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4)

8.

아침 햇살이 창가로 스몄다. 눈가로 스며드는 빛줄기에 김신우가 눈썹을 찡그렸다. 부스럭. 몸을 뒤척이는데 묵직하고 이질적인 느낌이 찾아왔다.

그는 날카롭게 눈을 떴다. 종전까지 자다가 일어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또렷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제 눈앞에서 잠들어 있는 공지한의 얼굴을.

김신우의 굳은 시선이 찬찬히 내려갔다. 왜 제 침대를 두고 공지한의 침대에서 잠든 걸까. 밤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던 걸까. 그러고 보니 어젯밤은 약도 먹지 않았는데 이상할 만큼 잠이 쏟아졌다.

조심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저지른 병실 이동은 충동적이었다. 그가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잦아드는 초조와 불안을 인지하기도 전에 벌인 일이다.

뒤는 생각지 않았다. 성진대교 위에서 보였던 모습을 떠올리면 제게 해를 가할 놈은 아니었다. 그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확실히 알면 알수록 의외로운 놈이었다.

생각에 잠긴 김신우는 고요하게 잠든 공지한의 얼굴을 가만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단단해 보이는 뺨은 백지장처럼 희었다. 매끄러운 이마를 따라 이어진 콧날은 깎은 듯 뻗어 있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냉랭한 눈매, 그리고 짙은 눈썹은 굳게 닫혀 있을 때도 차가운 인상을 준다. 굳게 다물린 가지런한 입술 또한 무심한 느낌을 주는 데에 한몫했다.

사람을 홀리는 흡혈귀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김신우는 살면서 그처럼 생김새와 성격이 일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만큼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목구비를 뜯어보듯 주시하던 김신우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제야 저를 짓누르는 무게가 느껴진 탓이다.

허리 위로 공지한의 깁스한 팔이 감싸듯 올라와 있었다. 침대 옆으론 풀어 놓은 지지대가 보였다.

김신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우선은 제일 먼저 찾아왔어야 할 분노와 불쾌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 판단을 위한 사고 회로는 빠르게 돌아갔다.

밤사이에 그놈이 나오기라도 한 걸까. 무슨 짓을 했기에 둘이 같이 잠든 거지. 공지한이 무슨 눈치라도 챘을까.

지금까지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외부에 제 병을 알린 사람은 또한 한정원 하나뿐이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애초에 누군가와 함께 잠든 적이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놈이 말이라도 나눴을 걸 생각하니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게다가, 애새끼처럼 끌어안고 자기까지.

시발….

당장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 지랄을 해야 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도 네가 알아서 떨어져야 하지 않느냐며 소리를 치고, 침대를 옆 병실로 도로 가져다 놔야 했다. 그러나 김신우는 인상만 와락 구겼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우선은 조금 진정이 필요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 공지한은 제 목숨을 구하느라 다친 사람이었다. 그날 그가 없었다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에는 그다지 미련이 없긴 했으나 그런 식으로 남의 차에 처박혀서 구걸하다 볼품없이 죽고 싶진 않았다. 죽더라도 생과 사의 끝은 스스로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김신우는 눈가를 구기며 공지한을 주시했다. 앞으로는 어떤 태세를 취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심경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그는 경호 인력으로서 완벽한 고급 인력이다. 남을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성품까지도 탁월했다.

절벽 끝에 내몰린 순간에도 흔들림 없던 눈동자와, 그런 그를 보며 지독하게 울렁거렸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괜찮다며 위로하던 단단하고 낮은 목소리도 귓가에 울렸다. 순간 목구멍이 조이는 듯한 불쾌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김신우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죽은 듯 미동 없이 자는 공지한의 옅은 숨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잠깐 사이에도 오락가락하는 기분이 미묘했다.

환한 햇살을 받은 다갈색 홍채가 지한의 자는 얼굴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누군가의 자는 모습을 이렇게 지켜본 적이 있었던가, 기실 기억도 나지 않았다. 생각하는 순간, 일순 지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으음….” 하고 낮은 신음이 흘러나오자, 김신우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가볍게 눈을 감았다.

부스스 눈을 뜬 지한이 밝은 햇살에 코끝을 찡그렸다. 반쯤 뜨인 눈으로 주변을 훑자 품 안에서 잠든 김신우가 보였다. 그는 또 촘촘한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깊게 잠든 듯 보였다.

잠든 사이 그의 몸 위에 놓여 있던 팔을 조심스레 물렸다. 인상을 구기며 그가 깨지 않도록 정면을 보고 느리게 누웠다. 하도 안아 달라고 보채는 탓에 모로 누워 잠들었더니 온몸이 뻑적지근했다.

느린 숨을 내쉬며 생각을 고르다 보니, 어젯밤에 벌어진 일들이 막 터진 댐처럼 마구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한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갔다.

지난밤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서도 그와 꽤 오래 키스를 나눴다. 따먹겠다느니, 뭘 넣고 싶다느니 적나라한 말들을 지껄이던 걸 차치하고서라도, 왜 그와 그렇게 오랜 시간 진득한 키스를 나눴는지 저조차도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인 한정원을 좋아했지만 그를 포함해 남자를 만나 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그 전엔 여자만 만나 왔으니 한정원 외의 동성을 좋아한 적도 없었다.

한정원을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한 이후, 괜한 죄책감에 성적 욕구와는 멀리한 채 살아왔다. 가끔 일 때에는 혼자 처리하거나, 운동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어젯밤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정상적이었다. 정말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김신우도, 그리고 자신도.

지한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짓눌렀다. 한참을 물고 빨리는 바람에 부어오른 입술이 따끔거렸다. 술을 마신 후 다음 날 제 주사를 떠올린 기분이었다. 수치스럽고 민망했다. 어쩌자고 그랬는지 짙은 후회까지 밀려왔다.

희멀건 달빛이 쏟아지던 새카만 병실 침대 안, 습한 공기가 떠올랐다. 매혹적으로 속삭이던 낮은 목소리와 질척거리는 손놀림 또한 외설스러웠다.

또다시 키스를 나누며 자연스레 발기하던 아래가 떠오른다. 질척하게 입술을 빨아대며 속삭이는 말에, 그 분위기에 홀려 한 번 더 빼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짐승이 따로 없었다. 끝나고는 씻겨 주겠다고 우겨대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탓에 함께 샤워도 했으니, 완전한 케이오패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질 수밖에 없는 승부였다. 그런 아름다운 얼굴로 죽자고 덤비는 유혹에 누구도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속내에는 꼬리 아홉 달린 불여우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아….”

지한은 낮게 침음 했다. 합리화해 보려 이런저런 이유를 애써 가져다 붙였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김신우였다. 제게 약점을 잡고 강압적인 행동을 취하던 김신우, 맥락 없는 말로 늘 사람을 모욕하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그런 짓을 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기에. 아니, 다른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분명 어젯밤 헌신적인 자세로 제게 봉사하던 남자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사랑을 속삭이고, 말 한마디에 눈물을 뚝뚝 떨구곤 하는 마음 약한 ‘김신우’는 또 다른 사람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김신우가 김신우가 아니게 된 것인가? 그 김신우가 아니기에 ‘김신우’와 그래도 되는 것일까?

끝없는 고민 끝에 지한은 아무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순하게 잠들어 있는 김신우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고운 얼굴은 입술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열렬한 키스에 끝내 자신도 응했었던 입술이다. 작은 숨소리만 내쉬며 잠든 얼굴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생각을 마친 순간 지한은 와락 미간을 좁혔다.

“진짜 미치겠네….”

한숨을 푹 내쉬며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앞이 캄캄했다.

어젯밤은 워낙 피곤했던 데다 열기까지 잔뜩 빼고 나니 그냥 늘어져 버렸다. 그를 먼저 재우고 옮길 새도 없이 자신도 함께 잠들어 버린 게 문제였다. 그래도 그렇지, 김신우를 끌어안고 밤새 푹 잠들었다니 그로서는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우선은 그를 다른 침대로 옮겨 놔야 했다. 하나 날이 밝은 탓에 도중에 깰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한은 그를 옮기다 잠에서 깨어 마주치는 아찔한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혹여 눈을 뜬다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느 질문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일어났어요?”

덜컥 놀란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귀신이라도 본 듯 느리게 시선을 내리자, 언제 깼는지 모를 김신우가 지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에서 깬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을 훑었다.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곧 또렷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한에게 말을 건넸다.

“이해 좀 해 줘요, 내가 사람 온기를 좋아해서.”

“…….”

“잘 때 옆에 사람이 있으면 종종 끌어안고 자더라고.”

예상을 빗겨 간 반응에,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멈춰 버렸다.

“팔은 괜찮아요?”

마른침을 삼킨 지한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지한을 응시하던 김신우가 천천히 침대를 짚고 일어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병원복의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얼떨떨하게 자리에 남은 지한은 멀거니 그가 사라진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

시간 맞춰 아침이 들어왔다. 지한은 침대 위에 앉아 서투른 수저질을 했다. 오른팔을 깁스한 탓에 왼손으로 먹기가 영 불편했다.

차라리 혼자 있었으면 느리게라도 어떻게든 해결했을 텐데. 대충 깨작대다 상을 물린 김신우가 옆에서 지켜보는 듯해 신경이 쓰였다.

“도와줄까요?”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밥 먹는 거, 도와주냐고요.”

“…아뇨. 괜찮습니다.”

답하자 김신우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식판에 시선을 다시 두고 수저질하던 지한이 문득 눈을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그가 맞은편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손도 대지 않은 지한의 젓가락을 들고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밥, 퍼 봐요.”

“…….”

“밥도 떠 줘요?”

물어오는 말에 진심이 섞여 있었다. 상황 파악을 마친 지한이 작게 기침을 했다. 남자의 고집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빠르게 고개를 젓고는 수저로 밥을 푹 펐다.

주춤거리며 눈을 흘긋 들자, 그가 정갈한 젓가락질로 고기반찬을 집어 올려 주었다. 먹으라고 눈짓하는 그를 보며 지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대로 입 안에 넣고는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신우가 정수기에서 물을 떠서는 지한의 앞에 놓아주었다. 또 반찬을 집어 든 채 얌전히 기다린다. 마치 식사를 도와주는 안드로이드 같았다.

지한은 이 순간이 어색하다 못해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밤의 김신우가 아니라 낮의 김신우였다.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맛없어요?”

자갈을 씹는 표정으로 밥을 먹는 지한을 보며 김신우가 물었다.

“맛없으면 다른 걸 사다 줄까요?”

메뉴는 최상이었다. 질 좋은 고기반찬과 적당히 양념이 잘 버무려진 맛있는 밑반찬들이 나왔으며 후식까지 꼬박 함께였다. 식당에서 사 먹는 1인용 한정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족했다. 하나 모래를 씹어 넘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전부 안 하던 짓을 하는 김신우 탓이었다.

“아뇨. 맛있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흰 쌀밥을 푹 퍼냈다. 금세 수저 위로 올라오는 반찬을 보며, 지한은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른 식사를 끝마쳤다.

식사 후 산책하러 나간다는 지한을 따라 김신우가 겉옷을 챙기고 마스크를 썼다. 어째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 어젯밤과 비슷한 기시감이 느껴졌으나, 지한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도 병실 안에만 앉아 있으려니 답답할 것이다. 혼자 나가기에는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으니 두려울 만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병원은 유난히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었다. 별 대화가 오가지 않음에도 둘은 제법 오래 걸었다. 한정원과 밤에 걸었을 땐 보지 못한 자잘한 운동 기구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조금 쉬었다가 걸을까요?”

김신우가 먼저 말을 건네자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는 산책로 한 중앙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지나다니기는 했으나 누군가 알은체를 해 오지는 않았다.

정적을 지키며 허공을 응시하는데, 어디선가 도르륵 굴러온 공이 지한의 발끝에 톡 채였다.

“공 주세요!”

앞에 웬 꼬마 아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통통하고 하얀 볼살이 돋보이는 귀여운 남자아이였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입매를 끌어 올리며 그것을 슬며시 발로 차 주었다. 아이는 딱 적당한 거리로 제 앞으로 튕겨온 공을 신나게 주웠다.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던 김신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사 봤어요?”

“기사요?”

지한이 또다시 데구루루 굴러온 공을 주워 아이에게 던져 주며 물었다. 김신우는 턱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재미가 들린 건지 아이는 또다시 이쪽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사고 기사. 공지한 씨 엄청 유명해졌던데. 지금 나보다 더 떴어요.”

“…그렇습니까.”

지한은 아이가 던지는 공의 방향을 가늠하여 손바닥을 벌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얼굴이 팔리는 것은 지난번 일로도 충분했건만 설상가상이었다.

“물에 빠졌을 때 영상도 풀렸고. 대표님도 잘됐다고 그냥 둔대요.”

잠시 말을 멈춘 김신우가 또다시 좆같이 굴러오는 공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요즘 핸드폰 카메라 성능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네.”

“아….”

탑배우인 김신우의 사고니 그와 얽혀 자신까지 조명이 된 것은 알고 있었으나, 뉴스 기사는 따로 챙겨 보지 않았다. 제 사진과 소식이 들어간 것들을 보는 건 굉장히 민망한 일이었다.

“퇴원하셔도, 당분간은 좀 조심하세요.”

지한은 방방 뛰는 아이를 향해 공을 다시 던져 주며 나직이 말했다.

“같이 조심해야죠. 이제 공지한 씨가 내 옆에서 지켜 줘야 하는데.”

“…….”

“대표님한테 집중 경호 기간 늘려 달라고 했어요. 혹시 싫은 거 아니죠?”

김신우가 담담히 고개를 돌렸다. 아이를 바라보는 지한의 날카로운 옆 모습을 응시했다.

“하긴 어디서 돈을 그렇게 받겠어. 안녕?”

말하며 어느 틈에 앞으로 다가온 아이를 보고 웃는다.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방싯방싯 웃으며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디 아픈 것 같지 않은 거로 보아, 아마 병문안을 온 가족의 아이인 듯했다.

제 의사도 없이 벌어진 일에, 지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신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새하얀 입김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이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살짝 미간을 모은 채 무어라 반박을 하려 했던 지한은, 마치 주변에 조명을 켠 듯 휘어지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아이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은 마치 공익 광고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지한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듯했다. 의외의 모습에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자신 또한 범인을 잡지 못하고 경호를 끝내기에는 찝찝한 면이 있다. 같이 사는 것도 불편하긴 했으나 범인만 빨리 잡는다면 끝날 일이다. 아마 꼬리가 길어진 이번 조사에서는 놈이 잡힐 확률이 높으니, 당분간 어떻게서든 그를 더 지켜보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지한이 잠시 김신우의 평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미소 띤 김신우가 지한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그리고 온 힘을 주어 공을 후려 찼다.

가벼운 공은 금세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갔다. 놀란 눈을 휘둥그레 치뜬 아이는 울먹이며 공을 따라 뛰었다. 당연하게도 곧 조그맣게 사라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이슈 HOT라인] 배우 김신우, 성진대교 위 참혹한 테러… 부서진 가드레일, 조악한 도로 안전에 국민 청원까지….

지난 28일 서울 성진대교 위에서 주행 중이던 배우 김신우의 페라리가 가드레일을 뚫고 강으로 추락했다.

서울 강남 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후 15시 30분쯤 성진대교 북단방향 3차로에서 주행 중이던 승용차를 뒤따라오던 SUV가 고의로 돌진하여 뒤 범퍼에 충돌했다. 당시 교량 공사를 위해 펜스가 일부 제거된 지점에서 난간을 들이박은 승용차는 곧 강으로 추락했다.

소방 당국은 사고 직후 강에 빠져 있던 운전자 남성 공 씨(27)와 배우 김신우 씨를 구조해 인근 병원으로 후송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운전자는 배우 김신우의 경호 수행원으로 밝혀졌으며, 사고 차량의 오픈 에어링 덕에 수월하게 강에서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정확한 사고 원인 등은 CCTV 영상 등을 파악해 수사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배우 김신우 대교 추락 사고 차량, 도난 차량으로 밝혀져….

└잇따른 연예인 스토킹 테러, 이대로 안전한가?

└배우 김신우, 드라마 <파고> 하차 논란, 정진욱 감독 曰 “말도 안 되는 일…. 김신우 배우와는 종영까지 함께.”

[댓글1430개]

└블박 영상 보니까 살벌하더라...요즘 싸이코들이 왜이렇게 많은지;; 애 키우기 정말 겁나는 세상.

└음주운전 확실하다.

└범죄자도 범죄자고 도대체 도로를 왜 저따위로 만드는 거? 세금 다 어따쓰냐

└근데 찍은사람 폰기종 뭘까 무슨 콧구멍까지 보이던데

└└갤갤22 아닐까요 밤에 달까지 찍힘..

└김신우 경호원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억아님? 구조 영상 보니까 수준급이심;;

└└ㅇㅇ최소 라이프가드 자격증 있을듯ㅋㅋ애초에 김신우 안티 스토커 때문에 난린데 아무나 쓸것같지도 않고

└지난번 떴을 때 ㅈㄴ잘생겼길래 어디 망생이 마케팅인줄 알았는데...영상보고 입틀막..보디가드 확실하다....

└9공수특전여단 귀성부대 제대 했습니다..당시 군 복무가 생각보다 너무 괴로워서 우울증까지 왔었는데 저분께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얼굴도 잘생기시고 인품도 완벽하신 분..ㅠㅠ억지갈굼 없이 잘못했을 땐 혼내고 흔들릴 때 잡아주던 분!! 소심한 성격에 감사 표현도 못 했었는데..김신우 배우 구조 영상에서 발견하고 깜짝 놀라고 반가워서 소리까지 질렀습니다..공 병장님! 저 김정환입니다! 혹시 이 댓글 보시면 꼭 연락 한번 주세요!! 보고 싶습니다!! 응원합니다!! 단결!!

└└그 정도면 팬카 가보세요 이 댓글을 보겠나

└└└아 팬카페도 있나요??? 정말 감사합니다. 바로 가보겠습니다.

└사랑해요 공지한 지켜줘요 김신우

└도난차량이라니..이거 범인 못잡으면 ㅂㅅ아님?

└침착한 구조 진짜 개멋있더라ㅋ나남자인데 내가 김신우였으면 반했음

└└2222222

└└└33333333

“지랄들 하네.”

인상을 찌푸린 김신우가 혀를 찼다. 추천 수가 빠르게 올라가는 김정환의 댓글을 누르고 ‘음란, 청소년 유해’로 신고를 마친 그는 침대 위로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박 대표는 그냥 두자고 했으나, 인권 운운하며 난리를 피운 덕에 공식적인 기사의 신상은 전부 내린 차였다. 그러나 각종 개인 에스엔에스를 타고 번지는 것들까진 어쩔 수가 없었다. 검색만 해도 수두룩하게 뜨는 공지한의 얼굴에 짜증이 났다.

자리에 털썩 누워 욕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에 집중했다. 벌써 입원을 한 지도 닷새째였다. 병원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아주 오래간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차라리 어디 한 곳 부러졌으면 좋았을 텐데.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가 한창 상영 중이라 더는 댈 핑곗거리도 없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은 공지한의 동태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김신우는 그의 옆에서 깨어난 공지한이 내쉬던 깊은 한숨과 중얼거림을 기억했다. 모르긴 몰라도 무슨 일이 있던 것은 분명한 듯했다. 하나 병원엔 그 좆같은 일기장도 없으니 유추해 볼 만한 증거도 없었다.

이를 어떡한다. 김신우는 가만히 천장을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기분이 미치도록 더러웠으나 분풀이할 곳이 없었다. 속으로 삭여야 했다.

지한의 혼잣말을 들은 직후, 김신우는 1차원적으로 잠을 자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잠들지 않으면 그 새끼들이 저 몰래 만날 일도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평소에도 며칠씩 밤을 새우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 얼마 남지 않은 퇴원까지 안 자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나 변수가 생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늦은 시각, 불을 끄고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옆 침대에서 일정하게 새어 나오는 공지한의 숨소리를 듣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른 아침 눈을 뜬 김신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잠 좀 자보려 발광을 떨어댈 땐 눈꺼풀 한 번 감기지 않더니, 일부러 버티려고 하니 잠들어 버렸다. 심지어 약도 먹지 않은 차였다.

씨발. 화가 났지만 애써 참았다. 아침에 제 침대에서 버젓이 일어났고, 일어나자마자 공지한의 반응을 살폈으나 별다른 내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옆에서 유독 그 날만 유난한 일이 벌어진 것은 맞는 듯했다.

하여 김신우의 계획은 다음 날도 이어졌다. 그는 기필코 이번엔 잠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댄 채 책을 들었다. 공지한이 “안 주무십니까.”라고 물어 왔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리고 책장을 몇 장 넘기지도 않았을 때,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끄고 누운 지 1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잠들어 있었다. 예민한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단순한 면이 있었다.

헛웃음을 터뜨린 김신우는 가만히 공지한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잠든 모습은 희고 날카로웠다. 감상은 그게 다였다. 그런데 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며 묘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란 대로 제 좆을 빨 때부터 확실히 웃긴 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얽히게 될 줄이야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토록 뭔가를 신경 써 본 것이 얼마 만인지도 모른다.

김신우는 책장을 덮고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모로 누웠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그를 노려보듯 주시하며 묘한 감정의 출처를 더듬기 시작했다.

뭔가 심장을 긁어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목구멍을 살살 조이는 듯한 간지러움, 명쾌하지 못하고 답답한 기분이었다. 분노와 짜증이라기엔 괴리가 있었다. 어찌 되었건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던 불쾌한 종류인 것은 분명했다.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거슬리게 굴면 잘라 버리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다, 김신우는 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김신우는 눈을 뜨자마자 짙은 헛숨을 뱉었다.

“하, 씨이발….”

옆에서 씻을 채비를 하던 지한은 눈뜨자마자 느닷없이 욕을 지껄이는 김신우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일도 못 하고 병원에만 갇혀 있다 보니 점점 인성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듯했다.

“왜 그러세요?”

의아하게 묻자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를 잠시 지켜보던 지한은 그가 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대로 등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혼자 남은 김신우는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지한이 욕실로 사라진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온갖 쌍욕을 지껄이며 침대 옆 협탁을 걷어찼다. 가지런히 놓여 있던 꽃병이 툭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긴 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분명 평소보다 충분히 수면을 취하고 있는데도 자꾸만 기절하듯 잠이 들어 버린다. 약이 아닌 체력의 문제다. 그렇다면 자신이 잠들었다고 생각한 사이에 일어나 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또한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김신우는 핸드폰을 집어 들곤 녹음 어플을 다운로드 했다.

오늘이 병원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궁금한 것은 확실히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일어나자마자 느닷없이 욕을 지껄이는 김신우를 뒤로한 채 욕실에 들어간 지한은 거울 앞에 서서 세수를 했다. 원체 체력이 좋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피곤해서 미칠 것 같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단 하루도 밤의 김신우가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는 낮의 김신우가 잠들자마자 귀신같이 튀어나와 지한에게 들러붙었다. 집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으니 아마도 같은 방을 쓰는 것이 문제인 듯했다.

지한은 우선 퇴원한 이후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없었을뿐더러, 그를 멈추지 않고서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것이 분명했다. 입원한 이후론 한낮에도 몽롱해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요즘은 낮의 김신우 또한 이상했다. 아무래도 자신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이라도 한 건지, 사고 이후 눈에 띌 정도로 친절하게 굴고 있었다. 기실 병원에서 깨어 있을 때의 그는 밤도, 낮도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모든 것이 이질적이고 이상했다.

밤에 나타난 김신우는 점점 증상이 심각해졌다.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빠짐없이 사랑을 고백했다. 담담한 반응의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며 내뱉는 울음 섞인 고백은, 아무 감정 없던 지한의 가슴도 지끈거리게 했다. 그만큼 절절했다. 왜 그렇게 제게 절절하게 구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여 그런 감정에 빠질 때마다 지한은 어쩔 수 없이 그의 키스를 받아 주곤 했다. 그의 마음을 유약하게 만드는 것은 혼몽하게 내려앉은 잠기운과 고요한 사위로 어렴풋한 달빛이 스민 분위기도 한몫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거의 매번이라 문제였다. 그는 마치 지한의 약한 부분을 손바닥에 쥐고 구는 듯 굴었다.

처음 서투른 듯했던 김신우의 키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좋아졌다. 좋아진다는 말은 무언가 이상하다. 한마디로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다소 투박했던 혀 놀림은 차츰 농염하고 야해졌다. 느리게 혀를 밀어 넣고 빼는 행동은 마치 무언의 행위를 연상시켰다. 부드럽게 목덜미를 쓸어 주는 손길과 따뜻한 입술을 머금고 있노라면 지한 또한 어슴푸레한 감정에 잠겼다.

이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지한은 매번 그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저지른 일에 더는 이유를 찾지 않았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할 뿐이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형….”

병원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혼몽한 정신에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그가 늘 자신을 조심스레 깨울 때마다 진득한 정신이 육체를 짓눌러왔다. 그러나 차마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너무 무서워요, 무서운 꿈 꿨어요.”

두려움에 떨며 울먹이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 지한을 깨울 때 꼭 이런 식으로 나타나곤 했다. 도저히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냥꾼에게서 도망치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자신을 채근하고는 했다. 그걸 알면서도 지한은 그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형, 형….”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다. 귀 끝에 간지럽게 닿는 숨결에 지한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부스스 눈을 떴다. 너무도 당연하게도 제품에 찰싹 안겨 있는 김신우의 등을 느리게 쓸어 주며 무거운 눈을 깜빡였다. 그와 함께 입원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김신우 씨. 잠을, 못 자서 피곤해요.”

“무서워요. 더 안아주세요.”

잠에서 덜 깬 지한이 천천히 단어를 뱉는 와중에도, 김신우는 그의 뺨과 턱 끝에 쪽,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결국 눈을 뜬 지한을 보며, 언제 울먹였냐는 듯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많이 졸려요?”

“…네.”

“그럼 자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오늘따라 더 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지한은 잠에 푹 젖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어느새 위에 올라탄 그가 지한의 손목을 쥐고 위로 올렸다. 진득하게 맞물리는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스며들었다. 그는 문득 그것이 달콤하다고 느꼈다.

“하아….”

맞물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흘렀다. 지한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자는 사람 위에 올라타선 질척한 키스를 퍼부어대는데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몽롱한 정신이었음에도 황당한 마음에 작게 헛웃음이 터졌다. 기색을 눈치챈 김신우가 입술을 떼어내고 작은 틈 사이로 속삭였다.

“왜 웃어요?”

말하며 혀로 입술 위를 할짝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러는데, 어떻게 자요.”

지한은 젖은 입술을 당겨 물었다. 수면 부족으로 머릿속이 웅웅대는 것 같았다.

“왜 못 자요. 형, 흥분돼요?”

당돌한 말에 지한은 헛숨을 흘렸다. 살며시 눈을 뜨자 반짝이는 눈동자로 저를 내려다보는 고운 얼굴이 보인다. 평소의 김신우와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이제 지한은 둘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낮은 숨을 뱉어낸 그가 제 아랫배를 쓰다듬던 김신우의 손목을 잡아떼었다.

“그렇게 만져대는데 흥분 안 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지지대를 푼 양손으로 김신우의 허리를 붙들었다.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하자 색이 밝은 예쁜 눈동자가 보였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자코 제 말만 기다리고 있는 그는 마치 말 잘 듣는 잘생긴 대형견 같았다. 이를테면 골든 리트리버 같은 종이 어울렸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당사자가 알면 큰일 날 생각이었다.

“…안아 줄 테니까, 이리 와요.”

잠투정하는 애를 재우는 심정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반항하려나 싶었던 생각과는 다르게 김신우는 고분고분 지한의 품에 딱 붙어 누웠다. 모로 누운 지한은 그의 등을 토닥이며 눈을 감았다. 벌써 똑같은 상황을 몇 번째 반복하는지 기억도 안 났다.

“형.”

“…네.”

“지난번에 한 거, 너무 좋았어요. 또 하고 싶어요.”

품에 파고든 그가 중얼거렸다. 병원에서 처음 그가 나타난 날 이후 입맞춤 외에 허락하지 않았으니, 아마 제 위에서 함께 자위했던 일을 말하는 듯했다.

“병원에서 그러면 안 돼요.”

그날은 숫제 무엇에게 홀리기라도 듯 벌린 일이었다. 아무리 일 인실에다 늦은 새벽이라지만 제정신이라면 그런 일을 벌여선 안 됐다. 혹여 누가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아무도 없잖아요.”

망설임 없는 답이 단호하게 돌아왔다.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사람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럼 욕실에서는요?”

“…….”

“퇴원하고 집에선, 또 해도 돼요?”

순진무구하게 물어오는 말에 지한은 하던 말을 멈췄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김신우를 바라보았다. 말간 얼굴 위로 잠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늘도 잠을 자기는 그른 듯했다.

지한은 거의 반 체념한 심정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김신우 씨는 제가 왜… 좋아요.”

이럴 때 주제를 돌리면 그는 그대로 따라오곤 했다. 잦은 만남으로 또 다른 그의 성격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된 상태였다. 밤의 김신우는 단순한 편이었다.

“좋은 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

“형은 제가 왜 좋은데요?”

예기치 못하게 돌아온 질문에 지한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김신우는 자신과 연인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됐는데 흐린 정신에 쓸데없는 말을 해 버렸다.

“제가 왜 좋으냐니까요.”

채근하는 말에 지한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낯빛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답이 늦으면 저 처연한 눈동자에 또 투명한 눈물이 한가득 고일 것이다.

지한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를 좋아한다면, 왜 좋을까. 답은 생각보다 쉬웠다. 처음 그를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느낀 감상은 대부분 하나였다.

“…귀여워서?”

툭 내뱉자, 잠시 정적을 지키던 김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저 귀여워요?”

그가 흥미롭게 눈을 반짝였다.

“어디가, 얼마만큼? 어떻게, 왜 귀여운데요?”

한껏 휘어지는 눈웃음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마치 자신이 예쁜 걸 알면서도 실컷 예쁜 척을 하는 느낌이었다.

지한은 건드려서는 안 될 벌집을 건드린 기분이었다. 육하원칙을 요구하는 답은 군 제대 이후로 처음이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진 지한을 보며 김신우가 짧게 웃었다.

“형이 더 귀여워요.”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투는 이제 친근을 넘어 익숙했다. 살짝 웃음기 어린 눈매는 곱게 휘어져 있었다.

“나….”

돌연 그는 한숨처럼 말꼬리를 흐리며, 지한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조근거리는 뺨은 살짝 상기되어 소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형이 첫사랑이에요.”

“…….”

“좋아해요.”

지한은 물끄러미 그런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저도 모르게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였다. 하나같이 여러 번 들었던 말임에도 들을수록 기분이 묘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밤마다 도를 넘은 수준으로 가깝게 지내다 보니 점점 그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한 번씩 낮의 김신우의 차가운 시선을 볼 때면 낯선 기분이 들 정도였다.

“형은…. 나 안 버릴 거죠.”

제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한은 그와 눈을 마주했다. 돌연 진지해진 눈빛이 진득하게 닿아 온다. 말간 눈동자가 애달프게 일렁거렸다. 기분 탓일까, 자꾸만 그의 표정이 슬프게만 보였다.

퇴원 이후 김신우에게 본격적인 치료를 권해 보려 할 계획이었다. 어느 방향으로든 설득이 된다면, 밤에 만나는 김신우는, 눈앞의 이 한 떨기 꽃 같은 남자는 언제건 이슬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하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생각을 꿰뚫고 하는 말처럼 들려왔다.

“떠나면 안 돼요…. 혼자 두지 말아요.”

지한은 숨을 죽였다. 한껏 처연해진 얼굴에 욱신, 가슴이 쑤셨다. 누군가 목구멍을 꽉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대답해 줘요….”

젖은 목소리와 함께 짙은 숨결이 입 안으로 스몄다. 헤아릴 수 없던 감정 또한 함께 지한에게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질척하게 감겨 오는 혀를 느끼며 지한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심장이 어릿했다. 실수다. 실수를 하는 것 같았다. 속 깊은 곳에서부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하아, 이건 안 되는데. 이건…. 이런 기분은.

지한은 그의 등을 감싸 안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아주 조금 내어주는 손길에도 빈틈없이 맞닿아 오는 체온을 느끼며, 뜨겁고 부드럽게 밀려들어 오는 것을 삼켰다. 따라 가슴이 빠듯하게 벅차올랐다.

***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레 들이닥친 한정원 탓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김신우의 퇴원 소식에 병원 주변으로 한가득 몰려든 기자들 탓이다.

김신우는 한정원이 가져온 모자부터 마스크까지 꼼꼼하게 쓰고는 미리 지하에 대놓았던 차로 향했다. 지한 또한 얼굴이 많이 알려진 탓에 함께 마스크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위장을 써도 훤칠한 두 남자가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었다.

먼저 내려온 한정원이 앞서 차로 뛰어갔다. 그리고 김신우와 지한이 자동문을 지나쳐 발을 내딛는 순간, 고요한 사방에 뛰는 발소리와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신우 씨!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지한이 고개를 홱 돌렸다. 두 명의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앞에 다가오기도 전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번쩍거리는 빛에 김신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뛰면서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한정원이 대놓은 차가 바로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동차 충돌 사건의 범인이 스토커라던데, 사실입니까? 경찰 조사에 진전이 있나요?”

그들은 시끄럽게 소리치며 경우 없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처벌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잠시만 답해 주세요, 김신우 씨!”

소란스러움에 김신우가 마스크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씨발, 예의는 밥 말아 처먹었나. 쌍욕을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였다.

“인터뷰는 소속사 통해 요청하세요.”

팔을 뻗은 지한이 김신우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아직 환잡니다. 조심해 주세요.”

그는 지지대를 풀고 깁스를 감은 손으로 기자들을 밀어냈다. 마스크 너머 냉랭하게 쏘아보는 눈빛에 기자들이 멈칫 몸을 물렸다.

때맞춰 한정원의 차가 눈앞에 섰다. 우뚝 멈춰 선 김신우의 어깨를 끌어당긴 지한이 뒷좌석 문을 열고 그를 태웠다. 문을 닫은 뒤 그 또한 바로 보조석에 올라탔다.

얼떨결에 차에 탄 김신우는 신경질적으로 마스크를 벗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정원이 쓸데없이 일찍 들이닥치는 바람에 눈뜨자마자 확인하려던 녹음본을 듣지 못했다. 몇 시간짜리의 녹음본을 전부 확인하려면 따로 시간을 비워야 했다. 초장부터 틀어진 일 처리에 심기가 불편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지한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팔짱을 낀 채 창가를 보고 있던 김신우는 이유 없이 돌아보는 행동에 눈썹을 치켜떴다. 잠시 그를 응시하던 지한이 툭 내뱉었다.

“벨트 하세요.”

말하고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린다.

느닷없는 간섭에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래라저래라 기어오르는 걸 보니 근래 너무 잘해 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없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어… 오늘은 집에서 쉬시고, 내일은 오후에 대표님과 미팅이 있어요. 3시쯤 모시러 올게요.”

정적 사이로 한정원이 룸미러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어쩐지 오늘도 둘의 분위기가 싸해 보였다.

지난번 지한의 반응을 보았을 때, 그는 병실을 함께 쓰는 걸 모르고 있는 듯했다. 점점 굳어지는 지한의 얼굴을 보며 한정원은 우선 자리를 피하는 걸 택했다. 그는 지한이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지한은 눈이 돌아가면 뵈는 게 없어지는 남자였다. 학창 시절 그의 핏자국을 닦아 준 횟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었다. 물론 그 핏자국은 지한의 것이 아닐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아니, 대부분 남의 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신우도 만만찮은 남자였다. 그는 제가 정해 놓은 선을 넘어 심사가 뒤틀리는 순간, 앞뒤 생각 않고 내지르는 배우였다. 욕설은 기본이고 폭행도 종종 일어났다.

때문에 박 대표와 그의 언쟁 사이에서 오들오들 떤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중의 시선을 가장 신경 써야 할 연예인 매니저로서는 가장 두려운 타입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을 마친 한정원은 두 남자가 동시에 화가 났을 경우를 떠올렸다. 상상하자마자 등 뒤로 소름이 죽 끼쳤다. 그런 무서운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됐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찰나, 어느새 도착한 그의 차가 김신우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여전히 침묵만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한정원은 그들을 빠르게 내려 준 후 다시 회사로 향했다.

“고생했어요. 난 오늘 집에 있을 거니까 혹시 볼 일 있으면 다녀와요.”

집 안으로 들어서며, 김신우가 조용히 말했다. 의외의 말에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요즘 한결같이 저를 옆에서 떼어 놓으려 하지 않던 그였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어젯밤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 차에 지한은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뭉근하고 답답했다.

“예. 어디 안 나가실 거죠?”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점퍼의 지퍼를 올리며 묻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체육관이나 들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간 집중 경호 탓에 만나지 못했던 관장님에게 조만간 얼굴을 비추려던 참이었다.

겉옷을 벗던 김신우가 문득 찌푸린 얼굴로 지한을 쳐다보았다.

이제 인기도 얻었겠다, 좋다는 연놈들도 많겠다, 일주일째 병원에 처박혀 아무 짓도 못 했으니 밖에서 섹스나 하다 올 것이 훤했다. 녹음본을 듣는 동안 괜히 신경이 쓰일 것 같아 다녀오라고 말을 했으나, 제 말에 고민도 없이 집을 나서려는 걸 보니 심사가 뒤틀린다. 씨발, 좆같았다.

“몰라요.”

“예?”

“봐서.”

짜증스러운 말투에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몇 초전에 집에 있을 테니 다녀오라던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김신우였다.

뭐 어떻게 하라는 거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김신우가 살짝 웃었다.

“장난도 못 치겠네. 약속 있으면 편하게 다녀와요.”

“…….”

“혹시 나갈 일 있으면 연락할 테니까, 멀리 가지 말고요.”

환한 미소와 함께였다. 물론 가식이었다. 예쁘게 웃는 얼굴에 지한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지. 들어온 그대로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가볍게 바깥 공기 좀 쐬며 땀도 좀 빼면 복잡했던 기분도 한결 나아질 터였다.

혼자 남은 김신우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달칵, 기다란 손가락으로 에어팟의 뚜껑을 열고 양쪽 귀에 꽂는다. 그리고 느슨하게 등을 뒤로 기댔다.

드디어 두 놈의 뒤를 까 볼 때가 왔다. 왜 진작부터 이 방법을 생각지 않았는지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

김신우는 눈을 감았다. 음량은 최대로 키웠다. 핸드폰 화면에서는 제가 어플을 켠 이후부터 녹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제 허벅지 위를 툭, 툭. 일정하게 두드렸다. 이어지는 정적에 옅은 숨을 흘려보냈다.

한동안은 두 사람의 간헐적인 숨소리만 들려왔다. 분명 마음먹고 있었음에도 잠들어 버린 자신의 멍청한 모습을 귀로 들으니 짜증이 났다.

김신우는 재생 속도를 배로 높였다. 가능하다면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기를 바랐다. 눈을 감고, 마음을 비웠다. 아무 일도 없다면, 지난번의 한 침대에서 일어났던 일은 덮어 두고 병원에서처럼 친절하게 대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정확히 빗나갔다.

음성 파일의 시작으로부터 정확히 두 시간 사십 분 지점에서였다. 자그마한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김신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재생 속도를 정상으로 돌려놓고는 다시 되감기를 눌렀다.

‘많이 졸려요?’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게 제 속삭이는 목소리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좆같은 말투는 그간 일기장에서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수치스러움도 잠시, 김신우는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공지한의 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그는 바짝 굳은 채로 숨을 삼켰다. 아주 작은 예민한 소리까지도 전부 다 잡아내겠다는 듯, 모든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그럼 자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쭙, 츠읍. 쯥. 살갗을 빨아대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는 절대 흘러나올 수 없는 소리였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소리이기도 했다. 팔등 위로 소름이 죽 끼쳤다.

불현듯 사고가 정지한 김신우의 머릿속에 온갖 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간간이 들려오는 짙은 숨소리는 분명 하나가 아니었다.

‘그렇게 만져대는데 흥분 안 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더 의심할 필요도 없이, 공지한의 낮은 목소리가 더없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는 제 귓속에서 지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말들을 건네고 있었다. 평소 무뚝뚝한 모습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정한 어투로, 그 새끼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안아 줄 테니까, 이리 와요.’

김신우의 얼굴이 점점 파랗게 굳어 갔다. 마치 부숴 버리기라도 할 듯 핸드폰을 콱 움켜쥔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시큰거리는 눈자위는 힘주어 부릅뜬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할 새도 없이 그저 흘러나오는 미친 소리를 귓속에 주워 담기 바빴다.

‘지난번에 한 거, 너무 좋았어요. 또 하고 싶어요.’

묵직한 쇠방망이로 머리라도 후려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어금니에서 까득, 소리가 날 만큼 이를 꽉 깨물었다. 지난번에 한 것. 지금 상황에 떠올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전신이 경련하듯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형은 제가 왜 좋은데요?’

‘…….’

‘제가 왜 좋으냐니까요.’

좆같은 질문을 지껄이는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나 그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남자, 그 씹새끼는 김신우였다. 당장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귀여워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신우가 테이블을 걷어찼다.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나무 테이블이 뒤로 고꾸라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김신우는 그 자리에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어디가, 얼마만큼? 어떻게, 왜 귀여운데요?’

뒷목이 오싹하게 굳었다. 동시에 터질 듯한 분노가 차오른다. 참을 수 없는 노기와 수치, 모멸과 치욕, 경멸과 증오, 혼란, 모든 혼잡한 감정들이 김신우의 속에서 바글바글 끓어올랐다. 톡 하고 심지를 빼면 그대로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좋아해요.’

‘떠나면 안 돼요…. 혼자 두지 말아요.’

붉으락푸르락 해지던 안색은 끝내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정적을 끝으로 다시 이어지는 질척한 소리에 김신우는 경련하는 눈가를 꽉 감았다. 힘을 준 안면근육이 울긋불긋 도드라졌다.

이 개, 씹, 좆같은….

김신우는 성큼성큼 거실 안을 돌아다니며 발에 채는 것들을 전부 걷어찼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곱게 장식되어 있던 유리 화병과 잔들을 손으로 쓸어 버렸다.

쨍그랑! 쨍! 각종 유리 깨지는 소리가 찢어질 듯 울려 퍼졌다. 그는 손에 잡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던지고 깨부수며 고함을 질렀다. 부릅뜬 눈자위가 벌겋게 물들었다.

헉, 허억. 테이블 위에서 발작하듯 부들거리던 김신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고래고래 악을 쓰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귓속에서는 아직도 녹음 파일이 재생되고 있었다. 작게 터지는 웃음 목소리에 김신우의 관자놀이가 툭툭 불거졌다. 제가 내뱉는 가쁜 숨 사이로 질척한 소리가 다시금 흘러들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공지한의 낮은 숨소리는 그를 미치게 했다.

새카만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숫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쾅! 꽉 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드세게 내리쳤다. 빠각, 깨진 유리 사이로 피가 흘렀다. 그 어떤 것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김신우는 그중 무엇도 삭일 수 없었다.

***

오래간만에 밖을 나선 지한은 그다지 상쾌하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마지막에 제게 말을 건네던 김신우의 태도가 조금 신경 쓰인 탓이다. 혹시 어디 나갈 생각이 있던 건가. 괜히 나간다고 말했나 싶어 마음이 찝찝했다.

정류장에 선 지한이 버스를 기다리며 아직 깁스를 풀지 않은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욱신거리던 고통은 어느 정도 사라졌으나 이래 가지고야 무슨 운동을 하겠나 싶었다. 얼마 전 제 사고 소식에 병문안을 오겠다던 이를 거절했으니 안부 인사라도 해야 했다.

“저어, 그. 김신우 배우, 경호원 맞죠…. 공지한, 오빠.”

조심스레 물어오는 목소리에 지한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어깨에 멘 가방을 꼭 쥔 채 지한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환희에 가득 찬 눈이었다.

“아….”

지한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찡그렸다. 곧바로 아니라고 하기에도, 맞다고 하기에도 곤란했다. 자신의 모습이 매스컴을 탔다고는 했으나, 김신우의 스케줄도 아닌 곳에서 이렇게 바로 저를 아는 사람을 마주칠 줄은 몰랐던 탓이다.

지한이 묵묵히 고민에 빠진 새에 그녀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 진짜 팬인데요.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면 안 될까요? 저 팬 카페도 가입했어요. 와, 여기서 만날 줄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사진 한 번만 찍어 주시면 안 돼요?”

자신이 연예인도 아닌데 퍽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기대에 찬 얼굴로 눈망울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어 카메라를 켰다. 화면 안에 지한과 그녀의 환한 얼굴이 떴다. 애써 입매를 끌어올린 지한이 살짝 미소 지었다. 찰칵, 셔터음과 함께 사진이 찍히자, 금세 저장을 마친 그녀가 곧 감격에 겨운 표정을 했다.

“와, 진짜. 와. 와…. 너무 잘생겼어요.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제가 카페에 팬레터 매일 올리는데 꼭 읽어 주세요. 아이디는, ‘공지한부인’이에요!!!”

“…….”

버럭 소리치는 단어에 지한이 할 말을 잃었다. …카페가, 카페까지 있었던가. 자신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지한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으나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아 진짜…. 진짜거든요. 오빠 꼭 읽어 줘요. 댓글, 댓글도 달아 주세요.”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지한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 시계를 흘긋 보았다. 10시. 지금 학생이 돌아다닐 시간은 아니었다. 입고 있는 교복과 가방을 보아하니 땡땡이를 치려던 듯했다. 자신도 방황할 때에 가끔 했던 행동이었다.

“네, 그럼…. 학교, 가세요. 자주 빠지면 안 좋아요.”

그는 어색한 듯 뒷목을 쓸며 말했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와…. 와. 네. 저 지금 바로 갈게요!!! 진짜! 가서 자랑할 거예요! 댓글 꼭 달아 주세요! 사진 찍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한의 예상대로 샛길로 빠지려던 그녀는 노선을 틀었다. 학교로 향하는 건너편 버스 정류장으로 뛰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지한은 버스에 올라타기 전, 눈앞에서 여전히 방방 뛰며 인사하는 그녀에게 까닥 고갯짓을 했다. 좀 정신 사납긴 했지만 귀여운 아이였다.

게다가… 공지한 부인이라니.

예상치 못한 닉네임에 뒤늦게 웃음이 터졌다.

[ 청 춘 체 육 관 ]

“계세요.”

지한은 장난스럽게 노크하며 문을 열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학창시절 다니던 유도관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물걸레질을 하던 남자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어허? 이게 누구야! 우리 우리, 연예인 공지한 씨잖아?”

반가운 표정과 능청스러운 말투에 지한이 슬쩍 웃어 보였다. 지한과 약 열 살쯤 차이나는 젊은 관장은 쾌활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어릴 적부터 지한이 의지를 많이 해 온 친형 같은 사람이었다.

“바쁘세요?”

지한이 오는 길에 사 온 아이스커피를 건넸다.

“바쁘기는, 쉬는 거 안 보여?”

손에 든 걸레를 흔들어 보인 이호준이 자리에서 영차 일어났다. 받아 든 커피의 빨대를 쭉 빨며 지한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다친 건 좀 괜찮아? 너 이 새끼, 병문안도 못 가게 하고 말이야. 아주 비싸졌어, 우리 공지한이.”

“그래서 퇴원하자마자 왔잖아요. 혼자 있던 게 아니라니까.”

지한이 겸연쩍은 얼굴로 깁스한 팔을 슬슬 흔들었다.

“전화를 주지, 왜 여기까지 행차하시고. 뭐 그 꼴로 대련이라도 하자는 건 아니지?”

“…좀 그렇죠?”

지한이 깁스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몸이 뻣뻣하던 차에 조금 움직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무리일 듯했다.

“와, 이제는 한쪽 팔로도 이 아저씨 정도는 거뜬하다 이건가?”

그가 짓궂게 웃으며 지한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불끈불끈한 단단한 근육이 머리를 두껍게 감쌌다. 영락없이 그에게 잡힌 지한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무슨. 팔다리 다 써도 이기기 힘든데, 장난치지 마세요.”

선수 출신인 데다 꾸준히 고강도의 운동을 해 온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한번 이겨 보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실제로 성공한 적이 없었다. 지한의 말에 쿡쿡 웃어 보인 그가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한가할 때 잘 왔네. 일은 어때? 연락도 잘 안 되고. 많이 바쁘지?”

그를 따라 소파에 앉은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뭐 그래요.”

“그냥 뭐 그래요? 영상 보니까 그냥 그런 수준이 아니던데. 인마. 진짜 놀랐어. 몸 건강할 때 아껴 써. 아작 나는 거 한순간이다.”

“별일 없었으면 됐죠.”

선생님처럼 꾸짖는 말투에 지한이 설핏 웃었다. 이호준은 그가 학생 때 다니던 체육관의 젊은 관장님이었다. 어릴 적에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성인이 되고 20대의 반을 훌쩍 지나가니 이제는 그저 동네 형같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둘은 자리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다 비울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질문은 대부분 이호준이 했고 지한은 답만 하는 식이었으나, 제법 즐거운 수다가 이어졌다. 오래간만에 친한 사람을 만나니 고향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인기도 많아졌겠다, 팬도 생겼겠다. 만나는 사람은 없어?”

느닷없는 질문에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 없어요.”

“얼굴도 잘생긴 놈이 왜 좋은 청춘 혼자 보내고 그래. 어? 어디 가서 간질간질하게 연애도 하고, 뽀뽀도 하고 그래야지 인마.”

그가 양쪽 눈에 번갈아 윙크하며 능청을 떨었다.

뽀뽀. 불현듯 지한의 머릿속에 제게 하염없이 입을 맞추던 김신우가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얘 봐라. 누구 있나 보네.”

심각한 얼굴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는 지한을 보며 이호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긴. 너 부끄러울 때 귀만 빨개지는 거 몰라? 그래서 너 학생 때부터 거짓말하면 다 티 났잖아. 형이 알면서 봐준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자식아.”

인상을 살짝 찡그린 지한이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한번 데리고 와 봐. 형이 어떤 사람인지 봐 줄게. 내가 또 사람 보는 눈 하난 기가 막히잖냐.”

천연덕스레 웃으며 지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그는 머릿속으로 잠시 이호준에게 김신우를 소개해 주는 상상을 하다가 질색하며 지워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일뿐더러, 상상하기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됐어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야. 네 나이 땐 다 즐기고 사는 거야. 넌 젊은 놈이 왜 이렇게 빡빡하게 사냐, 애늙은이처럼. 일 없으면 오늘 소주나 한잔할래?”

“아뇨. 저녁 전에 가 봐야 해요.”

잠깐 시간을 계산해 보던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늦지 않게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버스 타고 긴 거리를 온 탓에 왕복으로 오가는 시간만 해도 제법 걸렸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기에 아직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실컷 수다를 떨던 지한은 이호준과 오래간만에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그는 활달한 성격에 입담도 좋아 늘 같이 있는 사람을 즐겁게 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제 가슴께도 오지 않는 남자아이들이 하나둘 들어와 덤벼들 즈음에 지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슬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집에 뭐 마누라라도 기다려? 뭐 그렇게 서둘러 가.”

“휴가받으면 연락할게요. 그때 한잔해요.”

“나 참, 그래. 멀리 안 나간다!”

조금 아쉬웠으나 등을 돌렸다. 금방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가는 것까지 생각하면 제법 시간이 걸렸다. 어쩐지 퉁명스레 말하던 모습이 또 떠올랐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던 지한은 생각에 잠겼다.

퇴원 이후에 그를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자신이 연인이라 믿는 그의 인격을 언제까지고 받아 줄 수는 없었다. 당분간은 그의 집에서 계속 살아야 했다. 병원에서의 있었던 일들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니, 분명 다시 벌어질 것이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치부라고 생각한다. 병을 들켰을 때 한정원에게 분노했던 이야기만 들어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낮의 김신우는 화를 낼 것이다. 그 분노가 얼마나 클지는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하나 따지고 보면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먼저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고백을 하며 입술부터 들이댄 것은 그쪽이었다. 그저 제 잘못이라면, 밀어내지 못한 것. 그뿐이었다.

물론 그 사실만으로도 김신우에겐 화가 날 일일 테지만, 근래 친절하게 대해 주던 행동들을 떠올려 보면…. 또 아닐 것 같은, 생각도 들고.

‘형은…. 나 안 버릴 거죠.’

문득 제게 매달리던 가련한 눈동자가 떠오른다. 새카매진 시야로 그의 말간 얼굴이 어른거렸다.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나긋한 말투, 다정한 손길까지도 전부 또렷하게.

“하아….”

지한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눌렀다. 또다시 속이 답답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느새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어진 귀가에 지한은 걸음을 재촉했다.

뭐라고 말을 건넬까. 밥은 먹었을까. 그는 입맛도 어찌나 예민한지 대부분 풀 쪼가리나 닭가슴살 같은 걸 자주 먹곤 했다.

후우. 괜스레 심호흡을 내쉬고는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발을 내딛자 현관 센서 등이 깜빡, 점멸했다. 어슴푸레 가라앉은 어둠이 고요한 거실에도 깔려 있었다.

지한은 살짝 눈을 치켜떴다. 자나? 수면 주기가 불규칙하니, 낮에 잠들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발을 벗고는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레 안으로 걸어가던 지한이 문득 우뚝 멈춰 섰다. 딱딱하게 굳은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깨진 유리 파편들과 알 수 없는 액체, 핏자국, 넘어진 협탁과 벽에 걸려 있던 액자까지 뒤집혀 있었다.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심장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머릿속엔 의문의 인영이 집 안을 헤집는 영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놀란 지한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 갔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순간, 창가 옆 어둠 속에서 멀거니 서 있던 이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왔어요?”

김신우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 그의 모습에, 놀란 마음과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빠르게 교차했다.

지한은 홀린 듯,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발끝에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스락, 차였다.

“…무슨 일이…. 괜찮으십니까?”

그는 굳은 인상으로 주변을 느리게 훑었다. 아직도 놀란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물으며 그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지한은 점점 윤곽이 또렷해지는 김신우의 모습을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묻잖아요.”

그가 나긋하게 물었다. 입매는 살짝 말아 올라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음울한 얼굴이었다. 살짝 초점이 나간 눈동자는 처음 보는 류의 표정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아는 …사람을, 만나러.”

지한은 저도 모르게 멈칫 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걸음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구나. 뭐 했어요?”

그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사르륵 다시 흘러내렸다. 지한은 그가 다가온 만큼 두 번, 세 번, 더 뒷걸음질했다. 어느새 딱딱한 벽이 등에 툭 닿았다. 가만히 눈을 깜박이는 찰나 그가 또다시 물어 왔다.

“뭐 했어요?”

다정하게 묻는 어조였으나 왜인지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는 더 물러날 곳 없는 지한의 턱 끝을 그가 살며시 그러쥐었다.

움찔, 본능적으로 턱을 뒤로 물린 지한이 굳은 얼굴로 그의 손을 보았다. 손등 위 말라붙은 핏방울이 보인다. 상처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실 바닥에 점점이 찍혀 있던 핏자국이 그의 것인 듯했다.

“손이….”

난장판으로 뒤집힌 집,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김신우와 의중을 알 수 없는 집착적인 물음, 확연히 달라진 태도. 김신우는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아 보였다. 결론을 낸 순간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김신우, 씨….”

부르며 조심스레 낯빛을 살폈다. 불 꺼진 거실 안에서 그의 이채 어린 눈동자를 신중하게 응시했다.

혹시 밤의 김신우가 나타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이 기묘한 상황도, 어쩌면 대강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네, 왜 불러요.”

그가 답하며 손에 쥔 턱을 지긋이 들어 올렸다. 따라서 지한의 고개가 비스듬히 들렸다. 지한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곱게 내리깔린 속눈썹과 굳게 다물린 붉은 입술은 여전히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러나 상황에 맞지 않게도, 김신우의 하얀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지한은 숨을 죽이고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뺨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니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다.

돌연 그의 입술이 지한의 입술과 지그시 맞닿았다. 그는 마치 도장을 찍듯 제 입술을 꾹, 하고 눌렀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질척하고 뜨거운 혀가 스며들지 않았다. 건조한 입맞춤이었다. 그저 그렇게 가만히, 입술을 대고만 있을 뿐인.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입술을 맞댄 채로, 김신우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시선을 내리깐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 피하네….”

이윽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씨발, 왜 안 피하지….”

읊조리는 말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삽시간에 팔등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당혹스러웠다.

그는 밤의 김신우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제게 입술을 맞댈 이유가 없었다. 왜 안 피하냐는 말 또한 앞뒤가 맞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의 지한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그가 낮이든, 밤이든, 둘 중 어느 쪽이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혼란스러운 것들 투성이었다.

문득 김신우가 실소를 터뜨렸다.

“재밌었어요?”

그 말에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달리 섬뜩하게 식은 눈길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신 나간 놈 가지고 노는 거, 씨발, 재밌었냐고.”

낮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느리게 뻗어온 김신우의 손이 지한의 멱살을 꽉 쥐어 잡았다. 드세게 잡아당기는 손길에 목이 앞으로 끌렸다.

“병신 같은 거 데리고 놀면서. 재미 좀 봤습니까?”

당혹감에 물든 지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뭐든 다 해 주겠다는 말이, 이런 걸 노린 거였어요?”

“…….”

“작정하고 들어온 걸 내가 순진하게 몰라줬나 봐.”

그가 빈정거렸다. 처음부터 진심은 아니었을 희미한 웃음기조차 사라진 얼굴이었다. 굳은 낯빛에는 경멸이 서렸다. 날카롭고 낯선 시선에 숨이 막혔다.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어디까지 알게 된 거지. 당장 그런 걸 따질 새도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점점 벌겋게 일렁이는 눈동자로 저를 보고 있었다. 한 점의 감정이라도 전부 잡아내겠다는 듯, 아주 집요하고 뾰족한 눈빛이었다.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처음부터 그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하였음에도, 막상 일이 닥쳐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무어라 말대꾸라도 하고 싶었으니 쉽사리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기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랑 호모 짓 하고 싶었으면 솔직하게 말을 하지 그랬어요. 좆대가리 좀 놀려 주는 게 뭐 대수라고, 병자 데리고 몰래 그 짓을 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딱딱하게 굳은 지한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물에 젖은 행주처럼 심장이 꽉 쥐어짜이는 느낌이었다. 실수다. 실수라고 계속 생각했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것만큼은 제 잘못이었다.

침묵을 지키는 지한을 보며 김신우는 실소했다. 애초에 그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듯 제 할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또 밖에서 몸 굴리다 왔어요?”

대수롭잖게 말하는 어조완 달리, 그의 얼굴은 끔찍하다는 듯 찌푸려져 있었다.

“질문을 바꾸죠. 우리 섹스 많이 했어요?”

적나라한 물음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김신우의 얼굴은,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밖에서 굴려 먹던 더러운 몸 나한테 얼마나 비벼댔어?”

“…….”

“응?”

김신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물어왔다. 코끝이 부딪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짧은 순간에도 지한은 알 수 있었다. 혐오. 그는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제가 잠든 사이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혐오였다. 끔찍한 사실에 분노하여 집 안을 난장판으로 뒤집고는, 돌아온 자신에게 모욕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지한은 밖에서 몸을 함부로 굴린 적도, 그의 생각처럼 밤의 김신우와 섹스 같은 걸 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 모든 일의 시초는 김신우 자신이 먼저 벌인 일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친다. 그것은 불쾌하기도, 또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살면서 정확히 되짚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지한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혼잡하게 흩어지는 생각에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생각이 아니라 가슴이 문제였다. 고통과 엇비슷하게 닮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구구절절 변명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 씨발. 저렴한 몸, 여기에, 얼마나 비벼댔냐고 묻잖아요. 멋대로 사람 가지고 놀았으면 똑바로 대답해.”

“김신우 씨.”

지한은 그의 말을 뚝 자르듯 불렀다. 울컥, 솟구치려는 감정을 겨우 삼켰다. 눈을 내리깔곤 붕대를 감지 않은 손을 느리게 쥐었다 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눈을 감고는, 낮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발, 좀, 말 가려서 하세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엔 미세한 떨림이 배어있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자초지종을 잘 설명하면, 그도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점점 가빠 오는 호흡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었다.

“왜. 우리 이 정도는 알 사이 아닌가? 공지한 씨, 생각보다 물건이네. 좆같이 당돌한 거 보니까.”

“…….”

“아픈 사람 갖고 놀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쏘아 붙이는 날카로운 말에 지한의 얼굴이 한층 더 굳었다. 이를 꽉 물자 날카로운 턱에 근육이 불룩 섰다.

“그렇게 호모 짓이 고프면 지금부터 나랑 해요. 씨발, 정신 나간 새끼랑 몰래 떡 치지 말고.”

말이 끝나는 순간 지한은 제 멱살을 쥔 그의 손을 탁, 하고 강하게 쳐냈다.

순식간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짓누르기 힘든 분노가 삽시에 전신으로 번져 갔다. 머릿속에는 지난 김신우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궤적을 따라 후회만 흔적처럼 남을 뿐이었다.

“뭐가 궁금하신 건데요.”

지한은 거칠게 올라오는 숨을 뱉었다. 지지 않으려 시큰거리는 눈에 힘을 주곤,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김신우를 노려보았다.

그깟 알량한 동정심에 안일한 행동을 했다.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동들이었다. 처량한 눈빛과 애처롭게 떨구는 눈물방울에 혹했던 자신이 머저리였다. 그랬으면 안 됐는데. 평소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쉽게 정을 주어서는 안 됐는데.

“얼마나 비벼댔냐고요. 뭐 통계라도 써 드릴까요?”

말하는 입매가 저도 모르게 자꾸 꿈틀거렸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억 속의 그와 눈앞의 그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로 멀미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짓밟고 싶었다.

“좆 빨아 주셨습니다. 횟수는 몇 번 안 돼요. 대딸도 몇 번 쳐 주셨고요. 아. 키스도 했습니다. 이건 당연히 아시죠?”

목소리는 또렷했다. 지한은 점점 희게 굳어 가는 그의 얼굴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러나 분노로 떨리는 어깨까진 어쩔 수 없었다.

“김신우 씨가, 따먹을 거라느니 박겠다느니 개소리 많이 했긴 했는데요, 했는데, 다행히 끝까진 안 했습니다. 섹스 안 했다고요. 이러면 마음이 좀 나으십니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괜한 짓을 했다. 울렁거리는 속에 짙은 숨을 뱉어냈다.

“더러운 몸이요. 하아. 더러운 새끼랑 몸 비빈 그쪽도 똑같이 더러운 사람이잖아. 근데 저렴하니 뭐니 당신이 누굴 나무랄 입장이나 돼요?”

미치도록 후회가 됐다. 울컥 넘어온 숨을 짧게 뱉었다. 속은 데일 듯이 홧홧한데 내쉬는 숨은 얼어붙은 입김 같았다.

“그래요. 제가, 하. 제가 죄송하게 됐습니다. 밖에서 몸 막 굴리던 놈이랑 그딴 짓이나 하게 해 드려서. 미안합니다. 여기서 더러운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아니면 한 대 치실래요?”

“…좆같은 입, 다물어요.”

딱딱하게 굳은 김신우가 짓씹듯 말했다. 눈가는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좆같은 입.”

하, 헛숨을 내쉬었다. 허탈한 입술 끝은 살짝 올라간 채였다. 그는 순식간에 싸해진 눈빛으로 다시 김신우를 응시했다.

“그 좆같은 입. 좋다고 먼저 빨아대던 건 그쪽입니다. 씨발, 내가 아니고요. 아시겠어요?”

탁! 지한은 자신을 짓누르는 그를 드세게 밀쳐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김신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머리가 아팠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들어왔던 대로 성큼성큼 현관을 향해 걷는 순간, 거친 손길에 손목이 붙들렸다. 지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놓으세요.”

낮게 내뱉으며 손을 확 빼냈다. 그러나 드센 악력에 다시 팔이 붙들렸다.

“놓으라고.”

딱딱하게 굳은 지한이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김신우는 여전히 제 감정을 주체 못 하고 화가 난 얼굴이었다. 꽉 다문 입매와 일렁이는 눈빛이 지한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 속에는 초조한 눈빛이 어려 있었다. 감정이 고조된 지한의 눈에 그런 것이 보일 리 없었다.

“놔!”

지한이 거칠게 팔을 당겼다. 그러나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잡힌 손이 왼손이었으니 힘이 달렸다. 이를 아득 깨문 지한이 깁스한 오른팔로 주먹을 내질렀다. 퍽! 손등 뼈에 단단한 복부가 닿았다. 찌푸린 얼굴의 김신우가 살짝 뒤로 밀렸다.

와락 찌푸린 지한은 점점 벅차오르는 감정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마음 같아선 벌컥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말, 안 한 건 죄송한데요. 아니. 씨발, 죄송합니다. 죄송하고요. 근데, 자는 사람한테 와서 먼저 주무르고 키스해댄 건 그쪽이거든요. 하, 나는 하지 말라고, 아니. 됐습니다. 나도, 나도. 씹. 후회하니까. 없던 일로 하죠.”

지한의 가슴께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 뜨겁게 치미는 감정 탓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당신, 그쪽 말대로 그 쉬운 좆대가리 아무 데나 놀리고 다니시는 분이잖아요. 똥이라도 밟았다고 생각하세요, 그냥.”

그는 그대로 다시 홱 등을 돌렸다.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가슴이 쿡쿡 찌르는 괴로운 기분조차 그를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 서.”

돌연 등 뒤에서 김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말에 지한이 우뚝 멈춰 섰다.

“씨발…. 알았으니까.”

인상을 찡그린 지한은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선 김신우가 괴로운 얼굴로 지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드러난 눈가는 벌겋게 물든 채였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가지 말아요.”

축축한 눈동자가 그를 애처로이 바라보았다. 따라 붉게 물든 시선이 진득하게 내려앉는다. 머리끝까지 벌컥벌컥 삼켜대던 시뻘건 화마가 고작 한 줄기 나약한 눈길에 가루처럼 흩날렸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딱딱하게 굳은 인상이 한껏 일그러졌다.

“가지 마.”

끝이 갈라진 낮은 음색이 울려 퍼졌다. 상처를 주려 온갖 날을 세우던 사람이 정작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목이라도 졸린 듯한 표정으로 지한을 응시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한은 말아 쥔 주먹을 더 세게 그러쥐었다. 굳은 얼굴로 제게 들러붙은 시선을 마주했다.

쿵, 쿵. 쿵. 속에서 세차게 뛰는 맥박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호흡이 가쁘고 어지러웠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발아래 진득한 쥐덫이라도 밟고 있는 듯 움직이기가 버거웠다.

“하아….”

김신우가 고통스러운 숨을 내뱉었다. 동시에 속에서 무언가 파삭 바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뜨겁게 솟구치는 속과 달리 지한의 낯빛은 점점 더 차게 굳어 갔다. 일렁이는 시선을 마주하며 그는 조금씩 뒤로 걸음을 내디뎠다.

왜. 왜?

거세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한은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더는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뛰쳐나와 버렸다.

쾅.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적막한 복도에 굉음처럼 울렸다. 숨통을 꽉 조여오던 시야에서 벗어났으나, 어쩐지 걸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런 기분을 무시하듯 지한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속에서 울렁거리는 묵은 감정들은 당장 내뱉지 않으면 펑 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고요한 계단참에 그의 거친 발소리만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점점 차오르는 숨을 내뱉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같이 있어 줘요.’

‘떠나면 안 돼요…. 혼자 두지 말아요.’

침실에서 그를 처음 마주했던 순간부터 들었던 말이었다. 김신우는 그것을 마치 습관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처음부터 버림받으며 살아온 삶이라 그랬을까. 밤의 김신우가 제게 가진 과한 집착과, 과거의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그런 말들을 버릇처럼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가지 말아요.’

정신이 돌아온 김신우에게서까지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째서?

왜.

왜 붙잡은 걸까. 무슨 말을 하려고.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며 지한은 수없이 생각했다. 자신이 그곳을 나오지 않았다면 그가 어떤 말을 건넸을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보았을지 떠올려 보았다.

생각의 고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계속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숨이 콱콱 막힐 만큼 뛰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도중에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제게 독한 말로 상처를 주던 김신우의 입술 사이로 어떠한 말이 흘러나왔을지는, 끝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둔탁한 뜀박질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한참을 뛰던 지한은 결국 어느 골목 앞에서 멈춰 섰다. 인적 없는 캄캄한 골목이었다.

헉, 허억. 헉. 허리를 짚곤 턱을 젖힌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띵하게 아플 정도로 숨이 벅찼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그대로 담벼락에 주르륵 기대앉았다. 아무렇게나 앉은 흙바닥이 딱딱했다. 입고 있는 옷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아, 하아. 하아….

색색대는 가쁜 숨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차가운 담벼락에 머리를 툭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오래간만에 강도 높게 뛴 탓에 폐가 쿡쿡 쑤셨다.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어릿한 고통도 분명 이 때문일 것이다.

낯선 통증에 지한은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감았던 눈을 뜨자 새카만 시야에 희게 뜬 달이 보였다. 안개처럼 희뿌예진 형상이 흩어진다. 하나 한 점도 사라지지 않고 온통 습하게 스며들었다.

잠시 달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툭 떨궜다. 땀방울이 맺힌 머리칼을 쓸어 올리다 꽉 그러쥐었다. 달빛에 하얗게 드러난 이마가 반짝였다. 사이로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하아….”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으로 느리게 얼굴을 문질렀다. 적막하게 이어지는 침묵 속 희멀건 입김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미야옹.

문득 가늘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야아옹.

잘못 들은 줄 알았던 소리가 다시금 새어 나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캄캄한 주변을 훑었다.

어둠이 익숙해진 시야로 골목 귀퉁이에 작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덩치가 작고 앙상한 갈색빛의 길고양이였다.

지한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어미를 잃은 건가. 가만히 그것을 응시하던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갔다. 저를 물끄러미 보는 데에도 그것은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눈동자가 지한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마르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도 눈빛만큼은 경계심이 가득했다.

“…안녕.”

멀찍이 멈춰 선 지한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돌봐주던 길고양이다. 지한은 이런 아이들을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돌연 꼬리를 바짝 세운 놈이 등을 세우고 하악질을 시작했다.

“어, 알았어. 알았어….”

거친 울음소리에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근처에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뒷걸음질하여 빠른 걸음을 내디뎠다.

걸어가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급하게 들어간 편의점에서 고양이용 통조림을 샀다. 다시 조급한 걸음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사라진 건 아닐까. 걱정되었으나 그것은 아직 그 자리에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지한은 통조림의 뚜껑을 열고 얻어온 작은 박스 조각 위에 부어 조심스레 내밀었다. 그러나 꼬리를 바짝 세운 놈은 뒤로 슬슬 물러나며 날카로운 하악질을 이어 갔다. 하나도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하….”

지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팔뚝만 한 것이 열심히 경계하는 것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그는 바닥에 그것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았어.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먹어. 괜찮아.”

고양이는 멀찍이 뒤로 물러난 지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울음을 멈췄다. 지한은 그가 편히 먹을 수 있도록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자코 자리에 쭈그려 앉아 미동 없이 지켜보았다.

골목 안은 더없이 고요했다. 간간이 지한의 옅은 숨소리만 퍼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어둠 속에서 가만히 꼼지락거리던 고양이가 느리게 앞발을 내디뎠다. 사료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이내 조그만 혀를 내밀고 찹찹 먹기 시작했다.

어. 먹는다.

지한의 눈이 살짝 뜨였다. 입매엔 희미한 웃음이 어렸다. 찹찹찹. 골목 안에 먹이를 먹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양이는 먹다가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이따금 작은 소음이라도 들려올 때면 먹던 걸 멈추고 구석으로 뛰어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 아슬아슬한 식사를 지켜보던 지한은 문득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고양이의 하악질은 방어적 공격이라 했다. 어느 하수로에서부터, 또는 차디찬 길바닥 위에서. 날 때부터 주변을 숨 쉬듯 경계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온 것들이다.

지한은 문득 저 고양이가 제 다리 아래에서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안정적인 보금자리에서 애정을 주고 키웠다면 저 아이도 분명 그렇게 사랑스럽게 컸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툭 미끄러졌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앞 머리칼을 쓸어 넘기다 그대로 꽉 쥐었다. 어쩐지 저 가련한 길고양이 위로 자꾸만 누군가가 투영되어 보인 탓이다.

김신우의 마지막 얼굴이, 그 말이 신경 쓰였다. 경멸의 낯으로 그토록 독하게 몰아붙이다 돌연 붙잡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일까. 또다시 한 줄기 물음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그를 이해해 보려 하는 제 모습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고양이는 어느새 바닥까지 싹싹 사료를 긁어먹었다. 그러나 아직 떠나지도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걸까.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후우. 지한은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편의점 비닐봉지에 다 먹은 박스를 주워 담고는, 아직도 그대로 앉아 있는 고양이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놈의 하악질은 멎었다.

“잘 있어. 다음에 봐.”

그는 물끄러미 자신을 주시하는 고양이를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약국에 들러 밴드와 연고 등 간단한 의약품을 샀다. 어디가 얼마나 다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보아하니 가벼운 상처는 아닐 것이다. 이것저것 계산을 끝내고 약국을 나왔다.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서도 그는 또 한참을 고민했다.

그가 했던 심한 말들을 떠올리면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가 예쁘다고 약까지 챙겨 주는지, 이런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화가 날 만하다는 건 지한도 인정했다. 평상시 김신우는 여자만 만나 오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호모포비아적 성향도 비치는 남자였다.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역겹게 느껴질 수 있었다. 뭘 보고 들은 건지는 모르지만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렇다 해도.

그런 말들은 좀 심했잖아….

“하아… 씨.”

고개를 푹 숙이고 눈가를 주물렀다. 그대로 잠시 멈춰 선 채, 긴 숨을 내쉬었다.

끝내 그는 시선을 들었다. 다시 내딛는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

삐리릭.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깜빡, 센서 등이 점멸하는 현관 너머는 아니나 다를까 어두컴컴했다.

지한은 입술을 깨물며 신발을 벗었다. 한숨이 올라왔으나 겨우 삼켰다. 집 안으로 다시 발을 내딛자마자 그는 그대로 멈춰 섰다.

드넓은 집 안의 불 꺼진 거실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김신우는 소파 뒤에 비스듬히 기댄 채 허공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보았던 그 자리 그대로였다.

인기척에 그가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지한을 발견한 기다란 눈매가 아주 느리게 감겼다 뜨였다. 반쯤 풀린 눈으로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그는 마치 피폐한 분위기의 화보집 촬영이라도 하는 듯 보였으나, 하나도 보기 좋지 않았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는 마치 경기 시작 직전 출발선에서 내뱉는 심호흡처럼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김신우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김신우의 시선이 지한의 몸을 타고 찬찬히 올라갔다. 지한은 바닥에 툭 떨어진 그의 손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바닥에 비닐봉지를 내려놓고는 눈을 내리깐 채 뒤적거렸다.

사방은 적막했다. 지한은 가져온 약의 포장을 뜯으며 김신우의 손을 잡아 들었다. 이리저리 베인 상처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찡그린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자해까지 할 줄은 몰랐다. 성격이 여러모로 생각보다 더 파탄 난 사람인 듯했다.

침묵 속에서 지한은 능숙하게 상처를 치료했다. 따갑고 아플 법도 한데 김신우는 찡그리기는커녕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소독과 연고, 밴드까지 꼼꼼하게 붙인 지한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꿰맬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일단 약 바르고, 내일 병원 가요.”

“…….”

“혹시 많이 아프면 응급실 가고요.”

말하며 답을 구하듯 시선을 들자, 저를 뚫어져라 주시하던 옅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조금씩 달싹이던 김신우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왜 다시 왔어요?”

푹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붓이 깔린 속눈썹이 감았다 뜨인다. 그는 마치 고장 난 예쁜 인형 같았다.

“내가…. 좆같은 말만 했는데, 왜 다시 왔어요.”

부드럽던 음색은 초라하게 갈라진 채였다.

“이제 안 올 줄 알았는데.”

“…….”

“안 와야 맞는 건데….”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서서히 시선을 내리깐 김신우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결 좋은 갈색 머리칼이 그의 고운 눈매 위로 살랑였다.

지한은 아무 답도 하지 않고 입술을 다문 채 그를 응시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왜 다시 왔는지, 저조차 답할 수 없었다. 알 수 없었다.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그래서… 이제, 다시 못 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금방, 다시 올 거라고 생각 못 해서. 지금….”

그는 꽉 잠긴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두서없는 말들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찌푸린 얼굴은 괴로운 감정과 닮아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지한의 손등 위를 쓸었다. 치료하느라 잠시 잡고 있던 손이었다.

멈칫. 시선을 내린 지한이 그의 손길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은 서서히 팔을 타고 올라와, 지한의 턱 끝을 가볍게 스치고 하얀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끝내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그는 울고 있지 않았으나 우는 것처럼 보였다. 뺨을 감싼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였다. 단단한 손끝이 지한의 눈가를 더듬듯 매만졌다.

지한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숱하게 봐 왔던 밤의 김신우가 아니었다. 제 약점을 쥐고 협박하며 끔찍이도 혐오를 드러내던, 장점이라곤 얼굴 말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바로 그 악의 가득한 남자였다.

그러나, 짧은 시간 그는 이 달빛 아래의 흰 얼굴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그간 제가 정을 주었던 이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를 쉬이 밀어낼 수가 없었다.

혼잡한 생각에 물든 사이 김신우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입술이 맞닿은 것을 느낀 것은 이미 부딪친 이후였다.

“…….”

빳빳하게 굳어 버린 지한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칠 떨었다. 그와의 키스는 수도 없이 많이 겪어 봤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지한은 눈도 감지 않고 멈춘 채로 그를 응시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손길이지만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하아….”

잠시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어낸 김신우가 틈 사이로 떨리는 숨결을 내뱉었다. 뜨겁고 습한 숨결이었다.

눈앞에 기다란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처연하게 내리깐 눈꺼풀을 마주한 순간, 지한은 또다시 가슴 속이 지끈하는 것을 느꼈다. 뱃멀미라도 하는 듯 심장이 하릴없이 요동쳤다.

묵직한 침묵 속에서 그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는 이 낯선 감정을 분명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떠올리기도 어려울 만큼 아주 오래전에 겪어 보았던 일이었다. 쿵, 쿵, 쿵. 또다시 심장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지한은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그러 쥐었다. 느닷없는 행동에 느리게 눈을 내리깐 김신우가 그의 행동을 보는 찰나, 그대로 잡아당기며 깊숙이 입을 맞췄다.

눈을 감은 지한이 그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촉촉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어미 잃은 고양이처럼 웅크린 그에게 입 맞추고 싶다는 강렬한 감정에 이끌린 충동이었다.

김신우의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그대로 질척한 두 혀가 뜨겁게 얽혔다. 지한의 뺨을 쥔 손에 힘이 들어오고, 곧 뒷덜미로 기다란 손가락이 스며들었다. 춥, 츠읍. 츱. 젖은 점막이 마찰하는 야릇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한은 그에게 좀 더 몸을 기울였다.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김신우의 등이 소파 등에 바짝 붙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부드럽게 입술을 베어 물자 코끝이 간지럽게 부딪혔다. 말캉한 혀를 빠는 행위만으로도 옅은 흥분이 밀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제 의지대로 그에게 입을 맞추고 성애적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싫지 않았다.

김신우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팔로는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입 안을 깊숙이 파고드는 혀 놀림에 짜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어쩐지 혀끝에서 달큼한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생각에 빠질 틈도 없었다. 더. 더. 갈증이 났다.

뒷덜미를 타고 올라온 손이 지한의 머리칼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진득한 흥분이 차츰 더 짙어졌다. 지한은 낮은 숨을 내쉬며 격정적으로 혀를 섞었다. 혀 아래를 문지르고 타액을 삼키자, 곧 숨이 벅차올랐다. 지한은 잠시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 하….”

이마를 맞댄 채 둘은 고요히 숨을 골랐다. 김신우가 엄지손가락으로 지한의 젖은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그대로 지한의 귓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새끼랑…”

“…….”

“섹스…. 안 했다고 했죠.”

그가 나긋하게 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그 새끼? 생각에 잠긴 지한이 입을 다물자, 김신우가 목덜미에 코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나랑 해요.”

“…….”

“당신이랑…. 하고 싶어.”

더없이 애틋한 목소리였다. 음색과 달리 저돌적인 말에 지한이 숨을 삼켰다.

충동으로 갑작스레 시작된 키스였으나, 끝까지 가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별개로 자신도 흥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입을 맞추는 동안 아래는 이미 본능적으로 발기해 있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김신우가 지한의 목덜미에 다시금 말랑한 입술을 문질렀다.

“공지한 씨…. 나한테 잘못했잖아요.”

그러곤 조용히 눈을 맞춰 온다.

“나 몰래 내 입 안에 좆도 넣고…. 그렇죠?”

습한 눈동자에 말간 흥분이 어려 있었다. 예쁘다. 지한은 무심코 그 생각을 했다.

“나도 넣고 싶어. 당신 구멍에.”

그러나 우아하고 예쁜 얼굴과는 달리 내뱉는 말은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 나긋하게 달래는 목소리는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주고받는 듯 평온한 어조였다.

“…….”

지한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혹여 남자와 뭔가를 하게 된다면 당연히 자신이 넣는 쪽이리라 생각해 왔던 그였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관계에는 합의점이 필요했다.

김신우는 굳은 채로 침묵을 지키는 지한의 겉옷을 물 흐르듯 스르륵 벗겨내기 시작했다.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한참 뛰다 오는 바람에 한껏 땀이 밴 몸이었다.

“잠, 잠깐만. 씻고….”

“왜요. 난 좋은데.”

거짓말이 아닌 듯, 그는 끈적한 목선 위를 쭉쭉 빨아댔다. 농도 짙은 스킨쉽에 지한은 밤의 김신우와 낮의 김신우에 관하여 생각하는 일을 지워버렸다. 그저 눈앞에서 제 몸을 탐하기 바쁜 남자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버렸다.

“읏, 김신우 씨.”

빗장뼈를 빨아대는 찌릿한 촉감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지한은 바닥을 짚으며 몸을 물렸다. 김신우는 마치 자석처럼 그의 움직임마다 따라 들러붙었다.

묵직한 체중이 실리자 자연스레 지한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주변에는 흐트러진 꽃과 화분의 모래, 정체 모를 조각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적어도 무언갈 하기엔 적정치 않은 장소였다.

하나 김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위로 올라탔다. 지한의 귓속에 혀를 가득 쑤셔 넣은 뒤 척척하게 핥기 시작했다.

“아! 읏.”

지한이 낮은 신음을 내뱉을 때마다, 김신우는 그의 눈을 한 번씩 마주했다. 처연한 기색을 띄우던 밝은 눈동자는 어느새 색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입술 사이론 이따금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티셔츠 사이로 차가운 손가락이 쑥 들어왔다. 그의 단단한 허리선을 매만지며 김신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공지한 씨.”

“하아… 네.”

지한이 숨을 몰아쉬었다. 고분고분하게 행동하는 그를 보며 김신우는 참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애써 억누르며 표현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는 발정과 동시에 분노하고 있었다.

평소 공지한과 제 관계는 이런 식으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인즉슨, 이런 관계를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 빌어먹을 씹새끼라는 것이었다. 김신우는 달큼한 살을 자근자근 씹으면서도 그 극명하고 좆같은 사실 속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새끼가… 귀여워요?”

그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우면서도, 전부 부숴 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깨닫지도 못한 새 잠식되어버린 감정의 수면 아래에서 그는 지독하게 피어오르는 노기를 곱씹었다.

“씨발….”

제가 물어 놓고 치미는 분노에 속으로 욕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욕설을 이해하지 못한 지한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동시에 상체를 벌떡 일으킨 김신우가 지한의 무릎 오금과 어깨 밑으로 단단한 팔을 쑥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지한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지한은 반사적으로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뭐…!”

“침대로 가요. 난 느긋하게 즐기고 싶으니까.”

“…….”

단조로이 말하며 입을 맞추는 행위에 지한이 할 말을 잃었다. 김신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180이 넘는 그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지한은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안겨본 적은 없었다. 반쯤 발기해 있던 성기도 놀라 가라앉고 있었다.

등 뒤로 푹신한 침대 시트가 닿았다. 조심스레 그를 내려놓은 김신우는 손을 뻗어 협탁 위 무드 등을 켰다. 조도가 낮은 빛이 어슴푸레 스며들자 잠든 그와 어울릴 법한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김신우는 다시 상체를 숙여 지한에게 입을 맞췄다. 평소 성질머리와는 다르게 아주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그는 말랑한 입술을 비비듯 문지르며 부드럽게 젖은 혀를 밀어 넣었다. 지한이 무어라 말을 할 새도 주지 않았다.

“음…”

밤의 김신우와는 혀 놀림부터가 달랐다. 그는 아주 능숙했으며, 흐름이 끊기는 순간에도 어색하지 않게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 그다지 탐탁지는 않았으나 과연 경험이 많은 사람다웠다. 그는 몰아붙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지한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젖은 점막들이 마찰할 때마다 희미하게 울리는 소리에 야릇한 기분이 고조되었다. 다시금 티셔츠 속에서 제 살갗을 매만지는 손길에 지한이 입술을 떼어냈다. 하반신을 꾹 누르는 묵직한 무게감은 곧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해 주고 있었다.

“하아, 김신우 씨. 씻고….”

충동적으로 시작한 키스였으나 정말 끝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우선은 씻으면서 열기를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날 듯했다. 제 몸속에 다른 남자의 성기를 넣는다는 건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사귀지도 않는 사람과, 충동적으로는 더더욱.

“왜. 그놈이랑은 매번 씻고 했어요?”

말하며 그가 목 위를 따갑게 씹었다. 따끔함에 지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이 침대에서?”

“읏.”

낮은 어조에 화를 내는 듯싶었으나, 언뜻 올려다본 얼굴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가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여 지한은 그가 속으로 어떤 심한 욕을 삼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취향은 달라요. 공지한 씨.”

그가 귓가에 속살거렸다.

“나는 끈적하고, 질척하고, 난잡하게 섹스하는 걸 좋아하거든.”

하도 물고 빤 탓에 축축해진 목덜미를 손끝으로 느리게 쓸어내린다. 손길 하나만으로도 그는 더없이 외설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알겠어요?”

가쁜 숨을 내쉬며 저를 올려다보는 지한을 보며, 김신우가 예쁘게 웃었다. 이내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툭 건드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씻고 와요.”

“…….”

“원하는 대로 해 줄게.”

***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지한은 눈을 감았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툭 떨구고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한가득 수심에 잠긴 얼굴이었다.

어쩌자고 그렇게 키스를 한 거지.

밤의 김신우에게 정을 주었던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김신우에게 입을 맞춘 건 분명 도를 지나친 행동이었다.

평소 원나잇이나 가벼운 관계 같은 건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었다. 성 욕구를 자제하지 못할 정도로 미련한 타입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솟구친 충동 또한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김신우는 제가 한 짓들을 혐오하고 극도로 화를 냈다. 집 안을 부술 정도로 난동을 피우고 폭력적인 말로 상처를 주었다.

그 난장판이 된 집 안에서 물고 뜯으며 화를 내다가, 돌아와선 뜬금없이 입을 맞췄다.

지한은 입술만 꾹 맞대다 금세 떨어진 건조한 입맞춤을 떠올렸다. 그는 마치 제가 입을 맞출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이라도 해 보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모든 상황이 이해하지 못할 일투성이였다.

“하아….”

지한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깁스가 젖을까 들어 올린 오른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낮의 김신우. 장점이라고는 얼굴과 연기력뿐이었던 그 남자가 괴로운 얼굴로 자신을 붙잡고, 돌아와선 섹스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과정이 이상했다.

“온천 여행이라도 왔어요?”

돌연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한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김신우가 서 있었다. 그는 수치심이라고는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지한을 응시했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적나라한 광경에 지한이 시선을 내렸다.

“…다 씻었습니다.”

깁스한 손을 들고 한 손으로 씻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혼란함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것도 한몫했다. 사실 지금 나가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김신우의 눈이 그가 들고 있는 팔에 닿았다.

“불편하면 도와 달라고 말하지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지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제 몸을 씻겨 주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같은 남성의 몸을 보는 것이 유독 민망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아뇨, 다 끝났습니다.”

시선을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맨정신으로 그의 전라를 보고 있기가 부담스러웠다. 힐끔 바라본 하반신은 심지어 발기 상태였다. 그토록 저를 혐오하던 그가 왜 갑자기 제게 발정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취향이라도 바뀐 건가. 아니면 사고 때 자신을 구해 줘서? 입원한 순간부터 친절해졌던 걸 떠올리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리 인성 파탄 난 사람이라도 제 목숨을 구해 줬다고 생각하면 호감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 서슴없이 걸어온 그가 지한의 옆에 섰다.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지한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맨살이 맞닿는 낯선 촉감에 지한이 어깨를 뻣뻣하게 굳혔다. 손을 뻗어 수전을 끈 김신우가 지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물소리가 멎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나 섰는데.”

“…….”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려고.”

김신우는 내내 흥분 상태였다. 이유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겪어 보지 못한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이 제법 배덕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그는 손을 조금 더 내렸다. 들어올 때부터 시선을 사로잡던, 희고 동그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엉덩이가 예쁘네요.”

그대로 세게 그러쥐자 지한이 반사적으로 바짝 힘을 줬다. 둥그런 살결 위로 작은 골이 패었다. 지한은 당혹스러운 숨결을 삼키며 턱을 뒤로 물렸다.

“…김신우 씨.”

살짝 찡그린 얼굴로 제게 붙어 있는 김신우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였다.

“…저도 이쪽은 한 번도….”

“깔리기 싫어요?”

그가 단조롭게 물었다. 마치 지한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평온한 어조였다.

“이렇게 하죠. 먼저 내가 넣어 볼게요. 다음번에는 당신이 해요.”

“…….”

“그럼 괜찮죠?”

고개를 살짝 숙인 그가 지한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치켜뜬 눈이 곱게 휘어지며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물론 그에게 뒤를 대 줄 생각은 먼지만큼도 하지 않은 채였다.

지한이 답할 말을 고르며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나 섹스 잘하는데.”

살살 꾀어내듯 중얼거리며 맞닿은 하반신을 더 밀착했다. 배꼽 위로 불덩이 같은 단단한 좆이 문질렸다. 살갗 위를 스치는 은근한 손길을 따라 솜털마저 바짝바짝 섰다.

“남자랑은 안 해 봤지만 하는 법은 똑같겠죠. 공지한 씨는 해 봤어요?”

“읏, 전….”

설핏 인상을 찡그린 지한이 말문을 열자, 김신우가 말꼬리를 뚝 잘랐다.

“답하지 말아요.”

한정원 같은 놈들에게 열심히 박아댔을 그를 떠올리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나마 뒤는 처음이라니 조금은 용서할 수 있었다.

“기분 좋게 해 줄게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속삭이곤 지한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도톰한 입술이 맞닿자 다시금 화끈한 열기가 스며들었다. 단단한 살갗 위를 바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지한의 고환을 굴리듯 주물렀다. 갑작스러운 쾌감에 지한이 낮은 신음을 냈다.

“아….”

지한은 목을 뒤로 물리며 제게 달라붙어 오는 김신우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하나 그는 떨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 지한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아랫입술을 빨고, 혀를 내어 입 안을 문지르며 몸을 빙글 돌렸다.

“읍, 잠…….”

“하아, 왜.”

춥, 추읍. 그는 격정적인 키스를 이어가며 지한을 문 쪽으로 점점 밀어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는 지한이 바깥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로의 단단한 복근과 발기한 좆이 스쳤다.

달칵. 문이 열리고 젖은 몸에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김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침실로 그를 이끌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축축하게 젖은 혀가 몇 번이고 오갔다.

정신없이 농도 짙은 키스에 빠져들 즈음, 등 뒤에 푹신한 침대 시트가 닿았다. 지한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아… 하.”

입술을 떼어낸 김신우가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입술 사이로 얇은 실이 이어지다 툭, 끊겼다.

김신우의 뜨거운 시선이 지한의 잘 짜인 몸 위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던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좆같이 흥분되네.”

공지한에게 이렇게까지 발정할 줄은 자신도 예상치 못했다. 어이가 없었다.

녹음 파일을 듣고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표출했으나, 막상 그가 등을 보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본능적으로 그를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의 혼란 속에서 김신우가 확연히 감지한 욕망은 소유욕이었다. 그를 곁에 두어야 한다는 충동만이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유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나 그가 미련 없이 등 돌려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김신우는 차갑게 굳어 버렸다. 생애 몇 번 느껴 본 적 없던 지독한 공허함이 그를 채웠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세상이 끝난 듯한 적막 속에서 외로움을 삼켰다. 그러나 어두운 현관에서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주변으로 환한 빛이 스며들었다. 센서 등 탓은 아니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묵묵히 제 손을 치료하는 그의 날카롭고 냉랭한 얼굴을 주시하며, 김신우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입술을 맞대어 본 것은 그저 충동이었다. 평소 남자와 섹스는커녕 키스 같은 걸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던 자신이었다. 그러나 처음 머금어 본 남자의 입술은 더없이 말캉하고 부드러웠다. 감질이 났다.

제가 먼저 입을 맞춰놓고도 생각에 잠겨 천천히 멀어졌다. 그러나 공지한이 다시 제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여기서부터는 그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스킨십은 늘 환영하는 편이었으며 거부감 또한 들지 않았다.

저 몰래 밤마다 그 새끼와 개짓거리를 한 건 화가 나지만, 삽입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하니 용서해 줄 만했다. 당장 눈앞의 공지한의 몸이 무척 야하게 느껴진 탓도 있었다. 탄탄한 잔 근육으로 균형 있게 짜인 인체가 이토록 외설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몸이 솔직하게 반응했다. 키스만으로도 발기한 아래가 딱딱해지다 못해 아플 정도였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이닥친 것도 그 이유에서다. 더는 참기 힘들었다.

“풀어 줄게요.”

그가 지한의 무릎을 잡고 들어 올렸다. 엉덩이를 움켜쥐고 힘을 주어 벌리자 봉긋하게 솟은 탱탱한 둔부 사이로 앙증맞은 구멍이 드러났다. 분홍색이었다.

“당신 아다 따먹는 기념으로.”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가 사이로 코를 묻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를 내어 주름진 구멍 위를 문지른다.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으윽! 잠깐, 읏.”

갑작스레 안을 파고드는 생경한 느낌에 지한이 허리를 크게 튕겼다. 희고 탄탄한 허벅지가 바르르 떨렸다.

춥. 츠읍. 게걸스레 아래를 핥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휘어짐 없이 곧게 뻗은 지한의 좆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기립했다. 뒤를 빨리는 건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하읏, 윽….”

지한의 입술 사이로 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선을 든 김신우가 벌겋게 물든 지한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잔뜩 찡그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좋은가 보지. 닳아 빠져선.

수많은 여자와 섹스해 오면서도 단 한 번도 아래를 빨아 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괜찮을 것 같았다. 금욕적인 얼굴이 쾌락에 물드는 걸 보니 저조차도 거세어지는 흥분을 느꼈다.

김신우의 혀가 점막 안을 꾹꾹 짓누르며 넓혀갔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를 삽입하듯 쑥 넣었다가 빼는 감촉이 적나라했다. 지한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칠움칠 튕겼다. 인상은 한껏 찡그린 채였다.

“아! 으윽.”

그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아 보려 이를 꽉 물었다. 누구의 손길도 닿은 적 없던 곳에 고개를 박고 빨아대니 안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흥분에 젖은 지한은 몽롱한 기분에 잠겼다. 삽입 섹스도 이런 쾌감인 걸까. 문득 그의 흉흉한 성기를 떠올리고는 생각을 바꿨다. 아무리 나중에 역할을 바꿔 준다고 해도 그걸 뒤에 넣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 정도 풀어 줬으면 된 것 같은데.”

고개를 든 김신우가 잔뜩 젖은 입 주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알아챈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하아. 김신우 씨. 안 됩니다.”

“왜.”

“너무 커서, 안 될 것 같아요. 거기는 찢어질지도 모르고….”

지한 자신도 흥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몸 안에 무언갈 넣어야 한다면 적어도 저런 크기는 아니어야 했다. 차라리 전처럼 함께 성기를 쥐고 흔드는 일 정도로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 나았다.

“사람 몸 그렇게 쉽게 안 찢어져요. 걱정하지 마.”

그가 중얼거리며 두툼한 귀두를 구멍 위로 문질렀다. 미끌미끌한 쿠퍼액이 마찰하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읏…. 아직, 잠깐.”

얼굴을 구긴 지한은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자줏빛으로 번들거리는 좆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지한은 저것이 제 목구멍을 전체를 꽉 틀어막던 고통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반이나 들어가면 모를까. 그걸 넣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을 마친 지한이 시트를 짚은 팔에 힘을 주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복부에 힘이 바짝 들어가니 잘게 쪼개진 잔 근육이 도드라졌다.

“김신우 씨,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괜찮다니까.”

“아니, 윽!”

채 위로 올라오기도 전, 어깨를 내리누르는 손길에 다시 등이 시트에 파묻혔다. 동시에 아래에 묵직한 것이 꾹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윽!”

지한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꽉 다물린 아래가 벌어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드센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씹… 하, 아! 아파요, 좀, 읏….”

“괜찮으니까, 힘 풀어요.”

두꺼운 귀두 끝이 구멍 위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말과는 달리 아래에 절로 힘이 꽉 들어갔다.

“아! 흣, 윽.”

갑자기 시작된 삽입은 예상보다 훨씬 더 아팠다. 혀를 넣었다 빼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기분도 이상했다. 허벅지에 힘을 주어 김신우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나 당연하게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아. 씹…. 힘 좀 빼, 나도 아파.”

“아! 그만, 그만 넣어요. 으윽, 빼라고.”

지한은 그의 팔을 붙들고 턱턱 쳐대며, 턱을 치켜든 채 이를 꽉 물었다. 날카로운 턱선 위로 근육이 툭 불거졌다. 빠듯하게 차오른 아래가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평소 고통을 잘 참는 편인데도 살갗이 홧홧하게 쓰렸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 그냥, 끝까지 쑤셔 박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씨… 발, 이거, 남자는 원래 이렇게 조이나? 하아.”

“아읏… 내가 그걸, 어떻게.”

김신우는 그의 치골을 꽉 붙들었다. 아직 반도 들어가지 않은 두꺼운 성기를 느리게 밀어 넣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친 언사와는 달리 움직임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그의 시선이 지한의 벌게진 얼굴 위로 닿았다. 흰 피부가 목 아래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야하다. 좆을 빈틈없이 조이는 구멍도 아프지만 기분 좋았다.

“하….”

고조된 성감에 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벌써 사정감이 치밀었다. 쾌락에 젖은 눈은 초점이 흐려져 번들거렸다. 뭐 때문인지 지루 소리를 듣는 평소와 달리 금세 쌀 것 같았다. 김신우는 상체를 낮추며 인상을 찌푸렸다.

“공지한 씨.”

“흐읏, 윽. 천천히.”

“하, 먼저, 한 발 빼죠. 안에 싸도 돼요?”

그가 거친 숨결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지한은 온몸에 바짝 힘을 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래가 자꾸 끝도 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생경한 감각에 식은땀까지 줄줄 났다. 눈가는 붉게 물들어갔다.

“안, 안됩니다! 그만, 더 움직이지, 마세요.”

“괜찮아. 이제, 다 넣었어요, 읏.”

정말로 그 커다란 것이 끝까지 들어간 건지, 둔부에 딱딱한 살갗이 맞닿았다. 김신우는 뿌리 끝까지 삽입하자마자 헉, 숨을 내뱉었다. 동시에 거친 허릿짓을 시작했다.

“아! 으윽! 학!”

“하, 읏. 씨발….”

철퍽철퍽! 물에 젖은 소리가 거세어졌다. 홧홧한 내벽 안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불끈거리며 무언가를 토해내고 있었다. 행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김신우는 몽롱한 얼굴로 격렬하게 허리를 추어올렸다. 쑤셔 넣는 순간 차지게 달라붙어 오는 속살이 자지를 끝내주게 조여 왔다.

두껍고 기다란 기둥이 빠른 속도로 구멍 안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붉은 살덩이는 하얀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렸다. 그는 정말로 넣자마자 안에 전부 싸버렸다.

“아프, 읏. 씹. 으흑, 빼라고!”

완전히 찌푸린 지한이 거친 숨을 헐떡대며 그의 팔뚝을 세게 쥐었다. 사정없이 쑤셔 박히고 있는 엉덩이를 뒤로 빼 보았으나 그가 다시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주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미칠 것 같았다.

“하, 괜찮아. 지금, 안에 정액, 존나 싸 놔서, 흥건해요. 읏. 부드럽게, 먹고 있어.”

김신우가 달래듯 중얼거렸다. 사정을 끝낸 좆은 가라앉을 생각도 없이 더 크게 부풀었다. 탁, 탁, 탁! 살갗 맞부딪치는 소리와 찔꺽이는 젖은 소리가 가득 찼다. 지한의 끓는 신음과 가쁜 숨소리도 함께 섞여들었다.

“아, 아파. 김, 신우. 씹, 아프다고…!”

“아….”

김신우는 눈을 감고는 턱을 살짝 젖혔다. 여태껏 해 왔던 섹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좆같이 기분이 좋았다. 마치 쾌락에 정신이 나간 듯, 지한의 신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래서 호모질을 하는 건가. 김신우는 이런 쾌감이라면 한 번쯤은 게이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상대는 공지한이어야 했다.

“이런 걸, 두고, 나한테, 박을 생각을 했어요?”

그는 지한의 종아리를 꽉 쥐고 잘근잘근 씹었다.

공지한과 좀 더 진득하게 섞이고 싶었다. 끝을 모르고 딱딱해지는 자지를 끝까지 콱 쑤셔 넣고, 둥그렇게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붉은 좆이 내벽 전체를 둥글게 짓누르며 구멍을 차츰 더 넓게 벌려 갔다.

“아! 학, 윽! 아, 프다고, 이, 개, 같은 새끼…!”

와락 일그러진 지한이 그의 어깨를 퍽 밀었다. 이어 다리를 버둥거리며 가슴팍을 찼다. 그의 좆이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내벽의 속살이 바깥으로 끌려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빼지 않을 거라면 속도라도 늦췄으면 했다. 비정상적인 섹스로 몸 안의 장기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아. 욕하니까, 섹시한데. 더 해 봐.”

초점이 나간 김신우가 잔뜩 잠긴 음색으로 말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추어올리는 허릿짓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그는 무릎을 세운 채 지한의 한쪽 다리를 꽉 끌어안고 짐승처럼 박아 대기 시작했다.

“아, 학, 아! 아!”

배 속을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다. 내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거렸다. 쾌락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개처럼 무식하게 박아 대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알았, 으니까, 씨발, 좀, 그만, 씹….”

지한은 턱을 치켜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가엔 저도 모르게 축축한 눈물이 맺혔다.

그는 후회했다. 애초에 키스부터 시작하질 말았어야 한다고. 이런 섹스라면 행여 나중에 그의 차례가 온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냥 섹스에 정신이 나간 미친 사람 같았다. 지한은 다시는 그와 몸을 맞대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쓴 고통을 삼켰다.

긴 밤의 시작이었다.

언제 눈을 감았는지도 모른 채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지한의 눈가가 살짝 꿈틀했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탓이다. 등 뒤에 맞붙은 단단한 가슴이 들썩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몸을 돌리려는 순간 찌릿하게 찾아든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래엔 아직도 묵직하고 뭉근한 통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배 속에 무언가가 가득 들어찬 듯한, 불편한 느낌이었다.

속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느낌에 지한은 어처구니없는 숨을 내뱉었다. 아래에 힘을 주자 제 것이 아닌 살덩이의 윤곽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

진짜 제정신인가.

몽롱한 정신에 속으로 욕을 지껄이고 있을 때였다.

“…형….”

물에 푹 젖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한은 본능적으로 움칠 어깨를 떨었다. 이 목소리, 말투의 주인공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의 것이었다. 그는 마치 공포 영화 속 주인공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눈가를 벌겋게 물들인 김신우의 얼굴이 보였다. 일그러진 낯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3권에서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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