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고 현장 보니까 정말 눈앞이 아찔하더라. 진짜 속상하긴 하지만 이만한 게 어딘가 싶었어…. 배우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한이 네가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이 도와주셨나 봐.”
처진 눈으로 한숨을 폭 내쉬는 한정원을 보며 지한이 옅게 웃었다.
조금 전에 도착한 한정원과 함께 병원 산책로를 걷는 중이었다. 둘은 마른 잔디를 바삭바삭 밟으며 달빛과 가로등이 어우러진 길 아래를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게. 안 다쳐서 다행이야.”
답하며 김신우의 얼굴을 떠올린다.
‘내리라니까. 시발, 차라리 내려서 신고를 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리라며 소리치던, 제 손을 꽉 쥐고 놓지 않던 손길이 생생했다. 시퍼런 공포에 휩싸인 초연한 눈동자는 숫제 맹수에게 목덜미라도 물린 듯한 얼굴이었다.
알 수 없는 체념과 불안에 물든 눈빛. 흔들리던 시선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법 의외로운 면이었다.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혼자 떨어지겠다며 소리치는 모습은, 기실 평소 김신우의 행실로는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민폐를 끼치면 끼쳤지. 남을 생각해 줄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에 잠긴 지한이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당장 사고에 대한 충격보다 트라우마에 관한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저 때문에 모두가 죽었다고 중얼거리던 또 다른 김신우를 떠올려 보면 그럴지도 몰랐다.
“아무튼 대교 시시티브이에도 다 찍히고 목격자도 많다니까, 이번엔 꼭 잡힐 거야…. 나쁜 놈, 진짜… 진짜, 천벌 받아야 해.”
“형.”
주먹을 꼭 쥐고 부들거리던 한정원이 시선을 들었다.
“김신우 씨 말야.”
“응?”
“병원… 치료는 안 받는대?”
의외의 질문에 한정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무슨 일 있었어?”
“어, 일은….”
…정말 많았다. 많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그가 제게 포옹을 하고, 키스를 퍼부었으며, 성기를 빨아 줬다. 게다가 눈앞에서의 생생한 자위 퍼레이드로 화려한 마무리를 장식했다.
한정원에게 이런 말은 절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정말 미친놈이었다. 아니, 원래도 미친놈은 맞았지만….
돌연 머리가 지끈거려 눈가를 찡그렸다.
“아무튼, 치료받아야 할 것 같은데. 대표님이나 뭐 다른 언질 없었어?”
“으응…. 치료는 무슨, 말 잘못 꺼내면 큰일 나.”
“왜?”
묻는 말에 한정원이 주변을 훑었다. 아무도 없는 휑한 산책로를 꼼꼼히 확인하고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1년 전에, 컨디션 안 좋다고 너무 힘들어하시길래 병원 간 적 있거든. 의사 선생님이 불면증 때문에 수면 부족으로 그런 거라기에…. 박 대표님이 정신과 심리 치료 권했다가 대표실 다 뒤집혔었어.”
“…….”
“배우님 화나면 진짜, 진짜 무서워.”
테이블도 깨지고 화분까지 새로 다 샀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이는 그를 보며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왜? 치료받기 싫대?”
“응…. 아프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싫은가 봐. 아, 이건 그냥 내 생각.”
고개를 끄덕인 한정원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내 시선을 들고 눈을 반짝이며 지한을 응시했다.
“한이 너, 배우님이랑 많이 친해졌지?”
“응?”
“너 엄청 챙기시던데?”
느닷없는 말에 지한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챙기다니. 반대라면 모를까 그가 자신을 챙겨 주거나 한 적은 없었다.
모욕… 같은 걸 챙겨 준 적은 많았지만.
“전혀 아니야.”
단호한 답에 한정원이 배싯 웃었다. 그리곤 홀로 입꼬리를 씰룩거린다.
지한을 만나기 전, 미리 병원비 수납을 처리하고 온 차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사고를 함께하면서 둘은 전보다 관계가 훨씬 돈독해진 듯했다. 얼마나 친해졌으면 보험 처리도 안 되는 병실 사용료까지 내며 함께 있으려고 할까… 싶었다. 지난 3년간 김신우가 어떤 사람인지 봐 왔던 한정원은 감히 그 마음의 크기를 감히 재어 볼 수 없었다.
아무튼 이 정도면 엄청, 엄청. 좋아하는 거였다.
생각을 마친 한정원이 손을 뻗었다. 처음 지한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 듯보였다. 이제 와 말하기 부끄러운 듯하니 모른 척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으이구. 무뚝뚝한 건 여전해. 귀여워.”
“…….”
그가 지한의 볼을 죽 잡아당기곤 아프지 않게 흔들었다.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잔뜩 어린 채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볼을 내어주고 있던 지한이 코끝을 찡그렸다.
“아무튼, 그럼 네가 배우님이랑 가까워졌다고 생각이 들 때, 그때 살짝 말해 보는 건 어때?”
한정원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 김신우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열 정도라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일이었다. 어찌 됐건 일을 좋아하는 한정원으로서도 그가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배우 생활을 지속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시선을 돌렸다.
“가까워졌을 때….”
그는 살짝 찌푸린 채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환자복 차림에 깁스한 팔 위로 검정 점퍼를 걸쳤을 뿐인데, 마치 느와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보스의 오른팔처럼 보였다.
괜스레 코끝을 문지른 한정원이 슬쩍 눈치를 봤다. 지한은 별 반응 없이 한정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춥다. 올라가자.”
“으응.”
고개를 끄덕인 한정원이 힐끗 건물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 탓이다. 살짝 굳어 있는 지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얘는 이제 병실 같이 써야 하는 건 알고 있나?
하기야 김 배우가 일방적으로 병실 합병 같은 걸 요청할 리가 없었다. 어쩐지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듯 보이니 굳이 말은 꺼내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뭐가 되었던 한정원은 아무렴 상관없었다. 두 사람이 점점 친밀해지는 모습이 보일수록, 뿌듯한 마음이 더 크게 일 뿐이었다.
***
문에 들어선 지한은 다소 당황한 얼굴이었다. 널찍한 일인실 병동 안에 커다란 병원 침대가 하나 더 들어와 있던 탓이다. 그를 더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반쯤 세운 침대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책을 읽는 김신우의 모습이었다.
“…여긴, 왜….”
“왔어요?”
김신우가 대수롭잖게 물었다. 여전히 손에 든 책에 시선을 둔 채였다. 눈가를 움칠거리며 한정원을 바라보자, 그 또한 몰랐냐는 듯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눈가를 찡그린 지한이 묵묵히 걸어 들어왔다. 김신우는 표정 변화 없이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며 나긋하게 중얼거렸다.
“날 노리는 놈들이 좀 많아야죠.”
“…….”
“혼자 있다가 칼이라도 맞으면 어떡해요. 무섭게.”
할 말을 잃은 지한이 느리게 눈동자를 굴렸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무정한 얼굴과는 달리 속은 거의 질색 중이었다.
“깁스했다고 경호 안 해 줄 건 아니죠?”
사그락. 책장을 넘기며 묻는 부드러운 물음에 지한이 할 말을 잃었다.
보안 키를 받아야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두 개나 막고 있는 브이아이피 병동이다. 24시간 근무 중인 보안 요원이 배치된 곳에서 칼 맞을 일을 걱정하는 건 그렇다 치고, 꼭 이 넓은 곳에서 침대를 저렇게…. 나란히 붙여 놔야 할 일인가.
점점 굳어지는 지한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한정원은 상황을 피해 쪼르르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터벅터벅 걸어간 지한이 침대 옆에 섰다. 창가에는 원래대로 제 침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좁은 틈만 둔 채, 김신우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모로 눕다가 자칫 눈이 마주칠지도 모르는 모양새였다.
그제야 김신우가 시선을 들었다. 지한의 침대를 느리게 훑으며 입술을 달싹인다.
“불편해요? 공지한 씨 방 침대 크기보다 훨씬 큰데. 바꿔 달라고 할까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답하며 몸을 세로로 돌려 틈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딱 사람 지나갈 만한 크기만 남겨 두었다.
곧 침대 위에 툭 걸터앉은 지한이 곤란한 얼굴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병실 침대를 바꿔 달란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닐뿐더러, 자신은 침대 크기를 말한 게 아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지.
하기야 지금껏 쥐, 칼날, 압정도 모자라 위험한 교통사고까지 크게 났으니 주변이 두려울 만도 하긴 했다. 어처구니가 없긴 하나, 저 철옹성 같은 사람이 무섭단 이유로 이렇게까지 했다니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 소리에 김신우가 시선을 들었다. 영롱한 회갈색의 홍채가 지한의 내리깐 눈매와 입꼬리를 차례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런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뭐 하다 이렇게 늦게 왔어요.”
금세 다시 거둬진 시선이 두꺼운 책으로 향했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누르며 마음을 추스린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걸쳐 있던 겉옷을 벗어 벽 옷걸이에 걸어 놓으며 답했다.
“아, 얘기 좀 하느라고요.”
한 시간 전쯤 도착한 한정원과 커피 한잔 후 잠깐 걸으며 이야기한 게 다였다. 시간이 좀 흐른 줄은 알았으나 벌써 10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무슨 얘기?”
“…그냥…. 이런저런.”
“이런저런?”
틈 없이 돌아온 답에 지한이 의아하게 시선을 들었다. 대화의 뉘앙스가 왜인지 이질적으로 느껴진 탓이다.
“어디서 주물럭대다 온 건 아니고?”
불퉁하게 돌아온 물음에 지한은 눈가를 찌푸렸다. 근본도, 맥락도 없는 말에 또 할 말을 잃는다. 근래 아주 잠시 잊고 있었으나 그는 김신우였다.
잠시 흐르는 정적 사이, 멀리서 한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회사에 들렀다 가야 해서요. 혹시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제가 챙겨다 드릴게요. 지한이도!”
느닷없이 욕실에서 튀어나온 그가 다가오지도 않은 채 멀찍이서 꾸벅 인사했다. 떨떠름한 얼굴의 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후다닥 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보였다.
바쁜 일이 있나. 잠시 고개를 기울인 지한이 다시 김신우를 힐끗 보았다. 아무래도 더는 말을 섞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저는 그럼… 씻고 오겠습니다.”
답 없이 책을 읽는 김신우를 두고, 그는 다시 좁은 틈으로 빠져나갔다. 문을 열자 병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호화로운 욕실이 드러났다.
깁스 지지대를 벗고 병원복 단추를 풀어 내린다. 당분간만이라지만 하필이면 오른손을 다치는 바람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생애 처음 입원해 보는 특실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있었다. 욕조는 물론이고 각종 편의용품과 목욕 가운, 여벌의 병원복도 있었다. 한 편에는 깁스한 환자를 위한 방수 패키지까지 준비되어 있다. 팩을 팔에 그대로 끼우고 조여 놓으면 씻는 동안 물이 하나도 새지 않는 제품이었다. 지한은 이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어깨를 조금 움직이자 어릿하게 쑤셔 왔다. 괜한 생색내고 싶지는 않아 인대가 조금 늘어난 것뿐이라 말했으나, 사실 조금은 아니었다.
의사는 조금만 더 무리했으면 파열까지 갈 수 있던 상황이라며, 당분간은 힘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가벼운 재활 운동을 제외한 근력 운동에는 손대지 말란 말도 덧붙였다.
평소 꾸준히 운동하는 몸인데도, 아직 어깨와 팔을 따라 뭉근한 고통이 욱신욱신 번졌다. 전신의 근육통과 자잘한 타박상은 덤이었다. 물 밖으로 나온 후 손바닥은 거의 헤집어졌을 만큼 피가 흘렀다. 급박했던 당시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특별히 금이 가거나 부러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김신우에겐 실금 하나 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지한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안 삼을 수 있었다. 제 할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 같아 보람찬 기분까지 들었다.
수전을 틀자마자 뜨끈한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금세 몸이 노곤해진다. 물러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피어올랐다.
검은 차. 룸미러 속 악착같이 따라붙던 거친 주행.
하루빨리 그 악귀 같은 놈을 잡아야 했다. 이건 스토킹이나, 안티 팬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완전한 살인미수였다.
혹여 자신이 없었더라면, 김신우가 차를 혼자 몰고 있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흘렀을지 예측하기도 싫었다. 자칫 그가 잘못됐을 경우를 떠올리자 굉장히 불쾌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살갗이 익을 만큼 뜨거운 물줄기에 잡념을 흘려보낸다. 확실히 범인이 잡히기 전까진 김신우를 조금 더 주의 깊게 지켜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샤워를 마친 지한은 새 병원복으로 말끔히 갈아입었다. 방 안에 김신우가 있어 전처럼 편하게 벗고 나올 수가 없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수건으로 물기를 꾹꾹 누르며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침대 위에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김신우를 발견했다. 그는 죽은 듯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방의 불은 환하게 켜진 채였다.
그제야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잠들 줄 알았으면 좀 일찍 씻고 나올 걸 그랬나. 소음에 깰지도 모르니 드라이어를 쓸 수가 없었다. 불은 끄고 자도 되는데. 불면증이 있다더니 오늘은 잠이 잘 오는 모양이었다.
침대 옆에 멈춰선 지한은 가만히 그를 보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잠든 얼굴이 여간 순해 보일 수가 없었다. 둥글게 감긴 눈가 덕에 얼핏 아이 같은 얼굴이 비치기도 했다. 내려간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려 준 그는, 곧 불을 끄고 제 침대로 걸어갔다.
마른 수건을 베개 위에 올렸다. 아직 축축하게 덜 마른 머리 때문이었다. 깁스 지지대를 하고 자는 것은 불편했으나 웬만해선 차고 있는 것이 회복에 좋다고 했으니 두기로 했다.
침대 위에 반듯이 누운 지한이 눈을 깜빡였다. 딱히 잠이 오진 않았으나 함께 자는 이가 잠들었으니 별수 없었다. 곁에선 김신우의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한 침대에서 자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살짝 쳐 놓은 커튼 사이로 둥그런 달이 보였다. 빛나는 달을 보며 지한은 느린 숨을 내쉬었다. 고민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머릿속에 바글바글 생각을 짊어진 개미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대부분은 김신우에 관한 것들이었다.
처음 제 약점을 쥐고 빈정거리던 김신우는 비열했다. 상자를 든 채 희게 질린 김신우는 의외로웠으나 여전히 싫었다. 고맙다며 호기로운 미소를 짓던 김신우는 재수 없긴 했으나 밉지는 않았으며, 달빛 아래서 눈물을 뚝뚝 떨구던 남자는 유약하고 애달파 보였지만…. 그 또한 김신우였다.
그리고 대교 사고에서 보았던 김신우는…
하아.
눈을 감으며 깊은숨을 내쉰다. 짙은 눈썹 가운데로 실금이 그였다. 이어지던 생각이 곧 다른 곳으로 흐른다.
그 새끼가 빨리 잡혀야 하는데.
약한 사람을 쥐고 흔드는 놈들은 전부 독하게 벌 받아야 마땅했다. 어차피 카메라에 차 번호판도 다 찍혔을 거고, 신원 파악도 쉬울 것이다. 우선 퇴원하면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지한의 머릿속이 차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몰려오는 수면 속으로 천천히 잠기기 시작했다.
지한은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요한 병실 침대 위 곤히 잠든 그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불현듯 자세가 불편하게 느껴져 모로 눕는다. 곧 품 안에 포근하게 잡히는 것을 자연스레 끌어안았다.
살짝 찬바람이 스미는 병실이었다. 품 안의 바디 필로우는 푹신하고 따뜻했다. 가볍게 안았을 뿐임에도 착실하게 몸에 감겨 오는 것이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병원에… 이런 게 있었나.
잠결에 스친 생각에 지한이 무거운 눈을 들었다. 눈 아래로 향긋한 갈색 머리칼이 넘실거렸다.
아직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도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사이 품 안의 것은 제멋대로 더 파고들고 있었다. 손바닥 아래에 단단한 등이 감겨 있었다.
“…신우.”
설핏 눈가를 찌푸린 지한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몇 번 겪어 보았다고 벌써 상황 파악이 끝났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못 들은 척 제 품에 안겨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지한이 낮게 잠긴 목소리를 냈다.
“김신우 씨.”
“…깼어요?”
그제야 느리게 고개를 든다.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아래로 길게 내리깐 그의 속눈썹이 보였다. 사태 파악이 끝난 지한은 긴 숨을 내쉬었다. 잠깐 놀란 탓이었다.
밖이 새카만 걸 보니 아직 한밤중이다. 지한은 노곤한 몸을 늘어뜨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자다 일어나서인지 전신에 근육통이 욱신욱신 번졌다. 긴 행군이라도 끝마친 듯 아주 피로한 상태였다.
“여기서 뭐 해요.”
눈을 감은 채로 묻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김신우 씨.”
옅은 숨을 흘린 지한이 재차 그를 불렀다. 이제 그를 다루는 데에는 아주 조금 익숙해져 있었다.
“형은 뭐 해요.”
불퉁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예상외의 질문에 지한이 느리게 눈을 떴다. 시선을 내리자 그가 희미하게 짜증이 서린 얼굴이 보인다. 한숨을 푹 내쉰 김신우가 살짝 찡그렸다.
“형은, 왜. 왜 그래요?”
“…뭐가….”
난데없이 쏘아붙이는 말에 지한이 말끝을 흐렸다. 자다 깨는 바람에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 사이좋게, 나란히 누워 있어요? 여기 1인실이잖아요. 왜 이러고 있어요?”
입술을 꾹 당겨 문 채 반질한 눈동자로 노려본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지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답해 봐요. 속상하게 다치기나 하고. 그것도 왜 하필… 같이 다쳐요, 둘이 무슨 사이예요?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같이 잘 리가 없는데.”
“…….”
“형. 지금 바람피워요? 나랑만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지한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늘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눈매가 화가 난 듯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그는 김신우의 난해한 말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며, 멀거니 밤색 눈동자를 주시했다.
“…무슨.”
깜박, 깜박. 지한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려 눈을 서너 번 감았다 떴다. 그가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동안 김신우의 얼굴은 점점 더 상기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
“나랑 키스도 했으면서, 내가 자지까지 빨아 줬는데 어떻게 사람이.”
턱. 지한의 손바닥이 그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와락 찌푸린 눈가로 주변을 느리게 훑었다. 깊은 새벽 병실 안에는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지한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다. 뭐가 됐건 그가 지금 쏘아붙이는 말들은 시퍼런 새벽에 자다 일어나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시선을 내려 김신우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희멀건 달빛이 어린 눈매는 얄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손바닥 아래에서는 씩씩거리는 콧숨이 느껴진다. 화를 내는 것 같은데 한정원의 말처럼 딱히 무서워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쩌면 몸이 피곤해서일지도 몰랐다. 지한은 그저 다시 잠들고 싶었다.
“김신우 씨를 노리는 사람이 있어요.”
“…….”
“교통사고가 났고, 내가 당신 경호원이니까 같이 다치는 건 당연하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김신우는 고요히 눈동자를 굴렸다. 지한의 얼굴을 살피는 듯했다.
“바람난 게 아니라는 거죠?”
손바닥 아래에서 벽에 갇힌 듯한 음색이 울려 퍼졌다.
“바람….”
지한이 말꼬리를 흐렸다.
어째서 이야기가 거기까지 간 거지. 동정이니 뭐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굴더니 진심으로 내뱉는 말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지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아무리 다른 인격이라 하더라도 느닷없이 그와 애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김신우 씨,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에요.”
말을 끝내기도 전, 그의 눈가가 재빠르게 일그러졌다. 금세 붉어진 눈자위로 순식간에 투명한 막이 생긴다. 기다란 속눈썹을 한 번 깜박였을 뿐인데 별안간 차오른 눈물방울이 뚝 흘러내렸다. 그는 완전히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지한은 당혹스러움에 숨을 삼켰다.
“왜… 울고….”
그제야 입을 가로막고 있던 손을 조급히 치웠다. 본능적으로 김신우의 하얀 뺨을 쥔 채, 붉게 부푼 눈가를 엄지로 닦아냈다. 그러나 눈물이 지워진 궤적을 따라 금세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이, 형이. 나한테 키스하고, 내가, 자지도 빨아 줬는데. 사귀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나는. 형이 다 처음이었는데.”
그가 울먹거렸다. 어울리지 않는 대사와, 또 절대 어울릴 수 없는 흐느낌이 너무도 잘 어우러지는 바람에 지한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어떻게….”
지난번 만남과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열 살은 어린 순진한 연하를 꾄 뒤, 볼 장 다 봤다며 끝내 버리는 파렴치한이 돼 버린 기분이었다. 느닷없는 극적인 상황 연출에 지한은 입을 다물었다.
어느 것도 자신이 원해서 한 것은 없었다. 하나 여기서 그런 말을 해 봐야 좋지 않은 상황만 초래하리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침착하자. 섣불리 말을 뱉어선 안 된다. 지한은 또다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며 그를 달랬다.
“…김신우 씨. 우선 진정하시고.”
“그러지 말아요.”
낮은 음색이 말끝을 뚝 잘랐다. 지한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김신우가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깁스한 팔을 살짝 들어 올린 지한이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질투 나. 너무 짜증 나요.”
“…….”
“그런 거 진짜 싫으니까, 나만 만나요.”
가슴께에 얼굴을 묻은 그가 먹먹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얇은 병원복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한은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하여 빠르게 정리를 시작했다.
그는 지금 자기 자신을 질투하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렵긴 하나, 그는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본인이 두 개의 자아가 완전히 분리된 상태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이런 불같은 사랑을 느낀 것인가.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빗장뼈에 습한 숨결이 스며들었다. 김신우는 뜨겁게 젖은 숨결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나름대로 진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걔랑 뭐 했어요? 나랑 똑같이, 손도 잡고, 안고, 키스도… 그런, 그런 나쁜 짓도 다 했어요?”
물으며 가슴께에 얼굴을 비벼 온다. 딱히 틀린 말은 없었으나 그간 벌인 일들을 이런 식으로 나열해 놓으니 뉘앙스가 이상했다. 게다가 나쁜 짓이라니. 그렇게 치면 본인 또한 제게 나쁜 짓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
지한은 머뭇거렸다. 자다 일어나 굳어진 사고 회로가 느리게 돌아갔다. 키스나 포옹은 한 적 없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김신우에게 펠라티오를 해 준 전적이 있었다.
거짓말이라도 해 줘야 하나. 여기서 까닥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무언가 아주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머릿속에 그가 설게 우는 모습과 그 옆에서 당황하는 제 모습이 떠올랐다.
“했어요?”
물으며 돌연 젖은 눈을 치켜든다. 가닥가닥 갈라진 속눈썹이 비에 젖은 듯 처연한 분위기를 풍겼다.
뭘 했냐는 거지.
알 수 없는 질문에 지한이 설핏 미간을 모았다. 그의 불안한 눈빛이 흔들린다. 초조한 시선이 지한의 새카만 눈동자로 스며들었다.
“…섹스 …했어요?”
발음까지 뭉개가며 조심스레 묻는 얼굴은 쓸데없이 심각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지한은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했냐고 묻잖아요. 형.”
하얀 얼굴이 어느 틈에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얇은 병원복 밑으로 차가운 손가락이 들어와 단단한 허리선을 매만진다. 어깨를 움칠 떤 지한이 시선을 내려 그 손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의 눈을 마주했다.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뺨의 김신우가 지한을 원망스레 노려보고 있었다. 그 짙은 눈빛 사이,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또 뚝 떨어졌다. 눈가를 찌푸린 지한은 헛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처음처럼 그렇게 놀랍지도 않았다.
“김신우 씨.”
“…….”
“그런 거 안 했으니까, 진정하고 뚝 그쳐요.”
말하며 옷 속으로 들어온 그의 팔을 빼냈다. 속으로 혀를 차며 손바닥에 잔뜩 스민 물기를 병원복에 문질러 닦았다.
이건 무슨 유치원생 달래는 것도 아니고….
그 말에 김신우가 눈을 치켜떴다. 젖은 속눈썹이 달빛에 반짝였다.
“정말이에요?”
금세 화색이 도는 얼굴을 보며, 지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닦아내기가 무섭게 눈자위로 차오르던 눈물도 그쳤다. 말 한마디에 이토록 감정이 좌지우지하는 걸 보아하니 그는 생각보다 더 단순한 타입인 듯했다.
해결한 건가.
허탈한 숨을 뱉으며 건조한 눈을 감는다. 누군가 바윗덩이로 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고 욱신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남자를 치우고 그냥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그만큼 몸이 무척이나 피로했다.
“형.”
낮은 목소리가 턱 아래에서 속삭였다. 지한은 제품 안으로 파고드는 그의 단단한 팔뚝을 인지하면서도 말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어차피 하지 말란다고 안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다 또 울면 달래 줘야 하고….
아이 같은 성향을 파악해 버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처음보다 그를 대하기가 훨씬 편해진 기분이었다. 느닷없이 이런저런 짓을 당했다고 하나, 조건 없이 퍼붓는 애정과 고분고분한 호칭만으로도 밤의 김신우에게는 확실히 친근감이 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
“형은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모르는 척 잠들려고 했으나 그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자신이야 매일같이 보는 사람이 김신우인데 보고 싶어질 리가 없었다. 아니 떨어져 있다고 해도 별로 보고 싶어질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예. 보고 싶었습니다.”
눈을 감은 지한은 고저 없이 답했다. 지금 솔직하게 말해 봐야 득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밤마다 이런 식이라면 어쩔 수 없이 치료를 권해야 한다. 하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그런 얘기를 나눌 정도로 김신우와 친해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거 녹음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문제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 이제 사귀는 거 맞아요?”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이런 면에선 또 틈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답이 없는 지한을 보며 김신우가 재차 물었다.
“네?”
품 안에서 따끈한 것이 꼼지락거린다. 그는 또 제 몸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얇은 병원복 위로 그의 살갗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이 남자. 실제 남자를 좋아했던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들어 있던 정체성이 또 다른 인격에서 나타난 걸까. 혹시 저도 모르는 성향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아무나 문란하게 만나고 다니는, 그런….
무겁게 늘어지는 정신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요.”
지한은 대충 답하며 작게 하품을 했다.
아니라고 했다간 또 울겠지. 평소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냉혈한 주제에, 울어도 너무 많이 운다. 누가 김신우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할까. 어쨌든 그도 김신우의 일부일 텐데, 이토록 슬픔이 많은 사람이라니 참 아이러니했다.
“이제 가서 주무세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느리게 말했다. 자다 말고 일어나서 한바탕 신경을 쏟고 나니 온몸이 물에 젖은 듯 무거워졌다. 아무래도 내일은 물리 치료를 좀 더 받아야 할 듯했다.
“네…. 좋아요. 진짜 좋아요.”
작게 중얼거리던 그가 또 허리를 꽉 끌어안아 왔다. 불현듯 아래로 단단하게 부푼 하반신이 꾹 맞닿는다. 확연한 감촉에 눈가를 찡그렸다. 느리게 눈을 뜨자, 그가 턱 끝에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어디 아파요? 내가 주물러 줄까요?”
답을 하기도 전 단단한 손끝이 지한의 등줄기를 따라 꾹꾹 지압하기 시작했다. 척추를 따라 어릿한 고통이 피어났다. 안 그래도 무리하게 쓴 탓에 뭉쳐 있던 근육이었다.
“괜찮, 으….”
말리려던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악력이 세서 그런지 금세 시원해졌다.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가만히 움직임을 멈추자, 김신우가 작게 웃었다.
“내가 풀어 줄게요. 나 잘해요.”
지한을 정면으로 눕히고 위로 올라탄 그는, 양 무릎으로 딛고 선 채 두 손으로 승모근부터 꾹꾹 주무르기 시작했다. 지한은 그가 하는 짓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누가 본다면 흡사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누가 이런 자세로 안마를….
그의 눈가 위로 갈색 머리칼이 살랑인다. 저를 내려다보는 적나라한 눈길에 괜스레 민망해진 지한이 눈을 감았다.
“아.”
찌릿한 아픔과 함께 화한 느낌이 번졌다.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주무르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스포츠나 타이 마사지 등을 즐겨 받는 편이었다. 근래엔 여건이 되지 않아 가지 못했는데 뜻밖이었다.
승모근을 따라 주무르던 김신우가 베개 사이 목덜미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바닥 전체로 뒷목을 누르며 지압하기 시작했다. 뒤통수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시원함이 퍼져 나갔다. 살짝 턱을 치켜든 지한이 눈을 떴다 감았다. 처음으로 그가 쓸모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시원해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울린다. 지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귀여워. 머리는 왜 그래요.”
작게 웃어 보인 김신우가 까치집이 된 지한의 머리를 보았다. 그가 먼저 잠드는 바람에 제대로 말리고 자지 않은 탓이었다.
“…….”
지한은 별 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답해 줄 기운이 없었다.
제 위에 올라탄 채 안마를 해 주는 모양새는 퍽 이상했으나, 어깨선을 따라 깁스하지 않은 팔까지 주물러 주는 손길은 아주 좋았다. 잠이 솔솔 올 정도였다. 잠시 원래의 김신우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고요한 적막 사이로 둘의 숨소리만 이어졌다. 지한은 노곤 노곤해지는 기운을 느끼며 몸에 긴장을 풀었다. 전신이 침대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다.
“형 덕분에…. 요즘 내가 살아 있는 걸 느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곧 뺨에 말랑한 것이 닿는다. 보지 않아도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걸 알 수 있었다.
뭐라 답을 하기도 전, 곧 미지근해진 손가락이 느슨한 바지 사이로 들어왔다. 손바닥으로 드로즈 위를 적나라하게 문지르는 손길에, 무겁게 눈을 뜬 지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신우 씨, 그건 하지 마세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깁스한 팔등으로 그의 가슴께를 밀어냈다. 잠시 밀려났다가 다시 상체를 숙인 김신우가 지한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우리 사귀는 사이라면서요.”
“…….”
“연인 사이에는 이런 거 해야 하잖아요. 아니에요?”
다소 심각한 목소리였다. 순진한 아이처럼 굴다가도, 이럴 때 보면 도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춰 주어야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예측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입을 열었다.
“…그건, 읏.”
불현듯 들어온 손가락이 지한의 좆을 콱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지한이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팔 하나는 깁스를 하고 있었기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할게요. 형 아프잖아요.”
김신우는 달래듯 나긋하게 속삭였다. 손바닥으로 말랑한 좆의 표피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목덜미에 입을 맞춰 온다. 피곤한 몸과 별개로 자극당한 성기가 의도치 않게 단단해지고 있었다.
“으….”
지한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고요한 병실 안, 제 위에 올라타 젖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김신우가 돌연 너무도 야하게 느껴졌다.
“기분 좋아요?”
단단한 엄지가 귀두 끝을 문질렀다. 몇 번 만져 줬을 뿐인데 미끈한 액이 흘러나왔다. 지난번처럼 무턱대고 강한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닌, 느긋하고 여유로운 손길이었다.
“하…. 으. 잠깐….”
좆을 감싸 쥔 커다란 손바닥이 아래위로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무르게 풀어진 몸은 남이 주는 익숙한 쾌감을 즐기고 있었다. 몽롱한 정신은 조금 술에 취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아, 형. 같이 해요.”
아래에서 옷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발기한 좆 위로 뜨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지한은 무거운 눈을 들어 아래를 보았다. 전에 본 적있던 붉은 좆이 눈앞에 바짝 기립해 있었다. 체모가 없고 매끈한 기둥은 벌써 몇 번 보아도 적응하기 어려운 크기였다.
지한은 반사적으로 문 쪽을 보았다. 김신우의 침대 옆으로 넓고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데다, 이 새벽에 누가 들어올 리는 없었으나 신경이 쓰였다.
“다른 곳 보지 말아요.”
돌연 아래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허리를 움칠 떨었다.
“으읏.”
“나만 봐요.”
중얼거린 그가 한 번에 두 개의 좆을 쥐고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서 흘러나왔는지 모를 선액이 기둥을 타고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덕분에 자지를 잡고 흔들 때마다 찔걱찔걱 잔뜩 젖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으….”
지한은 무엇에 홀린 듯 눈을 질끈 감고 이를 꽉 물었다. 뜨거운 살덩이들이 마찰할수록 야릇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아, 으. 형….”
한 손을 시트 위로 지탱한 김신우가 바지런히 좆을 문질렀다. 무릎을 세우고 누운 지한이 턱을 비스듬히 든 채 입술을 짓깨물었다. 열이 올라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움칠움칠 떨렸다.
“하아, 하. 키스, 할래요.”
“읍….”
답을 하기도 전 뜨거운 입술이 맞물렸다. 숨을 들이켬과 동시에 뜨거운 혀가 가득 밀려 들어왔다.
“하, 우읍, 으….”
춥, 츠읍. 쭙. 쉴 새 없이 점막을 빨아대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거칠고 진득한 입맞춤 탓에 입술 주위가 엉망으로 젖었다.
탁, 탁탁탁! 김신우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좆 두 개를 쥐어짜듯 문질렀다. 점점 드세지는 손놀림과 함께 적나라한 살 기둥의 마찰 소리가 짙어진다. 입술을 떼고 턱을 치켜든 지한은 본능적으로 허공을 향해 허리를 들썩였다. 여전히 눈은 꽉 감은 채였다.
“아, 좋아요. 형. 쌀 것, 같아.”
“하, 윽… 그만.”
지한은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눈앞에서 전기가 번쩍번쩍 터지는 듯했다. 이렇듯 강렬한 악력으로 좆을 흔들어 본 적이 없었다.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퍼진다. 이내 뜨겁고 질척한 살덩이가 오른쪽 귀 안에 가득 문질렸다. 철썩대는 젖은 소리와 함께 소름 같은 쾌감이 번졌다.
“형, 후으. 뒤로, 해 본 적 있어요?”
낮고 짙은 숨소리가 점점 더 야하게 들려왔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찡그렸다.
“윽, 하아. 무슨.”
“없는 거죠, 아직. 이것만, 써 봤잖아.”
축축이 젖은 회음을 스치는 손가락에 지한이 몸을 움칠 떨었다. 그러나 답을 할 정신이 없었다. 절정이 코앞이었다. 뜨거운 숨을 훅 삼켰다. 허벅지 안쪽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저도 모르게 발끝을 꽉 오므렸다.
“아, 멈, 그만. 씹. 흐으.”
“싸도 돼요, 형. 같이 가.”
김신우의 목소리 또한 잔뜩 거칠어져 있었다. 더 말할 새도 없이 귀두 끝에서 정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김신우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꿀렁거리는 두 개의 좆이 동시에 진득한 액을 툭툭 뱉어냈다.
“으흑….”
“아… 존, 진짜, 좋아요. 하아.”
제대로 걷어 놓지 않은 병원복 위로 희뿌연 액체가 점점이 스며들었다. 정액으로 범벅 된 손바닥은 사정이 끝날 때까지 두 개의 성기를 주물렀다.
지한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고양된 흥분에 가출해있던 정신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찬찬히 상체를 숙인 김신우가 지한의 젖은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피할 수도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일렁이는 갈색 눈동자는 어두운 밤에 보아도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좋아해요.”
낮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짙은 눈빛과 함께 숨결 섞인 목소리가 속삭인다.
“좋아한다고요.”
지한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수도 없는 고백을 받아 봤으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몸과 얼굴을 맞댄 채로 저런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격정적이었던 행위의 여파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한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 채 눈만 느리게 깜박였다. 입술 사이로 가쁘게 흘러나오던 숨이 차차 가라앉고 있었다.
“형….”
김신우가 가지런한 입매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지한은 가만히 그의 또렷한 시선을 마주하며 숨을 죽였다. 붉은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작게 속삭였다.
“처음은, 내가 따먹을 거예요.”
“…….”
“알겠죠?”
할 말을 잃고 멀거니 그를 보는 지한의 입술 위로, 다시 말캉한 입술이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