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2권) (6/14)

5.

회식 장소는 넓은 룸이 구비된 한우집 ‘우가옥’이었다. 휘황찬란한 정원을 갖춘 한옥을 모티브로 만든 이곳은 최고급 숙성 소고기를 취급하는 곳이다. 직원들에게는 헉 소리 나올 가격이었으나, 박 대표에겐 껌값도 아닐 터였다.

룸에 들어선 지한이 주변을 훑었다. 자리에는 오다가다 얼굴만 몇 번 보았던 소속사 직원들과 미리 와서 자리 잡은 티에이디 경호 직원들이 보였다. 몇 마디 말을 나눠 보니 대부분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오셨습니까, 앉으시죠!”

장준혁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지한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김신우 또한 지한의 옆 좌석에 앉았다. 공석으로 비워 놓은 박 대표의 테이블에 앉겠거니 했건만 의외였다. 장소 섭외부터 시작해 자잘한 뒤처리를 맡은 한정원은 무얼 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빴다.

“어어, 다들 시간 맞춰 왔네! 앉아, 앉아.”

박 대표가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주변 직원들과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지한은 그 옆에 따라 앉는 한정원을 흘긋 보았다. 주량으로 한 가닥 한다는 박 대표 옆에서 주는 대로 마시다 잔뜩 취할 것이 눈에 훤했다.

“소주 괜찮으십니까?”

“아, 예.”

공손하게 술병을 든 장준혁이 김신우와 지한의 술잔을 차례로 채웠다. 옆자리엔 앳된 얼굴의 직원도 있었다. 이름이 이지운이라는 남자는 헤실헤실 웃는 상에 순한 눈매를 가졌는데, 병역 시절 지한이 예뻐하던 맞후임과 닮아 보였다.

“자, 다들 고생 많았고! 많이들 들어요.”

간단한 건배사와 함께 연말 맞이 회식이 시작되었다. 갖가지 밑반찬들과 함께 마블링이 화려한 생고기가 나왔다. 원래 이곳은 직원이 고기를 구워 주는 곳인 듯했으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지운 탓에 따로 오지는 않았다.

“많이 드세요.”

나직이 속삭인 김신우가 살짝 웃어 보였다.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지운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와. 배우님은 실물이 진짜 최고십니다.”

“화면발은 별론가요?”

김신우가 속눈썹을 길게 내리깔고 웃었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이지운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화면에서도 최고신데 실물이 더 빛나십니다!”

엄지손가락까지 치켜들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지한은 시선을 내리깐 채 쌀밥을 퍼서 우물거렸다. 빛은 무슨. 그런 외모 따윈 다 쓸모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공지한 씨.”

갑작스러운 부름에 눈을 들자, 술병을 든 김신우가 웃어 보였다.

“오늘은 같이 마셔 줘요?”

그가 손에 든 술병을 까닥였다. 카메라만 있었다면 소주 광고를 찍는 중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또 근무 중이라 안 돼요?”

“아닙니다.”

고개를 틀어 채워져 있던 잔을 비우곤 김신우 쪽으로 내밀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씁쓸함에 미간이 좁아졌다. 술은 그럭저럭 잘 마시는 편이었으나 즐겨 마시진 않았다.

“지한 씨, 특전사 출신이라면서요? 장 팀장님한테 들었습니다.”

“야 야. 네가 그걸 그렇게 말해 버리면 내가 지한 씨 얘기 다 하고 다니는 것 같잖아.”

장준혁이 팔꿈치로 그를 툭 치자 이지운이 실실 웃었다.

“예? 맞잖아요. 팀장님 지한 씨 엄청 좋아해요, 아주 맨날 얘기하십니다. 어제는 검색도 하시던데요?”

“야야! 지운아! 부끄럽게 왜 그러냐.”

난데없는 말에 지한이 먹던 것을 삼켰다. 시선을 드니 장준혁이 멋쩍게 웃어 보인다. 쉬는 시간 틈틈이 이것저것 물어오기에 몇 가지 답해 줬던 기억이 났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불굴의 검은 베레! 단결! 아닙니까?”

웃음기 어린 얼굴의 이지운이 주먹 쥔 팔을 절도있게 흔들었다.

“하하, 저 사실 검은 베레모 멋있어서 지원했다가 떨어졌거든요. 체력 검정이 생각보다 너무 빡세더라고요…. 제 친구 중엔 들어갔다가 훈련 기간에 포기하고 나온 놈도 있어요.”

넉살 떠는 모습에 지한이 짧게 웃었다. 그가 전역한 특전 사령부는 한때에 특수대원을 배경으로 한 모 드라마 열풍으로 지원이 폭주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 아주 달랐다.

“원래 운동하던 사람 아니면 힘들어요. 전 어릴 때부터 계속 운동해 와서….”

“검정 조건에 입이 다 벌어지더라고요. 붙는다고 끝도 아니라던데. 진짜 진짜 멋있으십니다…. 전 그냥 지오피 지원해서 다녀왔거든요.”

볼을 긁적이며 하는 말에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차이가 있더라도 어느 부대든 안 힘든 곳은 없었다.

“거기도 최전방이라 만만치 않잖아요. 힘드셨겠는데요.”

“에헤이. 그래도 특전대원만 하겠습니까!”

눈을 크게 뜨며 과장되게 손사래 치자, 지한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낮게 웃었다. 싹싹한 그들 탓에 생각보다 즐거운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했거든요!”

하나둘 술이 들어가고 슬슬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쉴 틈 없이 떠드는 장준혁과 이지운의 수다에 동조하며 열심히 먹던 지한의 앞에 잘 익은 고기가 놓였다.

시선을 들자 김신우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집게를 든 채 살짝 웃고 있었다.

“잘 먹네. 내가 사 주는 건 깨작거리더니.”

노릇하게 구워진 채끝살을 바라보며 지한이 먹던 것을 꿀꺽 삼켰다.

이미지 관리라도 하는 건가. 흘끔 주변을 훑어봤지만, 기껏해야 정신없이 떠들고 있는 티에이디 소속 직원들뿐이었다.

괜한 생각을 접어 두었다. 그가 이미지 관리를 하든 말든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생각을 지운 지한이 그가 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씹었다. 입 안에서 고소한 육즙이 터지며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앉아 계시니까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습니다. 그, 그 한 쌍의 잉꼬부부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늘어지는 말투와 함께 이지운이 헤벌쭉 웃어 보였다. 얼굴이 벌써 불그죽죽한 것이 술이 좀 된 듯했다.

슬쩍 김신우의 눈치를 본 장준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지한과 제법 붙어 다니던 그는 가까이서 김신우의 인성질을 몇 번 목격한 전적이 있었다.

“왜… 배우님은 그 천상의 여신 비너스 같은 느낌이라면… 지한 씨는 약간 싸한 느낌이 지하세계에서 온 하데스, 아야. 왜 그러십니까….”

장준혁이 이지운의 발등을 지그시 밟았다. 하나 이지운은 취기가 오른 얼굴로 실없는 말을 줄줄 읊어댔다.

“하하, 지운아.”

“네에. 블랙 앤 화이트랄까요. 대비 효과가….”

돌연 웃음을 터뜨린 김신우가 빙긋 미소 지었다.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지한은 물을 들이켰다.

“아무튼, 부럽습니다. 아까 연락처도 몇 번 받으셨죠? 어느 분이 마음에 드세요? 저는 첫 번째 여성분이 아주 예쁘시던데…. 흰 원피스 입으신 분이요. 연락해 보실 겁니까?”

이지운이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한은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았다. 정신이 없어 챙겨 놓았던 선물을 열어 볼 생각도 못 했다.

“아…. 아뇨, 안 할 겁니다.”

슬며시 고개를 젓자 이지운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요? 혹시 썸녀 있으십니까? 하긴, 없는 게 말이 안 되죠. 이 피지컬에, 이 외모에…. 이, 빛나는…. 크으.”

그는 손짓까지 해가며 과장되게 감탄했다. 시선을 내린 지한이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바로 옆에서 김신우가 듣고 있었다. 이런 얘기는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닌데, 연애할 생각이 없습니다.”

대충 눈짓하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리자 본의 아니게 한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벌써 발그레해진 얼굴로 여자 직원들과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불현듯 속이 답답해졌다.

“잠시, 담배 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게 이런 주제의 시선이 몰리는 것도 부담스러울뿐더러 담배가 고팠다.

쌀쌀한 밤공기를 헤치고 나와 흡연 구역에 섰다. 뒤뜰에 마련된 곳은 조선 시대 양갓집처럼 잘 꾸며 놓은 정원이었다. 날씨 탓인지 알알이 이슬이 맺힌 인공 잔디 사이론 연잎이 띄어진 자그마한 연못도 보였다. 이런 곳에서 흡연해도 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필터를 잘근 물고는 고개를 숙인 채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며 두 손가락으로 집어 내리자, 희뿌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후우….”

턱을 젖히고 새카만 하늘을 응시했다. 또렷하게 떠오른 노란 달이 눈에 들어온다. 왜인지 초라해 보이는 초승달이었다.

‘왜요? 혹시 썸녀 있으십니까?’

돌연 이지운의 물음이 귓가에 울렸다.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는 누군갈 만나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한정원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정적인 생각이 싹트는 걸 저 또한 느끼고 있었다. 한 달에 몇 번 만나지도 못한 채 혼자만 고이 간직할 때와는 달랐다.

매일 부대끼고 눈을 맞출 때마다 이루지 못할 외사랑의 윤곽이 선명해진다. 뭣 모르고 손을 댄 진통제의 부작용처럼 씁쓸한 감정만 몰려들었다.

“또 청승 떨고 있네.”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문득 시선을 돌렸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은 김신우가 느리게 걸어오고 있었다. 담배를 든 손을 자연스레 뒤쪽으로 물리며 한 손으로 연기를 흐트러뜨렸다.

“그냥 드라마 한 편 찍지 그래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선 지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또 시작이었다. 좋아한다던 술이나 마실 것이지, 굳이 나와 왜 제시간을 방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비흡연자였다.

설핏 인상을 찡그린 지한이 피우던 담배를 마저 물었다. 시야로 시선이 느껴졌으나 늘 그랬듯 쳐다보지 않았다.

“이리저리 좋다는 놈들 투성인데 뭐가 그렇게 아쉬워요?”

“…….”

“뭐 대단한 사랑이라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한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정말 대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한숨과 함께 짙은 연기를 뿜어냈다.

“그렇게 쉽게 말씀하지 마세요.”

“싫은데.”

또 시작이다. 이유 없는 빈정거림.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짧아진 꽁초를 비벼 껐다. 재떨이에 툭 떨궈 넣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다시 담뱃갑을 꺼냈다. 지금은 그다지 그를 상대해 주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세요. 춥습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손에 쥔 담뱃갑을 툭툭 흔들었다. 애당초 담배를 피우러 나온 것도 아닐 테니 굳이 여기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필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데, 시야로 시선이 느껴졌다. 라이터를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드는 찰나 김신우가 손을 뻗어 왔다.

단단한 손이 다소 드세게 지한의 턱을 그러쥐었다. 그대로 힘을 주니 고개가 비스듬히 들렸다. 따라 지한의 일그러진 시선도 그에게 향했다.

김신우의 손끝이 담배를 문 지한의 입술을 스쳤다. 엄지로 입매 끝을 꾹 눌러 올린다. 무심한 낯빛 위로 입꼬리만 슥 밀려 올라갔다. 느닷없는 행동에 지한의 미간 위로 실금이 그였다.

“친절하게 대해 줘요.”

김신우는 나직이 속삭였다.

“나한테 잘 보여야 하잖아.”

“…….”

“안 그래요? 공지한 씨.”

말하며 눈가를 살짝 휘어 웃었다. 노란 달빛이 차분히 내려앉은 미소가 환하게 빛난다. 새벽이슬 같은 얼굴이었다.

지한은 찌푸리듯 눈을 가늘게 떴다. 감정 없는 시선이 희고 부드러운 뺨을 스치고, 옅은 밤색 눈동자를 고요히 마주했다. 지한의 눈가가 작게 씰룩였다. 달빛이 은근하게 어린 김신우의 얼굴을 보니, 불 꺼진 방 안에서 눈물을 떨구던 처연한 이가 불쑥 떠오른 탓이었다. 또 속이 울렁거렸다.

하아. 속으로 낮은 숨을 삼킨다. 그는 제 턱을 쥐고 있는 김신우의 손목을 탁, 하고 잡았다. 마주한 눈동자를 피하지 않으며, 그대로 힘을 주어 서서히 아래로 내렸다. 움직임을 따라 김신우의 눈길도 옮겨 갔다.

잡고 있던 손을 툭 떨어뜨린 지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물고 있던 담배를 잘근 씹고는, 라이터를 딸각이며 불을 붙였다.

파슷, 소리와 함께 동그란 불이 붙었다. 찡그린 얼굴로 연기를 빨아들인 지한이 고개를 돌리며 후우, 기다란 연기를 내뱉었다. 기분이 나빠 보일 만큼 냉랭한 표정이었다.

찬 바람이 뺨을 스쳤다. 잠시간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새카만 허공을 응시하던 지한의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잘 보이려면….”

지한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런 방법 따윈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괴한에게서 구해내 줬음에도, 다친 자신을 상대로 무릎을 꿇기고 굴욕적인 행위를 시킨 사람이 바로 김신우였다.

“제가 김신우 씨한테 잘 보일 수는 있는 겁니까?”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지한은 알고 있었다. 그와 자신 사이에 타협점은 없다는 걸. 어떤 짓을 해도 그에겐 꼴 보기 싫은 놈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앞이 뻔히 보이는 얘기였다.

예상외의 질문에 김신우가 눈썹을 치켜떴다. 지한은 별 표정 변화 없이 희뿌연 연기를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는 묵묵히 날카롭게 뻗은 지한의 옆모습을 주시했다. 마치 손톱만 한 감정이라도 샅샅이 발라내려는 듯, 집요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수려한 이목구비 사이로 어른거리는 흰 연기가 무대 효과처럼 흩어졌다.

그렇게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짧은 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던 지한이 고개를 숙였다. 꽁초를 비벼 끄곤 희멀건 숨을 내뱉는다. 어차피 답을 기다린 건 아니었다.

“들어가시죠. 감기 걸려요.”

감정이라곤 찾을 수 없는 무심한 얼굴에 김신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대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지한을, 김신우가 느리게 돌아보았다.

***

“아무튼, 지한 씨.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바로 눈치채고 몸을 던져요. 거의 빛의 속도 아닙니까? 1초? 0.5초?”

“그러니까요! 반사 신경 엄청 나십니다. 말 나온 김에 근육 한번 만져 봐도 됩니까?”

자리에는 지한의 얘기가 한창이었다. 장준혁과 이지운은 마치 지한의 팬이라도 되는 양 칭찬하기 바빴다.

“그걸 네가 왜 만져. 아무튼 회식 자리에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정말 스카웃, 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생각 바뀌시면 꼭 우리 회사로 오세요.”

“맞습니다. 지한 씨, 혹시 불편하지 않으시면 형이라고 불러도 됩니….”

“야아, 이지운아. 1절만 해라 1절만. 지한 씨 부담스러워하시잖아.”

쉴 틈 없이 나누는 칭찬에 민망하게 웃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주목받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어지러운 테이블 위로 수십 개의 술병이 줄지어 늘어졌다. 지한 또한 장준혁과 이지운이 들이미는 술잔을 족족 들이켜다 보니 제법 얼큰하게 취기가 올랐다. 오래간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먹고 마시는 것도 제법 기분 전환이 됐다.

밖에서 들어온 후 김신우는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 둘러보니 박 대표의 옆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주 가끔 그쪽을 스치듯 바라보았으나, 단 한 번도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대표님, 잘 먹었습니다아!!”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회식은 자정이 지나서야 마무리되었다. 한정원이 허리를 90도로 접으며 비틀거리자, 뒤에서 그를 붙든 지한이 덩달아 인사를 했다. 그래도 대표 앞이라고 정신 줄은 잡는 중인지 전처럼 잠들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으, 완전 취한다. 한아. 괜차나?”

지한에게 거의 기대다시피 한 한정원이 혀 짧은 소리로 헤실헤실 웃었다.

“정신 차려. 형.”

그의 양 팔뚝을 잡고 더운 숨을 뱉어낸 지한이 상체를 숙여 중얼거렸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신경이 쓰였다.

“한아아.”

돌연 그가 지한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가슴팍에 뺨을 비벼댔다. 느닷없는 행동에 지한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무래도 제대로 취한 듯 보였다. 이대로 한정원 혼자 보내면 또 택시 안에서 잠들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지한 씨, 한 매니저님 저희가 모셔다드릴게요. 아까 들어보니 집이 가는 방향이시더라고요.”

“저희 대리 불렀습니다. 지한 혀엉.”

넉살 좋게 웃어 보인 장준혁이 지한의 등을 툭툭 쳤다. 이지운은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그들의 상태를 살짝 훑어본 지한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주량이 센 건지 제법 멀쩡해 보인다. 무엇보다 평소 행실을 보니 믿을 만 해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도 살짝 어지러웠던 터라 다행이었다.

“예, 그럼 부탁드릴게요. 이 형이 술 취하면 정신을 못 차려서….”

“걱정 붙들어 매십쇼!”

고목나무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떼어내자, 장준혁과 이지운이 그를 받아 부축했다.

“지한 씨, 모셔다드리고 연락하겠습니다! 들어가십쇼!”

“예. 잘 부탁드립니다.”

우렁찬 인사와 함께 그들이 등을 돌렸다. 지한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삼대독자 군대 보내요?”

“…….”

“쓸데없이 애틋하기는.”

아. 김신우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중얼거리는 그에게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묵묵히 핸드폰을 꺼내 어플을 켠 뒤 택시를 호출했다. 다행히 근거리에서 택시가 잡혔다.

“5분 뒤에 도착한대요.”

자정 넘은 새벽이라 그런지 날이 더 쌀쌀했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김신우의 얼음장 같은 손이 지한의 손등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시선을 들자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입김이 뽀얗게 흩어졌다. 고요히 숨을 내쉬는 김신우의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추우십니까?”

“왜요.”

물음에 김신우가 툭 던지듯 답했다. 그야 이 날씨에 코트만 달랑 걸쳤으니 추울 만도 했다. 잠잘 시간도 없는 톱스타 주제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지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한정원이 주었던 핫팩이 뜨끈한 열을 유지 중이었다. 지속 시간이 꽤 긴 제품인 듯했다.

손에 잡힌 핫팩을 꺼낸 지한이 김신우의 팔목을 잡고는 턱, 손에 쥐여 주었다.

내일도 스케줄이 빡빡하다. 하루하루가 바쁜 연예인인데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했다. 그의 건강 상태를 지키는 것 또한 도의적으로는 제 임무였다. 괜히 아파서 골골대는 건 보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몸에 열이 많은 지한은 추운 날에도 손발이 뜨거운 편이었다.

하나 막상 손에 쥐여 주고 나니 조금 민망해졌다. 괜히 핸드폰을 켜고는 택시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김신우는 그가 무심하게 건네준 손바닥 위의 핫팩을 가만히 보았다. 지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치 ‘오다 주웠다.’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문득 모른 척 회피하며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지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손바닥에 두었다.

열기가 솟아오르는 핫팩을 느리게 그러쥔다. 딱딱하게 얼어 있던 손이 뜨거운 열에 녹기 시작했다.

하, 같잖은 짓에 저도 모르게 살짝 입매를 끌어 올렸다.

김신우의 입술이 달싹이려는 찰나, 고요한 골목 안으로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출한 택시가 도착을 알렸다.

“가시죠.”

고개를 든 지한이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뒷좌석 문을 열어 주고는 눈짓했다. 김신우는 하려던 말을 멈추곤 택시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탄 지한이 주소를 이야기하자,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 내에는 뜨거운 히터 바람이 가득했다. 열이 많은 지한은 더울 정도였다. 가는 내내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만 정적을 깨웠다.

창밖을 바라보던 지한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 고민하다 한정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전 00:55 잘 들어갔어?]

아니나 다를까 얼마간 숫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답을 바라고 보냈던 건 아니기에 금세 말을 덧붙였다.

[오전 00:58 잘 자고 내일 봐.]

알아서 잘 데려다줬겠지. 생각하며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집에 올라갈 때까지 정적이 이어졌다. 이제는 그와 둘만 있는 것이 불편하진 않았으나 이유 모를 어색함이 감돌았다.

집에 도착해서는 둘 다 별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은 세 개였고 김신우가 사용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곧바로 옷가지를 챙겨 욕실로 들어간 지한이 양팔을 교차해 옷을 벗었다. 술기운도 오른 데다 집에 오니 피곤함이 배로 몰려오는 듯했다.

툭툭 벗어 내린 옷들을 한편에 두고는 샤워 부스로 들어가 수전을 틀었다. 틀자마자 뜨겁게 쏟아지는 물방울들이 잘 짜인 근육을 타고 흘렀다.

눈을 감고는 연거푸 세수를 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잔상들을 지워내며 고개를 저었다.

제법 오랜 시간 뜨거운 물로 씻고 나니 온몸이 노곤해졌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김신우의 방문 앞을 지나쳤다. 이미 굳게 닫혀 있는 걸 보아하니 아마 먼저 자는 듯했다. 아니, 불면증이 있다고 했으니 못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겉으로는 멀쩡한 문고리가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고장 난 걸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하건만 별 얘기가 없는 걸 보아하니 본인이 그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자다가 종종 기억 못 할 일을 벌이는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만도 했다.

고치긴 해야 할 텐데. 하기야 또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제게는 고장 나 있는 편이 낫긴 했다. 빠르게 머리를 말린 후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켜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TAD장준혁: 한매니저님은 잘모셔다드렷습니다~ 지한 씨~ 고생하셧고 내일 봐용><ㅋㅋ 오전 01:31]

[TAD장준혁: (이모티콘) 오전 01:31]

[TAD장준혁: (이모티콘) 오전 01:32]

[TAD장준혁: (하트)(하트)(하트) 오전 01:32]

장준혁에게서 온 것이었다. 남발하는 하트와 함께 우스꽝스러운 원숭이 이모티콘이 춤을 췄다.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슬쩍 웃었다.

[오전 02:19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답장한 뒤 핸드폰을 끄지 않고 한정원과의 대화방에 들어갔다. 여전히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씻지도 않고 잠들었겠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어떤 모습일지 눈에 훤했다. 픽 웃음을 터뜨린 그는 곧 핸드폰을 끄고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뉘자 금세 짙은 수마가 덮쳐왔다. 술기운 탓인지 눈꺼풀이 금세 무겁게 늘어졌다.

그렇게 깊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어딘가 불편한 느낌에 지한이 몸을 뒤척였다. 바스락 바스락, 귓가에 솜이불 스치는 소리가 났다. 잠들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무겁게 늘어진 눈을 떴다.

새카만 허공 속 꼼지락거리는 인영이 보인다. 잠에 취한 지한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 제 품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아, …한아.”

넘실거리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말간 눈동자와 동그란 콧망울이 코앞에 있었다. 놀란 나머지 숨을 훅 들이켰다.

한정원이었다.

손을 뻗어 이불 속을 더듬거리자 얇은 티셔츠와 말랑한 살결이 만져진다. 저대로 얼굴만 동동 떠 있다고 해도 괴이한 꿈이었겠으나, 아. 꿈이 아니었다.

“형, 여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돌연 통통한 입술이 꾹 맞물린 탓이다. 지한이 눈을 더 크게 떴다. 경직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

촉, 초옥. 젖은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작고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상상으로만, 아니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입 안으로 섞여들었다.

“하아, 한아… 빨리.”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제 허리를 끌어안고 달라붙었다. 별안간 심장이 우지끈 내려앉았다. 푹신한 침대 시트 위에 한정원과 둘이 엉겨 붙어 있었다. 불 꺼진 새카만 방 안에 오롯이 둘뿐이다. 몽롱한 정신에도 불현듯 아래에 피가 몰렸다.

지한은 머릿속에서 깜빡이는 적신호를 감지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슬렀다. 상체를 뒤로 물리며 한정원의 어깨를 잡아떼어냈다.

“형, 이건….”

“해 줘…. 지한아.”

“…….”

“빨리….”

나른한 목소리에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본능적인 욕망이 전신을 덮쳤다. 지한은 신체 건강한 남자였다. 하물며 한정원은 지한이 오랜 기간 홀로 열병처럼 앓아 온 상대였다. 더 생각할 틈 같은 건 없었다.

지한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뺨을 쥐고 고개를 비스듬히 비틀었다. 눈으로만 보던 희고 말랑한 속살이 손바닥 안에 잡혔다. 제게 들러붙어 오는 말캉한 입술을 기꺼이 머금었다.

“으응….”

그가 잇새로 야트막한 신음을 흘렸다. 옷깃을 끌어당기며 보채는 손길에 지한은 자연스레 그의 위로 올라탔다. 작은 손에 깍지를 얽고, 붉은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는다. 입 안의 여린 살을 느리게 문지르다, 어색하게 움직이는 혀를 뜨겁게 얽었다.

촉촉한 그의 입술을 삼키듯 머금고 부드럽게 당기기를 반복했다. 달큼한 혀가 입 안에서 사탕처럼 녹아들었다. 서로의 코끝이 스치듯 간지럽게 문질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어쩌면 이미 쾅 터져버려서 피가 줄줄 새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가슴께가 욱신욱신 아픈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비튼 한정원이 적극적으로 지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등을 더듬거리는 손길에 지한이 뜨거운 숨을 뱉었다. 아래가 아플 만큼 빳빳하게 달아올랐다. 제 아래서 끙끙거리는 한정원은 사랑스러웠으나 그와 맞먹는 배덕감이 지한을 덮쳐왔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과 달리 행동은 정직했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여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혀를 내어 부드럽게 문지르다가 잘근 깨물자 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흥분으로 전신의 근육에 힘이 바짝바짝 들어갔다.

드러난 목선에 쪽, 쪽 다정히 버드 키스를 하며 올라갔다. 귓불을 살짝 깨물고는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추자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점점 짙어지는 숨소리에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불현듯 정신 줄을 붙든 지한이 시트를 짚고 상체를 물렸다. 더하면 진짜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그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다. 아무리 몰아붙인대도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한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제 아래에 누운 그를 마주 보았다.

“왜 하다 말아요.”

“…….”

“감질나게.”

뽀얀 얼굴의 김신우가 살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돌연 심장이 쿵 떨어졌다. 제 아래에 있는 사람은 한정원이 아니라 김신우였다.

“왜, 당신이….”

예상치 못한 광경에 지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당황스러움에 헛숨을 삼킨다. 문득 그가 지한의 뒷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시, 말캉한 입술이 맞닿았다.

“읍….”

눈을 크게 뜬 지한이 시트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 드센 악력에 의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공격적으로 밀려든 살덩이가 뜨겁게 얽혔다.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야릇한 손길에 힘이 죽 빠지는 찰나, 강한 힘과 함께 시야가 뒤집혔다.

“……!”

어느새 지한은 그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혀 아래를 문지르는 뜨거운 살덩이에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여전히 단단하게 발기한 아래가 뻐근했다.

전신을 덮는 나른한 기운에 지한은 자포자기하듯 눈을 감았다. 이미 훨씬 전부터 고양된 흥분에 잠식된 남자는 본능적인 욕구를 따랐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저를 끌어안는 체온과 생각보다 말캉한 살의 감촉은 나쁘지 않았다.

숨이 조금 막혔다.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살짝 입술을 열어 보았다. 뜨거운 혀가 기다렸다는 듯 치열을 두드려 왔다. 티셔츠 사이로 불쑥 들어온 기다란 손가락이 허리선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단단한 손끝의 감촉이 생경했다.

이상한 기분에 지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간 손길이 딱 붙은 드로즈 사이를 비집는 찰나, 그의 손목을 턱 붙들며 제지했다. 어둠 속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왜 그래요….”

애틋한 목소리와 함께 김신우의 눈동자에 옅은 눈물이 고였다. 말문이 막힌 지한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싫어요?”

하늘거리는 갈색 머리칼 사이, 유리구슬 같은 눈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제 방에는 블라인드를 쳐 놓았음에도, 그의 얼굴 위로 이상하리만큼 달빛이 쏟아졌다.

눈꼬리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톡, 하고 떨어졌다. 동시에 뭉근하게 달아오른 감정도 뚝, 떨어진다.

지한은 깊은숨을 삼켰다. 바스러질 듯 꽉 잡고 있던 손목을 저도 모르게 느슨하게 물렸다. 얼굴은 여전히 찌푸린 채였다.

싫, 싫긴 싫은데.

저 얼굴에 대고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힌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처연한 눈물과는 달리 그의 입술 끝이 호를 그리는 순간, 지한은 번쩍 눈을 떴다.

“헉….”

거친 숨과 함께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하다 온 듯 숨이 벅찼다.

막 잠에서 깨어난 그가 상황파악 하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마치 공포 영화 속 주인공처럼 천천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이불 아래를 불안스레 더듬거렸다. 역시 비어 있었다. 이제 동이 트는지 푸르스름한 빛 한줄기가 블라인드 틈을 타고 스며들었다.

하아.

지한은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 위에 손등을 털썩 올려놓았다. 별안간 힘이 죽 빠졌다. 가쁜 숨을 씨근덕거리며 가만히 천장을 노려보았다. 입고 있던 면 티셔츠가 식은땀에 들러붙었다. 귓가에는 제 숨소리만 색색 퍼져 나갔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친 꿈이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현듯 불쾌한 기운이 올라왔다. 한정원을 상대로 꿨다고 해도 몹쓸 짓이건만, 설상가상 김신우까지 나왔다. 지한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말도 안 되는 꿈, 아니 현실이었다.

“아….”

지독한 좌절감과 함께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달아오른 숨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한참 속으로 욕을 곱씹고 나서야, 지한은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혹여 김신우가 일어나기라도 할까, 발소리를 죽인 채 허정허정 걸음을 옮겼다.

***

“잠 못 잤어요?”

“예?”

“피곤해 보이는데.”

김신우가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아침이 밝았다. 그는 넋이 빠진 듯 멀거니 소파에 앉아 있는 지한을 이상하게 여긴 듯했다.

“아뇨… 잘, 잤습니다.”

새하얀 니트를 차려입은 김신우는 오늘따라 더 신수가 훤했다. 지한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간밤에 꾸었던 흉흉한 꿈 탓이었다. 자신을 상대로 그런 발칙한 꿈을 꾸었다는 걸 알게 되면 기분 나빠할 것이 분명했다.

정말로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깊은 한숨만 나왔다.

기실 따져 보면 문제는 많았다. 입사 전이라면 상상도 못 해 볼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다. 김신우의 아래를 두 번이나 빨아 주었고, 맨정신으로 그의 앞에서 자위도 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침대 아래에 깔려 키스까지 당하지 않았는가.

주변 상황이 온갖 자극적인 것들투성이였다. 제 인생에 급작스럽게 나타난 변태 때문에 뇌의 기능에 이상이 생긴 걸지도 몰랐다.

처참한 기분에 표정만 굳어갔다. 곧 있으면 한정원이 올 시간이었다. 그에게도 발정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면목이 없었다.

상체를 비스듬히 숙인 채 소파에 앉아 있던 지한은 자괴감에 젖어 들었다. 무거운 배덕이 가슴을 짓눌렀다.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무슨 일 있어요?”

김신우가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문득 고개를 든 지한이 턱을 저었다.

“…아뇨.”

김신우가 짧게 혀를 찼다. 공지한은 그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정확히 열세 번의 한숨을 내쉬었다. 묻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요.”

“아닙니다.”

“뭐, 발정이라도 났나.”

대수롭지 않게 뱉는 말에 지한이 와락 눈썹을 구겼다.

발정이라니… 혹시 티라도 난 걸까.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늘 그렇듯 그는 시비를 걸어올 뿐이었다. 지한은 또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수라도 마시고 정신 차려야 했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는데 김신우가 등 뒤로 다가왔다. 갑작스레 뻗어오는 손길에 지한의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래요?”

어깨에 묻은 먼지를 떼어낸 김신우가 눈썹을 치켜떴다. 이상한 걸 본다는 듯한 눈빛과 함께 헛웃음을 짓는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언행이 부자연스러워 보인 탓이었다.

“그냥 좀….”

시선을 내리깐 지한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불현듯 꿈속의 김신우와, 첫날 밤 제 품 안에서 울던 김신우가 어지러이 흩어졌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지한은 또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꿈을 꾼 건지는 짐작할 수도 없다. 평소에 성욕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딱히 누군갈 만나고 싶단 생각도 하지 않았다. 꿈이야 말 그대로 꿈일 뿐이니 무시하려면 그럴 수 있었으나, 당사자가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바람에 혼란이 더해졌다.

미치겠다.

지한은 굳은 얼굴로 등을 돌렸다.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그를 보며 김신우가 혀를 찼다. 얼굴은 멀끔하건만 낯빛이 퍽 어두운 것이 술병이라도 낫나 싶은 생각이었다. 하나 흔쾌히 쉬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스토커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니, 그를 옆에 꼭 달고 다녀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한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뽀얀 피부와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활기를 띠었다. 어제 기절하듯 끌려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늘 적게 마시고 일찍 취해서 그런지 그는 숙취도 없는 편이었다.

“한아! 다친 덴 좀 괜찮아?”

손을 방방 흔들며 웃어 보인 한정원이 성큼성큼 지한에게 다가왔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칼을 들추며 이마 끝의 상처를 올려다본다. 사건 이후 한정원에겐 상처의 안부를 묻는 것이 필수 인사말이 되었다.

“어…. 괜찮아.”

굳어진 지한이 저도 모르게 턱을 뒤로 물렸다. 그저 조금 까진 정도에다, 처방받은 연고 또한 꼬박꼬박 바르고 있었다. 매일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시야 아래서 심각하게 저를 주시하는 얼굴이 보인다. 마치 어린아이가 곤충 채집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이렇게 제 걱정할 때 보면 보호자가 따로 없다. 문득 시선을 돌리다 김신우와 눈이 마주쳤다. 더럭 민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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