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짐짝처럼 등에 얹혀 있는 과거를 영영 못 본 척할 수는 없대도, 지금 당장 그 무게에 집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과거가 아닌 오늘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할 테니까.

“항상 예쁜 말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호진아.”

그리고 지금의 현실은 바로 여기, 숱하게 상처가 난 손으로 전해 주는 온기 속에만 있는 것 같았다.

***

마침내 정인이 차를 멈춰 세운 곳은 서해안에 위치한 바닷가였다. 간간이 불이 켜져 있는 횟집을 지나쳐 낮은 집이 붙어 있는 거리로 들어선 정인은 어느 한 집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유….”

드르륵 열린 문틈으로 한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폴폴 풍기는 술 냄새에 혹시 몰라 호진은 정인의 앞을 막아섰고, 정인은 까치발을 들어 호진의 어깨 너머로 말했다.

“강철용 선장님 안 계세요? 지금 자미도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양반 내일 장날이라고 일찍 들어갔슈.”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보관된 거 인계만 해 주시면 돼요.”

그 말에 남자가 껄껄 웃었다.

“뽀트는 됐구 고무 다라이 두 개 내줄 테니까 열심히 타고 가 봐유…. 거 내일 갈치 잘 잡히겠네.”

“고무 달…. 고무, 뭐요?”

전형적인 충청도 스타일의 농담이었다. 그를 칼 같이 알아들은 호진은 한숨을 쉬며 정인을 만류했다.

“지금 가면 위험한가 봐요.”

“오늘 밤은 파도가 나빠서 문어 배도 안 나가유. 그래도 내일 해 뜨면 한번 와 봐유…. 혹시라도 해가 안 뜨걸랑 빨리 뜨라고 전화도 한번 해 보구….”

남자는 홍알홍알 노래를 부르며 돌아섰다. 호진은 그제야 정인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우리 배 타는 거였어요?”

“응. 섬으로 갈 거거든…. 기상 이변은 상상도 못 했네.”

그렇게 말하며 정인은 볼록 튀어나온 벽 위에 앉아 버렸다. 호진은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아 검게 넘실거리는 바다를 살폈다. 뱃사람의 말대로 파도가 꽤 거칠어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하시게요?”

“해 뜰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아하….”

서늘한 바닷바람이 조금씩 기세를 더해 가고 있었다. 가방에서 새 옷을 꺼내 정인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그런데요, 형.”

그렇게 한참을 발끝만 툭툭 차다가 입을 열었다.

“해 뜨려면 많이 기다려야 하는데…. 밤바다는 춥기도 하고요.”

정말 다른 마음이 있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정인의 몸이 바닷바람을 몇 시간씩 맞기엔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근처 어디서 좀 쉬다 일찍 나갈까요?”

“근처?”

정인은 순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쪽에 숙소 많은 것 같아서요.”

길게 손을 뻗어, 저만치 번쩍번쩍 불이 들어와 있는 모텔촌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모든 모텔이 만실이었다. 겨우겨우 방이 하나 남았다는 곳을 찾긴 했지만 그마저도 썩 깨끗하지는 않아 보였다.

여러 명의 선수들과 한방에서 새우잠을 자던 청소년기가 아련하게 호진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스크를 쓴 채 진땀을 줄줄 빼는 호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주인은 곧 창틈으로 열쇠를 내밀었다.

“특실밖에 안 남았어요, 9만 원이요.”

방 하나가 간절한 상황이라는 걸 단박에 눈치챈 듯했다.

바가지를 쓰고 있다는 것쯤이야 뻔히 알았지만,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지금은 그놈의 방 하나가 전에 없이 간절해서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이걸로 해 주세요.”

그때, 정인이 등 뒤에서 불쑥 카드를 내밀었다. 호진은 황급히 그의 손목을 쥐었다.

“제발 그냥 넣어 두세요. 형이 숙박비 내시면 저 진짜 죽고 싶을 것 같아요.”

“…그 정도라고?”

정인이 잠시 멈칫한 사이 계산을 마쳤다.

세면도구가 든 파우치를 들고 돌아섰다. 엘리베이터에서는 끼긱 끼긱 이상한 소리가 났고, 복도 위는 이방 저방에서 틀어 놓은 TV 소리가 뒤섞여 엉망이었다. 기본적인 방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곳인 것 같았다. 그래도 막상 방 안으로 들어서니 영 잠을 자지 못할 컨디션은 아니었다.

익숙하게 카드 키를 꽂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리모컨을 들어 조명까지 전부 켜자 정인이 물었다.

“너 이런 데 많이 와 봤어?”

“많이 와 보긴 했는데….”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호진은 가능한 한 상세히 설명을 덧붙였다.

“어렸을 때 지방 대회 잡히면 같이 나가는 선수들이랑 다 같이 모텔에서 잤거든요. 당연히 전부 남자였고, 저만 이형질이었고요. 침대에 두 명, 바닥에 세 명…. 가위바위보 해서 이겨야 침대 올라가는데 저는 웬만하면 항상 져서 언젠가부터는 그냥 알아서 바닥에서 잤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다섯 명을 한방에 몰아넣는 게 적법한 일이었는지조차 의문이다.

“그래? 다섯 명이나 들어올 수 있구나.”

정인은 촌스러운 장판을 발끝으로 툭툭 차며 침대에 앉았다.

“난 이런 데 처음 와 봐.”

그러고는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고 있던 엄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호진은 천천히 정인에게로 다가가 바닥에 앉았다. 위를 올려다보자 정인이 웃으며 호진의 얼굴을 만져 주었다. 며칠간 쌓인 피로가 전부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앞으로는 더 많은 걸 하게 될 거예요.”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몇몇 개의 이미지가 감은 눈 안으로 떠올랐다.

훈련을 떠나는 길목에서 본 엽서들, 경기 팸플릿에 박힌 사진들, 병원을 오가는 동안 TV에서 본 것들….

“안 먹어 본 거, 안 해 본 거, 안 가 본 곳…. 전부 다 가 보고 해 봤으면 좋겠어요. 그럼 매일매일 재미있겠죠?”

그 모든 풍경 안에 정인과 함께 들어갈 것을 상상하니 앞으로의 긴 시간이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정인은 입가에 보조개가 쏙 파이도록 웃고 있었다.

“그러게.”

제아무리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을 들으면 질린다는데, 어떻게 된 게 최정인이라는 사람은 보면 볼수록 새롭게도 예쁘기만 하다.

“매일매일 재미있겠다.”

오물오물 열리는 입술이 좋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깜빡이는 속눈썹이 좋고, 이마에서 콧대로 넘어가는 지점의 오목한 부분마저도 좋아 죽겠다.

호진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정인을 불렀다.

“형.”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고, 여기서 뭘 더 바라겠다는 게 아니고.

“키스해도 돼요?”

그냥 보이고 들리는 게 없어서 그런다.

“…….”

인내심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정인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일 때가 되어서야 참고 있던 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몇 번 해 봤다고 이제 키스에는 꽤나 익숙해졌는지, 달달 떨기만 하던 처음과 달리 이제 정인은 먼저 호진의 입술을 핥아 보기도 하고, 장난치듯 뒤로 물러나는 혀를 이 사이로 살짝 물어 잡기도 했다. 그러다 코끝이 부딪쳤다. 정인은 간지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입술을 뗐고, 그 잠깐의 틈도 아쉬운 호진은 곧 정인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호진.”

정인이 문득 호진의 어깨를 밀어냈다.

“너 나 만나기 전에 이런 거 많이 해 봤어?”

“네? 그럴 리가요.”

당연히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유치원 생일 파티 때도 뽀뽀는 안 한다고 버텼어요,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려고.”

“영광이긴 한데…. 왜 이렇게 잘해?”

정인이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속에서 피가 끓었다.

“저 잘해요?”

호진은 서늘한 시선으로 정인을 쳐다보았다.

“비교군이 없어서 어차피 상대 평가는 안 될 테니까 그냥 형이 자체적으로 점수 매겨 주세요.”

“그런….”

“저 얼마나 잘해요? 몇 점 주실 거예요?”

“음…. 10점?”

호진은 그의 등 뒤를 손으로 받쳤다.

“그럼 10점짜리 계속할게요, 중간에 9점으로 떨어지면 꼭 말해 주세요.”

정인은 거의 반자동으로 호진을 끌어안았다. 무게중심이 기울며 두 사람은 함께 침대로 쓰러졌다. 옷감이 바스락거리고 정인의 등을 쓸어내리던 손에 무게가 실렸다.

이마를, 볼을 지나가 귀 아래의 연한 살에 입술을 붙였다. 정인이 어깨를 움츠리자 꽃집에서나 날 법한 향기가 확 스쳤다.

“…너무 좋아요.”

호진은 저도 모르게 정인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땐 향수를 쓰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맡아 보니 이건 인간이 조향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니다.

오메가의 향은 마냥 달기만 하다던데 막상 맡아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떠오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한여름의 생장미, 비 내린 정원, 흐드러진 치자꽃과 금목서. 전반적으로 달큼하고 싱그러웠지만 그 안에는 분명 알싸하고 시원한 기운도 조금 섞여 있었다. 젖은 손으로 로즈마리를 털어 낼 때나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분명 정인을 처음 만났을 때 맡아 본 적이 있는 향기였다.

“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진은 잠시 입술을 뗐다.

아직 민감도 레벨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팔 아래의 미인은 여전히 ‘분명 맡아 본 적이 있는’ 꽃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왜?”

“그냥….”

호진은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다. 얼마 전의 검사에서 페로몬 수치가 불안정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쩌면 지금 정인의 향을 느낄 수 있는 건 페로몬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정인을 만났을 땐 조금의 이상도 없었다.

이게 정말로 페로몬 향이라면, 그땐 어떻게 이 냄새를 맡은 거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지금은 몇 점이에요?”

“…자꾸 물어보지 말고.”

정인이 시선을 피하며 호진의 목을 끌어당겼다. 호진은 다시 정인에게 집중했다.

입술을 닫고 연한 살 위를 조심조심 문지르다 길게 핥아 내렸다.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니 도톰하게 튀어나온 쇄골 뼈가 아랫입술에 걸렸다. 그에 입 맞추는데 정인이 호진의 뺨을 붙들어 제게로 돌렸다. 잠깐 멈추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할까요?”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정인의 기색을 살폈다. 정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또 기분이 이상해요?”

“응.”

“큰일이네요.”

기본적으로 정인은 신체적 자극에 상당히 예민한 편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뭐가 닿았나 보다 하고 말 정도의 스침에도 매번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음이 아프지만 아마 오랫동안 겪어 온 통증 때문인 것 같았다.

일단은 어깨와 팔부터 차례로 주물러 주었다. 마침내 허리춤까지 손을 내리자 정인이 몸을 움츠렸다.

“아, 간지러워…. 이상해.”

커다랗게 펼친 손바닥 전체로 허리를 쓰다듬다가 뼈에 걸리는 지점마다 손끝을 세워 누르고, 그 자극에 몸이 크게 떨리면 곧장 손을 뗐다. 그를 반복하자 금세 익숙해진 정인은 곧 편안하게 숨을 쉬었다. 호진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턱 아래에 이마를 비비기까지 했다.

알고 하는 짓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본능대로 하는 짓인지 좀처럼 분간이 되질 않는다. 호진은 슬슬 고개를 치켜드는 음심을 간신히 억누르고 정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대로 조금 더 있고 싶었다. 아니, 실은 더한 것을 하고 싶었다.

“기분 좋게 해 드릴게요.”

내내 옷 위에 머무르던 손을 조금 움직여 옷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뜨끈한 손바닥이 맨살을 짚자 정인은 짧은 비음을 흘리며 호진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너무 이상하면 꼭 말하셔야 돼요.”

“응….”

그를 신호탄 삼아 옷을 가슴 아래까지 밀어 올렸다. 볕이라곤 한 번도 보지 않은 듯 흰 피부가 드러났다.

호진은 목 아래를 낮게 울렸다. 솜씨 좋은 조각가가 삶을 통째로 갈아 넣어 만든 역작 같았다. 도저히 경외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드러난 살갗에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호진의 머리카락 사이로 박혔다.

“…형.”

호진은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확 풀어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오메가의 향을 잡아낸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금세 증폭되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좋은데 당신은 어떨까. 정인의 표정을 살피려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어?”

호진은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정인이 형.”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에 달떠 있던 정인은 어느샌가 눈을 크게 홉뜨고 있었다. 꺽꺽 숨 막히는 소리를 흘리며.

살려 주세요.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제발.

“윽….”

폭발적으로 솟구친 호진의 페로몬 앞에 숨이 턱 막혔다. 정인은 갑갑한 목을 쥐어뜯었다. 그러자 점멸하듯 깜빡거리는 의식 속, 허름한 공사장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가던 납치범들의 등, 극적으로 살아남아 마주한 가족들의 얼굴, 기어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야 만 최정인, 신이 가끔 하는 실수.

‘이게 다 아빠 때문이잖아, 흐윽…. 아빠가 날 이렇게 만든 거잖아.’

한 번 발화가 시작되니 걷잡을 수 없었다. 영영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과 그로 인해 가족들이 지었던 표정, 하다못해 그날 집을 뛰쳐나가며 입었던 옷과 신발까지 전부 세세하게 기억나 버렸다.

“아악!”

“형!”

이대로 있으면 또 그때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너무 끔찍해서, 결국 정인은 악을 지르며 울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눈앞은 더 캄캄해졌다. 마침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때쯤엔 손에 잡히는 것을 전부 집어 던지며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도저히 성이 차지를 않아 벽에 머리를 박으려는데, 호진이 황급히 달려들어 정인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여기저기 긁히며 상처 난 팔을 움켜쥐어 제 품 안에 가뒀다.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약속할게요.”

떨리는 손이 등 뒤에 얹혔다. 앞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마구 쥐어뜯던 정인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어 들었다.

“정말이에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뒤집히던 세상이 마침내 제자리에 멈춰 서고, 정신이 돌아왔다. 불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흐윽, 흐….”

“정신이 들어요?”

묻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진은 무섭도록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선 몸에 힘부터 푸세요.”

“…….”

“몸이 긴장한 상태로 있으면 머리도 같이 긴장해요, 어서.”

등을 토닥이는 손을 따라 조금씩 힘을 풀었다. 호진은 한 번 더 정인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따라 왔다. 컵을 붙든 채 움직이지 않자 손목을 잡아 입가에 대 주기까지 했다.

무슨 정신인지도 모른 채 찬물을 들이켰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호진의 목덜미에 붉게 남은 상처가 보였다. 몸부림치는 동안 손톱에 긁힌 게 분명했다.

그걸 보니 정말로 죽고 싶어졌다.

“몸 괜찮아요? 병원 가 볼까요? 잠깐 가서 검사라도 받고….”

“괜찮아. 그럴 일 아니야.”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음 하나를 어쩌지 못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 버렸다는 게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몇 번이나 허락을 구하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해 줬는데도 결국 이렇게 만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나름대로 많이 애썼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니 이쯤 되면 당연히 해피 엔딩이 펼쳐져야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게 가도 가도 조금을 나아지지 않고 계속 이 자리다.

나 혹시 고장 난 거 아닐까. 어쩌면 이미 아주 오래전에 영구적으로 망가져 버린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지나간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졌다. 그동안 아무 의미 없는 짓을 해 온 것 같아서.

“호진아, 나 사실….”

정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호진은 테마파크에서 이미 한 번 비슷한 발작을 목격했다. 지금은 연인의 신분으로 이런 상황까지 겪었으니 도대체 왜 이러는지가 궁금하겠지.

“…어렸을 때, 납치당한 적이 있어.”

“…….”

“크게 다친 건 아니었는데, 납치범들 중 하나가 열성 알파였거든. 그때 그 사람 페로몬에 눌려서 죽을 뻔했어.”

호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트라우마가 돼서, 가끔 알파를 대하는 게 힘들 때가 있어. 진짜 아픈 게 아니라 몸이 아프다고 착각하는 거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슬그머니 호진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라도 미안해하거나 속상해할까 봐.

그리고 그는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군더더기 없이 정인의 현재에만 초점을 맞춘 질문이었다.

“…응.”

고개를 끄덕이자 호진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죄송해요, 앞으로는 페로몬 더 신경 쓸게요.”

“호진아, 네가 사과할 일 아니야. 그냥 내가….”

“잠깐만요. 이대로 놔두면 생각 너무 많이 할 것 같으니까, 우선 그것부터 끊어요.”

호진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이 상황에 형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절대 사과하지 마세요. 그렇게 크게 앓은 적 있으면 거부감 들 수밖에 없는 거고, 몸이 아프면 감정부터 격해지는 것도 너무 당연하잖아요. 저도 심인성 통증 자주 오는 편이라 잘 알아요.”

“…….”

“나머지는 형이 신경 쓸 필요 없는 일들이에요. 물건 어질러진 건 치우면 그만이고, 저는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았어요. 형 팔에 난 상처는….”

그는 정인의 손목이며 팔꿈치를 돌려 가며 긁힌 부위를 꼼꼼히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깊지는 않으니까 약 바르면 금방 나을 거예요. 이제 형 마음만 괜찮아지면 돼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호진은 정인이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사실만을 말했다. 끝까지 침착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그 배려 덕분에 정인이 먼저 상처를 헤집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호진의 태도가 고마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여태까지 정인이 겪었던 발작 직후의 풍경은 이렇게 깔끔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렇게 넘어가도 되는 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는 게 가능한 건가. 정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그리고 그 기색을 눈치챈 호진은 얼른 정인을 붙들었다.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크게 다친 사람 아무도 없고, 우리 사이가 달라진 것도 아니잖아요.”

그는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재차 확인시켰다.

“마음 가라앉히는 데에만 집중하시면 돼요. 서울로 돌아가서 쉬어도 좋고요.”

“…아니야, 이제 정말 괜찮아.”

정인은 그제야 편하게 숨을 쉬었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별것 아닌 일을 겪은 듯 느껴졌다. 스스로를 향하고 있던 자책마저 멎었다.

“이제 형 차례예요.”

무슨 소린가 싶어 쳐다보자 그는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다시 정인이 알고 있는 순한 유호진의 모습이었다.

“저 할 말 끝났으니까, 형 하려던 말 하시면 된다고요.”

사소하게 지나간 한마디도 기억하고 있었던가.

정작 정인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 잊어버린 참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호진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상처를 매만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침구와 베개는 물론,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전화기며 티슈까지 전부 집어 던진 것 같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호진은 대답 대신 정인을 꼭 안아 주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정인은 어설프게 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전쟁통처럼 어질러진 방 안의 풍경이 그의 넓은 어깨에 가렸다.

“혀엉.”

호진은 말꼬리를 늘이며 정인의 뺨에 제 얼굴을 붙였다.

“최정인한테 조금만 더 잘해 주시면 안 돼요?”

투정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 일이라면 손바닥의 작은 상처 하나까지도 신경 쓰시면서…. 그럼 지금 놀라서 정신없는 최정인의 마음에도 그만큼 신경 써 주셔야죠.”

마치 세상에 최정인이라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제일 먼저 그 마음을 알아봐 주고 신경 써 주세요. 그 정도 보살핌받을 자격 있는 사람이에요.”

“…….”

“그리고 정말로 그 사람을 위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단 말부터 하게 만들 순 없을 거예요.”

그에 정인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놀랍게도 타인의 일이라고 생각하자 그를 마주 보는 게 못 견디도록 싫지는 않았다. 아니, 심지어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정인은 속으로 가정해 보았다. 조금 전의 상황처럼 트라우마의 재경험으로 힘들어하는 타인을 봤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렇다면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구했을 것이다. 가장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고 마음이 놓일 때까지 곁을 지켜 주었을 것이다. 일단 사람이 놀랐으니까, 무서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비난할 거리부터 찾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섬뜩한 깨달음이 들이닥쳤다.

나는 나를 많이 싫어하는구나. 약간의 긍휼을 베푸는 것마저 아까워할 만큼.

“이제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응.”

왜 그랬을까.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처음 마주한 질문 앞에 우두커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에요.”

“응.”

“도장 찍고 복사도 해요.”

“뭐야, 애기같이.”

마침내 정인에게서도 웃음이 터졌다.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쏟아졌다.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정인은 호진의 품에 코를 묻었다.

“…내가 조금 더 강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호진을 위해 떠나 온 곳에서 이런 꼴을 보인 게 미안했다.

“지금도 충분히 강해요. 여기서 더 강해질 거면 내친김에 WWE도 나가야죠.”

호진은 웃으며 침구를 펼쳐 주었다.

“많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주무세요.”

“너는?”

“저는 아직 잘 시간 아니라서요. 짐 정리 좀 하다가 잘게요.”

그는 정인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토닥토닥 두드리며 잘 자라 인사했다.

“…호진아.”

“네.”

이유 없는 부름에도 그는 착실히 대답했다. 정인은 껌뻑껌뻑 졸음이 어린 눈으로 호진을 좇았다. 언젠가의 약속처럼, 어떤 일 앞에서도 일렁이지 않는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호진은 이따금 정인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안녕히 주무세요.”

힘든 밤이었다. 하지만 새로 맞게 될 아침이 서글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인은 끝까지 호진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호진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잠든 정인을 바라보았다.

정인은 어느샌가 천사 같은 얼굴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가방을 뒤졌다. 연고와 면봉을 꺼내고, 이불을 들추고, 정인의 손과 팔에 남은 상처 위로 연고를 펴 발랐다. 다행히도 모두 하루 이틀이면 사라져 버릴 생채기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아마 이것은, 최정인의 가장 깊은 상처이리라.

“…아.”

호진은 문득 처음 정인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알파라서 두려워했던 거구나. 맥없이 정신을 놓아 버리고, 눈을 뜨자마자 가시를 잔뜩 세워 덤비던 모습을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풀렸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잠시나마 정인이 자신으로 인해 두려워했다는 게 미치도록 싫었다.

그 마음을 곧이곧대로 표현하지 않은 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눈치부터 살피던 정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안해하거나 속상해하면 그 마음이 정인을 더 괴롭게 할 거란 걸, 그 순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

여기서 흔들릴 수는 없다. 어떤 일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겠다던 정인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호진은 담담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정인의 상처 위로 손을 들었다.

“…내일은 아프지 마세요.”

언젠가는 반드시 새살에 뒤덮여 사라질 상처, 눈이 닿는 자리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약을 발라 주었다.

***

“형, 여섯 시예요.”

한창 단잠을 자던 중이었다.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정인은 오만상을 지으며 눈을 떴다. 뜬금없이 우유 한 잔을 들고 있는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안녕….”

최근 몇 년간 이렇게 숙면을 취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편안한 밤이었다. 평소엔 열 시간을 내리 자도 온몸이 찌뿌둥하던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어떻게 된 건지 바로 전날 발작을 겪었는데도 꿈 한 번을 꾸지 않고 너무 잘 잤다.

“멀미할 수도 있으니까 우유랑 사과 정도만 드세요.”

“멀미?”

정인은 비몽사몽간에 그가 내미는 우유 잔을 받아 들었다.

“해 뜨면 배 타러 가기로 했잖아요.”

“아…. 그랬지.”

방은 어느샌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한구석에 접혀 있는 침구로 보아 호진은 바닥에서 잔 듯했다.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정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한 지점에 시선이 멈췄다.

“저게 뭐야?”

커다란 종량제 봉투를 꽉 채운 식자재가 보였다.

“장 좀 봐 왔어요.”

“이 시간에?”

“며칠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셔서요. 가재도구 파는 곳은 아직 문을 안 열었던데, 이따 나갈 때 봐서 없으면 마트 가서 냄비라도 사 올게요.”

“아니, 그런 건 다 섬에 있긴 한데….”

봉투 속에는 파프리카, 당근, 양파, 우유, 계란. 이름과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채소, 육류와 과일에 심지어 벌꿀까지 한 통 들어 있었다.

“…이럴 거면 아예 그냥 섬에서 사는 게 어때?”

“헉, 정말요? 그럼 저야 좋죠.”

누가 들어도 비아냥대는 말이었으나 호진은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딜이 안 들어가는 NPC에게 대고 초심자용 목도를 휘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여튼 힘들게 왜 아침부터 장을 보고 그래, 음식은 때맞춰서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 게 돼요?”

“당연하지.”

“어…. 그래도 형 입에 들어가는 건데 제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바깥 음식은 조미료가 너무 많이 들어간단 말이에요.”

호진은 더플백을 뒤져 과도를 꺼냈다. 상상하지도 못한 물건의 등장에 정인은 입을 떡 벌렸다.

“무슨 도라에몽도 아니고 반짇고리에 과도에…. 그 가방에 대체 안 든 게 뭐야?”

“일단 다이너마이트는 없는 것 같네요.”

그는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사과를 깎았다.

“저 사과 잘 깎죠?”

“응.”

정말이었다. 어떻게 저런 것까지 잘하는지, 사과 껍질은 한 번을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쭉 이어졌다. 마침내 깨끗하게 깎인 사과 한쪽을 베어 물자 호진이 웃었다.

“사과 잘 깎으면 예쁜 아기 낳는다던데.”

뭔 소린가 싶어 쳐다보자 호진이 슬쩍 눈을 피했다.

“그냥 알아 두시라고요. 저 사과 잘 깎는 거.”

어쨌든 사과는 아주 맛있었다. 호진은 정인이 사과 한 알을 전부 해치우자마자 칫솔에 치약을 묻혀 내밀었다. 그리고 정인은 막상 칫솔이 주어지자 군말 없이 양치질을 했다. 호진과 함께 산다면 매일 다침이 이런 모습일까, 은근슬쩍 상상하며.

“수건은 이거 쓰세요.”

“고마워.”

그러는 동안에도 호진은 여기저기를 오가며 열심히도 움직였다. 새 수건을 놓아주고, 사용한 컵을 세척하고, 사과 껍질을 따로 모아 봉투에 담고, 이미 완벽히 정리되어 있는 짐도 한 번 더 살폈다.

이제 겨우 아침 여섯 시를 조금 넘겼는데도 모든 동작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멍하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정인은 불현듯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호진아.”

뒤늦게야 발견한 그의 부지런함에 아차 싶었다. 칫솔을 내려놓고 다가가 미련한 등을 꼭 안아 주었다.

“형….”

“왜 이렇게 바쁘고 그래.”

모든 것을 놓고 도망친 곳에서마저도 그는 아마 언제나처럼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을 것이다. 장을 보고, 방을 정리하고, 그다음에는 우유 한 잔을 든 채 정인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겠지.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이니까. 매일매일 숨 돌릴 틈도 없이 치이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살던 사람이니까.

“바다 건너가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 알았지?”

자신이 눈을 뜨기 전의 한 시간 동안은 그를 말려 줄 무엇도 없었을 것이다. 초 단위로 쪼개져 있던 일상에 생겨 버린 공백을 혼자 견디도록 놔둔 것이 못내 미안했다.

얼른 섬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결코 뛰어들 필요가 없는 바다, 누구도 등 떠밀지 않는 물가를 한시라도 빨리 선물하고 싶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계획을 세우고 떠나온 것이 아니라 딱히 챙길 것도 없었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부둣가로 나서자 바다 냄새가 밀려들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물결 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직 섬은 코빼기도 뵈질 않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인은 수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갈 거야.”

“좋아요.”

호진은 순한 눈을 접어 웃었다. 도착할 곳이 어디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

마리나를 벗어나 한참을 나아가니 언젠가부터 돌아온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난간 앞에 선 호진은 발아래 넘실거리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넓은 바다까지 나올 땐 항상 오픈 워터 훈련을 위해 전문가용 안전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평상복과 구명조끼 외엔 아무것도 걸친 게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코치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고 먼 곳으로 떠나온 아침이다. 어차피 저녁 이전의 스케줄은 대개 호진 혼자 운동을 하는 게 전부이니 아직 그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고 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나 하나에 달린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나는 이토록 무책임하게….

“시원하지.”

“형.”

들려오는 목소리에 호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햇빛 아래 선 정인의 모습이 보였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사람. 그를 보고 있으니 이 모든 게 전부 꿈인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 눈을 뜨면 또 새벽 다섯 시, 빽빽이 차오른 일정을 내보이며 울고 있는 핸드폰 화면이 보일 것 같았다.

“급하게 나왔는데 이런 요트는 언제 준비하신 거예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정인은 선체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따로 준비한 건 아니고, 고모 거야.”

“네? 고모요?”

“응. 이런 건 누구 거든 가족들 다 같이 쓰거든.”

호진은 즉시 혼돈에 빠졌다.

지금 정인과 호진이 타고 있는 건 웬만한 사람이라면 평생 엄두조차 내지 못할 가격의 스포츠 요트였다. 당연히 대여일 거라 생각했고 나중에 선장에게 따로 이야기해 제 쪽에서 대여료를 정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인의 친척이 소유한 요트라는 데에서 말문이 턱 막혔다.

“크게 신경 안 써도 돼. 삼촌들은 좀 빡세긴 하지만 고모는 이런 데에 별로 흥미가 없어서 누가 타든 말든 상관도 안 해. 이것도 그냥 사기만 사 놓고 제대로 쓴 적은 없을걸?”

그 말을 듣고 있으니 조금 서운해졌다. 가족 중에 이런 요트를 처박아 둘 만큼 재정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 있다면 정인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지 않을 수 있도록 조금만 도와줄 수는 없는 걸까.

“그게 아니라…. 하.”

아무리 사랑해도 호진은 아직 웬만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정인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겠다며 대놓고 나설 수 없다. 정인이 스스로 유지하고 있는 삶의 균형을 존중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가 섞인 가족이라면 다르다. 물론 저 성격에 그런 도움을 순순히 받겠다고 하지야 않겠으나,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로라도 쥐여 보내면 당장은 마음이 불편할지언정 좀 더 편안히 학교에 다닐 수 있을 게 아닌가.

“저기야, 우리가 갈 섬.”

넋을 놓은 사이였다. 정인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드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섬 하나가 보였다. 오 분 남짓이면 충분히 정박까지 마칠 수 있을 것이다. 파도의 높이가 바뀌는 타이밍을 가늠하며 호진은 정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긴 몇 명이나 살아요?”

“아무도 안 살아.”

“헉, 무인도예요?”

“그런 셈이지.”

섬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라기엔 관리한 흔적이 많이 보였다. 해변에는 그 흔한 쓰레기 하나가 없고, 나무들은 모두 뜯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양제를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럼 섬 나올 때 연락해라, 아저씨 핸드폰 번호 알지?”

“네. 나가기 하루 전에 말씀드릴게요.”

선장은 요트에 타고 내리면서 호진과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도 전혀 알아보는 체를 하지 않았다.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로 정인과 필요한 이야기만을 나눌 뿐, 호진에게는 편하게 쉬라며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는 조용히 돌아설 뿐이었다. 그마저도 어딘가 현실감이 없었다.

“이제 가자.”

“넵.”

요트에 연결해 온 작은 배가 멀리 사라졌다. 정인이 먼저 돌아서고, 호진은 뒤따라 걸었다. 머지않아 긴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가를 따라 식재된 식물들은 전부 바다 한가운데서 자생하는 품종이 아니었다. 심지어 주기적으로 전지를 하는지 수형이 칼 같이 잡혀 있었다. 누가 이런 곳에 이렇게 신경 써서 조경을 해 놨을까, 궁금해하며 남은 계단을 올랐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건물의 모습이 보였다.

“와….”

영화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계단 아래와 달리, 헬리콥터 착륙장까지 갖춘 언덕 위의 드넓은 부지는 전부 현대적인 감각으로 꾸며져 있었다.

호진은 외국으로 훈련을 하러 갈 때면 가끔 초대받곤 했던 부호들의 파티를 떠올렸다. 암암리에 탈선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늘 인사만 하고 자리를 떴지만,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떠올려보건대 그들이 가진 별장은 대개 이런 모습이었다.

이윽고 건물 앞에 도달한 정인은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외관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보다 훨씬 넓어 보이는 내부가 펼쳐졌다.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데를 어떻게…. 여기 대체 뭐예요?”

정인은 호진의 발을 흘끔거리더니 신발장 안에서 새 슬리퍼 하나를 꺼내 뜯었다.

“내 알바비.”

그렇게 말하고는 백마 탄 왕자님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호진에게 슬리퍼를 한 짝씩 신겨 주었다.

눈대중으로 때려 맞힌 슬리퍼는 다행히도 호진의 발에 꼭 맞았다. 정인은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바비라뇨?”

“아, 그게.”

정인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텃밭 가꾸는 거 말야. 이번 학기 말까지 작물 수확해서 가져가는 조건으로 받기로 한 게 이 섬이거든.”

“그게 무슨…. 성북동 저택에 있는 텃밭 말씀하시는 거 맞죠?”

호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정인의 손을 잡았다.

“형, 혹시 고용주 직접 보신 적 있어요? 근로 계약서 쓴 적은 있고요? 이거 아무래도 딴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의아해하던 정인은 이내 자신이 집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게 아니라, 호진아.”

대학이야 다닌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렇다 쳐도, 학창 시절에도 외국에서도 이런 건 굳이 정인이 스스로 밝힐 필요가 없었다. 대놓고 말할 만한 일이 아니라 생각해 입을 다물고 있어도 꼭 어딘가에서 흘러나와 결국 모두가 다 알게 되기 일쑤였으니까.

이상하게 꼬여 버린 상황에 한숨이 터졌다. 호진과 처음으로 함께 저택을 드나들던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가까운 사이가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고, 먼저 묻지 않는 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대충 넘기고 지나친 게 오해로 발전한 듯했다.

“타이밍이 안 맞아서 말을 못 했는데, 사실 거기 우리 삼촌 댁이야.”

“네? 삼촌 댁이라고요? 친삼촌이요?”

여러 개의 물음표가 쏟아졌다.

“그러니까 고용주는…. 아니, 그 저택에 사시는 분은 형 삼촌 되시고, 형이 텃밭을 가꿔서 받기로 한 게….”

그는 멍한 눈으로 별장과 섬을 돌아보더니 물었다.

“…이 섬 전체라는 거죠?”

“응.”

“잠깐만 정리 좀 할게요.”

삼촌, 아르바이트, 섬. 세 개의 단어를 입에 넣고 굴리던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신 건 아니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었어.”

호진이 정인의 집안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그가 언제나 최정인이라는 사람만을 봐 준 덕이다.

집안 이야기를 하든 말든 자신을 보는 호진의 눈이 달라지지 않을 거란 사실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별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제 와서 따로 멍석을 깔아 놓고 이야기하자니 조금 어색했다. 결국 조금은 돌려 말해야 했다.

“나, 적어도 금전적인 부분으로는 크게 걱정해 본 적 없이 자랐어. 물론 내 힘으로 얻은 것들은 아니지만.”

호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정인을 보고 있었다. 정인은 황급히 덧붙였다.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게 아니야. 그저….”

단지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려는데,

“아….”

멍하니 정인만 바라보고 있던 호진이 땅이 꺼져라 한숨 쉬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온몸을 축 늘어트리더니 그대로 다가와 정인을 끌어안았다.

“다행이에요. 저는 형이 힘들게 학교에 다니시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니, 다른 건 하나도 모르겠고.”

그는 마치 생일을 맞은 소년처럼 웃었다.

“형이 자라는 동안에 그런 문제로 어려운 시절이 없었다는 얘길 들으니까, 그냥 너무 감사하고 좋아요.”

역시 호진은 정인의 예상대로 굴어 주지 않았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좋아 죽겠다는 말을 하니 이젠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너는 진짜 무슨….”

어디선가 삑삑 알림음이 울렸다. 정인은 소음의 출처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호진의 손목시계가 번쩍이고 있었다.

“뭔데?”

“오후 훈련 알람이요.”

“…그거 풀어.”

정인은 가차 없이 손을 뻗었다. 여전히 그의 손목 위에서 울고 있는 시계를 풀고 알람까지 꺼 버렸다. 호진은 어색하다는 듯 텅 빈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아, 맞다.”

그 모습을 보니 잊고 있던 선물이 떠올랐다. 정인은 내내 가지고 다니던 빨간 상자를 집어 들었다. 내부 뚜껑에 새겨진 로고가 보이지 않도록 이음새를 살짝 들추자 백금 팔찌가 나타났다.

“이건 뭐예요?”

“대회 선물 따로 한다고 했잖아.”

“헉, 아니에요. 저 이런 거 필요 없어요.”

호진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아니고요…. 이런 값비싼 선물을 주고받기엔 우리 둘 다 아직 너무 어리잖아요.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 더 큰 대회에서 우승하면 사 주세요. 그땐 감사히 받을게요. 지금은 형이 축하한다고 말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딱딱 끊기는 말투를 듣자 하니 그놈의 유 씨 고집이 슬슬 발동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최 씨 고집도 보통은 아니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면 그냥 받아. 선물에 나이가 대체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그런 상황이면 내가 너한테 고작 이딴 보석 쪼가리나 사다 줄 것 같아?”

“어…. 근데요 형. 저 팔찌 대신에 토끼풀 반지 하나만 만들어 주시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정인의 손을 잡았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게 뭔데?”

“알려 드릴게요. 같이 나가요.”

순식간에 휘말린 정인은 그를 따라 별장을 나섰다. 나무를 헤쳐 온 길을 되돌아 나가자 아침 햇살이 보석처럼 부서지는 백사장이 보였다.

“예쁘지?”

정인의 표정은 바다를 보자마자 환히 밝아졌고,

“네, 그렇네요.”

팔찌고 뭐고 금세 잊어버린 듯한 그를 보며 호진은 정인의 등 뒤에서 몰래 웃었다.

두 사람은 그늘 아래 신발을 벗어 두고 함께 모래를 밟았다. 발이 닿는 자리마다 사각사각 발자국이 새겨지고, 바다가 보내온 파도는 끊임없이 물과 모래의 경계에 부딪쳤다.

호진은 예쁜 조개껍데기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물에 씻어 정인에게 선물했다. 마침내 주머니가 꽉 찰 때쯤 되자 녹음이 우거진 언덕이 나타났다.

“여깄어요, 토끼풀.”

커다란 나무 그림자가 살랑이는 자리였다. 호진은 토끼풀을 발견하자마자 트랙 톱을 벗어 그늘 속에 펼쳤다. 여기 앉으세요, 바닥을 톡톡 두드려 정인을 앉힌 다음에는 고만고만 똑같아 보이는 꽃들을 손끝으로 훑더니 줄기가 긴 것만 골라내 무릎 위에 놓아 주었다.

“손 이렇게 해 보세요.”

정인은 시키는 대로 손을 펼쳤다. 호진은 진지한 얼굴로 작업에 착수했다. 하얀 꽃송이가 위로 가도록 위치를 정렬하고는 줄기와 줄기를 엮어 금세 반지 하나를 만들어 냈다.

“형도 만들어 보실래요?”

이번에는 호진이 손을 내밀었다. 정인은 가장 예뻐 보이는 꽃 한 송이를 들어 마찬가지로 그의 왼손 약지에 줄기를 감았다. 그러나 별일도 아니라는 듯 척척 엮어 가던 호진처럼 쉽게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아, 진짜.”

자꾸만 풀리는 줄기를 붙든 채 미간을 찡그렸다. 제법 애를 썼는데도 연약한 줄기가 전부 너덜너덜해져 버려야 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다시 하면 되죠.”

성질을 부리자 호진이 새 꽃을 내밀었다. 정인은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려 줄기를 엮었다. 머지않아 엉성한 반지 하나가 완성됐다.

“예쁘네요.”

호진은 다이아몬드 반지라도 받은 듯 행복한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펼쳤다. 정인은 그 옆에 나란히 제 손을 펼쳐 비교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진이 만들어 준 게 훨씬 예쁜 것 같았다.

“미안해. 다음번에 더 예쁘게 만들어 줄게.”

“형.”

부르는 소리에 호진을 돌아보았다.

“…저 부탁하고 싶은 거 하나 있는데.”

“뭔데?”

얼굴에 손바닥 그림자를 드리운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점에 맞아 들었다.

“이제부터 저한테 미안하다는 말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

“무슨 일이 있든 저한테는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는 하늘을 향해 뻗고 있던 손을 내려 땅을 짚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냥 예뻐해 주세요.”

그럼 저는 기쁘기만 할 거예요. 속삭이며 정인의 입술 위에 입 맞췄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 속에 간지러운 웃음이 섞여 들었다.

“물가에도 한번 가 볼래?”

“그럴까요?”

똑같은 꽃으로 만든 반지를 끼고 손을 잡았다. 왠지 놀리고 싶어진 정인이 은근슬쩍 깍지를 끼려 했지만, 호진은 어림도 없다는 듯 정인의 손가락을 전부 감싸 쥐었다.

정인은 쿡쿡 웃으며 그를 해변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바로 앞까지 달려 나갔다.

“여기가 내 개천이야, 호진아.”

드넓은 바다를 등진 채 호진을 돌아보았다. 반대 방향에서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흐트러트렸다.

“비록 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네 고향의 개천이 너를 키운 것처럼 이 바다도 어느 정도는 나를 키웠거든.”

늘 아름답기만 하던 노을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그 기억 위를 밟아 주는 타인이 유호진이라는 게 이 순간 정인을 많이 기쁘게 했다.

“같이 와 줘서 고마워.”

갓 다림질한 옷감처럼 구김 하나 없이 따뜻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제아무리 어두운 숲속에서도 하늘을 향해서만 자라나는 대나무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과 맞닿을 수 있어 참 기뻤다.

“지금은 별거 없어 보여도 저녁에는 너의 개천만큼 예쁜 곳이야.”

이렇게나 맛있고 예쁜 마음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정인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마주 잡아 줄 것을 알고 있었다. 서서히 스며들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샌가 첫사랑의 한복판이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호진이 정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정인은 으악 소리를 지르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눈을 맞추고 있었을까.

“아…. 안 되겠다.”

“응?”

별안간 호진이 어디론가 걸음을 돌렸다.

“뭐야. 어디 가는데?”

“그냥 조금 걷게요.”

정인은 퍽 난처해졌다. 안겨 있는 자신이야 크게 불편할 게 없지만, 아무리 선수라도 그렇지 성인 남자의 무게를 버티며 모랫바닥을 걷는 게 쉬울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호진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타박타박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형, 죄송한데 잠깐만 저 좀 꽉 잡아 보실래요?”

“어? 응, 알았어.”

뜬금없는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정인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려주길 반복했다. 멍하니 매미처럼 매달려 있던 정인은 똑같은 동작이 열 번을 넘어갈 때쯤 되어서야 이 짓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유호진, 설마 너 지금 나로 운동하냐?”

“아…. 네.”

“이게 진짜.”

정인은 그의 등짝을 철썩 내리치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너로도 한번 해 보자.”

“네?”

그 말에 호진은 정인의 다리를 흘끔거렸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면서도 그의 눈에는 ‘아마 안 될 거예요’라는 말이 또렷하게 쓰여 있었다.

“아, 빨리.”

자존심이 팍 상한 정인은 두 팔을 벌렸다. 호진이 슬금슬금 다가와 정인의 목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인이 했던 것처럼 발을 띄우고 온전히 무게를 맡기지는 않았다.

“왜 안 안겨?”

“음, 일단 이대로 한번 해 보세요.”

정인은 소싯적 배웠던 자세를 떠올리며 그의 무릎 뒤로 손을 밀어 넣었다.

“…….”

놀랍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그냥 1그램의 가능성도 없는 불가능의 영역인 것 같았다. 머리 위로는 갈매기가 깔깔 웃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아주 쓰레기가 다 됐네.”

정인이 허탈하게 손을 놓자 호진은 얼른 정인을 달랬다.

“쓰레기라뇨, 오랫동안 근력 안 하면 누구든 그렇게 돼요. 운동이야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고요.”

“다시 한다고 이게 되겠어?”

“당연하죠.”

그러고는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만 다리 좀 만져 볼게요.”

“뭐?”

정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변태 같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호진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불편하면 그만하라고 바로 말씀해 주세요.”

대답할 새도 없었다. 호진은 멍하니 서 있는 정인의 허벅지 쪽으로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고간과 연결되는 지점부터 엉덩이까지를 꾹꾹 눌렀다. 묘한 찌릿함이 빠르게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지난번 차 안에서처럼 실례라도 할 것 같아, 정인은 얼른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뭐, 무슨, 뭐 하는데?”

“선수 생활할 때 리프팅은 컨벤셔널로 하셨죠? 아까 보니까 그렇게 하시던데.”

“…뭐?”

애인의 다리며 엉덩이를 마구 주물러 놓고도 호진에게서는 눈곱만큼의 사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잘 벌어지는 골반이에요. 기본적으로 고관절 가동 범위가 넓으니까 스모 스타일로 연습해 보세요. 내전근 텐션도 빡 들어오고 좋을 거예요.”

그에 어쩐지 어이가 없어졌다.

“너는 여기서도 운동 생각밖에 없어?”

“그게 아니고요.”

호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라도 안 하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래요.”

“뭘 못 버티는데?”

“그야….”

뭔가 말할 듯 말듯 입술만 달싹이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평소엔 항상 이 시간에 운동하고 있어서…. 아직 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가 봐요.”

“호진아.”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제 그렇게 쏘아붙였냐는 듯, 정인은 재빨리 호진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혹시 그냥 쉬기만 하는 건 많이 힘들어?”

이 모든 것이 오히려 호진을 힘들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해 못 하는 거 아니야.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고, 너한텐 책임져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도 알아. 정 마음에 걸리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호진이 아, 하고 낮게 목을 울리며 정인을 끌어안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걱정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어디선가 짙은 풀 냄새가 확 풍겼다. 호진은 정인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는가 싶더니, 터트려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강한 힘으로 옥죄어 왔다.

장난으로라도 이런 적이 없던 사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지만 슬슬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정인은 그의 어깨를 톡톡 때렸다.

“나 좀….”

“어?”

호진은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며 정인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이상한 것을 물었다.

“혹시 방금 제가 형 세게 안았어요?”

“응?”

“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슬슬 들어갈까요?”

그는 이내 정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정인은 무심코 호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

정인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호진아, 잠깐만. 너 코피 나.”

“네?”

호진이 손을 들어 코 밑을 훔쳤다. 흰 뺨에 핏물이 엉망으로 번졌다. 그는 성가시다는 듯 혀를 한 번 차고는 정인을 향해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예전부터 이러지 않았어? 어디 좀 봐.”

정인은 황급히 그와의 거리를 좁혔지만,

“아뇨, 괜찮아요.”

그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혈관 터진 거 그냥 내버려 둬서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

“일단 들어가요, 간식 만들어 드릴게요.”

그러고는 정인의 손을 잡지도 않고 먼저 돌아섰다.

***

“샐러드 해 올 테니까 잠시만 여기 계세요.”

“어…. 그래.”

호진은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도망치듯 정인으로부터 멀어졌다.

부엌에 처박혀 있던 가방을 뒤져 페로몬 검사 키트를 꺼냈다.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그 피를 묻힌 뒤 잠시 기다리자 곧 두 자리의 숫자가 떠올랐다. 정상 범위를 살짝 벗어나 있지만 러트까지는 한참 모자란 수치였다.

이론상 러트가 터지려면 적어도 사나흘 전에는 확실한 이상 반응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니 아마 러트는 아닐 것이다.

“다행이긴 한데…. 왜 이러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눈을 뜨자마자 약을터 챙겨 먹었는데도 정인에게서 시시때때로 아찔할 만큼 짙은 향이 풍겼다. 실은 섬에 들어온 후로 쭉 그랬다. 지나가는 꽃 냄새처럼 잠깐 확 밀려들다 말기를 반복하다가, 조금 전에는 일순 이성을 잃을 만큼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컨디션이 많이 안 좋긴 했다. 정인과 함께 이곳으로 떠나오기 직전만 해도 평소 훈련량의 반도 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 내내 늘어지지 않았던가.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은 칼을 집어 들었다.

혼자 먹는 것이었다면 대충 만들었겠지만 정인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예쁜 사람에게 먹일 음식이니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예쁘기를 바랐다.

키위, 사과, 블루베리와 방울토마토. 심혈을 기울여 과일과 채소를 전부 썬 다음에는 크래커 위에 작게 자른 치즈를 얹고, 접시의 가장자리에는 오렌지를 잘라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칼을 씻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데,

“…윽.”

눈앞이 핑 돌며 쇠를 긁는 듯한 이명이 들렸다. 호진은 재빨리 스툴을 붙잡아 몸을 가눴다. 기다란 창에 경추를 꿰뚫린 듯 몸이 굳었다.

숨을 고르는 사이였다.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야는 점점 더 빠르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호진아, 너 왜 그래?”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정인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다고, 아무 걱정 말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어디 안 좋아?”

“헉….”

정인이 입을 열 때마다 천지에 꽃 냄새가 진동했다. 호진은 제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한 손에는 여전히 식칼을 든 채였다.

“형, 잠깐만요.”

이유도 없이 온몸이 간지러웠다. 피부 위로 무수히 많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이었다. 불쑥 폭력적인 분노가 머리를 치받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진은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정인에게 경고했다.

“잠깐만 저한테 오지 마세요.”

“호진아. 너 왜….”

“오지 마시라고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정인은 그제야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아, 하아….”

호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독한 갈증이 목구멍 안쪽을 태우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른침을 삼키며 정인과 눈을 맞췄다. 뼈까지 씹어 삼켜도 비린내조차 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몇 발짝 앞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시뻘겋게 물들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었다. 하나같이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질이 나쁜 말들이었다.

“헉….”

금방이라도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호진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며 정인에게로 다가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는 칼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였다.

호진은 느린 걸음으로 정인에게 다가왔다. 그에게서는 아찔하리만치 선명한 식물의 냄새가 풍겼다. 줄기를 자르고 잎을 찢어 짓이겨야만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냄새였다.

“윽….”

호진의 페로몬에 짓눌린 정인은 인상을 썼고, 호진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예리한 칼끝이 번쩍거렸다.

잠시 모든 것이 멈췄다. 정인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굳어 버렸다. 그러자 호진이 키친타월을 뜯어 칼날이 시작되는 지점을 감았다.

“혹시 모르니 들고 계세요.”

그러고는 덜덜 떨며 정인의 손에 그것을 쥐여 주었다.

“뭐? 그게 무슨….”

“저 지금 페로몬에 문제 생긴 것 같아요.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어요.”

호진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형 먼저 섬 나가세요, 최대한 빨리요. 구조 요청은 형 가시고 나면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도록 손가락까지 붙여 준 다음에는 정인을 등지고 복도를 향해 달려 나갔다.

“호진아!”

멍하니 서 있던 정인은 싱크대에 칼을 집어 던지고 그를 뒤쫓았다.

호은은 복도 끝의 방으로 들어가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정인은 얼른 달려가 그 문을 열려 했지만 방문은 이미 단단하게 잠긴 뒤였다.

“호진아, 문 좀 열어 봐. 응?”

정신없이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방문 안쪽에서 농도 짙은 향이 흘러나왔다. 정인은 화들짝 놀라 문으로부터 멀어졌다.

“헉….”

향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아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방문 안을 가득 메운 호진의 향은 차고 넘치다 못해 실금 같은 문틈으로도 새고 있었다.

특별히 컨디션이 나쁜 게 아닌 이상 남들의 페로몬을 잘 느끼지 못하는 정인에게까지 이렇게 독할 정도라면 실제로는 어마어마하게 짙을 것이다. 좁은 문틈에 새는 향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아윽….”

방 안에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높이가 낮은 것을 보니 호진은 문 근처에 쓰러진 듯했다.

“유호진, 이 문 열어.”

배려를 할 수 없는 상태의 호진은 연신 페로몬을 쏟아 냈다. 다시 트라우마가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호진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런 건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정인은 문을 두드렸다.

“너 지금 러트 온 거 맞지.”

이 상황에서 정인이 가장 빠르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러트였다. 그리고 만약 정말 그가 러트를 겪고 있는 거라면, 반쪽짜리 페로몬일지라도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정인이 알기로 알파의 러트에는 세 개의 단계가 있었다. 지금처럼 어느 정도 평상시의 인격을 유지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 본격적으로 정신을 잃기 시작하는 두 번째 단계, 그리고 마침내 이성이 모두 사라져 본능적인 욕구에만 반응하는 마지막 단계.

그때가 되면 상대가 문제가 아니라 알파 본인의 몸이 상한다. 그리고 호진은 지금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중인 것 같았다. 더 나가기 전에 어떻게든 중화를 시켜야 했다.

“우리 같은 형질이잖아, 같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이거 러트 아니에요. 바로 5분 전까지 키트 수치 정상이었어요.”

숨소리가 가까워지고 향이 조금 더 짙어졌다. 호진이 문가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해요, 이게 뭔지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아픈 숨소리가 이어졌다.

“최대한 정신 차리려고 노력할 거예요. 하지만 제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

“일단 섬부터 떠나세요. 그 사이에 혹시라도 제가 형을 위협하면….”

호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힘들겠지만 칼로 찔러서라도 제압하셔야 돼요. 무조건 형부터 지키세요.”

“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인은 대답 없이 거실을 향해 돌아섰다.

찬장을 열자마자 보이는 마스터키를 챙겨 돌아섰다. 이제 향은 복도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문틈이 벌어지며 그 앞에 엎드려 있는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온몸으로 문을 막았다. 손바닥 하나만큼의 틈을 남긴 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대체!”

안타까운 마음에 정인은 언성을 높였다.

“형….”

호진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모습이었다.

“부탁이에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살짝 벌어져 있던 문틈이 닫혔다.

“형한테 닿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페로몬으로 형 휘두를 수도 있고, 억지로 안으려고 덤빌 수도 있어요. 지금도 진짜 미칠 것 같아요. 머릿속에서 자꾸 이상한 말이 들려요….”

기어이 서러운 울음이 터졌다.

“저 힘으로 형 이길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호진이 애원했다.

“혹시라도 저 때문에 형 다치면 맨정신에는 못 살 것 같아서 그래요.”

정인은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끅끅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서글펐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향의 덩어리.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린 공간에 우두커니 선 채 정인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호진의 말이 백번 맞다. 만일 호진이 그가 잃고 덤벼든다면 정인으로서는 그저 휩쓸리는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어제와 달리 정인이 아무리 애원해도 그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머리가 아닌 본능으로 직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차근차근 배려해 주는 페로몬 속에서도 견디기가 힘들어 어젯밤 그 난리를 쳤는데, 저렇게 폭발적으로 터지는 페로몬을 맞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

분명 발작을 일으키겠지. 그 다음에는 지겹게도 따라오는 기억에 파묻혀 정신을 놓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결국 지켜보는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그에 죽도록 미안해하고, 이 모든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

스스로의 무기력함에 넌더리가 났다. 그러다 문득 너무나도 억울해졌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까마득한 오래전에 끝나 버린 일을 아직까지 끌어안고, 실재하지도 않는 고통에 발목 잡혀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데?

“…씨발.”

단 한 번도 내 잘못인 적이 없던 일이었는데.

“좆같아서 진짜.”

정인은 그대로 발을 들어 문을 걷어차 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리며 호진의 페로몬이 정인의 몸을 집어삼켰다.

놀랍게도 그게 견딜 만했다. 이딴 걸 왜 여태까지 그렇게 두려워했나 싶을 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유호진.”

호진은 어느샌가 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정인은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다가섰고, 호진은 푹 젖은 눈을 들어 정인을 바라보며 다가오지 말라 빌고 또 빌었다.

“제발요. 정말 안 돼요….”

“너는 그럴 수 있어?”

그 모습을 보니 또 한 번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나한테 칼 꽂을 수 있어? 아픈 나 두고 혼자 도망칠 수 있냐고! 너는 죽어도 못 할 거면서 어떻게 나한테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해!”

너무너무 화가 나서 눈물까지 치밀었다.

“아….”

울며 소리치자 호진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정인을 달래려 손을 들었다. 그러다 제 페로몬에 짓눌려 허리를 접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미련한 모습이었다.

“호진아.”

이렇게나 힘들어하는데, 잠시나마 망설인 게 너무 후회됐다. 짙은 풀 냄새를 흘리는 호진의 이마를 짚었다. 그는 정인의 손을 뿌리치며 물러났지만 정인이 조금 더 빨랐다.

“네 몸 쓰게 해 준다고 했지.”

호진은 막다른 벽에 등을 기댄 채 서글픈 눈으로 정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얕게 숨을 내쉴 때마다 기분 좋은 향기가 툭툭 터졌다. 조금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도 같았다.

“지금 쓰게 해 줘.”

“형….”

호진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정인의 손목을 붙들었다. 정인은 가볍게 그의 옷깃을 움켜쥐어 일으켜 세웠다. 마침내 제 어깨에 기대도록 끌어안은 다음에는 침대에 눕혔다.

“그놈의 페로몬, 어디 한번 휘둘러 보라고.”

“…….”

“먹히든 안 먹히든 뭐라도 해 보고 나면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긴장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코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까짓 게 뭔데?”

나는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실체도 없는 기억 따위에 삶을 전부 저당 잡힌 채 노예처럼 질질 끌려다녔다.

어쩌면 이번에도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운이 나쁘면 심인성 통증이 아니라 정말로 페로몬 쇼크가 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무엇도 유호진이라는 사람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더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마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세포가 모두 사멸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대로 너 두고 나갔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맨정신에는 못 살아.”

호진의 다리 위에 올라탔다.

“끝까지 너랑 같이 있을 거야. 내 선택이니 어떻게 되든 내가 감수해.”

허공에 걸려 있던 삶의 주도권이 온전히 손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정인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설령 또 정신 잃고 미친놈처럼 굴게 돼도 상관없어. 네가….”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연인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계속 내 옆에 있어 줄 거잖아.”

입술을 내려 새하얀 목덜미 위에 키스했다.

“어제처럼 물 먹여 주고, 손잡아 줄 거잖아.”

전에 없이 짙어진 호진의 향이 넝쿨처럼 정인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손마디가 얽혔다. 정인의 손가락이 제 손안으로 파고들자 호진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와중에도 깍지를 끼지 않기 위해 서둘러 그를 고쳐 쥐었다.

완전히 고장 나 버린 호진의 페로몬은 이제 홍수라도 난 듯 줄줄 흐르고 있었다. 물론 정인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페로몬을 제어하는 법을 모르는 몸은 너무나도 쉽게 알파에게 휩쓸리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본능의 영역이다. 평생을 기다려 마침내 완벽한 상대를 찾은 페로몬은 거침없이 작용했다. 둘 다 타인과 페로몬을 섞는 것은 처음인 데다 형질마저 같으니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아, 형….”

호진은 짐승처럼 목 아래를 울리며 정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정인은 빠르게 깨어나는 감각에 점점 예민하게 반응했다. 결국에는 그와 살짝만 스쳐도 살갗이 아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오르가즘이라는 게 이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호진의 목에 매달렸다.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내쉬며 서로의 입술을 물었다. 맞닿은 틈새로 타액이 줄줄 흐르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신음이 샜다. 부끄럽다는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자제력을 잃은 호진의 손은 어느샌가 정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

피부 위로 닿아 오는 열기가 낯설었다. 버티다 못해 앓는 소리를 냄과 동시였다.

“…힘드세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진이 물었다.

“아니, 괜찮아.”

정인은 고개를 저었고, 호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손을 뻗었다.

“뭐 하는 거야?”

우드득ㅡ. 커튼이 뜯어지며 레일에 달려 있던 플라스틱 고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커튼이 종잇조각처럼 찢어졌다. 호진은 길게 찢어진 천으로 제 손목과 침대 헤드의 끄트머리를 단단히 결박하고는 남은 한 팔로 정인을 끌어안았다.

힘들면 도망가셔야 해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 번 더 당부하는 말에 정인은 대답 대신 그를 끌어안았다.

“흐읏….”

다시 시작된 키스는 이전의 것보다 조금 더 질척했다.

솟구치는 페로몬에 완전히 뒤집힌 호진은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정인의 입 안을 훑었다. 그의 바지 안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푼 페니스가 직물을 한계까지 밀어 올리고 있었다.

한편 정인은 뜨끈하게 치고 올라오는 숨을 견디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다리로 호진의 단단한 몸을 휘감은 채였다.

허리를 지분거리던 호진의 손이 가슴팍으로 올라갔다. 호진은 뾰족하게 솟아오른 돌기를 누르며 정인의 목덜미를 깊게 빨아들였다. 혀를 내밀어 핥자 끔찍할 만큼 달콤한 향이 확 풍겼다.

방 안은 어느샌가 비 내리는 한여름의 정원이었다. 나무 향기와 꽃향기니 뒤섞이며 비릿한 음욕의 냄새로 변했다.

호진은 정인의 손을 움켜쥐어 아래로 내렸다. 스스로 만질 것을 종용하기라도 하듯, 볼록하게 튀어나온 정인의 앞섶을 문지르게 했다.

“흐윽….”

그러나 정인의 손은 자꾸만 어설프게 그 위에서 미끄러졌다.

호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정인의 상태를 살폈다. 어째서인지 정인은 많이 어색해하는 듯했다. 마치 한 번도 이런 짓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

만약 스스로를 만지는 것마저도 지금이 처음이라면….

“…모르셔도 돼요.”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배 속이 울컥 뒤집혔다. 한입에 최정인을 집어삼키고 싶어졌다.

“알려 드릴게요.”

달칵, 버클이 풀리고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내려갔다. 마침내 드러난 정인의 성기는 말간 분홍빛을 띤 채 프리컴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마저도 예뻐 죽을 것 같았다. 호진은 정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쥐고 아래를 흔들게 만들었다.

“아, 이게, 흐윽….”

엄밀히 말하자면 아래에 닿은 것은 정인 자신의 손이었지만 정작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은 호진이었다. 살만 닿지 않았을 뿐 결국 그가 만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금도 유실되지 않은 악력이 정인의 손가락을 타고 예민한 기둥을 훑었다. 어쩌다 한 번씩 호진의 손이 스칠 때마다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정인은 벗어나려 허리를 뒤틀었다. 하지만 호진은 정인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아래에 가해지는 압력은 더더욱 거세어졌다.

“아, 윽….”

결국 가느다란 허리가 크게 요동쳤다. 빠끔히 열린 요도를 타고 묽은 액체가 질질 흘렀다.

“아, 잠깐만…. 호진아.”

호진은 까맣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정인은 그를 밀어냈다.

“나…. 나 잠깐만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왜요?”

이상하리만치 목소리의 톤이 낮았다. 호진은 인형처럼 무표정한 눈을 한 채 되물었다.

“뭐 나올 것 같아서?”

정인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하세요, 괜찮으니까.”

“나온…. 나온 것 같은데.”

“아직 아니에요.”

호진은 아예 대놓고 제 손으로 정인의 것을 움켜쥐었다.

“그런…. 흑.”

뜨거운 열기가 직접적으로 전해졌다. 더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위아래로 움직이던 손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러자 벌벌 떨던 정인의 숨소리가 바뀌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호진은 정인의 아래를 움켜쥔 채 일순 모든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응….”

여름철 잘 익은 과일처럼 뺨이 달아올랐다. 정인은 제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무의식중에 호진의 손바닥 안에 제 것을 비비는 것이었다. 도톰하게 부푼 고환이 호진의 손목 아래 뭉개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원체 민감한 몸에 페로몬을 떡칠하듯 묻혀 놓으니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뒤가 열리며 애액이 쏟아졌다.

“아.”

음액을 흘리며 스스로 쾌감을 구하려 드는 모습에 결국 눈이 뒤집혔다. 호진은 그대로 머리를 숙여 정인의 것을 입 안에 머금었다.

“아, 흐, 흐윽…. 아, 잠깐….”

볼이 패도록 깊게 정인의 것을 빨아들이며 기둥을 흔들었다. 입술 전체로 귀두를 감싸 아래위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결박한 손목이 움직이며 침대 헤드의 나무가 삐걱삐걱 흔들렸다.

정인은 호진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으며 고개를 젖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툭툭 끊기는 숨소리를 따라 호진이 조금 더 세게 정인의 페니스를 흔들었다. 막연히 오르가즘이라 생각했던 것은 점차로 강해져 마침내 정말로 요의를 닮은 무엇이 되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간지럽고 두렵고 뜨거우며 벅찼다. 여기서 더 나가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황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호진아, 나, 흑….”

정인의 것을 문 채 호진이 눈을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발끝에서부터 찌르르하게 전기가 올랐다.

“헉….”

정인은 온몸을 벌벌 떨며 호진의 입 안에 사정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쾌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사정감에 머리가 절어서, 응당 미안하다는 말부터 나와야 할 일 앞에서조차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영혼을 통째로 뽑히기라도 한 듯 속이 텅 비었다. 입을 크게 벌린 채 헐떡였다. 아무래도 이게 진짜 오르가즘인 것 같았다.

“잘하셨어요.”

꿀꺽, 목울대를 넘기는 소리가 선명했다. 정인이 토해 낸 것을 그대로 삼킨 호진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고는 반쯤 내려가 있던 정인의 하의를 전부 벗겼다.

맨살 위로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그러나 다른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린 정인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두꺼운 손가락을 제 입 안으로 밀어 넣더니, 혀에 남은 정액을 긁어내 손가락에 묻혔다. 정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멍하니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늘 단정하기만 하던 얼굴이 음심으로 온통 엉망이었다. 반듯한 말만을 건네던 입가는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선하고 맑던 눈빛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진은 정인의 다리를 들더니 그 아래로 얼굴을 내렸다.

“하응….”

등이 안으로 굽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해 본 곳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고 있었다.

호진은 젖은 입술로 정인의 애널을 핥았다. 한쪽 손으로 엉덩이 살을 쥐어 벌린 채 드러난 곳으로 집요하게 혀를 놀렸다. 주름 하나하나를 직접적으로 핥기도 하고, 허벅지 안쪽을 빨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인은 아주 생경한 감각을 느꼈다. 쾌감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아….”

손끝과 심장에 똑같은 모양의 바늘이 하나씩 박힌 듯했다. 아주 작은 점이 동시에 쿵쿵 뛰며 그를 중심으로 뜨끈한 기운이 퍼졌다. 그것이 싫지 않아 감각을 더 집중하자, 하나였던 점은 순식간에 둘이 되고, 셋이 되다가 마침내 열 손가락에 전부 번졌다.

“형. 그러시면….”

정인의 아래를 빨고 있던 호진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위압적으로 부푼 근육 위에 힘줄이 두껍게 돋아나 있었다. 그는 목 안쪽을 낮게 울리며 말했다.

“제가, 참기가…. 너무 힘들어지는데요.”

정인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제가 엄청난 양의 페로몬을 풀어 냈다는 사실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호진은 정인의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새 녹진하게 풀려 버린 입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손가락 한 마디를 집어삼켰다.

정인의 몸 안은 뜨겁고 좁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 촉촉한 점막 속에 몸을 파묻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이 그를 붙들었다. 절대 정인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를 겨우겨우 붙든 채 가능한 한 천천히 움직였다.

“하, 윽, 흐….”

정인은 호진의 팔을 두 손으로 붙든 채 신음했다. 진입과 후퇴를 반복하는 손가락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디마다 튀어나온 굴곡이 예민한 입구를 벌리고,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한 몸은 무엇이라도 받아먹겠다며 움찔움찔 개폐를 반복하고 있었다.

낯선 이물감은 이내 간지러움으로 변했다. 너무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호진의 손가락을 뒤에 꽂은 채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움직였다. 곧 끝마디만 넣어 입구를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내부를 쑤셨다.

“흑….”

분수처럼 솟구친 액체가 엉망으로 튀었다. 놀란 정인은 호진을 끌어안았다. 거대한 어깨를 전부 담지 못한 손이 어정쩡하게 허공을 맴돌자 호진이 그를 잡아 제 목에 올렸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이 결합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목에 팔을 감았다.

“야해요.”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정인은 완전히 열기에 전도된 눈을 내려 호진의 아래를 쳐다보았다. 바지를 전부 벗고 있는 정인과 달리 그는 아직도 옷을 전부 갖춰 입고 있었다. 그러나 바지 너머의 사정은 정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너도…. 할래?”

호진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정인은 조심조심 움직여 호진의 것을 쥐었다. 어린애 팔뚝만 한 크기로 일어난 성기가 한 겹의 옷 너머에서 꺼떡거렸다. 정인은 슬그머니 그의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손에 닿는 감촉으로만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손안에 빠듯하게 차는 성기는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고 단단했다.

한쪽 방향으로 휜 페니스는 손가락으로 쓸어내릴 때마다 두꺼운 핏줄을 꿈틀거리며 약동했다. 그러나 흉포한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위의 언덕은 한 올의 터럭조차 없이 매끈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꽤나 의외였다.

“여기는 애기 같네.”

“윽….”

한쪽 팔을 스스로 결박한 탓에 호진은 가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 말릴 틈도 없이 아래를 쥐는 손길에, 그는 으드득 이를 갈며 정인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의 것조차 제대로 만져 본 적 없는 정인의 손길은 서툴기 짝이 없었다. 조금 아프다 싶게 꽉 쥐기도 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게 스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정말로 호진을 돌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정신적 쾌감이었다. 처음으로 이런 감각을 공유하는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정인이라는 게 견딜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흐윽….”

반면 정인은 육체적인 쾌감에 차츰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알파의 페로몬에 절어 버린 머리는 더 이상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 호진아….”

뒤를 헤집는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났다. 입구가 크게 벌어지며 쿨쩍거리는 소리가 샜다. 예고도 없이 쑥 뽑혀 나갈 땐 날카로운 교성과 함께 안쪽에 고여 있던 액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호진은 정인의 이마에 입 맞추더니 정인의 페니스 위로 제 것을 가져다 댔다.

“흐읏. 하….”

“…아.”

가장 예민한 곳을 마주 대고 비볐다. 쾌감의 역치가 낮은 정인은 얼마 가지 않아 또 한 번 바들바들 떨며 사정했다. 이미 한 차례의 사정을 거친 뒤 묽어진 정액은 기어이 호진의 옷자락을 더럽히고야 말았다.

호진은 정인의 배 위로 떨어진 정액을 그러모아 구멍에 펴 발랐다. 그러고는 급하게 제 것을 들이밀었다.

정인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저런 걸 집어넣었다간 정말로 몸이 망가질 것이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정도 판단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젖을 대로 젖은 점막은 여지없이 날뛰었고, 결국 호진의 것이 닿아 있는 상태에서 옴찔거리기 시작했다.

곧 뭉툭하고 두꺼운 귀두가 다물린 입구 위에 문질러졌다. 꾸욱, 눌러 붙이는 힘에 발끝이 굽고 구멍이 벌어졌다.

“형….”

단 하나의 동작도 요행인 게 없었다. 반동이 없도록 정인을 꽉 끌어안은 호진은 긁는 듯한 숨소리를 내며 아주 느리게 안으로 진입했다.

이미 정인의 아래는 애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묽은 액체가 아니라 미끈미끈한 점액이었다.

귀두의 가장 두꺼운 부분이 입구에 걸렸다.

“…아, 안 되겠어요.”

정작 첫 삽입 앞에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호진 쪽이었다.

정인의 몸이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제가 원하는 바야 너무나도 명확했지만 혹시라도 정인이 다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무서워서 더는 함부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정인이 손을 들어 호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냥….”

끝마치지는 않았지만 뒤따르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망설이던 호진은 정인에게 깊이 키스하며 허리를 밀어붙였다. 혀끝이 서로를 향해 얽혀 들고, 젖은 구멍 안으로 성기가 천천히 삽입되었다.

누가 가르쳐 주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맛보는 감각에 돌아 버린 두 사람은 정신없이 체액을 섞으며 서로를 끌어당겼다. 으응, 응. 제대로 된 소리가 되지 못한 신음이 맞닿은 입술 사이를 울렸다. 꽉 찬 주름을 밀어 내며 파고든 것은 마침내 깊은 곳에 멈췄다.

“아아….”

떨어진 입술 사이로 투명한 실이 늘어졌다. 호진은 정인의 골반을 꽉 틀어쥔 채 눈을 감았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쾌감이었다. 그리고 넣는 것만으로도 가 버린 정인은 또 한 번 사정했다. 주름진 내벽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맥박쳤다.

“아, 너무 좋아요….”

맨정신에 했어도 자극적일 일을 페로몬에 절여져서 하고 있으니 머리가 온전할 수가 없다. 호진은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풀어 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하, 아윽…. 아.”

발현하자마자 장애 판정을 받은 정인은 사실 페로몬을 푸는 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형질을 가진 알파와 몸을 섞게 되자 저절로 피가 들끓었다. 손끝과 심장에 박힌 작은 바늘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결국 그것은 무수한 점이 되어 온몸을 찔러 댔다.

“흐응, 앗!”

“…하.”

쑤욱, 쑤욱. 아래를 꽉 채운 것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정인은 숨기지 않고 교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손발을 타고 오르는 따끔한 통증이 익숙했다. 분명 정인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정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을 끌어모았다. 언제 어디서 이런 것을 느꼈었는지를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흐윽, 하….”

답은 멀지 않았다. 이것은 히트 사이클의 통증과 많이 닮아 있었다.

“…헉.”

그것을 깨닫자마자, 발끝에서부터 아찔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예고 없이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 윽, 정인은 입을 크게 벌린 채 꺽꺽 넘어가는 숨을 삼켰고, 확 터져 버린 정인의 페로몬에 잠식된 호진은 이성을 놓았다.

정인도 호진도 모두 신체 능력의 향상을 우선순위에 둔 채 성장기를 보냈다. 당연하게도 몸의 변화에 반응하는 신경이 일반인보다 몇 배는 예민했다. 물론 성적인 쾌감도 그들이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변화의 범위 안에 들어있었다. 그런 체질을 평생 의식적으로 억누르며 살았으니 첫 경험에 정신을 잃는 것이야 당연지사였다.

“하, 윽, 흐으….”

애틋한 애정과 걱정은 더 이상 어디에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선명한 것이라곤 동물적인 육욕뿐이었다.

완연한 번식기의 피크에 올라선 정인의 안은 가장 뜨겁고 부드럽게 풀렸고, 호진은 오로지 그곳을 파고드는 데에만 집중했다.

“아, 형….”

마치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이 사람과 이렇게 되기로 결정지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걸리적거리는 티셔츠를 벗어 버리고 정인의 옷을 벗겼다. 맨몸을 끌어안고 허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럴 때마다 정인의 몸 한가득 퍼져 있던 고통은 서서히 사그라져셔, 종국에는 뭉근한 쾌감이 되었다. 정인은 본능적으로 아래를 조이며 호진의 몸에 다리를 감았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우지끈,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호진의 손목에 묶여 있던 침대 헤드가 기둥째로 뽑혀 나왔다.

그는 부서진 나무 조각을 손목에 매단 채 정인의 몸을 완전히 감싸 안더니 기계처럼 일정한 박자로 아래를 쳐올렸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잔뜩 부푼 근육이 돌처럼 단단했다. 호진의 등에 얹혀 있던 정인의 손끝이 바짝 세워졌다. 호진에게는 그마저도 미칠 듯한 자극이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추삽질을 계속했다. 그러다 살짝 호흡이 흐트러지며 방향이 엇나갔다. 한쪽으로 휜 성기가 정인의 안을 짓이겼다.

“허억….”

사정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언가가 정수리를 꿰뚫었다. 정인은 한계까지 고개를 젖히며 몸을 떨었다.

〈4권에 계속〉

[각주 모음]

1) Emergency Stop Signal, 급제동 경보 신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