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
“나를 두고, 어떻게….”
어둠 속에서도 반질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상처와 노기로 얼룩져 있었다. 지한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짙은 숨을 삼켰다. 당혹스러웠다. 자다가 뺨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다. 평소 체력이 좋은 편임에도 쉼 없이 몰아붙이는 김신우 탓에 기절하듯 눈을 감은 차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밤의 ‘그’라니. 평상시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가지고 논 거예요?”
뭐라 채 답하기도 전 동그란 눈자위에 투명한 막이 씌었다. 금방이라도 아슬하게 흘러내릴 것만 같던 액체는 그가 눈을 깜빡, 감자마자 금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가련한 얼굴에 지한은 숨이 콱 막히는 듯했다.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아니….”
한껏 잠겨 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게 아니라고 둘러대기엔 증거가 너무 확실했다. 밤새 죽지도 않았는지, 혹은 다시 발기한 건지는 몰라도 여전히 그의 성기가 제 안에 박혀 있었다. 숨 쉴 때마다 살덩이의 윤곽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득했다.
고개를 돌려 등 뒤의 그를 바라보던 지한은 다시 묵묵히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우선은 안에 있는 걸 빼내고 뭐라 답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이 상태론 무슨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형. 나 봐요.”
“…….”
“피하지 마.”
낮게 내뱉는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한가득 배어있었다. 그는 굳어 있는 지한의 어깨를 탁, 그러쥐었다. 그대로 힘을 주어 누르며 위로 올라탔다. 내벽 안에서 두툼한 자지가 빠지지도 않고 움직였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왜.”
“…….”
지한은 찌푸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뭐라 답을 해 주고는 싶었으나,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마치 외도 현장을 본처에게 그대로 들켜 버린 참담한 유부남의 심정마저 느껴졌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턱 끝에서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지한의 뺨 위로 뚝 떨어졌다. 고운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다. 이제는 눈꺼풀 위까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형, 이런 사람이었어요? 사람 마음 막 가지고 놀고, 바람피우고. 원래 그런 사람이었느냐고요. 내가 잘못 본 거예요? 대답해 봐요.”
지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혹스러움도 잠시, 제 앞에서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가 안쓰럽게 느껴진 탓이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엄지로 그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하나 혼란한 생각에 잠긴 머릿속 탓에 여전히 입술은 꽉 다물린 채였다.
확실히 낮의 김신우와는 분리된 자아로 살고 있고, 거기다가 자신과는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바람이라고 느끼는 게 당연하겠지.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진짜…. 쓰레기.”
“…….”
“흐윽….”
심각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던 지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억울한 말이었다. 뭐라 말이라도 해 보려 입술을 여는 찰나였다.
“…읏.”
순간 아래에 묵직하게 박혀 있던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한은 놀란 눈을 치떴다.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깨문 채 저를 응시하는 김신우가 보인다.
“녹음도, 들려줬는데, 왜 그랬어요, 왜.”
그가 울먹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눈을 한번 깜빡 일 때마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의 눈물로 얼룩진 뺨 때문에 마치 자신이 울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화가 나요. 짜증 나서 미칠 것 같아요.”
습한 음색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가 아래로 상체를 낮추자 정액과 체액이 말라붙은 단단한 복부가 맞붙었다.
그는 지한을 숨이 막힐 정도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자세가 낮춰지며 뜨거운 좆이 내벽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몇 시간째인지도 모르게 벌어져 있던 구멍이 절로 움찔거렸다. 안은 뭔지 모를 액체로 척척하게 젖어 있었다.
“아! 잠, 잠깐. 김신우….”
그가 허리를 위로 쿡 추어올렸다. 지한은 그의 어깨를 붙들며 상체를 뒤로 쭉 뺐다. 그러나 푹신한 침대 시트에 더 파묻힐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형 처음은 내 거였는데…. 형은 내 건데.”
“윽! 으읏.”
“걔한테, 뺏겼다고 생각하니까.”
그는 이를 꽉 물고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씨발, 돌아 버릴 것 같아.”
그가 짙은 숨을 내뱉으며 짓씹듯 읊조렸다. 지한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점막을 가득 채우고 있던 뜨거운 살덩어리가 안을 콱 짓이겼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아!”
꼬리뼈를 타고 어릿한 쾌감이 타고 올라왔다. 헉, 숨을 삼킨 지한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다 허리를 움칠, 떨었다.
“읏…. 잠, 으!”
김신우는 흐느끼며 드세게 좆을 박아 넣었다. 얼굴은 잔뜩 찌푸린 채였다. 저도 모르게 찌릿하게 잦아드는 쾌락에 지한의 찌푸린 눈이 벌어졌다. 몇 시간씩 시달리느라 달아오른 내벽이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흐윽, 윽…. 형.”
“아읏, 으흑….”
지한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뭉근한 쾌감이 발끝부터 저릿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배 속을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고통은 사라졌다. 몇 시간씩 쑤시고 들러붙어 있던 탓인지 더는 아프지도 않았다. 여태껏 느껴본 적도 없는 쾌감이 그의 정신을 흐트러뜨렸다.
“왜, 왜 그랬, 어요. 읏, 말해요. 왜 아무 말이 없냐고.”
“아! 윽!”
철퍽.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쾌감이 번졌다. 배 속을 긁는 듯한 간질거림도 함께였다. 자다 말고 난데없이 전립선을 자극당하기 시작한 지한은 입술을 콱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대답, 해요.”
김신우는 지한의 입술을 벌리고 손가락 두 개를 욱여넣었다. 단단한 손끝이 벌어진 입 안을 헤집으며 말캉한 혓바닥 위를 문질렀다.
“우읍, 읍….”
“내가 지금 얼마나, 속상한지, 형이 알아요?”
“아, 욱.”
“흐윽. 모르죠. 내 마음 알면, 그렇게 못했겠지.”
김신우의 허릿짓이 점점 거세어졌다. 탁, 탁. 탁! 흉흉하게 발기한 좆이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가 길게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김신우의 헐떡임 또한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형…. 너무 좋아요. 좋아해요. 윽, 좋아서. 더 화나.”
“으읏! 웁, 흐!”
그는 여전히 지한의 입 안을 손가락으로 쑤시며, 상체를 숙여 바짝 선 유두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동시에 강한 허릿짓으로 둥그렇게 부푼 안을 두툼한 콱 짓이겼다.
“아! 학, 으흑!”
지한의 무릎이 움칠 튕겨 올랐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쾌감에 정신없이 흔들렸다. 바짝 선 허벅지가 바르르 떨리고, 귀두 끝에선 정액도 아닌 물이 질질 흘렀다.
“여기, 예요? 형도 좋아요?”
“흐, 아. 천, 천천히. 아아. 읏.”
지한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천장을 향해 뻗은 탄탄한 다리에 바짝바짝 근육이 섰다. 뒤로 느끼는 생경한 감각에 지한의 자지 또한 딱딱하게 부풀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쾌락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싫어요, 형도, 내 말 안 들었잖아.”
그가 시트 위에 팔등을 지탱하고는 플랭크 자세로 버티고 섰다. 그리고 안을 긁어내듯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레 지한이 느끼는 곳을 찾아 집요하게 공략했다. 암만 자신이 동정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들 그의 몸은 자연스레 자신의 문란함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하, 으흑. 우으. 아아….”
눈이 반쯤 풀린 지한의 몸이 움칠움칠 튀었다. 좋았다. 저릿저릿한 쾌감에 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귀두 끝이 극점을 쑤셔댈 때마다 사정하는 기분이었다.
“하아, 형. 왜 이렇게, 잘 느껴요? 설마, 나 몰래 전에도, 섹스했어요?”
“아! 으, 으 아니.”
“맞아? 오늘이 처음, 인 거, 맞아요?”
삽시간에 김신우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좆이 깊숙한 곳까지 처박힐 때마다 지한이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래에선 젖은 소리가 쩍, 쩍. 난잡하게 울려 퍼졌다.
“아, 윽. 하아. 아!”
지한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끌어안았다. 팔에 힘을 줄 때마다 땀에 젖은 매끈한 삼두근이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
김신우는 울음과 쾌락을 함께 삼켰다. 제 아래서 헐떡이며 느끼는 공지한을 지켜보며 하릴없이 잦아드는 분노를 겨우겨우 억눌렀다.
“으, 흑, 아. 쌀 것, 같. 그만, 그만.”
지한은 낮게 신음하며 버둥거렸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열락에 몸서리치며, 본능적으로 제 좆을 꽉 쥐었다.
“싸요, 그 새끼 손에, 몇 번이나 쌌을 거잖아.”
“윽, 하윽, 아, 아!”
“하. 내 걸로 더 많이 박을래요. 형은 내 건데. 전부 내가 가져야 하는데.”
그 외설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며 김신우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렇게까지 잘 느끼는 사람이 처음일 리가 없었다. 분명 그전에도 경험이 있다는 소리였다. 목구멍이 꽉 조이고 가슴이 답답했다. 하나 그와는 별개로 몰아치는 쾌감에 눈물이 다 났다.
“흐윽. 좋아해요. 형. 사랑해요. 나만 봐, 나만 봐 줘요.”
그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별안간 손을 뻗더니, 지한의 번들거리는 요도 끝을 엄지로 꾹 틀어막았다. 좆을 쥐고 허리를 흔들며 절정에 치닫고 있던 지한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섹스만 한 거라고 말해요, 몸만, 섞은 거라고. 읏,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빨리 말해요.”
“헉, 흐윽, 놔, 이거, 아!!”
지한의 허벅지가 바르르 떨렸다. 하복부에 힘을 주자 움찔거리는 복근이 조각조각 갈라졌다. 그는 답지 않게 거친 목소리를 내질렀다.
“아. 으! 쌀 것, 같다고! 이거, 씹. 놔! 윽!”
눈을 질끈 감은 지한은 거의 자지러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사정을 통제당한 적이 없었다. 실컷 쥐고 흔들던 자지와 뒤쪽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더해져 고통스러웠다. 빨리 싸고 싶었다.
“말해요. 빨리.”
“하, 아! 학, 뭘, 씨발!”
젖은 숨을 헐떡이며 그는 되는 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딱딱한 살갗이 와 닿았다. 하나 제법 아픈 주먹을 얻어맞으면서도 김신우는 꼼짝하지도 않았다.
“좋아한다고 해 줘요. 말해 줘요. 사랑한다고, 해 줘요.”
그가 뭐라고 하는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실 휘몰아치는 배출 욕구에 지금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치밀어오르는 욕망과 함께 전립선을 쉼 없이 쑤셔대는 자극에 숨이 다 멎을 것 같았다.
“빨리, 빨리요. 읏. 그럼, 싸게 해 줄게요.”
별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지한은 본능적인 욕구 앞에서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조, 좋아. 읏. 좋아합, 씹.”
지한은 헐떡이며 젖은 입술을 달싹였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김신우는 격정적으로 치닫는 흥분을 느꼈다. 잔뜩 젖어 찔꺽이는 소리가 점점 더 빠르고 격해졌다.
“하, 더. 더 말해 줘요.”
“아! 흐윽. 좋아, 좋아하니까, 읏.”
“헉, 으. 형. 나도, 좋아해요. 아.”
귀두 끝을 틀어막던 엄지를 떼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정액이 쏘아져 나왔다. 세차게 솟구친 희멀건 액은 지한의 가슴 위까지 툭툭 떨어졌다. 턱을 한껏 치켜든 지한은 눈을 꽉 감은 채 바르르 떨며 사정의 쾌락에 젖었다.
“하읏, 으읏….”
굳은 얼굴의 김신우가 상체를 세우곤 그의 치골을 꽉 붙들었다. 제 것으로 볼록 튀어나온 판판한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꾸욱 누른다. 그 움직임에 아직 사정 중이던 지한이 몸을 떨었다.
“하아, 형…. 형.”
그는 애틋하게 되뇌며, 거친 숨을 빠르게 내뱉었다. 곧 꺼덕거리는 살 기둥이 점막 안에서 사출을 시작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정액을 욱여넣으려는 듯, 좆을 더욱 꾹꾹 밀어 넣었다. 그럴 때마다 내벽 안이 움찔움찔 조여왔다.
“좋아해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지한은 입속에 맴도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김신우는 느리게 눈을 떴다. 스며드는 햇빛 아래로 공지한의 가지런한 옆모습이 보였다. 그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게 잠들어 있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자는 모습을, 게다가 남자의 잠든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애당초 누군가와 같이 잠든 적이 없으니 아침을 함께 한 적도 없었다. 하나 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그의 잠든 모습을 여러 번 마주하다 보니 상황이 제법 익숙하게 느껴졌다.
직선으로 뻗은 콧날과 도톰한 입술, 매끈하고 흰 피부가 반짝인다. 적어도 제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한 기시감이었다.
한참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김신우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공지한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스르륵 걷어냈다.
목선을 따라 툭 튀어나온 울대와 한 눈에도 단단해 보이는 어깨 아래로 봉긋하게 굴곡진 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하염없이 아래로, 또 그 아래로 홀린 듯 시선을 내리다 문득 제 할 일을 떠올렸다. 그가 이불을 들춘 것은 자신이 잠든 이후 그의 몸에 남았을지 모르는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지난밤 일부러 그의 안에 박아 넣은 채 잠이 들었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놈에게, 그 주제 모르는 새끼에게 공지한을 선점한 것을 똑똑히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썩 내키진 않았으나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만족스러우리만큼 따뜻한 점막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한몫했다.
그리고 곧 드러난 그의 살갗을 꼼꼼히 확인한 순간, 김신우는 어처구니없는 숨을 터뜨렸다.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흰 피부 곳곳에 제가 남기지 않은 열꽃들이 울긋불긋 난잡하게 피어 있었다.
아주, 더럽게도.
“씨발….”
치닫는 흥분에 눈이 돌아갔었다. 그가 아파하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평소 섹스를 즐기는 편이었으나 잠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상대를 몰아붙여 본 적은 없었다. 그것도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이토록 짐승처럼 발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여 기절하듯 잠든 그를 보며 제가 없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래가 퉁퉁 부을 만큼 해댔으니 더는 하지 않겠지 하는 착각에서였다. 혹시 모를 상황까지 미리 생각해 놓았었던 김신우는 섹스 내내 물고 뜯고 싶었던 그의 살갗에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난잡하게 새겨진 영역 표시를 보아하니, 아주 제대로 뜨거운 밤을 보낸 모양이다.
뭘 얼마나 해댔길래, 이따위로 씹어 놔?
생각하니 분노가 확 치솟았다. 금욕적인 얼굴과 거부하는 듯했던 손길은 다 가식이었다. 뒤로는 경험도 없다는 놈이 아프다면서 질질 쌀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저와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헐떡거리는 신음을 내질렀을 걸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잠들지 말걸. 그냥 기절한 놈을 제 방에 처박아 두고 문이라도 잠가 놨어야 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열쇠를 꼭꼭 숨겨 두고서.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난 김신우가 헛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빡이 쳤다. 고개를 돌려 다시 잠든 공지한을 쳐다본다. 제법 부스럭거리고 있는데도 깰 생각조차 않는 걸 보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닌 듯했다. 어젯밤 자신이 했던 짓을 떠올리면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끝난 후에는, 그 씹새끼한테도….
김신우는 이를 꽉 물었다. 불쾌한 기분과는 별개로 벌거벗은 그를 보고 있으니 아래가 또 묵직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짧게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사람을 불러 엉망진창인 집 안을 청소했다. 욕실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그제야 손바닥이 따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젯밤 공지한이 치료해 주었던 손이었다.
냉랭한 얼굴로 제 손을 붙들고 묵묵히 약을 바르던 얼굴이 떠오른다. 손바닥을 펼치고 꼼꼼하게 붙여놓은 밴드를 바라보던 그가 픽 하고 웃었다.
지난밤의 잔상에 빠져 있던 그는 밴드를 붙여 가칠해진 손바닥으로 성기를 문지르며 또 한 발 뺐다. 어제 그렇게 해댔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배 속 안에서 이글거렸다.
샤워를 마친 후, 대충 풀어헤친 가운을 걸치고 걸어 나오던 김신우가 인기척에 시선을 들었다.
“헉.”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괴상한 소리를 내는 한정원이 서 있었다. 김신우의 미간이 와락 좁아졌다. 그가 집까지 찾아올 경우는 대부분 급하게 조정된 일정이 있을 때뿐이었다. 계획대로라면 당분간은 스케줄이 없어야 했다.
“뭡니까.”
“저… 오늘.”
“빼요.”
칼같이 자르는 말에 그가 우물쭈물했다. 움츠러든 어깨로 시선은 지한의 방문 쪽을 힐끔거렸다.
“그게 아니라, 오늘은 지한이한테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서, 대표님이 물어보라고 하셔서요, 지한이가…. 전화를 안 받아서….”
“그것도 빼요.”
가차 없는 말에 한정원이 눈을 깜빡였다.
“네?”
“빼라고. 공지한 씨 아프니까.”
김신우는 귀찮은 듯 수건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한정원은 크게 뜬 눈을 소처럼 깜빡이며 크게 물었다.
“아, 아파요? 어디가, 어떻게요?”
그가 휘둥그레진 얼굴로 지한의 방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양을 주시하던 김신우가 툭 내뱉었다.
“됐고, 나가봐요. 내가 보고 있으니까.”
자리에 멈춰선 한정원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10년 가까이 지한이 앓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도…. 병원이라도….”
“한정원 씨.”
뚝 자르는 어조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칠했다. 딱딱하게 굳은 시선이 한정원의 눈동자에 닿았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내 경호원이잖아.”
멍하니 저를 보는 한정원을 보며 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나 시린 웃음은 무표정한 얼굴보다 더욱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그, 그래도….”
그는 말꼬리를 흐리는 한정원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신경 끄세요. 알아서 할 테니까.”
서늘한 어조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커다란 눈에 힘을 준 채, 한 번 깜빡거리지도 않았다. 김신우는 신경전이라도 하듯 한정원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답이 없는 그를 보며 다시금 또렷하게 읊조렸다.
“나가라고.”
핏줄 하나 없는 동그란 눈망울이 차츰 붉게 물들었다. 분하기라도 한 건지 내쉬는 숨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곧 입술을 꽉 깨문 한정원이 고개를 까닥하고는,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김신우는 그저 가만히 그의 같잖은 꼴을 보고 있었다. 매번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 나가던 걸 생각하면 저 나름대로 화를 표현하는 듯 보였으나 하찮아 보일 뿐이었다.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까지 들은 후에 김신우는 걸음을 내디뎠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를 꺼내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둘이 잤을까.
고작 좋아하는 걸 들킬까 봐 제게 벌벌대던 걸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닐 것 같았다.
몸 따로, 마음 따로라 이거지. 몸은 앞이나 뒤나 좆 달린 놈 아무한테나 다 퍼 주고, 마음은, 씨발….
그는 손에 쥔 생수병을 와그작 구겼다. 기분이 또 더러워졌다.
김신우는 그 길로 다시 침실에 들어갔다. 손에 젖은 수건을 든 채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그의 몸을 들췄다. 드러난 곳곳을 깨끗하게 닦았다. 지워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 새끼가 남겨 놓은 붉은 흔적 위를 힘을 주어 밀어내 보기도 했다.
느꼈을까?
수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노가 솟구쳤으나 참았다. 먼저 뚫은 것은 자신이다. 최초의 승전기는 제가 쥐고 있었다. 이제 와 흥분을 주체 못 하고 강하게 몰아붙인 게 조금은 신경이 쓰였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한번 몰아치는 쾌락을 경험을 해 보았으니 다음번부터는 조금 더 배려를 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생각하며 잠든 지한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
“한아! 괜찮아?”
일주일간의 휴가 후 첫 출근이었다. 호들갑스러운 소리에 소파에 앉아 있던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거칠게 문을 연 한정원이 사무실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 왔어.”
“괜찮아?”
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쉬는 동안 김신우의 집에 거의 갇힌 수준으로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팠던 건데,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응?”
첫 관계의 여파가 생각보다 컸다. 거의 이틀은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했다. 다행히 평소 체력과 회복 능력이 좋아서 그런지 사흘째부터는 거의 멀쩡해졌다. 휴가가 일주일이나 있어 다행이었다.
“아니… 그냥 몸살.”
제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한정원을 보며 지한이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어디가 아프냐는 그의 물음에 괜스레 그날 밤이 떠오른 탓이다.
“네가 무슨 몸살이야. 너 그런 거 안 걸리잖아. 배우님이랑 무슨 일 있던 거 아니고? 싸운 거야? 혹시 다친 건 아니지? 어디, 괜찮아? 좀 봐 봐!”
한정원은 여전히 소란을 떨며 인상을 찡그렸다. 작정하고 지한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김신우를 보며 크게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다는 지한의 메시지를 받은 후에도 그는 심각한 근심에 빠졌다. 머릿속에 지한의 핸드폰을 들고 제게 답장을 보내고 있는 김신우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유난스러운 행동들을 보며, 혹시 죽이기라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떻게든 해 보았겠으나, 그래도 튼튼하고 강한 지한이었기에 며칠 두고 본 차였다. 다행히도 느지막이 걸려온 전화에 마음을 놓았다.
“일은, 무슨 일…. 형. 진짜 몸살이었어. 이제 괜찮아.”
첫 관계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아팠으나 두 번째는 사정을 통제당했던 일만 제외하면 과하게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꽤 오랜 기간 성생활을 멀리하며 살던 지한이었기에 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안 아프던 애가 아프다니까 걱정돼서 그렇지. 얼굴도 안 보여 주고. 내가 진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일이야 있긴 했지만. 그의 집에 거의 갇혀 있다시피 했던 지난 일주일간은 중증 환자보다 더한 귀빈 대접을 받고 살았다.
아침에 자신을 깨우는 손짓에 끙끙대며 눈을 떴다. 유난히 부드럽고 친절한 김신우의 부축을 받아 나가자 균형 잡힌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병동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싸고 좋은 재료들로 만든 음식이었다.
맛도 매우 좋았던데다, 중간중간 후식이나 커피도 꼬박 챙겨 주었다. 물론 그가 직접 차렸을 거라곤 생각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을 불렀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니 또 점심이 차려져 있었다. 다음은 저녁이었다. 일어나면 아침이다. 꼼짝도 하지 못했던 근 사흘간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보냈다.
종일 끙끙거리느라 목이 쉬어 버린 바람에 한정원의 전화도 받지 못하고, 아프다는 메시지로 대신 답했다.
그런 날들이 며칠씩 이어졌다. 김신우는 저는 먹지도 않고 커피만 홀짝이며 지한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난밤의 키스나, 성관계에 대해서 일절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그저 지한을 먹고 쉬게 해 주었다. 안부 외에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확실히 전보다 부드러워졌다. 그 부분을 제외하고 둘 사이에 그다지 달라진 점은 없었다. 하여 지한 또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쉬는 동안 밤의 김신우를 더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잠을 잘 때 그는 꼬박 문을 닫고 잤다. 지한은 자신이 잘 동안 김신우가 따로 기사를 불러 방문 안쪽에 저만이 풀 수 있는 잠금장치를 달아 놓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올 수 없으니 실제 밤의 김신우는 감금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김신우 씨가 잘…. 돌봐 주셨어.”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지한이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표정은 살짝 풀어진 채였다.
“잘 돌봐 준 거 맞아?”
고개를 끄덕이는 지한을 보며 한정원은 화가 난 얼굴을 했다. 하나도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으나 한정원 나름대로 정말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차였다.
한정원은 요즘 지한이 걱정되었다. 지한을 회사로 부른 것은 자신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다칠 일이 생길 줄 몰랐을뿐더러, 그럴 때마다 죄책감과 책임감이 물밀듯이 밀려오곤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 쉽게 믿으면 안 돼 공지한.”
한정원은 지한의 성향이 어떤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한과 그의 만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부터가 그랬다. 조금이라도 안쓰럽거나 가여운 것들 앞에선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 공지한이다. 유난할 정도로 독특한 성격이었다.
김신우의 병에 대해 알게 된 시점부터, 그가 김신우에 관해 이야기하는 태도가 묘하게 변하고 있다는 건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가 불행했다 한들, 지금의 김신우가 무서운 사람이란 건 변함없었다. 둘이 친해지는 것은 좋지만, 모쪼록 착하기만 한 지한이 쉽게 마음을 주고 불합리한 일을 당하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돌연 걱정이 되었다.
“형이 정말 걱정돼서 그래. 이번도 봐. 배우님은 그냥 나가라고만 하지. 찾아가도 얼굴도 안 보여 주지, 너는 통화도 안 되지. 맨날 다치는 것도 그래. 경호 일이야 네가 열정적이니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매번 이런 식이면 널 부른 내 마음도 편할 수 있겠어.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평소답지 않게 다소 격양된 한정원을 보며 지한은 생각에 잠겼다. 그간 알지 못했던 감정의 출처가 어디서부터 솟아난 건지 이제 자신도 알 것 같기는 했다. 눈물을 뚝뚝 떨구던 밤의 김신우가 제 앞에 나타난 시점부터였다.
처연한 얼굴과 애틋한 눈물, 어미를 잃은 고양이처럼 어둠 속에 홀로 잠겨 있던 물기 어린 눈동자. 늘 가시 돋친 붉은 장미처럼 화려하고도, 때로는 희게 진 목련처럼 쓸쓸한 이면을 가진… 가여운 사람.
“너 불쌍한 사람한테 약한 거 잘 알아, 그래도 불쌍하다고 막 다 퍼 주려고 하고, 그러지 말란 말이야. 알겠어? 사람도 봐 가면서 해. 부탁이야, 부탁.”
숨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말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지난 김신우의 모습들이 잔상처럼 흩어졌다. 그 사람을 불쌍하단 이유 하나로 상대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별안간 침묵을 뚫고 소란스러운 벨 소리가 울렸다. 조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든 한정원이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네 기자님!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정이요. 잠시만요 제가 지금 나와 있어서, 잠깐만요!”
조급하게 뛰어나가던 그가 불현듯 헉, 숨소리를 냈다. 그 인기척에 지한이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김신우가 서 있었다. 양손에는 커피잔을 든 채였다.
“아, 네. 기자님. 네에…. 지금요.”
문가에 선 한정원은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까랑까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쉼 없이 새어 나왔다. 한눈에도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김신우가 사선으로 몸을 물렸다. 지나가라는 듯 자리를 만들어 준다. 잠시 멈춰 있던 한정원이 머뭇거리다 핸드폰을 움켜쥐며 조급하게 뛰어나갔다.
지한은 그런 둘을 묵묵히 응시했다. 언제부터 있던 거지.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굳어 있어요?”
담담한 얼굴로 다가온 김신우가 지한의 손에 차가운 커피잔을 쥐여 주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까만 액체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고요한 공기 속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들으면 안 될 말이라도 들었나.”
말하며 살짝 웃는다. 열 오른 손바닥이 차가운 커피잔에 미지근하게 식어갔다. 김신우는 그런 지한을 꿰뚫어 버리기라도 할 듯 물끄러미 주시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옅은 미소가 그의 얼굴 위로 번졌다.
“괜찮아요. 공지한 씨 취향이 그런 쪽인가 보죠.”
“…….”
“난 몰랐지만.”
툭. 낮게 뱉으며 굳은 얼굴로 스쳐 지나간다. 지한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탁 붙들었다.
“…김신우 씨.”
그 손길에 우뚝 멈춰선 그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제 손목을 붙든 손가락을 한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지한의 얼굴을 응시했다.
“왜요.”
단호한 어조였다. 웃음기가 사라진 눈빛은 한없이 더 냉랭했다. 적어도 최근에는 본 적 없던 표정이었다.
지한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어디부터 듣고 있던 건진 모르지만 적어도 한정원의 말을 들은 것은 분명했다. 아무래도 오해를 한 듯했다.
“저… 그런 게 아닙니다.”
“뭐가?”
틈 없이 되물은 그가 무감한 시선을 보냈다. 지한은 섣불리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 나 불쌍한 놈이라는 거?”
말하며 낮게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맞아요. 한정원 씨가 맞는 소리 했는데, 왜.”
김신우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커피를 홀짝였다. 그 말에 지한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밤의 김신우를 만난 순간 느낀 감정이 동정의 형태였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신경이 쓰였다.
하나 한정원의 말은 틀린 부분이 있었다. 여태껏 그를 대했던 그 모든 행동의 이유가 단지 동정뿐만은 아니였다. 그 사실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엔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한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김신우가 굳은 눈으로 웃었다. 희멀건 낯빛 위로 새파란 감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하하, 네. 도와주고 싶었어요?”
아름답게 휘어진 눈꼬리가 묘하게 날카로웠다.
“왜. 정신 돌아 버린 놈인 걸 보니, 신경이 쓰였어?”
그는 웃고 있었으나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지한은 입을 다물었다. 곤란했다. 이미 그의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의도치 않은 상황에 지한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말주변이 없었다. 제 이런 감정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약하게 붙들고 있던 팔목을 놓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 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김신우가 다시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공지한 씨.”
“…….”
“내가 불쌍해요?”
고요한 적막 사이로 김신우의 낮은 음색이 작게 읊조렸다. 시선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지한은 아무 답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들었다. 섬세한 눈매 끝이 작게 움직였다.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을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대답해.”
짧은 침묵 끝에 그가 손목을 아프도록 꽉 쥐어왔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둘 사이로 한겨울 한파와 같은 냉기가 흘렀다.
“내가 불쌍해요?”
“…….”
“씨발, 불쌍해?”
노기 어린 목소리가 거세어졌다. 불안정한 시선이 드세게 흔들리며 지한의 위로 쏟아진다. 기분 탓인지 그의 눈매가 유난히 초조해 보였다.
지한은 뻣뻣하게 굳은 채 그를 응시했다. 뜨겁게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숨이 막혀 왔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깊숙한 곳에서 출처 모를 감정이 꿈틀거렸다. 눈앞의 그에게 어떤 답을 주어야 할지, 이 순간 제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답도 서지 않았다. 그저 혼란한 잡념의 소용돌이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잠시,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희게 질린 김신우가 고개를 돌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뜨린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게.
“…그래. 불쌍해해.”
이윽고 한껏 음울해진 눈동자로, 한숨처럼 뱉었다.
“더 동정해 줘요.”
체념을 담은 목소리가 속삭인다. 그의 시선이 지한에게로 물끄러미 향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지한은 멈칫 어깨를 굳혔다.
김신우는 우두커니 서 있는 지한의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 사이, 이채 어린 눈동자가 말갛게 빛났다.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에 지한은 턱을 뒤로 물렸다. 난동을 피우고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저 또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키스해 줄래요? 불쌍한 놈한테.”
어느새 바짝 다가온 그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마주한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입술을 맞부딪칠 듯 아주 작은 틈만 남겨 둔 채로 지한을 주시했다.
지한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가를 찡그리며 그의 어깨를 살며시 쥐어 밀어냈다. 이곳은 김신우 전용으로 쓰이는 사무실이긴 했으나,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회사였다. 집에서처럼 막무가내로 굴어선 큰일이 날 것이다.
“여기서는….”
고개를 젓자, 김신우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미소와 달리 날카로워진 어조로 되묻는다.
“여기 아니면, 해 줄 건가?”
“…….”
“불쌍한 놈이면 누구든지 그렇게 막 달라는 대로 다 줄 거예요? 씨발, 무슨 적선이라도 하듯이?”
다소 고양된 목소리에 지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매번 오락가락하는 말에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하나 그의 말엔 어폐가 있었다. 자신은 그가 생각하는 그런 문란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한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이내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피해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전… 아무한테나 막 안 주는데요.”
말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전, 아무나 키스하고, 관계 갖지 않습니다. 여태 그런 적도 없고요.”
“…….”
“자꾸,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하며 찬찬히 눈을 내리깔았다. 예상치 못한 말에 김신우 또한 입을 다물었다. 둘 중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틈 사이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어어, 왔어들! 거기서 뭐 해. 앉아, 앉아.”
돌연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박 대표가 나타났다. 놀란 지한이 어깨를 움찔했다.
“신우야. 왜 그래, 또!”
박 대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싸한 분위기의 둘을 보고 성큼성큼 걸어오며 손을 휘적거린다. 어째 별 탈 없이 잘 지내는가 싶더니 시비가 붙은 듯 보인 탓이었다.
“우리 지한 씨만 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죽일 듯이 쳐다봐 쳐다보기를. 네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줬는데! 안 그래?”
스펙 좋고, 잘생기고, 몸까지 잘 쓰는 공지한은 박 대표의 마음에 쏙 드는 남자였다. 특히나 툭하면 돼먹지 못한 짓을 하는 김신우의 옆에 붙여 놓기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자 자, 우리 톱스타 공지한 씨. 편하게 앉아요, 앉아.”
천천히 지한에게서 떨어진 김신우가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지한 또한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박 대표는 곧은 자세로 소파에 앉는 지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외모나 체격, 어느 하나 흠 없이 탁월하다.
바짝 올린 머리에 훤히 드러난 이마, 짙은 눈썹 탓에 첫인상은 다소 드센 인상을 받았으나, 눈썹 위까지 차분하게 내린 새카만 흑발을 보니 차갑고 고고한 분위기가 잔뜩 풍겨 나왔다. 김신우와 나란히 입 다물고 앉아 있으니 냉탕과 온탕 같았다.
저도 모르게 둘의 외모에 빠져 분석하던 박 대표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자, 우선 오늘 할 말은 말이지. 먼저 신우한테 좀 물어보자.”
김신우는 다소 귀찮은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재개된 드라마 촬영은 밤늦게 잡혀 있었으나 박 대표의 호출에 소속사로 출근한 차였다. 늘 좆같은 타이밍에 나타나는 것도 재주였다.
“너 혹시 누구한테 원한 산 적 있냐?”
그는 심각한 얼굴로 상체를 낮추며 깍지를 꼈다.
“아니 뭐, 빚을 졌다든가. 뭔가 진짜 죽이고 싶을 만큼 잘못한 일들 같은 거 말이야.”
“됐으니까 그냥 본론만 말씀하세요.”
김신우는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빙빙 둘러 말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지금 서에 다녀오는 길이야. 너 이번 사고부터 시작해서 그간 벌어진 일들 전부 조사 들어갔는데, 이거 씨. 차 도난당한 시점부터 주변 시시티브이 다 돌렸는데도 흔적도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요.”
“강 형사가 이거 그냥 단순한 스토킹이 아니라 거의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 미수, 그러니까 악질 범죄 수준이란다. 완전 깜빵에서 몇십 년씩 썩어야 할 수준이라고.”
“그걸 이제 아셨어요?”
그가 툭 내뱉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멀쩡한 차를 들이박고 한강에 빠트리기까지 했는데 당연한 말을 지껄이는 것이 한심했다.
“그런 의미에서, 주변에 혹시 의심 가는 사람 없냐 이거야. 우선 신우 네가 조사받으러 오라는데, 아무래도 배우가 경찰서 들락거리는 게 영 보기 좋지는 않잖아.”
“그런 거 없어요.”
눈을 내리깐 김신우가 단호하게 답했다.
“없는 거 맞아?”
“없다니까.”
길게 뻗은 다리를 꼬아 앉으며 팔짱을 낀다. 틈 없이 돌아온 답에 박 대표가 수상쩍은 얼굴로 김신우를 응시했다.
“좀 잘 생각해 봐, 왜 너는 아무 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열 받게 한 거, 그런 것도 없었어?”
의심 가득한 시선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원한 살 일을 안 하고 살았을 리가 없었다. 분명 잘 생각해 보면 짚이는 구석이 있을 터였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사무실 구석을 노려보듯 주시하던 김신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를 보는 박 대표와 딱딱한 시선을 마주했다.
“김은별이 술 처먹고 전화해서 사귀자길래 싫다고 했어요.”
“…….”
“김 피디가 술 한잔하자는 거 유부녀는 취향 아니라고 했고요. 시선의 끝 야외 촬영 때 두신 공원 화장실에서 담배 문 학생 둘이 따라오길래 좆같으니까 꺼지라고 욕한 적 있는데. 아. 얼마 전에 XB 대표한테 소속 배우 두 명이 스폰 받고 싶어 하더라고 전해 준 적도 있네. 알죠? 그 오징어같이 생긴 새끼들.”
김신우는 다리를 꼰 채 담담하게 말했다. 느닷없는 인성 폭로에 박 대표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더 필요합니까? 더 필요하시면 말씀해드리고. 뭐, 촬영 시간 괜찮겠어요? 그냥 취소하고 편하게 경찰서로 가시죠. 대표님도 제가 뭘 잘못했기를 바라시는 것 같은데, 가서 전부 깨끗하게 불어드릴게요.”
살짝 웃는 얼굴에 옆에 앉은 지한 또한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예상외로 제 인성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편인 듯했다. 아주 좋지 않은 성향이었다.
“아니, 뭘 또 말이 그렇게 흐르냐. 나야말로 신우 네가 자꾸 위협당하니까, 걱정스러워서 그러지. 임마. 범인 잡으려고. 이거 지한 씨 없으면 어쩔 뻔했어? 위험하니까 빨리 잡아야 하는데. 하, 참 이걸….”
박 대표가 난감한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그러자 김신우가 눈썹을 치켜떴다.
“없으면이 왜 나와요. 공지한 씨는 앞으로 내 옆에 없을 일이 없을 텐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지한을 응시했다.
“그렇죠?”
그가 말간 얼굴로 싱긋 웃었다. 느닷없이 제 대답을 요구하는 행동에 지한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헛숨을 내쉰 김신우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비스듬히 턱을 치켜들었다.
“말 나온 김에 공지한 씨 월급 두 배 더 올려 줘요. 앞으로 계속 쓸 거니까.”
“뭐?”
“공지한 씨 아니었으면 나 죽었을 거라면서요. 비싼 몸뚱이 살려 줬으니까, 연봉 더 올려 주시라고요.”
당연하지 않은 말을 당연하게 하는 그의 말에 박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야. 지금도 공지한 씨 월급 정도면 탑이야, 탑!”
그가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버럭 말했다. 기실 지한은 업계에서는 물론이고 어딜 가도 견주기 어려운 대우를 받고 있었다.
김신우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지한을 보며 턱을 까닥했다.
“지한 씨, 맞아요?”
“…….”
“응?”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살짝 말아 올라간 입매와 답을 종용하는 눈빛이 무엇을 원하는지, 지한은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괜한 언쟁은 피하고 싶었다.
“더, 올려 주시면… 좋습니다.”
원하던 답에 김신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
김신우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한창 인기리에 상영 중이던 드라마 ‘파고’의 촬영을 더는 미룰 수 없던 탓이다. 총 16부작으로 이뤄진 드라마는 이제 거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남은 촬영은 강원도의 한 바닷가에서 진행되었다. 2박 3일간의 장정이었다. 한창 바쁘게 돌아가는 카메라 앞의 김신우는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모래사장 위에서 홀로 걸었다.
아주 느리게, 한 걸음씩 걷는 그를 따라 커다란 카메라와 스태프들도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희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멀찍이 떨어진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서 그를 지켜보던 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걸친 옷이 너무 얇다. 전보다 날이 조금 풀렸다고 해도 바닷가라 그런지 기온이 낮았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는 건 아닐까. 생각에 잠긴 찰나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대어 보기도 전, 낯선 여자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으로 시작한 멘트는 거절의 답을 꺼낼 틈도 없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잠시 입술을 다문 채 묵묵히 듣고 있던 지한은 끝내 그녀가 제 할 말을 전부 마치고 나서야 괜찮습니다.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누구?”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어깨 위에 검정 패딩 점퍼를 걸친 김신우가 지한을 보고 있었다.
“누구랑 그렇게 오래 통화해요.”
물음에 핸드폰을 재킷 안 주머니에 넣던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광고….”
“그 여자예요? 공지한 부인?”
답을 하기도 전 말을 뚝 끊는다. 눈썹을 치켜뜨며 묻는 김신우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한바탕 소동 탓에 한참 뒤에야 정류장에서 마주쳤던 학생을 기억해낸 지한은, 아차 하는 마음으로 제 팬클럽인 ‘notify’에 뒤늦게 가입했다. 당시 그 학생이 자신의 말에 다시 학교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댓글을 달아 주겠다던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가입했던 그곳에서 지한은 제 군대 후임이었던 김정환의 연락도 받게 되었다. 연락 수단이라고는 오직 문자와 메신저 어플뿐, 아무런 SNS도 이용하지 않던 그는 옛 동료와의 우연한 만남을 신기해했다.
그렇게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팬레터들을 읽고 있던 지한을 발견한 김신우는, 이후 이름도 좆같은 그의 팬 카페 노티파이를 습관처럼 들락거렸다. 정작 제 팬 카페는 3년 전 이후로 들어가 본 적도 없던 그였다.
그는 이따금 올라오는 팬레터들을 읽으며 코웃음을 쳤다. 우습지도 않았다. 게시글은 대부분 공지한 부인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여자의 것이 다였다. 아마 팬 사인회까지 찾아와 연락처를 주고 갔던 그년일 것이다. 안 봐도 뻔했다.
잔뜩 인상을 구긴 김신우는 그녀가 쓴 모든 글을 하나씩 눌러 ‘욕설, 비방’과 ‘음란, 청소년 유해’로 번갈아 신고했다.
“아뇨, 광고 전화입니다.”
손을 뻗은 지한이 그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려는 패딩을 올려 주었다. 심각한 얼굴로 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김신우의 안색을 살피고는 작게 물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느닷없는 말에 김신우가 눈을 치켜떴다. 그의 낯빛을 훑는 지한의 새카만 눈동자가 움직였다.
“좀…. 피곤해 보이셔서요.”
언뜻언뜻 그의 얼굴 위로 피로한 기색이 비쳐 보였다. 평소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24시간 종일 김신우만 지켜보고 있는 지한이었기에, 아주 작은 변화도 쉽게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티 나요?”
김신우는 대수롭잖게 말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방문에 잠금장치를 단 이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주 얕은 잠에 빠졌다가 깨기를 반복하는 것이 전부였다.
습관적으로 복용하던 수면 유도제도 먹지 않았다. 혹여 깊게 잠든 사이 그 새끼가 나와 방문을 부수고 나가기라도 할까 봐 신경이 쓰인 탓이다. 깊은 곳에서 차오르기 시작한 원인 모를 불안감이 그의 안에서 넘칠 듯이 찰랑거렸다.
“잠을 못 자서 그래요.”
이런 생활이 2주가 넘도록 이어졌다. 안 그래도 이따금 눈앞이 어질할 정도로 현기증이 났다. 필시 수면 부족 증상일 터였다.
“그럼 차에서 잠깐 눈 좀 붙이시죠.”
지한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었다. 마침 김신우의 촬영 분량이 끝난 차였다. 듣기로 다음 촬영분까지 시간이 조금 있다고 했다. 잠시 주변을 훑어본 김신우가 고개를 까닥였다.
“같이 가요.”
“예?”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밴은 촬영장 바로 옆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같이 가자고. 경호원 씨.”
그가 손가락으로 지한의 뺨을 툭 건드리고는, 망설임 없이 스쳐 지나갔다. 앞서 걷는 김신우를 따라 지한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채 걷지도 않았을 때 커다란 밴 앞에 도착했다.
“잠시만 계세요.”
드르륵, 문을 연 지한이 먼저 차에 올라탔다. 안으로 들어가 걸려 있던 옷가지와 짐들을 좌석 한편으로 몰아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는, 차에서 내려와 손을 털었다. 김신우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제 타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천천히 차에 올라탄 김신우가 자리에 앉았다. 곧 문을 닫을 자세를 취하는 지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뭐 해, 안 타고.”
김신우의 밴은 독일제 C사 최신 모델로 내부가 유난히 넓고 시트도 푹신했다. 하나 아무리 넓다 해도 자는 데에 옆에 누가 있으면 방해될 것이 분명했다.
짧은 순간 생각을 마친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잖아도 퍽 예민한 사람이었다.
“저는 밖에 서 있겠습니다. 편하게 쉬세요.”
“연봉 협상 조건. 상시 밀착 경호.”
그는 단호하게 지한의 말을 가로막았다. 팔짱을 낀 채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고는 지한을 내려다보았다.
“나 무서운데.”
“…….”
“그놈이 바닥에 숨어 있으면 어떡해요.”
지한은 차 손잡이를 붙든 채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또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하나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딱히 버티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얼굴 위로 들러붙는 따가운 시선을 피해 차에 올라탔다. 등 뒤로 문을 닫은 지한이 앉아 있는 그를 지나쳐 뒷좌석 바닥을 확인했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맨 뒷자리에 걸터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김신우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걸친 패딩을 벗고는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는 별 표정 변화 없이 그대로 걸어와 지한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밴의 가장 뒷좌석은 세 개의 좌석이 길게 이어진 형태였다.
묵묵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지한의 시선이 텅텅 빈 여러 개의 좌석을 훑었다. 굳이 넓고 많은 자리를 두고 제 옆에 앉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베개 좀 해 줘요.”
김신우는 가만히 앉아 있는 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무릎을 세워 시트 위에 발을 올려놓기까지 했다. 지한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자세만 보면 마치 캠퍼스 잔디에 누워 연애하는 대학생 커플 같았다.
“공지한 씨, 아래에서 보니까 색다르네요.”
허벅지 위에 얹힌 고운 얼굴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한은 다소 긴장하여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승위 느낌도 나고.”
“…….”
“해 볼래요? 섹시할 것 같은데.”
말하는 눈동자엔 장난기라곤 없었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부끄러움이라곤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아뇨. 됐습니다.”
그를 흘끔 보고는 괜스레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아래에서 여과 없이 느껴지는 눈길을 피해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잠을…. 전혀 못 주무시는 거예요?”
요즘 밤의 김신우가 보이질 않았다. 김신우와 관계를 가진 이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거의 2주가 다 되어 갔다.
이제는 병이 다 나은 걸까. 아니면 정말 잠들지 못해서 그가 나타나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이 어느 쪽이든 지한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그의 존재를 물어볼 수도 없다. 그에겐 더없이 민감한 부분이란 걸 이미 겪어 보아 잘 알고 있었다.
“왜요.”
틈 없이 돌아온 답에 지한이 마른침을 삼켰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빤한 얼굴엔 여전한 피로감이 엿보였다.
다소 날카로운 반응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지한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주무세요.”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물끄러미 지한을 올려다보던 김신우가 느리게 팔을 뻗어 왔다. 커다란 손바닥이 목 뒤를 덮듯이 감쌌다. 불현듯 따스한 체온과 함께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에 지한의 상체가 끌려갔다. 놀란 눈이 마주치기도 전, 입술이 맞붙었다.
쭙. 뜨겁고 미끈한 혀가 순식간에 입술을 적셨다. 엉거주춤 상체를 낮춘 지한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지한의 목덜미를 따라 목선까지 쓸어내렸다. 차분히 내려온 지한의 검정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김신우의 눈가를 간지럽혔다. 잠시 지한을 바라보던 김신우는 곧 서서히 눈을 감았다.
말캉하고 뜨거운 혀가 입 안을 간지럽히듯 문지른다. 지한은 밀려들어 오는 타액을 삼키며 입술을 벌렸다.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잔잔한 향기가 흘러들었다. 입 안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질척한 살덩이를 혀끝으로 가볍게 밀어내자, 미끌한 감촉과 함께 그가 드세게 혀를 감아 왔다.
츱, 쯔읍. 잔뜩 젖은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농도 짙은 키스였다. 설핏 미간을 좁힌 지한이 그의 어깨를 잡아 살짝 떼어냈다.
“하아….”
좁은 틈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저를 말끄러미 바라보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보며, 지한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딴 새끼 생각하지 마.”
그는 짓씹듯 중얼거렸다.
“알겠어요?”
순간 김신우가 살짝 웃었다. 기다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우아하고 다정한 눈빛이 그의 눈동자 위로 일렁였다. 거친 어조와 상반되는 흠 없는 얼굴은 신이 허점 없이 빚어 놓은 피조물 같았다.
지한은 옆에 툭 떨궈 놓은 주먹을 살짝 그러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 듣는 개 같네.”
“…….”
“닮았어요. 허스키. 늑대 개.”
다소 오묘한 억양에 지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말을 마친 김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옅게 머물던 웃음기는 금세 사라졌다.
“목줄이라도 채워 놓을까.”
그는 눈을 감은 채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잘 생각은 없었다. 그저 주변의 성가신 연놈들을 떨궈 놓고 단둘이 쉬고 싶어 끌고 온 참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릎을 베고 눕는 순간 김신우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지한은 아무런 답 없이 묵묵히 그를 응시했다. 길고 촘촘하게 뻗은 속눈썹이 곡선을 그렸다. 희고 말간 피부는 투명하리만큼 깨끗했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완벽하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하기야 밤낮없이 돌아가는 카메라에도 곧잘 화려하게 담기는 얼굴인데 완벽하지 않을 리 없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지한이 짙게 선팅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억누르던 숨을 흘려보내곤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가슴 한 부근이 저절로 움칠거린다. 마치 갓 싹이 움트는 씨앗이 심장에 심긴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상황이 이질적이고 어색했다. 제 약점을 쥐고 누르려던 사람과 잠자리도 했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키스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하물며 그것이 싫지 않다는 점이 가장 심각한 이유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지난 성적인 접촉이 좋았던 걸까. 함께 보냈던 첫날밤을 떠올려보면 무척 흥분하는 듯 보였으니, 민망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그 후로 쭉 제게 부드럽게 대해 주는 일 또한, 어쩌면 다음을 기대하는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저와 같은 대우를 받았을 김신우의 잠자리 상대들을 떠올려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문득 일정하게 흘러나오는 숨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그는 정말로 잠이 든 건지, 가느다란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문득 그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넘겨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고 참아냈다.
지한은 창틀에 툭, 머리를 기대었다. 불면증이 있다던 사람이 잠깐 머리를 대고도 잠들 정도라니. 얼마나 잠들지 못한 걸까. 자지 않았다면 그간 밤의 김신우는 왜 나타나지 않은 걸까.
몇 달간 일하며 한 번도 발견한 적 없던 그의 피로한 안색이 괜스레 신경 쓰였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도 지한의 머릿속은 혼잡하고 소란하기만 했다.
홀로 사색에 잠긴 동안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낮은 신음과 함께 김신우의 인상이 움칠 구겨졌다. 창밖을 바라보던 지한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얼굴이 찌푸려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엄지로 그의 미간을 살짝 펴 주자, 그의 표정이 다시 편안하게 돌아왔다.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번쩍거리는 고가의 시계는 김신우가 끝끝내 차고 다니라며 으름장을 놓은 명품 시계였다. 사고 이후 새로 장만한 슈트도 몇 벌이나 되었다.
아직 다음 장면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짧은 시간 이렇게라도 쉴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생각하는 찰나 재킷 안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은 한정원이었다.
“여보세요.”
행여 그가 깰까 낮게 속삭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정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아, 어디야? 배우님이랑 같이 있어?
“응. 근처야.”
-유설아 씨 의상 때문에 배우님 먼저 들어간대. 촬영장으로 와!
“…어, 알겠어.”
전화를 끊고는 잠시 망설인다. 그가 정말 곤하게 잠든 듯 보인 탓이다. 최근에 계속 잠들지 못했다고 하니 깨우기가 미안해졌다. 하나 멋대로 지체할 순 없었다.
“김신우 씨.”
중저음의 음색이 고요한 실내로 흘러들었다.
“김신우 씨, 일어나세요.”
지한은 혹여 잠든 그가 놀랄까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약하게 쥔 어깨를 가만가만 흔들자, 곧 기다란 눈매가 부스스 뜨였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눈꺼풀이 서서히 뜨였다. 꽃이 피듯 얇고 또렷하게 진 쌍꺼풀 아래 이채 어린 눈동자와 마주쳤다. 색이 옅은 다갈색 동공은 마치 물에 젖은 보석처럼 반질거렸다.
완전히 눈을 뜬 김신우는 보면 안 될 것을 발견한 것처럼 멈춰 있었다. 이내 고요하게 지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김신우 씨?”
문득 지한의 눈가가 가느스름해졌다. 그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해 보인 탓이었다.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신우는 느리게, 아주 찬찬히 눈을 굴렸다.
서서히 식어가는 눈길이 지한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이어 주변의 텅 빈 좌석을 훑고는, 시트 위 반쯤 접힌 제 무릎 즈음에서 멈췄다. 김신우는 다시 느리게 눈을 감았다. 하아. 잇새로 낮은 숨이 흘러나왔다. 따라 툭 불거진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그는 천천히 움직였다. 지한의 허벅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길게 접혀 있던 다리를 아래로 내렸다. 똑바로 앉은 후에 그는 서서히 고개를 떨궜다. 상체를 비스듬히 숙인 채로 제 머리를 쓸어 올린다. 입술 사이로 길고 낮은 숨이 흘러나왔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은데요.”
삽시간에 창백해진 낯빛을 확인한 지한이 그를 들여다보았다. 어째 눈을 붙이고 난 후 컨디션이 더욱 안 좋아진 듯했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 누른 김신우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붓이 깔린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팔락였다.
돌연 살짝 휘청이는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경직된 채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 어디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지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물음에 김신우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제 어깨 위에 얹힌 손을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금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침음했다.
“아아….”
다시 고개를 숙인 김신우가 제 발끝 즈음을 바라보았다. 유려한 옆선을 따라 그의 입술 끝이 느리게 말아 올라갔다.
“이래서였구나.”
중저음의 목소리는 억누르듯 떨리고 있었다. 지한의 손에 잡힌 단단한 어깨도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날 가둬 놨어요?”
느닷없는 말에 지한의 눈이 살짝 벌어졌다.
“둘이 붙어먹으려고, 내 방에, 잠금장치까지 달아 놓고…. 나를, 감금하고. 그렇게 짠 거예요? 나 몰래 이렇게 시시덕거리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지한이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이제는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는 종전에 제게 키스를 퍼붓던 남자가 아니었다. 그간 통 만나지 못했던 밤의 김신우였다.
“잠금… 이라니.”
영문 모를 말에 사고 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감금이라니.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하아….”
김신우는 다시 한번 짙은 숨을 내뱉었다. 느리게 들어 올린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아래 드러난 입매가 비뚜름하게 내려가 있다. 주체 못 할 감정에 진정하지 못하는 듯, 탄탄한 가슴께가 부풀었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불현듯 짙고 습한 침묵이 둘 사이로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보고 싶었어요.”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여전히 양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가린 채였다.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어요. 보름 동안, 매일매일 갇혀서 형 생각만 했어요.”
독백하는 목소리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문득 말을 멈춘 그의 커다란 손바닥 아래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지한의 눈이 벌어졌다.
“아닐 거라고. 그 새끼가 형이랑 나 사이 방해하려고, 일부러 괴롭힌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구하러 와 줄 거라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동그랗고 투명한 방울이 그의 턱 끝에 툭 하고 맺혔다.
“내가, 방해꾼이었어요?”
말하며 울음 섞인 헛웃음을 터뜨린다.
“씨발, 내가, 방해한 거예요?”
거친 숨이 섞인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김신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어둡고 축축했다.
“아니. 저, 김신우 씨.”
지한은 저도 모르게 조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벌겋게 물든 눈자위를 보며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감금이라니, 잠금장치라니.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일언반구도 없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그의 눈물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말하지 마요.”
“…….”
“듣기 싫어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지한이 덜컥 입을 다물었다. 그는 평소처럼 지한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방 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리기만….”
그는 젖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두서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한번 꾹 닫았다가 뜨곤, 다시금 젖은 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었는데, 진짜 보고 싶었는데.”
이어 설움에 벅찬 숨을 삼키고 뱉기를 반복했다. 지한은 섣불리 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둘 사이로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아요.”
“…….”
“아니, 보기 싫어요.”
말을 끝낸 그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가 드르륵,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린다. 지한은 별안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멀거니 그를 보았다.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빡, 감았다 뜨고 나서야 뒤늦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신우 씨!”
그는 문 옆에 놓인 김신우의 패딩을 탁 낚아채고는 차에서 조급하게 뛰어내렸다.
난데없이 지껄이는 이상한 말들도 말이지만 촬영, 당장 들어가야 할 촬영이 문제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토이 X토리나 보는 그가 대본을 외울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하니 애당초 촬영에 협조할 생각도 없을 터였다.
서쪽 산등성이로 해가 넘어가며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보폭이 넓은 김신우는 벌써 저만큼 멀어졌다. 지한은 재빠르게 다리를 내디디며 그를 쫓아갔다.
“김신우 씨, 잠깐 기다려 봐요!”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탁 잡아챘다. 그러자 우뚝 멈춰 선 김신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찌푸린 얼굴로 여전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꾹 다물린 채 아래로 내려간 입매는 보는 사람마저 괴롭게 만드는 가엾은 얼굴이었다.
“하아…. 하, 잠시만. 제 얘기 좀.”
“이거 놔요.”
김신우가 팔을 떨어내려는 듯 힘을 주었다. 그러나 잔뜩 찡그린 지한은 더 꽉 움켜쥐며 숨을 몰아쉬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처음 듣는 말이에요. 하아. 그게, 다 나은 줄, 아니. 안 계신 줄, 그… 당신이, 다른 곳에, 하아. 미치겠네.”
무작정 말을 내뱉던 지한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다소 거칠게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다 꽉 쥐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두서없는 단어들만 툭툭 튀어나왔다. 말주변이 없는 자신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인적 없는 어촌에 벌레 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다시금 김신우를 바라본 지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저, 이거 입으세요. 감기 걸려요.”
되는대로 급하게 집어 온 그의 패딩 점퍼를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입을 꾹 다문 채 그가 하는 행동을 응시하던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내가 감기 걸리면, 그 새끼가 아플까 봐 그래요? 그게 걱정돼서 그래요, 형?”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없는 동안 뭐 했어요.”
금세 말을 뚝 자른다. 붉은 눈가를 찡그리며 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손잡았어요?”
“…….”
“키스했어요?”
맥락 없는 질문에 지한의 말문이 막혔다. 키스야 조금 전에도 나눴으나, 지금은 아마 질투 때문에 화를 내는 듯하니 아니라고 해야…. 짧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지한을 보며, 김신우가 그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
“아.”
얼떨결에 지한의 팔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는 떨궈진 제 손을 느리게 응시했다. 다시 시선을 들자, 여전히 아픈 얼굴의 김신우가 보였다. 꽉 다문 턱의 근육이 불룩하게 불거졌다.
“…형….”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여러 번 숨을 곱씹은 그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뱉었다.
“진짜 싫다.”
지한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젖은 눈동자 위로는 증오와 배신감이 어려 있었다. 마주한 시선에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너무 싫어요.”
쿵. 쇳덩이같이 무거운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밑의 세상이 한 계단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알 수 없는 감각에 지한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내뱉었다.
김신우는 그대로 망설임 없이 등을 휙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날벼락 같은 말에 멀거니 눈을 깜빡이던 지한이 그제야 소리쳤다.
“김신우 씨!!!”
느닷없는 달음박질에 그는 반사적으로 김신우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둘은 동시에 투박한 길 위를 거침없이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김신우 씨!! 서 봐요!!”
지한이 고함쳤다. 평소 그가 출중한 달리기 실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금세 대로변으로 달려간 김신우가 멈춰 서더니 기다란 팔을 휘저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차량이 그의 앞에 끼익, 멈춰 섰다.
“김신…!! 야!!!”
눈 깜짝할 새 차에 탄 그가 문을 쾅 닫았다. 놀란 지한이 소리쳤다. 빠르게 출발한 차는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지한은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뛰어가 똑같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단 한 대의 차가 떠난 한적한 도로 위엔 차량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는 허탈한 얼굴로 휑한 도로를 바라보며 헉, 허억.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 씹….”
지한은 낮은 목소리로 욕을 읊조렸다.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해가 넘어간 하늘에는 희뿌연 구름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문득 타이밍 좋게 재킷 안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한정원이었다.
-여보세요. 한아, 어디야? 안 와?
수화기 너머 조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형. 하아. 일이, 생겼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김신우 씨가, 하….”
지친 기색이 깃든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단 차로 와 봐. 이야기할 게 있어.”
그는 마치 패잔병처럼 고개를 떨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
박 대표와 통화를 끝냈다. 급한 대로 김신우가 건강 문제로 쓰러져 지한과 함께 병원에 갔다고 말을 맞췄다. 대표는 우선 오늘 밤 안으로 연락이 오길 기다려보잔 입장이었다. 이대로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일 촬영 또한 펑크였다.
“어떡하지?”
한정원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둘은 숙박을 잡아놓았던 근처 모텔 안에 앉아 있었다. 상체를 숙인 채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던 지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놓쳐서. 미안해.”
“아니야. 네가 미안할 건 없지, 왜 그래.”
“…….”
“그보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어디로 가신 걸까, 여기 강원도인데. 여태 집에도 안 들어가신 거면….”
그는 아직 아파트에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디선가 방황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한은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 벌써 몇 시간째 김신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받질 않았다. 또다시 흘러나오는 음성 사서함 메시지에 지한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 갔다.
차를 타고 주변을 한참 뒤졌으나 당연하게도 그는 없었다. 이대로 신고할 수도, 어디로 갔을지 모를 그를 막연하게 더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침대 위에 핸드폰을 툭 던진 지한이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마치 응급 수술에 들어간 환자를 기다리는 보호자처럼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이었다.
“한아. 너무 걱정하지 마. 돌아오시면 전화 올 거야. 그렇게 무책임한 분도 아니고, 또 최근에 잠도 별로 못 주무셨다고 했으니까. 금방 잠드시면, 다시 돌아오실 거니까….”
지한의 옆에 선 한정원이 등을 두드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좀 더 찾아보고 올게. 형은 먼저 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한이 패딩 점퍼를 집어 들고는 차 키를 챙겼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잠도 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를 찾아 나서는 것이 마음 편했다.
머뭇거리던 한정원이 그를 말리려다 그만두었다. 지한의 저런 얼굴은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차에 탄 지한은 밴에 시동을 걸고는 핸들을 돌렸다. 캄캄한 시골 바닷가 마을은 인적 없는 길마다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자정이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다. 기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와의 일들은 전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만 있었다. 자꾸만 무력한 기분이 들었다.
잠이 든다면, 잠이 든다면 다시 원래의 김신우로 돌아올 텐데. 그러면 다시 돌아올 텐데. 그만 돌아오면 모두 해결되는 일인데. 혼자 중얼거리다 보니 저를 원망스럽게 보던 김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짜 싫다.’
‘…….’
‘너무 싫어요.’
떠올리는 순간 지한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저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 돌연 눈앞에 커다란 개가 튀어나왔다. 끼익! 지한은 빠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란 건지 잠시 멈춰 있던 개는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바짝 굳어 있던 지한은 그대로 핸들에 이마를 툭 기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했다. 원인 모를 괴로움이 깊은 곳에서부터 번져간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초조해졌다.
***
한가로운 한낮의 병실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지한이 문득 협탁 위에 놓인 김신우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잠시만요.”
낮게 중얼거리며 묵묵히 화면을 들여다본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책을 읽던 김신우가 난데없는 행동에 눈썹을 치켜떴다.
“번호…. 저장했어요.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고개를 든 지한이 금세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혹시 몰라서 단축 번호는 8번으로 해 놨습니다. 전부 비어 있으시길래.”
느닷없는 말에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붙어사느라 여태 번호조차 알지 못했다.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은 그가 지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0번도 아니고, 1번도 아니고. 8번은 뭐예요?”
“엄지로 누르기 쉬운 위치라…. 중앙이잖아요.”
작게 중얼거린 지한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걱정이라도 되나 보지. 김신우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따라 부드러운 눈길이 지한의 옆모습 위로 미끄러졌다.
말없이 그를 응시하던 김신우는 다시 책 위로 시선을 돌렸다. 가지런한 입매는 살짝 말아 올라간 채였다.
“쓸데없이 전화할 일 만들지 말아요.”
“…….”
“옆에 잘 붙어 있어.”
단조로운 어조에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그는 다시 담담한 얼굴로 손에 든 책을 읽고 있었다. 사그락. 가볍게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햇볕에 데워진 오후의 미지근한 공기가 문득 후덥지근하게 느껴진다. 손등으로 제 뺨을 슬쩍 문지른 지한은, 곧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
툭, 툭. 이질적인 소리에 눈을 떴다. 시야는 온통 어두컴컴했다. 온몸으로 번지는 진득한 피로에 김신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
찬찬히 두 눈을 감았다가 뜬다. 하나 몇 번을 반복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춥고, 어둡고, 딱딱했다.
다리를 움직이려다 단말의 신음을 뱉었다. 전신에 묵직하고 뭉근한 고통이 느껴지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실로 팔, 다리가 단단히 압박된 무언가에 의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던 건지 어릿한 고통과 함께 사지가 절절하게 저렸다.
“아, 시발….”
그는 작게 욕을 지껄였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어지러운 정신을 떨쳐내려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여긴 어디지, 무슨 일이지. 삐걱거리는 회로로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본다.
촬영이 끝났고, 공지한과 차에 올라탔고, 그의 무릎 위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헛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큰거리는 눈을 치떴다. 차츰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무릎 위 가지런히 묶인 팔목이 보인다. 하얀 줄은 케이블 타이였다. 따라 시선을 내리니 명치께에 단단한 밧줄이 칭칭 감겨 있었다.
등에 닿은 시멘트 벽은 차가웠으며, 바닥 또한 축축하고 딱딱했다. 의자에 묶인 채였다.
짧은 순간 그의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 잠이 들었고, 기억이 없다. 중간에 그 새끼가 튀어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럼, 공지한은? 어떻게 된 거지. 혼자 잡혀 온 건가. 어디로 간 거지. 그러나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어, 이, 일어났다.”
돌연 어둠 한구석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신우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새카만 어둠 속에서 동그란 랜턴이 켜졌다. 갑작스러운 환한 빛에 김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 무슨 자, 잠을 그렇, 그렇게 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가린 얼굴은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불현듯 나타난 사람을 확인한 순간, 김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가 매우 곤란한 위기에 처했다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당신 뭐야.”
한껏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제 몸을 결박하는 단단한 것들은 촬영 소품이 아니었다. 정말로 실제 상황이었다.
“나, 나?”
짧은 물음에 킥킥, 큭큭, 푸흡. 괴이하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퍼졌다. 김신우는 고요히 숨을 내쉬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간 제게 따라붙으며 개 같은 짓을 벌여온 놈이 분명했다.
“나, 주, 준구야. 박준구.”
그는 소리 내 웃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숨은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여전히 따갑게 내리비추는 랜턴 빛에 눈이 부셨다. 인상을 찡그린 김신우가 고개를 틀며 눈을 내리깔았다.
“씨이… 발, 그게 누군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있으나 그 또한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전신이 결박되어 있었기에 한없이 무력했다. 눈앞의 놈이 당장 칼이라도 들고 쑤신다면 반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찔려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왜, 왜 그래. 우리 가족, 가족이잖아.”
말끝마다 눅눅한 웃음이 흘렀다. 김신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간 해 온 짓을 보면 물으나 마나 정신 이상자일 터였다.
“알았으니까 이거, 풀어.”
다시 시선을 든 그가 찬찬히 주변을 훑었다. 차갑고 습한 실내는 곰팡이 섞인 먼지 냄새가 났다. 발밑에 자욱하게 쌓인 먼지를 보아하니 사람이 살지 않는 폐건물 같았다. 작은 희망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아, 아 안 돼. 네, 네가, 나, 죽이면 어떡해.”
박준구는 또 키킥대며 웃었다. 묶인 손이 뭉근하게 죄어 왔다. 김신우가 채 대답하기도 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푸흐. 네, 네가, 사, 사, 사람 죽였잖아.”
“뭐?”
“네, …가 죽였잖아. 너, 너 혼자만 살고. 형, 죽이고. 엄마, 죽이고. 꽥. 꽥.”
예상치 못한 말에 김신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경직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쾌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사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형, 형도. 네가, 나 대신. 내가 잠깐 집, 가출, 아니 나간, 그사이에, 내 자리 다 차지하고, 형이랑, 엄마랑, 뺏고. 죽였어. 왜? 나는, 다시 그, 금방 집, 들어가려고 했어. 근데, 네가 죽여서. 아무것도, 다, 시팔, 나, 엄, 엄마한테 사과해야 하는데. 모, 못 했어. 너 때문에. 개, 개자식. 왜, 왜 너만 살았어.”
그의 말에 잊고 있던 기억이 강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건만,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고 선명했다.
건조한 공기 속 김신우의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박준구. 저를 위해 대신 죽었던 김준우의 친동생이라는 말이었다.
“나, 나. 혀, 형이랑, 엄마가, 계속, 꿈에 나와. 너, 너 죽여 달라고. 보, 보… 복, 복수해 달라고. 그래서 왔어. 시팔, 자. 자꾸, 나와서. 흐으. 흐. 잊, 못 잊어. 죽, 주, 죽여야 잊을 거야.”
그는 흐느끼듯 말하며 웃었다. 덜컹. 플라스틱 통을 집어 들었다. 손에 쥔 랜턴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건물 구석구석을 마구잡이로 비췄다.
“흠. 흐음. 음.”
그가 음산한 콧노래를 부르며 바닥에 무언의 액체를 뿌려댔다. 코끝으로 비릿한 향이 올라왔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휘발유였다. 딱딱하게 굳은 김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엄마와 형을 죽인 사람이라고 했다. 눈앞의 그는 지난 모든 사건의 경위를 알고서, 제게 복수하러 온 것이다.
“그, 그런데. 너, 혼자만 죽으면, 우리가 소, 손해잖아. 아, 알지? 엄마랑, 형, 둘이 죽, 죽었으니까. 너, 너도 둘 죽어야지. 흐흠. 흠. 으음.”
주변을 돌아다니며 콸콸 액체를 뿌려대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투웅, 빈 통이 나동그라지는 소리와 함께 그가 김신우를 홱 바라보았다.
“그, 그 시팔. 걔. 계속, 내 일, 바, 방해하던 놈. 머, 머, 멀대 같은 놈. 전화. 저, 전화 계속 와. 머, 멍청한 새끼. 오, 오라고 했어. 흐흠. 으흠.”
느닷없는 말에 김신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씹, 무슨, 개 같은….”
박준구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냈다. 김신우의 핸드폰이었다.
“오, 오기 전에. 너, 머, 먼저 죽어 버리면, 아, 안 되니까. 조, 조금 있다가 부, 불 피우고. 흐흠. 여, 여기로 부, 불러서. 안, 안으로. 두, 둘이 같이 죽여야지. 워, 원 플러스 원. 크크.”
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방 킬킬대며 웃었다. 이따금 훌쩍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돌연 어둠 속에서 하얀빛이 반짝, 빛났다. 그가 손에 든 김신우의 핸드폰이 진동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저, 전화 왔다!”
박준구가 신이 난 듯 웃었다. 돌연 김신우의 눈도 크게 뜨였다. 지금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히 보였다. 그리고 덫에 걸린 공지한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또한,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받지 마!!”
“아, 안 돼. 여, 여기 차, 찾기 어렵단 말이야.”
분함에 바닥을 퍽, 걷어찬 김신우가 소리쳤다.
“씨발, 원하는 게 뭐야!!”
흥분한 그의 가슴께가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반짝이며 진동하는 핸드폰을 바라보던 박준구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워, 원하는 거? 네, 네가 죽는 거. 두우, 두우 명. 죽어, 죽는 거. 조, 존나, 안 죽어. 죽여 버리고 싶어. 죽어. 죽어.”
큭큭 웃으며 달칵. 통화를 연결했다. 부들거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누르자 스피커폰이 연결되었다. 건너에서 거칠게 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김신우 씨! 괜찮아요?!
적막한 사위를 뚫고 수화기 너머 지한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여, 여기 빠, 빨리 구, 구하러 와. 구, 구하다가. 너도, 가, 같이, 죽어.”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지한이 거친 목소리로 고함쳤다. 얼마나 뛰고 있는 건지 숨을 심하게 헐떡거리는 채였다.
달각. 작은 소리가 들렸다.
“으, 으응. 알아. 자, 잘 알아.”
화륵. 찬 바닥에 작은 불꽃이 일었다. 작은 불길이 그가 뿌려 놓은 휘발유의 길을 따라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빠르게 번져 나갔다. 삽시간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멀거니 얼어있던 김신우가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 안색은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오지 마.”
-김신우 씨? 내 목소리 들려요?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 없어요?
작은 목소리에도 반응한 지한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목소리에 숨이 콱하고 막히는 듯했다. 김신우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어 갔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덜덜 떨리는 주먹을 드세게 쥐었다.
“오지 마, 씨발. 오지 말라고….”
김신우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옆에 선 박준구의 얼굴이 벌건 불길에 서서히 드러났다.
-하아, 하. 다 왔어요. 도착, 했으니까. 제발, 조금만 기다려요. 원하는 거 다, 들어 드릴 테니까, 다치게 하지 마세요.
“흐. 크으. 내, 내, 내가 왜!”
-하아, 당신, 원하는 게 뭔데. 헉, 그 사람 돈, 많아요. 그러니까 건들지 말라고. 하아, 하.
“시, 시, 싫은데. 싫어!”
검정 마스크를 쓴 박준구가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즐겁게 웃었다. 크크크, 흐흐, 큭큭.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 씹, 건들기만 해 봐. 당신, 당신 진짜 가만 안 둬!!
“으, 으응. 주, 죽, 죽으면 어, 엄마랑 형, 형한테 사, 사과하고. 아, 아아 안녕.”
핸드폰이 김신우의 앞으로 툭 떨어졌다. 그는 남아 있던 휘발유를 마저 바닥에 탁탁 털었다. 그리고 빠르게 문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가, 공지한. 돌아가요. 빨리.”
그는 바닥에서 홀연히 빛나는 화면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본능적으로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녹슨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화르륵, 더 큰불이 번졌다.
삐걱, 삐걱.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낡은 소리가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곧 쾅. 문이 닫혔다.
-하아, 윽. 김신우 씨, 집이 넓어요. 헉, 주변에 뭐, 있는지 뭐라도, 아무거나 말해 봐요! 움직일 수 있어요? 묶여 있어요?
스피커폰에선 지한의 거친 숨소리와 뛰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김신우의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다.
“오지 마, 안 돼. 오지 마…. 오면 안 돼.”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굳은 듯,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화르륵. 불씨가 또 옆으로 번졌다. 일렁이는 불길을 따라 김신우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묶인 팔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숨이 점점 막혀와 괴로웠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금세 크기를 부풀려 가는 화마 따위도, 발아래로 후끈하게 피어오르는 열기와 매캐한 연기 탓도 아니었다. 저 때문에 누군가가 세상을 등졌다는, 평생 자신을 짓눌러오던 트라우마였다.
-김신우 씨. 제발, 제발 뭐라도 말해요.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
“불, 시발, 불이…. 불이 났어요. 그러니까, 오지 마. 돌아가요.”
-옷이나, 뭐라도, 대고 있어요. 금방, 금방 찾을 거니까. 숨, 숨 쉬지 말고. 최대한 숨 쉬지 말고 있어요.
화르르륵. 눈앞이 새빨갛게 번졌다. 서서히 매캐한 연기가 그의 목구멍을 죄어 오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로는 여전히 뛰는 듯 헐떡이는 소리가 났다.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그제야 김신우가 눈을 크게 치떴다.
“가, 가라니까! 쿨럭, 오지 마. 씹, 오지 마!! 찾지 마!!”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 묶인 몸을 좌우로 흔들며 드세게 고함쳤다. 하얀 눈자위에 벌건 핏발이 섰다.
“가라고!!! 그냥 가!! 공지한!!! 너도 죽는다고!!!”
-제발!! 내 말 좀 들어요!!!
수화기 너머로 크게 되받아친 지한이 악을 지르듯 소리쳤다.
-당신 같으면 가겠어? 어떻게 가. 어떻게 그냥 가? 씨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어떻게 가냐고!! 당신 미쳤어?!
쿨럭, 쿨럭. 김신우는 일그러진 얼굴로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당장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던 김준우의 형상이 떠오른다. 시커멓게 그을린 교복과, 괜찮다고 위로하던 다정한 음색까지도.
“헉, 허억. 헉….”
묶인 손이 덜덜 떨렸다. 가슴이 쥐어 짜이는 듯 괴로웠다. 희게 질린 낯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하아. 기다려. 기다려요. 오면서, 신고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하지 마. 다 왔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씹, 헛소리 좀 그만해요. 소리치지 말고. 숨 최대한 참아요.
바깥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김신우의 시선이 문 쪽으로 느리게 움직였다. 끼이익. 문이 열린다. 저 문은, 절대로, 다시 열려선 안 되는 문이었다.
“김신우 씨!!”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 사이로 훤칠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공지한이었다.
아, 안 돼. 오지 마. 오면 안 돼. 죽어. 죽을 거야. 죽으면….
죽으면 안 돼.
눈을 크게 뜬 지한이 헐떡이며 거칠게 뛰어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등 뒤로 기다렸다는 듯 쾅, 하고 문이 닫혔다. 그 모든 장면이 마치 느린 화면처럼 눈앞에 서서히 재생되었다.
“괜찮아요?!”
그는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앉았다. 쇳소리가 날 만큼 숨을 크게 몰아쉬며 김신우의 몸을 더듬거린다. 조급한 손길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김신우의 코와 입술을 막고는 머리 뒤로 묶었다. 손수건 위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하, 좀 불편해도, 숨, 최대한 작게 쉬고. 잠깐 있어요.”
주변을 두리번거린 지한이 욕을 중얼거렸다. 그의 뒤로 가 꽁꽁 묶인 밧줄을 턱턱 힘주어 풀기 시작했다. 포로 구출 훈련은 군에서도 수십 수백 번 단련한 경험이 있었다.
“하, 씹. 꽉도 묶어 놨네.”
짧은 찰나 툭, 소리와 함께 명치를 조이던 고통이 느슨해졌다. 비틀거리는 김신우를 똑바로 일으켜 세운 지한이 그의 뒤에 섰다.
“풀어 줄 테니까, 팔에 힘 빼요. 후우. 힘주지 말아요. 한 번에 풀어야 하니까.”
빠르게 읊조린 지한이 뒤에서 팔을 뻗었다. 백허그하듯 그의 양 팔뚝을 잡아 머리까지 쳐들었다가, 훅 숨을 내쉬며 아래로 세게 내리치듯 끌어당겼다. 투둑, 소리와 함께 손목이 따끔했다. 풀어진 케이블 타이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모든 일이 그가 나타나고 1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신속하게 벌어졌다.
“쿨럭, 나가요. 숨, 아껴 쉬어요.”
손등으로 제 코를 막은 지한이 김신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드세게 번지는 불길 속에서 그가 들어온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굳게 닫힌 철문은 열릴 생각도 않았다.
욕을 지껄인 그가 발을 들어 문을 마구 후려 찼다. 쾅! 쾅! 그러나 당연하게도 단단한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춤추듯 벌겋게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김신우는 뿌리라도 내린 듯 굳어 버렸다.
모든 것이 그놈이 짜 놓은 판이었다. 죽이려고, 모두를 죽이려고. 아니 자신을 죽이려고.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 죽을 것이다. 공지한이 나 때문에. 화마에 휩싸여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나를 구하려다가. 나 때문에. 김준우처럼.
두려움에 김신우의 얼굴이 희게 질려갔다. 새빨간 불길은 멈출 생각 없이 점점 더 크게 번지고 있었다.
“하아, 하. 위험하니까 물러서 있어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본 지한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변에 널브러진 의자를 집어 들고는 심호흡을 내쉬었다. 이내 머리 위로 휙 쳐들고는 두꺼운 창문을 드세게 내리쳤다.
파각!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몇 번 더 퍽! 퍽! 내리치니 창이 와장창 부서졌다. 찬 공기가 훅 밀려들어 왔다. 실내에 고여 있던 희뿌연 연기가 밖으로 빨려 들어가듯 새어 나갔다.
“후우, 먼저 나가요! 빨리!”
지한이 쿨럭대며 손을 휘적거렸다. 김신우는 숫제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든 일이 빨리 감기 하듯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듯했다.
굳은 채 부들거리는 한쪽 다리를 먼저 내디뎠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 사이로 축축하게 젖은 진흙이 철퍽, 튀었다. 따라 바깥으로 몸을 빼내고 나머지 다리도 빼냈다.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누군가 목을 죄는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헉, 다리에 힘이 풀린 김신우가 저도 모르게 털썩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짚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이 따갑게 시큰거렸다.
“김신우 씨!”
주저앉은 모습에 놀란 지한이 소리쳤다. 김신우가 시선을 들었다. 무릎을 꿇은 채 뒤를 돌아본 김신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느새 지한의 등 뒤로 나타난 박준구가 커다란 의자를 머리 위까지 쳐들고 있었다. 김신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크게 고함쳤다.
“안 돼!!!”
느닷없는 비명에 지한이 몸을 움찔했다. 인기척을 느끼고 바로 상체를 낮췄으나 박준구의 팔은 이미 휘둘러진 이후였다.
낡은 의자가 허공을 가로질러 지한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퍽! 갑작스러운 가격에 지한이 크게 휘청였다. 헉, 그의 무릎이 털썩 꺾이자, 박준구가 다시금 의자를 홱 쳐들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치켜든 지한이 머리를 가렸다. 퍽! 또다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윽.”
눈을 깜빡인 김신우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하나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진흙에 푹 빠진 무릎을 바들거리며 일으켰다. 혼잡한 감정들이 머리를 들쑤셨다. 낯빛은 점점 더 희멀겋게 질려가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거기, 거기 있어 신우야. 형이 갈게!’
불현듯 분노에 찬 목소리와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너는 불행의 싹이야. 너 때문에, 네가 죽였어. 네가 문제야. 너는, 너는. 살인자야. 너 때문에 다 죽어. 네가 문제야!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팔팔 끓는 연기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새카맣게 탄 냄새가 코끝으로 흘러들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박준구가 그의 동공 속에서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
아. 안 돼.
안 돼.
더는, 더 이상은 안 돼.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초점이 나간 김신우의 눈동자 위로 시뻘건 불길이 일렁였다.
그는 용수철이 튀어 나가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붉은 화마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박준구의 시선이 느리게 굴러 김신우에게 닿은 순간, 그의 주먹이 박준구의 턱뼈를 강하게 가격했다.
퍼억! 턱이 속절없이 돌아갔다. 가슴께를 크게 부풀린 김신우가 다시금 거칠게 팔을 뻗었다. 퍽! 묵직한 주먹이 명치에 정확히 맞아 들었다. 쿨럭, 거친 숨을 내뱉은 박준구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으헉!”
틈도 주지 않고 긴 다리를 들어 그의 배를 걷어찼다. 체구가 작은 박준구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주변은 여전히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퍽! 퍼억! 퍽! 무자비한 발길질이 그의 위로 쏟아졌다. 배 속의 내장을 짓이기고 뼈의 마디마디를 부러뜨릴 듯 거친 폭력이 이어졌다. 윽, 아윽, 윽! 몸을 웅크린 채 하염없이 짓밟히던 박준구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컥, 크억! 히, 히히. 켈룩….”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김신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축구공을 차듯 콰직, 그의 머리를 걷어찼다. 드센 일격에 박준구가 크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기절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퍽! 퍼억! 김신우는 벌겋게 물든 눈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의자 다리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머리 위로 홱, 치켜드는 순간 누군가 그의 발목을 턱 붙들었다.
“그만. 그만 해요….”
잠긴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의자를 머리 위로 든 김신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공지한이었다. 그는 땅을 짚고 일어서려 힘을 주고 있었다.
“죽어, 그러다 죽으면, 당신. 윽.”
힘겹게 말을 잇던 지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의 바짓가랑이를 세게 움켜쥐며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김신우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아, 하…. 그는 들고 있던 의자를 옆으로 쾅 집어 던졌다. 일그러진 지한의 얼굴을 보는 그의 표정 또한 엉망으로 구겨졌다.
털썩 무릎을 꿇은 뒤 지한의 어깨와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단번에 들어 올렸다. 축 늘어진 지한이 찌푸린 눈을 가늘게 떴다. 묵직한 고통과 함께 시야가 어지러이 흐려지고 있었다.
김신우는 거칠게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며 무작정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목적지도 없이 젖은 바닥을 콱콱 짓이기며 나아가다, 이내 정신이 나간 듯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시커먼 하늘에선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으….”
돌연 작게 들려오는 신음에 그가 우뚝 멈춰 섰다. 헉, 허억. 숨을 몰아쉬며 품 안에서 눈을 감은 지한을 내려다본다. 김신우는 못 볼 걸 본 듯한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돌연 누가 뒤통수를 후려친 듯 정신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그는 바들거리는 다리를 굽히며 천천히 바닥에 꿇어앉았다. 지한의 뒷목을 받치고 있던 손바닥에 뜨겁고 진득한 피가 묻어 나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벌건 공포가 번져간다.
“신고, 신고를…. 전화, 전화.”
중얼거리는 얼굴이 점점 더 파랗게 질려갔다. 조급한 손길로 더듬더듬 지한의 옷을 뒤적이자, 주머니 속에서 그의 핸드폰이 잡혔다. 피에 젖은 축축한 손끝이 화면 위에서 몇 번이고 미끄러졌다.
“…신고, 했어요…. 곧 올 거야.”
갈라진 목소리에 김신우가 등을 움칠 떨었다. 느리게 시선을 내리자 잔뜩 찌푸린 지한의 얼굴이 보인다. 찬찬히 눈을 깜빡인 지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냥 좀.”
말을 멈춘 그가 고통을 참는 듯 턱을 꽉 물었다. 그리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김신우 또한 굳어 버린 듯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한숨처럼 숨을 내쉰 지한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김신우의 입매가 아래로 꿈틀거렸다. 따라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그 말을 끝으로 지한은 마치 잠이 든 듯 고요해졌다. 입술을 꽉 다문 채 그를 응시하는 김신우의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그는 돌연 주체 못 할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등을 뻣뻣하게 굳힌 채 짙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자, 단단한 가슴께가 크게 부풀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마치 산소가 부족한 사람처럼 거친 숨을 삼키고 뱉었다. 시선은 지한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아….”
그는 끓는듯한 신음과 함께 괴로워했다. 벌겋게 물든 눈가에서 끝내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진다. 이윽고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
왱왱. 구급차 안에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돌아가는 기계음만 섞여들었다. 응급대원들이 들것에 누운 지한의 위에서 부산스레 조치를 취하는 동안, 김신우는 한순간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런저런 질문들에도 아무것도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었다. 귀고 눈이고 입이고 온통 먹먹했다. 머릿속이 잔뜩 뭉그러진 것 같았다.
그는 느리게 손을 뻗었다. 깊게 잠든 듯 보이는 지한의 뺨을 살짝 쓸었다. 하얗게 굳은 모습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새파랗게 목을 죄어 오는 고통은 겪어 본 적 있는 공포였다. 끝도 없는 심해로 서서히 가라앉는 듯한 막연한 두려움이 가슴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도착한 응급실은 숫제 전쟁터였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손에 지한을 보낸 김신우는, 좀비처럼 걸어가 의자에 풀썩 앉았다. 잔뜩 그을려 엉망인 옷과 여기저기 상처 난 손바닥 위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잔뜩 말라붙어 있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그가 손바닥으로 느리게 눈가를 쓸었다. 그제야 입술 사이로 괴로운 숨이 터져 나왔다. 뾰족한 것이 가슴을 들쑤시는 듯한 통각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비틀린다. 턱 끝까지 미끄러지듯 내려간 손이 문득 목에 매여 있는 손수건에 툭 걸렸다. 김신우는 그것을 스르륵 끌어내렸다. 지한이 매어 주었던 네이비색 손수건이었다.
‘괜찮아요?!’
‘하, 좀 불편해도, 숨, 최대한 작게 쉬고. 잠깐 있어요.’
그제야 급하게 뛰어와 제 안위를 살피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작 자기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시커먼 연기를 전부 다 들이마시면서,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빌어먹을. 미련하게, 씹, 미치도록 미련한….
“하….”
손수건을 움켜쥔 김신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따라 그의 눈썹도 일그러진다. 벌건 눈에 힘을 준 그는 손수건을 쥔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매캐한 흔적이 코끝으로 흘러들어왔다.
수술실 앞 온 에어의 불은 여전히 빨갛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