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4)

11.

목이 죄어 온다. 익숙한 갈증에 시야가 밝아졌다. 시리도록 푸른빛은 금세 다시 붉게 물들었다.

용서받고 싶어. 그리고 또 죽고 싶어.

비겁한 나약함은 꺼풀처럼 켜켜이 휘감겨 떨어질 줄을 모른다. 닥쳐오지 않은 고통은 두려웠고 용기는 바싹 메말랐다. 그러니 끝내 무엇도 실천하지 못했다.

가는 시선 사이로 익숙한 천장이 비친다. 손끝에는 보드라운 솜이불이 감겼다.

하아. 김신우는 그제야 짙은 숨을 내쉬었다. 세상 가장 안온한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보호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느리게 센 숫자가 열에 이르러서야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안도와 불안 속에서 그는 다시 아가미를 열고 헐떡거렸다.

살아야 하니까. 살라고 했으니까.

“형….”

울먹이며 내뱉는 제 목소리에, 그 한 글자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형. 형. 동떨어진 세상에서 오롯이 하나 손에 쥐어보았던 것. 그리고 제 손으로 형체 없이 부숴 버렸던 것. 새카맣게 태워 하늘 끝으로 어룽어룽 올려 보낸 것.

눈을 감으면 찢어지게 웃는 자신이 보인다. 자조와 책망 속에서 엇갈린 자아는 또 엉망으로 뒤엉켰다.

‘신우야.’

잃어버린 것,

‘괜찮아요?’

저 버린 것.

‘당신 같으면 가겠어? 어떻게 가. 어떻게 그냥 가? 씨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어떻게 가냐고! 당신 미쳤어?!’

견디기 힘든 절골지통 속에서 김신우는 젖은 눈을 떴다. 해일 같은 잔상 속에서 붙들 곳을 찾지 못하고 그저 훌훌 떠밀려 갔다.

“…으….”

눈을 감은 채 빳빳이 굳은 손가락을 쥐었다 펴보았다. 당연하게도 바스락대는 이불자락 외에 잡히는 건 없었다. 타오르는 화마와 어지러이 흩어지는 숨소리가 머릿속을 빽빽하게 메웠다. 돌연 등줄기에 섬뜩한 소름이 흘렀다.

유실된 하나. 돌아온 하나.

아니, 이젠 아닌데.

“형….”

가까스로 정신을 붙드는 순간, 움찔 어깨가 움츠러든다.

‘형. 진짜 싫다.’

‘너무 싫어요.’

김신우는 벅찬 숨을 삼켰다. 날카롭게 잦아든 두통에 눈을 질끈 감는다. 감금되었던 나날 후에 그를 만났고, 질투에 못 이겨 화를 냈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무작정 차를 얻어 탔고, 불현듯 자각한 이질적인 현실에 몸서리쳤다.

두려웠다.

낯선 사람, 낯선 세상. 단절된 공간 밖으로 발을 내디뎌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아무런 보호 없이 경계 밖으로 내디딘 걸음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던지는 알 수 없었다. 말을 건네는 순간 찌릿한 고통과 함께 다시 정신을 까무룩 놓았으니까.

그리고 다시, 지금.

찌푸린 김신우가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환각의 잔재와 허상의 경계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실재하는 것들을 찾았다.

바스락. 바닥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물건들이 발끝에 채였다. 휘청거리며 벽을 짚어 불을 켠 순간, 서서히 벌어진 눈이 빼곡하고 생소한 방 벽면을 훑었다.

-배우 김신우 연이은 스토킹과 납치극, 경호원 A씨, 필사적인 구호로 인한 중태에 빠져….

-[NEW 이슈] ‘정의는 살아 있다.’ 혼수상태 보디가드 공 씨가 살아온 선한 발걸음.

-이슈 콜렉터! 서울현대병원 曰 공 씨,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 다분해…. 팬클럽 회장 김 모 씨의 증언은?

-사건의 발단은 소속사의 악덕 노동 착취? YNH 엔터, 이어지는 악플 세례에 법정 공방 경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더듬듯 스치는 눈동자가 하릴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옅은 동공은 서서히 좁아 들었다. 김신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구겨진 흑백 종이 속에 그가 있었다. 잃어버린 적 없던, 잃어버릴 리 없던.

지독하게 멍청한 유실.

“…….”

엉망으로 흔들리는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그리운 그의 옆으로 빼곡히 붙어 있는 신문 조각과, 프린트 구석 한편에 흐리게 찍힌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우울한 인상, 왜소한 체격. 아주 잠시간 차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구겨진 눈매와 그늘진 낯빛이 선연하게 피어올랐다.

아. 아아. 꿈이어야 하는데,

꿈, 이어야 했는데.

희멀겋게 질려가는 안색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늘 서랍 깊숙한 곳에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던 일기장이 협탁 위로 보란 듯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 휘갈겨 쓴, 짤막한 글귀에 눈이 턱 벌어졌다.

[죽었어. 너 때문에.]

깜박, 깜박.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김신우는 마치 글을 모르는 사람처럼 단어의 뜻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죽었다. 죽었다. 제게는 가깝고도 먼 단어였으나 그에게는 조금도 닿아서는 안 될 말이었다.

“뭐….”

파리한 안색으로 거칠게 일기장을 집어 든다. 눈을 문지르고 다시 읽어보아도 정갈하게 새겨진 글자는 미동도 없었다.

[죽었어. 너 때문에.]

죽었다니. 죽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일은 벌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잘게 흔들리는 시선이 다시 벽면의 스크랩들을 확인했다.

스토킹, 납치, 화재…. 혼수상태, 중태.

글자 끝에 그가 있었다. 붉어진 눈길이 번듯한 슈트 차림으로 선 지한의 사진 위로 향했다.

‘교통사고가 났고, 내가 당신 경호원이니까 같이 다치는 건 당연하죠.’

부드럽게 토닥여 주던 손길과 나직한 음색이 재생되었다.

-배우 김신우, 성진 대교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테러! 체포된 동일범의 소행으로 밝혀져…. 도를 넘은 극악무도한 범행에 분노….

아. 아. 멈춰 있던 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바닥에 내팽개친 퍼즐 조각처럼 흩뿌려진 것들이 하나둘 제 짝을 찾아 기워지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그럴 리가. 그러면, 그럴 리가….

불현듯 머리를 두 개로 쪼개는 듯한 두통이 치민다. 윽.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익숙하고 낮은 음색이 귓가를 스쳤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냥 좀.’

몰아쉬는 숨소리, 힘없이 감기던 기다란 눈, 바르르 떨리는 손바닥에 묻어나던 진득한 피의 형상….

‘그래도…. 다행입니다.’

헉. 거친 숨이 터져 나온 입을 틀어막았다. 금세 눈자위로 빠르게 차오른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초점이 흐려진다.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설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아….”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그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잰걸음은 점점 뜀박질이 되었다. 조급하게 뛰어간 그가 덥석 방 문고리를 잡았다. 어디 마음껏 날뛰어 보라는 듯, 제 방문은 더 이상 잠겨 있지 않았다.

덜컥. 쉽게 열린 문을 젖히고 스산하리만큼 가라앉은 공기를 헤쳤다. 거실을 가로질러 뛰다가, 부엌, 서재, 드레스룸, 욕실까지 정신없이 그의 흔적을 찾아 달음박질했다. 헉, 헉.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끝내, 그는 멈춰 섰다. 사자의 선고를 받은 망자처럼 지한의 방문 앞에 우두커니.

떨리는 손을 서서히 올려 든 그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형…. 형.”

새파란 정적이 이어졌다. 똑똑똑. 똑.

“…문 열어 봐요.”

답하는 이는 없었다. 방문이 잠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쉽게 열릴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하면서도 행동할 수 없었다.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기 시작한 시커먼 공포 때문에. 벌컥 연 순간 자신을 덮쳐올 두려움 때문에.

그는 꽉 쥔 주먹으로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똑똑!

“문 열어 봐요, 열어 줘요…. 형. 대답해요.”

애원과 함께 간헐적인 흐느낌이 올라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거세어졌다.

분명 답이 돌아와야 했다. 여기에 산다고 했으니까, 늘 붙어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형. 형! 혀엉…. 형. 형!”

쾅쾅! 쾅! 어느새 그는 발악하듯 문을 흔들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눅진하고 적막한 공허를 등진 채로.

“으. 아니, 안 돼. 안 되는데….”

문고리를 잡은 채 김신우는 주르륵 주저앉았다. 윽, 으윽. 서글프게 차오른 고통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너른 등이 가엾게도 들썩거린다. 견디기 어려운 격통에 방문에 이마를 툭 기댔다.

‘그러니까 사라져.’

‘사라져.’

종이 위에 굳건히 쓰여 있던 글자가 솟아올라 별안간 귓가를 쑤셨다. 아. 아. 부러 헐떡이는 아가미를 닫아 제 숨통을 조였다. 자격도 없어. 너는 숨 쉴 자격도 없어. 누군가 쉼 없이 속삭였다.

쿵, 쿵. 쿵. 이마가 쓰려 오는 데도 그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형…. 혀엉. 형….”

울음을 삼키며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 문고리를 돌리고 안을 들여다볼 용기 따윈 없었다. 무섭다. 두렵다. 온통 짓눌리는 오감과 솟구치는 감정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겁게 늘어졌다.

“잘못, 했어요…. 으흑, 잘못했어요.”

그는 울었다. 아무도 닦아 주지 않을 눈물을 끊임없이 쏟아내며 또 용서를 바랐다. 고요 속에 찾아든 공허가 사위를 메웠다.

이 밤에도 시야는 푸르렀다. 그러나 또 벌겋게 물들어 버리고 말 뿐이다.

***

손바닥의 열로 뜨끈하게 달아오른 핸드폰을 응시하던 지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을 한 번 바라보고, 눈앞의 김신우를 한 번 더 바라본다.

벌써 몇십 분째였다. 정류장 앞에 우두커니 선 채 손에 쥔 핸드폰과 김신우의 사진을 번갈아 바라보는 일이.

속을 채운 씁쓰레한 술이 심장을 달궜다. 울렁이는 감정을 견디려 손끝에 힘을 주었다.

어떡할까요. 내가 어떻게 할까.

그는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끝이 선명한 동그란 눈동자와 날이 선 콧대, 도톰한 입술 끝을 응시했다. 따라 머릿속에 시원스레 휘어지던 입매가, 어울리지 않게 한껏 채워 보내던 다정한 시선이, 부드러운 음색과 이따금 낮게 터지던 웃음소리가 툭 퍼졌다.

‘…많이, 다쳤습니까?’

눈을 뜨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던, 걱정을 담은 눈빛과 낮게 잠긴 목소리. 처음으로 마주했던 진심.

‘좋아해요.’

거친 하악질 뒤로 감춰 두었던 가여운 그림자.

‘그게, 문제라고요. 씨발…. 그게, 문제라고.’

눈물. 분노. 상처. 모두 자신만 아는 것이었다.

일순 괴롭게 흩어지던 숨소리에 낯선 감정이 왈칵 넘어온다. 지한은 눈가를 찌푸렸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찡그린 눈을 감았다.

‘가지 말아요.’

스멀스멀 전신을 타고 올라온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는 부정했다. 고향 없는 이에게 휘몰아치는 향수는 필시 술기운 탓이리라. 그래, 그게 분명한데도.

지끈거리는 눈가를 감았다가 떴다. 시야엔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의 김신우가 보였다. 혼란스럽다. 한 번도 쉬이 자각해 본 적 없던 동요가 빈 수레처럼 요란하게 덜그럭거렸다.

지한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긴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쉴 때마다 어릿한 감정이 빈틈없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생각에 잠겼다. 푹 가린 시야에 점자를 더듬어가는 손끝처럼 세심하고 집요하게 제 마음을 되짚었다. 그리고 느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다 어느새 흠뻑 젖어 버린 자신을. 축축하게 들러붙는 감정이 불편하고 무겁게 늘어진대도, 꼭 벗어 던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어째서, 왜.

다시 눈을 들었다. 멀거니 그를 주시하던 지한이 입술을 잘근 물었다. 괴롭게 견뎌낸 한 번의 경험을 쉬이 잊어버릴 만큼 학습 능력이 낮지는 않았다. 불현듯 스며드는 선명한 감정을 이제는 또렷이 알고 있었다.

아….

그는 낮게 탄식했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누르며 고개를 숙인다. 아주 짧은 찰나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 끝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보고 싶네.

허탈한 깨달음에 턱을 젖혀 하늘을 본다. 별빛 한 점 없는 새카만 하늘 구석엔 옅은 달만 우두커니 빛났다. 칠흑 속 짙은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쓸쓸하기에 아름다웠다.

한 손으로 느리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과정은 길었고 판단은 짧았다.

급격하게 목이 메었다. 쥐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삽시간에 번져 든 갈증은 전화 한 통 따위로 충분히 적실 수 없었다. 당장 눈앞에 그를 두어야 했다. 지한은 조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택시가 오늘따라 붉은 신호등에 자주 멈춰 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기사는 유난히 느긋해 보였다. 시간은 새벽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창문에 기댄 채 밖을 보던 지한은 옅은 숨을 뱉었다. 약속도 없이 무작정 누군갈 찾아가는 것도, 또 그것이 자정을 넘은 시각이라는 것도, 아무 일 없음에도 이상하게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도 전부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이유 없이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창밖으로 눈에 익은 아파트 단지가 보일쯤에는 엉덩이가 절로 들렸다. 도착도 전에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어 손에 움켜쥐었다.

“감사합니다.”

계산 후 정문 앞에 내린 그가 흘긋 하늘을 보았다. 정류장 앞에서 보았던 흐린 달은 여전히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주머니에 카드를 대충 밀어 넣고 걸음을 옮겼다. 밑도 끝도 없이 넓은 단지 안에서 그가 사는 동을 찾아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입술을 꾹 다문 지한이 빠르게 보폭을 좁혔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가 바람에 흩날릴 정도로 뛰고 있었다.

유난스럽다. 지금 제가 하는 짓이 유별나다는 걸 알면서도 뛰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금세 도착한 익숙한 현관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새벽이라 인적 없이 적막하기만 한 홀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그가 사는 40층을 눌렀다. 입원 기간은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무척 오랜만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우웅. 기계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상승했다. 지한은 뛰어오느라 벅차오른 숨을 겨우 느릿느릿 삼켰다. 왜인지 긴장되는 마음에 땀이 밴 손을 꽉 쥐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지한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굳건히 닫혀 있는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선 후에, 혼잡한 생각 사이로 잠시 숨을 골랐다.

비밀번호를 바꿨을까, 그냥 초인종을 누를까. 퇴원도 전에 사람을 부려 칼같이 내쫓은 사람이니 아마 바꿨을 것이 분명했다. 알면서도 그의 손끝은 마치 무언갈 확인하듯 도어락 위를 향했다.

5782. 네 자리 숫자를 누르자마자 띠리릭, 전자음과 함께 철컥 문이 열렸다. 잠시 굳어 있던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정말로 열릴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러나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후우. 짧은 숨을 내뱉은 그는 그대로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노란 센서 등이 깜빡인다. 늦은 새벽, 안은 당연하게도 캄캄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은근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전처럼 바닥에 주저앉은 김신우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벽을 짚은 지한이 운동화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자고 있으려나, 늦은 시간이지만 평소 잠을 잘 자지 못했으니 깨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아닌 ‘그’가 있을지도…. 아니,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김신우 씨.”

낮은 목소리가 조심스레 적막을 갈랐다. 지한의 눈동자가 느리게 주변을 훑었다. 범인이 잡혔음에도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 불안의 싹은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지한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안위에 관하여 떠올리고 있었다.

실내는 더없이 고요했다. 불안과는 달리 집 안은 전처럼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 내심 안도의 숨을 뱉은 그가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실에 들어선 순간,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선 채 자신을 돌아보는 김신우를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불현듯 눈이 마주쳤다. 창문 밖 희멀건 달빛에 반사된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였다.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그를 보며 지한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그가 확연하게 몸을 떨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벌어지는 모습을 보며, 지한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괜찮아요?”

조심스레 던진 물음에 그는 아무 답이 없었다. 그저 멀거니 지한을 응시할 뿐이었다.

잠시 그를 살피듯 주시하던 지한이 다시금 발을 내디뎠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순간에도 김신우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로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마치 숨이 멎은 사람 같았다.

지한은 끝까지 멈추지 않고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밖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유리에 등을 딱 붙이고 선 김신우의 눈동자가 천천히 지한에게로 닿았다. 다갈색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할 말을 고르던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안색은 좋지 않았으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명치께에 콱 막혀 있던 초조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저조차도 황당하리만큼 금세 깨달은 감정은 완연한 충족이었다.

“…….”

그때였다. 김신우의 눈자위에 맑은 막이 차올랐다. 놀랄 새도 없이 눈꼬리에 달려 있던 굵은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느닷없이 터져버린 둑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고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입술 끝은 안쓰러우리만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지한은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마주하자마자 난데없이 쏟아지는 눈물 세례에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왜 그래요.”

손을 뻗은 지한이 조심스레 그의 하얀 뺨을 쥐고 엄지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나 한번 닦아내기가 무섭게 또 금세 맺힌 눈물이 턱 끝으로 쉼 없이 미끄러졌다.

그가 누군지는 대강 짐작이 갔으나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안쓰러운 눈물의 이유는 몰라도 제가 뭘 해야 하는지는, 뭘 하고 싶은지는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혼란 속에서 지한은 찌푸린 채 침묵을 지켰다.

뺨을 쥐고 있던 지한의 손이 스르륵 내려가 그의 목덜미에 감겼다. 숨을 쉬고 있다는 걸 알려주듯 손바닥에 뜨끈한 체온이 전해 온다. 두근거리는 옅은 맥박도 느껴졌다. 남은 팔을 뻗어 그의 등을 감싸곤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그가 쉽게 끌려왔다. 덜미를 누르는 손에 힘을 주니 어깨에 그의 이마가 툭 파묻혔다.

“왜 울어요….”

그의 머리칼에 뺨을 기댄 지한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목덜미를 덮은 손은 느리게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귓가에서 흠뻑 젖은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해서.”

잠시 숨을 멈춘 지한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울먹임이 섞여 잔뜩 뭉그러진 말은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팔 아래 저보다 듬직한 어깨가 하릴없이 떨리고 있었다.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는다. 흐느끼는 음성과 함께 김신우의 어깨가 들썩였다.

“형이…. 으윽. 으….”

살짝 고개를 비튼 지한이 물끄러미 김신우의 다갈색 머리칼을 응시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따스하게 감겨 오는 체온에 절로 한숨이 흘렀다.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칼 위로 뺨을 툭 기댔다.

“흐윽, 형이…. 윽.”

맞닿은 체온은 기꺼웠으나 그는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어처구니없이 웃음이 샜다. 하, 뭐가 웃긴 건지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또렷해지는 정신에 목구멍을 뜨끈하게 달구던 술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윽…. 형이….”

“…응. 형이.”

작게 되묻자, 말을 멈춘 김신우가 울음을 삼키며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눈물로 티셔츠 윗부분이 뜨겁고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어지는 훌쩍임과 함께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숨이 막힐 정도로 더 꽉 안겨 올 뿐이었다.

하여 지한 또한 더는 묻지 않았다. 가여운 얼굴로 서럽게 우는 그를 보듬어 주었다.

거실 창 옆에서 부둥켜안은 채로 제법 긴 시간을 보냈다. 그의 울음소리는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으나, 그는 마치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참 후 울음이 완전히 멎은 듯했을 때, 그제야 지한은 그의 어깨를 살짝 쥐어 떼어냈다.

스르르 떨어져 나간 김신우가 고개를 들었다. 두 눈꼬리는 붉게 젖은 채 부풀어 있었다. 힘겨워 보였으나 그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물 좀 마실래요?”

나직한 물음에 고개를 저은 김신우가 다시 지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얼굴을 푹 파묻는 바람에 품에 갇힌 목소리가 애틋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어디 가지 말아요. 나 두고 가지 마세요.”

절박한 목소리에 지한의 심장이 우지끈 흔들렸다. 옅은 숨을 뱉은 지한이 고개를 돌려 머리를 쓸어 올렸다.

“김신우 씨.”

부르며 그의 어깨를 다시 쥐었다. 내내 제 어깨에 파묻고 있었으니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었다. 부드러운 손길을 따라 김신우가 고개를 들었다.

좁은 틈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어둠 속에 잠긴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지한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두고 간 건…. 그쪽이었는데.”

찬찬히 뱉어낸 말에 김신우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살짝 시선을 올린 지한이 가느다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손끝으로 갸름한 턱을 쥐어본다. 턱 끝에 채 떨어지지 않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엄지로 느리게 문질러 닦아내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두고 가도 되니까….”

김신우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 영문 모를 얼굴을 주시하며 지한이 옅게 웃었다.

“너무 멀리 도망가진 마세요.”

“…….”

“찾기 어렵잖아요.”

여전히 굳어 있는 김신우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지한은 엄지에 힘을 주어 그의 턱 위를 지그시 눌렀다. 따라 그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보고 싶었어요.”

지한이 낮게 속삭였다. 기다란 눈을 살짝 내리깐 그의 턱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는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말캉하고 뜨거운 촉감의 입술이 꾹 맞닿았다. 지한은 그대로 그를 밀며 더 깊숙이 입을 맞췄다. 눈을 감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습한 숨결을 남김없이 빨았다.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어쩐지 더 갈증이 났다.

몰아붙이는 움직임에 김신우의 등이 차가운 창문에 닿았다. 눈앞에 기다랗게 감긴 지한의 냉랭한 눈매를 보며 그 또한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뜨겁게 감싸 안았다.

지한은 김신우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이리저리 고개가 비틀리고, 엉망으로 입술이 문질렸다. 그는 마치 따지듯, 또는 무언가 갈구하듯 김신우의 잇새를 망설임 없이 가르고 혀를 얽었다.

“후으….”

“…형…. 읍.”

지한은 다시 그의 입술을 삼켰다. 오뚝한 코끝이 뭉개지듯 문질렸다. 춥. 추읍. 젖은 살이 문질리는 질척한 소리와 짙은 숨소리가 섞였다. 서로의 입술을 물고 혀를 얽는 행위는 오싹한 소름이 끼칠 만큼 달콤했다. 꽉 끌어안은 덕에 바짝 맞붙은 하체에 열기마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갑작스레 시작된 입맞춤은 꽤 오래 이어졌다. 서로의 입술과 혀를 녹여버릴 듯 뜨겁고 진득한 행위가 끊길 듯 끊기지 않았다. 조급하게 이어지던 행위에 서서히 숨이 막혀올 때쯤이었다. 타액으로 흠뻑 젖은 입술이 촉촉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두 남자는 시선을 마주한 채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

“후우….”

지한은 기다란 눈매로 그의 붉어진 눈가를 응시했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만 울려 퍼지는 적막 사이로, 지한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불안하지 않게 해 줄 테니까.”

냉소적인 눈매가 여느 때와 달리 부드럽게 빛났다. 풀어진 얼굴은 지켜보는 이의 바싹 마른 심장을 절절하게 달굴 정도로 더운 빛을 뿜었다.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비로소 눈부신 밤이었다.

***

두 남자는 침대 위에 서로를 마주 보고 누워있었다. 새벽 5시. 아직 아침이 밝아 오지 않은 짙푸른 시간이었다. 지한은 베개 위 괸 팔에 뺨을 댄 채 물끄러미 잠든 김신우를 보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빼곡하게 붙어 있는 스크랩 기사에 그는 내심 당황해 버렸다. 사정을 알고 나니 밤의 김신우가 저를 발견하자마자 왜 그렇게 행동했었는지 이해가 갔다.

그간 낮의 김신우가 보여 온 질투를 떠올리면 도가 지나친 행동도 대강 헤아릴 수 있었다. 그 둘은, 서로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제 자신에게는 아니었지만.

품 안에서 훌쩍이던 김신우는 몇 번 토닥여 주자 금세 스르르 잠이 들었다. 되짚어보면 제 옆에선 잠들지 못하는 걸 그다지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잘 자는 축에 속했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잠들지 못하는 편인 건가. 그의 과거를 떠올리면 그럴 법도 했다. 그간의 모습을 더듬어보던 지한은 괜스레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처럼 늘 환하게 빛나는 사람이 그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지 누가 알았을까. 괜스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아. 옅은 숨을 내쉰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곤하게 잠든 김신우의 얼굴 위로 손을 뻗어, 눈가 위로 흩어진 다갈색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문득 바라본 섬세한 얼굴이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쁘게도 생겼다.

생각하자 헛웃음이 샜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다지도 간사했다. 그렇게 끔찍해할 때는 언제고.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가면 아래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있을 거라고만 짐작했었지, 정말로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곁에 남고 싶다. 지켜 주고 싶다.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결심 하나로 판단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돌연 평온하게 감겨 있던 김신우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찌푸린 눈가를 보며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스르르 열린 눈꺼풀 사이로 초점이 흐린 다갈색 동공이 드러났다. 반쯤 감긴 기다란 눈매를 보며 지한은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이 두어 번 깜박, 깜박 감았다 뜨였다. 몽롱한 얼굴의 김신우가 눈앞의 지한을 느슨히 응시했다.

“…공지한….”

끊어질 듯 잠긴 목소리와 느릿하게 올라온 손이 지한의 뺨을 쓸었다. 지한이 멈칫 굳은 사이 그가 서서히 다가왔다. 뭐라 답하기도 전 둘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

느닷없는 입맞춤에 지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잇새로 뜨거운 숨결이 흘러 들어온다. 자연스레 파고든 입술과 함께 서로의 상체가 좀 더 가까이 맞붙었다.

“음….”

키스는 느리고, 섬세하게 이어졌다. 부드럽게 스며든 혀가 입천장을 문지르다 치열을 훑었다. 뾰족한 혀끝이 입 안 여린 살을 스칠 때마다 찌릿한 간지러움이 피어올랐다.

조금 전처럼 조급하고 성마른 입맞춤이 아니었다. 갈증이 날 만큼 섬세하고 부드러운 혀 놀림에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였다. 눈앞에 나붓이 내리깔린 속눈썹을 보며 지한 또한 눈을 감았다.

서서히 진득하게 달라붙던 그가 지한의 위로 스며들 듯 올라왔다. 고개를 비틀어 느리게 입술 위를 핥으면서 셔츠 사이로 손을 넣는다. 따라 지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지한의 손바닥이 그의 가슴께에 닿았다. 살짝 밀어내자 그가 쉽게 입술을 물렸다.

“하아…. 김신우 씨.”

낮은 목소리에 김신우가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떴다. 흐릿한 시선이 지한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제 위에 바짝 올라탄 그를 올려다보던 지한이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그가 조금 굳은 듯 보인 탓이다. 하나 착각이 아니었다. 점점 또렷해지는 동공은 확연히 굳어 가고 있었다. 지한은 놀란 듯 경직된 김신우를 들여다보듯 조심스레 시선을 맞췄다.

그 김신우다. 제 이름 세 글자를 중얼거릴 때부터, 그 초연한 눈빛을 볼 때부터 지한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꿈… 꾸셨습니까?”

나직한 물음에 그가 불현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를 끌어 올렸다.

“…당신, 왜.”

말하다 말고 돌연 질끈 눈을 감았다. 또다시 괴로운 듯한 얼굴이었다.

“어디 아프세요?”

지한은 다소 놀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김신우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천천히 뻗어 나간 손이 김신우의 등을 감싸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트 위를 팔로 지탱한 채 그를 내려다보던 김신우가 그 손길에 툭 내려앉았다. 열 오른 뺨이 지한의 가슴께에 닿았다.

꿈인 줄 알았다. 헤어진 날 이후로 늘 그가 꿈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사방이 부서질 듯 흔들리는 화마 속, 또는 고요한 제 침대 위에서였다.

종말을 맞은 세상에 단둘이 뚝 떨어진 듯 적막에 잠길 때면, 김신우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에게 입을 맞췄다. 허상인 걸 알아챘을 때도, 또는 모를 때에도 기꺼이 욕심대로 갈증을 비웠다.

자각 없는 그리움을 꿈으로 채워보았다. 몰염치하게도. 그걸 알면서도.

허덕이는 악몽 속에서는 매번 덫에 걸린 그를 만났다. 낮인지 밤인지 모를 시간에 갇혀 수면 속으로 빠져들 때마다, 이제는 화마에 휩싸인 김준우 대신 공지한이 얼굴을 드러냈다. 달아날 수 없는 현실은 받아들였다. 얹힐 것이 분명한 소유욕을 억지로 씹어 뱉었다. 그렇게 버티던 시간이었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부드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김신우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불안하지 않게 해 줄 테니까.’

푸르스름한 새벽빛 사이로 낯선 말들이 스며든다. 두통과 함께 속수무책으로 피어나는 잔상에 그가 짙은 숨을 내쉬었다.

전과 달리 자꾸만 원치 않는 기억이 흘러들었다. 의도치 않게 파악한 상황에 속절없는 분노가 밀려들었다. 제가 벌여놓은 모든 일이 다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성과 감성을 어지러이 헤집는 모든 것이, 그 모든 일이 불쾌하고 거북했다.

이래선 안 되는 거니까.

여전히 제 등을 쓰다듬는 팔목을 꽉 쥐곤, 그의 위에서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투명하게 저를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를 보며 김신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왜 왔어….”

속수무책으로 불어나는 죄책이 괴로웠다.

다시 만나선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좋을 거 없다고 했잖아… 내 옆에 있어 봐야 좋을 거 없다고, 했잖아요. 씹, 내가 말했잖아.”

김신우는 이를 꽉 다물었다. 울컥, 뜨거운 숨을 삼킨다. 목적을 잃은 울분은 굳이 더 토해내지 않았다.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메슥거렸다. 먹은 것도 없으나 당장 뭐라도 게워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대로 거칠게 욕실로 달려가려는 그의 팔목이 붙들렸다. 꽉 쥐어 오는 힘에 그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지한이 심각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

잡힌 손목이 아프게 죄어 왔다. 빤하게 김신우를 응시하는 지한은, 늘 그랬듯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김신우는 잠긴 목을 열었다. 그의 평안과 안위를 위해,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던,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진심을 꺼내었다.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할 거야.”

불행의 싹, 악의 존재, 좋아하는 이를, 사랑하는 사람을 끝내 죽이고 마는 살인귀.

“아프게, 내 옆에 있으면, 당신…. 죽을지도 몰라. 나는, 내 옆에선, 내가, …하면 죽었으니까. 당신, 죽을 뻔했으니까….”

끝없이 치닫던 갈망과 동경, 지독한 소유욕.

“내 옆에선 좋을 게…. 하나도 없어.”

감정을 느끼는 순간, 네가 또 죽을 뻔했으니까.

절망적인 현실에 눈가가 시큰거린다. 입술을 꽉 다문 김신우는 아려오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불현듯 다시 깨달은 현실이 아프고 괴롭다. 애써 막아 두었던 시커먼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콸콸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저 좋아하잖아요.”

중저음의 음색이 단호하게 스몄다.

“김신우 씨, 나 좋아하잖아요.”

김신우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잘게 떨리는 시선이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저도 좋아요.”

“…….”

“좋아서 왔어요.”

꽉 쥔 손목을 놓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난 지한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되짚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꾸는 꿈, 악몽, 과거의 기억…. 그런 건 전부 현실이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 여기, 나. 그리고 당신…. 그것만 믿으면 안 돼요?”

눈앞에 멈춰선 그가 집요하게 시선을 맞춰왔다. 손목을 잡은 손이 느릿느릿 아래로 내려가 깍지를 얽었다.

“겪어 보지 않은 일들, 벌어지지 않을 일 같은 거, 불필요한 걱정하지 말고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이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삼켜낸 숨과 함께, 애틋한 본심을 뱉었다.

“나 좀 믿어 줘.”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새카만 눈동자엔 거짓이라곤 없었다.

애틋한 한 마디에 김신우의 눈가가 붉어졌다. 짙게 섞여든 진심에 돌연 숨이 막혀옴을 느낀다. 시큰거리는 눈을 깜빡이며, 그는 가만히 지한을 응시했다.

깊숙한 곳에 감춰 두었던 까만 나락에 빛이 스며들었다. 누구에게서도 받아 본 적 없는 다정한 위로가, 그 진심 어린 감정에 속이 쓰렸다.

말간 눈동자에 고이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래, 나도 널 보내고 싶지 않았어.

“…후회할 거야.”

딱딱하게 굳은 김신우의 눈동자가 그를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후회 안 해요.”

“…….”

“결과가 어떻든, 내 선택이니까.”

그러니까 상관없었다.

지한은 힘없이 늘어진 손가락에 좀 더 단단히 깍지를 얽었다. 턱을 비스듬히 들고 희게 미끄러진 눈물의 궤적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찌푸린 채 반쯤 감은 눈으로 지한의 눈동자를 마주하던 김신우가 이내 허탈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고개가 툭 떨어진다.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꾸욱 짓눌렀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눈썹은 잔뜩 찌푸린 채였다.

“하아, 씨발….”

중얼거리는 혼잣말과 함께 깊고 긴 한숨이 이어졌다.

“좆같아요.”

한 번의 한숨이 더 이어진 뒤에 손을 내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찌푸린 눈동자에는 옅은 물기가 반짝였다. 느리게 눈을 내리깐 김신우가 그의 어깨 위로 얼굴을 툭 파묻었다.

“좆같이 좋아서….”

“…….”

“화가 나.”

맞닿은 체온에 해일 같은 안도가 번진다. 퍽 그다운 말에 지한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

지한은 강아지처럼 제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김신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다갈색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겨 왔다. 그 머리칼에 뺨을 살짝 문지르곤 고요히 속삭였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어깨에 기대어 있던 김신우가 서서히 일어났다. 좁은 틈에서 시선이 마주친다. 지한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곧은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저, 다시 일하게 해 주세요.”

작지만 강단 있는 어조였다. 살짝 시선을 내린 지한이 그의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표정은 더없이 심각한 낯이었다.

“제가….”

“…….”

“제가 옆에서 지켜 주고 싶어요.”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이었다. 일자로 꾹 다물린 입술이 워낙 비장해 보인 탓에, 김신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고집스럽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참 한결같은 놈이었다.

답을 기다리듯 저를 응시하는 지한의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인 김신우가 손바닥으로 눈부터 턱 끝까지 느리게 쓸어내렸다.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끝내 다시 고개를 든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눈매는 어딘가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요.”

나긋한 목소리로 답한 그가 지한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어렴풋이 지한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턱을 비스듬히 든 채, 느른하게 시선을 마주한 김신우가 서서히 다가왔다.

“지켜 줘요, 나.”

귓가에 조심스레 속삭인다. 귀 끝을 간질이는 숨결에 지한의 등이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허리를 점점 더 단단히 감아온다. 설핏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상에…. 무서운 일 너무 많으니까.”

“…….”

“공지한 씨가 책임지고 나 지켜 줘.”

속삭이듯 건네는 말에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지한은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확실히 그의 주변엔 그가 무서워할 법한 일들이 많았고, 잘해 낼 자신 또한 있었다. 감사 인사를 건네려던 차에 김신우가 그의 귓불을 살짝 씹었다.

“읏….”

지한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이어 티셔츠 아래로 단단한 손끝이 타고 올라왔다. 김신우는 지한의 목 뒤와 턱선, 뺨을 스쳐 눈꼬리까지 차례로 입술을 눌렀다. 바짝 맞닿은 살결에 코끝으로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겼다.

“후회 안 할 거라고 했죠.”

“…네.”

기분 탓일까, 작게 중얼거리는 음색이 축축이 젖은 듯했다. 푹 잠긴 목소리에 지한은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얼굴을 들고 가만히 시선을 맞추던 김신우가 지한의 양 뺨을 조심스레 쥐었다. 잠시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도…. 혹시 후회하게 되는 날엔.”

“…….”

“말해 줘요.”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김신우가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말간 눈동자가 왜인지 슬퍼 보였다. 의도가 짐작 가는 말에 어쩐지 가슴이 욱신거린다.

“응?”

“…….”

묵묵히 눈가를 찌푸린 지한이 대답 대신 그를 끌어당겼다. 눈을 감으며 깊숙이 입을 맞췄다. 말랑한 입술을 비집고 혀를 밀어 넣자 그가 반기듯 제 혀를 얽어 왔다.

“으음….”

“하아….”

지한이 그의 등을 꽉 끌어안자, 김신우 또한 상체를 더 맞붙여 왔다. 두 남자는 눈을 감고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서로를 꽉 붙든 손길은 한없이 단단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젖은 입술이 맞물리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려 퍼진다. 아랫입술과 혀를 번갈아 빨며 부드럽게 미는 힘에 지한이 뒷걸음질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간 김신우의 손바닥이 그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숨이 막힐 정도로 부드러운 키스였다. 무릎 뒤에 침대가 툭, 걸렸다. 지한의 뒷머리를 가볍게 받친 김신우가 서서히 그를 침대 위로 눕혔다. 매끄러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살갗을 깨물었다.

“으….”

뜨거운 숨결과 함께 찌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지한은 눈을 감으며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쭙, 쯔읍. 귀 아래에서 혀와 살갗이 문질리며 야한 소리가 났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두 남자의 묵직한 좆은 이미 발기한 지 오래였다.

“하아, 벗겨도 돼요?”

입술을 살짝 떼어내며 묻자,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쓸 필요도 없이 홀로 양팔을 교차해 티셔츠를 훌렁 벗어냈다.

희끄무레한 새벽빛에 지한의 맨몸이 드러났다. 조각칼로 홈을 낸 듯 섬세하게 갈라진 광배근을 따라 점점 잘록해지는 허리가 도드라졌다. 묻지도 않았는데 선뜻 제 트레이닝 바지에 손가락까지 걸어 끌어 내리던 지한이 문득 홀린 듯 제 몸을 보고 있는 김신우를 올려다봤다.

“벗겨 드릴까요?”

의외의 말에 김신우가 눈썹을 치켜떴다. 겪어 보지 않은 상황에 생경한 기분의 김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관계 전에 제 옷을 벗겨준 적은 없었으나, 그에게 벗겨지는 기분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망설임 없이 제 트레이닝 바지를 툭 벗어 내린 지한이 검은 드로즈 하나만 걸친 채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은 탄탄했다. 그는 김신우의 생각보다 수줍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김신우의 시선이 제 앞에 선 지한의 몸을 차근히 훑어 내려갔다. 검정 드로즈 안의 좆은 오른쪽으로 확연히 부풀어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곳에서 남자의 성기를 꺼내어 주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지한은 제 할 일에 열중했다. 가만히 침대 위에 걸터 앉은 김신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고, 실크 재질의 홈웨어 단추를 하나씩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햇빛이라곤 본 적도 없는 듯한 말간 목덜미와 단단한 속살이 드러났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흥분이 피어올랐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던 지한의 상체가 김신우 쪽으로 기울었다. 본능적으로 그의 뽀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는,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점점 상체를 낮춰 오는 지한 탓에 김신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지한은 입 안의 살갗을 바지런히 잘근거리며 한 손으로 단추를 전부 풀어내고, 하의마저 벗겨 내렸다. 김신우는 저돌적으로 덤비는 지한의 모습이 무척 야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드로즈를 제외하고 전부 벗어낸 두 남자가 침대 위에 딱 맞붙었다. 빗장뼈 부근을 쪽, 쪽 빨아대던 지한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내려가 그의 유두를 머금었다.

“하…. 공지한.”

머리 위에서 김신우의 낮은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지한의 머리칼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 숨소리와 손짓 하나에 지한의 몸도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지한은 그에 대해 수없이 찾아보았다. 프로필, 기사, 최근 인터뷰까지. 자각하지 못한 그리움이 자연스레 그를 쫓고 있었다. 와중에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바로 김신우의 나이였다.

밤의 김신우가 저를 형이라 부르던 것이 트라우마 탓인 줄 알았으나, 실제로 지한이 그보다 한 살 더 많았다. 첫 만남부터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 와 그런지 실제 나이는 당연히 저보다 많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제법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한은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했다. 밤마다 그가 형, 형 해대는 것이 귀엽기도 했지만, 딱딱한 이름 세 글자보다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여 그것이 비단 한쪽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면 더 좋을 듯했다.

“제가…. 후우, 형이던데….”

침대 위에서 가슴을 빨다 말고 하는 소리치곤 맥락이 없었다. 느닷없는 서열 정리에 눈을 감고 있던 김신우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하는 짓이 좆같이 귀여웠다. 시선을 내린 김신우가 지한의 머리칼을 슬며시 쥐었다.

“왜. 형이라고, 불러 줘요?”

“하아…. 네.”

지한은 멈추지 않고 돌기를 질척하게 빨아대며,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답했다. 허리를 움직여 드로즈 위로 부푼 좆을 비비듯 문질렀다. 두 남자의 속옷이 흥건한 쿠퍼액으로 점점이 젖어 들었다.

“그래요…. 하아.”

기분 좋은 신음과 함께 그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그가 귀엽다는 생각과 별개로, 착실하게 달아오르는 육체에 굳은 눈가가 꿈틀거렸다.

김신우는 손을 뻗어 지한의 팔목을 탁 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감싸 아래로 확 끌어당겼다. 젖은 사타구니와 단단한 복부가 딱 맞붙었다. 점점 숨이 거칠어지던 둘의 시선도 마주쳤다.

“이런 요망한 짓은, 어디서 배웠어요? 형.”

물으며 은근히 허리를 움직이자 딱딱하게 발기한 두 개의 좆이 꾸욱, 꾹. 문질렸다. 야릇한 느낌에 지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후우…. 어디서 배우진…. 않았는데. 그냥…. 으….”

말하던 지한이 신음을 뱉었다. 진득하게 하체를 비비던 김신우가 지한의 드로즈를 단숨에 벗겨 내린 뒤, 제 것도 아래로 끌어내렸다.

두 개의 뜨거운 좆을 쥐고는 위아래로 찬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릿하게 올라오는 쾌감에 지한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었다.

“하아, 하고 싶어요.”

김신우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동그랗게 솟은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길에 지한이 멈칫 굳었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이렇게 하죠. 먼저 내가 넣어 볼게요. 다음번에는 당신이 해요.’

그러니 이번엔 제 차례였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는 첫 경험을 맞은 남자의 쓰라린 아픔을 잘 알고 있었다. 뒤로 처음 성기를 넣었을 때 쾌감이라곤 느낄 수 없었다. 오직 괴로움뿐이었다. 사람의 신체 구조가 다 똑같고, 제 것도 크기가 큰 편이니 그 또한 아파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괴로워할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김신우 씨.”

곤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신은 벌써 두 번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두 번째에는 생전 처음 겪는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처음은…. 좀, 아프거든요.”

갑작스러운 말에 김신우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니까, 그냥 제가…. 아래…. 해야겠습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지한이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가 쾌락 없이 고통만 견뎌내야 하는 섹스를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난데없는 비장한 눈빛에 김신우가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그제야 자신이 했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그저 달래려 꺼냈던 말이었고, 이번에도 당연히 제가 올라탈 생각이었으나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나 혹시라도 그가 원한다면 뒤를 내어줄 의향이 있었다. 상대가 공지한이라면 자신의 처음을 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요.”

제 생각을 한답시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러나 이미 한껏 달아오른 몸에 이런저런 걸 잴 여유가 없었다.

처음 그를 안았을 때, 지독한 흥분에 빠져 허겁지겁 그를 취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떠올리자마자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이번에는 되도록 함께 즐기고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만족시켜 줄 생각이었다.

생각을 마친 김신우가 지한의 어깨를 붙들고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다시금 그의 위로 올라와 무릎을 세우고 앉은 김신우가 지한의 무릎 뒤를 잡아 올렸다. 적나라하게 벌어진 가랑이 사이 드러난 섬세한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맺혔다.

“그럼….”

“…….”

“이번엔 안 아프게 해 줄게요? 형.”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마친 김신우의 얼굴이 고간 사이로 처박혔다. 눈을 크게 뜬 지한이 손을 크게 내둘렀다.

“윽…. 잠, 그건. 읏.”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쭙, 츠읍. 뜨거운 혀가 구멍 위를 파고들었다. 지한이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으나, 허벅지를 단단히 붙든 손은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었다. 닫혀 있던 살이 벌어지며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감촉이 생생했다.

“아! 하읏…!”

지난번보다 강렬한 촉감에 지한이 턱을 치켜들었다. 불끈 기립한 좆이 금세 딱딱해졌다. 버둥거리는 지한을 꽉 붙든 김신우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젖은 입술이 번들거렸다.

“하, 잠, 이건, 좀, 윽….”

“가만히 있어요. 아무나 빨아 주는 거 아니니까.”

‘아무나’가 아니라는 말에 지한이 입술을 꾹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신우가 누군가의 아래를 빨아 줄 사람은 아니었다. 특별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한은 손에 잡히는 솜이불을 꽉 쥐고는 눈을 감았다. 제 마음을 인정하고 결심한 이상, 이런 것들은 이제 받아들여야 했다.

“후윽, 읏.”

미끌미끌한 회음부에 김신우의 코끝이 문질리자, 발끝이 바짝 서고 절로 이가 꽉 물렸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적응하기 힘든 이상한 쾌락이었다.

“하아… 그만 벌름거려요, 형.”

“으, 아니. 자꾸 거길.”

“자꾸 그러니까 빨리 박고 싶잖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느긋하게 속살거린다. 적나라한 말에 지한의 귀 끝이 붉어졌다.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턱선이 도드라졌다. 아무리 세 번째라지만, 남자의 아래에 깔려 버둥거리는 상황은 익숙지 않았다. 차라리 아픈 게 나을 것만 같았다.

“…그냥 넣어요.”

입술을 한번 꾹 깨문 지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회음부에 코를 박고 빨아대던 김신우가 눈썹을 치켜떴다.

“뭐?”

“으, 그냥, 그만하고, 넣으라고….”

벌게진 얼굴로 중얼거리자, 빳빳하게 발기한 지한의 좆을 보며 그가 픽 웃었다.

“왜, 배고파요?”

김신우가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체모 하나 없이 매끈하고 붉은빛을 띤 좆이 제 크기를 자랑하며 우뚝 기세를 드러냈다. 슬쩍 입매를 끌어올린 김신우가 제 좆을 잡고는 구멍 위를 문질렀다.

“그럼, 빨리 먹여 줄게요.”

야릇한 기분에 지한은 저도 모르게 아래에 힘을 주었다. 잔뜩 젖은 귀두가 구멍 위로 찔걱찔걱 마찰했다.

“전처럼 아프면 말해요.”

김신우가 찬찬히 상체를 숙이며 나긋하게 물었다. 그는 최대한 인내하고 있었으나, 표정은 점점 여유를 잃어갔다.

“흐읏, 괜찮, 아직…. 아윽.”

빠듯한 아래가 서서히 벌어지며 이물감이 파고들었다. 뜨거운 자지가 녹진하게 젖어 든 아래를 느리게 가르곤 안을 점점 채우기 시작했다.

“으읏….”

고작 두 번의 경험으로 빡빡하게 다물린 곳이 쉬이 벌어질 리 없었다. 그러나 행위는 전과 달리 아주 조심스럽고 느렸다. 강하게 안을 쑤셔 박을 때보다, 뭉근한 움직임에 더 애타는 기분이 몰려왔다. 뜨거운 살갗이 맞물리는 소리와 감촉이 선명했다.

“으흑, 읏. 아윽.”

낮은 숨을 몰아쉰 김신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공지한과의 섹스가 마지막이었으니, 전에 비하면 실로 굉장히 오랜만에 갖는 관계였다.

“하아…. 힘 좀 빼, 요.”

금욕적인 얼굴을 찌푸린 채, 제 아래서 헐떡이는 지한을 보니 지독한 흥분이 몰려왔다. 한계까지 발기한 줄 알았던 좆이 내벽 안에서 점점 더 부풀기 시작했다. 그의 안을 제가 가득 메우고 있다는 생각에 김신우의 입매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좆, 터질 것 같아요. 형.”

“아학, 윽!”

말하며 쿡, 허릿짓을 했을 뿐인데, 지한의 몸이 발작하듯 튕겨 올랐다. 거친 숨을 뱉은 김신우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끝까지 박아 넣자마자 강하게 느끼는 듯한 그를 보며, 불현듯 개 같은 생각이 떠오른 탓이다.

“하, 왜 형 소리에, 더 조이지?”

“하윽, 아!”

길게 빼낸 좆을 다시 처박자, 그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녹음 파일에서 흘러나오던 대화가 떠오른다. 형, 형. 형. 개처럼 불러대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지한의 허리를 꽉 붙든 김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씨발. 설마 딴 새끼, 생각해요?”

“아, 으. 그런 거, 아니…!”

철퍽, 기다란 좆이 끝까지 박혔다가 느리게 빠져나왔다. 낮은 숨을 삼킨 김신우가 그의 정수리를 살며시 그러쥐며 상체를 낮췄다. 쿡, 다시 귀두 끝이 내벽 깊은 곳을 찔렀다.

“아니죠, 형.”

“후윽, 읏….”

“혀-엉.”

말꼬리를 늘이며 빈정대는 어조에 지한의 내벽이 바르르 떨렸다. 안을 불덩이 같은 기둥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올라왔다. 신체 구조가 완전히 뒤바뀐 듯한 기분이었다.

“하아, 으. 왜, 왜 부르는….”

거칠게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지한이 찌푸린 눈을 떴다. 왜인지 전과 달리 굳은 듯한 얼굴의 김신우가 비스듬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흉통이 부풀어 오르고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후으, 씨발. 이것도 나예요.”

그가 허리로 뭉근하게 지한을 짓누르며 낮게 속삭였다.

“무슨, 아흑.”

“하아, 나라고…. 당신이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이 자지가. 읏.”

끈적한 상체가 진득하게 맞붙었다. 아래에선 쩍쩍, 살갗이 벌어지고 좁아지는 물소리가 난잡하게 울려 퍼졌다. 하아, 하아. 하아. 서로의 숨소리가 격하게 섞여들었다.

“아, 학! 읏!”

“기억해요.”

차츰 속도를 붙여가는 행위에 점점 짜릿한 성감이 치닫기 시작했다. 턱을 치켜든 지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김신우의 등을 감싸 안고, 본능적인 감각을 따라 박자에 맞춰 허리를 튕기기 시작했다. 빳빳하게 솟은 커다란 좆이 허공을 갈라댔다.

“형…. 하아, 형.”

헐떡이며 지한의 손목을 꽉 틀어쥔 김신우가 거칠게 속삭였다.

“이건, 나야.”

“읏, 아, 아!”

“나예요. 형.”

한껏 잠긴 음색과 함께 질퍽거리는 살갗이 끊임없이 마찰했다. 형. 형, 형. 형…. 유난히 집착적인 김신우의 부름은 새벽 내도록,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지한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

지한은 다시 복직했다.

김신우의 입김으로 정산받은 금액은 단 1원도 토해내지 않았다. 새로 쓴 계약서는 박 대표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대우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추가로 지정된 특약에는 김신우가 와이앤에이치 소속사와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경호를 맡는다 라는 사항이 추가되었다. 사실상 거진 종신 계약이었으나, 지한은 아무렴 좋았다.

손에 쥐어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부담스러워하던 그는 일부 금액을 김신우의 이름으로 보육원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김신우는 단번에 거절했으나, 단호한 지한의 태도에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잖아도 기부 천사 타이틀을 단 배우였기에 박 대표 또한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하여 두 남자의 복귀 후 첫 일정은 ‘초록 꿈 마을 보육원’에서의 봉사였다. 내용은 기부와 함께 보육원의 조경 시설을 가꿔주고 쉼터를 가꿔주는 개·보수 활동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봉사였기에 기존 채용 중이던 스태프들과 티에이디 캡스 전 직원들도 함께 나왔다.

“자, 사진 먼저 찍겠습니다. 다들 모여 주세요!”

멀리서 사진 기사가 소리쳤다. 직원 두 명이 소속사에서 미리 준비한 커다란 현수막을 쥐고 맨 앞줄에 쭈그려 앉았다.

[ 사랑과 정을 나누는 김신우와 함께!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세요! -YNH 엔터테이먼트 일동 ]

현수막 정 가운데 선 김신우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수선하게 웅성거리는 인파 사이 김신우가 주변을 훑었다. 그의 눈동자는 단번에 티에이디 직원들 사이에 둘러싸인 지한을 찾아냈다.

“공지한 씨.”

크지 않은 목소리에도 지한은 금세 시선을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이리 와요.”

까닥이는 손짓에 잠시 멈칫 주변을 둘러본 지한이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다가왔다. 한 걸음 채 남지도 않았을 때, 김신우는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낮게 속삭인다.

“떨어져 있지 마.”

얼떨결에 센터에 자리한 지한이 그를 힐끔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눈부시게 웃어 보였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살짝 눈매를 굳혔다. 미소가 너무 환해서 잠시 눈이 머는 건 아닐까 하는 주접스러운 생각을 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 찍겠습니다!”

카메라를 치켜든 기사의 말에 김신우가 몸을 바싹 붙여왔다. 자연스레 어깨에 손을 두르니 지한의 어깨가 빳빳이 굳었다. 그는 친절한 미소를 유지한 채로 지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웃지는 마요. 아무한테나 보여 주기 싫으니까.”

지한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긋한 목소리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봄바람이 살살 뺨을 스치고, 벚꽃 봉우리들이 나뭇가지에 팝콘처럼 맺혔다. 다시 고개를 돌린 지한은 정말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정자세로 카메라를 보았다.

“하나, 둘, 셋!”

셔터음이 연이어 터졌다. 잠시 후 기사가 카메라를 내리자마자 김신우는 기다렸다는 듯 지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 웃었죠?”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는 말에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바람에 멈췄던 숨을 터뜨렸다. 어깨동무하고 있으니 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어수선하게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손등에 슬쩍 스쳤다. 굳어 있던 지한이 힐끔 눈을 들자, 그가 약하게 손가락을 얽어 오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봄바람보다 따뜻한 미소였다.

지한은 또 멀거니 그 얼굴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지한 씨!”

“지한이 혀엉!”

멀리서 고함이 들렸다. 돌아보니 삽을 든 장준혁과 이지운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조경 개·보수 봉사다 보니, 김신우를 제외하고 전부 가볍고 편안한 차림으로 나왔다. 지한도 마찬가지였다.

“저, 가 볼게요. 쉬고 계세요.”

눈을 맞추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듣기로 오늘 보육원에서 할 일이 제법 많았고, 그는 사진 촬영 후 원장실에서 단독 면담이 있다고 했다.

“조심해서 해요.”

고개를 기울인 김신우가 살짝 웃어 보였다. 맘 같아선 전부 집어치우고 싶었으나 일부러 은근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간 지켜본 결과 공지한이 제 웃는 얼굴을 좋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죽 해 온 일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예. 혹시 무슨 일 있으시면 전화하세요. 벨소리 제일 크게 해 놨습니다.”

지한이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를 두드리며 말하자, 김신우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전화하면 빨리 받을 거예요?”

“네.”

“얼마나?”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툭 건드린다. 지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신우는 입매를 또 끌어올렸다. 고작 말 한마디를 쉽게 뱉지 않는다. 매사 우직하고 진중한 모습이 이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아랫배가 뭉근해졌다.

“저어, 배우님…. 원장님 면담이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던 한정원이 눈치 보듯 눈을 굴렸다. 면담 시간이라고 해 봐야 고작 10여 분간인데 오가는 대화가 여간 이상해 보인 탓이다. 마치 사귄 지 22일 된 연인 같아 보였다.

“아. 고생하세요. 형도 고생해.”

흠칫, 눈인사를 해 보인 지한이 등을 돌려 뛰어갔다. 그가 뒷모습을 보이기 무섭게 김신우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시선은 뛰어가는 지한의 뒷모습에서 떨어뜨리지 않은 채였다.

“…….”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한정원이 쫄래쫄래 뒤를 따랐다.

***

“지한 씨! 오랜만에 뵈니까 더 잘생겨지셨습니다.”

“형. 왜 연락 안 줬어요. 아아. 저 서운해요.”

너스레를 떠는 둘을 보며 지한이 낮게 웃었다.

거처를 김신우의 뜻대로 다시 합쳤다. 쉬는 동안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그 탓에 따로 밖을 나다닐 수가 없었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그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었으므로, 거의 전과 같이 감금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래도 좋았다. 이전보다 그는 훨씬 더 부드러워졌고, 애정 표현에도 서슴없었다. 개중에 가장 확연히 눈에 띈 변화는 제 품 안에서 곧잘 잔다는 것이었다. 요즘 그의 평균 수면 시간은 여덟 시간 정도였다. 불안정하던 모습도 점차 사라져 가는 듯했다.

“일이 좀 있어서.”

받아든 삽으로 부지런히 땅을 일구기 시작한 지한이 입술 끝을 올렸다. 침대에 누워 토닥여 주면 금방 잠드는 그를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기분 탓일까. 밤의 김신우나, 낮의 김신우나 전부 제게 형 소리를 붙이다 보니 요즘 서서히 둘의 간극이 좁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기야 어느 쪽이든 귀여운 면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한은 홀로 그를 떠올리며 삽질을 했다. 확실히 날이 따뜻해지니 조금만 움직여도 더웠다. 입고 있던 후드를 벗으니 검정 반팔 티셔츠만 남았다. 구석에 대강 옷을 내려놓고는 다시 삽을 쥐었다.

“아니, 형. 요즘 스케줄도 없다면서 왜 이렇게 바빠요오.”

눈썹을 쭉 끌어내린 이지운이 지한의 팔뚝을 붙들었다.

“야야, 지한 씨 괴롭히지 마.”

“아. 뭘 또 괴롭혔다고 그러십니까-!”

넉살 좋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한 그에게 장준혁이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혹시 투잡 해요, 형?”

하나 굴하지 않은 그는 지한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살갑게 웃었다.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라, 꼭 친해지고 싶었다. 어쩐지 영 기회가 오질 않아 아쉬운 마음이었다.

“그런 건 아닌데….”

삽질을 멈추고 말꼬리를 흐린 지한이 생각에 잠겼다. 이지운과 장준혁이 약속 좀 잡자고 채근하던 것도 벌써 몇 달이나 지났다. 이제 더 거절하기도 곤란한 입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체육관에도 들러야 하고, 이현우와도 한 번 만나야 하고. 아무래도 조만간 날을 잡아 밖을 돌아야 할듯했다. 결심을 마친 지한이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시간을 물어볼….”

“회식하죠.”

불현듯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쏟아지는 햇빛을 등진 김신우가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와 있었다.

“안 그래도 대표님이 복귀 기념으로 한턱 쏘신다고 했거든요. 따로 하지 말고 같이 하면 되겠네.”

그가 사르르 웃으며 자연스레 이지운의 팔을 떼어냈다. 물론 박 대표는 한 적 없는 말이었다.

“오, 정말요? 그럼 바-로 참석하겠습니다!”

“말만 해 주십시오! 당일 참석도 가능합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이지운과 장준혁이 싱글벙글 웃었다. 지한은 땅에 꽂힌 삽을 쥐곤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래요. 이렇게 고생하시는 김에 오늘 하자고 할게요.”

말하며 자연스레 지한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긴다.

“좀 더 수고해 줘요.”

그가 웃으며 등을 돌렸다. 단호한 악력에 지한이 얼떨결에 그를 따라나섰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의아한 얼굴로 김신우를 응시했다. 자신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어디 가시는….”

시선을 내린 김신우가 지한이 쥐고 있는 삽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윽고 그것을 빼앗아 들고는 길바닥에 툭 던졌다. 땡그렁, 소리와 함께 삽이 나동그라졌다.

“음….”

그는 나긋하게 목을 울렸다. 눈가엔 고운 눈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어딜 가냐고. 좆같은 오징어 새끼들이 치대지 않는 곳. 너를 지저분하게 흘끔거리는 놈들이 없는 곳. 다 집어치우고 둘만 있을 수 있는 곳.

상냥한 음색과 달리 생각은 난잡했다. 그러나 생각하는 대로 뱉을 순 없었다. 공지한은 연약하고, 보호해 줘야 하는 것들을 더 좋아하니까. 잘 보이기 위해선 그가 좋아하는 모습대로 굴어야 했다.

생각하며 힐긋 시선을 내린다. 옆으로 탄탄한 어깨를 따라 팔뚝을 드러내는 검정 반팔 티셔츠가 보였다. 집에서도 늘 입고 다니는 무채색의 헐렁한 티셔츠였건만 괜한 짜증이 치밀었다.

별로 덥지도 않은데 맨살을 보일 필요가 있나?

팔 아래로 드러난 뽀얀 살결과 단단한 근육이 묘하게 섹시해서 기분이 더 더러웠다.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원장 노인네가 쓸데없는 말을 이어 가려 하기에 몸이 안 좋다며 자르고 나온 참이었다.

면담실을 나오자마자 그는 지한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업체 직원들 사이에 섞여서 시시덕거리는 걸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쓸데없이 잘나서 남자고 여자고 침을 줄줄 흘려대는 것이 꼴 보기도 싫었다.

씨발…. 싹 다 잘라 버릴까.

미간을 굳히며 속으로 욕을 곱씹었다. 속으로 하는 생각은 속에서만 그쳐야 했다. 아직 그의 마음에 대해 확신이 서질 않아 불안했다. 지한의 앞에선 최대한 입을 조심해야 했다.

더 깊게, 더 많이. 완전하게. 푹 잠겨 헤어 나올 수 없도록. 그를 더 자신의 안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오랜만에 햇빛 보니까 어지러워서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살짝 눈가를 찌푸린다.

“혼자 가긴 무섭고.”

중얼거리는 말에 지한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많이 안 좋으세요? 약 사올까요? 아니면 병원 가실래요?”

금세 빨라진 어조였다. 심각한 낯빛으로 저를 들여다보는 지한을 보며, 김신우가 입술 끝을 올렸다. 그의 관심과 호감을 끄는 일은 단순한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앞뒤가 투명해서 생각하는 대로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것이 좋았다. 어떻게 된 사람인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구석뿐이었다.

“아니요, 그냥 차에 가서 좀 쉬면 될 것 같은데.”

느긋하게 말하며 지한의 손목을 끌었다. 바로 앞에 주차된 커다란 밴이 보였다. 지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따르며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고운 옆모습은 가히 아름다웠으나, 워낙 흰 피부와 부드러운 인상 탓에 유약해 보일 정도였다. 체격도 좋고 운동도 꾸준히 한다. 더없이 좋은 신체 조건에 정기적으로 받는 검진에서도 별다를 문제가 없다는데, 왜 이렇게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네. 거기 약이 있거든. 타요.”

드르륵, 먼저 문을 열어 준 김신우가 턱짓했다. 지한은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차에 올라탔다. 따라 주변을 훑은 김신우가 문을 닫았다. 등 뒤로 달칵, 차 문이 잠겼다.

제일 뒷좌석으로 건너간 지한은 수납 칸을 뒤적거렸다. 한정원은 늘 그곳에 생수를 구비해 두곤 했다. 아무래도 예민하고 자주 아픈 사람이니 상비약을 종류별로 좀 더 늘려 달라고 한정원에게 요청해야겠다 싶었다.

자리에 앉아 생수통을 꺼내든 지한이 병뚜껑을 땄다. 어느새 옆자리를 꿰찬 김신우에게 건네주었다.

“여기요. 드세요.”

“고마워요.”

가만히 그가 건네는 물병을 받아 든 김신우가 천천히 생수병을 입술에 대었다. 시선을 마주친 채로 느리게 물을 넘긴다. 꼴깍, 꼴깍.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툭 불거진 목울대가 울렁였다.

별생각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한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느른하게 눈을 내리깐 채 혀로 입술을 훑는 모습이 새삼 묘하게 야해 보인 탓이다. 아무래도 쉬는 기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갖던 잦은 성관계가 문제인 듯했다.

지한은 속으로 혀를 차며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다시 사회로 복귀했으니 건강한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차츰 나아질 터였다.

“약은…. 어디, 찾아 드릴까요?”

“응?”

“약 드신다고….”

“무슨 약?”

휘어진 눈가와 물기 어린 도톰한 입술이 호를 그렸다. 그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서서히 다가왔다. 졸지에 창가 쪽으로 등을 기댄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머리…. 어지러우시다면서요.”

그는 진지한 얼굴로 김신우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김신우가 고개를 틀고는 손목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멀거니 저를 보는 지한에게로 서서히 상체를 기울인다. 둘의 거리가 바짝 맞붙었다.

“섹스할 때 나오는 호르몬이 진통제보다 좋대요.”

그가 지그시 속삭였다.

“알아요? 형.”

추읍, 쭙. 말릴 새도 없이 아랫입술을 빨렸다.

외설적인 입맞춤에 지한이 낮은 숨을 내쉬었다. 말랑한 입술이 부드럽게 감싸오자, 자연스레 입술이 벌어졌다. 잇새로 뜨거운 숨결이 흘러든다. 눈앞에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을 응시하던 지한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와 입 맞추는 것이 좋았다. 누군가와 키스를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니건만, 그와 키스할 때면 해선 안 될 일을 하는 듯 매번 찌릿한 전기가 흘렀다.

고개를 살짝 비튼 지한은 김신우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뜨겁게 스며든 그의 입술을 머금고, 혓바닥 위를 간지럽히는 뜨거운 살덩이를 부드럽게 문지르자 달큼한 맛이 났다.

김신우는 키스를 잘했다. 그와의 입맞춤은 늘 농염하고 야릇한 기분이 들게 했다. 단둘이 있는 집 안에서 붙었다 하면 키스로 끝나는 적이 없었다. 삽입이 아니더라도 꼭 사정까지 이르러서야 김신우는 그를 놓아주곤 했다.

젖은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민망한 소리가 났다. 김신우의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얇은 티셔츠 위를 타고 올라가 옆구리를 더듬거렸다. 순식간에 올라온 뜨끈한 열기가 두 남자를 감쌌다.

격렬한 입맞춤 탓에 맞물린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흘렀다. 그것을 혀로 쓸어 올린 김신우가 그에게 더 깊숙이 몸을 기울였다. 지한의 등이 아플 정도로 딱딱한 창문에 밀렸다. 점차 거칠어지는 숨소리는 두 사람 모두 흥분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진득하게 그의 혀를 삼켜대던 지한이 자꾸만 셔츠 안을 파고드는 손목을 붙들었다. 단호한 손길에 김신우가 색욕으로 물든 눈을 떴다.

입술을 살짝 떼어낸 지한이 젖은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러다, 설 것 같아요.”

지한은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진즉부터 얇은 트레이닝 바지 속으로 열기가 고여 들고 있었다. 짧은 키스만으로도 반사적으로 달아오르는 몸이 문제였다. 연애를 많이 해 본 편은 아니었으나 다른 이와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나가서 일해야 하는데.”

그는 진지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직원들은 한창 힘들게 삽질 중일 텐데, 밴 안에서 입술이나 맞대고 있으려니 양심이 찔렸다.

“여기 막노동하러 왔어요?”

느닷없이 분위기를 깨는 말에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밖에서 다들 고생하시니까, 같이….”

“그런 놈들 고생하는 걸 왜 신경 쓰지.”

뚝 말문이 막힌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싸하게 빛나던 김신우의 눈빛이 금세 느슨하게 풀어졌다. 전 같았으면 가감 없이 한 마디 뱉었겠으나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공지한은 착하고, 약하고, 보호해 주고 싶은 것들을 좋아한다. 참 좆같은 취향이었다.

“신경 쓰지 마요.”

말하며 지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만 신경 써 줘요. 형….”

턱 아래서 느껴지는 열기에 지한이 흠칫 어깨를 굳혔다. 가만히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뗀 김신우가 찬찬히 짙은 시선을 올렸다.

“나 아프다니까요.”

조금도 아파 보이지 않는 얼굴에, 지한이 한껏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어디가 아프신데요? 그럼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병원을….”

느닷없이 제 양 뺨을 감싸 쥐는 손길에 말을 멈췄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김신우가 다시금 그의 입술을 장난치듯 베어 물었다.

“그냥 키스해 줘요.”

“…….”

“여기서 섹스할 순 없으니까.”

직설적인 말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김신우가 눈썹을 치켜뜬다. 정적 사이로 그가 미소를 머금었다.

“왜. 할래요?”

“…….”

“난 좋은데.”

경직된 채 잠시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지한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꾀병인 듯하다. 괜한 어리광을 부린단 생각에 낮은 웃음이 흘렀다.

“왜 웃지.”

예상치 못한 미소에 김신우의 눈이 가늘어진다. 냉랭했던 지한의 낯이 순식간에 풀어지니 무척 귀여운 얼굴이 되었다.

“그냥….”

짧은 물음에 지한이 말꼬리를 흐렸다. 시선엔 여전히 한 자락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얼핏 미간을 좁힌 김신우가 그의 어깨 위로 뺨을 툭 기댔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억지로 꾹꾹 억누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밖에서 웃지 말아요.”

“예?”

“나랑 있을 때만 웃어.”

불퉁한 목소리에 지한이 또 픽 웃었다. 그가 질투와 집착이 심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굴 때마다 영 귀여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만난 이후 취향을 개조당한 기분이었다.

“네…. 뭐, 더 요구 사항 있으십니까?”

물으며 느리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짝 들뜬 마음이 구름을 타고 뭉게뭉게 흘러갔다. 그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지한의 품에서 서서히 상체를 든 김신우가 눈을 맞춰왔다.

“못생긴 것들 그만 쳐다봐요.”

“…….”

“눈 나빠져.”

장난기라곤 없는 말에 지한이 눈을 깜빡였다.

못생긴 것들? 누굴 말하는 거지. 주변에 그다지 못생긴 사람들은 없었다.

진중한 얼굴로 짧은 생각에 잠긴 찰나, 김신우가 지한의 턱을 살짝 쥐었다. 입술 위로 가볍게 쪽, 입을 맞추곤 가까이서 속삭였다.

“예쁜 것만 보고 살라고.”

말하며 그대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 마치 보라는 듯이.

멀거니 그 얼굴을 보던 지한은 저도 모르게 또 웃음을 터뜨렸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도가 훤히 보였다.

예쁜 것.

그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키는 중이지 않은가. 24시간 늘 지한의 시야를 채우는 것은 김신우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지한의 입술 끝이 호를 그렸다.

***

봉사가 끝난 후 이어진 회식은 근방 고깃집에서 시작되었다. 장소는 장준혁의 추천으로 넓은 야외에서 장작 구이를 하는 곳으로 예약을 했다. 주말이 아니라 그런지 다행히 단체석이 남아 있었다.

계획에 없던 회식 요청에 박 대표가 투덜거렸으나, 김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갖고 있던 법인 카드를 꺼내 한정원에게 주었다. 술 약속이고 뭐고 공지한과 오징어들이 사적인 자리를 갖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만취한 놈들을 챙기는 지한을 떠올려 본 김신우가 속으로 욕을 곱씹었다. 행동반경이 일반인보다 훨씬 제한적인데도 들러붙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오는 길에 들린 휴게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흡연 부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공지한에게 번호를 묻는 여자를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성큼성큼 다가가 손목을 붙들고 끌고 나와 버렸다.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짜증 나서 이가 다 갈렸다.

“배우님, 진짜 추진력 최고십니다! 감사합니다!”

맞은편에 앉아 엄지를 치켜드는 이지운을 보며 김신우가 옅게 웃었다. 알았으면 입 다물고 빨리 처먹기나 하라고 빈정대고 싶었으나 참았다.

내일부터는 이례적으로 방영이 중단되었던 드라마 파고의 촬영이 재개될 예정이었다. 당분간 또 밤낮없이 바빠질 게 분명하니 그 전에 양껏 붙어 있어야 했다. 물론 한 달 내내 종일 붙어 있어도 만족스러운 적은 없었다. 함께 있어도 늘 부족했다. 종일 머릿속엔 공지한과 단둘이 집에 가서 붙어먹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쯧. 작게 혀를 찬 김신우가 시선을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지한이 불판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목장갑을 낀 채 커다란 집게를 들고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단체 예약 때문에 손질해 주는 식당 인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화력이 센 장작 구이는 잘못하면 다 타 버릴 수 있기에 능숙한 그가 자처하고 나섰다.

짧은 시선에도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팔뚝, 길게 뻗은 다리와 동그랗게 올라간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김신우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가벼운 트레이닝 바지에 검정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을 뿐인데 왜 귀티가 흐르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주변을 훑으니 여자 직원들이 괜히 이쪽저쪽 오며 가며 그를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김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더럭 또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 좆같네….

겨우 시선을 돌리곤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맞은편에 앉은 장준혁과 이지운이 눈치 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어딜 가나 공지한에게 껌딱지처럼 들러붙으려는 게 보여 꼴 보기도 싫은 놈들이었다. 치미는 욕을 애써 삼켰다.

“배우님, 그럼 이번 드라마 촬영 끝나면 다른 일정 계획은 없으십니까?”

“아. 혹시 영화 바로 들어가세요? 그저께 기사에 뜨던데…. 그, ‘지금 우리 사이는’ 맞죠?”

호들갑스러운 말에 고개를 숙인 그가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씨발, 왜 궁금하지….”

“예?”

속삭이는 목소리에 알아듣지 못한 이지운이 반문했다. 작게 혀를 찬 김신우가 고개를 들었다. 크게 들이쉰 숨으로 가슴께를 부풀리며 사람 좋게 웃어 보인다.

“아뇨. 가서 고기 좀 구워 줄래요?”

물으며 고개를 돌려 힐긋 지한을 응시했다.

“우리 지한 씨가 힘들어 보여서.”

“아하! 옙. 안 그래도 제가 하려고 했는데, 지한 형이 계속하신다고 해서….”

그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린 이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손바닥을 입가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지한이 형!! 이리 와서 먹어요. 제가 할게요!”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는 지한을 보며 활짝 웃어 보인 이지운이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내에서 그런 식으로 쉽게 말 놓고 하는 거, 별로 안 좋아 보여요.”

굳은 어조에 흠칫 시선을 내린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신우는 눈을 들며 나긋하게 웃어 보였다.

“괜히 일 안 하고 떠들고 다닌다고 말 나올까 봐.”

더없이 다정한 얼굴이었으나 어딘가 이질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이지운은 장준혁과 얼떨떨한 시선을 나눴다.

“오른쪽이 화력이 너무 세서, 왼쪽 가에서 굽는 게 나아. 금방 타더라.”

어느새 터벅터벅 다가온 지한이 목장갑을 벗어 이지운에게 건넸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왜인지 조용해진 분위기에 눈썹을 치켜뜬다.

“아. 옙. 제가 잘 구워 올게요. 드시고 계십쇼!”

집게와 장갑을 받아 든 이지운이 묘한 기분을 느끼며 후다닥 불판으로 걸어갔다. 김신우는 머릿속으로 그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상상을 했다.

“왔어요? 여기 앉아요.”

옆을 툭툭 두드리는 손짓에 지한이 걸음을 옮겼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장준혁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씩 웃는다.

“고생하셨습니다, 지한 씨.”

“고생은요.”

분위기를 좀 더 띄어 보려 술병을 집어 든 그가 병뚜껑을 돌려 땄다. 지한과 김신우를 번갈아 바라보며 술병을 내밀었다.

“자아. 그럼 우리 다 같이 한잔하실까요….”

그가 미처 손을 뻗기도 전, 김신우가 술병을 낚아챘다. 엉겁결에 술을 뺏긴 장준혁이 김신우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주세요. 오늘 두 분 다 고생하셨으니까 제가 따라 드릴게요.”

술병을 쥐고는 또 우아한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김신우 나름의 철통방어였으나 그들이 이유를 알 리 없었다.

장준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술잔을 받았다. 고개를 돌린 김신우가 웃으며 지한에게 술을 따르고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돌연 물 흐르듯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장준혁이 엉덩이를 일으켰다. 술병으로 손을 뻗으며 김신우의 잔을 채울 준비를 했다.

“아! 제가 따라 드리겠….”

“지한 씨.”

뚝 끊으며 지한에게 술병을 건넨다.

“나 한 잔 줘요.”

잔을 든 손을 내밀자, 술병을 받아든 지한이 그의 잔을 채웠다. 장준혁은 겸연쩍은 얼굴로 다시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따스한 햇볕이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귓가엔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렸고 이지운과 장준혁의 소란스러운 수다 속 이따금 지한의 낮은 웃음이 섞였다.

술잔이 부딪치고, 잔을 넘길 때마다 지한은 힐긋 김신우를 살폈다. 내심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종 웃으며 함께 술을 마셨다.

김신우가 평범한 사람들 속에 섞여 어울리고 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그간 함께 지내온 시간이 꽤 있음에도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별다를 것 없는 술자리였으나 왜인지 들뜨는 기분이었다. 선선한 공기도 좋았고, 그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도 즐거웠다.

술 없이 식사를 마친 직원들은 듬성듬성 집에 돌아갔으나, 2차는 기본이라는 주당 장준혁과 이지운은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한은 그들의 속도에 맞춰 술을 넘겼다.

테이블 위에 초록색 소주병이 두 줄로 줄을 지었다. 지한은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김신우를 쳐다보았다. 그 또한 제법 빠른 속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희고 말간 얼굴은 멀쩡해 보였지만 혹여 취하는 건 아닐까, 신경이 쓰였다.

“저….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레 묻는 말에 김신우가 시선을 들었다. 지한의 살짝 달아오른 뺨과 기다란 눈매를 잠시간 응시하다, 이내 눈을 내리깔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좀 취한 것 같아요.”

눈썹을 치켜뜬 지한이 그가 들고 있는 잔을 쥐어 내려놨다. 내일도 스케줄이 가득한데 혹여 숙취라도 생기면 안 될 일이었다.

“그럼 그만 드세요.”

김신우는 맞은편에 앉은 눈치 없는 새끼들을 힐긋 쳐다보았다. 얼굴이 벌게진 장준혁과 이지운은 마주 본 채 끊임없이 떠들고 있었다.

술 못 처먹고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었나.

대강 맞춰 주다 중간에 지한을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의 모습 탓에 군대니, 축구니 관심 없는 얘기를 꾸역꾸역 참고 있던 차였다.

주량이 센 편인 김신우는 둘을 만취시킬 생각으로 마시는 속도를 높였지만, 그들은 술병을 비우는 족족 앵무새처럼 ‘한 병 더!’만 외칠 뿐 자리를 뜰 생각을 않았다. 가뜩이나 못난 얼굴들만 불그죽죽 못생겨질 뿐이었다.

“집에 갈까요?”

지한이 그를 들여다보며 작게 물었다.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저를 걱정하는 듯한 진심 어린 얼굴을 보니 더 참기가 어려워졌다.

빨리 그와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단둘만의 공간에서 저 도톰한 입술을 빨고, 하얀 살결을 서슴없이 매만지고 싶다. 그리고 침대에 거칠게 눕혀선….

김신우는 자꾸만 꼬리를 무는 생각을 애써 죽였다. 여기서 발기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해도 졌고, 시간도 제법 흘렀다. 이 정도면 실컷 즐기고도 남았겠지. 앞의 오징어 두 놈은 이미 제정신도 아닌 듯했다.

생각을 마친 그가 지한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지한이 멈칫 굳었다. 느리게 시선을 돌리자, 아래로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보인다.

“네. 가요. 나 취했어요….”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리며 눈을 감는다. 별안간 지한의 얼굴에 걱정이 드리웠다. 빨리 마시는 것 같더라니, 아무래도 제대로 취한 듯 보였다.

“어! 우리 배우님 쓰러지셔따!”

손가락으로 김신우를 가리킨 이지운이 샐쭉 웃었다. 술이 좀 됐는지 발음이 줄줄 샜다. 따라 김신우를 바라본 장준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하, 김신우 배우님, 술이…. 영. 생각보다 약하신가 봅니다. 이런 귀여운 모습이 있으셨네요. 하하하!”

“그러게요. 근데 이렇게, 눈 감고 계시니까, 완전…. 와….”

눈을 반짝거린 이지운이 그의 얼굴을 감상하며 감탄했다. 평소 싸한 눈길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해 힐끔거리는 게 다였던 탓이다.

직설적인 눈길에, 김신우의 머리를 어깨에 고정하던 지한이 손바닥으로 살며시 얼굴을 가렸다.

술이 세다고 했던 것 같은데. 혼자 홀짝거리더니 많이 마셨나.

아무래도 집에 가야 할 듯했다. 주변을 훑어보니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 한정원이 보인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테이블이라 그런지, 멀쩡하게 웃으며 여직원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지한은 김신우의 팔 밑으로 손을 끼워 넣고 허리를 감쌌다. 금세 잠이 든 듯한 그를 부축하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가시게요? 형. 아쉽다. 아쉽다.”

“야야, 가셔야지. 배우님 기절하셨잖아. 지한 씨, 다음에 또 한잔해요.”

돌연 윙크를 해 보인 장준혁이 두 손가락으로 잔 넘기는 시늉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한이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네. 저, 혹시. 가실 때 저기….”

말꼬리를 흐리며 한정원의 테이블을 바라본다.

그를 챙기는 건 원래 제 몫이었다. 전이었으면 김신우가 아니라 한정원을 집에 데려다 놨어야 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은 더 신경 써서 돌봐 주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형 좀 부탁드려요. 지금은 괜찮은 것 같은데, 혹시 몰라서.”

장준혁의 시선이 그를 따라 한정원에게 옮겨갔다. 이에 김신우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아아! 걱정하지 마십쇼. 저번에 가 봐서 집도 아니까 끝나면 잘 모셔다드릴게요.”

“네. 고맙습니다.”

“어우, 다정해. 진짜 우리 형 삼고 싶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혀엉!”

이지운이 장난스레 손짓했다. 김신우를 다시 단단히 붙든 지한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김신우 덕에 한층 무거워진 걸음을 옮겼다. 예쁜 얼굴과 달리 커다란 체격을 가진 그가 늘어지게 기대오니 제법 힘이 들었다. 하나 제게 뺨을 기대어오는 그의 예쁜 얼굴에 설핏 웃음을 머금었다. 괜스레 그가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하, 주책맞은 생각을 삼키며 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산속에서의 캠핑을 컨셉으로 한 고깃집이다 보니 평소 차나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다. 인적 없는 길을 따라 걸어 나간 지한이 벤치 위에 조심스레 그를 앉혔다.

“잠시만요.”

듣지도 못할 그에게 양해를 구하며 옆자리에 앉는다. 김신우의 머리를 조심히 제게 기대어 놓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플을 켜 택시를 예약한 후,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그래도 도심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라 그런지, 공기가 더 맑은 듯했다. 긴 숨을 내쉰 그가 고요히 제게 기대어 있는 김신우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올라간 손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불 앞에서 고기를 먹다 왔는데도 코끝에 향긋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경험해본 적 없는 묘한 충족감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한정원을 두고 그를 데리고 나오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언제 이렇게 빠져든 건지….

생각에 잠긴 채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기분 탓인지 눈을 감은 그가 더 품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추운가.

지한은 입고 있던 얇은 후드 집업 지퍼를 내리고 조심조심 벗었다. 그리고 이미 재킷을 걸친 김신우의 어깨 위로 슬며시 덮어 주었다. 살며시 그의 어깨를 감싸 쥔다.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내가…. 왜 좋아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시선을 내리자 잠든 줄 알았던 김신우의 눈꺼풀이 어느새 살짝 뜨여 있었다.

“아. 깨셨어요?”

흠칫 어깨를 굳힌 지한이 저도 모르게 손을 떼어냈다.

“계속 쓰다듬어 줘요.”

나긋한 목소리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느 날의 언젠가, 그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멀거니 눈을 깜빡이던 지한은 그의 말대로 다시 조심조심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요한 사위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내가 불쌍해서 좋은 거예요?”

멈칫.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멎었다.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에 지한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사무실에서 엿들었던 한정원의 말 때문일까. 그는 이따금 이런 물음을 던지곤 했다.

자신 또한 언제부터 그에게 빠져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몸을 웅크린 고양이 같은 모습에 눈길이 간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지금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깨닫지 못한 순간부터 그가 신경 쓰였고, 더 알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는….

옅은 숨을 내쉰 지한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턱을 비스듬히 들고 밤하늘을 바라본다. 새카만 하늘에는 유난히 동그랗고 밝은 달이 떠 있었다.

“당신이 뭐가 불쌍해요.”

그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남들은 꿈도 못 꾸는 수십억짜리 아파트도 있고, 일하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펑펑 쓸 수 있을 만큼 돈도 많잖아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그가, 운동화 끝으로 흙바닥을 툭, 툭 건드렸다. 까마득한 정적 속에서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만 대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한 배우에, 응원하고 좋아해 주는 팬이 10만 명이 넘고…. 해외 팬도 많고.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기고…. 또 부족한 게 뭐가 있으려나.”

“…….”

“당신이 불쌍한 사람이면, 온 세상 사람들 다 불쌍하겠다.”

지한은 여전히 제게 폭 기대어 있는 김신우를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안 그래요?”

말하며 머리칼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담담한 어투 속 느껴지는 다정함에 김신우가 느린 숨을 내쉬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나락까지 떨어진 자존감은 부와 명예 따위에 속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저 텅 빈 껍데기 속에 가득 쏟아져 넘쳐 버릴 만큼의, 진심 어린 애정이 고팠다.

지한은 묵묵히 그를 주시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물어올 때마다 뭉뚱그려 답하곤 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어느 하나 콕 짚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면면이 다 좋다. 낯부끄러움에 잘 답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아서, 그래서…. 혹시 신경 쓰고 있던 건가.

생각에 빠져 있던 지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뻐서 그래요.”

툭, 낯부끄러운 말이 잘도 튀어 나갔다.

“김신우 씨, 예뻐요. 엄청.”

살짝 달아오른 술기운 때문일까. 좋아하는 이유가 확실히 듣고 싶은 거라면 떠오르는 족족 말해 줄 수 있었다. 하나 이 정도면 적당할 듯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김신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무릎 위에 얹힌 지한의 손등 위를 감싸 쥐었다.

***

둘은 곧 도착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내일 새벽부터 재개된 드라마 촬영이 잡혀 있었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각자 사용하는 욕실에서 씻은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한이 머리에 물기를 털며 김신우의 방으로 향했다. 이제 자신의 방은 드레스 룸 용도 외에 잘 쓰질 않았다.

김신우는 지한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함께 잠들 때도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 지한을 찾으며 불안해했다. 그것이 밤의 그 일 때도, 낮의 그 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부모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러나 지한은 그런 것들이 싫지 않았다. 침대는 푹신하고 넓었고, 그를 끌어안고 잘 때마다 전해 오는 따뜻한 체온이 기분 좋았다. 제 품 안에서 잠든 그를 볼 때면, 비로소 그를 완전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만족스러웠다.

먼저 잠이 든 김신우를 바라보던 지한이 뒤늦게 눈을 감았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미동 없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지한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깊은 잠에 빠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형, 형….”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으음….”

“형….”

반쯤 잠든 지한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왜 그래요….”

지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김신우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그가 품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새벽에 깨는 것은 익숙했다. 다짜고짜 형을 불러대는 이라면 밤에 나타나는 그일 터였다.

“형.”

“네….”

“이지운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아요.”

지한이 느리게 눈을 떴다.

“나 말고 누가 형이라고 치대는 거 진짜 싫어요.”

말하며 숨이 막히도록 허리를 꽉 끌어안는다. 얼굴은 지한의 가슴께에 푹 파묻은 채였다.

“…….”

잠결에 상황을 파악하며 눈을 깜빡인 지한이 턱을 숙여 품 안의 김신우를 응시했다. 그의 말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명치께에 뜨거운 숨이 한껏 스며들었다.

“존나, 싫어요…. 씨발.”

“…….”

“진짜 싫어….”

여전히 얼굴을 파묻은 채 그가 낮게 웅얼거렸다. 제 가슴에 입술이 가로막혀 먹먹한 목소리였으나 잘못 들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들려왔다.

“약속해요…. 빨리.”

“…….”

“빨리 약속해요….”

혼란에 빠진 지한은 가만히 옅은 숨을 내쉬었다. 무겁게 전신을 감싼 잠기운을 덜어내고 그의 등줄기를 쓰다듬는다. 곧 부드러운 머리칼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약속할게요.”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밤의 김신우라면 이지운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채근하는 말투나 억양, 행동 등은 분명 그였다. 둘은 목소리 톤도 미세하게 달랐다.

이제 낮의 일을 기억하는 건가.

사이가 안정된 이후로 치료를 받자는 말은 꺼낼 생각도 않았다. 그는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었고, 그가 원치 않는 것을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자신에게 김신우는 그저 김신우일 뿐이었으므로.

“형….”

김신우가 그의 가슴팍에 더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지한은 어느새 선명해진 정신으로 그의 동그란 머리칼을 내려다보았다.

짧은 정적이 지나간 이후, 김신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예뻐요?”

맥락 없는 말에 슬쩍 웃음이 샜다. 물어오는 질문이 퍽 그다워 보인 탓이다.

“…네. 예쁘죠.”

망설임 없이 답을 해 주었다. 아무래도 회식 자리에서의 일을 기억하는 듯했다. 하나 전과 달리 질투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심경의 변화가 있는 듯 보인다. 확실히 무언가 조금 달라졌다. 지한은 그것이 기특하게까지 느껴졌다.

김신우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지한 또한 시선을 내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어디가 제일 예쁜데요?”

다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유치하다 생각할 법도 한 질문이었으나, 지한은 여느 때보다도 진중한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는 어려운 물음이었다.

“음….”

티끌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는 백지처럼 희고 고왔다. 자로 재어 나눠 놓은 듯 균형을 이룬 이목구비는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기도 하다. 깎아 붙인 듯한 날렵한 콧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붓으로 그린 듯 또렷한 쌍꺼풀, 그 아래로 촘촘히 뻗은 속눈썹과 살짝 붉은 기마저 도는 도톰한 입술. 딱 어디라고 짚어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제법 깊은 생각에 잠긴 지한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끝내 고르고 고른 말을 달싹였다.

“눈, 코….”

“…….”

“입?”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제가 말하고도 어처구니없어 웃음을 터뜨린다.

“…어려워요.”

지한은 눈을 감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냉랭했던 눈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옅게 휘어졌다. 시원스러운 입술 끝도 호를 그린다.

답이 만족스러웠던 듯 김신우 또한 따라 웃었다. 이내 지한의 가슴팍에 파고들며 제 이마를 문질렀다.

“네. 더 예뻐해 줘요. 더….”

말하며 지한의 얇은 티셔츠 위로 쪽, 쪽. 입을 맞춘다. 묘한 느낌에 지한이 흠칫 굳었다. 입술로 면 티셔츠 위를 빈틈없이 누르던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팔등으로 지한의 머리 옆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형은. 얼굴도 몸도, 좋은데….”

자연스레 위로 올라탄 김신우가 시선을 내렸다. 입매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여기가…. 진짜 예뻐.”

속삭이며 검지로 유두를 꾸욱 누른다. 티셔츠 위임에도 정확하게 짚었다. 찌릿한 느낌에 지한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빨아 먹고 싶게 생겼어요.”

음탕한 말에 헛숨을 삼킨다. 눈가를 찡그린 지한의 위로 짙은 시선이 쏟아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벌건 정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 배고픈데.”

장난기라곤 없던 낯빛에 느슨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먹어도 돼요, 형?”

그는 지한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달고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응?”

그리고 또 예쁘게 웃는다. 어떤 이라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해사한 미소였다.

***

잠에서 깬 김신우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깜박, 깜박.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지한의 감은 눈이 보였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형, 허리 더 들어 봐요.’

흩어지는 신음과 거친 숨소리가 섞였다.

‘아…. 좋아요.’

‘읏. 좋아. 존나, 좋아요….’

뱉어낸 적 없는 숨이 생생하게 터지고, 찌릿한 쾌감이 차올랐다. 기억을 상기시키는 행위만으로도 아래가 아프도록 뜨거워졌다.

하아…. 김신우는 긴 숨을 내쉬었다. 내리깐 눈을 찬찬히 들자, 희멀건 목선과 단단한 어깨가 오르락내리락 미세한 숨을 쉬고 있었다. 살결 위 울긋불긋 피어난 흔적을 응시하던 그가 홀린 듯 손을 뻗었다.

그는 곤히 잠든 지한의 머리칼을 간절하게 끌어안고, 품 안에 가두었다. 양팔에 따스한 체온이 가득 담기자 안정이 찾아왔다. 다시 눈을 감는다. 고요히 스미는 숨결 끝에 불안이 잦아들었다.

차라리 이대로 순간이 멈췄으면. 이대로 함께 영원히 잠들었으면. 네가 온전한 내 것이었으면.

갖고 있음에도 모자랐다. 양껏 들이키면서도 갈증이 났다. 어젯밤 그를 짐승처럼 취하고, 쾌락에 허덕이다 종내에 눈물까지 보인 그와 함께 울며 갈망했다.

차라리 이대로 하나가 되었으면, 어둠이 잠식한 세상에 단둘이 떨어졌으면, 팔다리를 묶어 오롯이 혼자만 소유할 수 있었으면.

공지한. 형. 형… 형.

지독한 집착과 욕망이 그를 벌겋게 물들였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깊게 바라게 되었다.

끝내 기절하듯 잠든 그를 꽉 끌어안고 홀로 짐승처럼 발정했다. 마치 영역 표시라도 하듯, 그의 안에 수차례 사출의 흔적으로 더럽혀 놓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온전한 제 것이어야 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좆같은 것들의 한 줌 시선에도 벅차오르는 질투를 억누를 수 없었다.

행복할수록 초조해진다. 눈빛이 따스할수록 두려워졌다.

더는 웃어 주지 않으면 어쩌지, 더는 예뻐해 주지 않으면 어쩌지, 더는 불쌍해 보이지 않으면. 더는 보호해 주고 싶지 않아지면….

씨발, 씨발. 씨발….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칼을 꽉 끌어안는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욕을 짓씹는 그의 눈가가 벌겋게 물들어갔다.

***

지한은 뻐근하게 굳은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지난 새벽 갑작스레 시작된 섹스는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언제 잠이 든 지도 모른 채 잠들어 버리고, 잠결에 눈을 뜨니 김신우의 품 안이었다.

씻고 나온 그의 안색이 유난히 파리했다. 마치 툭 치면 쓰러져 버릴 듯 위태롭기도 하다. 정작 피로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으나, 어쩐지 그늘진 낯빛에 덜컥 걱정이 밀려왔다.

그제야 지난 새벽 격정적이었던 움직임이 떠올렸다. 엎드려서, 앉아서, 서서, 마지막엔 그의 팔에 들려 공중에 붕 뜬 채로 섹스했다. 몇 번의 사정을 했던지 셀 수도 없었다. 종내엔 아무것도 싸지 않고도 절정에 다다랐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나누던 체온과 끈적하게 맞붙던 둔부가 따가웠다. 확실히 무리였을 만도 했다.

오늘은 하필이면 박준구의 살해 협박으로 중단되었던 바닷가 촬영이 다시 시작되는 날이었다. 미리 훑어본 대본 속에는 주인공이 밤바다의 물살을 헤치며 울고 있었다.

날이 그리 춥지는 않았으나 바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니 걱정이 되었다. 그러잖아도 지친 몸에 더욱 고된 일이 될 테니, 촬영을 마친 후 기력 보충을 위한 몸보신이라도 해 줘야 할듯했다.

그런데 뭘 먹여야 하지? 장어, 소고기…?

밴의 맨 뒷자리, 제 옆에 다소곳이 등을 기대고 앉은 김신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정말 지치기라도 한 건지 유난히 말수가 적었다. 기운 없는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를 제 어깨에 기대어 놓고, 편히 쉬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아픈 곳이 있냐고 다정하게 물으며 입을 맞추고도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앞에서 한정원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든 지한이 룸미러를 힐긋 응시했다. 거울 속 한정원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열심히 운전에 임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김신우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그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순 없었다.

“어디 봐요.”

불현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지한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지그시 지한의 손등 위를 감싸왔다. 지한의 시선이 맞잡은 손 위로 닿았다. 다시 눈을 들자, 어딘가 심기 불편해 보이는 듯한 눈동자가 지한을 주시했다.

“쓸데없는 거 보지 마.”

잠시 입술을 다물고 있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만 봐요.”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지한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다물린 입술과, 손등을 감싼 커다란 손을 말없이 응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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