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 좋은 일 있었다며. 괜찮아 신우 씨?”
“예. 별일 아니에요.”
“어어. 경호원 씨 피까지 봤다면서 별일 아니기는? 요즘 세상에 정신병자들이 많아. 몸조리 단단히 해.”
몸값도 비싼데. 이어지는 정 감독의 말에 김신우가 조소를 머금었다.
“하하, 그래서 가드도 고용했잖아요.”
“그래. 생각 잘했어. 더 큰 일 생기기 전에 미리미리 예방해 놓으면 좋지.”
“네에. 몸값 비싼 주연이 죽기라도 하면 감독님 곤란하시니까.”
산뜻하게 답하며 미소를 짓는다. 악의라곤 없는 말간 미소에 정 감독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손바닥으로 괜스레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니 뭐 꼭 그런 말은 아니고….”
말꼬리를 흐리던 정 감독의 시선이 몇 미터 떨어져 있는 지한에게로 향했다. 기다란 눈가에 작은 밴드를 붙여놓는 바람에, 원체도 냉랭한 인상이 조금 더 서늘해졌다.
“저이야?”
물으며 과장되게 눈썹을 치켜뜬다. 그는 지한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다 말고,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신우 씨, 얼굴 보고 직원 뽑아?”
“설마요.”
“아니, 매니저도 그렇고 말이야.”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곤 다시금 지한을 주시한다. 집요한 눈길에 김신우의 시선 또한 지한에게로 향했다. 뒷짐 진 채 주변을 지켜보고 있던 지한이 쏟아지는 눈길에 눈을 들었다.
“아아, 나 장난 아니야. 바로 카메라 앞에 세워도 되겠어. 왜 지난번에 박우준 대신 다쳤던 놈 아닌가? 왜 이제 봤지? 어, 거기 보디가드 씨! 이쪽으로 와 봐!”
그가 손을 크게 휘적거리자, 지한이 조금의 지체도 없이 성큼성큼 뛰어왔다. 말 잘 듣는 개 같은 모습에 김신우의 눈가가 살짝 구겨졌다.
“부르셨습니까?”
“얼굴 좀 보려고.”
“예?”
느닷없는 말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영문을 모르는 새카만 눈동자가 김신우를 힐긋 보았다.
“그때 다친 건 괜찮아? 우리 김우진이가 원래 실수하는 놈이 아닌데 미안하게 됐어요. 병원비는, 청구 다 했지?”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지한의 어깨를 마사지하듯 주물거렸다.
“아…. 괜찮습니다. 병원 갈 정도도 아니었고요.”
“그래, 가까이서 보니까 더 훤칠하니 이거 딱 영화 할 얼굴인데. 혹시 왕년에 뭐 좀 찍어 봤어? 왜 요즘 애들 조금 반반하면 어릴 때부터 크리에이터니 뭐니, 희한한 영상 찍고 그러잖아.”
지한의 눈동자에 언뜻 당황의 빛이 스쳤다. 그는 바닥에서 구르며 뜀박질하는 운동 말고는 딱히 해 본 것이 없었다.
“아뇨, 저는….”
“왜 그러십니까, 감독님. 저로는 부족하세요?”
지한의 어깨에서 정 감독의 손을 떼어낸 김신우가 웃었다. 자연스레 팔을 뻗어 대신 지한의 어깨를 감싸 쥐며 눈을 가늘게 뜬다.
“우리 공지한 씨가 얼마나 본업에 충실한데요. 저 말고도 벌써 몇 놈 목숨을 살렸는지, 어지간해선 구하기 힘든 고급 인력이에요.”
안 그래요? 다정하게 덧붙이며 물어 온다.
붙들린 어깨에 뻐근한 힘이 들어왔다. 그 손을 힐긋 바라본 지한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정 감독이 진중한 얼굴로 지한을 뜯어보듯 훑었다.
“그러니까 더 구미가 당기네. 몸이 좋아서 액션 쪽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야. 스턴트 쪽이나….”
“감독님 준비 다 됐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온 스태프의 외침에 정 감독이 끄덕이며 손짓했다.
“어 그래. 신우 씨, 자 다 쉬었으면 들어가자고!”
어깨 위에 닿았던 손이 스르륵 거둬졌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지한을 흘긋 바라본 김신우는, 곧 세트장 속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잠시 지켜보던 지한 또한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자리에 서서 김신우를 주시한다. 그는 상대 배역인 설지현과 마주 선 채 다정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대부분 카메라 앵글 앞에서만 볼 수 있는 하얀 미소였다.
저 사람도 저런 웃음이 진심일 때가 있겠지. 그간 스캔들이 났던 여자들이나 진짜 제 사람에게는 다정한 웃음을 보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괜한 생각에 찝찝해졌으나 곧 그 인성이 어딜 가겠나 싶어 고개를 저었다.
“우리 한이, 머리 그렇게 훤칠하게 넘기니까 더 멋있다. 내가 아주 잘 키웠어.”
돌연 나타난 한정원이 지한의 팔을 붙들고 꼼질꼼질 흔들었다.
느닷없는 칭찬에 지한의 귀 끝이 붉어졌다. 이따금 왁스를 바르고 이마를 훤히 드러낼 때마다 그는 이런 칭찬을 하곤 했다. 간만에 머리에 신경을 쓰고 온 보람이 있었다. 문득 시선을 내리니 투명한 눈망울이 물끄러미 닿아온다.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형이 뭘… 키워.”
“내가 다 키웠지, 그럼. 아니야?”
지한은 별 답 없이 슬쩍 웃음만 머금었다. 자신이 업어 키웠다면 몰라도, 그에게 키워졌다는 건 그림이 이상했다.
“약은 잘 바르고 있어?”
한정원은 금세 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게 뭐 별거라고. 제일 많이 다쳤던 군 생활 땐 수도 없이 긁히고 까져도 약조차 바르지 않았다.
“얼굴 피부는 약해서…. 이런 작은 상처가 은근히 흉터 남을 수도 있어. 진짜 약 잘 챙겨 발라. 알겠지?”
속닥거리는 말에 답 없이 작게 턱을 끄덕였다. 아무래도 얼굴의 상처라 그런지 좀 신경 쓰이는 듯했다.
“한 매니저님! 신우 씨 대본이랑 협찬 재킷 좀 체크해 주시래요!”
느닷없는 외침에 한정원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선 촬영 스텝이 급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옆에 선 김신우 또한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네!”
한정원이 눈을 크게 뜨곤 소리쳤다. 이내 당황한 얼굴로 부산스럽게 두리번거렸다.
“아! 재킷은 차에 있는데…. 대본 어디다 뒀더라…. 대본.”
촬영 중 대사 실수를 하지 않는 김신우는 꼭 제가 따로 체크해 놓은 대본만 읽곤 했다. 한정원은 별의별 이상한 약품들은 꼬박꼬박 잘 챙겨 다니면서, 은근히 중요한 것들을 잘 빼먹는 맹한 구석이 있었다.
저러다 김신우한테 또 한 소리 듣지….
부산스레 뒤적거리는 한정원을 보던 지한이 손을 내밀었다.
“차 키 줘, 뒤에 걸어 놓은 재킷 가져오면 되지?”
“어, 어! 아니야. 내가….”
“1층까지 가야 하잖아, 줘. 형은 가서 대본 찾아봐.”
“아, 응. 고마워. 뒷좌석에 검정 슈트 재킷이야.”
키를 받아 든 지한이 걸음을 옮겼다. 3년 내내 그가 얼마나 많은 눈칫밥을 먹고 살았는지, 이 순간만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덜렁대는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니 그 성격에 뭐라 할 만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제라도 지켜보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김신우의 경호로 들어온 것이 인생 최대의 실수인 건지, 아니면 다신 없을 행운인 건지는 모른다. 하나 이런 식으로 그와 얽힌 것만 아니었다면 참으로 기꺼웠을 환경이었다.
엘리베이터를 지나 입구를 나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되어 있을 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밴의 문 쪽에서 누군가 어슬렁대는 모습이 보였다.
불현듯 지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새카맣게 선팅된 차 문 옆으로 검은 인영이 움직이고 있었다.
…뭐야.
지한은 숨을 죽이며 발소리를 낮춰 다가갔다. 차츰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그는 눈치채지 못한 채, 무언가에 집중해 있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불현듯 흰 장갑을 낀 손가락이 보였다. 순간 좋지 않은 직감이 스친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긴장감이 올라왔다. 그대로 마지막 걸음을 내딛는 찰나였다.
“한아! 안 가져와도 돼!”
뒤에서 주차장을 가득 메우는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차 앞의 인영이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젠장. 거친 발소리와 함께 지한도 힘껏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조급한 뜀박질이 고요한 주차장 사이로 울려 퍼졌다. 탁탁탁!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놈은 제법 빨랐으나, 평균을 훌쩍 넘는 지한의 긴 다리 탓에 점점 거리가 좁아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따라잡으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눈가를 찌푸리며 경사진 바닥을 힘차게 뛰어 올라가는 순간, 주차장을 들어서던 세단 한 대가 지한의 앞을 확 가로막았다.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클랙슨이 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빵, 빵빵빵!
“야 이 새끼야! 똑바로 안 보고 다녀!!!”
미간을 좁힌 지한이 입술을 콱 물었다. 소리치는 운전자를 무시하곤 차와 벽 사이를 비집고 뛰어나갔다. 삽시간에 밝은 햇빛이 시야를 내리비춘다. 잔뜩 찌푸린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대낮의 길거리에는 바삐 움직이는 인파가 가득했다. 그 속에서 놈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놓쳤다.
지한은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인상은 잔뜩 찌푸린 채였다. 빌어먹을, 거의 다 잡은 거였는데! 욕을 읊조리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분한 마음에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훅 솟구쳤다.
“하아, 하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펴곤 허리에 손을 얹었다. 집요한 눈길은 아직도 주변 사람들을 느릿하게 훑고 있었다.
없다. 이미 사라졌다. 지한은 좀 더 재빠르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신경질적으로 오른발을 굴렀다.
“한, 한아. 또 그놈이야? 또 나타났어?”
뒤이어 쫓아온 한정원이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희게 질린 얼굴에 관자놀이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긴 숨을 내쉰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놓친 거야? 너 안 다쳤어?”
“괜찮아. 하….”
지한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공개되지 않은 촬영장과 차 모델까지 낱낱이 파악한 걸 보아하니 예사로운 놈이 아니었다. 차에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지한은 빠른 걸음으로 다시 주차장을 향했다. 그의 뒤를 한정원이 잰걸음으로 쫓았다.
“차에 뭘 한 것 같아.”
“차에? 뭐, 바퀴에 구멍이라도 냈나?”
눈을 동그랗게 뜬 한정원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확실히 겁이 없는 놈이다. 아무래도 사안이 조금 심각한 듯 보였다.
“가서 봐야지.”
생각에 잠긴 지한이 보폭을 좀 더 빠르게 좁혔다. 우선 블랙박스 먼저 확인해야 했다.
지난번 일이 벌어지고 경찰 신고를 한 지도 며칠 지나지 않았다. 왜인지 동일범일 거란 직감이 왔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집요하게 나타날 것이고, 자칫하면 김신우부터 한정원까지 모두가 타깃이 될 수도 있었다. 생각하니 불안감이 더해졌다.
밴 옆에 쭈그려 앉은 지한이 손가락으로 타이어를 눌러 보기 시작했다.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다. 다행히 어디 구멍을 낸 것 같지는 않은 듯했다. 하기야 요즘 세상에 이런 1차원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러면 뭐지. 그냥 팬인데 너무 과민 반응한 건가.
하나 그런 것 치고는 어딘가 수상쩍었다. 지한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하게 도망가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제법 오래 서 있던 걸 보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우선 블랙박스를 살펴보는 게 좋을 듯했다.
“악!”
별안간 한정원이 비명을 질렀다. 퍼뜩 일어난 지한이 반대쪽에 서 있던 그에게 달려갔다.
“무슨…!”
어깨를 잔뜩 움츠린 한정원이 오른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얼굴은 한껏 일그러진 채였다. 놀란 지한이 그의 손을 잡아 쥐었다. 조심스레 펴자 붉게 물들기 시작한 손가락이 보였다.
“아…. 여기, 차 문 열려는데 뾰족한 게…. 으!”
고개를 숙인 채 주춤거리며 주먹을 쥔다.
“아….”
눈가를 찌푸린 한정원이 단말의 신음을 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새빨간 핏방울이 점점이 맺혀 들고 있었다.
지한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체를 숙여 그대로 손잡이 뒤쪽을 들여다본다. 뒷면에 뾰족하게 솟은 압정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놀라움을 넘어선 황당함에 헛숨을 터뜨렸다. 생각지도 못한 기괴한 방법이었다.
“미친 새끼.”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한정원의 손을 그대로 쥔 채 다른 문도 전부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네 개의 차 문 전부 빠짐없이 작업해 놨다. 턱을 꽉 문 지한이 이를 갈았다. 이 정도면 숫제 정신병이었다.
“형, 일단 병원 가자.”
평소와 달리 경직된 얼굴에 한정원이 어깨를 옹송그렸다.
“어, 아니야…. 가방에 약이랑 밴드 다 있어…. 따가워서 바로 떼서…. 조금밖에 안 찔렸어.”
그는 위축된 채로 지한의 눈치를 보았다.
분명 지난번과 같은 놈이 벌인 일이다. 조금만 빨리 행동했어도 현장에서 잡을 수 있었는데, 눈앞에서 놓치고 한정원이 다치기까지 하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잔뜩 굳은 얼굴의 지한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생각할수록 열이 받았다.
“한아, 지한아. 아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문득 시선을 옮기니, 하얀 손목이 벌겋게 물들었다. 놀란 지한이 손에 힘을 풀었다.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너무 꽉 쥐고 있던 탓이었다.
“미안.”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쉰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식이라면 작은 실수에도 모두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하루라도 빨리 그 미친놈을 잡아야 했다.
미리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고 말할걸. 작은 상처라도 다친 걸 보니 속이 상했다. 지한은 제 멍청한 실수를 탓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앉아 봐.”
촬영장에 도착한 한정원이 엉거주춤 스태프 의자에 앉았다. 지한은 그의 가방을 뒤적여 구급상자를 꺼냈다. 바닥에 털썩 한쪽 무릎을 꿇어앉고는, 그의 팔목을 쥐었다. 아직도 새빨간 핏방울이 동그랗게 맺혀 들고 있었다. 지한의 눈가가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왜 그래요?”
등 뒤로 김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차 문손잡이에 압정을 붙여 놨어요.”
지한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 실수 때문에 한정원이 다친 것 같아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압정?”
눈썹을 치켜뜬 김신우가 물끄러미 한정원의 손을 보았다. 지한은 그의 손을 쥐고 능숙하게 소독 후 연고와 밴드를 차례로 붙였다. 다행히도 큰 상처는 아녔다. 치료를 마친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꺼냈다.
“우선은 신고 좀 하겠습니다. 블랙박스도 확인해야 하고, 혹시 촬영에 방해될지 모르니 주차장에서 조용히 처리하고 올게요.”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김신우가 시선을 옮겼다. 잔뜩 겁을 먹어 울상인 한정원이 보였다.
“매니저님, 다쳤어요?”
“네… 조금요.”
하얀 손가락에 감긴 밴드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김신우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피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프면 병원 가요. 나중에 칭얼거리지 말고.”
툭 내뱉고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떤 할 일 없는 연놈인지 쉴 틈 없이 귀찮게 굴고 있었다. 최근 벌인 것만 봐도, 어지간한 담력 가지고는 행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하, 시발….”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딛는 걸음은 투박하기만 했다.
지난번 칼부림 사건을 선처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철창에 처넣어 본보기를 보여 줬어야 이런 새끼들이 더 설치지 않았을 것이다. 기회에 한 번 더 이미지 메이킹을 하자던 대표 말을 따른 제 불찰이었다.
익숙한 밴이 금세 시야에 들어왔다. 지한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문손잡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옷이 더러워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지난밤 제 앞에서 벌거벗고 무릎 꿇었던 일이 떠오른다. 촬영장에서도 무릎을 꿇고 한정원을 치료해 주었다. 김신우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병신. 아무 데서나 꿇는 싸구려 무릎이 거슬린다.
“보면 뭐 압니까?”
불퉁하게 묻는 말에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좌우로 턱을 저었다.
“혹시 특이 사항이 있나 싶어서요. 신고했으니 곧 경찰이 올 겁니다.”
비스듬히 선 김신우의 눈동자가 지한의 얼굴을 느리게 훑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굳은 표정이 보기에 썩 좋지 않았다.
한정원이 피를 봐서 그런가 보지. 절절 끓는 세기의 사랑에 기가 찼다.
“범인 봤어요?”
짧게 혀를 찬 김신우가 통로 쪽을 주시하며 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짐짓 찌푸린 얼굴이었다.
“예. 바로 쫓아갔는데….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답하는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진다. 시선을 내리자 아래로 주먹을 쥐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 별 표정 변화도 없는 놈이 저렇게 티를 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분한 듯 보였다.
헛숨을 내쉰 김신우가 픽 웃었다. 매사 무정한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흥미가 일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지한의 그늘진 얼굴을 응시했다.
“잡고 싶어요?”
“…….”
“왜?”
물음에 고개를 든 지한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보며, 김신우는 생각에 잠겼다.
***
“저번 달에도 그 칼 들고 난리 치던 스토커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썩였는데, 쥐 사체에 커터 칼날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압정을 박아? 이거 완전 개사이코 새끼 아니야….”
흥분한 박 대표가 침을 튀겨댔다. 경찰이 다녀간 후 박 대표의 긴급 호출로 대표실에 모인 차였다.
“이번에 잡히면 그냥 처넣어요.”
다리를 꼰 채 잡지를 보던 김신우가 귀찮은 듯 툭 뱉었다. 그러자 난감한 표정의 박 대표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유난히 매스컴과 바이럴에 촉각을 세우는 그는, 다정하고 아름다운 국민 대배우 김신우의 이미지 커버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지난 선처도 전부 박 대표의 입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신우야, 다 너 생각해서 그런 거지. 그 이후로 너 이미지 메이킹 제대로 들어간 거 몰라서 그래! 그 뒤에 후원 단체 광고 모델도 세 개나….”
“그놈의 천사, 천사…. 그만하죠?”
그가 읽고 있던 잡지를 테이블에 툭 던졌다.
“아니면, 진짜 콱 천당이라도 보내려고 그래요? 대표님 나한테 악감정 있나?”
찡그린 인상과 불손한 어조에 박 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 형은 다 너한테 좋아지라고 그러는 거지. 신우야, 넌 그렇게 나를 오래 봐 놓고 아직도 내 진심을 모르냐? 천당은 무슨, 섭하게.”
그는 불리할 때만 친근한 척 형 소리를 꺼내곤 했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지한이 속으로 혀를 찼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그가 천당을 갈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 반대면 몰라.
“그냥 기사 내보내요. 방구석에서 겁이라도 좀 집어먹어야 몸이라도 사릴 것 아닙니까.”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이런 일도 한두 번이지, 자꾸 안 좋은 기사들이 엮이면 자연스레 배우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는 박 대표의 반대 의견 때문이었다.
“있어 봐, 내가 수사 좀 잘 부탁드린다고 얘기도 잘해 놨으니까 이제 금방….”
“하아. 시발….”
김신우가 성마른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멍청한 수사관들은 또 흐지부지 일을 넘길 것이 분명했다. 지난번도 그랬다. 그 광증 있는 새끼가 앞뒤 생각 못 하고 제게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사건은 오리무중 넘어갔을 것이 뻔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불쾌했다. 이번에는 저를 포함한 공지한과 한정원이 엮여 있어 더 신경이 쓰였다. 서로서로 아끼고 보듬어 주며 볼썽사납게 지랄병 떠는 꼴을 더 보고 싶지도 않았다.
“쥐 사체에 칼날까지 튕기고, 이제는 차 문고리에 압정을 박아 놨어요.”
“그래, 나도 심각한 건 알지.”
“매니저 손에 압정 박힌 거 보셨어요? 압정이 아니라 대못이라도 박혔어야 했나? 손가락이라도 잘렸어야 기사 한 줄 내보내 줘요?”
공격적인 어투에, 생각에 잠겨 있던 박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진정하라는 듯 손짓한다.
“알았어! 알았어. 누가 위험한 거 몰라서 그래.”
그는 난감한 얼굴로 문가에 묵묵히 서 있는 지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지한 씨. 당분간만 신우 집에서 지내는 거 어때? 그 집에 방 많으니까 하나 내주고 좀 딱 붙어 다녀. 조금 지켜보고 경찰에서 안 되면 내가 사설 업체라도 더 붙여 줄 테니까….”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가 눈치 보듯 지한을 흘끔 쳐다보았다. 느닷없는 말에 고개를 든 지한의 위로 곤란한 기색이 비쳤다. 그 집이 아무리 넓다 해도 불편한 사람과, 그것도 김신우와 함께 살고 싶진 않았다.
부정적인 기류를 눈치챈 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매에 은근한 미소를 띠고는 장난스레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알았어.”
“…….”
“그 집에 사는 동안 월급 따블. 오버타임 쳐서 특근 수당까지. 어? 파고 종영 때까지 이제 두 달도 안 남았으니까 그때까지만 좀 봐줘. 아파트 주차장까지 따라온다니 어떤 미친놈인지 내가 걱정돼서 그래. 지한 씨가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응?”
생각지 못한 협상이었다. 별안간 튀어나온 말에 지한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두 배….
확실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돈은 더 빨리, 많이 모아 놓을수록 좋았다. 언제고 일이 틀어질 것을 대비해 놔야 했다.
지한은 혼자 사는 것치고 터무니없이 넓던 김신우의 집을 떠올려 보았다. 잠만 자고 나간다면 딱히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휘몰아치는 일정 탓에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거의 없기도 했다.
고작 한두 달뿐이고…. 다른 어느 곳을 가도 이런 대우를 받긴 힘들다.
머릿속으로 금세 계산을 마친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한은 답하며 김신우의 반응을 살폈다. 살짝 찌푸린 얼굴에선 늘 그렇듯 아무런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모른 척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 우리 지한 씨가 실속도 잘 챙기고 계산 빨라서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오늘 당장 옷만 좀 챙겨서 들어가. 필요한 거 사는 덴 이거, 법카 쓰고. 응?”
카드를 내민 박 대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누구도 집주인의 의견은 묻지 않았으나, 그 또한 아무런 말이 없었다.
***
촬영이 끝난 후 지한은 집에 들러 당분간 생활할 짐을 챙겼다. 기본적인 옷가지들로만 꾸리고 보니 여행용 가방 하나면 충분했다. 그 외에 생활하면서 필요한 것들은 박 대표가 준 법인 카드로 사양 않고 결제하기로 했다.
검정 캐리어 하나를 끌고 김신우의 집 문 앞에 섰다. 생각에 잠긴 지한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당장 박 대표의 앞에서는 덜컥 승낙했으나, 이제 와 생각하니 잘한 것인지 조금의 후회가 밀려온 탓이었다.
최대한 떨어져 있어도 모자랄 판에….
약하게 입술을 깨문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돈이야 빨리 모을수록 좋고, 앞으로 김신우와의 관계가 어찌 변하게 될지도 모르니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놔야 했다.
일은 지금으로서도 최상의 조건이었다. 집 안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 월급의 두 배에 오티 수당이라면 사실상 거저였다.
그래. 어딜 가도 받기 힘든 파격적인 조건이다.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제가 알아서 잘 피해 다니면 되는 일이었다. 가장 의외로웠던 건 김신우 또한 거절의 말을 뱉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스토커가 제법 두렵긴 한 모양이었다.
지한은 다시금 마음을 굳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루라도 빨리 그놈을 잡고 끝내면 될 일이다. 막상 눈앞에서 놓치고 보니 열의가 더 불타올랐다.
헛기침하곤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칵 문이 열렸다. 미간을 모은 김신우가 퉁명스레 그를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어요.”
“죄송합니다.”
머리를 숙여 인사하곤 캐리어를 번쩍 들었다. 바퀴가 맨바닥에 닿았던 탓이었다. 흘긋 바라본 김신우가 앞장서자 지한은 문을 닫고 그 뒤를 따랐다.
혼자 살기에 지나치게 큰 이 펜트하우스는 서재 포함 방이 총 다섯 개였다. 거실 바로 옆 가장 큰 방이 김신우가 쓰는 방이었다. 마치 아파트 복도만큼 넓은 통로를 지나쳐 더 안쪽으로 들어간 그가 어느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방 쓰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한 지한은 들고 있던 캐리어를 바퀴가 닿지 않게 바닥에 뉘어 놓았다. 두 배의 월급까지 받으면서 얹혀사는 것치고는 과히 호화로운 방이었다.
“다른 건 다 알아서 하고.”
팔짱을 낀 김신우가 찌푸린 눈가로 그를 주시했다.
“내 방에 절대 들어오지 마세요. 불면증에 잠귀가 밝아서 한번 깨면 잘 못 자니까.”
“아…. 예.”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잡아끌어도 갈 생각이 없는 곳이었다. 떠오른 생각은 속으로만 삼켰다. 문 끝에 비스듬히 기대선 김신우가 새삼스레 안을 쭉 훑어보았다.
“그것만 지키면 내쫓을 일 없습니다. 부엌에서 내가 쓰는 건 커피 머신뿐이니 뭐, 밥 같은 건 알아서 해 먹든가. 냄새만 풍기지 말고.”
딱히 뭘 해 먹을 생각도 없었건만, 그건 그냥 쓰지 말라는 소리였다. 이상한 화법에 속으로 혀를 찬 지한은 속과 다르게 착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 없이 지한을 응시하던 김신우는 곧 등을 돌렸다.
방은 대단히 큰 편이었다. 적당한 크기의 옷장과 화장대, 푹신하고 고급스러운 침구가 두툼히 깔린 침대도 있었다. 외에도 수납할 서랍이나 커다란 창문은 물론, 화장대 위 디퓨저에선 은은한 향기마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지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한 곳이다. 아마 손님방으로 준비해 둔 곳인 듯했다.
캐리어의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한 지한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편하게 즐겨 입는 검정 반팔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였다. 지한의 옷은 대부분 무채색으로 때를 타거나 구겨져도 티가 잘 나지 않는 무난한 검은색이 주를 이뤘다.
손을 탁탁 털고는 방문을 나섰다. 아무리 경호를 위해 들어왔다지만, 공짜로 얹혀사는 판에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 할 듯했다. 시간은 아직 저녁 여덟 시다. 이른 새벽부터 진행한 촬영 덕분에 오늘은 굉장히 일찍 끝난 편이었다.
다시 봐도 터무니없이 넓은 집을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의 집은 현관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방들이 길게 뻗어 있는 구조였다. 별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다 보니, 유리로 된 슬라이딩 중문과 함께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커다란 방이 나타났다.
“어….”
놀란 듯 눈을 살짝 치뜬 지한이 감탄했다. 방 안쪽으로 온갖 값비싼 헬스 기구들이 총집합되어 있었다.
놀라운 광경에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얼추 기구 가격을 계산해 보니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한동안 헬스 중독에 빠져 있던 지한은 생활 스포츠 지도사 자격증까지 있었다. 헬스를 좀 해 본 사람이라면 눈이 빛나지 않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관음증 있어요?”
느닷없이 들려온 말에 지한이 눈을 치켜떴다. 벽면 전체에 둘린 거울 속에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심상한 얼굴로 랫풀다운 머신에 앉아 바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운동 기구에 시선을 빼앗겨 그는 발견하지도 못했던 차였다.
“아뇨…. 이거 머신들이 다 비싸 보여서.”
괜스레 겸연쩍어진 지한이 헬스 머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평소에도 꾸준히 운동한다더니 집까지 이런 걸 갖춰 두고 사는 줄은 몰랐다. 하기야 이 정도 자기 관리는 해 줘야 저런 몸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어떻게 보면 참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운동 좀 할 줄 압니까?”
“…좋아합니다.”
“들어와요, 그럼.”
평소 운동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근래 들어 김신우의 빡빡한 일정을 따라 다니느라 운동은커녕 조깅조차 하지 못했다. 구미가 당기는 말에 지한은 사양 않고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쓰고 싶으면 써요.”
김신우는 느리게 숨을 내쉬며 끊임없이 팔을 움직였다. 그다지 붙는 옷도 아니었으나 아래위로 움직일 때마다 견갑골과 광배근이 불끈거렸다. 그 동작에 따라 지한의 시선도 찬찬히 옮겨 갔다.
“아. 감사합니다.”
기구를 둘러보는 지한의 눈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변했다. 혼자 살던 사람이 방까지 내어주고, 값비싼 운동 기구까지 쓰게 해 주다니 의외로 그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물론 아주 잠깐 생각만 했을 뿐, 괜찮은 사람일 것 같지는 않았다.
“운동 좋아하시나 봐요.”
“잠잘 시간도 없는데, 이걸 좋아서 하겠어?”
“…그렇긴 하죠.”
지한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묻는 말은 빈정거림에 가까웠으나 이제는 별 대수롭지도 않았다.
실컷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문득 그를 바라보니, 제법 난도 높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지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자세가 조금 잘못되어 보인 탓이었다. 지한은 그의 자세를 주시하며 곁으로 다가갔다.
“이거 바 내리실 때는….”
그가 손끝으로 김신우의 척추 즈음을 지그시 눌렀다. 어깨를 살짝 잡아 주자 손길에 따라 김신우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이렇게… 상체를 조금 더 앞으로 펴시고….”
살짝 고개를 숙인 지한이 속삭이듯 낮게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이었다. 김신우가 거울 속의 지한을 미묘한 눈길로 응시했다. 허리선을 따라 움직이는 손가락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바랑 팔꿈치가 동일 선상에서 움직이도록…. 예, 그렇게요.”
지한은 심각한 얼굴로 거울 속 그를 주의 깊게 주시하며, 어깨를 잡아 주었다. 아무래도 운동을 오래 해 온 탓에, 살짝 어긋난 자세가 신경 쓰였다. 잘못된 자세로 오랜 운동을 이어가면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눈썹을 치켜뜬 김신우가 어처구니없는 듯 짧게 웃었다. 별안간 거울 속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
“난 호모 아니니까 꿈 깨세요, 공지한 씨.”
단호하게 내뱉는 말에 지한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제야 그에게서 손을 떼어낸 지한이 찬찬히 눈을 내리깔았다.
“저도…. 취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만인에게 사랑받는 배우라지만. 제아무리 천상의 체격과 신이 내린 외모로 극찬을 받는 배우라지만, 제게도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공지한이 주변 사람들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인성이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가장 부족한 것이었다.
“취향이 뭔데?”
틈도 없이 되돌아온 물음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취향이 뭐냐고 묻잖아요.”
잡고 있던 바를 텅, 놓은 김신우가 사근사근하게 웃었다.
머뭇거리던 지한은 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 앞에서 인성 운운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휘어지는 아름다운 미소에 넘어가선 안 된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무슨 욕을 얻어먹을지 몰랐다.
“…아무튼, 김신우 씨는 아닙니다.”
지한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옅은 숨을 뱉었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돌연 머쓱해진 지한은 머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대로 등을 돌려 운동실을 나왔다.
***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영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을 포근한 이불 안에서 뒤척거리던 지한이 몸을 일으켰다. 목이 말랐다. 선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은 벌써 새벽 4시였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문을 연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복도로 나갔다. 그는 불면증이라고 했다. 혹여 괜한 소리로 그를 깨웠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넓은 집은 복도가 참 길기도 했다. 조심조심 부엌에 도착한 지한은 정수기 앞에서 잠시 고민했지만, 야밤에 마신 컵을 바로 씻어 놓을 수도 없어 작은 생수 한 병을 꺼내 들었다. 김신우의 눈에 띌 만한 행동은 최대한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괜스레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은은한 불빛이 켜져 있는 집 안은 고풍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으나, 너무 넓어서인지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았다.
커튼을 치지 않은 통유리 너머 야경은 별을 뿌려 놓은 밤하늘 같았다. 동트기 전 펼쳐진 도심의 푸르스름한 빛이 아름답기도 했다. 제 재력으로는 인생을 두 번 산다고 해도 살 수 없는 집이었다.
새삼스러운 격차에 고개를 한번 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별안간 복도를 지나던 지한이 우뚝 멈춰 섰다. 닫힌 방문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김신우의 방문이었다.
‘으… 윽, 으….’
지한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잘못 들었나.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희미한 소리가 또 흘러나왔다.
‘으… 윽….’
지한은 저도 모르게 방문에 바짝 다가갔다. 조심스레 문 위로 귀를 대었다. 앓는 듯한 낮은 신음이 방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헛숨을 들이켰다. EFRI 응급처치 수료증이 있는 지한은 잠을 자는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고가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면 중 사고는 촌각을 다투는 응급처치가 관건이었다.
똑똑.
“김신우 씨.”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방문을 두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곤란한 듯 뺨을 쓸어내린 지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여 악몽 같은 걸 꾸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다시 노크했다.
똑똑.
“김신우 씨, 괜찮으세요?”
건너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종전과 같은 앓는 소리였다. 더는 그냥 지켜봐선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들어가겠습니다.”
지한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하나 덜그럭, 소리만 날 뿐 문은 굳건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조금 당황했다. 잠겨 있을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탓이었다.
어쩌지….
입술을 꾹 깨무는 순간 안쪽에서 또 나직이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조함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짧은 순간, 모든 생각을 마친 지한은 문고리를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덜컥. 덜컥. 힘을 주는 팔뚝에 핏줄이 불거졌다. 체중을 실어 두어 번 아래위로 퍽퍽 힘을 주니 파각,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움직였다. 그는 동시에 어깨로 문을 들이받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김신우의 침실이 드러났다. 굳은 얼굴로 뛰어가자 잔뜩 인상을 찡그린 김신우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황색 조명 빛에 드러난 희멀건 한 얼굴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김신우 씨, 괜찮아요? 김신우 씨.”
이불을 살짝 걷어낸 뒤, 어깨를 조심스레 쥐고 흔들어 깨웠다.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보니 호흡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어 손등을 이마에 가져가자 잔열이 조금 느껴졌다. 어디가 아파서 앓고 있는 것 같긴 하나, 다행히도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했다.
멀쩡하게 운동하더니 갑자기 감기몸살이라도 온 건지. 무리한 스케줄을 보면 속병이 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떡하지. 주변을 돌아보니 침대 옆 협탁에 여러 개의 약통이 보였다. 수면 유도제와 신경 안정제였다.
저런 걸 먹을 정도로 불안정한 사람이었나?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끙끙 앓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선은 그를 깨워 상태를 확인한 후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상체를 숙인 지한이 그의 어깨를 흔들며 다시금 낮게 속삭였다.
“김신우 씨. 일어나보세요. 김신우 씨.”
돌연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갑작스러운 눈 맞춤에 놀란 지한이 고개를 뒤로 물렸다.
사위에 고요한 정적이 스며들었다. 흐리멍덩한 눈빛이 지한을 응시한다. 늘 보던 얼굴처럼 찌푸린 채였으나 묘하게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집요한 눈길은 어딘가 가라앉은 듯 보였다.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
일언반구 없는 그의 묵묵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지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금 입술을 떼려는 찰나였다.
“…형.”
그에게서 조그맣게 흘러나온 한 마디가 지한의 정신을 붙들었다.
형?
그가 저를 부를 때 쓰는 호칭과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