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거야. 적당한 때 데리러 가면 돼. 지금은 괜히 따라나설 때가 아니야.”
도윤이 나직이 읊조렸다. 듣기에 따라 연제에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혹은 스스로에게 암시하듯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말을 끝낸 도윤이 고개를 비틀어 연제를 보았다.
연제는 한참 동안 해교가 사라진 빈 현관을 바라보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욱하게 퍼지는 뿌연 담배 연기가 눈앞을 가득 메우곤 도윤과 연제 사이를 갈랐다.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도윤을 응시하던 연제가 담배를 문 채 거실로 향하더니 소파에 앉았다.
“에휴. 시발…….”
연제는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상체를 기댄 채 재가 떨어지는 것을 상관 않고 계속해서 담배를 피웠다.
[오후 14:57 오늘 중에 연락 올 수도 있어요. 전에 말 맞춘 대로만 하세요.]
도윤은 혹시 몰라 확인차 문자 하나를 보내 두고도 조금 답답했던지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경직된 표정은 풀릴 새 없고 자꾸만 입 안이 말라 왔다. 집 안에는 조용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간다.”
연제는 거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아무렇지 않게 담뱃재를 털다 남은 연초를 비벼 껐다. 몇 모금 빨지 않은 꽁초가 연제의 손길에 따라 뭉개진 채 쉬익,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 * *
보증금도 없는 집에 한 번에 몇 달 치 월세를 입금해 버리는 도윤에게 집주인은 금세 넘어갔다. 딱히 머리 쓸 것도 없이 돈 몇 푼에 돌아서 버리는 집주인을 보며 생각보다 일이 쉽게 돌아가는 것 같아 도윤은 만족했다.
해교에게 잘 가라는 말을 속 편하게 꺼낸 것 역시, 곧 다시 볼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랬는데…….
분명히 굳게 잠겨 있는 집 앞에서 절망한 채 갈 데가 없어 쪼그리고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타이밍 맞추어 가서 달랜 후 다시 해교를 데려오면 되는, 간단하고 명료한, 계획이랄 것도 없는 계획이었다.
일단 나가고 싶다고 해서 막지 않고 내보내 줬고, 나가 봐야 기댈 곳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할 일 없이 제집에서 머무를 거라고.
하지만 해교는 도윤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기다려도 연락이 없는 해교 때문에 슬며시 찾아가 본 그의 집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관문 아래 떨어져 굴러다니는 색색의 마카롱만이 도윤을 반겼다.
“전화도 안 받는데? 너한테 무조건 연락할 거라더니. 씨발. 이게 웬…….”
“…….”
벌써 수십 통 전화를 걸어 댔지만 먹통이라도 된 듯,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기계의 음성만 재생되어 흘러나올 따름이었다. 연제가 잔뜩 미간을 구긴 채 신경질적인 손길로 휴대폰을 제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도윤. 너네 집 덕 좀 보자? 차해교 어디 갔는지 알 수 있을 거 아냐. 대신 이번에도 빼돌리면…… 그땐 이판사판일 줄 알아. 절대 가만히 안 있어.”
연제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뜬 채로 짓씹듯 중얼거렸다. 협박에 가까운 말을 들은 도윤이 눈매를 살짝 찌푸리더니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즉흥적이었다.
“알아보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딱 거기까지야.”
“뭐?”
“형 의지로 나간 건데 억지로 끌고 올 순 없잖아.”
“야. 네가 어차피 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라며. 다 준비해 둔 게 있는 것처럼 으스대더니. 이제 와서?”
“그래. 그럴 줄 알았지. 그건 내 패착이야. 인정해.”
“그러면 이럴 게 아니라!”
불같은 성격의 우연제는 소재 파악한 걸 알려 줬다간 아마 하루도 못 참을 게 뻔했다. 그리되면 의도와는 반대로 더더욱 우연제가 아닌, 자신의 품에 파고들게 되리란 걸 예상하지 못하는 건지.
억지로 끌고 올 거면 끌고 와 보든가. 머리가 나쁘진 않은데 이성보다 늘 앞서는 감성이 연제의 큰 결점이란 생각을 한 도윤이 희미한 웃음을 내보이며 옅게 웃었다.
“고작 하루 가지고 뭘……. 형도 생각을 정리하고 싶겠지.”
지나치게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낮에 차해교가 집을 나설 때부터 딱, 저 정도로 감정의 변화가 없어 보였다. 겨우 저따위 관심만 주고 말 거면서 그동안 차해교를 숨기고 있었단 사실에 화가 난 연제가 대뜸 도윤의 멱살을 붙잡았다.
“하루……? 시발. 야. 돈도 없고 백도 없는 애가 고작 하루라도 어디에 가 있는데? 막말로, 너랑 나 같은 새끼 하나만 우연히 길 가다 만나기만 해도!”
지나치게 흥분한 연제를 보며 도윤이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알아볼 거니까 진정해. 우연제, 내가 여태껏 네가 하는 짓 다 참아 준 건 형이 집에 있어서였어. 이제 한 공간에 없으니 나도 선 넘으면 안 참아.”
“먼저 선 넘은 게 누군데.”
번득이는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둘 중 누구 하나도 질 생각이 없는 듯 팽팽하게 맞선 시선은 한참 동안 비틀린 채 서로를 잡아먹을 듯 쏘아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적대감 가득한 눈빛은 도윤이 제 멱살을 쥔 연제의 손을 쳐 내고서야 마침내 어긋났다.
애초에 집을 나가는 순간부터 보고만 받지 않았다 뿐이지 해교의 동선은 도윤의 손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걸 우연제에게 알릴지, 그저 혼자 알고 있을 지 여부를 고민하던 중이었지만…….
역시 이렇게 날뛰는 걸 보니 우연제에게 알려 주는 게 좋을 성싶었다. 우연제가 참고 기다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너랑 나 같은 새끼를 만나면? 너 한정이겠지. 우연제.”
자폭해라, 연제야. 그럴수록 내 위치는 굳건해질 테니까. 도윤이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끌어 내렸다. 아무래도 승리는 제 손에 떨어질 듯했다.
* * *
[겨울이 되면 길고양이들은 한결 더 사정이 나빠집니다. 배고픔에 더해 얹어지는 추위 때문인데요. 따라서 급격히 날이 추워지면 길거리에서 고통에 떨고 있는 고양이들을 어렵지 않게 많이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지혁과 나란히 앉아 TV에서 방영되는 고양이 다큐멘터리를 보던 해교가 별안간 한숨을 내쉬었다. 지혁도 얼마 전 겨울에 대해 언급했고, 다큐멘터리에서도 겨울을 언급하니 새삼 집 안에만 있어 신경 쓰지 않았던 계절의 변화가 느껴짐과 동시에 메리에 대한 걱정이 슬며시 고개를 든 것이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면 많이 추울 텐데.
메리가 동네에 등장한 것은 올봄으로 작년 겨울을 나는 메리의 모습은 본 적이 없어 이번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저도 여기에 얹혀사는 주제에 메리에 대한 걱정을 티 낼 수 없던 해교는 조용히 재차 한숨만 내쉬었다.
“무슨 걱정 있어요?”
지혁이 기민하게 이를 알아채고 말을 걸었다. 최대한 걱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 티가 났나 보다. 당황한 해교가 재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도리질하였다.
“아니요, 아니에요.”
“으음. 내 앞에서 숨기는 거 없으면 좋겠는데……. 역시 너무 큰 바람인가 보네. 이럴 때마다 난 내가 느끼는 우리 사이의 연대감과 실제 차해교 씨가 느끼는 연대감 사이에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하아.”
지혁이 해교가 내뱉은 한숨보다 더욱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초반과는 달리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꽤나 상처받은 것 같은 지혁의 표정에 해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의사 선생님을 속상하게 하려고 한 의도는 절대 아니었는데.
“아…… 그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가는 길고양이가 있는데요, TV를 보니 생각이 났어요. 겨울에 본 적은 없어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기서 말하는 걸 보니까 정말 겨울이 되면 어쩌나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한동안 계속 못 만나기도 했고…….”
“그럼 잘 지내고 있는지 한번 보러 갈까요.”
의도적으로 해교를 이 집에 가둬 둔 지 어언 1달이 넘은 상태였다. 다행히 본인은 현 상태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도, 의심을 하지도 않는 것 같기는 했지만 길고양이 걱정을 대충 흘러 넘길 순 없었다. 혼자 끙끙 앓으며 고양이 생각을 하게 두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안 되겠다며, 나가 봐야겠다고 하면 골치 아팠으니까.
혹여라도 있을 수 있는 사고는 미리 예방해야 했다. 말이 나온 김에 자신과 동행해 그간 하지 못하던 외출과 고양이 확인을 시켜 주는 게 좋을 듯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지혁이 따라오라는 듯 손을 뻗었다. 우물쭈물하며 내민 손을 어찌할지 모르는 해교에게 지혁이 조금 더 각도를 낮추어 손바닥을 내밀자, 해교는 쭈뼛쭈뼛 지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조금 어색하게 손바닥 위에 얹어진 조그마한 손가락을 고쳐 잡으며 지혁이 해교의 손과 제 손을 깍지 끼었다. 그러곤 계속해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확실히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집 안에만 있느라 의식하지 못한 사이, 정원 곳곳의 나무들이 어느덧 한층 어둡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바람도 꽤나 찼다.
이런 걸 예감한 듯 지혁이 준비해 둔 두툼한 안감의 후드 집업과 바지는 살갗을 에는 바람이 감히 천을 뚫고 들어올 수 없게끔 단단히 막아 주었다.
다소 쌀쌀한 바람과는 다르게 햇살은 반짝반짝 금빛을 띠고 해교를 감싸 안았다. 모처럼 맞는 싱그러운 햇살에 기분이 좋아진 해교가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린 채 지혁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환한 햇살을 등지고 선 지혁은 오늘따라 더욱 훤칠해 보였다. 마치 만화책 한구석을 찢고 나온 듯한 모습에 괜히 배 속이 간지러워진 해교가 멋쩍은 듯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이상한 신체 반응이 오는 스스로를 타박하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기도 했다.
영문을 모르는 지혁은 그러다 피가 난다며 제 아랫입술을 감쳐문 해교를 말리듯 기다란 손가락으로 입술을 한 번 눌렀다 뗐다.
부드럽고 연약한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떨어지는 서늘한 손의 감촉이 좋았다. 또 닿고 싶을 만큼.
얌전히 자신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해교가 귀여웠던 듯 지혁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이, 접히는 눈꼬리가 해교는 마치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비추는 초승달 같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배 속에 수만 마리의 나비라도 들어앉은 듯, 해교는 복부 근처가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는 한참을 달려서야 해교가 원래 살던 동네에 도착했다. 늘 깔끔하게 정리된 지혁의 집 안에만 있다가 다소 복잡하고 더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동네에 도착하니 해교는 어색한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가 이사 와 더는 제집이 아니라는 빌라 앞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다 늘 메리에게 밥을 주곤 했던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해교뿐 아니라 낯선 지혁까지 함께 있어서일까. 한참을 기다려도 메리는 나타날 생각을 않았다.
“저어, 선생님……. 괜찮으시면 차에서 잠깐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확실하진 않은데 고양이가 선생님이 계셔서 안 나오는 걸지 몰라서요.”
아무리 코앞에 차를 세워 놓았다 한들 해교 혼자 두고 차에 가 있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이 부탁을 거절할 핑계가 없었다. 지혁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지혁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카맣고 보송보송한 털 뭉치가 조심스레 해교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제가 알던 이가 맞는지 확인하듯 살펴보다 간만에 보는 그가 반가웠는지 꽤나 가까이 와선 고롱고롱 울어 댔다.
그간 밥을 굶지는 않았었는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야윈 모습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잘 지내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제집이 아닌 터라 그 무엇도 가지고 나오지 못한 해교가 아쉬운 듯 손을 뻗어 메리의 엉덩이 부근을 쓰다듬었다. 다음번에 올 때는 꼭 먹을 걸 가져와야겠다고 중얼거리면서.
한동안 엉덩이를 바짝 든 채로 해교의 몸에 제 몸을 비비적대는 메리를 차에서 본 지혁이 차 앞 유리로 상체를 바투 당겨 고양이를 관찰하였다.
그러니까, 차해교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있던 검은 봉지였다. 검은 봉지 실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동안 메리를 쓰다듬고 인사하던 해교가 아쉬운 듯 메리에게 손을 흔들며 지혁이 탄 차로 되돌아왔다. 지혁은 기다렸다는 듯 얼른 차 문을 열어 주며 해교의 탑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양이 간만에 보니 어때요? 잘 있던 거 같아요?”
“네. 다행이에요. 서로 안부 확인하는 친구 같은 애였거든요.”
친구는……. 학교를 그만둔 뒤 먹고살기 바빠 만들지 못한 존재였다. 조금이라도 더 고양이를 자세히 살피려 힐끔대는 해교를 응시하던 지혁이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차 문을 열었다.
“그럼 조금 더 봐요. 차해교 씨 친구라니 나도 궁금하네.”
여태 곁을 떠나지 않은 메리는 두 사람이 동시에 차에서 내리자 탐색하듯 주변을 맴돌다가 별안간 지혁에게 몸을 비볐다.
“우와. 선생님, 신기해요.”
“윽…….”
“메리가 선생님이 좋은가 봐요. 이렇게 치대는 거 처음 보는데. 고양이도 좋은 사람을 알아보나 봐요.”
시발. 지저분한 똥구멍을 갖다 대는데 이게 좋다는 표시라니…….
지혁은 자꾸만 똥구멍을 가져다 대는 고양이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차마 티 내지 못한 채 얼굴만 굳혔다. 그간 닦아 온 연기력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무용지물이 된 듯 먹혀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기는 메리를 바라보던 해교가 고개를 돌려 지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잠시 헛숨을 들이켜고는 작게 읊조렸다.
“선생님, 사실은 저는 아빠랑 둘이서만 쭉 오래 살았었거든요.”
여태껏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해교가 묻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건 처음인지라 지혁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더, 편히 이야기하라는 듯.
“근데 이제는 혼자예요. 아빠가 좀 멀리 가셨거든요. 갈 데가 없었는데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어…… 선생님 병원에 처음 간 날이요, 그날 청담동에 일 잡아 주신 아주머니가 은인처럼 느껴져요.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신 거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선생님한테는 더더욱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수천 번 말한 것 같았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조리 있게 말할 자신이 없어 그저 떠오르는 대로 제 감정을 나열하는 해교의 말을 지혁이 능숙하게 끊었다.
“감사 인사 들으려고 한 거 아니니까 그런 말은 안 해도 돼요.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나는 감사받을 일을 한 게 없어요. 모든 건 내가 하고 싶어서, 자의로 한 겁니다.”
정말이었다. 양심을 파고들자면 모든 일은 순전히 한지혁, 자신의 이기심으로 비롯되고 이어져 오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제가 하는 개수작질 면면을 순수한 호의로만 받아들이는 차해교에게 못 할 짓을 잔뜩 해 댄 탓에 지혁은 이런 분위기가 몹시 불편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지적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거를 반추하느라 말을 잇지 않는 지혁을 바라보다 해교가 무언가 떠올린 듯 제안을 해 왔다.
“어, 저, 선생님……. 여기까지 왔는데 저녁 먹고 들어가는 건 어떠세요?”
그다지 탐탁지 않은 제안이었다. 집에 가면 정해진 식단표대로 꼬박꼬박, 매끼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분배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모처럼의 외출에 들뜬 해교를 충분히 이해했다. 제가 살던 동네에 와서 추억에 잠기기도 했을 테고.
“괜찮으시다면 선생님께 저녁 사 드리고 싶어요. 저희 동네에 있는데,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가던 식당이라서요…….”
신나서 떠들던 해교가 아직도 생각에 잠긴 듯한 지혁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역시 허름한 동네의 허름한 식당은 싫으신 걸까. 큰 기대 없이 즉흥적으로, 넌지시 던진 말이었지만 막상 흔쾌히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금세 해교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가요. 맛있을 것 같아요. 궁금하네요.”
지혁이 심경을 티 내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로 응했다. 기운이 빠진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저 얼굴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 * *
특별할 것 없는, 동네마다 흔히 있을 법한 식당이었다. 종종 아버지가 기분이 좋을 때면 어린 해교를 데려와 전골 요리를 하나 시킨 뒤 본인은 소주를 마시고, 해교에게는 사이다 한 병을 시켜 주곤 했던 추억이 있었다.
한동안 오지 않은 해교를 알아보지 못한 식당 주인에게 작게 인사하고는 해교가 구석진 테이블로 지혁을 이끌었다. 이렇게 지혁과의 관계에서 제가 리드하는 적은 처음이라 살짝 들뜬 표정이었다.
“저희 만두전골 중짜 하나 주세요.”
상기된 표정의 해교가 주문을 마치고 지혁을 마주 보았다. 선생님이 이런 식당에 계시다니, 마치 합성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근래 본 것 중에 가장 신나 보이는 해교의 모습에 한 번씩 이 동네에 와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 지혁이 영문을 모른 채 해교를 따라 웃었다.
잠시 후, 보글보글 끓는 전골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이고 간단하지만 깔끔한 찬 몇 개가 딸려 왔다. 쌓인 앞접시를 능숙하게 지혁의 앞에 놓아 주곤 수저까지 전달하느라 정신없는 해교를 바라보던 지혁이 느닷없는 질문을 해 왔다.
“혹시 그간 집에서 지내면서 아쉬웠던 점이나, 더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건 없습니까. 나온 김에 해결하고 들어가죠.”
아침저녁으로 자신을 살피고 돌보아 주는 다정한 의사 선생님, 대궐처럼 큰 집에 시간 맞춰 대령되는 음식, 덥지도 춥지도 않게 유지되는 집 안 온도. 거기다 잔뜩 쌓인 게임과 만화책까지…….
여기서 더 필요한 게 있을 리 없었다.
“전혀요. 완벽해요. 천국 같아요.”
“천국……?”
되묻는 지혁의 눈빛에 웃음기가 어렸다. 천국 같으면 계속 자신의 집에서 살면 될 일이었다. 진료 놀이를 그만두려 하는 데에 청신호가 보인 것 같아 지혁이 그답지 않은 설렘을 느꼈다.
“천국 같으면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느끼길 바라요. 오래오래 지금처럼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이제 먹을까요.”
익숙한 음식이라 그런지 해교는 며칠 전 치킨을 먹을 때만큼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지혁은 이따금씩 그런 해교를 바라보며 속도를 맞추어 제 앞 그릇을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앞의 음식은 동이 났고 처음 집에서 나올 때 계획했던 때보다 꽤나 늦어진 시각에 지혁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제가, 제가 계산할래요! 하게 해 주세요. 제가 사 드린다고 했잖아요.”
지갑을 꺼내며 일어나는 지혁을 막아서며 해교가 카운터로 달려갔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퍽 고집스러운 표정이었다.
지혁이 힐끔 메뉴판에 적힌 음식 가격을 확인했다.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계좌에 있는 돈을 빤히 아는데 얻어먹자니 마치 자신이 불한당이 된 것만 같았다.
2차 정부 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현금을 건네주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생각을 마친 지혁이 입술을 휘고 웃었다.
“고마워요. 잘 먹었어요.”
* * *
지혁과 해교가 함께 지내는 집은 거의 조용했다. 간혹 해교가 소리 나는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거나 해서 간간이 울리는 소리 외에는 큰 소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게 일상이었다.
오늘은 그런 집에 느닷없이 오전부터 초인종이 울렸다. 주말에 밀린 집무를 보는 지혁 옆에 앉아 만화책을 들여다보던 해교가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 지혁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누가 왔나 봐요.”
“그러게. 같이 나가 볼까요?”
해교와 달리 태연한 모습이었다. 갸웃거리며 지혁을 따라나선 해교는 의외의 방문자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놓인 이동 장 문을 열자마자 슬금슬금 검은색 털 뭉치가 기어 나왔다. 메리였다.
“병원 들러서 기본 검진 시키고 데려왔어요. 다행히 건강에 이상은 없고.”
“고, 고양이랑 같이 있어도 돼요? 고양이 좋아하세요?”
당연히 싫다. 그걸 말이라고.
이 집에 차해교와 단둘이서 지내고 싶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도 추가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자신의 집에 머무르는 일 자체를 당연시할 수 있을까 궁리한 지혁이 생각해 낸 방법은 검은 봉지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당연하죠. 나도 안면 있는 고양이가 추운 거리에서 고생할 거 생각하니 자꾸 마음 쓰이더라고요. 원래 동물 애호가예요.”
개뿔. 동물의 털을 만져 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지만 지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술술 거짓말을 이어 갔다.
“우와아……. 선생님은 역시 대단하세요.”
감탄해 마지않는 해교를 바라보며 제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하는 지혁의 표정에 뿌듯함이 어렸다. 지혁과 해교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메리는 낯선 공간이 무서웠는지 소파 아래로 숨어 버린 채였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메리의 살짝 삐져나온 꼬리를 바라보느라 신이 난 해교를 뒤로하고 지혁은 서재로 향했다. 아무래도 고양이 털 때문인지 코끝이 간질간질했으나 티 낼 수 없었다.
다음 날, 지혁의 집 거실 창가에 캣 타워를 비롯한 고양이 물품이 잔뜩 설치되고 놓였다. 얼핏 봐서는 사람 집이 아니라 고양이 집으로 보일 만큼의 양이었다. 다행히도 메리는 모든 것이 저를 위한 것임을 알아챘는지 예상보다 빠르게 바뀐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지혁이 거실 소파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메리가 캣 타워에서 내려와 그를 쳐다보았다. 고요한 거실에서 시차를 두고 찬찬히 서로를 응시하다, 지혁이 먼저 팔을 뻗어 괜스레 바닥을 몇 번 두들겼다. 그 소리와 진동에 호기심이 생긴 듯 메리가 슬슬 지혁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오.”
딱히 반응해 줄 거라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의외로 애교 있게 구는 고양이가 신기해 지혁이 손을 뻗어 메리의 등을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자 언제 다가왔었냐는 듯 단숨에 메리가 방향을 바꾸어 홱, 도도하게 그의 팔을 친 뒤 멀어져 갔다.
“…….”
저 요망한 검은 봉지가.
집에 들어왔으니 볼 장 다 봤다는 것 같았다. 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메리를 쏘아보았다. 메리는 지혁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자리에 앉아 제 털을 핥았다. 무척 얄미웠다.
“선생님, 뭐 하세요? 메리야, 밥 먹자.”
어느덧 고양이 밥을 챙겨 온 해교가 지혁과 메리에게 다가왔다. 무언가 탐탁지 않은 표정이던 지혁의 낯은 금세 바뀌었다. 고양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사람을 경계했었냐는 듯 미야오, 간드러진 소리를 내며 해교의 종아리에 제 몸을 비비적거렸다.
저게 진짜……. 마치 지혁을 경쟁자로 여기기라도 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종아리 가득 제 체취를 남기겠다는 듯 바지런히 몸을 비벼 대는 고양이를 한참 지켜보던 지혁은 손을 뻗어 해교의 허리를 감싸고 제게로 찰싹 끌고 왔다.
“야옹.”
기댈 곳이 사라진 메리가 작게 울며 떠나간 다리를 찾았다. 그 모습을 유유히 내려다보며 지혁은 건방진 고양이를 향한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미소 속에 숨긴 지혁의 언어를 알아들은 듯 메리가 꼬리로 툭, 지혁의 얼굴을 치더니 캣 타워 꼭대기로 올랐다.
아오, 저게……. 지혁은 놀라 바라보는 해교와 눈을 맞춘 뒤 괜찮다는 듯 눈꼬리를 휘어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인위적인 미소였다.
지혁의 집에 군식구가 하나 더 늘자 해교의 일상은 조금 달라졌다. 온종일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만화책을 보는 데에 한정되었던 틀에서 메리와 놀아 주는 일이 추가된 것이다.
새로 추가된 일은 퍽 비중도 컸다.
그러다 보니 지혁은 해교를 집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 검은 봉지를 들여놓긴 했지만 외려 제가 저지른 일을 후회하기도 했다.
일하는 와중에 종종 들여다보곤 하는 CCTV 속 해교는 더 이상 소파에 늘어져 있거나 하지 않고 바쁘게 메리와 놀고 까르르 웃어 대곤 했다. 나쁘지 않은 변화였지만 채신머리없게 고양이에게 질투가 났다.
“선생님, 다녀오셨어요?”
메리와 놀다가 금세 몸을 돌려 제게 뛰어오는 해교를 본 지혁이 옅게 웃음 지었다.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기만 했던 지혁의 표정을 단번에 풀어지게 하는 싱그러운 미소를 띤 해교는 아침과 같이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응. 다녀왔어요. 잘 있었죠?”
“네에. 선생님. 오늘은요, 메리가 갑자기 우다다 뛰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가 봤더니요, 거기에 뭐가 있었는지 아세요? 글쎄…….”
쫑알쫑알 종일 고양이와 있었던 일을 터놓는 해교를 바라본 지혁은 금세 제 마음을 바꾸었다. 고양이가 있어서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닌 듯도 했다. 비록 저에게는 곁을 잘 내어 주지 않는 건방진 고양이지만 해교가 그로 인해 심심치 않은 하루를 보낸다면 달리 봐 줄 의향도 있었다.
* * *
지혁은 오전 진료를 마치자마자 휴대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여덟 분할이 되어 집 안을 비추는 CCTV 화면 속에서 거실에 앉아 있던 조그만 몸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이미 준비해 둔 점심 식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냉장고를 뒤져 각종 채소를 꺼내는 걸 보니 오늘의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 준비해 둔다고 했던 게…….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짚어 보니 아귀찜이다.
생선류도 잘 먹는다고 생각해 딱히 요리를 맡은 사람에게 언질하지 않았는데 역시 좀 올드한 메뉴 선정이었나 보다. 저녁에 집에 가면 은근히 물어보고 식단표에 반영하게 해야겠다.
지혁은 어느덧 능선을 그려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한 채 꼬물거리는 해교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아쉽지만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닫으려던 찰나, 지지직거리며 화면이 멈추고 바삐 움직이던 해교 역시 멈추었다. 순식간에 경고하듯 깜박이는 파란 불이 화면 전체를 덮어 내렸다.
지혁은 곧바로 미간을 구기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대는 사외 이사직을 수락한 결과로 생긴, 요즘 들어 숨 쉬듯 통화하는 수행원이었다.
“화면상 파란색 불이 들어오면서 영상이 멈췄는데.”
- 아, 죄송합니다. 그러잖아도 현재 수리 중인데 통신 선로 서버에 오류가 생겨서 작동에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걸 지금에야 알립니까.”
- 정말 죄송합니다. 외부 침입 시에 출입을 통제하고 긴급 출동하게끔 하는 기능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집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자동 잠금 대신 수동 방식으로 작동되어 그 부분이…….
“아니, 씹. 그걸 말이라고.”
- 저녁 시간 전에는 시스템 고쳐 놓는다고 합니다. 고쳐지자마자 보고드리겠습니다.
“하아…….”
어차피 고양이도 같이 지내는 마당에 해교가 뜬금없이 집 밖으로 나가려 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간 집에서 지내면서 느낀 바가 있으니 문고리에 손을 올릴 일은 없을 테고, 가장 중요한 치안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으니 반나절 정도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일하는 사이사이 그를 지켜보는 즐거움은 포기해야겠지만.
도처에 CCTV가 널린 집에 간 크게 대낮부터 찾아오는 미친놈은 없을 테니, 여기서 경거망동하지 않고 참아야 했다. 무엇보다 잠시 후 있을 일을 위해 오후 진료까지 조금 미뤄 둔 마당에 직접 집에 갈 수도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고, 고쳐지면 바로 보고하세요.”
- 예, 알겠습니다.
K 메디컬 장녀와 동생 지헌의 약혼식 전, 그녀를 소개받기로 한 날이었다. 거의 허울뿐인 이사로 지헌의 사람들을 마음껏 부리고 있는 터라 이것까지 거절하기엔 꽤나 양심에 찔렸다.
지혁은 평소보다 넉넉하게 빼 둔 점심시간에도 불구하고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진료 시간 늦춰 뒀으니 오늘은 여유롭게 식사들 해요.”
“네, 원장님. 잘 다녀오세요.”
* * *
해교는 캣 타워 위에서 가르릉거리고 있는 메리를 올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이 저뿐만 아니라 메리까지 거둬 주셨는데 아무것도 안 해 드리고 있자니 내내 마음에 걸려 고민이 이어졌는데, 그 고민을 조금이라도 덜 방법이 생각나서였다.
이렇게 큰 집에 그렇게 큰 병원까지, 거기다 씀씀이까지 생각하면 결코 돈으로 부족하진 않은 의사 선생님께 어떻게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해교는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보답을 계획했다. 바깥에서 사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지혁의 말에서 힌트를 얻은 터였다. 줄곧 생각만 해 온 일을 실천하려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냉장고에 재료는 다 있던 것 같은데…….”
주방에 가 냉장고 문을 여니 각종 재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해교는 평소 지혁의 식성을 생각하며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요리 몇 가지를 떠올렸다.
소불고기, 어묵볶음, 달걀찜……. 화려한 요리는 아니지만 도시락에 넣을 수 있으면서 선생님이 잘 드실 만한 메뉴 몇 가지를 고른 뒤, 오랜만에 팬을 쥐고 냉장고에서 꺼낸 재료들을 이용해 요리를 시작했다.
주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자 호기심이 생긴 메리가 어느덧 캣 타워에서 내려와 해교의 곁을 뱅뱅 맴돌았다. 해교는 그런 메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몇 번 쓰다듬어 주다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사료를 사 주시긴 했지만 너, 간식이 없구나.”
고양이 간식이라니. 매번 제 끼니와 더불어 메리의 끼니도 겨우겨우 챙겨 주는 게 다라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확실히 지혁의 집에 얹혀살면서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생긴 듯했다.
“음. 내가 나갔다 오면서 네 간식도 사 올게.”
의사 선생님에게 2차 연구 지원금을 한가득 받았으니 오늘 외출하면서 조금 꺼내 돌아오는 길에 메리의 간식을 사다 주면 좋을 것 같았다. 해교의 말을 알아들은 듯 메리가 요리를 하는 그의 종아리에 치대며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요리를 하는 과정이 심심할 새 없었다.
부산스레 움직여 만들어 낸 요리를 도시락 통에 나누어 담는 해교의 마음은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해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2층에 올라 드레스룸에 걸린 옷 중에 하나를 골라 입었다.
양털 플리스에 둘러싸이자 평소보다 몸이 더 볼품없어 보였다. 드레스룸 한편에 있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작은 체구가 불만스러워 입을 삐쭉거리던 해교는 문득 얼마 전, 여기서 이루어졌던 일이 생각나 하던 짓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지금 눈에 보이는 홀로그램 버튼을 누르면 옷장 전체가 거울처럼 변했었다. 신기하게도. 해교는 눈앞의 녹색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가 보려다 제 뺨을 가볍게 두들겼다.
“변태……. 요즘 자꾸 왜 이래…….”
얼른 사념을 털어 내고 2층 구석방에 들러 휴대폰을 챙겼다. 오랜만에 나가는 김에 휴대폰 충전기도 사 올 요량이었다.
한쪽 주머니 안엔 지혁에게 받은 현금 일부를 고이 접어 넣고 한쪽 손엔 그에게 전달할 거대한 도시락 통을 든 채로 단단히 준비를 마친 해교가 심호흡하며 현관문 앞에 섰다.
이 집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을 열다 실패한 이후로 좀처럼 문고리를 쥔 적이 없었는데. 설마 또 안 열리진 않겠지. 해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묵직한 문고리를 붙잡고 돌렸다.
철컹,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그새 비가 오는지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간 다시 열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정말 그날따라 힘이 들어가지 않아 열리지 않았었나 보다. 매끄럽게 열리는 현관 문고리를 쥔 해교가 바로 앞발치까지 쪼르르 쫓아 나온 메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현관 옆에 놓인 우산꽂이에 꽂혀 있는 우산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마지막으로 나왔을 때보다는 날씨가 많이 추웠다. 팔이 휘청거릴 만큼 커다란 검은색 장우산을 편 뒤 현관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다시 한번 꼼꼼하게 확인했다.
거대한 대문마저 물 흐르듯 열리고, 한 발 내딛는 순간, 불쑥 튀어나온 음성이 해교의 신난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형, 여기서 뭐 해요. 얼굴 보기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갈라진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해교가 서서히 우산 손잡이를 들어 올리곤 제 앞을 막아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올려다봐야 마주칠 수 있는 눈동자는 핏발이 선 채로 번뜩이고 있었다.
* * *
차해교가 뻔히 남의 집에 머무는 걸 알면서 초연한 모습의 이도윤과 그 곁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치미는 충동을 참아 내는 일은 힘들었다. 마냥 기다리자니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왔다. 우연제 성격에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현재 차해교와 함께 산다는 남자에게 특이점은 없었다. 탯줄 잘 잡고 태어나 무난하게 개원해서…… 어? 빠른 속도로 제 손에 들린 서류를 훑어 내리던 연제가 짧은 정적 뒤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지혁. 가족 관계…… 한지헌? 야. 의료 재벌에다 이름이 한지헌인 게 내가 아는 한지헌 말고 또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
“……동일인 맞아. 이 사람, 선배님 친형이더라고.”
그러니 한지혁은 결코 평범한 의사는 아니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음습한 짓이라도 가능할 법했다. 연제가 도윤을 힐긋 바라보며 짜증스레 서류를 넘겼다.
“존나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아는 사이란 거야? 애초에 데리고 있단 거 자체가…….”
“진료 기록이 남아 있는 걸로 봐서는 병원에 갔다가 만났겠지. 선배님이랑 다르게 자기 병원 하나만 운영하고 있어.”
“시발. 보지 달린 새끼가 비뇨기과를 갔다고?”
“……다른 성기도 있긴 하니까.”
연제의 말에 도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괸 채 노는 손으로 볼펜을 딸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제가 의자에서 일어나 걸어 둔 외투를 껴입었다.
이대로 켜지지 않는 휴대폰이 켜지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과 난데없이 나타나 제 감정을 그대로 쏟아붓는 것,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느 쪽을 고를지는 연제에게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연제는 결국 도윤에게서 받아 낸 정보로 기어이 지혁의 집을 찾았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체 뭐야.”
매일 아침, 저녁 시간대에 규칙적으로 한지혁이라는 인물이 대문을 여닫는 것, 그리고 가사 도우미로 보이는 사람이 새벽 시간대에 오고 가는 것 외에는 도통 사람의 출입이 없는 집이었다.
정말 이 집 안에 차해교가 있는 건가. 이도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준 게 맞나. 계속 의심을 하면서도 연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지혁의 집 앞을 맴돌았다.
해교가 여기 머무른다손 친다면 집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 상황이 수상해 자꾸만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호시탐탐 노리는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연제는 축여 주지 않아 버석 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CCTV 사각지대로 보이는 곳에 세운 차 안에서 시간을 죽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무작정 지혁의 집 앞에서 시간을 보내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곤 하는 게 루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나날이 흐른 뒤, 마침내 해교가 지혁과 함께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제는 골목을 울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약간 내려 두었던 차창을 좀 더 아래로 내리며 운전석에 느슨히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자동차 앞 유리 너머에 그토록 다시 보고 싶었던 차해교가 보였다.
걱정과는 달리 잘 지냈는지 발그레한 혈색이 좋아 보였다. 막무가내로 차에서 내려 다가서고 싶었지만 도윤이 넘겨준 보고서에 나와 있던 인물이 바짝 옆에 붙어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숨이라도 몰아쉬었다간 눈앞의 장면을 놓칠까, 잔뜩 긴장한 연제가 가만히 해교를 주시하였다.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 해교는 지혁을 향해 살갑게 웃음 짓고 있었다.
저 웃음은 뭔데……. 자신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눈꼬리가 반달을 그리며 접혀 있었고 저와 있을 때는 웅얼거림밖에 내뱉지 않던 도톰한 입술이 부지런히 꼬물거리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앞이면 늘 바짝 긴장해 있는 것은 알았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꽤 많이.
그렇게 연제는 바로 앞에 있는 해교에게 손을 뻗지 못한 채 해교가 지혁과 외출에 나서는 일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엿같았지만 어쨌든 한지혁의 집에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언젠가는 한지혁 없이, 차해교 혼자 집 밖으로 나오는 일도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새벽에 도우미가 퇴근하고 사라졌고 한지혁은 아침에 출근을 했다. 평소 패턴으로 분석하자면 지금 집에 있는 건 차해교 혼자일 게 분명했다.
연제는 언제 나올지 모르는 해교를 기다리며 주야장천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쏟아지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기다리던 해교를 만난 참이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긴 했으나 해교는 전과는 달리 단단히 겁을 먹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연제의 음성에 살짝 놀란 듯한 움찔거림이 반응의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즈음 노력한 것이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던 듯했다. 연제가 심호흡하듯 숨을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사람 말려 죽이려고……. 하……. 휴대폰은 왜 꺼 놨어요?”
“아, 그게, 휴, 휴대폰 충전기가 없어서……. 근데 어떻게 여길…….”
“휴대폰 충전기? 그걸 지금 핑계라고 대는 거예요?”
“진짜예요. 충전기가 없어서 충전을 못 했어요. 그런데 진짜 여기…… 어떻게 온 거예요?”
몇 날 며칠을 미친놈처럼 기다려 겨우 잡은 기회였다. 지금 이대로 보내 버린다면 언제 또다시 이야기할 틈이 생길지 몰랐다. 연제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잘못했어요.”
“……?”
“잘못했어요, 형…….”
“갑자기 무슨…….”
“형한테 한 거, 다. 다 잘못했어요. 정말 반성하고 있으니까 이딴 집에서 나오면 안 돼요? 정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미칠 것 같아.”
연제가 힘겹게 침을 삼키며 한 발 다가섰다. 손을 뻗으려 하다 행동을 멈추곤 해교의 허락을 기다리듯 양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을 닦아 내 봤자 금세 쏟아지는 비로 다시 얼굴이 젖어 들었다.
“하…….”
이대로 우연제에게 우산을 씌워 주지 않았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한 우산 속에 들어오란 말은 도저히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교는 어쩔 수 없이 우산을 훌쩍 높이 들며 연제에게로 기울였다.
“비가 많이 와서……. 마, 만져도 된다는 말은 아니에요…….”
혹시라도 연제가 오해할까 걱정되었던 해교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
벌써 조우 후 몇 번째 이어지는 사과인지 몰랐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자꾸 사과는 왜 하는 건지, 찜찜한 일투성이긴 했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순 없었다. 해교가 고개를 저으며 연제에게 되물었다.
“차는 어디에 있어요?”
데려다줄 심산이었다. 여전히 좋은 감정은 생기지 않았지만 해교는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 비를 맞고 있는 꼴을 볼 만큼 무신경한 성격이 아니었다. 이대로 두고 갔다간 하루 종일, 두고두고 생각나 마음을 불편케 할 테니 차라리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나았다.
“데려다주게? 나 보내고 형은 어디에 가려고.”
실랑이를 하려니 진이 빠졌다. 이미 도시락을 만드느라 온몸의 힘이란 힘은 다 뺀 채였는데.
해교는 이제 연제가 자신을 해할 생각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일까. 평소보다 짜증스레 대답이 흘러나왔다.
“상관할 일 아니잖아요.”
“내가 상관할 일 아니라고? 그럼 한지혁은 상관할 일이에요?”
연제의 입술 사이에서 의사 선생님의 이름이 언급되자 해교가 석연찮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그 새끼도 수상해. 아니, 시발. 원래 열정적으로 진료하던 스타일도 아니던데 갑자기 환자한테 손은 왜 뻗은 건데.”
“새끼라고 하지 마세요.”
“그럼 뭐라고 해요. 의사 나부랭이? 정상적인 의사와 환자 관계에 같이 살 일이 뭐가 있어.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지내는 건데요? 변태 새끼가 순진한 사람 데리고 뭐 하는 거야.”
연제의 말에 해교의 눈이 뾰족해졌다.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열심히 매번 진료에 임하는지도 모르면서. 지혁을 대변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해교가 이내 하려던 말을 포기했다.
아무리 멍청하지만 의사 선생님이 신신당부했던 일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은 둘만의 비밀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생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그냥 좋은 분인데.”
“뭐? 아무것도 모르는 게 누군데. 사람 볼 줄도 모르면서!”
항변하듯 지혁을 감싸며 웅얼대는 해교를 내려다보는 연제가 오늘 대화 중 가장 큰 소리를 내었다. 다소 굳은 그의 표정에 살짝 긴장해 유순한 해교의 눈매 끝이 잘게 떨렸다.
연제는 다정을 가장한 이도윤의 얼굴 아래로 당신이 모르는 민낯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한지혁 역시 저와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생각보다 쓰레기라고, 차라리 그 새끼보단 내가 낫다고 진실을 보라고 똑똑히 일러 주고 싶었다.
쭉 함구하고 있던 말들을 쏟아 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음흉한 개짓거리를 한 건 이도윤인데 왜 차해교는 저에게만 방어벽을 세우는 건지. 지은 죄가 있어 고개를 빳빳이 들 순 없지만 여하간 서운하기까지 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저만 바라보는 연제의 눈초리에 해교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아무리 물어도 우연제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더는 상대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어디 가는데?”
“따라오지 마세요. 싫은 거…… 안 한다고 했잖아요. 비 오니까 들어가세요.”
“그래서 보고만 있잖아! 시발. 휴대폰 충전기 내가 사다 줄, 아니, 그냥 새로 휴대폰 사 가지고 올 테니까 받아요.”
“싫어요…….”
“왜? 그냥 좀 받으면 안 돼요? 연락이 안 되니까 내가 미칠 것 같아서 이러는 건데, 좀! 주고 싶다잖아. 그럼 그냥 받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받는 거 그게 어려운가.”
매번 제가 주는 것은 탐탁지 않아 하니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이도윤도, 빌어먹을 의사 새끼한테도 잘만 붙어 있고 잘만 받아먹으면서 왜, 왜 나만.
“……어려워요. 저는 머리가 나빠서 쉬운 게 하나도 없어요. 일단 지금은 가야 될 곳 있으니까 그만…….”
“그러니까 대체 어딜 가려고.”
본 적 없이 단호한 해교를 따라나서려던 연제는 이윽고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자신의 두 발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조금 더 움직였다간 더는 제가 설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았다. 이도윤만이 저를 위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뛰는 심장이 제 다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알았어요.”
“…….”
연제가 간신히 충동을 내려 앉히고 눈을 내리깔았다. 제어되지 않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고 심호흡이 이어졌다.
“안 따라가요. 안 간다고. 기억해요. 말 잘 들었으니까…….”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만큼 해교가 멀어질 때까지 연제는 그렇게 골목 어귀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 가린 채로.
* * *
뜻하지 않게 우연제를 만나는 바람에 병원 점심시간에 늦을 것 같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허겁지겁 뛰었다. 펼쳐진 우산이 해교의 발걸음에 따라 팔랑거렸다.
아직 병원에서 안 나가셨으면 좋을 텐데.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 딱히 의사 선생님께 연락도 하지 못하고 온 터였다.
의사 선생님께 점심 식사를 전해 드리면 뭐라고 하실까. 또 잘했어요,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지 않을까. 지혁을 상상하는 해교의 얼굴이 설렘으로 가득해지고 가슴이 콩콩거렸다.
해교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꼬깃꼬깃 만져지는 지폐를 확인하곤 바삐 지혁의 병원 건물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막 병원에서 나온 말쑥한 지혁이 해교의 눈에 띄었다.
“서, 선생님!”
비가 와 가뜩이나 어수선한 날, 인파 속 말소리를 지혁이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신호등이 얼른 바뀌길 바라며 해교가 재차 그를 불렀다. 그러던 사이 지혁만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해교의 시야에 늘씬한 미인이 들어왔다.
누구지. 구질구질한 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멋있어 보이는 미인이 지혁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가슴 위에 누가 커다란 바위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감정에 해교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단순히 멀리서도 의사 선생님을 알아보고 반긴 저를 알아채지 못한 서운함으로 치부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이런 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이런 기분을…….
한참 우두커니 지혁을 바라보며 어렴풋한 제 감정을 추측하던 중, 문득 깨달음이 일었다.
선생님이 좋아.
감히 선생님을. 의사 선생님은 덜떨어진 저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사람과 거리를 걷고 있는데.
몇 번 병원에 가 본 바로는 병원 직원도 아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생각에 닿자, 심장 일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저릿했다.
“아…….”
신호등이 바뀌기 전, 지혁과 나란히 서 있던 여자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향하는 방향을 봐서는 전에 그와 함께 갔던 식당으로 가는 듯도 하였다. 해교는 문득 제 손에 쥔 도시락 통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난데없이 나타나 선생님의 점심 약속을 방해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돌아설 수도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의사 선생님께 도시락을 전달해 드리고 문 여는 방법을 여쭤보면 되겠지 하고, 대책 없이 나온 까닭이었다.
“하아……. 정말…… 정말 가지가지 한다…….”
지혁과 미인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해교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많이 잘 어울리긴 했지만 못 본 새에 새로 뽑은 직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단순히 점심 약속을 한 지인일지도 몰랐다. 조금 살가워 보이긴 했지만 우산도 따로 쓰고 있었고, 손을 잡거나 하는 걸 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지레짐작하지 말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병원으로 돌아온 선생님을 만나서 직접 여쭤보면 될 터였다. 조금 주제넘을지 모르지만 집에 들어가는 방법도, 예쁜 여자분과의 관계도.
속단하지 말자고 생각했음에도 1층, 2층, 3층…… 탑승한 엘리베이터가 선생님의 병원에 한 층씩 가까워질 때마다 긴장으로 인해 자꾸만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짐작이 맞을까 봐 걱정이 된 탓이었다.
마침내 땡, 경쾌한 소리가 울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해교는 주춤주춤 발걸음을 내디디며 병원 문에 다가섰다.
“저,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오늘은 원장님이 일이 있으셔서 점심시간이 1시간 더 길어요. 진료 보시려면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간만에 얼굴을 비친 해교를 보며 김 간호사가 활짝 웃었다. 겨우 두 번 만난 사이이지만 워낙 얼굴이 예쁘게 생겨 아직 기억나는 환자였다. 초기 방광염이었던 것 같은데 또 오다니, 만성이 된 것 같아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 1시간이요?”
“네. 조금 바쁘셔서.”
상냥하게 웃음 지으며 이어지는 김 간호사의 말에 해교는 요즘 선생님이 바쁘신지 종종 퇴근도 늦으실 때가 있었단 사실을 상기했다. 정말 피곤하시겠다. 이따 집에 오시면 뭐라도 해 드리고 싶…….
“아, 김 간호사님. 그거요. 약혼식 때문 맞아요? 뭐 아시는 거 없어요? 그때 친척분이 원장님 할아버님 보필하셨다고 했잖아요.”
간호사복을 입은 또 다른 여자가 다가오더니 커피가 담긴 잔을 건네며 김 간호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작긴 했지만 병원 인포데스크 바로 앞에 서 있는 해교에게는 또렷하게 들릴 만한 음성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모시고 있어서 종종 일이 있으면 주워듣기는 해요. 한 회장님이 엄청 걱정하셨는데 약혼까지 순조롭게 가서 다행이죠. 맞히셨어요. 오늘도 약혼식 때문에 원장님이 진료 늦추신 걸 거예요.”
약혼식…….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듯 소곤소곤 이어지는 말소리 사이를 뚫고 들려오는 한 단어에 해교의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곧이어 귓구멍 안에 심장이 들이친 것처럼 펄떡이는 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의 몸을 잠식해 나갔다.
선생님이 약혼을 하신다니…….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달아오른 눈가에 투명한 액체가 고이기 시작했다. 안 돼……. 가만히 있다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대화를 하느라 자신에게 쏠렸던 시선이 멀어진 사이, 해교는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병원을 빠져나왔다. 맥없이 손에서 흘러내린 도시락 통과 우산은 병원 바닥에 떨구어진 채였다.
* * *
“흑, 흐윽…….”
눈이 시리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한가득 차오른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래오래 지금처럼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오래오래 좋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지내고 싶으시다는 건데. 선생님의 다정함은 제가 차해교라서가 아니라, 그저 특별한 케이스의 환자여서 주어진 것인데 제멋대로 기대해 버렸다. 주제도 모르고.
다정함에 기대어 미련스레 익숙해져 버린 나날의 대가는 컸다. 견고한 줄 알고 딛고 있던 지반은 조그만 충격에도 금세 깨어져 무너져 내릴, 겨울 호수에 낀 살얼음과도 같았다.
분명히 행복했는데.
그다지 길게 누리진 못한, 하지만 금세 익숙해졌던 행복감은 우스울 만큼 손쉽게 어그러졌다. 이다지도 큰 미련이 남을 거였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걸.
감정을 자각한 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음에도 벌써 마음은 제멋대로 크기를 부풀리고 있었다. 지금은 선생님께 거짓으로나마 약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지만 내일이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모레는 선생님이 당혹스러울 만큼 그의 앞에서 엉엉 목 놓아 울 수도 있고 그다음 날엔 주제도 모르고 왜 저는 안 되냐고 패악질이라도 할지 몰랐다.
그래선 안 되는데. 일분일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또렷하고 짙어지는 마음이 무서울 정도로 선명했다.
살아오면서 평생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강렬히 욕망한 적 없었는데.
해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지혁을 만나면 안 된다는 것을. 지혁이 있어 행복한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감정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
우르릉, 쾅.
날씨마저 얄궂게도 해교를 도와주지 않았다. 보슬비처럼 내리던 비가 병원을 나서자마자 더욱 세차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도시락 통과 함께 병원에 두고 나온 우산이 뒤늦게 생각났지만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혹여라도 병원에서 지혁과 그의 약혼녀가 나란히 함께 있는 모습을 맞닥뜨리게 될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해교는 굵은 빗줄기를 피하지 않고 몽땅 맞으며 넋을 놓은 채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흠뻑 젖은 옷은 내리는 비를 흡수하며 가뜩이나 무거운 몸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찰박, 찰박 고인 물웅덩이에 신발창이 닿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흙탕물이 지혁이 사 준 바지를 더럽혔지만 무의미했다.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하고 포근했던 안식처는 이제 없었다. 돌아갈 집도, 기댈 사람도 없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집 앞이었다. 해교와 아버지가 단둘이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던, 더 이상은 제집이라 부를 수 없는 옛 집. 무의식은 이곳으로 돌아가라고 제게 종용하고 있었다.
“으흑……. 흡.”
해교는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빌라 출입구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내리는 빗발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눈물도, 울음도 함께 커져 갔다. 촉촉하게 번져 나간 물기가 비에 젖어 서늘해진 뺨을 덮어 내렸다. 기다란 속눈썹을 타고 또르르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와중이었다.
“……교.”
귀를 기울여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의, 빗소리에 묻힐 작은 목소리였지만 해교는 단번에 저를 부르는 환청 같은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사이에서도 그의 귀에는 또렷하고 확연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아……빠?”
해교는 두 뺨 위에 엉망으로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놓칠세라 한 번 더, “아빠!” 하고 크게 외쳤다. 제발 방금 들린 음성이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숨을 죽인 채 급박하게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지러울 만큼 고개를 돌려 가며 주변을 확인하던 중, 골목 끝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인영만 겨우 알아챌 정도의 손짓이었지만 해교는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버지였다.
“뭘 보고 섰어! 빨리 이리 와!”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길 안, 흐린 시야 속 아버지는 퀭한 두 눈 아래 노란 멍이 군데군데 들어 있었고 며칠은 물도 안 마신 사람처럼 입술이 메말라 있었다. 내리는 비는 신경 쓰지 않고 맞은 채, 계속해서 주변을 살펴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선 그는 해교를 채근했다.
“열쇠 바꿨어? 문이 잠겨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그……게 사정이 있었어요. 그게…….”
쫓겨났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차마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해교가 답답했던지 아버지가 금세 태세를 전환하고 해교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건 됐고. 모아 둔 돈, 돈 좀 줘 봐.”
“……돈이요?”
“이번에 큰 판이 있는데 정말 이번만 따면…… 다시는 노름판 쳐다도 안 볼 테니까 어떻게 조금만이라도. 응? 정말 너밖에 없는데 넌 날 외면하면 안 된다. 집 열쇠는 안 맞지, 너는 전화도 안 받지, 내가 얼마나 걱정한지 알아?”
역시나 돈 이야기였다. 늘 돈이 필요할 때면 찾아오긴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해교는 지금 아버지에게 내어 줄 돈이 조금도 없었다.
“어, 없어요……. 정말. 자, 잠깐 있긴 했는데, 아빠 빚을 갚으라고 찾아온 사람들이 몽땅 가져갔어요.”
“이런 씨벌 새끼들, 그새 왔어?”
분한 듯 발로 애꿎은 아스팔트 바닥을 쾅쾅 내리치던 그가 낡은 재킷 안에서 종잇조각을 꺼냈다. 대충 휘갈긴 글씨가 쓰여 있는 종이는 누렇게 바래 있었지만 아버지는 이를 보석이라도 다루듯 조심조심 접어선 해교의 주머니 안에 넣었다.
“너 당분간 여기 말고 가 있을 데 있냐? 한번 털러 왔으면 분명히 조만간 또 올 텐데 어디 도망가 있어. 괜히 모은 돈 뜯기지 말고.”
갈 데가 없는데. 차마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해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 조금이라도 생기면 꼭 여기로 전화해. 아빠 번호 바뀌었으니까 여기로 해야 된다. 혹시라도 누가 또 찾아오면 절대 이 번호는 알려 주면 안 돼. 누구한테 말하면 그날은 아빠 죽는 날이야. 알았지?”
난처해하는 해교의 표정에 아랑곳 않고 아버지는 제 할 말을 속사포같이 쏟아 냈다. 초조한 듯 이야기 중간 중간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가시게요? 어디 가려ㄱ…….”
같이 가자고 하고 싶었다. 어디든,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해교가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가 보겠다는 듯 해교의 어깨를 두어 번 툭, 툭 다독이더니 빠르게 골목을 나섰다. 비가 많이 내렸어도 누가 봐도 한껏 운 얼굴의 해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도 않은 채, 급박하게 쫓기듯 제 할 말만 하고 아버지는 그렇게 사라졌다.
“하아…….”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와 목을 졸랐다. 불과 반나절 만에 해교의 눈앞이 컴컴해졌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듯한 갑갑함에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해교가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선생님 댁에 머물렀다간 언제 다시 사채업자들이 나타날지 몰랐다. 일전에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걸 생각하면 이번엔 선생님 집에서 돈 될 만한 것들은 싹 다 쓸어 갈 듯했다. 곧 결혼도 하셔야 하는데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응당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해교는 이제야 생각난 듯 급히 주머니에 들어 있던 지폐를 꺼내 살폈다. 지혁이 5만 원권 현금 다발을 봉투에 넣어서 준 덕에 해교의 얇은 주머니 안엔 1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5만 원짜리 한 장에 벌벌 떨었을 텐데, 무의식적으로 10만 원이나 되는 돈을 턱 가지고 나오다니. 제 돈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을,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나.
지금 상황에선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퍽 그간 정말 주제도 모르고 살았구나 싶었다.
아버지가 떠난 골목에 서 있는 동안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체온은 가라앉았고 옷은 축축했다. 갈 곳이 없어 서럽다는 생각만 했을 뿐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은 채다.
애써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해 봤자 정리될 리 없었다. 이 집에도 머물 수 없지만 의사 선생님 댁에도 머물 수 없다. 해교는 이 넓은 서울 땅 어디에도 제가 있을 곳은 없는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