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어느 누구도 만날 생각 따위 없었는데. 하지만 찾아온 손님은 해교의 자의로 만남의 가부를 결정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산골짜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안일함이 불러온 참사였다.
“흐으, 으…….”
“대가리가 안 돌아가나 봐? 여기가 섬인데 튀어 봤자 섬이지. 븅신.”
사나운 눈매 아래, 찢어지기라도 했던 듯 얼굴을 사선으로 가르는 흉터가 선명한 남자가 해교의 윗머리를 때리듯 툭, 툭 거칠게 쓰다듬으며 입매를 비틀었다. 해교는 그 손길이 투박하게 정수리를 내리칠 때마다 움찔 어깨를 움츠린 채 줄줄 눈물을 흘렸다. 온몸의 힘이 빠져 제멋대로 딱딱 부딪히는 어금니를 고정할 수 없어 아까부터 턱이 절로 떨렸다.
“그래서. 우리 고생시킨 만큼 돈은 좀 있어?”
“큿…… 윽……. 끄으…….”
꽉 쥐인 멱살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서늘한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삽시간에 식은땀이 맺혀 온몸이 경련했다. 기도가 막힌 바람에 단숨에 시뻘게진 얼굴로 고통을 호소했지만 상대는 조소만을 머금을 따름이었다.
퍽 애처로운 모습이었으나 그런 감정을 느낄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이 섬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차윤식을 탈탈 털어 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들의 목표는 차해교였다. 쥐어짜 내서 돈이 나오지 않으면 장기를 털어서라도 받아 낼 작정이었다.
“아가, 돈 해 주려고 차윤식한테 연락한 거 아니었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발이 돌부리에 걸려 단번에 균형을 잃었다. 바닥에서 파닥대는 해교를 잠자코 내려다보는 남자의 표정은 무감했다. 버둥대느라 애쓰는 몸에서 오는 진동 때문에 간간이 얼굴 근육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으, 흐으…… 해교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연락은 왜 했어. 사람 설레게.”
“흐윽!”
남자가 우악스레 해교의 머리채를 붙들고 뒤로 당겼다. 거침없는 손길에 단번에 고개가 젖혀지고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해교의 얼굴이 정면으로 남자의 시야에 닿았다. 통증으로 말미암아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도 불구하고 뽀얗고 말간 얼굴은 그들의 구미를 당겼다.
“새끼야, 살살 해라. 특히 얼굴은 건들지 마.”
“예, 형님.”
돈이 없다는 말에 단단히 말아 쥔 주먹이 이제 막 복부에 꽂혀 들려던 참이었다. 해교가 수하들의 손길에 따라 처참하게 짓뭉개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 남자가 이를 저지했다. 예상치 못하게 반반한 모습에 장기가 아닌 다른 걸 팔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꽤 값이 나갈 듯했다.
“끅…… 흣…….”
해교를 붙들고 있던 남자가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힘을 주어 누른 손을 풀었다. 켁켁, 막혔던 기도가 트이면서 마른기침이 급박하게 섞여 들었다.
그저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해서 했던 전화에 꼬리가 잡힌 듯했다.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를 알게 되었다는 건, 아버지 역시 이들에게 잡혔다는 뜻일까. 이번에 잡히면 죽는다고 했는데 설마 아버지를 죽인 건 아니겠지.
“돈은, 하윽, 돈은 없어요. 그런데 꼭…… 꼭 갚을 테니까 아빠…… 끅!”
“이게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남자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금 제 손을 해교의 목울대 위로 올렸다. 단번에 가느다란 목이 뒤로 꺾이고, 힘없이 감긴 눈꺼풀에 매달린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였다.
부웅, 하루에 한 번밖에 운영하지 않는다는 여객선이 또 한 번 섬에 연착하는 것을 알리는 경적이 울렸다. 섬마을 끝까지 닿을 법한 커다란 경적 소리에 숨통이 조여 파닥거리던 해교도, 그런 그를 관망하던 이들도 소리가 나는 해안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객선이 섬에 닿기도 전에 뛰어내린 남자는 곧장 산등성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에 남자의 잘 닦인 구두 위로 흙먼지가 휘날렸다. 하나, 둘, 셋…… 해교를 둘러싼 남자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남자들이 시커먼 정장을 입은 채 그를 따라 배에서 내렸다.
“늦을 뻔했잖습니까. 그러길래 운전은 내가 한다고 했었죠.”
“죄송합니다.”
질타하듯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푹 수그린 남자의 덩치가 심상찮았다.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린 남자를 필두로 수많은 남자들이 그를 따르며 단숨에 산 중턱까지 올랐다. 하나의 산이 움직이는 것만큼 커다랗고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그들은 성큼성큼 시원스레 떼는 걸음의 보폭이 넓어 몇 걸음 걷지 않아 원하던 목적지에 금세 도착했다.
혹시, 이 사람들에 더해 또 다른 채권자까지 찾아온 건가. 그렇다면 정말 오늘은 해교의 제삿날일지 몰랐다. 제 위에 올라탄 남자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지만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해교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크헉!”
그러나 다음 순간,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해교를 겁박하던 손이 단숨에 종잇장처럼 나가떨어졌다. 흐윽, 헉…… 숨을 몰아쉬는 해교에게 급히 다가간 남자가 해교의 양 뺨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어디에, 얼마나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는 손등에는 방금 전 주먹을 휘두른 탓에 묻어난 뜨거운 액체가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 서, 흐으…… 생님?”
“응. 나예요.”
꿈이 아닐까. 말도 안 됐다. 궁지에 몰린 나머지 환상이라도 보는 게 아닐까. 하지만 엄청나게 쏟아 낸 눈물의 양으로 흐려진 시야 사이에서도 가늠할 수 있는 얼굴은 틀림없는 지혁이었다.
이 외딴섬에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오신 거지.
두려움에 매몰되었던 방금 전보다 한껏 더 심하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제멋대로 펄떡거렸다. 놀란 해교의 눈이 쏟아질 만큼 커다래진 사이, 지혁과 함께 등장한 남자들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지혁의 지시에 따라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교를 얕봐 맨손으로 등장한 이들과는 달리 보기만 해도 온몸이 서늘해지는 날카로운 연장이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단숨에 산등성이를 점령한 그들은 해교에게는 한없이 거대해 보이던 이들을 손쉽게 쓰러트리고 무릎을 꿇렸다.
아까부터 기세등등하게 해교를 윽박지르던 남자는 끙끙거리며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가느다란 목을 옥죄어 기도가 살짝 막혔던 것 외에는 당장 눈에 보이는 외상은 없는 듯했다. 조금 겁을 먹었을 뿐. 그런 해교를 안심시키듯 살짝 뺨을 문지르고 눈을 감긴 지혁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저의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 낸 남자에게로 다시 다가갔다.
지혁이 고갯짓하자 그와 함께 등장했던 일행들이 단숨에 몸으로 가벽을 세워 해교와 그들 사이를 갈랐다. 해교의 시야에는 새카만 정장을 입은 남자들의 뒷모습만 보일 따름이었다. 그러자 살벌한 분위기가 조금은 가려지는 듯도 하였다.
퍽! 주먹이 뻗어 나가 뼈와 뼈가 부딪히는 듯한 서늘한 소음이 공기를 갈랐다. 퍽! 퍽! 연이어 들려오는, 무언가를 찧는 듯한 소리 사이사이에 살려 달라고 고통스레 비는 남자의 애원이 섞여 들었다. 음성만으로도 가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지혁이 손을 뻗어 쓰러진 남자의 목을 감싸 쥐고 누르기 시작했다. 허윽, 헉, 남자가 땅을 치며 지혁에게서 벗어나려 애를 쓰면 쓸수록 외려 그를 짓누르는 손의 힘은 차츰 더 강하게 목울대를 압박하였다. 여전히 지혁의 손엔 남자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검붉은 피가 채 마르지 않은 상태로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끄으, 크으, 윽!”
“그러게 왜 좆같이 사람 목을 졸라…….”
짓밟힌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화가 난 건지, 기분이 좋은 건지, 속을 알 수 없는 지혁의 눈동자가 검게 일렁였다. 삐딱하게 비틀린 입술은 여전히 모양이 좋았다. 지혁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눈동자가 돌아간 남자의 숨통에서 느릿하게 제 손을 뗐다. 시체에 가까운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는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남자가 엎어진 채 바들거리자 지혁이 그의 머리채를 쥐어 고정한 뒤, 뺨을 매섭게 내리치며 속삭였다.
“채권 사 주러 왔는데 누워 있으면 쓰나. 고객인데 깍듯이 모셔야지?”
* * *
지혁은 수십 번 들여다보아 이제는 익숙해진 상호명의 빌딩 앞에 내려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의 삽질은 모두 이 한 방을 위한 거였다. 오늘 합의만 잘 이끌어 내면 차해교의 안전과 행방, 모든 것이 제 손안에 쥐어질 터였다.
도착한 사무실 내에는 미리 협의된 듯, 지혁을 기다리는 이들이 즐비했다. 협약을 위해 대기 중인 변호사와 도윤의 형, 그리고 아버지까지. 온 식구가 출동한 바로 보아 이도윤은 꽤나 집안에서 촉망받는 듯했다.
항상 정도를 걷던 아들이 엇나갈까 걱정되었던 도윤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흔쾌히, 그저 목적이 뭐든 수단이 뭐든 간에 일을 처리해 달라며 지혁의 요구 조건을 선뜻 받아들였다.
너무 어려 무엇이 중요한지 구분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는 제 아들을 정신 차리게 할 구실을 마련하는 것이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비록 몸을 쓰는 일을 통해 사업을 키워 왔지만 직감이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도윤은 영영 정신 차리지 못할 거라고.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모든 사인을 마친 서류를 받아 든 지혁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해교 아버지가 도윤네 대부업에 진 빚을 이자까지 더해 몽땅 지혁에게로 넘기는 조건과 함께 지혁은 도윤 측 인사 몇몇과 차윤식의 행방을 찾아내고 처리할 수단을 선사받았다.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숱하게 차고 넘칠 나머지 채권들까지 책임지기로 마음먹은 지혁은 만났을 때보다 한결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윤의 아버지에게 먼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바로 뒤에 서서 모든 과정을 주시하고 있는 도윤의 형 또한 덤이었다.
〈……일이 잘 마무리되길 바랍니다.〉
사업에 관심이 생겼다는 말에 기쁘게 오냐오냐 다 받아 주었는데. 도무지 여자한테도, 사업의 승계에도 관심을 갖지 않던 놈이 난데없이 가진 것 없는 동성 남자에 빠져 제멋대로 추적에, 뒷조사에…… 아주 영화를 찍고 있었다. 죽마고우로 자라났던 우연제와 함께.
이래선 우 사장 볼 낯이 없었다.
낮과 밤처럼 확연히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는 연제와 도윤의 부모였지만, 유독 친하게 지내는 아들들을 매개로 가끔 연제의 부모가 귀국할 때면 가족끼리 식사 자리를 마련할 때가 있었다.
엇비슷한 규모의 자산을 가진 두 집안인지라 언제고 위기 상황이 닥치면 어느 정도 서로에게 도움도 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며 이어 온 연이었다. 그 끈을 이런 일로 그르칠 수는 없었다.
지혁은 채권을 양도한 각서를 서류철에 끼워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드님이 얼른 정신을 차렸으면 하네요, 하며 걱정하는 듯한 말을 덧붙이면서.
* * *
해교의 숨통을 가벼이 쥐고 흔들던 남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혁만이 남았다. 해교는 제 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지혁이 나타난 이후로는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협박하던 남자들과 지혁과 함께 등장한 남자들 모두가 환상이었던 듯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늦었죠. 미안해요.”
지혁이 바닥에 쓰러진 해교의 겨드랑이 사이에 제 손을 넣곤 가볍게 그를 들어 올렸다. 너무 가벼워 거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아 해교를 일으키는 지혁의 미간에 잠시 주름이 잡혔다. 매끄러운 복숭앗빛 뺨은 눈물로 뒤덮여 엉망이었다. 턱 끝에 매달린 제법 큰 물방울이 지혁의 네이비색 외투 위로 똑, 떨어지며 흔적을 남겼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휘청거리는 해교를 제 품에 기대게 한 채 지혁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려 가느다란 등줄기를 느리게 쓸어내렸다. 지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해교가 파들파들 떨던 몸이 진정되자 찬찬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현실감이 없어서였다.
자신의 품 안에서 바르작대는 해교의 몸짓에 지혁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쳤다.
“불편해요?”
“아니, 끄으, 아니에요. 그냥……. 어, 어떻게 여기에…….”
홀연히 나타나서는 당장에라도 억지로 끌고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지혁이 감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이 미소가 먹혀들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게.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왔을까.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
“어, 없어요. 괜찮아요. 그런데 정말 선생님이 여긴…….”
“왜겠어요. 너 찾으러 왔지. 친구 집에 간다더니 여기가 친구 집입니까.”
“네? 흐으…… 그게……. 저는, 저는 그냥…… 선생님이 진료하는 환자니까. 더는 민폐 끼치지 않기로 마음먹어서요.”
“환자?”
“네에…… 끅……. 그게, 이제 곧 결혼도 하실 건데, 어, 그 집에 계속 있기도 죄송스럽고…….”
눈물이 아른아른 차오르는 해교의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지혁의 약혼 소식을 듣던 날 느꼈던 절망감이 다시 떠올라 그를 억눌렀다. 동그란 눈꼬리 전체가 일순 뜨겁게 달아올랐다.
역시 제 짐작이 맞았다. 간호사들끼리 지헌의 약혼식 이야기를 화두에 올린 걸 제 약혼식으로 오해하고 당황해서 여기까지 온 거였다.
도시락이며, 약혼식에 실망해서 여기까지 온 거며 지금 태도까지……. 모든 행적은 오로지 명확하게 하나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감정의 크기 차이는 있을지언정 차해교도 저와 같은 마음인 거다. 해교는 그새 퉁퉁 부은 눈으로 훌쩍이고 있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지혁은 입꼬리가 자꾸만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것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결혼이라니.”
“흣, 선생……님…… 끄윽, 약혼, 식…… 하신다고…….”
“차해교 씨 눈에는 내가 뭐로 보여요?”
“……? 다, 당연히 의사 선생님으로…….”
“그래요. 자선 사업가로 보이진 않아 다행입니다. 사실 난 차해교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저열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에요. 그런 내가 유독 한 사람 앞에선 자꾸만 내가 모르던 모습을 보여요. 세상 어느 천지 미친 의사가 자기 시간 빼 가면서 이렇게까지 환자를 찾으러 옵니까.”
해교는 지혁의 의중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길고 어려운 말이었다. 자선 사업가가 아니라는 말은 알겠는데……. 의미를 파악하느라 축 처진 눈썹이 그의 얼굴을 한결 더 울적하게 보이게끔 했다.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내가 아주 쉬운 말로 풀어서 이야기할게요. 내가……. 차해교 씨한테 관심 있어요. 아니, 신경 쓰…… 씹. 이딴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좋아해요.”
“……네?”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그것도 꽤 많이.”
쐐기를 박는 말이 이어졌다. 해교는 지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에 꿈을 꾸는 듯했다. 퍽 놀라 입만 벙긋거릴 따름이었다.
“내 말을 어떻게든 오해할 건더기를 찾는 것 같은데 환자로서, 그딴 거 아니고 연애 감정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한 거예요.”
“저, 정말……요?”
“어떻게 증명하지. 지금 심장이라도 갈라서 꺼내 줄까요.”
선생님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씀해 주시는 건 정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지만 아까까지 있던 사채업자들이 하는 말로 보아서는 아버지가 이번에 단단히 큰 사고를 친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로이 선생님에게 고백…… 같은 걸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생님을 위험에 빠트릴 순 없었으니까.
“아니, 아니, 가, 가르지 마세요……. 저, 서, 선생님……. 그런데, 흐으, 저희 아빠한테 일이 있어서요. 여기서 이러다가, 끅, 선생님이 다치실 수 있어요.”
“다 불법 추심이에요. 걱정 말아요. 같이 온 분들이 다 해결해 줄 거예요. 아까 그 사람들도 그분들이 해결했어요. 조금 무서웠죠? 음, 나도 좀 무섭긴 했는데 합법적으로 일 처리 하신 거래요. 태형, 뭐 이런 거죠.”
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다정히 해교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치를 떨 만큼 끔찍한 폭행에 저는 가담하지 않았다는 듯, 철저하게 선을 긋고서. 아까 해교를 붙들고 있던 남자에게 갚아 주느라 핏줄 선 손등은 시차를 두고 튄 핏자국이 어지러이 묻어났으나 다행스럽게도 놀란 해교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불법이긴 한데, 다들 하는 거라고…….”
도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젓는 해교를 안심시키듯 지혁이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이미 차윤식의 채권 대부분을 지혁이 사들였고 추가적으로 맞닥뜨릴 어떤 유형의 사고든 본인이 책임지기로 마음먹은 채였다.
하지만 이를 사실대로 말한다면 차해교는 당장 숨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굴겠지. 남들이라면 행운이라고 여기고 덥석 받아들일 모든 것들을 민폐로 여기고 어떻게든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고.
“내가 말했죠. 정부 손을 잡고 연구한다고. 그러니 내가 해결 못 할 문제는 없어요. 나 믿잖아요. 지금 있었던 일도 다, 범법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정부에서 허가해 준 일이었어요. 난 그냥 때가 맞아 함께 들어온 거고.”
단호한 지혁의 말을 듣자 해교는 거짓말처럼 안심이 되었다. 여태껏 의사 선생님이 해결하지 못하신 일은 없었으니까.
눈물샘이 마르며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가슴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지혁이 이를 느끼며 해교를 다시 제 품에 힘주어 안았다. 진정시킨 것이 무색하게 빳빳하게 굳은 해교의 몸에 달린 심장이 다시금 쿵, 쿵 정신없이 뛰기 시작하였다. 맞닿은 지혁 역시 그랬다.
“집에 갑시다. 메리……도 기다려요.”
사이사이, 알레르기에 대한 대안까지 알아보며 고양이를 데리고 있던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 *
지혁은 그길로 해교를 돌봐 주었다는 할머니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를 기다려 인사를 건넸다. 정말 손자 같아서 그랬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노인은 자랑처럼 제 손자의 사진을 지혁에게 보여 주었다.
“진짜 닮았제?”
“…….”
지혁이 보기엔 공통점이라곤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인 것이 전부였으나 그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얼굴 근육을 부여잡느라 혼신의 힘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얼마 되지 않는 1년 치 사회성을 이 순간 다 써 버린 것 같았다.
적정선의 사례비 또한 건네는 것을 잊지 않은 뒤, 다음에 같이 놀러 오자는 말로 해교의 미련을 떨쳐 낸 지혁은 혹시 모를 쇼크에 대비해 마음이 바빴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여객선이 섬을 출발해 뭍에 닿자마자 지혁은 종합 병원으로 향해 해교에게 각종 검사를 받게 했다. 검진 결과, 조금 놀랐을 뿐 외상도 내상도 없다는 의사의 소견에 그제야 만족한 그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차에 탑승했다.
서울로 되돌아오는 길, 뒷좌석에 앉은 지혁은 제 옆에 앉은 채 잔뜩 긴장해 있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꾸벅꾸벅 조는 해교를 지켜보았다. 지혁은 한참 위태하게 고개를 젖히던 해교의 조그만 머리통을 붙들어 제 어깨에 기댔다.
그러다 방지턱을 만나 차체가 살짝 흔들리며 그의 머리가 어깨를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질 뻔하자 급히 뺨을 감싸 안고서 백미러로 운전대를 잡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더욱 조심히 운전하겠습니다.”
지혁이 조심스레 해교의 뺨을 받친 손을 옮기며 제 허벅지 위로 내렸다. 탄탄한 허벅지 위에 완연히 해교의 얼굴을 누인 채로 차량은 한참 동안 도로를 달렸다. 얌전히 허벅지에 놓인 보드라운 뺨이 탐스러웠다. 지혁은 자꾸만 허벅지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의지와 상관없이 앞섶이 팽팽해져 감을 느꼈다. 달콤한 고역이었다.
“우응…….”
딱딱하지만 포근한 느낌이 드는 베개에서 고개를 돌린 해교는 열기가 느껴지는 단단한 것에 코가 짓눌렸다. 이게 뭐지? 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제 앞의 물체를 관망하던 해교가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흠칫 얼굴을 물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 내내 해교가 뒤척일 때마다 착실하게 커지기 시작한 지혁의 좆이었다.
간만에 보아서인지 바지 천에 눌린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상당한 부피였다. 아직 한계까지 발기하려면 멀었는데도.
운전대를 잡았던 남자는 차에서 내린 지 오래였고, 지혁은 해교가 깨어날 때까지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네…….”
민망한 듯 뺨을 문지르는 해교를 조심스레 일으킨 지혁이 차 문을 열었다. 히터가 나와 따스하던 차 안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에 해교가 잠시 몸을 떨었다. 이를 눈치챈 지혁은 제가 걸치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어 해교의 어깨를 감쌌다.
불과 몇 걸음만 걸으면 집 안이건만, 지혁은 집으로 들어가기 전 몇 시간 동안 참고 있었던 말을 내뱉었다.
“완전히 정신이 든 거면 키스해도 되나요.”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물음이었다. 매번 진료며, 뭐며 갖은 핑계를 대고 몸을 접촉해 왔던 터라 해교는 어안이 벙벙했다. 거기다 조심스레 허락을 구하는 말투가 조금 낯간지러웠다.
“네……?”
“내가 좋아서 떠났던 거 아니에요? 결혼한다고 오해해서.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 이건 진료, 그딴 걸 핑계로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같은 걸 차해교 씨가 느끼고 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단순히 의사로서 기대고 싶은 건지가 알고 싶어요.”
여전히 자신의 어깨에는 지혁의 따스한 손길이 닿아 있었다. 선생님이 느끼는 감정……. 아마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일 터였다. 아버지와 사채업자 일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선생님이 걱정할 것 없다고 하셨으니 솔직한 내 마음을 전달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기적적으로 의사 선생님과 마음이 통하는 일이 있을지 몰랐다. 아니, 아예 지금이 꿈일지도. 그렇다면 더욱 망설일 것이 없었다.
머뭇대던 해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혁의 목에 제 팔을 뻗어 감은 채 그의 말에 응답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닿고 싶어 발뒤꿈치가 휘청일 정도로 발끝에 힘을 주고 지혁에게 와락 안겼다.
“네. 서, 선생님이 해 주시는 다정한 진료도 좋지만…… 저는…… 선생님이 좋아요…….”
까치발을 한 채 제게 매달리는 해교를 잠시 바라보던 지혁이 제 앞의 조그만 턱을 붙든 뒤 조심스레 입술을 맞대었다. 쪽, 얇고 부드러운 점막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차고에 울려 퍼지더니 또다시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제는 다정한 눈빛으로 해교의 얼굴 전체를 훑어 내리던 지혁 또한 온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그간 거친 바람이 이는 곳에서 제대로 된 화장품 하나 찍어 바르고 지내지 못했을 것임이 분명했는데도 맞닿은 입술은 여전히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탐색을 하듯 느릿하게 마주했다 떨어져 나가길 수차례 반복하던 입술은 혀끝을 내지 않고 얇은 입술 점막만 간신히 포개고, 부딪히고, 비비며 애정을 표현했다.
여린 점막이 맞닿을 때마다 계속해서 젖은 소리가 났다. 뜨거운 살덩이를 얽지도 않았건만 느릿하고 부드러운 접촉만으로도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해교는 지혁의 목을 감았던 손을 내려 그의 허리에 둘렀다. 비록 지혁의 너른 몸을 다 안을 순 없었으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감싸 안은 몸 전체는 따스했다. 단단하고 따스한 품을 절대 놓지 않을 듯 껴안자 거짓말처럼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듯했다.
화답하듯 결박에 가깝게 해교의 몸을 빈틈없이 껴안은 지혁이 작게 웃음 지으며 제 혀를 꺼냈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붉은 혀가 밀려 들어갔다.
꼭 지혁의 몸만큼이나 두툼한 것이 연약한 살덩이를 휘감고 헤집자 속절없이 끌려가는 해교는 벌써부터 정신이 몽롱해졌다. 혀뿌리를 빨고 이를 부딪치고, 입술이 맞닿는 질척한 소리 사이로 감미로운 신음이 울렸다.
온몸 말단에 심장이 달린 듯 쿵쿵거리는 맥동이 느껴졌다. 감겼던 눈꺼풀이 서서히 다시 올라가고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 * *
“당신 빚은 내 앞에 달아 뒀습니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여럿이라 당신 하나 잡는 게 귀찮아 두고 보는 타입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채권은 오직 차윤식, 당신 것 하나뿐이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알려 주는 겁니다.”
지혁은 차윤식을 해교의 아비라는 명목으로 최대한의 인내심을 끌어 올려 대우해 주고 있었다. 이를 알 리 없는 그는 꼬박꼬박 존댓말로 응수하는 젊은 남자를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잘만 구슬리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일단 이거 풀고 말해요. 어디 도망 안 간다니까? 내가, 내가 정말 이번에 판 하나가 있는데 이럴 게 아니라고! 놔줘야 당신도 빚을 받을 거 아니에요. 예?”
“당신 채권, 썩은 거나 다름없었어. 여기저기 들쑤셔 놔서 골칫덩이던데 나 아니었으면 지금쯤 숨이 온전히 붙어서 살아 있지도 못했어요. 빚 갚는 데 큰 도움이 안 될 장기나 꺼내고 껍데기는 버려졌겠지.”
“아악! 내가 지금! 지금 가 봐야 한다니까!”
야산에서 목만 빼고 묻힌 걸 꺼내 줬더니 정신 차리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그도 그럴 것이 거한 판돈이 걸린 하우스 도박 도중에 끌려 나갔으니 그로서는 눈이 돌 수밖에 없었다.
지혁은 냉랭한 눈빛으로 차윤식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너무 젠틀했군요. 적당한 선에서 정신 차리게 해 주세요. 다만 손발이 부러지진 않았으면 합니다. 그 정도 예의는 지켜 드리고 싶어서.”
지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서 뒷짐을 지고 대기하고 있던 험상궂은 남자들이 곧바로 두둑, 주먹을 풀며 차윤식에게로 다가섰다. 지혁은 미묘하게 바뀌는 공기를 느끼고 두려움에 물들기 시작한 차윤식을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았다.
그의 구겨진 얼굴 위로 잠시 해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 것도 같았다. 그게 반갑기보단 역겨웠다. 평생 차해교 앞에 나타나 알짱거릴 일이 없도록 할 예정이었다.
“일이 끝나면 보고 올린 곳들 중 적당한 도박 중독 치료 센터에 구겨 넣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지혁의 허가 없이는 절대 다시는 나오지 못할 곳이었다. 아주 가끔 상처럼, 해교가 그를 그리워할 때가 되어서나 목소리 한 번 들려줄 작정이었다. 갱생은 어려울 듯하니.
지혁이 빠져나간 비닐하우스 안에서 고통에 젖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나갔다. 그래 봐야 한적한 산속에 곧 묻혀 버릴 신음이었다.
인생사에서 굳이 쓴맛을 볼 필요는 없었다. 때론 모든 걸 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약이 되기도 하니까. 대신 미안한 만큼 더 잘하면 되는 거다. 지혁은 그렇게 해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자신의 과거를 덮기로 했다.
차윤식의 처분마저 마친 지혁이 차에 올라 골몰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네가 만족할 만한 결말일까. 당사자 세 사람 모두 함구하고 있었으니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정확한 처분은 정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생각 같아선 해교에게 대놓고 묻고 싶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직설적이고 확실한 성격의 자신과는 달리 차해교는 물렀다. 무를뿐더러 겁도 많았다. 자신의 방식대로 묻고, 대답을 기다리는 짓을 했다간 또 저번처럼 금세 울음이 터져 나올지 몰랐다. 우는 얼굴까지 사랑스럽긴 하지만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더는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냘픈 얼굴엔 늘 흐드러지게 만개한 웃음만 머금게 하고팠다.
“음…….”
그래. 결심이 섰다.
추후에 차해교가 알게 되어도 별다른 충격이 없으면서 가장 깨끗이 치우는 방법,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깔끔하게 엿 먹이는 법을 택하기로.
세상 더 산 어른으로서 이정도 아량은 충분히 베풀어 줄 법도 했다. 때론 무차별적인 폭력이나 눈에 보이는 복수보다 가슴을 긁는 좌절감과 무력감이 사람을 파멸시키는 데에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오히려 이게 조무래기들이 갖지 못한 어른으로서의 포지션을 확고하게 활용하는 방법일 테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다면 꽤나 분통이 터지겠지.
지혁은 해교가 너무 어리기에 그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어 때때로 그보다 지나치게 빨리 태어난 자신이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이번 일을 처리하면서는 자신을 일찍 낳아 준 부모에게 처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 제 나름의 기반을 다지고 능력이 십분 발휘된 덕에 그 애송이들에게서 차해교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으니.
* * *
“후우…….”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당분간 미뤄 둔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지긴 하겠지만 감수할 수 있었다.
지혁은 피곤한 몸을 좌석에 기댄 채로 달라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막 일 처리를 끝낸 탓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겨 풀곤 톡, 톡,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러다 생각이 난 듯 앞좌석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수행원에게 말을 걸었다.
“이도윤 떠나는 날이 언제라고 했었습니까.”
“이도윤은 1월 1일, 우연제는 1월 5일이 출국일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안 남았네. 나중에 출발하면 한 번 더 확인하고 보고해요. 유학 간 학교 정보도 함께.”
“예.”
차창 너머 스며드는 야경을 바라보는 지혁의 시선에는 포만감이 넘쳐흘렀다. 지난 며칠간의 행적을 반추하며 휘어지는 입매는 그답지 않게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그래, 우선 이도윤부터였나…….
* * *
열린 사무실 문틈으로 이질적인 분위기가 새어 나왔다. 도윤은 급작스레 저를 사무실로 호출한 둘째 형에게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대수롭잖게 문을 열었다. 또 누가 사고라도 쳤나,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선배……님?〉
도윤은 잠시 방에서 저를 기다리던 남자를 지헌으로 착각했으나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류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지헌을 닮은 그의 형, 한지혁이었다.
도윤의 등장에 뒤로 훅 넘어가 있던 검은색 가죽 의자가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며 의자에 앉아 있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흔치 않은 키의 도윤조차도 내려다보지 못할 체구를 가진 남자가 반가운 듯 눈을 휘며 웃었다. 조롱하듯 슬며시 눈을 내리깐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안녕.〉
지혁이 겉치레에 불과한 인사를 전했다. 도윤을 바라보는 지혁의 가벼운 인사에는 한껏 오만한 기색이 묻어나 그 의중을 도윤이 눈치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상황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던 도윤이 미간 사이를 좁히고 입을 떼었다.
〈……뭐예요?〉
도윤은 하마터면 지헌으로 착각할 뻔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대체 왜, 어떤 연유로 한지혁이 이곳에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진작 해교가 지혁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알았고, 그가 머무르는 집의 주인이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한지헌의 형제라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어 대충 우연제에게 떡밥을 던져 놓고 상황을 봐서 나서려 했는데…….
왜. 이 사람이 여기 왜.
〈네가 도윤이구나. 형님이랑 이야기는 잘 끝났는데 어린 네가 납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혁이 유독 ‘어린’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며 도윤의 어깨를 도닥였다. 도윤보다 살짝 높은 시선이 느른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을, 어떻게 형이랑 이야기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딴 거 저랑은 관계없어요.〉
도윤이 지지 않겠다는 듯, 제 어깨를 감싼 지혁의 손을 단번에 떨구어 냈다. 과연 한가락 하던 집안이라더니 아직 어린 도윤의 눈빛 역시 형형해 지혁은 살짝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지헌이 보는 눈은 있네.
〈너 가업 물려받기 싫어서, 스타트업 시작해 보고 싶어서 한지헌 쫓아다녔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부모님과 척져도 될 거 같겠지. 어린 마음에.〉
〈그거야 정말 제 사정인데 그쪽이 어떤 권리로 그런 말을 하시는데요?〉
〈잘 생각해. 차해교 부친 앞으로 달린 빚이 얼만지. 집안 재산 생각하면 그깟 몇억, 싶겠지만 지금 네가 상환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
〈나중에 갚든, 어쩌든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끄세요.〉
〈……도윤아. 네 아버지가 차해교 존재를 모를 것 같지?〉
〈무슨……!〉
〈그대로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해? 네 호기심으로 건드린 차해교 인생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지 않나? 아버님이 참 예쁘게 생겼다, 하며 어화둥둥 예뻐해 주시리라 생각할 만큼 어리진 않겠지.〉
일개 의사였다. 한지헌처럼 의전을 위해 부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제 형처럼 범법 지대에서 피를 튀기며 구르는 것도 아닌, 그냥 의사. 그런 의사가 어디까지 알아보고 제 목줄을 쥐고 흔드는지 쉬이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한지헌이 개입해서 이 정도로 멈추는 거야. 똑똑한 애니까 적당히 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편 많이 들던데. 불행히도 나는 한지헌과는 많이 다른 타입이거든. 정해 놓은 선 이상 넘어오면 더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걸로 안 끝나.〉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당장 눈앞의 불을 끄느라 급급해 제가 하는 짓에서 파생되는 문제까지 신경 쓰지 못한 이도윤 때문에 차해교의 존재는 이미 도윤의 부모를 넘어 함께 관여하고 있는 연제의 부모에게까지 화두에 올라 있었다.
생각보다 해교가 지혁의 집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져 여기저기 흘린 흔적을 도윤이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저 해교만 바라보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 도윤이 뒤늦게 제 실책을 깨닫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 제일 중요한 말을 빼먹었네. 남의 걸 탐내면 안 되지. 학교에서 아직 거기까진 안 알려 줬나 봐.〉
그럼, 열심히 배워. 지혁이 말을 덧붙이고 유유히 사라졌다. 떠나가는 그 모습을 주시하던 도윤은 이내 제 앞에 나타난 형이 까닥,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을 마주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씨발. 아저씨. 남의 인생에 상관 마.〉
연제가 갖은 성질을 부리며 씹어 뱉듯 거친 욕설을 뇌까렸다.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저도 엄연한 성인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한지혁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개소리를 하고 있으니 성질을 죽이려야 죽일 수가 없었다.
아저씨? 시발. 이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아저씨 호칭에 지혁의 눈이 돌아갔다. 먼저 처리하고 온 이도윤을 생각하며 이번에도 신사답게, 어른답게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이도윤과 전혀 다른 우연제의 반응에 헛웃음마저 흘러나왔다.
〈씹. 아저씨가 아니라 어른이겠지. 어이, 애송이. 어른으로서 막 나가는 핏덩이 계도 좀 해 주겠다는데 문제 있어?〉
〈핏덩이? 나 성인이거든요? 댁이랑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입장이야. 계도는 무슨.〉
이도윤네 집이 한바탕 뒤집어졌단 소리는 진작 전해 들었다. 이도윤이 그렇게 되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차례라고 생각은 해 왔지만 생각보다 달갑지 않은 만남은 빨리 닥쳐왔다.
하지만 연제는 암만 이도윤이 힘을 못 쓰고 강제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한들 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리라 생각은 않았다. 저와 닮은 구석이란 조금도 없는 샌님 이도윤이 하듯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 조금도 없던 까닭이었다. 구부정하게 선 채 건들거리던 연제가 지혁을 상관 않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네 친구 도윤이 이야기는 들었겠지? 너도 부모님 걱정이 많으시더라.〉
〈안 가, 씨발. 좆 까요. 내 유학에 왜 댁이 관여해?〉
연제가 당장이라도 칼을 벼릴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지혁을 쏘아보았다. 저 씨발 새끼, 하고 눈으로 욕을 하는 게 분명했지만 지혁은 여유 가득한 표정으로 연제의 반항을 지켜보았다. 한참 흥분한 연제를 지켜보던 지혁은 미끄러지듯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안 가게? 버티게? 좋아. 그것도 방법이네. 차해교를 다시는 보지 못할 방법.〉
〈개소리 작작 해. 당신이 뭔데 차해교를 본다 만다야?〉
연제가 잇새에서 담배를 빼어 낸 뒤 불도 붙이지 않은 연초를 단숨에 구겼다. 그러곤 분노를 참아 내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이어 흘러나오는 숨소리가 매우 거칠었다.
〈너, 생각 외로 내놓은 자식이 아니더군. 하지만 하기에 따라선 내놓은 자식이 될 수도 있겠던데. 사고 치면 미국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누누이 말했다더니, 금세 잊고 지냈나 봐?〉
〈사고는 무슨 사고. 씨발.〉
〈네 부모를 등에 업지 않고선 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부모님 말씀 거역해도 괜찮겠어?〉
〈아저씨가 쥐고 있는 것도 죄다 댁 부모한테서 나온 거잖아.〉
여전했다. 지혁이 하는 말마다 연제가 족족 끊어 먹어도 상대는 한결같이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종일관 시건방진 태도를 지켜 나가던 연제가 뒤늦게 자신의 열세를 감지하고 점차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떠날 수는 없는데. 아직 차해교에게 해 주지 못한 말이 많은데.
〈맞아. 나 역시 그렇긴 하지만 난 그걸 기반으로 이룬 게 있고 넌 없다는 게 너와 나를 가르는 어마어마한 차이점이지.〉
〈내가 댁 나이쯤 되면, 아마 비교도 안 될…….〉
거칠게 제 얼굴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이어가던 연제가 분한 듯 손에 쥔 휴대폰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상대방의 나이가 되려면 몇 년이 남았나. 좆같은 현실이었다.
퍽, 휴대폰 액정이 깨어지고 화면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이미 수를 다 써 놨구나.
〈네 패착은 네가 너무 어리단 게 아니라 네가 너무 좆같이 굴었단 거야. 내가 귀여워해 줄 때 떠나는 게 좋을 거야, 꼬마야. 지금 이 상황이 억울하면 얌전히 부모님 말 듣고 떠나서 힘을 길러.〉
물론 언제든 돌아왔을 땐 이미 해교와 나 사이에 애 셋은 있겠지만. 세상은 그런 도전을 삽질이라고 부르지. 마지막 말은 마음속으로 삼켜 넘긴 지혁은 승리를 거머쥔 자의 자애로운 미소를 유지한 채로 어깨를 으쓱이며 뒤돌아섰다. 곧 우연제의 부모가 보낸 사람이 도착할 때가 된 탓이었다.
* * *
“인사해요. 내 동생 한지헌.”
“네……?”
해교는 얼빠진 표정을 한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에 도윤의 집에서 만난 적 있던, 도윤의 선배라던 사람이 의사 선생님의 동생이었다니. 어쩐지 얼핏 보면 모를 만큼 꽤나 많이 닮아 있어 몇 번이고 작게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하며 웅얼거렸던 기억이 이제야 떠올랐다.
“또 보네요. 반갑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인연 아니에요?”
지헌은 지혁에게 들어 익히 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그리 놀라지 않은 채 씨익, 웃음 지으며 먼저 인사를 해 왔다. 하지만 그 역시 처음엔 지혁이 하는 모든 말들이 당황스러워 입만 벙긋댔던 참이었다.
여태껏 지혁이 딱히 소개한 사람이 없었기에 누군가를 소개받는다면 단단히 사랑에 빠진 뒤일 거라 얼추 짐작해 오긴 했지만 그 상대가 남자일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었다. 평소에도 남다르다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남다른 형이었다.
하지만 지헌은 이내 편견을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대쪽 같은 지혁의 성격을 알기에 거기다 대고 싫은 소리를 하는 것도 비효율적이었고 늘 트렌드, 트렌드 운운하며 좇는 마당에 구시대적 발상으로 형의 사랑을 재단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를 집안에 알리는 건 다른 문제겠지만……. 거기까진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신경 쓰지 않을 셈이었다.
지헌의 주도로 이야기를 나누던 해교는 머지않아 그가 약혼을 할 거라는 소식을 들음과 더불어 약혼녀의 사진까지 보게 되었다. 지헌의 어깨에 기댄 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여자는 일전에 지혁의 병원 근처에서 보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 약혼식이 지혁이 아니라 지헌의 약혼식이라는 걸 깨닫게 된 해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붉혔다. 이 일이 아니었다 한들 찾아온 아버지 때문에라도 의사 선생님 댁에서 나올 결심을 하긴 했었겠지만 그래도 잠깐의 혼란으로 인해 저도, 지혁도 괜한 고생을 한 것 같아 민망했다.
지혁은 해교를 붙들고 약혼식에 대한 설명을 하기보단 지헌을 만나 직접 두 눈으로 확인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를 집으로 부른 참이었다.
“마침 지금 전화가 오네요.”
- 자기야, 어디예요?
“응, 애기야. 형 집에 왔어요. 같이 술 한잔하자고 모처럼 초대를 해 줘서.”
의사 선생님과 비슷하게 생긴 얼굴로 ‘애기’를 운운하는 모습에 해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기……. 우와……. 연인 사이에는 저런 호칭을 쓰는구나. 선생님이 저런 말을 하시면 아마 자신은 숨을 채 들이켜기도 전에 기절할지도 몰랐다. 나누는 대화를 간접적으로 듣기만 하는데도 해교는 가슴 속에 몽글몽글하고 간지러운 것이 가득 차는 것만 같아 괜스레 손가락을 꼼지락대었다.
해교가 마른침을 삼켜 넘기며 통화하는 지헌을 흘끔거리는 모습에 지혁이 작게 웃음 지었다.
“저쪽 애기는 꽤 크구나. 우리 애기는 작은데.”
지혁이 자연스레 해교의 어깨에 제 팔을 얹고는 눈을 마주했다. 돌연 눈을 마주치고서는 “그치, 애기야.” 하는 지혁 때문에 해교는 순식간에 숨을 멈추었다. 저, 정말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지혁은 그런 해교의 모습에 보기 드물게 입꼬리를 활짝 올리곤 고개를 저으며 큭큭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이 애기야, 하신 것도 놀라운데 장난까지 치시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해교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지혁의 말을 곱씹기만 할 뿐이었다.
“술 좀 가져올 테니 앉아 있어요.”
지혁이 지하 창고로 내려가 위스키를 고르는 동안 어느덧 통화를 끝낸 지헌이 맞은편 소파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통화 도중 얼핏 들렸던 단어가 믿기지 않아서였다.
“형도 애기라고 불러요?”
“네? 아니, 아니에요…….”
들으셨구나. 어떡해.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는 해교를 바라보며 지헌이 능글맞게 웃었다. 형한테 나중에 뭐라도 뜯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음. 이상하다. 난 방금 들은 거 같은데. 그럼 왜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쳐다봤어요?”
“그, 부르시는 게 신기해서……. 저, 정말 아니에요. 그냥…… 이름 부르세요.”
“그렇구나. 그럼 해교 씨는요?”
“네?”
“차해교 씨는 형한테 뭐라고 부르는데요.”
“……선생님이요.”
“와. 정말? 선생님이 뭐야. 딱딱하게. 형한테 애기라고 할 수는 없고 자기야, 해 보는 건 어때요.”
“그, 그런…….”
……건 절대 못 해요. 다분히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그의 말을 들은 해교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자기……라니. 자기야라니. 자기님이라면 모를까. 해교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 발을 동동거렸다. 너무 부끄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지헌이 던지는 말마다 해교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사이에 지혁이 술병과 잔이 담긴 우드 트레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웃음을 간신히 참아 내고 있는 제 동생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지혁이 툭, 거실 테이블 위에 우드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지헌, 우리 애기 괴롭히지 마.”
순간, 지헌이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제 앞에 놓인 술병 뚜껑을 돌린 뒤 곧바로 샷 잔에 술을 따랐다. 지혁의 말에 잔뜩 굳어선 어버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해교와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제 형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워 맨정신으로 있기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제 장난을 받아 주는 형이 어색해서 술이라도 들이켜고 취해야 할 듯했다.
지헌의 손에서 따라진 호박색 액체가 얇은 술잔을 단번에 채우고 넘실거렸다. 지헌이 단번에 목 뒤로 위스키를 넘기는 걸 보고 있던 지혁 역시 남은 잔에 술을 따르고 가뿐하게 잔을 비웠다.
지혁이 해교 몫으로 가져온 라임 향 탄산수를 그의 앞에 밀어주었다. 어느새 지혁과 지헌 앞의 잔엔 또다시 위스키가 따라진 채였다.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기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았던 해교가 지혁과 지헌을 곁눈질하다 긴장한 듯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슬쩍 고개를 기울여 지혁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저, 저도 한 잔만…….”
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차해교가 술을 마실 줄 알았나? 지난번에 치킨을 먹을 때조차 콜라를 먹던 모습이 떠올라 자동으로 눈매를 좁혔다.
“술 마실 줄 알아요?”
“자, 잘은 못해요. 그냥…….”
“뭐 어때. 진짜 애기도 아니고. 아, 형네 애기는 맞지만. 애기님 주민등록증은 나오셨으니까 한 잔 드려. 형이 안 주면 내가 준다?”
지헌이 당장이라도 새 잔을 가져올 것처럼 굴자 지혁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탄산수를 담아 마시라고 가져온 빈 잔에 아주 적은 양의 위스키를 따랐다.
“그럼 딱 한 잔만 마셔 봐요.”
“네에…….”
중간중간 해교가 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지만 지혁과 지헌의 대화는 대부분 일 이야기라 해교에게는 조금 지루했다. 따분한 이야기와 더불어 술까지 마셔서 그런지 솔솔 잠기운이 몰려왔다. 해교는 어떻게든 자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고 버텼다.
그러던 와중 지헌이 일전에 도윤의 집에서 해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주제에 대해 언급했고, 간만에 잘 아는 이야기가 나와 신난 해교가 자연스레 대화에 참여하였다.
“그, 그거 저도 알아요! 전에 만났을 때 이야기해 주셨던 거.”
“아, 도윤이 집에서요?”
지헌의 말에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해교는 문득 도윤이 궁금해졌다. 우연제는 이후 한 번 만나기라도 했지만 도윤은 집을 나온 이후 단 한 번 만난 적도, 제가 그의 연락에 답을 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연락하고 지내세요? 잘 지내나요?”
“연락 안 하고 지냈어요? 그럼 몰랐겠네요. 도윤이 유학 간 거.”
“유학이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해교의 눈동자에 덕지덕지 묻어 있던 잠기운이 떨어져 나갔다.
“뭐, 꽤 있는 집안이라 그런지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나 보던데, 맞지? 친한 친구랑 진작 떠난 것 같던데. 이름이…… 우연제인가, 아마 그랬지.”
마치 저는 아닌 것처럼 선을 그으며 지혁이 의기양양하게 웃음 지었다. 말이 나온 김에 완벽하게 치워 버려야겠다. 이제 한지헌만 눈치 있게 행동하면 되는 시점이었다.
“그렇게 갑자기요?”
마지막까지 제 곁을 맴돌던 우연제의 모습과 어떻게든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려던 도윤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말 한마디 않고……. 아니, 휴대폰으로 연락을 했어도 못 받긴 했었지만 그래도 갑작스레, 아예 한국을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듣자 해교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워낙 급하게 간 거 같더라고요.”
지헌이 형의 말에 살을 덧붙여 주었다. 해교는 도윤과 많이 친한 것 같았던 지헌마저 지혁의 말에 동의하자 금세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나쁜 일도 아니고 열심히 공부하려고 떠났다니 뭐…….
제법 아귀가 들어맞는 이야기로 근황을 만들어 가는 모습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지혁이 흡족한 듯한 눈빛을 보냈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한지헌을 적극 밀어줄 예정이었다.
“네에…….”
갑자기 떠난 게 의외이긴 하지만 공부를 위해 유학까지 갔다니 그들에겐 잘된 일이었다. 이렇게 못 보게 될 줄 알았으면 그날 편의점에서 휴대폰을 충전했을 때 도윤에게 연락 한번 해 줄 걸 그랬다. 계속해서 잘못했다고 하던 우연제에게도.
해교는 지혁의 눈치를 보며 제 앞에 놓인 잔을 다시 홀짝였다. 선생님도, 선생님 동생분도 이 쓴 걸 몇 잔이나 비우셨는지 몰랐다. 저도 잔을 시원하게 비우고 멋있게 대화에 끼고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으음…….
슬쩍슬쩍 재차 밀려오는 수면욕에 해교의 눈꺼풀이 천천히 끔뻑였다. 이를 눈치챈 지혁이 해교의 뺨을 만지작대며 그의 체온을 가늠하였다. 양으로 가늠하자면 샷 잔에 해당하는 잔을 반 조금 넘게 비운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꽤나 술이 오른 것 같았다. 도수가 워낙에 높은 술이긴 했다.
느릿하게 뺨을 문지르던 손길이 떨어져 나가자 단단한 손을 잃으며 한결 더 노곤해진 해교의 고개가 살짝 미끄러져 내렸다.
점차 해교의 고개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 지혁이 그를 가벼이 안아 들곤 눈빛으로 지헌의 양해를 구했다. 지헌은 자신이 힘이 있냐는 말을 입 모양으로 벙긋대며 전하더니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지혁은 해교를 다시 집에 들인 뒤 현재 자신이 맡은 일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고자 마음먹었다. 지헌을 도우려 수락한 사외 이사직 임기가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제 사업체를 키워 볼 작정이었다. 지나가듯 흘린 계획에 누구보다 기뻐하는 조부를 보며 그 결심은 더더욱 단단해졌다.
단순히 재산 증식 같은 일차원적인 요소 따위에 욕심이 나서가 아니었다. 당치도 않으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우연제와 이도윤, 아직은 핏덩이에 불과한 놈들이 시간이 흘러서라도 다시 나타난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격차를 보여 주고 좌절시켜야만 했던 까닭이다.
뭐, 그 전에 해교와 잘 합의해 애라도 하나 만들어 둔다면 선녀를 붙든 나무꾼처럼 확실한 보험이 생기긴 하겠지만 아직 너무나도 어린 차해교는 경험해 볼 것이 많았기에 가급적이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본인도 해교와 단둘이서 지내는 이 생활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고양이까지 합하면 셋이지만 어쨌거나 사람은 둘인 셈이니.
본격적인 가족계획은 나중에……. 언젠가 정말 그럴 마음이 든다면 그땐 임신을 준비할 예정이었다. 뒤늦게 생식 활동이 발발한 양성구유 사례를 바탕으로 그 궤적을 따른다면 불가능할 일도 아니었다.
지혁이 제 옆자리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해교를 바라보며 다감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제 곁에 잠든 해교의 목덜미에 코끝을 파묻은 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거였다.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떨어진 내내 옅게 이불에 배어 있어 그를 굶주리게 한 체향이었다.
* * *
점심 즈음 일어난 해교가 메리를 쓰다듬어 주다 거실을 휘휘 둘러보았다. 어제 술자리는 흔적도 없이 말끔히 치워진 채였다. 가지런히 정리된 거실 테이블을 미련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해교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교는 흔치 않게 위스키를 마시다 금세 취해서 저만 잠이 든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주인공들이 술을 먹다가 속에 있는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서 더욱더 가까워지던데.
선생님을 잘 아는 듯 보였던 동생분과도 친해지고 싶었고, 저는 모르는 그의 과거 이야기도 많이 듣고 싶었다. 그렇게 좋은 기회를 몽땅 날려 버리다니…….
위스키는 태어나서 처음 마셔 봐서 면역이 없었다. 조금씩 더 마시다 보면 다음에 선생님과 같이 대작하면서 이런저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지혁이 직접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해교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다 결심한 듯 지하로 내려가 각종 술을 보관해 둔 창고로 향했다. 지하 층 거실 오른쪽에 있는 창고의 문을 열면 짜인 장 전체가 지혁의 취향을 반영하는 위스키와 브랜디로 가득 차 있었다.
술병으로 빼곡히 찬 창고 안, 어제 지혁이 꺼내 온 위스키와 같은 상표지만 개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의 술병이 선반 끄트머리에 놓여 있었다. 이를 발견해 낸 해교가 술병을 움켜쥐고 조심스레 뚜껑을 돌렸다.
“읏……. 냄새.”
뚜껑을 돌려 따자마자 오래된 오크 향이 훅 밀려왔다. 싱글 몰트위스키라 더욱더 강한 향이었으나 이를 알 리 없는 해교는 그대로 술병 입구에 제 입술을 대었다. 병 주둥이에서 단 한 번도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꼴깍, 꼴깍 목구멍을 거쳐 뜨끈한 액체가 넘어갈 때마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났다.
이렇게 맛없는 걸 왜 드시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지혁과 담소를 나누는 제 미래를 그리며 한 모금, 한 모금씩 목구멍으로 넘겼다.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호박색의 액체로 가득 찼던 유리병이 점점 더 투명하게 변해 갔다.
차츰 열이 오르며 알코올이 빠르게 몸에 번졌다. 역한 알코올 냄새에 몇 번이나 구역질을 참아 내던 해교가 마침내 손에 쥔 유리병을 바닥에 두고 몸을 웅크렸다. 눈앞이 핑 돌 만큼 어지럼증이 일어 머리가 흔들거렸다.
어지러웠다. 어지럽고…….
몸이 자꾸만 달아올랐다. 아랫배가 꿈틀거리며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야릇한 기분이 들어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으읏…….”
이 집으로 돌아온 후에 해교는 지혁과 몸을 맞댄 적이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예전 같은 개짓거리로 몸을 섞고 싶지 않았던 지혁이 해교가 진료가 아닌 섹스를 원할 때를 기다렸던 까닭이었다. 그 와중에 어제는 취해 버리기까지 해서 해교도, 지혁도 서로를 알게 된 이후로 가장 오랜 기간을 수절 중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못 해 쌓인 성욕에다 더불어 취기까지. 해교는 이곳이 지혁의 집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더운 숨결을 내뿜으며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내려 애썼다.
어지러운데다가 몸이 무거워져 옷을 벗는 데에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드로어즈까지 벗었을 때, 해교의 몸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 * *
달칵. 문이 열리고 다급하게 지혁이 들어섰다. 오늘부터 정상궤도로 업무를 돌려놓겠단 다짐과는 달리, 잠시 짬이 났을 때 바라본 CCTV 화면 가득 비춘 살색의 향연에 도무지 집무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예정보다 빨리 퇴근한 지혁은 익히 알고 있는 지하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으응…….”
술에 취한 눈동자가 느릿느릿 초점을 맞추었다. 해교는 지혁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손가락으로 제 뒷구멍과 앞구멍을 쑤시느라 헐떡이고 있었다. 여린 손등뼈가 걸릴 때까지 깊숙하게 손가락을 집어넣고 열기 가득한 살점을 마구 휘젓는 와중이었다.
지혁이 혼자서는 구멍을 쑤시지 말라고 했던 말은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진 채였다. 해교는 오로지 본능만을 따르며 벅찬 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쑤셔 대 홧홧하게 달아오른 구멍 둘이 끈질기게 개폐를 반복하였다. 찐득한 보짓물로 점철된 보지와 뻑뻑한 뒷보지를 번갈아 쑤셔서인지 미끌미끌한 보짓물이 해교의 손가락과 구멍 어귀에 질펀하게 묻어나며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람 미치게 하네.”
기가 막힌 지혁이 바닥에 엎드린 해교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자 붉게 물들인 목덜미 위 솜털이 삐죽이 솟아올랐다. 알코올에 전 뇌로는 그 어떤 판단도 할 수가 없어 해교는 잔뜩 젖은 입술을 말아 물곤 잠자코 눈만 깜빡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여전히 하체는 들썩이고 있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짓궂게 웃으며 지혁은 가만히 해교의 입술이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 이미 출발하기 전부터 봐 와 조그만 손가락을 마구잡이로 쑤셔 달군 두 구멍이 무엇을 바라는지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해교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다.
“으응……. 하……고 시퍼요.”
평소보다 알아듣기 힘든 발음이었다. 알코올에 젖어 축축 늘어지는 몸에 맞추어 혀까지 제 맘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자꾸만 꼬이는 혀의 심을 세워 해교가 간신히 제 의사를 표명하며 울먹였다.
“뭘?”
“진료……. 흐응, 응…….”
섬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마주한 자지는 앞섶이 부푼 실루엣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못 본 사이에 더욱 거대해진 것 같았지만 해교는 지금 당장 자신의 구멍 어디든 커다랗고 단단한 그것을 쑤셔 박고 싶었다.
그래야만 온몸이 타는 듯한 갈증이 해소될 것 같았다.
이제는 도저히 자지만 흔들어선 갈 수 없는 몸이 된 탓이었다.
해교가 엎드린 채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이미 지혁의 앞에 적나라하게 둔부를 드러내고 자지를 조르고 있었지만 자각이 없는, 오로지 본능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해교는 그 잠시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가락을 푹 보지 구멍 안에 쑤셔 박곤 잘게 털었다. 쫀득한 점막이 저를 가르는 손가락에 들러붙어선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찐득한 애액이 찔끔찔끔 새어 나오며 해교의 손가락을 흥건하게 적셨다. 순식간에 보지 구멍 안을 가득 채운 물을 가르며 손가락이 철퍽대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번들거리는 애액이 포동포동한 볼기와 연결되는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당장이라도 사정할 듯 지혁의 자지가 앞섶을 팽팽히 부풀렸다.
홀쭉한 아랫배에 민둥한 분홍빛 자지가 닿을 것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술을 마시고 나서 한참 동안 자지를 흔들고 구멍을 쑤셔 보았지만 도무지 절정에 닿을 수 없어 갑갑했다. 체액에 푹 전 하얀 몸이 달아오른 채로 제게 파고드는 모습에 지혁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료가 아니지, 애기야. 우리…… 의사와 환자 아니잖아요.”
“그, 그럼, 흐응…… 섹스……. 읏, 성생님, 자지……. 너어 주세요. 세, 섹스하고 시퍼요, 흣.”
지혁이 해교의 가슴을 껴안고 턱 끝을 쥔 뒤 자신을 향해 돌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붉은 입술을 내렸다.
고른 치열 사이를 비집고 나온 붉은 혀가 해교의 입 안을 가르고 맞은편에 숨어 있던 살덩이를 찾아내자마자 질척하게 몸체를 얽기 시작하였다. 갈급한 혀가 여린 입 안 곳곳을 파헤치며 제 흔적을 남겼다.
격렬한 입맞춤에 자꾸만 해교의 숨이 헐떡였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가쁘게 호흡을 가다듬던 해교가 혀를 뒤로 물리자, 진득하게 따라온 살덩이는 혀를 빨아내다 못해 목구멍까지 쑤시며 입 안의 모든 점막을 간지럽혔다. 농밀한 혀의 움직임에 점차 입 안에서 선연한 열기가 일었다.
질척하게 살덩이가 얽히고설키면서 빚어낸 열기는 곧 서서히 맞닿은 몸체 전체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음…… 으음…….”
새어 나오는 모든 신음은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억눌린 신음이 방아쇠가 된 듯, 지혁은 아랫배가 저릿해지면서 근래엔 터진 적 없는 강한 충동이 이는 것을 느꼈다. 추측할 것 없이 너무나도 명확한 쾌감이었다.
입 안 가득한 알코올 향이 어찔해 입맞춤을 멈춘 지혁이 제가 입고 있던 바지 지퍼만 내린 채로 달아오른 살덩이를 꺼냈다. 옷을 모두 찢어발길 듯 거친 손길로 대강 천을 젖히고 꺼낸 자지는 단단히 젖은 채로 돋아난 핏줄을 팽창시키며 꺼떡이고 있었다.
지혁은 제 무릎을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댄 채로 꿇어앉았다. 쭉 뻗어 나간 커다란 손이 해교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등허리가 옴폭 파이며 가느다란 뼈를 드러냈다. 이를 내려다보는 지혁의 눈동자에 한층 더 짙은 열망이 끓어올랐다. 넓지 않은 등을 가로지르며 반복적으로 쓸어내리던 손은 점차 아래로,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늘 나긋했던 손길 대신 퍽 갈급하게 느껴지는 손길이 해교의 보드라운 살결을 훑어 내렸다.
애정과는 무관하게 살결을 오르내리는 손길은 마치 뱀의 몸짓 같았다. 달아오른 몸을 더욱더 뜨겁게 만드는 손길에 감기는 피부는 차츰 질척하게 젖어 갔다.
아, 으응, 흐으으……. 지혁이 야들야들한 살결을 입술로 빨아 당길 때마다 느껴지는 자잘한 소름에 해교의 어깨가 움칠 움츠러들었다. 지혁은 이에 아랑곳 않고 고개를 숙여 하얀 등줄기의 빈 공간마다 제 흔적을 남겼다.
여린 살결은 지혁이 크게 애쓰지 않아도 금세 붉게 물들어 그를 만족시켰다. 조밀하게 남겨진 울혈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지혁이 자신의 허벅지 사이를 벌려 해교의 몸을 단단히 압박하였다. 순식간에 해교는 엉덩이를 내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세가 되었다.
해교가 얼른 넣어 달라는 것처럼 엉덩이를 재차 지혁의 가랑이 사이에 가져다 대려 애쓰며 낑낑거렸다. 지혁은 여전히 모든 옷을 껴입은 채 자지만 내놓은 상태였는데, 몇 시간 동안 쑤셔진 해교의 구멍은 어느 구멍이든 뜨끈한 보짓물로 점철되어 있어 스치듯 닿은 지혁의 검은색 정장 바지에 찐득한 체액이 묻어나 번들거렸다.
감각을 수용하는 세포마저 흠뻑 취해 모조리 곤두선 듯, 마주 닿는 몸 곳곳이 오싹할 만큼 민감했다. 해교의 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절절 끓어올랐다.
“어떻게 참았어. 보지가 좆 달라고 보채잖아요. 후으, 귀두만 가져다 대도 좋아서 자지러지잖아.”
보지 점막이 꿈틀거리며 끊임없이 자지를 갈구했다. 안을 휘젓기만 할 뿐 만족시키지 못하는 손가락 말고, 묵직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저에게 밀려와 마구 짓눌러 주기를. 지혁이 기다란 틈에 굵다란 귀두를 가져다 대곤 천천히 문질렀다.
후, 씨발. 간만에 닿는 보짓살이 아찔할 만큼 몰캉하고 보드라웠다. 지혁은 느릿하게 보지 둔덕을 따라 입구 근처를 서성대면서 미끌미끌한 체액을 묻히며 이미 흥분한 보지를 푸욱 익혔다.
어느덧 선홍빛 보짓살은 점차 시뻘겋게 농익어 갔고, 좁은 구멍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양 조갯살은 끊임없이 보짓물을 내보내며 통통하게 몸집을 불려 가고 있었다.
지혁은 당장에 자지를 찔러 넣기보다는 보지를 빨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가만히 있어도 훤히 보이는 붉은 보짓살에 자꾸만 지혁의 입 안이 말랐다. 흘러내리는 모든 보짓물을 게걸스럽게 빨아 마시며 희열을 느끼고 싶었다.
“아, 으응…… 빠, 빨리이…….”
해교가 칭얼대며 보지를 조여 왔다. 단숨에 빠끔대던 구멍이 확 수축하며 지혁을 유혹했다. 그 모습에 보빨이고 뭐고 다른 짓으로 시간을 끌 여유가 사라졌다.
마침내 지혁이 갈라진 보지 틈새로 잔뜩 젖은 제 자지를 퍽, 강하게 내리꽂았다. 흐읏, 아……. 습윤한 점막이 두 쪽으로 벌어지면서 뿌리까지 들이치는 살덩이를 폭신하게 감싸 안았다. 물크러진 보짓살의 촉감이 뇌를 뒤흔들 만큼 강렬했다.
간만에 받아들이느라 조금 버겁긴 했지만 구멍은 곧 귀두에 맞게 벌어지며 묵직한 쾌감을 선사했다. 단단한 귀두로 보지 점막을 떡을 빻는 것처럼 짓찧어서인지 뭉개진 점막은 추삽질이 반복될수록 점점 더 찰지게 자지로 들러붙었다. 그 야릇한 감각에 흠칫, 몸을 떤 해교의 가랑이 사이가 파들파들 진동했다.
“후, 씹. 좋아요?”
“으읏, 네헤……. 하으으.”
해교가 고개를 주억이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달뜬 보지가 자지를 주욱 빨아들이며 밀착했다. 그러자 귀두가 비벼 대는 보지 점막이 쫀득하게 늘어나며 금세 쿠퍼액에 흠뻑 젖기 시작하였다.
해교는 당장이라도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얼굴을 박을 것만 같아 힘겹게 두 팔을 뻗어 제 체중을 받친 뒤, 자지의 움직임이 멎은 것을 느끼곤 조르듯 엉덩이를 거듭 흔들었다. 하얀 찹쌀떡 같은 볼기가 찰싹찰싹 흔들리며 불투명한 점액질이 엉긴 모습이 걷잡을 수 없이 야했다.
지혁은 해교의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콱 틀어쥔 뒤 터트릴 듯 굴었다. 손바닥에 감겨 오는 쫀쫀한 감촉에 보지에 담근 자지가 한결 더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지혁이 허리 짓을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자지가 제멋대로 움칠거리며 아찔하게 녹아 드는 질벽 곳곳을 저돌적으로 찧어 댔다.
“우, 움직여 주세……. 아흐윽……!”
지혁이 거세게 허리를 쳐 올리자 고간과 맞닿은 엉덩이 살이 요란스레 흔들거렸다. 거친 지혁의 음모가 여린 살결을 짓뭉개는 느낌에 소름이 일었다. 찰싹, 지혁이 가볍게 흔들리는 볼기를 내리친 뒤 다시 한번 보지를 자지로 들쑤셨다. 축축한 살점을 가르는 느낌에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곧 다정한 눈빛에 음욕이 서리고, 사나운 허리 짓이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해교의 몸이 낭창하게 흔들릴 때마다 말랑한 젖이 바닥을 향한 채 출렁출렁 흔들거렸다. 지혁은 손을 뻗어 야릇하게 흔들리는 해교의 젖가슴을 한가득 쥐었다.
손바닥에 빳빳이 일어난 유두가 비벼지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 손바닥에 힘을 주어 젖가슴 정점을 비비자 예민해진 해교의 유두는 곧 알이 잘 여문 과육처럼 새붉게 변한 채 도드라졌다.
“아, 흐읏!”
해교는 엎드려진 채 지혁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흐느끼듯 허리가 튀었다. 쾌락에 물든 얼굴은 목덜미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지혁이 계속해서 가슴을 꼬집고 튕겨 대며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았다.
“후우, 그동안, 젖꼭지 만진 적 있어요?”
“으응, 응……. 네에, 흐으…….”
“그래서 젖물이 안 터지네. 아쉽게…….”
유두를 짜부라뜨릴 때마다 치솟는 쾌감이 좋았다. 늘 이렇게 기분 좋은 쾌감이 들끓으면 좋겠다……. 세상이 어지러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도 아득하게 쏟아지는 성감에 해교가 중얼거렸다.
지혁이 추삽질에 집중하느라 유두를 만지작대던 손길이 떨어져 나가자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든 해교가 한 팔로 제 체중을 받친 채 나머지 팔을 가져와 가슴을 만지작대기 시작하였다. 뭉개지는 살결이 야릇했다.
“하아. 가슴 만져 주는 거, 좋아요?”
“으응, 네에, 늘 이렇게에, 기분 좋았으면…….”
“하아, 어떡할까. 유두에 피어싱이라도 할까.”
“앗, 흣, 조, 흐아요…… 으응…….”
잔뜩 취한 상태에서 하는 말이라 못 미더웠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진실된 욕구의 반영일지도 몰랐다. 지혁은 흥분한 허리를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쳐 올리면서도 조만간 해교의 유두에 직접 피어싱을 해 주는 상상을 했다.
오른쪽 유두에만 얇은 은침을 통과시켜 한결 더 예민한 성감을 키워 주고 싶었다. 톡, 살짝만 건드려도 발발거리며 함몰 유두가 일어나겠지. 왼쪽 생유두는 보드라운 젖꼭지 그대로를 보존하면서 자극을 줄 때마다 곤두서게 만들고…….
씨발. 미치도록 꼴렸다.
“후, 그럼 보지는. 보지는 가만히 내버려 뒀어요? 아무것도, 손가락도 안 쑤셔 넣었어요?”
“흐으…… 응, 네에……. 안 했, 흣!”
“애기 보지가 그동안 굶어서 벌렁거리는 거였구나. 후우, 이제 잔뜩 먹여 줘야겠네…….”
“으읏, 쟈, 쟌뜨윽 너……어 주세요.”
짐승처럼 본능에 몸을 맡긴 지혁이 통통한 허벅지 사이로 몸을 비집어 넣은 뒤, 해교의 보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사타구니를 바짝 밀착하고서 곧추선 육중한 살덩이가 강하게 안을 짓치자 푹 익은 보짓살이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듯 물컹해졌다. 뜨끈한 보짓물에 푹 절은 보짓살을 오고 갈 때마다 자지가 물에 젖으며 음란한 소리를 냈다.
“히이, 아아아……!”
해교의 입이 헤벌어지며 입 안에 고여 있던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을 필두로 어느덧 게게 풀린 눈은 뜬 것이 무색하게 초점이 맞지 않았고 조금의 좆물이라도 받아먹고 싶어 게걸스레 빠끔거리는 아랫구멍에선 질척한 소리가 났다.
지혁이 계속해서 자지로 해교를 몰아붙였다. 열이 오른 몸은 어느새 혈관에 돌던 알코올을 모조리 기화해 날려 보낸 듯 잔뜩 민감해진 채 자지의 움직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허리 짓 할 때마다 몸을 관통하며 착실히 쌓인 성감은 곧 무서우리만큼 큰 쾌감으로 격변할 준비를 하며 꿈틀거렸다. 잇따라 해교의 자지가 팽창한 채로 아랫배를 퉁퉁 쳐 댔다.
지혁의 추삽질에 맞추어 음낭과 찰싹찰싹 맞닿는 해교의 엉덩이가 차지게 씰룩였다. 난폭하게 질벽을 드나들 때마다 자지는 솟아오른 음핵을 투욱, 툭 치고 지나가 음부 전체를 진동하게 했다. 앙증맞은 클리토리스는 어느새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채 발발, 자지러지고 있었다.
“힉!”
“우읏……. 보지 조이는 게……. 씨발.”
질 안에 숨어 있던 쾌락점을 거침없이 짓친 살덩이 덕택에 오르가슴에 도달한 보지 구멍이 정신없이 오그라들었다. 절정에 오른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자지를 감싼 질벽이 지혁의 성기를 흡착하며 꽉꽉 씹듯이 물어 댔다. 동시에 해교의 분홍빛 자지 구멍에서 많지 않은 양의 정액이 발사되듯 쏟아져 나왔다. 난잡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아흐응…….”
“크읏…….”
움찔움찔 수축하며 자지에 달라붙는 매끄러운 점막에 지혁이 낮은 쇳소리를 흘렸다. 온몸이 흥분감에 절어 든 듯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뜨끈한 점막에 닿는 부위마다 익어 버린 듯 신경 말단마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자지와 마찰하며 통통하게 부어오른 보지 안으로 곧이어 울컥울컥 불투명한 씹물이 잔뜩 쏘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한 번도 빼지 않고 잔뜩 쌓아 두었던 정액이었다.
보지 안에 켜켜이 좆물을 쏟아 낸 지혁이 몸을 물리자 다시 좁아 든 보지 구멍 안에서 점성 있는 하얀 정액이 질질 흘러내렸다. 지혁은 아까운 듯 살짝 벌어진 보지를 가르고 흘러내리는 진득한 좆물을 손가락으로 모아 구멍 안으로 밀어 넣기를 반복하였다. 계획과는 달리 임신시키고 싶은, 수컷의 본능에서 기인한 동작이었다.
지혁은 아직 절정이 선사한 여운에 움찔움찔 몸을 떨고 있는 해교를 껴안아 올렸다. 가느다란 목을 받치고 허리를 감싸 쥔 뒤 자신의 단단한 허벅지에 그를 겹쳐 앉혔다. 보지 아래에 이어진 얇은 회음이 질척하게 젖은 채로 가늘게 떨렸다.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지혁을 받아 낸 터라 무릎 곳곳을 울긋불긋하게 만든 채로 해교가 숨을 헐떡였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에 흐트러진 입술 사이로 가쁜 신음이 샜다. 마주한 지혁의 이마에 맺힌 땀이 방울져 턱 끝으로 흘러내려 똑, 해교의 새빨간 혀 위에 안착했다. 그 땀방울마저 달큼하게 느껴져 해교는 헥헥대며 모조리 삼켜 넘겼다.
지혁의 허벅지 위에 해교의 허벅지가 얹어지니 해교의 하체가 살짝 공중에 뜨게 되었다. 지혁은 탈력감에 온몸에 힘이 풀린 해교의 종아리를 끌어와 제 허리를 휘감고 발목을 교차시켰다. 상체는 바닥에 눕힌 채였다.
보지에서 인 전율이 아랫구멍까지 전이되어 주름진 구멍이 덩달아 수축하는 모습이 지혁에게 확실하게 보이는 자세가 되었다. 아직까지 찔끔찔끔 붉은 보짓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이 회음을 따라 흐르다 아랫구멍까지 적셔 내렸다.
몇 시간 전부터 찐득하게 풀려 버린 구멍이었지만 미끄러운 정액까지 더해지자 좁은 구멍은 벌름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한 번 자지를 받고 씹물을 뱉어 내는 듯한 광경에 지혁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지혁은 단번에 삽입할 듯 귀두 끝에 힘을 주었다가 옴찔대는 주름 어귀만을 맴돌며 해교를 애태웠다. 지친 와중에도 은밀한 구멍은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조이며 지혁의 귀두를 자극하였다. 귀두에 닿는 쫀득한 살점에 지혁은 곧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씹…….”
지혁이 손가락으로 좆 기둥을 받쳐 각도를 조절한 뒤, 오물오물 공기를 씹어 대는 빈 구멍을 꿰뚫으며 자지를 삽입했다. 흐으, 아, 아응……! 밀려오는 좆 기둥을 감싼 흉측한 핏줄 줄기가 점막을 가르는 느낌이 생생했다. 빼곡하게 모여 있던 주름이 흔적 없이 펴지며 굵은 기둥을 빨아 올렸다. 잔뜩 부풀어 오른 내벽에 자지가 감싸이자 야릇한 감각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지혁이 이를 꽉 깨문 채로 좁은 내벽을 벌리며 성기를 짓찧었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자지가 사정없이 퍽퍽 박혀 들자 해교의 보드라운 허벅지가 힘없이 활짝 벌어지며 그를 맞았다.
오랜만에 아랫구멍에 파고든 자지가 예민해진 채 박동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지에 돋아난 핏줄마저 불뚝거리며 육벽에 새겨졌고,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도취한 지혁이 정신없이 허리를 털어 댔다.
“흣! 아, 아! 너무우, 하읏, 빨……라요, 으응.”
“하아, 애기 보지가 자꾸 자지를 씹으니까, 그렇지. 후으.”
어느덧 옅은 밤색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넘어간 채 버거운 쾌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몇 번을 받아들여도 살덩어리가 전립선을 찍어 올리기 전에 느껴지는 버거운 감각은 줄어들지 않았다. 지혁은 푸욱, 전립선을 뭉근하게 치대고 지난 뒤 여태 닿지 않은 더욱 깊은 곳까지 좆 대가리를 들이밀며 콱콱 허리를 치받았다. 아흐응, 아, 아! 내장 전체가 밀리는 것 같은 강한 압박감이 느껴져 해교가 흐느끼듯 신음을 내질렀다.
간만에 고삐가 풀린 몸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오직 뒷보지에 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구멍은 귀두에 알맞게 늘어나 검붉은 살덩이를 주욱 쭉, 맛있게 빨아 당겼고 어느새 지혁은 항문을 또 다른 보지로 취급하고 있었다. 처음 해교를 만난 날의 지혁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해교가 억지로 교차된 발목을 풀며 지혁에게서 달아나려 하였다. 엉덩이가 그의 고간에서 살짝 멀어지자마자 지혁이 폭이 좁은 골반을 끌어 내리며 쾅, 거세게 자지를 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헤에엑!”
위로 솟던 몸이 내려앉자 반동으로 오히려 더욱 깊이, 내밀한 내장 안까지 단단한 자지가 들이쳤고, 잇따라 울부짖는 듯한 신음이 밀실 같은 창고 안을 울렸다. 여태 질러 대던 교성과는 결이 달라진, 한층 더 농밀해진 신음이었다.
굵직한 귀두가 직장과 결장을 잇는 부분까지 파고든 것이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자극에 안달 난 지혁이 단숨에 허리를 움직이며 닿아 있는 부분을 더욱 거세게 비벼 올렸다. 안을 마구잡이로 쳐 올리는 자지에 부푼 전립선이 짜부라지자 내벽이 조여들며 살 기둥을 적셨다.
녹진하게 녹아내린 점막이 따끈했다. 닿아 본 적 없는 부분은 더더욱 뜨거웠다. 지혁은 오직 굽이치는 구멍 안을 들쑤실 생각만으로 기계적으로 자지를 넣었다 빼는 짓을 반복하였다. 자지에 닿는 모든 점막이 소름이 일 만큼 짜릿했다.
“서, 선생, 니힘. 자, 잠시이……. 흐으…….”
해교가 몸을 뒤틀며 지혁에게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지혁의 사타구니와 해교의 엉덩이는 꽉 맞물린 채 연결되어 있었고, 이미 단단히 잡힌 골반과 손가락 사이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연약한 살결은 쉽게 짓뭉개져 지혁의 손가락 모양대로 물이 들어 있었다. 태초부터 그의 손가락에 짜 맞추어 만들어진 것 같은 골반을 틀어쥔 채 지혁은 계속해서 제 성기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지나친 자극에 무어라도 쥐고 버티고 싶었지만 판판하기만 창고의 바닥 위엔 아무것도 쥘 것이 없었다.
해교는 그저 발가락과 손가락만을 몇 번이고 꼼지락거리면서 의미 없이 몸을 뒤틀었다. 야릇한 감각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달아오른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애타게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지혁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작은 저항이었다.
지혁이 바르작거리는 해교를 눈치채고 뒤늦게 손을 뻗었다. 그러곤 파들파들 떨리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가락으로 전달되자 해교가 안심한 사이, 지혁은 잔뜩 달아오른 눈으로 해교를 내려다보다 결장 입구로 느껴지는 부분을 다시 헤집기 시작했다.
자지를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채, 결장 어귀에 귀두를 걸쳐 놓곤 잔뜩 부푼 주변만을 푹푹, 끊임없이 쳐 올리고 저를 머금도록 한 것이다.
깊이, 더 깊이, 닿은 적 없는 곳을 비집고 자꾸만 파헤치자 구멍이 얼얼할 정도로 열기가 작열했다. 주름 사이사이마다 거품이 끼이고 체액이 엉겨 진득한 열기에 불을 붙였다. 그러다 그 열기가 지혁의 성기에 아찔한 황홀을 선사하며 번지자 지혁은 단숨에 드드득, 내벽 점막을 긁어내리며 자지를 빼내었다.
“하으으……! 아아!”
일순 해교의 숨이 멎으며 고개가 뒤로 꺾였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머릿속이 하얗게 번진 상태에서 시뻘건 쾌감이 마구 튀어 오르며 날뛰었다. 오줌, 오줌 누고 싶어. 당장 실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벅찬 쾌락에 온몸의 세포가 곤두섰다.
지혁에게서 벗어나려 뒤틀던 몸짓이 멈추고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자잘한 경련이 일어나며 사지가 떨리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쪼르르, 조그만 자지 끝에서 맑은 물이 터지며 지혁의 하얀 셔츠 위로 번졌다. 절정이었다.
“서, 흐으, 생님, 으읏……. 저, 또오…….”
벅찬 쾌감과 함께 들이닥친 현상에 해교의 눈에서 울컥 눈물이 터져 나왔다. 발개진 두 뺨과 관자놀이를 거쳐 길을 낸 눈물을 닦아 줄 새 없이 해교의 구멍 안에 여태 걸쳐진 거대한 귀두가 움찔거렸다. 박힌 귀두 표면에 들러붙은 내벽 근육이 정신없이 펄떡이며 살점을 쥐어뜯듯 전율했던 까닭이었다.
계속해서 자극이 쏟아져 내리자 가뜩이나 민감해진 귀두가 딴딴해진 채로 점막을 비벼 댔다. 복근 위에 쏘아지는 묽은 물을 맞던 지혁의 몸에 삽시간에 찌르르한 전기가 일었다. 아랫배가 뻐근해지고 음낭이 굳는 예사롭지 않은 느낌에 지혁이 미간을 구겼다. 그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드러나자마자 정액을 사출하는 것보다 한 단계 위의 절정감이 들이치며 하체가 마구 떨려 왔다.
“후으…… 읏.”
뇌수가 절절 끓다 못해 녹아내렸다. 음낭이 요동치는 생경한 경험과 함께 자지 선단이 바짝 들끓었다. 마침내 지혁의 목에 자리한 목빗근이 뚜렷이 돋아나면서 강렬한 사정이 시작되었다. 아찔한 쾌감이 지혁을 뒤덮는 신호탄이었다.
여태껏 쌓아 두었던 과한 압박감에서 비로소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줌을 갈기기 직전에 느껴지는 전조 증상 같았는데, 이를 깨닫자마자 묵직한 귀두 끝, 요도구에서 묽은 씹물이 솟구쳤다.
“아, 선생, 님……. 안 대애…….”
구멍 안에 쪼르륵, 쏟아지는 물줄기를 느낀 해교가 기진맥진한 상태로도 오줌을 떠올리며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하니 선생님이 그러실 리는 없지만 느낌이 이상했다. 정액이라 하기엔 찰박이는 느낌이 묘했던 것이다.
귀두가 요동치며 뱉어 낸 뜨끈한 물은 내벽을 가득 채우고도 넘칠 만큼 계속해서 차올랐다. 내장을 출렁이게 할 만큼 많은 물을 들이붓듯 쏘아 댄 지혁이 자지를 길게 뽑아내자, 구멍 안에 차올랐던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뒷보지 밖으로 삐져나와 소파를 타고 흐른 여러 줄기의 액체는 어두운 대리석 바닥 위로 고여 들었다. 부르르, 지혁이 하체를 떨며 쏟아 낸 그것은 익히 알던 유백색의 정액이…… 아니었다.
“미친…… 씨발.”
지혁은 말을 잃고 제 아랫도리를 바라보았다. 지나친 쾌감으로 인해 진득한 점액질 대신 흘러나온 묽은 물이 웃옷과 바닥 모두를 적셨다. 젖은 셔츠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견고한 상체 근육의 윤곽이 드러났고 흥분한 복근이 오르내리며 더더욱 또렷한 형태감을 더했다. 어이가 없는 건 이런 상황에서도 자지 끝에 남아 있는 쾌감이 계속해서 들썩이고 있다는 것이다.
“서, 선생님…….”
선생님이 오줌을……. 해교는 연이은 사정에 힘이 빠진 와중에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도 아닌 선생님이 섹스 도중에 소변을 누시다니. 일부러 뒷보지에 오줌을 싼 것도 아닌 듯해 그가 원망스럽기보단 걱정이 되었다.
많이, 아주 많이 부끄러우실 것 같았다. 어떡하지. 전에 저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괜찮다고 다독여 드려야 하나.
“선생님. 괜찮, 괜찮아요. 저, 저도 쌌…….”
자신도, 지혁도 모두 오줌을 쌌으니 괜찮다고 말하고파 입술을 달싹이는 해교를 눈치챈 지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저와 해교의 몸 전체를 적신 체액을 상관 않고 해교를 마주한 채 꼭 껴안았다. 그러게. 우리 둘 다 쌌네. 어쩌지.
* * *
지혁이 서재에서 업무를 보는 동안 해교는 지하에 있는 거실에서 영화를 한 편 보고 올라온 참이었다. 막 서재에서 나온 지혁이 고개를 까딱이며 해교를 다시 서재로 이끌었다. 좀처럼 들어갈 일이 없는 서재를 향한 발걸음에 잠시 망설이던 해교가 이내 그를 따랐다.
“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던 높다란 책장 상단은 여전히 영어로 된 서적이 가득했지만 하단은 서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 대신 꽂혀 있었다. 해교의 시선이 닿는 높이를 기준으로 정확히 갈라진 아래위의 책들은 눈치가 없는 해교일지라도 단번에 알아챌 만큼 분위기를 달리했다.
고졸 검정고시 기출 문제집
의아해하는 눈으로 바삐 눈동자를 굴리는 해교에게 어느덧 지혁이 다가와 말했다.
“강요는 아니에요. 혹시 다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지 시작했으면 해서.”
자신과 해교의 키 차이를 감안하여 아래층마다 죄 검정고시와 관련한 책들을 일렬로 꽂아 둔 터였다. 언제 설치했는지 지혁이 쓰는 책상 옆에 해교의 상체 높이에 맞는 크기로 제작된 책상 역시 함께 놓여 있었다.
“저는…… 머리가 나빠서 잘 못해요. 수학도, 국어도 다 못해요. 자신 없는데…….”
“자신은 없어도 돼요. 하고 싶은지가 중요한 거지. 원한다면 과외 선생을 부르든, 아니면 내가 나서서라도 도와줄 수 있어요.”
“아…….”
기껏 선생님이 준비해 주셨는데 아예 안 한다고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의자에 앉는 해교의 뒷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웃음 지은 지혁이 편하게 하라는 듯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더니 서재에서 나갔다.
음……. 막연히 대학생들을 동경하고 부러워하긴 했지만 막상 정말로 공부를 하려 하니 벌써 머리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다. 이미 서재 한편을 자신의 검정고시 준비와 관련한 책으로 바짝 채워 넣은 지혁을 봐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긴 했지만…….
해교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에 쥔 책의 중간쯤을 잡아 펼쳐 보았다. 하얀 바탕은 종이요, 검은 글자는 한글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표준 발음법 규정: 어간 받침 ‘ㄴ(ㄵ), ㅁ(ㄻ)’ 뒤에 결합되는 어미의 첫소리 ‘ㄱ, ㄷ, ㅅ, ㅈ’은 된소리로 발음한다…….
“아아. 대체 무슨 말이야.”
정말 하나도 못 알아들을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없던 자신감이 사라지고 자존감은 땅속 깊숙한 저 아래로 처박혀 버렸다.
아마도 의사 선생님은 제가 이 정도까지 무식한지는 모르고 책을 사다 주셨을 터였다. 정말 선생님의 제안처럼 과외라도 받을까. 아니, 그랬다가 제가 돌머리라는 말이 선생님 귀에 들어가는 건 더 싫은데.
끙끙 앓던 해교는 어느덧 지혁이 가까이 다가온지도 모르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지혁은 그런 해교의 옆에 서서 조심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린 뒤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힘들 순 있지만 절대 스트레스 받지 말아요. 특히 이상한 생각은 하면 안 돼요.”
“이상한 생각이요?”
문득 섬마을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도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게 생겼나.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날이 좀 풀리면 선생님께 섬에 다시 놀러 가자고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전에 눈앞에 놓인 이 책을 먼저 해결해야겠지만.
“……내가 나를 위해서 공부시킨다는 생각. 나는 내 연인이 중학교까지 나왔든 초등학교까지 나왔든 아무 상관 없거든요. 언제든 이깟 공부, 하고 싶지 않으면 때려치워요.”
“정말요? 그럼 왜…….”
“다만 나보다 한참 어린 연인을 데리고 사는 도둑놈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겠다 싶어서 제안한 거예요. 물론 그 제안의 기반은 애기의 행복이니 애기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는 거고.”
난 그걸 위해 일하는 거니까. 뒷말은 속으로 삼킨 지혁이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해교의 뺨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곤 다시 서재를 빠져나갔다.
나를 위한 공부……. 그렇다면 조금 못해도, 몇 번쯤 떨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해교는 한결 부담이 덜어진 채로 덮었던 책을 다시 폈다. 잘 몰라도 더 읽어 보고 싶었다. 정 모르겠으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얼마 후, 서재로 돌아온 지혁이 책상 위에 엎드려선 색색 숨을 내쉬며 잠든 해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말간 뺨과 손가락 사이에 미처 뚜껑을 닫지 않은 펜이 놓여 있었다. 하얀 종이 위, 삐뚤빼뚤한 글씨로 몇 군데 밑줄을 쳐 둔 모습이 꽤, 아니 아주 많이 사랑스러웠다.
책상 위에 흐트러진 가느다란 머리카락 덕분에 매끈하고 고운 이마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움찔, 꿈틀대는 미간 아래 자리한 촘촘한 눈썹 결마저 둥그렇고 유려한 모습이었다. 지혁은 쏟아지는 햇살에 황금빛으로 변한 속눈썹 끝에 살포시 입술을 대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해교의 얼굴을 응시했다. 다시 봐도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해교가 다시 이 집에 돌아온 지 어느새 꽤나 시간이 흘러 있었다. 더는 진료를 핑계로 댈 필요 없는 연인 사이가 된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아 이렇게 그를 말없이 바라보곤 하는 것이 그의 은밀한 취미가 되었다.
다시는 멍청하게 제 감정을 누군가가 짚어 내고서야 알아채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매일매일, 어제보다 한결 더 깊어진 감정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에 불을 붙인 건 성욕이었고, 이는 곧 느껴 본 적 없는 소유욕으로까지 번졌다. 어디서 기인한지 알 수 없는 감정은 어느덧 모양을 바꾸고 똬리를 튼 지 오래였다.
더는 삶이 권태롭지 않았다. 매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에서 잠든 차해교를 보고 싶었고, 맛있는 걸 맛보면 차해교의 입에 한가득 넣어 주고 싶었다. 더는 차해교를 속이고 싶지도 않았고, 원하는 건 뭐든 다 해 주고만 싶었다.
차해교가 원한다면 이 집이 아니라 어디든, 언제든 갈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검정고시를 통과한다면 까짓것 대학도 보내 주고 싶었다. ……혼자 보내기는 힘들겠지만.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은 매분 매초 하고 있었다. 매일을 만끽하고, 또 만끽해도 부족했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지혁은 해교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하다 느꼈다.
한때는 나 자신이 무성애자가 아닐까 의심까지 했었다면 너는 믿어 줄까.
그렇게 말하면 또 ‘무성애자요?’ 하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겠지. 정말 귀여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마자 지혁은 참아 낼 의지 없이 얼굴 전체에 만연히 퍼지는 웃음을 크게 뱉어 냈다.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봄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혀 잠든 해교가 끙끙대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지혁이 혹여나 해교를 깨울까, 입 안 살을 살짝 깨물고 숨을 참았다. 하지만 여전히 간간이 잇새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까지는 참을 수 없었
다.
봄이다.
아주 마음에 드는 계절이었다.
〈다정한 진료, 본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