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진료 4권-10장 (13/18)

우선 편의점에 가서 휴대폰 충전기를 사야 할 듯했다. 의사 선생님께 당분간 다른 곳에 가 있는다고 연락을 드린 뒤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예전처럼 가사 도우미 서비스로 돈을 모아 아버지에게 주기는 힘들 것 같았으니까.

해교는 언덕을 내려가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편의점 문을 열었다. 그새 아르바이트생이 바뀌었는지 종종 삼각김밥을 사 먹을 때마다 보았던 여학생 대신 낯선 사람이 포스기 앞에 서 있었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여과 없이 맞은 탓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골고루 젖은 해교를 수상하게 여기는 시선이 느껴졌다.

각종 휴대용품을 모아 둔 코너에 가서 열심히 충전기를 찾았다. 혹시 몰라 가져온 휴대폰을 꺼내서 충전 잭 끄트머리 모양과 비교도 해 가면서 걸린 물품들을 뒤졌지만 좀처럼 해교가 쓰는 휴대폰과 같은 모양의 단자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충전기요. 여기 있는 게 다인가요?”

“어…… 네. 휴대폰 충전 잭은 거기 있는 게 단데요.”

“이, 이렇게 생긴 충전기는 안 팔아요?”

“X핀이네요? 이건 요즘 찾는 고객분들이 안 계셔서 발주를 한다 치더라도 본사에 물량이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아…….”

아르바이트생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온 해교는 편의점 앞에 놓인 파라솔에 털썩 앉아선 테이블에 뺨을 대었다. 어떡하지. 이젠……. 갑자기 안 들어가면 선생님이 걱정하실 텐데. 움직이지 않은 채 눈동자를 굴려 보아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한숨만 쉬는 와중에 건너 또 다른 파라솔에 앉아 캔 맥주를 나눠 마시는 남자 2명이 눈에 들어왔다. 해교의 또래로 보이는 둘은 착석한 지 꽤나 시간이 흘렀는지 여러 개의 빈 캔과 조금 남은 안주 몇 점이 그들이 마주한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야. 세상에 여자가 걔 하나야? 이제 그만 잊어.”

“말이 쉽지. 학교에서 매일 보는데 어떻게 잊냐? 보지를 않아야 잊지.”

“그건 그렇다…….”

“하…….”

역시 눈에서 멀어져야 마음에서 멀어지는 법이었다. 해교는 자신도 당분간 의사 선생님을 보지 않으며 마음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점점 더 그들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한 명이 이별을 통보받고 힘들어하는 걸 다른 한 명이 위로해 주는 광경인 것 같았다.

“주말에 바다라도 갔다 오든가.”

“바다?”

“왜, 실연하면 바다 많이 가잖아. 거기서 미련을 버리고 와.”

“씨발, 감사합니다. 아주 실연했다고 광고하고 오겠네요.”

상대방의 말에 투덜거리던 남자는 곧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어쩐지 솔깃해진 해교는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조언해 주는 남자의 모든 말을 제게 하는 것처럼 새겨들었다.

* * *

터미널 매표소에서 무작정 바닷가로 가는 버스표를 달라고 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몇 곳을 읊어 주는 안내원에게 지금 출발할 수 있는 가장 빠른 표로 사고 싶다고 했고, 향하는 목적지가 대체 서울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인지도 모르는 채 해교는 표값을 계산했다.

출발 시간까지 20분. 아직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커다란 눈을 휘휘 굴리며 버스 터미널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해교에게 익숙한 로고의 간판이 보였다. 흔하디흔한 편의점이었지만 아까 들른 곳과는 다른 브랜드의 편의점 간판을 보며 여기엔 충전기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편의점 문을 열었다.

“아……. 여기도 없네…….”

눈을 씻고 찾아보았지만 이곳에서도 해교의 휴대폰과 맞는 충전기는 보이지 않았다. 상당히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꾸욱 깨무는 해교를 본 직원이 생각났다는 듯 전자레인지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보이시죠? 저 기계로 결제하시면 휴대폰 충전은 하실 수 있어요. 구형 휴대폰 충전 단자도 다 있을 거예요! 저거 쓰세요.”

“아……. 네, 네. 감사합니다.”

충전기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충전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해교는 알바생이 알려 준 기계 앞에 가 휴대폰을 충전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충전을 해서인지 휴대폰은 좀처럼 켜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스 출발 시각까지 이제 5분, 조급한 해교의 마음을 모르고 느릿느릿 충전되던 휴대폰이 마침내 켜지고, 그간 쌓인 연락들이 한꺼번에 수신되면서 또 한참 동안 그는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었다.

우연제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속속들이 들어오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의 대부분은 그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발신인이 우연제로 표시된 연락들 사이마다 도윤에게서 온 연락도 섞여 있었으나, 해교는 지금 한가하게 그간 받지 못했던 문자를 확인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수신을 하던 휴대폰의 배터리가 거의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던 탓이었다.

빨리…… 꺼지기 전에 빨리…….

혹시라도 그새 휴대폰이 꺼질까, 배터리 잔량을 표시하는 그림이 깜빡이는 휴대폰을 붙들고 해교는 급하게 지혁의 연락처를 찾았다.

전화를 했다간 다정한 음성을 듣자마자 또 훌쩍이며 선생님을 걱정시킬 것만 같아 최대한 담담하게, 별일 아닌 듯 보이려 갖은 애를 쓰며 문자를 써나갔다.

[오후 15:32 선생님. 일이 잇어서 친구집에 가잇을게요ㅠ 대출ㅇ일주일정도 잇다 갈게요 정리대면 열락 또 드릴게요 갑자기 말씀드려서 죄송함니ㄷㅣ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휴대폰 화면이 깜빡거렸다. 해교는 급하게 전송 버튼을 누르고 숨을 멈추었다. 문자 메시지가 전송되었다는 알림창과 동시에 휴대폰 화면이 새카맣게 변했다. 그리고 해교는 버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꽤나 오래 가야 한다는 버스 기사의 말에 좌석에 엉덩이를 대자마자 눈을 감았다. 목적지는 실로 엄청난 시골인지 버스 안은 해교를 제외하곤 단 2명의 승객만 더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으니 어렴풋이 오늘 하루 동안 느낀 감정이 되살아나 울컥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주제도 모르고, 분수도 모르고 왜 그런 마음을 품어서.

하지만 해교는 투정도 마음껏 할 수 없는, 기한을 선고받은 몸이었다. 내일부터는 새로운 일거리와 거주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으므로 실연에 대한 사치스러운 감정은 딱 오늘까지만 되새기기로 했다.

종일 몸도, 마음도 지쳐서인지 눈꺼풀에 추를 단 듯 잠기운이 밀려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해교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달린 버스가 종착지에 도착했다는 기사의 말에 눈을 떴다.

떠밀리듯 하차하니 TV에서나 봐 오던 시골 버스 터미널 풍경이 펼쳐졌다. 초겨울일지라도 적당히 관광객이 돌아다니고, 어느 정도의 운치가 있는 해수욕장을 떠올리며 몇 시간을 이동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바다라곤 보이지 않는 시골 마을 경관에 당황한 해교가 걸음을 멈추었다.

* * *

지헌의 약혼녀는 생각보다 호탕한 성격이었다. 이해득실을 떠나 그가 짧은 시간 안에 결혼 진행의 의사를 밝힌 것이 이해가 될 만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 타입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지혁은 시원시원한 성격보다는 조금 우유부단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을, 건강미를 자랑하는 태닝한 피부보다는 햇볕을 잘 보지 못한 듯한 창백한 피부를, 쭉 올라가 주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눈꼬리보다는 축 처져 늘 울망울망 겁을 먹고 있는 듯한 눈꼬리가 좋았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다 보니 해교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지혁이 재차 자신이 중증이라 판정을 내렸다.

생각보다 만남이 길어져 갈무리하고 돌아왔을 때에는 밀린 환자들이 병원 내 한가득 대기하고 있었다. 해교 때문에 조금 유해져서인지 지혁은 평소처럼 칼같이 끊어 내지 않고 기다린 모든 환자의 진료를 마치고서야 병원 문을 닫았다.

늘 귀가하던 시각에 비해 아주 조금 늦은 정도였지만 지혁은 집에서 저만을 기다리고 있을 해교를 떠올리며 부산스레 몸을 움직였다. 러시아워에도 불구하고 액셀러레이터에서 거의 발을 떼지 않고 레이싱하듯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이상했다. 집에서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늘 퇴근할 때면 온 집 안 불을 켜 둔 채 자신을 맞이하던 해교였는데.

“왜 불이…….”

정체 모를 불안감이 지혁을 급습했다. 지혁은 성마른 발걸음으로 차에서 내려 차고와 집 안을 연결하는 문을 열려 시도하였다. 틱, 소리가 나며 꿈쩍 않는 문을 보자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평소처럼 대문 개폐 시스템을 작동하려 하자 오류가 난 것이다.

“이 씨발. 낮에 고친다고 하더니.”

지혁은 왠지 모르게 더욱 초조해져 아랫입술을 혀로 핥아 냈다. 급한 마음과 더불어 간만에 도어록에 직접 비밀번호를 입력하다 보니 잘못 입력된 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해교가 이 집에 머물게 되면서부터 새로 통신 선로를 구축하며 거의 이용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씹. 좀…….”

짜증스레 미간을 구긴 채 겨우 연 대문을 열어젖히고 현관문까지 통과했다. 그리고 다다른 컴컴한 집 안에선 ‘다녀오셨어요?’ 하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쪼르르 달려 나오는 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거실 소파 위에 놓인 게임 컨트롤러가 지혁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캣 타워에서 내려온 고양이가 야옹, 하고 지혁에게 다가와 어슬렁거렸다.

혹시나 자고 있는 건 아닐까 침실부터 들러선 지하 층과 2층, 하다못해 소파 밑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재킷도 벗지 않은 채 온 집 안을 한 바퀴 돈 후에야 막연히 느껴지던 불안감의 이유가 명확해졌다.

없다.

없었다.

사라졌다.

그러니까, 대체 왜?

아침만 해도 출근하는 자신을 따라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는 집을 나서는 때까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던 해교였는데. 점심 즈음까지 보이던 화면상으로도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기에 급작스레 사라져버린 연유가 도무지 짐작 가지 않았다.

혹시…… 제가 해교를 희롱하려 갖은 개수작질을 해 온 걸 알게 된 걸까. 하지만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첫 번째 진료만이 진료 기록에 남았기에 이후 주욱 해 온 각종 개짓거리를 이와 연관해 생각하기는 힘들 터였다.

그게 아니라면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그럴 만한 일도, 낌새도 없었는데. 그렇다면 호기심에 모처럼 열린 문을 열고 나갔다가 생각보다 귀가가 조금 늦어지는 걸지도.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여전히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지만.

외부의 침입 흔적도 없었으며 보안 업체 측에서도 경비와 관련해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었기에 누군가 강제로 끌고 나갔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지혁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휴대폰을 쥐었다.

하필이면 왜 오늘 보안 시스템에 오류가 났었는지, 담당자는 난데없이 한밤중에 불려 와 손이 발이 될 때까지 빌어 댔지만 지금은 그딴 일보다는 급작스럽게 차해교가 사라지게 된 경위를 알아내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지혁은 당장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해교가 이 집을 빠져나간 순간부터의 행적을 낱낱이 알아 올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집 안 전체를 뒤엎듯 해교를 찾아다녔다.

“…….”

날이 넘어갔다. 지혁이 밤새 눈을 붙이지 못해 뻘건 핏줄이 선 눈동자로 소파를 두들겼다. 다리를 달달 떨며 연신 손가락을 내리치는 모습이 퍽 초조해 보였다. 병원에 출근조차 하지 않은 지혁의 앞에 선 남자가 잔뜩 경직된 자세로 보고를 해 나갔다.

“최근 정리 중이시던 일과 겹칩니다. 우연제가 찾아왔었습니다. 늘 CCTV 카메라 사각지대 부근에 차를 세워 두었는데 이날은 아예 내려서 대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만난 것 같습니다. 다행히 잠시 대화하다 헤어지긴 했습니다만.”

“담당자 경질은 물론이고 씨발, 내 손해는 어쩔 겁니까.”

도저히 물질적으로 계산되지 않는 손해를 언급하는 지혁의 눈빛이 형형했다. 뭐든 잡히는 대로 박살 내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낮게 욕지거리를 뇌까리던 지혁이 기어코 손에 잡힌 펜을 부서뜨리며 이를 갈았다.

“당장 우연제, 이도윤 위치 추적하고 그날 동선 파악해요. 혹시 집에 데려간 건 아닌가 확인해 보고.”

일단 제일 먼저 살펴봐야 할 용의자는 둘이었다. 사탕을 내밀어 어린애를 꾀듯, 어떤 감언이설로 순수한 해교를 꾀어냈을지 몰랐다. 가정만으로도 열이 오른 지혁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다가 테이블 아래에서 지혁과 수행원을 바라보는 메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너라도 두고 갔으니 곧 들어오겠지. 어디 친구라도 만나러 갔다가 깜빡 연락을 못 한 걸 수도 있고. 가증스럽다고 느낀 고양이가 곁에 있는 걸 확인하자 기이하게도 안도감이 느껴졌다.

제 욕심이 과했다. 세상과 연락할 수단을 끊어 버리니 저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휴대폰이라도 하나 사서 쥐여 주는 거였는데. 아, 휴대폰.

지혁이 뒤늦게 2층으로 향해 해교의 휴대폰을 찾았다.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는데 휴대폰의 존재 여부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해교를 찾던 전날 밤처럼 휴대폰 찾기에 혈안이 된 지혁이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온 집 안을 뒤엎고 들쑤셔 보아도 해교의 휴대폰은…… 나오지 않았다.

* * *

‘선생님, 다녀오셨어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그래요. 다녀왔어요. 정신 나간 놈처럼 혼자 현관에서 읊조린 지혁이 지친 몸을 이끌고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고작 2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함께했을 뿐인데, 그새 해교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퇴근하고 그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이 드는 것이 일상이 된 모양이었다.

설핏 바라본 소파 위에서 해교가 예쁘게 눈매를 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잔상이 떠올랐다. 잠을 못 자 그런가. 지혁은 멀거니 소파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며칠 새 살이 내린 얼굴로 제 눈가를 짓누르는 지혁은 늘 단정하게 걸친 정장 재킷 대신 잔뜩 흐트러진 셔츠만을 입은 채였다.

흐릿하게 창을 뚫고 스며든 달빛 아래, 고통스러운 듯 구겨진 얼굴은 여전히 조각을 한 듯 유려했다.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향한 지혁이 대강 몸을 씻고 나와선 침실로 향했다. 고작 배스 가운을 입는 순간에도 차해교가 떠올라 고역이었다.

순식간에 비어 버린 침대 옆자리를 바라보며 지혁이 입 안 살을 마구 짓씹었다. 텅 빈 자리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었다. 당연히 온기 따위 느껴질 리 없었다.

그렇다면…… 향이라도 맡고 싶었다. 지혁이 몸을 숙이고 늘 해교가 잠들던 시트에 코를 묻었다. 칼을 벼린 듯 날카로운 콧날이 보드라운 시트를 가르며 주름을 만들어 냈다.

가사 도우미에게 당분간 침구는 갈지 말 것을 요구한 참이었다. 억지로 숨을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시면 미세하게 느껴지는 해교의 향에 심취한 지혁이 아까운 듯 아주 천천히, 옅게 날숨을 내뱉었다.

언제 맡아도 아기 분내 같은 향이 목덜미에서부터 서서히 퍼지고 그 체취를 맡으면 지혁은 이성을 잃곤 했다. ……지금도.

씨발.

공기 중에 흩어지는 미미한 향기에 저도 모르게 발기한 좆을 내려다보며 지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흥분해서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말갛고 붉은 눈꼬리가 떠올랐다. 살짝 쳐진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맺힐 즈음엔 하얀 피부가 달아오른다. 부드러운 살결 곳곳이 새붉어지고, 그 몸에 제 몸을 맞대면 열기가 자신에게로 옮겨 왔다.

어느덧 뜨거워진 숨을 억눌러 참으며 지혁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적어도 지금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게 제일 큰 이유이긴 했지만 이와 더불어 익히 차해교를 안을 때의 뜨거운 체온, 강렬한 쾌감, 사람을 미치게 하는 신음 소리 같은 것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어떤 난잡한 상상을 해서도 욕구가 해갈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 까닭이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해교를 알게 된 이래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보지 못한 적이 없었기에 그의 부재는 더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서서히, 무리 가지 않게 하나하나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는데.

지혁은 은은하게 켜진 수면 등을 끄면서 지난 몇 주간 자신이 해 오던 일을 되짚어 나갔다. 이 모든 일들이 헛된 일이 되어선 안 됐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듯 세세히 반추하느라 옅어진 숨이 모양 좋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 * *

〈어려서 그런가……. 꼬리가 너무 기네.〉

묵묵히 보고를 받고 있던 지혁이 실소했다. 애초에 무슨 일이든 감출 작정을 하지 않았는지 우연제와 이도윤이 하고 다니는 짓은 놀라우리만큼 투명했다.

차해교에 대한 구애. 그게 다였다.

퍽 요란스레 일을 벌여 놔 광고라도 해 둔 꼴이다. 황당할 정도로 어린 조무래기들이라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봐 줘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어림짐작한바, 그간 해교와 연제, 그리고 도윤이 꽤 여러 번 진득하게 엮였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대체 그 만남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히 내막 전체를 알 수 없는 점이 쉽게 처분을 내릴 수 없게 했다. 해교가 입만 열면 깨끗하게 끝낼 수 있을 문제지만 도통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고, 지금은 들을 방도도 없으니 우연제와 이도윤, 이 둘을 직접 파 보는 수밖에 없었다.

피곤했다. 일을 해서라기보다는 차해교의 행적을 알아보는 것에 많은 피로가 쌓인 탓이었다. 그래도 불 켜진 집에 들어가면 차해교가 기다리고 있고, 얌전히 종일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예쁘게 구는 모습을 보면 거짓말처럼 피로가 풀렸다.

그 사랑스러운 광경을 계속해서 보려면 지금 제 앞에 놓인 것들을 해결해야 했다. 지혁은 어깻죽지를 한번 돌리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철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김상배. 임대 중인 세대 수 18채. 20XX년부터 B-101호 차윤식과 임대 계약 체결 후 최근까지 계약을 유지…….

대충 종이를 몽땅 훑어 내린 지혁이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지시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지혁 앞에 선 남자가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그에게로 넘겼다. 상대방은 남자에게 그의 범법 행위와 이에 따른 처벌을 미리 고지당한 상태라 상당히 겁을 먹고 있었다.

〈영감님. 임대 놓은 곳이 이 집 하나만이 아닌 걸로 아는데 하나하나 다 따져 볼까요. 애가 어리숙한 거 이용해서 임대차 신고도 안 하고 몇 년을 세금도 안 내고 사셨던데. 마음먹고 짚으면 길게 남지 않은 생, 밖에서 못 사실지도 몰라요. 바른대로 말하면 적당한 선에서 덮는다고 약조하죠. 세상 꽤 오래 사셨으니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에 잔뜩 졸아든 집주인은 묻지 않은 말까지 술술 불어 댔다. 덕분에 지혁은 그와의 통화를 끝낼 즘엔 머릿속에서 얼기설기 얽혀 있던 인물들에 대한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통신 기록을 살펴보려고 했을 때 중간에 막혔던 게 아마 이쪽 솜씨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차해교가 쓰는 회선에 다닥다닥 장난질을 해 두었다는 소리였다.

하나는 새카맣게 어린 한지헌 후배에다 또 하나는 그 친구고. 씨발.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어린 새끼들이 대체 주변에서 껄떡대며 무슨 짓을 한 건지 파면 팔수록 기함할 듯했다. 이 정도로 스케일을 키워서 집착해 댈 정도면 차해교에게 어떤 마음일지 능히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차해교에 대해 알아볼 수 없게 꽁꽁 감추어 두고 싶었던 모양인데 외려 그 덕에 꼬리가 손쉽게 잡혔다. 구태여 더 캐 볼 필요도 없이 아마 저와 같은, 동류의 마음에 바라는 바도 같을 터였다.

* * *

어느덧 해교가 지혁을 떠난 지 며칠이 흘렀지만, 지혁에게는 몇 달이 흐른 것처럼 까마득했다.

허탈했다. 제 품 안을, 이 집을 안온하게 느낀다 생각했었는데. 요란하게 여기저기를 들쑤시긴 했지만 다음날이면 차해교가 제 발로 다시 들어오든, 그게 아니면 본인이 찾든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이루어질 거라 보았는데 명백히 그른 판단이었다.

“나한테 문자를 보낸 내역이 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이미 해교가 사라진 걸 알게 된 날 자신의 휴대폰으로 따로 들어온 연락은 없는지 골백번도 넘게 확인했었다. 평소 읽지 않은 채 내버려 둔 문자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까지 싹 다 훑은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네. 여기……. 한 건이긴 하지만 해당 일자에 발송한 걸로 뜹니다.”

[오후 15:32 선생님. 일이 잇어서 친구집에 가잇을게요ㅠ 대출ㅇ일주일정도 잇다 갈게요 정리대면 열락 또 드릴게요 갑자기 말씀드려서 죄송함니ㄷㅣ다]

무슨 오타가 이렇게 많아. 지혁은 해교의 문자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일이 있어서 친구 집에 가 있을 거고, 대충 일주일 정도 있다 가겠다, 정리되면 연락을 또 하겠다, 갑자기 말해서 죄송하다……인가.

감히 지혁의 휴대폰을 뒤질 생각은 하지 않은 수행원이 그의 미간이 움찔댈 때마다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빌어먹을. ‘대출’이라는 단어 때문에 자동 스팸 처리되어 이 문자를 미처 받아 보지 못했던 듯했다. 낮게 욕설을 뇌까리며 제 휴대폰을 꺼내 든 지혁은 몇 번 터치하지 않아 곧 화면 속 스팸 메시지 함에서 수행원이 보여준 메시지와 같은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친구 집……. 네가 친구가 누가 있는데. 이도윤? 우연제? 친구 집 운운할 때 만나고 지냈던 놈들이 떠오르자 지혁의 눈빛이 삽시간에 매섭게 번득였다.

지혁에게 문자를 보낸 이후에 해교의 휴대폰이 다시 켜져 GPS가 송수신되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휴대폰이 켜졌던 곳을 중심으로 해교를 찾기 위한 인력을 보냈지만, 이쯤 되자 지혁은 해교가 일부러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침착했던 마음가짐이 점차 무너져 내렸다. 혹시, 친구 이야기는 연막이고 의도적으로 집에서 못 나오도록 감금해 둔 걸 진작 알아챈 건 아닐까. 그래서 기회만 엿보다가 시스템이 오류 난 날, 급하게 도망이라도 간 거다.

……시발. 도무지 믿고 싶지 않지만 믿겨서 좆같은 가정이었다.

그새 해교가 집에 머물며 한 행동들에 의미가 있을까 그간의 모든 행적을 담은 CCTV를 돌려 보던 지혁이 낮은 욕설과 함께 일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지된 화면은 ‘감금’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보다 치를 떨고 꺼 버리는 해교였다. 마구잡이로 DVD를 사들이다 보니 소재까지 솎아 낼 여력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왜 저딴 걸 골라서. 어쩌면 이때부터…… 이때부터, 진작 눈치를 챈 걸지도.

“……이 씨발. 하아.”

눈치가 빠른 편도, 똑똑한 편도 아닌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다. 그게 흔치 않은 순수함과 섞여 매력이 되었기에. 그럼 그렇지 누구라도 의심할 법한 헛소리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 받아들이던 그를 한 번쯤은 유심히 살펴보아야 했는데!

해교가 정말 지혁이 하는 말을 믿어 왔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지혁이 결론을 내리고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우연제나 이도윤이 조력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도 아니라면 저 혼자 쏙 사라져 버렸거나. 어떤 의도로 집 밖에 나갔던들 만에 하나 현재 위험한 상황일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병신 같네, 한지혁.”

어울리지 않게 길고양이까지 데려온 뒤 정말 해교의 말처럼 그에게 완벽한 천국을 건설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당황하든 말든 그냥 제 마음을 드러낼걸. 그랬다면 그 착하고 모진 소리를 하지 못하는 차해교는 아마 미안해서라도 제 곁에 머물렀을지 몰랐다.

어떤 결론을 내리든 일단 해교를 찾아서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말이 뭐가 되었든 다시 데려올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됐다.

빠르게 박동하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다시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 * *

차해교가 없는 집은 간간이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 외에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고요했다. 늘 해교가 게임을 하고 있던 거실 TV 앞에 잠시 시선을 준 지혁이 신경질적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나갈 채비를 했다.

쌓인 피로도 느끼지 못할 만큼 정신이 나가선 요 며칠간 한 번도 열지 않은 병원과 참여치 않은 이사회가 잠시 떠올랐으나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날 행적에 한 이사님 병원도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지혁이 굳게 잠긴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인포데스크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켠 뒤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는 CCTV 프로그램 옵션을 누르고 특정 날짜로 화면을 되돌렸다. 숨을 멈춘 채 화면을 바라보던 지혁이 헛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차해교였다. 낮에 꼬물거리는 손으로 만든 도시락 통을 한 손에 들고선 병원에 들어왔다가 인포데스크로 향한 뒤…….

김 간호사와 박 간호사의 짧은 대화가 이어지고 비틀거린다. 그리고 주춤하더니 금세 사라졌다. 얼마나 아연실색했으면 애지중지 들고 온 도시락 통까지 우산과 함께 떨어뜨린 채.

이날 비가 많이 왔을 텐데, 우산도 없이 저렇게 나간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멀쩡하게 도시락까지 싸 들고나왔다가 챙겨 가지도 않은 채 대체 왜. 왜 사라진 걸까.

지혁이 지푸라기라도 잡듯 김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분간 병원이 휴업 상태에 돌입할 거라는 문자만 달랑 남겨 놓고는 연락을 끊은 지혁에게서 온 첫 전화인 터라 김 간호사는 빠르게 응답해 왔다.

“혹시, 휴업 들어가기 전날 말이에요.”

- 네, 원장님.

“그날 병원에 날 찾아온 사람은 없었습니까.”

- 환……자요? 환자들이야 많았죠. 그날 늦게까지 진료 보셨잖아요.

돌려 말하니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다. 지혁이 살짝 미간을 구겼다가 펴며 심호흡을 하였다. 뒷수습은 나중에 생각하고 차해교에 대해 대놓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온 환자 있잖습니까. 왜…… 방광염 재진 받았던 환자요. 혹시 기억나요?”

- ……아! 네네. 워낙 예쁘게 생겨서 기억해요. 그날도 진료받으러 왔다가 대기 명단에 이름 안 올리고 갔어요.

“그래요. 그 환자가 있을 때 박 간이랑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 어……? 별 이야기 한 것 없는데요. 원장님 사정으로 점심시간이 1시간 늘었다는 것밖에는 말 안 했어요.

“생각해 봐요. 아주 조금이라도. 그 정도 이야기만 한 게 답니까? 김 간, 박 간 둘이서 꽤 오래 담소를 나눈 것 같은데.”

- 음. 그러고 보니…… 약혼식…… 이야기를 했어요.

“약혼식?”

- 네, 원장님이 동생분 약혼식 때문에 진료 미루셨단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정말 그게 다예요. 박 간이 궁금해하길래 맞장구친 게 단데…… 정말이요.

김 간호사는 이후 집요하게 물어 대는 지혁 때문에 제가 내뱉은 말과 박 간호사의 반응을 하나하나 떠올려야만 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기를 종용하는 지혁 때문에 김 간호사는 갖은 힘을 다해 그날을 되짚었고, 마침내 김 간호사와의 통화를 끝낸 지혁은 다시 한번 CCTV 영상을 돌려 보며 그녀의 이야기와 상황을 종합해 보았다.

약혼식 이야기를 듣고 왜 저렇게 당황해선, 가지고 왔던 도시락 통도 놓치고……. 도시락을 여기까지 가져온 걸 보면 날 주려고 한 것 같은데.

“잠깐. 설마……?”

무언가를 깨달은 듯 지혁이 덜컥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에 급하게 일어나 앉아 있던 의자가 뒤집어져 쿵, 소리가 났지만 신경 쓸 새 없었다.

* * *

해교가 도착했던 버스 터미널은 바다로 향한 종착지가 아닌, 중간 경유지였다. 해교는 기대했던 풍경이 나오지 않아 당황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같은 버스에서 내린 승객 할아버지가 이곳은 화물 항구에 불과해 여객선을 타고 좀 더 이동해야 그가 그리는 바닷가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서울 아들 집에 들렀다 본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그의 도움 덕택에 해교는 하루에 한 대 있는 여객선을 타고 간신히 섬에 들어왔다. 워낙에 외진 바닷가 촌락이라 해변가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주민 몇몇이 이따금씩 해교의 옆을 지나칠 뿐이었다.

하지만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덕인지, 해교는 금세 제 처지를 잊고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에 빠져들었다.

넘실거리는 바다와 맞닿은 하늘이 어둠에 물들기 시작하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멓게 내려앉은 바다를 바라보자 가뜩이나 음울해진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바닷바람 앞에 오래 서 있었더니 어느새 팔뚝에는 잔뜩 소름이 돋아 있었다.

처음 겪는 실연의 충격은 꽤나 컸는지 가만히 앉아 있자니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주제도 모르고 품은 마음은 꽤나 단단해져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삼킬 듯 사위에 깔리는 어둠에 멀거니 바다를 바라보던 해교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차가운 바닷바람과 상반되는 사람의 체온에 놀란 해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몇 신데 집에 안 가나? 누구 집 손님인데?”

머리가 희끗한 노파가 해교를 아래위로 훑으며 점검하듯 말을 걸었다. 외부인이라곤 좀처럼 볼 수 없는 마을에서 홀로 밤바다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게 수상쩍어 아까부터 그를 지켜보던 마을 주민이었다.

“아…… 그게…….”

아무래도 낯선 저를 도둑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해교는 입술을 달싹이다 무심결에 제 눈에 닿는 평상을 가리켰다. 바닷바람과 소금기에 여기저기가 부식된 낡은 평상은 거뭇거뭇해 불청결한 느낌을 주긴 했으나 상황을 타개하느라 발견한 것치고는, 하룻밤 정도 누웠다 가기엔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저, 저기서 자고 가려고요.”

“……저긴 우리 마을 사람들 앉아서 화투 치는 곳인데.”

“배편이 없어서……. 죄송해요. 나쁜 짓 하려고 온 건 절대, 절대 아니에요. 해 뜨면, 배 오면 바로 갈게요.”

“……쯔, 그렇게 말라비틀어져 갖고 나쁜 짓은 어떻게 하노?”

혀를 차던 노인이 따라오라는 듯 해교의 손목을 덥석 잡곤 산등성이 비탈길로 향했다. 해교는 당황하긴 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경찰서에 데려갈 심산은 아닌 것 같아 그저 조용히 따를 따름이었다.

노인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길을 잘도 헤쳐 나갔다. 몇 없는 집 중에서도 제일 끝, 가파른 산 중턱에 자리한 노인의 집은 꽤 낡긴 했지만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와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노인은 본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방문 손잡이를 잡으며 해교를 들였다.

“여기 빈방이니까 여기서 자라. 내 손자 같아서 재워 주는 거니께 은혜도 모르고 이상한 짓은 하면 안 된다.”

“네, 네. 감사합니다.”

나쁜 짓은 못 할 거라고 하더니 이상한 짓은 하지 말란다. 대체 노인이 말하는 이상한 짓이 뭘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해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깊은 생각을 하기에는 머리가 너무 아팠다.

밤새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덜컹이는 문과 지혁의 약혼에 대한 생각에 제대로 잠이 들지 못한 해교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감았다. 적지 않은 양의 비를 맞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서인지 노인이 뜨끈하게 데운 아랫목에도 불구하고 선잠에 들었다 깨길 반복했다.

스스로가 느낄 만큼 뜨거운 열이 오르고 눈두덩을 누가 쑤시는 듯한 통증이 멈추지 않았다.

얇은 문 너머로 어렴풋이 느껴지는 인기척에 해교가 미간을 꿈틀대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꽤나 고열이 이는지 겨우 확보한 시야로 어룽대는 형상에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아가, 어디 아프나?”

“…….”

겨우 색색 숨만 몰아쉬며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상대는 손을 뻗어 해교의 이마를 짚더니 이내 방 밖으로 나섰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그나마 어제 늦게라도 주워 와 이만했지, 평상에서 자라고 내버려 뒀었다간 시체를 치울 뻔했었다는 중얼거림과 함께 노인이 바삐 몸을 움직였다.

* * *

내려진 커튼 사이로 슬쩍슬쩍 스미는 빛을 보아서는 한낮인 듯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지만 손끝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기껏 마음 정리를 한답시고 여기까지 와서는…….

바닥에 눌어붙은 채 멀거니 숨만 쉬던 해교가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몸을 일으키려 손바닥에 힘을 주자마자 끼익, 문이 열리며 해교를 이곳에 묵게 해 준 노인이 등장하였다.

“아가. 이제 괜찮나? 이상한 생각은 하덜 말아래이.”

노인이 해교의 이마에 제 손바닥을 올려 열을 가늠하였다. 이제 괜찮네, 하며 가져온 원목 쟁반을 주욱 끌어오더니 그의 옆에 놓았다. 펄펄 김이 나는 하얀 죽이 담긴 그릇과 수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상한 생각요?”

“그 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든가……. 뭐, 그런 쓸모없는 생각 말이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 절망적이긴 했지만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는 누구보다 강한데. 해교는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억울했다.

“저, 절대 아니에요.”

“그라믄 다행이고. 이상한 맘 묵지 마래이. 한 3년 전에 외지인 하나가 죽으러 와서 동동 뜬 적이 있었는데 송장 치는 꼴 두 번은 보기 싫으니까 알아서 해라.”

노인은 먹으라는 듯 쟁반을 한 번 더 해교 앞으로 밀어 주더니 구부정한 허리를 최대한 일으켜 세우고는 방문을 열고 나섰다. 오늘 외부로 나가는 배편은 텄으니 가려거든 내일 가라는 말을 남겨 두고서.

해교는 허겁지겁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비우고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여전히 휴대폰은 전원이 켜지지 않아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 주인 할머니에게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찌뿌둥한 몸을 힘겹게 일으켜 방에서 나왔다.

해교가 슬쩍 눈치를 보며 개수대로 향하자 주인 할머니가 다가와서는 쟁반을 통째로 빼앗아 갔다.

“야가 힘도 없을 텐데 뭐 하노.”

“제가 먹은 건 제가 설거지해야죠…….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하…….”

“감사할라믄 또 아프지나 마라. 3일 밤낮을 못 일어나 놓고서는 그릇 딱는다 카면 어떡하노.”

“……3일이요?”

흐릿하게 앓은 기억은 있었지만 길어야 하룻밤이라 생각했다. 3일이나 흘렀다니, 그래서 일어났을 때 몸에 쉬이 힘이 들어가지 않은 듯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해교는 머리끝이 땅에 닿을 듯, 격하게 허리를 숙인 채 노인에게 연신 인사했다. 대뜸 처음 보는 놈이 3일을 앓는데 쫓아내지 않고 돌보아 준 노인은 정말 자신의 손자 같아서 그렇다는 말을 하곤 손을 내저으며 공치사를 거절했다.

“감사하면 죽상 하지 말고 오래 살아래이. 내 꿈자리 뒤숭숭하게 만들지 말고.”

정말 죽을 생각이 없는데. 조금 억울했지만 해교는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노인을 만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도움만 받고 이대로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던 해교가 노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온 집 안 청소에 나섰다. 아무리 깔끔하게 정리를 해 놓는다 한들 노안으로 꼼꼼한 청소는 힘들 터였다. 그러니 먼지 한 톨 나오지 않게 깨끗한 집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오래된 실온 보관 제품들을 골라내 쓰레기통에 담고, 가전 사이사이에 쳐진 거미줄을 걷어 내고, 틈새마다 먼지가 잔뜩 낀 마룻바닥을 닦다 보니 하루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야가 더 붙어 있을라꼬 수 쓰는 거 봐라.”

창틀에 고인 빗물을 닦아 내던 해교가 노인의 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재미있다는 듯 픽, 웃음 짓는 그녀의 눈가엔 세월의 흔적이 만든 주름이 가득했다.

“있고 싶은 만큼 더 있어라.”

“그런 거 아니…….”

“나도 외로워서 그러니까 더 있어라. 손자 같아서 그런다.”

하루 정도만 더 머물 요량이었으나 뜻하지 않은 권유에 마음이 쏠렸다. 자꾸 손자가 생각난다는데 정말 닮았나? 할머니는 워낙에 나이가 드셔서 이목구비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아직 아무렇지 않은 듯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해교는 노인의 권유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더욱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몇 개 없는 창틀을 다 닦아 낸 뒤에는 툇마루를 쓸었고, 마당 구석에 자리 잡은 텃밭에 가서는 스멀스멀 죽어 가는 식물들을 뽑아내고 흙을 덮었다.

조금이라도 쉬면 쫓겨날 것처럼 바삐 집을 다듬었다. 제 눈에만 감지될 정도의 소소한 변화였지만 조금씩 깨끗해질 때마다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청소를 마친 해교가 노인이 내어 준 방 안에 들어와 제 웃옷 냄새를 맡았다. 비릿한 비 냄새가 배어들어 쿰쿰했다. 벗어서 마당에서 털기라도 할 요량으로 옷을 벗었을 때, 팔랑, 하얀 종이가 웃옷 주머니에서 떨어져 바닥에 착지했다.

010-283x-xx29

아버지가 급하게 건네주고 간 쪽지였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잘 들어갔는지 연락 한번 해 봤어야 했는데. 나도 가족 있는데……. 신세를 지고 있는 집 할머니가 자꾸 손자, 손자 해서인지 해교는 아버지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방 안 구석에 다이얼을 돌려 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기가 놓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해교는 교통비를 제하고 남은 돈에서 오만 원을 할머니께 드리기로 마음먹고 꼬깃꼬깃한 지폐를 펴서 전화기 아래에 두었다.

꽤 오랫동안 신호가 갔다. 모르는 번호라서 안 받으시나. 한참을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던 해교가 마침내 포기한 듯 내려놓으려 할 때, 건너편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누구야. 해교야?

“어, 아빠……. 네. 그날 잘 들어가셨…….”

- 돈 좀 생겼어? 그래?

“아……. 그런 게 아니라, 그날 비도 많이 왔고 해서 어디로 가셨나 걱정돼서 전화했어요.”

- 하……. 아들.

“네.”

- 아빠 지금 네 전화 때문에 싸던 똥 끊고 뛰어온 셈이야.

“…….”

- 지금 나한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돈 생기면 전화해. 알았지? 이번에는 진짜 대박의 기운이 보인다니까. 아빠가 이번에 잘되면 씨발, 너한테 차도 한 대 사 준다.

수화기 너머로 넘어오는 냉랭한 기운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유일한 피붙이인데, 조금만, 조금만 더 살갑게 굴어 주지. 차 필요 없어요. 그냥 아빠랑 예전처럼 같이 살고 싶어요. 해교는 차마 하고 싶은 말을 전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 * *

몇 가구 되지 않는 마을 어귀의 반대편엔 주인 할머니와 그녀 또래의 마을 주민 몇몇이 절벽을 타는 해안이 있었다. 미끄러운 갯바위에 붙어 있는 돌김과 거북손, 가사리 같은 것들을 빠르게 긁어내는 것이 그녀들의 일감이었다. 오랜 시간 채취해 가지고 간 그물망에 한가득 담아 넣으면 그날 일과는 끝이 난다.

할머니는 해교가 절벽을 깎을 듯 부는 바람에 휩쓸려 바다로 떨어지면 그대로 황천길이라며 절대 일하는 곁에는 오지 못하게 했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으나 함의된 진심을 알았기에 해교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서 오는 길목에서 노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외지인이 머무는 것이 흔치 않은 동네라 해교의 존재는 금세 마을 전체에 퍼졌다. 주인 할머니와 꽤 막역한 사이인 듯한 또 다른 노인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해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님. ……야가 진욱이를 닮았다고?”

“닮았제.”

“으데? ……뽀얀 기 때깔부터 다르구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노인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계속해서 자신의 손자와 해교가 닮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해교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잠깐 어깨를 으쓱이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짐을 몽땅 제게로 옮겨 온 뒤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가 채취해 온 따개비류를 다듬는 일련의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빠르게 돌아갔다. 해교는 어떻게든 할머니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틈틈이 머릿속을 지혁이 헤집었지만 고개를 살짝 흔들며 눈앞에 쌓인 잔업에 집중하다 보면 금세 생각을 지울 수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서울로 돌아가서 의사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기로 마음먹었지만, 지낼 곳을 마련할 때까지 이곳으로 내려와 좀 더 일을 배우라는 할머니의 말을 따를 예정이었다. 예전처럼 괜히 선생님 곁을 맴돌다가 선생님께 피해를 주면 안 되니까. 아무리 사채업자라 한들 이런 시골 섬까지는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렇게 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시간을 보낸 뒤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다시 일을 하러 나오는 나날이 며칠간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자 몸부림치듯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감을 해내 가니 사념이 일 새 없어 좋았다.

“아…….”

급하게 껍데기를 까느라 검지 손톱 끝이 부러졌다. 얼얼한 통각을 느끼는 순간, 의사 선생님이 떠올랐다. 게임기를 놓다가 손톱을 찧었을 때 큰일이라도 난 듯 넓은 손바닥 위에 제 손가락을 올린 뒤 꼼꼼히 여기저기를 살펴봐 주셨는데.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해교의 움직임이 멈추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실까. 잊고자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느닷없이 떠오른 지혁의 생각은 쉽게 떨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살펴봐 주지 않는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살며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뭐 하노.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여까지만 해라.”

해교가 망설이는 사이 할머니가 다가와 마당에 펼쳐 둔 일감을 걷어 갔다. 워낙에 일만 해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은 수없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고 산등성이 아래 너울대는 바다는 하염없이 평화로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작정 선생님이 보기 힘들어 도망 나왔는데 되짚어 보면 책임감 없는 행동이었다. 이렇게 느닷없이 진료를 중단해서 기껏 좋아진 몸이 다시 나빠지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나한테 진료받으려는 양성구유 환자가 줄을 섰어요.〉

아주 예전에, 진료를 거부하려 들던 자신에게 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분명히 저 외에도 많은 양성구유 환자가 대기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은 이제 저를 대신할 또 다른 환자에게 열심히 진료를 하시고, 또 전에 보았던 예쁜 여자분과 약혼식 준비도 잘, 아니면 어느새 마치셨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몸은 자신이 돌볼 수밖에 없었다. 해교는 할머니에게 들러 저녁 인사를 한 뒤 서둘러 그녀가 제게 내준 방으로 돌아왔다. 새벽같이 바다로 나가는 할머니의 일과 탓에 해교는 별채처럼 마련된 공간에서 머물고 있었다.

해교는 예전에 지혁이 유두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보지와는 달리 가슴은 자주 만져 주는 게 좋다고 한 말을 기억했다. 진료를 받지 못하는 대신 유두라도 매만지면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그가 알려준 대로 가슴에 자극을 주려 마음먹었다.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들어올 일은 없을 테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에 심호흡을 하곤 조심스레 옷을 탈의했다.

뽀얀 가슴의 정점은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최근 만져 주지 않아서인지 함몰된 유두가 옴폭 파인 채로 넓은 유륜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해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통통한 젖가슴 살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하아…… 으응…….”

긴장이 무색하게 경직되었던 몸이 순식간에 풀리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손으로 감싸니 적당히 차오르는 양감이 기분 좋아 해교는 저도 모르게 허벅지 사이를 맞붙인 채 몸을 배배 꼬았다. 차마 젖꼭지를 만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선 유륜 근처만 맴도는 손이 부드러운 살결 위를 푸욱, 짓눌렀다 떨어져 나갔다.

만져 주지 않은 유두가 서서히 고개를 들며 색을 붉혔고, 크기 또한 점차 부풀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눌린 알갱이일 때에 비해서는 제법 큼직해진 젖꼭지는 성감까지 예민해져 가슴 몽우리 주변만 만져 대도 직접적인 자극을 준 듯 야릇한 감각이 솟아났다.

오싹한 전율에 몸이 절로 떨려 왔다. 읏, 으응…… 해교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손가락을 뻗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돌기를 끼웠다. 그러곤 살짝 힘을 주어 유두를 쥐어짜 내듯 비틀자 동그랬던 유두의 모양이 짜부라지며 단숨에 열이 올랐다.

해교는 지혁이 유두 표면을 살살 굴리다가 예고 없이 꾸욱, 짓누를 때를 떠올렸다. 지혁의 거칠한 손가락으로 예민한 돌기를 간질이고, 비비면 가슴 끝이 저릿해지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던 그때를.

딱히 요령 없이 젖을 만지는 데 심취했는데도 곧 보지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펄떡대고 구멍 주변 근육이 수축하고 확장하는 감각이 선연해졌다. 바닥과 맞닿은 해교의 발가락 끝이 절로 곱아들었다.

“하아, 선생……흐으!”

젖꼭지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작하게 끓어오르는 기분 좋은 열감에 해교는 더더욱 적극적으로 양 손가락 사이에 끼운 젖꼭지를 쥐어짜 냈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가슴의 흥분감이 옮아 갔는지 젖통에서 뻗어나가는 푸른 핏줄이 사방에 번지고 어느새 보드라운 허벅지끼리 비벼지며 엉덩이가 들썩였다.

“흐응, 웃…….”

해교는 점차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고 거세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유두를 비볐다. 꽈악 압박을 준 상태에서 거칠게 비벼 오는 마찰까지 더해지자 젖꼭지 안에서 몽글몽글, 무언가가 튀어나올 준비를 하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전에도 느낀 적 있었다.

이렇게 뭔가가 나올 듯 말 듯 한 기분에 애간장이 녹다 보면 갑자기…… 그러니까…… 하으응…….

덜컹, 허리가 튀어 오르면서 붉어진 젖꼭지에서 질척한 점성의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솟아 나온 하얀 유즙은 방울방울 흘러 갈비뼈를 지나며 뜨끈하게 몸을 달구었고, 막 젖물을 쏘아 대는 유두를 비롯한 젖가슴은 팽팽하게 부어오른 채로 잘게 떨렸다.

“아으, 하, 으읏…….”

젖꼭지를 잡고 비틀던 손가락은 자극으로 인해 금세 힘이 빠졌다. 해교는 순식간에 떨어진 손가락으로 간신히 바닥을 짚어 몸을 받쳤다. 바닥을 짚은 손목이 파들파들 균형을 잃을 듯이 경련했다.

살짝 상체가 앞으로 쏠리게 되었지만 한번 터지기 시작한 유즙은 멈출 새 없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우유에 비해서는 묽으나 결코 투명하지 않은 액체는 질질 흘러나오다 못해 숙어진 배꼽에 고여 들기 시작하였다.

옴폭 파인 일자 배꼽에 담긴 하얀색 젖물은 계속해서 고이는 풍부한 유즙 때문에 흘러넘쳐 사타구니 사이로 길을 내었다. 해교가 맞닿은 허벅지 사이를 살짝 떼어 내자 쩌걱, 질펀한 체액이 얽혔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으응, 아, 아…….”

어느덧 해교가 엉덩이를 대고 앉은 노란 장판이 깔린 방바닥에는 찐득찐득한 액체가 불투명한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가슴을 타고 흐른 젖물 때문에 물기가 어린 하얀 몸은 점차 진분홍빛으로 달아올랐고, 느릿느릿 점성 있는 액체가 몸 선을 타고 흐를 때마다 이와 맞닿은 살결에서 찌르르 전류가 일었다.

해교는 살며시 눈을 감고선 미묘하게 샘솟기 시작하는 감각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하아, 하아, 뜨거운 숨을 몰아쉴 때마다 온통 컴컴하기만 한 시야 속에서 색색의 불빛이 점멸하듯 깜빡거렸다.

자극을 받은 하체가 움찔움찔,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처덕처덕 묻어나는 우유가 매번 다른 방향으로 흘러내리며 바닥을 난잡하게 만들었다. 후으…… 후…… 어느덧 방 안은 해교의 입술 새에서 흘러나온 열기 가득한 숨과 젖꼭지에서 흘러나온 유즙으로 인해 축축하고, 습하게 달아올랐다.

“으읏, 아까워…….”

왜일까. 자꾸만 새어 나가는 우유가 아까웠다.

삽시간에 든 생각에 해교가 혀를 쭉 빼어 냈다. 고개를 숙이고 통통한 가슴살을 쥐어 보았지만 좀처럼 우유가 흘러나오는 젖꼭지에 쉽게 혀가 닿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당기면 젖꼭지 끝에 닿을 것도 같은데.

하얀 손가락을 타고 모유가 조르륵 흘러내렸다. 붉은 혀를 좀 더 뾰족하게 세워 빼내고, 말랑말랑한 살점을 쥔 손바닥에 좀 더 힘을 주어 끌어 올렸다. 어떻게든 닿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마침내 젖꼭지 끝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하읏! 자의로 젖가슴을 애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파드득 튀어 올랐다. 말캉한 살덩이를 할짝거리자 혀끝에 달큼하고 뜨끈한 액체가 스몄다.

단지 우유를 핥고 삼키는 것뿐인데도 어느덧 조그만 자지는 바짝 발기해 유즙으로 점철된 아랫배를 두드릴 듯 꺼떡이고 있었고, 위에서 터진 젖물에 지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의 보짓물이 보지 사이를 흥건하게 적셨다.

온갖 종류의 체액이 섞인 하체가 제멋대로 수축을 거듭하며 벌름거렸다. 텅 빈 구멍 안을 가득 채워 달라는 듯 뻐끔거리는 두 구멍은 공들여 안을 적신 것처럼 열이 올라 흐물흐물 풀어져 있었다. 흥분으로 부푼 육벽이 박동하는 감각이 선명했다.

물을 흘려 대는 보지를 조이기 위해 엉덩이에 바짝 힘을 주자 보지 구멍뿐만 아니라 항문 구멍 역시 함께 좁아 들었고, 가슴에서 오는 자극 때문에 힘이 풀리자마자 참고 있던 물이 보지를 타고 왈칵왈칵 흘렀다.

회음을 타고 흐른 물을 빨아들여 머금은 애널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옴찔거리며 입구를 씹어대 보지에서 배어 나온 물이 역류해 쏟아져 나왔다. 보지와 항문에서 흘러내린 물은 회음부에서 다시 합쳐져 뚝, 뚜욱 끈적하게 바닥을 적셨다.

“하읏, 읏, 으응…….”

뱃속이 뜨거웠다. 꾹꾹 신음을 눌러 담아도 자꾸만 교성이 샜다.

마침내 열기 가득한 머릿속이 난잡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 굵직한 귀두가 촘촘하게 조인 주름 사이를 벌리며 구멍 속으로 밀려들었다. 찢어질 듯 팽팽한 구멍을 통과하고 들어와서는 간지러운 곳을 주욱 긁고 느릿하게 빠져나간다.

그러곤 또다시 얇은 점막을 꿰뚫고 거세게 좆 대가리를 삽입하는 짓을 거듭했다. 거대한 부피감이 얇은 내장을 짓누르고 도톰한 정점을 파고들면 힉힉, 붉은 잇새에서 뜨거운 숨이 마구 새어 나온다.

꾸역꾸역 좁은 내벽을 밀어내며 진입했다가 단숨에 자지를 뽑아내면 뜨거운 살덩이에 들러붙은 쫀득한 점막이 딸려 나오다 오그라들었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언제 좁았냐는 듯 성기 크기에 알맞게 벌어진 구멍이 자글자글 들끓기 시작했다. 거대한 자지 모양대로 길이 난 것이다.

하아……. 상상만으로도 달아오른 구멍이 욱신거렸다.

해교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당장 달군 쇠 같은 귀두를 억지로 구멍에 밀어붙여 푹, 제 안을 가르고 싶었다. 뜨거운 살 기둥을 쭉쭉 빨아올리고 싶었다.

“아, 읏…… 넣고 싶어어…….”

해교가 다급하게 오른손을 뻗어 하얗고 말랑말랑한 제 엉덩이 살을 매만졌다. 보드라운 볼기가 누르는 대로 푸욱 들어가며 떨려 왔다.

조금만 더 손가락을 내리면 익히 잘 아는 쾌감을 선사하는 구멍에 손가락 끝이 닿을 수 있었다. 손끝으로 벌름거리는 구멍을 더듬고 마구잡이로 비벼 대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거세게 허리를 쳐 올릴 때만큼의 자극은 받지 못하겠지만 손가락 4개쯤을 모아 한꺼번에 구멍 안에 푹, 푹 쑤셔 넣으면 묵직한 자지가 주는 압박감의 절반 정도는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당장 손가락 끝만 대어도 저릿저릿할 것 같은데.

기대감에 들뜬 보지에서 미끌미끌한 애액이 계속 흘러나오고, 흥분한 보짓살이 경련하듯 요동쳤다. 항문 주변을 맴돌던 손가락의 방향을 틀어 쫀쫀한 보짓살에 쑤셔 넣고 으깰 듯 휘젓고 싶었다.

“흐으, 흐……. 아…… 안 대애…….”

선생님이 절대 혼자서는 보지를 쑤시지 말라고 하셨다. 그건 아마도 똑같은 구멍인 뒷보지에도 해당되는 말일 터였다. 해교는 당장에라도 손가락을 구멍 안에 처박고 추삽질하듯 파고들고 싶은 욕구를 참아 내기 위해 애써 주의를 젖가슴으로 돌렸다.

미련이 남아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려는 양손을 끌어 올린 해교는 포동하게 살이 오른 가슴 아래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그러곤 사타구니 사이와 바닥과 맞닿은 종아리, 그리고 엉덩이까지 몽땅 젖물로 적신 상태에도 불구하고 다시 젖을 짜냈다.

하, 아앙……. 애액과 유즙이 한데 고여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점차 헐떡이는 소리가 짙어지며 적나라한 교성이 사이사이 스며들었고, 이내 해교는 가슴이 선사하는 쾌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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