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숨은 시다 1권
Chapter 1.
Please allow me to be your hidden servant (1)
깨끗한 운동화. 선명한 햇살. 정제되지 않은 설렘과 미숙하고 여린 잎.
개강을 맞이한 캠퍼스는 딱 3월다운 모습이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새내기들은 걸음부터가 잔뜩 들떴고, 이미 몇 번이고 3월을 지나 본 헌내기들의 얼굴에는 안정감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개강일이면 매년 똑같이 펼쳐지는 풍경이었다.
“잠시만 지나가겠습니다.”
“밀지 마세요!”
물론 정문 앞의 소란도 마찬가지였다. 유명인이 등교했다는 소문이 돌면 으레 그렇듯 올해도 입구는 아침부터 인파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CBS 정윤주 기자입니다. 유호진 선수, 컨디션은 어떤가요?”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까맣게 넘실대는 기계들 사이로 질문 공세가 쏟아지고 플래시가 터졌다. 지나치던 학생들마저 하나둘 가세하자 인파는 순식간에 불어나 차도까지 흘러 넘쳤다. 유호진이 들어선 지로부터 고작 10여 분 만에 펼쳐진 난장판이었다.
“학기 중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수강하는 과목은요? 대략적으로라도요.”
대한민국 국가 대표 수영 선수. 개천의 하늘에 샛별처럼 등장해 기어이 열아홉에 올림픽 금메달까지 거머쥔 노력형 천재.
온 세상이 주목하는 스포츠 스타 유호진의 ‘첫 등교’는 이미 작년 봄의 일이었다. 그러나 올해도 기자들은 그에게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준 지난 시즌의 부상 때문이었다.
“오늘은 아마 대부분 오리엔테이션일 것 같아요. 그 후에는 평소처럼 간단한 훈련을 할 예정이고요.”
호진이 입을 열 때마다 기자들은 마치 생사가 달린 일처럼 그의 일과를 받아 적었다.
“장소는요?”
“혼자 체육관을 쓰시는 건가요?”
이후로 얼마간은 별것 아닌 이야기가 이어졌다. 곧 매니저가 호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께 가방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뻔쩍 치켜들었다.
“잠시만요. 이번 시즌 대회 출전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얼음판 한가운데에 던져진 바윗돌 같은 물음이었다.
복작거리던 움직임들이 얼어붙고, 모두의 시선은 조금 전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쏠렸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던 호진을 멈춰 세울 수 있던 건, 오늘만큼은 부상이나 향후 일정에 관해 묻지 않겠다고 모두가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몇몇 기자들이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이제 막 등교한 선수를 굳이 지금 들쑤셔야겠느냐며, 진작 약속한 일인데 도의적으로 이건 좀 아니지 않냐며.
그럼에도 기자는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경 일보 김주호 기자입니다. 지난 광주에서의 사고 이후 딱히 입장 발표가 없었는데요,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다음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컨디션이긴 한가요?”
적나라한 물음이었다. 호진은 대답 대신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그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더는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사인을 보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물꼬를 틀어막을 도리는 없었다. 결국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다른 기자들까지 하나둘 입을 열었다.
“…아직 회복 중인가요?”
“재활 프로그램이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후로는 뭘 했나요?”
“식단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직 신감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나요?”
“외과 진료는 계속 받는 겁니까?”
이미 김주호 기자의 질문에 대답을 회피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사 제목 열 개쯤은 즉석에서 뽑아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노련한 기자들은 기레기 소리를 듣지 않을 범위 내의 질문만 교묘하게 골라 던졌다.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려도 실은 어떻게 대답하든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호진은 난처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건….”
그때, 멀리서 끼익 타이어 마찰음이 울렸다. 호진을 에워싸고 있던 모든 이들의 고개가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정문 앞을 가로지르는 6차선 도로. 좌회전 신호 끝물에 드리프트를 하듯 쏜살같이 튀어나온 중형 세단 한 대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정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흘러나온 인파를 감지하기에 충분한 거리에 진입했음에도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빠르게 접근하는 모습에, 놀란 사람들이 재빨리 인도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커다란 장비를 미처 챙기지 못한 기자 몇몇은 여전히 차도 위에 남아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무조건 충돌이다. 결국 장비를 남겨 둔 채 사람이 먼저 대피했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다가온 세단은 머지않아 거친 소음과 함께 멈춰 섰다. 알루미늄 카메라 박스로부터 고작 2미터를 앞둔 지점이었다.
미친놈인가. 누가 운전을 저따위로 해. 웅성대는 틈으로 겨우 인도에 올라선 기자 하나가 차주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니, 이런 미친…. 이봐요!”
틴팅이 짙은 창문이 살짝 내려갔다. 운전자의 얼굴을 식별하기엔 턱없이 좁은 틈으로, 별안간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튀어나와 도로에 있는 카메라 박스를 치우라는 듯 까딱였다. 기자는 성큼성큼 다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이보세요. 사람 있는 거 못 봤어요? 누가 학교에서 운전을 그렇게 험하게 합니까?”
그러자 까딱이던 손가락이 차창 너머로 사라졌다.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은가 본데….”
그때였다. 사라졌던 손이 도로 나타나 기자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엉겁결에 백만 원짜리 수표 열두 장을 받아 든 기자는 벙찐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교수야? 저건 뭔데?”
“몰라, 잘 안 보여. 무슨 종이 같은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그렇게 10초쯤 흘렀을까. 말없이 굳은 기자의 옆에 서 있던 차가 비상등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반대 차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끄러지듯 역주행하다 원래 차선으로 돌아간 차체는 머지않아 코너 너머로 사라졌고, 흥미를 잃은 사람들은 호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
그러나 호진이 서 있어야 할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럼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건강 상태에 관한 질문은 회사로 보내 주시고요.”
모두가 미친 차에 정신이 팔린 사이 퇴로를 확보한 매니저가 말했다. 그 곁으로는 학교 측의 요청으로 이제 막 도착한 보안 요원들이 서 있었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기자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처음 질문을 던진 기자도, 조금 전 차에 치일 뻔한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호진과 보안 요원들은 교문 안쪽을 향해 돌아섰다. 구름 떼처럼 몰려 있던 인파도 뿔뿔이 흩어졌다.
“근데 유호진 진짜 잘생겼다.”
“그러게, 실물이 훨씬 낫네.”
비일상적인 광경에 괜스레 들떠 있던 학생들 몇몇만이 끝까지 남아 수군대고 있었다. 물론 그 또한 금세 사그라졌다. 숱한 것들이 소리도 없이 피고 지는 새봄다운 풍경이었다.
***
한국의 3월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쌀쌀했다. 얇은 스웨터 사이로 스미는 찬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며 정인은 차 문을 닫았다.
공항에 내린 것은 한창 추운 1월이었으니 매서운 칼바람도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3월쯤이면 응당 날씨가 풀려야 하는 게 아니던가.
“네, 삼촌. 지금 막 도착해서 주차했어요.”
품 한가득 들어찬 새 책을 추슬렀다. 고작 서너 권밖에 되지 않는데도 한 팔로만 들고 가기엔 버거워 슬슬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전화 너머의 상대는 아직 정인에게 할 말이 많이 남은 듯했다.
그 대단한 TH 그룹의 최현욱 회장도 하나뿐인 조카에게만큼은 뙤약볕 아래의 눈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제 그는 한술 더 떠 아직 임시 번호판도 떼지 않은 차를 새것으로 바꿔 주겠다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아뇨, 정말 안 해 주셔도 돼요. 여기 운전하기 많이 나쁜데 더 크면 좀 불편할 것 같아서…. 근처에 집을 새로 구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지어진 지가 100년도 더 넘었다는 학교 주변의 도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크게 닦아 놓은 정문 앞의 큰길마저도 사람과 차가 뒤섞여 지옥 같고, 내비게이션 위에 떠오른 골목골목의 모양새 또한 가관이었다. 아무리 봐도 자가용을 끌고 다니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현욱이 권하는 대형차라면 더더욱.
“정말 괜찮아요.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정인이 딱 잘라 거절하자 그의 목소리는 곧 사그라졌다. 하지만 이내 다른 잔소리가 시작됐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족히 열 번은 더 들은 것 같은 말이었다.
- 집에도 꼭 전화해야 한다, 정인아.
“…알았어요.”
- 말로만 알겠다고 하지 말고.
대충 넘기려던 심산이었음을 금세 알아봤다는 듯 현욱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 효준이 옆에 잘 붙어 있고, 조금이라도 몸 안 좋으면 원장님께 가고, 귀찮다고 가방 없이 다니지 말고, 용돈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공교롭게도 줄줄 흘러나오는 이야기 중의 단 하나도 제대로 지키고 있지 않았다.
이런 데서까지 굳이 조효준을 찾아내고 싶지도 않았고, 아침부터 약간 열이 오르는 것 같긴 했지만 너무 자주 있는 일인지라 대충 넘겼다. 물론 가방 따위를 들고 다니며 여닫는 건 상상만으로도 귀찮아 애초에 고려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조금 전에는 차도에 튀어나와 있던 주제에 당당하기까지 하던 미친놈에게 지갑에 있던 걸 죄다 던져 주고 오기까지 했다.
“…….”
혹시 사람을 붙인 건 아닌가 싶어진 정인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그늘 아래 주차된 자동차 몇 대와 멀찌감치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 트렁크에 있을 테니까 우산도 꼭 챙겨.
“우산이요?”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솜구름 사이로 무서우리만치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 오늘 비 온다고 했어. 괜히 비 맞아서 감기….
“네. 그런데 삼촌, 저 이제 수업 들어가 봐야 돼서. 조효준도 저기 왔어요. 다시 전화할게요.”
- 정인아.
“사랑해요, 안녕.”
얼른 전화를 끊어 버렸다. 끝까지 걱정뿐이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쓸쓸할 만큼 평화로운 적막이었다. 그 사이에 서서 정인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시린 공기 곳곳에 싱그러운 꽃향기가 옅게 배어 있었다.
이 날씨에 뜬금없이 꽃향기라니. 아마도 다른 알파나 오메가가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컵홀더에 꽂힌 약병을 꺼냈다. 통증이 심할 때가 아니면 웬만해선 약 없이 버티라던 의사의 말이 떠올라 망설여졌지만, 나름대로 큰맘 먹고 학교라는 델 다니기로 했는데 첫날부터 남들의 냄새에 휩쓸려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생각하며 물도 없이 억제제 한 알을 삼켰다. 그러고는 저만치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오늘도, 내가 아무도 모를 수 있게.
그리고 아무도 나를 모르게 해 주세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 곳곳에서 새것 특유의 서늘함이 풍겼다. 지나치는 사람들과 닿지 않기 위해 최대한 벽에 붙어 걸으며 정인은 핸드폰 속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재무 관리, TH관 307호.
입구에 들어서면서 건물의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했고, 준공 기념비에 붙어 있는 삼촌의 이름도 보았으니 이건 분명 그가 올렸다는 그 건물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3층에 307호 따위는 없었다. 몇 번이나 계단 입구로 돌아가 살폈지만 304호 다음은 310호였다. 대체 무슨 건물이 이따위란 말인가. 투덜대며 걸음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개떡이 어디야?
기저귀 사용자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효준의 전화였다. 정인은 진 빠진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 보고 싶어서 그러지.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마, 그리고 어제 봤잖아.”
겨우 12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니 실은 어제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자정이 넘도록 함께 게임을 하다가 별안간 애인을 만나러 간다길래 보내고 나중에 돌아보니 방 한구석에는 효준이 까먹고 그대로 내버려 둔 귤껍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야, 너 어제 내 방에 귤껍질 버리고 튀었지.”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르며 갑자기 열이 확 뻗쳤다.
“그러게 그딴 거 사 오지 말라고 했잖아. 처먹는 새끼 따로 있고 치우는 새끼 따로 있어?”
정인이 쏘아붙이자 전화 너머의 효준은 낄낄 웃었다. 어쩐지 그 괘씸한 목소리가 가까운 것 같다고 생각한 찰나였다.
“에이, 미안해.”
능글맞게 어깨를 감싸 오는 손에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효준이 보였다.
“여기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냐니, 네 시간표 짜 준 게 난데. 내가 너 백 퍼 3층에서 얼타고 있을 줄 알았다.”
그는 정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까지 다 안다는 듯 씩 웃었다.
수강 신청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 정인을 살살 꼬드겨 제멋대로 시간표를 짜 놓고는 동네방네 생색을 내서 기어이 정인의 고모에게 명품 클러치까지 뜯어낸 인간이다. 정인은 혀를 끌끌 차며 그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은 효준은 흠, 하며 한 발짝 물러서 정인의 행색을 훑었다.
“얘가 아직 뭘 모르네. 너 진짜 남들 눈에 띄기 싫으면 여기서 이러고, 이러고, 이러고 다니면 안 돼.”
‘이러고’라는 말을 한 번 할 때마다 신발과 옷을 한 번씩 가리킨 손가락은 마지막으로 정인의 손목에 닿았다. 이어 효준은 세상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정인의 손목을, 정확히 말하자면 그 위에 감긴 시계를 쥐고 살폈다.
“아버님들 취향은 아닌데…. 이거 회장님 선물이지?”
“…….”
“시계 좋아하는 애들은 금방 알아봐. 이 정도 급까지 넘어가면 진품이어도 가품이어도 뒷말 나오니까 웬만하면 내일부터는 다른 걸로 하고 다녀.”
그 말에 정인은 효준의 손목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는 너는?”
이미 코트며 구두며 가방까지 온몸을 싹 명품으로 휘감은 효준의 손목 위에는 100미터 전방에서도 눈에 띌 것 같은 다이아몬드 워치가 번쩍이고 있었다. 정인이 지적하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야 애저녁에 얼굴 다 팔렸으니까 상관없지만 넌 아니잖아?”
“하….”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조용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정인과 달리, 인생의 모토 자체가 ‘좋은 게 좋은 거다’인 효준은 어릴 적부터 타인의 시선을 받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본인이 세영 금융 그룹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를 이용해 제 취향의 미인들과 붙어먹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너랑 안 다닌다. 수고해라.”
얼굴이 팔렸다는 말에 잠시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본 정인은 미련 없이 효준을 등졌다. 그리고 효준은 본격적으로 치대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너 잘 챙겨 주라고 하셨단 말야. 앞으로 혼자 다니든 떼로 다니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일단 나랑 사진 한 번만 찍자.”
틈만 나면 피트니스 센터에 붙어 사는 인간을 정인의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얼굴을 딱 맞댄 채로 사진을 찍고야 말았다.
“근데 정인아.”
찍은 사진을 곧장 어딘가에 전송한 효준은 슬쩍 눈을 들었다. 한쪽 팔은 여전히 정인의 어깨 위에 올린 채였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정인은 꺼림칙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 시계 말야. 어차피 못 하고 다닐 거면 나 주는 게 합리적이란 생각 안 들어?”
“뭐?”
“회장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내 거랑 바꾸자. 이거 너 줄게.”
효준의 눈알에 일순 광기가 어렸다. 그는 곧바로 번쩍이는 다이아몬드 시계를 풀어 내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이거 안 놔?”
“아, 그거 구하기 힘들단 말이야. 처박아 놓지 말고 나 주라, 좋은 데 쓸게. 응?”
탄탄한 팔뚝에 휩싸인 채 간신히 머리만 내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효준을 불렀다.
“어? 효준 오빠!”
그와 거의 동시였다. 열심히 치근대던 효준이 순간적으로 자세를 바꿔 정인을 숨기듯 제 등 뒤로 돌려세웠다.
콱 조여 있던 숨통이 트이며 정인은 헉하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는 동안 효준에게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뭐 해? 저 사람은 누구고?”
“중학교 동창. 근데 혜나 너 살 빠졌냐? 필라테스 끊었다더니 얼굴선이 확 살았네.”
빠르게 화제를 바꾸자, 어깨 너머로 정인을 흘끔대던 사람들의 관심은 금세 효준에게 쏠렸다.
그 사이, 효준은 등 뒤로 팔을 뻗어 정인을 살짝 떠밀었다. 알아서 막아 줄 테니 불편하다면 자리를 피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신호에 정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돌아섰다.
“…….”
한참 멀어진 뒤에야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효준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지만, 미묘하게 힘이 들어간 듯한 표정으로 짐작하건대 효준은 저 무리를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듯 했다.
과장 조금 보태 걸음마를 처음 떼던 시절부터 저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랐으니 모를 수가 없다. 효준이 저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어야 하는 건 아마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정인에게 쏟아졌을 관심을 막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알파가 있네.”
정인은 효준의 곁에 선 사람들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페로몬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 중에는 형질이 강한 알파가 끼어 있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절대 얽히고 싶지 않았다. 몸서리치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효준이 보낸 것이었다.
307호 2층에 있어 이 멍충아
정인은 피식 웃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답장을 적어 넣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뒷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
정인이 보낸 메시지는 머지않아 효준에게도 도착했다. 그는 슬쩍 핸드폰을 확인한 뒤 눈앞의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공적으로 최정인을 빼돌렸으니 이제는 갈 길이나 가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아직 효준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 맞다, 인사해. 이쪽은….”
한창 필라테스와 인생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던 혜나는 막 생각났다는 듯 뒤쪽에 서 있던 누군가의 팔을 잡고 끌어와 효준의 앞에 세웠다.
못해도 그녀보다 30센티미터는 더 큰 것 같은 장신의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딸려 왔다. 물론 효준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알지, 유호진 씨를 어떻게 몰라.”
틈만 나면 신기록을 갈아 치운다는 바로 그분이다.
하지만 어차피 효준에게야 널리고 차이는 게 연예인이고 유명 인사다. 예의상 신기한 척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실은 썩 놀랍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조금만 더 구슬리면 정말로 시계를 내줄 것 같던 정인을 조기에 방생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남자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경제학과 조효준이에요.”
눈앞의 남자는 효준과 마찬가지로 알파였다. 심지어 한창 활동 중인 운동선수이기까지 했다. 약으로 억누른 듯 꽉 응축된 기운을 감지한 순간, 효준은 정인이 이 사람을 버텨 낼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신체적인 능력을 극대화하는 게 일이자 목표인 사람들에게 일반인 수준의 억제력을 기대하는 건 금붕어에게 물리학을 가르치려 드는 것과 같다.
물론 선수인 만큼 늘 민감도 관리를 받고야 있겠지만, 이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호르몬 장애가 있는 최정인을 주무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다. 정인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러니 애초에 노출시키지 않는 편이 나은 것이다.
그런 효준의 계산을 꿈에도 모를 남자는 해맑게 웃으며 내민 손을 맞잡아 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눈매가 순하고 단정했다. 근육이 꽉 차오른 몸에 비해, 예쁘장한 얼굴만큼은 어딘가 청순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미디어로 보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선한 인상에 효준은 살짝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맞닿은 손가락의 뿌리마다 딱딱하게 배긴 굳은살이 느껴졌다.
“근데 오빠,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돼?”
머지않아 혜나가 끼어들었다.
“갑자기 왜?”
“왜긴, 오랜만에 오빠랑 같이 밥이나 먹으려는 거지. 예지 언니랑 유정이는 된댔고 민준이도…. 그러고 보니 호진이 넌? 작년엔 학교 많이 못 나와서 아는 사람 별로 없을 거 아냐. 다 같이 더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효준은 하마터면 웃어 버릴 뻔했다. 자그마치 혜성 해운의 장녀 되시는 박혜나 공주님께서는 조만간 이 거대한 수영 선수를 볶아 먹을 계획이신 것 같았다. 일단 효준에게 의사를 묻는 것 같지만 결국 진짜 궁금한 건 유호진의 스케줄인 것이다.
“챙겨 줘서 고마워, 혜나야.”
효준은 흥미로운 눈길로 그를 살폈다. 정직과 성실의 아이콘이라던가, 카메라가 도는 곳에서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선비처럼 굴어 대더니 사석에서는 이런 저도의 어그로에 홀랑 넘어가는 꼴이 어쩐지 우스웠다.
항간에 도는 소문에는 선수 생활 쫑 나기 직전이라던데, 잠깐이나마 혜나의 액세서리 노릇을 하며 살길을 도모해 보는 것도 썩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아.”
그때, 호진이 입을 열었다. 깨끗하게 웃는 낯이었다.
“훈련 잡힌 걸 빼기가 좀 곤란해서…. 모처럼 신경 써 줬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유들유들하게 사과하면서도 결국은 거절이었다. 그러나 백전무패의 여장부는 어지간히도 유호진이 마음에 드는지 계속해서 그를 꼬드겼다.
“에이, 시간 오래 안 뺏어. 조금만 있다 가면 되잖아.”
“정말 미안해. 다음에 또 초대해 주면 그땐 꼭 시간 낼게.”
효준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적어도 효준이 알기로 여태까지 혜나가 한 번 마음 먹어서 데리고 놀지 못한 놈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혜성 해운을 통째로 집어삼킬 공주님에게 두 번이나 철벽을 치고도 유호진의 표정은 여전히 반반하고 평온하기만 했다.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유호진 특유의 표정이었다.
금메달을 건 채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태극기를 펼치던 날에도, 모두가 물살을 가르며 전진하는 가운데 혼자서만 덩그러니 출발선에 남겨져 있던 날에도 변함없던.
***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시간표를 짜 놨다던 효준의 말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정인이 그걸 깨닫게 된 건 세 번째 강의 시간이 다가올 무렵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정인은 1교시부터 지금까지 307호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의 모든 강의가 307호에서만 있기 때문이었다.
정인이 해야 하는 거라곤 그저 구석진 자리에 앉은 채 강의가 바뀔 때마다 함께 바뀌는 교수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전 시간과 마찬가지로 정각이 가까워져 오자 강의실은 다시 빈틈없이 차올랐다.
강단에는 일찍 들어온 조교가 PC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잔뜩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대체로 무난한 하루였다. 문제는 아침부터 맴돌던 미열이었다.
“…아.”
정오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슬슬 숨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두통까지 올라왔다. 이유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스웨터 한 장으로 버티기엔 조금 쌀쌀한 날씨 때문이거나, 혹은 오늘 아침에 먹은 약이 잘못됐거나.
물론 무조건 전자가 낫다. 감기나 몸살쯤이야 하루 이틀 푹 쉬고 나면 그만이지만, 갑자기 억제제가 말썽을 피우면 며칠간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 속을 뒹굴어야 하니까.
제발 평범한 감기 정도이기를 빌며 정인은 더운 숨을 삼켰다. 저 멀리 스크린에 박힌 글자들이 불현듯 눈에 띄었다.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
까만 화면과 대비되는 글자가 유달리 희었다. 그 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일단 눈에 박아 버릴 심산으로 적어 넣은 것 같았다.
세팅을 마친 조교가 몇 번인가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화면이 툭툭 바뀌었다. 글자만 빼곡하게 박힌 페이지도 있고, 뜬금없이 촌스러운 무지갯빛 리본이 지나가는 페이지도 있었다. 머지않아 움직임이 멈추고, 화면 한가득 센스 없는 서체가 떠올랐다.
!!!!!과거의 나와 마주 보고 서기!!!!!
“…….”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죄어들었다. 예고도 없이 몰아치는 두통에 정인은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허리를 접었다.
곁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대는 게 느껴졌다. 얼른 자리를 피할 요량으로 책부터 챙겼다. 아무리 그래도 첫 수업인데 출석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다른 수업들도 첫날은 간단한 과목 소개와 몇 가지 지침만을 전달하는 것 같으니 아마 이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정인은 이제 막 들어서는 교수를 지나쳐 그대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머리가 쿵쿵 울렸다. 이에 조금 더 확실해졌다. 안타깝지만 이건 단순한 감기 따위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이상하게 순조롭다 했다. 제발 집까지만. 아니, 차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좋으니 몸이 버텨 주기를 바라며 로비에 내려왔다.
“정말….”
그러나 로비는 온통 비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
“가지가지 하네.”
내내 창문 없는 강의실 안에만 있느라 바깥 날씨가 이렇게까지 변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걸음마다 빗물이 묻어나고, 뻥 뚫린 입구 너머로는 언제 그렇게 맑았냐는 듯 세찬 빗줄기가 한창이었다.
오늘 비가 올 거라고, 우산을 꼭 가지고 다니라고. 걱정이 담뿍 묻어 있던 삼촌의 목소리가 그제야 생각났다.
지하의 가게에 들러 우산을 사자니 몸이 앞으로 얼마나 버텨 줄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이 상태로 저 사이를 뚫고 가자니 그건 글자 그대로의 자살행위다. 일단은 주차장과 가장 가까운 문을 찾아 최대한 비를 덜 맞으며 빠져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략 방향을 가늠하며 돌아섰다. 그러나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몸은 급격히 나빠졌다. 몇 번인가 벽을 짚어 가며 겨우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땐 이미 이마가 온통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점점 불편해지는 호흡을 간신히 뱉어 내며 정인은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이라도 주치의에게 연락해야 할 것 같았다. 익숙한 번호를 찾아내 막 발신 버튼을 누르려는데,
“아….”
주치의에게 연락하면 분명 본가에서도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다른 데로 가야겠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형질을 보는 병원이야 널리고 널렸으니 오피스텔에 들러 가짜 신분증만 챙겨 나오면 된다.
일단은 버텨 보자, 설마 그사이에 죽기야 하겠어. 정인은 비 내리는 허공을 노려보며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과 함께 걸음을 떼자 맑은 공기를 가르던 빗방울이 어깨 위로 부서졌다.
***
비가 많이 오네.
온 세상이 말갛게 이지러져 있었다. 커다란 창에 미끄러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호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어깨가 조금 신경 쓰이는 것 같더니 아마 이래서였나 보다.
재활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센터의 소견도 긍정적인 편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기상 변화 정도에 이렇게까지 컨디션의 변화가 느껴지는 걸 보니 다시금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솟구쳤다. 또 착각인 건 아닐까. 실재하지도 않는 고통을 만들어 낸 뇌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닐까.
재활 중 떨어진 근지구력을 회복하려면 이제 하루라도 훈련을 걸러서는 안 된다.
예외 따위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상황에 갑작스레 찾아온 통증에 신경이 곤두섰다. 원래는 수업이 모두 끝난 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워밍업부터 할 예정이었지만, 지금 당장 컨디셔닝 센터에 들러 이놈의 어깨부터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오늘 짜 놓은 운동 메뉴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결국 학교 수업에 불참하는 것을 택해야 했다.
“얼른 회복되어야 할 텐데, 큰일이군요. 어서 다녀와요.”
다행히도 교수는 흔쾌히 호진의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그래도 이번 주는 어차피 오리엔테이션이니 상관없지만, 다음 주부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아무리 호진 선수여도 출석을 인정해 주기 어려워요. 알고 있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의실 문이 닫힐 때까지 교수의 등을 바라보던 호진은 곧 몸을 돌렸다. 그러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돌아본 곳에는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다.
“유호진 선수 팬인데, 혹시 사인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호진은 빙긋 웃으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일이었다. 차례대로 내미는 노트며 다이어리에 사인을 마치자 사람들은 기쁜 얼굴로 칭찬을 한마디씩 덧붙였다.
“경기하시는 거 정말 열심히 챙겨 봤어요. 정신력이 정말 강하신 것 같아서 항상 부러워요, 정말 멋지세요.”
고운 말에 섞여 든 진심들이 하나같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호진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응원 속에서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성의를 다해 인사했고, 사람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호진을 보내 주었다. 기자들로 가득한 학교 밖에서는 좀처럼 받아 볼 수 없는 배려였다.
담담히 돌아선 호진의 발길이 닿은 곳은 비교적 인적이 드문 보조 출입구였다.
적막한 풍경 속을 울리는 빗소리가 가까웠다. 문가에 기대선 호진은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한 손으로 쥐고 살살 돌렸다. 모든 관절과 인대가 조금의 걸림도 없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 부상이 있던 자리를 눌러 보았지만 역시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통증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역시 심인성 통증인 것 같았다.
‘정신력이 정말 강하신 것 같아서 항상 부러워요.’
그런 과찬이 어디 있을까. 고작 제 몸 하나를 마음대로 컨트롤하지 못해 매번 이렇게 한계에 부딪히는데.
부담을 주려 한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숨이 막혔다. 물론 어디에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남은 하루가 아직 길어서. 무너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정신 차려야지.”
씁쓸함을 접어 치우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 없도록 일 분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정말로 생각이나 마음 정도가 이 통증의 원인인 거라면 오히려 쉬울 것이다. 물리적인 문제는 어쩔 수 없지만 사사로운 감정 따위야 몸을 조금 더 혹독하게 굴려 지워 버리면 그만이니까. 내 힘으로 능히 극복해 낼 수 있는 거니까.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어깨를 곧게 폈다. 이윽고 호진은 우산을 펼쳐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비에 젖어 가는 두 번째 보조출입구 아래,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나갈 생각은 않고 바닥만 쳐다보는 것으로 보건대, 우산이 없어 건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호진은 제 가방 속에 든 여분의 우산을 떠올리며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때, 바닥을 보고 있던 이가 얼굴을 들었다.
“아….”
걸음이 멈췄다. 호진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긴 궤적을 남기며 시야를 가렸으나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뭐라고 하면 좋을까.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미인이었다.
단 한 순간, 모든 것이 새하얗게 잊혔다.
오늘의 남은 일정도, 앞으로의 일들도, 아직 지워 내지 못한 감정들도, 내내 신경을 거스르던 어깨의 통증마저도.
연예인들과 함께 이런저런 행사장에 불려 다니며 그린 듯 아름다운 사람들이야 수도 없이 마주쳤지만 그중에도 이렇게까지 첫눈에 감탄부터 터지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호진은 홀린 듯한 눈으로 처마 밑의 미인을 살폈다. 옅은 물빛 스웨터 위로 드러난 목선이 깨끗하고, 작은 흠조차 없는 피부는 곱게 빚어 놓은 도자기처럼 희었다. 세상 모든 나무와 풀의 색이 빗물로 짙어져 가는 가운데, 미인은 조금의 습기조차 머금지 않고 혼자서만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를 향해 걸음을 뗐다. 멀리서부터 시선을 사로잡던 색조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또렷한 이목구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빗줄기를 바라보는 눈이 처연하고, 굳게 다문 입술은 말간 혈색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왠지 조금 슬퍼 보였다.
“…….”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던 미인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상하리만치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이어 내뱉는 숨과 함께 빗속으로 한 걸음이 떨어졌다.
부드러운 스웨터 위로 물방울이 후드득 내려앉는 것을 본 호진은 곧장 그에게로 뛰어들었다.
“…저기.”
쓰고 있던 우산을 전부 그의 머리 위로 기울이자, 한숨처럼 내려앉아 있던 속눈썹이 들렸다.
훌쩍 가까워진 미인에게서는 화원花園의 냄새가 났다. 싱그러운 봄날의 꽃시장에서나 맡을 법한 향기였다.
“…….”
옅은 갈색 눈동자가 온전히 호진을 향했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빗소리 속에서 호진은 그 흔한 인사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자 창백한 수심이 어려 있던 미인의 아름다운 뺨 위로 경계심이 떠올랐다.
호진은 그 모든 것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장면 장면 끊어진 프레임을 바라보듯.
“뭐예요?”
우산 아래 얌전히 들어선 미인이 물었다.
“아, 음, 안녕하세요.”
…어쩌면 목소리마저 이렇게.
“그게, 저. 비가 많이 오는데…. 옷이 얇아 보여서요. 가시는 데까지 데려다드릴게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자 고운 미간이 좁혀 들었다.
“괜찮아요.”
그는 싸늘하게 대답하고는 호진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호진은 얼른 팔을 뻗어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웠다.
“…그래도요.”
저도 모르게 애원하듯 덧붙였다.
“감기 들어요.”
***
한편 정인은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뜬금없이 우산을 들고 나타난 남자는 이제 아예 빗속에 선 채 팔만 길게 뻗어 정인에게 우산을 씌워 주고 있었다. 제법 굵은 빗방울을 전부 맞으면서도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걸 보니 어쩐지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려는데,
“윽….”
무거워진 공기의 입자가 흘러들며, 잔뜩 물 먹은 풀 향기가 숨 속에 꽉 들어찼다. 정인은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알파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억제제 부작용 때문에 감각이 조금 둔해져 있었나 보다. 그러잖아도 위험한 상태에서 하필이면 알파와 정통으로 마주치게 될 줄이야.
정인은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좁은 길 위로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엔 오직 이 알파와 정인 둘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바짝 긴장한채로 정인은 품에 든 책을 움켜쥐었다.
“상관하지 마.”
곧장 우산 아래를 벗어났다. 저기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하….”
한번 느껴 버린 알파의 페로몬은 아무리 크게 숨을 내뱉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찐득하게 숨 속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조금씩 불편해진 호흡은 이내 새된 소리가 되어 입 안을 맴돌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기다렸다는 듯 숨이 막혔다.
일순 사위가 캄캄해지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족 전화번호 불러 봐. 부모, 친척, 누구든.’
‘다치게 할 생각 없으니까 빨리빨리 끝내자.’
몸이 무거웠다. 단지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도 공포심은 끔찍하도록 선명했다. 마치 다시 그때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곧 발작이 시작될 것 같았다. 정인은 이를 악물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 모든 건 전부 내 상상일 뿐이야. 나한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자칫하면 과호흡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최대한 고른 숨을 쉬려 노력하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괜찮으세요?”
젖은 땅 위로 볼썽사납게 쓰러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이니 잿빛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쓰러지는 정인을 황급히 받아 든 알파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들고 있던 우산은 저만치 진창에 처박혀 있었다.
“흐윽….”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을 비집고 들어온 알파의 체향이 정인의 숨통을 막았다. 그를 밀어 내려 애썼지만 굳어 버린 몸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헉, 헉. 얇은 숨소리를 토하며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떨리는 손가락이 몇 번인가 남자의 가슴팍 위를 힘없이 맴돌다 축 늘어졌다.
***
살려 주세요, 제발요.
희미한 환청과 함께였다. 높은 곳으로부터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거세게 들썩이며 정신이 돌아왔다. 정인은 어째서인지 누군가의 옷을 덮은 채 기다란 의자 위에 반쯤 누워 있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멍한 정신으로 찬찬히 과거를 되짚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병원에 전화를 하려다가….
“정신 들어요?”
그래. 이 새끼를 만났다.
아직 온몸이 빗물에 축축한 걸 보면 정신을 놓은 지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물 좀 마셔요.”
그새 정수기에서 물을 떠 왔는지, 남자는 물기가 송송 맺힌 텀블러를 내밀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마 조금 전까지 덮고 있던 옷도 그의 것인 듯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보건실 가 볼래요?”
“…….”
됐다고, 가 보라고.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힘이 하나도 없었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짚었다. 끈질긴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로비를 향해 걸었다.
큰 고비가 한 번 지나가자 호흡이 많이 안정됐다. 언제 또 상태가 나빠질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물기를 닦고 우산을 살 정도의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건물 안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작 우산부터 살걸. 로비에 붙어 있던 상업 시설의 목록을 떠올리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머지않아 학교 로고가 박힌 점퍼와 티셔츠 따위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진열장 안에는 보송보송해 보이는 수건 세트가 놓여 있었다.
한산한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 점주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정인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수건이랑…. 우산도 하나 주세요.”
정인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학생, 미안한데.”
점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계산대 앞에 붙은 종이를 가리켰다. 급히 만들었는지 셀로판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A4 용지 위에 ‘카드 단말기 고장’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얼른 지갑을 뒤져 보았지만 든 거라곤 영수증 몇 장이 전부였다. 가진 현금과 수표를 전부 털어 버린 아침의 자신이 조금 미워졌다.
“안녕하세요. 이걸로 계산 부탁드려요.”
그때였다. 등 뒤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지폐를 건넸다. 그를 건네받은 점주는 정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본 양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
이제는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정인을 대신해 계산을 마친 것은 조금 전의 알파였다.
정인은 그대로 상점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타박타박 급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야.”
정인은 참다못해 돌아섰다. 그새 한 걸음 뒤까지 다가온 알파의 손에는 새 우산과 수건이 들려 있었다.
“너 나 알아?”
“…네?”
“몇 번을 거절해도 계속 이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좋게 말해서는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정인은 싸늘하게 알파를 노려보았다.
“그럼 확실하게 말할게, 나는 네 호의가 썩 달갑지 않으니까 꺼져.”
그러나 알파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게 우산과 수건을 내밀었다.
“이대로 놔두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예요.”
“…….”
“받아요. 그럼 이제 더는 안 따라갈게요.”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정인은 픽 웃으며 물건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근처의 쓰레기통에 그것들을 고대로 처박았다.
쾅, 울리는 소리에 지나치던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어차피 젖은 거 두 번 젖는 게 대수이겠는가 싶어 이번에는 정문을 통해 건물을 빠져나왔다.
빗줄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겨우 차에 도착했을 땐 정말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수건 정도는 받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역시 생면부지의 알파가 주는 물건을 받느니 차라리 아파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추워….”
으슬으슬하게 몸이 떨려 차에 타자마자 히터부터 틀었다. 서서히 말라 가는 공기 속에서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에는 제법 오래 앓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
내게는 두 명의 아빠가 있다. 알파인 큰 아빠와, 오메가인 작은 아빠.
아빠들이 둘 다 우성인데도 나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베타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16년을 베타로 살다가, 남들보다 한참 늦게 오메가로 발현해 버렸다.
‘…아, 윽.’
발현하던 날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어져 있다. 중간중간 자꾸 정신을 잃은 탓이다.
제대로 기억나는 거라곤 너무너무 아팠다는 것뿐이다. 온몸이 불에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바늘이 박혀 드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수준의 통증이지만 그때만 해도 정말 세상에 그렇게 아픈 건 다시는 없을 줄 알았다.
‘아빠….’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무엇 하나 이해되는 게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를 꼭 끌어안은 채 울고 있는 작은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돌리자 문가에 서 있는 큰 아빠도 보였다. 그는 어째서인지 멀찌감치 떨어진 채 조금도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하얗게 질린 주먹을 꽉 쥔 채 손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울고 있는 작은 아빠의 모습도, 내게 다가오지 않는 큰 아빠의 모습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끔찍한 고통도 작열감도 모두. 낯설고 무서웠다. 아프고 서러웠다.
큰 아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이 튀어 오르고 눈이 뒤집혔다.
‘아빠…. 헉, 흐윽….’
‘정인아. 아가, 정인아!’
내가 꺽꺽 소리를 내며 넘어가자 작은 아빠는 죽을 것처럼 울며 큰 아빠를 향해 소리쳤다. 아직도 멀었냐고. 금방 온다더니 왜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냐고. 그다음은 또 기억이 없다. 아마 꽤 오랫동안 기절했던 것 같다.
잠깐잠깐 정신이 들 때마다 풍경이 바뀌었다. 분명 작은 아빠에게 안겨 있었는데 곧 구급차 안인 것 같더니 어느샌가 병원이었다. 어떤 때는 너무 추웠고 또 어떤 때는 너무 더웠다. 병실도 계속 바뀌었다.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어지러운 세상 속에 변하지 않는 게 딱 하나 있었는데.
‘정신이 들어?’
그건 바로, 칼을 삼킨 듯 아픈 표정으로 내내 머리맡을 지키던 아빠들의 얼굴이었다.
‘응…. 근데 배고파.’
일주일을 꼬박 앓고 일어나니 죽을 것 같던 열기는 싹 가신 채였다. 두 아빠는 어김없이 내 곁에 있었다.
‘이제 안 아픈가 보네.’
‘하나도 안 아파.’
얼굴이 반쪽이 돼서 큰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큰 아빠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 뺨을 만졌다. 작은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많이 울어 빨갛게 부은 눈으로 나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머지않아 의사를 만났다. 그는 내가 하루아침에 오메가가 되어 버린 이유를 최대한 간단히 설명하려 애썼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면이 많은 호르몬의 원리와 개념을 고작 중학생 수준에 맞춰 설명하는 건 아마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말에 의하면 나는 선천적으로 호르몬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케이스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굉장히 드문 유형의.
알파 혹은 오메가로 분류되는 이형질 보유자들의 99.9퍼센트는 대개 신생아 시절의 검사로 형질을 판별할 수 있는데, 드물지만 나처럼 호르몬 장애 인자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 중에는 사는 내내 몇 번을 검사해도 쭉 베타로만 뜨다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발현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두 아빠가 모두 이형질이니 사실 내가 오메가로 발현하는 것도 확률이 아주 낮은 건 아니다. 문제는 성장기에 받지 못한 케어였다.
인간의 힘으로 억제하기 어려운 페로몬은 어릴 적부터 꾸준히 관리해 발현 후에는 스스로 어느 정도 본인의 상태를 느끼고 제어할 수 있도록 자연스레 바꿔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베타로 태어났기에 그런 관리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죽을 것처럼 아팠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그 흔한 백신 한 번을 맞지 않고 자란 탓에 가뜩이나 불안정하던 페로몬이 제어 불가 상태에 접어든 거라고, 갑작스러운 발현을 견뎌 내기엔 내 페로몬 면역체계가 너무 약했던 거라고.
아주 사무적이던 어조 때문인지, 페로몬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 몰랐기 때문인지. 그때의 나는 꽤나 해맑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쨌든 오메가가 됐다는 거네요. 작은 아빠랑 똑같아지는 거죠?’
‘그런 셈이죠.’
‘그럼 좋은 거 아닌가?’
‘글쎄요.’
의사는 덧붙였다. 히트 사이클 주기가 많이 불안정할 것이며, 사이클이 돌 때마다 몸이 크게 아프거나 불편해질 수도 있다고.
그러니 앞으로는 운동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요.”
숨이 훌쩍 가벼워졌다.
“내가… 했어.”
정인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중얼거리다가 눈을 떴다.
눈꼬리에 고여 있던 눈물이 베갯잇 위로 떨어졌다. 침대 아래에서는 헥헥대는 개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태피. 계속 여기 있었어?”
커다란 도베르만은 제 이름이 불리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고는 정인의 손등에 제 이마를 비볐다.
그 따뜻한 온기에, 정인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강아지 보리를 떠올렸다. 가끔 정인이 감기라도 앓는 날이면 꼭 이렇게 침대 옆을 지키고 서 있던.
멋진 털을 가진 그레이하운드 보리는 정인이 간신히 옹알이를 하던 때부터 이미 사람의 나이로 치면 스무 살쯤 되는 청년이었다. 아주 똑똑한 강아지여서 간식 한 알이면 별걸 다 할 줄 아는 녀석이었는데, 신문을 가져다 달라고 하면 냉큼 가져다줬고 핸드폰이 어디에 있느냐 물으면 귀신같이 핸드폰을 찾아내 여기 있다며 컹컹 짖곤 했다.
정인이 마지막으로 녀석을 본 것은 발현하기 직전이었다. 너무나도 빨리 늙어 버린 개와 걸음을 맞추며 산책을 다녀온 그날이 바로 정인이 발현한 날이었다.
한참을 앓다 겨우 눈을 뜨던 날의 아침,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보리는 정인을 보지도 않고 조용히 떠났다. 마치 정인을 대신해 죽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인을 괴롭히던 아픔을 제가 거둬 가기라도 한 것처럼.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그 옛날의 보리처럼 반짝이는 털을 쓰다듬으며 시계 위에 깜빡거리고 있는 날짜를 보았다. 쓰러진 뒤로부터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비가 많이 오던 그날, 정인은 최현욱 회장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버렸다. 억제제 부작용에 비까지 맞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운전대를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삼촌에게 연락해야만 했다. 제발 본가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해 가며.
깜빡깜빡 정신이 드나 싶다가 기절하길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축축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안이 조용한 걸 보니 현욱은 언제나처럼 고용인을 모두 물리고 출근한 것 같았다.
아직도 으슬으슬한 기운이 남은 몸을 추슬러 태피와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우유를 팩째로 들이켜는데 문득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일어났어?”
의외의 얼굴이었다. 삼촌의 아름다운 애인은 신문을 반으로 접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정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주영이 형이 왜 여기서 나와요?”
“내일 새벽부터 촬영이라서 오늘은 좀 쉬려고. 그나저나 너 몸은 좀 괜찮아?”
“네. 이제 괜찮아요.”
주영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정인에게로 다가왔다. 답지 않게 웬 신문인가 싶었는데, 역시 기사는 읽는 둥 마는 둥 십자말풀이에만 까맣게 볼펜 자국이 나 있었다.
“곱게 큰 애가 왜 눈뜨자마자 나발을 불고 있어.”
정인이 들고 있던 우유 팩은 주영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가 컵에 우유를 채우는 사이, 정인은 십자말풀이의 빈칸에 들어갈 답을 하나씩 불렀다.
“계시, 보이지 않는 손, 장 자크 루소, 연금 복권이요.”
그 말에 주영이 놀란 듯 물었다.
“뭐야, 이런 것도 유전이야?”
“네?”
“너희 삼촌도 이거 엄청나게 잘하거든.”
“아…. 네.”
그런 게 유전일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정인은 의자에 걸터앉아 우유를 홀짝였다. 밤새 곁을 지켜 준 태피에게 고구마말랭이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주영이 지나치듯 덧붙였다.
“아 참, 너 집에 전화 좀 해야겠더라.”
그 말에 하마터면 우유를 뿜을 뻔했다.
“…집에서 알아요?”
“당연하지. 두 분 다 매일 왔다 가셨어.”
아빠들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그걸 그새 일러바쳤단 말인가. 현욱을 향하는 배신감에 정인은 조금 세게 컵을 내려놓았다.
“근데 애기야.”
그리고 정인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십자말풀이를 완성한 주영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신문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겠지만 너도 정말 그러는 거 아니야.”
“네?”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꼴 보는 거, 당연히 가슴 찢어지게 아프지.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게 되면 그땐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피눈물 쏟는 거야.”
그 심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 못 하지. 덧붙이며 주영이 코트를 걸쳤다.
“태피 산책시키고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네.”
이미 스스로 리쉬를 물어 와 기다리고 있던 태피는 신난 걸음으로 현관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꺼냈다. 두 아빠 중 누구에게 전화를 걸면 될까, 생각하는데 쥐고 있던 핸드폰이 큰 소리로 울었다.
“응, 아빠.”
큰아빠 정훈이었다. 받자마자 쏟아지는 다정한 목소리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괜찮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날은 너무 정신이 없었어. 그냥…. 삼촌네가 학교랑 더 가까우니까.”
어째서 본가나 오피스텔로 가지 않고 삼촌의 집으로 왔는지에 대한 해명이었다.
밥은 먹었는지, 더는 아프지 않은지, 학교는 어땠는지. 묻는 말에 조곤조곤 대답하다 보니 통화에 공백이 생겼다.
“아, 맞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밤새 이마를 짚어 오던 손, 고요히 머리맡에 닿아 오던 한숨 소리.
컵을 만지작대며 정인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아빠….”
작은 아빠는 기분 어때 보였어?
“…….”
혹시 많이 슬퍼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끊을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을 생각이었으나 목구멍이 콱 막혀 그러지 못했다.
튀어나올 듯 말 듯 입가를 맴돌던 말은 그냥 삼켜 버리기로 했다.
“사랑해요, 안녕.”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얀 우유 잔 속에 둥근 불빛이 달처럼 떠 있었다.
***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올 땐 아니었다. 실은 적당할 때 눈치를 봐서 오피스텔로 도망칠 계획이었으나, 정인이 눈을 뜨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최현욱 회장은 절대 안정을 빌미로 일주일을 꽉 채워 정인을 끼고 지냈다.
학교고 나발이고 더 쉬어야 한다며 여차하면 정인을 감금할 기세로 나오던 그를 말린 것은, 밤샘 촬영을 마치고 시체 같은 몰골로 돌아온 주영이었다. 얘도 다 큰 성인인데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는 말에 현욱은 강하게 반발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다는 녀석이 다 죽어서 실려 오느냐며. 결국 다시는 비를 맞고 다니지 않겠다고 피의 맹세를 한 후에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제 방으로 돌아온 정인은 썰렁한 집에서 몇 벌의 옷가지만을 챙겨 캐리어에 대충 쑤셔 넣었다.
오늘은 일단 학교 근처에 집부터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원체 물욕이 별로 없다 보니 가진 물건도 적어서, 새집을 구해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상황인데도 딱히 챙길 게 없었다.
가벼운 캐리어 하나를 들고 막 집을 벗어나려는데, 문득 전신 거울에 비친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눈에 띄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 이러고 다니면 안 돼.’
효준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정인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워치 와인더들을 바라보다 무난한 브랜드를 집어 들었다.
…가, 정확히 어디서부터가 적당한 브랜드인지 감이 오질 않아 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시계 뭐 차야 돼?”
- 글쎄…. 애플 워치 있냐?
한창 게임 중인지 총소리가 들려왔다.
“…없는데.”
그러자 그는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몇몇 브랜드를 말하며 대충 범위를 지정했다.
전화를 끊고 효준이 말한 범위 내에서의 브랜드를 찾아 보았다. 오토매틱 중에는 적당한 게 없었고, 쿼츠 모델만 모아 놓은 곳을 살펴보니 다행히도 언젠가 고모에게 선물받은 보석 브랜드의 백금 시계가 있었다.
“음….”
기존에 차고 있던 것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았다. 아무리 봐도 백금보다는 무난한 가죽 밴드가 훨씬 얌전해 보였지만 우선은 효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차고 있던 시계는 쇼케이스에 예쁘게 넣어 놓고 새것을 손목에 감았다. 용두의 사파이어가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결국 시계는 그냥 풀어 버리고 말았다.
정인은 가벼운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섰다. 전용 차고에 몇 대의 차가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었다.
삼촌에게 선물받은 세단과 소형 SUV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SUV를 골랐다. 뒷좌석에 대충 가방을 쑤셔 넣고 일단은 학교로 향했다.
정확히 일주일 만에 돌아온 학교 앞 도로는 여전히 엉망이었고, 거리의 분위기 또한 변함없이 부산스러웠다. 정인은 제일 먼저 공인 중개사 사무소에 들렀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고 있던 중개인은 정인을 향해 웃었다.
“방 보러 왔어요?”
“네.”
“지금은 거의 다 나가서 조건을 다 맞추기가 좀 어려울 텐데…. 일단 앉아 봐요.”
머지않아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이 나타났다.
“어떤 방으로 볼 거예요? 월세나 보증금은 어느 정도까지 할 건지, 방 컨디션은 어느 정도까지 괜찮은지. 말해 주면 좋은 거 찾아 줄게요.”
“웬만하면 건물 한 채를 매수하는 쪽으로 했으면 좋겠는데요.”
“…네?”
그 대답에 중개인은 흘끔 눈을 들어 정인을 바라보았다.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이었다.
“최대한 TH관과 가까운 매물로 부탁드려요. 컨디션은 딱히 상관없고, 바로 계약만 가능하다면 호가에서 어느 정도 더 쳐 드릴 수 있어요.”
이미 어른들에게는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두 아버지 모두 평생 땅만 보고 산 사람들이라 그런지 지금 학교 주변으로 서 있는 건물들에, 정확히 말하자면 부지 자체에 꽤 좋은 평가를 내렸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정인이 주로 수업을 듣는 건물과 지금 보고 있는 동네의 거리가 고작해야 도보로 5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인 것 같았다.
정인은 곧 제 아빠들이 했던 말을 고대로 읊었다.
“이미 임차인이 있다면 다른 건물로 이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더 컨디션이 좋은 매물과의 임대료 차액과 이사 비용은 전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그, 이러면 어른들이랑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말꼬리를 늘이는 건 아마 새파랗게 어린 정인의 나이 때문인 것 같았다.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정인은 지갑 속에 나란히 꽂혀 있는 명함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지금쯤 지중해 어딘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막냇삼촌을 제하면 남는 선택지는 총 네 개다. 큰삼촌, 고모, 큰 아빠, 작은 아빠.
아직도 정인의 자취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 정훈은 우선적으로 제외하고, 우선 삼촌이나 고모에게 연락을 하는 것부터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들에게 이런 걸 부탁했다간 해당 건물의 전후좌우를 전부 사 버릴 것 같았다.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아버지세요.”
개중 그나마 현실적인 작은 아빠 원경의 명함을 꺼냈다. 까다로울 것 같다던 말은 일종의 블러핑이었는지, 건설사 지부장 직함이 찍혀 있는 명함을 받아 들자 중개인의 안색은 금세 밝아졌다.
“마침 괜찮은 매물이 있긴 한데…. 혹시 오후에 한 번 더 들러 줄래요?”
“알겠습니다.”
정인은 부동산을 빠져나와 샛길을 따라 걸었다. 형형색색의 포스터와 웃음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 강의실에 들어섰다. 망부석처럼 앉아 두 번째 강의까지 듣고, 잠깐 졸았나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사람들의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바람에 중간에 빠져나온 바로 그 과목이었다. 정면의 스크린에는 아니나 다를까 변함없이 구린 디자인의 PPT가 떠 있었다.
정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 시간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 옆에 앉으면 지난주 출석을 불렀는지를 물어보고, 만약 그렇다면 가져온 진단서를 제출할 계획이었다. 머지않아 시계는 정각에 가까워졌고 슬슬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리를 채웠다. 정인의 옆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앉는 것을 확인한 정인은 그를 돌아보았다.
“저기.”
“…으어.”
머리칼이 까치집처럼 흐트러져 있는 게 마치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기도 했고, 미동조차 없는 것을 보니 한편으로는 어딘가 많이 아픈 사람 같기도 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쾅 하는 소리에 놀란 정인은 그에게서 조금 멀찍이 떨어졌다.
이거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당황해서 가만히 그를 보고만 있는데, 책상에 이마를 대고 있던 남자가 기계처럼 얼굴만 스으윽 돌려 정인을 바라보았다. 온 얼굴이 붕어처럼 팅팅 부어 있었다. 거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남자가 말했다.
“…되게 잘생겼다. 아침에 거울 볼 때마다 행복하죠?”
“네?”
그러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남자가 찰싹 소리 나게 등을 후려쳤다.
“아 쫌, 진짜 제발. 창피하지도 않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정말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 붕어의 입을 틀어막고 정인에게 미친 듯이 사과했다. 그러나 붕어는 한술 더 떠 정인에게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저는 고수학인데요…. 혹시 술 좋아하시면 동아리 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아, 진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새끼… 아니, 이 친구가 아직 술이 덜 깨서.”
그러고 보니 묘하게 술 냄새가 풍겼다. 비교적 맨정신으로 보이는 붕어의 친구는 얼굴 한가득 분노와 수치심을 꾹 눌러 담고 있었다.
“그…. 저기.”
술을 좋아하는 것과 동아리가 대체 무슨 상관인가.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연결이란 말인가. 좀처럼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 고민하던 정인은 떨떠름하게 입을 뗐다.
“혹시 지난주에 출석 불렀나요?”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이 사람들 외에는 물어볼 곳이 없었다.
“저도 출석 안 해서 모르는데…. 오티는 빠져도 될 걸요?”
“…네, 감사합니다.”
갈색 눈의 남자가 대답했다. 정인은 그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책을 펼쳤다. 이윽고 교수가 등장했다.
“윤선형.”
“네.”
“고수학.”
“에에….”
대강의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정인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요상한 사람들도 중간중간 손을 들었다. 첫 정규 수업을 맞이해 전부 출석을 부를 작정인지, 교수는 몇 페이지나 되는 출석부에 적힌 이름 하나하나 꼼꼼히 불러 가고 있었다.
“최정인.”
“네.”
머지않아 정인의 이름이 불렸다.
“유호진.”
“네.”
곧이어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그쪽을 돌아보려는데, 문득 옆에서 탁,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단정한 생김새의 갈색 눈알 남자가 내는 소리였다. 그는 어째서인지 일정한 간격으로 종이를 뚫고 있었다.
그냥 하는 짓치고는 뭔가 체계가 있어 보여서 가만히 지켜보니 점자를 찍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써 왔는지 손이 굉장히 빠르고 능숙했다. 마술처럼 완성되어 가는 점자를 흘끔흘끔 구경하던 정인은 이내 정면을 보았다.
조금 전 자신이 돌아보려던 유호진이라는 사람이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그 사람이다.
“…아.”
오늘은 마지막으로 미인을 만난 날로부터 정확히 일주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정황상 미인은 그 시간 언저리 이 건물에 수업이 있는 학생인 것 같았다. 마침 호진도 같은 시간에 수업이 있으니 대충 이맘때쯤 건물을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한번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예 같은 수업이라니.
불을 삼킨 듯 가슴이 뛰었다. 단정한 뒤통수를 바라보며 호진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미인은 놀라울 만큼 곧은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듯하게 뻗은 목선도 유독 희어 보이는 낯빛도 여전했다.
워낙 하얀 사람인 데다 그날은 비가 오기까지 했으니 시각적으로 조금 더 자극을 받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흐릿한 하늘이 아닌 밝은 백열등 아래 앉아 있는 걸 보니 뭐라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호진만 그렇게 느끼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그를 흘끔대고 있었다.
내내 그쪽에 시선을 박고 있던 호진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정인.”
어떻게 이름마저 정인일까.
초여름의 고요한 여우비가 떠오르는. 값비싼 한지를 단정하게 접어 엮어 놓은 모습이 떠오르는 발음이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지가 궁금했다. 그것 말고도 궁금한 게 참 많았다. 그 예쁜 이름에 한자는 뭘 쓰는지, 이런 사람을 쏙 낳아 놓은 부모님께서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 분들이신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많이 아파 보였는데 이제 몸은 좀 괜찮은지.
…그리고 그날은 왜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는지.
“…….”
미인은 호진의 호의가 달갑지 않다며 떠났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도 호진은 한참 동안 그를 잊지 못했다.
아마 그날 그에게서 발견한 간극 때문일 것이다. 연약한 면을 감추기 위해 손바닥 뒤집듯 날을 세우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걸 본 순간,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 내리는 비를 막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쓸쓸하고 차가운 빗속에 혼자 잠겨 들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그토록 마음이 쓰였던 건, 어쩌면.
“…….”
호진은 습관처럼 한쪽 어깨를 살짝 돌려 보았다. 한 주 내내 무슨 짓을 해도 가실 생각을 않던 통증은 여전히 아무 이유 없이 어깨 위에 머물러 있었다.
***
끝도 없이 이어지던 PPT가 마침내 마지막 장에 다다랐다. 정인은 그제야 한숨을 내뱉었다.
분명 효준의 말에 따르면 교양 수업 정도는 대충 들어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양을 보니 이건 대충 들어서 될 사이즈가 아니다. 생전 처음 듣는 심리학자들의 이름과 저서를 정신없이 받아 적느라 손이 다 아팠다.
어쨌든 그 방대한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이 수업의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골자는 ‘나를 사랑하라’인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눠 드리는 거 다 쓰고 앞으로 제출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조교가 프린트물을 넘겼다. 정인은 펜을 들었다. 종이 위에는 이름과 학번을 적는 칸조차 없이 간단한 질문 몇 개만 달랑 적혀 있었다.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대충 답을 적어 내려갔다. 좋아하는 것은 가족,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강아지. 싫어하는 것은 딱히 없음.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정인은 자신을 스쳐 간 평가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오메가로 발현한 애, 운동 그만둔 애, 그래도 죽을 때까지 걱정 없을 애, 부잣집 외동아들, 부럽다, 좋겠다, 근데 쟤 희귀병 있대, 납치당한 적 있다는 소문은 진짜일까, 죽을 뻔했다던데, 불쌍하다, 그래도 평생 놀고먹어도 될 만큼 부자잖아….
“…….”
결국 짧은 문장 하나를 적어 넣었다.
배부른 새끼.
뭐가 그리 고민인지 사람들은 간단하기 그지없는 질문 앞에 치열하게도 종이를 붙들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종이를 제출하고 돌아섰다. 그 사이 정인을 졸졸 쫓아온 붕어가 물었다.
“저기, 시간 되면 같이 밥 먹으러 갈래요? 김치찜 맛집 있는데.”
“아….”
조금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 드물게도 백 퍼센트 무해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점심 한 끼 정도는 같이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 시간에 부동산에 방문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오늘은 방 계약하러 가기로 해서요.”
“그럼 다음에 먹죠, 뭐. 전화번호 알려 주세요.”
“어…. 네.”
속전속결이었다. 그 몇 시간 사이에 붓기가 조금 빠진 듯한 붕어, 아니 고수학이라는 사람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정인의 핸드폰을 빼앗아 가 자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름이 뭐예요?”
“최정인이요.”
“흐음…. 제 이름은 수학이에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저장해도 될까요?”
“…네.”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그는 번개같이 ‘국문과남신고수학’이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다. 이윽고 수학은 본인의 핸드폰에 정인, 까지 쓰고는 또 한 번 물었다.
“신입생이시죠?”
“네.”
정인은 ‘정인이이잉이이잉잉’이라고 적혀 가는 자신의 이름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얼핏 본 전화번호부 전체가 그런 식이었다. 단 하나도 사람 이름 석 자가 제대로 박힌 게 없었다.
“저도 신입생이에요.”
“아….”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썰매 타는 날 꼭 연락드릴게요. 생각보다 재밌어요.”
“네…. 네?”
정말 자연스러운 말투에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3월에 썰매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원래 다 저렇게 ─ 좋게 말하면 ─ 문학적으로 말하나.
그들은 아리송해 있는 정인에게서 돌아서며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보자면서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혼이 쏙 빠지는 것 같았지만 그게 또 나쁘진 않았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강의실을 벗어났다. 그런데 별안간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고개를 들자,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볕을 등지고 선 남자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몸은 좀 어때요?”
정인은 곧 그가 비 오는 날에 만났던 알파임을 알아보았다.
반갑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렇게 쏘아붙였으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강의실 한복판에서 마주친 걸 보니 이 작자도 같은 수업을 듣나보다.
사실 대강의실을 꽉 메우는 수강생 중에 알파나 오메가가 서넛쯤 끼어 있어도 이상할 게 없긴 하다. 문제는 이 남자가 뿜어내는 기운이었다.
정인은 컨디션에 따라 남들의 냄새를 지나칠 만큼 민감하게 맡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웬만한 형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바로 옆에 서 있어도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둔해지기도 했다. 페로몬 장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몸의 상태가 썩 나쁘지 않은데도 알파의 체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성인지도 모른다.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오메가의 페로몬쯤은 장난감 가지고 놀듯 쥐고 흔들 수 있는.
“분명 그쪽이 신경 쓸 일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심지어 체격까지 좋았다. 품이 큰 트랙 톱으로 덮어 놓아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만든 몸인 게 분명했지만 미용 목적으로 키운 몸은 아니다. 그렇다면 최소 체대생, 운이 나쁘면 프로 운동선수까지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언제 발작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몸을 쓰는 사람일 확률이 높은’ 알파와 같은 공간에 놓여 있다니, 정인에게는 이만한 악수가 없었다.
“그날 많이 안 좋아 보여서….”
“원래 이래요?”
말을 끊으며 되받아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던 기분은 어느샌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아무한테나 이렇게 아는 척, 친한 척. 치대는 편인가?”
정인은 일부러 한심하다는 듯한 투로 말을 이었다. 고운 말에 돌아가는 게 이런 태도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데도, 남자는 조금의 동요조차 없이 정인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 단정한 시선 앞에 불쑥 모든 게 지겨워졌다.
언제까지 움츠려야 하는 걸까.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날을 세워야 하는 걸까. 어차피 사는 동안 알파를 아예 마주치지 않고 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싫다. 그저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난다.
“아니면 나한테 뭐 바라는 거라도 있어?”
한 번 더 몰아붙였다. 그러자 남자가 정인을 향해 물었다.
“그런 게 있어야 걱정할 수 있는 건가요?”
뻔뻔한 건지, 아니면 미련한 건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그저 반듯하기만 한 물음이었다.
“내가 나아지면 어쩔 거고, 당장 뒈지면 어쩔 건데?”
“네?”
“걱정한 다음에는 뭘 어쩌고 싶어서 이러는 거냐고.”
“친해지면 좋겠어요.”
조금의 계산도 무엇도 없는 직구가 돌아왔다. 악의는 보이지 않았으나 너무나도 허튼소리라 헛웃음부터 났다.
“난 싫어.”
“…….”
“그러니까 더 할 말 없으면 꺼져.”
정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서 돌아섰다.
건물을 나오자마자 중개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아주 미안한 목소리로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비는 시간이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 얼추 맞을 테니 안 될 것도 없다.
이럴 줄 알았다면 썰매를 타러 간다던 그 애들을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정인은 혼자였다.
“…음.”
배가 고프면 ‘이걸’ 참고하라던 효준의 말을 떠올리며 그가 메신저 창에 등록해 놓은 공지 글을 눌렀다. 도대체 어떤 경로로 수집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으나, 창 안에는 음식점의 상호명과 위치, 메뉴와 별점에 이어 짤막한 감상 같은 것까지 붙어 있었다.
쓱쓱 목록을 훑어봤지만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리스트 끝에 붙어 있는 문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도 저도 싫으면 학식(가람동 지하). 전반적으로 평타는 치지만 오징어덮밥은 쓰레기.
“가람동 지하?”
지도 앱을 켜서 ‘가람동’을 입력했다. 다행히도 여기렸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핸드폰을 돌려 보며 나침반을 정렬한 정인은 그에 의지해 타박타박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찜찜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본 알파와 눈이 마주쳤다. 자꾸만 바보 같은 얼굴로 웃는 건 아무래도 습관인 것 같았다.
“…하.”
그런데 그게 묘하게 낯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생각하다 보니 곧 삼촌이 임시 보호 하던 강아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
그래. 이 남자는 개를 닮았다.
일단 빈말로라도 소형견은 아니니 제외하고, 타고난 듯 골격이 큰 걸 보면 중대형견 급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또 스피츠나 하운드 그룹의 날카로운 느낌은 없다.
풍산개 젤리, 리트리버 봄이, 사모예드 구름이, 진도 믹스 해밀이…. 유기견 보호소에서 구조된 뒤로 한참을 삼촌의 저택에서 머물다 입양 간 강아지들의 이름을 되짚어 가던 정인은 이내 해답에 도달했다.
그레이트피레네 감돌이.
사고로 한쪽 다리를 다친 뒤 버려진 아이였다. 삼촌과 함께 지내며 수술과 재활을 완벽히 마쳤지만 구조 후 2년이 넘어가도록 적당한 입양처를 찾지 못하다가, 노르웨이에서 온 IT 기업 CTO가 첫눈에 반해 데려간 녀석이었다. 최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신명 나게 터그 놀이를 하다가 그 집 따님의 2억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 한 점을 해 먹었다고 들었다.
늘 폭신폭신하고 친절하던 강아지를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지만, 그래 봤자 저건 강아지가 아니라 인간이고, 알파다.
정인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멈춰 있던 남자의 걸음은 어김없이 정인을 따라 움직였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
“…….”
얼마간을 더 걸어 나가던 정인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보폭을 넓혀 알파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친해지고 싶다고?”
똑바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남자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네?”
정인은 코웃음 쳤다.
“일단 오메가면 성별 안 가리고 무작정 들이대 보는 건가? 그런 식으로….”
“오메가세요?”
남자가 물었다. 뻔한 걸 두고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싶어 정인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는 움찔 어깨를 떨며 정인에게서 물러났다.
“저…. 민감도 관리를 받고 있어서요. 매일 약을 먹다 보니 감각이 무뎌져서 몰랐나 봐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사과드릴게요.”
정말 몰랐다는 듯한 눈치였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꼭 선수가 아니더라도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는 이형질 보유자들은 민감도를 낮추기 위해 약을 복용하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몸을 써 온 사람 티가 철철 흐르는 알파를 보고 그것부터 떠올리지 못한 게 실수였다.
조용히 있을 걸, 괜히 성질이 나서 오버했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제발 겉으로 티가 나지 않기를 바라며 정인은 손안에 든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됐으니까 이제 그만 따라와.”
“…따라가는 거 아닌데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풀 죽은 얼굴로 두어 걸음을 더 물러났다. 정인은 휙 돌아섰다. 멀찌감치 따라붙는 걸음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앞을 향해 걸었다.
머지않아 가람동이 나타났다. 물론 알파의 기척은 내내 정인의 등 뒤를 맴돌았다. 로비에 들어선 후로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도, 마침내 식당 입구에 도착해서도.
이래서야 신경을 끄고 싶어도 끌 수가 없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정인은 미간을 잔뜩 좁히고 뒤를 돌아보았다.
“야.”
“네? 저요?”
그러나 그곳에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었다. 정작 화살받이가 되었어야 할 알파는 식당 바로 옆에 위치한 보건실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아뇨. 죄송합니다.”
정인은 황급히 사과하고 길게 늘어선 줄 뒤로 붙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자의식부터 앞서서 오메가임을 드러내 버린 걸로도 모자라, 멀쩡히 제 갈 길 가는 사람한테 따라오지 말라며 패악을 부렸다니.
정말이지 한숨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불 속에 처박혀 영영 그대로 묻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 드릴까요.”
“…….”
“저기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상념에 빠져 있던 정인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먹통이 되어 버린 키오스크 앞에 식권과 카드 단말기를 들고 서 있던 근로 장학생이 다시 한번 물었다. 뭐 드릴까요.
“오징어덮밥 빼고 아무거나요.”
얼른 주머니를 살폈다. 그러나 그 안에 지갑 따위는 없었다.
“어….”
아마 아침에 옷가지와 함께 캐리어에 넣어 놓고 그대로 잊어버린 듯했다. 대체 오늘은 무슨 날이기에 일진이 이럴까 싶어 한숨이 기어 나오려는데,
“돈가스 주세요.”
줄에 끼어든 누군가가 카드를 내밀었다.
묘한 기시감이 들어 돌아본 곳에는 역시나 개를 닮은 알파가 서 있었다. 그는 군말 없이 계산을 마치고는 곧장 물러나 줄의 맨 끝으로 붙었다.
“…….”
실랑이를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정인의 뒤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신기한 것이라도 보듯 정신없이 고개를 돌리며 정인과 알파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오래 끈 게 문제인 것 같아서, 얼른 식권과 식판부터 받아 들었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 식권을 내밀자 이어 네모난 구멍 사이로 집게며 국자가 나타나 차례로 식판에 음식을 담아 주었다. 노릇노릇한 튀김옷을 입은 돈가스 위로 철철 흐르는 소스가 코스의 마지막인 것 같았다.
음식을 받은 정인은 터덜터덜 걸어 빈자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막상 식사를 하려고 보니 이번에는 수저가 없었다.
“…미치겠네.”
그냥 밥 안 먹을래. 넝마가 된 듯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여기요.”
갑자기 나타난 알파가 수저를 내밀었다. 요령 좋게 식판을 받쳐 든 한쪽 손목부터 소매를 걷어 올린 팔꿈치 아래까지 근육이 쭉 갈라져 있었다.
“여기 앉아도 돼요?”
“…하.”
네 맘대로 하든가 말든가. 대꾸할 기운조차 없어 내버려 두었다.
남자는 흐흐 웃으며 정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식판에는 어째서인지 정량의 다섯 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양의 밥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 맞다.”
그는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얼마 되지도 않아 되돌아온 그의 양손에는 물이 찰랑이는 컵 두 개가 들린 채였다.
“맛있게 드세요.”
그중 하나를 정인의 앞에 놓아 주며 남자가 말했다. 정인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모든 반찬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하게 짜고 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교육 기관 이름을 걸고 내는 음식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
그런데 또 먹다 보니 나름대로 중독성이 있었다.
흐물거리는 김치 한 입, 튀김옷이 엄청나게 두꺼운 돈가스 한 입, 숨 죽은 숙주나물 한 입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흐.”
맞은편의 알파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정인은 흘끔 눈을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얼굴로 흐흐 웃고 있던 알파는 곧바로 식판에 고개를 처박았다.
“…아, 그냥.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지. 그를 알파를 아니꼽게 흘기며 정인은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했다.
“…….”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직 반도 다 먹지 못한 알파의 고봉밥이 눈에 밟혔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건 사실이다. 먼저 식사를 마쳤다고 상대를 남겨 둔 채 자리를 뜨는 짓 같은 건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내키지 않았다. 다시는 안 볼 사이에 사소한 예절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싶으면서도, 평생을 몸에 들인 습관이 습관인지라 결국 정인은 도로 자리에 앉아 버렸다. 그러자 알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다려 주시는 거예요?”
“…빨리 먹어.”
정인의 말에 그는 볼 한가득 밥을 밀어 넣은 채 환하게 웃었다.
“네. 그럴게요.”
평생 나쁜 일이라곤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야무지게 숟가락을 고쳐 쥐고 밥을 밀어 넣는 모습을 바라보던 정인은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눈을 들었다. 웬일인지 제 갈 길을 가다 말고 멈춰서 이쪽을 흘끔대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알파를 보고 있던 그들은 정인과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륵 시선을 돌렸다. 다들 의외로 남의 밥 먹는 모습에 참 관심이 많은 듯했다.
그나저나 얘는 밥을 대체 언제까지 먹는 걸까. 꽤 빠른 속도로 먹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식사가 끝나지 않는 것 같았다. 정인은 다시 알파를 돌아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음식을 마시다시피 하고 있던 알파는 웬일인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나물 한 줄기를 집어 들고는 이상하리만치 느린 속도로 깨작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정인이 묻자 그는 토끼 손톱만큼 베어 먹은 나물을 식판 위에 내려놓았다.
“좀 천천히 먹어야 할 것 같아서요.”
가지가지 한다.
“나 바빠.”
성큼 다가온 중개인과의 약속 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반듯한 얼굴 위로 수심이 어렸다.
“…죄송해요. 빨리 먹겠습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남은 음식을 비웠다. 식판이 깨끗하게 바닥을 보이기까지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식사를 마쳤음을 확인한 정인은 미련 없이 빈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밥값은 나중에 줄게.”
“아뇨, 그러지 않으….”
알파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되물었다.
“나중에…. 언제요?”
주차장에 들러서 지갑만 빼면 지금이라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중개인과의 약속에 늦을 것 같았다.
“글쎄.”
“혹시 내일 오후에도 괜찮으세요?”
머릿속으로 시간표를 그려 보았다. 내일은 한 건물에서, 그것도 오전에만 수업이 있는 날이니 오후에 잠깐 만나 돈을 건네주는 것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알파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저, 그럼 전화번호 알려 주시면.”
가당치도 않은 수작질에 정인이 헛웃음 치자 그는 황급히 덧붙였다.
“이 넓은 캠퍼스에서 만나려면 아무래도….”
“두 시에 이 앞에서 만나.”
깔끔하게 자르고 돌아서려 했다. 그러자 알파가 정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정인 씨.”
무게로 비유하자면 병아리 깃털쯤 될까. 트랙 톱까지 겹쳐 입고도 우락부락한 근육이 비치는 몸과 어울리지 않게, 당기는 힘은 아주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제 이름은 유호진이에요.”
뜬금없이 토해 낸 말끝이 달달 떨렸다.
“혹시라도 내일 제가 정인 씨를 못 보고 지나치면….”
여기저기 식기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알파는 진중하고 낮은 울림으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멀리서라도 좋으니 불러 주세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하며 정인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럼 빨리 뛰어갈게요.”
뭐가 그리 좋은지.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실실 웃는 모습이 정말 바보 같고 이상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이 사람이 알파인 것을 아는데도 이제 못 견디게 싫거나 두렵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
중개인은 건물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도 어렵게 구한 건물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두 달 전부터 알아봤으면 좀 수월했을 텐데…. 이미 학생들이 다 차서 웬만해선 어렵다고 하는 걸 겨우 찾았다니까요? 지금 살고 있는 학생도 얼마 없어서 이사 비용이 많이 나가지도 않을 거고요.”
당장 벌레가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을 듯한 방이었다. 정인의 얼굴에 아연한 기색이 어린 것을 확인한 중개인은 가능한 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뻑뻑한 창문을 열었다. 끼기긱, 엄청난 쇳소리가 지나갔다.
“창문 열면 보이는 저 건물이 TH관이에요. 가깝죠?”
과연 그 말대로 저만치에 TH관 건물 귀퉁이가 보였다. 확실히 학교와 가깝긴 했다.
“원랜 저쪽까지 다 허허벌판이었어요. 버린 땅이다 아니다 말이 많았는데…. TH 그룹에서 갑자기 100억 가까이를 부어서 저걸 올려 버렸거든요. 덕분에 꼴 보기 싫던 폐가도 싹 밀고.”
“…네.”
“어쨌든 올해만 이상하게 계약이 없는 거고 작년까지는 만실이었어요. 정문 앞 상권이랑도 멀지 않으니까 여긴 나중에 학생이 졸업하고 나서도 쭉 들고 있으면 든든할 거야. 어차피 내부는 공사 한다고 했으니까 골조만 한번 살펴봐요.”
두 아버지가 모두 건설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만큼 정인도 어느 정도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다. 판단은 어렵지 않았다. 딱 잘라서 이곳은 토지 장사를 할 게 아니라면 대대적으로 내부를 갈아엎지 않는 한 영영 가망이 없는 곳이었다.
전반적인 시세에 비해 보증금이 이상하리만치 싸게 매겨져 있는 데다 학교와 꽤 가까운데도 아직까지 세입자가 서넛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살짝 의심스러웠지만, 이 정도 컨디션이라면 모든 게 말이 된다.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고 누렇게 뜬 채 간신히 달라붙어 있는 벽지 하며, 누수를 대충 틀어막은 흔적이 역력한 천장 하며, 말도 안 되는 자리에 붙어 있는 스위치 하며.
어차피 방의 컨디션이 어떻든 내부 공사는 할 예정이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풍경이다 보니 좀처럼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길어야 일이 년 정도를 살다 떠날 학교 앞 자취방을 자비 들여 고칠 학생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 수리 없이 이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가정하면 고작해야 평균가를 약간 밑도는 게 고작인 수준의 월세는 메리트가 되지 않는다. 이 빽빽한 자취촌에 다른 선택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닐 테니까.
정말로 이 상태에서 세입자를 받고 싶다면 적어도 월세를 시세의 절반 정도까지는 후려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올해만’ 계약이 없었다는 말은 아마도 거짓말인 것 같았다.
“다른 건물도 있긴 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저 뒤에 법대 후문까지 넘어가야 되는 데다 거긴 지금 살고 있는 학생들이 좀 있어서. 어때요? 더 볼래요?”
중개인이 부추겼다. 학교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뉘앙스로 미루어 다음 선택지는 여기서 꽤나 먼 곳이겠거니 짐작하며 대략적으로 골조를 살폈다.
평범한 원룸 구조였지만 오래전에 유행한 공사 기법을 쓴 건물이라 층고가 높았고, 무리해 확장한 흔적도 없었다. 당장의 지옥 같은 모습이야 어찌 됐든 공사에 크게 걸림돌이 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아뇨, 그냥 이걸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어차피 인테리어 새로 하면 다 똑같아. 그쵸?”
슬슬 정인의 눈치를 보던 중개인은 금세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정인은 약속대로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송금했고, 곧 매도인에게서 확인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럼 짐 풀고 쉬어요. 지금 학교 다니는 학생이라고 내가 미리 말을 해 뒀지. 특별히 계약 전인데도 쓸 수 있게 해 준댔거든요…. 자, 여기 짐도 받고.”
“감사합니다.”
중개인은 밖에 세워 둔 정인의 캐리어를 넣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방을 빠져나가고 난 후에야 정인은 ‘빌트인 침대’에 앉았다. 가운데가 푹 꺼져 있는 스프링에서 비명 같은 쇳소리가 났다.
“…….”
정인이 살게 될 곳은 이 건물의 꼭대기 층 전체였다. 진작 알아봤다면 개강 전에 매입과 내부 인테리어를 모두 끝낼 수 있었겠지만, 이제 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계약했으니 공사가 끝날 때까지 족히 한두 달은 이 상태로 지내야 할 것이다. 미리 학교를 한번 둘러보라던 효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대가였다.
지금이라도 오피스텔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한두 달 정도 교통 체증을 견디는 건 어렵지 않다. 큰마음 먹고 캐리어의 손잡이를 쥐는데,
“뭐지?”
가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상태의 책상 구석에, 작게 접힌 쪽지 한 장이 보였다. 별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펼쳤다. 두꺼운 펜으로 적어 넣은 문장이 나타났다.
여기 귀신 나와요. 도망치세요.
정인은 도로 침대에 앉았다.
“…음.”
멍하니 쪽지를 들여다보며 캐리어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지퍼를 열었다. 몇 없는 옷가지들과 간단한 세면도구 같은 것들이 달그락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바쁜 움직임이 이어졌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옷장 안에 옷을 걸고, 물때 낀 화장실에 수건과 세면도구를 차례로 정리해 두었다.
쪽지가 있던 자리는 대충 훔쳐 낸 뒤 책을 쌓아 올리고 캐리어를 구석에 처박자 그래도 사람 사는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래도 옷장 아래 깔려 있던 이불과 베개는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대충 나머지 짐 정리를 마치고, 침구 없이 빈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방이 어두워지며 낡은 창 위로 가로등 불빛이 하얗게 어렸다.
정인은 내내 한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다시 펼쳤다.
“…….”
질 나쁜 장난일지, 랜덤한 타인에게 보내는 호의일지.
정체가 모호한 글자의 둥근 모서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놓았다. 하얀 종이가 팔랑팔랑 떨어져 바닥에 내려앉았다.
“귀신이 좀 나오면 어때.”
아직 잠들기엔 많이 이른 시간이었다. 창 너머로는 여전히 사람들의 말소리며 발소리가 한창이었다.
“…나는 사람도 죽였는데.”
그래도 눈을 감아 보기로 했다.
뜬 눈으로 얼마나 뒤척였을까. 잠시 눈을 감은 사이, 꿈도 현실도 아닌 경계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트 사이클 주기가 많이 불안정할 거예요.’
‘사이클이 돌 때마다 통증이 있을 텐데 이건 그래도 성인이 되고 나면 다른 방법을 써 볼 수도 있을 거고, 우선은 타고난 성향 자체가 예민한 게 가장 문제란 말이죠. 남들의 페로몬에 많이 휘둘릴 수 있으니 평소에 관리를 잘해야 해요. 웬만한 상황은 억제제 없이 버티는 게 유리할 거고, 그러려면 평소에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운동은 웬만하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대회 준비를 하려면 민감도 관리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 정인 군 몸으로는 그걸 버틸 수가 없어요.’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자의식이라는 게 있던 때부터 트랙에 붙어 살았으니까.
재능도 있었고, 의지도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걸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덜컥 놓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한계를 봐도 내가 직접 보겠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티고 버텼다. 호르몬이 제멋대로 뒤틀려 매일 밤 칼 같은 통증에 온몸을 베여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트랙에 섰다. 마침내 경기 도중 트랙 한가운데서 정신을 잃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진심으로 바라고 또 믿었다. 언젠가 반드시 프로가 될 거라고. 국가 대표가 될 거라고. 올림픽에 출전하게 될 거라고. 기어이 메달리스트가 되고야 말 거라고.
하지만 2주간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니 그 모든 것은 마치 한철의 꿈이었다는 듯 멀기만 했다. 꽉 채워 두었던 미래도 깨끗하게 비어 버린 지 오래였다.
당연하게도 아팠다.
많이 슬퍼했고 많이 울었다.
그래도 그게 절망의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세상에 영원한 슬픔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달리기만큼이나 잘 해내고 싶어지는 무언가를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그냥 그렇게만 흘러갔으면 좋았을 거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운동을 그만두게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분명 뭔가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거다.
그렇게 별 탈 없이 조금은 심심한 매일매일을 보내며 어른이 되었다면. 오늘의 내 모습도 조금은 달랐을까.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아무도 만나기 싫어.’
아니, 그건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때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끔찍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지금 이 순간이 작은 아빠에게 영영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을 거란 걸.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흑,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도대체 왜!’
‘…….’
‘그냥 확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아침마다 눈 뜨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고 짜증 나, 다 싫다고!’
‘최정인.’
그럼에도 나는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나쁜 말을 골라, 더는 아플 곳도 남아 있지 않았을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이게 다 아빠 때문이잖아, 흐윽…. 아빠가 날 이렇게 만든 거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우는 일조차 할 수 없게 된 당신을 등지고 돌아서야만 했던 건.
‘…차라리 낳지 말지.’
당신이 삶을 아낌없이 깎아 만들고 낳은 내가,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가야.’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깜빡이자 가득 차 있던 눈물이 떨어지며 시야가 트였다. 선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위는 어느샌가 밝아 있었다.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정인은 뻐근한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귀신이 나온다며 겁을 주던 쪽지는 여전히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귀신은 무슨.”
귀신은커녕 열두 시간 가까이를 깨지도 않고 푹 잤다.
불을 밝혀도 터무니없이 어둡기만 한 욕실로 들어섰다. 거울 속의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칫솔을 무는데 문득, 아가야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쁜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온.
세상에 귀신 같은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진 모르겠다. 물론 만약 있대도 효율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이렇게 훤한 대낮에 대학가 한복판에 나타나진 않을 거다. 하지만….
“…….”
하얀 거품을 뱉어 냈다.
울지 말아야지, 더는 울지 말아야지. 속으로 열심히 되새겼지만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가슴이 콱 죄었다.
정인은 칫솔을 내려놓고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그러고는 그 안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렇게 물에 얼굴을 박고 울면 아무리 울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쏟아지는 물소리에 파묻혀 마음 놓고 엉엉 울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달래듯 닿아 오던 그 목소리는 이제 기억조차 희미한 할아버지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내가 죽여 버린.
그렇게 될 걸 알면서도 나를 너무 많이 사랑했던.
***
“또 학교 올라가게?”
드라이어 소리가 멈춘 사이였다. 물기 어린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 내며 유영이 물었다. 호진은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한쪽 어깨에는 이미 더플백을 멘 채였다.
“그래야지.”
“올라가면 쉴 시간도 없이 바로 오후 훈련일 텐데…. 세 시간 웨이트 돌리고 서울 갈 체력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새벽부터 물을 탔던 다른 선수들은 오전 훈련이 끝나자마자 모두 휴식을 취하러 갔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짐을 정리하던 호진과, 잠은 오지 않고 딱히 할 일도 없어 호진을 배웅하기로 마음먹은 유영뿐이었다.
유영은 가뿐하게 길을 나서는 호진을 따랐다. 건물을 나서자 이제 막 샤워를 마쳐 노곤해진 몸 위로 서늘한 한기가 붙었다.
“어으, 추워.”
“이러니까 춥지.”
호진은 곧장 돌아서서 유영의 옷 지퍼를 턱 아래까지 올려 주었고, 유영은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호진아. 그러지 말고 그냥 아무 대회나 나가면 안 돼? 그럼 출석 같은 건 어떻게든 처리될 거 아냐.”
호진은 대답 대신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어쩌려고 이러냐, 정말.”
부상 이후로 호진은 선수촌에서 수중 훈련을 하지 않았다. 오전 운동은 웨이트로만 꽉 채우고 수영은 오후에만 했는데, 그마저도 진천 인근의 스포츠 센터를 빌리거나 지금처럼 서울로 올라가 혼자 대학교 수영장을 사용하는 듯했다.
가끔 진천에서도 간간이 몸을 풀기야 했지만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오래전부터 함께 수영을 해 온 유영도 마찬가지였다.
“자꾸 그러니까 사람들 말만 더 많아지잖아.”
호진을 둘러싼 말들은 매일매일 커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유영과 호진이 가까운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기자들은 시시때때로 유영을 찔러 댔다.
복귀가 가능한 상태냐고. 재활을 하는 동안 기량이 떨어져서 숨기는 건 아니냐고. 다음 올림픽에 출전을 할 수는 있겠느냐고. 아니, 그보다도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거냐고.
제 일도 아닌데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부담감에 기가 쪽 빨렸다. 물론 함께 웨이트를 하며 본 호진의 컨디션은 썩 나쁘지 않았다. 문제가 되었던 어깨도 재활 프로그램을 마친 뒤로는 괜찮아 보였고, 지구력이나 근력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날 잡아 기자들 불러 놓고 보란 듯이 200미터라도 짧게 한번 달려 주면 그만일 일이다. 그런데도 호진은 굳이 고된 길을 가고 있었다. 아직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운동에 한해서는 조금의 융통성도 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기에 그러려니 하던 것도 벌써 몇 달을 넘어가고 있다. 이제는 슬슬 유영도 그의 상태가 걱정되던 참이었다.
“너 진짜…. 괜찮은 거 맞긴 하지?”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맙다.”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호진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깨끗하고 시원한 미소였다. 그러니 더는 캐물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 몸조심하고.”
“응, 너도.”
그래도 끝끝내 마음이 쓰였다. 유영은 우두커니 서서 오랫동안 호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진이 서울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두 시간이나 더 지난 뒤의 일이었다.
정인과의 약속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다가오는데, 하필 오늘따라 도로 공사가 참 많기도 많아서 서울에 진입한 뒤로는 내비게이션 예상 경로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온통 새빨갰다. 내리자마자 온 힘을 다해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맞다, 호진아. 아까 유영이가 뭐라던?”
“네?”
막 도착해 내릴 채비를 하던 호진은 매니저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요새 기자들이 유영이도 많이 찌르는 것 같아서. 별일 없었대?”
개강 첫날부터 그 몸살을 치렀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진은 씩 웃었다.
“네. 따로 그런 얘긴 없었어요.”
“학교 안에서도 가능하면 접촉 조심하고, 센터에서 보자.”
“알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다. 기지개를 쭉 켜자 두어 시간을 구겨져 있던 몸이 펴졌다. 가볍게 숨을 토해 내고,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내린 자리에서부터 걸어서 15분 정도가 걸리는 곳이다. 하지만 정각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해야 5분.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건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이제는 제 시간에 도착하는 데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
호흡조차 신경 쓰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사람과 나무를 지나고 언덕과 광장을 지났다. 그러는 동안 흘끔대는 시선이 몇 번이고 호진을 훑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는데,
“어….”
종이가 가득 든 박스를 안은 여학생이 불안한 걸음으로 비틀대나 싶더니 코앞에서 확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다가선 호진은 그녀의 무릎이 땅에 닿기 직전 가까스로 팔을 잡아 붙들었다.
“괜찮으세요?”
“어, 어…. 유호진 선수 아니세요?”
그녀는 호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평소였다면 성의껏 대답해 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했다. 호진은 얼른 그녀의 상태부터 살폈다. 다행히도 다리에는 까진 상처 하나 없었다.
“팔 한 번만 이렇게 돌려 보실래요?”
호진이 급하게 잡아당긴 팔도 멀쩡한 듯했다. 열심히 시키는 동작을 따라 하는 그녀를 잠깐 지켜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여기 길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세요.”
“아…. 네.”
곧장 몸을 돌려 박차를 가했다. 흘끗 확인한 시계는 그새 정각으로부터 2분을 더 넘어가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커다랗게 자라난 조바심이 가슴 속을 굴러다녔다. 마지막 힘까지 전부 짜내 조금 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머지않아 가람동의 입구가 보였다. 거세게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올랐다.
제발,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하아.”
간절히 바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정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페이스로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벅차게 차오른 숨이 가쁘고, 터질 듯한 심장 소리는 이명이 되어 귓가를 쿵쿵 울렸다.
차가운 석재 기둥에 이마를 붙이고 서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약속 시간에 5분이나 늦었다. 아무래도 정인은 먼저 떠난 것 같았다.
호진은 돌처럼 가만히 서서 패인을 분석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다. 오전 훈련을 빼먹을 수도 없었고, 오늘따라 유달리 막히는 길을 뚫어 낼 방도도 없었다. 크게 다칠 뻔한 사람을 모르는 체할 수도 없었고, 여기서 더 빠르게 달려올 수도….
“…….”
…없었나?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 이게 최선이었다고. 정말 자신할 수 있어?
“…아.”
문득 치미는 물음과 함께 어깨가 콱 조여들었다. 호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했다. 오전 훈련 내내,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게 갑자기 망가졌을 리가 없는데도 도저히 착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버티다 버티다 기어이 찢어지고야 말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유호진.”
그때였다. 부르는 소리에 질끈 감고 있던 눈이 뜨였다. 돌아본 곳에는 계단 아래에는 정인이 서 있었다.
“…정인 씨.”
호진은 얼른 그 아래로 뛰어내려 갔다. 야트막한 돌계단 위에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안녕하세요.”
정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봄이라는 계절이 사람이 되면 이런 모습일까, 햇살에 가늘게 뜬 눈마저도 마치 색조가 선명한 명화 속에서 건져 올린 듯 곱기만 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지금 막 도착했어.”
그렇게 말하며 정인은 지갑을 꺼내 오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돈가스값의 열 배가 넘는 돈이었다.
산들산들 부는 찬 바람과 따뜻한 햇살, 아주 떠나 버린 줄 알았으나 이제 막 도착했다 말하는 미인, 퉁명스러운 얼굴로 내미는 말도 안 되는 액수의 돈.
맥이 탁 풀린 호진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경기, 부상, 평판, 과거, 미래, 책임져야 할 많은 것들. 그 모든 게 한순간에 희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 거스름돈 없는데요.”
“됐으니까 그냥 가져.”
정인은 더 이상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호진은 그대로 돌아서는 사람을 황급히 붙들었다.
“이렇게 큰돈은 못 받아요.”
그러자 정인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쩌자는 건데.”
“저랑 거스름돈 만들러 가요.”
“…뭐?”
이미 한 발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둔 채 정인이 미간을 좁혔다.
“남한테 빚지는 거 싫어하시죠.”
“…….”
“굳이 시간 내서 여기까지 나와야 했을 만큼.”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 호진은 불쑥 궁금해졌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내내 가시를 세우고 있는데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게 진짜가 아닌 것 같다. 뾰족한 가시를 조심조심 거둬 내고 나면 그 자리에는 실바람에도 흩날리는 고운 모래만 남아 있을 것 같아.
“저도 그래요. 그래서….”
온통 어쩔 수 없는 것들뿐이던 날이 기울어 어느샌가 발아래 짧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호진은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시면 다음에 또 저 만나 주셔야 돼요.”
다만 이로써 이 순간을 어쩔 수는 있기를 바라며.
***
제대로 숨을 쉬긴 하는 건지, 몸은 좀 풀고 달리는 건지.
한들한들 가벼이 거니는 사람들 사이로 나타난 호진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뛰었다. 정각보다 조금 이른 시간부터 나와 있던 정인이 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아직 약속한 시간으로부터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게 저렇게까지 죽을 각오로 달려야 할 일인가. 원래 좀 미련한 사람인가.
엄청난 페이스로 저 멀리서부터 한참을 뛰어오는데 용케도 끝까지 속도가 줄지 않았다. 일단 일반적인 체대 입시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훨씬 상회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또 전문적으로 육상만 하는 선수의 폼은 아닌데, 그럼 뭘까. 심폐 지구력을 저 정도로 사용하는 운동이 뭐가 있더라.
멍하니 지켜보다 마지막 순간에 몸을 숨겼던 건, 숨 돌릴 틈이라도 주지 않으면 정말로 사람 하나 잡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쨌든 그는 굳이 굳이 오만 원을 깨서 받아 가겠다며 학교 아래 편의점까지 정인을 데려왔다. 그러고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라며 야외 테이블에 앉혀 놓고 매장 안으로 들어가더니 5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저기, 정인 씨.”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던 정인은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편의점의 유리문을 붙든 채 그 틈으로 얼굴만 쏙 내민 호진이 보였다.
“어디 사세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냥…. 자취하시나 해서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자 호진이 씩 웃었다.
“금방 갔다 올게요.”
정인은 거리로 눈길을 돌렸다. 할아버지 생각에 아침부터 펑펑 울어서인지 실은 하루 종일 기운이 없었다. 그 와중에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맞고 있자니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멀리 지나가는 고양이의 통통한 꼬리를 바라보며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슬슬 눈이 감기려던 찰나, 등 뒤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정인 씨.”
다시 나타난 호진은 웬일인지 한 손 가득 돌돌 말린 비닐 봉투 뭉치를 들고 있었다.
“이게 뭔데?”
“그…. 선물이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쭈뼛대며 건넨 것을 받아 들었다.
일반 생활 쓰레기 종량제 봉투 (20L, 가정용)
문의 : 청소 행정과 02-22XX-44XX
“제가 여기까지 오자고 했으니까 대신 뭔가 간식거리라도 사 드리고 싶었는데, 있는 거라곤 전부 액상 과당투성이라서…. 그래도 이건 오래 두고 쓸 수 있으니까요.”
대학생쯤 되면 종량제 봉투 뭉치 같은 걸 선물로 주고받기도 하는 건가. 이런 건 정말이지 생전 처음 받아 보는 데다, 애초에 정인이 건드릴 일이 없는 물건이라 당황스러웠다.
“그…. 이제 가 보셔야 하죠?”
정인의 눈치를 보던 그는 잽싸게 잔돈을 내밀었다.
“응.”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품목이야 어찌 됐든 신경 써서 사 온 것이니 ‘선물’로 받은 쓰레기봉투도 잘 챙겼다.
“잘 쓸게.”
호진은 그 한마디에 설탕이라도 삼킨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등지고 돌아섰다.
하지만 정인은 사실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분명 멀지 않은 곳에 학교 건물이 보이긴 하는데, 어떻게 해야 저기까지 갈 수 있는 건지는 도통 모르겠다.
일단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건물이 보이는 쪽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저기, 정인 씨.”
“왜.”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은 호진이 나란히 걸음을 맞춰 왔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TH관.”
“그쪽으로 가면 좀 돌아가는데.”
“…….”
“데려다드릴게요. 같이 가요.”
그냥 빨리 사라져 줬으면 좋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충 학교에 들어섰다 싶으면 따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인은 반걸음 정도 앞선 호진을 따라 걸었다.
그는 나지막한 원룸 건물만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 골목을 요리조리 돌아 나갔다. 한 번 모퉁이를 돌 때마다 건물이 성큼 가까워졌다.
“혹시…. 정인 씨는 몇 학년이세요?”
묻는 말에 정인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이번에 들어왔어.”
“어?”
호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제가 형인 것 같은데요.”
“그래서 뭐. 모셔 달라고?”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긴 뭐가 아냐. 빤히 드러나는 억울함에 정인은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넌 몇 학년인데.”
“저는 2학년이에요.”
잠깐 계산해 보았다. 한국에서 학사를 시작한 조효준이 3학년이니 같은 루트를 밟았다면 정인도 3학년이어야 했다. 기껏해야 한 살 정도의 차이가 별 의미가 있겠는가 싶긴 하지만.
“너 나보다 어려.”
“…정말요?”
그는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 정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신기한 건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첫 만남부터가 썩 유쾌하지 않았기에 여태까진 그저 실없고 미련한 바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반듯한 이목구비 하며 구김 없이 깨끗한 표정과 눈빛 하며. 전체적으로 관옥 같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너무…. 아니에요. 네. 그렇구나.”
한참 서로를 마주 보던 두 사람 중 먼저 눈을 돌린 건 호진이었다.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아니.”
딱 잘라 대답했다. 유호진이라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처음보다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조금만 페로몬이 잘못 튀어도 죽을 것처럼 아픈 마당에 낯선 알파가 주위를 맴돌도록 내버려 둘 생각 따윈 없었다.
“잘 가.”
어느샌가 지척에 다가온 건물을 바라보며 정인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호진을 등지려는데,
“저기, 정인 씨.”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또 우연히 만나게 되면, 그땐 형이라고 부르게 해 주세요.”
가능성이 썩 높지는 않은 일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수업은 특정 건물에만 몰려 있고, 수업이 없는 한 굳이 집 밖으로 나올 일은 없다. 게다가 호진과 함께 듣는 강의는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 번이다. 그마저도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번에 듣는 대강의이니 대충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 보면 조용히 지나갈 수 있겠지.
“그러든지.”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이 사람과 다시 마주친다 해도 상관없다. 정인은 또 한 번 아픈 말을 골라 상처를 주고 밀어 낼 작정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마저 그랬던 것처럼.
***
“안녕하세요.”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머, 정인이 왔구나? 너무 오랜만이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다 컸어?”
상담사는 정인을 꼭 안아 주었다. 그녀를 마주 안으며 정인은 웃었다.
외국에 있는 동안은 통화로만 목소리를 들어 잘 느끼지 못했는데, 몇 년 만에 보는 상담사의 얼굴은 조금 더 따뜻하고 온화하게 변해 있었다.
눈길을 돌려 변함없이 테이블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식물도 한번 살펴보았다. 마찬가지로 참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었다.
“많이 컸지? 몇 번이나 다른 선생님들께 나눠 드렸는데도 이렇게 커.”
봄을 맞이하여 줄기마다 돋아난 새잎이 싱싱했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만 해도 고작해야 서너 개쯤의 비루한 잎이 전부였는데, 6년이 지난 지금은 하나하나 세기도 벅찰 만큼 풍성하다. 정인은 투명한 물병 안에 얽혀 있는 뿌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화분…은 안 바꿔 줘도 되는 거예요? 꽉 찬 것 같은데.”
“아직은 괜찮아. 어쨌거나 새잎이 난다는 건 건강하다는 거니까.”
어느샌가 새 종이를 꺼내 든 상담사는 가지런히 인쇄된 정인의 이름 아래 오늘의 날짜를 적어 넣었다.
“그나저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학교 입학했다며.”
“네. 딱히 별일은 없었어요.”
별일 없었음, 흘리듯 적힌 한 줄의 근황 위로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그래도 뭔가 느끼는 게 있었을 것 같은데. 학교 다니는 건 어땠는지 말해 줄래? 오며 가며 자주 드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도 들어보고 싶은데.”
최근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딱히 좋은 기억은 없었다. 개강 첫날부터 반쯤 죽어 삼촌의 집으로 실려 간 것부터가 그랬고, 새집을 구하는 과정도 뭔가 찜찜했고, 낯선 알파와 엮이게 된 것도 유쾌하진 않았다.
“…피곤했어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줄래?”
“그냥…. 사람이 많은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랑 부딪치는 것도 전부 별로였어요.”
“늘 그랬었니?”
상담사가 문득 물었다.
“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는 때가 또 언제가 있지…. 호주에서 지낼 땐 괜찮았어?”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똑같이 싫었어요.”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건 늘 스트레스였다. 이미 전화 상담으로도 몇 번이나 이야기한 것이었다.
서서히 친해진 몇몇 친구들이 있기야 했지만, 특별한 약속을 제하면 늘 집에 처박혀 있거나 혼자 요트를 끌고 나가 바다 위에서 시간을 죽였다.
“그럼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가 보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처음 갔을 때. 그리고 초등학교, 중학교에 처음 갔을 때. 그땐 어땠어?”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서리가 둥근 블록, 새 옷, 부직포로 만든 감나무, 아이스크림, 새로 만난 친구들, 종소리, 운동장, 바람 빠진 축구공, 일요일 아침의 나른한 햇살과 몇몇 만화 영화들의 제목…. 그리고 효준과 크게 다퉜던 날.
“아….”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새 학기가 시작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삼촌의 정원에서 아주 예쁜 나뭇가지를 발견한 게 화근이었다.
먼저 나뭇가지를 찾아낸 건 효준이었다. 하지만 정원에서 나온 모든 것의 소유권은 정원의 주인에게 있다는 것을 내세워, 나뭇가지는 정원 주인의 조카 되시는 정인이 차지했었다.
효준은 나뭇가지를 빼앗긴 게 억울해서 엉엉 울었고, 미안해진 정인은 곧장 나뭇가지를 돌려주었다. 사과의 의미로 가장 아끼는 장난감을 반으로 뚝 갈라 그것까지 주었다. 하지만 효준은 허리가 잘린 로봇을 보고는 징그럽고 무섭다며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때마침 보리를 데리고 나온 삼촌이 그 모습을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였고, 결국 둘 다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다시는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건 후에는 나란히 훌쩍거리며 앉아 레몬케이크를 퍼먹었다. 한 손에는 로봇의 상체와 하체를 각각 나눠 든 채였다.
그때를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대부분의 날들이 그런 식이었다. 높은 나무 위의 오두막에서 아래를 내려다봐도 무섭지 않고,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덤불 너머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던.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럼 언제부터 그게 싫었던 걸까?”
상담사가 물었다. 그러자 맑은 햇살이 비치듯 환하게 밝혀져 있던 머릿속의 전등이 픽 나갔다.
동그랗고 하얀 접시 위에 담겨 있던 레몬케이크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뿌리가 꽉 찬 물병이 보였다.
“…이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 현실이었다. 결국 상담사는 정인으로 하여금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들 작정인 듯했다.
“그래. 이건 조금 더 준비가 될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보자.”
“언제까지 이 얘길 해야 하는 건데요?”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6년이나 지났어요. 이제는 그때가 어땠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실은 왜 여기 앉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상담사가 직접 종결을 말하기 전까지는 꼭 상담을 받아 달라던 삼촌의 간곡한 부탁이 아니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을 터였다.
“제 잘못이 아니었잖아요.”
“…….”
“어렸던 제 마음을 돌아보라고 하셨죠. 그 순간에 함께 머물러 주고, 위로해 주라고.”
이미 끝난 일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가끔 나타나는 플래시백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마저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온전히 잊고 잘만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자꾸 그걸 끄집어내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아서 떠나 버린 일을 굳이 굳이 붙들어 와 눈앞에 펼쳐 놓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걸까.
“네, 머물러 봤어요. 그 나이에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던 어린 최정인이 불쌍하다는 건 알겠어요. 충분히 위로해 줬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전부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이제 더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는데요.”
“…….”
“저는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어요. 다 끝난 일인데 여기서 뭘 더 해야 돼요? 화라도 내면 되는 거예요? 납치범들은 이미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게 되어 버렸는데, 이제 와 제가 그 개새끼들한테 화를 낸다고 해서 뭐라도 달라지는 게 있나요?”
담담히 말을 하다 보니 이유도 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 순간, 상담사가 테이블 너머로 정인의 손을 붙들었다.
“네 기분이 달라질 거야, 정인아.”
분노가 힘없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며 정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정인의 손마디 위를 덮어 토닥토닥 두드렸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열여섯 중학생을 대하듯 부드럽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람의 기분은 때때로 바람을 넣고 뺄 수 있는 풍선 같은 거야. 끊임없이 바람을 넣다 보면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지. 따가운 햇볕을 너무 많이 보면 약해져서 바람이 많이 들어가지 않게 되어 버린다는 점까지 비슷해.”
“…….”
“풍선을 터지지 않게 가지고 있으려면 가끔 바람을 빼 주기도 해야 하는데, 정인이 네 풍선은 아직 많이 부풀어 있는 것 같아.”
그거야 선생님이 자꾸 끄집어내기 때문이잖아요. 대답하려던 것을 눌러 삼켰다. 상담사는 정인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을 이었다.
“화를 내도 좋고, 슬퍼해도 괜찮아.”
“…….”
“이번 주에는 조금만 더 지금의 감정을 들여다봐 줘. 늘 잘해 왔으니까 이번에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알겠지?”
늘 똑같이 하는 말의 반복이었다. 정인은 잡혀 있는 손을 천천히 빼냈다.
“…가 볼게요.”
“그래. 그럼 2주 후에 볼까?”
정말 싫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랑하는 삼촌이 하나뿐인 조카에게 바라는 것이 고작 이거 하나라는데, 남아도는 게 시간인 마당에 뭘 어쩌겠는가.
“…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그새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가슴 속이 갑갑해 견딜 수가 없었다. 크게 숨을 쉬어도 달라지지 않아 가슴 위를 퍽퍽 두드렸다. 나아지는 것은 없고 괜히 아프기만 했다.
상담이라는 건 항상 이런 식이다. 편한 마음으로 들어서도 결국 나설 때면 항상 마음이 온통 헤집어져 불편하다. 그러면서 결국 그 무엇도 해결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잖아도 최근 들어 신경 쓸 일이 부쩍 늘어나 복잡한데, 굳이 시간을 쪼개 가며 매번 불쾌함뿐인 일을 하는 게 정말 정신 건강에 좋은 일이긴 한 건지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조만간 이걸 종결하는 쪽으로 삼촌과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건물을 나선 정인은 상담실의 창문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버틸 만했던 날들이 조금 전의 한 시간으로 인해 진창에 처박혀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
아무래도 오늘은 물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착잡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종종 들르던 오피스텔 근처 스포츠 센터의 홈페이지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 저녁 시간은 퇴근 후의 직장인 대상으로 수업이 많은 곳이다 보니 역시 대관이 불가능했다. 근처에 또 다른 곳이 있을까 검색해 보려다가,
“…학교.”
학교에도 수영장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업은 어차피 낮에만 있을 테니 저녁 늦게까지 수영장을 이용하려는 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대관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른 학교 웹 사이트에 접속했다. 역시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은 구석에 대관 안내 페이지로 가는 링크가 보였다.
이용을 신청한 학생이 없는 경우에 한해서만 대관이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어쩐지 불길했지만, 다행히도 시간표를 보니 오늘 오후는 단 한 명의 이용자도 없이 전부 비어 있었다. 차에 오르며 정인은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수영장 대관 신청 건으로 연락드렸는데요.”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 화면 속의 시계를 흘끔 확인했다.
“네, 30분 후부터요. 한 시간만 사용하겠습니다.”
문득 상담실 테이블 위에 있던 식물이 떠올랐다.
정인은 좁은 병 안에 갇혀 있는 식물을 훔쳐다 넓은 수영장 안에 풀어 놓는 상상을 했다.
하늘하늘한 뿌리가 끝도 없이 뻗어 나가 수영장을 한가득 메우면, 싱싱하게 일어난 잎사귀가 흔들릴 때마다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
허공을 노려보던 호진은 주먹을 꽉 쥔 채 물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하얗게 넘실대는 그림자가 피부 위에 드리웠다.
그대로 물을 내리치고 싶었으나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갈 곳 없는 분노를 애먼 곳에 푸는 최악의 모습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
으드득 이를 갈며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숨을 길게 마시자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심박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는 판단이 섰다. 우선 몸을 씻어 내고 감정도 정리한 뒤에 훈련을 재개할 요량으로, 레인 앞에 던져둔 옷을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실은 수영장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샤워기를 틀자 마른 타일 위로 물이 쏟아졌다.
뱀처럼 기어가던 물줄기는 얕게 파인 홈을 따라가다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엉망진창으로 젖어 드는 바닥을 지켜보던 호진은 이내 눈을 감았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의 무게가 유달리도 무거웠다.
“하….”
오늘도 훈련은 생각처럼 흘러가 주지 않았다. 아니, 어제보다 미숙하고 지난주보다 미흡했다. 부정할 수 없는 퇴보였다. 어쩌면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마저 그저 생각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체 왜 이럴까, 뭐가 문제인 걸까. 아무리 고민해도 뚜렷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고작 샤워 한 번으로 리프레쉬가 될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것 외에는 뾰족한 수도 없다.
“…….”
생의 대부분을 물속에서 보냈다. 밥을 먹는 것보다 물을 잡는 게 더 익숙했다. 물속에서는 집중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에게 모습을 감춘 채 괜찮다고 말해 왔지만, 사실 전부 거짓말이었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모든 것이 무의식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져 왔다. 간혹 기술적인 부분이 의식의 차원까지 올라오는 경우는 있었지만, 호진에게 있어 수영 자체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닌 운동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부상을 당한 후로는 달라졌다. 물에 들어서기만 하면 자꾸만 수영의 이론적 프로세스가 의식의 층위에 박혀 들었다.
팔을 들어 물을 가르고, 다리를 뻗어 앞으로 나아가고, 필요한 근육만을 사용해 물 안에서 최대한 저항을 줄여 가다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양의 숨을 들이마시는 것까지. 그 과정들을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기록은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레인의 절반도 채 가기 전에 그 확연한 부진함을 스스로 눈치채고 멈춰 서야 할 만큼.
머리가 고장 난 거라면 몸을 그에 맞춰야 한다. 반년의 재활 후 맞닥뜨린 슬럼프 앞에서 호진이 택한 목표는 고장 난 머리를 커버할 수 있는 몸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쉽지는 않았다. 겨우내 이를 악물고 운동에만 집중했지만 아직까지도 대충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자신 있게 발표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고도 해 봤지만 허사였다. 하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 하면 하얀 코끼리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동작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다 마음먹으면 그 생각은 더욱더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
좋아하는 일이었고, 자신 있는 일이었다. 이후의 삶은 계획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이 늘 온전한 현재만을 살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칭찬에 칭찬을 거듭해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한 발 앞이 절벽이었다.
휩쓸리지 않기 위해 평생 무던히도 애를 써 왔지만, 이제는 가끔 제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한 번만 발을 삐끗해도 까마득한 저 아래로 떨어져 머리부터 깨질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호진은 소리 나게 제 뺨을 때렸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시간이 흐르면 주어진 날도 저문다. 어차피 하루가 끝나면 반성의 시간은 충분히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흐트러짐 없이 마음을 다잡아야 할 터였다.
타월로 물기를 대충 닦아 내고 샤워실 입구에 걸쳐 둔 옷을 옆구리에 낀 채 수영장으로 향했다. 오른손으로 왼쪽 팔꿈치를 쥔 채 퍽퍽 당기며 레인에 서는데, 아무도 없어야 할 물가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뭐지?”
정식 대관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시간은 학교 측의 배려로 주에 두 번 호진이 혼자 수영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시간이었다.
일반 이용자는 받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지켜보던 호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꽉 조이고 있던 팔을 풀었다. 트랙 톱에 도로 팔을 끼워 넣고 곧장 몸을 돌렸다.
가까워지면 질수록 확실해졌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은 이 학교에, 아니. 이 세상에 하나뿐일 테니까.
반짝이는 물그림자를 받아 내며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정인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수영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무슨 일일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겠지만 혹시 나를 보러 온 건 아닐까.
“정인….”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였다.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던 정인의 몸이 물을 향해 기울었다. 그러고는 쓰러지듯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호진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던 순간처럼, 일말의 저항조차 없이.
“정인 씨!”
첨벙―. 물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호진은 울림이 미처 사그라지기도 전에 정인을 따라 물에 뛰어들었다.
호흡을 줄이고 유연하게 허리를 움직여 속도를 높였다. 저 멀리 바닥을 향해 가라앉고 있는 정인의 모습이 보였다.
오직 그 자리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다. 탄탄하게 잡힌 근육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아무런 생각도 계산도 없이 그저 몸에 익힌 대로 빠르게 거리를 좁혀 가자 이윽고 힘없이 떠오른 손끝이 코앞에 보였다.
정인의 손을 잡아당기려던 호진이 문득 그 자리에 멈췄다. 가만히 눈을 감은 얼굴이 너무나도 평안해 보인 탓이었다.
“…….”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중력을 피해 물속으로 도망친 인어 같았다. 마침내 곱게 일렁이는 수면 아래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져, 이제는 이대로 오래도록 쉴 수 있기를 바라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여긴 가끔 시리도록 춥고, 또 외로워지는 곳이니까.
호진은 낮은 곳을 향해 내려앉는 정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다행히도 수면은 멀지 않았다. 익숙한 수압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땅을 박찼다.
“하….”
꽉 막혀 있던 귓가가 트였다. 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린 호진은 팔 안에 얌전히 안긴 정인의 상태를 확인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 가닥가닥 빛 망울을 매단 속눈썹이 푹 젖어 있었다.
이윽고 정인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시선이 마주친 순간, 세상이 멈추고 모든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정인의 존재를 제외한 모든 것이 하얗게 흐려졌다. 거대한 무언가에 한 대 거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영혼 전체가 얼얼하게 아팠다.
***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진 조명이 수면 위로 부서졌다.
시퍼렇게 넘실대는 물을 내려다보며 정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쓰러지듯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레와 같은 소음이 지나갔다.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자 삽시간에 숨통이 막히고 귀가 먹먹해졌다. 그래도 파문에 일렁이며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표면뿐이라서, 역시나 물 밑은 아득한 침묵으로 가득 찬 채였다.
조금씩,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몸이 가라앉았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침잠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 충동의 끝이란 뻔하다. 수도 없이 반복해 이미 넌더리가 나도록 익숙해진 일이었다.
이렇게 끝도 없이 가라앉을 것 같다가도 결국 몸은 떠오를 것이다. 숨이 모자라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엔 의지와 관계없이 어떻게든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어 공기를 찾게 될 것이다.
물에 푹 젖은 생쥐 꼴로 패잔병처럼 풀을 벗어나 대충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언제나처럼 평온히 잠들고 깨어나 어김없이 새로운 날 앞에 서게 되겠지.
어설프게 죽음을 흉내 냈지만 이번에도 결국엔 싱싱하게 숨이 붙은 채로. 숨이 끊어지기 전의 마지막 몇 초를 견디지 못해 기어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던 순간의 비겁함을 한 번 더 몸에 새긴 채로.
“…….”
저 아래에는 기다랗게 자라난 미역이 있었으면. 원한을 잔뜩 품은 귀신의 앙상한 팔이 있었으면 좋겠다. 뭐든 좋으니 내가 아닌 무언가가 발목을 단단히 휘어 감아, 영영 위로 나갈 수 없도록 붙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때였다. 얼굴 위로 작게 그림자가 지고, 허리 아래에 무언가가 닿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텅 빈 풀을 예상했던 정인의 시야에 낯익은 브랜드의 로고가 걸렸다.
단단하게 허리를 휘감은 것이 누군가의 팔이라는 것을, 그리고 눈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 그의 가슴팍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른 것은,
“괜찮아요?”
내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침묵이 깨지며 생긴 파열음이었다.
엄청난 힘으로 정인을 물 밖으로 밀어 올린 이는 금세 벽을 타고 올라왔다.
머리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한 손은 여전히 정인의 목을 받친 채, 그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었다.
“눈 뜰 수 있겠어요?”
물소리와 목소리가 어지러이 섞여 들었다. 정인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물방울이 눈꼬리를 타고 떨어지며 어물어물 흐려져 있던 시야에 상이 맺혔다.
둥글고 까만 눈동자가 지척에서 빛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두 뼘 정도의 거리에서 정인을 내려다보던 이는 안도감이 가득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또 너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정인을 물속에서 끄집어낸 것은,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 확신했던 그 알파. 유호진이었다.
“비켜.”
물에 빠진 직후라 그런지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고, 덕분에 알파의 몸에 손을 대는 것도 딱히 꺼려지지 않았다. 한 팔로 몸을 지탱한 채 위에서 버티고 있는 어깨를 슬쩍 떠밀자 호진은 불에라도 덴 사람처럼 파르르 떨며 물러났다. 까만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흐트러져 있던 숨이 서서히 돌아왔다.
애초에 만 사천 명이 다니는 대학교 수영장을 빌리면서 정말로 혼자 쓸 수 있기를 바랐던 것부터가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고였다. 근교의 노는 땅이라도 사서 아예 수영장을 지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여덟 시까지 내가 여기 대관했는데.”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고 가닥가닥 맺혀 있던 물방울이 손등 위를 흘렀다. 멍한 눈으로 정인을 쳐다보던 호진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따로 연락을 받은 게 없는데, 그게, 오늘은 꼭 훈련을 해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사정 때문에 선수촌에서는 훈련을 못 해서…. 아닙니다. 그냥 제가 죄송해요.”
덩치에 맞지 않게 목소리가 우물쭈물 기어들어 갔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인은 문득 그의 말을 끊었다.
“너 선수야?”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대고 변명을 줄줄 늘어놓던 호진은 그제야 정인을 마주 보았다.
“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 그렇게 떨었냐는 듯 웃었다.
정인은 푹 젖어 있는 그의 가슴팍으로 눈길을 돌렸다. 물속에서 얼핏 보았던 스포츠 브랜드의 로고 아래에 태극기가 콱 박혀 있었다. 와펜의 상태와 스폰서 로고의 양으로 보아 그냥 선수도 아니고 상위 티어의 국가 대표쯤은 되는 것 같았다.
“…….”
그래서 그렇게 심폐 지구력이 좋았구나. 이 순간에 생각나는 게 고작 이런 거라니,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추우시죠? 수건 가져다드릴까요?”
“됐….”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어딘가로 달려간 그는 곧 커다란 타월을 들고 왔다.
“다 젖었네, 감기 들겠어요.”
그러고는 고이 접혀 있던 타월을 펼쳐 그것으로 정인의 몸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정인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자 호진은 곧바로 손을 떼고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딱딱한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정인을 보며 한 번 더 웃었다. 젖은 트랙 톱 아래로 드러난 허벅지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
평소였다면 대충 물속에 잠겨 있다 나와 탈의실까지 덜덜 떨며 걸어갔을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물건을 챙겨 들고 오가는 게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물에서 나오자마자 보송보송한 수건을 두르니 이게 생각보다 나쁘지가 않았다.
커다란 타월에 돌돌 말려 물기를 닦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진은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석상처럼 얌전히 앉아 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은 정인의 머리카락이 반쯤 말랐을 때쯤의 일이었다.
“정인이 형.”
거의 타월에 온몸을 파묻다시피 하고 있던 정인은 고개를 들었다. 호진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조금 전에는 왜 그랬느냐 물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며 쏘아붙일 작정이었다.
“…다시 만나면 형이라고 부르게 해 주신댔는데.”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째서 정인이 물로 뛰어들었는지, 어째서 스스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맥없이 가라앉기만 했는지.
“그래도 되는 거 맞죠, 이제?”
그 와중에도 별것 아닌 호칭 따위가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
스스로 뱉은 말을 이제 와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호진이 흐흐 웃으며 제 주머니를 뒤졌다. 이윽고 핸드폰이 물을 뚝뚝 흘리며 딸려 나왔다.
“우연이 세 번이면 인연이라던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커다란 손바닥 위에 핸드폰을 올려 정인에게로 내밀었다.
“…뭐?”
“이제 전화번호 알려 주세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났다. 정황만 놓고 보면 물에 빠진 정인을 구한 건 호진이었지만 사실상 지금 호진이 하고 있는 짓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았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 보채는 격이었다.
“어…. 이게 왜 이러지.”
신이 나서 웃고 있던 호진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그는 까맣게 꺼진 채 반응이 없는 핸드폰을 툭툭 쳤다. 그러다 마침내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켜지 마.”
정인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핸드폰 언제 샀어?”
“글쎄요…. 좀 오래된 거긴 할 텐데.”
얼른 핸드폰의 상태를 살폈다. 틀림없이 고모의 회사에서 나온 보급형 모델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출시된 지로부터 자그마치 7년이 흘렀다는 점이었다. 생활 방수 정도나 간신히 견딜까 싶은 것을 풀 안에 완전히 처박았으니 켜질 리가 있겠는가.
“지금 전원 들어가면 메인보드 다 타. 영영 못 살릴 수도 있으니까 충전기에도 연결하지 말고 웬만하면 서비스 센터로 가져가. 그래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시킨 건 아니었지만, 남 아픈 꼴을 그냥 지나칠 줄 모르는 이 멍청한 알파는 정인을 구할 요량으로 방수도 되지 않는 핸드폰을 몸에 지닌 채 물에 뛰어든 듯했다.
그리고 그걸 보상하는 건 정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모에게 연락하면 금세 최신 기종 한 대를 보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정인이 개강 직전에 타사 핸드폰을 구입한 걸 뻔히 알고 있었다.
몇 주도 되지 않아 다른 기계가 필요해진 이유를 물으면 어쩌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써 보니 고모네 핸드폰이 훨씬 좋은 것 같아서 그런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려나.
“형은….”
호진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는 뚫어지게 정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놀랍도록 깨끗하고 맑아서, 정인은 저도 모르게 그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삿된 것들은 감히 다가설 엄두조차 내지 못할 선비 같달까. 순하게 웃고 있는데도 반달처럼 둥근 눈매에는 반짝반짝 총기가 어려 있고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전체적인 인상은 부드럽고 유한데도 이 깔끔한 눈빛 때문인지 어딘가 묘하게 심지가 있어 보였다.
“…어쩜 이렇게 똑똑하고 친절하기까지 하세요?”
그런 눈을 하고서는 내뱉는 게 고작해야 이런 바보 같은 말이라니. 잠깐 감상에 빠져 있던 정인은 한숨을 푹 쉬며 몸을 일으켰다.
“수리비는 영수증 가져오든가 하고, 수리가 되든 안 되든 기계는 새 걸로 사 줄게.”
“저….”
호진이 타월 끝자락을 붙들어 왔다.
“그럼 형 전화번호는 더더욱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010 10XX 0921. 외워.”
“공일…. 공구…. 잠시만요, 한 번만 더요.”
한 번 더 숫자를 불러 주었다. 그러자 호진은 눈을 꼭 감고 그 숫자들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번뜩 물었다.
“형, 혹시 9월 21일이 생일이세요?”
“…어.”
떨떠름한 대답에도 호진은 웃었다.
“이제 안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9월 21일.”
반짝거리는 눈을 보니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정인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 돌아섰다.
그리고 정인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호진은 쿵쿵 뛰는 가슴팍 위로 손바닥을 가져다 대 보았다.
아무도 없는 빈 수영장에서는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는데, 어쩌면 이 심장 소리도 바깥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창피해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괜히 물로 벅벅 씻어 내며 돌아섰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레인으로 돌아가려던 호진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돌아온 길을 둘러보았다.
지금 호진이 서 있는 곳은 스타트 라인으로부터, 심지어 매번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돌아서던 지점으로부터도 한참은 더 떨어진 자리였다.
“어….”
호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수영을 해냈다는 사실을.
***
대관을 관리하는 쪽의 근로 장학생이 바뀌며 일정이 꼬인 것이라 했다.
뒤늦게야 사실을 알게 된 학생은 부랴부랴 정인에게 전화를 걸어 연거푸 사과했다. 하지만 어차피 물에 한 번 빠졌다 나오는 게 오늘 하고 싶은 일의 전부였고, 얼마 되지도 않는 대관료를 돌려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괜찮습니다. 아뇨, 환불은 안 해 주셔도 돼요. 네. 정말 괜찮아요.”
근로 장학생은 끝까지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아마 곧 호진에게도 비슷한 연락이 가겠지.
“…아, 맞다.”
그를 생각하자 손에 들고 있던 타월로 눈길이 갔다.
일단 그대로 들고 나오긴 했는데, 도로 들어가서 돌려주자니 애써 가져다준 수건을 사용해 놓고선 알아서 하라며 덜렁 던져 주는 꼴이 된다. 역시 세탁 정도는 해서 줘야 할 것 같았다.
“저기, 학생.”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정인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미안해요, 갑자기 말 걸어서 놀랐나 보다.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말을 걸어 온 상대는 정인의 반응을 보고는 적잖이 미안해하며 명함을 꺼냈다. 명함 귀퉁이에는 메이저 일간지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지금 유호진 선수 개인 훈련 시간인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학교 친구분인가요?”
정인이 아무 말도 없자 그는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변명처럼 덧붙였다.
“훈련 중에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건 도의상 좀 그래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에요. 혹시 호진 선수 훈련하는 모습이 어때 보였는지만이라도 대략적으로 말해 줄 수 있어요?”
하여튼 이놈의 기자라는 인간들은 늘 적당히라는 게 없다. 정인은 픽 웃었다.
“아, 그럼 선수 지인을 들쑤시는 건 괜찮은 건가?”
“네?”
“이런 데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제대로 된 절차를 밟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명함을 기자에게 도로 내밀었다.
“성원 일보 기자씩이나 되는데도 인터뷰 허가를 못 받은 거면, 정황상 유호진 본인은 그 어디와도 인터뷰를 원치 않는다고 봐도 되겠고.”
멍청히 서서 보고만 있는 것을 보니 명함을 되돌려받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럼 저 사람이 뭘 어쩌고 있는지에 대해 입을 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우선은 연장자인 것 같으니 존대는 해야겠지.
“…요.”
잠깐 쳐다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더 할 말이 없을 기자는 정인을 붙잡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길래 저런 게 붙어.”
어릴 적부터 언론 노출을 경계하며 자라 왔기 때문인지, 유호진이 기자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뒷맛이 찝찝해졌다.
쓰러져 가는 자취방 건물을 향해 걸으며 학생 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무안하지도 않은지 밥 먹는 사람을 집요하게도 쳐다보던 시선들. 마치 희귀한 물건을 보듯 배려 없이 닿아 오던 눈길들.
그땐 그저 신기할 정도로 밥을 많이, 그리고 빨리 먹는 사람이기에 그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유호진이라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나 보다.
방 안으로 들어선 정인은 타월을 대충 구석에 던져둔 채 침대로 기어들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호진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반듯하게 웃고 있는 프로필 사진 옆으로 인물 정보가 주르륵 떠올랐다. 무려 192센티미터에 85킬로그램이라는 어마어마한 신체 스펙 아래로는 그가 여태까지 출전한 경기와 수상 내역이 주르륵 붙어 있었다.
별생각 없이 그것들을 훑어 내리던 정인의 눈길은 머지않아 ‘파리 올림픽 수영 남자 400m 금메달’이라는 문장 위에 머물렀다.
“…….”
어디선가 텁텁한 흙먼지 냄새가 났다.
가볍게 대지를 박차고 달려 나가면 온 사방에 가득 퍼지던. 아직은 무엇도 망가지지 않았던 날들의 냄새.
올림픽 출전을 실현 가능한 꿈으로 두고 살던 시절의 기억이 머릿속 한구석에서 작게 숨을 쉬었다.
이제는 미련도 무엇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이렇게 입 안이 쓴 걸 보니 아직도 과거를 온전히 보내 주지 못했나 보다.
가슴이 꽉 메는 것 같아 얼른 눈길을 돌렸다. 무엇으로라도 주의를 분산할 요량으로 수상 내역 아래 보이는 동영상도 한 번 눌러보았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며 드넓은 경기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화면 밖에서는 해설자들이 뭐라 뭐라 주절거리고 있었다.
볼륨을 높이자 기대로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와 작은 방 안을 울렸다.
“4번 레인에 유호진 선수. 벌써부터 환호성이 터지고 있습니다.”
“정신력이 아주 좋은 선수예요.”
“그렇죠. 사실 어린 나이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으니 이제 조금은 여유로워질 법도 한데, 경기를 보면 좀처럼 흐트러지는 법이 없어요.”
카메라는 이내 호진의 얼굴을 잡았다. 그는 가볍게 몸을 풀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정인이 보고 온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가라앉은 시선과 차분히 이어지는 호흡. 어수선한 소음이 사방에 가득했으나 유호진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박태환 선수 이후로 이렇게 기록이 좋은 선수는 드물었던지라 아무래도 세간의 기대가 높아요. 물론 부담감을 생각하면 조금 우려되는 지점도 있긴 합니다만.”
“그렇죠. 하지만 원체 집중력이 뛰어난 선수이기 때문에, 이 페이스를 유지만 해 줘도 다가올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크게 별 탈은 없지 않을까….”
휘슬과 함께 선수들이 모두 출발대 위에 자리 잡았다. 이어 무거운 버저음이 울렸다.
“유호진 선수, 400미터. 출발합니다.”
“입수 좋았습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떠오른 몸이 흰 포말과 함께 수면을 갈랐다.
호진은 머지않아 선두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영법을 바꾸며 레인 끝을 향해 나아가더니, 반환점에 다다르자마자 가볍게 벽을 박차고 추진력을 얻어 다시금 물살을 갈랐다. 2등으로 따라오는 선수와 벌써부터 거리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
“250미터 지나왔습니다. 현재까지 개인 신기록보다 0.5초 느린 기록입니다.”
“수원시청 이영하 선수, 빠르게 따라붙어 주는 모습 보입니다.”
이제는 눈에 익은 사람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이기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2위 선수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4번 레인에 유호진 선수.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350미터, 3분 18초 44의 기록으로 통과합니다.”
호진은 조금 더 속도를 올려 마지막 50미터 지점을 넘어섰다. 그제야 비로소 진짜 스퍼트가 시작되었다.
여기까지가 이 사람의 최대치일 거라고 생각한 순간,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치고 나가는 속도가 실로 대단했다.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장장 400미터를 헤엄쳐 온 호진은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패드를 터치했다.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성이 터지고, 보석처럼 부서지는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수경을 벗은 호진은 전광판을 돌아보았다.
압도적인 1위, 그 와중에도 깨끗하고 맑은 눈빛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반짝였다.
“…….”
넋을 놓은 사이 동영상은 끝나 버렸다.
곧장 관련 영상을 재생하겠다며 돌아가는 로딩 바를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화면이 캄캄해지고 새로운 영상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역시나 카메라는 호진의 얼굴부터 잡고 있었다.
“4번 레인에 유호진 선수입니다. 오늘은 컨디션이 살짝 좋지 않아 보입니다만.”
그 말대로였다. 어째서인지 호진의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다. 다른 선수들을 소개하는 말을 듣고 있던 정인은 재생 바를 당겨 경기가 시작되는 지점을 확인했다. 조금 전의 영상과 마찬가지로 버저가 울리자 그는 망설임 없이 물로 뛰어들었다.
“…어?”
그리고 잠깐 속도가 느려지나 싶더니, 호진이 갑자기 물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어,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잠시 경기 중단됩니다.”
삐이익―. 날카로운 휘슬에 이어 선수들의 움직임이 멈추고, 경기장 밖에 서 있던 라이프 가드가 부리나케 뛰어들었다. 양옆 레인의 선수들이 황급히 따라붙어 호진을 물 위로 끌어 올렸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호진은 의식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블랙아웃으로 보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우선 응급조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집요하게 그를 비춰 대는 카메라 덕분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몇 번인가 울컥 물을 토해 내는 모습은 여과 없이 화면에 잡혔다. 영상은 거기에서 끊겼다.
굳어 있던 정인은 그제야 동영상의 제목을 확인했다.
[노컷 하이라이트] 0517 정하 수영 대회 유호진 선수 관절와순 파열 당시 생중계 영상.
거북할 만큼 직설적인 제목이었다.
영상의 조회 수는 자그마치 250만에 육박했다. 넉넉잡아 대한민국 국민 스무 명 중 한 명은 이 영상을 본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래에는 수천 개에 달하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대개가 유호진을 응원하는 내용이었지만 여론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간혹 잘됐다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비아냥거림도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정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다른 것들이었다. 누구보다도 이 선수를 걱정하는 척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과한 슬픔을 표현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났음을 확고하게 가정해야만 할 수 있는 말들. 누구보다도 앞서 있던 어린 선수의 비극에 몰두해 멋대로 지어내기 시작한 이야기들. 맥락을 벗어난 비난보다 훨씬 더 촘촘하고 악의적인, 그런 것들.
정인은 조용히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날짜는 불과 몇 개월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규모가 작아 보이는 경기였다.
“유호진 선수, 부상 후 첫 경기입니다. 많은 언론이 주목하고 있을 거예요. 부담감이 상당할 텐데요.”
“그렇습니다. 물론 재활 프로그램이 이제 막 끝났기 때문에 기록은 조금 나쁠 수 있어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경기감을 올리는 게 중요하겠죠?”
해설자들의 목소리 톤이 낮았다. 그러나 호진의 표정은 딱히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응원의 함성을 따라 고개를 든 그는 담담하게 웃었다. 찬란한 파문을 일으키며 선두로 나아가던 첫 번째 영상 속에서 본 것과 똑같은, 묘하게 신뢰를 주는 모습이었다.
재활을 무사히 마쳤다는 말을 들으니 큰 부상은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는 사이 휘슬이 울렸다. 저마다 자리에서 몸을 풀고 있던 선수들이 출발대 위에 올라섰다. 정인은 호진을 바라보았다.
“…….”
저 사람도 그 동영상을 봤을까. 그 아래에 달린 댓글들을 봤을까.
부디 이대로 주저앉기를, 그로써 완벽한 비극이 완성되기를 바라며 던진 악의를 느꼈을까.
부디 그런 적 따윈 없었으니. 그런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으면 좋겠다. 400미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터져 나오던 그 압도적인 스퍼트처럼, 정인은 이번에도 호진이 모두의 걱정과 우려를 단칼에 베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운동을 그만두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줌 의심 없이 눌러 담았던 미래가 증발한 가운데, 길게 남아 버린 빈 삶 앞에 우두커니 서는 일이 얼마나 아픈 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유호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이었대도 똑같았을 것이다. 기어이 트랙을 떠나야 했던 자신과 달리, 정인은 이 사람의 불행이 그저 긴 역사에 짧게 스쳐 간 해프닝에 불과하기를. 아주 먼 훗날 조금도 아프지 않은 마음으로 반추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만 남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Take your mark.”
이어 버저가 울리고, 레인 위로 물보라가 일었다.
그러나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인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아…. 유호진 선수, 뭔가 이상한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모두가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가운데, 혼자만 출발대에 덩그러니 남겨진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던 호진이 마침내 물속으로 빠져 든 것은, 그의 상태를 확인하려 다가온 스태프가 어깨를 두드린 뒤의 일이었다.
그새 반환점을 돌아온 다른 선수들은 이제 세 번째로 벽을 박차고 레인 끝을 향해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힘없이 가라앉은 호진은 오랫동안 떠오르지 않았다. 의료진이 뛰어들 때까지, 그렇게 또 한 번 경기가 중단될 때까지.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영상은 없었다. 이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
기자가 캠퍼스 무단출입을 강행하면서까지 매달리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정인은 착잡한 심정으로 천장을 보고 눕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버려 두면 이러다 말겠지 싶어 받지 않으려다가, 설령 스팸 전화라 해도 이런 기분으로 혼자 누워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냥 받고 말았다.
“여보세요.”
- 형.
들려오는 것은 공교롭게도 조금 전까지 들여다보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정인은 재차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지역 번호가 찍혀 있는 것으로 보건대 어디선가 유선 전화를 끌어다 쓰고 있는 듯했다.
“뭐야.”
- 타월 안 돌려주셨는데.
웃음기 섞인 말끝이 피로에 낮게 갈라져 있었다.
“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아침 일찍 고모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세탁기와 건조기 정도는 설치하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아마 내일 저녁쯤에는 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 지금 주시면 안 돼요?
“…아직 세탁 안 했어.”
- 그런 거 안 하셔도 되는데.
호진이 나지막이 웃었다.
- 그거 말고도 타월 많아요. 어차피 한 번에 다 집어넣는 거니까 그냥 주세요.
“그럼 굳이 지금 안 받아도 되는 거 아냐?”
가만히 듣고 있던 정인이 물었다.
“이거 말고도 타월 많다며. 다른 거 쓰면 되잖아.”
- 아…. 네?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에 일순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 그게, 아끼는 거라서요. 그게 없으면…. 좀 신경이 쓰여서. 제가, 음…. 그 타월은 제가 가진 것 중에 제일 하얗고 예쁘거든요, 깨끗하기도 하고.
정인은 현관 근처에 팽개쳐 둔 타월을 흘끔 쳐다보았다. 글자 그대로의 흰색이긴 하지만 특별하게 하얗고 깨끗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운동을 하다 보면 사람마다 징크스 같은 게 생기기 마련이니 한편으로는 그러려니 싶기도 했다.
- …죄송해요.
말도 무엇도 아닌 것을 중얼중얼 이어 가던 호진은 이내 정인에게 뜻 모를 사과를 건넸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딘데.”
- 네?
차키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게. 지금 보자고.”
- 정말요? 그럼 제가 갈게요.
“됐으니까 어딘지나 말해.”
- 아직 수영장이에요. 지금은 공중전화 부스 안인데….
“공중전화?”
아직도 그런 게 된다니 그야말로 놀랄 노 자다. 어쨌거나 학교 안이라면 굳이 차를 끌고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정인은 쥐고 있던 차 키를 도로 내려놓았다.
“일단 TH관 쪽으로 와.”
- 10분 안으로 갈게요.
“그….”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전화는 끊긴 지 오래였다. 아직도 축축한 타월을 둘둘 말아 품에 안고 집을 나섰다.
밤의 캠퍼스는 한산했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지만 하루 종일 사람들이 북적이다 빠져나간 자리에는 묘한 서늘함이 감돌았다.
캄캄하고 고요한 거리 위로 이따금 몇몇 사람들이 잔뜩 취한 채 정인을 스쳐 갔다. 웃음소리가 낙엽처럼 거리를 굴렀다. 별생각 없이 그들을 바라보는데,
“형!”
멀리서부터 간격이 짧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눈 깜짝할 새 정인에게 도착한 호진은 거센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그러고는 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뽀얗게 웃었다.
“8분 55초다, 이번에는 안 늦었어요.”
정인은 내심 감탄했다. 수영장을 비롯한 체육 시설은 전부 학교의 최북단에 붙어 있고, TH관은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거의 전력 질주를 하다시피 하지 않으면 10분 만에 주파하기에는 조금 빠듯한 거리였다.
“…자.”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고 축축한 수건을 내밀었다. 호진은 그것을 몇 번 만져 보더니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이거 이대로 안고 오신 거예요?”
그토록 소중하다는 타월을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팽개치며, 그는 황급히 겉옷을 벗어 정인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큰일 났네, 옷 다 젖었어요….”
그 말에 내려다보니 그새 배어난 물기에 가슴 아래가 전부 얼룩져 있었다. 조금 춥다 싶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됐어.”
정인은 옷을 갈무리해 그에게 건넸다.
“입어, 땀 식으면 추워.”
“전 괜찮아요. 형 입으세요.”
정인은 한숨을 쉬었다.
“너 이래 놓고 나중에 또 이거 달라고 연락할 거잖아.”
“그렇긴 한데….”
호진은 슬금슬금 정인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도 그냥 입고 계세요, 오늘 물에도 들어갔다 왔으니까 따뜻하게 하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
“…돌려 달란 말은 아주 나중에 할게요, 형이 잊어버릴 때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정인의 손에 들려 있던 옷을 도로 어깨 위에 얹어 주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어디 사세요? 데려다드릴게요.”
“됐으니까 네 갈 길 가.”
호진의 옷은 대충 눈대중으로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더 품이 컸다. 현역 수영 선수에 비하면 체구가 한참 작은 정인이 걸치자 어린애가 아빠 옷을 훔쳐 입은 듯한 느낌까지 났다. 그래도 막상 젖은 옷 위로 스미던 바람이 멎으니 그게 또 따뜻해서 정인은 군말 없이 돌아섰다.
“길이 너무 어두워서…. 위험할 것 같은데요.”
바닥을 뒹굴던 타월을 챙긴 호진은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었다.
“얼마 전에 묻지 마 살인 사건도 일어났잖아요.”
“어디서?”
“미국 켄터키주요.”
가만 보니 헛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렇지만 한국이라고 그런 사건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헛소리하지 말고 집에 가.”
싸늘하게 자르자 호진은 울상을 지었다.
“흉기 든 살인범을 혼자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둘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은데.”
그 말에 돌아오는 것은 웃음기 하나 없는 대답이었다.
“제가 찔릴게요. 형은 멀리 도망가서 119 불러 주세요.”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던 정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따라와.”
“…네.”
호진의 걸음은 정인의 등 뒤에 순순히 멈춰 섰다. 정인은 시원한 숲 냄새가 풍기는 옷자락을 여몄다.
돌아볼까, 말까.
어쩐지 신경이 쓰였지만 끝내 돌아보지는 않았다.
***
별 볼 일 없는 주말이었다. 오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허공의 먼지나 들여다보고 있던 정인은, 정오를 넘길 무렵 불알친구 효준의 전화 한 통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정인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정인은 그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주말답게 도로는 엉망진창이었다. 상식선의 교통 법규는 이미 요단강을 건넌 지 오래였고, 심지어 중간중간 미친 보행자들이 튀어나와 무단 횡단을 해 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화가 나기는커녕 상쾌하기만 했다. 차를 몰아 마침내 정인이 도착한 곳은 최현욱 회장의 저택이었다.
“그 섬을 네가 사겠다고?”
“네.”
주영의 물음에, 정인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끄덕였다.
“거기 아무것도 없을 텐데…. 별장 지어 놓은 것도 너 외국 나가고 나서 몇 년은 관리 안 했어.”
“괜찮아요.”
이렇게까지 정인을 들뜨게 만든 건 불과 두 시간 전 주영이 내놓은 섬이었다.
현욱에게 기념일 선물로 받은 것이었지만 데뷔 이래로 늘 바빴던 주영은 사실상 한가롭게 섬에 드나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바쁜 배우님을 대신해 가끔 그 섬에 머문 건 중학교를 그만둔 뒤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이던 정인뿐이었다.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지만 기념일 선물을 팔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꾹 참았는데, 그게 매물로 나왔다니 호재도 이런 호재가 없었다.
“우선 삼촌한테 물어봐. 너한테 이런 거 돈 받고 팔면 한 소리 할 것 같은데.”
“뭘 물어봐?”
때마침 태피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현욱이 물었다.
“아까 자미도 내놨는데 애기가 그거 봤나 봐. 사고 싶대.”
“결국 그걸 팔겠다는 거군.”
역시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보호자의 기분이고 나발이고 이제 막 산책을 마쳐 흥분도가 높아진 태피는 신나는 걸음으로 정인에게 달려와 왕 짖었다. 어딜 갔다 이제 나타났냐는 듯한 투였다.
태피를 쓰다듬어 주며 정인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현욱을 바라보았다.
“삼촌….”
“그래, 그건 정인이가 갖는 걸로 하자.”
현욱은 곧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꽤 신경 써서 고른 섬인데 애먼 놈에게 넘어가는 것보다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에게 주는 게 무조건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정말요?”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요?”
현욱은 따라오라며 먼저 현관을 나섰다. 정인은 쫄래쫄래 그의 뒤를 쫓았다.
현욱의 걸음은 드넓은 정원 구석에 위치한 빈 땅으로 향했다. 그는 돌과 자갈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흙바닥을 가리켰다.
“뭐라도 심어 보자.”
“…네?”
동해를 입고 죽은 목련 나무를 뽑아낸 자리였다. 다른 곳에는 전부 정원사나 주영의 손길이 닿아 있었지만 여기는 아직 버려진 상태 그대로였다.
“이번 학기가 끝날 때까지 일주일에 두 번, 해가 떠 있는 동안의 두 시간은 텃밭에서 보내는 거야. 뭐든 상관없으니 아무거나 심어 놓고 수확해서 가져오면 돼.”
“어…. 이런 건 전문가가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주영이 형이나.”
현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꼭 네가 직접 해야 해. 사람 쓰는 것도 안 돼.”
정인은 행여나 그의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대답했다.
“할게요. 할 수 있어요.”
어차피 식물이라는 건 씨 뿌리고 대충 내버려 두면 알아서 크는 게 아니던가. 세금 정도는 알아서 낸다 쳐도, 토지가와 별장 건축비를 고작 그 정도의 노동으로 퉁칠 수 있다면 꽤 남는 장사다. 대충 계산해 봐도 시간당 4천만 원 이상은 버는 셈이었다.
벌써부터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닷바람 냄새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가슴이 뛰었다. 넓은 창 너머로 바다 끝까지 차오르는 노을. 푸르고 깨끗한 새벽녘의 공기. 그것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 서너 달 수고를 들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정인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럼 당근 심을게요. 고추랑 양파랑…. 음, 블루베리도.”
널찍한 땅을 바라보며 야심 찬 공약을 발표했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영이 하,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고추에 블루베리라니, 너 여기서 인생 마감….”
“그거 좋은 생각이네.”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주영이 하려던 말을 칼같이 자른 현욱은 눈꼬리를 착 접어 웃었다.
“꼭 약속 지켜야 해. 등기는 수확까지 무사히 마치면 해 줄 테니까.”
“…네.”
정인이 대답하자 현욱은 주영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대로 돌아섰다. 쟤 저러다 요절해, 작게 속삭이는 주영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가로세로 칠팔 미터쯤 될까 싶은 땅을 내려다보며 정인은 밝은 미래를 그려 보았다.
우선 종자를 구매하고 나면 파종이야 금방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간중간 비가 올 것을 감안하자면 따로 물을 줄 필요도 없겠고, 남는 시간은 대충 어딘가의 그늘 아래 드러누워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족하겠지. 그렇게 반년만 버티면 꿈에서도 그리던 예쁜 섬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올해 들어 가장 좋은 일이 될 것 같았다. 기대에 부푼 숨을 크게 들이쉬며 돌아섰다.
***
체육관을 나서자마자 피부에 닿아 오는 공기가 놀라울 만큼 산뜻했다.
유달리도 햇살이 맑고 따스한 것을 보니 이제 정말 봄인가 보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의 가지마다 새순이 트고 있었다. 하늘하늘 드리운 그늘을 조심스레 밟아 가며 호진은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누구 하나 사용하는 이 없는 공간인데도 구석구석 남은 손때만큼은 정겨웠다. 뾰족한 것으로 새긴 듯한 이름 하며, 색이 다 바래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워진 스티커 하며.
한때는 모두 새것이었을 흔적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수첩을 펼쳤다. 매니저의 전화번호를 찾아 오전 훈련을 마쳤다고 전할 생각이었다.
“아….”
그때, 찾아 보지 않아도 선명한 번호 하나가 떠올랐다. 커다란 옷을 걸치고 걷던 뒷모습을 생각하니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한참을 망설이다 건 전화였다.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속아 넘어가 줄 리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실은 한 번만 더 말을 붙여 보고 싶어 그랬다.
그리고 그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10분간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 고작 5분 남짓을 보고 헤어졌으나 후회 따위는 남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입어, 땀 식으면 추워.’
겨울밤의 별처럼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는 참 쌀쌀맞지 못한 사람이었다.
매니저에게 걸려던 것을 그만두고, 호진은 실실 웃으며 새로운 번호를 눌렀다. 상대는 금세 전화를 받았다.
“민준아. 아…. 응, 나 맞아. 잘 지냈어?”
혜나를 통해 알게 되어 이따금 안부를 주고받던 친구들 중 하나였다.
“사정이 생겨서 공중전화 쓰고 있어. 물어볼 게 좀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아?”
유리 벽에 기댄 채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몇 번인가 손안에서 굴리자 싸늘하던 동전은 금세 체온으로 따뜻해졌다. 꼭 어젯밤에 만난 누구처럼.
“TH관 후문 아랫길에 사는 신입생들은 대부분 경영대지? 너도 경영대니까 잘 알 것 같은데.”
민준은 아마 그럴 거라며 긍정하면서도 뜬금없이 왜 그런 걸 묻느냐 물었다. 호진은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화제를 바꿨다.
“넌 신입생 때 교양 뭐 들었어?”
몇몇 과목들의 이름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민준이 최고의 인기 과목이라 꼽은 건 호진이 전공 외에 유일하게 듣고 있는 심리학과 교양, 즉 정인과 함께 듣는 바로 그 수업이었다.
상당수의 신입생들이 재학생 추천으로 과목을 정한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 민준이 불러 주는 것들 중에는 분명 정인이 듣는 과목이 더 있을 것이다.
그럼 우선 하나씩 수강 신청을 해 놓고, 수강생 명단을 확인해서 정인의 이름이 없는 과목은 지우면 된다. 얼른 볼펜을 꺼내 과목명을 하나하나 받아 적었다.
“아, 별건 아니고. 정정 기간 좀 남은 것 같아서 교양 한두 개만 더 들을까 알아보는 중이야.”
그 말에 민준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그래도 괜찮겠느냐 물었다. 그의 말대로 조금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다. 수업이 늘어나면 그만큼 쓸 수 있는 시간의 범위도 줄어들 테니까.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응. 다음에 보자.”
호진은 가만히 전화를 내려놓았다. 따뜻한 적막 속에서 손안의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다시금 정인이 떠올랐다. 그를 마주한 순간의 기억은 어째서인지 전부 온기로만 남아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초봄의 빗줄기도, 시퍼렇게 넘실대는 물 아래도, 어둠에 잠겨 든 밤공기까지도.
“…….”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던 자리를 단숨에 건너가게 만들던 사람. 평생을 이견 없이 믿고 알아 온 온도마저 손짓 한번 없이 뒤집어 놓는 사람.
그를 향하는 마음이 명백한 호감임을 알았다. 다만 여태까지 호진이 알고 있던 감정들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실장님. 저 호진이예요. 방금 오전 훈련 끝났습니다.”
그래서 궁금했다. 조금 더 알아 가고 싶었다.
“어젠 핸드폰이 고장 나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 학교에서 한 저녁 수중 훈련에서 성과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뾰족하고 불편한 이 마음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이번 학기는 학교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
자미도를 손에 넣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간단한 취미 원예 정도가 아니었다.
작은 화분 몇 개를 키워 본 ― 사실은 그마저도 결국 죽이고야 말았지만 ― 어릴 적의 경험만 믿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거였다.
씨앗을 발아시키는 데에 펠릿과 물이 필요하다는 것까지는 대충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냈고, 씨앗을 하나씩 심어 볕 잘 드는 곳에 며칠 놔뒀더니 떡잎도 쏙 올라왔다. 하지만 그걸 옮겨 심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땅의 상태였다. 나무를 뽑아내면서 들린 자리를 대충 덮어 놓은 탓에 텃밭 여기저기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그나마 멀쩡한 곳도 자갈 반 흙 반이라 도저히 뭘 심을 수가 없었다.
큰 구멍 하나를 다지고 돌 몇 개를 옮겼더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대충 새순을 심어 놓고 그늘 아래서 쉬려던 계획은 당연히 물 건너갔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푹푹 꺼졌다. 보통의 마른땅을 생각하며 스니커즈를 신고 온 것부터가 엄청난 악수였다. 훤히 드러난 발목을 타고 흘러드는 흙 때문에 발아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껄끄러웠다. 물론 새하얗던 스니커즈는 이미 원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애써 중심을 잡으며 텃밭의 끝으로 나아가는데, 별안간 얕은 구덩이로 발끝이 박혀 들며 몸의 축이 무너졌다.
“어어….”
결국 정인은 속절없이 흙바닥에 무릎을 찧고 말았다.
“괜찮냐?”
나무 밑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만지던 효준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괜찮아 보이냐?”
다행히도 큰 돌은 미리 골라 구석에 건져 둔 덕에 뼈가 나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글자 그대로의 막노동이다. 정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지으며 손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그러고는 조금 전 대차게 엎어 버린 지피 펠릿을 하나둘 주워 담았다.
흙바닥에 솜씨 좋게도 처박힌 것들은 완벽한 보호색으로 위장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찾아 보겠다고 용을 썼는데도 기어이 몇 개가 모자랐고, 용케 찾아낸 것들도 태반은 떡잎이 꺾여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그만 기운이 쪽 빠져 버려서, 정인은 옷이고 뭐고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막 중천에 떠오른 햇볕이 따가워 눈이 아팠지만 이제는 그늘까지 기어갈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야…. 너 하는 꼬라지 보니까 이거 하루 두 시간 해서는 이번 학기 안에 어림도 없겠는데?”
효준은 본격적으로 낄낄거렸다. 아주 고소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무나도 맞는 말인지라 반박할 수 없는 게 그저 분할 따름이었다.
“도와줄 거 아니면 조용히 좀 해.”
“아니, 나도 마음이야 도와주고 싶은데 회장님이 워낙 완고하시니 그렇지. 절대 도와주면 안 된다시잖아.”
웃기는 핑계였다. 만약 현욱이 도와주라 했다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빠져나가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을 인간이다.
“좋게 생각해. 햇볕 좀 보라고 일부러 그러시는 것 같은데, 까놓고 말해서 나무늘보도 너보다는 활동적일걸?”
“알아.”
정인은 불퉁하게 되받아치며 바닥에 누워 버렸다. 한가롭게도 흘러가는 뭉게구름이 해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현욱이 굳이 이런 것을 시키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는 6년 전의 납치사건으로 인해 가장 많이 충격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정작 당사자인 정인은 많은 것을 잊어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그 일을 신경 쓰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그 걱정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조금 더 햇볕을 보기를,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정인이 투덜거리자 효준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 적당히 꽃이나 심는다고 하지 나대긴 왜 나대서.”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단 말이야.”
“그러시겠죠.”
어느샌가 다가온 효준이 손을 뻗었다.
“일어나, 데려다줄게.”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말과 신발 밑창 사이에 가득 찬 것들을 털어 내려 신발을 거꾸로 들자 모래가 우수수 쏟아졌다.
“근데 조효준.”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 보니 갑자기 엄청난 불길함이 엄습했다. 정인은 여전히 흙이 쏟아지는 신발을 흔들며 효준에게 물었다.
“모래에서 식물이 자라기도 해?”
“글쎄…. 왠지 안 자랄 것 같지 않냐?”
그 말에 정인은 들고 있던 트레이를 통째로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휘몰아쳤다.
“아니, 너는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여태까지 안 알려 줬어?”
“참 나,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려 줘?”
이번에도 역시 맞는 말인지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인은 울상을 지었다.
“다 망했어,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진짜 그런 거면 식물 심는 흙 사다 채워야지.”
그 말인즉슨 오늘 한 짓이 전부 뻘짓이 되었다는 소리다.
“씨발, 진짜…. 짜증 나.”
하루가 너무 길었다. 그냥 이쯤에서 포기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왠지 모를 오기가 샘솟았다. 고작 흙과 풀 몇 포기에 섬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조효준. 시간 되면 양재 좀 들렀다 가자.”
분노로 펄펄 끓는 속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이번에는 효준의 도움 없이 일어났다.
“안 될 건 없긴 한데, 뜬금없이 양재는 왜?”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간다. 정인은 이 거지 같은 텃밭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작정이었다.
“삽 좀 사려고.”
***
순식간에 화훼 단지를 찍고 온 효준의 차는 굉음과 함께 정인이 사는 골목 어귀에 멈춰 섰다.
기분을 좀 내야겠다며 효준의 오피스텔까지 가서 바꿔 타고 온 스포츠카였다. 제발 얌전한 차를 타면 안 되겠냐는 정인의 말에 효준은 콧방귀로 응수했다.
정차 중인데도 붕붕 울어 대는 엔진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정인은 끙 소릴 내며 제 이마를 짚었다.
“너 진짜…. 꼭 이렇게 천박한 걸 타고 다녀야 돼?”
“이야, 살다 보니 최정인이 감히 천박을 운운하는 날도 오네. 운전을 그렇게 좆같이 하고 다니면서.”
효준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도어 개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이런 차는 하차감에 타는 거란다, 즐기렴.”
새까만 스포츠카의 문짝이 소리도 없이 하늘로 들렸다. 깜짝 놀라 문을 도로 닫으려 했지만 조수석에 굳어 있던 정인의 모습은 결국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호기심 어린 눈길들이 여과 없이 닿아 왔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화훼 단지에서도 느꼈지만 그냥 도로를 주행할 땐 어차피 안이 안 보이니 그렇다 쳐도, 차를 타고 내릴 때 닿아 오는 시선들은 정말이지 맨정신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제발…. 집 앞까지 데려다주면 안 될까.”
최대한 빨리 건물 안으로 몸을 감추고 싶어 한 번 더 부탁해 봤지만 효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기 못 들어가.”
골목은 이미 주차장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정인이 좀처럼 자차를 끌고 다니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폭이 좁은 세단 정도나 간신히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틈을 효준의 스포츠카로 비집고 들어가는 건 확실히 무리라,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이제 아예 가던 길을 멈추고 차와 정인을 번갈아 구경하고 있었다. 그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하나둘 짐을 꺼냈다. 삽, 곡괭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막대기. 그리고 농기구상의 강력한 추천으로 충동구매한 거대한 포크 같은 물건에 이르기까지.
미끈하게 빠진 차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품을 한 품에 바리바리 끌어안아 추스르자 이윽고 문이 닫혔다. 효준의 차는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짐승 같은 배기음을 남기며 일말의 미련조차 없이 떠나 버렸다.
“하….”
달그락달그락 품 안에서 부딪치는 금속성 때문인지 차가 떠나고 한참이 지나도 사람들의 시선은 자꾸만 정인을 향했다. 최대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처음부터 내 차로 움직이는 건데, 뒤늦게야 후회했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뒤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던 길도 농기구를 안고 걷자니 보통 거리가 아니다. 생각보다 꽤 무거운 탓에 자꾸만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놓치지 않고 열심히 걷는데, 문득 누군가가 정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길을 가던 사람이겠거니 생각하며 한 걸음 왼쪽으로 물러났다. 상대가 똑같이 왼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
엇갈린 것 같아 먼저 오른쪽으로 비켜 주었다. 그러자 상대는 마찬가지로 따라붙어 또 한번 앞을 막았다. 이번에는 고의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찰나에 이건 또 웬 미친 새낀가 싶어 고개를 들자,
“저 주세요.”
시원한 향기가 홱 스치나 싶더니 정인의 품이 가벼워졌다.
“너….”
정인은 차마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게 확률적으로 말이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정인의 눈앞에 나타난 건 놀랍게도 또 유호진이었다.
호진은 정인이 한참을 낑낑대며 들고 온 농기구 전부를 한 팔에 번쩍 들어 안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근처에 방 좀 구하려고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이번 학기에는 학교에 좀 오래 있게 될 것 같아서요.”
이상한 일이었다. 정인이 알기로 체대 건물은 지금 서 있는 장소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너 체대 아니야?”
“네, 맞아요. 그나저나 이거 무게가 좀 있는데…. 이걸 어디서부터 들고 오신 거예요?”
별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두어 번 위아래로 흔들며 묻는 말에 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실은 백 미터 남짓을 걸은 게 전부지만, 겨우 그 정도에 죽을 것처럼 힘들어 헉헉대고 있다는 걸 알리자니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가시는 데까지 옮겨 드릴게요. 어디로 가면 돼요?”
호진은 이미 골목 안쪽을 향해 반쯤 돌아서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번에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정인은 힘없이 손을 들어 그의 등 뒤를 가리켰다.
“…저 앞에.”
“가요.”
그새 놀라 버린 팔의 근육들이 덜덜 떨렸다. 나무늘보도 너보다는 활동적일 거라던 효준의 말이 정답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나무늘보도 이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이런 것들은 왜 갖고 계시는 거예요?”
호진이 물었다.
“할 일이 좀 생겨서.”
“일이요? 음….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세요?”
“그런 셈이지.”
“무슨 일 하시는데요?”
질문도 참 많다. 입을 여는 것마저 귀찮아진 정인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노가다.”
그 말에 호진의 걸음이 멈췄다. 정인이 왜, 하고 묻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앞을 보고 걸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품에 안긴 농기구들은 더 이상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반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자주 나가시는 거예요?”
“아니.”
어느샌가 집 앞이었다. 정인은 두 손을 내밀었다.
“다 왔어. 이제 줘도 돼.”
“조심하세요.”
호진은 아주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것들을 넘겨주었다.
“고마워.”
“형, 잠깐만요.”
막 돌아서려는데, 호진이 다급하게 정인을 불러 세웠다.
“손목 좀 볼게요.”
“아….”
그는 정인의 손목을 쥐고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따끔한 느낌이 피어올라, 정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소매 아래로 길게 긁힌 상처가 보였다.
“일하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아마도.”
돌을 옮기다 긁혔거나, 혹은 농기구를 들고 돌아다니다 긁혔거나. 어쨌든 그 빌어먹을 텃밭과 관련된 일 외에는 딱히 이런 상처가 생길 만한 사건이 없다.
“안까지 옮겨 드릴게요. 몇 호예요?”
호진은 한숨을 푹 쉬더니 정인의 품 안에 있던 것들을 거둬 갔다.
“바로 앞이야, 안 그래도 돼.”
“다쳤잖아요.”
답지 않게 단호한 말투였다. 정인은 흘끔 눈을 들어 호진을 바라보았다.
“약 있으니까 이거 들여다 놓고 소독부터 해요.”
그러고 보니 구급 키트 같은 건 아직 구입하지 않았다. 당장 드러누워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약을 사러 또 외출을 감행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싶어진 정인은 앞장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층 내부 공사는 아직 준비 단계였고, 그동안 정인이 지내기로 한 곳은 입구에서 한 칸 떨어진 안쪽의 방이었다. 중개인이 처음으로 보여 준 그 방이기도 했다.
구식 도어 록의 뚜껑을 젖히자 호진은 한 걸음 물러났다. 비밀번호를 보지 않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물론 크게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비밀번호야 처음 설정되어 있던 그대로 1111이었기에.
“…….”
정인은 문손잡이를 잡고 망설였다. 그래도 몇 번 얼굴을 봤다고 익숙해지기야 했지만, 밀폐된 공간에 알파와 함께 있다가 갑자기 페로몬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서로 곤란해질 것 같아서였다.
“이것만 넣어 드릴게요. 약은 밖에서 바르고요.”
그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호진이 말했다.
“누가 뭐래?”
속을 읽힌 것 같아 괜히 민망해진 정인은 일부러 문을 크게 열어젖혔다. 그러자 처참하기 짝이 없는 내부의 몰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호진의 눈길이 빠르게 방 안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 끝에서 정인은 입술을 깨물며 신발을 벗었다.
“그냥 들어와.”
“네.”
호진은 도어 스토퍼를 내려 현관문이 닫히지 않도록 고정한 뒤에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고 있던 농기구는 현관 옆에 가지런히 세워 둔 채였다.
공간이 트이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마땅히 앉을 곳이 없어, 정인은 방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따라온 호진도 그 앞에 앉았다. 혼자 지낼 땐 좀처럼 느끼지 못했는데, 192센티미터나 되는 거구를 앉혀 놓으니 방이 형편없이 좁아 보였다.
호진은 가방을 열어 구급 용품을 하나둘 꺼냈다. 작은 밴드에서부터 근육 테이프까지 없는 게 없었다.
실내 스포츠라 좀 덜할 줄 알았는데, 대부분 사용한 흔적이 있는 걸 보니 수영도 이래저래 자잘하게 다칠 일이 많긴 한 모양이었다.
“잠깐만 손댈게요.”
거즈와 종이테이프와 연고를 쏙쏙 골라낸 호진이 말했다. 정인은 퉁명스레 물었다.
“일일이 허락받을 거야?”
한쪽 손으로 정인의 손목을 받쳐 든 그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소독했다.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남이 몸에 손대는 거.”
정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과 이삼 년 전까지만 해도 어쩌다 모르는 알파와 몸이 스치면 소스라치게 놀라기 일쑤였고, 많이 나아진 지금도 썩 편안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순순히 팔을 내어 주고 있는 건 그저 피곤해서다. 정말 단지 그뿐이다.
“조금 따끔할 거예요. 많이 아프면 말씀하세요.”
그는 알코올 솜으로 상처 위를 살살 눌렀다. 정말 조심조심 닿아 오고 있는데도 인간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상처가 있는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동안은 조금도 아프지 않던 게 막상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꽤 쓰라렸다.
“형.”
“왜.”
면봉 끝에 연고를 묻혀 돌돌 감으며 호진은 뜸을 들였다.
“…부탁드릴 게 있는데.”
“뭔데.”
상처가 생각보다 길었다. 손목과 손바닥의 경계에서 족히 15센티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면봉이 톡톡 두드리고 지나간 자리마다 연고가 반질거렸다.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 그만두시고, 대신 일주일에 한 번만 제 훈련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깊게 팬 상처 위로 거즈가 덮였다. 호진은 능숙한 손길로 종이테이프를 뚝뚝 뜯어냈다.
“오래는 부탁드리지 않을게요. 열 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
“한 번 만나 주실 때마다 백만 원씩, 아니다. 얼마든 형이 원하시는 대로 드릴 수 있어요. 금액은 그냥 말씀만 하세요.”
패기는 넘쳤지만 너무나도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심지어 조건조차도 구렸다.
수영 선수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텃밭을 가꾸는 대가로 정인이 받을 섬과 별장의 가치를 시급으로 환산하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시간당 4천만 원 이상은 된다. 열 번의 만남이라면 적어도 4억은 맞춰 줘야 그 조건에 근접하기라도 하는 셈이다.
물론 섬 가격의 백 배를 제안한다 해도 언론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니는 선수와 금전 거래를 할 생각 따윈 꿈에도 없기에, 정인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거절의 말뿐이었다.
“문제가 좀 있거든요.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한 건 아니지만.”
그때, 호진이 말했다.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담담한 어조였다.
“작년 경기에서 부상을 입었어요. 그 뒤로는 뭐든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는데…. 수영장에서 형을 만났던 날은 그렇지 않았어요.”
조금의 상함 없이 곧고 정직한 눈빛이 닿아 왔다.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렇게 멀리 나가 본 건 부상 이후로 처음이었어요. 다른 변수는 없었으니 혹시나 해서 그래요.”
그 말에, 정인은 운동을 그만두던 무렵의 스스로를 떠올렸다.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망가진 몸이 몇 번이고 한계에 다다랐음을 경고했지만 숨기기에 급급했고, 늘 모두에게 가장 자신 있는 모습만을 보여 주려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나 버릴 것 같아서. 절대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어서.
“…….”
하지만 이 사람은 다르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정인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사람은 삿된 말들이 천 번을 쏟아져 흔들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반드시 이 순간을 이겨 내고야 말 사람이라는 것을.
그건 정말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모습이어서, 한때 정인이 꿈꿨던 미래와 많이 닮아 있어서.
“…뭘 하면 되는데.”
어쩔 수 없이 그 모습이 부러워졌다. 마음 한편에서 불쑥 열등감이 치솟을 만큼.
“그냥 수영장에 같이 가서 한 시간 정도 봐 주시기만 하면 돼요.”
또한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 사람이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진심이기 때문에. 주제넘게도 유호진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좋아. 그렇게 해.”
“정말요?”
정인의 대답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지금 바로 현금부터 뽑아 올게요. 얼마로 할까요? 500만 원 괜찮으시겠어요? 더 뽑을까요?”
“잠깐만.”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것을 얼른 붙들었다. 정인은 입가에 깊은 동굴이 파이도록 환히 웃고 있는 얼굴로부터 슬쩍 시선을 내려, 탄탄해 보이는 몸을 훑어보았다.
수영을 하는 사람인 만큼 당연히도 어깨는 넓게 벌어졌고, 벗겨 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가늠해도 모든 근육이 단단히 짜여 있는 것 같았다. 팔다리도 신장처럼 타고났는지 쭉 뻗어 길고, 손가락의 마디는 의외로 굵지 않지만 그에 비해 손 자체는 굉장히 컸다.
평생 운동을 해 왔으니 근력이야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할 것이다. 종목 특성상 웬만한 노동으로는 좀처럼 지치지도 않겠지.
“…돈은 됐고.”
아무리 그래도 몸을 쓰는 게 직업인 선수를 데리고 이래도 되나 싶어 조금 망설여졌지만, 따지고 보면 일반인을 훈련에 이용하고자 하는 건 호진도 피차 마찬가지다.
정인은 짧게 숨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말했다.
“대신 너도 나 좀 도와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을 갖다 쓰면 밭을 갈기가 참 수월할 것 같았다.
***
하얗게 밝은 창 앞에 선 정인은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으로는 내내 성북동 저택의 구조를 떠올리고 있었다.
훈련을 돕는 대신 저의 일을 도와 달라던 정인의 말에 호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뭐든 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 패기를 악용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 저택에 데려가 텃밭을 보여 주고, 못 하겠다고 하면 깔끔하게 보내 줄 작정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호진을 들여보낼 방법이 필요했다.
24시간 내내 CCTV가 돌아가고 있는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건 무리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 봤지만 현욱과 주영이 눈치채지 못하게 호진을 들여보내려면 역시 월담을 시키는 수밖에 없다. 담이 조금 높기야 하지만 키가 원체 크니 담 밖에 사다리라도 깔아 놓으면 어떻게든 넘을 수야 있겠지.
문제는 담 위의 장식인데.
“…음.”
적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업 총수의 자택 담장에 고압선을 두르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어릴 적 조효준의 집 담벼락에 대고 물 풍선을 던졌다가 그 자리에서 통구이가 될 뻔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물론 현욱의 담 위를 둘러싼 넝쿨 모양의 장식도 전도율이 꽤 높아 보이는 소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는 없다. 평생을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 담 위에 전류가 흐르느냐 물으면 눈치 빠른 현욱은 곧바로 정인의 계획을 알아차릴 테니까.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시도했다간 정말로 그 자리에서 멀쩡한 사람 하나가 골로 갈지도 모른다.
이제 기댈 곳이라곤 주영뿐이다. 이런 일에 별 관심이 없을 사람이기야 하지만 그를 제외하면 전류의 존재 여부를 알 만한 사람이 없다. 게다가 지금쯤이면 한창 촬영 준비에 바쁠 게 분명해서 정인이 무슨 얘길 하든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그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문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들고 있던 책을 도로 내려놓은 정인은 우선 도어 뷰부터 확인했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아해하며 문을 열자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며 밀려났다. 검은 비닐 봉투 위에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너무나도 수상쩍은 물건이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봉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채 포스트잇을 확인했다.
지난번에 보니 방에 냉장고가 없더라고요. 아침 식사 못 하셨을 것 같아서 놓고 가요. 꼭 챙겨 드세요. - 유호진
단정한 필체 뒤로 잉크가 비쳤다. 정인은 손을 뻗어 포스트잇을 뒤집었다. 빼곡히 적힌 글자가 나타났다.
샐러드 (토핑 : 수비드닭가슴살, 연어, 계란지단)
착즙 주스 (케일, 샐러리, 당근, 라임, 오렌지)
닭고기수프, 그릭요거트
비닐 봉투 안에는 텀블러와 함께 투명한 유리그릇 여러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역시 사는 곳을 알려 주면 안 되는 거였다. 정인은 미간을 좁히며 그대로 돌아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고는 책을 챙겨 집을 나섰다. 호진이 놓고 간 봉투는 건드리지도 않은 채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 비하면 날씨가 많이 풀렸다. 얇은 카디건 하나를 걸치고도 저녁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리로 나서자 수업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하나둘 빠져나온 다른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사이에 섞여 걸으며 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왜?
“형. 저 물어볼 게 좀 있는데요.”
뭔데? 하고 묻는 목소리 뒤로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성북동 담벼락 말예요, 혹시 고압선 깔려 있어요?”
- 선이 있긴 해. 넝쿨 장식물 알지?
역시나였다. 정인은 주영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주영이 덧붙였다.
- 근데 길고양이들 다칠 수도 있다고 못 켜게 해.
“…아.”
정말 현욱다운 일이었다. 왜 이걸 제일 먼저 생각하지 못했는지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 만큼.
매일 밤 태피가 잠들고 나면 그 저택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길고양이가 한둘이 아니다. 일부러 고양이들을 위한 전용 출입구까지 뚫어 놓은 사람이 담 위로 전류가 흐르게 놔뒀을 리가 없다.
“알았어요. 형 오늘 들어오세요? 아…. 네. 그럼 다음에 봬요.”
심지어 주영은 당분간 집에 들어올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일이 정말 쉬워진다. 어차피 정인이 저택으로 갈 시간이면 현욱은 회사에 있을 테고, 그는 본인이 집에 머물 때만 고용인들의 출입을 허락한다. 보안업체 직원들이야 부르지 않는 한 오지 않을 테니 CCTV만 어떻게든 피하면 되는 것이다.
한결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오르막을 오르는데, 건물 어귀에 몇몇 사람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정인은 TH관으로 빠지는 갈림길에 잠시 멈춰 섰다. 인파 한가운데에 삐죽 솟아올라 온 사람의 머리통이 지나치게 익숙한 탓이었다.
역시나 무리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건 유호진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저마다 내미는 종이 위로 열심히 사인을 휘갈기고 있었다.
정각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훈련 대신 캠퍼스에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수업에 가는 길이었을 게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그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떠올릴 생각조차 없는 건지 연신 말을 걸어 댔다. 그리고 호진은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하여튼 미련하다. 생각하며 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문득 고개를 든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
겹겹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너머로 정인을 발견한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살짝 가셨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인을 바라보던 호진은 이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가는진 알 수 없지만 호진의 표정으로 보건대 나쁜 말은 아닐 듯했다. 물론 지금은 백 마디의 좋은 말보다도 그냥 수업에 보내 주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지만.
작은 생선 가시 하나가 가슴에 박힌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그것은 건물 안으로 들어선 후로도, 강의실에 앉은 후로도 그랬다.
정말 신경 쓰이는 인간이다. 왜 뿌리치지를 못할까. 왜 그냥 지나치지를 못할까.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대체 왜 한 걸까.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그런 걸 한 걸까.
…그러니까 그렇게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지.
“형.”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멍하니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던 정인은 고개를 들었다.
호진의 등장에 실내가 일순 술렁였다. 그 틈에서 호진은 씩 웃으며 정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아직 추운데 왜 이렇게 옷을 얇게 입고 나왔을까. 정인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그것이었다.
옷이 얇아지니 살짝 마른 듯한 몸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도저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몸으로 막노동을 한다니. 기본적으로 체형이 좋고 자세도 바른 사람이라 밸런스가 무너진 곳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단언컨대 그런 험한 일을 할 수 있는 몸은 아니었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야 더할 나위 없이 멋지지만, 여린 피부가 찢어져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잔뜩 지친 얼굴로 골목을 걷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니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신청했는데, 형도 이 수업 들으시는구나. 너무 신기해요.”
대충 현대 시 어쩌고 하는 교양 과목이었다. 밤새도록 수강생 목록을 뒤지고 뒤져 정인의 이름만 보고 억지로 집어넣은 것이라 사실 수업 커리큘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침은 드셨어요?”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어차피 아침 안 먹어.”
깔끔하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하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아직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눈길들이 많아서, 호진은 정인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귀찮아도 꼭 챙겨 드셔야 해요. 아침을 거르면 점심이나 저녁에 불필요한 탄수화물을 섭취하게 되는데, 그러면….”
“유호진.”
가만히 듣고 있던 정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네 훈련을 도와주기로 했고, 너는 그 대가로 내 일을 도와주기로 했어. 여기까진 이해가 돼?”
호진은 얌전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인이 말을 이었다.
“너랑 나는 기본적으로 생판 모르는 남이야. 서로 약속한 일 외에는 딱히 볼 일 없는 사이라고.”
“…….”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허락 없이 찾아오지도 말고.”
아마 아닐 거예요, 다른 수업에서도 보게 될 테니까요.
호진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러고는 다른 말을 꺼냈다.
“제가 찾아간 게 아니라 그릇들이 찾아간 거라고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정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한껏 기분 나쁜 티를 내면서도 이제 처음 만나던 때처럼 싸늘하게 쳐 내지는 않는다.
호진은 비실비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췄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최정인이라는 사람은 결국 물면 이빨이 들어가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저렇게 구는 것이다. 발아래에 선을 그어 놓고 이걸 넘지 말라 날을 세워도 결국 조금만 그 안으로 들어서면 더는 매몰차게 굴지 못하니까. 그러니 애초에 선 안으로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일부러 더 쌀쌀맞게 구는 것이다. 하지만 호진은 자신이 이미 그 선을 반쯤 넘어갔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어떻게 물면 좋을까.
더 가까워지려면 얼마나 더 깊게 이를 박아 넣어야 하는 걸까.
“죄송해요, 걱정돼서….”
풀 죽은 척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저열한 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인의 표정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 마음 쓰여서 그래요. 한 번에 많이 만드는 편이라 남는 걸 드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세요. 어차피 형이 안 드시면 버려야 해요.”
애원하듯 한 번 더 말했다. 그러자 정인이 물었다.
“너 원래 이래?”
“네?”
“모든 사람한테 이렇게 미련하게 굴어?”
“…….”
“고작 남 밥 굶는 게 그렇게까지 신경 쓰이냐고.”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만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네. 형이 아닌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너무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잤을 것 같아요.”
정인은 침묵했고, 호진은 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둘. 둘의 반, 둘의 반의반.
“그래도 그러지 마.”
“…….”
“피곤할 일 굳이 늘리지 말라고.”
또 이빨이 들어가네.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삐져나온 웃음이 온 얼굴에 걸렸다.
“하나도 안 피곤해요. 남는 걸 드리는 거라니까요?”
“…….”
“가끔 시간 되는 날만 만들어서 드릴 테니 꼭 드셔 주세요.”
네? 하고 한 번 더 묻자 정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호진은 우유처럼 뽀얗고 고운 뺨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눈을 향해 묻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렇게 말랑말랑하냐고,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었냐고.
그리고 그거 아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본인이 아주 예쁜 사람인 거 알고 있냐고.
***
“출발할게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주차장으로 달려간 호진은 정인이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건물 앞에 차를 대령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자취방에서 농기구를 꺼내 싣는 건 금방이었다.
도로를 달리는 내내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어색해하거나 불편해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인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호진은 뭔가 일이 생기면 그것에만 집중하는 타입이기 때문이었다.
“…는 없어요?”
절간을 방불케 하는 고요함 속에서 호진이 물었다. 잠에 빠져들려던 정인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뭐?”
“혹시 몰라서요. 음식 알러지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건 빼게.”
아, 밥 얘기구나.
“없어.”
노곤노곤한 날씨 때문인지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정인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몰래 하품했다.
호진의 차는 안정감 면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스웨덴제 중형 SUV였다. 심지어 운전 스타일마저도 조금 답답하다 싶을 정도의 정석이라서, 보조석에 심심하게 앉아 있자니 과장 조금 보태 도로를 굴러가는 건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건지 좀처럼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몇 번인가 반복하자 머지않아 익숙한 동네가 나타났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거리의 초입에서 정인은 내비게이션을 꺼 버렸다. 과속 방지 턱이 있다며 10초에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키던 음성이 힘없이 사그라졌다.
“두 번째 코너에서 좌회전.”
“네.”
호화로운 단독 주택이 모여 있는 길로 들어섰다. 현욱의 저택은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붙어 있었다.
“이런 데서 막노동…을 하시는 거예요?”
“응. 차는 저 뒤쪽에 주차하면 돼.”
CCTV 사각지대를 떠올리며 한 지점을 가리켰다. 차는 정확히 정인이 가리킨 곳에 멈춰 섰다.
시동을 끄자마자 차에서 내린 호진은 부리나케 보조석으로 달려와 문을 열어 주었다.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만 해도 늘 기사와 함께 다녔던 정인은 어색함 없이 그를 따라 내렸다.
“일단 여기서 기다려.”
“네.”
농기구 두어 개를 챙긴 뒤, 정인은 긴 담을 빙 돌아 대문 앞에 섰다. 문가에 붙어 있는 패드를 가만히 쳐다보자 홍채를 읽은 센서가 금세 반응했다.
곧 문이 열리며 거대한 정원이 나타났다. 대문으로부터 저택까지 쭉 뻗은 길 위로 조경수가 산들거렸다. 정원의 좌측 구석에는 주영이 취미로 돌보는 관엽 식물 온실이, 우측 구석에는 오직 정인을 위해 지어진 별채가 있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전부 정원사의 작품이었다.
담 아래의 텃밭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헥헥대며 달려온 정인은 농기구를 전부 흙바닥에 내팽개치며 담장 너머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아직 거기 있어?”
네에,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 사다리 가지고 갈게.”
“사다리 안 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이 담 넘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뭐?”
호진이 서 있을 법한 자리에서 툭, 하고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잠깐만!”
정인은 꽥 소리쳤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곧바로 별채의 문을 열었다. 정인이 외국에서 지내는 동안 주인 없이 비어 있던 별채는 어느샌가 태피의 식자재 창고가 되어 있었다. 냉장고를 열자 역시나 싱싱한 생고기 몇 덩이가 보였다.
태피의 점심 재료를 훔쳐 낸 정인은 그것을 들고 뽈뽈 달려가 담 아래에 섰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고기를 집어 던졌다.
“…이게 뭐예요?”
물론 예상대로 담 위에 예쁘게 안착해 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마 호진의 발아래쯤 어딘가에 떨어졌겠지.
“담 위에 장식 보이지. 그 위로 올릴 수 있겠어?”
“해 볼게요.”
소리도 없이 날아든 고기가 정확히 뾰족한 장식 위에 걸렸다. 끄트머리가 담벼락 위에 닿아 있으니 애매하지만 대충 접지도 됐다.
전류가 흐르고 있다면 스파크라도 튀었겠지만, 멀쩡하게 걸려 흐늘거리고만 있는 것을 보니 역시 고압선은 꺼져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됐어. 그래도 너무 높긴 한데….”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커다란 손이 담 위로 불쑥 올라와 장식의 뾰족한 부분을 쥐었다. 엄청난 팔 힘으로 몸을 끌어 올린 호진은 담 위에서 머리만 내밀어 씩 웃었다.
신체 능력이 특이점을 넘으면 이런 걸 할 수도 있는 거구나. 새삼 감탄하며 정인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호진은 이미 담을 반쯤 넘은 채였다.
“뭐 하세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쭉 뻗고 있는 정인을 보며 호진이 물었다.
“받아 줘야 할 거 아냐.”
“…네.”
호진이 웃었다.
“셋 하면 뛸게요. 하나, 둘.”
받아 주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니 불쑥 무서워졌다. 어떻게 받아야 하지. 쟤 저러다 잘못 떨어져서 다치면 어떡하지.
“셋.”
그러나 호진은 가차 없이 셋을 셌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단단한 팔이 정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충격에 뒤로 밀려나지 않도록 정인을 한 품에 안은 호진은 그대로 제 왼쪽 다리를 축 삼아 몸을 반 바퀴 돌렸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가해진 힘은 정인이 미쳐 느낄 새도 없이 전부 호진에게 옮겨 갔다.
발밑의 모래가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정인은 모든 것이 멈춘 뒤에야 슬그머니 눈을 떴다.
눈꺼풀 밖에 멈춰 있던 햇살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살짝 눈을 찡그리자 호진이 손그늘을 드리워 햇살을 막아 주었다.
“…….”
맞닿은 품에서 고아한 나무 향기가 풍겼다. 아직 가지고 있는 호진의 트랙 톱에서도 똑같은 향이 났지만, 지금은 조금 더 진하고 시원했다. 마치 편백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숲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형 덕분에 무사히 내려왔네요.”
정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까맣고 부드러운 눈동자, 반듯하게 뻗은 콧날, 시원하게 웃는 입매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서 찬찬히 뜯어보니 꽤 예쁜 얼굴이었다. 조금 더 이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제 놔.”
정신을 차리고 가슴팍을 밀어 냈다. 손바닥 아래를 스치는 대흉근이 돌처럼 딱딱했다.
“뭘 하면 되는 거예요?”
“아…. 음, 여길 전부 파내야 돼.”
정인은 고개를 두어 번 흔들고는 텃밭을 가리켰다.
“이걸 왜요?”
“땅이 이러니 뭘 심을 수가 없어서.”
그 말에 호진은 몸을 낮춰 맨손으로 흙을 헤집었다. 커다란 손을 몇 번인가 굴리자 흙이 모조리 떨어지고 자갈만이 남았다. 그것을 저만치 던져 버리며 호진이 말했다.
“조금만 손보면 될 것 같은데요.”
“그래?”
“네, 나쁜 흙은 아니에요. 뭐 심으실 거예요?”
그는 정인이 농기구를 던져둔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땅을 파는 일이니 당연히 삽을 집어 들 줄 알았지만, 호진이 들고 온 것은 농기구 상점 주인이 강력히 추천하던 거대 포크였다.
“당근, 고추, 블루베리, 양파.”
텃밭의 끄트머리에 포크를 처박은 호진은 정인을 돌아보았다.
“…고용주가 그렇게 하래요?”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너무 대중이 없어서요. 하면 할 수야 있긴 한데 효율이 좀 떨어질 거예요.”
호진은 팔을 쭉 뻗어 텃밭의 반대편 끝을 가리켰다.
“블루베리나 고추는 실생보다 모종을 사다 심는 게 빨라요. 하지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관수를 한다고 쳤을 때, 수압을 모종에 맞추면 당근 씨는 너무 작아서 떠내려가요. 반대로 당근에 맞추면 모종은 물 마름으로 죽겠죠.”
“…….”
“그렇다고 일일이 그걸 따져 가며 한 줄씩 물을 주는 건 너무 시간 낭비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시킨 걸까요?”
“…몰라.”
사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지껄였을 뿐이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뭐가.”
“노가다라고 하셔서 건설 현장 다니시는 줄 알았거든요. 그건 너무 힘든 일이라.”
호진은 어느샌가 땅에 대고 포크를 죽죽 긋고 있었다. 한 번 길게 지나갈 때마다 자갈만 마법처럼 날의 안쪽에 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정인은 그늘 아래 앉았다.
“…근데 넌 어떻게 이런 걸 할 줄 알아?”
“저희 집 농사지어요.”
한들한들 불어오는 봄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정인의 얼굴 위로 그물 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서울 올라오기 전까진 저도 웬만해선 종일 밭에 있었고, 여름 방학은 딱 농번기다 보니 대회가 겹치지만 않으면 종종 내려갔어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평생 볕이라곤 조금도 보지 않은 것처럼 새하얀 얼굴을 하고서는 농사일을 거들어 본 적이 있다니.
“형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어머니께서 아주 미인이실 것 같은데.”
호진의 물음에 정인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엄마는 없어.”
그러자 호진이 하던 것을 멈추고 정인을 돌아보았다.
“아, 죄송….”
딱히 죄송할 일은 아니다. 아빠가 둘이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어쩐지 오해한 것 같아 해명하려는데, 어디선가 으르렁 하고 낮게 우는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본 곳에는 태피가 서 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발소리조차 없었다.
“태피.”
조용히 태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태피는 평소와 달리 정인에게 다가오지도, 애교를 부리지도 않았다.
귀와 꼬리를 쫑긋 세우고 두 눈은 완전히 호진에게 고정한 채였다. 태피의 무게 중심이 앞발에 걸린 것을 확인한 정인은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낯선 침입자의 존재에 한껏 예민해져 있을 개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유호진, 너 절대 움직이지 마. 지금 이 말에 대답도 하지 마.”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호진을 향해 걸음을 뗐다. 이제 태피는 완전히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만 잘못했다간 그대로 호진에게 달려들어 목부터 물어뜯을 기세였다.
느리게 다가간 정인은 호진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아이, 예쁘다.”
그러고는 태피를 향해 웃어 보이며 단단한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호진은 적잖이도 긴장한 것 같았다. 모든 근육이 굳어 버린 게 느껴졌다.
정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몸 낮춰. 그러자 호진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마침내 눈높이가 맞아 들 때쯤, 정인은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풀어 호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옳지, 예뻐라. 어쩌면 이렇게 똑똑하고 멋진 강아지일까? 정말 대단한 강아지야.”
평소 태피에게 해 주는 칭찬을 그대로 읊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기세로 이를 드러내고 있던 태피가 입을 다물었다. 제가 좋아하는 정인이 예뻐해 주는 녀석이라면 아주 천견공노할 나쁜 놈은 아닐 거라 판단한 듯했다.
호기심 어린 코가 이쪽을 향해 킁킁 벌름거렸다. 정인은 호진의 목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태피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저벅저벅 다가서는 태피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안심하기는 이르다. 정인은 목소리를 한 톤 더 높여 열렬하게 호진을 칭찬했다.
“우와, 호진이는 예쁜 강아지네. 정말 사랑스럽고 귀여운 강아지다. 아이 예뻐, 최고야…. 천천히 손등 내밀어.”
호진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손등을 내밀었다. 다리께에서 킁킁대던 태피는 손등의 냄새를 맡더니, 곧 성의 없게 그를 한 번 핥아 주었다. 대충 통과인 것 같았다.
“하아….”
정인은 그제야 호진에게서 떨어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저 때문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피는 축 늘어진 정인의 손바닥 아래로 무식하게 제 머리를 밀어 넣었다. 저 낯선 놈을 예뻐해 줬으니 자기도 그만큼 예뻐해 달라는 뜻이었다. 힘없이 그를 쓰다듬으며 호진을 바라보았다.
“뭐 해?”
“아…. 저.”
어쩐지 호진은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굽힌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쓰면 안 될까요.”
적잖이도 무서웠나 보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정인의 눈에야 여전히 아기 강아지지만 호진에게는 아닐 것이다. 40킬로그램을 가뿐히 넘는 초면의 도베르만이 그렇게 살벌하게 구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낮 동안은 태피가 자유롭게 정원을 드나든다는 사실을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게 실수였다. 손님을 데려올 거라면 리쉬를 꼭 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미안한 마음으로 호진의 기색을 살피며 정인은 별채를 가리켰다.
“저 안에 있는 거 쓰면 돼, 문 열려 있어.”
“금방 다녀올게요.”
호진은 엄청난 속도로 별채를 향해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화장실에 들어선 호진은 깊게 숨을 내뱉었다. 한 겹의 옷 너머로 붙어 오던 몸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했다.
호진은 머릿속으로 데드 리프트의 동작을 떠올렸다. 발을 단단히 땅에 붙이고, 어깨를 완전히 펴서 바를 당겨 쥐고, 천천히 앞뒤로 움직여 퍼스트 풀 지점을 찾은 다음에는 그대로 무게를….
효과는 전무했다. 이번에는 다른 생각을 했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 이제 볕이 꽤 좋아졌으니 지금쯤이면 아마 논에 퇴비를….
“…아.”
역시나 소용없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결국 종착점은 최정인이었다.
호진은 잔뜩 인상을 쓰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프도록 발기한 페니스가 앞섶을 밀어 내며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야 생리 현상이니 그렇다 쳐도 이렇게 뜬금없는 상황에서, 심지어 사람을 보고 발기라니.
분명 페로몬의 영향은 아니다. 하루 종일 운동에 온 신경을 쏟고 나면 다른 건 생각할 기운도 겨를도 없는 날이 더 많았고, 애초에 호진은 상당히 금욕적인 편이기도 했다. 게다가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고 있는 한은 설령 우성 오메가 열 명에게 둘러싸여 있다 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건 아마 정신적 자극 때문인 것 같았다. 투명한 봄볕을 두르고 그만큼 예쁘게 웃으며 안겨 오는데 어쩌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로 정인의 시선 끝에 선 개가 되고 싶었다.
그러면 다정한 목소리로 칭찬해 줄 테니까. 따뜻하게 웃어 주는 얼굴에, 그 예쁜 손에 입 맞춰도 기분 나빠 하지 않을 테니까.
“…….”
타일에 기대어 있던 등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저도 모르게 아래로 손이 갔다. 명백한 정욕이었다.
자위 같은 건 좀처럼 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자신의 집도 아니다. 형사 처벌을 받는대도 할 말이 없을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정인을 보러 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느리게 아래를 문지르던 손이 속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핏줄이 불거져 선액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귀두 끝에 손이 닿자 복근에 힘이 들어갔다. 아, 하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기둥을 꽉 쥐었다.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어도 끝이 한참 남아 갈증이 났다. 호진은 제 아랫입술을 꽉 물어 신음을 삼키며 손을 흔들었다.
빨리 끝내고 나가야 하는데 사정감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정인이 의심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 여기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는 민감도 관리를 받지 않는 일반인이니 아마 화장실 문 앞에만 서도 이미 그 너머에 가득 찬 페로몬을 느끼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아….”
정인의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허리가 튀었다.
그 예쁜 입술에 키스하면 어떤 느낌일까. 얇은 옷감 너머의 피부는 얼마나 더 희고 고울까.
언감생심 꿈에도 그리지 않던 일을 상상하며, 티셔츠 자락을 쇄골까지 끌어 올렸다. 정인의 향을 찾기 위해 옷감에 코를 박았지만 늘 복용하는 억제제 때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이쯤 어딘가에 얼굴을 기댔는데. 가느다란 팔이 이 허리를, 목을 감싸 안았는데.
뭐라도 남아 있을 텐데. 그래야 하는데.
“…하아.”
할 수만 있다면 핏줄을 전부 끄집어내 그 안에 스며든 억제제의 입자를 모조리 파내고 싶었다.
그러면 느껴질 테니까. 그렇게 끔찍이도 달콤하다는 오메가의 향이. 세상에 단 하나뿐일 저 사람만의 체향이.
폭력적인 욕심에 숨이 멎었다. 빠르게 페니스를 흔들던 손의 악력이 더없이 거세어지고, 복근이 수축했다. 기둥 전체가 끄떡이며 구멍 끝에서 짙은 정액이 터져 나와 타일 위에 뿌려졌다. 쭉, 쭉. 몇 번이나 정액을 토해 낸 뒤에야 겨우 거친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하….”
엉망이 되어 버린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짐승 새끼도 아니고.”
설핏 이성이 돌아오자 너무너무 미안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정인을 생각하니 엄청난 죄책감과 자괴감이 번갈아 몰아쳤다.
호진은 차가운 물을 틀어 얼른 바닥을 치웠다. 그다음에는 몇 번인가 물로 어푸어푸 얼굴을 닦아 내다가 아예 물을 받아 놓고 그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한 번의 거한 사정이 지나갔음에도 좀처럼 죽을 생각을 않던 아래는 1분 남짓을 물속에 머문 뒤에야 간신히 가라앉았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응?”
줄줄 흐르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제 뺨을 철썩철썩 내리치며 화장실을 벗어났다. 그제야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인지 실내 곳곳이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정인을 고용한 사람의 집은 아마도 정원 끝에 있는 큰 건물인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다 보니 정원 쪽으로 난 커다란 창에 눈길이 갔다. 커다란 도베르만의 목을 끌어안고 먼 곳을 바라보는 정인의 모습이 보였다.
홀린 듯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나뭇가지가 움직일 때마다 정인의 얼굴 위로 내려앉는 햇살의 모습이 변했다.
차가운 유리 위로 손을 올렸다. 한 손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아진 정인의 등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유도 없이 가슴이 아파 왔다. 호진은 정인이 저에게 해 주었던 말들을 따라 해 보았다.
“…아이, 예뻐라.”
아름답고, 착하고, 멋지고, 다정한 사람.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고용주가 기르는 개까지 마음 다해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그런 따뜻한 사람을 두고 자위나 해 버린 스스로의 모습이 정말 견딜 수 없이 추잡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 다시는 그런 생각일랑 말아야지. 굳게 다짐하며 한 겹의 유리 너머 얌전히 앉아 있는 정인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너무 좋았다.
잠깐을 봐도 그렇게 좋기에 오래 보면 어떠려나 했는데, 이렇게 두고 가만히 보니 정말 말도 못 하게 좋았다.
***
최현욱 회장은 모니터에 눈길을 고정한 채 만년필의 캡을 돌려 닫았다.
“…….”
여러 개로 분할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그중 하나를 확대했다. 별채 창가에 우두커니 선 인영이 조금 더 선명히 들여다보였다. 분명 조금 전 담을 넘어온 그놈이었다.
CCTV의 정확한 개수는 연인인 주영에게조차도 알린 적이 없다. 사실 화장실과 침실을 제외하면 저택 전체를 통틀어 사각지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원 구석을 비추는 카메라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신 듯한 조카님께서는 여전히 태평한 모습으로 그늘 아래에 앉아 계셨다. 이따금 태피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정지 화면이라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분명 사람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별채의 침입자는 이제 한 손을 유리 위에 얹은 채 가만히 정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동물들 다치지 말라고 꺼 둔 것일 뿐, 담장 위의 고압선은 원래 저런 침입자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넘어와 심지어 정인의 별채를 들락거리기까지 하다니.
이걸 어떻게 조질까, 생각하며 현욱은 가만히 그의 모습을 살폈다. 저도 아까워서 잘 안아 보지 못하는 조카를 몇 번이나 끌어안고 실실대던 낯이 어쩐지 익숙한 것 같았다.
별채 내부의 다른 카메라를 조정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현욱이 아는 얼굴이었다.
“실장님.”
그는 곧바로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유호진 선수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뜬금없는 부탁에도 비서의 표정에는 한 치의 변화가 없었다.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면 될까요.”
“음…. 그냥 전반적으로 궁금하네요, 뭐 하는 새낀지.”
비서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가족 및 밀접 접촉자 정보, 6촌 이내 보유 자산 일체와 최근 10년 진료 기록, 출입국 히스토리 포함해 24시간 내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현욱은 곧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별채를 나선 유호진은 이제 정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
금세 호진과 친해진 태피는 그를 퍽 마음에 들어 했다.
“또 놀고 싶어?”
노란 테니스공을 물어 온 태피가 호진의 발아래에 머리를 붙였다. 잔뜩 신이 났는지 하늘로 치켜든 엉덩이 위의 꼬리는 정신없이 살랑대고, 입술도 완전히 귀에 붙어 있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여태까지 저 정도의 풀 파워로 공을 던져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절대적으로 기력이 모자라는 정인은 물론이고, 평생 꾸준히 운동을 해 온 현욱이나 몸 만드는 게 직업인 주영마저도 공놀이에서만큼은 네 발 달린 개의 비위를 맞추지 못했다. 공놀이로 태피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가끔 주영을 찾아오는 메이저 리그 투수뿐이었다. 평균 구속이 150km를 훌쩍 넘는.
그런데 지금 유호진이 그걸 해내고 있는 것이다.
“옳지, 멋지네.”
태피의 이마를 쓰다듬어 준 호진은 팔을 크게 휘둘러 웬만한 야구선수 뺨치는 폼으로 공을 던졌다. 그러고는 태피가 저만치 달려가자 그제야 포크질을 재개했다.
“오늘은 거기까지만 해.”
시간을 확인한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는지 머리가 핑 돌았다. 그새 공을 물어 온 태피는 헥헥대며 정인의 발치에 드러누워 버렸다. 한참 동안 공을 던져 준 호진의 노고 덕에 드디어 지친 것이다.
“포크는 여기다 세워 놓으면 돼.”
“포크…. 이거요?”
정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진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건 네기라고 해요, 네이버 할 때 그 ‘네’요.”
그는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정인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나무 아래의 농기구를 하나하나 가리켰다.
“삼양 낫, 막 호미, 홉바…. 그리고 얘네들은 살짝 이름이 다르긴 한데 다 괭이예요.”
“다 다르게 생겼는데 이름은 똑같다고?”
그러자 호진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정인에게 닿지 않도록 한 손으로 날 끝을 막은 뒤 여길 보라며 손짓했다.
“끝이 뾰족하죠? 발이 하나면 한발 괭이, 세 개면 세발 괭이…. 두 개짜리는 두발 괭이, 혹은 마늘 괭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뭐에다 쓰는 건데?”
“음…. 돌을 고를 수도 있긴 한데, 대부분은 잡풀 뽑을 때나 약초 캘 때 쓰죠.”
매번 호진을 데려다 쓸 수는 없을 테니 알아는 둬야겠다. 정인은 속으로 그가 알려 준 것을 복기했다.
이윽고 호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늘 아래에 걸터앉았다. 2리터짜리 생수병 하나를 쉬지도 않고 비워 내는 모습이 마치 하마 같았다.
“저 자리에 원래 나무가 있었나 봐요? 땅 밑에 잔뿌리가 꽤 남아 있던데.”
호진이 자갈밭을 가리켰다.
“응.”
정인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텃밭을 바라보았다.
“…목련 나무였어.”
할아버지가 유달리도 좋아하던 나무였다.
지금은 죽은 뿌리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봄이면 가지마다 새빨간 꽃이 피었고 가을이면 정인의 얼굴보다 큰 이파리가 수북하게 떨어져 바스락거렸다.
떨어진 잎을 주워다 손톱으로 구멍을 뚫어 가져가면 그는 매번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늘 정인을 칭찬했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걸 가져왔느냐고, 나뭇잎 위의 웃는 얼굴이 꼭 우리 손주처럼 예쁘게도 생겼다고.
‘할아버지, 있잖아요….’
‘응, 아가.’
정인은 언젠가 조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건 언젠가 죽는 거래요. 정말 그래요?’
‘…….’
‘그럼 이 나무도 언젠가 죽어요?’
틈만 나면 어리광을 부리고 떼를 써도 허허 웃기만 하던 사람.
‘아주 오래 살 거다. 할애비 집에 있는 큰 소나무는 벌써 오백 살도 넘었는걸?’
‘하지만 병에 걸릴 수도 있잖아요. 사고가 나서 죽으면 어떡해요?’
정인에게는 큰 소리 한번을 낸 적이 없으나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나 정인의 큰 아빠인 정훈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이형질 패혈증으로 아내를 잃은 조부는 4남매 중 유일한 알파였던 둘째 아들에게 모든 화살을 돌렸고,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믿으며 자라 온 정훈은 원경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제 감정을 표현하는 법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부가 제 아버지의 유년기를 망쳐 놓은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당시의 정인은 너무 어렸고, 정훈은 자신의 일은 자신의 일로만 남겨 둔 채 정인과 그의 관계를 존중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단언컨대 정인은 한순간도 빠짐없이 그를 사랑했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에야 정훈을 위해 한 조각도 꺼내 든 적이 없으나, 그렇다 하여 할아버지를 향하는 그리움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따뜻한 품은 어린 정인을 지키던 세상의 아주 큰 부분이었으니까.
한없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죽을 만큼 그리웠다. 너무너무 그리워서 가끔은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기도 했다.
‘나무가 죽는 건 싫단 말이에요….’
울지 마라, 울지 마라. 그는 엉엉 우는 정인을 꼭 안아 주며 다독였다.
‘봐라. 아직 나뭇잎이 파랗지? 정인이가 어른이 된 뒤로도 오래도록 살겠다고 이렇게 파란 얼굴을 하고 있는 거란다.’
‘…흐윽.’
‘하지만 만약 죽는대도…. 마지막까지 정인이를 걱정하고 또 많이 아낄 게야.’
이미 손쓸 수도 없이 죽어 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그날 나무에 자신을 빗댔다는 사실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우리 귀한 아가가 마음 아파 울면 어쩌나, 이 예쁜 얼굴에 먹구름이 끼면 어쩌나…. 그저 그 생각뿐이겠지.’
아니. 당신은 그렇게 가면 안 되는 거였다. 그토록 외롭게 세상을 떠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다음에는 아주 먼 곳에서 정인이가 커 가는 모습을 쭉 지켜보다가….’
마지막 임종 정도는 지키게 해 줬어야 했다. 외국에 가 있다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볕 좋은 봄이 오면, 저를 대신해 정인이를 지킬 나무의 새싹을 보내 줄 거란다.’
작별의 인사를 할 기회는 주었어야 했다.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는 손을 잡아 볼 수 있게 해 주었어야 했다.
‘…그러니 정인아, 부디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다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내게, 사랑했다 말할 시간을 주었어야 했다.
“뿌리가 깊은 수종이네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호진은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실바람 부는 새봄과 잘 어울리는, 참 맑은 얼굴이었다.
“나무가 죽어도 가끔 잔뿌리는 살아요. 그걸 다 걷어내야 다음 작물이 멀쩡히 크는데, 워낙 깊게 얽혀 있어서 아마 형 혼자 하기엔 좀 벅찼을 거예요.”
정말 저런 곳에서 새 나무가 멀쩡히 자랄 수 있을까.
“…넌 언제 서울에 올라왔어?”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이었으니까, 열네 살 겨울이네요.”
“방학 때마다 집에 내려갔다며. 그 나이에 너 혼자 올라와서 살았다고?”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 대회에 입상하면서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들어가게 됐거든요.”
그럼 그때부터 쭉 혼자 살았다는 건가. 빈틈없이 관리받으며 곱게 자라 온 도련님 같은 인상을 하고서는 이 또한 의외의 역사였다.
“고향은 어딘데?”
“공주요. 저희 집은 의당면이라고 시내에서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의당면 안에서도 손꼽히게 작은 마을이에요. 과장 좀 보태서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 만큼.”
정인은 피식 웃었다.
“난리가 났겠네, 너 금메달 따고.”
호진은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좀 그렇긴 했어요. 잔치도 크게 하고.”
보통 잔치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코딱지만 한 시골 마을에서 세계 정상급 선수가 나왔는데 모르긴 몰라도 공주시 전체가 뒤집혔겠지. 어쩌면 시내 곳곳에 유호진의 모습을 본뜬 동상 같은 게 몇 개 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아, 맞다.”
호진이 가방을 열었다. 그는 뭔가 싶어 킁킁대는 태피에게 근육 테이프 냄새를 맡게 해 주고는 정인을 올려다보았다.
“저 테이핑 다시 해야 될 것 같은데…. 잠깐만 옷 벗어도 돼요?”
같은 남자끼리 별걸 다 묻는다. 정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잠깐 눈치를 보나 싶더니 땀에 젖은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젖혔다.
“…….”
정인은 흘끔 그의 몸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완벽한 형태의 근육들이 커다란 몸 한가득 차올라 있었다. 타고난 신체 조건에 더해 그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낸 것 같았다.
한창 운동을 하던 때도 정인의 몸은 이렇게까지 울퉁불퉁했던 적이 없다. 성인이 되기 전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도저히 같은 종의 생물이라곤 믿을 수가 없어서 신기한 마음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호진은 너덜너덜해진 테이프를 아무렇지 않게 뜯어 버리고는 새 테이프의 끄트머리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인은 한숨을 쉬며 그의 곁에 앉았다.
“줘 봐.”
호진의 손에 들려 있던 테이프를 빼앗았다. 눈대중으로 근육의 길이를 가늠하고 쭉 잘라 냈다. 능숙하게 테이프를 감는 정인의 손을 바라보며 호진이 놀란 듯 물었다.
“이걸 어떻게 할 줄 아세요?”
“운동했었어.”
옛날에. 작게 덧붙이며 승모근과 삼각근을 한 바퀴 크게 둘러 감쌌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예전처럼 깔끔하게 되진 않았지만 끝을 잘 붙여 놓으니 얼추 모양은 났다. 혼자 끙끙대며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무슨 운동 하셨어요?”
“육상 중거리.”
호진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금세 테이핑을 마친 정인은 호진의 어깨를 툭 쳤다. 다 됐다는 뜻이었다.
“운동에 잘 어울리고 말고가 뭐 있어.”
“있죠, 비율이 이렇게 좋은데.”
그렇게 말하며 호진이 정인을 향해 돌아앉았다. 앉은키 차이가 조금 나는 탓에 정인의 시선은 호진의 가슴팍에 꽂혔다. 실내 스포츠를 하는 사람답게 피부는 새하얀데, 그에 어울리지 않게 꽉꽉 짜여 있는 근육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눈길을 돌려 버렸다.
“왜 그만두셨어요?”
호진이 물었다.
“페로몬 장애 때문에.”
딱히 숨겨야 할 일은 아니었다. 정인은 덤덤히 대답하며 늘어진 테이프 끝을 갈무리해 호진의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쭉 베타로만 알고 살다가 열여섯 살에 발현했거든. 민감도 관리를 받자니 몸이 못 버텨서 어쩔 수 없게 됐지.”
“…….”
내내 해맑게 웃고 있던 호진의 표정이 굳었다. 정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다 지난 일이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호진은 여전히 멍하니 앉은 채 정인만 쳐다보고 있었다.
“안 갈 거야?”
“…가야죠.”
새 티셔츠를 꺼내 입은 호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처럼 넘어가면 되는 거죠?”
“정말 사다리 없어도 되겠어?”
“괜찮아요.”
태피는 성큼성큼 벽을 향해 다가서는 호진의 걸음을 쫓았다. 마지막까지 그를 쓰다듬어 준 호진이 정인을 돌아보았다.
“조금 이따 봐요, 형.”
그러고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담장 끝 장식물을 쥐었다. 아직 그 위에 걸려 있는 고기를 건져내 태피에게 던져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무나도 쉽게 담을 넘어간 호진의 모습은 이내 정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정도면 보안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하며 돌아섰다. 호진이 반쯤 갈아 놓은 텃밭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나무의 뿌리 위를 단단히 덮고 있던 자갈들은 이제 거의 다 텃밭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볕 좋은 봄이 오면, 저를 대신해 정인이를 지킬 나무의 새싹을 보내 줄 거란다.’
“…거짓말.”
볕이 아무리 좋아도 죽은 나무는 새싹을 피우지 못한다.
“아무것도 없잖아요.”
정인은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에 대고 투정을 부리며 돌아섰다. 그러고는 담 너머에 기다리고 있을 호진을 향해 걸음을 뗐다.
***
거대한 와퍼 세 개. 감자튀김 두 봉지. 오렌지주스 한 병과 너겟 열두 조각.
수영장에 가기 전에 뭐라도 ‘간단히’ 먹어야겠다며 호진이 정인을 끌고 들어선 곳은 체육관 후문에 붙어 있는 패스트푸드점이었다. 그는 묻지도 않고 정인의 몫으로 샐러드와 랩과 탄산수를 시켜 내밀었다. 튀긴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앞에는 딱 봐도 건강에 좋지 않아 보이는 햄버거가 기름을 줄줄 흘리며 쌓여 있었다.
“…그게 다 들어가?”
인터넷에서 본 푸드 파이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아서, 정인은 방울토마토만 겨우 건져 먹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형은 그게 다 드신 거예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혹시 입맛에 안 맞으세요? 다른 걸로 사 올까요?”
호진은 곧장 먹던 것을 내려놓았다.
“됐어.”
얼른 그를 만류했다. 약속한 훈련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도 했고, 다른 메뉴라고 해서 크게 식욕이 동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호진은 중죄라도 지은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무난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건데…. 형은 여기 오면 보통 뭐 드세요?”
“보통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 특별한 날 아니면 딱히 와 본 적이 없어서.”
정말로 학창 시절에도 이런 곳에는 별로 와 본 적이 없었다.
정인과 어릴 적부터 어울려 온 친구들은 전부 대기업의 후계자거나 최소 3선 이상 국회 의원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개중에는 성인이 되면서 조효준처럼 망나니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긴 했지만, 적어도 부모의 그늘 아래 있는 동안만큼은 전담 영양사가 짜 준 저염식 위주로 먹다 보니 자극적인 음식에는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별한 날이요?”
“그런 거 있잖아. 반 친구 생일이거나 가끔 어디 놀러 갈 때.”
“…….”
“그래도 가끔 먹으면 신기하긴 했지.”
그 말에 호진의 눈에 왠지 모를 슬픔이 어렸다.
“그럼 이제 맨날 저랑 여기 올까요?”
“왜?”
뜬금없는 말이었다.
“메뉴 하나씩 다 먹여 보게요. 여기는 새우 들어간 것도 맛있고, 버섯 들어간 것도 맛있고…. 그냥 다 맛있어요.”
“됐으니까 너나 많이 먹어.”
쌀쌀맞게 쏘아붙이며 정인은 턱을 괴고 매장을 둘러보았다. 푹 눌러쓴 모자 덕분인지 호진을 쳐다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형. 저 주스 한 병만 더 사 올게요.”
눈 깜짝할 새 오렌지주스를 해치운 호진이 말했다.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꽤 바쁜 매장이었다. 호진이 잠깐 1층으로 내려간 그 짧은 사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홀을 가로질렀다. 음식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한참 그렇게 구경하는데, 문득 건너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뚫어지게 정인을 바라보았다. 그냥 우연히 부딪친 거라기엔 꽤나 집요한 시선에 불편해진 정인이 먼저 눈을 돌렸다.
“저기요.”
그러나 그도 잠시, 아예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오는가 싶더니 정인의 옆에 섰다.
“혹시 전화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미미하지만 분명 알파 특유의 싸한 체향이 느껴졌다. 매일 억제제를 복용하는 호진보다도 한참 옅은 것으로 짐작하건대 형질이 썩 강한 알파는 아니고, 끽해야 쿼터쯤 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정인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게 뭔가 이상했다.
“…….”
어쩐지 불길한 마음에, 정인은 마지막으로 히트 사이클이 왔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가늠했다.
어차피 장애 때문에 정확한 주기를 예측하려 드는 건 무의미하다. 대충 살 만해졌다 싶을 때 한 번씩 찾아와 반쯤 죽여 놓는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의지와 관계없이 페로몬이 줄줄 새는 건 그 전조 증상이었다.
짧으면 일이 주, 길어야 한 달 안이겠구나.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내내 잠잠했으니 곧 크게 한 번 터질 때가 되긴 했다.
“너무 긴장하신다, 안 잡아먹어요.”
정인이 별말이 없자 남자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분위기 좋은 와인 바 아는데, 시간 날 때 드라이브 겸 같이 한번 놀아요.”
“허….”
요즘 세상에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괜히 듣는 제가 다 창피해진 정인은 얼른 주변을 살폈다. 도대체 누가 대학가 패스트푸드점 한복판에서 이딴 말을 한단 말인가. 보란 듯이 눈앞에 흔들고 있는 키 링 안의 수입차 로고마저도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됐으니까 가서 볼일 보세요.”
키 링을 건 손가락을 툭 밀어 치우자, 남자는 다짜고짜 호진의 자리에 앉아 버렸다.
“맨입으로 그러자는 거 아닌데.”
“…….”
“한번 만나 보고 재밌으면 이것저것 좀 챙겨 줄 수도 있고.”
아주 대단한 얘기라도 하는 양 목소리는 한껏 낮춘 채였다. 정인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뭘 얼마나 챙겨 줄 수 있는데?”
“그야 그쪽이 뭘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아, 제발 좀.”
확 짜증이 솟구쳤다.
“어느 정도는 수준이 맞아야 같이 놀지. 너 같은 거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 꺼져.”
그러자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뗐다.
“아주 꼴값을 떠네.”
예상대로였다. 그는 정인이 자신을 받아 주지 않자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야. 너 오메가 아니야?”
“…….”
“수준 운운하는데, 알파라면 사족 못 쓰고 달려드는 거 니들 종특이잖아. 피차 다 아는데 뭐 이렇게 비싸게 굴어.”
대화의 제로백이 거의 마세라티 수준이었다. 뜬금없이 괴상한 분노를 표출하는 걸 보니, 사는 내내 여기저기서 오메가들에게 숱하게도 거절당한 듯했다.
아빠들 세대에나 있었다던 이형질 차별은 이제 잃을 것 없는 폐급 인생들의 전유물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자신의 또래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니. 불쾌하다기보다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닌 척, 관심 없는 척. 그럼 몸값이 좀 올라가는 줄 아는가 본데, 반반한 껍데기 씹창 나는 거 한순간이야.”
남자가 이 사이로 내뱉었다.
“너 낳은 오메가도 좆 되기 전에 알파 물어서 살길 찾은 거고.”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것쯤은 얼마든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원경을 모욕하는 말에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정인은 손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였다. 멀리서 쾅 소리가 났다. 돌아본 곳에는 호진이 서 있었다. 주스를 병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은 호진이 성큼성큼 남자에게로 다가섰다. 막 그의 멱살을 잡으려던 찰나, 정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어.”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호진의 가슴을 손끝으로 눌러 제 등 뒤에 세웠다. 그러고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나 봐.”
“…뭐?”
“주제도 모르고 배짱만 앞세워서 아무 데나 기어오르는 거, 되게 위험한 짓인데.”
황당하다는 듯한 남자의 표정을 무시하고, 정인은 반도 채 마시지 않은 탄산수의 뚜껑을 열어 그의 머리 위로 부었다.
“야!”
음료와 함께 얼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줄줄 흐르는 액체를 흠뻑 뒤집어쓴 남자는 정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든 말든 텅 빈 컵은 발치에 던져 버리고, 남자의 주머니로 손을 쑥 밀어 넣어 지갑을 찾아냈다.
“뭐 하는 짓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히고 싶지 않으면 새겨들어…. 석현아.”
이름과 얼굴, 생년월일 정도면 뭘 하기에도 충분한 정보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지갑은 바닥에 던져 버렸다.
“대가리에 든 게 없으면 가끔 무리수를 두게 되는데, 바로 그럴 때 인생이 꼬이는 거야.”
정인이 눈을 들었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주제면 아가리 간수라도 잘하고 살라고, 씨발 새끼야.”
“이 미친…!”
제 얼굴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 내며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정인의 기세에 눌린 게 뻔히 들여다보이는데도, 그놈의 자존심을 포기할 수는 없는지 그는 곧 한 손을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뺨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물론 그건 정인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지만 아직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당방위 정도만 성립돼도 그 뒤로는 무슨 짓을 하든 큰 문제는 없겠지.
“손 내려.”
그때, 인의 등 뒤에 서 있던 호진이 그를 막아섰다. 그제야 호진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를 알아본 것 같았다.
“어….”
다음은 뻔했다. 애써 꾸며 내던 여유는 금세 밑천을 드러냈다. 외적으로도 커리어 면에서도 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조건이 좋은 사람이 나타나자 남자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쪽은 참견 마시고요, 이 새끼가 먼저 시비 걸었다니까?”
“야.”
호진이 짐승 같은 목소리로 내뱉으며 남자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늘 순하기만 하던 두 눈이 완전히 분노에 돌아 있었다.
“유호진.”
이러다 정말 한 대 치기라도 할 것 같아서, 정인은 얼른 그를 불러 세웠다.
“보는 눈 많아, 문제 일으키지 마.”
사냥감을 목전에 둔 늑대처럼 남자를 주시하고 있던 호진이 그제야 정인을 돌아보았다.
“…형.”
“나가자. 음료수는 다른 데 가서 사 줄게.”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않는 그의 손목을 잡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죄송해요.”
고개를 푹 숙인 채 딸려 나온 호진이 말했다. 정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속상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가.”
“…아무것도 못 해서요.”
“유호진.”
정인은 픽 웃으며 호진을 마주 보고 섰다.
“너, 잃을 거 많은 사람이야. 이런 사소한 일로….”
“사소한 일 아니었어요.”
좀처럼 정인의 말을 자르는 법이 없던 그는 곧바로 정인의 말을 정정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참 유난이라고 생각하며 정인은 조곤조곤 그를 달랬다.
“누구도 마음 상할 필요 없는 일이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잖아. 백 번을 던져 봤자 몇 마디 말 따위는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해.”
“…….”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분노는 내 몫이야. 굳이 네가 나눠 지지 않아도 돼.”
그사이에 해가 많이 기울었나 보다. 호진의 반듯한 얼굴 위에 걸리는 햇볕의 색으로 말미암아 정인은 시간을 가늠했다. 네 시쯤 되었을까, 아니면 네 시 반쯤.
“형은 정말 강한 사람이네요.”
호진이 문득 웃었다.
“저는 가끔씩 그런 아무것도 아닌 말들에도 흔들리는데….”
정인은 수심 어린 표정이 변해 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형 말이 맞아요. 몇 마디 말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죠.”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던 눈에 총기가 어리고, 분을 못 이겨 악물고 있던 입술은 반듯하게 호선을 그렸다.
깨끗한 시냇물로 돌 위에 묻은 진흙을 씻어 내면 마침내 깔끔한 수석만이 남는 것처럼, 호진은 순식간에 감정을 지워 내고 평정심을 찾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인의 마음도 조금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죄송해요.”
커다란 손이 천천히 들렸다. 정인의 귓가를 향해 뻗어 온 손가락은 망설이다 끝끝내 닿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다음번엔 제가 더 잘 살필게요.”
“…….”
“나쁜 말 같은 건 들을 틈도 없게.”
호진의 눈을 바라보며 정인은 생각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데. 그럼 이 사람의 창가에서는 저 멀리 산에 걸린 구름까지도 먼지 한 톨 없이 내다보이려나.
***
정인은 천천히 물 안으로 발목을 밀어 넣었다. 빈틈없이 피부를 감싸 오는 수온이 기분 좋았다. 엉덩이 밑에는 옷이 젖는다며 호진이 깔아 놓고 간 타월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형.”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샤워를 마치고 온 호진이 웃으며 정인에게로 다가섰다. 덕지덕지 붙이고 있던 테이프를 전부 떼어낸 맨몸 위로 물기가 반질거렸다.
“너무 가까이 앉아 있지는 마세요. 끝 레인을 쓰긴 할 건데, 그래도 물 넘칠 거예요.”
그는 팔을 뻗어 정인이 깔고 앉아 있는 타월부터 살폈다. 족히 열 겹은 되는 듯한 타월 뭉치를 뒤집어 보송보송한 바닥을 확인한 뒤에는 한 번 더 신신당부했다.
“조금이라도 옷 젖는 것 같으면 바로 말씀하셔야 해요. 새 타월로 바꿔 드릴게요.”
정말 유난도 이런 유난이 따로 없다. 그까짓 옷 좀 젖는 게 무슨 대수이기에 훈련을 앞두고 이런 데다 정신력을 낭비한단 말인가. 집중력이 좋은 선수라며 해설자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상대가 정말 저 사람이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가서 운동이나 해.”
정인은 턱짓으로 레인의 시작점을 가리켰다.
“…다녀올게요.”
끝까지 못 미덥다는 듯한 눈으로 타월의 상태를 살피던 호진은 곧 가장 멀리 떨어진 레인의 끝에 도착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자그마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개인 훈련이니 뭔가 엄청난 동작이 이어질 줄 알았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평범한 스트레칭을 마친 호진은 수경을 쓰고 머리칼을 단정히 정리해 수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양 무릎을 쥔 채 숨을 들이켜더니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올랐다.
화살 코처럼 하나로 모은 손끝이 허공을 가르며 공중에 곡선을 그렸다. 이윽고 찰박, 하는 소리와 함께 호진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금세 수면을 뚫고 나온 그는 빠르게 물을 가르고 나아갔다. 막연히 느껴지는 파괴력에 비해 의외로 소리는 적었다.
눈 깜짝할 새 50미터 지점을 찍은 호진은 어째서인지 물 안에서 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풀을 벗어나 타일을 밟았다. 그다음에는 물을 뚝뚝 흘리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잠깐 스트레칭을 하는가 싶더니 도로 물에 뛰어들었다.
꽤 속도가 빠르기에 이게 본 훈련인 줄 알았는데, 경기 때와는 형식이 조금 다른 걸 보니 아무래도 워밍업인 것 같았다.
“…잘만 하면서.”
뭐가 안 된다는 걸까. 호진의 영상을 보던 날을 제외하면 수영 경기를 제대로 본 적조차 없어서, 무엇이 문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호진은 몇 번인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더니 스타트 라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닥이 아닌 출발대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렸다.
후우, 하고 숨을 내쉬자 부풀어 있던 흉곽이 날렵히 붙었다.
그는 팔을 앞뒤로 두어 번 흔들며 자세를 잡고, 허리를 숙여 보드의 끝을 잡았다. 무게 중심이 살짝 뒤를 향하나 싶더니 하체의 모든 근육이 단번에 수축했다. 이어 출발대가 거친 소음과 함께 경련하고, 수면 위로 포말이 일었다.
기계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스트로크의 파워는 워밍업 때 본 것보다 훨씬 강했다. 발등을 간질이는 물보라가 조금 더 거세어졌다.
그때였다. 레인의 중간 지점을 지나쳤나 싶은 순간, 호진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제자리에 서서 지나온 길을 바라본 호진은 힘없이 헤엄쳐 출발대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출발대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레인의 끝까지 도착하는 일은 없었다. 조금을 가다 멈춰 서고, 또 조금을 가다 멈춰 서고.
그렇게 마침내 다섯 번째로 그가 멈춰 섰을 때.
“…….”
정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가 트이며 먼발치에 선 호진의 모습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였다.
‘작년 경기에서 크게 부상을 입었어요. 그 뒤로는 마음처럼 되지가 않아서 고민이 많았는데….’
이제 호진은 장승처럼 우두커니 수영장 한가운데 서서 물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똘히 생각에 몰두하느라 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수영장에서 형을 만났던 날은 그렇지 않았어요.’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렇게 멀리 나가 본 건 부상 이후로 처음이었어요.’
분명 그날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멀리 나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 자리에 멈춰 있을까. 대체 무엇이 너를 저 끝까지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누르는 걸까.
‘다른 변수는 없었으니 혹시나 해서 그래요.’
글쎄.
정말 내가 너의 변수였을까?
“…….”
발가락 위로 물이 거세게 넘실거렸다. 호진의 말대로였다.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가 만들어 낸 파문은 어느샌가 정인의 발등까지 찰랑이고 있었다.
정인은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물 안으로 몸을 던졌다.
첨벙―. 빼곡히 들어차 있던 물의 입자를 가르고 들어서자 눈앞이 흐려졌다. 갑작스러운 기압의 변화에 가슴이 아프고 손끝은 자꾸만 위를 향했다.
생경한 감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물에 빠졌지만 지금처럼 들어서자마자 숨을 쉬고 싶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울고 싶지만 울 수 없어서. 죽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아는 한 가장 죽음과 가까운 물속으로 뛰어들던 날들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정인은 금방이라도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바닥을 향해 가라앉았다. 그러자 머지않아 허리 아래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아 왔다.
눈앞이 가로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유호진이 왔다는 것을.
여덟 개의 레인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온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곧장 정인을 안아 물 위로 끌어 올렸다.
“하아….”
정인은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뱉었다. 그러자 호진은 빠르게 수경을 벗어 던지며 정인의 뺨을 받쳐 들었다.
“괜찮으세요?”
그리고 정인은 기어이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물속에서 머리가 고장 나기라도 한 건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웃겼다.
“유호진.”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호진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역시 예상이 맞았다. 정인은 입을 열었다.
“나는 네 변수가 아니야.”
***
이럴 줄 알았다.
활짝 웃는 순간에는 이토록 끔찍이 아름다울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정말 모르겠어?”
정인이 재차 물었다. 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처음 웃음을 터트리던 순간 손 쓸 도리도 없이 저 아래에 처박혀 버린 심장 때문이었다.
텅 빈 가슴이 쿵쿵 울었다. 귓가에 쏟아지는 이명을 어쩌지 못하고 호진은 그저 물끄러미 정인을 쳐다보았다. 완연한 반달 모양을 띤 눈꼬리가 푹 젖어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애간장이 녹아서, 그만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졌다.
“내가 아니라, 나를 구하려던 네 마음이 변수였던 거야.”
그렇게 말하며 정인이 호진의 품을 벗어났다. 물 위로 올라가기 위해 벽을 짚는 손이 희었다. 호진은 조심스럽게 정인의 허리를 받쳐 위로 올려 주었다.
언제나 빛을 머금은 것 같던 머리색이 물을 먹어 짙었다. 벽에 걸터앉은 정인은 머리칼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귀찮다는 듯 한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날 너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물에 빠진 나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거지.”
단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아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그랬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정인은 귀가 먹먹한지 한쪽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툭툭 털었다. 멍청히 서 있던 호진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를 따라 타일 위로 올라섰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동료 선수들에게 이따금 해 주던 대로 정인의 얼굴 옆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가,
“잠깐만 손댈게요.”
“그래.”
허락이 떨어진 뒤에야 부드러운 목을 감싸 쥐었다.
트라거스 위로 엄지손가락을 붙이고 천천히 마사지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고작 두 번이니 이게 정답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그날도 지금도 너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어.”
호진은 마음 놓고 그의 입술을 훔쳐보았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그때, 정인이 갑자기 눈을 떴다. 예고도 전조도 없었다. 별처럼 떠오른 정인의 눈동자 속에 호진의 모습이 비쳤다.
“혹시 목표가 필요한 건 아닌지.”
여린 귓가를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
벤치에 누워 발을 바닥에 박았다. 흉추를 펴자 가슴 근육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이 사이로 호흡을 내뱉으며, 호진은 명치 위에 붙은 바벨을 단숨에 들어 올렸다. 충분히 달구어진 근육은 무리 없이 100킬로그램을 견뎌 냈다.
“60파운드 더 얹어도 되죠?”
한 세트가 끝난 것을 확인한 트레이너가 물었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벨을 걸었고, 바의 양옆으로는 30파운드짜리 플레이트가 하나씩 더 걸렸다. 지난 시즌의 최대 근력에는 못 미치지만 충분히 버거운 무게였다.
짧은 휴식 시간 동안 이온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모니터 속의 수치를 확인하고, 깊은 호흡으로 심박수를 내린 뒤에는 그립부터 다시 잡았다.
혹시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 트레이너가 어깨 사이로 손을 받쳐 넣었다. 호진은 서서히 내려앉는 무게를 버텨 냈다. 내뱉는 숨에 온 힘을 다해 들어 올리자 근육이 터질 듯 부풀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그때였다. 문득 정인이 떠올랐다.
“어어, 잠깐만요. 손목.”
트레이너가 재빨리 개입해 바를 움켜쥐었다. 명치를 향해 내려가던 바벨의 움직임이 멈췄다. 호진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확인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균형이 틀어져 어느샌가 손목에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천천히 걸게요, 하나, 둘.”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바벨을 걸었다. 그러자 저만치서 지켜보던 코치가 호진에게로 다가왔다.
“오늘 호진이 집중력 왜 이렇지? 파워크린도 그러더니.”
“죄송합니다.”
심박수 센서를 떼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치는 곧장 센타르1) 결괏값을 내밀었다.
“135도에서 좌우 5 정도 차이가 나는 거 말고 크게 다른 문제는 없네. 이번 주 근력은 1RM의 70퍼센트 유지하고, 컨디셔닝 위주로 하는 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슬슬 대회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호진의 등을 툭툭 쳐 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스텝 테스트 결과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가볍게 소청부터 나가 보는 건 어때?”
4월 중순에 있을 대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호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코치가 허허 웃으며 벤치 옆에 걸터앉았다.
“규모가 너무 작아서 좀 그래?”
“아뇨, 그럴 리가요.”
호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한 시즌 내내 대회를 안 할 수는 없잖아. 여기서 금 하나만 따면 돼, 그러면 언론도 당분간은 잠잠할 거다.”
금 하나만.
참 쉬운 말이었다.
“네가 나간다고만 하면 유영이랑 정우도 같이 출전할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긍정적으로 고려해 봐, 알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코치와 트레이너가 떠나고, 호진도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시간이 훌쩍 넘도록 모든 근육을 전부 쥐어짜 낸 탓에 온몸이 뜨거웠다. 지친 걸음은 이윽고 텅 빈 샤워실에 멈춰 섰다.
‘금 하나만 따면 돼.’
사실 소청 수영 대회는 국가 대표 선발전을 염두에 두는 어린 선수들의 무대였다. 호진의 출전이 그들에게 동기 부여를 할 수는 있겠지만, 코치의 말대로 호진이 나설 규모의 대회는 아니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올림픽 출전 경험이 있는 유영에게도 정우에게도 그랬다.
그럼에도 그들이 함께 출전하겠다 하는 이유는 단지 호진의 복귀를 돕기 위해서다. 경기장에서 함께 페이스를 맞추며 능력치를 끌어내 주기 위함이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테니까.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만 할 테니까.
“…….”
호진은 처음으로 대회에 출전하던 날을 떠올렸다.
전담 팀 감독하에 체계적으로 관리를 받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전문적인 지식도 지금 같은 근력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연습량만을 꽉꽉 채워 레인에 서던 순간, 저보다 훨씬 더 키가 큰 형들 사이에 섞여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물을 내다보던 그 짧은 찰나.
기적 같은 장면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입수, 돌핀, 스트로크와 턴의 과정과 횟수가 저절로 떠오르고, 모두를 제치고 앞서 나가 가장 먼저 패드를 터치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히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그 상상은 몇 분 후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호진은 처음으로 출전한 대회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단꿈이 아니었다. 훈련량에 정확한 한계치와 가능성을 대입한 결괏값이었고, 세상은 그런 것을 이미지 트레이닝이라 불렀다.
대회 직전이면 찾아오는 상상과 현실에는 늘 별다른 오차가 없었다. 금을 딸 것 같으면 금을 따고, 은을 딸 것 같으면 은을 땄다. 그 감이 빗나간 건, 단 한 번. 부상을 입던 그때뿐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도수가 높은 부상은 아니었다. 사고 당시만 해도 충분히 자력으로 풀을 빠져나올 수 있는 상태였고, 최종 진단 결과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재활 치료를 받고 나면 금세 회복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물 안에서 정신을 잃고야 말았던 건, 당혹감 때문이었다.
“…….”
수백 번의 반복으로 이미 완벽하게 결과를 예상하고 있던 경기였다. 그러나 어깨의 인대가 파열되며 모든 것이 틀어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스트로크 하나가 휜 것이 시작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물 안에서 통제력을 잃은 호진은 부력을 유지하기 위해 곧바로 몸의 축을 틀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큰 충격을 받은 어깨를 다시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엄청난 통증이 몰아쳤다. 하지만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보다도 더 끔찍한 것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팔이었다.
속절없이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저만치 위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다른 선수들은 이미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까지 앞서 나간 채였다.
페이스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가 알고, 몸이 그 방법을 아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호흡이 서서히 끝나 가는 가운데, 호진은 마침내 모든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평생의 목표이던 올림픽 금메달을 손에 넣은 뒤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출발대를 박차고 뛰어오르기 직전이면 당연하다는 듯 주어지던 예언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재활 직후 출전한 첫 경기에서 출발조차 하지 못했던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까지구나, 생각했었다.
“…금 하나만 따면.”
더는 벅차지도 설레지도 않는 목표가 입 안에서 버석거렸다.
지금 이 순간, 간절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
“아가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정인은 몇 발짝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어?”
험악한 인상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화려한 플라워 프린트 티셔츠의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는 여의주를 문 용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삼촌!”
정인은 화색을 띠며 그에게로 달려가 덥석 목을 끌어안았다. 크고 작은 흉터가 빼곡한 얼굴로, 그는 정인을 향해 씨익 웃었다.
“오메, 어째 얼굴이 반쪽이 됐다. 요즘 가세가 휘청휘청허냐?”
“하하하, 그런가 봐요. 그나저나 삼촌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사내는 원경의 오랜 친구인 성필이었다. 정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느그 아빠가 저거 해 달라고 아주 탭 댄스를 춰 싸니 글제. 딴 데는 못 믿겠다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건물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정인은 그제야 그가 꼭대기 층 공사의 관리 감독자로 왔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드디어 뭔가 시작된 것 같았다.
“언제 오신 거예요? 언제까지 계시는 거예요? 어디서 지내시는데요?”
“아따 거, 쫑알쫑알 궁금한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겄다. 엊그제 왔고, 이거 끝나면 가고, 그때까진 영등포에 있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그는 정인이 물은 말에 하나도 빠짐없이 답을 해 주었다. 외국에서 지낼 때도 가끔 전화로 듣곤 하던 목소리 그대로였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귀여운 모습이라 정인은 저도 모르게 흐흐 웃었다.
“아 근디 너는 어째 크면 클수록 느그 아빠랑 똑같냐.”
“그래요?”
“고럼, 원경이가 딱 너만 할 때 고렇게 뽀얘 가지고 이뻤지.”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성깔을 닮아 불면 안 된다잉. 얌전히 잘 있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 눈깔 뒤집어지면 아주 다 죽여 버릴 것처럼 뎀비는데 고것이 참….”
정인이 태어나기 전의 원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바와 같았다. 정인으로서는 어쩐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이간 정인이 너는 느그 아부지들 승질은 닮지 말고 뚝심 있게 너만의 길을 가야만 헌다. 아빠들 흉봐서 미안하긴 헌데, 그래도 둥글게 살어야 복이 오는 것이여.”
“…네.”
“아, 그리고 참.”
성필은 일수 가방을 뒤적여 신문지에 감싸인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먹어라, 요새 애들 좋아하는 거라던데 나는 영 맛이 없더라….”
달콤한 시나몬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츄러스인 것 같았다.
단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정인을 위해 굳이 사 와서 가방 속에 꼭 숨기고 기다렸던 것이다. 마음이 몽글몽글 따뜻해져서 히히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무언가가 정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성필의 손목을 거세게 쳐 내는 손길에 츄러스가 허공을 날았다.
“당신 뭐야.”
정인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호진의 등이 보였다.
이번에는 무조건 지켜 낼 것이다.
정인을 모욕했던 알파를 그냥 보내 버린 그날처럼 순순히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두 번 다시 정인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웜메….”
“뭐냐고 묻잖아.”
정인에게 흉기를 들이대며 위협하던 괴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정인이 호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미쳤어? 당장 안 놔?”
호진은 말없이 고개만 돌려 정인을 살폈다. 많이 당황했는지 낯빛이 조금 창백하긴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우선 집에 들러서 좀 쉬다 나올까 고민하다가 혹시나 해서 곧바로 학교로 온 건데,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 큰일 났을 뻔했다.
“다친 데 없어요, 형?”
“이 손부터 놓으라고. 버릇없게 뭐 하는 짓이야?”
정인은 돌처럼 박혀 있는 호진의 손가락을 억지로 하나씩 떼어 냈다. 그러고는 곧바로 괴한의 앞을 막아섰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손목을 확인하더니 벌겋게 남은 손자국을 보고는 고운 미간을 좁히기까지 했다.
“…괜찮으세요?”
“어어, 괜찮어.”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을 두어 번 턴 괴한은 호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만있자, 이놈 이거 분명 어디서 봤는데….”
그리고 호진은 상당히 당황했다. 분명 위협당하는 정인의 모습을 보고 달려든 건데, 어째서인지 정인은 호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애틋하게 괴한의 상태만을 살피고 있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찰나였다.
“아! 거시기 뭣이냐, 수영 선수 아녀?”
괴한이 짝, 하고 박수를 치며 웃었다.
“맞네. 골드 뽀이, 금의 싸나이 유호진 선수. 아따 영광이어라.”
두 손바닥을 옷자락에 삭삭 비벼 닦은 그는 호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호진은 멀뚱멀뚱 정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정인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아빠 친구분이셔, 인사드려.”
“아, 어…. 네?”
해일 같은 민망함이 찾아왔다.
“아, 아, 안녕하세요. 유호진입니다.”
호진은 부리나케 모자를 벗고는 구십 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덜덜 떨리는 두 손을 들어 그가 청한 악수에 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 그게….”
“지가 쪼까 험악하게 생기긴 했지라?”
“아뇨, 아닙니다.”
정말 어딘가에 머리를 박고 콱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결례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남자는 그저 호진의 존재 자체가 신기한 듯했다.
“아따, 풍채 좋은 것 보소. 테레비로 보던 것보다 인물도 훨씬 낫고. 정인이랑은 어찌 아는 사이셔?”
“그, 학교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동생이에요.”
“오메…. 한 입 거리 개떡이가 시방 이 장골의 형님이 돼 부는 것이여?”
고것 참 신통하네. 깔깔 웃으며 남자는 허리를 숙여 ‘흉기’를 도로 주웠다.
“신문지 둘둘 말아 놨응께 괜찮어야, 들어가서 한 입씩 애껴 먹어라. 알았냐?”
아깐 경황이 없어 그저 칼이겠거니 했는데 다시 보니 칼치고는 폭이 많이 좁았다.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음식류인 것 같았다.
어쨌거나 정체 모를 물건을 손에 쥔 정인은 남자를 향해 예쁘게 웃었다.
“정말 배고플 때만 조금씩 아껴 먹을게요.”
“왐마? 다음에 보면 요기서 또 반쪽이 돼 있겄다?”
껄껄껄 웃는 소리가 골목을 쩌렁쩌렁 울렸다. 남자는 가 보겠다며 정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돌아섰다.
정인은 끝까지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호진을 노려보았다.
“…죄송해요, 형.”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호진은 침통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시간에 여긴 또 웬일인데.”
“아…. 그게.”
사실 정인을 보기 위함이었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호진은 빠르게 변명을 생각해 냈다.
“그냥, 방 구하러요.”
그래도 반쯤은 사실이었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가 있긴 했지만 그건 진천을 오갈 것을 염두에 두어 고속 도로로 빠지는 길 근처에 얻은 집이었다.
학교에서 시간을 오래 보낼 거라면 학교 근처에도 방을 하나 두는 게 좋을 것 같았고, 그게 정인의 집 근처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 알아보던 참이었다. 이상하게도 정인이 사는 건물의 매물은 나오지 않는 것 같지만.
“아직도 못 구했어?”
“네. 학기 시작된 지가 좀 돼서 그런 것 같아요.”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학교 근처 부동산을 몇 군데나 돌았지만 중개인들은 하나같이 ‘그 건물’만큼은 계약하기가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정확한 사정을 듣지는 못했지만 뉘앙스로만 미루어 보면 건물주가 세입자를 받는 데에 꽤나 까다로운 편인 것 같았다.
“…꼭 이 근처야 돼? 체대 쪽은?”
“TH관에서 듣는 수업이 훨씬 많아서요.”
이 또한 사실이었다. 여태까지 찾아낸 바에 의하면 정인이 듣는 수업은 죄다 TH관 수업이었고, 그걸 따라 듣자니 자연스레 호진의 시간표도 그렇게 맞춰졌다.
“그나저나 형은 이제 수업 다 끝나신 거예요?”
“응.”
“그럼 계속 집에 계시는 거고요?”
한 번 더 묻는 말에 정인이 호진을 흘겨보았다. 분명 귀찮아서 저러는 거겠지만 호진의 눈에는 그저 삐진 종달새처럼 보일뿐이었다.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릴 뻔했다.
“…그럼 쉬세요. 다음 훈련할 때 연락드릴게요.”
“잠깐만.”
뭐라고 한 소리 하기 전에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인은 호진을 붙잡았다.
“너 핸드폰은 어떻게 됐어?”
“네?”
“고장 났잖아. 수리 맡겼어?”
“아…. 아뇨. 딱히 연락을 할 데가 없어서.”
꽤 지난 얘기였다. 사실 핸드폰이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아 호진조차도 잊고 있던 일이었다.
“기다려.”
정인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곱게 포장된 새 핸드폰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데이터는 따로 복구해 줄 테니까 우선 쓰고 있어.”
“형, 저 이런 거 못 받아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핸드폰이 고장 난 게 정인의 잘못이 아닌 건 차치하고라도, 고운 몸 상해 가며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산 것을 어떻게 받겠는가.
“수첩에 전화번호 다 있어서 데이터 복구도 필요 없어요. 핸드폰은 어차피 회사에 신청하면 새거 나오니까 이건 환불하시고….”
“돈 주고 산 거 아니야. 환불 같은 거 못 해.”
“그럼요?”
“고모한테 받았어.”
“그럼 더더욱 형이 쓰셔야죠.”
그 말에 정인이 한숨을 쉬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 회사 핸드폰 안 맞아. 너나 써.”
“그럼 중고로라도 파세요.”
“고모한테 받은 걸 팔라고?”
“다른 사람한테 줘 버리는 건 괜찮은 거예요?”
이번에는 정말 양보할 수 없다. 아무 대가 없이 귀한 시간 내 훈련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이런 것까지는 받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정인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하기만 했다.
“애초에 너 주려고 받아 온 거야.”
호진의 손끝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냥 써. 싫으면 버리든가.”
너 주려고 받아 온 거야.
너 주려고.
“하….”
세상에, 이 사람이 내가 없는 곳에서 내 생각을 했다니.
가슴이 뻐근하게 벅차올랐다. 미친 듯이 나대는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정인이 내민 상자를 받아 들었다.
“네. 받을게요.”
호진은 고개를 들었다.
“대신 이제 저녁밥도 해 드릴 거예요.”
“…뭐?”
재빨리 상자를 열었다. 내용물만 꺼내고 박스는 조심조심 가방 속에 넣었다.
“상자 열었으니까 이제 못 물러요.”
“야.”
“아무리 싫어하셔도 가져올 거니까 안 드실 거면 버리세요.”
정인히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그러자 정인이 제 이마를 짚었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호진은 웃었다.
“고마워요, 형.”
“…….”
“근데 또 이런 거 주시면 다음번에는 점심까지 해다 드릴 거예요.”
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글부글 속을 끓이고 있는 것이 보여 또 픽 웃음이 났다.
“쉬세요.”
저녁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재료를 구입하고 요리를 마치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열이 식지 않도록 보온 용기도 따로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인을 등지고 돌아섰다.
발아래 닫는 땅의 느낌이 좋았다. 호진은 가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죽은 핸드폰을 꺼내 심 카드를 뽑아냈다. 이게 될까 싶었지만 다행히도 심 카드까지 맛이 간 건 아닌지 금세 안테나가 떴다.
새 핸드폰을 켠 호진은 정인의 번호를 제일 먼저 입력했다. 그러고는 전화를 걸며 뒤를 돌아보았다. 정인이 핸드폰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 여보세요.
“형.”
호진의 목소리를 확인한 정인이 뾰로통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재미있고 웃길까. 호진은 바보처럼 웃으며 정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전화 잘되나 해서 걸어 봤어요.”
- 끊어.
“형, 근데요.”
금방이라도 끊어 버릴 기세였다. 호진은 얼른 정인을 불렀다.
“저 오늘….”
너무 힘들었어요.
어디에도 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멈춰 섰다.
“…….”
멀리 이쪽을 보고 있는 정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햇살이 그의 머리카락 위에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그걸 보고 있자니 그냥 모든 게 상관없어졌다.
결국 이렇게 보게 될 걸 알았다면, 설령 오늘이 더 힘들었대도 괜찮았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들어가세요.”
한 번 더 손을 흔들었다. 정인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응달진 건물 입구로 들어서는 등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오후 내내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는 어느덧 씻은 듯 가신 채였다.
***
꼭대기 층은 벽을 허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애초에 하나의 공간이었던 것을 여럿으로 쪼갰는지 방과 방 사이를 막고 있던 것은 사실상 가벼운 합판뿐이라, 그걸 부수고 나니 세 개의 호실이 훤히 트여 시원했다.
“안녕하세요.”
쾅쾅 때려 부수는 소리 속에서 인테리어 담당자가 정인에게 다가섰다. 그는 대략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현관, 침실, 세탁실에 가벽 들어갈 거고, 주방은 저기 끝 집 것만 남기고 전부 철거할게요. 나머지는 이전에 저희 대리님이 상의드린 대로 진행하면 되겠죠? 벽지는 나중에 천천히 고르셔도 되고, 바닥은….”
미리 만들어 둔 파일을 뒤적이던 그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침실 바닥만 폴리싱 타일로 하시는 게 맞나요?”
“네.”
“좀 차가울 텐데…. 다른 공간이랑 맞춰서 다 우드 톤으로 까는 게 낫지 않아요?”
귀국 후 지내던 오피스텔의 인테리어 담당자가 짚었던 부분과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침실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야만 하니까.
“괜찮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정인은 끝끝내 못 미더운 눈을 하고 있는 그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왔다.
잠깐을 서 있었을 뿐인데도 엄청난 소음에 머리가 다 얼얼했다. 그래도 1층까지 내려오니 둔탁한 소리만이 남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문득 전화가 왔다. 또 유호진이 장난을 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화면 위에는 조효준의 이름이 떠 있었다.
“왜.”
- 정인아….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술 마실래?
“아니.”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자 전화 너머에서 효준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 좀 진짜, 안 되겠냐?
“…무슨 일 있어?”
어쩐지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묻는 말에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가 돌아왔다.
- 나 차였어.
정인은 효준과 만나던 사람을 떠올렸다. 이번의 상대는 유명한 걸 그룹의 멤버였다. 한 달 전쯤 정인에게도 소개해 준 적이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정말 아름다웠고, 조효준에게는 조금 아깝다 싶을 만큼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죽고 못 살 것처럼 붙어 다니더니 이번에도 석 달을 못 갔나보다. 사실 고등학생 때 3년쯤 사귀었던 애를 제외하고는 전부 그런 식이었다. 두어 달을 만나다 헤어지고, 금세 다른 사람을 만났다가 또 헤어지고.
“어딘데.”
- 학교 앞 쭈꾸미집. 어디 멀리 나갈 기운도 없다….
효준은 축 늘어진 목소리로 대충 위치를 설명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찾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정인은 집을 나섰다.
골목을 조금 벗어나자 곧바로 상가 밀집 지역이 나타났다. 다들 뭐 그리 할 말이 많고 갈 곳이 많은지, 지나치는 이들 모두가 바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작은 꽃 가게와 편의점, 복권방을 차례로 지나친 정인은 지하도를 건너 지상으로 나왔다. 그사이에 조금 기운 햇볕의 색이 붉었다. 통화로 들은 큼지막한 가게의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조금을 더 나가자 효준이 말한 가게가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직 술을 마시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내부가 한산했다. 정인은 가장 안쪽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효준에게로 다가섰다.
“야.”
“…왔냐.”
그는 녹은 문어처럼 테이블에 엎어진 채 마카로니 과자를 하나씩 집어 먹고 있었다.
정인은 테이블 위에 있는 것들을 살폈다. 소주에, 맥주에, 사케에 백세주까지 아주 가게에 있는 술은 죄다 한 병씩 시켜 드신 듯했다. 심지어 안주라고 있는 건 전부 달고 짜고 매운 것이었다. 손 귀한 집안 장남이라고 좋은 것만 먹여 키운 효준의 부모님이 아시면 경을 칠 만한 상차림이었다.
“…어머니가 뭐라 안 하셔?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잘 먹고 다녀야 한다고 늘 그러시잖아.”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조효선 태어나기 전까지가 내 인생 리즈였어.”
여덟 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을 말하는 것이었다.
“삼대독자라고 어화둥둥 예쁨받던 때가 편했지…. 이제 그냥 걔가 왕이야.”
“그러고 보니 껌딱이는 요새 뭐 해?”
“당연히 학교…. 아니, 넌 내가 이러고 있는데 조효선 안부가 더 궁금해?”
효준이 발끈했다. 하지만 허구한 날 차였다고 징징대는 효준의 상태보다야 세영 금융 그룹의 밝은 미래 그 자체인 효선의 근황이 훨씬 더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물론 이런 걸 입 밖으로 냈다간 여러모로 귀찮아질 것 같아서 우선은 효준의 잔부터 채워 주었다.
“그래서, 이번엔 뭐가 문제였는데.”
“몰라. 내가 자길 별로 사랑하는 것 같지 않대.”
꽉 찬 잔을 쭉 들이켠 효준은 크으, 하는 소리를 내며 쭈꾸미를 질겅질겅 씹어 댔다.
“중고딩 때도 안 챙기던 기념일 다 챙겨 줘, 에르메스에 샤넬에 웨이팅 몇 달씩 밀린 것까지 죄다 구해 바쳐, 스케줄 끝나면 무조건 보러 가고 바쁘시면 조신하게 대기하고…. 대체 여기서 내가 뭘 더 해야 돼?”
“…글쎄.”
정인은 효준이 채워 준 잔을 털어 넣었다. 부리나케 포크에 찍어 내미는 쭈꾸미는 사양하고 야채만 건져 먹었다. 그러다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났다.
“너 걔 만날 땐 어땠어?”
“누구.”
“있잖아, 고등학교 때 오래 만났던 애. 다림이였나?”
그 말에 효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걔 만날 땐 이런 거 하나도 안 했지.”
정인이 호주에서 지내던 시절의 일이다. 사귀는 사람이 생겼다며 효준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있었다. 그전에도 몇 번인가 남녀 가리지 않고 만나기야 했지만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라 정인도 아직까지 그 애를 기억했다.
꽤나 잘나가던 제약 회사 상무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쯤에 뭔가 잘못돼서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효준이 그 애의 대학 등록금을 대느니 마느니로 한참 시끄러웠던 게 생각났다.
“걔는 그냥…. 바보였어.”
그 말을 하는 효준의 표정을 보니 좀 알 것 같았다. 이번에 헤어진 상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근데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긴 해.”
“무슨 생각.”
“걔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이랑도 좀 진득하게 만나 보고 왔으면 그렇게까지 망하진 않았을 것 같다고.”
아무래도 효준은 여전히 그 애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첫사랑이라는 건 웬만하면 이루어지는 법이 없대. 경험상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정인아.”
정인은 찬물을 홀짝이며 효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이야 척하면 딱이지. 상대가 뭘 원하고 꺼리는지 썸만 타도 다 알지만 그땐 아니었어. 멍청해 가지고…. 그냥 좋아하는 마음이면 다 되는 줄만 알았지.”
효준은 이윽고 첫사랑의 개념에 대해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썩 영양가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정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쭈꾸미 하나를 집어 먹었다. 이런 건 사는 내내 절대 손도 대지 않을 거라 확신했는데, 막상 한 입 먹어 보니 꽤 괜찮은 것도 같았다.
“너도 조심해. 혹시라도 연애 같은 거 하게 되면 첫사랑에는 절대 올인하지 마.”
빈 병이 하나둘 쌓여 갔다. 효준은 슬슬 맛대가리가 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정인의 머릿속은 이 새끼를 어디에 갖다 치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효준의 본가에 실어다 놓으면 애가 떡이 될 때까지 말리지 않은 정인도 한 소리 들을 테고, 오피스텔에 갖다 놓는 것도 무리다. 애인이 바뀔 때마다 비밀번호를 이중 삼중으로 걸어 놓으니 이렇게까지 맛이 간 상태라면 웬만해선 효준 본인조차도 그 보안을 뚫을 수 없을 것이다. 괜히 헛걸음만 할 확률이 80퍼센트 이상이었다.
아무래도 건물의 빈방에 던져 놔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너 좋다는 애 아무나 잡아서 시험 삼아 만나 보기라도 해.”
효준이 말했다.
“처음부터 너무 찐득하면 힘드니까, 웬만하면 네 말 한마디에 죽는시늉까지 하는 애로. 그래야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실수가 없어.”
형아의 꿀팁이다, 인생 꿀팁.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반쯤 풀린 눈으로 제 가슴팍을 퍽퍽 치기까지 했다.
이제 정말 여기서 한 잔이라도 더 들어갔다간 험한 꼴을 보게 될 것이다. 정인은 얼른 계산을 마치고 효준을 부축했다.
“일어나, 집에 가게.”
“꼭 누구라도 만나 봐야 돼…. 알았지?”
다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술을 퍼마신 조효준이 무언가를 말할 땐 아무리 헛소리여도 절대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정인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일어나.”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을 둘러업다시피 한 채 가게를 빠져나왔다.
어느샌가 해는 완전히 넘어가 하늘이 온통 검었다. 밤이 되면 조금 쌀쌀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안 그래도 큰 키에 이 악물고 프로틴 빨아 가며 키운 몸을 부축하고 걷자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제 막 술을 마시러 기어 나온 사람들 사이를 겨우겨우 헤쳐 나가 집 앞 골목에 도착했을 땐 정인도 죽을 것 같았다.
“아, 좀 제대로 걸으라고.”
“어….”
걸음걸음이 위기였다. 자꾸만 휘청거리는 효준의 다리를 퍽퍽 걷어차며 겨우 건물 앞에 도착한 정인은 그대로 빈방의 문을 열고 그를 던지듯 처넣었다.
“하아, 하아….”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하여튼…. 하아, 인간이 덜됐어….”
너무 힘들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처참하게 방을 뒹구는 효준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을 쾅 닫았다. 그제야 찾아온 평화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곧장 침대에 처박힐 작정으로 제 방문의 손잡이를 쥐는데,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발끝에 비닐 봉투가 닿았다.
‘아무리 싫어하셔도 가져올 거니까 안 드실 거면 버리세요.’
핸드폰을 받은 대가로 저녁까지 만들어다 주겠다던 호진의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역시나 비닐 봉투의 겉면에는 메뉴를 빼곡하게 적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하.”
산 넘어 산이다. 정인은 한숨을 푹 쉬며 비닐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갈비찜, 냉이된장찌개, 잡곡밥.
밑반찬 : 도라지무침, 시금치무침, 무말랭이, 열무김치, 동치미 국물.
후식 : 고구마맛탕, 재스민 티, 말차 초콜릿.
이번에도 뒷장에 뭔가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정인은 포스트잇을 뒤집었다.
연고 같이 넣어 놨어요. 꼭 챙겨 바르세요.
아직도 후끈후끈한 온기가 남아 있는 그릇들 위에는 새 연고와 면봉이 놓여 있었다.
흘끔 눈을 돌려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호진이 정성껏 붙여 준 거즈는 옛날에 날아가 없어졌고, 이제 길게 긁힌 상처의 앞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붉은 기만 조금 남았다. 굳이 뭘 또 바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연고는 내려놓고 제일 위에 있는 통의 뚜껑을 열었다. 고소한 냄새가 확 올라왔다. 윤기로 반들거리는 고기가 소복하고, 군데군데에는 작게 썬 당근과 밤이 박혀 있었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입맛이 도는 것도 같았다.
물론 호진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가 수시로 문 앞을 드나든다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다.
“뭐…. 냄새는 좋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농축산업 종사자들의 피땀 어린 수확물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빠르게 합리화를 마친 정인은 비단 천에 싸여 있는 수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머지 통도 했나둘 꺼냈다.
갈비찜과 밥과 된장찌개는 보온 도시락통에, 찬 반찬들은 작은 유리그릇에 담겨 있었다. 깨가 송송 뿌려진 시금치와 향긋한 도라지무침을 차례대로 펼쳤다. 꿀이 줄줄 흐르는 맛탕과 작은 초콜릿 두 알, 보온병에 담긴 차까지 꺼내 놓으니 제법 모양새가 났다.
정인은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아직 훈기가 올라오는 밥 위로 갈비찜 조각 하나를 얹어 입에 넣었다.
“음….”
부드러운 고기가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대추와 은행의 은은한 향이 담백하게 풍미를 더하고, 풍부한 육즙과 달달한 양념이 적당히 섞여 든 고기에서는 조금의 잡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정식 전문점 메인 코스로 나와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퀄리티였다.
다른 반찬들도 한 입씩 먹어 보았다. 모든 밑반찬은 원재료의 향을 살리면서도 저마다의 특색이 있고, 식감은 완벽 그 자체였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깔끔한지, 갈비찜의 깊고 진한 맛을 시원한 동치미 국물로 상쾌하게 씻어 내고 냉이 향이 솔솔 풍기는 된장찌개까지 한 숟갈 뜨니 눈치챌 새도 없이 밥은 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마침내 식사를 마치고 정갈하게 담긴 맛탕을 베어 물었다. 재스민 티까지 호로록 마시고 나니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끝까지 말차 초콜릿 두 알을 해치웠다.
“…….”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호진의 요리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어느덧 깨끗하게 빈 반찬 통을 앞에 둔 채 벽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쩐지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작게 분노하던 정인은 그릇을 하나씩 챙겨 방에 딸린 싱크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도 설거지는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도 수납장 구석에는 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 간 듯한 도구들이 남아 있었다.
너덜너덜한 수세미와 반쯤 남은 세제를 꺼내 슬슬 거품을 냈다. 사실 본가에 살 때도 오피스텔에서 지낼 때도 가사는 보통 따로 해 주는 사람을 두었기에 이런 걸 스스로 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되는대로 열심히 문질러 봤지만 폼이 어설퍼 자꾸만 그릇이 미끄러졌다. 쿵쿵 몇 번인가 떨어뜨려 가며 간신히 거품 칠을 마친 뒤에는 온 사방이 물바다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자리가 모자라 싱크대 옆에 올려 둔 유리그릇 하나가 뜬금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어?”
나름대로 잡아 보겠다고 손을 뻗었지만 실패였다. 당연하게도 그릇은 엄청난 소리와 함께 깨져 버렸다.
싱크대의 물은 일단 내버려둔 채 유리 조각부터 하나씩 주웠다. 큰 것은 대충 모아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고, 작은 조각들은 빗자루로 쓸어 구석에 대충 밀어 넣었다.
그러는 동안 배수가 원활하지 않은 싱크대에는 물이 줄줄 차올랐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정인이 그쪽을 돌아보았을 땐 이미 넘치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수도꼭지를 잠갔다. 잠겨 버린 그릇들이 세제 거품과 함께 둥둥 떠다녔다.
밥 한 끼 받아먹은 대가로 이 정도 규모의 재난을 겪게 될 줄이야. 기운이 쭉 빠진 정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데 어쩐지 손바닥 아래가 미끄러웠다.
“헉, 뭐야.”
뭔가 싶어 내려다본 곳이 피로 흥건했다. 얼른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피가 줄줄 새고 있었다. 유리 조각을 치우다 베인 것 같았다.
곧바로 지혈을 하지 않은 탓인지, 큰 상처는 아닌데도 방바닥이 섬뜩한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가히 손가락 절단의 현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도시락 통과 함께 들어 있던 연고가 떠올라 막 몸을 일으킨 찰나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 호진이예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였다.
“왜.”
휴지를 둘둘 말아 일단 손가락부터 막았다. 문 너머로 묻자 호진이 대답했다.
“이제 식사 다하셨을 것 같아서요. 그릇 받으러 왔어요.”
“…아직 설거지 다 안 했어.”
“그냥 주셔도 돼요.”
정인은 고민에 빠졌다. 실은 물이 빠지지 않은 싱크대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먹을 건 다 먹어 놓고 더러운 그릇만 돌려주는 건 정말이지 못 할 짓 같았다. 그때, 문 너머에서 호진이 말했다.
“어차피 식기 세척기 돌릴 거예요. 그냥 주세요.”
“…그래?”
솔깃해진 정인은 그제야 슬쩍 문을 열었다.
언제나와 같이 맑게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는지 머리카락 끝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정인은 고갯짓으로 싱크대를 가리켰다.
“근데 지금 상태가 저래. 물기 닦아서….”
“어? 손 왜 이래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이었다. 황급히 정인의 손목을 잡아챈 호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손끝을 꾹 누르고 있던 휴지는 어느샌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다치셨어요?”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처에 달라붙은 휴지를 떼어 냈다.
“아, 그릇 하나 깼거든. 치우다가 좀 베였어.”
그 말에 반듯한 미간이 확 좁혀 들었다. 정인은 빠르게 사과했다.
“깬 그릇은 새로 사 줄게, 미안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말을 하다 말고, 호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우선 상처부터 치료해요. 잠깐 들어갈게요.”
살벌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을 지나쳐 성큼성큼 방 한가운데로 걸어간 호진은 곧바로 가방을 열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정인은 슬금슬금 그의 앞에 앉았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핀셋부터 꺼낸 호진은 솜을 알코올에 적셨다. 처음에는 몇 방울을 톡톡 떨어뜨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입을 꽉 다물고는 엄청난 양을 들이부었다.
“손 주세요.”
딱 봐도 저게 닿으면 아플 것 같았다. 정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호진은 부드럽게 그 손목을 감싸 쥐고는, 젖은 솜으로 상처 위를 꾹 눌렀다.
“아….”
줄줄 흐른 알코올이 상처 틈으로 스며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따가운 느낌에 놀란 정인의 손이 확 튀어 올랐다. 하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 없도록 꽉 붙든 힘 때문에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따가우시죠.”
고저 없는 물음이 와 닿았다.
“당연하지.”
“하….”
정인은 흘끔 눈을 들었다.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호진의 얼굴이 보였다. 티끌만 한 상처를 두고 지을 표정은 아니었다. 마치 손가락이 잘린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라 머쓱해졌다.
“야,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한 번도 안 다쳐. 그리고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니야.”
“다쳐서 속상한 거 아닌데요.”
상처를 한 번 더 닦아 낸 호진은 그 위로 조심조심 연고를 펴 발랐다.
“…많이 놀라고 아팠을 텐데.”
손끝에 작은 반창고가 감겼다. 접착 면의 끄트머리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맞아 들었다.
“형이 다쳤는데 제가 그릇 따위를 신경 쓸 거라고, 그런 생각부터 하시면 어떡해요.”
서운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와 함께였다. 호진이 눈을 들어 정인과 시선을 맞췄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였다. 가만히 정인을 바라보던 호진이 픽 웃었다. 눈은 여전히 울 것 같은 모양 그대로였다.
“안 다치시면 더 좋겠지만, 만약 다치더라도 다음번엔 그런 거 생각하지 마세요. 형 아픈 게 제일 먼저예요.”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정인은 문득 옆방에 잠들어 있을 효준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가 했던 말을.
‘너 좋다는 애 아무나 잡아서 시험 삼아 만나 보기라도 해, 웬만하면 네 말 한마디에 죽는시늉까지 하는 애로.’
‘그래야 진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실수가 없어.’
당연히 그런 짓을 할 마음 따윈 없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호진의 깨끗한 눈을 바라보며 정인은 뜬금없는 질문 하나를 삼켰다.
너는 내 말 한마디에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아시겠죠?”
그러자 호진이 그렇게 물으며 정인과 눈을 맞췄다. 죽는시늉쯤이야 몇 번이고 기꺼이 할 수 있다 말해 버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릇을 찾아가겠다던 호진은 싱크대를 한 번 슬쩍 들여다보더니 꽉 막힌 배수구 너머로 망설임 없이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낀 거름망을 꺼내 쓰레기봉투에 털어 냈다.
“…욱.”
정인은 헛구역질을 누르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써야 했다.
자취 경력이 10년 가까이 되어 가는 호진에게야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설거지조차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정인에게는 그야말로 생전 처음 맛보는 날것의 충격이었다.
여태까지 저런 것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역겹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머리가 다 아플 정도였다.
저 이물질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던 걸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 안에서 썩어 가고 있었던 걸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서, 정인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는 사이 호진은 거름망 세척을 마치고 둥둥 떠다니던 그릇들을 깨끗하게 씻어 착착 쌓아 올렸다. 늘 들고 다니는 물티슈를 꺼내 싱크대 전체를 한 번 닦은 뒤에는 바닥을 쓸었다.
구석구석 남은 유리 조각과 묵은 먼지까지 싹싹 쓸어 담자 쓰레받기 위가 금세 가득 찼다. 핏자국이 벌겋게 말라붙은 장판을 닦아 낸 뒤에는 유리 조각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 한곳에 모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
부르는 소리에 정인은 그제야 호진을 돌아보았다.
“혹시 세탁할 건 없어요?”
“뭐?”
“이번 주에 비 온다고 했거든요. 저 집에 건조기 있는데, 내일 아침까지 다 말려서 돌려드릴 수 있어요.”
“제발 좀…. 그릇만 찾아간다며.”
머리가 너무 아파서 뭐라 대거리를 할 기운도 없었다. 그러나 호진은 해맑게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밥만 해서 가져오나 빨래까지 해서 가져오나 어차피 20킬로미터 가는 건 똑같은데, 이왕 하는 거 한 번에 여러 개 하는 게 낫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냥…. 잠깐만, 20킬로미터라고?”
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어디 사는데.”
“송파 IC 근처요.”
“뭐?”
그 말에 정인은 용수철 튀어 오르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지금 거기서 여기까지 와서 밥 놓고 간 거야?”
“별로 안 먼데. 차 안 밀릴 땐 30분이면 와요.”
30분은 무슨 개뿔의 30분이란 말인가. 효준과 정인이 건물로 들어오기 직전에 놓고 갔다고 가정해도 그 무렵은 퇴근길 러시아워와 정통으로 맞물려 있는 시간대다. 한마디로 이 바보는 지금 정인에게 밥 한 끼를 가져다주겠다고 전쟁통 같은 퇴근길의 서울을 횡단했다는 소리다.
기가 찬 정인은 성큼성큼 호진의 곁을 지나쳐 그가 예쁘게 쌓아 놓은 그릇들을 봉투에 척척 담았다.
“다시는 이런 거 해 오지 마.”
“안 돼요, 약속했잖아요.”
호진은 그렇게 말하며 바삐 움직이는 정인의 손을 붙들었다.
“아….”
“죄송해요.”
맨살 위로 닿아 오는 뜨끈한 열기에 놀란 정인이 움찔하자 그는 곧바로 사과하며 손을 뗐다.
“그래도 무르는 건 없어요.”
“유호진.”
“어차피 이번 주 내로 이 근처에 방 구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태도였다.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정인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하…. 됐다, 그냥 가라.”
“그럼 내일 아침에 또 올게요.”
웃는 낯으로 끝까지 얄밉게 못을 박은 호진은 그대로 현관을 쏙 빠져나갔다.
“저게 진짜.”
한 대만 세게 쥐어박으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하며 침대에 풀썩 누워 버렸다. 그대로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끄려는데, 손 끝에 예쁘게 감긴 반창고가 보였다.
’많이 놀라고 아팠을 텐데.’
곰 같기도 하고, 여우 같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보면 또 곰 같다.
반창고를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불을 툭 꺼 버렸다. 창가로 스민 불빛이 벽지 위에 어른거렸다.
부디 내일 아침에는 두통이 멎어 있기를 바라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안 그랬는데.”
놀라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걱정해 준 마음이 무색하게도 그 정도쯤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 번을 겪으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정인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본가의 방이었다. 포근한 볕이 기어든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참고서와 공책들이 반가웠다. 그 사이사이로 삐져나온 포스트잇에는 수업이 끝나면 누구네 집에서 뭘 하겠다느니 하는 둥의 시답잖은 낙서가 가득했다. 그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허공에 멈춰 버린 손이 보였다.
손의 주인은 원경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에는 정훈이 서 있었다. 정인은 가만히 제 아버지들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일렁이는 감정을 읽어 내려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그날 그들의 얼굴 위에 정인의 시선이 머문 시간은 몇 초가 채 되지 않았다.
‘됐어.’
천천히 입이 떨어졌다. 이 모든 게 꿈인 것을 알면서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나가면 될 거 아냐.’
시야가 변했다.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쳐 현관을 나선 정인은 온 힘을 다해 커다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런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부터 찌직, 하고 뭔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건 기억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발아래에 갑자기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몸이 쑥 가라앉았다.
“…헉.”
눈이 번쩍 뜨였다. 정인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분명 알람을 들은 기억도 끈 기억도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벌써 수업 30분 전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아서 벽을 짚고 간신히 화장실로 기어들어 갔다. 샤워를 마치고 급하게 집을 나서니 아니나다를까 자그마치 송파 IC 근처에 산다던 유호진 선생께서 아득바득 두고 간 봉투가 보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하지만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 그걸 집 안에 들여다 놓을 시간조차도 없었다. 어제 넣어 놓은 효준을 깨우기 위해 옆방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조효준.”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 빨리 일어나라고!”
조금 더 힘을 주어 문을 쾅쾅 쳤다. 그제야 안쪽에서 왜에, 하고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 시야. 알아서 학교 가라.”
“어….”
죽진 않은 걸 확인했으니 됐다. 정인은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확실히 평소보다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음식물 쓰레기 따위를 조금 쳐다봤다고 이렇게까지 몸 상태가 나빠질 수가 있나 싶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열심히 걷다 보니 어느샌가 강의실이었다.
소규모 전공 과목인지라 수강생이 전부 들어온 뒤로도 강의실에는 듬성듬성 빈자리가 남았다. 정인은 뜨거운 숨을 삼키며 구석에 자리 잡았다.
“에…. 날씨가 참 좋아요….”
조금 심하다 싶을 만큼 말이 느린 교수였다. 본격적인 수업에 앞서 서론처럼 늘어놓는 이야기에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정인은 쿡쿡 쑤시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쥔 채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스물, 스물하나, 서른.
“이번 주에는 큰 이슈가 있었죠, 대림 유통이…. 에, 뭐냐…. 안송 산업과…. 기술 공유 협약을 맺었단 말이에요. 물론 우리 학생들이야 이미 알고 있겠지만요….”
여든아홉, 아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으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악물고 있던 정인은 마침내 백까지 숫자를 센 후에야 직감했다. 곧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가슴팍이 확 조여들고 숨이 찼다. 금방이라도 숨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참고 있던 숨을 내뱉자 별안간 세상이 한 바퀴 뒤집혔다.
제대로 시작조차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죽을 것 같았다. 정인은 갑갑한 목을 쥐어뜯으며 급한 대로 화장실에 숨어들었다. 맨 끝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구역질이 났다. 욱, 하는 소리와 함께 빈 속을 몇 번이나 게워 냈다.
너무 아팠다. 온몸의 장기를 전부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덜덜 떨며 핸드폰을 쥐었다. 이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곳이라곤 지금쯤 숙취에 쩔어 있을 효준뿐이다.
“…제발.”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다. 저장된 사람이라곤 몇 되지도 않는 전화번호부 속에서 겨우 효준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 사이에도 몇 번이나 속이 뒤집혔다. 변기를 붙잡고 가까스로 발신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인가의 신호음이 가는 그 짧은 시간조차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차가운 바닥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채, 정인은 구원을 찾듯 핸드폰을 쥐었다. 머지않아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효준아….”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나 좀…. 도와줘, 흐윽….”
간헐적으로 몰아치던 고통이 잔인하게 기세를 드높였다. 허억, 하고 숨을 삼키자 침묵하고 있던 상대가 물었다.
- 어디예요?
효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인은 간신히 눈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어째서인지 화면 위에는 호진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도 꼬일 수 있는지, 효준에게 전화를 걸려다 이름이 비슷한 호진에게 잘못 건 것 같았다.
- 지금 바로 갈게요. 어디예요?
“잘못 건…. 아, 윽.”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엄청난 통증이 몰아쳤다. 숨을 쉬려고 입을 열 때마다 명치 아래에 칼이 박혀 드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사람을 가릴 처지가 못 됐다.
“하아…. 여기, 흑…. 3층….”
화장실. 겨우 토해 낸 말을 끝으로 핸드폰이 툭 떨어졌다. 정인의 몸과 함께였다.
- TH관 맞아요? 전화 끊지 말고 그대로 들고 계세요.
구겨지듯 바닥에 쓰러진 정인은 가물가물 흐린 눈을 들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아직 끊기지 않은 전화 너머로 간간이 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고 있어요. 5분 안에 도착할 것 같아요.
- …형. 제 말 듣고 있죠?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보일 리 없음에도 호진의 목소리는 동요 없이 이어졌다.
- 이제 막 코너 돌았어요. 건물 입구 보여요.
아무런 대답이 없는 정인에게 대고 호진은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밝혔다. 쓸데없는 짓을 한다 싶으면서도 그 힘 있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 계단 올라가는 중이에요.
적어도 여기서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순간을 견디면 어떻게든 괜찮아질 수 있을 거란 믿음까지 솟았다.
- 3층까지 다 왔어요. 지금 들어갈게요.
멍하니 눈만 깜빡이며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적막뿐이던 화장실 안으로 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
노크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저예요. 문 열어 주세요.”
대답을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마당에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정인이 아무 말도 없자 호진은 몸을 낮춰 문 아래의 빈틈을 살폈다. 점점 호흡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정인은 작은 틈 너머로 호진과 눈을 맞췄다.
“가능하면 조금만 뒤로 물러날 수 있겠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에요, 그냥 그대로 계세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하며 호진은 좁은 틈 사이에 팔을 밀어 넣어 정인의 다리를 뒤로 밀었다. 축 늘어진 몸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밀려났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된 것을 확인한 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문 부술게요.”
단 한 번이었다. 어마어마한 파열음과 함께 쇠붙이가 떨어져 나갔다.
“형.”
문이 부서지며 정인에게 닿을 것을 염려해 한 손은 일정 각도 이상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문을 꽉 붙든 채였다. 그는 곧바로 몸을 낮춰 정인을 안아 들었다. 단단하게 몸을 받쳐 오는 팔 안에서 정인은 그대로 정신을 놓고 말았다.
〈2권에 계속〉
[각주 모음]
1) 센타르Centar : 3차원 척추 안정화 운동시스템. 약한 근육의 방향과 통증 포인트를 체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