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넌, 너는 불행의 싹이야. 너 따위는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해. 이 암 덩어리 같은 새끼. 너 때문에 연화가… 연화가,’
김신우의 어머니는 그를 낳던 중, 난산으로 명을 다했다. 세상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미쳐 있던 그의 아버지 또한 회까닥 돌아 버렸다.
남자에게 아이는 가혹하고 몹쓸 존재였다. 눈앞에서 불사르고 싶은 불행 덩어리였다. 그를 볼 때마다 느끼는 극도의 충동을 늘 억누르며 살았다. 사랑하는 여자의 숨을 끊어버린 악의 근원을 돌보려 하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세상 빛을 보자마자 부모 전부를 잃어버렸다.
실의에 빠진 남자는 변했다. 아름답고 조각 같은 얼굴로 꾀어낸 여자들을 집 안에 끌어들였다. 상대는 수없이, 매일 바뀌었다. 그는 텅 비어버린 삶을 방탕하게 채우기 바빴다.
희미한 어릴 적 기억 끄트머리에 그는 대부분 울고 있었다. 굶주리고, 맞고, 아파하며 외로워했다. 아니 어쩌면 그마저도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매번 낯선 사람이 들이닥치던 유동적인 가정환경으로 인하여, 그는 한글도 배우기 전 눈치 보는 법부터 배웠다. 어린 나이에도 상대가 저를 미워한다는 느낌쯤은 금세 알게 되었다. 남자의 사랑을 유난히 갈구하던 여자에게 밉보인 이후 본능적으로 습득한 경험이었다.
김신우 또한 허울뿐인 아버지가 싫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애정을 원했다. 사랑받고 싶다. 관심받고 싶다. 양가감정이 매일매일 날뛰었다. 그러나 어리고 나약한 몸뚱이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갈 곳이 없었다. 가진 건 껍데기뿐인 아버지와 그 껍질만도 못한 작은 방구석 하나가 다였으므로.
그때부터 김신우는 배고픔을, 눈물을, 화를 속으로만 삭였다. 미소가 어미를 닮았다며 웃음조차 허락하지 않던 남자는, 정신이 나갈 때마다 김신우에게 웃는 얼굴을 종용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며 반복되던 악순환 속에서 김신우는 깨달았다. 남자는 제 웃는 얼굴을 좋아했다. 웃지 말라고 뺨을 때리면서도, 웃으며 매달리면 봐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웃기지 않아도 웃는 얼굴을 연습했다. 슬프지 않아도 우는 연습을 했다.
그가 원하는 바에 따라 맞추며 늘 사랑받고 싶어 했다. 아니 미움받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그에겐 최선의 방어이자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리고 일곱 살쯤 되던 해, 남자는 또 새로운 여자를 들였다.
김신우는 낯선 사람들이 싫었다. 숱하게 바뀌는데도 하나같이 저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겉으론 웃고 있어도 화를 내는 듯 보였다. 그게 무서웠다. 그러나 조금만 참으면 그들은 금방금방 사라지곤 했다.
하나 이번에 발을 들인 여자는 오래도록 집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만 한 아들을 데리고 와 집구석에 들어앉기까지 했다.
입을 다문 채 서 있던 아들놈의 첫인상은 더없이 냉하고 날카로웠다. 방구석에 처박혀 늘 오가던 여자들만 마주쳤던 어린 김신우는 두려움에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성인이 아닌 또래의 남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신우 안녕. 형 이름은 준우야.’
그러나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설핏 웃는 얼굴에 시린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따스한 말 한마디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더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름 봐 봐. 우리 형제 맞네.’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의 원래 이름은 박준우였다. 김신우의 집으로 들어온 순간, 그는 김준우가 되었다. 말마따나 이름조차도 완전히 형제 같았다.
살뜰하게 저를 챙기는 모습에서 김신우는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느꼈다. 냉랭한 인상과는 상반되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는 난생처음 억지 아닌 웃음도 지을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 행운만 찾아온 건 아니었다. 바람기가 다분했던 남자는 또 겉돌기 시작했다.
그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밤이 갈수록 빈번해졌다. 여자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도 차츰 짙어지기 시작했다. 유달리 집착이 심했던 여자는 김신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죽도록 싫어했다. 어린 그도 훤히 알 수 있을 만큼.
‘이딴 걸 네가 왜 가지고 있냐고! 당장 갖다 버려!!’
어머니의 사진은 남자가 준 유일한 것이었다. 잔뜩 술에 취한 여자는 꼬깃꼬깃한 사진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다시 이어붙일 생각조차 못 할 만큼 낱낱이 조각을 냈다.
부모에 대한 정이라고는 알지도 못하던 아이였다.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으니 줄 것 또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신우는 서럽게 울었다. 그저 겨우 손에 쥔 유일한 제 것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그를 서글프게 했다.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말아요. 들어가세요. 신우야. 이리와.’
그가 설게 울고 있을 때 김준우가 나타났다. 따뜻하게 보살피고 끌어안으며 등을 쓸어 주었다. 그런 일들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괜찮아? 어머니 술 드셨을 때는 근처에 가지 마. 응?’
‘밥은 먹었어? 가자, 형이 햄버거 사 줄게.’
어린 나이에도 제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를 미워할 법도 한데 외려 넘치는 애정을 받고 있었다. 그로 인해 충만하게 차오르는 이질적인 감정을 느낀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안온한 품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늘 김준우의 애정에 목말라 했다. 그의 말이라면 싫어하는 채소도 남기지 않고 먹었으며, 입에도 대지 않던 우유도 챙겨 마셨다.
든든하게 저를 챙겨 주고 지켜 주는 모습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형처럼 되고 싶었다. 그에게 더 칭찬받고, 더 관심받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모든 사랑을 제가 갖고 싶었다.
그로부터 김신우의 세상은 김준우가 나타나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 여전히 집을 돌보지 않는 남자와 술에 취한 여자는 여전히 싫었지만, 김준우가 있어 전보다 살 만했다.
살 만하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김신우는 따가운 아침 햇살에 부스스 눈을 떴다. 목이 말라 비척비척 부엌으로 걸어 나가는데, 사방에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가득했다. 거실 지척엔 술병들이 가득 늘어진 채였다.
손가락으로 코를 막는 순간,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늘 굳건히 닫혀 있던 안방 문틈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곤 안방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건, 작은 틈 사이로 살덩어리들이 엉겨 있는 모습이었다. 제 아버지와 여자였다.
‘윽!’
짐승처럼 들러붙어 있는 모습이 끔찍했다. 난생처음 보는 난잡한 장면에 소스라치게 놀란 김신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손까지 벌벌 떨며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유 없이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이상해… 흐으, 이상해….’
무슨 이유로 벌거벗고 저렇게 몸을 흔들어대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한 번도 저를 안아 준 적이 없었다. 살면서 체온이라곤 김준우에게 느껴 본 것이 다였다. 두려움에 끙끙대던 김신우는 한참을 울었다.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흐느낌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그는 또 잠이 들었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아이는 부스스 일어났다. 몇 시인지도 모른다. 어젯밤부터 근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더니 배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조심스레 걸어 나온 거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다시 비스듬히 열린 문틈 안을 들여다본다. 그들은 여전히 엉킨 채 늘어지게 잠들어 있었다. 김신우는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배고프다고 깨웠다간 욕을 먹고 발길질 당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엉겨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기조차 싫었다.
‘배고파….’
형이 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꾸역꾸역 배고픔을 참던 김신우가 부엌을 찾았다. 발뒤꿈치를 들어 찬장에서 라면 봉지를 꺼내 부스럭거린다. 끓이는 법은 김준우가 하는 것을 눈동냥으로 보아 알고 있었다.
냄비 안에 쪼르륵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달각. 달각. 형이 하던 대로 했는데 불이 붙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키가 닿지 않아 발끝을 세웠다. 팔을 뻗어 간신히 가스 밸브를 눌렀다 올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불을 켜려는 찰나였다.
펑! 미약한 폭발음과 함께 눈앞에 화르르 작은 불씨가 일었다. 놀란 김신우는 뒤로 주저앉았다. 주먹만 했던 불덩어리는 매캐한 연기와 함께 순식간에 크기를 부풀렸다.
목이 콱 틀어막혀 사레들린 기침을 했다. 삽시간에 사방으로 옮겨 가는 시뻘건 불길을 보며 그는 공포에 젖었다.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베란다로 도망 나갔다. 고개를 마구 흔들고는, 다시 남자와 여자가 얽혀 있는 방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아빠, 아빠. 아줌마… 아줌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무거운 살덩어리들을 흔들어 깨운다. 술기운에 코까지 골며 잠에 빠져든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울던 김신우는 다시 뛰어나갔다. 밖에 나가서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콜록, 켁!’
입을 가리고 콜록거리며 현관으로 기어간 김신우가 손잡이를 잡았다. ‘아!’ 신음과 함께 퍼뜩 튀어 오른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철제 손잡이는 이미 절절하게 뜨거웠다. 순식간에 번진 화마는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작은 집 안을 집어삼켰다.
그는 몸부림치며 다시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집은 15층이었다. 새카만 연기가 창문 밖으로 새어나가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김신우는 베란다 한쪽에 쪼그려 앉아 울며 그저 형만 불렀다.
그때였다. 밖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우야, 신우야!!’
‘형아…! 켈룩, 형!’
팔팔 끓는 연기 속, 아득한 시야 너머로 김준우가 보였다. 한껏 찡그린 채 교복 재킷 소매로 입을 가린 그가 소리쳤다.
‘신우야! 이리 와. 나가야 돼.’
‘흐아앙, 흐아아앙!!’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있던 김신우가 벌떡 일어났다. 등 뒤에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닦느라 젖은 소매를 코에 문질렀다.
‘형아…….’
베란다 문을 지나자, 천장에서 불덩어리가 뚝뚝 떨어졌다. 놀란 얼굴의 김준우가 세차게 고함쳤다.
‘움직이지 마!! 거기, 거기 있어 신우야. 형이 갈게!’
새카맣게 번진 연기와 뚝뚝 떨어지는 불덩어리 사이로 김준우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교복 재킷은 이미 그을음으로 엉망이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몸에 닿는 순간 김신우는 폭풍 같은 안도감에 휩싸였다. 서럽게 우는 김신우를 품에 꽉 끌어안은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젖은 눈을 깜박이는 찰나, 쾅! 찢어질 듯 날카로운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김신우는 정신을 잃었다. 머릿속에서는 따뜻했던 체온과 애틋한 목소리만이 잔상처럼 흩어졌다.
***
간헐적인 전자음이 울렸다. 눈을 떴을 때는 소곤대는 소리와 알싸한 병원 냄새가 났다. 온몸이 절절 끓고 아팠다. 뼈 마디마디를 바늘로 쿡쿡 쑤시는 고통이었다.
무거운 눈을 뜨지도 못하며 끙끙 앓던 아이는, 제 핏줄도 아닌 형의 이름만 불러댔다. 갈라진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 우상을 찾았다. 정신을 잃고, 다시 찾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반짝, 눈을 떴다. 찬찬히 주변을 훑자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몇 번 가 본 적도 없던 병원이었다.
그렇게 김신우는 가족이라고 불리던 것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티브이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던 화목한 가족을 원했던 것도 아니건만 겨우 손에 쥐고 있던 껍데기마저 홀랑 빼앗겨 버린 것이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아이였다. 느닷없이 고아가 돼 버린 김신우는 보호소로 향했다. 난생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 지독한 두려움을 느꼈다. 무서웠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는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으나 형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보호소에서 처음 만난 여자는 김준우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전해 주었다.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나, 이제 다신 그를 볼 수 없다는 건 알았다.
형은 죽었다. 천사가 되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저는 외딴 세상에 남겨 두고서.
밉다. 형이 지독하게 미웠다. 죽으려면 같이 죽어 줬어야지. 혼자 살아가기엔 너무 무서운 세상이었다. 설움에 눈물만 뚝뚝 났다. 하나 곱씹을수록 원망도 오래가지 못했다. 죽음의 원흉은, 모든 악몽의 시작은 제가 무턱대고 벌인 사고 탓이었으므로.
못된 김신우는 살았다. 착한 김준우는 죽었다. 착한 김준우는 못된 김신우를 구하려다 죽었다. 이 모든 사실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한없이 무섭고 두려웠다. 종일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김준우가 죽었다.
나 때문에.
너 때문에.
그로부터 매일 밤 김신우는 악몽에 빠져들었다. 눈을 감으면 벌건 화마 속에 선 자신이 웃으며 김준우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빨리 들어와, 형. 빨리 들어와. 말갛게 웃는 그를 점점 지옥의 불길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김신우는 울부짖었다. 들어오지 말라고, 빨리 나가라고, 제발 다가오지 말라고. 발버둥 치며 목이 쉬도록 외쳤다. 하나 그에게는 한 번도 닿지 못한 부르짖음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끝내 김준우는 김신우를 끌어안는다.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그는 장렬하게 조각났다. 꼭 그 마지막 모습까지 봐야 악몽이 끝이 났다. 섬뜩한 소름과 함께 진저리치다 보면 눈을 뜰 수 있었다.
헉… 헉, 허억… 헉.
악몽은 곧 환상이 되었다. 환상은 환각이 되었다. 꿈에서 깨어나고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망상 탓에 김신우는 잠시도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로부터 그는 벽 한 귀퉁이에 매일 쪼그리고 앉아 되뇌는 버릇이 생겼다.
‘너 때문에 죽었어. 너 때문에… 네가 다 죽인 거야. 여자도, 남자도, 형도.’
‘아니야. 내가 죽인 거 아니야. 나는 그냥 배가 고파서….’
‘그러니까 네가 죽였잖아. 네가 다 죽인 거잖아.’
‘아냐, 내가 아니야. 형… 형은….’
‘네 형은 이제 없어. 네가 죽였으니까.’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아니? 네가 죽였잖아. 진짜 네 형도 아니면서. 왜 죽였어? 안에서 같이 죽자고 일부러 불렀지? 못된 놈, 너는 못된 애야. 이 불행 덩어리, 너는 불행의 싹이야!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홀로 되뇌는 책망 속에서 그는 속절없이 쪼개지고 갈라졌다. 하릴없이 뒤엉켜 드는 합리화 속에서 매 순간 무너지고 바스러졌다. 수도 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는 자신을 긍정하려 했지만 늘 실패했다.
‘왜 죽였어? 왜? 왜 죽였어?’
‘시끄러워! 형이 나쁜 거야! 진짜 형제도 아니면서 왜 구해 줘? 왜 그랬어! 그냥 죽게 놔두면 되지! 나 같은 거 그냥 죽게 놔뒀으면 되잖아! 그랬으면 된 거잖아! 왜 나 대신 죽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이기적인 놈, 이기적인 놈! 너는 못된 아이야! 불행 덩어리! 다 네 탓이야!’
‘악! 제발, 제발 그만해!!!!’
악몽을 꾼 날이면 꼭 또 다른 ‘김신우’가 어린 김신우를 괴롭혔다. 그건 기억이 날 때도,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매일 밤 꿈속에서 울며불며 몸서리치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는 더 추락할 수도 없을 만큼 끝없는 나락으로 처박혔다. 죗값을 치르고 벌을 받고 있었다. 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김신우는 또 덜컥 두려워졌다. 세상에 하등 쓸모없는 놈이 정신까지 회까닥 미쳐 버렸으니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에서도 쫓겨나면 어떡하지. 길바닥에서, 맨홀 아래서 잠을 자야 하면 어떡하지.
악몽을 꿨을 때는 ‘김신우’가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머리 한편을 뚝 썰어 간 듯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김신우는 깨달았다. 가끔 기억이 통째로 잘린다거나 무언가 이상한 흐름이 있다 싶을 때는 그가 나타난 후라는 걸.
그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세뇌했다. 매시간, 매 순간, 마치 흔적을 남기듯 꼬박꼬박 적기 시작했다. 비로소 살기 위해서였다.
습관은 무서웠다. 김신우와 ‘김신우’는 빠짐없이 일기를 써나갔다. 두꺼운 노트가 몇 권씩 쌓여도 멈추지 않았다.
기억이 끊길 때면 숨겨 둔 일기장을 보았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일 뿐일 때도 있었으나 어김없이 적혀 있는 글들을 보며 제가 뭘 했는지 추측하곤 했다. 무서웠다. 제 본 모습에 사람들이 싫어할까 봐 두려웠다.
기억에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늘 몸에 배어 있던 습관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악몽을 조심하면 된다. 잠든 순간만 신경 쓰면 되는 일이었다. 타고나길 기민한 탓에 들키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실수는 당연히 벌어졌다. 그게 못내 불안했다. 결국, 떠올린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하고도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아닐 때에도, 내가 나일 때에도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는 김신우는 이따금 둘이 되었다.
김신우는 영특하고 머리가 좋았다. 예쁜 외모는 물론이고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잘 따라 해 사랑받는 천사 같은 아이였다. 하나 누구도 이 예의 바르고 착실한 아이가 마음의 눈으론 세상을 새카맣고 삐뚤게 들여다본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기부 목적으로 들렀던 이의 도움을 받아 좋은 집안에 입양되었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특출 난 외모로, 우연히 잡지 모델에 캐스팅되었다가 운 좋게 아역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마치 정해져 있던 절차처럼 그는 데뷔 직후 혜성 같은 샛별로 떠올랐다. 이름도 모르는 이들에게 받는 애정과 쏟아지는 사랑은, 생애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기꺼운 관심이었다. 그 환상이 벅차오를수록 그는 더 열심히 했다. 사랑받기 위해, 관심받기 위해, 마치 텅 비었던 어린 시절 공허함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이.
5년, 10년, 15년.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김신우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부족한 것 따위 없는 부유한 생활은 지루했고, 분이 넘치게 받던 사랑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그는 굳어진 본성을 조금씩 티 나지 않게 드러내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은 가차 없이 바로바로 쳐냈다.
그러나 왜일까. 결핍 없는 정상적인 생활이 지속하고 있었음에도 또 다른 ‘김신우’는 사라지지 않았다. 기민하고 불안정한 정신 탓에 늘 약도 달고 살았다.
하여 잠은 꼭 제 방 안에서만 잤다. 불면증이 심하고 예민하다는 이유로 근처에 사람 하나 두지 않았다. 제 주변에 단단한 벽을 세웠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이 비밀을 들키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 문제없이 평탄히 지속하던 삶이었다.
그랬는데.
불현듯 찾아온 날카로운 두통에 눈을 뜬 날이었다.
“조금 더 자는 게 어때….”
대뜸 눈앞에 제게 반말을 지껄이는 놈이 있었다. 새로 들어온 멍청한 신입 매니저였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김신우가 돌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한껏 찌푸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느닷없이 표독스러워진 얼굴에 한정원이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화들짝. 손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소란스레 머리를 숙였다.
“아! 죄, 죄송합니다! 그, 저. 스케줄… 오전에, 변경되어서!”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려는 그의 팔목을 콱 움켜쥐었다. 사색이 되어 희게 질린 얼굴을 보아하니,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단번에 인지할 수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
“씨발, 뭐 하고 있었냐고.”
당혹스러워 보이는 한정원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그 창백한 낯짝을 보며 김신우 또한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 갔다.
“저, 저, 저는 괜찮아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고, 진짜예요. 또. 안쓰러워서… 그래서!”
삽시간에 불길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기다란 팔을 뻗어 가느다란 목을 콱 움켜쥐었다. 가뜩이나 착한 척 오지랖을 떨고 다니는 것이 꼴 보기 싫던 놈이었다.
“윽!”
“똑바로 말해. 죽여 버리기 전에.”
새로 온 로드 매니저에게 고분고분 굴던 것도 잊고 거친 욕을 했다. 뾰족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쑤셔대 눈가를 찌푸렸다. 악몽을 꿀 때마다 어릿하게 남아 있던 두통이었다.
“피니시 촬영 일정이 급하게 변경되어서, 깨우러 왔었어요. 잠을 평소에 잘 못 주무신다고 하셔서, 약까지 드시길래…. 오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주무시라고… 와서 깨우려고 그랬습니다….”
목 졸린 토끼처럼 버둥거리던 한정원이 중얼거렸다.
“마, 말은. 자꾸 놓으라고 해서. 형이라고… 하시기에…. 그래서… 그런데 저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다 아픔은 있으니까요….”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단 그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잠귀가 밝아 전화 한 통이면 일어나곤 했다. 생각도 못 한 걸림돌을 방심하고 있었다. 멍청한 주제에 쓸데없이 성실한 것이 문제였다. 기분이 더럽고 찝찝했다.
“잠들 때까지 있어 달라고 해서…. 그게 다예요. 금세 주무셔서. 잠깐 지켜보다가 갔습니다. 정말입니다….”
위축되어 쪼그라든 같잖은 모습을 보며, 김신우는 손에 주었던 서서히 힘을 풀었다. 이후 그의 입으로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전부 뱉어내게 했다. 어처구니없던 건, 제 상태를 처음 목격한 후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었다.
씨팔. 개좆같네….
한 손에 다 들어오는 목덜미를 내팽개치듯 놓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키는 짓이나 처할 것이지. 기억력도 짧고 일도 좆도 못하는 주제에,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려서 사람을 귀찮게 만들었다.
“저… 괜찮으세요? 두통이 있으시면 제가 약이라도 사 올까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욕 처먹고 목까지 졸린 주제에 누굴 걱정하는지 기가 찼다.
“그냥 꺼져요.”
사랑받고 자란 티가 한껏 나는 놈들을 볼 때마다 입 안에 가시가 돋았다. 찜찜한 생각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투명한 눈동자가 꼴 보기도 싫었다. 말간 얼굴을 짓밟고 싶다. 그를 볼 때면 늘 비틀린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언제고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꼴을 보니 적어도 어디에 떠벌리고 다닐 성격도 아니었다. 기왕 들킨 거라면, 차라리 구슬려 먹기 좋은 멍청한 한정원에게 걸린 것이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
김신우는 한정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형.”
지한은 경직되어 있었다. 천천히 상체를 숙여 김신우와 시선을 맞추곤, 묘하게 흐트러진 동공을 지그시 주시했다.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듯 느꼈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모르는 사이 술이라도 마시고 잠들었나? 혹은 독한 약 기운에 취한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달빛에 비춰 반질거리는 동그란 눈동자는 또렷하기만 했다. 언뜻 물기를 머금은 듯 보이기도 했다.
적막 속에서 헛숨을 삼킨 지한이 상체를 곧게 폈다. 정신이 돌아오자,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몰려든 탓이다. 들어오지 말라고 언질을 줬건만 고작 하루 만에 어겨 버렸다. 그의 성격에 이런저런 사정을 알아줄 리도 없으니 명백한 실수였다.
“그… 괜찮으신 거라면 가 보겠습니다.”
동의를 구하듯 살짝 눈짓했다. 그대로 등을 돌리는 찰나, 돌연 뻗어온 손이 그의 팔목을 탁 잡았다. 적막 속 김신우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깔렸다.
“가지 마.”
지한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공허하고 처연한 눈빛이 지한의 위로 스며들었다.
“혼자 두지 말아요.”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이 살짝 뜨였다. 놀라 머뭇거리는 순간, 잡힌 팔목에 그대로 힘이 들어왔다. 그는 지한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무방비한 상태의 지한이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몇 시간 전까지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엄벌을 놓던 그였다. 멀쩡한 제 방에 왜 멋대로 들어왔냐며 욕을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도, 이 야밤에 제게 가지 말라며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한은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상대의 상태를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신우는 일말의 악의도 없는 얼굴로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달빛에 반짝인 얼굴은 마치 연약한 초식동물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그는 눈가를 찌푸린 채 물었다. 머릿속으로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네, 아파요. 많이.”
고분고분 되돌아온 답에 지한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김신우는 정말로 아프기라도 한 사람처럼 찡그린 채, 심장 부근을 움켜쥐기까지 했다.
“저, 그럼 병원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지한이 단호하게 답했다. 술에 취한 것으로 보기엔 술 냄새가 나지 않았고, 잠에 취한 것이라고 보기엔 눈동자가 터무니없이 또렷했다. 그가 무슨 연유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도통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분이 조금 아, 아프셔….’
불현듯 한정원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단순한 우울증 등으로 치부했건만 생각보다 더 심각한 사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같이 있어 줘요.”
일순 김신우의 청초한 눈동자가 반들거렸다. 발갛게 물든 눈가 또한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말도 안 되지만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틈 없이 보내오는 시선에 훅, 숨구멍이 죄어 온다.
무표정을 유지하던 지한은 실로 당황해 버렸다. 김신우와 눈물. 두 명사는 절대 함께할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적어도 제 앞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했다. 당혹에 잠긴 사이 김신우가 상체를 기울여 왔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지한의 가슴께에 기대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같이 있어요.”
그는 고양이처럼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절로 복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흠칫 놀란 지한은 그와 닿지 않도록 자연스레 두 손을 살짝 들었다. 혼란한 머릿속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김신우,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 김신우 씨.”
당황한 그의 목소리가 낮은 신음처럼 울렸다. 품 안에서 김신우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 본 적 없던 처연한 얼굴이 그를 마주했다. 옅은 불빛에 그늘진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수려했다.
지한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그가 아프다고 해도 우선 그와는 이럴 사이가 아니었다. 도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언제 이곳을 벗어나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 없어서 곤란했다.
순간 품 안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착각인 줄 알았으나,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지한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경직되었다. 자꾸 가까워지는 그를 피해 턱을 뒤로 살짝 물렸다.
가만히 내려다보자, 유려한 선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가 조명에 또렷하게 반사되었다. 나붓이 깔린 속눈썹이 부채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투명해 보일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는 깨끗하고 고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홀린 듯 그의 얼굴을 살피는 찰나, 말캉한 입술이 제 입술 위로 맞닿았다.
지한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코앞에 기다랗게 감긴 눈이 보인다. 사태를 파악하며 눈을 깜빡이는 사이, 뜨거운 혀가 잇새를 가르고 들어왔다. 축축이 젖은 살덩어리가 혓바닥을 문지르고 입천장을 길게 덧그리고 나서야, 지한은 그의 어깨를 잡고 떼어냈다.
“무… 슨….”
뒤늦게 놀란 얼굴을 했다. 입술을 떼어 낸 김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단한 가슴께에 얼굴을 묻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뺨을 문지르며 기대 오는 행동에 중심이 뒤로 기울었다. 생각보다 드센 힘에 멍해진 지한은, 위에서 짓누르는 힘에 그대로 풀썩 넘어가 버렸다.
얼결에 푹신한 침대 시트 위로 파묻혔다. 순식간에 그의 위로 올라탄 김신우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빗장뼈에 뜨겁고 습한 숨결이 고여 든다. 그대로 혀를 내어 빨아 당기자, 물컹한 촉감과 함께 찌릿한 전류가 피어올랐다.
“아.”
찌푸린 지한이 낮은 신음을 냈다. 더 말릴 새도 없었다. 김신우는 지한의 양 손목을 쥐고 올렸다.
“김…. 잠깐.”
그제야 정신 차린 지한은 힘을 주어 그를 떼어내려 했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기엔 들러붙어 오는 힘이 엄청나게 억셌다. 좁은 틈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물기에 젖어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한없이 애처로웠다.
“왜 이제 왔어요.”
생전 본 적 없던 애틋한 눈빛이 지한의 위로 쏟아졌다. 낮은 목소리는 유난히 구슬프게 들렸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찰나, 저도 모르게 힘을 주던 팔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 이게….”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지한은 헛숨을 들이켰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서인지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머뭇대는 사이 김신우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읍….”
다시금 말캉한 입술이 진득하게 맞물렸다. 뜨겁고 몽글한 혀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눈앞에는 또다시 기다랗게 감은 눈이 보였다. 지한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돌연 티셔츠 사이를 파고드는 손가락을 느꼈다.
그제야 덜컥 정신을 차렸다. 잡힌 손목에 힘을 주어 억지로 빼낸다. 강한 힘으로 어깨를 붙들어 밀자, 그가 생각보다 쉽게 떨어져 나갔다.
“아… 정신을, 김, 김신우 씨.”
당황하여 말도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이만큼 놀라 본 건 병역 시절 겪었던 전차 사고 외에 처음이었다. 그만큼 지한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김신우는 고장 난 인형처럼 눈을 깜빡였다. 찡그린 그의 눈가가 차츰 새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유리구슬처럼 차오른 눈물방울은 뺨을 타고 서서히,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넓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한의 검정 티셔츠가 굵은 눈물방울로 점점이 번져 갔다.
운다. 그가 정말로 울고 있었다.
“왜….”
한껏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하나 이 상황에 울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가 아니라 저여야 했다. 멋대로 키스한 건 자신이면서 왜 몹쓸 짓이라도 당한 얼굴로 울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김신우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친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속눈썹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달빛에 비친 기다란 눈매가 오늘따라 한없이 처져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딱 저런 얼굴일 것 같았다.
지한은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돌연 심장 어느 한구석이 지끈하고 움직인 것 같았다. 그는 우는 사람에게 약했다. 우는 이를 잘 달래 주는 법도 몰랐다. 그러나 그게 김신우에게까지 포함되는 사실일 줄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김신우가 그의 가슴팍에 살포시 이마를 기대었다. 눈앞에 소리 없이 떨리는 어깨를 보며, 지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근육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등판을 다소 어색하고 느리게 쓸어내려 주기 시작했다. 손끝에 부드러운 실크 옷감이 감겼다. 우는 이를 달래는 방법은 이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너무 당황스러우면 머릿속이 텅 빈다는 게 사실이었다. 기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바늘은커녕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 김신우가, 제 품 안에서 울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처연한 얼굴을 하고서.
그의 손길 아래서 김신우는 차츰 일정하게 색색 숨을 쉬기 시작했다. 지한은 묘하게 일렁이는 감정에 휩싸였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니 길게 감은 눈이 보인다. 그는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제 가슴 위에서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지한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이마 위에 손등을 턱 올려놓고는 천장을 바라본다. 사위는 한차례 폭풍우가 몰아친 뒤의 마을처럼 고요해졌다.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심호흡하며 사태를 정리했다.
지금 누워있는 곳은 김신우의 침대였고, 제 가슴 위에 쓰러지듯 잠든 사람은 김신우였다. 평소의 김신우가 아니라 어딘가 정신이 아주 많이 아픈 김신우다. 그게 뭔지는 저도 알 수 없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키곤, 어깨를 붙들어 원래 제 자리에 뉘어 주었다. 다행히도 그는 깊게 잠들었는지 깨지 않았다.
가슴께까지 이불을 올려 덮어 준 지한은 가만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곤하게 잠든 얼굴은 평소에 볼 수 없는 순한 얼굴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신들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우아한 외모였다.
자꾸 떠오르는 헛생각에 지한이 세수하듯 얼굴을 문질렀다. 그대로 등을 돌리곤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왔다. 조심히 방문을 닫고 나선 그는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건조한 눈을 깜빡이다가 머리를 느리게 쓸어 올렸다.
뭐야… 이거,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제 앞에서 일부러 연기할 리는 없었다. 혹여 저것이 정신적인 문제라면 아마도 심각한 문제일 터였다.
물을 마시려던 것도 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굳은 얼굴과 달리 놀란 심장은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무래도 첫날밤부터 징조가 좋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던 그가 핸드폰을 들었다. 포털 사이트에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갑자기 성격이 변하면’ 등을 머뭇머뭇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과 맞지 않는 질문 뒤에는 죽을 때가 다된 거라는 의미 없는 답변들만 떴다.
인상을 쓰고는 썼던 글을 지운다.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곧 정신병에 관한 글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여러 가지 유형의 병명들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개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새로고침을 하자마자 아래로 관련 검색어들이 주욱 떴다. 해리성 기억 상실증, 해리성 정체 장애, 이인증, 자아의식 장애…. 관련하여서는 수도 없이 많은 사례와 질문들이 퍼져 있었다. 종전에 제가 겪은 것과 가장 비슷한 증세 같았다.
[유년 시절 정신적 외상의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거나…. 대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피하고자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낸다….]
곱씹듯 중얼거린 지한이 헛숨을 내뱉었다. 핸드폰을 든 손을 시트 위로 툭 떨구고는 눈가 위에 팔을 얹었다.
“하아….”
기분이 이상했다. 의도치 않게 그의 이면을 발견한 듯해 혼란스러웠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구는 이의 치부를 몰래 들여다본 것 같아, 찜찜하기까지 했다.
눈을 감은 지한은 문득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선명했던 감촉이 떠올라 눈가를 찌푸린다. 말캉한 촉감과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입술이 불에 덴 듯 홧홧했다.
이건…. 누가 알아서는 안 되는 미친 일이었다.
괜히 죄라도 지은 듯한 기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모로 누워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 어처구니없게도 김신우 생각에 한참을 빠져 있었다.
***
꿈속에서는 처연한 얼굴로 울고 있는 김신우가 나왔다. 무어라 울면서 제게 말을 하는데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의 지한이 소리쳤다. 아무런 대화도 전해지지 못한 채, 김신우는 먼지처럼 허공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잿가루처럼 뿔뿔이 흩날리던 그는 결국 형체 없이 사라져버렸다.
헉, 숨을 들이켠 지한이 막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아니면 잠들기 전 그런 일을 겪어서 그런진 몰라도 오래간만에 꾸는 악몽이었다. 불쾌하고 찝찝했다.
“잠자리가 편했나 봅니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시선을 들자 문지방에 기대선 김신우가 보인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지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지한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잠을 제대로 설쳐서인지 머리가 윙윙 울렸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곤 이마를 짚었다.
“시간이 몇 신데 정신을 못 차리네. 놀러 왔어요?”
팔짱을 낀 김신우가 방을 한번 죽 훑어보았다.
“침대가 아니라 침낭을 놔줄 걸 그랬나. 캠핑 분위기라도 내게.”
익숙한 어조에 현실로 빨려 들어왔다. 그는 잠기운이라고는 없는 멀끔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재수 없는 언행을 보니 제가 알던 이가 맞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작게 고개를 숙이며 힐긋 그를 살폈다. 냉랭한 얼굴은 어젯밤 제 앞에서 눈물을 보이던 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도깨비에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언뜻 진짜 꿈을 꾼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씻고 올게요.”
지한은 부스스해진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가만히 서서 저를 응시하는 그를 피해 시선을 내리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잠을 설쳐서 그런지 온몸이 뻑적지근했다. 밤새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며 잠깐 알아보려던 게 어느새 동까지 터 버린 탓이었다. 그 덕에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김신우가 과거에 어떤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공지한 씨.”
별안간 등 뒤에서 김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옮기던 지한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예.”
뚜벅뚜벅 걸어온 김신우가 지그시 지한을 응시했다.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돌연 긴장이 되었다.
“혹시 내 방문 건드렸습니까?”
아. 불현듯 어제 강제로 문손잡이를 땄던 일이 떠오른다. 어젯밤은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다.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겨우 표정 관리를 했다. 아무래도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뇨. 무슨 문제라도….”
“됐어요, 그럼.”
말꼬리를 끊어먹은 그가 스쳐 지나갔다. 일부러 놀란 내색을 하지 않은 지한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훌렁훌렁 옷을 벗고는 수전을 틀었다.
정신이 몽롱해서 물 온도를 일부러 차갑게 낮췄다.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거칠게 세수를 하며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킨다. 어젯밤 보았던 김신우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니까, 같이 있어 줘요.’
심장이 무쇠 철통으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확실히 지난밤 그 모습은 연기가 아니었다. 원래 남자를 좋아했던가? 혹시 날 다른 사람과 착각했나. 아니면 외로워서? 어느 방향으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만 남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희미한 잔상이 남았다. 지난 일이 지한에게는 아주 충격적으로 다가온 듯했다.
샤워를 마친 지한은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생각이 많으니 정신 또한 또렷하지 못했다. 찬바람이라도 좀 쐐야 할 것 같았다.
순간 부엌 쪽에서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놀란 지한이 반사적으로 빠르게 뛰어나갔다.
“아… 시발.”
번쩍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산산이 조각난 머그잔이 흩뿌려져 있다. 그 가운데에는 찌푸린 김신우가 서 있었다. 머신에 불이 들어와 있는 걸 보니 커피를 내리려다 떨어뜨린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옆으로 다가간 지한이 팔을 기다랗게 뻗었다.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진 유리 조각이 꽤 날카로워 보였다.
“조심하세요, 다칩니다.”
제 가슴 앞을 가로지른 팔을 바라보던 김신우가 눈썹을 치켜떴다. 주변을 둘러보던 지한이 구석에 놓인 작은 쓰레기통을 들고 왔다. 그대로 앉아 조각난 머그잔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제가 치울게요.”
뒤로 비켜난 김신우가 뚜벅뚜벅 걸어가 커피 머신을 껐다. 의미심장한 눈길이 지한의 위로 쏟아졌다.
***
이른 오전부터 시작된 스케줄은 ‘MH BANK’의 광고 촬영으로 시작되었다. 202X년 영화배우 브랜드 평판 1위를 차지한 김신우는 모델로 발탁된 시에프 영상마다 누적 조회 수 1위를 달리곤 했다. 한마디로 맡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린단 소리였다.
간혹 한정원에게 그의 수입에 관하여 흘려들을 때면, 박 대표가 그를 왜 그렇게 애지중지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굳이 빗대어 보자면 황금알을 낳는, 성격 더러운… 거위 정도.
“형, 얘기 좀 하자.”
촬영 전 김신우가 메이크업 대기실에 들어간 틈을 타, 한정원에게 눈짓했다. 조금 이따 나오라는 말을 전하며 먼저 흡연 구역으로 나와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오전 내내 정신없이 이동하던 탓에 담배 한 대 피울 시간도 없었다.
다소 몽롱했던 정신에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나니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시야에 모퉁이를 돌아오는 한정원이 보였다. 급한 것도 아닌데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왜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는 붉어진 뺨을 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지한이 이런 식으로 불러내는 일은 흔하지 않다 보니 조금 놀란 듯 보였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튼 지한이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필터를 빨았다. 그에게 연기가 가지 않게 손으로 휘휘 젓는다. 빠르게 두어 번 내쉬고는 반도 태우지 않은 꽁초를 금세 지져 껐다. 그는 비흡연자였다.
“후우, 뭘 이렇게 뛰어왔어.”
“갑자기 부르니까, 무슨 일 있나 해서.”
다소 불안해 보이는 얼굴에, 지한은 찬찬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번에… 김신우 씨, 아프다고 했던 거 말야.”
그는 작은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혹여 누군가 들을지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잔 생각이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한정원이 다소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찡그린 얼굴로 눈을 굴리다, 곧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지한은 말을 더 잇지 않고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봤어?”
물으며 그 역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되묻는 말에 지한이 헛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늘 곁에 있는 주변인에게 숨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응. 어제.”
“어떡해….”
곤란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 내린다. 손끝을 잘근 무는 것이 제법 난감한 얼굴이었다.
“왜?”
의외의 반응에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한숨을 내쉰 한정원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다시 쭉 훑었다. 약 30미터 밖에 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를 흘끔 바라본 한정원이 곧 지한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무슨 짓을 해도 들리지 않을 거리였으나, 지한은 살짝 상체를 숙여 귀를 가져다 댔다.
“내가 그거 알게 된 이후로 엄청… 차가워지셨거든.”
입가에 손바닥을 펼치곤 소곤거린다. 여전히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이리저리 훑는 채였다.
“아무래도 들킨 게 싫은가 봐…. 그 이후로 완전 달라지셨어. 나야 물론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고…. 또 일이니까, 상관없는데…. 혹시 너까지 싫어하실까 봐….”
간지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흠, 고개를 끄덕인 지한이 상체를 다시 곧추 폈다. 말을 마친 한정원이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듯했다.
“안 그래도 너 그 집에 들어가서 산다길래 걱정되긴 했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지한은 생각에 잠겼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고 있었다.
한정원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켜서 화가 났고, 그래서 그가 싫어졌다. 그러나 어디서 떠들고 다닐 성격 같지는 않으니, 그냥 옆에 두고 쓰고 있다.
…이건가.
담벼락에 살짝 등을 기댄 지한이 지그시 한정원을 주시했다.
“천천히 얘기해 봐. 어떻게 된 건데?”
골몰한 얼굴로 우물거리던 한정원이 입을 열었다.
“전날에…. 밤샘 촬영하고, 점심에 또 스케줄이 있었어. 몇 시간만 자고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더 이른 시간으로 변경됐거든.”
“응.”
“내 눈에 너무 피곤해 보이시더라고. 원래 도착 전에 전화로 먼저 깨우라고 하시는데, 그날따라 뭔가 안쓰러워서…. 운전해서 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주무시고 직접 가서 깨워야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때만 해도 배우님 자택이랑 좀 먼 곳에 살고 있었거든.”
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가 김신우의 자택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한 건 기억하고 있었다. 거의 밤낮을 가리지 않던 스케줄 탓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갔는데. 이미 깨어 계셨어. 침대에 그냥 앉아 있는데 눈빛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는 조심스레 제가 본 이야기를 시작했다. 또 다른 김신우와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 처연한 남자의 가정사와 불운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끊임없이 말을 잇던 한정원은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입을 다물었다. 평소 지한의 우직한 성격을 잘 알고 있음에도, 전부 알려 주어도 되는 건지 고민이 되는 듯했다.
“은연중에 계속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지 잠을 잘 못 주무셔, 불면증도 심하시고. 수면제 드시는 것도 엄청 쉬쉬하는 일이야…. 그래도 몸 아픈 곳이 없으셔서 다행이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지한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지한의 인생이라고 딱히 평탄하지도 않았으나, 한정원에게 전해 들은 김신우의 삶은 더 불운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보다 더 공허하고 외로운 삶을 보냈을 것 같았다. 지난밤 일에 이어 안타까운 과거까지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다. 성격이 저렇게 개차반으로 굳어진 것도 그런 불우한 환경 탓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무튼… 지한아, 알아도 내색하지 마. 괜히 미움받지 말고. 알겠지?”
사실 미움이라면 이미 받을 수 있을 만큼 받고 있었으나,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시선을 내린 채,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형, 혹시 그럼 그….”
“응응.”
“나타났을 때 다른 행동은 없었어?”
“다른 행동?”
불현듯 어제의 입맞춤이 떠오른 탓이었다.
지한과는 겨우 첫 번째 만남이었다. 한정원은 이미 대화도 여러 번 나누었다고 했으니, 더한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연 머리가 띵해져 미간이 절로 모였다. 어쩐지 그런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응. 이상 행동 같은 거.”
지한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곤 말없이 한정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라면 곤란한 일을 당했다 해도, 모른 척 덮어 주려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냥 가끔 같이 있어 달라고 무섭다고…. 그거 말고는 없었어.”
한정원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행히도 거짓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기야 평범한 연애를 하는 한정원에게 그런 짓을 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차라리 제게만 그랬다는 것이 더 나았다.
“알겠어. 말해 줘서 고마워.”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 지한이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머릿속엔 눈물을 뚝뚝 떨구던 수려한 얼굴과, 뜨거웠던 입술의 촉감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왜….
곱씹어 봐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답이 없는 문제에 지한은 곧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쓸모없는 시간 낭비였다.
***
연이은 촬영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XCB 사에서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길거리 인터뷰였다. 아무래도 득실거리는 인파 속을 헤쳐 가며 하는 촬영이었기에, 지한 말고도 경호 인력이 서너 명 더 배치되었다.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안녕하세요.”
대기 중 느닷없이 다가온 남자가 말을 걸었다. 게릴라 데이트를 위해 방송사에서 지원해 준 경호 인력 중 하나였다. 지한은 살짝 고개를 숙이곤 인사에 응했다.
“네, 안녕하세요.”
“김신우 씨 전담 경호라면서요. 저희는 TAD 캡스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불쑥 건네 오는 명함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새카만 명함에는 ‘전문 경호 업체 TAD’라는 문구와 함께, ‘최상의 안전과 최고의 서비스!’라는 멘트가 쓰였다.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고 있자 그가 덥석 손을 내밀었다.
“아, 저는 장준혁입니다.”
“공지한입니다.”
한 눈에도 덩치가 우락부락 좋아 보이는 남자는 아마 본인이 회사를 세우고 직접 현장을 뛰는 듯했다. 명함 아래 이름엔 ‘장준혁 대표’라고 적혀 있었다.
“혹시 프리로 혼자 다니시는 거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조건 잘 맞춰 드리겠습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멈칫, 시선을 든다. 하회탈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 장준혁이 지한을 향해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너무… 잘생기셔서. 하하.”
“아. 감사합니다.”
느닷없는 스카우트 제의에 살짝 웃어 보이곤, 재킷 안주머니에 명함을 넣었다. 시선을 돌리니 김신우가 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지 않을 때는 무정해 보이는 인상이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빛났다. 찡그린 얼굴은 언뜻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한정원의 말대로라면 밤마다 저도 모르는 새 정신이 깨어 있을 테니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YNH 소속으로 일하시는 거죠?”
어쩐지 눈이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아 묵묵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비틀린 감정을 내보일 때마다 전과 다른 안쓰러운 감정이 느껴진 탓이다.
“지한 씨?”
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지한을 보며 장준혁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흠칫 어깨를 떤 지한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습니다.”
“원래 이쪽에서 일하셨었어요?”
“아뇨. 엔터 쪽은 처음입니다.”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장준혁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멀찍이 떨어져 있던 스태프가 크게 외쳤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자리 잡아 주세요!”
동시에 주변이 부산스러워졌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지한이 김신우의 뒤편에 가서 섰다. 언뜻 보이는 흰 뺨은 적나라한 조명 밑에서도 매끄럽게 반짝였다.
“한밤의 쇼 월드! 오늘 만나 볼 분은 누굴까요!”
호쾌한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옷 정리를 해 주는 스태프 앞에서 무표정 해있던 김신우는, 카메라가 돌아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어 보이기 시작했다. 미소와 동시에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네가 없는 세상은 나도 없어.’로 뭇 여성분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대스타! 김, 신, 우! 씨와 함께 길거리 게릴라 데이트를 진행해 볼 텐데요!”
김신우의 명대사를 연기하던 진행자가 팔을 크게 휘두르자,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싼 인파들이 소리를 질렀다.
“좋아요, 우리 출발해 볼까요!!”
“네!!!!!”
지한은 그의 뒤쪽에 한걸음 떨어져 걸었다. 한쪽 팔을 쭉 뻗은 채로 소리를 지르는 인파들이 끼어들지 않도록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길거리 인터뷰는 생방송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방송사고가 날 수도 있기에 경호 인력을 넉넉히 배치했으나 괜스레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근래 계속 위협을 받다 보니 신경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오빠!!! 꺅!!!”
“잘생겼어요!!!!”
온갖 날카로운 비명들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뻗은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있는데도, 파도처럼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자꾸만 안쪽으로 밀렸다. 절로 몸에 힘이 콱 들어갔다.
“김신우!!”
“여기 봐 줘요!!!”
아니나 다를까 꾸역꾸역 따라오던 자그마한 여자 하나가 고꾸라졌다. 눈썹을 치켜뜬 지한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들어 잡아 주었다. 간발의 차로 넘어지지 않은 그녀가 놀란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그렇게 좋은가. 다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자! 나는 김신우의 진짜 진짜 광팬이다! 먼저 손들어 주세요!!”
“저요!! 저요!”
결국, 촬영 팀은 중간에 멈춰 섰다. 김신우보다 군중 속에서 고함을 지르는 진행자가 더 힘들어 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무작위로 여학생 두 명을 불러냈다. 지한의 인상이 차츰 굳어졌다. 아무리 드라마 홍보를 위해서라지만, 정신 나간 스토커가 난동 피우는 시기에 강남 한복판에서 이런 걸 꼭 찍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어때요! 잘생겼어요?!”
“네! 개잘생겼어요!! 와! 미쳤어요!”
“진짜 눈빛 쩔어요!!”
잔뜩 흥분한 학생들이 소리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김신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하도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중간중간 진행자의 말에 답하는 김신우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저기요….”
갑작스레 아래서 들려온 목소리에 지한이 시선을 내렸다. 아까 붙들어 준 작고 앳된 얼굴의 여자였다. 기껏 많아 봐야 스무 살 정도, 또는 학생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냐는 듯 눈짓하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혹시 연예인 지망생이에요?”
느닷없는 물음에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요?”
“…경호, 인데요.”
낮게 답하며 다시 김신우를 힐끗 보았다. 그는 예쁘게 웃으며 앞서 나온 여학생 둘과 차례로 포옹하고 있었다.
“근데 오빠, 진짜 엄청 멋있어요! 사진 찍어도 돼요?”
“…아뇨.”
그녀는 이제 김신우가 아니라 지한을 쫓아오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다소 부담스러웠다.
촬영 내내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통에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녀는 지한의 팔뚝을 살며시 붙들며 한 번씩 무언갈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무시할 수도 없어 짧게 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는 중에 김신우와도 한 번씩 눈이 마주쳤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딴 짓거리한다고 생각할까 내심 신경이 쓰였다.
촬영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로 예정되어 있었다. 지한은 손목의 시계를 힐긋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30분 정도 지났으나, 소란스러운 비명과 복잡한 인파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기가 쭉 빨렸다.
‘저 새끼가 뭔데….’
흠칫,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지한이 고개를 돌렸다. 소란스러운 함성들 속에서 분명하게 들려온 음성이었다.
뭐지.
눈을 얇게 뜨고 주변을 살폈으나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김신우 씨, 요즘 안방극장을 책임진다던 드라마 파고의 촬영이 한창이라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말 전에 시청률 1위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옆에선 여전히 쉴 틈 없는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었다. 부산스러운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멈춰있는 군중들 사이로 검은 인영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하하, 네. 이럴 때 미리 공략이라도 세워야 하나요?”
“그럼요, 그럼요! 우리 쇼 월드에서 시청률 공략 세우신 분들이 전부 목표를 달성하셨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지한의 시선이 찬찬히 옮겨갔다. 서서히 주변을 맴돌던 인영이 제 바로 옆쪽까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설마. 카메라 몇 대가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대놓고 사고를 칠 머저리는 없을 것이다. 지한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괜한 망상일 수 있었으나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그 순간, 굵직한 외침과 함께 한 남성이 손을 번쩍 들며 튀어나왔다.
“좀, 닥치라고! 닥쳐!”
“꺅!!”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순식간이었다. 재빠르게 튀어 나가며 손을 뻗자, 남자의 팔과 지한의 팔이 둔탁하게 부딪쳤다. 퍽! 거친 소리와 함께 이마 부근에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김신우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방어는 했으나, 주먹이 날아온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뭐야!!”
“미쳤어!! 잡아요!!!”
누군가 내지른 비명을 시작으로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쪽 눈을 찡그린 지한이 놈의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그대로 놈의 몸을 제 쪽으로 세게 당긴 후 무릎 뒤를 퍽 걷어찼다. 그 힘에 놈이 휘청거리자, 잡고 있던 팔에 힘을 실어 바닥에 쓰러뜨렸다.
“아악!!”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주변에서 웅성거림과 함께 높은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지한은 바닥에 뺨을 대고 버둥거리는 놈의 팔목을 꺾어 잡고는, 무겁게 짓눌렀다. 뺨을 타고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다. 시선을 내리니 꺾어 잡은 놈의 손에 작은 돌덩이가 쥐어져 있었다. 아래에선 강한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미친놈. 지한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여전히 그를 짓누른 채 시선을 들어 촬영 스태프들을 바라보았다. 고작 한 방울 흘러내린 피가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따가웠다.
“경찰 불러 줘요.”
이마에 아릿한 고통이 느껴진다. 불안한 직감은 늘 맞아 드는 편이었다. 미리 주시하고 있지 않았으면 아마 그는 그대로 김신우를 덮쳤을 것이다.
“움직이지 마세요. 부러뜨려 버릴지도 모르니까.”
여전히 버둥거리는 남자를 무릎으로 짓누르며 느린 숨을 쉬었다. 한쪽 눈으로 스치듯 시선을 들자, 시야에 김신우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또다시 희멀겋게 굳어 버린 얼굴로 지한을 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촬영은 중단되었다. 주변은 온통 난리가 났고, 헐레벌떡 달려온 스태프들이 소란을 떨었다. 시내의 중심 한복판이다 보니 몇 분 지나지 않아 경찰이 출동했다. 현장에서 바로 쇠고랑을 채운 괴한은 그들과 함께 서로 향했다. 얼굴이 벌건 중년의 남자는 예상했던 대로 완전히 만취 상태였다.
***
지한은 김신우와 함께 병원으로 왔다. 한정원은 일 처리를 위해 서에 갔다. 대기하는 동안 한정원이 주었던 손수건을 이마에 지그시 찍어냈다. 다행히도 중간에서 한번 막아낸 탓에 약간의 피만 조금 묻어나올 뿐 별 이상은 없었다.
제압하며 금이 간 시계는 초침을 여러 번 돌려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래 차고 다니던 것이라 더 못쓰게 된 것이 아쉬웠다.
“괜찮아요?”
앉아서 손목시계를 만지작대던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수납을 마친 김신우가 다가와 서 있었다. 혼자 다녀온다는 데도 굳이 굳이 따라나선 차였다.
“예… 괜찮습니다.”
걱정하는 듯하여 부러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러자 김신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차갑게 굳은 표정에 지한도 입을 다물었다. 전에 쥐 사체를 받았을 때보다 더 심각한 얼굴에 제가 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생각 외로 정말 심약한 사람이었다.
문득 눈앞으로 기다란 손가락이 뻗어왔다. 그는 눈가를 얼핏 가리는 지한의 머리칼을 살며시 걷어냈다. 상처를 바라본 김신우의 시선이 곧 옅게 피가 묻어난 손수건 위로 머물렀다.
빛에 따라 색이 조금씩 달라지는 갈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기분 탓인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럴 리가 없는 걸 알면서도.
걱정이라도 하는 건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지한은 묵묵히 눈을 내리깔았다. 돌연 어젯밤처럼 눈물이라도 떨구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방 안에서 마주쳤던 이가 평소의 김신우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인지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겹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신우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지한의 이마 즈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머물던 지한의 시선도 서서히 내려갔다. 시야에 굳게 다물린 가지런한 입술이 보인다. 생각보다 뜨겁고 부드러웠던 입술이었다.
지한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하는 미친 생각을 자각하곤, 흠칫 눈을 내리깔았다. 타이밍 좋게 병원 직원이 지한을 호명했다.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끝냈다. 다행히 살갗만 조금 찢어진 수준이었을 뿐, 꿰맬 정도도 아녔다. 마음이 놓였다. 한정원도 그렇고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침묵만 흘렀다. 뒤처리를 위해 서에 간 한정원 탓에 운전은 지한이 했다. 그는 지한에게 택시를 타고 가라며 부득불 말렸지만, 어딜 가나 눈에 띄는 김신우 때문에 대중교통보다는 직접 운전하는 게 나았다. 실제로 아무런 이상이 없기도 했다.
보조석에 앉은 김신우는 멀거니 창가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놀랐으니 피곤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연예인도 어지간히 힘든 직업이다. 광적인 안티 팬과 스토커들이 줄줄이 따르는 김신우는 더 했다. 칼날이고, 돌덩이고,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모두 그가 당했을 일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무식하게 몸 쓰지 말아요.”
“…….”
“그딴 거 하나도 안 고마우니까.”
돌연 나직한 음성이 정적을 갈랐다. 창문에 기댄 김신우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좆같은 기분이 스멀스멀 들어차고 있었다. 괴한과 공지한이 맞붙었을 때는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그깟 일로 이렇게까지 기분이 저조해질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아니, 이건 공지한 때문이 아니다. 모든 것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아니지. 그런 병신 같은 새끼들이 주변에 득실거린다는 사실에 열이 받은 것뿐이었다.
다소 공격적인 어투에도 지한은 별 대꾸 없이 핸들을 돌렸다. 아무리 거칠게 이야기해 봐야, 당시 저를 보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병원 대기실에서 본 낯빛 또한 아직 선명했다. 적어도 걱정하는 듯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한은 그저 그가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멋대로 감정을 표출하고 투정을 부리는, 치기 어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린애.
물론 어젯밤 서럽게 떨어뜨리던 눈물의 영향이 없다곤 할 순 없었다. 불우했던 과거에 약간의 동질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나 멀끔한 가면 아래 그가 가진 이면을 본 이상, 조금 더 이해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그게 다였다.
두 남자는 적막 속에서 집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집 안에 들어갈 때까지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도착해선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갔다. 거울 앞에 서자 이마 끝에 잘라 붙인 거즈와 방수 밴드가 드러났다. 불현듯 희게 질리던 김신우의 얼굴과 눈물을 떨구던 서러운 눈동자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는 제가 다칠 때마다 창백한 낯빛을 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트라우마가 훨씬 클지도 모른다. 다만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 정도면 치료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연예인이라 불편해서 하지 않는 걸까. 소속사에서도 쉬쉬하고 있다고 했으니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그래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 생긴 후유증인데 치료는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한정원에게라도 얘기를 좀 해 봐야….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오지랖이다. 어젯밤엔 그런 모습을 보였다지만, 평소의 그는 제게 악역과 다름없었다.
왠지 모르게 답답한 심정에 긴 숨을 내쉬었다.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를 헝클어뜨리곤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간다. 까진 이마가 따끔거렸다.
욕실에서 나온 지한은 목이 말라 부엌으로 향했다. 거실에는 멀끔히 차려입은 김신우가 서 있었다. 코트까지 차려입은 것을 보아하니, 이 시간에 당장 나갈 채비라도 하는 듯 보였다.
“어디 가세요?”
“네.”
물음에 답하며 협탁 위의 차 키를 집어 든다. 따라 지한의 시선이 옮겨갔다. 나가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아… 그럼 잠시만, 옷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말리지도 못한 젖은 머리를 털며 등을 돌렸다. 지한의 업무는 24시간 경호였다. 언제 어디서든 김신우와 동행해야 하는 것이 제 할 일이란 소리였다.
“섹스하러 가는 데 따라오려고?”
지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신우가 툭 내뱉었다. 방으로 걸어 들어가던 지한이 우뚝 멈춰 섰다. 느리게 고개를 돌리자, 별 감흥 없는 표정의 그가 손목시계를 흘긋 보았다.
“필요 없으니까 들어가요.”
단호한 어조에 지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시간이 늦어서 위험합니다.”
“…….”
“그냥 오늘은, 그냥 집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당장 며칠 전만 해도 쥐 사체에 압정 테러까지 당했다. 오늘은 돌을 들고 달려든 괴한 때문에 병원까지 다녀왔는데, 이 시간에 성관계를 위해 혼자 나간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단호한 어조에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평소보다 차게 식은 눈동자가 지한을 응시했다. 빈정거리는 웃음기도, 가식으로 치장한 웃음도 없었다.
“선 넘네.”
김신우는 물끄러미 지한을 주시했다.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 공지한 씨, 셋이서 하는 취미 있어요?”
눈빛엔 서늘한 조소가 깃들었다. 왜인지 돌아온 내내 훨씬 더 냉랭해진 태도였다.
말도 안 되는 말에 지한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때면 몰라도 습격을 받은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 집에 얹혀살며 두 배의 월급까지 받는다. 혹여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저 또한 불편해질 것이 분명했다.
“당장 오늘 습격이 있었습니다. 조사 끝나 봐야 알겠지만, 제가 봤을 땐 동일범 아닙니다.”
흔들림 없는 눈빛에 김신우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한을 무시한 채 그대로 등을 돌렸다. 지한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탁. 그 손길에 멈춰선 김신우가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표정 없는 얼굴로 제 팔목을 쥔 지한의 손을 바라보았다. 두 남자의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내가 오늘 기분이 많이 좆같은데….”
그는 잡히지 않은 손바닥으로 느릿느릿 얼굴을 쓸어내렸다. 곧 딱딱히 굳은 얼굴로 지한을 응시했다. 정적 사이로 둘의 시선이 진득하게 얽혔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신경전이 짧지 않게 이어졌다.
“그럼 공지한 씨가 대신 빼 줄래요?”
적막 끝에 꺼낸 말은 직설적이었다. 김신우는 제 팔목을 쥔 지한의 손목을 반대로 느리게 쥐었다. 그 손길에 지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저 환자입니다.”
지한은 눈치가 빨랐다. 본능적으로 그의 팔목을 잡은 손을 물렸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내자 김신우가 짧게 웃었다.
“아깐 괜찮다면서.”
그가 입고 있던 코트 단추를 툭, 툭 풀어 내리며 지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금세 벗어 내린 감색 코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지한은 그가 다가온 만큼 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아뇨… 안 괜찮습니다.”
그는 찌푸린 채 낮게 중얼거렸다. 와중에도 김신우와의 거리는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끝내 등이 거실 벽에 닿았다.
“얼굴 보면서 하긴 좀 그렇고.”
“…….”
“뒤집어 놓으면 박아 줄 생각 정돈 있는데.”
지한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할래요?”
지한을 벽에 가두듯이 짓누른 김신우가 조소를 머금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과는 달리 커다란 흉통과 체격 탓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안 합니다, 그런 거….”
고개를 돌린 지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그와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속 깊은 곳에서 불쾌한 감정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왜. 호모 짓 하면서 뒤는 안 뚫려 봤어요?”
적나라한 말에 지한이 느리게 눈을 들었다. 고개를 살짝 비튼 김신우는 어느새 바짝 다가와 있었다. 희미하게 어려 있던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앞으론 말 뱉기 전에 생각을 해요, 공지한 씨.”
“…….”
“좆같이 굴지 말고.”
나직하게 중얼거린 김신우가 지한을 싸하게 응시했다. 지한은 끝까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뱉어대는 막말에 그 또한 화가 났다.
“일 생길까 봐 걱정돼서 그런 겁니다.”
“걱정?”
지한은 턱을 꽉 물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뻔히 알면서 일일이 동요할 필요가 없었다. 김신우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다.
“제 일이잖아요.”
“아하, 일.”
말꼬리를 늘이며 빈정거리는 어투에 지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들리지 않게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신우 씨가 다치면 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됩니다. 돈을 받고 하는 건데 대표님께도 죄송해질 일이고요.”
지한은 무감한 얼굴로 김신우를 응시했다.
저 또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켜주는 것이 제 일이니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 난리 통에 고집부린다면, 굳이 모욕까지 당하며 붙잡을 이유도 없었다.
지한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연하게도 김신우는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불현듯 피곤함이 몰려왔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럼.”
지한은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께를 지그시 밀어냈다. 그와 바득바득 기 싸움해 봐야 좋을 것이 없단 걸 다시금 깨닫는다. 막말로 나가서 다치든 싸우든 제 알 바는 아녔다. 이 정도 했으면 본분은 지킨 것이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자리를 떠나려는 지한의 손목을 탁 잡아챘다. 느닷없는 언행에 지한이 굳은 듯 멈춰 섰다. 그는 삽시간에 불손해진 눈빛으로 김신우를 응시했다.
“왜.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며.”
느긋한 어조와 달리 그는 지한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드센 악력에 벽과 김신우 사이에 바싹 끼인 지한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당신 말대로 나가서 걱정 안 시킬게요.”
아래에서 달그락대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내리자 그가 벨트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박는 건 됐고.”
“…….”
“좀 빨아 줘요.”
단호한 어조에 지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뒤늦게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왜. 싫어요?”
부드럽게 묻는 김신우의 얼굴엔 희미한 조소가 깃들었다. 순식간에 뒤집힌 태도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오늘 저를 구하느라 다치기까지 했는데, 성욕에 눈이 회까닥 돌아버린 것이 분명했다. 잠시라도 그를 동정했던 제가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이 말을 하면 씨발, 답을 해야지.”
그가 지한의 턱을 와락 움켜쥐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김신우의 눈을 주시하는 지한의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섞여들었다. 그러나 어느 하나 선뜻 꺼낼 수가 없었다.
“하아.”
짜증이 난 지한은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하니 나가지 말란 말 한마디에 이런 식으로 나와야 하는 건지, 도통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역시 쓰레기통에 분리수거도 안 될 개차반이었다. 아니, 애당초 이해해 보려 노력할 가치도 없는 놈이었다.
지한은 제 턱을 쥔 그의 팔을 탁, 쳐냈다. 김신우를 오래 겪어 보진 않았으나 여기서 제 사정을 봐주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봐야 꼴만 더 우스워질 뿐이었다. 한번 해 봤는데 두 번 못할 것도 없었다.
“여기서 하면 됩니까?”
무심한 어조에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계속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역시 봐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지한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느닷없이 남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는 기분은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더러웠으나, 참아야 했다. 포식자는 사냥감이 겁을 집어먹을수록 더 희열을 느낀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김신우는, 그저 김신우일 뿐이었다.
무릎으로 선 채, 그의 까만 드로즈를 내렸다. 퉁 튀겨져 나온 성기를 손으로 쥐었다. 어쩐지 전과 다르게 반쯤 일어서있었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전에 해 봤다고 하나 남의 성기를 무는 것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잠시 숨을 고르는 찰나, 목덜미를 누르는 악력에 가랑이 사이로 머리가 처박혔다.
“뭘 망설여.”
“으븝….”
김신우가 지한의 젖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미끈한 좆이 삽시간에 입 안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뜨끈한 입 안에서 금세 제 크기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하아, 씹. 제대로 빨아요.”
머리 위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지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것이 한계까지 발기했을 때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지는 이미 겪어 봐서 잘 알고 있었다.
지한은 코로 숨을 내쉬며 천천히 혀를 놀렸다. 핏줄이 도드라진 표면을 핥고, 사탕 빨듯 쭉 빨아올리자 단단한 좆이 입 안에서 꺼덕거렸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다.
“후. 한번 해 봤다고, 잘, 하네요.”
“컥, 읍….”
쿡, 하고 귀두를 더 쑤셔 넣는 허릿짓에 지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뒤가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기에 지난번처럼 도망갈 곳도 없었다.
“그새, 어디서 싸구려 같이, 입 놀리다 왔나?”
뒷머리 칼을 꽉 쥐어 잡은 김신우가 눈을 얇게 떴다. 붉게 물든 지한의 눈가를 주시하며 뜨거운 숨을 길게 내뱉는다. 지한의 입 안에서 젖은 살덩이가 마찰하는 소리가 질척질척 울려 퍼졌다. 숨구멍이 막혀 잇새로 타액이 줄줄 샜다.
“하아, 씨발….”
“흐읍….”
“공지한 씨.”
김신우는 짙은 숨을 내뱉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커다란 자지로 숨구멍이 다 틀어막힌 지한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축축이 젖은 눈을 치뜬 채 김신우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거슬리게 좀 굴지 마요.”
“으욱… 큽….”
두툼한 귀두 끝이 흉포하게 입천장을 문질렀다. 지한은 질끈 눈을 감곤 허리를 곧추세웠다. 길게 빠져나갔던 좆이 다시 목구멍을 쑤셔 왔다.
오늘 한 일이라곤 최선을 다해 그를 지킨 게 다였다. 제가 뭘 거슬리게 한 건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딱딱한 바닥에 닿은 무릎이 아리다. 어차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한은 울컥 치솟는 반발심을 느꼈다. 시큰거리는 눈을 힘주어 치떴다.
그는 반항하듯 기둥의 뿌리를 잡고는, 딱딱하게 부푼 살덩이를 적극적으로 물고 빨았다. 그저 이 개 같은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했다.
김신우의 낮은 숨소리가 점점 짙어져 갔다. 살짝 치켜든 턱과 붉은 입술에선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지한을 굴복시키겠다는 생각도 잊은 채, 그는 번져 가는 쾌락에 잠겼다. 짜릿한 성감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하아….”
한 손으로 벽을 짚은 그가 반대 손으로 지한의 머리칼을 쥐었다. 시선을 내려 저를 노려보는 눈을 마주한다. 추웁, 춥. 츱. 질척한 살 기둥이 문질리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눈가를 찌푸린 그의 커다란 손이 지한의 뒷목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질끈 눈을 감은 지한은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했다. 입가를 찢을 듯 부푸는 흉기에 미간이 좁아진다. 당장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았다.
지한은 볼이 홀쭉해지도록 좆을 빨며 행위에 열중했다. 핏줄이 솟은 붉은 기둥이 꺼덕거렸다. 숨이 막히고 속이 울렁거렸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만큼 지한은 더 열심히 빨았다. 지금은 그의 사정을 유도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탈출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열이 올랐다. 온몸이 바싹 타버릴 것만 같았다. 하여 이마의 상처를 스치듯 어루만지는 김신우의 손길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
만취한 남자가 김신우에게 앙심을 품은 이유는,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인 전 부인이 그의 극성팬이었던 탓이라고 했다. 그들은 결혼 생활 중에도 그 문제로 여러 번 다퉈왔고, 그뿐만 아니라 폭행, 외도 등의 다른 사유도 있는 듯했다. 하기야 하는 짓을 보면 김신우 탓만은 아닐 터였다.
다음 날 아침 술이 완전히 깬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해 왔으나 합의는 없었다. 와이앤에이치 엔터의 박 대표 또한 선처는 없다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뒤에서 강경하게 나간 김신우의 단호한 태도 탓이었다.
추가적인 조사의 결과로 확실해진 것은, 지한의 생각대로 그가 김신우의 스토커와 동일범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말인즉슨 아직도 주변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우선은 여론의 눈치도 살필 겸, 겸사겸사 쉬라는 박 대표의 말대로, 삼일간의 휴가를 받았다. 따라서 예상치 못하게 지한도 함께 쉬게 되었다.
이제 김신우의 집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지한은 소파에 앉아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어디를 틀든 간에 김신우에 관한 기사와 인터뷰가 나왔다. 최근 연예계에서 벌어진 사건 중 가장 쇼킹한 방송 사고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의 핫뉴스! 생방송 쇼 월드의 길거리 인터뷰 중 괴한의 습격을 받은 김신우 씨의….’
주먹만 한 돌을 들고 달려드는 놈과 그를 제압하는 지한의 영상이 여과 없이 전파를 타고 흘렀다. XCB사 홈페이지에선 다시 보기 분량을 부분적으로 삭제했으나,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한 대중들의 영상들이 인터넷에 일파만파 퍼졌다.
[이현우: 꽁!!! 너 연예인 다 됐던데?(이모티콘) 오후 14:01]
[이현우: 나 사인해 줘라ㅋㅋㅋ 오후 14:01]
동기 이현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기실 평소 연락 없던 이들에게도 연락이 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살풋 인상을 찡그린 지한이 답문을 보냈다.
[오후 14:03 미치겠다.]
[이현우: 왜ㅋㅋㅋ유명해지면 좋지ㅋㅋ 오후 14:04]
[이현우: 너 카메라빨 존나 쩔던데 이기회에 데뷔ㄱㄱ? 원래 잘생기긴 햇지만 오후 14:04]
묵묵히 그의 메시지를 읽던 지한은 답을 하지 않고 대화창을 껐다.
‘이로 인해 김신우 씨의…. 개인 경호원으로 알려진 20대의…. …가 단숨에 괴한을 제압하는 모습이 실시간 1위를 차지….’
돌연 티브이에서도 지한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포털 사이트에 ‘김신우’라고 쳤을 때 ‘김신우 경호원’,’김신우 보디가드’ 등이 연관 검색어로 떴다.
인터넷엔 온갖 제보 영상들로 들썩들썩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제 얼굴을 확인한 지한은 질색을 했다. 평소 사진을 찍어 본 일도, 남이 찍게 내버려 둔 일도 없던 그였기에 카메라를 통해 드러난 제 얼굴이 더욱 어색하게 보였다. 졸지에 얼굴이 팔려 민망하고 골치 아프기만 했다.
[이현우: 야야! 이거봄?ㅋㅋㅋㅋ 오후 14:10]
[이현우: 링크 오후 14:10]
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행인이 찍어 올린 유튜브 동영상의 링크였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시끄러운 비명과 함께 괴한을 신속하게 제압하는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흘러나왔다.
‘경찰 불러 줘요.’
멀끔한 블랙 슈트와 훤칠한 체격, 서늘한 눈빛과 도시적이고 잘생긴 익명의 경호원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새하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붉은 피 한 방울을 매단 채 말하는 날카로운 모습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부러뜨려 버릴지도 모르니까.’
지한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팔뚝에는 소름이 돋아났다. 남들이 아무리 멋있다고 한들, 본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장면일 뿐이었다.
“아….”
신음처럼 중얼거린 지한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욕이 절로 나왔다. 마음 같아선 핸드폰을 내던지고 싶었다. 전면, 후면, 좌, 우, 360도까지 각종 각도에서 찍힌 영상들이 에스엔에스를 타고 삽시간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툭 소파에 기대앉은 지한이 망연자실하게 영상을 껐다. 빠르게 퍼져 나간 영상 덕에 그는 어느새 ‘김신우 경호원’으로 실검에 오른 것도 모자라 실명은 물론 간단한 신상까지 퍼져 있었다.
물끄러미 핸드폰 화면을 보던 지한은 별생각 없이 검색어 1위인 김신우를 눌렀다. 여러 기사와 사진, 그리고 관련된 에스엔에스의 글 등이 떴다. 최근 기사에는 지한의 이야기도 심심찮게 보였다.
스크롤을 내리던 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개중에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한 탓이었다.
제목 : 인간적으로 김신우 경호 오빠랑 연애중이어야함ㅇ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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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어느 익명 사이트였다. 본문에는 그날의 일을 축약한 사진이 여러 장 이어져 있었다.
먼저 환하게 웃으며 인터뷰하는 김신우와, 뒤를 따라 묵묵히 군중을 제지하는 지한의 모습이 보였다. 아래로는 난데없이 습격한 괴한과 그를 재빠르게 제압한 지한의 행동이 이어졌고, 제 아래에 놈을 짓눌러 놓고도 심각한 얼굴로 김신우를 살피는 지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희게 질린 채 지한을 보고 있는 김신우의 마지막 사진은 아주 화룡점정이었다.
[댓글121개]
└ㅇㅈ망설임없이 바로 몸던질때부터 세기의 사랑각
└ㅅㅂ 와 눈빛 미쳤냐 이마 존나치는중;;;
└그럼 김신우가 탑임 바텀임?
└원래 아름다운 얼굴과 그렇지 못한 몸매가 탑이어야ㅎㅎ
└미슐랭 쓰리스타^^
└노자曰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머물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있게 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 했소.
└└ㅁㅊㅋㅋㅋㅋ존나웃김
└└└성지순례왔습니다
댓글을 스크롤 하던 지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엮을 사람이 따로 있지.
그는 짧게 혀를 찼다. 김신우와 세기의 사랑이라니. 아직도 그제 밤만 생각하면 화가 차올라 속이 다 뜨거웠다. 지한은 못 볼 것을 본 듯한 얼굴로 대충 휙휙 넘겼다. 이쯤 되면 세상 사람들도 그의 실체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김신우와 관련된 다른 기사들이 떴다. 개중에는 열애설이나 스캔들에 관한 것들도 제법 있었다. 아이돌, 배우, 심지어는 패션모델까지 무수한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했다. 하나같이 전부 아름다운 외모와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자들뿐이었다.
‘섹스하러 가는 데 따라오려고?’
돌연 그의 음성이 떠오른다. 만나러 가던 여자 또한 이런 이들 중 하나였을까. 적어도 그녀들에게는 제게 보였던 개차반 같은 성격을 내보이진 않을 것이다. 생각하니 또 속이 쓰렸다. 개새끼. 공연히 입매 끝이 따갑게 느껴졌다.
“나한테 관심이라도 생겼어요?”
별안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지한이 흠칫 핸드폰을 뒤집었다. 고개를 돌리자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친 김신우가 보였다. 그는 희미하게 웃음기 어린 얼굴로 티브이를 주시하고 있다. 다행히도 핸드폰 화면을 본 것은 아닌 듯했다.
“아뇨… 그냥 나오길래.”
지한은 눈을 내리깔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끄지 않았던 티브이 화면에는 그날의 촬영 장면과 함께 당시 현장에 있었던 행인들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었다.
‘보디가드 오빠 진짜 멋있었어요! 최고, 최고! 사랑해요!’
‘잘생겼어요!!! 진짜 존잘!!’
스피커를 통해 느닷없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지한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화면 속에는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손을 마구 흔들며 환호하고 있었다. 문득 지켜보던 김신우의 눈이 살짝 굳어졌다.
“팬 카페도 생겼던데.”
“…….”
“이 기회에 직업 전향해도 되겠네. 대표님한테 말해 줘요?”
화면을 지켜보던 김신우가 빈정거리듯 말을 건넸다. 민망해진 지한이 리모컨으로 티브이 전원을 껐다.
“…됐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에 김신우의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한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이마에 손등을 툭 올리곤 천장을 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얽혀들었다. 돌연 지난밤 제 뒷목을 잡고 성기를 들이밀던 김신우의 찌푸린 얼굴이 떠올랐다.
불쾌하고 역겹다. 앞뒤 없는 무례함에 화가 났다.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며 눈을 감는다. 뒤따라 애처로운 얼굴로 눈물을 떨구던 모습도 떠올랐다. 가진 전부를 잃어버린 듯, 구슬프고 처연하게 울던 얼굴이. 생각하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해리성 인격장애라고 했다. 그날 밤 그는 김신우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평소 김신우와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인 것이다.
누구나 아픔은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빌미를 잡고 저를 멋대로 휘두르려는 김신우는, 제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더욱이 지금 제 마음의 파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은 자꾸만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뜨끈해진 눈두덩을 꾹 눌렀다. 설마 그 콧대 높은 김신우를 동정이라도 하는 걸까. 어릴 적부터 그런 제 성향은 알고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불쌍한 놈이라도 그를 동정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화재가 났는데… 그때 김신우 씨 빼고 가족이 전부….’
귓가에 한정원의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를 미워하던 마음에 무거운 추가 달린 기분이었다. 한번 묵직해진 생각의 무게는 쉬이 가벼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거푸 의도치 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눈을 감은 지한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모로 누웠다.
지금 덫에 걸린 건 저였다. 한정원에게 제 마음을 들킬 일 없이, 최대한 빨리 그만둘 방법부터 생각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니까, 김신우의 상처 따위는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저 조금 편해졌단 이유로 부리는 멍청한 오만에 불과했다.
***
휴무는 빠르게 흘렀다. 지한은 최대한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김신우와 마주치지 않고 이틀을 보냈다. 다행히 그 또한 따로 지한을 찾지 않았다. 전처럼 억지를 부리며 밖으로 나도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늘은 의류 브랜드 ‘카오슈’의 협찬 모델인 김신우의 팬 사인회가 있었다. 현장에 도착 전부터 미리 많은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사고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규모가 큰 행사라 취소가 어려웠다.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과 함께, 김신우가 사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지한은 그의 등 뒤로 한 걸음 더 붙어 섰다. 언제 어디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지한 또한 제법 긴장이 됐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김신우와 문득 눈이 마주친다. 밝은 빛 아래 오묘한 빛깔이 맴도는 눈동자가 지한을 응시했다. 그는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반듯한 자세로 뒷짐을 진 채 웅성거리는 관중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위험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정신 차리고 경계해야 했다. 지금 자신이 할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눈을 마주하지 않자, 이윽고 김신우의 시선도 금세 거두어졌다.
“지한 씨!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별안간 다가온 장준혁이 주먹을 쥐며 인사했다. 인터뷰 사고 이후 박 대표의 지시로 상시 경호 인력이 보충되었다. 지난번 명함을 받았던 티에이디라는 업체였다. 지한은 눈인사로 가볍게 답해 주었다. 우직한 체격에 넉살 좋은 성격까지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지어 서 있던 인파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히 이렇다 할 연령층도 없었다. 젊은 여자들의 비중이 크긴 했지만, 남자도, 중년층도 종종 보였다. 아무래도 남녀노소 전부 김신우를 좋아하는 듯했다. 남 일에 그다지 관심 없는 지한에게는 종이 한 장을 받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사인회는 별일 없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줄을 선 사람들이 차례로 나왔고, 사인 종이를 받으면 악수와 함께 나갔다. 끝이 보이지 않던 줄도 금방금방 줄어들었다.
“네, 성함이?”
“김지은이요! 저 내년 수능 잘 보라고 써 주시면 안 돼요?!”
발랄한 말투에 김신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펜을 쥔 기다란 손가락이 능숙하게 곡선을 그린다. 사각거리며 덧붙인 추신에는 하트로 마무리했다.
“수능 잘 봐요, 지은 씨.”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메고 있던 학생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좋나. 파닥거리는 병아리 같은 모습에 지한의 입매도 잔잔히 끌어 올라갔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떠난 학생의 뒤로 단아한 원피스 차림의 젊은 여성이 다가왔다. 손에는 작은 쇼핑백을 든 채였다.
“안녕하세요, 성함이.”
“류수아요.”
“네에.”
“어…. 저….”
눈치를 보듯 꾸물거리던 여자가 문득 뒤로 시선을 옮겼다. 별생각 없이 보고 있던 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저어… 오빠, 팬이에요. 여기.”
느닷없이 내미는 노란색 쇼핑백에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다지 표정 변화는 없었으나 그 나름대로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그녀가 한 번 더 손을 내밀었다.
“저, 저, 받아 주세요.”
뻣뻣하게 경직된 지한이 주춤거리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아래로 김신우의 싸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나 그것도 잠시였다. 금세 사르르 웃어 보인 김신우가 사인을 마친 종이를 건넸다.
“저희 경호원 씨가 좀 멋있죠? 여기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시선은 오롯이 지한에게로 둔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네, 오빠… 연락처 안에 있어요, 꼭, 꼭 연락 주세요!”
그녀는 곧 가느다란 손을 마구 흔들며 사라졌다. 휑하니 찬 기운이 남은 자리에 지한은 손에 든 것을 어쩌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었다.
“와. 역시 지한 씨, 잘생기고 멋지셔서 인기도 많으십니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장준혁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여자분 엄청 아름다우시던데 연락 한번 해 보시죠. 어차피 애인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능청스레 말을 건넨다. 지한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명색이 김신우의 사인회인데 제가 이런 걸 무턱대고 받아도 되나 싶은 생각이었다.
“왜 이렇게 굳으셨어요. 하하, 혹시 의외로 부끄러움 많은 타입?”
“…….”
눈치 없이 오두방정 떠는 모습에 지한은 입을 다물었다. 돌연 김신우가 반쯤 남아 있던 생수의 뚜껑을 따 느릿하게 들이켰다. 아니나 다를까 제 사인회에 엄한 놈이 선물을 받고 있으니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그라면 충분히 기분 나빠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혹시 잘되면 배우님께 한턱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거.”
“그러게요! 진짜 좋으시겠습니다.”
그사이에 슬쩍 다가온 다른 직원이 말을 거들었다. 장준혁은 그의 말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한보다 그들이 더 신난 듯했다.
끝까지 물을 비운 김신우가 병을 종이처럼 가볍게 구겼다. 민망해진 지한은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
약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사인회에서는 다행히도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과 다른 점을 꼽아 보자면, 사인을 마친 팬들이 종종 지한에게 악수를 청한다거나 멀리서 사진을 찍어댔다는 것이다.
주변의 동태를 살펴야 하는 지한으로서 저를 찍고 있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모른 척 눈을 내리깔거나 묵묵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었지만 민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사인을 마친 김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한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정하게 웃으며 브이를 하자, 지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로써 정신없던 사인회도 막을 내렸다.
“우리 한이, 인기 이렇게 많아져서 데뷔해도 되겠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건 한정원이 키들거렸다. 창밖을 보던 지한은 묵묵히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하던 핸드폰엔 기별 없이 지내던 지인들의 메시지가 쌓이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을 질색하는 지한은 피로할 뿐이었다.
“먼저 집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차는 김신우의 아파트로 출발했다. 팬 사인회가 끝난 후 그간 미뤄 왔던 소속사 단체 회식이 있었다. 지한의 입사 후부터 말로만 오가던 것이 티에이디 경호까지 추가 계약하며 날이 잡혔다.
차에서 기다린다는 한정원을 두고 아파트에 올라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한과 김신우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쌀쌀해진 날씨 탓에 두툼한 패딩 점퍼를 입은 지한과 달리 김신우는 목 폴라에 코트 차림이었다.
추울 텐데. 연예인이라 그런지 곧 죽어도 멋을 챙기는 그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뭘 봐요.”
김신우는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 없이 그의 옷차림을 보던 지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괜히 훔쳐보다 들킨 것 같아 머쓱해졌다.
“추워 보이셔서.”
말하며 빠르게 변하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바라보자, 김신우가 짧게 웃어 보였다.
“왜, 벗어 주기라도 하려고?”
“아뇨.”
여느 때보다도 단호한 답이 튀어 나갔다.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문득 옆 시야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앞을 주시했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유난히 느린 듯했다. 돌연 바짝 붙어서 있던 김신우가 손가락으로 지한의 뺨을 툭 건드렸다.
“내 경호원이면서 그 정도도 못 해 줘요?”
“…….”
“서운하네.”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지한이 시선을 들어 김신우를 쳐다보았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밤색 머리칼이 눈가를 스치듯 가린다. 살짝 휘어진 눈매와 희고 매끄러운 피부가 오늘따라 더욱 반짝거렸다. 지한은 설핏 눈매를 굳혔다.
저 아름다운 얼굴에 속지 않으리라. 겉껍질만 완벽한 그는 속이 시커먼 악마였다. 그대로 시선을 거두곤 바닥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서 겉옷이라도 하나 더 가져가시죠.”
“됐어요. 감기밖에 더 걸려.”
감흥 없이 답하는 김신우의 말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내키는 대로 구는 그에게 적응이 될 법도 하건만, 곱게 웃는 화려한 외모를 볼 때면 매 순간 속는 기분이었다.
별 답 없이 고개를 숙인 지한이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마지막에 한정원이 챙겨 줬던 핫팩 탓인지 조금씩 몸에 열이 올랐다.
2권에서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