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다음 소식입니다. 요즘 연예계가 불안에 떨고 있다죠. 스토킹에 시달리던 배우 김신우 씨의 사고 소식 때문인데요. 지난 6일 드라마 촬영차 떠난 현장에서….’
띡. 김신우가 티브이 전원을 껐다. 침대 위에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지한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그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동시에 자괴가 몰려들었다. 고작 몇 달 새, 벌써 몇 번째였다.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
똑, 똑. 링거액 떨어지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수술은 잘 끝났다. 그는 찢어진 머리를 꿰맸으며 팔등 뼈에 금이 가 또다시 깁스를 했다. 뇌진탕 증세가 있으나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벌써 이틀째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왜 눈을 뜨지 않을까.
의사는 기력이 쇠하면 며칠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없으니 차분히 기다려보란 말만 한다.
차분히… 씨발, 차분히. 어떻게 차분할 수가 있지.
김신우는 한시도 지한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그의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볼 뿐이었다. 낯선 고통이 그의 안에 자리 잡고 뿌리를 내렸다. 그 뿌리는 끝을 모르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 똬리를 틀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에 이렇게 잘 살아 있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죽어 버리는 건 아닌지,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벌컥벌컥 스며드는 초조함에 바짝 말라 비틀어지는 것만 같았다.
“배우님, 집에 가서 좀 쉬세요…. 제가 있을게요.”
어느새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정원이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나 죽 그랬듯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배우님도 쓰러질 것 같아요. 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았다. 김신우는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잠도 자지 않았다. 모든 것을 병실 안에서 해결하고 자리를 비우는 일도 없었다. 회진을 온 의사에게 왜 눈을 뜨지 않냐며 별안간 고함을 치고 화를 낼 땐 말릴 생각조차 못 했다.
죄책감 때문일까. 날이 갈수록 안색이 나빠지는 그를 보니 한정원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어….”
말을 꺼내려는 순간, 김신우의 등이 티 나게 움칠했다. 돌연 그의 상체가 조급하게 침대 쪽으로 기울어졌다. 따라 지한의 다리가 살짝 움직이는 듯했다. 한정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한아!”
뒤에 서 있던 그가 달려가 지한을 살폈다. 가지런히 덮여 있던 이불 위에 손을 얹자, 기다랗게 감겨 있던 지한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깨어나자마자 찾아온 뻐근한 두통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정원의 눈가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한아. 한아, 괜찮아? 어디 불편한 곳 없어?”
소란스레 묻는 말에 새카만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갔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정원의 뒤에 앉아 있는 김신우였다.
굳은 시선과 마주친 순간 지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 으십니까?”
꽉 잠긴 목이 칼칼했다. 음, 찡그린 채 목을 울리며 그는 다시 김신우의 낯을 살폈다. 그의 안색이 무척 좋아 보이지 않았다.
“…….”
김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는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을 억지로 삼켜내고 있었다.
“저, 저는 의사 선생님 모셔 올게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핀 한정원이 눈치껏 병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묵묵히 김신우를 응시하던 지한이 상체를 일으키려 침대를 짚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쑤셔 왔다.
“더 누워있어요.”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지한이 동작을 멈췄다. 일순 눈을 내리깐 김신우가 긴 숨을 내쉬었다. 한숨은 아니었다. 막 숨을 참다가 겨우 내쉬는 숨처럼 느리고, 길고, 깊은 숨이었다.
적막 속에서 김신우는 그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적막한 분위기에 지한 또한 입을 다물었다. 한참 지한을 주시하던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끝내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김신우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드르륵,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쉬어요.”
지한은 당황한 듯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천천히 돌아서는 넓은 등이 홀연히 병실 문을 나설 때까지, 그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낮게 침음했다.
“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그는 평소의 김신우였다. 그러나 섬세하게 내리깔린 속눈썹 아래 투명하게 차오른 건 분명, 눈물이었다. 그걸 본 순간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잡았어야 했는데. 괜찮냐고 더 물었어야 했는데, 당황하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짙은 숨을 내쉬며 눈가 위에 팔을 툭 얹었다. 뇌리에 또렷하게 박힌 괴로운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아, 의사 선생님 불렀어. 몸은 어때, 안 좋은 곳 있어? 쑤시거나 결리거나, 아픈 곳은 없구? 팔, 다리 움직여 봐. 이따 오시면 다 말씀드려. 혹시 모르니까…. 후유증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헐레벌떡 들어온 한정원이 지한을 샅샅이 살폈다. 붉어진 뺨과 눈가는 벌겋게 물든 채였다.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킨 지한이 스트레칭 하듯 몸을 슬슬 움직였다. 깁스한 팔과 따끔거리는 뒤통수, 뻐근한 근육통 외에 딱히 이상은 없는 듯했다.
“응. 괜찮아.”
팔짱을 낀 채 손톱을 잘근 깨물던 한정원이 의자에 털썩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놀랐어. 엄청 걱정했어. 너 그러고 나가고 나서 아침까지 들어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되고…. 나 진짜 경찰서까지 갔었어. 네가 그럴 애가 아닌데.”
“미안.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
지한이 눈가를 간질이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당시 걸려 온 전화 너머로 들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김신우를 죽여 버릴 거란 말에 앞뒤 재지 않고 바로 달려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건 사고가 터지는 흉흉한 세상이었다. 우습게 넘길 수 있을 만큼 더듬거리던 그의 말이 조금도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으며 느꼈던 불안과 초조가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아냐. 그런 상황이면 나였어도 경황없었을 거야. 괜찮은 거 맞지? 수술은 잘됐다고 했어. 잘 아물기만 하면 된다고 그랬거든. 그리고 현장에서 바로 범인도 잡혔어.”
“잡혔어?”
“응. 그 사람도 많이 다친 것 같던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대표님이 전부 일 봐 주시고 계셔. 너 누워 있는 동안 김신우 씨도 여기서 꼼짝 않으셔서…. 안 그래도 나도 오늘 사무실 가 봐야 해.”
“그래. 다행이다.”
지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무슨 원한이기에 죽이려고까지 들었을까. 다소 허술한 납치극이었으나 자칫 잘못했으면 충분히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난번 대교 위 교통사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 근데 배우님 가셨어?”
돌연 한정원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짐짓 심각한 얼굴의 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다시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응?”
“왜 가셨어?”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그 말에 지한도 눈썹을 치켜떴다. 뜻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왜…. 갔냐니.”
“아니, 너 수술 끝난 이후로 밥도 안 드시고, 잠도 안 주무시고 여기 계속 앉아 계셨거든. 엄청나게 걱정하는 것 같았는데….”
팔짱을 낀 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근데 왜…. 눈 뜨자마자 가셨지?”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며칠 내내 그토록 간절하게 눈 뜨길 기다리더니, 10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계속 있었다고? 얼마나?”
의외의 답에 지한이 눈이 벌어졌다. 한정원은 손바닥을 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보더니 다시 지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수술하고 지금까지니까. 3일? 4일?”
“…….”
“장난 아니었어. 나 일 보다가 새벽에 잠깐 들렀는데, 잠도 안 주무시고 앉아서 너 쳐다보고 계신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아무래도 미안하긴 엄청 미안하신가 봐.”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하던 한정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배우님 때문에 너 그렇게 된 것 같아서 나도 좀 미웠거든. 근데 며칠 내내 계속 그러고 계신 거 보니까 안쓰럽기도 하고…. 또 평소에 그럴 분이 아니라서 더 마음이 쓰이더라….”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화들짝 일어난 한정원이 의사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살짝 눈인사를 해 보인 지한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물끄러미 김신우가 앉아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
집으로 돌아온 김신우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었다. 식사고 잠이고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것이 없어 눈앞이 흐렸다. 누구도 찾지 않은 적막한 거실은 싸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느릿느릿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서 낮은 숨을 터뜨렸다. 한숨과 괴로움이 섞인 숨이었다. 천천히 발을 내디딘 그는 한동안 건들지 않았던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안에는 여전히 그가 쓰던 두꺼운 공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김신우는 그것을 느리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탁상 위에 툭 떨어뜨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건조하게 책장을 넘기자, 사그락, 사그락.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밤색 눈동자가 종이 위를 느리게 훑었다.
빼곡하게 적힌 글씨는 장을 더할수록 점점 분노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과정을 바라보는 김신우의 얼굴도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 갔다. 모르긴 몰라도 제가 잠든 사이 그가 수작질한 것은 분명해졌다.
애당초 첫 단추부터가 잘못 끼워진 일이었다. 모든 일의 원흉은 그놈이었다. 그가 공지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공지한을 집에 들이지 않았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공지한에게 좆같이 굴지 말고 친절하게 대했더라면. 그러면, 이 모든 불쾌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어도 됐을까.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생각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어폰 안에서 흘러나오던, 그들의 낮은 웃음과 생생한 말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형은 제가 왜 좋은데요? 제가 왜 좋으냐니까요. 귀여워서? 어디가, 어떻게, 왜요? 안아 줄 테니까, 이리 와요.
환청 같은 대화가 귓가를 메웠다. 이를 꽉 문 김신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급격하게 치미는 분노에 서서히 목구멍이 조여 왔다. 그 순간이었다.
‘그런 벌은 없어요.’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관통했다. 돌연 날카로운 통증이 관자놀이를 스친다. 갑자기 들이닥친 통증에 김신우가 눈가를 찌푸렸다. 두 손바닥으로 탁상 위를 짚고는 고개를 툭 숙였다. 헉, 잇새로 작은 숨이 터졌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형. 좋아요. 좋아해요.’
‘귀여워요.’
‘대답해 줘요. 나 무섭게 하지 말아요.’
‘형. 형….’
환각 같은 음성과 흐릿한 영상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뇌를 쥐어짜는 듯한 날카로운 통각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벌겋게 핏발 선 눈에 힘을 주자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거졌다. 주먹을 아프도록 꽉 말아 쥐었다. 어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공지한의 눈가가 아래로 기울었다. 따라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간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터지는 웃음과 부드러운 손길, 말랑한 입술의 촉감이 생생했다. 경험한 적 있으나 겪어 본 적 없는 오감이 생경하게 피부 위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바스러지듯 탁상 위로 몸을 기울인 김신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 차리려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뻐근하게 조여 오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꽉 막힌 목구멍 탓에 호흡마저 가빠졌다.
그는 그대로 휘청거리며 침대 옆 협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서랍을 뜯어내듯 거칠게 열고 안에 든 잡다한 것들을 마구 꺼내 집어 던졌다. 한동안 찾지 않았던 약통을 조급하게 꺼내 손바닥 위로 탁탁 흔들었다. 입 안에 털어 넣고는 물도 없이 삼켰다. 구역질이 났다.
“…씹.”
눈을 꽉 감고 침대에 걸터앉은 김신우가 욕을 짓씹었다.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과 함께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그대로 털썩 드러누워 손바닥으로 눈가를 꾸욱 짓눌렀다.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자 지독한 두통이 더 강렬해졌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힘 풀어요.’
나직한 목소리와 세차게 철썩이던 강물 소리가 들려온다. 전신을 감싸는 한기와 함께 코끝으로 매캐한 연기가 흘러들었다. 김신우는 턱을 꽉 물었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든다. 하릴없이 잦아드는 음성에 괴로운 듯 몸을 웅크리고 이불에 뺨을 묻었다.
‘먼저 나가요! 빨리!’
‘김신우 씨!’
소란스러운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파고들었다. 한껏 일그러진 그는 손바닥으로 제 귀를 꽉 감쌌다.
아니야. 아니라고. 희게 질린 얼굴이 고통스럽게 구겨졌다. 방은 여전히 새카만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 또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건져 줄 사람을 찾지도 못한 채로.
***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던 지한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병실에서 눈을 뜬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김신우는 그날 이후 얼굴을 비추지도, 연락 한 통조차 보내지도 않았다. 늘 붙어 있었기에 따로 전화나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은 없었으나 전화나 메시지조차 없다는 사실에 이상하게도 휑한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지한이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를 켰다. 마침 연예계 뉴스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화면이 넘어가며 리포터가 나타났다. 화면 가운데로 떠오른 것은 김신우의 사진이었다. 자막과 함께 그녀는 곧 김신우에 관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양반은 못 되나 보네. 그를 생각하고 있던 지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에 많이 휩쓸려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요, 현재 진행 중인 드라마 파고의 결방이 불가피하다는….’
화면 한가운데에 뜬 그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얼굴에선 더없이 먼 거리감이 느껴진다. 작게 숨을 내쉰 지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눈가는 살짝 찡그린 채였다.
띠딕. 끝내 전원 버튼을 누르고 티브이를 껐다. 보고 있으니 더 싱숭생숭한 마음이 몰려들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고요한 창밖을 향했다.
김신우는 아무 이상이 없었고, 스케줄을 전부 보류한 채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한정원이 해 준 그의 소식이었다.
깨어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옆을 지켰다기에 곧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혹여라도 미안해하거나, 자책이라도 하고 있다면 제가 먼저 연락했을 때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병문안을 오지도,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범인이 잡혔다지만, 제법 충격을 받았을 테고, 또 혼자 밖을 나다니기도 무서울지도 모른다.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게 남았을 수도 있고…. 그러면, 그냥 집에 있고 싶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찾아오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전화 한 통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중얼거린 지한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까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그가 당연히 다시 나타날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일까. 정말로 미안해서 그런 걸까. 되짚어 봐야 자신은 알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결같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게는 너무 어려운 존재였다.
지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마지막 보았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물기 어린 눈동자와 괴로운 표정. 그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 가슴을 뭉근하게 짓눌렀다.
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섭섭함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금이 간 액정을 만지작거리던 지한이 대화방을 켰다. 잃어버린 그의 핸드폰은 한정원이 다음 날 바로 개통해 전해 주었다고 했다. 사진 하나 없이 떠 있는 그의 이름을 눌러 보았다. 그리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전화를 해 볼까. 아니면 메시지를 보내 볼까.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일은 잘 해결되었는지,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 정도 안부 인사라면 오버스러워 보이지 않을 듯했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움찔 놀란 지한이 고개를 돌렸다.
“어.”
문가엔 김신우가 서 있었다. 마치 소원을 빌면 나타나는 지니처럼 갑작스럽게.
내심 당황한 지한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등 뒤로 문을 닫은 그가 천천히 걸어왔다. 회갈색 코트를 걸친 채 시선을 내리깐 하얀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듯했다.
“오셨… 어요.”
생각지 못한 방문에 지한의 말문이 막혔다.
“몸은 좀 어때요?”
그대로 다가온 김신우가 침대 옆 협탁에 작은 화분을 내려놓았다. 지한의 시선이 그가 가져온 초록색 식물 위에 닿았다. 손바닥만 한 화분에 조그마한 리본이 달린 걸 보아하니 선물용으로 가져온 듯했다.
“아. 괜찮습니다. 거의 다 나았어요.”
혹여 그가 미안해할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도 정말 괜찮아지고 있었다.
“팔등 뼈 부러지고, 머리까지 꿰맸는데 일주일 만에 다 나았어요?”
“…….”
“당신이 무슨 슈퍼맨이라도 돼?”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살짝 웃었다.
“…이제, 아프진 않아서.”
시선을 내리깐 지한이 겸연쩍게 중얼거렸다. 가만히 서서 화분을 만지작거리던 김신우가 눈길을 돌렸다. 침대 위에 앉아 저를 보는 지한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온 불그스름한 노을이 그의 얼굴 위로 물들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그 말에 지한이 눈을 들었다. 해가 지는 노을 속에서 둘은 묵묵히 시선을 마주했다. 시간은 무척 짧게도, 또는 길게도 이어졌다.
마른침을 삼킨 지한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가슴 속이 간지러웠다. 뭐라도 뱉어내지 않으면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저…. 서 있지 마시고, 앉으세요.”
고르고 고른 말은 겨우 앉으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공지한 씨.”
“예?”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뜸을 들이듯 침묵을 지키던 그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병실은 쓰고 싶은 대로 써요. 나을 때까지 언제고 계속 입원해 있어도 됩니다. 수납은 회사에서 처리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뇨, 전 이제 괜찮은데….”
어쩐지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와 의미심장한 말에 지한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한정원의 말마따나 마지막 검사가 끝날 때까지 억지로 입원해 있던 차였다. 하룻밤 입원비에 입이 떡 벌어지는 1인실에 더 눌러앉아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계약 기간이 3년이었죠.”
김신우가 시선을 들었다. 느닷없는 말에 지한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금 조건 그대로 3년 치 연봉, 기타 각종 상여금 전부 오늘 기점으로 정산되어서 조만간 계좌에 들어갈 겁니다. 우리 쪽에서 먼저 해지 요청하는 거니까, 계약서에 제시했던 대로 위약금도 배로 더 넣어 줄 거예요. 그 돈이면 몇 년 일 안 해도 지내기 충분할 테고.”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온 말은 한없이 나긋했다. 무 자르듯 단호한 내용과는 달리 그의 얼굴과 음색이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지한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굳이 일하고 싶다면, 어느 방면으로든 다른 이직 자리를 찾아 줄게요. 꼭 경호 직 아니어도 되고, 그 외에 원하는 부분이 있으면 한정원 씨 통해서 요청하세요.”
“…….”
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나 저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을 잇는 낯빛이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지한이 멀거니 그를 보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신우가 시선을 들었다.
“그 말 하려고 왔어요.”
어두웠던 낯빛은 어느새 말끔히 걷혔다. 그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생각해 보고, 더 원하는 게 있으면 한정원 씨한테 전해요.”
“아….”
“몸 관리 잘하고.”
말을 마친 그가 등을 돌렸다. 굳은 듯 그를 응시하고 있던 지한이 그제야 입술을 달싹였다.
“김신우 씨!”
그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옅은 밤색 동공과 눈이 마주치자, 지한은 당황했다. 혼란스러움에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어째서, 갑자기 왜.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마지막 그 현장에서 김신우는 제게 오지 말라고 소리쳤었다. 그런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제가, 오지 말라는 거, 말 안 들은 건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지한은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불을 꽉 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숨을 내쉰 지한이 김신우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그래도, 결론적으로 김신우 씨가 무사하시니까, 범인이 잡혔지만, 앞으로도 위험한 일들이 많을지도 모르고….”
두서없는 말들이 툭툭 튀어 나갔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이렇게 갑자기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정확히는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니까….”
지한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명치께서부터 흘러나온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목구멍까지 울컥하고 솟구쳐 올랐다. 누군가 입을 콱 틀어막은 것 같았다.
적막 속에서 김신우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나도 좀 쉴 거고.”
“…….”
“이렇게 하는 편이, 당신한테도 좋아.”
고요한 사위로 중저음의 음색이 나직하게 스며들었다. 잠긴 듯,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를 지켜야 하는 제 임무는 분명 훌륭하게 해냈다. 그가 왜 이러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구는 건…. 싫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심, 하겠습니다.”
지한은 왈칵 치미는 감정을 삼켰다. 목구멍이 턱턱 막혀 왔다.
“더 잘할 자신, 있습니다. 그러니까.”
“…….”
“계속 일하게 해 주세요.”
지한이 흔들리는 시선을 들었다. 마주친 김신우는 찌푸린 얼굴이었다. 입술을 다문 지한도 이를 꽉 물었다.
칠흑 같은 정적이 이어졌다. 굳은 듯 멈춰서 있던 김신우는 어떠한 답도 주지 않았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으나 수없이 많은 감정이 뒤엉키고 흩어졌다.
“쉬어요.”
그는 원하는 답을 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 곧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지한의 시선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는 이불 위에 얹은 주먹을 말아 쥐며, 다시금 턱을 꽉 물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끝내 버린다고.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지한은 그대로 이불을 홱 걷고는 성큼성큼 뛰어나갔다. 막 문을 나서던 김신우의 손목을 낚아챘다. 꽉 붙든 팔목을 안으로 홱 끌어당기곤, 깁스한 팔등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드르륵, 쾅! 졸지에 문과 지한의 사이에 갇힌 김신우가 느리게 시선을 내렸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치켜뜨고 있었다.
찌푸린 지한은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제멋대로예요.”
노려보는 눈빛에 김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아. 인상을 찌푸린 지한이 감정을 삭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머리를 쓸어 올린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가 똑바로 김신우의 얼굴을 마주했다.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자르는 거, 부당 해고 아닙니까?”
의도치 않게 문에 딱 들러붙어 버린 둘의 거리가 가까웠다. 곱게 내리깔린 속눈썹은 지한의 시야보다 조금 더 위에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은 붉은빛을 띠었으나 왜인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제가 구해 드렸잖아요.”
귓가로 김신우의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남에서, 한강 대교에서, 그리고…. 그 망할, 산에서까지 구해 드렸잖아요.”
그는 또렷하게 한 글자씩 억누르듯 뱉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의 생각을 돌릴만한 어떤 것이든 좋았다. 치졸하고 옹색해 보일 수 있으나 생색이라도 내어야 했다. 돌연 솟구치는 감정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뚜렷한 불쾌라는 건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없었으면, 그쪽 다칠 수도 있었어요.”
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내리깔고 그의 어깨쯤을 바라보던 김신우가 서서히 시선을 맞춰왔다.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보석 같은 동공이 흔들렸다.
밀도 높은 눈길이 얽힌다. 말끄러미 지한을 내려다보던 김신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지한의 턱선을 따라 스치듯, 느리게 쓸어내렸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그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는 여전히 지한과 시선을 맞춘 채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문제야.”
나직한 목소리에 지한이 설핏 눈썹을 치켜떴다.
“그게, 문제라고요. 씨발…. 그게.”
점점 거세어지려던 억양이 끊겼다. 문득 말을 멈춘 김신우는 숨을 들이켰다.
“문제라고.”
그리고 작게 내뱉었다. 따라 턱에 닿아 있던 손끝도 떨어졌다.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잠시간 그를 응시하던 김신우가 고요히 시선을 돌렸다.
“비켜요. 환자랑 입씨름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그가 지한의 가슴께를 살짝 밀어냈으나, 지한은 힘을 주고 버텼다.
“전 할 말 다 안 끝났습니다.”
또렷한 눈빛은 그를 쉬이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김신우 씨, 저는.”
“키스할래요?”
맥락 없는 말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공지한.”
그의 손끝이 지한의 턱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지그시 힘을 주자 턱이 비스듬히 들렸다. 마치 곧 입을 맞추기라도 할 듯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지한이 입매를 굳혔다.
뺨에 옅은 숨결이 닿아왔다. 하나 그대로 스쳐 간 입술은 귓가에 머물렀다.
“내 집에 얌전히 처박혀서….”
“…….”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누구도 만나지 말고, 개처럼 종일 나만 기다리면서. 내가 먹이고, 입히고, 주는 거, 나만 보고. 나랑만 섹스하고.”
중저음의 음색이 천천히, 짓씹듯 읊조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렇게 살래요?”
더없이 짙은 어조에 지한의 눈가가 구겨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한을 보던 김신우의 입술 끝에 미지근한 웃음이 샜다.
“못 하잖아.”
그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불꽃같이 일렁이는 열기가 밤색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다.
턱을 쥔 손에 강한 힘이 들어왔다가 다시 스르륵 빠져나갔다. 어느새 그는 담담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지한의 양어깨를 살짝 쥐고는 떼어냈다.
“공지한 씨가 제 팔자 꼬는 타입인 건 아는데, 이쯤 해요.”
무심해진 시선이 얼굴 위를 스친다.
“좋을 거 없으니까.”
그는 멀거니 굳어 있는 지한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단호하게 등을 돌리곤, 그대로 문을 열었다.
드르륵, 쿵.
병실 문이 닫혔다. 멀거니 선 지한의 머릿속은 그가 뱉고 간 말로 가득 차 넘실거렸다.
***
이상하리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식사를 마친 뒤 산책을 했다. 병원 재활실에서 가벼운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일이 끝난 후에 찾아오는 한정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지겨우리만큼 반복되는 생활은 유난히 빨리도 지나갔다.
좀 더 머물러도 된다는 한정원의 말에도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의사가 말한 최소한의 기간만 채우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퇴원 날이었다.
“한아…. 입금됐대. 확인해 봐.”
한정원이 우물쭈물 들고 온 지급 명세서를 보며 지한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 말라니까.”
핸드폰 앱으로 통장 잔액의 알림을 확인한 지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한정원이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관리하는 게 아닌데 어떡해. 대표님이 직접 보내신 것 같은데.”
곤란한 얼굴로 이마를 만지작거린 지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그마치 수억이었다. 아무리 소속사 주가 1위를 달리는 김신우의 목숨을 살렸다지만 제게는 과한 처사였다.
“잘된 거야. 응? 범인 잡혔다지만 앞으로 어떤 위험한 일 생길지도 모르고 너도 너무 많이 다쳐서 나도 마음 불편했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챙겨 주셨잖아…. 한아. 네가 하고 싶은 게 있었으면 뭐든 해도 되고. 아니면 쉬어도 되고. 다른 일자리도 알아봐 주신다니까, 얼마나 좋아. 응?”
한정원이 묵묵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지한의 어깨를 토닥였다.
얼마 전 김신우는 한정원에게 사람을 부려 지한의 짐을 전부 옮기라고 전달했다. 놀란 그가 지한에게 물었으나 합의된 내용은 아니었던 듯했다.
애초에 여행용 가방 하나만 가지고 들어갔었기에 굳이 사람을 쓸 필요도 없었다. 한정원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막상 지한의 집에 짐을 옮겨 놓고 나니 무언가 이상했다.
느닷없는 해고였다. 퇴원도 하기 전 무자비하게 쫓아내는 걸 보면 싫어서 그러는 게 분명하건만, 이상할 정도로 퇴직과 관련하여 처우가 후했다. 겨우 1년 일한 수당치고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물론 김신우의 벌이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으나….
“하아.”
지한의 반응 또한 이상했다. 수억의 액수를 보고도 좋아하지 않았고, 외려 불편해하는 기색을 비쳤다. 하나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지한이 정말 화라도 날까 봐 무서워서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둘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것이 분명했다.
“가자.”
침묵을 지키던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로즈메리 화분 또한 잊지 않고 챙겨 들었다. 김신우가 찾아온 날 주고 간 것이었다.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던 한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지한을 따라 쫄래쫄래 걸음을 옮겼다.
***
한동안 비어 있던 집은 당연하게도 인기척이 보이질 않았다. 창가 옆에 화분을 내려놓은 지한이 적막한 집 안을 죽 훑었다. 몇 년을 산 집이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공허하고 낯설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은 애써 잡념을 치웠다.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퇴원 소식을 들은 동기 이현우와 오래간만에 저녁 약속이 있던 참이었다. 근 반년 만에 혼자 하는 외출이 이토록 어색할 줄은 몰랐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느새 봄기운이 성큼 다가온 밤공기는 전처럼 춥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근처 고깃집에 다다르니, 문 앞에서 담배를 쥔 손을 휘적거리는 이현우가 보였다.
“오랜만이다.”
“예에. 얼굴 한번 뵙기 존나게 힘든 공지한 행님. 오셨습니까.”
조폭처럼 어깨를 굽히는 인사에 지한이 낮게 웃었다. 어깨를 툭툭치고는 고깃집 안으로 들어섰다. 시끌벅적한 실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삼겹살을 주문하며 소주도 한 병 시켰다. 친구와 보내는 술자리가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진짜 너 뭐 조상신이 뒷배 봐주고 있는 거 아니냐? 인마. 생각만 해도 무섭다 무서워. 나 진짜 뉴스 속보 다 챙겨 봤잖아. 너 죽는 줄 알고.”
“잘 해결됐으니까 됐지, 뭐.”
지한은 덤덤한 얼굴로 소주잔을 채웠다. 익어가는 고기를 뒤집던 이현우가 들뜬 얼굴을 했다.
“그래서, 얘기 좀 해봐. 연예인 썰 좀 들어 보자. 김신우는 어땠는데? 존나 잘생겼어?”
벼르고 있던 듯 쏟아내는 질문에 지한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응. 보면 모르냐.”
“아. 하긴. 괜한 걸 물었다. 그럼 그, 그 김은별이랑 스캔들 진짜래? 사귀는 사람 있어?”
“…모르지.”
“맨날 붙어 다녔으면서 그것도 몰라? 성격은 어떤데. 네가 그렇게 죽자 살자 지켜 준 걸 보면 어지간히 잘해 줬나 봐? 친해졌어?”
입술에 소주잔을 지그시 댄 채 멈춰 있던 지한이 느리게 술을 넘겼다. 씁쓰레한 맛에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돌이켜보니 그에 관해선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뭐. 그래.”
“아, 새끼. 진짜 재미없기는.”
“네 얘기나 해. 쓸데없이 남 얘기하지 말고.”
집게를 뺏어 든 지한이 살짝 웃었다. 두어 번 구시렁대던 이현우는 그간 벌어진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신나게 풀어대기 시작했다.
“그 미친 사수 때문에 일 때려치우고 싶다니까. 아. 근데 돈 벌려면 이 짓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하잖아. 그 사실이 존나 날 괴롭게 해…. 진짜 로또라도 사야 하나.”
머리를 쥐어 잡으며 쉼 없이 종알대는 그를 두고, 그제야 종전의 물음들이 지한의 머릿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김신우. 잘생긴 건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다. 허구한 날 그렇게 스캔들도 터지고, 따르는 여자들도 많았다. 촬영장마다 그에게 쏟아지는 여자들의 눈길을 지한 또한 모를 리 없었다.
하나 따로 누굴 만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 딱 한 번을 빼고는 늘 저와 함께 다녔고, 누군가와 연락을 하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었다. 주변이 지저분하더라도 관계에 있어 큰 의미를 두고 살지는 않는 사람 같았다.
잘해 준 건…. 잘해 줬었나.
첫 만남은 엉망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아니었다. 게다가 마지막 수억의 보상으로 유종의 미까지 거두었으니 따지고 보면 잘해 준 편이었다. 물적으로는 당연했고, 초반의 그와 비교해 달라진 태도 또한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변해 있었다.
“야야, 딴생각 좀 그만해라. 여자 생겼냐?”
“어…. 아니.”
“듣는 척이라도 하던가. 시발, 너무해. 너 정희한테 다 이를 거야.”
핸드폰을 꺼낸 이현우가 여자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지한을 등진 채 손을 쭉 뻗자 금세 화면을 여자의 모습이 가득 채웠다.
“정희-.”
-어!!!!
화면 속의 그녀는 지한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인 그가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서운하다며 그녀를 나무라는 이현우를 두고 고개를 숙인 지한은 다시 묵묵히 술잔을 채웠다.
고깃집을 나와 2차로 호프집에서 맥주까지 마신 뒤, 헤롱거리는 이현우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지한 또한 오래간만의 음주라 그런지 얼큰하게 술기운이 올랐다.
그는 정류장 근처 마련된 흡연 부스에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곤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니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후우. 흰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리자, 문득 조금 떨어진 정류장 광고판에 붙은 김신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촬영할 때 지한도 지켜보았었던 남성 향수 ‘블루 드 아르스’의 광고였다.
그는 설핏 눈을 찡그렸다. 묵묵히 연기를 들이쉬고 뱉으며, 꽁초가 전부 타들어 갈 때까지 웃고 있는 김신우의 얼굴을 응시했다. 낯설고도 멀어 보이는 그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조금 울렁거렸다.
연달아 두 개비를 피운 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용 재떨이에 꽁초를 처리한 그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바로 대로변으로 나가 택시를 탈 작정이었으나, 저도 모르게 정류장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환히 빛나고 있는 김신우의 얼굴 앞에 다가가 그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휘어진 눈가와 모양 좋은 입술이 호를 그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의 김신우는 더없이 다정해 보였다. 커다란 전광판 크기와 눈높이 탓에 마치 시선을 맞추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문득 마지막 병실에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귓가를 울리는 나직한 음색도 함께였다.
‘내 집에 얌전히 처박혀서….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누구도 만나지 말고, 개처럼 종일 나만 기다리면서. 내가 먹이고, 입히고, 주는 거, 나만 보고. 나랑만 섹스하고. 그렇게 살래요?’
비뚤어진 입매와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그날 그의 눈동자에 스친 건 명백한 소유욕이었다.
그가 자리를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나 아무리 고심해봐도 앞뒤가 전부 딱 들어맞는 해답은 없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과 도출된 답은 전부 믿기지 않는 방향만 가리켰다.
혼자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던 답은, 그의 언행이 가리키는 이정표는 돌고 돌아 끝내 하나의 도착지로 향했다.
김신우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깨닫는 찰나, 그간 그의 행동들을 전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진심으로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라면 모든 행동을 어렴풋이 납득할 수 있었다.
“하아….”
가만히 김신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지한이 고개를 숙였다. 주머니 속을 뒤적거리자 핸드폰이 손에 잡혔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화면 위를 바라보았다.
어쩐다. 어쩐다.
머리 위에서 빛을 발하는 김신우의 시선은 여전히 지한의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