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오면 되지. 방학에 이게 무슨. 날씨도 좆같은데.”
“교수님이 우리 학교 학생으로 자리 좀 채워 달라고 하시잖아. 내가 너 대리 출석 해 준 것만 몇 번이지? 2학기는 나 없이 알아서 잘 나올 자신 있나 봐, 우연제.”
“……알았다고.”
장대비가 무섭게 쏟아져 습한 날이었다. 강의실 바로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잠깐 사이에 바짓단이며 운동화며 진흙이 옮겨 붙어 엉망이었다.
비 오는 날엔 학기 중에도 무조건 자체 휴강인데. 연제는 창가에 앉아 창문을 살짝 열어 들이치는 빗방울을 손가락으로 받아 냈다. 도저히 이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이 가지 않을 것 같았다. 굵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손가락을 맞고 튕겨 나가며 연제의 뺨에 묻어났다.
방학 중 산학 프로젝트 회사 인사를 초청해 진행하는 강연이었다. 유독 많은 호평을 받은 H 사 측 임원은 꽤 젊어 보였다. 아니, 터무니없이 많이. 연제가 입매를 비틀며 작게 말했다.
“저거 딱 봐도 금수저 물고 태어난 새끼네. 그런 새끼가 무슨 강연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연제는 도윤의 말에 작게 투덜거리며 앞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한지헌. 이도윤이 죽어라 따르는 선배 중 하나다. 최근 의료 사업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어 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도윤과 제법 친한 사이인지 단 한 번 밥을 같이 먹어 본 적이 없는데도 그의 이름이 연제의 뇌리에 꽂혀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프로젝트의 결과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시간가량 진행되는 강의 내내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연제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왔어? 강의 지루했지.”
“아니에요. 뜻깊었습니다.”
지랄하네. 연제는 강연자와 반갑게 인사 나누는 도윤을 뒤로한 채 강의동을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대충 가업이나 물려받으면 되지 뭐 그리 대단한 일 하겠다고 저리 바쁘게 사는 걸까, 이도윤은.
언젠가 제가 물려받긴 해야 할 고루한 사업을 떠올리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도윤 집안의 가업 쪽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은데. 탯줄을 바꿔 잡아 태어났어야 했나.
연제는 라이터를 꺼내 연초에 불을 붙였다. 곧 주변이 뿌옇게 흐려지며 젖은 흙냄새와 매캐한 담배 냄새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짧은 어닝 밖으로 여전히 비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기다렸지? 가자.”
“같이 밥 안 먹어?”
“선배님은 교수님이랑 약속 있대. 다음에 따로 만나기로 했어. 당기는 거 있어?”
“음?”
빗물에 씻겨 옅게 깔린 담배 냄새 사이로 익숙한 체취가 느껴졌다. 연제는 돌연 도윤의 옷 소매를 쭉 끌어당기고 킁킁거렸다. 꼭 무언가를 찾아내는 듯.
“개야? 왜 이래.”
“냄새가 나서.”
“무슨 냄새. 냄새는 너한테서 나. 담배 냄새.”
“그딴 거 말고. 너한테서 풍기는 향이 달라졌어. 도우미 바꿨냐?”
“……도우미를 바꾼 건 아니고. 내가 너처럼 사람 자주 갈아 치우는 줄 알아? 아마 일하는 분이 세제를 바꾼 거겠지. 난 잘 모르겠어.”
대수롭잖게 연제의 말에 대꾸하는 도윤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태연한 척하는 겉과 달리 살짝 놀란 마음을 누르느라 심장은 펌프질을 하고 있었지만.
세탁할 때 쓰는 섬유 유연제가 바뀐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도윤의 말과 달리 주체는 도우미가 아닌 도윤이었고, 해교의 집에서 얼핏 보았던 세탁기 옆 섬유 유연제 브랜드를 찾아내기 위해 마트를 이 잡듯 뒤지는 수고 또한 따라왔다는 점은 쏙 빼놓았다.
마트에서 파는 싸구려 세제를 잔뜩 사서 집에 들여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윤의 집 도우미는 기존에 쓰던 세제를 사용해 세탁을 이어 갔다. 결국 도윤은 분리수거하는 날을 틈타 남은 세제를 죄 버리는 수고스러움까지 감수해 가며 섬유 유연제를 바꾼 셈이었다.
“그래. 도우미가 고른 향이란 거지.”
베이비파우더 향이라니. 이도윤 네 덩치에 어울리긴 하냐고 한마디 더 붙이려다 말았다.
담배를 피우다 맡아서인지 냄새가 더욱 선명했다. 사실 오늘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이도윤에게서 은근슬쩍 차해교와 비슷한 향이 나기 시작했다. 그게 딱, 오늘 끌려온 강의를 진행하는 강연자 및 그 무리들과 이도윤이 만남을 한 즈음이었던 것 같다.
워낙에 도윤이 좋아하는 선후배 모임이라 연제 역시 몇 번 참여를 권유받았던 터라 또렷이 기억이 났다.
뭐, 우연의 일치겠지. 연제는 태우던 연초를 바닥에 버리곤 발로 비벼 껐다. 잔뜩 젖은 신발 밑창에 담배꽁초가 들러붙어 털어 내는 것이 여간 귀찮지 않았다.
* * *
- 어, 차해교 학상이여?
“네.”
학생은 아닌데. 이런 호칭을 들을 때마다 입맛이 썼다.
- 월세는 잘 받았어. 이번 달 가기 전에 주니께 얼마나 좋아.
“네.”
- 거 느 아부지 소식은 있고?
“…….”
- 어이고.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겨. 혼자 사는디 깎아 주고 싶어도 내 코가 석 자여서. 알제? 암턴 다음 달도 늦지 않게 넣어 주믄 이쁘겄어.
“네. 그럴게요.”
정말 아버지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넌지시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 집주인 전화를 끊으니 머리가 아팠다. 침대에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다 잊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숨 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진동음이 울려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메리
형. 오늘은 시간 되세요? 오전 09:02]
며칠 전 우연제의 집에서 다시 만난 도윤으로부터 온 문자 메시지였다. 옷을 받으러 오려고 연락한 듯했다. 저번에 안 된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무조건 그쪽 시간에 맞춰야겠다.
밤에는 병원도 가야 하니 그 전에는 왔으면 좋겠는데. 언제든 오라는 답장을 보내 놓고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 뒤 주방으로 향했다. 어울리지 않게 가득 찬 냉장고와 찬장을 바라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모두 우연제가 잔뜩 사 놓고 간 것들이었다.
월세 입금 후 개털이 되었는데 시기적절하게 음식 재료가 쌓였으니 마냥 원망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음식은 죄가 없었다. 사실 죄가 있다 해도 제 처지에 그런 걸 따지는 건 사치였다.
망설이다 합리화를 끝낸 해교는 연제가 사다 놓은 부어스트를 꺼내 삶았다.
모처럼 풍족하게 준비된 식사를 마치고 소금기 뺀 음식을 덜어 집 밖으로 나갔다. 하수구에서 꺼내 준 날 이후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던 메리는 며칠 전부터 서서히 다시 해교에게 다가오기 시작해 밥그릇에 음식을 담아 두면 물고 사라지곤 했다.
유독 더운 날씨였다. 해교는 부어스트를 넉넉히 담아 후미진 골목 끝에 두곤 한참 메리를 기다렸다. 나중에야 올 모양이지. 오래 기다려도 소식 없는 메리를 뒤로한 채 빠른 걸음으로 집에 되돌아갔다.
“형. 저 왔어요.”
“어서 오…….”
애매하게 바깥과 현관의 경계에 선 도윤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해교는 사선으로 비켜서 도윤을 들이면서 말끝을 흐렸다.
“지난번에 신세도 졌고, 제 옷 받으러 오면서 빈손으로 오기가 뭐하더라고요. 점심 같이 먹으려고 사 왔어요.”
“아……. 집에 음식 많은데.”
“별건 아니에요. 참, 그날 경황이 없어서 통성명도 안 했어요. 저는 이도윤이라고 하는데 소개가 많이 늦었죠? 연제 집에서 다시 만나고 너무 반가웠어요.”
“……저는 차해교예요.”
“해교 형, 이렇게 부르면 되겠다. 저한테는 도윤아, 해요.”
“으…… 그…… 말 놓는 걸 잘 못해서…….”
“그럼 좀 더 친해지면 편하게 놓으세요.”
그러려면 자주 봐야겠어요. 도윤이 정신없이 몰아치며 씨익 웃었다. 구김살 없는 모습에 전염이라도 된 듯 해교 역시 작게 웃음 지었다. 또래와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 얼마 만인지. 우연제와는 달리 저를 긴장하게 만들지 않는 상대였다.
그새 흐르는 땀방울을 훔쳐 내는 도윤을 보며 해교가 망설였다. 우연제가 두고 간 서큘레이터가 떠오른 까닭이다. 그날 이후 의식적으로 외면한 서큘레이터였지만 손님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거실과 작은 방 사이에 떡하니 놓아둔 상태라 도윤의 눈에도 서큘레이터가 보였을 것임이 자명한데.
결국 해교는 도윤이 보지 못하게 한숨을 폭 쉰 뒤에 서큘레이터를 끌고 와 작동했다. 에어컨을 켠 것만큼 시원한 것은 아니라도 푹푹 찌는 열기가 조금은 거두어지는 것도 같은 기분이 들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건 제가 그때 빌려 입었던 옷이에요. 덕분에 잘 입었습니다.”
“저도 옷 돌려 드릴게요. 죄송한데, 비싼 옷인지 몰라서 세탁기에 돌려 버렸어요…….”
“아, 세탁기에 돌리는 거 제가 봤는데요. 뭘.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세일할 때 사서 아마 이 옷 열 벌은 사야 형 옷 한 벌 값 나올 거예요.”
너스레를 떠는 도윤이 돌려주는 옷에서 제가 쓰는 섬유 유연제와 같은 향이 났다. 자신은 마트에서 싼 섬유 유연제만 골라 사 쓰는데. 섬유 유연제도, 옷까지도. 정말 이 남자는 예상외로 세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해교는 도윤에게서 느껴졌던 거리감이 걷히는 것을 느꼈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두 사람은 주로 도윤이 이끄는 대로 대화를 이어 가며 식사를 마쳤다. 기왕에 포기하고 서큘레이터를 쓰기로 한 거, 우연제가 사 온 과일도 꺼내 대접하기로 마음먹은 해교가 좌식 테이블 앞에 모으고 있던 다리를 쭉 폈다.
굽혔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자 네이비색 쇼츠가 팔랑이며 도윤에게 하얀 허벅지를 보여 주었다. 오래 앉아서인지 보드라운 살갗 군데군데 눌린 자국이 진한 분홍색으로 남아 있었다.
살결이 약한 듯했다. 늘씬한 종아리에 비해 어느 정도 살집이 있는 허벅지는 눈으로 더듬는 것만으로도 목이 말라 왔다. 만지지 않아도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분명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서도 비슷한 향이 나는 것이 분명한데, 뒤에서 불어오는 서큘레이터 바람에 실린 체향이 아찔했다. 체향 자체가 띤 성격은 한없이 앳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윤은 손마디가 저릿해 옴을 느꼈다. 주체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에 흘깃 울긋불긋하지만 매끈한 허벅지를 한 번 더 눈으로 훑고는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목을 적셨다. 음료를 머금은 채로도 두 눈은 바쁘게 움직이는 걸 도윤도 해교도 알지 못했다.
왠지 모를 갑갑증이 느껴져 도윤은 손바닥으로 제 눈두덩을 문질렀다. 몇 번 문지르다 한숨과 함께 팔을 내렸을 때, 뜻하지 않게 팔뚝이 컵 손잡이를 스쳤다. 팔꿈치가 비스듬히 컵을 치고 지나간 탓에 단숨에 컵에 담긴 내용물이 엎질러졌다.
“엇…….”
“어, 죄송해요. 제가 정신을 딴 데 팔다가.”
“가만, 가만히 계세요. 제가 닦을 거 가져올게요.”
싱크대로 향해 돌아서 있던 해교가 황급히 수건 2개를 가져왔다. 해교는 도윤에게 하나 건넨 후 나머지 수건으로 음료가 엎질러진 바닥을 닦으려 상반신을 숙였다. 그러자 목이 늘어난 티셔츠가 주욱 아래로 내려가며 상체 속살이 훤히 보였다.
아, 미치겠네. 저번부터 계속…….
얕게 내쉬던 도윤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전에는 보지 못한 함몰 상태의 유두가 시선을 잡아챘다. 여전히 투명한 피부 위, 작게 일자로 폭 파여 들어가 있는 분홍색 젖꼭지는 지혁이 준 연고를 발라 주변이 도톰하게 솟아 있었다.
앙증맞은 유두 껍데기를 감싼 연고가 번들거리는 젖꼭지는 일전에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짙은 분홍색으로 바뀌어 있는 것 같았다. 유륜도 그때보다 더 커진 것 같았고.
숨을 훅 불어 넣어 유두를 꼿꼿이 세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묽은 연고에 흠뻑 적셔진 함몰 유두에 손가락을 대고 꾹꾹 눌러 보고 싶었다. 그럴 때 터져 나오는 신음은 어떤 목소리인지 궁금했다.
“여기는 잘 안 지워지네…….”
해교가 혼잣말하며 인상을 쓰곤 바닥을 북북 닦았다. 손에 힘을 주고 같은 지점을 계속해서 닦아 내자 티셔츠가 흔들리고 통통하게 부푼 젖가슴이 출렁였다. 젖가슴의 정점에 달린 유두는 쏙 들어간 채로 파르르 떨려 한없이 음심을 자극했다.
힐끔거리던 시선이 어느새 노골적으로 변모했다. 음욕이 가득 찬 다갈색 눈동자가 끓어오르고 저릿한 손가락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허공을 쓸어내렸다.
마치 눈앞의 먹음직스러운 젖꼭지를 문지르고 잡아당기기라도 하듯이.
거친 손가락으로 원 없이 말랑한 젖가슴을 비비다 보면 육감적인 젖꼭지가 터질 듯 부어오를지도. 후우……. 잠깐 머릿속을 떠돈 상상만으로도 은근한 흥분감이 밀려와 욕망에 찬 탄식이 낮게 터졌다.
마침내 해교가 바닥을 다 닦고 일어나자 아쉬움이 몰려왔다. 해교의 몸 곳곳을 어루만지던 도윤의 눈길이 강제로 거두어졌다.
도윤은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혈기 왕성한 시기에 성욕을 풀어 낼 상대가 없어 마침내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했을 정도로.
부드럽고 깔끔한 외모뿐만 아니라 다정다감한 태도까지 갖춰 한평생을 남자 무리 틈에서 살아왔어도 그에게 호감을 표현한 이성만 한 트럭이었다.
욕정을 일게 만드는 상대가 없어 동정을 유지해 왔을 뿐.
우연제는 씹선비라고 놀려 댔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은 걸 어쩌란 말인가. 의미 없는 섹스를 하느니 책이라도 한 자 더 읽고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 그것도 동성에게 묘한 성적 호기심이 일었다. 아까부터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온몸을 들쑤시는 야릇한 긴장감에 지배당한 상태였다.
말도 안 돼. 우연제도 아닌 이도윤이.
아무리 부정해 봐도 좀처럼 잘 느껴 볼 수 없던 아랫도리가 뻐근한 감각, 이건 분명히 성욕이다. 좆이 터질 듯 달아오르고 아랫배 근육이 콱 조여들었다. 입 안에 고이는 침은 명백히 하나만을 바라고 있었다.
저 사람은 경험이 있을까. 당연히 여자와? 그게 아니라면 저 같은 남자와…….
계속 이어지는 상상에 정신 차리라는 듯 도윤은 제 팔뚝을 붙들고 살가죽을 꼬집었다. 하지만 의도와는 반대로 탄탄한 팔뚝의 촉감에 대비되는 눈앞의 말랑한 살을 더욱 느끼고 싶어져 손끝의 신경이 아우성을 쳤다.
몇 번 보지 않았던 야한 동영상 속 여자의 신음이 해교 위로 오버랩되었다. 엄지와 검지로 분홍색 젖꼭지를 세게 잡아당기고 비트는 상상을 하는 도윤의 머릿속은 진창이 되어 녹아내렸다.
“이제 된 거 같아요. 옷에 묻은 거 닦으셨으면 주세요.”
도윤은 얌전히 눈을 깜빡이며 손을 내미는 해교 때문에 흠칫 넓은 어깨를 굳혔다. 말아 쥔 손바닥 안에는 후끈한 열기가 넘치도록 고여 있었다.
시커먼 색소가 베이지색 옷감 끝자락에 흡수되어 셔츠에 번져 있었다. 정신없이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느라 닦기는커녕 수건을 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탓이다. 인내하려 힘이 잔뜩 들어간 도윤의 손등엔 푸른 힘줄이 바짝 돋아 있었다.
수건을 다시 돌려주며 두 사람의 손가락 끝이 살짝 맞닿고 떨어졌다. 스치는 손끝으로 단단히 박인 굳은살을 느끼곤 놀란 듯 해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였다. 고운 얼굴과는 달리 뼈마디가 굵고 투박한 손 모양새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생각 외로 도윤의 손은 꽤나 거칠었고 곳곳에 생채기가 혼재해 있었다. 아까 수건을 건넬 땐 정신이 없어 미처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저, 여기요…… 다친 거 같은데…….”
“아, 공부하려면 체력이 필요해서 운동하다 생긴 상처예요. 이제 다 나았어요.”
“와……. 공부는 앉아서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체력도 필요한 거구나. 몰랐어요…….”
공부를 해 봤어야 알지. 딱 봐도 이지적인 느낌이 강한 도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해교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해교의 시선에 어느덧 살짝 붉어진 도윤의 낯을 보곤 많이 덥죠, 하고 중얼거리며 회전하던 서큘레이터를 한 방향으로 고정했다.
“아, 괜찮은데요.”
“아니에요. 많이 덥나 봐요. 저는 익숙해서 별로 안 더워요.”
더워서 이렇게 된 게 아닌데. 도윤은 차마 진실을 말하지는 못하고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방금 닿은 부드러운 손은 한없이 작고 여렸다. 손이며 얼굴이며 가슴선까지. 도무지 같은 남자라고 믿기지 않는 해교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되짚는 것만으로도 다시 숨결이 뜨거워졌다. 이게 대체 무슨 반응인지.
한참 혼란한 머릿속을 부정하던 도윤이 묵직해진 제 하반신에 시선을 주었다. 누가 봐도 발기한 느낌이 강해 슬쩍 시선이라도 내려왔다간 단번에 들킬 것만 같았다. 하물며 같은 남자인데 모를 리가.
초조해진 도윤은 좆이 발기한 걸 들키기 전, 아래를 가라앉히려 조급히 메리 이야기를 꺼냈다.
“형. 전에 그 고양이는 잘 지내나요?”
“아, 메리요! 그러잖아도 아까 밥을 놓고 왔는데 예전만큼 잘 다가오진 않아요. 그날 겁을 많이 먹었나 봐요.”
메리 이야기에 반색하는 해교의 말을 적당히 받아치며 도윤은 티 나지 않게 속으로 백 번이 넘도록 애국가를 불렀다. 기왕 온 김에 고양이를 보러 나가겠냔 말을 거절하느라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빠듯하게 부푼 앞섶을 가리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어울리지 않게 욕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행히도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애국심이 적당히 버무려졌는지 끓어오른 열기가 점차 가라앉아 부풀었던 앞섶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그렇게 홀린 듯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늦은 오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걸려 온 전화를 받느라 도윤이 집 밖으로 나간 사이 화장실로 들어간 해교가 아주 얇은 금속으로 제작된 클립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양감 있는 유륜을 쥐고 클립을 눌러 유두를 고정했다. 얇지만 단단한 클립이 유두를 짓누르자 함몰된 젖꼭지가 짜부라진 모양으로 단단해져 갔다.
지혁이 진료하기 전부터 미리 하고 있으라고 준 것이었으나 손님의 방문으로 이제야 실행에 옮긴 터였다. 얇은 클립 사이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젖가슴이 비죽 튀어나왔다. 삐뚤게 끼워진 것 같아 해교가 클립을 살짝 비틀자, 옴폭 들어간 함몰 유두가 발갛게 익으며 솟아올랐다.
“으우, 흐…….”
아예 사무용 클립 모양을 그대로 본떠 나와 함몰 유두를 봉긋 서게 만드는 것 외엔 다른 기능이 없는 클립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오른쪽 유두에만 달라고 한 지혁 때문에 해교는 한쪽 유두에만 클립을 달고 반대쪽은 자연 그대로의 생유두로 두었다.
손을 떼자, 얇은 티셔츠 너머로 도톰하게 튀어나온 오른 유두가 확연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해교는 클립과 함께 가져온 어두운 체크무늬 셔츠를 상의 위에 한 겹 더 덧대어 입었다. 다행히도 클립 주변이 미미하게 뜰 뿐, 그 누구도 젖꼭지에 이상한 걸 달았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돌아서 화장실을 나왔어야 했는데.
“하으응…….”
가만히 있어도 젖꼭지로 찌르르 전류가 올라오며 화끈거렸다. 가슴 정점에서 자작하게 시작된 쾌감에 결국 해교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빗장뼈가 보이는 곳까지 옷을 끌어 올린 뒤, 살살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랑한 젖을 만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클립을 꾹 누르다 옆으로 튀어나온 포동포동한 젖가슴을 만지니 쾌락과 함께 허벅지 안쪽이 당기면서 마구 경련하였다. 허벅지 살이 바들바들 떨리자 연결된 봉긋한 볼기 두 짝 역시 잘게 진동해 철썩였다.
느릿하게 유륜 주변을 쓸어내리다가 손가락을 잘게 흔들며 돌기를 짓쳤다.
아, 하흑! 멈추지 않고 내리꽂는 아찔한 감각에 결국 손바닥을 이용해 가슴 바깥 살을 안쪽으로 모으고 얇은 신음을 터뜨렸다.
해교는 출렁출렁 얕게 흔들리는 젖가슴을 화장실 거울로 들여다보다가 급기야 주무르고 쥐어뜯었다. 본능에 휩쓸려 난잡할 정도로 격하게 살점을 잡아 비트는데도 통각이 아닌 야릇한 쾌감이 느껴져 척추가 저릿저릿했다.
어느덧 클립을 끼우지 않은 왼쪽 젖꼭지까지 꼿꼿하게 일어나 심을 세웠다.
가슴에서 시작된 근지러움이 사타구니를 거쳐 보지까지 전해졌다. 보지 안이 급격히 따끈하게 달아오르며 작은 자지로 열기가 번져 피가 몰렸다. 이에 따라 바지 속 드로어즈 천이 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척척히 젖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 후, 으응, 아앙.”
보지의 간지러움을 떨쳐 내려 아랫배에 바짝 힘을 주자 엉덩이가 파르르 떨려 왔다. 이걸 달고 오랫동안 신음을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참으려 해도 나직이 흥분에 겨운 신음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흐으, 하아…….”
통화를 끝냈는지 현관문을 열어 달라는 듯 똑, 똑 두드리는 소리가 몽롱한 정신의 끝자락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얼른 도윤과 헤어지고 병원에 가고 싶었다. 선생님은 이 이상야릇한 기분을 해결할 방법을 아실 테니까.
“아쉬워서 어쩌죠. 오늘 온 김에 저녁까지 놀다 가고 싶었는데 하필 급한 전화가 왔어요.”
“저도 오늘 저녁엔 일이 있어서…….”
“음. 형 볼일은 어디서 있어요?”
“어…… 청담동이요.”
“그럼 제 차 타고 가요. 어차피 가는 길이니 내려 드릴게요.”
한 푼이 아쉬운 마당에 감사한 제안이었다. 그사이 꽤나 친근감이 쌓였는지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해교를 내려다보며 도윤이 다정히 웃음 지었다.
해교가 도윤을 따라나서자, 일전에 본 하얀 SUV가 집 앞 골목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몸에 밴 매너인 양 도윤이 조수석 차 문을 열고 해교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도윤은 운전할 때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BGM이 흘러나오자마자 음 소거 버튼을 눌렀다. 해교와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그런 도윤의 마음도 모르고 해교는 얼른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내비게이션을 초조히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젖꼭지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홍조 띤 얼굴이 발그레했다.
“형, 더워요? 에어컨 좀 더 세게 틀까요.”
“아, 아니에요.”
달아오른 젖꼭지와는 달리 하얀 팔 상완은 추워서 오른 소름이 한가득했다. 종일 더운 집에 있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공기에 휩싸이니 체온이 단번에 내려가는 듯했다. 마음 같아선 에어컨을 꺼 달라고 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젖꼭지는 점차 더욱더 민감해져 갔고, 차량이 미세하게 방지 턱을 지나기만 해도 자극을 느껴 발작하듯 허리가 튀었다. 해교는 어떻게든 신음을 내지 않으려 입 안 살을 뭉개질 때까지 짓씹었다.
빨리 내리고 싶었다. 도윤이 건네는 말마다 힘겹게 대답하는 해교의 관자놀이에는 식은땀 한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 * *
해교는 바로 지척에 다가온 지혁을 올려다보았다. 유려한 턱선과 반듯한 콧날, 기다라면서 시원한 눈매. 밖에서 보니 새삼 선생님이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집에 찾아오셨을 때도 사복 입은 걸 보긴 했지만 아플 때와 제정신일 때 보는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작열하는 태양에 턱선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마저 그를 빚은 예술품처럼 느끼게끔 하는데 한몫하는 것 같았다. 멍하니 지혁을 바라보던 해교가 피식, 낮게 웃음 짓는 그 때문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 오늘은 왜 병원 밖에서 보자고 하셨어요?”
“이른 저녁 먹고 들어가려고요. 병원 근처라 종종 가는 집인데 맛이 괜찮아요.”
“아……. 늘 얻어먹기 죄송한데 그럼 오늘은 제가 살게요.”
“부담 갖지 말아요. 오늘은 밖에서 밥 먹을 만한 날이라 가는 겁니다.”
밖에서 밥 먹을 만한 날은 무슨 날일까. 해교는 의문을 가지고 지혁을 따라 고급 일식집에 들어섰다. 은은한 음악과 조명이 감도는 식당은 저녁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왁자지껄한 느낌이 없었다. 결코 손님이 없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찾아온 방문자 모두가 식당의 분위기에 걸맞게 우아한 톤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였다.
홀과 별도로 분리된 룸으로 안내받은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좌식처럼 꾸며진 룸이었지만 테이블 아래가 파여 있어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었다. 직원이 지혁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따라 들어와 테이블 위로 차와 물수건을 세팅해 주었다.
“늘 드시던 코스로 준비해 드릴까요?”
“네. 아, 차해교 씨 혹시 못 먹는 거 있어요?”
못 먹는 거라니. 여기가 뭘 파는 곳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조용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해교는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저었다. 계속 산다고 우겼으면 큰일 날 뻔했다. 통장 잔고를 다 털어도 1인 식사비도 안 나올 것 같았다.
“아……니요.”
“그럼 늘 먹던 코스로 해 주세요. 음식은 중간중간 내지 말고 그냥 한 번에 세팅해 주시고. 아, 오늘 전복이 괜찮으면 전에 맛봤던 회로 좀 부탁드립니다.”
“예. 알겠습니다.”
문을 닫자 아예 또 다른 세상이기라도 한 듯 홀에서 흘러나오던 은은한 노래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밀실처럼 꼭 닫힌 식당 룸 안에서 의사 선생님과 마주 보고 있자니 괜스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위축되어서일까. 불현듯 속이 울렁거렸다. 거의 만날 때면 둘만 있었는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랬다.
“전복 회 먹어 봤어요? 오늘 신선하다고 해서 같이 주문했는데.”
“아니요. 회를 많이 안 먹어 봤어요.”
“그래요. 그럼 먹어 보면 되겠네.”
“저, 근데 밖에서 밥 먹을 만한 날이라는 게…….”
“궁금했구나. 연구비가 나왔는데, 대상 환자에게도 지원금이 같이 와서요.”
지혁이 재킷 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들었다. 하얀 봉투는 눈으로 보기만 해도 묵직해 무게감이 절로 느껴졌다.
“지원금이요?”
“그때 설명을 누락했나 봐요. 국가적 양성구유 연구에 차해교 씨도 기여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지원금이 같이 나옵니다.”
“네? 저는 치료도 공짜로 받고 있는데…….”
“나 나쁜 놈 만들려고요? 차해교 씨가 기여한 거라니까요. 본인이 본인 몫 해서 받는 겁니다. 받아요.”
지혁이 꺼낸 봉투를 단호히 해교 앞에 놓았다. 며칠 전부터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손수 준비한 것이었다.
지혁은 해교가 속 모를 인간들의 집에 가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졌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따지고 보면 운이 좋아 저를 만난 거지 쓰레기 같은 의사를 만났었다간 지금쯤 어딘가에서 감금이라도 당했을 것이라며, 천연스레 쓰레기 범주에서 자신을 제외한 결과였다.
제집에서 설렁설렁 일하고 돈 받아 갔으면 좋겠는데 설득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듯했다. 차선으로 돈이 좀 생기면 일하느라 발발 돌아다니는 것도 줄이지 않을까 싶어 생각해 낸 묘책이 바로 연구 지원금이었다. 기실 존재하지 않는 연구였지만.
진료 놀이가 귀찮은 것과는 별개로 이럴 땐 유용하긴 했다.
“우와……. 이, 이렇게 많이요?”
받아 들자 느껴지는 봉투의 무게에 해교가 커다란 탄성을 흘렸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을 어디로 둘지 몰라 여기저기로 눈알을 굴려 댔다. 이를 지켜보는 지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귀엽긴.
“일개 기업이 아니라 정부 지원이잖아요. 이 정도는 받아야죠.”
“그래도 너무 많은데…….”
몇 번이나 지원금 수취에 관해 엇갈리는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지혁이 강제적으로 해교의 바지 주머니에 봉투를 쑤셔 넣어 대화를 일단락하였다. 이로 인해 조금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 직원이 서빙 카트를 끌고 와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을 내기 시작했다.
조그만 접시마다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이 플레이팅되어 소량씩 올랐다. 테이블 중간에 놓인 미색의 도자기 그릇 위에는 하얗다 못해 뽀얀 살점의 전복이 줄을 지어 누워 있었다.
세팅을 마친 직원이 사라지자마자 지혁은 그중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자신의 앞접시에 놓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앞접시에 놓인 뽀얀 전복 살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이거 꼭 차해교 씨 보지 같아요.”
“……네?”
다짜고짜 그리 늦지도 않은 시각, 훤한 음식점에서 보지라니.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해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지혁은 느른하게 입매를 끌어 올리곤 또박또박, 친절히 방금 한 말을 반복해 읊어 주었다.
“차해교 씨 보지 같다고.”
순진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야들야들한 전복 살을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조금의 마찰력도 없이 미끄러진 손가락이 전복 회 위를 느리게 부유하는 모습에 마치 자신의 보지가 만져지는 것처럼 이입이 된 해교가 양 허벅지를 바싹 당겨 붙였다.
“이 집에 와서 먹을 때마다 생각나요.”
먹고 싶게. 마치 해교의 보지를 탐하는 것처럼 눈을 고정한 채 붉은 혀를 내서 전복 살을 핥는 지혁의 모습에 서서히 해교의 아래가 뜨거워졌다. 어느덧 다리를 오므릴 때마다 쩍, 쩌걱 끈적하게 젖은 소리가 날 만큼 보지가 흥건하게 젖었다. 그저 선생님은 식사를 하시는 건데 왜 이리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지.
보지 안이 촉촉이 젖어 들고 손바닥엔 땀이 가득 차 애가 탔다. 희멀건 살점을 비벼 대는 혀의 움직임과 찰박찰박, 노골적인 혓바닥 소리를 듣고 있자니 단전을 타고 아찔한 소름이 올랐다. 흐읏, 흐……. 저도 모르는 새 점차 해교의 숨이 넘어갈 듯 가빠 왔다.
“그만큼 내가 열정을 가지고 진료에 임하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밥 먹을 때도 생각날 만큼.”
“아, 아, 네.”
역시 병원의 원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저는 밥 먹을 때면 아무 생각 안 하고 밥만 먹는데,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한다니. 해교는 다시 한번 지혁을 존경스럽게 바라보며 애꿎게 보지를 적신 자신을 탓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보지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그, 그게 무슨…….”
“연구 진행자로서 물어보는 거예요. 바로 대답하기 힘들다면 이걸 참고해 보는 건 어때요. 질감이라던가, 느낌 같은 걸 떠올리는 데 좀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지혁은 일부러 보지 소음순 모양으로 주름진 체층이 잘 보이는 단면을 골라 해교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주저하던 해교가 얌전히 입을 열자, 붉은 혀가 들리고 투명한 타액 안에 물결 진 전복 살이 머금어졌다.
이를 보며 흥분한 지혁이 낮게 목을 울렸다. 혀에 닿는 전복살 대신 해교의 보짓살을 빨아올리고 싶은 강한 욕망이 거세게 들끓었다.
“맛이 어떤가요? 차해교 씨 보지에 비하면 한참 못하지만.”
당장 변태라고 신고당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외설적인 말을 지껄이면서도 지혁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했다. 아랫도리 사정과는 사뭇 달랐다. 문장 속 단어와는 달리 마치 밥 먹었냐고 묻는 듯 여상한 지혁의 말투에 해교는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다…… 달아요.”
“차해교 씨 보지도 달아요.”
“아…….”
대체 보지가 달다고 하면 뭐라고 반응해야 하는 걸까. 한참 동안 씹어 작디작게 조각나 버린 전복살을 넘기지도 못한 채 해교가 데구루루 눈알을 굴렸다. 도저히 맞은편에 있는 선생님의 얼굴을 볼 자신은 없어 멀뚱히 뒤편 벽지에 새겨진 격자무늬 개수를 세어 댔다.
“본인 보지를 만졌을 때 느낌은 어때요. 내가 보고서에 달랑 한 줄 써 넣을 순 없잖습니까.”
“만지면 뜨……거워요…….”
“그건 겉 이야기일 테고. 안은?”
“아…… 안은……. 좁고 축축해요…….”
“왜 축축하다고 생각해요?”
“……그건…….”
“내 생각이 아닌 차해교 씨 생각이 필요해서 묻는 거예요. 공동 연구자나 다름없잖아요. 아주 중요한 역할인데.”
배움이 짧은 제가 공동 연구자라니. 나라에서 지원하는 대단한 프로젝트에 기여한다는 말을 듣자 해교가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허리를 쭉 펴는 해교를 본 지혁은 웃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미치겠다. 사람이 이렇게 귀엽게 느껴질 수도 있나.
“보……지에서 물이 나와서요…….”
“그렇구나. 하긴 씹질하면 차해교 씨 보짓물 때문에 자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요.”
“……아…….”
도톰한 입술을 엉망으로 짓씹곤 미간이 살짝 구겨지는 얼굴이 당장에 자지에서 정액을 사출해 버릴 만큼 야했다. 발기 부전 치료제를 연구하는 회사는 성분보다는 차해교의 얼굴을 보고 영감을 받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죽은 좆도 세울 만큼 한없이 색정적이니까.
지혁은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해대다 고삐를 잡았다.
이만할까. 조금 더 놀려먹었다간 살짝 숙여진 얼굴이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새빨갰다. 이 또한 귀여워 더 보고 싶긴 했지만 기왕에 밥 먹이려고 데리고 나온 것, 식사를 할 숨통은 틔워 주어야 할 듯했다.
“잘했어요. 역시 연구비 나눠 가질 자격이 있어요, 차해교 씨는……. 아주 성실해요.”
학교 다닐 때도 듣지 못한 칭찬 세례를 마구 퍼부어 주며 지혁이 해교 앞으로 접시를 밀어 주었다. 해교는 작게 네, 네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곤 눈을 마주치지는 못한 채 앞접시에 놓인 음식을 집어 먹었다.
에어컨 덕에 시원한 룸 안인데 너무 더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분명히 비싸고 맛있는 음식일 텐데 음미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입에 욱여넣기만 할 따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셔벗을 서빙한 직원이 문을 열고 사라지자마자 지혁이 해교에게 물어 왔다.
“요즘에 생활하는 데 특별한 불편함은 없나요. 궁금한 사항이라든가.”
“선생님. 저어…….”
“말해요.”
“그…… 자지를 넣으면……. 아픈 거 말고 찌릿한……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시, 싫지가 않아요……. 그게 너무 걱정이 돼요. 제가, 제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비단 지혁뿐만 아니라 연제와의 섹스 역시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싫은 우연제와 몸이 닿을 때조차 기분 좋은 자극이 몰아쳐 두려웠다. 점점 더 몸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이를 알 리 없는 지혁이 성취감 가득한 미소를 띠었다.
“차해교 씨.”
“네…….”
“자지나 보지가 예전처럼 아플 때가 있었어요?”
“어…… 그러고 보니까, 이제 전혀…… 안 아파요.”
“거봐요. 그러니까 무언가를 느낀다고 부끄러워할 건 없어요. 내 말 들어서 손해 본 거 없잖습니까.”
“네, 네.”
“그럼 보고서에는 자지를 넣는 게 싫지 않다, 그렇게 쓰면 되겠네요.”
말을 마친 지혁이 거침없이 일어나 해교에게 다가왔다. 깜짝 놀란 해교가 어찌할 틈도 없이 지혁은 해교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삽시간에 드로어즈 안으로 단단한 손가락이 들어와 살결을 헤쳤다.
“으흣! 서, 선생님. 여기는 시, 식당…….”
보짓물로 점철된 입구를 가르니 쩍 보지가 갈라지며 붉은 살이 드러났다. 갈라진 보지 속살은 외부를 향해 기꺼운 듯 조갯살을 활짝 벌렸다. 지혁이 숨을 쉬는 것처럼 펄떡이며 오르내리는 뜨끈한 점막을 살살 느리게 쓸어내리자 해교가 할딱였다. 잡을 곳 없는 빈손이 절박하게 공중을 마구 허우적거렸다.
거칠한 지문이 말랑말랑한 보짓살을 파고들자, 보지 구멍이 옴찔 조여들며 쫄깃하게 손가락을 삼켰다. 손가락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점막의 촉감에 지혁이 낮은 숨을 내쉬며 여린 점막을 간지럽히듯 어루만졌다. 이 보지가 얼마나 쫀득한지 잘 알기에 당장에 엎어 버리고 박아 대고 싶다.
중지 한 마디 정도만 집어넣었는데도 열이 올랐다. 더, 더 깊이 들어오라는 것처럼 촉촉하게 물오른 점막이 갈구하듯 손가락에 들러붙어 감겨 왔다.
“하아, 자지 말고 손가락을 넣을 때 느낌은 어떤가요. 후,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 말해 줘요. 지금 생각났을 때 해결합시다.”
지혁이 해교의 목덜미에 탁한 숨결을 흩뿌렸다. 젖은 숨이 내려앉는 살결에 야릇한 소름이 치밀어 놀란 해교가 움찔 허리를 튀었다.
검지가 뱀처럼 스멀스멀 탐욕스레 보지 둔덕을 훑었다. 학! 아흐응! 밖이라는 것도 잊고 해교가 갈라진 교성을 내뱉었다. 지혁은 가쁜 숨을 내쉬며 파드득 떨리는 작은 몸을 보고도 인정사정없이 중지를 더 깊이 쑤셔 넣었다.
어느덧 손등 뼈만 남기고 다 들어온 중지의 움직임에 자꾸만 숨이 차고 아래가 간질거렸다. 보지에 힘을 주자 선홍빛 보지 구멍이 벌렁이며 개폐를 반복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씹. 보지가 벌렁거리네. 후으. 어때요?”
“흐읏, 응, 으…….”
지혁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해교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더듬다 못해 추삽질하듯 저돌적으로 손가락을 쑤셔 박고 뽑아내는 것을 거듭할 때마다 찍찍, 쩍쩍, 질척이는 소리가 귓등을 울렸다.
지혁이 처덕처덕 손가락에 들러붙는 애액을 헤치고 음핵에 엄지를 댄 뒤 지그시 눌렀다. 동그란 살점이 짓눌리며 통통한 보지 양 날개 사이에서 왈칵 뜨거운 보짓물이 쏟아졌다. 그가 보지에 주는 압박을 멈추지 않자, 해교는 정전이라도 난 것처럼 눈앞이 깜빡깜빡 점멸하고 자궁 깊은 곳으로부터 야릇한 쾌감이 일어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아흐으……. 해교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쏟아지는 흥분감과 함께 어느덧 일어난 작은 자지가 당장이라도 정액을 쏠 것처럼 꺼떡이며 지혁의 손등을 때렸다.
지혁의 손가락이 빠른 속도로 보지 구멍을 문질거리자, 일어난 자지 끝 귀두에서 투명한 선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작하게 끓어오르는 쾌감이 보지에서부터 치밀어 목울대까지 번졌다.
흥분에 젖은 끈적한 신음이 나지막이 갈라져 나오고, 해교의 발가락이 꼼질거리며 바삐 움직였다. 힘이 빠진 손은 제가 깔고 앉은 방석 끄트머리를 붙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으, 으, 으응……. 간지, 흐으, 간지러워요, 우응.”
뜨겁게 익어 흐무러진 보지 구멍이 벌름거렸다. 어서 허전한 안을 가득 메워 달라는 것처럼 흐물흐물 풀려선 곧 쑤욱 밀려 들어올 자지를 기다렸다.
늘어난 구멍에서 조르륵 흐른 보짓물이 회음을 타고 뒷구멍을 적셨다. 촉촉하게 젖어 든 뒷보지가 화답하듯 주름을 죄었다 펴며 뜨거운 애액을 내벽 안으로 울컥울컥 빨아들였다.
“음. 지금도 보지가 간질거립니까.”
“아, 앙…… 네에…… 그리고 가……슴…… 읏, 가슴도 간지러워요.”
“보지를 손가락으로 만졌는데 가슴이 간지럽구나. 간지럽기만 해요?”
“그게…… 흣, 확실하진 않은데에, 하아, 가슴이잇, 조금 커진, 것 같기도 해서어…….”
호르몬 범벅인 연고를 매일 발라 댔으니 당연히 커졌겠지. 커지기만 했겠나. 차해교는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만 조만간 가슴에서 모유도 나올 예정이었다. 아, 부드러운 젖가슴에서 우유가 나오는 상상을 하자 단숨에 지혁의 자지가 터질 듯 부풀었다.
“그건 살이 올라서 그런 거 같은데.”
보지를 뒤적이는 손 외의 노는 손이 티셔츠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그러곤 가늠하듯 도톰한 젖가슴을 성큼 쥐고 마구 반죽하였다.
“힉……. 하아앙.”
“그럼 면역력이 길러지고 건강에 도움이 되죠.”
역시 살이 쪄서 그런 거였구나. 선생님이 열심히 봐주시고 약도 주시는데 괜한 걱정을 한 듯했다. 젖가슴을 저돌적으로 유린하는 지혁의 손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해교가 밭은 숨을 내쉬며 허리를 뒤틀었다.
지혁은 천천히 가슴 몽우리 주변을 주물럭대다가 손톱으로 쏙 들어간 함몰 유두를 스쳤다. 우읏……. 살살 떨리는 유두로 다시 돌아온 손가락이 파인 부분에 손톱을 박곤 아래위로 긁어내렸다. 커다란 손바닥이 주무르고 짧게 깎은 손톱이 쪼아 대는 젖가슴이 기분 좋게 저릿해 함몰 유두가 빳빳이 일어났다.
다른 손으론 예민한 붉은 보지 속살을 느릿느릿, 진득하게 비벼 오는 움직임에 해교가 어깨를 좁히곤 움찔움찔 떨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 흣.”
어느덧 해교는 흐리멍덩하게 풀린 눈을 하고 자지 선단에 바짝 힘을 주었다. 꺼떡거리는 자지에서 흘러내린 진득한 선액이 지혁의 손등을 허옇게 적셨다.
이런. 이러다 정말 여기서 싸겠다.
지혁이 낯에 어렸던 짓궂은 표정을 거두고 드로어즈에 넣은 손을 빼냈다. 그의 손은 질척한 보짓물과 선액이 엉겨 번들거렸다.
숨 막히게 쏟아지던 자극이 사라지자 해방감 대신 박탈감을 느낀 해교가 아쉬운 듯 눈두덩을 찡그렸다. 눈꺼풀에 매달린 기다랗고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여운을 내비쳤다.
“오늘 이야기가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지혁이 테이블 위 물수건으로 손등을 닦아 냈다. 전복으로 장난을 칠 때부터 한껏 솟아오른 좆 때문에 불편해진 그의 바지 천 역시 해교의 사정과 다르지 않게 터질 것처럼 팽팽했다.
얼른 자리를 마무리하고 병원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혁은 해교의 볼을 살짝 매만지더니 흐트러진 해교의 아랫도리를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을 끌면 가라앉을 거라 생각해 취한 행동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지혁과 해교는 생각처럼 쉽게 식당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 * *
“형! 어디 다녀온 거야?”
초조한 듯 발을 구르며 병원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지혁을 보자마자 반갑게 다가왔다. 지혁에게는 그리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던 듯 남자를 발견한 지혁의 표정이 심드렁해졌다. 방금 전까지 해교에게 보여 주던 부드러운 미소는 삽시간에 흔적을 감추었다.
“뭐야.”
지혁이 남자를 바라보며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커다란 지혁의 몸에 가려져 해교는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혹시나 해서 기다리고 있었지. 병원 불이 아직 켜져 있더라고. 내가 형 성격 잘 알잖아.”
“그럼 이런 짓 안 좋아한다는 것도 알 텐데.”
“아, 알지. 알아. 근데 진짜 오늘은 시간 딱 5분만 내줘라. 그럼 더 귀찮게 안 할게. 응?”
지혁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결론을 내린 듯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에 따라 쓸모 있을 듯도 했다.
“……해교 씨, 미안한데 진료실에 먼저 들어가 있어요.”
“네, 네.”
지혁은 출입 카드를 찍어 해교를 먼저 병원 안에 들인 뒤 남자에게 따라오라는 듯 턱짓하며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지혁을 따르는 남자는 설핏 긴장한 모습이었으나 아까 해교에게 보여 준 지혁의 미소에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그를 따랐다.
옥상에 발을 딛자마자 남자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환자지? 저런 환자도 와? 대박. 저런 애들은 좆 쓸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웬 비뇨기과? 형은 진짜 운이 좋다.”
미소를 싹 지운 형형한 눈이 눈앞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살갑게 웃고 있는 면상을 한 대 쳐 버리고 싶었다. 지껄이는 말에 따라 곧 주먹이 나갈지도 몰랐다.
“……예쁘게 생겼길래. 저런 애들 진료하면 진료할 맛 나겠다 싶어서 한 말이야. 형이 안 보여 주려고 하는 거 같길래 기를 쓰고 봤지.”
“저런 애들?”
“왜, 같은 남잔데도 이상하게 꼴리게 하는 애들 있잖아?”
“이게 뚫린 입이라고…… 분간 못 하고 내뱉네.”
서슬 퍼런 목소리가 남자의 입을 막았다.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던진 질 낮은 농담이 외려 분위기를 한층 더 가라앉힌 것이다.
은연중에 나타나는 지혁의 불쾌감을 눈치챈 남자는 곧 제 말을 얼버무렸다. 방금 같이 있던 환자를 희롱하는 말에 차갑게 일변한 분위기를 느꼈기에 쫓겨나기 전에 재빨리 목적을 말해야 했다.
“농담이야. 환자한테 더러운 말 한 거 잘못했어. 형, 나 자금 융통이 좀 힘들어서 왔어.”
“그래서.”
“진짜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회생할 수 있을 거 같아. 할아버지는 이번엔 절대 안 도와준다시고, 지헌이는 사업가 대 사업가로 해결하자고만 하더라. 형은 경영권에 관심 없잖아. 그러니까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사촌 좋다는 게 뭐야?”
입만 잘 털면 이번에는 가능할 것도 같았는데. 지혁의 앞에 선 남자가 답답한 듯 넥타이를 손으로 잡아 풀며 최대치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시큰둥해 보이는 한지혁에게 감정의 호소가 먹혀들지는 미지수지만.
“형님, 제발. 내가 이번 위기만 넘기면 다시는 손 안 벌릴게.”
“그런 것보다.”
“무슨 말 할지 알아. 말없이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거, 정말 다시는 안 할게.”
“그건 당연한 거고. 너 J&C 딸 알지. 나 대신 네가 걔랑 선봐.”
“어?”
“내 앞에 떨어진 시한폭탄 네가 대신 껴안아. 그게 조건이야.”
자꾸만 결혼을 들먹이며 귀찮게 하는 아버지의 입을 막아 버릴 속셈이었다. 무능력한 사촌은 저의 투자금 역시 홀라당 말아먹을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이런 유에서라면 충분히 효용 가치가 있었다.
남자는 잠시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듯 미간을 문지르며 골몰하다가 낮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수락하리라 예상했던 지혁은 볼일 다 봤으면 어서 꺼지라는 듯 계단을 향해 눈짓하였다.
“간다, 가. 근데 형. 표정 관리 잘해. 아까 그 환자, 누가 보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말 안 되는 건 알지만 형답지 않게 너무 정색을 하길래 쫄았잖아. 형이 정의로운 의료인, 뭐 그런 스타일도 아닌데.”
목적을 달성한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사라진 뒤, 지혁이 바닥을 보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하.”
입가를 매만지며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표정이 오묘했다.
* * *
[이도윤
와. 날씨 대박 더워요. 오늘은 뭐 해요? 오전 10:17]
[오전 10:25 일 가고 잇어요]
[이도윤
저는 방학 중이라 늘 시간 되는데 형은 언제 쉬어요? 오전 10:25]
요즘 들어 매일같이 연락하는 도윤에게 일하러 간다고 이른 말과는 달리 해교는 연제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가는 도중 버스에서 쉴 새 없이 새어 나오던 한숨은 마침내 당도한 연제의 집 현관문 앞에서도 이어져 나왔다.
초인종…… 누르기 싫다. 영원히 문이 안 열렸으면 좋겠다.
진작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지만 해교는 늘 초인종을 누른 뒤 언제까지고 우연제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일을 반복했다. 영원히 그렇게 거리감을 유지하고 싶다는 소리 없는 나름의 반항이기도 했다.
한참을 망설이다 힘없이 현관문 옆 초인종을 눌렀다.
연제의 응답을 기다리며 미처 답하지 않은 도윤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려 하자마자 달칵, 해교에게는 한없이 거대하게만 느껴지는 철문이 열리며 연제가 등장했다.
“왔으면 바로 들어오지, 언제까지 고사 지낼 거예요?”
“새, 생각 좀 하느라. 들어갈게요…….”
뭘 좀 마시겠냐고 물어도 딱히 대답 없는 해교에게서 뒤돌아 연제는 거실에 놓인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 기대앉아 허벅지를 벌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해교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듯했다. 입술을 말아 물고 잠시간 버티던 해교는 포기한 듯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얌전히 고간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미리 풀어 둔 바지 버클 아래 지퍼를 내리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 얼굴과 대조되는 검붉은 자지를 보고 망설이는 듯 숨만 내쉬자 연제는 해교가 물러날 수 없게 목덜미를 단단한 손으로 꽉 붙들었다. 그러곤 흉흉한 성기를 쥐곤 툭, 툭 해교의 입술에 문질렀다.
아직 피가 몰리지 않았는데도 거대한 살덩이에서 살냄새와 함께 진한 열기가 훅 전해져 왔다.
“이 세우지 말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아, 해요.”
보드라운 입술에 좆 대가리를 두어 번 치자 기대감에 자지는 점점 더 몸집을 불려 갔다. 후우……. 연제의 잇새에서 뜨거운 숨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조그맣게 벌어진 해교의 입술 사이를 꿰뚫으며 살덩이가 들이쳤다. 곧 거대한 좆 기둥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귀두 끄트머리만 물어도 입 안이 가득 차는 크기의 자지가 들이치자 불뚝불뚝 튀어나온 핏줄이 볼 안 점막으로 생생히 느껴졌다. 거대한 살덩이가 여린 점막에 닿을 때마다 꺼떡거리며 여기저기를 쑤셔 대는 탓에 구역질이 났다.
“크, 켁…….”
겨우 문 귀두를 뱉어 내다 다시 물었다. 우연제에 의해 몇 번 강제로 해 보긴 했지만 여전히 해교는 펠라에 요령이 없었다. 점점 더 묵직해지는 자지의 양감에 해교가 작은 턱을 한계까지 벌리곤 헐떡였다.
굴곡진 입천장을 긁는 귀두 구멍에서 진득한 선액이 살짝 흘러나와 침과 함께 섞였다. 움직이는 자지에 설소대가 찔리자 놀란 혀가 튀어 오르며 귀두 갓과 기둥 사이를 훑었다. 욱, 우으……. 뜻하지 않게 예민한 부위를 핥아 내리는 혀 때문에 흥분한 살덩이가 한층 더 커진 채로 목구멍을 쑤셨다.
연제가 허리에 힘을 주고 샅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쩌걱, 살 맞닿는 소리가 나면서 조그만 입으로 굵은 선단이 더욱 깊이 밀려 들어왔다.
“웁, 우읍.”
“제대로 안 하니까…… 후아, 내가, 하잖아요?”
퍽, 퍽. 해교의 뒷머리를 붙든 연제가 앞뒤로 몸을 흔들어 대며 더, 더 깊이 자지를 박아 넣었다. 버거운 살덩이가 목젖을 치니 절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내리깐 속눈썹 끝에 동그란 물방울이 맺혀 흔들거렸다. 커다란 귀두가 푹푹 목구멍을 쳐 댈 때마다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가를 타고 흐른 눈물과 입가를 타고 흐른 타액이 턱 끝에서 만나 연제의 고간에 턱턱 부딪히는 바람에 아직 다 벗지 않은 연제의 드로어즈 천이 축축해져 갔다. 턱 끝에서 흘러내리는 침이 은실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끊어지길 되풀이했다.
인정사정없이 허리를 쳐 올리고 빼낼 때마다 자지가 박혀 드는 말간 얼굴이 무력하게 뒤흔들렸다. 오로지 뒷머리만 붙잡은 채 우악스럽게 파고드는 터라 눈앞이 핑핑 돌 만큼 어지러웠다. 도무지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휩쓸리는 탓에 해교는 연제의 갈라진 허벅지 앞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고개를 박았다. 그래도 휘청거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귀두가 입천장을 강하게 긁어 내리고 주름진 고환이 해교의 보드라운 얼굴 살결을 찰싹찰싹 쳐 댔다. 묵직한 성기와 맞닿는 모든 부위가 마찰열로 뜨거워졌다.
연제는 따뜻한 점막이 주는 촉감을 만끽하며 얌전한 얼굴을 뚫을 것처럼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생긴 얼굴은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고 야한 냄새가 얹어지니 걷잡을 수 없는 색기가 묻어났다.
“씨, 팔……. 더 조여 봐요……. 후…….”
잔뜩 흥분한 숨결이 아래로 떨어졌다. 연제의 말에 해교가 입가를 찢을 만큼 가득 들어찬 자지를 입술로 조였다. 여전히 어설프기만 한 조임이지만 전보다 한결 나았다. 서서히 거대한 좆에서 물밀듯 프리컴이 쏟아져 나왔다. 확연히 느껴지는 비리고 쓴맛에 해교가 얼굴을 찌푸린 채 눈물을 흘렸다.
“형. 입 보지가 영 별론데, 하아, 그냥 밑 보지 써야 하나 봐.”
“으……븟…… 으, 웁.”
“자지 구멍에 혀 넣어요. 혀 뾰족하게 만들어서, 후으, 쑤셔 보라고.”
해교는 연제의 말에 따라 혀를 세워 귀두의 갈라지고 팬 부분을 긁었다. 읍……! 연제가 장난처럼 허리를 얕게 쳐 올리자 할짝이던 혀가 놀라 모습을 감추었다. 동시에 해교 한쪽 뺨에 불룩하게 자지 선단이 튀어나왔다. 연제는 튀어나온 복숭앗빛 뺨을 쓰다듬으며 눈을 휘어 접었다.
체액의 양은 자지 크기에 비례하는 건지, 말 좆 같은 연제의 자지는 프리컴의 양 또한 상당했다. 입 안 가득 자리한 귀두 끝에서 쌉싸름한 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제대로 호흡할 수 없어 간간이 옅게 새어 나오는 숨이 연제의 음모에 맺혀 열감을 뿜어냈다. 거대한 귀두가 목구멍을 막을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와 입 안이 좁아지며 꿀렁거렸다. 하아, 허억……. 그 자극에 연제의 자지가 더욱 흥분해 마구잡이로 몸통을 쑤셔 박았다.
“하…… 후.”
아래를 쓰느니 차라리 지금 마무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해교가 본능적으로 빠르게 고갯짓을 하였다. 저도 남자이니 어떤 식의 자극이 사정에 도움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쩌걱쩌걱, 물기 가득한 살덩이가 입술을 오가며 적나라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하디연한 입가는 이미 찢어진 것처럼 아팠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숨까지 참아 가며 바삐 입 안을 조이고 고개를 흔들어 보았지만 연제의 자지는 도무지 사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린 입 안 점막을 이리저리 짓치는 말 좆의 선단 윤곽만 또렷하게 해교의 볼에 자국을 남길 따름이었다.
연제는 해교의 머리칼을 움켜쥐어 얼굴을 고간으로 더 가까이 당겼다. 웁, 읍! 퍼덕이는 해교를 상관 않고 꺼떡이는 자지에 힘을 주었다. 깊숙한 입 동굴 속에 처박힌 성기는 연제의 허리 짓에 따라 목구멍을 열고 좆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후우…… 씹.”
샅에서부터 뜨끈한 열이 번졌다. 뜨겁고 좁은 점막을 꿰뚫으며 전진하는 자지가 주는 감각에 연제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몸을 떨었다. 달뜬 눈을 반쯤 내리깐 연제의 두꺼운 허벅지엔 바싹 힘이 들어가 또렷한 근육이 솟아났다.
목구멍이 제멋대로 자지를 조이며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탓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담그고만 있어도 곧 사정감이 일 것 같았다. 연제가 가쁜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다.
이대로 목구멍에 싸기 아까웠던 연제는 해교의 자그만 입 안에서 자지를 뽑아내었다. 힘겨워하던 해교는 자지가 빠져나가자마자 고개를 꺾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사레가 들린 듯 켁켁거리는 해교의 입에서 프리컴 섞인 침이 줄줄 흘러 바닥에 고였다.
막 흘러내린 침과 눈물로 엉망인 얼굴이 꼴렸다. 연제는 귀두와 기둥 사이를 붙들고는 자지를 해교 얼굴 위로 조준하였다. 그러자 얼굴 위 자지가 맥동하며 살갗을 툭툭 치대는 것이 느껴졌다.
진득한 점성의 액체가 해교의 자그마한 얼굴 위로 후드득 쏟아졌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사이와 붉은 입술 위를 끈적한 좆물이 뒤덮었다. 뜨겁고 역한 재질의 체액이 얼굴을 뒤엎자 이미 한차례 본인을 훑고 지나간 굴욕감이 다시 일어 해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학, 허윽, 큽…….”
역한 정액 냄새에 뒤늦게 들이켠 숨이 버거웠다. 밭은 호흡을 내쉬느라 오르내리는 몸이 가늘게 떨렸다. 연제는 검지로 해교 눈썹 위의 점액질을 훑곤 도톰한 입술 위에 얹어 주었다.
“핥아. 마무리해야죠.”
“흐윽…….”
해교는 제 입술 위의 역겨운 정액을 핥아 낸 뒤 체액으로 흠뻑 적셔진 연제의 자지 또한 빨아야 했다. 붉게 달아오른 눈꼬리와 하얀 얼굴 곳곳에 아직 닦지 않은 정액이 점점이 튀어 있었다.
끝내주게 야했다. 해교의 얼굴이 주는 시각적 자극에 방금 싼 자지가 다시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몸을 불렸다.
“앞, 뒤?”
“하으, 흐으…….”
“지금 앞보지로 할지, 뒷보지로 할지 형 의사 묻고 있잖아요. 착하게.”
“……우우, 윽.”
“하여간 개보지 아니랄까 봐. 둘 다 하고 싶은데 선택권을 줘서 그런 거죠. 내가 좆 하나만 달고 태어나서 형을 아쉽게 해서 어떡해.”
“으, 아, 아니, 에요, 흐으…….”
아직도 숨이 차 헥헥대는 해교의 얼굴은 불그스름했다. 그 꼴이 또 꼴려 연제는 곧바로 해교를 깔아뭉갰다. 억눌린 해교가 흡, 숨을 멈추고 뻣뻣해진 목뒤에 최대한 힘을 주어 그에게서 떨어지려 애썼다.
그러자 어림없다는 듯 꼭 해교가 물러난 만큼 다시 다가온 연제가 해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 맡아도 생김새처럼 여리고 부드러운 체향이 났다. 아무리 같은 섬유유연제를 써도 이도윤 따위와는 결이 달랐다.
잠시 떠오른 도윤의 생각에 연제가 미간을 구겼다. 이 좋은 와중에 이도윤 생각이라니.
한참 해교에게 얼굴을 박고 있던 연제가 고개를 들었다. 이젠 또 뭘 하려나, 짐작도 하기 전에 연제는 해교의 턱을 쥐었다.
언제부터인가 본격적인 섹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은 키스가 되었다. 연제는 예전과 달리 앞보지나 뒷보지에 대뜸 달려들어 지분대기보다는 입술을 맞대는 걸 좋아했다. 섹스를 하고 있지 않을 때도 자꾸만 입술을 들이밀고 싶어진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그렇게 시작된 좆질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몇 번이나 박고 싸기를 반복하다 해교가 실신하기 직전까지 갔을 때, 연제는 마침내 해교의 보지 안에 처박아 두었던 자신의 자지를 꺼냈다. 지독히 붉게 달아오른 소음순 사이사이에 끼인 허연 정액 덩어리가 뚝, 뚝 사타구니를 타고 흘렀다.
“아무리 좆질이 좋아도 밥은 먹어야지. 전에 형이 잘 먹던 데서 시켜 놨어요.”
연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해교를 가볍게 안아 들곤 욕실로 향했다. 무섭게 몰아붙일 때와는 달리 다정한 손길로 기력이 다한 해교의 몸 구석구석을 씻겨 주었다. 그런 뒤 뽀송하게 온몸을 말려 주기까지 하곤 당연한 듯 제 옷을 내밀었다.
“입고 온 옷…… 입을게요.”
“하긴, 좀 크긴 하죠? 집에 형이 입을 만한 옷 좀 사 둬야겠어. 이따 같이 사러 나가요.”
대체 얼마나 더 만나려고 집에 옷까지 사서 둔다는 건지. 해교는 차마 기한을 묻지는 못한 채 조용히 입술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 옷을 산다고 통보해서인지 연제는 자신이 입고 온 옷을 다시 입는 해교를 딱히 저지하지 않았다.
삐빅.
옷을 입고 얼마 되지 않아 현관문에서 익숙한 기계음이 울렸다. 아직 식사 배달이 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연제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현관을 바라보자 잘 아는 목소리가 뒤이어 들리고, 목소리의 주인은 제집이라도 되는 양 망설임 없이 연제 집 거실로 들어서 진짜 주인을 불러 대었다.
“우연제, 집에 있어?”
“너 또 왜 왔어.”
“친구가 오는데 왜라니. 서운하게. 어? 안녕하세요. 오늘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해교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음 지은 도윤이 연제를 향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저번에 너랑 보드 타러 갔다가 이 집 팬트리에 내 장비 그대로 두고 왔잖아.”
그러니까, 한여름에 갑자기 보드 장비를 찾으러 왔다는 말이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갑자기 보드 장비는 왜? 보드 타러 출국이라도 해? 아니면 죽어.”
“뭐 꼭 보드를 탈 때만 장비를 챙겨? 미리미리 닦아 놓고 준비해 둬야 안 상하지.”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도윤은 최근 예고 없이 자주 연제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해교에게서 일이 있다는 이야길 들을 때마다 혹시, 하며 찾아오긴 했지만 항상 해교를 만날 수는 없었으므로 헛걸음도 잦았다.
하지만 매번 우연제에게 냉대받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오기 부린 결과로 오늘처럼 만남이 성사될 때가 있었다. 마주쳐도 길게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곧 우연제의 집에서 나와야 했지만 잠깐이라도 해교를 만나고 나서는 길이면 입꼬리가 바짝 올라붙었다.
원체 연상과 괴리 없이 잘 지내는 타입이었다. 살다 보면 유독 호감이 가는 인간상도 만나기 마련이었고, 그런 흔치 않은 사람과는 응당 연을 이어 가는 것이 마땅했다. 그래서 도윤은 해교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후.”
연제는 짜증스러운 마음에 미간을 잔뜩 구겼다. 삐딱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저도 모르는 새 힘이 들어간 턱에는 근육이 잡혀 심까지 서 있었다.
“야. 너 나한테 불만 있어?”
“무슨 말이야.”
“후우……. 이도윤. 암만 너랑 나 사이라도 요즘 방문이 너무 잦다고 생각 안 해?”
“우연제. 오해하지 마. 정말 보드 장비 찾으러 온 거야. 타러 갈까 싶은 마음도 있었고. 네 말 들으니 짧게 여행 다녀와도 좋겠다.”
부아가 치민 연제를 달래듯 도윤이 활짝 미소 지으며 가볍게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연제가 화를 삭이며 한숨을 내쉴 때, 도윤은 짧은 틈을 타 해교와 눈을 마주치며 찡긋거렸다.
“장비, 다용도실 옆 팬트리에 있어. 찾아가.”
보드 장비를 챙긴 도윤이 곧바로 나갈 수 있도록 현관문을 열어 두곤 연제가 밖에 서 있었다. 언제 나가나 지켜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이도윤이 눈치 없는 놈도 아닌데 이렇게 구는 건 필시 이유가 있어서일 터. 날을 잡아 제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나 곰곰이 따져 봐야 할 판이었다.
“어휴. 우연제. 간다, 가.”
이래서야 안 가려 해도 안 갈 수가 없었다. 도윤은 작게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팔꿈치로 연제의 옆구리를 쿡, 찌르곤 집을 나섰다.
[오후 15:35 오늘 운 좋게 만나서 좋았어요. 형, 그럼 나중에는 약속 잡고 봐요ㅎㅎ(이모티콘)]
연제에게 쫓겨나고도 웃음이 나는지 차에 장비를 실은 도윤은 해교에게 춤추는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내곤 운전대를 잡았다. 다음엔 해교의 동네로 가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