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숨은 시다 2권
지은이│오락
펴낸곳│비욘드
투고메일│[email protected]
ⓒ 오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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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Please allow me to be your hidden servant (2)
온몸이 불덩이였다. 목이 많이 부었는지 내뱉는 숨마다 얇은 쇳소리가 샜다.
호진은 미리 벗어 둔 옷으로 정인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는 조심조심 목을 받쳐 들어 기도를 확보했다.
“구급차 부를게요, 병원부터 가요.”
“…안 돼.”
파랗게 질린 얼굴로 품 안에 늘어져 있던 정인이 호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집으로 데려다줘, 낮게 이어지는 음절의 사이사이로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바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다. 너무 갑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졌기에 혹시 히트 사이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아파하는 정인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히트 사이클의 증상이라 알려져 있는 흥분이나 고양감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다.
“아뇨,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기조차 쉽지 않을 듯한 고열도 문제지만, 맥박과 호흡부터가 정상이 아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면서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건대 통증을 많이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제발, 부탁이야.”
정인이 울음을 터트렸다.
“병원은 조금 나아지면 갈게…. 아, 흐윽…. 집에 약 있….”
정인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몸을 말았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병원은 안 된다며 애원했다. 호진은 둥글게 품 안으로 파고드는 몸을 꼭 끌어안았다.
고통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이렇게까지 거부한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고, 그것을 캐물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해 줄 수 있는 것은 정인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는 일뿐이니, 우선은 그가 바라는 대로 집에 데려가서 상태를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알겠어요.”
가방을 뒤져 마스크와 모자를 썼다. 혹시라도 저를 알아보고 걸음을 멈춰 세울지 모를 사람들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다음에는 축 늘어진 정인을 그대로 안아 들고 화장실을 나섰다.
무슨 정신인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렸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정인은 자꾸만 품 안에서 의식을 잃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어깨를 떠는 걸 보니 통증에 기절했다가 다시 아파서 깨는 듯했다. 간간이 그 모습을 확인해 가며 날듯이 정인의 집 앞까지 달려온 호진은 가볍게 정인을 추슬렀다.
“비밀번호 뭐예요?”
이제 숨소리가 너무 작아져 있었다. 애가 타서 묻는 말에 정인은 간단한 숫자 네 개를 불러 주었다. 위험하게 여태까지 비밀번호를 1111로 놓고 살았다는 것조차도 지금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정인을 침대에 눕혔다.
“약 있다고 하셨죠. 어디 있어요?”
입을 열 기운조차 없는지, 정인은 대답이 없었다. 호진은 휑한 집 안을 이 잡듯 뒤졌다. 책상과 서랍을 헤집어 보고, 주방의 찬장을 전부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욕실로 들어서자 수납장 구석에 박혀 있는 약병 하나가 보였다. 다른 곳은 아무리 뒤져 봐도 약 비슷한 것조차 없는 걸 보니 정인이 말한 약이라는 건 아마 이것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약은 억제제였다. 심지어 호진이 복용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제품이었다.
R1형 억제제. 라벨에 눈길을 고정한 채 호진은 언젠가 정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호르몬 장애 때문에.’
‘쭉 베타로만 알고 살다가 열여섯 살에 발현했거든.’
히트 사이클이 맞을 수도 있겠구나. 억제제를 꽉 쥐고 부리나케 정인에게로 달려갔다.
“형, 여기 약 있어요.”
정인의 입 안에 약을 밀어 넣었다. 잘 삼킨 것을 확인하고 도로 눕히는데, 손이 닿는 부분마다 뜨끈한 열이 느껴졌다.
가방 속에서 타월과 손수건을 꺼내 미지근한 물에 흠뻑 적셨다. 손수건은 작게 접어 정인의 이마 위에 올리고, 타월로는 걷은 소매 아래의 피부를 살살 닦았다.
“흐윽….”
천이 닿기 무섭게 정인은 밭은 숨소리를 내며 도망치려 했다. 몸에 뭔가가 닿는 것만으로도 아픈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열이 잔뜩 오른 상태에서 찬 기운이 닿으니 아마 칼에 베이는 듯 아플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열을 식히려면 어쩔 수 없다. 이를 악물고 조심조심 목이며 얼굴을 닦아 주었다.
머지않아 가쁘게 차오르던 숨이 가라앉았다. 혹시 또 정신을 잃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확인해 가며, 호진은 제가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를 풀어 정인의 손목 안쪽에 붙이고 심박수를 확인했다. 벌써 약 기운이 도는지, 이제 적어도 화장실에서처럼 맥박이 불안정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호진은 미끄러지듯 바닥에 앉아 침대 위에 머리를 기댔다. 흰 손가락 끝에 붙은 반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
이 사람의 히트 사이클은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건가. 여태까지 항상 이랬을까.
항상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고 있던 정인의 모습이 떠올라 참담해졌다.
그래야만 했던 거다. 정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던 거다. 정말로 사는 내내 지나온 모든 히트 사이클이 오늘처럼 아팠다면, 매번 이런 고통을 견뎌야 했다면.
아마 많이 애를 써야 했을 것이다. 당연히 평소에도 예민할 수밖에 없었겠지. 타인에게 곁을 내줄 여유 같은 건 챙길 틈이 없었겠지.
“…유호진.”
“네.”
한결 가라앉은 숨으로 정인이 말했다.
“고마워.”
“…….”
죽을 것처럼 아팠으면서 정신이 들자마자 한다는 말이 참.
이렇게나 말랑하고 착한 사람이, 그렇게 뾰족해지느라 많이 힘들었겠다.
“…그리고 이제 가 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창백했다. 처음 만났던 날 본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안 돼.”
정인은 단칼에 거절했다.
“…정말 안 될까요.”
“그냥 혼자 쉬고 싶어. 부탁할게.”
많이 지친 것 같았다. 이제는 말을 들어야 한다. 호진은 그의 얼굴 위에 머물던 시선을 거두었다.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 주셔야 돼요.”
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겨우 움직여 현관에 선 호진은 천천히 신발을 꿰신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손을 탄 흔적 없이 그대로 문 앞에 놓여 있는 아침밥을 챙기며 한 번 더 덧붙였다.
“…꼭이요.”
정인이 혼자 고통을 참는 데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하여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
병원을 끼고 있는 컨디셔닝 센터는 늘 그렇듯 오전 내내 부산스러웠다. 허리가 틀어진 사격 선수를 고쳐 내보내면 곧바로 무릎에 물이 찬 축구 선수가 들이닥치고, 손목 인대가 늘어난 양궁 선수를 정형외과로 보내고 나니 그제야 점심시간이었다.
막 컵라면 하나를 까먹으려던 권 실장은 문득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포장을 뜯던 것을 멈췄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은 호진이었다. 권 실장은 황급히 모니터를 확인했다. 하지만 역시 오늘은 호진의 이름으로 잡힌 예약이 없었다.
“오늘 오는 날 아닌데?”
“아, 개인적으로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권 실장에게 보자기에 둘둘 싸인 무언가를 내밀었다. 열어 보니 갓 구운 듯 뜨끈한 라자냐 한 판이 들어 있었다.
“식사 아직이실 것 같아서 만들어 봤어요.”
“세상에, 고마워서 어떡하지…. 일단 앉아.”
자리를 권하자 호진은 허리를 접어 인사하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저…. 선생님, 이형질 선수들도 많이 보시죠?”
권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호진이 물었다.
“혹시 호르몬 장애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어떤 장애?”
호르몬 장애의 종류는 한둘이 아니다. 갑자기 형질이 변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분명 판정을 받았는데 죽을 때까지 발현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판정 없이 발현하는 경우도 간혹 보고될 때가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판정 없이 사춘기쯤에 발현했다고 들었어요.”
“아, LGS? 그거 되게 드문데.”
권 실장은 라자냐를 우물거리며 문서를 출력했다. LGS에 관한 배포용 자료와 논문 두어 편이었다.
“갑자기 그건 왜?”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많이 아픈 것 같아서요.”
“…알파야?”
“아뇨.”
뜻밖의 대답이었다.
오메가의 LGS1)는 수많은 장애 유형 가운데서도 가장 드문 축에 속하는 희귀병이다. 국내에 보고된 사례 중 지금 살아 있는 사람만 추리면 전부 합쳐 봐야 전국에 스무 명도 안 될 만큼 수가 적은데, 하필이면 TH가家의 3세도 그에 해당하는지라 그룹 산하의 의료 기관이 장장 6년을 매달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특별한 성과가 없다고 들었다.
“호진아. 이런 거 물으면 좀 실례인지도 모르겠는데.”
“네?”
“앞으로 네 민감도 관리 방향이랑 직결되는 문제라서 묻는 거니까 나쁘게 듣지는 마. 혹시 너 애인 생겼니?”
권 실장의 물음에 호진의 얼굴 위로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그녀는 라자냐 한 조각을 더 집어 먹으며 덧붙였다.
“LGS 있는 오메가를 알고 지낸다면 아무래도 좀…. 깊은 사이가 아닐까 해서.”
호진은 여전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설명할게.”
아니면 말고, 라는 말로 운을 뗀 권 실장은 호진의 눈치를 살피다가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국내에는 지금 LGS를 겪는 오메가가 백 명도 안 돼. 그리고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만 놓고 보면 이 사람들에게는 확정적인 공통점도 패턴도 없어.”
두 개의 동그라미 위로 직직 밑줄을 그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직 가설이긴 하지만, 원인이라 추측되는 건 이거야. 발현의 키가 되는 세포가 숨어 버린 상태로 태어난다는 거.”
“…….”
“임신 초기에 모체가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뭘 잘못 먹거나…. 하여튼 자기 형질을 드러내면 모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태아가 본능적으로 감지해서 나름의 방어 시스템을 돌리는 거다, 라는 거지. 아직 제가 사람인 줄도 모르는 세포 주제에 자기 품은 사람 살리겠다고 그러는 게 좀 짠하기도 해.”
권 실장이 덧붙였다.
“그 상태로 태어나면 어떻게 되겠어? 발현 인자가 숨어 버린 거라 백날 검사를 해 봐야 절대 안 나와.”
그녀가 든 펜촉은 이윽고 두 개의 동그라미 아래 똑 떨어져 있는 작은 원으로 향했다.
“물론 이 모든 조건이 다 맞아도 대다수는 발현하지 않아. 그러면 장애고 뭐고 없이 평생 베타로 사는 건데, 재수 없게도 발현해 버리는 사람들이 LGS 판정을 받는 거야. 그나마도 알파라면 사는 동안 러트가 몇 번 없으니 상관없는데, 오메가면 좀….”
“…어떤데요?”
“평생 눌려 있던 게 한 번에 터져 버리는 거라서, 발현 시점부터 페로몬 민감도가 일반인의 몇 배 이상 올라간 채로 살게 돼.”
“…….”
“기본적으로 호르몬 장애니까 히트 사이클 주기 자체가 불규칙할 수밖에 없는데, 이 사람들에게 히트 사이클은 그냥 지옥이야. 남들처럼 적당히 기분 들뜨는 정도가 아니라 랜덤하게 한 번씩 터질 때마다 엄청난 통증을 느끼는 거지. 호르몬 문제라 진통제 같은 것도 잘 안 들어.”
이어 작은 원 위로 체크 표시가 그려졌다.
“잘 알려지진 않은 얘기이긴 하지만 TH 그룹 3세도 이 케이스거든? 그래서 삼한 의료원이랑 한오 제약이 존스 홉킨스 교수며 하버드 박사며 다 데리고 몇 년째 연구 중인데, 수술은커녕 아직까지 억제제 말곤 약도 없어.”
굴지의 대기업 재벌 3세마저도 타개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보고 나온 정인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억제제를 쓰는 데에는 좀 문제가 있어. 안 그래도 응축된 페로몬이 문제인 건데 인위적으로 페로몬 레벨을 낮추는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
“…부작용이 생기나요?”
권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챙겨 먹으면 모르겠는데, 통증이 워낙 심해서 대부분의 LGS 환자가 약을 과다 복용하는 경향이 있어. 그렇게 되면 다음 히트 사이클 때는 약이 눌러 놓은 페로몬 때문에 더 아프지.”
“…….”
“그래서 약을 더 먹고, 그다음엔 더 아프고…. 이런 식으로 연쇄 부작용이 오는 거거든. 이런 경우에는 알파 파트너를 두고 장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게 통증 완화에 그나마 낫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환자들 스스로도 대부분 알고 있고.”
“…관계라면.”
“물론 성적인 관계지.”
쿵, 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성인이라면 설령 애인이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알파 파트너 한둘쯤은 무조건 두고 있을 거야. 문란하네 마네 밖에서 떠들 게 아니라, 본인부터 살고 봐야 하니까 정말 어쩔 수가 없어. 그래서 아까 애인 생겼냐고 물어본 거고.”
권 실장의 말투는 꽤나 확정적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정인에게도 그런 깊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걸까. 사실 썩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사람을 누군들 탐내지 않겠는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혹시 여태까지 내가 임자 있는 사람을 귀찮게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하니 그야말로 찬물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네, 형질 유형이 달라도 일단 알파면 그쪽에서는 무조건 잡고 싶어 할 텐데. 게다가 너 R1형 아니야?”
“네.”
“R1이면 거의 모든 유형이랑 맞잖아. 그런데도 별말이 없어?”
호진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미소지었다.
“그런 사이는…. 아직 아니라서요.”
“…….”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신 자료도 정말 감사해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발아래가 푹푹 꺼져 드는 것 같았다. 로비의 의자에 털썩 앉은 호진은 권 실장이 건네준 논문을 한 장씩 훑어보았다.
그러다 정인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떠올랐다.
‘호진아, 나 좀 도와줘.’
정인은 단 한 번도 성을 떼고 호진을 부른 적이 없었다.
그게 정말 내 이름이었던가?
“아….”
호진아, 호진아, 효진아, 효진아.
“…효진이.”
그렇게 호진은, 그날 정인이 부른 것이 타인의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
밤이 깊도록 통증은 가실 생각을 않았다.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정인은 결국 억제제 한 알을 더 삼켰다.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히트 사이클이 지속되는 내내 이 페이스로 약을 먹는다면 다음번엔 정말로 꼼짝없이 입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가 없어 자꾸만 약에 손이 갔다.
마지막으로 히트 사이클을 겪은 건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몇 주 전이다. 그러니 못해도 서너 달 정도는 지난 셈이다.
사는 환경이 급격히 변한 탓인지 석 달이나 잠잠하던 게 이제 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친다. 차라리 사이클이 자주 돌아 빨리빨리 호르몬이 순환되면 견디기가 좀 수월하지만, 그 흐름은 장애가 있는 정인의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어서 모든 게 지나가기를 바라며 덜덜 떠는 것뿐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아픈 건 둘째치고, 이번에는 오랜만의 사이클이라 그런지 약도 잘 듣지 않았다. 호진이 먹여 주고 간 첫 번째 억제제의 약효가 다하자 그 뒤로는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나아지질 않았다.
“흐윽….”
피부 아래의 모든 근육이 낱낱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중엔 허리조차 제대로 펼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이대로 기절해 모든 게 끝난 뒤에나 정신을 차리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바닥에 웅크린 정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조금의 냉기라도 찾기 위해 바닥 위로 이마를 붙였다. 하지만 매끌매끌한 장판 따위는 역시 대리석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고 그저 꼴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잠시 찾아온 소강상태 속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통증이 올라올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주었더니 이제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이러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다가, 이렇게 아플 거라면 차라리 지금 죽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다가. 또 정훈과 원경을 떠올리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죄스러웠다.
“…아, 윽.”
멈춰 있던 통증이 거세게 기세를 드높였다. 으드득 이가 갈렸다. 이제 슬슬 견딜 수 있는 통증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 같았다.
도저히 뭘 어쩔 수가 없었다. 잔뜩 웅크린 채 신음성을 삼키자 악다문 입술이 터지며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뚝뚝 떨어진 핏방울이 바닥 위로 물드는 것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이나마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게 하던 여유는 거기서 끝났다. 완전히 이성을 놓아 버린 정인은 본능적으로 아빠들을 찾았다.
“흐윽, 아빠….”
이제는 정말로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며 정인은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념을 붙들었다.
나 이제 더는 못 하겠어. 이제 정말 다 그만둘래. 이것밖에 안 돼서 모두에게 정말 미안해.
아니, 사실은 항상 미안했어요.
“…흑.”
그때,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누군가가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비닐봉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형!”
그리고 정인이 의식을 놓음과 동시에, 들고 있던 것을 전부 집어 던진 호진은 황급히 정인에게로 뛰어들었다.
“형, 정신 좀 차려 봐요. 네?”
한참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던 정인은 너무나도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파랗게 질린 얼굴에 눈가만 벌겋고, 세게 깨문 흔적이 남은 입술은 엉망으로 터져 피가 줄줄 샜다.
“아, 어떡하지…. 형, 제 말 들리세요?”
가란다고 정말 가 버리면 안 되는 거였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같이 있어 주었어야 했다.
정인이 이렇게 된 게 전부 제 탓인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그 효진이라는 사람이 너무나도 미워졌다. 정인은 마지막까지도 그 사람을 찾았는데,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기에 밤이 다 저물도록 나타나지를 않는단 말인가.
호진은 정인을 추슬러 안고 곧바로 구급차를 불렀다. 대강 상황을 설명하자 상담원은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조금 전에 의식 잃었고 호흡도 많이 약해요.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여기 주소가…. 한미르길….”
“…전화 끊어.”
품 안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호진은 얼른 고개를 들어 정인의 얼굴을 살폈다.
“형….”
“어서.”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해요. 그냥….”
“부탁이니까, 제발.”
정인이 말했다.
“…지금은 정말 안 돼.”
음절의 사이마다 아픈 숨소리가 차올랐다. 핸드폰을 쥐고 있던 호진의 손이 느리게 바닥을 향했다.
“그럼…. 저 형 옆에 있게 해 주세요.”
전화 너머의 상담원이 이쪽을 향해 여보세요, 하고 한 번 더 말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 모든 소리가 멎어 들었다. 호진은 정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켜보기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
God makes no mistakes.
친구들이 좋아하던 노래에 이런 가사가 쓰여 있었다. 신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너는 분명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 거라고.
처음에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실은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살던 대로 사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니까.
왜 하필 그런 가사가 쓰여졌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건, 납치를 당한 뒤의 일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열 시간 남짓을 공사장 구석에 갇혀 있었을 뿐이고, 페로몬 때문에 죽을 뻔 했다는 걸 빼면 그들이 내게 딱히 해를 가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재수 없게도 2인조로 구성된 납치범 중의 한 놈은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하는 열성 알파였고,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내 페로몬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은 게 바로 그놈의 페로몬이었다.
‘얼마 부를까. 삼천 정도?’
‘그냥 천 오백만 해.’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썩 똑똑한 놈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가 그놈들의 타깃이 된 건 정말로 단지 운의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그럴싸한 계획도 뭣도 없었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닌다는 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때마침 혼자 하교하던 나를 납치했을 뿐, 내가 어느 집안의 자식인지조차 몰랐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에 대해 알았다면 고작 일이천을 부르네 마네로 그렇게 오랫동안 아웅다웅하진 않았겠지.
‘가족 전화번호 불러 봐. 부모, 친척, 누구든.’
이제 막 약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내게 가족들의 전화번호를 대라 윽박지르던 것마저도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협상할 상대의 연락처조차 모른 채 덥석 납치부터 감행한단 말인가.
‘윽….’
아빠들에게 연락하고 싶은 건 이쪽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시의 내 몸은 조금의 충격으로도 쇼크에 빠질 수 있을 만큼 약했다.
‘다치게 할 생각 없으니까 빨리빨리 끝내자.’
납치범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재촉했지만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풍기는 알파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그게 너무 당황스러웠다. 생활 반경 안에서 만나는 알파들은 모두 장애를 가진 나를 배려해 주는 편이었으니까. 이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페로몬을 줄줄 쏟아내는 알파는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 새끼가 진짜.’
내가 어째서 입을 다물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납치범은 답답하다는 듯 나를 툭툭 건드렸다. 뭐라 소리를 지른 것도 같지만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진 않는다.
‘윽….’
전혀 조절하지 않은 날것의 페로몬에 무방비로 노출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알파의 손이 닿자마자 온몸을 들쑤시는 통증에 등부터 확 굽었다. 결국 의자에 묶인 채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생전 처음 겪는 고통이었다. 발현하던 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파서, 나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한참을 볼썽사납게 꺽꺽거렸다.
‘뭐야, 얘 왜 이래.’
희미하기 짝이 없는 내 페로몬 때문에 그는 끝까지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내 발작이 저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당황한 납치범이 내 어깨를 틀어쥐었을 때, 목구멍 안쪽이 조여들며 본격적으로 숨통이 막혔다.
‘흐윽, 으….’
아무리 애써도 한 줌의 공기조차 들이마실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잔인한 통증은 연신 온몸을 헤집어 댔다.
이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이러는 건가, 나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아득한 공포심 속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살려 달라 빌었다. 그러나 정작 입밖으로 나가는 것은 긁는 듯한 쇳소리가 전부였다. 머지않아 눈이 뒤집히며 온몸에 힘이 빠졌다.
‘씨발, 어떡하지?’
‘비켜 봐.’
지켜보고 있던 다른 남자가 다가와 묶여 있던 내 손발을 풀었다. 그때, 멀리서 웅ㅡ 하고 기계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좆 됐다. 누구 온 것 같은데.’
‘씨발. 재수가 없으려니까.’
조금씩 숨이 꺼져 가고 있었다. 그들은 널브러진 내 모습을 흘끔거리다 황급히 도망쳤다.
‘허억….’
이대로 여기에 혼자 남겨진다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들의 등 뒤에 대고 입만 벙긋거렸다. 너무 아파요, 살려 주세요.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제발.
‘아, 윽, 아….’
사는 내내 원하는 것은 뭐든 가질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은 전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순탄하던 삶이 한순간에 이토록 죽음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꿈에서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지독한 공포심과 무력감에 몸서리치며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조금씩 의식이 멀어져 갔다.
‘아이고, 세상에!’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플래시라이트가 비치며 설풋 정신이 들었다.
‘얘야, 너 여기서 뭐 하니. 응? 정신이 좀 들어?’
글자 그대로의 천운이었다. 죽어 가는 나를 발견한 것은, 다음날 사용할 자재를 확인하기 위해 느즈막이 공사장에 들른 관리자였다.
그는 점퍼를 벗어 내게 입히고는 계속해서 뭐라 뭐라 말을 걸어 댔다. 잠들면 안 된다며 뺨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에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결국 입술만 달싹이다가 도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인아.’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콘크리트에 쓸린 생채기 위로 두꺼운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공사장에 쓰러져 있었다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응?’
작은 아빠는 창백하게 핏기 가신 손을 들어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아빠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정리하려 애썼다.
‘…….’
하굣길에 납치를 당했고, 갑작스러운 페로몬 쇼크에 숨이 멎었다.
납치범들은 의식이 없는 나를 내버려 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서….
‘…….’
잠깐. 이걸 정말 아빠들에게 말해도 되는 걸까?
이미 아빠들은 갑작스레 페로몬 장애를 얻은 나로 인해 충분히 자책하고 있었다. 굳이 입을 열어 그들에게 또 다른 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이상한 용기가 샘솟았다. 없던 일이라 치자면 얼마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으니까. 결국 아무것도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냥, 들어가 보고 싶었어. 궁금해서.’
나만 입 다물면 끝날 일일 줄 알았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이 모든 게 사춘기의 일탈 정도로 비치기를, 살다가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는’ 일로만 보이기를 바라며.
정확히 그때를 기점으로 내가 미쳐 가기 시작했다는 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잠깐만 둘러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파서 쓰러졌어.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
‘…….’
‘…걱정시켜서 미안해.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세상에 영원한 슬픔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보리가 죽었을 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운동을 그만두고 난 뒤에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혼자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만 입 다물고 조용히 견디면 괜찮아질 줄로만 알았다.
꼭 안아 주는 작은 아빠의 품에 안겨 까무룩 잠들었다. 눈을 뜨면 모든 게 없던 일처럼 사라질 거라 믿으며.
결론적으로는 그 생각이 맞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은 정말로 별일이 아니었다고 느껴지는 때가 더 많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어리고 약했다. 발현과 동시에 보리를 떠나보내고, 평생의 길이라 믿었던 운동을 그만두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것마저 그 무렵이었다. 이미 한계까지 몰려 있던 내게는 더 이상 회복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그 상태로 일주일 남짓이 지나니 언젠가부터는 집 밖으로 한 발짝을 나서는 것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당장이라도 납치범들이 다시 나타날 것 같았고, 지나가는 모든 알파들이 나를 죽이려 들 것만 같았다. 길을 걷다 누군가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돌아서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신고하자. 그 새끼들 잡아 처넣자고.’
내가 이상해졌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효준이었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문 나를 닦달하고 또 닦달해 기어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냈다. 그러고는 불 같이 화를 냈다.
‘네가 못하겠으면 내가 해. 계속 불안해하고 무서워하잖아, 너.
’그러지 마, 효준아. 아무 일도 아니었어.’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나는 제발 그러지 말라며 빌었다.
‘나 하나도 안 다쳤잖아, 나만 조용히 있으면 없던 일 될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응?’
‘…….’
‘내가 알아서 잘할게, 얼른 괜찮아질게. 나 발현하고 나서 우리 아빠들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너도 봤잖아, 이제 정말….’
그때의 조효준은 딱 나만큼 어렸다. 그는 펑펑 우는 나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돌이켜 보면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절대 혼자 삭일 수 없는 것을 혼자 삭이려 애쓰던 나는 머지않아 완전히 고장 나 버렸고, 조효준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내 상태는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나빠졌다. 말수가 줄어들고, 표정 변화가 사라지고, 점점 타인과 마주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알파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평생을 함께 지낸 큰 아빠와 효준을 제외한 모든 알파의 존재가 내게는 위협이었다. 페로몬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로도 쭉 그랬다. 알파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죽음의 문턱에서 느낀 공포가 플래시백처럼 되살아나서, 심할 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속에 든 것을 전부 게워 낼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게 틀어지던 그날 아침,
‘정인아. 학교 가야지.’
작은 아빠는 노크 끝에 한참을 망설이다 방으로 들어섰다.
며칠 내내 이상하게 구는 나 때문에 출근이 늦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도 역시 이미 출근할 채비를 모두 마쳤는지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안 갈래.’
‘이상하네, 우리 정인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까.’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빠가 여전히 내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행여나 내가 아플까 늘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오메가로 발현하고 운동까지 그만두게 되자, 작은 아빠는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몇 번이나 쓰러졌다. 내게는 일이 바빠 그렇다며 둘러댔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오메가로 발현해 버린 게 자신의 탓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는데도.
이게 어떻게 누군가의 잘못일 수 있을까. 누구든 한눈에 나를 보고 말해 왔던 것처럼, 나는 작은 아빠를 닮아 눈매가 둥글고 큰 아빠를 닮아 코끝이 뾰족했다.
강아지가 강아지로 태어나고 병아리가 병아리로 태어나는 것처럼 최정인은 그냥 최정인으로 태어난 거다. 강아지에게 날개가 없고 병아리에게 뾰족한 귀가 없듯이 나는 그냥 아빠들의 어떤 면을 물려받아 내가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오메가가 되어 버린 나를 보며 간혹 연민 어린 위로를 건넸다. 안쓰러워서 어떡하냐고, 너무너무 불쌍하다고,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냐고. 차라리 아빠가 둘 다 알파이기라도 해서 알파로 발현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어차피 아빠들이 둘 다 알파였대도 백 퍼센트 알파로 발현할 거란 보장 따윈 없는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그게 정말 위로이긴 했던 걸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발현하던 날을 떠올렸다. 오래 앓다 깨어난 날 마주한 작은 아빠의 부은 눈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미안한 얼굴로 웃기만 하던 그 모습을.
‘정인아. 아빠 좀 봐.’
‘싫어.’
서늘한 손이 이마를 짚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아무도 만나기 싫어.’
그땐 모든 게 내 잘못인 것 같았다. 납치범들이 나를 죽이지도 해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나만 변한 거라면 그건 그냥 내 탓인 거라고.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냥 확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아침마다 눈 뜨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고 짜증 나, 다 싫다고!’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왜 이렇게 나약할까. 왜 항상 모두를 걱정시키고 슬프게 만드는 걸까.
내가 너무 싫어 미칠 것 같았다.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단지 재수가 없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일 따위가 도대체 왜 아직도 이렇게 힘들까.
‘흑….’
God makes no mistakes. 가사가 왜 그렇게 쓰였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가사와는 반대로 신은 가끔 실수를 하고, 가사는 세상에 가득한 그 실수들을 위로하기 쓰여진 거였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실수 중의 하나였다.
‘아악!’
내가 아니었다면 아빠들이 슬퍼할 일은 없었겠지, 할아버지와 보리가 그렇게 떠나지도 않았겠지.
원망할 곳을 찾지 못한 화살이 고스란히 내 안으로 돌아와 꽂혔다.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소리를 지르자 아빠는 황급히 내 어깨를 쥐었다. 그 손길에 또 겁이 났다. 아빠가 나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을 것처럼 두려웠다.
’정인아!’
모든 것에 넌더리가 났다.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나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니 아마 앞으로 꼼짝없이 이 속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저리 가!’
죽음이 내게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음을 찾아가는 게 덜 아프지 않을까.
어쩌면 차라리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다 아빠 때문이잖아, 흐윽…. 아빠가 날 이렇게 만든 거잖아.’
그래서 그랬다. 작은 아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게 보이고, 그런 말을 하는 내가 미워서 콱 혀를 깨물고 싶었어도.
‘…차라리 낳지 말지.’
‘최정인!’
문가에 서 있던 큰 아빠가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로 성큼 다가서고,
‘누가 낳아 달랬어?’
‘아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당장 사과하지 못해!’
크게 호통치는 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어도.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빠들 마음대로 태어나게 만든 거잖아! 나는 한 번도 태어나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데,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
속에 든 불덩어리가 너무 뜨거워서 악을 지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놓고도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다.
‘다 싫어, 아빠들도 다 보기 싫어. 소름 끼치게 싫으니까 제발 나 좀 가만히 놔두라고!’
그때 내가 던진 말들은 정말이지 하나같이 다 나쁘고 끔찍했다.
‘…그럼 나가.’
그래서 큰 아빠가 그렇게 말했을 땐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꾸 그렇게 못된 말로 아빠한테 상처 줄 거면, 집 얻어 줄 테니까 차라리 나가서 혼자 살아.’
‘당신이 뭔데 내 새끼한테 나가라 마라야.’
하지만 작은 아빠는 그 순간까지도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나를 침대 밖으로 끌어낼 기세이던 손을 가로막은 아빠의 얼굴을 타고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끔찍했던 발현의 밤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됐어.’
밀치는 내 손길에 아빠는 너무나도 쉽게 밀려났다. 이마저도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이 몸 안에 있었을 때도 나 때문에 많이 아팠었댔는데.
‘나가면 될 거 아냐.’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집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발이 닿는 대로 걸으며 내내 울었다. 듣지도 못할 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나쁜 말 해서 미안해, 자꾸 아프게 해서 미안해.
사실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정말로 진심이 아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사건의 전말은 그간 이를 악물고 애쓴 게 무색할 만큼 빨리 밝혀졌다. 호기롭게 집을 떠나 놓고 고작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길거리 한복판에서 쓰러졌기 때문이다.
몸을 살피려던 의사의 손에 경기를 일으키며 한 번 더 정신을 잃었고, 소식을 들은 효준은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찾아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털어놓았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납치범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잡혔고, 나는 본격적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때가 많아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빠들이 울다 지쳐 죽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몇 밤을 자고 일어나도 나는 여전히 나였고, 아빠들도 여전히 아빠들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상담사 선생님을 만나러 가던 길, 삼촌은 직접 차를 몰았다.
’정인아. 오늘부터는 너 자신만 생각하는 연습을 할 거야.’
그는 이 일 앞에 내게 미안해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속이야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은 그랬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견뎌야 해. 다른 길은 없어.’
모두가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내게 미안해하고 있던 가운데, 삼촌은 매번 내가 봐야 할 지점을 명확히 짚었다. 덕분에 나는 적어도 그의 앞에서만큼은 마음 놓고 힘들어할 수 있었다.
‘차근차근 시작하자.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일주일에 한 번은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만 해도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평생 나를 예뻐한 삼촌이 하라는 건 하고 죽어야 할 것 같았다.
12회기의 상담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이게 끝나면 그때야말로 정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6년이나 연장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된 납치범들은 감옥에 가지 않았다. 재판을 받기 직전 잠깐 집을 나섰다가 포크레인에 나란히 역과당했기 때문이다.
한 놈은 그 자리에서 바퀴에 말려 즉사했고, 다른 한 놈은 팔다리가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그 소식을 전해 준 건 내 사건의 담당 형사였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는데도 간신히 숨만 붙은 게 기적인지 저주인지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라며 그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렇게 되든 말든 신경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결국 자퇴서를 내 버리고 한참을 집과 병원, 상담실만 오가며 살았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
‘…그냥 똑같은데요.’
상담실 테이블 끝에는 볼품없는 식물이 살았고, 상담사는 매일 똑같은 것을 물었다.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
‘…아무 생각 없었어요.’
재미라곤 하나도 없고 지루하기만 했다.
‘정인아.’
‘…….’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다음 주에 보자.’
‘…네.’
그래도 역시나 영원한 슬픔 같은 건 없는 법이라, 상담을 받으며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었더니 언젠가부터는 입맛이 돌고 삶의 의지 비슷한 게 생기기도 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빈도도 많이 줄어들었다. 알파는 여전히 싫었지만, 스치기만 해도 숨을 쉬지 못하던 게 나아지니 그럭저럭 견딜 만은 했다.
괴물이 될 뻔한 최정인은 다시 사람이 됐다.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바닥을 구르며 웃었고, 귀신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효준과 나란히 붙어 앉아 오들오들 떨기도 했다. 아빠들이 퇴근하면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었고, 꿈에는 가끔 할아버지와 보리가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세상에 나서게 한 건 약도 상담도 아닌, 삼촌의 아름다운 애인이었다.
‘애기야.’
그맘때쯤 그는 틈만 나면 어딘가 아름다운 곳으로 나를 데려가려 했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뭔가를 사 올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어딜 가든 그의 팔을 꼭 붙잡고 함께 걷다가 서서히 한 발짝을 떨어지고, 두 발짝을 떨어지고. 마침내 일이 미터를 떨어져 걸어도 괜찮아질 무렵이 되자 그는 이제 혼자 다녀와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가서 통감자랑 핫도그 좀 사 와 봐. 설탕 뿌리지 말고, 케첩은 세 개.’
‘…저 혼자요?’
처음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한 발짝을 뗄 때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런데 또 여러 번 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그가 따로 시키지 않았는데도 휴게소에 서면 자동으로 가장 가까운 통감자 판매점의 위치부터 찾아내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으로만 가득한 장소를 혼자 헤치고 뛰어나가 감자가 식기 전에 돌아오면 형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육상 했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역시 발이 빠르네. 나중에 할 거 없으면 내 매니저 할래? 슈킹 좀 쳐도 눈감아 줄게.’
‘…슈킹이 뭐예요?’
‘있어, 좋은 거.’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아할 만큼 예쁜 사람이라 그런지, 늘 좋은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참 좋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외딴곳에서 새벽 내내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TV를 보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야, 두 바퀴만 더 뛰자.’
‘…왜요?’
‘어제 하루 종일 우리가 처먹은 걸 생각해 봐. 난 이제 끝났어.’
피자며 치킨을 잔뜩 먹어 놓고 속죄하듯 뜀박질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서예준 저 새끼 저거, 착한 척하는 거 다 연기야.’
‘드라마니까 당연히 연기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가 아니라, 너 어쩌면 이렇게 니 삼촌을 쏙 빼닮았냐? 좀 재수 없게 똑똑한 건 혹시 집안 내력인가?’
결국 그와 가장 친한 배우 정유재 씨와, 가장 싫어하는 ― ‘그림자도 밟기 싫은 새끼’라고 했다 ― 배우라는 서예준 씨의 출연작까지 전부 다 섭렵했을 때쯤에는 혼자서 외출을 하는 것도 제법 할 만해졌다.
그 무렵부터는 딱히 어려운 게 없었다. 물론 아무래도 그렇게 쓰레기 같은 말을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아빠들과는 조금 서먹해졌지만, 그 외에는 별 탈 없이 잘 먹고 잘 자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가끔은 삼촌이 주영이 형에게 선물한 혼자 놀러 가서 멍하니 노을만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는 조효준과 함께 호주로 여행을 떠났다가, 한국의 것보다 훨씬 예뻐 보이는 노을에 반해 그냥 그 자리에 눌러앉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파도가 높은 서호주의 해변은 사시사철 따뜻해서 요트를 끌고 나가 쉬기에 제격이었다. 샴페인과 과일을 챙겨 하루 종일 별일 없이 바다에 둥둥 떠 있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푹신한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딱히 나쁘진 않은 삶이었다. 물론 돌아올 마음을 먹은 이유도 거창하진 않았다.
‘정인아. 한국에서 학교 다녀 볼 생각은 없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삼촌은 어느 날 내게 한국에서 학위를 따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학교요?’
‘뭘 하더라도 학위는 있는 편이 좋으니까. 효준이랑 같이 다니면 든든하기도 할 테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겠느냐는 그의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때마침 나도 그 생활에 질릴 만큼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선 앞으로 몇 년이나 질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명확한 목표도 무엇도 없이 돌아오는 길에는 다만 그게 궁금할 따름이었다.
“…….”
뭔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났다. 기분 나쁜 꿈에서 깨어나며 정인은 슬며시 눈을 떴다. 날은 하얗게 밝았는데, 아무도 없어야 할 방 안에 웬일인지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처음으로 머릿속을 스친 건 드디어 귀신이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열에 달뜬 머리로 할 수 있는 추론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일어나셨어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신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 손에는 웬일인지 나무 스푼을 든 채였다.
정인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터진 입술 위로 연고가 두껍게 발려 있었다.
어젯밤의 기억은 희미했다.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참 끔찍하게도 아팠다는 것과, 정말 간절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너 여기서 뭐 해?”
마지막엔 유호진에게 안겨 정신을 잃었다는 것.
“잠시만요, 거의 다 됐어요.”
호진은 가스 불을 끄고 냄비 안을 젓더니, 네모난 고무나무 트레이에 도자기 그릇을 올려 쪼르르 달려왔다.
두껍게 썰린 전복이 쌀죽 위에 콕콕 박혀 있었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를 맡으니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목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음식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가.”
문을 가리켰다. 그러나 호진은 물러나지 않았다.
“드세요.”
“…나가라고.”
“속 다 버려요, 뭐라도 드셔야 돼요.”
실랑이가 이어졌다. 너무 귀찮아진 정인은 힘없이 손을 들었다. 살짝 트레이를 밀어 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그만 트레이의 모서리를 눌러 버리고야 말았다.
“됐다고 했….”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깜짝 놀란 정인은 어깨를 움츠리며 그릇이 떨어진 자리를 돌아보았다. 완전히 박살 난 그릇은 뜨거운 죽을 줄줄 흘리며 뒹굴고 있었다.
“어….”
정인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귀찮긴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안 다쳤어요?”
호진은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정인의 상태부터 살폈다. 혹시나 뜨거운 죽이 튀지는 않았는지, 파편을 맞지는 않았는지. 이불까지 꼼꼼히 들춰 가며 확인을 마친 뒤에야 허리를 굽혀 깨진 그릇을 수습했다.
사과를 건넬 틈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를 정리한 그는 곧 부엌에 서서, 도마와 칼을 도로 꺼내 기본 재료부터 손질했다. 삭삭 칼질하는 소리 뒤로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의 것과 똑같은 죽이 나왔다.
“그….”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정성껏 차려다 준 밥상을 엎어 버린 게 미안해서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그는 억지로 정인의 손안에 스푼을 쥐여 주었다. 그래도 정인이 움직이지 않자 제 손을 정인의 손등 위에 겹쳐 쥔 채로 죽을 휘휘 저었다.
스푼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회오리 모양의 자국이 생겼다. 정인은 마지못해 죽을 조금 떠 입 안에 넣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고 자시고 너무 맛있었다. 슬쩍 호진의 눈치를 보다가 본격적으로 죽을 떠먹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쌀죽 같지만, 심심하지 않게 간도 잘 맞춰졌고 두툼한 전복 덕분에 식감도 좋았다. 얇게 저민 인삼에서 풍기는 정갈한 향은 두말할 것 없이 일품이었다.
부어 있던 목 안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자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리고 식사를 하는 동안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호진은 정인이 스푼을 내려놓자 그제야 다가와 그릇을 챙겼다.
“유호진.”
정인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뒤늦게야 사과했다.
“…미안해.”
그 말에 호진은 소리 없이 웃었다.
“마음 쓰지 마세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아요.”
“…….”
“많이 아프면 몸을 움직이는 게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저도 가끔 독감 걸리면 그릇 깨 먹고 그래요.”
이어 트레이 위로 새로운 접시가 올라앉았다. 차가운 아이스크림 한 스쿱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호진은 티끌 하나 없이 반짝이는 티스푼을 꺼내 정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드세요. 목이 많이 부었으니까 아이스크림부터.”
그렇게 말하며 물과 알약까지 챙겨 내밀었다.
“약은 전부 이형질 보는 병원에서 받아 온 거예요. 억제제랑 중복으로 먹어도 되는 해열제, 두통약…. 이건 항생제고요.”
하나씩 하나씩 가리키는 손가락을 흘끔대며 정인은 아이스크림을 뒤적였다.
바닐라 빈의 입자가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반으로 가르자 도대체 어떻게 넣었는지 알 수 없는 작은 벌집이 나타났다. 티스푼으로 꾹 누르니 황금색 꿀이 줄줄 쏟아졌다. 담백한 아이스크림과 찰떡같이 잘 어울려 순식간에 접시가 비었다.
“한 스쿱 더 드릴까요? 혹시 몰라서 좀 많이 만들긴 했는데.”
이런 것까지 직접 만들었단 말인가.
“…아니, 됐어.”
가까스로 이성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알약을 삼키는 정인을 뒤로하고 호진은 설거지를 시작했다. 뽀득뽀득 닦은 그릇들의 물기 제거를 마치고 싱크대를 한 번 싹 닦아 낸 다음에는 가방을 뒤지더니 웬 크림을 들고 정인에게로 다가섰다.
“이제 마사지할게요. 잠깐만 옷 좀 걷어도 돼요?”
아무 생각 없이 팔을 내밀려다가, 상황이 뭔가 지나치게 스무스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어.”
정인은 이불 안으로 숨어들었다.
“애써 차려 준 밥 엎은 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이런 것까지는….”
허락한 적 없다? 허용한 적 없다? 싫으니까 하지 마라?
뭘 붙여도 그 뒤로 이을 말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호진은 당연하다는 듯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근육이 많이 놀라서 조금이라도 풀어 줘야 해요. 내일 아플지도 모르니까.”
“…….”
맞는 말이긴 했다. 히트 사이클을 거하게 겪고 나면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느라 생겨 버린 근육통으로 며칠은 보너스처럼 더 앓기 일쑤였다. 어렸을 때야 가족들이 아득바득 우겨 대는 통에 매번 마사지를 받긴 했었지만 외국에서 지낼 때는 입을 대는 이가 없으니 웬만하면 혼자 앓고 끝냈다.
정인은 오래전 마사지를 받아 본 기억을 떠올렸다. 운동을 그만둔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어느 정도 근육이 남아 있었기에 더 효과가 좋았겠으나, 어쨌든 마사지를 받고 나면 조금 괜찮았던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전문 마사지사가 아닌 운동선수가 이런 것까지 제대로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호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정인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따뜻한 수건으로 피부 위를 닦아 주다가, 농기구에 긁힌 자국을 보고는 미간을 좁히기도 했다.
“아직도 조금 빨가네요.”
팔 위에 펴 바른 크림에서 달콤한 프리지아 향기가 났다.
정인은 멀뚱멀뚱 벽지를 쳐다보았다. 정당한 대가를 주고 이런 것을 부탁한다면 큰 어색함 없이 받을 수 있겠지만, 딱히 해 준 게 없는데도 이러고 있는 타인에게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요.”
호진이 물었다.
“효진이라는 분은 누구예요?”
“효진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저한테 전화 잘못 거신 거잖아요. 원래 그분한테 걸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아, 걔?”
정인은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던 시점을 떠올렸다. 누굴 말하는 건진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래된 친구야.”
굳이 틀린 이름을 고쳐 주자니 귀찮아서 대충 넘겼다. 어차피 조효준과 유호진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닐 텐데 이름 따위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싶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세요?”
“알 게 뭐야.”
효준과 정인은 사실상 친형제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대부분의 형제 사이가 그러하듯 진심으로 서로의 일상에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물론 알파와 오메가의 조합인 데다 이게 성사된다면 TH와 세영 금융 그룹 사이에 대외적인 연결 고리가 생기는 것이니 이따금 어른들이 ― 특히 현욱이 ― 장난삼아 결혼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인은 현욱에게 정훈과 결혼을 할 수 있겠느냐며 되받아치곤 했다.
그러면 그는 마치 썩은 걸레짝이라도 삼킨 듯한 얼굴로 정인을 세상에 둘도 없는 패륜아 취급했는데, 효준과 정인의 관계도 정확히 그 정도였다.
“그분 말고 다른 친한 알파…는 없으세요?”
“한 명 더 있긴 있는데 멀리 있어.”
“어디에요?”
엘리자베스 메이 로빈슨. 호주에서 친해진 친구들 중의 하나였다. 바다에 가면 자해의 일종으로 물에 빠지는 것밖에 하지 못하던 정인에게 요트를 모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
“글쎄…. 지난주까지는 발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그 두 분은 형이랑 오랫동안 같이 지내신 거예요?”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효준이야 평생을 알고 지냈고, 베스와도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와 친해지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굳이 따지자면 이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가까워진 알파는 태어나서 호진이 처음이었다. 아니, 사실은 이형질이 아닌 사람들까지 범위를 넓혀 봐도 말도 안 되게 빨리 가까워진 축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정말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처음에는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 알파가 어느샌가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요.”
정인은 흘끔 눈을 들어 호진을 바라보았다. 늘 웃을 줄만 아는 눈이 웬일인지 시무룩했다.
“어깨나 다리 쪽은 좀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는 이윽고 정인의 팔을 놓아주었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조금 기운 없어 보였다.
“근데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어젯밤부터요.”
“훈련은 어쩌고? 너 아침에도 뭐 하지 않아?”
“오늘은 안 갔어요.”
호진의 말에 정인은 조금 놀랐다.
“그래도 되는 거야?”
“오후 훈련을 좀 길게 빼려고요.”
어느덧 그릇을 다 챙긴 호진이 가방을 둘러멨다.
“이제 정말 가 볼게요. 저녁에 또 오겠지만 그사이에 뭐든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주세요.”
“유호진.”
어쩔 수 없이 그를 불러 세웠다.
“오늘 저녁에는 오지 마.”
“왜요?”
아마 호진은 오늘도 운동을 하러 갈 것이다. 밤을 꼬박 새우고, 훈련을 마치고, 그 몸으로 위례까지 갔다가 밥 따위를 주겠다고 돌아오는 건 정말 무리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한다면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호진은 가볍게 무시하고 또 밥을 해 올 것이다.
뭔가 다른 이유가 필요했다. 정인은 빠르게 짱구를 굴렸다. 역시 가장 만만한 건 다른 약속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었다.
“만날 사람 있어. 저녁도 밖에서 먹을 거야.”
호진은 가만히 이쪽을 쳐다보았다. 들켰나 싶어 간이 쪼그라든 정인은 이불 속에서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물음에는 뜻밖의 이름이 담겨 있었다.
“효진 씨요?”
갑자기 조효준 얘긴 왜 하지? 사실 그 인간이 어디서 뭘 하든 조금의 관심조차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러니까 오지 마.”
“네. 알겠어요.”
호진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곧 문이 닫히고, 정인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깊게 한숨을 쉬어 보았다. 터진 입술이 아직도 아파 얼굴이 구겨졌지만 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조금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멀쩡했다.
“…뭐지.”
마치 히트 사이클이 하루 만에 전부 끝나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인의 집을 나서자마자 코피가 툭 터졌다. 호진은 후드득 떨어지는 핏물을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처 받아 내지 못한 피가 손 틈새로 흘러 바닥을 더럽혔다.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은 채 얼른 바닥부터 닦았다.
제대로 터졌는지 한참을 흐르던 것은 마침내 차에 올라탄 후에야 멎어 들었다. 호진은 시트에 몸을 푹 묻으며 한숨지었다. 곁에는 억제제의 빈 병이 속을 드러내며 나뒹굴고 있었다.
2주 치의 억제제가 하루 만에 몽땅 사라졌다. 페로몬에 남들보다 몇 배 민감하다는 정인이 혹시나 잘못될까 봐, 지난밤 내내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약을 삼켜 댄 탓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체한 듯 속이 불편한 이유는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날 사람 있어.’
체기를 닮은 이 기분은 정확히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시작됐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 마음이 울렁였다. 정인과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는데도, 마치 가장 먼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불안을 닮은 이 감정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깔끔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잘 익은 사과 같은 질투였다. 당장은 겉으로 표가 나지 않아도,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얼마든 썩어 문드러질 수 있는.
“…어떤 사람일까.”
얼굴도 나이도 모를 효진이라는 사람이 많이 부러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이며,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디서 어떻게 정인을 만나서, 어떤 말과 행동으로 정인의 마음에 들었는지. 어떻게 정인의 사람이 되었는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빈약한 상상력으로 그려 낼 수 있는 것은 희미한 인영 정도가 고작이었다.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도 운동 같은 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조금씩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는, 그런 거라면 참 쉬울 것 같았다.
호진은 씁쓸한 마음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래도 오늘 저녁엔 부디 정인이 아프지 않고 즐겁기를 바랐다.
***
“R1형 우성이시고요…. 하루 만에 히트 사이클이 끝났다고 하셨고요.”
일부러 주치의를 피해 외곽의 작은 병원을 찾았다. 낯선 의사의 방은 머리 아픈 방향제 냄새로 가득했다. 최대한 숨을 적게 쉬려 노력하며 정인은 제 무릎만 바라보았다. 의사는 이제 막 검사실로부터 넘어온 자료를 하나하나 넘겼다.
“음, 히트 사이클이 끝난 건 아니에요. 앞으로 이삼일 정도는 간헐적으로 통증이 있을 겁니다.”
모니터 위에는 이런저런 그래프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페로몬 반응이 보이는데, 혹시 최근에 알파와 접촉한 적이 있나요?”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오기 직전까지 알파가 해 준 음식을 먹고 마사지도 받았으니까.
“연인 관계인가요?”
“아뇨.”
딱 잘라 대답했다.
“우선 왜 사이클이 뒤틀렸는지 먼저 말씀드릴게요.”
의사는 정인을 향해 모니터를 살짝 돌려 주며 한 지점을 짚었다.
“아직 몸이 생활 환경 변화에 완벽히 적응을 한 상태는 아닌 걸로 보이거든요? 해외에 오래 거주하다 귀국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LGS 때문에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걸 어느 정도 감안하더라도, 사실 수치로만 따지면 다음 사이클은 대략적으로 5월 초순쯤이었어야 해요.”
끔찍한 소리였다. 고작 넉 달 남짓을 건너뛴 것만으로도 죽을 뻔했는데, 그게 더 늦게 터졌다면 얼마나 아팠겠는가.
“그 주기가 두 달이나 당겨진 건 아마 알파의 영향일 겁니다. 이 정도 수치면 가벼운 일상적 접촉 정도였겠지만, 아무리 미미해도 자주 노출됐다면 충분히 영향을 받을 수 있죠.”
“…하지만 다른 알파들과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요.”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을 거라면 진작 그랬어야 했다. 피치 못할 사회적 상황에서 종종 마주쳐야만 했던 알파들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니까. 심지어 허구한 날 얼굴을 보는 효준마저도 알파였지만 평생 그에게는 영향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와 갑자기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좋은 지적이에요. 아마 상대는 환자분과 같은 R1형 우성이었을 겁니다.”
의사는 의외의 해답을 내놓았다.
“네?”
우성은 전체 이형질 보유자 파이의 5퍼센트도 안 되고, R1형은 세계적으로 쪽수가 얼마 없는 유형이다. 너무 말도 안 되는 확률이라 아예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환자분은 컨디션에 따라 페로몬에 과하게 민감해질 수도, 아예 둔해질 수도 있는 체질이에요. 하지만 같은 형질, 즉 R1형 우성에게는 무조건 최대한으로 반응할 겁니다. 그런 만큼 처음으로 노출됐던 때엔 가벼운 쇼크가 있었을 수도 있겠고요.”
그 말에 정인은 호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한참 잠잠하던 플래시백이 들이닥친 날이었다. 몸이 안 좋던 상황에서 낯선 알파와 마주친 게 트리거가 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원인이 된 호진의 존재가 당연하게도 불쾌했고, 더 사납게 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호진이 R1형 우성이라면 모든 게 달라진다. 그건 단지 필연적인 페로몬 쇼크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럼…. 앞으로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은 건가요?”
“아뇨. 그 반대입니다. 최대한 자주 만나셔야죠.”
의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알파의 페로몬으로 어느 정도의 진통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거,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게다가 R1형 우성은 워낙 보기가 드무니 가능하다면 주기적으로 페로몬 교환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고요.”
“…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놓고도 의사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본딩을 하게 된다면 더더욱 좋겠죠. 해외에는 같은 형질 유형을 가진 알파와 본딩해서 LGS 완치 판정을 받은 사례도 두 건이나 있어요.”
“완치….”
꿈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조건이 너무 벅찼다.
“…….”
정인의 조부를 죽음으로 몰아간 게 바로 본딩이었다. 이미 다른 사람과 본딩을 하고 온 아내에게 이중으로 본딩을 건 게 원인이었다.
본딩을 마친 알파와 오메가는 평생 서로에게 종속된다. 하지만 온몸의 절반을 상대의 페로몬으로 채우고 사는 만큼, 꾸준히 서로의 페로몬을 새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혈액이 버티지 못하고 썩어들어 간다. 이별하거나 둘 중 하나가 사망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일찍 사망하자 그는 평생 다른 이형질 보유자와는 접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오메가인 원경의 피를 절반이나 물려받은 정인이 태어나면서부터는 가파르게 죽음을 향해 달려갔다.
유전자의 반을 내어 준 이가 오메가인 이상, 정인이 베타였대도 그에게 위협이 되는 건 마찬가지다. 아무도 몰랐지만 심지어 몸 안에 발현 인자까지 지닌 아이였으니 오죽했을까.
지금이야 기술이 발달해 미리 본딩 상대의 페로몬을 저장해 두고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조부의 생전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인을 아꼈다. 모두가 만류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번 안아 볼 때마다 패혈증이 심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정인의 이마에 입 맞추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다루듯 어르고 달랬다.
“…본딩 같은 건 할 수 없어요.”
단지 알파의 페로몬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만이 아니다. 정인은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막 발현했을 무렵만 해도 언젠가 아빠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본딩까지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히트 사이클로 인해 서서히 약해져 가는 몸을 느끼면서 반쯤 포기했고,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뒤로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약해 빠진 몸은 분명 얼마 살지 못할 테니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면 아빠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니까.
당장 10년 뒤조차 확신할 수 없는 몸으로 누군가에게 영원을 약속하는 건 이기적인 짓이다. 그리고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혼자 세상에 남겨진 채 쓸쓸하게 죽어 가던 할아버지처럼 만들고 싶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하, 그야 아주 먼 나중의 일이니까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 우선은 자주 만나 보는 걸로 하세요.”
“…저기, 선생님.”
정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오늘 검진 결과는 폐기해 주실 수 있나요?”
“네?”
“외부에 유출되면 곤란해서요.”
“걱정 마세요. 진료 기록은 원래 환자 본인만 열람 가능하니까요.”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신뢰도는 제로였다.
지구 반대편에 있을 땐 조금만 시골로 들어가도 가족들의 힘이 닿지 않으니 차라리 편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지금은 다르다. 정인이 어떤 증상으로 내원했고 어떤 검사를 받았는지를 실시간으로 받아 보는 것쯤은 가족들 모두에게, 특히 현욱에게는 일도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호르몬 문제로 병원에 가게 될 경우를 대비해 가짜 신분을 몇 개 사 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미 모든 것이 그의 귀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진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남은 건 깔끔한 마무리다. 정인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봉투를 꺼냈다. 빳빳한 새 수표로만 소형차 한 대 값을 채워 넣은 봉투였다.
“진료 기록 잘 처리해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장춘삼 씨. 이러시면….”
의사는 잔뜩 당황한 티를 내면서도 결국 안에 든 것을 슬쩍 확인했다.
진료 한 번에 이 정도를 받아 처먹었으면 폐기 정도는 알아서 해 주겠지. 부디 양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며 정인은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
참 저주 같은 형질이다.
아니, 어쩌면 나의 존재 자체가 저주인지도 모르지.
“…….”
잠에서 깬 정인은 반듯하게 누운 자세 그대로 멀뚱멀뚱 천장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그림자 위로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걸 보니 이른 새벽인 듯했다.
간헐적으로 통증이 있을 거라던 의사의 말과 달리 어젯밤은 평온했다. 조금 열이 오르긴 했지만 충분히 참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지옥 같던 고통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수준에 불과했다.
‘본딩을 하게 된다면 더더욱 좋겠죠.’
의사의 목소리와 함께, 자연스레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패혈증에 걸리면 어떻게 죽는 걸까.
정인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형질 패혈증 환자들의 모습을 굳이 찾아보려고 한 적도 없었다. 온몸의 피가 썩어들어 가는 병이니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만 했다. 간혹 궁금해져도 꾹 참았다.
그걸 보게 되면, 나로 인해 그가 감내해야 했을 고통을 낱낱이 알아 버리게 되면. 그땐 정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할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했다.
볕이 좋은 봄이었고, 그는 정인이 좋아하던 딸기 케이크를 한 품에 안은 채 웃고 있었다.
그날 그는 말했다. 곧 멀리 외국으로 떠나야 한다고, 아주 먼 곳으로 가기 때문에 백 밤 천 밤을 자도 만날 수는 없겠지만 대신 계절마다 엽서를 보내겠다고. 그러니 그동안 아빠들의 말을 잘 듣고, 음식을 골고루 먹고, 친구들과도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보통의 경우 그런 조건이 붙으면 따라오는 대가가 있었지만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야속하게도 그는 병원에 입원하던 순간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도 정인을 병실에 들이지 않았다. 가족 모두는 그의 유언을 따라 한동안 할아버지가 외국에 떠났다고 말했고, 정인은 장례식에조차 가지 못한 채 조금씩 나이를 먹다가 불현듯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계절마다 날아오던 엽서는 간히티도, 몰디브도, 하와이도 아닌 엎어지면 코 닿을 병원의 병실에서 쓰였다는 것을. 매년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던 건 할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은퇴한 비서였다는 것을.
세상에 산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프로세스였다.
“…….”
사실 정말 몰랐던 건 아니다. 모두가 입을 닫고 있는 가운데 느껴지던 그 미묘한 불안감에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을 뿐, 피부로 와닿는 공허함 자체는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정훈과 원경에게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에도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 할아버지가 어디에 묻혔는지를 묻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던 산의 풍경을 가만히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을 뿐이었다.
“…나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끔찍이도 사랑했던 손주가 자신의 망가진 모습에 두려워하는 걸 보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어떤 모습이어도 정인은 그를 사랑했을 터였다. 설령 온몸이 썩어 문드러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됐다 해도 그가 정인의 할아버지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흉측한 모습으로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해도 한눈에 그를 알아볼 자신이 있었고, 조금의 거리낌 없이 그를 끌어안을 자신이 있었다.
귀신이 두렵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귀신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매체에 의하면 한국의 귀신들은 대개 원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고, 정인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대대손손 삼대까지 이루어 줄 부와 권력이 있었다.
그러니 죽어 만나는 게 아니더라도, 어쩌다 우연히 귀신을 보게 된다면 묻고 물어 할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를 만나면 정말 묻고 싶었다.
마지막 날, 헤어지기 전 마지막 순간에 나를 안고 당신이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딱 한 번만 더 듣고 싶었다. 열심히 준비했을 나와의 마지막을, 찢어지는 심정으로 걸음을 돌리기 전의 그 마지막 말을.
기억해 내기 위해 오랫동안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지막 말은커녕 그의 모습마저도 점점 흐릿해져 간다. 잘 지내라는 말이었는지 사랑한다는 말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남은 기억이라곤 그저 케이크에 정신이 팔려 입가에 더덕더덕 크림을 묻힌 채 그의 말에 웃었다는 것뿐이었다.
“…….”
목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 조금씩 마신 생수병이 텅 비어 있었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떠올리며 정인은 습관처럼 호진의 옷을 걸쳤다. 시간이 꽤 지난 탓인지, 아니면 짧게 외출을 할 때마다 뻔질나게 입고 다닌 탓인지. 이제 그의 체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쌀쌀한 새벽 공기를 들이켜며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웠다. 아직 세상이 다 밝지 않았는데도 거리 위에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쓰레기 수거 차, 편의점의 물건을 가득 실은 트럭, 건물 앞에 놓여 있는 신문을 들고 들어서는 학생, 밤새 술을 마셨는지 붉은 얼굴로 이제 막 귀가하는 사람들, 그리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가스 불을 켜 놓고….
“야!”
평화로운 풍경을 감상하던 정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자 버너 앞에 명상하듯 정자세로 앉아 있던 호진이 움찔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나셨어요?”
“너 지… 지금, 도대체. 여기서 무슨… 무, 뭐 해?”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호진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는 보글보글 끓는 냄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는 동안 조금 식어서 데우고 있었어요.”
“이 미친…. 뭐?”
골이 띵하니 울렸다. 할아버지 생각이고 나발이고 싹 날아가 버렸다. 정인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가 가스 불을 껐다.
“너 진짜 왜 이래?”
“네?”
“시간이 남아돌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운동이나 해. 도대체 몇 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야?”
“이거 놓고 바로 운동 갈 건데요.”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아하니 소귀에 경 읽기다. 정인은 양손을 허리춤에 짚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그만해. 네 시간 깎아 먹으면서 이런 짓 하는 거 부담스러워.”
“형.”
호진이 말했다.
“형에게 식사를 가져다드리기로 한 건, 처음에는 형을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저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
“저는 저와의 약속을 어겨 본 적이 없어요. 지난 10년간 단 하루도요.”
그는 무서우리만치 맑은 눈을 반짝였다. 과장 조금 보태 미친 꽃사슴 같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형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건 이제 제 하루의 시작이고 루틴이에요. 그렇게 하기로 저 스스로 약속했어요. 이제 저는 이게 있어야 운동도 할 수 있고, 제 마음을 다스릴 수도 있어요.”
“…하.”
“형이 부담을 느끼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싫으시면 전에 말씀드린 대로 버리시면 돼요. 저는 제 할 일을 할 테니까요.”
정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은 태도였다. 도저히 어떻게 쳐 내도 물러날 것 같지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정인은 제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돌아섰다. 그러고는 곧바로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어떻게 사람이 저 정도로 미련할 수가 있지.
지나가던 사람이 죽는 체를 하며 가진 걸 다 내놓으라고 하면 제 뼈까지 발라 내놓을 놈이다. 아무리 그래도 기록경기를 하는 사람인데, 저렇게 미련해서 여태까지 대회 우승은 어떻게 한 걸까. 2등이 조금만 불쌍하게 굴어도 아주 메달까지 헌납했을 기세다.
“순 또라이 아니야, 정말.”
얼른 생수 몇 병을 계산하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물론 정인이 집 앞까지 돌아왔을 때도 호진은 여전히 바른 자세로 앉아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그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정인은 침대에 앉아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은 가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머릿속을 맴도는 건 오직 호진의 미련함에 대한 고찰뿐이었다.
도대체 몇 시부터 일어나서 저런 걸 준비했는지. 이렇게 미련해서 여태까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온 건지. 정말로 쟤를 등쳐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건지.
“…진짜 어디서 뭐 뜯긴 거 아냐?”
불길함이 엄습했다. 한국에서 난 세계 정상급 선수들에게 으레 따라붙던 계약 문제나 연맹의 갑질 같은 것들이 촤라락 뇌리를 스쳤다.
악덕 매니지먼트사의 독소 조항에 홀랑 넘어가고, 얼마 되지도 않는 상금마저 전부 빼앗기고, 부상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경기하고, 그러면서도 허허실실….
“아, 짜증 나.”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말해야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아….”
마침 문 앞에 서 있던 호진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바닥에 비닐 봉투를 내려놓으려던 호진이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드세요.”
김치찌개 냄새가 풍겼다. 고기가 들었는지 묵직하고 고소한 향에 식욕이 확 동했다. 이성을 잃으려던 찰나, 정인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너….”
호진은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선한 욕심으로 가득한 눈을 보니 별안간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이 꿀꺽 속으로 넘어갔다.
너 진짜 이따위로 살면 안 돼, 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 알아, 이렇게 살다간 본전도 못 건져, 제발 좀 이기적으로 굴어.
“…몇 시에 일어났어.”
하려던 말은 온데간데없고 이상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되레 제가 놀란 정인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어, 아직 그러면 안 되는데.”
호진이 손을 뻗었다. 아직 덜 아문 입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피하며, 정인은 자신의 뇌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손을 거둔 호진이 대답했다.
“원래 다섯 시쯤 일어나요.”
너무 일찍 일어나는 거 아닌가. 정인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품 안의 김치찌개는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고 보니 호진이 주는 음식들은 항상 그랬다. 지금 막 데워 온 것처럼 따끈따끈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이 근처에 방 구하면 더 잘 수 있어?”
“잠을 더 자진 않겠지만 운동을 더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보통은 이 시간에 스트레칭 좀 신경 써서 했거든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한 죄책감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나저나 형은 어떻게 이 방 구하신 거예요? 이 근처는 방 구하기가 쉽지 않던데.”
“부동산.”
잠깐의 침묵이 지나갔다. 정인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일단 더 알아봐.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차피 남는 게 방인데 하나쯤 내주는 거야 뭐 어떻겠는가 싶었다.
“그래도 정 못 구하겠으면 여기서 살아도 돼.”
***
쿵, 하고 땅이 울리는 소리에 유영은 덤벨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배틀 로프를 놓기 무섭게 휴식 시간도 없이 케틀 벨을 휘두르고 있는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전 훈련이 다 끝나 가는 와중에도 호진의 동작에는 조금의 처짐조차 없었다. 평소에도 죽기 살기로 운동을 하는 거야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더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그러다 죽겠다, 열두 시 다 됐어.”
유영은 픽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가 새 수건 하나를 건넸다.
“고마워.”
“너 무슨 좋은 일 있냐? 오늘 왜 이렇게 기운이 넘쳐?”
에너지 드링크 한 병을 눈 깜짝할 새 비운 호진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 내며 웃었다.
“학교 근처에 자취방 구했거든.”
그 말에 유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이제 아예 서울에만 있게?”
“특별한 일 없으면 아마도 그럴 것 같아.”
유영은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야. 너 소청 안 나갈 생각이냐, 혹시?”
조심스럽게 묻자 호진은 대답 대신 애매하게 웃었다.
유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진 모르겠지만, 이제 너 경기 안 한 지도 꽤 됐잖아. 감 떨어지는 거 순식간인데 그냥 눈 딱 감고 한다고 하면 안 돼? 소청 정도면 그냥 너 메달 따라고 판 깔아 주는….”
“유영아.”
호진이 유영의 말을 끊었다.
“다들 최선을 다하는데 그런 말이 어딨어. 남의 메달을 만들어 주기 위해 출전하는 선수는 없는 거 알잖아.”
정말 유호진답게 답답한 말이었다. 평소였다면 선비가 선비질 하는구나 싶었겠지만 지금만큼은 그러려니 넘길 수가 없었다. 유영은 제 가슴을 퍽퍽 치며 말했다.
“내가 그럴 거야.”
진심이었다. 이건 호진의 복귀전에 같이 출전하기로 한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입을 모아 말하던 바와 같았다.
“그놈의 최선, 내가 다 해서 네 메달 만들어 줄 거라고.”
국가 대표로 선발될 정도의 선수 중 크고 작은 부상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과정에서 운동을 그만둘까 고민했던 선수도 한둘이 아니다.
물론 유영도 한때는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유영이 가슴팍에 태극기를 매달고 있는 건, 적어도 반쯤은 유호진 덕분이었다.
“유호진. 너 나 부상당했던 때 기억 안 나?”
“…….”
햄스트링 부상을 입은 시즌의 일이었다.
재활을 끝냈는데도 자꾸만 기록이 처졌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제자리였다.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시절, 글자 그대로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유영을 붙잡은 게 바로 호진이었다.
그는 매일매일 제 훈련도 뒤로 하고 유영의 집 앞을 서성였다. 쓸데없이 맛있는 도시락을 거절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고, 호진은 매일 유영에게 수영을 그만둔 뒤의 계획에 대해 묻고 정말 후회가 없겠느냐 물었다.
물론 처음에야 귀찮아서 그저 밥만 받아먹고 쳐 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도 않아 유영은 호진의 앞에서 아이처럼 펑펑 울며 인정하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고.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그런다고. 너무너무 잘하고 싶은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아서 이러는 거라고.
그러자 호진은 위로도 무엇도 없이 그대로 유영을 체육관에 끌고 가 미친 듯이 굴려 댔다. 최대 근력에 근접하는 강도의 운동으로 지옥 같은 일주일을 꽉 채우자 잡생각은 사라지고 마음도 거짓말처럼 아물었다.
그러다 마침내 진심으로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코치를 찾아가 다시 마음잡고 해 보겠다 말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호진은 여전히 유영의 곁을 지켜주었다.
옆자리에서 자신과 똑같이 헉헉대며 바벨을 들고 있는 그에게 장난을 치려다 바벨에 깔려 갈비뼈 몇 대가 나갈 뻔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회복하자마자 또 부상을 입을 뻔한 유영은 당연히 작살 나게 깨졌다. 물론 전담 팀에서 짜 준 스케줄을 무시하고 유영에게 붙어 있떤 호진도 연맹에서부터 쭉쭉 내려온 내리 갈굼을 받아 내야 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이 밝자 그는 언제나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제일 먼저 훈련을 시작했다.
유호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동화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올곧고 바른.
그는 대한민국의 영웅임과 동시에 한유영의 개인적인 영웅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세계적인 선수는 이런 식으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구나, 같은 종種의 생명체 가운데 저런 경지에 도달한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거구나. 오래전의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던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겠구나.
호진을 보면 드는 생각이라곤 대부분 그런 거였다. 다른 선수들도 아마 비슷하게 느꼈을 터였다. 유영뿐만이 아니라 큰 고비를 겪었던 선수들 모두가 저마다 작게든 크게든 호진에게 진 빚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호진은 정작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그 어디에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만두지 말라며, 나보고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겠냐며. 그래서 아직도 버티고 있잖아. 그런데 너는 왜 이래?”
그리고 그건, 정말 서운한 일이었다.
“나도 했는데 너는 왜 자꾸…. 금방이라도 운동 그만둘 것처럼 구냐고.”
말을 하다 보니 속상해서 화가 치밀었다.
“그만두는 거 아니야, 유영아.”
호진은 씩씩대는 유영의 어깨를 도닥이며 웃었다. 그걸 보니 더 속상해졌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있어도 그 속이 속일 것 같지가 않았다. 단 한 번도 주변 사람들에게 힘듦을 내색한 적이 없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자신은 어디 가서 화풀이라도 하고 꼴사납게 울기라도 했지, 호진은 어떤 일에도 싫은 소리 한번을 한 적이 없었다. 평생을 그렇게 섬처럼 살면서 조금도 힘들지 않다고 느끼는 건 아무리 유호진이어도 무리일 것 같았다.
“그냥 요즘 생각이 많아서 그래.”
“무슨 생각?”
“…이런저런 생각.”
얼버무리며 호진은 기구를 하나하나 정리했다. 유영은 그를 따라다니며 종알종알 떠들었다.
“그래서. 너 진짜 소청 안 나갈 거야? 그럼 나도 나가지 마? 정우랑 벌써 스케줄 다 짜 놨는데, 네가 책임지냐?”
“다쳐, 좀 떨어져 있어.”
“책임지냐고 이 미친놈아. 너 때문에 우리 둘 다 팔자에도 없는 서울 올라와서 이러고 있는데 미안하지도 않아?”
장난임을 알아보고 피식피식 웃기만 하는 그의 얼굴에 대고 끝까지 소리쳤다.
“책임져, 빨리! 어쩔 거야!”
“가서 낮잠이나 자, 힘 빼지 말고.”
마침내 호진이 낄낄 웃으며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을 때까지.
***
호진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조금 전 마친 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하래도 웃으며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형.”
떨떠름한 얼굴로 몇 발짝 앞에 서 있는 최정인 씨 덕분이었다.
“이제 수업 마치신 거예요?”
정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 두고 나올게. 조금만 기다려.”
“네.”
오늘은 정인의 아르바이트를 위해 꽃 시장에 묘목을 사러 가는 날이었다. 어차피 이번 주의 훈련도 하루는 정인이 도와주기로 했으니 응당 호진도 정인의 일을 도와야 했다.
물론 정인은 혼자 할 수 있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호진은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자신과의 약속을 재차 운운하자 정인은 머리가 아파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네 마음대로 하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또 바보 같은 웃음이 났다.
“…흐.”
호진은 천천히 최정인이라는 사람을 대하는 법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와 가까워지는 것은 마치 외국어로 쓰인 설명서를 읽어 나가는 일 같았다. 처음 보는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한 줄씩 차근차근 해석하다 보면 어느샌가 고운 문장들이 완성됐다.
그렇게 처음으로 발견한 문장은 ‘최정인이라는 사람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말랑말랑한 사람입니다.’였다. 그리고 요즘 호진이 새로 해석해 낸 문장은 ‘최정인과 가까워지고 싶다면 스스로를 이용하세요.’였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 정인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호진이 뭘 하든 그대로 내버려 두는 편인 것 같았다.
호진은 얌전히 벽에 기대 제 방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자그마치 정인의 옆집에 자리 잡고 있는.
정말로 정인이 사는 건물에 살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매물이 나오지 않기에 실은 반쯤 포기하고 5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방을 잡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정인은 건물주와 꽤 친한 사이인 것 같았고, 정인의 인맥 덕분에 호진은 너무나도 손쉽게 방을 구할 수 있었다.
똑똑하고, 예쁘고, 강하고, 다정하고, 착하고, 게다가 인맥 관리까지 완벽하다니. 어디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야말로 어딘가 먼 나라에서 뚝 떨어진 왕자님 같았다.
그러니 그 효진이라는 사람은 오죽 좋을까.
“…….”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코피가 툭 터졌다. 호진은 물티슈를 꺼내 코를 틀어막았다. 이상하게 요즘 들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코피가 자주 나는 것 같았다.
“…뭐야?”
때마침 문을 열고 나온 정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혈관이 터졌나…. 요새 좀 이러네요.”
“있어 봐.”
보폭을 넓혀 다가온 정인이 조심스럽게 호진의 손등 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뭘 어쩔 새도 없이 가까워진 정인에게서 싱싱한 꽃 냄새가 났다.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버린 물티슈를 손끝으로 한 번 뒤집어 본 정인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너 그냥 오늘 병원엘 가든가 쉬든가 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안 돼요. 저도 가게 해 주세요.”
호진은 얼른 정인을 붙들었다.
“저 오늘 이거 하나 보고 오전 훈련 버텼단 말이에요….”
코피는 여전히 줄줄 흐르는 채였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별것도 아닌 묘목 구매 따위가 오전 훈련을 버티게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니.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호진은 고장 난 장난감처럼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요, 지금 가면 차도 별로 안 막힐 거예요.”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정인을 건물 밖으로 이끌었다.
“왜 대단한 일인데?”
“음…. 글쎄요. 고향 생각 나서 그런가 봐요. 농사일 하는 거 되게 오랜만이라.”
가만히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하다. 하계 스포츠이니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농번기에 시간을 내기가 마땅치 않았겠지.
“그래, 그럼 같이 가.”
고향 생각이 난다는데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타세요.”
호진은 왠지 웃음을 꾹 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보조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 올라타 버클 옆의 버튼을 누르자 안전벨트가 몸에 맞춰 감겼다. 곧 시동이 걸렸다.
“그런데요, 형.”
호진이 정인을 불렀다.
“효진 씨랑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잠시 효진이가 누구더라 하고 생각하던 정인은 그가 아직도 조효준의 이름을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네가 그게 왜 궁금해?”
“그냥요.”
“어차피 너랑은 영원히 상관없을 사람이야.”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 말에 몇 가지 가능성을 점쳐 보았다. 같은 학교에 다니니 언젠가 한 번은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유호진과 조효준은 카테고리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적어도 정인이 여태까지 봐 온 모습에 의하면 유호진은 타고난 성품 자체가 유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것 같았고, 조효준은 뭔가 시끌벅적한 파티 비슷한 게 있다는 소리만 들려도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파티광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일 만한 일이 과연 있을까.
“혹시 너 행사도 다녀?”
정인이 물었다.
“네?”
“디자이너 패션쇼나 브랜드 파티 같은 거.”
그 말에 호진은 음, 하고 뜸을 들였다.
“스폰서 쪽에서 부탁하면 가끔 나가긴 해요.”
“그럼….”
그럼 정말로 어쩌다 만날 수도 있겠네. 막 입을 열려는데, 별안간 옆 차선에서 튀어나온 탑차가 아찔한 각도로 호진의 차 앞을 스쳐 끼어들었다. 급브레이크가 훅 들어가며 몸이 앞으로 쏠렸다. 조금만 더 나갔다간 그대로 충돌했을 터였다. 아슬아슬하게 피해 간 탑차는 비상 깜빡이를 두어 번 켜고 저만치 사라졌다.
“이런 씹…. 괜찮으세요?”
그리고 브레이크를 밟음과 동시에 팔을 뻗어 정인의 어깨 앞을 막아 준 호진은 곧장 정인을 살폈다. 사시사철 대나무 이파리나 뜯어 먹고 살 선비 같은 얼굴로 쌍욕을 반쯤 토해 놓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돌아보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순했다.
“놀라셨죠, 죄송해요.”
“…아냐.”
호진의 차는 출시 이래로 교통사고 사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모델이었다. 심지어 주행 속도마저도 사고가 나 봤자 범퍼 정도나 겨우 날아가려나 싶은 정도의 저속이었다. 운전 스타일이 썩 곱지 않은 정인으로서는 딱히 놀라울 일이 아니기도 했다.
“목 괜찮아요?”
“그냥 가자, 좀.”
하지만 호진은 연신 개복치처럼 반응했다. 허리가 괜찮냐느니, 발목은 괜찮냐느니.
“…그래서, 효진 씨는 어떻게 만나신 건데요?”
한참을 물어 대던 그의 질문은 ‘효진이’에게 돌아갔다. 이상한 집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인은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친했어.”
“…얼마나 어릴 적부터요?”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 두 살 좀 안 돼서부터 알았을걸.”
호진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정도면 형 아버님이랑 효진 씨 부모님이랑도 서로 다 아시겠네요?”
“응.”
그러는 사이 차는 어느샌가 화훼 단지 주차장에 멈춰 있었다.
“안 내려?”
주차를 마친 뒤로도 내릴 생각은 않고 우두커니 핸들만 붙들고 있는 호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호진은 그제야 네에, 하고 따라 내렸다.
점심시간을 교묘하게 피해 간 꽃 시장은 호진의 말대로 한산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얼마간을 걸어가자 묘목상이 나왔다.
습기로 가득 찬 하우스에 들어섰다. TV를 보고 있던 주인이 멀리서 건성으로 인사했다.
특별한 것 없는 직선형 구조였으나 온실의 규모 자체는 상당히 컸다. 사람이 드나들 만한 너비의 길옆으로는 정인의 키보다 높은 선반이 끝도 없이 늘어섰는데, 바닥부터 2층까지는 무릎 높이까지 자란 묘목이 빼곡히 자리 잡았고 그 위로는 이름 모를 관엽 식물이 가득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정인이 찾던 묘목들이 보였다. 모양과 품종은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것은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았고 또 어떤 것은 50센티 이상 커 있었다. 이미 작은 열매가 열린 나무로도 눈길이 갔지만, 이런 걸 가져다 그대로 심었다간 꼼수를 부린다며 한 소리 들을 것 같았다.
“이 중에 어떤 거 심으면 돼?”
우선 어떤 품종을 심으면 좋을지부터 호진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호진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껌딱지처럼 붙어 따라오던 게 없으니 왠지 이상했다. 돌아온 길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걸음을 떼려는데, 등 뒤의 선반으로부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했어요.”
“정말요?”
정확히 정인의 눈높이였다. 선반에 꽉 들어차 있던 관엽 식물 화분 하나가 빠지며 빈틈이 생겼다. 새파랗게 산들거리는 잎사귀 사이에 액자처럼 끼어드는 것은 선반 맞은편의 풍경이었다.
“반양지 정도에 두면 될까요?”
“크게 상관은 없어요. 웬만해선 어디서도 잘 살아요.”
식물 하나를 안고 온실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묻다가, 짧게 웃기도 했다. 온전히 상대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선반 너머의 정인에게까지 느껴졌다. 늘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상점 주인과 한참 떠들던 호진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짙푸르게 피어난 식물의 잎 사이, 손바닥만 한 빈틈으로 눈이 마주쳤다. 호진은 싱그럽게 웃었다. 오랜 장마가 끝난 뒤의 첫 햇살 같기도 하고, 나무 그늘 사이로 비치는 하늘 같기도 한 미소였다.
“형, 이거 보세요.”
호진이 손을 뻗어 화분을 내밀었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정인은 그의 손에 들린 식물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하늘하늘한 이파리마다 그려 놓은 듯 희게 번진 무늬가 익숙해 피식 웃음이 났다.
“형이랑 닮았죠.”
흙 한 줌 없이 물속에 처박힌 채, 장장 6년째 상담실 테이블 끄트머리를 지키고 있는 바로 ‘그 식물’이었다.
연둣빛 줄기는 곧게 뻗었고, 작은 잎은 전체적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이따금 레이스를 두른 듯 가장자리가 물결치는 잎도 보였다. 그 또렷한 직선과 곡선의 대비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단정하면서도 화려하고, 우아하고 기품 있지만 한편으로는 작은 잎이 오종종 모여 있는 모양새가 귀엽기도 했다.
호진은 선반의 사이로 난 통로를 지나 정인에게로 돌아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잎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한번 만져 보실래요?”
사실 상담실에 있는 것도 눈으로 보기만 했을 뿐 손을 대 본 적은 없다. 정인은 천천히 손을 뻗어 이파리를 만졌다. 반짝반짝 억세어 보이는 앞면과 달리, 뒷면은 조금만 잘못 만져도 상처가 날 것처럼 부드러웠다. 어쨌든 상담실에 있던 녀석보다는 훨씬 싱싱해 보였다.
“…얘는 흙에서 사네.”
“이 식물 아세요?”
정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에서 크는 거 본 적 있어. 오래 지나니까 많이 커지더라고.”
“흙에서는 더 잘 자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화분을 내밀었다.
“싱고니움이라는 식물이에요. 책상 위에 올려 두세요.”
“…나보고 키우라고?”
“네.”
“이런 건 못 키워, 아마 금방 죽을 거야.”
얼떨결에 받아 들긴 했지만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 정인이 키웠던 식물들은 전부 한 달을 못 버티고 죽어 나갔기 때문아다.
정이 들 만하면 홀랑 시들어 버리는 것들을 땅에 묻어 주는 건 은근히 감정 소모가 많은 일이다. 그런 걸 또 하고 싶지는 않아서 호진에게 화분을 돌려주려 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이번엔 아닐 거예요.”
“뭐가 아니야. 여태까지 키웠던 건 전부 다 한 달도 안 돼서 죽였는데.”
정인은 앞장서는 호진의 등 뒤로 따라붙으며 투덜거렸다. 호진은 고추나무 묘목이 잔뜩 놓여 있는 선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작은 포트를 하나하나 살폈다.
“왜 죽었을 것 같아요?”
순식간에 건강한 모종을 추려 낸 호진이 물었다. 정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걸 알면 안 죽였겠지.”
호진은 말없이 다른 것들을 살폈다. 이번에는 블루베리의 차례인 것 같았다. 조금 전 골라낸 고추 묘목처럼 작은 것들을 고를 줄 알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하나씩 뽑혀 나오는 포트에는 뜻밖에도 웬만한 성인 남자의 정강이 높이까지 자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이런 거 가져가면 꼼수 부린다고 뭐라 할 것 같은데. 내가 심고 키워서 수확까지 하는 게 조건이거든.”
호진은 고개를 들어 정인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네, 무슨 아르바이트가 그래요?”
“…그러게.”
“그래도 3년생 정도는 돼야 해요. 일이 년 키워서는 턱도 없거든요.”
고추와 블루베리를 합쳐 대충 서른 개는 고른 것 같았다. 선반 너머로 고개를 내민 호진은 사장에게 포장을 부탁했다.
“한 30분쯤 뒤에 찾으러 올게요.”
그는 또 어딘가를 향해 바삐 걸었다.
“어디 가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 화분이나 꼭 끌어안고 호진의 등 뒤만 쫓아다니자니 마치 게임에 나오는 펫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자재 사야죠. 흙도 사야 하고.”
“나쁜 흙은 아니라며.”
“블루베리가 좀 까다로워서요, 걔는 전용으로 나온 흙 쓰는 게 좋아요.”
호진의 걸음은 원예용품을 파는 상점으로 향했다. 주인과 뭐라 뭐라 이야기를 나누며 안쪽으로 들어가나 싶더니, 머지않아 한 팔에는 쇠 말뚝 몇 개를 끼고 다른 쪽 어깨 위에는 단단히 엮인 흙 몇 포대를 얹은 채 나타났다. 딱 봐도 엄청나게 무거워 보이는 것들이었다.
“나도 들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도.”
“…그럼 말뚝 몇 개만 들어 주세요.”
살짝 열어 주는 팔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말뚝을 쥐었다. 아직 반쯤은 호진이 들어 주고 있는데도 무거웠다. 조심조심 서너 개를 빼내 품에 안고 그를 따라 걸었다.
조금의 힘든 기색도 없이 차까지 걸어간 호진은 가뿐하게 짐을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차에 기대서서 정인을 바라보았다.
정인은 무거운 말뚝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고, 호진은 느린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도와주겠다고 섣불리 나서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정인을 지켜봐 주다가, 마침내 정인이 문 앞까지 다가서자 별말 없이 말뚝을 받아 차 안으로 던져 넣을 뿐이었다.
“화분도 잠깐 차에 둘까요?”
“응…이 아니라, 나 이거 못 키운다니까?”
덜덜 떨리는 팔을 들키지 않으려 제법 애를 써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호진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할 수 있어요.”
“아….”
커다란 손이 정인의 팔꿈치 아래를 꾹 눌러 왔다. 은근히 아팠지만 정인은 끝내 피하지 않았다. 어느샌가 무의식적으로 이 사람이 절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으리라는 걸 믿게 되었기 때문에.
“여태까지 형이 키웠던 식물들 말이에요.”
천천히 마사지를 해 주며 호진이 물었다.
“많이 예뻐하셨죠?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물도 매일매일 주고.”
어떻게 알았나 싶어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호진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좋은 마음도 가끔은 독이 될 때가 있어요. 흙에 물이 너무 많으면 뿌리가 숨을 못 쉬거든요.”
“…….”
“좋은 흙과 물은 식물을 잘 자라게 돕기도 하지만, 이따금은 그 무게로 식물을 죽이기도 해요. 그런 걸 과습이라고 불러요.”
꾹꾹 눌러 주는 손길은 얼마간 이어졌다.
“과습이 오면 처음에는 티가 잘 안 나요. 어제랑 똑같이 예쁘고 처음처럼 싱싱하니까.”
“…….”
“그런데 속으로는 썩어 가고 있는 거예요. 예뻐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사실은 숨이 막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예쁘다 만져 주는 손길마저 아파서 새잎을 내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손이 점차 느려졌다. 정인은 호진의 내리깐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멈춰 있던 속눈썹이 깜빡, 움직였다.
“그러다 결국 벼랑 끝까지 몰리면 제발 살려 달라고 잎을 조금 말거나 색이 변한 잎을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그때 사람들은 보통 물을 더 줘요. 아프지 말고 다시 예뻐지라고.”
“…….”
“그러면 그나마 남아 있던 뿌리로 간신히 며칠을 더 버티다가…. 그렇게 이를 악물고 조금을 더 살아 내다가.”
그 말을 하는 호진의 얼굴이 조금 외로워 보였다
“…결국 마지막 숨구멍까지 틀어막혀서, 하룻밤 사이에 말라 버리는 거예요. 손쓸 수도 없이.”
어쩐지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왠지 모를 조바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인은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숨 쉬게 해 줄게.”
호진이 고개를 들었다. 찬란한 햇볕 사이로 시선이 마주쳤다.
볕이 너무도 밝았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늘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기만 하던 호진의 눈빛 안에 무언가가 섞여 든 게 보였다.
마치 반듯한 옥돌에 그어진 실금 같기도 했고, 단단한 비늘 사이에 숨은 단 하나의 역린 같기도 했다.
그 불완전함을 읽어 낸 순간, 잠깐의 침묵을 건너 날아든 세상의 소음이 아득하게 귓가에 부서졌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된 듯한 기분이었다. 정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픈 것 같아 보이면 물 안 주고, 싱싱해질 때까지 기다릴게.”
아, 나 지금 왜 이러지.
아픈가?
“가만히 놔두고 눈으로만 예뻐하면 되잖아.”
호진은 소처럼 까맣고 순한 눈으로 정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렇게 해 주실래요?”
정인은 호진의 손에 잡혀 있던 팔을 빼냈다.
“…응.”
그래도 대답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
“됐어요?”
담장 너머에 선 호진이 물었다. 한참 뒤로 물러난 정인은 응, 하고 크게 소리쳤다.
“흙 넘어가요!”
족히 20킬로는 넘는 흙포대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땅에 닿자마자 엉망으로 터져 버렸다. 호진의 계획을 듣자마자 정인의 머릿속을 스친 장면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설령 자루가 터지더라도 나중에 삽으로 뜨면 된다며 굳이 이렇게 짐을 넘길 것을 권했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허약하기 그지없는 정인의 몸 상태를 염두에 둔 것 같았다.
영 찜찜한데도 결국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던 이유는, 자신의 체력으로 저걸 전부 들고 정문을 통과해 텃밭까지 돌아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정인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말뚝 넘길게요, 조금만 더 뒤로 물러나세요.”
“알았어.”
“위험하니까 더 물러나세요. 형 목소리 저한테 들리지도 않는 데까지 가셔야 돼요.”
무거운 금속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 번 더 신신당부하는 말에 정인은 조금 더 멀찌감치 떨어졌다. 이윽고 말뚝이 하나둘 날아들어 땅에 박혔다. 저걸 제대로 맞는다면 정말로 두개골에 구멍이 날 것이다. 살벌한 기세에 몇 걸음을 더 물러났다.
날아들던 말뚝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담장 위를 스쳤다. 깡― 하는 금속성이 울리기 무섭게 번쩍 스파크가 튀었다.
“유호진!”
정인은 기겁하며 호진을 불렀다. 연신 날아오던 것들이 일순 멎어 들었다.
“네?”
“너 가진 것 중에 물기 있는 거, 뭐든 좋으니 저 장식물 위로 던져 봐.”
“음…. 네.”
정체를 알 수 없는 흰색 물체가 휙 떠올라 장식물의 뾰족한 부분에 꽂혔다. 새파란 스파크와 함께 퍽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미친….”
지직거리며 익어 가는 닭 가슴살 덩어리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역시 고압선이 켜져 있는 것 같았다.
“유호진,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때였다. 멀리서 태피가 컹 하고 짖었다. 태피는 분명 저택 안에 있을 텐데, 생각하며 뒤를 돌아본 정인은 히익 숨을 삼켰다. 저택의 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현욱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주영과 함께 정원으로 나서는 현욱의 모습을 발견한 정인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호진에게 문자를 넣었다.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차로 돌아가. 오늘 먼저 들어가도 돼.
제발 확인해라, 제발. 손을 달달 떨면서 메시지 창을 흘끔거렸다. 다행히도 곧 메시지를 읽었음을 나타내는 표시가 나타났다. 그러는 사이 현욱과 주영은 이미 정원을 가로질러 코앞까지 와 있었다.
“뭐야, 너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답장이 온 것 같았지만 그걸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처넣었다.
“형 오늘 촬영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삼촌은 회사 왜 안 갔어요?”
“현장에 뭐 잘못됐대서 내일 것까지 다 엎어졌어. 그러고 보니 이사님은 왜 왔댔지?”
회장이 된 지 한참은 지났는데도 아직 주영은 가끔 그를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물론 현욱은 그에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별 이유는 없고.”
날카로운 시선이 텃밭을 훑었다. 정인은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터져 있는 흙 자루를 한 번,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구는 말뚝을 한 번. 그리고 시꺼멓게 탄 채 아직도 담장 위에 걸려 있는 닭 가슴살을 마지막으로 한 번 쳐다본 현욱은 곧 정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
들켰나?
“정인이가 혼자서 참 열심이네.”
다행히도 아직은 그저 예뻐 죽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정인은 내심 안도했다. 뜬금없이 켜져 있던 고압선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만약 그게 꺼져 있었다면 말뚝 다음에는 유호진이 넘어왔을 테고, 그랬다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그 자리에서 들켰을 테니까.
“먹을 거 잔뜩 사다 놨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이거 다 옮기느라 힘들었겠다.”
이 상황에 아무 생각이 없을 주영만 해맑았다. 정인은 담장을 흘끔대며 그들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따라 부엌에 다다르자 테이블 위로 예쁘게 쌓여 있는 과자가 보였다. 주영은 정인의 앞에 꿀이 든 밀크티 한 잔을 놓아 주었다.
“너 와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오늘 이거 또 나 혼자 다 먹었을 텐데.”
“뭘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어제저녁부터 굶었거든. 눈이 안 뒤집히고 배기냔 말이지.”
따뜻한 밀크티를 홀짝이며 정인은 주영이 사 온 마카롱 하나를 집어 들었다.
“형도 드세요.”
주영에게 먼저 권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거 하나에 트레드밀 한 시간인데 그냥 너 먹는 거나 볼래.”
“…형 드시려고 사 오신 거 아니에요?”
“원랜 그럴 예정이었는데, 지금 말하면서 생각 바뀌었어. 네가 대신 먹어 줘.”
그는 스툴에 앉아 정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주 없던 일은 아닌지라 정인은 익숙하게 그 시선을 받아 내며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작품에 들어가게 되면 주영은 항상 비인간적인 수준으로 식단 관리를 했다. 그게 적잖이 스트레스가 되는지, 가끔은 밤늦게 정인을 불러내 초밥이나 수제 버거 같은 것을 먹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남이 밥 먹는 거라도 봐야 미치지 않고 버틸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병아리 모이 먹냐?”
“…죄송해요. 많이 먹을게요.”
크게 한 입 더 물었다. 주영은 그제야 탐탁잖은 기색을 지웠다.
어쨌든 주영의 초이스답게 입 안에서 바삭하게 부서지는 촉감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잔뜩 긴장해 있던 신경이 사르륵 풀리려던 찰나,
“유호진 선수, 100미터 지나치고 있습니다.”
“초반부터 굉장히 빠르게 치고 나갑니다. 평소 스타일과는 조금 다른데요. 크랄렌스키 선수를 유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이름에 목이 콱 막혔다.
“웁….”
“왜, 목에 걸렸어?”
재빨리 다가온 주영이 정인의 등을 토닥였다. 간신히 먹던 것을 넘긴 정인은 마카롱을 꽉 쥐고 부리나케 거실을 향해 달려갔다. 현욱은 턱을 괸 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삼촌.”
“응?”
부드럽게 물으면서도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300미터, 현재까지 유호진 선수 개인 신기록입니다. 남은 50미터 힘내 주길 바랍니다.”
“모두가 응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유호진 선수.”
화면 속의 호진은 엄청난 속도로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대부분의 선수들과는 꽤나 거리가 벌어졌지만, 바로 뒤에 쫓아오는 선수와는 큰 차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힘차게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무수한 물방울이 부서지고 깨지며 길을 열었다. 포말을 헤쳐 성큼성큼 전진하는 모습에서 깨끗하게 정제된 결기가 느껴졌다. 모든 사념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진 채, 그저 제 앞에 예비된 길을 헤치고 가는 일에만 숨죽이고 집중한.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마음았 바빠졌다.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경기임을 알고 있음에도 정인은 저도 모르게 그를 응원했다. 제발 힘내, 조금만 더. 그러자 호진의 속도가 거짓말처럼 확 높아지고 해설자들의 함성이 커졌다.
머지않아 2위 선수와 팔 하나의 차이를 벌린 호진의 손끝은 거침없이 패드를 터치했다. 호진의 이름 옆으로 1이라는 숫자가 박히고 비명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금메달입니다!”
“파리 올림픽 자유형 400미터, 대한민국 유호진 선수. 세계 신기록 수립하며 자랑스럽게 금메달 차지했습니다!”
거칠게 수모를 벗어 던진 호진이 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백 미터를 꾹 참아 온 숨을 한꺼번에 터트리듯.
절대 쉽지 않았을 싸움 끝에 마침내 월계관을 거머쥔 금메달리스트는 여름날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으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수천수만 시간을 헤엄쳐 마침내 정상에 오른 사람의 얼굴 위로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그 순간 화면이 멈췄다.
“…아.”
정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현욱과 눈이 마주쳤다.
“정인이가 수영 좋아했던가?”
“아뇨.”
딱 잘라 부인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이건 왜 보고 계세요?”
“이 선수 스폰서 중에 곧 계약 만료되는 데가 있다기에 알아보는 중이야. 우리 쪽에서도 한번 넣어 보자는 얘기가 나와서.”
테이블에는 이런저런 서류가 잔뜩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인이랑 같은 학교라고 들었는데. 혹시 학교에서 본 적 있어?”
“…….”
거짓말을 하자니 양심에 찔리고, 아는 사이라 하자니 변수가 걱정이다.
“모르는구나. 아쉽네.”
정인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그 침묵을 부정이라 이해한 것 같았다.
“정인이랑 안면이라도 있으면 좀 더 유심히 볼까 했는데.”
묘한 뉘앙스였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정인의 물음에 대신 대답한 건 어느샌가 다가온 주영이었다.
“이제 큰 데랑은 못 하는 거지. 어차피 올해 못 넘기고 은퇴할 것 같긴 하지만.”
“네?”
“선수 생활 끝나기 직전이라고 우리 쪽에도 소문 많이 났어. 아직 오피셜 뜬 건 아닌데 기자들이랑 밥 먹다 보면 얘기 많이 나오거든. 진짜 문제가 되는 건 부상이 아니고 뭐랬더라, 심인성 통증이랬나 트라우마랬나…. 하여튼 상황이 좀 안 좋나 봐.”
그는 정인이 들고 있던 반쪽짜리 마카롱을 빼앗아 입에 넣었다.
“이때다 싶어서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노리는 애들도 꽤 있을걸, 걸 그룹 에이트오 출신 예니 알지? 걔도 요새 유호진 연락처 딴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닌대.”
“…….”
“대시하는 연예인 차고 넘치는 마당에 괜찮은 애 만나서 인지도 높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그렇게 여친 빽으로 몇 년쯤 여기저기 얼굴 비추다가 돈 많은 집 호구 하나 물어서 결혼할걸? 아니면 말도 안 되게 어린 애를 만나던가. 하여튼 운동하는 새끼들 중에 여우 같은 창….”
주영의 목소리가 멈췄다.
“…창?”
“아니, 걸….”
“…걸?”
난감한 표정으로 정인을 쳐다보던 주영은 이내 손을 저었다.
“그냥 간혹 문란한 사람이 있다는 거야.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일단 내가 만났…. 아니, 그러니까.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애들은 좀 그런 편이었다고.”
잠자코 있던 현욱이 그 말에 픽 웃었다.
“아, 그러세요?”
“뭐, 그, 어….”
주영은 어버버하다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하여튼 정인이 너는 어디 가서 저런 애들한테 코 꿰이면 안 된다, 알았지?”
정인은 아직도 화면 속에서 웃고 있는 호진을 바라보았다.
“…삼촌.”
하늘이 무너져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하루를 시작한다 했다.
그런 사람이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쁜 일이라곤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것처럼 웃어서, 전혀 티를 내지 않아서.
너무 나이브하게 생각했다. 그의 머리 위를 덮은 것이 그저 잠깐을 머물다 지나갈 소나기구름 정도일 거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몰락을 말하는 가운데, 그가 그토록 안간힘을 써야 했던 건 어쩌면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라.
“…제가 책임지면요?”
난데없는 비극을 둘러싼 말과 말들이 지나가고 나면, 홀로 남은 어느 순간 불현듯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을 잃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예고조차 없이 불쑥 거울 너머로 찾아드는 것.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수없이 마음을 다독여도 기어이 뾰족한 송곳이 되어 가슴을 파고드는 것.
턱 밑에 차오르는 숨마저 반갑던 그 시절로, 이제부터는 무슨 짓을 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저 사람 써서 뭐가 잘 안 되면, 제가 가진 물산 쪽 지분 처리해서 그만큼 메울게요. 그러면….”
무시할 수 없었다. 더는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모든 게 끝났다며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리게 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이미 겪어 봤으니까.
“그러면 써 주실 거예요?”
그 순간이 얼마나 아픈지, 뼈저리게도 선명히 알고 있으니까.
“아니. 그 정도론 안 돼.”
단칼에 자르자 정인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현욱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똑똑한 정인이가 왜 이럴까, 네 지분을 매도해서 메워 봐야 결국 우리 시총에서 빠진 걸 그대로 돌려받는 거잖니?”
사실 어떻게 되든 유호진을 밀어 볼 작정이긴 했다. 현욱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전문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가장 전도유망한 선수로 꼽히고 있었다. 당장 문제가 되는 심리적인 부분만 어떻게든 해결하면 다시 성적을 내는 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너무 이르게 찾아온 전성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저평가 단계에 진입하게 된 선수다. 그를 헐값에 매입해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세우는 건 간단한 일이고, 설령 주영의 말대로 은퇴를 감행한대도 그가 여태까지 쌓아 온 이미지를 이용한다면 이익을 낼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인과 어울리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급을 높여 놔야 한다.
“…….”
유호진은 충청남도 내에서 손꼽히는 부농의 외아들이었다. 심지어 외가는 현욱과도 건너 건너 연이 있는 예술가 집안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본인과 부모 대의 자산 규모만 해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고, 사생활도 흠결 없이 깨끗했다. 학창 시절에는 내내 운동만 했고, 최근 만난 사람이라곤 운동 관련 인물을 제외하면 정인이 전부였다. 외모도 성품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현욱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우선은 최대한으로 잠재력을 끌어올려 그럴싸한 모습이라도 만들어 놔야 그나마 곱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욱은 정인이 원하든 말든 유호진에 대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었다. 의존도가 백 퍼센트에 가까워질 때까지 끊임없이 돈을 쏟아부어 놓고, 혹시라도 정인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지옥 밑바닥에 처박아 버리면 그만이니까.
이미 거기까지 계산을 마쳤음에도 괜히 심술을 부리는 건, 단지 흥미로워서다. 아주 어릴 적 이후로는 정인이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원하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잠시 기다리자, 오밀조밀 예쁜 입술이 열렸다.
“삼성동 빌딩 매각할게요.”
정인이 내놓은 것은 뜻밖의 답이었다.
“최정인.”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는 것뿐이에요.”
작게 숨을 토해 내며 정인이 말을 이었다.
“프로 모델까지 범위를 넓혀도 광고나 행사로 삼성동 빌딩 가격만큼의 이익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애초에 이런 건 실질적인 손익을 추산할 수도 없는 일인데….”
“…….”
“그럼에도 고민하시는 이유는 아마 기회비용의 문제겠죠, 같은 자본으로 다른 선수를 밀어서 얻을 수 있는 이미지의 값이요.”
정인은 고개를 돌려 화면 속의 유호진을 바라보았다.
“아직 자료 조사를 해 보지 않아서 확실한 데이터를 근거로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방금 보셨잖아요, 어떤 선수인지.”
깨끗한 뺨에 미소가 어렸다.
“제 투자금을 대신 운용하시는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제가 책임질게요.”
늘 뽀얗기만 하던 아가가 똑똑하게 제 할 말을 다 하는 걸 보니 대견한 마음에 웃음이 삐질삐질 기어 나왔다.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현욱은 소파를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앉아 봐.”
그러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정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는가 싶더니, 아기 토끼 같은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앉았어요.”
저를 예뻐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제 아주 작정하고 애교를 부려 뭐라도 뜯어보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저 선수를 그렇게까지 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야?”
“…사실 개인적으로 좀 아는 사이거든요.”
“그래?”
정인은 순순히 실토했다. 어차피 다 아는 얘기였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친한 건 아니지만…. 밥도 같이 먹은 적 있어요.”
밥만 같이 먹었겠는가. 정원의 CCTV를 통해 본 모습을 떠올리자 또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가능성 있는 사람이에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렇게 말하며 정인은 아예 현욱을 폭 끌어안았다.
“저 아무 데나 투자 안 하는 거 아시잖아요…. 네?”
꽃 같은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이러는데 도대체 어떻게 싫다 하겠는가. 현욱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랑해요, 삼촌.”
꼭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애가 달도록 예쁘기만 한 조카를 한 번 꼭 안아 주었다.
“그래도 벌써부터 인맥으로 라인 태우는 거 맛 들이면 안 돼.”
어쨌든 언젠가 날 잡아 인성 교육을 다시 시키긴 해야 할 것 같았다.
***
“하…. 망했다.”
그리고 저택을 빠져나오자마자 정인은 이마를 짚었다.
“미쳤지, 그냥 아파트 같은 걸로 할걸…. 뭐가 예쁘다고.”
삼성동의 메디컬 빌딩은 정인이 태어나던 무렵 조부가 들어 준 신탁에 속한 건물이었다.
물론 정인이 가진 것 중엔 더욱 깨끗하고 값진 건물도 많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탄생을 축하하며 남겨 준 첫 선물에는 무엇도 감히 비견할 수 없었다. 물론 현욱 또한 그 건물이 정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소중한 것을 내건 이유는 단지 자신이 유호진에게 확신의 베팅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래, 단지 쇼맨십의 일종이었던 거다.
대충 애교를 부리고 귀여움도 좀 떨면 저택을 나설 때쯤엔 없던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욱은 기어이 그 자리에서 각서를 뽑아 서명까지 박아 버렸다.
계열사와의 계약 첫 분기가 마무리될 즈음 빅 데이터를 분석해, 60퍼센트 이상의 사용자가 유호진에게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한다는 리포트가 나오면 성공이라 치고 해당 분기 이익 일부를 나눠 받는 대신, 그 이하라면 ‘반드시 그 빌딩’을 매각해 마케팅 비용 전액을 정인이 후불로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물론 이자도 포함이었다.
이렇게 되면 몇 개 호실의 소유권을 몰래 쥐고 있다가 서서히 나머지를 사들이는 꼼수도 통하지 않는다. 일단은 팔고 나중에 웃돈 얹어 사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혹시라도 소유주가 팔지 않겠다고 말해 버리면 정말 끝이다. 한마디로 요약해, 유호진의 성과가 부진하다면 할아버지의 빌딩이 날아가게 생긴 상황이라는 것이다.
“하….”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뭐가 예쁘다고 앞뒤 보지도 않고 현욱을 상대로 그런 엄청난 딜을 걸었을까.
사서 매를 벌었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킬 방법 따윈 없다. 각서의 효력이야 사실 법적으로 걸고넘어지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이야 있겠으나, 감히 그런 식으로 분쟁을 걸었다간 빌딩 하나 정도가 아니라 전 재산을 털릴 게 분명하다.
“현금을….”
당장 현금부터 스위스로 옮겨 놓을까. 생각하던 정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조건 해야 돼, 뭐라도.”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우선은 지금 유호진이 어떤 평판을 얻고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도 알아보고, 분석업체에 의뢰도 해야 할 테고….
“아니다. 운동부터 시켜야지.”
이제부터 딴짓은 조금도 하지 못하게 잡아 놓고 운동만 시켜서 반드시 어떤 대회에든 출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인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까 읽지 않은 메시지 하나가 떠 있는 게 보였다. 물론 호진에게서 온 것이었다.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아니, 이런 미친….”
저택으로 들어온 뒤로 족히 세 시간은 흘러 있었다. 설마설마하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너 어디야?”
호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 아까 그 자리요.
정인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욕 대신 크게 숨을 들이켜고, 호진이 있을 곳을 향해 달렸다. 호진의 차는 뉘엿뉘엿 해가 지는 골목 어귀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야.”
성큼성큼 다가가 문부터 확 열어젖혔다. 실내등이 밝혀지며, 웬 종이 뭉치를 잔뜩 펼쳐 읽고 있던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 오셨어요?”
“오셨냐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정인은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도대체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어?”
“뛰어오셨어요?”
그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정인에게로 다가섰다. 다짜고짜 제 시계를 풀어 정인의 손목에 붙이려다가,
“이건 뭐예요?”
저택을 나서기 직전 현욱에게 받은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정인은 쌀쌀맞게 그 손을 쳐 냈다.
“알 거 없어.”
일단 주니 받긴 했지만 사실 정인도 이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고 있었다. 후면에 익숙한 로고가 박혀 있는 걸로 보아 전자 계열사에서 나온 스마트워치 중의 하나겠거니 싶었다.
“심박수 나오는 거예요?”
호진은 끈질기게도 정인의 손목을 잡아 왔다. 긴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어 번 두드리자 시간, 심박수, 걸음 수가 차례로 나타났다.
“형, 갑자기 심박수 너무 크게 변하면 안 돼요.”
“왜?”
“제가 방금 논문을 하나…. 아니, 36분의 1 정도 읽었는데요, 하여튼 그러면 안 된대요.”
“무슨 헛소리야.”
36분의 1이면 초록조차도 다 읽지 않았을 것이다. 정인은 호진을 무시하고 액정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혹시라도 응급 상황이 생긴다면 측면의 버튼을 세 번 이상 누르라고, 그러면 곧바로 병원에 연락이 갈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직접 손목에 이것을 채워 주던 현욱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찜찜하네.”
“뭐가요?”
매끈한 화면을 살펴봤다.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현욱의 손에서 나온 이상 뭐가 들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응급 상황에서 연락이 갈 정도라면 GPS는 물론이고 당연히 통신 모듈도 있겠지. 도청 장치나 카메라 같은 건 없는 걸까. 까만 베젤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호진에게 물었다.
“너 혹시 이거랑 똑같은 모델 본 적 있어?”
“음…. 아뇨, 제 친구들도 스마트워치 많이 쓰는데 이건 처음 봐요.”
정인은 그 즉시 시계를 풀었다.
“종이 한 장만 쓰자.”
“아…. 네.”
아직 열려 있는 차 안으로 손을 밀어 넣은 호진은 빈 종이 한 장을 쭉 찢어 내 건넸다. 그리고 정인은 그것으로 시계의 바디를 빈틈없이 둘둘 감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일단 시동 걸어.”
“네?”
멍청히 서 있는 호진을 향해 말했다.
“바로 운동하러 가자고.”
“어….”
아쉽지만 오늘 정인과의 만남은 이대로 끝날 예정이었다. 학교 수영장에서 할 훈련은 모레고, 그때까진 운이 좋아야 밥을 가져다줄 때나 겨우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오늘은 약속한 날이 아닌데요.”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정인은 벌써 조수석에 타 벨트까지 매고 있었다.
“같이 있어 주실 거예요?”
“그래.”
어쨌든 이득이다. 호진은 냉큼 넵, 하고 대답한 뒤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근데, 밥 먹고 가도 돼요?”
“마음대로 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동을 걸었다. 혹시라도 정인과 함께 외식을 하게 되는 날이 올까 봐 미리 알아봐 둔 레스토랑의 위치를 떠올리며 천천히 도로를 빠져나왔다.
이제 막 퇴근길 러시아워가 시작될 참인 듯했다. 대로로 나오자마자 훌쩍 늘어난 통행량에 블록마다 차가 멈춰 섰다. 정인을 신경 쓰며 최대한 조심조심 운전하는데,
“다음 대회는 언제 나가?”
정인이 물었다. 얕게 브레이크를 밟아 정지선 앞에 멈춰 서며 호진은 그를 돌아보았다.
“글쎄요. 아직은 잡힌 일정이 따로 없네요.”
“가장 가까운 대회는 언제인데?”
“음…. 4월 중순에 작은 대회가 하나 있긴 해요. 출전 여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그 말에, 차창 너머를 바라보던 정인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 그거 나갈 수 있겠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왜요?”
정인은 잠시 말을 골랐다.
“제대로 하는 거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아….”
정인이 호진에게 뭔가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러겠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호진이 머뭇거리는 사이 신호등이 바뀌었다. 빼곡하게 차오르는 도로를 내다보며, 호진은 출전을 선언한 이후의 삶을 그려 보았다.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몸이야 꾸준히 만들어 왔지만 정말로 대회 준비를 할 거였다면 족히 일이 주 전부터는 페이스 훈련을 시작했어야 했다.
“그냥 나가기 싫은 거야, 아니면 피치 못할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정곡을 찌르는 질문 뒤로 긴 정적이 생겼다.
“…잘 모르겠어요.”
호진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속에 든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마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 한구석에 담긴 상자를 여는 일 같았다.
“저는….”
어디서 빠져나왔는지도 모를 털실 한 가닥이 틈만 나면 방 안을 굴러다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문제 없다고, 모든 것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으며 그것들이 보일 때마다 한 올씩 주워 네모난 상자 안에 밀어 넣었다. 정인은 지금 호진에게 그 상자를 열라 하고 있었다.
거역하지 않고, 호진은 상자 안에 차곡차곡 담겨 있는 감정의 표면을 긁어 보았다. 그러자 스스로조차도 모르게 덮어 둔 글자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홀린 듯 그것을 따라 읽었다.
“…싫은 것 같아요.”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왜 싫은데?”
“그냥….”
더듬더듬 이유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가슴 속을 맴도는 감정들을 단어로 표현해 내기 위해 한참 고민하던 호진은,
“…힘들어서요.”
또 한 번 어디에도 한 적이 없던 말을 꺼내 놓았다.
“…….”
정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으로 호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배부른 소리죠, 지금도 모든 것을 바쳐 가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그 침묵이 어쩐지 위로가 됐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정인이라면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잘못됐다 나무라거나 실망스럽다며 쓴 얼굴로 돌아서는 대신, 그저 언제나처럼 단단하고 곧은 시선으로, 조금은 무심한 듯한 다정함으로. 이 순간을 조용히 지켜봐 줄 것 같았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씩은…. 힘든 것 같아요.”
호진은 멋쩍게 웃었다.
“그럼 쉬어.”
정인의 목소리는 명료했다.
“너 지금 일주일에 며칠 쉬어?”
“아…. 주말은 조금 덜 하긴 하는데.”
“운동 아예 안 하는 날은?”
“그런 날은 없어요.”
정인이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음….”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최근 일이 년 안에는 하루를 통째로 쉰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간단하게 개인 훈련 위주로만 돌아가는 요즘이 가장 널널했다.
“그럼 내일 당장 아무것도 하지 말아 봐.”
“네?”
“하루 빠진다고 누가 쫓아와서 목에 칼 꽂는 거 아니면, 일단 내일 건 전부 빼라고.”
내일의 스케줄을 떠올렸다. 학교 근처의 짐에서 오전 훈련을 하고, 정인과 함께 듣는 수업이 모두 끝나면 센터에 들러 트레이너와 함께 근력 운동을 하다가 마무리로 개인 수중 훈련까지 하면 끝이었다. 하루쯤 빼먹는다고 해도 정인의 말처럼 피를 볼 일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저 뭐 하면 돼요?”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일이라. 핸들을 크게 돌리며 호진은 막연하게 내일의 모습을 상상했다.
“…생각해 볼게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
마침내 도착한 장소는 조용한 레스토랑이었다.
“제가 형 음식 골라 드려도 돼요?”
“응.”
호진이 간단하게 주문을 넣는 동안, 정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원하게 트인 인테리어에 조명 구성마저 완벽해서 별것 없이도 눈이 편안했다. 그러나 남자 둘이 밥을 때울 목적으로 올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딱 봐도 데이트 중인 사람들로만 가득한 홀을 흘끔거리며, 정인은 애피타이저로 나온 빵을 야금야금 뜯어 먹었다.
“형은 내일 뭐 하실 거예요?”
“글쎄. 수업 끝나면 집에서 잠이나 자겠지.”
바스켓이 비기 무섭게 수프가 나왔다. 정인은 냅킨을 살짝 뒤집어 반짝이는 커틀러리를 꺼냈다. 호진이 불쑥 물었다.
“그럼…. 형이 저랑 놀아 주시면 안 돼요?”
“뭐?”
“저 혼자서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수프를 휘휘 젓기만 하며 호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일 잘 쉬고 나면 부담감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
“혼자 가만히 있는 것보단 차라리 간단하게라도 운동을 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거든요. 하지만 그러면 결국 평소랑 똑같아지는 거라 별 의미가 없을 거고요.”
달그락달그락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아득했다. 정인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 개수작인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이 사람이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통째로 하루를 놓아 본 적이 있어야 뭐라도 할 것 아닌가.
“나랑은 뭐 할 건데.”
어느새 등장한 메인 요리를 뒤적이며 물었다.
“혼자 노는 법도 모른다며. 나랑은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
“아, 음. 영화도 보고 싶고, 산책도 하고 싶고, 카페도 가고 싶고요….”
“다 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내일 그거 하면 되겠네.”
담백한 라비올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얇은 피 안에 꽉 찬 리코타 치즈가 싹 올라와 조금 심심하다 싶은 첫맛을 잡고, 버섯은 두툼하게 썰려 수분을 유지하면서도 꼬들꼬들 씹는 재미가 있었다. 토핑처럼 얹혀 있는 치즈의 향도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왔다면 가볍게 샴페인 한잔 정도를 곁들여도 좋았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호진이 불쑥 말했다.
“저, 놀이공원도 가 보고 싶었어요.”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결심을 내놓는 듯한 목소리였다.
“초등학교 소풍 후로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거든요. 중학교 때부턴 바로 선수 생활 시작해서…. 근데 이런 건 혼자 가서 놀면 재미없잖아요.”
가지가지 하네, 진짜.
“그거 말고 다른 건 안 되겠어?”
떨떠름한 물음에 호진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원이에요. 고등학교 때 한 번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대회가 잡혀 버려서 못 갔거든요. 되게 속상했어요, 엄청 많이요. 얼마나 속상했냐면….”
“…아니, 알았으니까 그만 좀.”
마치 새벽녘 고속 도로의 화물 트럭 같은 기세였다.
“그런 데가 그렇게 가고 싶어? 다른 일도 잘 생각해 봐.”
할아버지의 빌딩을 생각하면 무조건 유호진이 하자는 대로 해 줘야 한다. 아무래도 호진은 일종의 번아웃을 겪고 있는 것 같았고, 어쩌면 내일 하루가 의외로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테마파크처럼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쉽사리 그러자 하기가 어려웠다.
“정말 너무너무 가고 싶어요.”
호진은 그저 번쩍이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알았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호진이 별안간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뭐야,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
“형 덕분에 소원 풀겠네요.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어쩐지 묘하게 기분이 찝찝했다. 탄산수를 홀짝거리며 정인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호진도 이제 슬슬 식사를 마친 것 같았다. 마치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정인이 스푼을 놓음과 거의 동시에 라비올리 한 접시를 싹 비운 그는 정인의 허락도 없이 계산서 폴더 안에 제 신용 카드를 끼워 넣었다.
“교양 있게 굴어.”
자연스럽게 그 계산서를 빼앗은 정인은 그의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대신 제 카드를 꺼냈다.
“형, 제가 살게요. 제가 오자고 했잖아요.”
“뇌물이라고 생각해.”
카드와 함께 팁을 끼워 넣으며 담당 웨이터에게 눈짓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계산서를 받아 들었다.
“정 힘들다면 억지 부리지는 않을게. 그래도….”
멀어지는 웨이터의 등에 눈길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혹시 괜찮을 것 같다면, 4월 대회 출전하는 쪽으로 생각해 줘.”
***
가방을 내려놓고 환복까지 마치는 데에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호진은 텅 빈 로커 룸을 가로질러 곧장 옆에 딸린 샤워실로 들어섰다. 가볍게 몸을 씻어 낸 다음에는 망설이지 않고 수영장으로 향하는 문을 쥐었다.
“할 수 있다.”
습관처럼 스스로를 향해 말했다.
물을 타기 직전에 한 번 더 암시를 걸고 들어가는 것은 이미 루틴의 일부가 된 지 오래였다. 실제로 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와는 관계없이, 기억하던 말이 떨어지자 몸은 기다렸다는 듯 긴장 반응을 내놓았다.
아드레날린이 올라오며 눈앞의 것들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마지막 한숨과 함께 잡념을 털어 낸 호진은 곧 문을 열었다. 드넓은 실내에 한가득 펼쳐진 물이 보였다.
정인은 그 가운데에 선 채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호진은 얼른 그에게로 다가섰다.
“무슨 생각 하세요?”
“…아.”
눈 한번을 깜빡이지 않고 발아래만 내려다보던 정인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여기 청소 주기가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
“아…. 그건 저도 잘 모르는데. 시설 팀에 물어볼게요. 일단 여기 앉으세요.”
호진은 정인을 흘끔대며 타월을 옮겼다. 두툼하게 쌓아 올린 것을 툭툭 두드리자 정인은 거절하지 않고 호진이 만들어 준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이것도 입고 계세요.”
정인에게 트랙 톱을 건넸다.
“응.”
밤의 수영장은 꽤 쌀쌀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추웠는지, 옷을 받아 들자마자 곧장 팔을 끼워 넣는 것을 보니 너무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났다.
가만 보면 정인은 타인을 경계하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남의 손을 타는 일에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타월을 주면 주는 대로 쓰고, 옷을 주면 또 주는 대로 입는다. 차에 타고 내릴 때나 어딘가에 출입할 때 호진이 문을 열어 주는 것에도 늘 별말이 없었다. 물론 호진이야 그 덤덤함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괜히 한 번 더 말을 붙이거나 눈을 맞출 기회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테니까.
“형, 오늘은 정말 물에 들어오시면 안 돼요.”
목 끝까지 지퍼를 잠근 것을 확인하고, 정인을 향해 당부했다.
“왜?”
정인이 눈을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생각하며 호진은 바보같이 웃었다.
“춥잖아요, 빨리 피곤해지고.”
“…….”
찰박찰박 흘러넘치는 물소리 속에서 정인은 말이 없었다. 가만히 호진을 쳐다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 가서 운동해.”
“네.”
호진은 씩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오늘은 끝까지 와.”
정인이 말했다.
“네?”
“중간에 멈추지 말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오라고.”
“아….”
어차피 문제는 스타트에 있다. 초반 몇 번의 스트로크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50미터를 끝까지 찍는 건 지금의 호진에게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네, 형.”
하지만 정인이 그러라는데 하지 못할 것도 없다. 호진은 출발대를 향해 걸었다.
정인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마음에 묻어 있던 따뜻한 기운도 조금씩 희미해졌다. 마침내 레인의 시작점에 다다랐을 때는 가슴 속이 온통 서늘하게 식은 채였다.
점처럼 작아진 정인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늘 하던 대로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벽에 걸린 로프를 당기며 근육을 풀고, 부상 부위에도 적당한 스트레스를 주어 열을 올렸다.
머지않아 비로소 물속으로 들어설 시간이 닥쳐왔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출발대에 올라섰다. 허리를 숙였다. 훌쩍 가까워진 수면을 노려보았다.
더는 기쁘지도 설레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순간을 목전에 두고, 한 번 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할 수 있다.”
그래야만 해.
이를 악물고 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물거품과 함께 온 세상이 먹먹해졌다. 싸늘한 수온을 견디며 나아가다가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물 밖의 세상이 바삐 뒤집혔다.
다시 물 안으로 들어섰다. 수경 너머로 보이는 물 아래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호진이 있는 레인을 제외한 나머지 레인은 당연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잡생각을 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곧 어김없이 수영의 과정이 떠올랐다. 손끝을, 팔을, 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이 레인의 끝까지 몇 번의 숨을 쉬고 몇 번의 스트로크를 쳐야 하는지. 평생을 배우고 익혀 온 이론과 숫자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곧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한 20미터쯤 왔을까. 이제 더는 의미가 없다. 멈춰 서기 위해 호흡을 갈무리하려는데,
‘오늘은 끝까지 와.’
정인의 말이 떠올랐다.
굳이 재지 않아도 처참하기 그지없는 기록이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정인의 명이 있는 한 끝까지 가야만 했다. 호진은 머리를 내밀어 남은 거리를 버텨 줄 만큼의 숨을 마셨다.
“…….”
25미터, 30미터, 35미터.
물이 무거웠다.
40미터, 45미터.
실은 정말로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었다.
오늘의 50미터가 아닌, 앞으로의 전부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와.’
꾹 참고 조금을 더 나아갔다. 마침내 벽이 보였다. 팔을 쭉 뻗어 벽을 짚었다. 물 밖으로 빠져나온 호진은 수경을 이마 위로 추켜올리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하아….”
넓은 수면은 오직 호진이 만들어 낸 파문으로만 가득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흔적조차 없이 증발한 가운데 혼자만 이 안에 남아 버린 것처럼.
“잘했어.”
그러나 외로움은 잠시였다. 오늘은 물 밖에 호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형.”
타월을 깔아 놓은 마지막 레인에서 한참은 떨어진 자리였다. 정인이 손을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끝까지 가는 게 어렵다고 했지.”
호진은 멍하니 그의 손을 우러러보았다.
“반은 했어.”
“…….”
“무슨 생각을 하면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왔잖아. 그러니 반은 해낸 거야.”
정인은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천천히 그를 맞잡았다. 살짝 당겨 주는 힘에 의지해 물을 빠져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가는 게 어렵다면, 다른 생각을 하면서 가.”
정인이 말했다.
“나는 그렇게 견뎠어.”
그러고는 눈을 돌려 조금 전 호진이 빠져나온 그 아득한 물을 바라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물 아래의 풍경처럼 고요하고 먹먹한 시선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건…. 다른 생각으로 지웠어.”
“…형.”
언제든 저 안으로 뛰어들 것 같은 눈에 덜컥 겁이 났다. 호진은 얼른 정인의 팔을 붙들어 제게로 돌려세웠다.
“다른 생각 하면서 가 볼게요. 저 이번에는 백 미터도 찍고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정인이 웃었다. 호진은 출발대도 없는 레인 끝에서 몸을 숙여, 아득하게 뻗은 물 너머의 반환점을 바라보았다.
후, 하고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마시는 숨에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돌핀을 마치자마자 첫 번째 스트로크를 질렀다. 완벽한 힘과 각도로 한 번을 더 내지르자 물길이 열렸다. 거침없이 그를 따라 성큼성큼 나아갔다.
여전히 등 뒤를 지키고 서 있을 정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저만치 막막하게 드리운 벽마저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호진은 쏜살같은 속도로 저만치까지 나아가 마침내 한 번 머리를 내밀었다.
레인 끝에 가만히 선 채 정인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센 파문에 휩쓸려 이지러진 수면 아래로 사라졌던 호진은 이내 다시 나타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반대편 벽을 찍고 이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았다. 정인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맨발은 차가운 물에 젖어 들었다.
‘춥잖아요, 빨리 피곤해지고.’
여태까지 늘 그랬던 걸까.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물에 들어갈 때마다 춥고 피곤했던 걸까.
그렇다면 혹시 지친 건 아닐까. 큰 목표를 이루었으니 이제 정말 그저 쉬고 싶은 건 아닐까.
내가 대회에 나가라고 종용하는 게 부담이 되는 건 아닐까.
“…….”
잠깐 딴생각을 한 사이였다. 순식간에 레인 끝으로 돌아온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잘했다고, 이제 조금 쉬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빠르게 물 밑을 가로질러 온 호진은 그대로 벽을 차고 반대편을 향해 나아갔다.
“어….”
그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둥글게 물이 일렁였다. 거대한 수영장의 귀퉁이마다 호진이 만들어 낸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정인은 잠자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호진은 멈추지 않고 한 번을 더 돌아왔다. 그러고는 다음의 한 바퀴를 위해 또 한번 몸을 돌렸다.
200미터를 넘기며 속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정밀하게 맞춰진 템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직 모든 것이 그의 통제하에 있는 듯했다. 정인은 이것이 단지 마지막 스퍼트를 위한 도약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300미터를 넘기자 거친 스퍼트가 시작되었다. 조금도 계산하지 않고, 그저 가지고 있는 최대치를 끌어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이 느껴졌다.
“…….”
그리고 그건 정말로 힘들어 보였다.
남의 일처럼 화면으로만 볼 때는 느끼지 못하던 것이었다.
“하아, 하아….”
사백 미터의 레이스는 금세 끝났고, 호진은 벽을 짚으며 멈춰 섰다. 그는 수모를 벗고 물 안으로 한 번 푹 잠겼다 나오며 이마를 쓸어 올렸다.
“사백 미터 했어요.”
정인은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피로한 기색도 없었다. 겨우 오십 미터를 달려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생기가 넘쳤다. 반짝이는 눈을 들어, 호진은 칭찬해 달라는 듯 순하게 웃었다.
“응.”
혹여나 부담되지는 않을까 우려하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놓였다.
정인은 손을 내밀어 그를 물에서 꺼냈다. 간단히 붙들어 주기만 했는데도, 호진은 너무나도 손쉽게 스스로의 힘으로 물을 벗어났다. 물기를 뚝뚝 흘리며 바닥을 딛고 선 호진을 마주 보았다.
“유호진.”
정인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회 나가자.”
역시 너는 여기서 멈춰 설 수 있는 사람이 못 돼.
두 번을 종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호진에게도 이 순간이 필요하다는 걸, 너무나도 확실히 알아 버렸기 때문에.
크게 자라난 나뭇잎이 가로등을 가렸다.
바닥 구석구석 실금같이 스며든 빛무리 위로 발을 내딛자 시원한 밤공기가 어깨를 감쌌다. 봄밤 특유의 알싸하면서도 포근한 냄새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금방이라도 벽을 따라 샛노란 개나리가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형.”
정인은 걸음을 멈췄다. 대여섯 발짝쯤의 사이를 건너, 가장 어두운 자리에 우두커니 선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형은 왜 제가 대회에 나가길 바라세요?”
유독 가로등 불빛이 많이 가린 자리라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들려오는 목소리로 미루어 평소의 담담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고 상상만 했다.
정인은 천천히 대답을 골랐다.
“멋있었거든.”
돌려 말할 필요 없는 진심을 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경기하는 네 모습을 보는 거, 좋았어.”
정말이었다.
마치 온몸으로 빛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반짝반짝 아름답다 못해, 조금은 서글퍼지기까지 할 만큼.
그렇게나 가슴이 요동치는 건, 정인 또한 몇 번이고 그런 시절을 지나 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선두에 서서 마침내 스스로 세운 벽을 넘어서고야 마는, 그 강렬한 기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호진이 그것을 놓지 않기를 바랐다. 평생 그리할 수는 없다 해도, 가능한 한 오랫동안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무모한 도박을 해 가며 그의 손을 들 수밖에 없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
멀리서 실바람이 불어왔다. 본격적으로 꽃이 피려면 아직 조금 멀었는데도 어디선가 희미한 목련 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그래 본 적이 있어서 그래.”
발끝을 톡톡 차며 정인은 입을 열었다.
“너무 지치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을 일들도 괜히 무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잖아.”
정인은 피식 웃었다. 뜬금없이 봄 냄새에 취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스스로의 모습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넌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어. 하루쯤은 훈련이고 뭐고 쉬고 싶은데, 당장 하루라도 빠지면 바로 기록에 티가 나니까 그럴 수도 없고. 대회는 다가오고, 부담되고. 그러다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너무 짜증이 나서 운동 그만할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어.”
“…….”
“지금 생각하면 참 웃겨. 어차피 이런 식으로 그만두게 될 거였는데…. 그땐 왜 그렇게 쉬고만 싶었을까.”
정인이 트랙을 떠난 것은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하지만 호진에게는 아직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끝까지 후회 없는 길을 걸었으면 좋겠어.”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으면 좋겠다. 고작 여기서 이렇게 가라앉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너만큼은….”
잠깐의 권태에 지지 말라고. 이 순간을 견뎌 내라고.
말하려던 정인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 바람에 담긴 자신의 저의를 읽어 버린 탓이었다.
너만은 어떻게든 이 순간을 견뎌 내서, 원하는 곳까지 거침없이 나아가라고.
그렇게,
내가 하지 못했던 것을 대신 이루어 달라고.
“…….”
아, 어쩌면 나는 이 사람에게서 나를 보고 있었는지도 몰라.
생각한 순간이었다.
“네, 형.”
어둠 속에 서 있던 호진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나무 그늘 아래를 벗어난 호진의 콧날 위로 새하얀 불빛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할게요.”
이어지는 목소리가 거침없었다.
“소청 나가서, 금메달 가져올게요.”
***
새까만 화면을 바라보며 호진은 숨을 죽였다.
도저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매니지먼트사에 따로 부탁해 겨우 얻어 낸 자료였다. 영상은 아직 첫 프레임에 멈춰 있었다.
망설이다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경쾌한 로고와 함께 모션 그래픽이 지나갔다.
“이제 남자 초등부 800미터 결승전입니다. 총 여덟 명의 선수가 나와 있고요.”
리스트 가운데에 박힌 이름으로 눈길이 갔다. 머지않아 해설자가 선수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3번 트랙에 서울 소담 초등학교 최정인 선수입니다.”
유독 흰 얼굴이 카메라에 크게 잡혔다. 정인은 가볍게 다리를 풀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진은 재빨리 스페이스 바를 눌러 영상을 멈춰 버렸다.
“아….”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생길 수가 있을까.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힘들 만큼 예쁜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린 정인은 그냥 사람 같지가 않았다. 여름철 잘 익은 백도처럼 뽀얗고 고운 게 마치 도자기 인형 같은데,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눈도 깜빡이고 숨도 쉬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자, 정인이 긴 다리를 쭉쭉 뻗어 제 라인에 섰다.
그저 감탄뿐이었다. 앳된 티가 폴폴 풍기는 얼굴을 하고서도 숨 한 번을 허투루 쉬는 법이 없었다.
반듯한 시선으로 먼발치를 바라보던 정인의 모습은 곧 풀 숏으로 바뀌었다. 능숙하게 자세를 잡고,
“경기 출발합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선수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오버 페이스를 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첫 대회다 보니 간혹 욕심을 내는 경우가 있어요.”
“선두 그룹, 현재 서울 창아초 김지호 선수와 전북 이재영 선수가 가장 앞서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소담초 최정인 선수, 양지초 양대한 선수 따라갑니다.”
트랙을 따라 달리던 선수들이 대열을 맞춰 좁은 폭으로 붙었다. 흐흐 웃던 낯으로 영상을 바라보던 호진은 의자를 당겨 모니터에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머지않아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긴 채 선수들이 스피드를 올렸다. 그 속에서 정인은 놀라울 만큼 여유롭게 페이스를 조절하고 있었다. 주변에 휩쓸리지 않는 담대함이 돋보였다. 기술적인 부분도 또래에 비해 훨씬 뛰어났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다. 저건 국가 대표의 감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될 싹’이었다.
“양대한 선수, 이재영 선수 선두 그룹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최정인 선수도 힘을 내고 있는데요.”
내내 중간쯤에 머물러 있던 정인이 별안간 앞으로 확 치고 나왔다.
“아, 최정인 선수 선두로 들어섭니다!”
“엄청난 스퍼트예요, 이제 백 미터 남았습니다.”
해설자들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 정인은 착실하게 거리를 벌려 가고 있었다. 뒤따르는 선수들이 그에 맞춰 페이스를 올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미 정인은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까지 앞서 나간 채였다.
“자세 아주 좋습니다, 선두 유지한 채로 마지막 직선주로 진입합니다.”
“현재 선두 최정인 선수. 이제 결승선이 머지않았습니다!”
스피드는 계속해서 높아졌다. 결국 결승선에 다다르자 풀 숏으로 잡는데도 화면에 보이는 선수는 정인뿐이었다.
삼십 미터 이상의 차이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밟은 정인은 허리를 숙이며 자리에 멈춰 섰다.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관중석을 바라보며 꽃처럼 달큼하게 웃었다.
“공식 기록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 소담 초등학교 최정인 선수, 압도적인 차이로 금메달입니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겨. 어차피 이런 식으로 그만두게 될 거였는데…. 그땐 왜 그렇게 쉬고만 싶었을까.’
그렇게 말하며 쓸쓸하게 웃던 정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너는….’
다음으로 이어질 말은 끝내 듣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에 와닿는 울림으로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떨어트린 돌의 파문이 기어이 뭍에 와 부서지듯, 정인의 뜻은 고요하면서도 명확했다.
호진은 앳된 정인과 가만히 눈을 맞췄다.
“…어떻게 견뎠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저 지난 일에 불과하다며 담담하게 털고 일어서는 오늘에 닿기까지, 참 많은 감정들을 삭이고 견뎌야 했을 것이다.
“…….”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화면 속의 아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래에서 오래된 기록을 들여다보는 호진이야 모든 답을 알고 있지만, 이 시절의 아이는 아마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조금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작고 예쁜 아이가 보내야 했을 아픈 시간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하게 내려앉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저 안으로 뛰어들어 가 그대로 그 속에 살며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수고했어요, 형.”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다.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겪어 내고도 결국 저 아이는 언젠가 아름다운 스물둘의 봄을 맞는다. 세상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늘 기품있게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다.
이마저도 진짜 엔딩은 아니다. 창창하게 남은 생 앞에 선 당신은 반드시 또 다른 길을 찾아낼 것이다.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달려, 마침내 언젠가는 진정 원하는 곳에 멈춰 서서 저 날과 같이 웃을 것이다.
“…….”
호진은 곧장 핸드폰을 들었다.
“감독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그런 날들의 하루라도 내가 위로할 수 있다면, 이까짓 게 무엇이겠는가.
“지난번에 말씀해 주신 소청 수영 대회 때문에 연락드려요.”
대회의 이름을 꺼내자 전화 너머에서 감독이 반색했다. 그에 심장이 뛰고, 입 안이 말랐다.
그 안에 처음으로 마주 보는 감정 하나가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호진은 조금 더 자세히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네.”
그것의 정체는 바로 두려움이었다. 제 안에는 없다 확신하며 살아온 것들 중의 하나였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어리를 움켜쥔 채, 이대로 천천히 주저앉다가 영영 수영을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실망을 사는 일이 두려웠고, 이미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일단은 채찍부터 들이밀 스스로의 모진 말들이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 무엇도 실재하는 공포가 아니다.
재활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작 경기 결과 따위로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 와중에도 무슨 짓을 하든 반드시 유호진은 유호진의 약점을 찾아내겠으나 그것은 분명 다음번을 위함이다.
이런 식으로 제자리에 멈춰 있기를 원해 여태껏 그토록 혹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여 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최정인이 이것을 원한다.
먹구름만 잔뜩 끼어 있던 머릿속이 맑게 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호진은 입을 열었다.
“소청 출전하겠습니다.”
이제야 넓은 물 안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자, 일단 여기까지가 고전적인 트라우마의 정의입니다.”
교수가 PPT 한 장을 넘김과 동시였다. 정인의 노트 옆으로 별안간 샛노란 포스트잇 하나가 붙었다. 호진은 씩 웃고 있었다.
형ㅎㅎ 그럼 오늘 퀸즈 아일랜드 가실래요?
아무리 운동선수라도 그렇지, 학생이 수업은 안 듣고 이런 장난질이나 치다니. 혀를 끌끌 차면서도 정인은 대답을 적어 넣었다.
왜 하필 거기야 다른 데 많잖아
퀸즈 아일랜드는 정인의 막냇삼촌이 소유한 테마파크다. 어릴 적부터 딱히 별일 없이도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라 별 감흥이 없었다. 게다가 가족 단위 손님 위주의 다른 테마파크와 달리, 이쪽은 연인 관계의 젊은 사람들을 상대로 마케팅을 펼치는 편이기도 했다.
에버랜드랑 롯데월드는 어릴 때 가 봤어요 거기만 한 번도 못 가 봤는데ㅠ.ㅠ
…그래도 유호진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그 러 세 요 그 럼
더는 답장을 하지 못하도록 빈칸에 꽉 차게 글자를 적었다. 그러자 호진은 손톱만큼 남은 틈에 무언가를 끼적였다.
돌아온 포스트잇의 한편에는 ‘넵’이라고 쓰인 말풍선과 함께 작은 토끼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뭐 어쩌라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웃자 호진은 손만 뻗어 그 옆으로 다른 그림을 하나 더 그려 주었다. 이번에는 꽃잎이 여러 개 달린 꽃이었다. 반듯한 줄기를 그리고, 이파리도 몇 개 달아 놓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개똥이 물을 안 주고 왔다는 게 생각났다.
정인은 황급히 뒷장을 뒤집어 그 위에 글씨를 썼다.
어제오늘 화분에 물 안 줬어 어떡해
호진이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ㅎㅎ 앞으로 한 사나흘 더 안 주셔도 돼요
그렇게 오래?
겉흙이 다 마른 것처럼 보여도 흙 안쪽 조금 파 봐서 물기 남아 있으면 더 말려야 돼요ㅎㅎ
이상한 말이었다. 식물에게 물이란 밥 같은 게 아니던가. 당장 상담실에 있는 개똥이 친척만 해도 매일 물속에 처박힌 채로 살고 있는데.
그러다 죽으면? 물 안에 있는 건 매일 물 먹어도 괜찮던데 그냥 계속 주면 되는 거 아냐?
그건 수경 재배라는 건데요ㅜㅜ 잠시만요 새 종이에 써 드릴게요
호진은 새로운 포스트잇을 뜯어냈다. 정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특징적 증상은 크게 재경험, 회피, 인지와 기분의 부정적 변화, 그리고 과각성으로 나눌 수 있어요. 이건 다음 주 퀴즈에 나올 겁니다.”
교수의 말에 모두가 일제히 사각사각 펜을 놀렸다. 번뜩 정신을 차린 정인은 조금 전 교수가 언급한 부분에 새빨간 별을 잔뜩 치고, 호진과 필담을 나누느라 놓친 강의 자료 몇 장을 쓱 훑었다.
역시나 전부 아는 내용이었다. 애초에 트라우마 파트는 따로 공부를 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빠삭했다. EMDR이니 인지 행동 치료니 하는 것들 또한 지금 당장 개념과 원리를 설명하라 해도 준전문가 수준으로 줄줄 늘어놓을 수 있었다.
“다음 주는 Tedeschi와 Calhoun이 제시한 외상 후 성장 모델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자료는 블랙보드에 올려 두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여기저기서 인사가 터졌다. 정인은 책을 챙겨 일어났다. 그러나 호진은 아직도 포스트잇을 붙들고 있었다.
“허….”
수업이 끝났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일어나든 말든 완전히 포스트잇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눈을 빛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유호진.”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 수업 끝났어요?”
“그래.”
정인은 호진의 앞에 놓여 있던 포스트잇을 집어 들었다.
수경 재배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해 기본적인 원리와 활용법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에 빼곡히 써 내려간 글자는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가 국제 사회에서 수경 재배가 어떻게 이용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다.
“아주 논문을 쓰지, 왜.”
피식 웃으며 그것을 노트 사이에 끼워 넣었다. 호진은 머쓱한 듯 목을 만지작거리며 정인을 따라 일어났다.
“그럼 바로 갈까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며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들떠 보였다. 어지간히도 신이 난 듯했다.
“잠깐 종로 쪽 들렀다 가. 볼 일이 있어서.”
“네에.”
호진과 함께 강의실을 벗어났다. 로비를 지나쳐 입구로 나올 때까지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호진을 쳐다보았다. 그의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정인 또한 그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너 좀 떨어져서 걸어.”
“왜요?”
“사람들이 나까지 쳐다보잖아.”
그러자 호진은 시무룩하게 눈썹을 늘어뜨리며 정인으로부터 서너 걸음 물러섰다.
“이 정도면 돼요?”
“더.”
결국 호진은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졌다. 정인은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러면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언제 꺼내 썼는지, 푹 눌러쓴 모자와 얼굴을 전부 가린 마스크가 보였다.
허락을 구하듯 멀뚱멀뚱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웃겼다. 정인은 큭큭 웃어 버렸다.
“뭐야, 그게.”
“괜찮죠?”
호진은 데룩데룩 눈만 굴리며 능청스럽게 정인의 옆에 와 붙어 섰다. 정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앞을 보고 걸었다. 그래도 얼굴을 가려 놓으니 와 닿는 시선의 수가 조금 줄어드는 것 같기는 했다.
머지않아 두 사람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호진이 열어 주는 문 안으로 들어서려다가, 요즘 너무 호진의 차만 얻어 타고 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날 너만 운전하는 것 같네.”
“형도 운전할 줄 아세요?”
마지막으로 내 차를 탄 게 언제였더라, 생각하며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5년쯤 됐어.”
호주에서는 만 16세부터 러너 퍼밋learner permit을 딸 수 있다. 풀 라이선스를 가진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시간을 채우고, 최소 기한을 넘기자마자 곧바로 프로베이셔너리를 땄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발급받은 풀 라이센스를 들고 다닌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어쨌든 운전 경력으로만 치면 꽤 기간이 되는 셈이다.
“…미성년자 때부터 운전하셨구나.”
호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형 혹시…. 학생 때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셨어요?”
“담배는 안 피웠어.”
대신 너무 아프면 가끔 병원에서 의료용 마리화나를 처방받아 피우기는 했다.
“다행이다, 담배는 정말 백해무익이거든요.”
“…그래.”
그러는 사이 차는 어느샌가 복작복작 낮은 건물들로 가득한 거리에 진입했다. 정인은 주머니 속에 든 시계를 챙겼다.
“걸어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20분 정도면 될 거야.”
“저도 같이 가요.”
“어차피 너 같이 가도 밖에서 기다려야 되는 건 똑같아.”
“그래도요.”
벌써부터 또 신이 나서 마스크며 모자로 얼굴을 치덕치덕 가리고 있는 걸 보니 도저히 가만있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장은 활기로 가득했다. 카테고리 구분 없이 깔린 좌판을 흘끔대며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유동 인구가 적었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의 틈을 살피던 정인은 곧 어딘가에 멈춰 섰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네.”
호진을 세워 두고, 정인은 벽 사이를 더듬어 먼지 낀 문을 열었다. 볕 한 줌 들지 않아 어두운 골동품점의 내부에서는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났다.
“안녕하세요.”
“네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이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TV를 보며 짜장면을 먹는 중이었다. 정인은 현욱에게 받은 스마트워치를 든 채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거 한 번만 뜯어봐 주실 수 있으세요?”
그 말에 사장이 눈만 돌려 정인을 바라보았다.
“…어?”
그는 먹고 있던 짜장면을 거의 뱉어 버리다시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뚫어지게 정인을 쳐다보았다.
“원경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혹시 너 원경이 아들이니?”
“네.”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게를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원경이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은 법의 비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길 때가 있다고. 하지만 절대 그에 의존해서는 안 되니 꼭 필요할 때에만 가라고. 끝끝내 신신당부하며 그는 음지의 몇몇 루트를 알려주었다. 한국에서 병원에 갈 때마다 바꿔 쓰려고 모아 둔 가짜 신분도 실은 그런 루트를 통해 구한 거였다.
“소름 끼치게 닮았네, 원경이 잘 지내지?”
“…아마 그럴 거예요.”
“그래서 뭐 봐 주면 되는데?”
정인은 카운터 위에 시계를 올려놓았다.
“카메라 모듈이나 음성 녹음 기능이 붙어 있는지, 그리고 그걸 외부에서 제어할 수 있는지도 궁금해요.”
그는 곧바로 간단한 도구를 꺼내 들어 시계를 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탄성을 내뱉으며 정인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너무 닮았다, 야. 원경이도 한 스무 살 무렵에 딱 그렇게 생겼었는데.”
언젠가 성필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아마 넌 기억 못하겠지만 우리 구면이야.”
“…네?”
“원경이가 너 임신하고 여기 한 번 왔었거든. 뭐 좀 바꿔 갈 게 있어서.”
마침내 시계가 열렸다. 딱히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PCB 칩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사장은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부품을 하나하나 뒤집으며 말을 이었다.
“평생 웃지도 울지도 않고 돌처럼 살던 게, 자기 애 생겼다고 그렇게 좋아하는 거 보니까 어찌나 맘이 짠하던지.”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일단 카메라랑 마이크는 없어. 통신 모듈처럼 보이는 게 있긴 한데…. 소프트웨어까지 뜯어봐야 알겠지만 일단 물리적으로는 이 버튼이랑만 연결돼 있거든? 별건 아닐 거야.”
뾰족한 핀셋 끝으로 가리킨 것은, 응급 상황에 누르라던 그 버튼이었다. 의심한 것이 무색하게도 이건 그냥 평범한 스마트워치의 프로토타입인 것 같았다. 괜히 의심한 것 같아 삼촌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한번 열었으니까 이제 방수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써라. 알았지?”
대략적인 설명이 끝난 후로도 남은 부품의 이름과 용도를 하나하나 알려 준 사장은 곧 시계를 닫았다.
“저기….”
정인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좋아했어요?”
“뭐가?”
“아빠가…. 저 가진 거 좋아했다고 하셔서.”
원경이 자신을 많이 사랑한다는 건 이미 차고 넘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괜히 한 번 더 묻고 싶었다. 타인의 말로도 한 번 더 확인 받고 싶었다.
“온 세상에 너밖에 없는 것 같은 얼굴이었어.”
사장은 껄껄 웃으며 음료수 캔 하나를 닦아 내밀었다.
“원랜 그런 애가 아니었어. 욕심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특별히 야마 돌게만 안 하면 누가 뭘 시키든 뺏어 가든 네네 하면서 내놓는 순한 애였거든.”
“…….”
“그런데 나한테 왔을 땐 아니더라고. 이제 지 새끼를 지켜야 한다 이거지. 이러려고 여태까지 찍소리 한 번을 안 하고 살았나 싶을 만큼 독한 눈을 하고서는 웬일로 제 몫을 다 챙겨 가는데, 그게 참 신기하더라. 뭘 받아도 꼭 남의 몫을 크게 떼 놓지 않고서는 못 지나가던 애라서.”
정인아, 하며 웃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웃게 되기까지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다던.
“잘 낳아서 이만큼 번듯하게 키워 놨으니 이제 원경이도 할 일 다 했네. 보아하니 아직 학생인 것 같은데 공부 열심히 하고, 아빠 말 잘 듣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테니까.
“시간 나면 한번 들르라고도 좀 전해 줘. 몇 년 전에 한 번 왔다 가고는 통 소식이 없네.”
“네, 그럴게요.”
안녕히 계세요. 목 끝까지 차오른 것을 간신히 삼키고 그를 등졌다.
정인은 먼지 쌓인 골동품들을 천천히 지나쳐 입구를 향해 걸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운데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도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장식품들이 눈에 밟혔다.
거북이 모양의 장식품 멈춰 섰다. 먼지를 손끝으로 조심조심 닦아 내자 황동 조각상이 본래의 색을 드러내며 반짝였다.
“…….”
그게 마치 원경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정인의 잘못으로 인해 영영 먼지 속에 파묻히게 되어 버렸지만, 실은 단 한 순간도 변한 적이 없던. 돌아보면 늘 항상 같은 자리에 있던.
“맘에 드는 거 있으면 아무거나 가져가.”
멀리서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그럼 이거….”
“어어, 가져가.”
그는 이쪽을 보지도 않고 손만 흔들었다. 머리만 반짝이는 거북이 조각상을 손에 쥐고 가게를 나서려다가,
“감사합니다.”
아빠의 힘든 시절을 도와준 사람이 고마워서, 수표 몇 장을 꺼내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조용히 끼워 넣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벽에 기대서 있던 호진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정인의 손에 들린 거북이를 보고 씩 웃었다.
“그거 사 오신 거예요?”
“뭐…. 응.”
“먼지 많이 묻었다, 닦아 드릴게요.”
호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가져가 제 옷자락으로 슥슥 문질러 닦았다.
“됐어요.”
정인은 순식간에 새것처럼 변한 거북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고마워.”
사람 마음도 이렇게 간단히 털어 낼 수 있는 거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먼지처럼 쌓여 있을 나쁜 기억들을 닦아 낸 다음에는, 언제든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과 마주 볼 수 있는 물건 같은 거라면 참 좋겠다고.
***
평일인데도 놀이공원은 사람으로 붐볐다. 단체로 소풍을 왔는지 똑같은 모자를 쓰고 줄지어 지나가는 아이들도 보였고, 간혹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도 보였다. 그래도 대부분은 호진과 정인 또래의 커플들이었다.
호진은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정인을 흘끔거렸다. 그는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주위도 둘러보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흐.”
반듯한 걸음과 흔들리지 않는 시선이 아름다웠다. 누구든 한 번쯤 돌아볼 수밖에 없을 만큼 고운 미인이 이 많은 사람 가운데 자신과만 짝을 지어 걷고 있다는 게 벅차도록 설렜다.
“점심 안 드셔도 돼요?”
“배고파?”
정인이 하얀 햇볕에 눈을 찡그렸다.
“아뇨. 전 괜찮아요.”
사실 밥이고 뭐고 누군가 툭 건드리면 그대로 심장을 토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진이 고개를 젓자 정인은 손가락을 들어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식당가는 저쪽인데, 아직 배 안 고프댔으니까 이따가 가자. 롤러코스터 같은 거 타고 싶으면 구름다리 건너가면 되고, 그냥 어디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안 하고 꿀 빨면서 구경할 수 있는 건 저 언덕 아래에 다 있어.”
“음….”
왠지 정인은 마지막으로 언급한 곳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럼 꿀 빨면서 구경하는 거 할까요?”
“좋아.”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다. 기다렸다는 듯 돌아서는 등을 보니 웃음이 툭 터졌다.
정인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망설임 없이 한쪽을 택했다. 그러다 제대로 된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여기서부터는 얼굴 안 가리고 있어도 돼.”
마침내 정인이 멈춰 선 곳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깔로만 뒤덮여 있던 테마파크의 뒤편이었다.
펼쳐진 풍경은 조금 살벌하다 싶을 정도로 삭막했다. 귀여운 강아지 모양 간판의 눈 부분에 저런 식으로 나사가 박혀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쓰레기통마저도 조금 전에 본 것들과는 달랐고, 간판에 가려 볕도 많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꽤 넓은 길인데도 정말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호진에게는 이런 곳이 훨씬 편했다. 정인과 함께 나온 날이니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나 누군가 알아볼까 봐 내심 마음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예쁜 거 보고 싶으면 다시 돌아가도 되는데….”
정인이 말했다.
“…너는 차라리 이쪽을 더 편하게 느낄 것 같아서.”
열탕 중인 초콜릿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진은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네, 이게 훨씬 편해요.”
따로 내색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을 써 주는 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길은 어차피 하나니까 지금 못 본 건 올라가는 길에 보면 돼. 그때쯤이면 어두워서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천천히 그를 따라 걸었다. 번잡한 소음이 사라진 길옆으로는 커다란 산이 버티고 있었다. 갑갑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것을 벗으니 사방을 가득 메운 나무 향기가 느껴졌다.
“형은 여길 어떻게 이렇게 잘 아세요?”
“어릴 때 자주 왔거든. 보통은 가족들이랑 왔는데 혼자서도 종종 다녔어.”
호진은 더 이상 그의 추억에 대해 캐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저 이따금 들려오는 산새 소리를 들으며 정인과 발을 맞추며 걷는데, 손목에서 삑삑 알람이 울렸다.
“뭐야?”
“아, 오후 훈련 알람이요.”
그러자 정인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하루 스케줄이 어떻게 돼?”
“여기 보시면, 다섯 시에 첫 번째 알람이고요. 점심 먹고 이때부턴 스트레칭해요.”
작은 화면을 기울여 정인에게 보여 주었다. 기상 시간부터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 착착 정리되어 있는 일정을 훑어보던 정인은 별안간 뜨악한 표정으로 화면 한구석을 가리켰다.
“52밖에 안 돼?”
심박수가 표시되어 있는 자리였다.
“지금은 좀 움직여서…. 가만히 있을 땐 가끔 30 후반까지도 나와요.”
그 말에 정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보다 두 배는 더 살겠네.”
“네?”
“왜, 그런 얘기 있잖아. 모든 생물은 심장이 뛰는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음악 소리가 점차로 가까워졌다. 슬슬 놀이공원의 앞면으로 돌아갈 시간인 것 같았다.
그러자 한 발짝 앞서 걷는 정인의 손을 붙들고 싶어졌다. 또 한 번 어떻게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지어내서 조금 더 이대로 둘이 머물자고 부탁하면, 또 못 이기는 척 속아 넘어와 줄 것 같았다.
“그래서 심장이 빨리 뛰는 소동물들은 일찍 죽고, 코끼리는 오래 사는 거래.”
호진은 정인의 손목을 스치듯 건드렸다. 정인이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손바닥으로 감싸듯 그의 손목을 쥐었다.
“…형은 몇인데요?”
화면을 두드렸다.
“지금은 70에서 75쯤 될걸.”
말 그대로였다. 정확히 75에 멈춰 있는 숫자로부터 눈길을 들어, 호진은 정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제가 운동 더 열심히 하면 되겠네요.”
“응?”
깜빡이는 속눈썹이 너무 예뻤다. 그에 온 신경이 팔려, 호진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이 입을 열 때마다 정인의 손목 위에 적힌 숫자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훈련할 땐 150 금방 넘거든요.”
75, 76, 77.
“형은 항상 75로 계세요. 제가 150에서 조금 더 오래 있으면….”
79, 81, 83.
“그럼 비슷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84, 86, 88.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정인은 황급히 손목을 빼냈다. 못내 아쉬웠지만 싫다는 사람에게 또 손을 댈 수는 없어 얌전히 물러나야 했다.
“그냥 어디서 들은 얘기야, 의학적 근거 같은 건 없어.”
정인은 끝까지 구시렁대며 녹슨 문의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호진은 얼른 달려가 정인을 대신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손에 뭐 묻어요. 제가 열어 드릴게요.”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높은 간판에 가려 있던 볕이 쏟아지고 음악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마주한 눈동자 위로 맑게 빛이 어렸다. 서로를 바라보며 정인과 호진은 잠시 멈춰 섰다. 손목 위의 숫자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89,
57,
91,
66.
예상대로였다. 연령대가 낮은 어트랙션 위주로 돌아가는 공간은 어린이 손님으로 가득했다. 정인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그들을 바라보며 호진을 기다렸다.
“형.”
고개를 돌렸다. 구름처럼 폭신해 보이는 하늘색 솜사탕 하나가 눈앞에 버티고 있었다.
“예뻐서 샀어요. 커피랑 같이 드세요.”
솜사탕은 정인의 소울 푸드였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말릴 사람이 없는 외국에서는 아예 집에 기계를 들여놓고 하루 종일 틈만 나면 말아 먹을 정도로 좋아했다. 물론 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어 온 정훈에게 들켜 한 소리 듣고야 말았지만.
정인은 솜사탕을 한 꼬집씩 떼어 먹었다. 입에 밀어 넣기 무섭게 녹아 없어지는 것이 아쉬워 자꾸 손이 갔다. 그렇게 반 정도 떼어 먹었을 즈음,
“…….”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 호진을 돌아보았다.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그는 정자세로 앉아 뚫어지게 정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입 줘?”
너무 혼자만 먹었나. 생각하며 솜사탕을 크게 한쪽 떼어 내밀었다.
“네.”
호진이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며 느리게 허리를 숙였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는, 허공에 떠오른 정인의 손끝에 스치듯 입술을 붙이며 솜사탕을 받아먹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길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어…. 그냥요.”
그는 솜사탕을 오물오물 물며 순진무구한 눈으로 정인을 쳐다보았다.
“손으로 두 번 집으면 두 번 줄어들잖아요?”
“…….”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 네가 떼어 가든가.”
“넵.”
호진은 냉큼 솜사탕을 떼어 갔다. 소여물 먹듯 우물거리는 걸 바라보다가 그냥 막대를 통째로 넘겨주었다.
나란히 커피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인의 걸음이 향한 곳은 이 구역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놀이 기구 앞이었다.
“이게 여기서 제일 꿀이야.”
호진은 군말 없이 따라왔다. 검표원을 지나 탑승장까지 내려가자, 검게 넘실대는 물 옆으로 대여섯 팀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은근히 기구의 배차 간격이 빨라서 얼마 되지 않는 줄은 금세 줄어들었다. 마침내 도착한 보트에는 호진이 먼저 올랐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정인에게 손을 뻗었고, 정인은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고 보트에 올랐다.
머지않아 기구가 출발했다. 짧은 터널을 지나자마자 온갖 인형들로 가득한 내부 공간이 나타났다.
“예쁘네요.”
그저 10분 정도 평온하게 물길을 따라 흘러가며 예쁘게 꾸며 놓은 실내를 감상하는 게 이 놀이 기구의 목적이었다. 정인은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여긴 다 좋은데 등받이가 낮은 게 좀 아쉬워.”
“높으면 좋은 거예요?”
“기대서 볼 수 있잖아.”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한테 기대실래요?”
호진이 물었다. 황금색 개구리 인형을 구경하던 정인은 눈을 세모꼴로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냥 벽이랑 똑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저 여기 되게 단단하거든요.”
너무 아무렇지 않은 눈을 하고 있어서, 수작을 부리는 건지 그냥 바보라서 저러는 건지 좀처럼 구분할 수가 없다. 정인은 대답 대신 커피를 쪽 빨았다. 머지않아 다음 공간으로 이어지는 터널이 나타났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모든 음악 소리가 가셨다. 물방울만 똑똑 조용히 떨어지는 가운데, 정인은 괜히 커피 컵을 꽉 움켜쥐었다.
“…좋아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말로 이런 시간이 필요했나 봐요.”
덜컥, 하고 기구가 어딘가에 걸렸다. 레일이 바뀌며 멀리 터널의 끝이 보였다. 서서히 밝아 가는 풍경 속에서 정인은 호진의 얼굴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고마워요, 형.”
참 예쁜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림자 하나 없이 빛에 휩싸일 때에는, 절로 그를 따라 웃게 될 만큼.
***
커다란 광장을 경계로 어트랙션의 수위가 훌쩍 높아졌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로만 가득하던 이전 구역과 달리, 여기는 잊을 만하면 어디선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댔다.
“혹시 저런 거 좋아해?”
앞서 걷던 정인이 호진을 향해 물었다.
“아뇨.”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롤러코스터를 바라보며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정인과 함께 어딘가에 갈 명분이 필요했던 것뿐, 놀이공원이라는 장소 자체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런 기구는 몸이 약한 정인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저건?”
정인은 후룸라이드를 가리켰다. 때마침 꼭대기에 도착한 보트가돼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내리꽂혔다. 보트에 탄 사람들이 모두 찬물을 흠뻑 뒤집어쓰는 것을 목격한 호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안전사고는 난 적 없어. 이건 내가 보장해.”
“다른 건 없어요? 높은 데서 떨어지는 거 말고, 물 맞는 것도 말고요.”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본 정인은 아, 하고 어느 한편을 가리켰다.
“저건 물도 안 맞고 높은 데서 떨어지지도 않아.”
유독 시커멓게 칠해진 건물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누가 봐도 귀신의 집이었다.
줄과 가까워지자 소복 차림의 처녀 귀신이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리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활기차게 양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창산 병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레드 패스는 이쪽, 그린 패스는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돼용.”
정인은 미리 준비해 온 듯한 카드를 보여 주고는 곧바로 입구로 들어섰다.
시커먼 공간 여기저기에는 사람의 신체를 본뜬 모형과 목을 매단 귀신 인형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호진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형. 이건….”
이런 거라고 해서 몸에 좋을 리가 없다. 혹시 몰라 정인을 만류하려다가,
“와, 되게 리얼해졌다.”
소품을 톡톡 건드리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입이 딱 닫혔다.
“예전엔 진짜 시시했거든? 우리 사장님 돈 좀 썼나 봐.”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몇 번 들춰 보고, 누를 때마다 비명 소리가 나는 버튼도 자꾸만 눌러 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뒤에서 몰래 웃으며 따라가자 곧 커다란 문 하나가 나왔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귀신은 찰칵찰칵 계수기를 누르며 멘트를 읊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이 문을 열면… 돌이킬 수 없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는가….”
신입 사원인지 스스로 말하면서도 상당히 창피해하는 게 느껴졌다. 호진과 정인이 딱히 반응하지 않자 그는 손전등을 하나씩 나눠 주고는 힘없이 문을 열었다.
“마지막 기회마저 저버린 건 너희들이다…. 하. 하. 하.”
끼익, 열리는 문틈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호진은 슬그머니 정인의 손목을 쥐었다.
“뭐야?”
“잘 안 보여서요.”
뭐라 한마디 하기 전에 얼른 선수를 쳤다. 그때, 갑자기 정인의 옆에서 창문이 확 열리며 귀신이 끼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윽….”
화들짝 놀란 정인이 손을 꽉 잡아 왔다. 넘어져 다칠까 호진은 얼른 그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으세요?”
“아니, 그냥, 조금. 어, 괜찮아.”
애써 담담한 체를 하고 있긴 하지만, 마디가 질리도록 꽉 잡은 손을 놓진 않는 걸 보니 적잖이 무서운가 보다. 호진은 입술을 콱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제가 먼저 갈게요, 그럼.”
“…응.”
여러 개의 방을 지나는 동안 수많은 아르바이트생이 호진의 곁을 지나쳐 갔다. 공기의 질도 썩 좋지 않은 것 같은데 하루 종일 이 안에서 일을 하려면 참 고생이 많을 것 같았다.
어쨌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들의 노고가 무색하지 않도록, 정인은 정말 착실하게도 놀라 주었다.
“끼야아아악!”
“흐….”
다리 하나가 없는 귀신이 정인의 코앞까지 왔다가 사라졌다. 그러자 정인은 양손으로 호진의 팔뚝을 꽉 부여잡고 답싹 매달렸다. 이제 아주 자동이었다.
끝나고 이거 한 번 더 하자고 할까. 이토록 좋은 ‘놀이 기구’가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호진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이번 방은 폐건물을 테마로 꾸민 듯했다. 철근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외벽을 따라 온갖 자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호진은 정인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정인의 걸음이 멈췄다. 호진은 별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한 손으로 제 가슴을 톡톡 때리고 있는 정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 안 좋아요?”
“조금.”
정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니 숨을 쉬는 게 불편한 듯했다. 호진은 얼른 그에게로 다가섰다.
“아악!”
정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여태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형.”
그를 살피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잠깐만요.”
머리를 완전히 감싸 안은 팔이 파들파들 떨렸다. 억지로 그 팔을 잡아 올렸다.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드러난 정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얕게 숨을 쉬던 정인은 곧 제 목을 쥐어뜯었다. 끅끅 넘어가는 숨소리에 호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그쪽에 계신 분 잠시만요!”
“…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귀신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이제 정인은 숨을 들이마시지도, 내쉬지도 못하고 있었다. 호진은 곧바로 정인을 안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바로 나갈 수는 없을까요?”
발을 들여놓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새로 나타난 방에서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한없이 불쾌한 냄새가 났다.
갑갑해지는 가슴을 두드렸다. 호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인을 향해 다가섰다.
그때, 예고도 없이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헉….”
이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이러는 건가? 나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아파,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살려 주세요.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제발.
“아악!”
코앞까지 닥쳐온 죽음의 냄새에 정인은 쓰러지듯 몸을 말았다.
눈과 귀가 먹먹해지고, 사고 회로가 멈췄다. 해일처럼 일어난 공포심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모든 것이 그때와 똑같았다. 아, 흐, 윽,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숨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애썼다. 누군가 말을 거는 것도 같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흐윽…. 아, 으….”
금방이라도 온몸이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실재하지 않는 통증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 아파서 손발이 덜덜 떨렸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밝아졌다. 정인은 소스라치듯 놀라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어깨를 감싸 안은 팔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상태로 조금을 더 버티자 곧 반듯한 바닥에 등과 머리가 닿았다. 가슴 위를 조심조심 쓰다듬는 온기가 느껴졌다.
“형. 조금만 힘낼 수 있어요?”
“…아, 윽.”
“세게 숨 내뱉어 봐요, 한 번만요.”
어설프게 돌아온 의식 속으로 다정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쩔 도리 없이 정인은 그에 매달렸다. 눈을 질끈 감고, 꽉 막힌 숨통을 억지로 뚫으려 애썼다. 그러나 아예 숨을 쉬는 법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까마득하기만 했다. 점점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졌다.
“안 되겠다.”
끅끅 이상한 소리만 토해 내고 있는데, 몸이 들리며 단단한 무언가에 뺨이 닿았다. 곧 커다란 손이 정인의 등을 세게 두드렸다. 퍽, 퍽. 몇 번인가 두드리자 쿨럭 기침이 쏟아지며 숨통이 트였다. 허억, 하고 숨을 몰아쉬며 정인은 그제야 눈을 떴다. 꽉 차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고요하고 맑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아, 하아….”
“그대로 천천히. 하나 하면 들이마시고, 둘에 내쉬는 거예요.”
하나, 둘. 느리게 이어지는 소리를 따라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호진이 살짝 몸을 떼 정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제 괜찮아요?”
너무 긴장해서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호진의 품에 축 늘어져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가까운 의무실이 여기서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대요. 업힐 수 있겠어요?”
“…됐어.”
아직도 잔떨림이 등줄기를 따라 남아 있었다. 정인은 후들거리는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호진은 간단히 힘을 주어 정인을 품에 안았다. 별말 없이 살살 등을 쓸어 주는 손길에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런 데서 갑자기 플래시백이 올 줄이야.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좋은 기분으로 놀러 왔다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을 호진에게도 미안했다.
“…안 좋은 기억이, 그게.”
더듬더듬 변명처럼 토해 냈다. 그러자 잔뜩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자극받으며 불안이 올라왔다. 어쩔 수 없이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손끝이 떨려 왔다. 그래도 말을 마무리 짓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오래전 일이긴 한데, 그냥….”
그러자 호진이 조금 더 가까이 정인을 당겨 안았다.
“자꾸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 날씨 무지 좋네요.”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좀 추웠던 것 같은데, 이러다 바로 여름 되겠어요.”
일부러 화제를 돌려 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정인은 입술만 달싹이던 것을 멈추고, 호진의 어깨에 코를 묻었다.
알파의 냄새를 두고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지만, 호진에게서 풍기는 향은 그의 성정만큼이나 차분하고 온화했다.
그 향 때문인지, 아니면 내내 등을 쓸어 주는 손길 때문인지. 가만히 파묻혀 있자니 마음도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정인은 힘없이 눈만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상구와 마주 보는 벤치 위로 커다란 나무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평온하고 맑기만 한 세상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벌컥벌컥 뛰어 대던 심장의 박동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이제 괜찮아. 고마워.”
한 손으로 호진의 어깨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호진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집으로 바로 갈까요, 아니면 병원 들렀다 갈까요.”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가자고?”
“더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정 병원이 싫으면 의무실에라도 가요.”
“됐어.”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여긴 글자 그대로 막냇삼촌의 손바닥 안이다. 트라우마의 플래시백 때문에 쓰러졌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20년이 넘도록 이 자리에 서 있던 귀신의 집은 즉시 철거될 것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일의 시발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안전사고 제로를 슬로건으로 내건 테마파크의 첫 번째 오점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괜찮아. 원래 가끔 이래.”
“…….”
“정말 멀쩡하다니까?”
호진의 얼굴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정인은 한숨을 쉬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형. 하나만 물어볼게요.”
호진이 물었다.
“어두운 거, 아니면 밀폐된 공간. 둘 중에 뭐였어요?”
“…….”
“정확히 어떤 게 힘들었던 건지 알고 싶어요.”
단순한 궁금증이나 흥미로 캐물으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안에 담긴 걱정을 단박에 알아차린 정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둘 다 별로 좋아하진 않아. 그래도 항상 이정도로 과민 반응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
“정말 별일 아니었으니까 그만 일어나자.”
“…네.”
그 말에 호진은 더 묻지 않고 정인을 따라 일어섰다.
매몰될수록 더 떨쳐 내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정인은 의식적으로 밝은 생각을 하려 애썼다. 다행히도 탁 트인 광장에 나서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광장 외곽을 따라 걷다가 직원용 통로로 들어섰다. 식당가로 가는 지름길은 다른 어트랙션 건물의 지하에 있었다. 별생각 없이 건물의 문을 열자 지하를 향해 쭉 뻗은 계단이 나타났다.
“잠깐만요. 다른 길로 가요.”
호진이 정인의 손목을 잡아 왔다.
“이쪽으로 가면 5분 안에 갈 수 있는데?”
“그래도요. 밖에 예쁜 거 많잖아요.”
떼를 쓰듯 당기는 손길에 결국 문을 닫고 돌아서야 했다. 두 사람은 테마파크 안으로 돌아왔다. 예쁜 건물 아래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사이에 섞여 한들한들 걸어가던 정인은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가는 길에 저거 한 번 타고 갈래?”
터널 안에서 레이저 총으로 유령을 쏴 맞추는 실내 기종이었다.
“저것도 어디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응.”
“그럼 싫어요.”
정인은 호진을 돌아보았다. 마스크 위로 소처럼 순한 눈이 깜빡였다.
다가가 살짝 마스크를 내렸다. 아니나다를까 호진의 표정은 시무룩하게 처져 있었다. 그 모습이 나름대로 귀여워 보여, 정인은 작게 웃었다.
“정말 괜찮아.”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역시 조금 전의 일이 신경 쓰이는 것이다.
“아까는 당황해서 그랬어. 매번 그러는 거 아니래도.”
열심히 다독여 봤지만 호진의 얼굴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모처럼 만든 휴일인데 괜히 자신 때문에 기분을 망친 것 같아 너무 미안해졌다.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는데, 한 아이와 엄마가 정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엄마, 나 왕자님 칼 갖고 싶어.”
“안 돼. 지난번에 그걸로 수정이랑 장난치다가 다칠 뻔했잖아.”
“이제 안 그럴게요…. 네?”
기념품 상점의 창가에 걸린 커다란 칼 ― 애초에 판매용 상품도 아닌 듯했다 ― 을 발견한 아이는 잉잉 울며 엄마에게 떼를 썼다. 엄마가 몇 번이고 손을 잡아끌었지만, 종국에는 아예 드러눕기까지 했다.
정인은 장승처럼 우뚝 서서 고집을 피우는 호진과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몸집만 다를 뿐 사실상 하는 짓은 저 아이나 유호진이나 똑같은 것 같았다.
그럼 아마 해법도 비슷하지 않을까.
“펭귄 사 줄게.”
“…네?”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아이디어에, 정인은 다짜고짜 호진의 손목을 움켜쥐고 기념품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어린아이들 취향에 맞춰 알록달록한 물건으로만 가득한 매대를 지나치자 동물 인형만 모아 놓은 공간이 나타났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가장 인기가 많은 펭귄을 사 주려다가,
“얘 너랑 똑같이 생겼다.”
바로 옆에 있는 하늘색 돌고래를 집어 들고는 호진의 얼굴 옆으로 가져다 대 보았다.
“…형.”
“가만히 있어 봐.”
폭신한 인형을 뭉개듯 그의 뺨 옆에 꾹 눌러 붙였다. 동그랗고 까만 눈이 정말 많이 닮아 있었다.
“이거 사 줄게.”
이제 보니 개를 닮은 게 아니라 물고기를 닮았네.
저와 똑같이 생긴 인형에 짓눌리는 볼을 보니 왠지 웃겼다. 정인은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기분 풀어, 호진아.”
호진아, 호진아, 호진아.
“뭐 해?”
“어으?”
묻는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넋을 놓고 있던 호진은 멍청한 소리를 내며 정인을 쳐다보았다. 정인은 턱짓으로 호진의 앞에 놓인 파스타 접시를 가리켰다.
“별로야?”
“아뇨, 맛있어요.”
얼른 접시에 고개를 처박았다. 사실은 호진아 하고 불러 주던 그때부터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려서, 이제는 음식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조차 모르겠다.
“…….”
호진이라고 불렀다.
야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유호진도 아니고, 자그마치 ‘호진이’였다.
평생 별생각 없이 듣고 써 온 이름인데 정인이 불러 주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이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파스타를 전부 해치운 호진은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 배불러요.”
“…그래야지.”
고르곤졸라 씬피자 한 판, 크림파스타, 치킨윙 열 조각, 닭고기수프 두 그릇, 새우를 곁들인 로제리조또와 무화과케이크. 보통의 성인 둘이 먹기엔 조금 많은 양의 음식이었지만, 하루에 만 칼로리 이상을 섭취해야 하는 호진에게는 조금 모자라다 싶게 적당한 한 끼였다.
“이건 정말 제가 살게요.”
행여나 이번에도 정인이 음식값을 계산하겠다고 할까 봐, 호진은 거의 뛰어가다시피 카운터로 가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이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이걸로 해 주세요.”
어느샌가 다가온 정인이 손목에 찬 팔찌를 내밀었다. 아르바이트생은 그제야 바코드 스캐너를 집어 들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계산이 완료됐다. 솜사탕 같은 간식거리와 달리 매장에서는 카드로 결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형….”
정인이 사 준 돌고래 인형을 꽉 끌어안은 채 호진은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러자 정인이 픽 웃었다.
“이런 데서 너한테 얻어먹으면 찝찝해서 밤에 잠도 안 올걸.”
이때다 싶어진 호진은 상처받은 척 입을 떡 벌리고 일부러 그의 말을 조금 과장했다.
“제가 형한테 밥 사 드리는 게…. 찝찝할 정도로 싫으세요?”
이러면 미안해서라도 좀 더 다정한 말을 해 줄 사람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역시나 말랑말랑한 정인은 곧바로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누구랑 오든 여기선 항상 내가 사. 원래 그랬어.”
“아….”
정인을 놀려 먹는 동안 조금 들떠 있던 마음이 그 말에 착 가라앉았다.
이 테마파크는 연인들을 주 고객층으로 타겟팅한 곳이다. 여러 개의 테마파크 중 굳이 여길 고른 이유도 실은 그거였다. 하지만 정인이 다른 사람과도 여기에 와 봤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당연하게도 질투가 났다.
“효진 씨랑도 자주 오셨어요?”
“뭐…. 걔랑은 셀 수도 없이 왔지.”
“그분이랑은 뭐 하셨는데요.”
듣고 싶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속들이 알고 싶었다. 정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남자 둘이 이런 데서 할 게 뭐 있어, 그냥 밥 먹고 롤러코스터 타고 사람들 구경하다가 집에 가는 거지.”
“남자요? 효진이면…. 여자분 이름 아니에요?”
그 말에 정인은 아, 하며 멈춰 섰다.
“효진이 아니고 효준인데.”
“네?”
“이름 잘못 안 거 알고는 있었는데, 어차피 너랑 아는 사이 아닐 것 같아서 그냥 그러려니 했어. 하여튼 효준이야.”
차라리 묻지 말 걸 그랬다. 정인을 만나는 사람이 저와 똑같은 남자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기분이 손쓸 수 없이 가라앉았다. 그래도 정인에게 치졸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호진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꾸며 냈다.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요.”
“우리 학교 다녀. 경제학과 조효준 모르지?”
경제학과 조효준.
호진은 우뚝 멈춰 섰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
해가 넘어가며 전구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워낙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보니 정인은 요일별로 몇 시쯤 어느 기구에 줄이 얼마나 붙는지까지 대충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게 족히 칠팔 년 전의 일이니 아직도 그 시간대가 유효할 거란 보장은 없지만, 불꽃놀이가 시작될 즈음 가장 멋진 야경을 보려면 슬슬 관람차 쪽으로 넘어가야 한다.
“…혹시 그분, 세영 금융 그룹 장남이라는 분이에요?”
안전 바가 내려오자마자 호진이 물었다. 그가 효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정인은 둥그렇게 눈을 뜨고 되물었다.
“너 걔랑 아는 사이였어?”
“경제학과에 친구가 있는데…. 이번에 개강하고 한번 같이 인사한 적이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연이 닿을 수가 있구나. 역시 몇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 된다는 지구촌답다.
“그분….”
삐걱삐걱 흔들리는 케이블카 위로 호진의 목소리가 짧게 울렸다.
“언제부터 만나신 거예요?”
“저번에 말했잖아. 한글 떼기 전부터 알았다니까?”
“그런 거 말고요.”
왠지 말투가 축 처져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돌고래 인형을 터트릴 듯 꽉 움켜쥔 손등이 보였다.
“…사귀기로 한 게 언제였냐고요.”
“뭐?!”
정인은 저도 모르게 빽 소리쳤다.
“미쳤어? 어디 그런 저질스러운 소릴…. 아니, 야. 왜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돼?”
하도 어릴 적부터 이걸로 놀림을 받아서 그런지 이제 정말 비슷한 말만 들어도 진심으로 화딱지가 난다. 정인은 우다다 쏘아붙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만 알면 되는 사이야. 사는 내내 서로한테 관심이라곤 좆도 없었고,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야. 도대체 왜 다들 그렇게 못 붙여서 안달이야? 뭐 씨발 혼맥 맡겨 놨어?”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라고!”
끝 음이 메아리처럼 울려 되돌아왔다. 제법 멀리 떨어진 앞차의 손님이 이쪽을 흘끔 돌아보는 것을 느끼며 정인은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럼 그분은요?”
“또 누구.”
너무 화가 나서 채신머리없게 군 게 갑자기 민망해졌다. 정인은 빠르게 숨을 몰아쉬며 안정을 찾았다.
“친한 알파 한 분 더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분이랑 사귀시는 거예요?”
“나랑 사귀면 불륜이야. 애가 셋인데 무슨.”
베스를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인을 만날 때쯤 둘째를 출산해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다. 정인은 한숨을 쉬었다.
“너도 젊은 애가 벌써부터 그렇게 편견에 휩싸여 살면 안 돼. 알파랑 오메가가 붙어 있으면 무조건 사귀는 거야? 적당히 선 지키는 건강한 관계는 없는 거냐고.”
“…그런 건 아니지만요.”
물론 보통의 이형질 보유자라면 신체적 특성상 히트 사이클이 올 때마다 서로 민망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페로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정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몸이 좀 좋지 않다 싶으면 어디 숨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아아악!”
호진이 문득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정인은 그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무슨…. 뭔데.”
“시원해서요. 그냥 기분이 너무 좋네요.”
호진이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폐활량이 어찌나 좋은지 한참을 뱉었는데도 끝나질 않았다. 기어이 마지막 한 줌의 공기까지 전부 토해 낸 호진은 번쩍이는 눈을 들어 정인을 마주 보았다.
“그럼 애인처럼 만나는 사람은 없는 거죠?”
“어.”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케이블카는 정상에 도착했다. 가볍게 땅에 내려서는 호진을 확인하고, 어둠이 깔린 길을 따라 걸었다.
“호진아.”
“네.”
딱히 뭘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벌써 하루가 저물었다.
모처럼 뺀 휴일이 어땠는지, 대회에는 나갈 수 있을 것 같은지.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
반짝이는 조명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꼭 지금 물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며 정인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수영은 어떻게 시작했어?”
“음, 원랜 그냥 바다 놀러 가려고 배우기 시작한 거예요.”
나무에 걸린 앵두 전구 한 알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호진이 말했다. 다른 전구들에 비해 유독 빛이 희미한 녀석이었다. 호진의 손이 닿을 때마다 전구는 빛을 잃었다가 도로 밝아지길 반복했다.
“하다 보니 재미있어서 취미로 수영부에 들었는데….”
호진은 이내 완전히 전구를 향해 돌아섰다. 소켓이 있는 부분을 살피나 싶더니, 손끝으로 조금 힘주어 연결 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맥없이 깜빡이던 전구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아픈 불빛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고쳐 놓은 호진의 눈동자에도 이윽고 따스한 광채가 어른거렸다.
“그 당시 코치님이 수영 제대로 하면 잘할 것 같다고 삼한 장학 재단 인재 개발 프로그램에 추천서를 넣어 주셨거든요.”
“…삼한 장학 재단?”
뜻밖의 이야기였다. 삼한 장학 재단은 정인이 두 살쯤 됐을 무렵, 조부가 어린아이와 청소년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곳이었다.
“운 좋게 그게 됐어요. 처음에는 그래도 공주에서 중학교까진 다닐 예정이었는데, 도 대회에서 메달 하나 더 따니까 그쪽 담당자분이 서울로 부르시더라고요. 그래서 세계 선수권 메달 따기 전까지는 쭉 삼한…. 지금은 TH 그룹이죠? 그쪽에서 지원 많이 받았어요.”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재단을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늘 정인을 무릎에 앉혀 놓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에게 내가 예쁘고 귀한 아이인 만큼, 지나가는 저 아이도 누군가에겐 그토록 소중한 존재임이 틀림없을 거라고. 그러니 정인이 너도 훗날 어른이 되면 꼭 어린아이들을 가장 먼저 살피라고.
끊임없이 사랑을 부어 주다 보면, 언젠가 분명 온 세상을 빛낼 보석 같은 아이를 만나게 될 거라고.
“…그랬구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말했던 그 보석이 바로 정인의 눈앞에 서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쯤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겠죠?”
아마 아닐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도 기어이 누군가의 눈에 띌 만큼 반짝이고 있었으니, 세상은 어떻게든 그 빛에 홀려 너를 찾아냈을 것이다.
“어땠을 것 같아?”
정인은 스스로 내린 답을 감추고 호진에게 물음을 던졌다.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
한참 전구를 바라보고 있던 호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바람 속에서 손을 뻗었다.
“아뇨.”
길고 흰 손가락이 귓가를 스쳤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정인의 머리카락 끝에 걸려 있던 풀씨를 거둬 낸 호진은 싱그럽게 웃었다.
“어떤 삶을 살았대도….”
정인은 돌이 되어 굳어 버리기라도 한 듯 그를 마주 보았다.
“지금만큼 행복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영영 이 자리에 못 박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아, 불쑥 가슴이 답답해졌다.
밤이 점차로 깊어 가고 있었다. 호진은 고아한 빛으로 반짝이는 정인의 눈동자에 푹 빠져 버렸다.
어쩌면 이렇게 매 순간 놀랍도록 아름다운지, 이쯤 했으면 세상에 더한 건 없을 것 같은데도 또 돌아보면 새로이 예쁜 구석이 보인다.
둥글게 휜 눈과 뾰족한 코끝을 따라 내려간 시선은 곧 미소 띤 정인의 입가에 머물렀다. 한쪽 입꼬리에만 작게 보조개가 파여 있었다.
“…….”
웃으면 저런 게 생기는구나.
늘 완벽한 정인의 미숙한 부분을 발견한 것 같아, 그것마저도 참 좋았다.
“가자.”
정인은 매몰차게 등을 돌렸고, 호진은 돌고래 인형을 소중히 옆구리에 낀 채 얼른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흐흐 웃던 것도 잠시였다. 몇 발짝을 가다 말고 멈춰 선 정인이 한 손으로 제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왜요, 어디 불편해요?”
호진은 얼른 달려가 정인의 어깨를 붙들었다. 낮에도 이러다가 갑자기 호흡 곤란으로 고생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그러나 정인은 곧바로 호진의 손을 쳐 냈다.
“아냐, 그런 거.”
아니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얼굴이 붉었다. 호진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빈 벤치가 조금 있었다.
“쉬었다 가요.”
“신경 쓰지 말라니까.”
일부러 쌀쌀맞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제 호진에게는 조금의 딜도 들어오지 않았다. 설령 정인이 느닷없이 쌍욕을 한 바가지 쏟아 낸다 해도 다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바로 가야 안 늦어.”
“어디 가는데요. 저 이제 진짜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정말 이 정도면 충분했다. 차고 넘치다 못해, 여기까지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만큼 행복했다. 그러나 정인은 꿋꿋하게 걸음을 뗐다.
“이거 보고 나면 생각 달라질 거야. 잔말 말고 따라와.”
곧 작은 관람차 하나가 나타났다.
“이거예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훨씬 크고 번쩍이는 대관람차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이 작은 관람차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줄이랄 것도 딱히 없어서, 일이 분 남짓을 기다리자 금세 차례가 돌아왔다. 호진은 정인을 먼저 들여보내 주고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미친…. 이게 이렇게 낡았었나?”
차내로 들어서자마자 정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호진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차가 삐걱삐걱 흔들리며 호진이 앉아 있는 쪽으로 기울었다.
“뭐야, 왜 이래 이거.”
“제가 더 무거워서 그런가 봐요.”
대충 눈대중으로만 봐도 15센티 가까이 키 차이가 나고, 몸무게도 호진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간다. 물리의 법칙인지라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리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비어 있는 정인의 옆자리를 향해 두 다리를 뻗었다. 그러자 정말로 수평이 조금 맞아 들었다.
“…이게 되네.”
“그러게요.”
아주 느린 속도로 땅이 멀어져 갔다. 끼익, 끼익. 쇠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으며, 호진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지상을 가득 메운 놀이공원의 조명으로부터 벗어나자 사위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
좁은 차 안은 오직 차분한 숨소리로만 가득했다. 창 너머를 내다보는 정인의 옆선을 훔쳐보는데, 왠지 모를 긴장감에 목울대가 울렸다. 그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심장까지 쿵쿵 뛰었다.
애매한 빛과 어둠의 경계 속. 창틀에 턱을 괸 채 정인이 말했다.
“예쁘지.”
“네.”
오직 정인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다시 침묵이었다.
“…….”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거리를 좁혀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
키스하면, 싫어할까.
빛이 점점 멀어졌다. 정인은 흘끔 눈을 돌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정각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30초. 파크 내의 모든 불이 꺼지고, 낙진 지역에 가이드라인을 친 스탭들이 처마 아래로 사라졌다. 가이드라인 바깥에 빙 둘러선 사람들은 동쪽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의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장담하는데.”
아직은 까맣기만 한 하늘을 뒤로, 정인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예쁠걸?”
“뭐가요?”
그때였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불꽃이 튀었다.
“아….”
새하얀 꼬리를 남기며 수직으로 솟구친 불꽃이 사그라지기 무섭게, 양 옆으로 붉은 빛이 번졌다. 관람차는 가장 화려한 시간에 정상에 서기 위해 착실히 고도를 높여 가고 있었다.
펑, 펑. 몇 번이고 터지는 파열음이 경쾌하게 창가를 때렸다. 기억 속의 것보다 많이 낡고 바랜 기물은 커다란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잘게 진동했다. 그래도 그게 나름대로 낭만적이었다.
새로 올렸다는 대관람차에서도 똑같은 풍경이 보일지 궁금해졌다. 우선 확실히 타이밍을 아는 게 이것이니 이번에는 이쪽으로 왔지만, 다음번에는 그걸 타 봐도 좋을 것 같았다.
“…헉.”
무의식중에 다음을 생각한 정인은 되레 놀라 작게 숨을 삼켰다. 온갖 색깔의 불꽃들이 딱 눈높이에서 터지고 있었다.
곧 정상에 다다를 테고, 가장 아름다운 불꽃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결코 질리는 법이 없던 풍경을 상상하자 가슴이 콩콩 뛰었다. 마치 손끝에도, 발끝에도 심장이 달린 것 같았다.
괜히 손을 꼭 움켜쥐며 정인은 관람차의 티핑 포인트를 살폈다. 몇 미터 남짓을 남겨 둔 채 끼릭끼릭 일정한 속도로 올라가던 차가 살짝 멈춰 섰다.
“형, 이거….”
“응?”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거의 동시였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수천 개의 불꽃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새하얗게 밝혀진 세상 속으로 담담한 눈동자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까만 밤하늘에는 별똥별 같은 불빛들이 은하수를 그리듯 쏟아지고 있었다.
“…….”
제아무리 다음이 있대도 오늘의 불꽃은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정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불꽃이 아니라 호진의 눈동자였다.
펑 하고 튀어 오르는 불빛의 색이 그대로 호진의 뺨에 묻어났다. 정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또한 불꽃은 뒤로하고 정인만 쳐다보고 있었다.
정인은 문득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어차피 아무도 볼 수 없는 곳, 그 어떤 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곳인데.
조금 더 움직여 가까이 다가가면. 그 손을 잡고, 천천히 허리를 숙여서.
“…….”
키스하면, 싫어할까.
“…….”
아무래도 맛이 간 것 같았다. 자꾸 이상한 일에 휘말리다 보니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진과 키스하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왠지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정인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그저 받아 줄 것 같았다.
커다란 손으로 목을 감싸 안고 아주 조심스럽게 입술을 붙여 올 것 같았다. 살살 등을 쓸어 주며 무해한 얼굴로 웃기만 할 것 같았다.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그렇네요.”
묵묵히 이쪽을 보고만 있던 호진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불경한 상상을 하고 있던 정인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완전히 절정을 향해 치달은 불꽃이 발작하듯 온 세상을 밝히는 가운데, 다정한 목소리가 가슴 한가운데 날아와 박혔다.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티핑 포인트를 지난 관람차는 바닥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발의 불꽃이 기다랗게 어둠 속을 가르고 있었다.
“너무 예쁘고….”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정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시야가 온통 검었다. 무릎이 있을 법한 자리를 내려다보며 호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무 좋아요.”
마지막 불꽃이 터졌다. 가슴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정인은 그만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
“오늘 감사해요. 정말 재밌었어요.”
복도에 점점이 흩뿌려진 페인트 얼룩을 따라 고개를 들자, 제 방문을 붙든 채 서 있는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정인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뛰어들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끼익, 탕. 호진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아무 생각 하지 말자, 아무 생각 하지 말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둥글게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캄캄한 시야 속으로 불꽃이 보였다. 반짝반짝 아름다운 빛을 내던 것들과, 그를 배경으로 하얗게 웃던 호진의 얼굴이….
“아, 진짜 미쳤냐고!”
이유도 없이 불쑥 성질이 나서 이불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씩씩대며 몇 번인가 그것을 발로 밟았다. 그러나 분은 풀리지 않고 괜히 발만 아팠다. 애꿎은 이불에 대고 성질을 부린 벌이었다.
정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이불을 주워 들고, 그 안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폭신한 이불에 파묻힌 다음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직까지도 바쁘게 가슴이 뛰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시간에 잠들기는 글렀다. 호진의 방이 있는 쪽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거북이를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나도 재밌었어.”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그제야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