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도착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주차를 마친 한정원이 해맑게 외쳤다. 지한은 김신우와 맞잡고 있던 손을 뒤로 슬쩍 물렸다. 그러나 김신우는 그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등을 더욱 꽉 감싸 쥐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예기치 못한 행동에 지한의 낯빛 위로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부르릉, 시동을 끈 한정원이 손목의 시계를 힐끗 보았다.
“아직 시간이 여유 있어서, 조금 더 쉬고 계셔도 될 것 같아요!”
뒤로 고개를 돌린 그가 나란히 앉은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그들의 맞잡은 손을 발견하진 못했으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포착했다. 딱 붙어 있는 모습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색하게 이어지는 정적에 한정원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어…. 우선 저는 정 감독님 먼저 뵙고 올게요. 잠깐 계세요! 한아. 잠깐 있어?”
“응.”
경직된 지한이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문을 열고 내렸다. 문이 닫힌 후에야 지한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창가로 시선을 돌린 채 미동 없는 김신우를 바라본다. 평소와 달리 저를 보지도 않는 데다, 언뜻 보이는 옆얼굴은 무표정했다. 화가 난 건가. 그러나 화가 났다고 하기에 맞잡은 손은 놓치기라도 할세라 꽉 쥔 채였다. 틈 없이 맞물린 손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지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만 보라던 의미심장한 말 이후 그는 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의도치 않게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듯했다.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깐 지한이 엄지로 그의 손등 위를 살살 문질렀다. 짧은 정적 끝에 고르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제가…. 뭐 잘못했나 봐요.”
말하는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웃을 분위기는 아니건만, 어딘가 심기 불편한 김신우의 얼굴이 조금 귀여워 보인 탓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김신우가 지한을 응시했다. 하나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이는 듯했다.
코끝을 살짝 찡그린 지한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원래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데….”
말하며 살짝 헛기침했다.
“가끔 조금, 어려울 때가 있어요. 뭐 때문에 그러는지,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그런 면에선 뭐, 둔한 편인 것 같기도 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다소 담담하게 이어졌다. 최대한 신중하게 말을 하려다 보니, 두서가 없고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간 겪어온 김신우는 변화무쌍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그에 대하여 잘 안다고 자신하는 편이었으나, 그는 이따금 전처럼 종잡을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김신우의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지한은 종종 곤란해졌다.
눈치나 융통성이 없지는 않았다. 짧은 연애 경험만으로도 다툼의 시발점이 대부분 대화 부족에서 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하여 그럴 때마다 솔직하게 제 생각과 감정을 전하는 일을 최선으로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진지하게 누굴 만나 본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가, 아무래도 좀 서툴고, 어렵기도 해요….”
지한은 마치 달래듯 그의 손등 위를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은 몇 번 있었으나 깊은 만남이 아니었다. 개중에도 누군가를 이만큼 진심으로 대해 본 적도 없었다.
그 또한 조바심이 나지 않을 리 없다.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한 배우와의 연애라니. 그것도 같은 남자였다. 현실 같지 않은 모든 것이 현실임을 자각할 때마다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많이 부족하고 그래도…. 맞춰 가면 되는 거니까….”
잠시 말을 멈춘 지한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러니까 경험 많은, 당신이 좀 이해해 줘요.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원하는 걸 알려 주고, 혼자 삭이거나 감추는 건 없으면 좋겠고.”
작게 숨을 삼키곤 천천히 말을 잇는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말로 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모르는 일로 당신이 속상해하는 건 싫어요. 그래서 서로 감정에 솔직해졌으면 하는데. 가끔은 이런 말 꺼내기도 조심스러워져서…. 하,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네…. 미치겠다.”
한숨처럼 웃어 보인 지한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낮게 침음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전하고 싶은 말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 꼬여 들었다.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던 것도 아닌데, 괜한 염려가 잔뜩 부푸는 바람에 긴장감마저 돌았다.
입을 다물고 눈을 치켜뜨자 김신우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지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희게 질려 좋지 않은 안색을 하고서.
불안한 걸까, 그 정도로 좋은 걸까.
마음을 알게 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건만, 그런 그를 인지할 때마다 낯선 감정이 드는 건 여전했다. 그토록 까탈스럽던 남자가 자신이 없으면 잠도 못 잘 정도로 푹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이 종종 믿기지 않았다. 분에 넘치는 애정을 받는 것 같았다.
눈가를 찡그린 지한은 제 이마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여전히 감도 잡지 못한 주제에, 뭐라도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냥….”
문득 옅은 밤색 동공에 담긴 자신이 보인다. 말끄러미 저를 향하는 온전한 시선에 뜨거운 감정이 넘실거렸다. 온갖 유창한 표현들이 심장을 마구 헤집는다. 그러나 어느 하나 콕 짚어 건넬 수 없을 만큼 어렵게만 느껴졌다.
“좋아합니다. 진심으로.”
그러니, 또 멋없는 진심을 내뱉을 수밖에.
“난 그것만 믿어 주면 돼요.”
말하며 지그시 시선을 맞췄다.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하며, 제 손등을 감싼 손바닥 아래서 벗어나 다시 그의 손을 꽉 감싸 쥐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처음이에요. 이런 감정 느낀 거.”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김신우의 눈 아래가 움찔 떨렸다. 느닷없이 차에서 던질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언뜻 알 것도 같아서였다. 정적 속에서 지한은 평소답지 않게 어딘가 어색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귀 끝이 살짝 달아올랐다.
“…알아요.”
김신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다문 입술 사이로 옅은 숨을 흘려보낸다.
그가 문란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오해란 것도, 연애나 성 경험이 그다지 없다는 것도 이제는 전부 알고 있었다. 하나 그와는 별개로 바짝바짝 타오르는 갈증은 심해져만 갔다.
어떤 것을 빗대어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가 절실했다. 감당하기 벅찬 감정에 잠겨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 눈빛, 손짓, 숨결,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까지도 모조리 다 자신을 향하기를, 전부 제 소유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눈, 코, 입,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자근자근 씹어 삼켜 하나가 되고 싶었다.
완전히 비틀린 감정에 속이 까맣게 탔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현듯 뻗어 나간 팔이 지한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그다지 힘이 실리지 않은 손길에도 지한은 쉽게 딸려왔다. 체념한 얼굴의 김신우가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키스해 줄래요.”
그는 더 다가가지 않고, 지한의 허리를 다시 끌어당겼다. 마치 네가 먼저 오라고 부추기는 듯한 모양새였다.
“오랜만에 촬영이라 떨려서 그래요.”
말하며 그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던 지한은 느닷없는 요구에 기다란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곱게 드리운 속눈썹이 예쁘기도 했다. 하나 굳은 낯빛은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한은 홀린 듯 손끝으로 그의 뺨을 쓸어주었다. 안쓰럽다. 기실 몇 달 만의 촬영인 데다 몸 상태까지 저조하니, 제아무리 베테랑 배우라도 힘들겠단 걱정부터 들었다.
힐긋, 짧게 차 문을 바라본 지한의 손이 망설임 없이 뻗어 나갔다. 손바닥으로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가자, 김신우가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포개졌다. 지한은 약하게 그의 입술을 빨았다. 촉, 초옥. 뜨거운 입술을 머금고 익숙하게 혀를 밀어 넣어 그의 혓바닥 아래를 문질렀다. 그 또한 자연스럽게 지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맞닿은 체온에 안정을 느낀다. 그것이 못내 좋았다. 돌연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김신우가 그의 등을 더 드세게 끌어안았다. 톱니바퀴처럼 완전히 맞물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취할수록 배가 고프고, 마실수록 갈증이 났다.
부드럽게 시작된 입맞춤은 그의 갈급한 몸짓에 점점 더 농밀해졌다. 완전히 밀착된 두 남자의 사이에서 뜨끈한 열기가 바글바글 끓어오른다. 금세 또 아래가 뻐근해지고 몸이 달아올랐다. 지한은 제게 딱 들러붙어 오는 김신우를 살짝 밀어냈다.
“하아…. 잠깐.”
“…….”
“이따가, 촬영 끝나고…. 해요.”
지한은 가쁜 숨을 뱉었다. 그리고 엄지로 그의 젖은 입술 위를 닦아주었다. 장소도 장소거니와, 가벼운 입맞춤을 하려고 했던 거지 이런 식의 끈적한 키스를 나눌 생각은 아니었다. 혹여 한정원이 문을 열고 들이닥칠까 봐 신경 쓰이는 부분도 있었다.
“방으로 갈 테니까, 오늘은 같이 자요.”
말하며 그의 입술 위로 한 번 더 짧게 입을 맞췄다.
원래대로라면 한정원과 방을 함께 썼을 것이다. 하나 자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김신우 탓에 새벽에 자리를 비워야 했다. 내일도 고된 촬영이 이어질 테니 김신우가 최대한 편하게 쉴 수 있었으면 했다.
혹시라도 한정원이 중간에 깰 것을 염려해, 그에게 방을 따로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조금 의아해하는 듯했으나 별말 없이 수긍했다.
가만히 지한의 얼굴을 주시하던 김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과 초조가 깃든 눈빛이 지한의 눈동자 위를 스쳐 지나갔다.
“어디…. 가면 안 돼.”
맥락 없는 말에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이내 어깨 위로 힘없이 툭 이마를 기댄 김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서 떨어지지 말아요.”
“…….”
“딴 사람 보지 말고, 한눈팔지 말아요. 다른 놈들 앞에서 웃어 주지 말고, 나 외에 다른 새끼들이랑 시시덕대지 말아요. 제발, 나는 형이 그럴 때마다….”
씨발,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불쑥 튀어 나가려던 말을 억지로 삼킨다.
“형이 그럴 때마다…. 무서워요.”
“…….”
“나 버리고 다른 놈한테 갈까 봐.”
내뱉지 못한 흉악함을 담은 입술 끝이 비뚜름해졌다. 그 마음은 속으로만 넘겼다. 험한 말을 하지 말아야 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줄이는 편이 좋았다.
공지한, 공지한에게 잘 보여야 했다.
살벌한 속을 모르는 지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목을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일부러 귀여워 보이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거죠.”
“…….”
“이제 더 잘 보일 것도 없는데.”
다정하게 속삭이며, 가만히 제 품에 안긴 김신우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는다.
그저 결핍이었을 뿐, 이토록 귀엽고 순한 사람인 것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날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이따금 후회도 됐다.
“…귀여웠어요?”
가만히 그의 쓰다듬을 받던 김신우가 온순한 고양이처럼 이마를 비벼댔다. 지한의 허리를 감아 끌어안고는 중얼거린다.
“귀여웠냐고요. 형.”
“…네.”
“이런 거 좋아해요?”
“몰랐는데, 그랬나 봐요.”
묻는 말에 지한은 또 낮게 웃었다. 나직한 웃음 사이로 김신우는 피로에 지친 눈을 감았다.
최종적인 목표는 공지한을 완전히 갖는 것이다. 다른 연놈들은 눈에 들일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제게 완전히 빠져들게 할 것이다. 좋아하는 걸 전부 기억했다가 질리도록 보여 줄 것이다. 그러면….
아니지, 질리다니. 절대로 그딴 일이 벌어져선 안 돼.
불현듯 제가 떠올린 생각에 폭풍 같은 불안이 치닫는다. 전과같이 냉랭하고 경멸 어린 눈빛의 공지한을 떠올리자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간 제게 매달려오던 숱한 여자들이 떠오른다. 초면에 느낀 호기심 한 자락조차 고작 몇 번의 섹스 끝에 완전히 소모되곤 하던 경험 또한 또렷했다.
진짜 질려 버리면 어떡하지. 씨발, 그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머리가 또 지끈거렸다. 한 치의 틈 없이 맞붙은 두 남자가 상반된 감정에 젖어 있을 때, 돌연 정적을 헤치고 드르륵, 문이 열렸다.
“저어, 이제 나오셔도 될 것 같아요!”
한정원의 커다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움찔 놀란 지한이 급히 그의 어깨를 붙들고 홱 떼어냈다. 그는 차 문을 잡은 채로 고개를 쭉 빼 들었다.
“어…. 한아, 혹시 그 뒤에 검정 재킷 있어?”
“아. 재킷?”
다소 당황한 얼굴의 지한이 김신우에게서 조금 더 떨어져 앉았다. 별 감흥 없는 눈길로 한정원을 응시하던 김신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씨발…. 타이밍하고는.
혐오가 깃든 적나라한 눈길에 한정원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문 옆으로 서 있는 한정원의 위로 냉랭한 시선이 꽂혔다.
저 새끼부터 눈앞에서 치워 버려야 하는데.
저런 수준 낮은 놈에게 그가 푹 빠져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 끼칠 정도로 좆같은 기분이 몰려왔다.
***
“자, 다시 들어갈게요!”
스태프의 외침과 함께 촬영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카메라 앞에 선 김신우가 상대 배우 설지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간 중단되었던 드라마의 전개가 절정에 치닫고 있느니만큼, 대본 속 두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차례였다.
짠 기 어린 바닷바람과 함께 파도치는 소리가 철썩철썩 울려 퍼졌다. 하나 가만히 지켜보는 지한의 마음은 그리 잔잔치 못했다.
미리 훑어본 대본에 키스 신이 있었다. 과거 스크린 속 김신우의 키스 신을 시청한 적은 있었으나, 눈앞에서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로는 더더욱.
바닷가에 선 두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녀를 품에 안은 주인공이 사랑의 언어를 부드럽게 속삭이고, 상대가 눈물을 터뜨릴 때 다정한 키스가 이어질 것이다. 차 안에서 읽어보았던 시나리오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로맨스 장르로 여심을 휘어잡았던 그가 수없이 해 오던 것들이고, 그의 본업이었다. 사적인 감정이 담긴 시야로 좁게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지한은 커다란 카메라 앞의 선남선녀를 응시했다. 스태프들의 시선 또한 그 중심으로 모였다.
철썩이는 파도와 바람 소리, 대사를 읊는 김신우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사위에 조금의 잡음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한 얼굴의 김신우가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그가 손을 뻗자, 가느다란 허리가 단단한 팔 안에 폭 안겼다. 상대의 뺨을 쥐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김신우와 그녀의 거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던 지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툭 떨군다. 심장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 생애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흡연이 고파졌다.
“형, 나 담배 좀.”
옆에 서 있던 한정원에게 얘기하고는 등을 돌렸다. 돌아오는 답은 듣지도 않은 채, 평소보다 빠른 보폭을 좁혔다.
미리 보아 둔 흡연 구역에 도착했다. 필터를 입에 물곤 눈썹을 살짝 찡그린 지한이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인 뒤 턱을 살짝 들며 길게 내쉬었다. 시선은 저 멀리 드넓게 펼쳐진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 감독이 심사숙고하여 고른 장소이니만큼 전망 하나는 끝내주는 곳이었다.
파도 소리 사이로 연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만 미미하게 번졌다. 묵직했던 속이 한결 편안해지는 듯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희뿌연 연기 사이로 설지현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김신우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종전까지 제게 키스해 달라며 조르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의도치 않게 밀려온 감정에 지한은 눈가를 찡그렸다. 아무리 연기라 해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연인의 입맞춤을 보는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실수는 하지 않는 사람이니, 두 대 정도 피고 들어가면 끝나 있겠지. 생각에 잠겨 뭉툭해진 꽁초를 지져 끄던 지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낯설다. 좋아한다는 것 이상의 짙은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10년 가까이 한정원을 좋아해 왔다고 자부하던 것이 무색할 만큼 생소한 감정이었다. 보호해 주고 싶고, 지켜 주고 싶던 마음과는 간극이 있었다. 그보다 더 큰 집착과 질투, 갈망이 섞여들었다.
생각하며 다시 불을 붙였다. 이질적인 감정이 신기롭다. 서툴고 생소한 제모습이 싫지도 않았다. 외려 좋았다. 누군가를 이토록 바라는 것도, 또 그만큼 상대가 저를 바라는 것도.
부드러운 맛이라고는 전혀 없는 제 몸에 발정하는 그였다. 옅은 눈동자에 스민 초조와 불안이 거짓이 아님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뜻 닿기만 해도 발기하는 그의 속내는 투명하기만 했다. 그것이 못내 좋았다.
생각을 마친 입술 끝에 미소가 걸린다. 하아, 흰 연기에 같잖은 잡념이 흩어졌다. 떠올린 상상이 멋쩍은 듯 이마를 만지작대던 지한은 저도 모르게 또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세 개의 불을 끄고 나서야 그는 다시 등을 돌렸다.
촬영장으로 돌아가니 예상대로 키스 신은 끝나 있었다. 여전히 돌아가는 카메라 앞, 모래사장 위를 걷는 두 선남선녀가 보였다.
지켜보던 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렇게 얇은 옷을 입고 오래 서 있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를 텐데. 아무리 날이 풀렸다고 해도 바닷바람은 아직 찹찹했다. 두툼한 흉통으로 위압감을 주던 김신우의 첫인상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한아. 이거 마셔.”
불현듯 한정원이 병 음료를 내밀었다. 고개를 돌린 지한이 그것을 받아 들자, 따끈한 온도가 손바닥에 감겨 왔다. 꿀물이었다.
“배우님 감기 심하시대서 꿀물 사 왔어. 컨디션 안 좋아 보이시긴 했는데, 아프신 줄은 몰랐네….”
느닷없는 말에 지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봄 감기가 그렇게 독하다던데 너도 안 옮게 조심해. 요즘 엄청나게 붙어 다니잖아.”
지한은 손에 쥔 꿀물 병을 바라보다, 다시금 한정원을 응시했다. 조금 의아한 얼굴이었다.
“…감기래?”
“응. 목감기 심해서 설지현 배우님 옮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던데, 클로즈업 키스 신 풀샷으로 빼서 촬영했어. 배우님 생각보다 엄청 다정하시더라….”
조곤조곤 전하는 말에 지한은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밴 안에서의 그가 떠오른 탓이다.
‘키스해 줄래요.’
‘오랜만에 촬영이라 떨려서 그래요.’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긴 했지만…. 감기 같지는 않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살짝 웃음이 샜다. 그냥, 불현듯 그가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진 탓이다. 어릴 적에도 보이지 않던 제 팔불출 같은 모습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컷! 컷! 그만!”
정 감독의 외침에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찾을 필요도 없이 저를 보고 있던 김신우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얽히자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따로 조명을 켠 것도 아닌데 멀리서도 환히 빛났다. 눈이 부시도록 예쁘다. 아무렴 팬이 많은 이유가 있지, 저 미소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지한은 괜스레 주변을 살짝 훑었다.
제게 들러붙는 스태프와 사람들을 제친 그가 곧장 지한에게로 걸어왔다. 자리에 그대로 서서 기다리던 지한이 작게 웃었다.
“고생하셨어요.”
말하며 그의 어깨 위에 겉옷을 둘러 주었다. 어둑해진 하늘엔 노을이 지고 있었고, 오늘 촬영분은 여기까지였다. 다음 일정은 각자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내일 다시 진행될 예정이었다.
뒷정리로 소란스러워진 촬영장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밴에 올라탔다. 차는 한정원이 예약해 놓은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10분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여기야?”
차에서 먼저 내린 지한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언덕 너머 바닷가 앞의 한적한 독채 펜션은, 지난 촬영 때 묵었던 모텔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펜션?”
“아, 응! 여기 주변이 워낙 시골이라. 마땅한 곳이 없더라구. 지난번 모텔에서는 쥐 나왔었잖아…. 으으. 여긴 신축이라 깔끔하고, 독채라 간섭 없고. 방 네 개에 화장실도 두 개라 훨씬 나을 것 같아서. 방은 네가 말한 대로 따로 쓰면 돼!”
쥐 얘기를 하며 양팔을 문지르던 한정원이 뿌듯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배우님은 2층에 큰 방 쓰시면 되고요, 거긴 방 안에 욕실이랑 베란다까지 있어요. 한이 너는 1층 방 아무 곳이나 맘에 드는 곳 써.”
지한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계획과 좀 틀어져 버렸다. 숙박업소도 아니고 한 집 안에서 맘 편히 함께 있기는 어려울 텐데. 더군다나 섹스에 관해선 더더욱.
지한은 살짝 곤란한 얼굴로 김신우를 쳐다보았다. 예상외로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 참! 감독님이 오늘 저녁 식사 다 같이 하자고 하시던데.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손뼉을 친 한정원이 갸우뚱거리며 묻자, 김신우가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안 좋아서요. 나 대신 자리 좀 채워줘요.”
“아…. 맞다, 감기. 감기. 제가 약 챙겨 왔으니까 드릴게요. 잠시만, 그럼 한이 너는….”
“당연히 같이 있어야지.”
말을 맺기도 전에 뚝 잘라버린다. 김신우는 종전과는 달리 싸해진 눈빛으로 한정원을 힐긋 바라보았다.
“내 경호원인데.”
“…….”
“안 그래요, 지한 씨?”
말하며 지한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댄다.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지한이 한정원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네.”
너무도 사이좋아 보이는 모습에, 입을 벌리고 두 남자를 번갈아 보던 한정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그러면 식사는…. 어쩌죠? 당연히 밖에서 드실 줄 알고, 아! 아니면 혹시 고기도 괜찮으세요? 원하면 여기서 테라스에 바비큐 준비해 주시는데, 한이랑 같이 드시면….”
행여 싫어하려나 싶어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한정원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요. 좋아요.”
걱정과 달리 단번에 돌아온 긍정에 한정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싫어하기는커녕 그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빨리 가 봐요, 그럼. 나는 지한 씨랑 먹으면 되니까.”
“아, 네! 그러면 우선, 주문하고 올게요!”
한정원이 우당탕탕 나갔다. 쿵 소리를 내며 닫힌 현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한이 고개를 돌려 김신우를 응시했다.
“그럼 저도 좀, 씻고 올….”
김신우의 양팔이 그의 허리를 감싸곤 훅 끌어당겼다. 그대로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음미하듯 깊게 숨을 들이켠다.
“하아….”
간지러운 숨결에 지한이 어깨를 굳혔다.
“안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
낮은 속삭임은 마치 투정 부리는 듯 보였다. 한숨처럼 웃어 보인 지한이 덩달아 그를 끌어안았다. 평소 체온이 높은 지한과 달리 그의 몸은 미지근한 편이었다. 품 안에 한가득 섞이는 온도가 기꺼웠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달래듯 등줄기를 살살 쓸어내리자, 그가 지한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네, 나 고생했어요. 형이랑 이러고 싶은 거 참느라.”
낮은 음색과 함께 목덜미가 찌릿했다. 뜨겁게 젖어 드는 숨결에 지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둘이 남기가 무섭게 들러붙어 오는 그의 어깨를 쥐곤 살짝 떼어 놓았다.
“김신우 씨, 아직, 형 안 갔어요.”
“나도 알아요. 빨리 꺼지라고 해요….”
떼어 놓은 게 무색하게도 다시 끌어안겼다. 춥, 추웁. 김신우는 망설임 없이 매끈한 목선을 빨아대기 시작했다. 뜨끈한 하반신도 바짝 맞붙여 왔다. 그는 무척이나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촬영 내내, 왜 그런 얼굴로 쳐다봤어요.”
입술을 살짝 떼어 낸 김신우가 띄엄띄엄 말했다. 멈춰야 한다는 의지와는 달리 달아오르는 몸에 지한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하아, 제가 뭘….”
“야한 얼굴로 쳐다봤잖아. 형 때문에 카메라 앞에서 좆 세운 거 들킬 뻔했어요. 알아요?”
“…저는, 읍.”
답을 먹어 버리듯 입술을 덮쳐온다. 눈썹을 치켜뜬 지한이 제 앞에 길게 뻗은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다른 생각에 잠길 새도 없이, 뜨거운 살덩이가 입술 사이를 질척하게 가르고 들어왔다. 가만히 멈춰 있던 지한도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 또한 종일 입을 맞추고, 꽉 안아 주고 싶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입술을 벌려 달큼한 혀를 머금자, 서로를 물고 당기는 짧은 키스가 이어졌다. 실컷 맛을 보던 김신우가 젖은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여전히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였다.
“하아. 내가 키스 신 찍는 거, 싫었어요?”
“…….”
“응? 싫어요?”
사람을 꾀듯 속삭이는 말에 지한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지한의 허리를 더 꽉 안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코끝을 문질렀다. 마치 주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아기 고양이 같았다.
“질투해요, 계속 질투해 줘요. 좋아서 돌아 버릴 뻔했으니까.”
애틋한 목소리완 달리 흉흉하게 부풀어 오른 좆이 하반신 위로 문질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감기 걸렸다고, 핑계 댄 거예요?”
“형이 싫다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여자 입술을 빨아.”
말하며 번들거리는 아랫입술을 한 번 더 쪽 물었다 놓는다. 더없이 진지한 음색에 지한의 낯빛에 당황스러운 기운이 어렸다.
자리를 피하는 게 티가 났나. 혹시나 하긴 했으나 그가 이렇게까지 제 생각을 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괜히 저 때문에 일에 지장을 주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순간 철컥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지한이 그를 떨어뜨려 놓고는, 벽에 기대어 아무렇지 않은 척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한 시간 뒤에 불이랑 고기랑 다 올려 주신대요!”
후다닥 들어온 한정원이 눈치 없이 외쳤다. 해맑은 얼굴로 여태 그 자리에 서 있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돌연 지한에게 밀려난 김신우는 짜증 섞인 얼굴로 그를 보았다.
“두 시간 뒤로 해요.”
“네?”
“두 시간 뒤로 바꾸라고.”
“그러면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는데, 배 안 고프실….”
싸한 눈빛에 말을 멈춘 한정원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꼭 두 시간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우선은…. 좀 씻고 올게요.”
현관문을 바라보던 지한이 몸을 움직이자, 김신우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왜 이렇게 씻는 걸 좋아해요.”
“…….”
“씻지 말아요. 좋은 향기 나니까.”
가슴팍에 얼굴을 문지르며 손끝으로는 허리께를 만지작거렸다. 마치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들러붙는 몸짓에 지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이들에게는 더없이 냉랭한 사람이었다. 둘이 있을 때 제게만 아이처럼 어리광부리는 모습이 생소하다. 하나 그게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귀여워.”
중얼거리며 뺨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겨주자, 김신우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긴 속눈썹 아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촉촉하다. 예쁘다. 느끼는 순간 지한은 도톰한 입술 위에 쪽, 짧은 키스를 했다.
“요즘…. 유치한 생각을 해요.”
그는 스칠 듯 입술을 맞댄 채로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 이런 모습은,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생각.”
웃음기 어린 음색에 김신우가 눈을 들었다. 애정이 듬뿍 담긴 저를 향한 시선이 애틋하기만 하다. 알면서도, 그럼에도 자꾸만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럴 거야.”
그는 그대로 지한의 입술을 삼키듯 머금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살덩이를 물었다가 놓자, 번들거리는 입술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가 느리게 속삭였다.
“형한테만 웃고…”
그의 손길이 지한의 목덜미를 따라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형이랑만 키스하고, 형 좆만 빨고, 형 구멍에만 박을 거예요.”
“…….”
“전부 형이랑만 할래요. 싫다고 하면 일도 때려치울 수 있어.”
진득한 입맞춤 사이로 혼잣말 같은 애원이 함께 섞여들었다.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면, 얌전히 처박혀 있을게요, 아무도 만나지 말라면 그럴게. 다리를 묶으라면 기꺼이 묶고, 개처럼 기다리면서 형이 시키는 거, 하라는 거 다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씨발. 나한테 질리지만 마….
조급한 음색이 지한의 입 안으로 간간이 스며들었다. 찬찬히 눈을 내리깐 그가 지한의 목덜미 위로 뺨을 비볐다.
“계속 예뻐해 줘요. 지금처럼.”
진심은 삼켜야 한다. 매 순간 뜨겁게 올라오는 욕구와 지독한 갈망을 억누르고 견뎌야 했다. 조잡한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그가 제게 질릴까 봐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또 참을 수 없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지한은, 답 대신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무언의 신호도 없이 열린 입술 사이로 혀가 섞였다. 두 남자는 서로 몸이 닿고 싶어 애가 달았다.
“음….”
소리 없이 시작된 키스는 이어질수록 농밀해졌다. 춥, 추웁.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고 뒷걸음치다, 아무 방의 문이나 벌컥 열고 들어갔다.
두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이 허물처럼 툭, 툭 떨어졌다. 적극적이고 능수능란한 손짓으로 두 남자 모두 삽시간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었다.
“읏….”
그는 지한의 목덜미를 잘근거리며 동그랗게 올라붙은 둔부를 콱 움켜쥐었다. 성마른 손길이 골 사이를 미끄러지듯 훑어 내리자, 두 사람 모두에게서 점점 더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그저 맨 살갗을 문지르고 비비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흥분이 몰려왔다.
“하…. 좋아요, 형. 씨발, 빨기만 해도 쌀 것 같아.”
“아, 으. 천천히, 천천히 해요.”
“싫어, 하아. 빨리할래요. 형이랑 난잡하게, 섹스하고 싶어.”
서로의 달뜬 숨결이 섞여들었다. 그의 손목을 꽉 쥐어 누른 김신우가 드러난 살갗 위를 깨물며 쉼 없이 빨아댔다. 털썩, 침대 위로 밀려난 지한이 턱을 젖혔다. 진득한 혀 놀림에 어깨가 움찔움찔 튀었다. 맞닿은 아래는 진즉에 흉흉하게 부풀어 올랐다.
“으읏….”
김신우는 둥그렇게 솟은 가슴을 주물거리다, 삽시간에 딱딱해진 돌기를 덥석 물었다. 야릇한 감각에 지한이 턱을 젖히고 신음했다. 멈추지 않고 유두 위를 혓바닥으로 넓게 누르며 문지르자, 지한의 몸이 움칠움칠 튀었다.
붉은 혀가 단단하고 굴곡진 명치께를 지나 배꼽까지 미끄러졌다. 김신우는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양 쭉쭉 소리를 내며 지한의 몸을 한참 빨아댔다. 어느새 힘이 받은 좆이 근처로 단단하게 올라붙어 있었다.
“후으, 좋아요?”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가 지한의 탄탄해진 고환을 주무르며 귀두 끝을 살살 핥았다. 아찔한 쾌감에 지한이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발끝이 절로 꼿꼿하게 서고 허벅지 안쪽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느새 그에게 완전히 적응한 몸은 손길 하나하나가 자극적이기만 했다.
“아, 읏. 으….”
그는 빳빳하게 발기한 지한의 자지를 물고는 단번에 목구멍까지 처박았다. 귀두가 목울대를 찌르자, 숨이 콱하고 막혀 왔다. 하나 공지한의 좆을 빨다 질식하는 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흑! 아. 김, 신우. 아!”
엄청난 흡입력에 지한이 그의 머리칼을 꽉 움켜쥐었다. 절로 뺨이 달아오르고 귀 끝이 붉어졌다. 잔뜩 찡그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자, 눈을 치켜뜬 김신우가 제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입 안 가득 커다란 좆을 욱여넣은 채 올려다보는 얼굴에 적나라한 흥분이 치밀었다.
“하으, 읏….”
김신우의 스킬은 능수능란했다. 입 안을 조여 기둥을 쭉쭉 빨아들이면서 혀끝으로는 요도 안을 파고들었다. 강렬한 자극에 지한의 허리가 움칠움칠 튀었다. 삽시간에 차오르는 쾌감에 눈을 질끈 감은 지한은 본능적으로 허릿짓을 했다. 관계를 오랜만에 하는 것도 아닌데 몰아쳐 오는 아득한 쾌감 탓에 바로 사정할 것만 같았다.
“아, 하, 쌀 것, 잠깐. 빼요.”
잔뜩 찌푸린 지한이 그의 어깨를 세게 밀어냈다. 강한 자극이 버거웠다. 그러나 김신우는 그의 허벅지를 꾸욱 내리누르며, 볼이 홀쭉해지도록 거친 흡입력으로 애무했다. 멈출 기미는 없었다.
헐떡거리던 지한의 엉덩이가 바르르 떨렸다. 절정이었다.
“윽, 나온, 다고! 큿….”
김신우의 입 안에 든 자지가 꿀렁거리며 사출을 시작했다. 김신우는 굳건히 버틴 채로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빨대를 빨듯 빨아들였다. 지독하게 강렬한 후희에 사정 중인 지한의 목에 핏줄이 섰다. 손에 힘을 어찌나 주었는지, 김신우의 어깨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하, 하아. 빼, 라니까….”
격정적인 사정을 마친 지한이 발간 눈을 내리떴다. 그제야 입에서 좆을 주르륵 빼낸 김신우가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며 웃었다. 가지런한 치열이 드러나고, 혓바닥 위에 가득한 하얀 정액이 드러났다. 적나라한 광경에 놀란 지한이 조급하게 상체를 일으키며 그의 턱을 와락 쥐었다.
“뱉, 뱉어요. 그걸 왜….”
허둥지둥 대는 지한과 달리 그는 나긋하게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뱉을 생각이라곤 한 치도 없는 사람 같았다.
와락 찌푸린 지한이 그의 턱을 쥐고 입 안에 손가락을 넣어 혀 위를 긁어냈다. 입 안에서 주르륵 흘러나온 정액이 지한의 허벅지 위로 투드득 떨어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신우는 입을 다물곤 남은 정액을 꿀꺽 삼켰다. 이내 지한의 손가락마저 혀로 간지럽히며 춥춥, 빨아댔다.
지한은 가만히 제 손가락을 물고 우물거리는 김신우를 응시했다. 뜨끈한 감촉이 손바닥에 야릇하게 감겨왔다.
야하다, 지독하게 야했다. 원래 이렇게 야하게 생겼었나 의문이 들 만큼.
지한의 손목을 쥐고 손가락을 죽 빼낸 김신우가 열 오른 얼굴로 웃었다.
“하아, 그걸로 혼자 쑤셔 줘요.”
“…….”
“네? 보고 싶어요.”
그는 지한의 손을 잡곤 허벅지 위에 흥건하게 고인 정액을 문질렀다. 지한의 손가락이 삽시간에 하얀 정액으로 번들거렸다. 마치 조르듯 천천히 손을 아래로 끌어가자 지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표정을 굳힌 그는 기대감 어린 김신우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저 큰 걸 그냥 넣을 순 없고…. 풀어 줘야 하긴 하니까. 또 애가 저렇게 보고 싶다는데….
고심하다 생각을 마친 지한이 천천히 구멍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다리를 벌린 채 잔뜩 젖은 손끝을 구멍 위로 문지르다, 검지 하나를 쑥 넣어 보았다. 벌어지는 감각이 생경했다.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찌걱찌걱 젖은 소리가 났다.
“하….”
그는 한쪽 팔로 침대를 짚고 무게를 지탱하며, 뜨겁고 말캉한 안을 천천히 넓혔다. 아픈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제 가랑이 사이에서 적나라하게 아래를 들여다보는 김신우의 시선에 몸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저 벌어진 상황만으로 흥분이 됐다.
“아, 읏….”
사정을 마치고 늘어져 있던 좆이 다시 서서히 힘을 받기 시작했다. 혼자는 처음 해 보는 짓이었다. 그러나 두 개의 손가락을 가위처럼 늘리길 반복하자, 야릇한 감각이 내벽 안쪽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혼자 못 하겠어요?”
느닷없는 물음에 벌게진 시선을 들었다. 그는 지한의 답도 듣지 않은 채 제 두 손가락을 입 안에 넣어 몇 번 빨다가 쑥 꺼냈다. 왜인지 조급한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도와줄게.”
“아니, 괜찮…. 큿.”
“형, 혼자 하기 힘들잖아. 내가, 도와줄게요.”
움직이지 못하게 지한의 허벅지를 꽉 붙든 그가 두 손가락을 쑥 밀어 넣었다. 내벽 안에서 둘의 손가락과 얽히며 점점 더 조여들었다. 일순 찌릿하게 올라오는 쾌감에 지한이 이를 꽉 물었다. 그보다 더한 것도 받아냈는데 왜인지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 손가락, 잠깐, 읏.”
구멍 안에서 얽힌 채 빡빡해진 손을 빼내려 하자 김신우가 그의 팔목을 꽉 붙들었다.
“빼지 말고 움직여 봐요, 지금 그대로. 잘 먹고 있으니까.”
말하며 안을 푹 찔러 넣으니, 지한의 다리가 움칠 떨렸다.
“아, 으흑!”
그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순순히 손가락을 빼지 않은 채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신우의 아래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선단에 맺힌 옅은 물이 번들거렸다. 벌겋게 물든 좆은 흉흉할 만큼 꺼덕꺼덕 흔들렸다.
“안 되겠어요, 형. 형 구멍이 손가락으론 모자란 것 같아요.”
“아, 안 돼, 찢어져. 흣.”
“괜찮아요. 내 자지로 채워 줄게요.”
그는 구멍에서 손을 쑥 빼내곤 조급하게 지한의 허벅지를 붙들었다. 그 반동으로 풀썩 침대에 누운 지한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제 아래에 무릎으로 선 채 흉기 같은 좆을 잡고 문질러 대는 김신우가 보였다. 잔뜩 상기 된 얼굴의 그가 거칠고 낮은 숨을 내쉴 때마다, 잘 다듬어진 근육이 오르락내리락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전시장에 세워진 조각상을 보는 기분이었다.
홀린 듯 생각하는 찰나,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지며 불덩이 같은 자지가 단번에 구멍을 쑤시고 들어왔다.
“헉, 으흑. 아!”
푹, 내벽 끝까지 미끄러지듯 좆을 처박은 김신우가 상체를 숙이며 지한을 꽉 끌어안았다. 서로의 몸이 틈도 없이 바짝 맞물렸다.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지며 둔중한 고통이 밀려왔다.
“후우, 아아…. 형.”
입술을 꽉 깨문 지한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붙이며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안을 채운 좆이 더 커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뱃속은 버거웠지만, 그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흐윽, 읏…. 하아.”
“하아, 좋아…. 뜨겁고, 조여요. 존나, 좋아요.”
“아, 나도, 좋아….”
“형도, 좋아?”
그대로 굳은 듯 멈춰 있던 김신우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성기를 주욱 뽑았다가 다시 강하게 박아 넣자, 퍽. 지한의 허리가 위로 발작하듯 튀었다. 강렬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찌르르 울렸다.
“아! 학, 살, 조금, 천천히. 흣.”
“좋아요. 하아, 형. 좋아해요. 미칠 것 같아….”
쾌락에 버둥거리는 지한을 상체로 짓누르며, 그가 지한을 옥죄듯 꽉 끌어안았다. 땀으로 젖어 끈끈한 상체에 뺨을 비비고, 허리는 위아래로 난폭하게 치대기 바빴다.
철퍽거리는 젖은 소리와 짐승처럼 헐떡대는 숨소리가 난잡하게 섞여 퍼졌다. 내벽이 경련하듯 떨리며 지한의 숨이 터져 나올 때마다, 김신우는 그의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 뜨겁고 습한 공기가 둘 사이로 가득 차올랐다.
“형. 후으, 아까 왜, 유수연한테 웃어 줬어요?”
푹, 푹. 처박히는 소리 사이로 김신우가 짓씹듯이 말했다. 난데없는 소리에 헐떡거리던 지한이 시선을 내렸다. 땀에 젖은 새까만 머리칼이 이마에 가닥가닥 갈라져 있었다.
“윽, 흐읏. 무슨.”
“새로 들어온 신입, 걔보고, 웃었잖아요. 씹. 그러다, 후읏. 형한테 반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쓸데없이, 하, 웃고 그래요.”
띄엄띄엄 말하는 박자에 맞춰 그가 내벽을 쑤셔댔다. 그에 맞춰 복부에 힘을 바짝 준 지한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냥, 인사만 한, 아! 아으, 윽!”
유수연은 새로 들어온 신입 스타일리스트였다. 이제 갓 성인이 된 듯 앳된 얼굴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촬영 중에 슬쩍 인사를 건네오기에 맞받아쳐 준 것이 다였건만, 그 사이 그걸 본 듯했다.
“거짓말. 어리고 작다고, 귀엽다고 생각했잖아. 형, 그런 거 좋아하잖아. 그래서 웃은 거잖아. 씨발, 그랬잖아요.”
“우읏, 그런 적 없! 학!”
침대에 팔을 지탱하고 선 김신우가 제 아래서 헐떡이는 지한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촬영 중에도 김신우의 시선은 늘 지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한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연놈들을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의 눈이 차츰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탁탁탁! 자비 없는 허릿짓은 점점 더 거칠고 빨라졌다. 주체하기 어려운 쾌감에 지한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하아. 나 말고 딴 사람, 쳐다보지 마요.”
“흐읏, 윽. 아니, 아니라고…. 흣!”
“진짜 싫어. 윽, 씨발…. 싫으니까….”
돌연 물기 어린 목소리에 지한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게 아닌데, 그가 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매끄러운 뺨을 타고 눈물이 뚝 흘렀다. 하지만 짐승 같은 허릿짓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아윽, 왜…. 우읏.”
쾌감에 허벅지를 바르르 떨면서도, 지한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섹스할 때 그는 종종 밤에 만나곤 했던 전처럼 눈물을 흘리곤 했다. 뺨 위로 흐르는 눈물 위로 입을 맞추는 순간, 그가 몸속 어딘가를 콱 찔러왔다. 꼬리뼈부터 형용할 수 없는 쾌락이 번졌다.
“아, 흑. 씹…. 아!”
“흐윽, 좋아요? 이렇게, 쑤셔 주니까, 좋아요, 형?”
“아! 학, 좋아. 좋아, 흐읏.”
“좋아요? 얼마나 좋아요. 형. 형…. 읏. 이렇게, 내 밑에 깔려서 좋아하면서. 이제 나 아니면 못 싸면서, 윽, 그러면서. 왜 다른 사람 봐.”
그는 연약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러면서도 난폭한 허릿짓과 난잡한 입놀림을 멈추지는 않았다.
주체 못 할 쾌감으로 무너진 지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도 모르게 거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윽, 좋아. 헉, 좋으니까, 개소리, 그만하고, 아!”
“알았어요, 평생, 내가 좆같이 싫다고, 할 때까지, 읏. 박아 줄게요…. 아니야. 싫다고는, 하지 말아요. 후읏. 그냥, 여자고, 남자고 한눈팔지 마. 씹, 제발….”
상체를 낮춘 김신우가 그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팔등으로 지탱하고 섰다. 허리를 뒤로 살짝 물린 뒤, 위에서 아래로 안을 긁어내듯 박기 시작했다. 철퍽철퍽. 잔뜩 젖은 소리가 빠르게 방안을 채웠다. 전립선을 바로 자극하는 이 자세는 지한이 가장 자지러지는 체위였다.
“하아, 공지한, 공지한…. 형, 형.”
“흑, 아윽. 아! 좋아, 신우. 학!”
땀에 젖은 몸이 쩍쩍 들러붙었다. 조급하게 지한의 입술을 머금은 김신우가 눈물을 떨어뜨리며 젖은 키스를 이어 갔다. 지한은 그의 등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꽉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제 몸 곳곳을 완전히 파악한 그의 몸놀림에 자지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해요, 좋아해….”
“으, 나도, 좋아, 읏. 좋아해요. 아….”
절절한 속삭임에 지한의 귀두 끝에서 하얀 액이 튀기 시작했다. 몸부림칠 만큼 지독한 절정의 한 가운데에서, 지한은 정신없이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김신우의 좆이 꿀렁이며 사출을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네 번의 섹스 중 첫 번째 사정이었다.
***
쉬는 시간도 없이 김신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한은 축 늘어져 있었다. 두 시간 뒤에 사람을 부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알차게 시간을 채울 줄은 몰랐다. 그마저도 사람이 올 시간이 됐다며 억지로 떨어뜨려 겨우 중단된 차였다.
현관 두드리는 소리에 나신으로 누워있던 김신우가 대충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갔다. 문밖으로 짧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늘어져 있을 수만은 없어 지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에 통증이 몰려 왔으나 이제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요즘 허리의 코어 근육 강화를 위한 운동을 집중적으로 한 보람이 있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한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즐겨 입는 검정 반소매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실내가 고요하다. 지한은 김신우가 있을 2층 계단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방문을 열자, 한정원의 말대로 아래보다 훨씬 커다란 방이 드러났다. 기다란 통창 밖으로 테라스에 앉아 있는 김신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왜인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살짝 웃음이 샜다.
“왔어요?”
인기척에 김신우가 등을 돌렸다. 그도 막 씻고 나온 건지 머리가 촉촉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한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를 살짝 쥐곤 허리를 숙이며 뺨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입맞춤에 김신우가 그의 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쪽, 쪼옥. 물기 어린 소리가 두어 번 더 울렸다. 금세 또 티셔츠 사이를 찾아드는 손길에 지한이 웃음을 흘렸다.
“식사, 하셔야죠.”
그의 손목을 살짝 쥐며 저지하자, 살짝 찡그린 김신우가 중얼거렸다.
“나 배 안 고픈데.”
“그래도 먹어요. 오늘 고생 많이 해서 든든히 먹어야 돼.”
“밥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어요.”
뜻 모를 말에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물끄러미 저를 보는 김신우의 눈동자가 또 열기로 일렁이고 있다. 이제는 뭘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한은 한숨처럼 웃으며, 곤란한 듯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격하게 물고 빨아대는 바람에 온몸이 화끈화끈 따가울 정도지만….
“고기 많이 먹고, 또 해요.”
“…….”
“그럼 됐죠?”
가만히 그를 보던 김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한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예쁘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둘은 밤바다를 향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한이 집게를 들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서늘한 바닷바람이 어우러졌다. 시야가 탁 트인 테라스 앞으로는 새카만 밤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달빛이 수면 위로 부서지고, 저 멀리 작은 배의 등불이 반짝였다.
한정원에게선 스태프의 숙소에서 묵고 아침에 돌아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대충 예상은 했으나 아무래도 술을 마신 듯했다. 의도치 않게 둘만 오붓하게 있을 수 있게 되어 좋았다. 마치 작정하고 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에 설레고 들떴다.
바닷바람은 가볍게 선선했고, 온도도 적당했다. 그러나 자꾸 춥다며 안겨 오는 김신우 탓에, 지한은 담요를 가져와 그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아직 추워요? 겉옷 가져다줄까요?”
“옷은 됐고, 더 안아 줘요.”
어리광부리는 말에, 지한이 그의 어깨를 꽉 감싸 안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잘 익은 고기를 접시에 올려 주어도 먹지를 않아, 입에 직접 넣어주자 그가 조금씩 먹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먹지 않는 바람에 고기 한 점당 뽀뽀 한 번으로 합의를 봤다. 김신우가 그만큼 잘 먹는 건 또 처음 보았다.
서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정적이 어색하지 않았다. 지한은 그저 이 평화로운 순간이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열심히 고기를 굽던 지한이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 앉은 김신우가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나 뭐 묻었어요?”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열심히 봐요.”
고기를 뒤집으며 눈썹을 치켜뜨자, 김신우가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무언가에 집중한 사람처럼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보고있어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
“자꾸 이러니까 내가 미친 것 같아요.”
애틋한 혼잣말을 속삭이곤, 지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티셔츠 위로 뺨을 문질렀다. 간절함이 배인 손길에 뜨끈한 체온이 맞닿았다.
“나는 이제 당신 없으면 못 살 것 같은데. 형은, 아닐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좆같고…. 두려워. 무서워요. 형이 나 버릴까 봐. 걱정돼.”
그가 조금 더 힘을 주어 지한을 안았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라던 대로 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과거의 자신이 들었으면 별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말이다. 하나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더없는 진심으로 느껴졌다. 평생을 결핍 속에서 살아온 그가 가엽게만 느껴졌다.
지한은 가만히 품에 안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말하며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여느 때보다도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혹시 당신이 내가 싫어졌다고 해도…. 진짜 그렇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고요.”
“…….”
“음. 이건 뭐 말해도 믿질 않으니,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네.”
부드럽게 김신우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가 하얀 뺨을 톡톡 건드렸다. 말랑하고 매끄러운 촉감이 손에 기분 좋게 닿았다. 그 손길에 김신우가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당신 경호는 내가 계속할 거니까. 전처럼 도망갈 생각도 하지 말아요. 이번엔 계약서 제대로 쓴 거 알죠?”
“…….”
장난스러운 얼굴의 지한이 잘게 웃었다. 별안간 드러난 귀여운 눈웃음에 초조해하던 김신우의 눈빛이 풀어졌다.
새 계약서는 여러 가지 특약 사항을 넣어 절대 계약을 파기할 수 없는 조항으로 작성했다. 불안정한 김신우의 모습에 지한이 하룻밤을 특별히 고심하여 작성한 것들이었다.
“또 나 두고 도망가면, 이제는 내가 스토킹할지도 몰라요.”
주제에서 살짝 어긋나 버린 말에 김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더 드센 손길로 지한을 꽉 끌어안았다. 더 이상 멍청하게 그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그를 놓치기 싫을 것 같았다.
좋다. 좋다. 미치도록 그가 좋았다.
두 남자가 동시에 느낀 감정이었다.
몇 번의 장난스러운 포옹과 짧은 입맞춤 끝에 둘은 식사를 끝냈다. 펜션에 도착한 이후 세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김신우는 지한에게 안겨 왔고, 종일 느낀 질투를 표현하기 바빴다. 너무 멋있게 머리를 하고 왔다거나, 카메라 감독을 야하게 쳐다보았다는 말도 안 되는 것들로 지한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평상시 타인에게 완벽한 선을 긋는 김신우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진 점이 없었으나, 둘만 함께 있을 때는 애정이 고픈 아이처럼 굴어왔다. 마치 밤에 만났던 그 같았다. 하나 그 이어지는 간극엔 조금의 위화감도 없었다. 그저 귀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는 낮의 김신우도, 밤의 김신우도 아니었다. 지한의 앞에서 그는 언제부턴가 두 개의 이면을 오롯이 내려놓고 완전한 하나로 남았다.
사실을 깨달은 지한 또한 구태여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늘 결핍을 느끼는 그가 만족할 만큼 다정하고 따뜻한 사랑을 주기에도 모자랐다. 온전히 하나로 사랑해 주기에도 바쁜 나날들이었다.
어깨에 뺨을 문지르는 행위에 지한이 살풋 웃었다. 가만히 그의 머리를 끌어안자, 그가 턱을 들고는 입을 맞춰왔다. 소리 없이 시작된 키스는 점점 물기 어린 소리로 번졌다. 수십, 수백 번을 해도 질리지 않을 입맞춤이었다.
“하아, 나 또 섰어요.”
지한의 손을 쥔 김신우가 제 중심부로 가져다 댔다. 뜨끈한 열기와 함께 두툼한 굴곡이 만져진다. 젖은 입술을 혀로 훑던 지한이 픽 웃었다. 닿기만 하면 발기하는 모습이 참 솔직하기도 했다.
“으…!”
채 답을 하기도 전, 티셔츠 안으로 또 손이 들어왔다. 단단한 광배근을 어루만지고 유두 위를 살살 긁어낸다. 적나라한 손길에 지한이 허리를 움찔거렸다. 춥, 추웁. 지한의 목덜미 위를 빨아대던 김신우가 중얼거렸다.
“야외에서 섹스해 봤어요?”
“하아, 읏…. 야외는….”
“아니, 대답하지 마요.”
돌연 말을 멈춘 그가 티셔츠를 걷어내고 유두 위를 입술로 질척하게 문질러댔다. 의자에 기대어 있던 지한의 등줄기가 쾌감으로 찌르르 울렸다.
몸 위를 덮치듯 옮겨온 김신우가 점점 아래로 상체를 낮춰왔다. 의자 아래 바닥에 무릎을 세워 앉고는,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 탄탄한 복근 위를 연달아 물고 빨며 울혈을 남겼다. 눈가를 찡그린 채 턱을 살짝 젖힌 지한이 김신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형, 좋아요?”
찌푸린 채 한쪽 눈을 뜬 지한이 그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후우…. 좋아요.”
“뭐 해 줄까. 하아. 어떻게 해 줘요. 형이, 원하는 거 뭐든 다 해 줄게요.”
“하아…. 뭐든?”
“응. 뭐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지한이 김신우를 지그시 응시했다.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과 옅은 조명 등에 어린 얼굴이 색정적이기도 하다.
지한의 손바닥이 김신우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종전에 두 시간이나 했던 섹스가 무색하게도 삽시간에 흥분이 몰려왔다. 얇은 트레이닝 바지 위로 발기한 좆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럼….”
그의 머리를 가랑이 사이로 이끌었다. 난데없는 손길에 김신우가 시선을 들었다. 허공에서 둘의 눈이 마주친다.
“좀 빨아 줄래요?”
지한의 잇새로 나른한 음색이 흘렀다. 말하는 가지런한 입술 끝이 살짝 휘었다.
“좆, 빨아 달라고.”
잠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따라 냉랭했던 눈매가 풀어지며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싫어요?”
되묻는 말의 뜻을 깨달은 김신우가 눈을 감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듣기 좋게 퍼지는 나직한 웃음소리와 예쁜 눈웃음은 마치 천상의 신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요. 원하는 거 다 해 줄게. 다 해 줄게요.”
중얼거린 그가 눈을 내리깔고는 지한의 손가락을 깍지 끼어 부드럽게 쥐었다.
“대신…. 나 책임져요. 한눈팔지 마.”
미소를 띠었으나, 어딘가 불안정한 얼굴이었다. 문득 숨을 멈춘 지한이 한숨처럼 웃었다. 못 말려. 이런 상황에서 엉뚱한 말을 하는 그가 미운 네 살처럼 느껴졌다.
망설임 없이 뻗어 나간 팔이 김신우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맞닿은 체온이 더욱 짙어졌다. 따뜻하게 달아오른 제 마음은 이제 그저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었다.
내가 당신을 이만큼이나 사랑하고 있다고. 이렇게나 많이.
“사랑해요.”
낮은 속삭임에 김신우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두 남자의 심장이 빠르게 맥박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줘요….”
“…….”
“다시….”
아이처럼 채근하는 말에 지한이 짧게 웃었다. 그의 머리 위에 살짝 입을 맞추며 다시금 속삭였다.
“사랑해요. 정말로.”
고작 하나의 단어가 가슴 속에서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는 지한을 더욱 드세게 끌어안고, 뺨을 비비고, 문지르며 애정을 표현했다.
“나도, 나도…. 내가 훨씬, 더 사랑해요.”
그가 끓어오르는 신음처럼 답하자, 지한이 손을 뻗었다. 그들은 달큼하게 흐르는 열기와 함께 다시 입술을 맞물었다. 맞닿은 체온을 기꺼이 나누며 언젠가 그 어느 날의 추억에 잠겼다. 앞으로 함께 헤쳐나갈 미래에 흠뻑 젖어 같은 생각을 나눴다.
두 남자는 서로에게 거짓 같은 환상이었고, 바라마지않던 한 편의 꿈이었다. 그들은 오롯한 하나가 되어 같은 곳을 보았고, 또 그런 것들을 원하는 서로가 좋았다.
훔쳐 온 불씨에 온기를 쬐던 어둠이 녹아내린다. 나락에 잠겨 허둥대던 몸짓은 건져낸 손길에 희미해졌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었다.
더블다운 (Double Down)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