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 입술이 왜 그래?”
놀란 얼굴의 한정원이 손을 뻗어 지한의 입매를 만지작거렸다. 금세 딱지가 굳은 입가는 누가봐도 찢어진 티가 났다.
한산한 사무실을 죽 훑던 지한이 한쪽 눈을 작게 찡그렸다. 이틀간의 휴무 끝에 김신우의 일정에 맞춰 소속사로 출근한 참이었다.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기억 탓에 휴무 내내 몸을 혹사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핏발이 설 만큼 뛰었다. 토기가 올라올 만큼 헐떡대고도 부족해서 체육관까지 찾아가 관장님과 대련도 했다.
오래간만에 무리하는 바람에 속 근육까지 뻑적지근했다. 덕분에 근 이틀은 휴무가 아니라 숫제 훈련 기간이었다.
“싸웠어?”
한정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따라 더 복슬복슬해 보이는 머리칼이 넘실거린다. 한번 쓰다듬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저 가만히 한 번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얻어맞아서 터진 거였으면 좋았을 뻔했지. 금세 머릿속을 헤집으려는 살갗의 향연을 애써 떨쳐냈다.
“그럼, 약은 발랐어?”
눈을 가늘게 뜬 한정원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지한은 동그랗고 예쁜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거로 무슨 약까지 발라.”
“그런 작은 상처가 은근히 더 오래가. 내가 좀 다쳐 봐서 알잖아.”
등을 돌린 한정원이 테이블 위의 커다란 가방을 뒤적거렸다. 늘 들고 다니는 저 커다란 백 팩 안에는 연고나 밴드는 물론, 각종 소화제나 진통제까지 온갖 잡동사니들이 그득했다.
“좀 작은 거로 들고 다니지. 무거울 텐데.”
작은 체구와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가방을 흘긋 바라보았다. 언젠가 저 안에서 숙취 해소제까지 튀어나오는 걸 보며 혀를 내두른 적도 있었다.
“다 이럴 때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지. 한아, 이리 와 봐. 빨리.”
그가 샐쭉 웃으며 손짓했다.
“괜찮다니까.”
내뱉는 말과는 달리 그의 앞으로 순순히 걸어갔다. 그는 의외로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말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우리 한이, 어디서 또 못된 깡패들 혼내 주기라도 했어?”
흘겨보듯 웃던 한정원이 손가락에 연고를 짜내며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눈썹을 치켜뜬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형은 내가 뭐 쌈박질만 하고 다니는 줄 알아.”
“그럼 이게 어디 긁힌 상처야? 누가 봐도 한 대 맞은 것 같은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한정원은 까치발을 든 채 지한의 입가에 연고를 조심스레 바르기 시작했다. 달착지근한 숨결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싸워도 다치진 마. 형아 속상해.”
그가 조곤조곤 속삭이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얀 얼굴 위로 길게 늘어진 촘촘한 속눈썹에 절로 시선이 머문다. 형은 고사하고 저보다도 한참 어려 보이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긴장한 와중에도 제법 귀여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샜다.
“어쭈. 비웃지 지금?”
“그런 거 아니야.”
볼에 둥그렇게 바람을 넣은 한정원이 지한을 흘겨보았다. 지한은 웃음기를 머금은 입매를 끌어올렸다. 동그랗고 하얀 뺨이 찰떡처럼 몽실몽실해 보였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김신우가 했던 말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싫어서요. 한정원 씨가.’
인상을 팍 구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김신우에게 당했던 짓을 자칫 한정원이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파?”
찡그린 얼굴을 보며 한정원이 놀란 듯 물었다. 물끄러미 저를 보는 순진무구한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이런 사람을 왜 그렇게 극도로 싫어하는 걸까.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
“응?”
“이 일, 언제까지 할 거야?”
재지 않은 물음이 툭 튀어 나갔다.
“일? 갑자기 왜?”
느닷없는 질문에 한정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앞뒤 생각 없이 무작정 뱉어 버린 말이라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묵묵부답에도 한정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다닐 수 있을 때까지 해야지. 재미도 있고, 보람차기도 하고.”
티끌 하나 없는 웃음에 지한은 조금 허탈한 기분을 느꼈다.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쓴 침묵을 삼켰다.
“또 이제 한이 너도 있고.”
“…그래.”
덧붙이는 말에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신나서 제 일 얘기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확실히 전에 하던 일과는 다르게 유난히 즐거워하는 듯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한정원이 아래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왔다. 지한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냥.”
“그냥? 그냥이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지한의 재킷 끝을 잡으며 물었다. 집요한 시선이 느껴진다.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던 지한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어디서 언제 일이 터질지도 모르고, 성격상 돌려 말하는 것엔 소질이 없었다. 꼭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언질 정도는 주는 것이 좋을 듯했다.
“김신우 그 사람, 좀 위험해 보여서.”
언제고 돌변할지 모를 사람이다. 일을 좋아하는 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저렇듯 속내가 새카만 사람을 모른 척 둘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는 한정원을 지독하게 싫어하기까지 했다.
한정원은 구를 대로 굴러 본 지한과는 처지가 달랐다. 제 의지로 ‘당해 주는 것’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 지한이 처한 상황이 꼭 그랬다. 제 한 몸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체구로 무엇을 어쩔 수 있을 리 없었다.
“어. 내가 좀 실수해서 그렇지…. 나쁜 분 아니야. 걱정하지 마.”
놀란 듯 눈을 치켜뜬 한정원이 우물쭈물 손사래를 쳤다.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지한은 다소 무심하게 답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니. 지독하게 싫어했던 꼰대 선임도, 학과 회장도 저 정도로 빌어먹을 놈은 아니었다. 인생에서 그보다 더한 개새끼를 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기대도 없었으나 한정원은 그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진짜야. 그분 나쁜 분 아니야.”
한정원은 할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정적을 지켰다. 지한은 아무 답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그냥….”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인다. 그가 말하기 곤란한 일이 있을 때 꼭 하는 버릇이었다. 지한은 그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정원은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면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조금….”
이윽고 그가 운을 띄웠다. 호기심과 동시에 덜컥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긴 침묵의 의미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조금?”
“그러니까, 그분이. 조금.”
“응. 조금.”
한정원은 불안한 듯 텅 빈 사무실을 훑어보았다.
“아, 아프셔….”
다소 놀란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돌연 제 머리채를 쥐어 잡던 악력과, 샤워 가운 사이 두껍고 견고했던 흉곽이 떠오른다. 도저히 어디가 아픈 사람이라곤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디가?”
부러 별일 아닌 양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한정원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그러니까.”
“응.”
“몸 말고…. 여기.”
심각한 표정의 그가 제 가슴께를 쿡쿡 찌른다.
“아니, 여기라고 해야 하나…?”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다시금 손가락을 관자놀이 옆쪽으로 가져갔다.
아마 정신 쪽 문제인 듯했다.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톱스타들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 건 흔한 일이니 놀랄 것도 아니었다. 하나 무거운 비밀을 토해내듯 망설이는 한정원의 모습에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한정원이 그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약점을 알게 된 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하나둘씩 피어오른다. 지한은 김신우에 관해 떠올리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한아…. 왜 그래.”
그가 불안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문득 시선을 들자 금세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 보인다. 그제야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정원은 유난히 걱정이 많은 편이었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손을 뻗어 그의 머리 위를 살짝 엉클어뜨렸다. 타고난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칼은 늘 그렇듯 부드럽게 손에 감겨 왔다. 그는 지한의 손길에 순한 강아지처럼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문득 그것을 손에 쥐고 조금 더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둘이 붙어서 뭐 해요?”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김신우의 시선이 한정원의 머리칼 위에 놓인 지한의 손 위로 닿았다. 지한은 찬찬히 손을 물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 일찍 오셨네요, 푹 쉬셨어요?”
고개를 돌린 한정원은 금세 눈을 접으며 말갛게 웃었다.
“네, 덕분에.”
세팅되지 않은 머리를 차분하게 내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둔 지한은 그를 향해 건조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탄식한 한정원이 안절부절못하며 양손을 모아 잡았다.
“저, 배우님. 지난번엔 죄송해요, 제가 취하는 바람에, 괜찮으시다면 다시 대접을, 아니 계좌라도 알려 주시면 보내 드릴….”
“됐어요.”
그는 나직이 답하며 한정원을 스쳐 지나갔다.
사실 그가 술에 취해 쓰러지고 말고는 관계없었다. 담당 서버는 이미 김신우가 예약 시 회원 카드로 선결제 신청을 했다고 전했다. 그 말인즉슨, 애당초 그는 한정원에게 얻어먹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연한 부담이나 주며 반응을 즐겼다. 다시 생각해도 악질 중의 악질이 따로 없었다.
“아, 저 그래도….”
우물쭈물 웅얼대는 한정원을 지나친 김신우는 지한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더디게 시선을 올린 지한이 그를 쳐다보았다. 제 눈높이보다 조금 위에 위치한 눈동자가 지한을 주시했다.
“한정원 씨.”
“네?”
“정 그러면 나중에 부탁이나 하나 들어줘요.”
그는 한정원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지한에게 말을 건네듯 입을 열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음험한 말에 지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아, 네! 물론이죠. 언제든지 말씀만 해 주세요!”
한정원은 제 속도 모르고 당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대체 저 인간이 뭘 해달라고 할 줄 알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해맑게 웃기나 하니 속이 답답했다.
“찢어졌네.”
문득 김신우의 시선이 지한의 턱 즈음에 닿았다. 불현듯 뻗어 온 손가락이 입매를 스친다. 만졌다고 하기도 모호할 정도의 미미한 접촉이었으나 지한은 반사적으로 움찔해버렸다.
“나 때문에 어떡해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더디게 흘러들었다. 이윽고 손을 거둔 그의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예상치 못한 말에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어 한정원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저를 보고 있었다.
지한은 옅은 숨을 찬찬히 내쉬었다. 짧은 순간 수십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동요하지 않으려 했으나 흔들리는 눈동자는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이지. 설마 다 불어 버릴 심산인가. 도통 의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직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의 몰골을.
“매니저님. 대표실 좀 가 볼래요? 크랭크 인 일정 꼬여서 난감해하던데.”
“아, 네…!”
여유로운 표정 위로 김신우의 눈썹이 추어 올라갔다. 눈치 보듯 분위기만 살피던 한정원이 주춤주춤 문 뒤로 사라졌다. 달칵. 금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지한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고작 말 몇 마디에 쩔쩔매는 꼴이라니. 엉망진창이다.
“생각보다, 더 비겁하십니다.”
가만히 김신우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잠긴 목소리를 냈다. 눈을 치켜뜬 김신우가 지한의 말이 의외로운지 하하, 짧게 웃었다.
“내가?”
이내 흥얼거리듯 콧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한 얼굴이었다.
“여기 김신우 씨 말고 누가 있나요.”
중얼거린 지한은 답 없이 손바닥으로 입가를 감쌌다. 속 깊숙한 곳에서 느린 맥박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근래에 느껴 볼 일 없던 생소한 감정이 몰려온다. 불안과 초조였다.
“그렇게 보인다니 서운하네.”
웃음기 어린 김신우가 지한을 응시했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부드럽게 속삭이며 손을 뻗는다. 단단한 손가락이 지한의 뺨 위를 덧그리듯 쓸어내리다, 날렵한 턱을 지그시 쥐었다.
“누구는 좋아 죽겠단 눈빛으로 보다가.”
“…….”
“나는 벌레 보듯 쳐다보니까…. 씨발, 기분이 더럽잖아요.”
단단히 움켜쥔 턱에 어릿한 고통이 느껴진다. 지한은 가만히 눈꺼풀을 내려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위압적인 말과는 달리 중저음의 음색은 녹아내릴 듯 달착지근했다.
“안 그래요? 애인 있는 놈 짝사랑 중인 공지한 씨.”
지한은 이를 꽉 문 채 눈살을 찌푸렸다. 싫어하는 티가 많이 났나. 어쩌면 자신은 생각보다 표정 관리에 능숙하지 못한 편일지도 모른다.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무식하게 턱을 조여 오던 악력이 느슨하게 떨어져 나갔다.
“촬영 끝나고 집으로 와요.”
그는 입고 온 코트 자락을 툭툭 털어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한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더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한마디 말도 섞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왜….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구겨진 지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김신우가 호기롭게 팔짱을 꼈다. 금세 냉랭해진 얼굴이 비스듬히 그를 깔아보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내가 그걸로 입 닫는다고 한 적 있었나.”
그의 입가에 어렴풋이 머물던 미소가 사라졌다.
자신은 한정원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고, 그는 밑지는 장사가 싫다며 뭘 해 줄 수 있냐고 했다. 저는 뭘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 그는 좆을 빨아 달라고 했다.
물론 한 번만이라는 소리는 덧붙이지 않았었지만….
지한은 눈가를 찌푸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공지한 씨 학습 능력이 좀 부족해요?”
다갈색 눈동자가 지한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말했잖아, 좆같다고.”
강한 어조로 뇌까린 그가 다시 다가왔다. 그저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고압적인 분위기에 억눌린 지한은 눈만 깜빡였다. 가라앉은 눈빛 하나로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밟아 뭉개 놔야 성이 찰 것 같아서, 질질 짜는 것 좀 보려고 하는데.”
“…….”
“불만 있어요?”
평이한 어조와는 달리 거친 발성이었다. 그 가시 돋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지한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눈을 주시했다.
그래, 그에게 다른 이유는 없었다. 말마따나 그는 그냥 자신이, 그리고 한정원이 아주아주 싫은 것일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목숨 줄을 움켜쥔 이에게 붙들린 채,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선고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애당초 멍청한 뒷걸음질로 덫에 걸린 머저리는 저였으므로.
***
“컷! 컷! 박우준 씨! 이런 식으로 하면 오늘 아무도 집에 못 가. 자꾸 이럴 거야?”
오늘도 드라마 ‘파고’의 촬영이었다. 비중 없는 조연을 맡은 신인 박우준은 긴장한 탓인지 자꾸만 대사 실수를 반복했다.
“환장하네. 저런 놈은 누가 뽑은 거야…. 쉬었다 합시다!”
촬영 감독이 거친 목소리로 구시렁댔다. 지한은 손목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시간이 점점 더 늘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밤샘 촬영이 계속 이어지기를, 그래서 김신우가 저를 찾지 않길 바랐다. 보아하니 정해진 분량을 소화하려면 최소 새벽 2시는 넘겨야 할 듯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뒷짐을 진 지한은 가만히 박우준을 응시했다. 그는 소속사도 매니저도 없다고 했다. 독립 영화 말고는 경력도 없는 앳된 신인이라더니, 안쓰러울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안절부절못했다. 반질반질한 이마 위로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한정원이 주고 간 생수병을 만지작거리던 지한이 쭈뼛쭈뼛 걸어가는 박우준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박우준은 놀란 눈을 치켜뜨며 생수를 받아들었다. 그는 마치 기다렸던 사람처럼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희멀건 목울대가 요란하게 울렁거렸다. 단숨에 500밀리리터짜리 생수를 비운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열없이 웃었다.
“죽을 맛이네요. 이렇게까지 엉망일 줄 몰랐는데.”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쉰다. 땀에 젖은 앞 머리칼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근 몇 시간 동안 지켜본 바로, 슛이 들어가는 순간 판이해지는 표정이나 목소리 톤 등은 아주 좋았다. 그러나 긴장하는 바람에 대사를 자꾸 틀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듯했다.
하긴, 긴장하지 않기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시선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잘하고 계세요.”
“예?”
“대사가 틀려서 그렇지 연기는 손색없으시던데요.”
말해놓고 민망함에 입매를 살짝 올려 웃었다.
안쓰러운 모습에 동정심이 든 것은 사실이다. 조금 힘을 냈으면 하는 생각이었지만 거짓은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나 싶기도 하면서도.
박우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휘어진 눈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그렇습니까? 제가 자꾸 부족하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부담을 느끼나 봐요. 존경하는 대선배님 앞이라 더 긴장되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김신우 선배님 정말 팬이거든요.”
그의 말에 지한이 미간을 좁혔다.
당신이 존경하는 그 사람은 인성에 아주 문제가 있는 놈인데요. 말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 올랐다. 퍽 저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살짝 고개를 젓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꿋꿋이 제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겐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사람일 텐데, 축 늘어진 어깨나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자존감이 낮은 듯했다.
“멋지십니다. 충분히요.”
익숙지 않은 칭찬 한마디를 뱉어내니 괜스레 겸연쩍어졌다. 부러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는 작게 헛기침하자,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힘이 나네요. 정말로요.”
전보다 커진 목소리로 웃어 보인 그가 지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통성명이라도 하죠. 전 박우준입니다.”
“공지한입니다.”
“아, 네. 지한 씨. 긴장 풀고 열심히 해 볼게요. 정말 감사해요.”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조금은 편안해진 웃음이었다. 지한은 답 없이 눈짓으로 인사했다. 그는 돌아가다 말고 고개를 돌려 손짓하며 “물 잘 마셨어요!”라고 짧게 외쳤다.
괜찮으려나.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리는데, 문득 김신우와 눈이 마주쳤다.
감흥 없는 시선이 잠시 지한에게 머무르다, 금세 제 머리를 매만지는 스태프에게로 돌아갔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몰라도 그는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껍데기일 뿐인 미소가 온전히 가식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또 더부룩해졌다.
애써 그를 외면하며 시선을 돌렸다. 공터 중앙에 우두커니 서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박우준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카만 사방에 그의 위로만 환하게 내리비치는 백색 조명이 휘황찬란하다. 마치 무대 위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 보였다.
유난히 환한 조명을 멀거니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조명 기둥이 어딘가 구부정하게 기울어진 것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위태로워 보인 탓이다.
잘못하면 넘어지겠는데. 생각한 찰나였다.
“어….”
생각보다 몸이 더 먼저 움직였다. 다급히 걸음을 내디딘 지한이 박우준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며 손을 뻗었다. 돌연 제게로 내달리는 지한을 발견한 박우준이 놀란 듯 눈을 크게 치떴다.
“조심…!”
얼어있는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며, 몸을 둥글게 돌려 끌어안았다. 우당탕! 얽힌 두 남자가 흙바닥을 두어 바퀴 굴렀다. 당황한 박우준이 허억, 거친 숨을 내질렀다. 연이어 ‘퍽!’ 터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어깨에 강렬한 격통이 느껴졌다.
“윽.”
지한은 눈을 질끈 감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숨을 훅 들이켜자 사위에 날카로운 비명과 굵직한 고함이 소란스레 들려왔다. 박우준이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잔뜩 찌푸린 눈을 지그시 뜨자, 말 그대로 하얗게 질린 남자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허, 괘,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지한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어쩔 줄 모르는 박우준의 등 뒤로, 멀리서 지한을 내려다보는 김신우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화가 난 듯 아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지한이 보기에, 아버지는 버석하게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슈퍼맨처럼 아들을 둘러업던 단단한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볼품없이 늘어진 마네킹처럼 침대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팔은 푸르스름한 멍으로 가득했다. 하루에도 너덧 번씩 굵은 주삿바늘을 꽂아대던 탓이었다.
‘아빠…. 많이 아파요?’
빛을 잃은 눈동자는 하얀 막이 씐 듯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볼 때마다 제 머리를 쓰다듬던, 정확히는 그냥 얹어 놓고는 했던 미약한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말할 기운조차 없어 고개를 떨구며 짓던 부스스한 미소까지도.
병상 앞에 우뚝 선 채 그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지한은, 어린 마음에도 세차게 몰려오는 저릿한 감정을 느꼈다.
‘불쌍해.’
어린 나이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생경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아주 깊고 짙은, 슬프단 말로는 전부 형용하기 어려웠던 충격과도 같은 동정심이었다.
앙상한 손바닥 위로 얼굴을 묻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가슴을 옥죄는 고통에 한참을 훌쩍이며 눈물만 흘렸다.
그것이 지한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의 죽음이 어떠한 사업적 이해관계에 연루되어 일어난, 계획된 사고라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다.
가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하나뿐인 아내에게도, 그의 아들에게도 궤적 같은 트라우마를 새겨 놓았다. 남편이 세상을 등진 사실이 슬프리라는 것 정도는 여덟 살 꼬마애도 알았건만, 그녀는 혹여 제 고통을 들킬세라 아들의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마치, 모든 감정을 한 데에 꽉꽉 억눌러 새어 나올 수 없도록 꽁꽁 싸맨 것처럼 보였다.
‘지한아, 건강하게 자라야 해. 강하게. 씩씩하게.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그녀는 남들 다 하는 사교육은 학교에 미뤄 두곤, 한꺼번에 네댓 개의 체육관만을 끊어 주었다. 어린 지한은 그것이 그저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어머니의 뜻인 줄로만 알았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의 트라우마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표현에 다소 서툴렀던 10대의 그는 어머니의 간헐적인 미소 하나에 온 세상이, 아니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다.
하나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 위해선 온전한 치유가 필요했다. 그저 보이지 않게 덧씌우고 꽁꽁 감춰 두어선 절대로 나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꼭 그랬듯이.
그렇게 하나뿐인 어머니마저 쓰러졌다. 곪다 못해 진물이 흐르기 시작한 새카만 염증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서 그녀를 온전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각종 잔병치레는 다 하고 살던 가여운 몸뚱이 속, 실체로 변모한 몹쓸 감정들은 종국엔 주먹만 한 종양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빠르게 쇠약해져 가는 그녀를 지켜보며 잊고 있던, 아니 자각하지 못했던 지한의 트라우마는 시뻘건 불길처럼 크기를 부풀렸다. 불시에 찾아온 기이한 괴로움을 본인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주 짧은 시간, 내도록 절절 끓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끝내 하나 남은 피붙이와도 이별했다. 이 모든 것이 고작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지한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부모가 전부 죽었다고 해서 홀로 남은 아들의 보험금을 노리는 친지 따윈 없었다. 외려 처지를 안타까이 여겨 편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던 사람들이 다였다.
기관에서 보내 준 30대의 김선혜 씨가 아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지한은 꽤 삐뚤게 자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두 식구가 살던 작은 아파트의 대출을 전부 갚아 놓았고, 제법 비싼 수업료를 내던 세 개의 체육관도 꾸준히 다녔다. 그 외 기타 필요한 생활비나 대학 등록금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전부 계획하여 성인이 될 때까지 꼼꼼하게 지출할 수 있었다.
‘지한아, 이렇게 막 데려오면 안 돼.’
‘…빗길에서 울고 있었어요. 엄마도 잃어버린 것 같은데.’
감히 누굴 돌봐줄 여력도, 재주도 없는 주제에 그는 온 세상 가엾은 것들에게 눈길을 줬다. 마치 저보다 더 불행한 것들을 찾아 헤매듯 집착적으로.
‘아이 썅. 내놔, 안 내놔? 이런 시팔 년이!’
‘윽! 우으윽!’
‘씨이발 이거, 더 처맞아야 정신을….’
‘그 손 놔.’
‘뭐? 악! 너, 너 이 새낀 뭐야! 아악, 이거 안 놔!’
사춘기, 그즈음에는 눈이 돌았다. 정신을 놓고 손에 피 떡칠을 한 채 경찰서에서 눈을 뜬 적이 더럭 있었다. 평소 지한의 성정을 잘 아는 순경들 덕분에 별일 없이 나오곤 했으나, 젊은 치기에 불한당들에게 덤벼들다간 큰일 생길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니까 그게…. 한정원을 만나기 전쯤일까.
‘한아, 그렇게 마. 그러다 정말 크게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늘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불안한 눈빛은 지한에게 외려 잔잔한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휘몰아치던 불안정한 사춘기는 그로 인해 수면 속으로 잠잠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응, 안 그럴게. 형.’
새카만 나락 속에 스며든 한 줄기 빛이자, 마른 칼바람 속 따스한 햇볕 같았던.
“…아, 한아. 한아!”
나의 구원.
“못 움직이시겠어요? 구급차를 부를까요?”
“한아, 괜찮아? 응?”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시야에 파랗게 질린 박우준의 얼굴과 눈물이 가득 차오른 한정원의 눈동자가 보였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어 어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어깨를 움직여보았다. 욱신거리기만 하는 걸 보니 어디가 금이 가거나 부러진 건 아닌 듯했다.
“거기 괜찮아? 야 김우진!! 조명 팀 제대로 관리 안 해? 이게 갑자기 왜 떨어져!”
“아…. 부, 분명 아무 이상 없었는데….”
“인명 사고 드라마에 독인 거 몰라? 장비 체크 확실히 하라고 했지! 싹 다 말아먹을 일 있어!!”
고래고래 고함치는 감독을 뒤로하고, 바닥을 짚으며 느리게 일어났다. 빽빽한 시선이 지한에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눈앞엔 깨진 조명을 어수선하게 수습하는 스태프들이 보였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박우준 씨는 안 다치셨어요?”
찬찬히 상체를 핀 지한이 흙이 잔뜩 묻은 검정 슈트를 툭툭 털어냈다. 다행히 조금 더러워졌을 뿐 어디 찢어지진 않았다. 별것 아닌 일에 공연히 소란 부린 것 같아 민망해졌다.
“아, 저는 멀쩡해요! 지한 씨가 밀어주셔서 망정이지, 모르고 맞았으면 진짜 위험할 뻔했습니다.”
박우준은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눈앞에서 그의 머리 위로 조명이 터지는 모습을 보았다면 종일 마음이 불편했을 테니까.
“한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혹시 모르니까 병원 가 보자.”
턱 아래서 잘게 떨리는 미성이 들려왔다. 시선을 내리자 걱정이 한가득 어린 한정원의 얼굴이 보였다.
“응. 빗맞았어.”
지한의 몸을 이리저리 짚어보며 안절부절못하던 한정원이 다시 그를 보았다.
“괜찮아, 안 다쳤다니까.”
부러 아무렇지 않게 답하자, 그의 찡그린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젖어 들었다. 옅은 한숨을 내쉰 지한이 엄지로 그의 눈가를 슥 닦았다.
“아프면 바로 병원 갈게.”
“그, 그래도….”
“뭘 이런 거로 울고 그래. 가서 하던 일 해.”
군홧발로 짓이겨도 멀쩡하던 몸인데 정말로 괜찮았다. 집에 가서 파스나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아… 그 전에 집에는 갈 수 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찬찬히 주변을 훑었다. 넘어진 채로 보았던 김신우의 딱딱한 얼굴이 뒤늦게 생각난 탓이었다.
그는 멀찍이서 촬영 감독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발견한 찰나, 우연인지 시선이 마주친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김신우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런웨이를 걷듯 지한에게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주름 하나 없는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박우준 씨, 놀라셨겠어요.”
어느새 다가온 그가 박우준을 느릿하게 훑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지한 씨가 구해 주셔서….”
당황한 얼굴의 박우준이 우물쭈물 답하자, 무감한 눈동자가 지한을 더듬듯이 스쳤다.
“그래, 다행이네요. 우리 공지한 씨 덕분에 무사하셨다니.”
“네, 정말 감사합니다. 공지한 씨 덕분에….”
“이러라고 채용한 건 아니지만.”
들릴 듯 말듯 낮은 목소리가 독백처럼 이어졌다.
“예?”
눈썹을 치켜뜬 박우준이 되물었다. 그 혼잣말을 선명히 알아들은 지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제 씬은 내일로 미뤘어요. 우리 매니저님도 놀라고, 지한 씨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가시 돋친 말과는 다르게 김신우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박우준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으로 뒷목을 쓸었다.
“아, 예.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팬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저와 통성명을 하던 당찬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불그스름한 얼굴로 김신우의 앞에서 머뭇거리던 그는 허리까지 바짝 숙여 가며 인사를 반복했다.
“저어, 지한 씨.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면 연락 주세요. 괜히 저 때문에…. 그런 것 같아서.”
지한의 어깨 위에 손을 얹은 박우준이 조용히 속삭였다. 내미는 손에는 명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언뜻 보니 그의 사진과 필모그래피가 간단히 적힌 명함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만든 듯했다.
연락할 일은 없을 테지만 안 받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명함을 받아 든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순하고 착한 사람처럼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님, 가죠. 차 좀 대기시켜 줘요.”
김신우가 지한의 말을 뚝 끊었다. 잠자코 서서 눈동자만 굴리던 한정원은, “아, 곧 가져오겠습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 멀리 뛰어갔다.
“네, 다녀와요.”
짧게 답한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박우준을 보았다. 묘한 분위기에 슬쩍 눈치를 본 그가 조용히 눈인사하며 다시 촬영장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색한 정적 사이에 둘만 남았다. 앞뒤로 소란스레 뛰어다니는 사람들 속 김신우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적막 속에서 또다시 괜한 긴장감이 돌았다.
“여기 왜 왔습니까?”
“예?”
숱한 소음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낮고 선명하게 들렸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에 지한은 숨을 삼켰다.
“공지한 씨 업무는 내 경호잖아요. 엄한 조연 새끼가 아니라.”
그는 애당초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오지랖 부리다가 다치고. 산재 처리는 소속사로 하시려고? 아, 그렇지. 감사 인사도 받고 돈도 받고 좋네요.”
시선을 드니 표정 없는 희멀건 한 옆모습이 보인다. 곧게 뻗은 콧대와 모양 좋은 입술, 날렵한 턱선까지. 지금 뱉는 험한 말과는 상반되는 얼굴이 기이하게도 아름다워서 지한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위험하단 생각에 본능적으로 뛰어든 것뿐이었다. 혼자 나서다 다쳐 놓고 보험 처리를 해 달라는 말을 할 만큼 양심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뻐근한 어깨보다 골이 더 띵했다.
“하는 꼴을 보니 다른 걸 받아먹을지도 모르겠고.”
눈가를 찌푸린 지한이 그를 바라보았다. 착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나 짧은 순간 낸 결론으론, ‘받아먹는다는 것’이 뭘 의미하든 좋은 뜻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런 거, 안 좋아합니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게 뭔데?”
고개를 돌린 김신우가 되물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지한을 주시했다. 불현듯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으나 애써 참아냈다.
어쨌거나 그는 지한의 고용주였다. 적어도 자신이 열을 낼 상대는 아니란 뜻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소관이 아닌 업무 외적인 일에 끼어든 건 제 실수였다.
따지고 보면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집에 가서 마저 얘기하죠.”
“예?”
지한이 눈썹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김신우의 눈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어렸다.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서 한정원이 끌고 온 새카만 밴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 다쳤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꼭.
지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팔짱을 푼 김신우가 머뭇거리는 지한에게 마뜩잖은 시선을 던졌다.
“공지한 씨,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
“그냥 닥치고 따라와요.”
짓씹듯 뇌까리는 음색이, 참 쓸데없이 부드러웠다.
***
차 안엔 덜컹덜컹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라디오의 잔잔한 첼로 선율이 흘렀다. 지한은 물끄러미 창밖만 바라보았다. 무정한 표정과는 달리 머릿속은 혼곤하기만 했다.
김신우는 어쩌고 싶은 걸까. 정말 그만둘 때까지 괴롭히려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문득 옆 시야로 힐끔대는 한정원의 시선이 느껴진다. 창문에 반사된 희끄무레한 얼굴을 바라보니, 뭐가 불안한지 또 안절부절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늘 종알대던 그조차 입을 다무니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뒤에 앉아 있는 김신우만 아니었다면, 괜찮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줬을 텐데. 한정원과 제가 꼴 보기 싫다고 했으니 괜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적어도 그의 앞에선.
차는 어느새 도착한 아파트 입구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참담하기까지 했다.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 속에서 한정원은 요리조리 눈을 굴렸다. 커다란 핸들을 버겁게 돌려대는 모습에 대신 운전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찰나, 부르릉- 낮은 소음과 함께 시동이 꺼졌다.
“저어…. 도착했습니다.”
뒤에서 읽고 있던 대본을 덮는 소리가 났다. 한정원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지한은 안전벨트를 끌어내리다 굳은 듯 멈춰 있었다.
이대로 내리면, 같이 집에 가자고 할 텐데….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암만 머리를 굴려 봐야 원점이었다. 문을 열고 내리자, 바로 옆에 선 김신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지한은 애써 모른 척했다.
“어…. 눈 좀 붙이시고.”
손목에 찬 시계를 쳐다보던 한정원이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다섯 시간 뒤에 다시 모시러 올게요. 심폴리 촬영 일정이 조금 변경돼서요.”
시간이 벌써 12시였다. 자그마한 체구로 쪽잠 자며 돌아다니는 게 지치지도 않는지, 기특하긴 했으나 조금 걱정이 됐다.
“그래요. 이따 봐요, 그럼.”
대수롭지 않게 턱을 까닥인 김신우가 지한을 응시했다. 그는 굳은 듯 자리에 서 있었다.
한정원은 이제 제 차로 갈아타고 집에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보통 퇴근은 지한과 함께였다. 당장 김신우의 집으로 간다면 의아한 상황이 벌어진다. 오는 내내 쓸 만한 핑계를 생각해 봤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변명이 없었다.
같이 집에 갔다가 다시 오겠다고 말이라도 해 볼 걸 그랬나.
그러나 김신우와는 아무런 언질도 주고받은 것이 없었기에, 뒤늦게 말을 맞추기도 곤란했다. 애당초 이러쿵저러쿵 사이좋게 얘기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푹 쉬세요!”
지한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한정원은 또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모두의 인사가 끝났으나 누구도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신우 또한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흘렀다. 주먹을 살포시 쥐자 손에 축축하게 땀이 배었다. 단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견디기가 힘들었다.
“저, 그럼….”
먼저 말꼬리를 흐린 한정원이 눈치를 봤다. 옆 시야로 저를 보는 시선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끝내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인 한정원이 지한의 재킷 끝자락을 살짝 끌었다. 기어들어 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였다.
“한아…. 안 가?”
지한은 곤란한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뭐라 말을 해야 하지. 그러나 무슨 핑계를 대도 이 시간에 그의 집으로 가는 건 이상해 보일 것이 뻔했다.
내심 당혹스러웠으나, 굳이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아…. 나는.”
“공지한 씨는 연장 근무예요. 도와줄 게 좀 있거든.”
한정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와 김신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아, 배우님하고, 지한이랑….”
또다시 말꼬리를 늘인 한정원이 머뭇거렸다. 따로 할 말을 찾지 못한 지한은 그저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이상해 보이겠지….
옅은 한숨을 내쉬곤 한정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서 시간 끌어 봐야 그의 수면 시간만 줄어들 뿐이었다.
“어, 뭐 좀 도와드리기로 했어. 조심히 들어가 형. 이따 봐.”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는 어투로 눈짓하자, 벌어진 입술로 눈을 굴려대던 한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어.”
뭔가 내키지 않는 듯 머뭇거리다 꾸벅, 인사하고는 뒤를 돌아 걸어 나간다. 지한은 우두커니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출구를 향해 걷던 한정원이 돌연 뒤를 흘끔 바라보았다. 아직도 자리에 서 있는 둘을 보곤 허둥지둥 고개를 돌린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인 줄 알겠어요.”
빈정거린 김신우가 아파트 출입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지한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고요한 사위로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강남 중심에 있는 호화로운 아파트는 입구부터 로비까지 어느 하나 번쩍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전에도 와 보았건만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 전자음이 울렸다. 둘은 그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꺼운 현관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자동 센서 불이 깜박거렸다. 현관에서부터 지한은 본능적으로 목이 말라 옴을 느꼈다.
먼저 들어선 김신우가 달칵 스위치를 눌렀다. 환히 밝아진 사위에 지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다시는 발을 딛고 싶지 않은 곳에 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버렸다.
“안 들어오고 뭐 해요.”
김신우는 어깨에 걸쳐 놓았던 감색 코트를 느릿느릿 벗었다. 지한은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선 이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뭐라도 해결을 봐야 했다.
“확실히 해 주세요.”
느닷없는 말에 김신우가 찬찬히 시선을 돌렸다. 턱을 비스듬히 치켜든 채 가만히 지한을 주시한다.
“뭘?”
그저 되묻는 말일 뿐인데 숨이 막혔다. 불현듯 찾아온 두통에 멀쩡하던 어깻죽지까지 욱신거리는 듯했다.
하나 저 또한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갈무리해 놓지 않으면 쭉 이런 식으로 저를 휘두를 것이 분명했다. 그건 죽어도 싫었다.
“저는.”
지한은 김신우의 시선을 묵묵히 마주했다. 이제 제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합의를 보아야 했다.
“저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끌려다니는 거 싫습니다. 차라리 원하는 걸 정확하게 말씀해 주세요.”
낮은 음색에 멈춰 있던 김신우가 몸을 돌렸다.
“제가 그만두길 원하시는 겁니까?”
지한은 눈가를 찌푸렸다.
“그래서, 협박하시는 건가요?”
가만히 선 채 그를 주시하던 김신우가 찬찬히 다가왔다. 우두커니 현관에 서 있는 지한의 앞에 바짝 멈춰 선다.
“그렇다면?”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몸에 딱 붙는 하얀 와이셔츠가 두꺼운 흉통을 여실히 드러냈다. 팬들이 보았다면 제법 환호했을 몰골이었지만, 지한에게는 그저 위압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었다.
“계약서 조항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지금은 제 의사대로 계약을 무르기 어렵습니다. 특약에 적힌 위약금을 낼 여건이 안 돼요.”
지한은 무심한 얼굴로 옅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
“하지만 위약금 없이 계약 해지가 가능하도록 도와주신다면, 지금 이 자리와 조건에 연연하지 않고 깔끔하게 그만두고 싶습니다. 이달 월급도 없던 일로 하셔도 됩니다.”
짙은 시선이 지한의 얼굴을 훑듯이 지나갔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김신우의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그런 그의 눈빛에 동요하지 않으려 최대한 감정을 숨겼다.
일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차라리 먼저 깔끔하게 해고해 주는 것이 지한에게도 좋았다. 하나 박 대표가 쉽게 넘어갈지가 미지수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김신우가 비스듬히 턱을 치켜들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감흥 없는 얼굴로 지한을 응시했다.
잠시 말을 끊은 지한이 한 번 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원하는 걸 확실히 말씀해 주세요. 해 드릴 수 있는 건 다 하겠습니다.”
“…….”
“그리고 약속해 주세요. 한정원에게는 절대로, 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그것만 확실하게 지켜 주신다면 원하시는 거,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숱한 생각의 정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절박해진 이제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다.
어차피 상대는 제멋대로 저를 쥐고 흔들 것이다. 아무런 확답도 받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휩쓸릴 바에야, 차라리 최소한의 못이라도 박은 후 끌려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이것 또한, 그가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것이었다.
말을 마친 지한이 입술을 꾹 당겨 물었다. 아무런 표정 없는 김신우와 시선이 얽힌다. 일자로 다물린 입매 덕에 조금 찡그린 듯 보이기도 했다. 그 빤한 낯빛에 지한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속으론 말실수라도 하진 않았을까, 그의 심기를 건드려 일을 그르치진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는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8년 동안 한정원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일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담담한 척, 대수롭지 않은 척했으나 그럴 리 없었다. 잘못될까 봐, 틀어질까 봐, 그와 전처럼 지낼 수 없게 될까 봐. 그런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와르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짧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둘은 한참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서로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였다.
지한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김신우의 눈매가, 돌연 살짝 휘어졌다. 따라 모양 좋은 입술이 호를 그렸다.
“하하….”
그는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덮듯이 감싸며 웃었다.
“참,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그리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살짝 올라간 입매 사이로 고르고 하얀 이가 스치듯 드러난다. 딱딱하게 눈가를 굳힌 지한은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흐려지는 웃음과 함께 눈가를 덮고 있던 손이 찬찬히 턱 끝까지 내려갔다. 사이로 드러난 옅은 눈동자가 지한을 또렷하게 주시했다.
“좋아요. 들어와요.”
김신우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마치 손님에게 제집을 소개하듯, 한 걸음 뒤로 비스듬히 비켜서며 눈썹을 끌어 올렸다.
“공지한 씨가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죠.”
까닥 턱짓한 김신우가 등을 돌렸다. 찬찬히 고개를 숙인 지한이 신발을 벗었다. 당돌하게 내뱉은 말과 달리 속은 착잡하기만 했다. 제가 악마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마실 것 줘요?”
와이셔츠 소매를 접어 올리며 부엌을 향해 걸어가던 김신우가 평이하게 물었다. 목이 마르진 않았으나 괜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예.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대충 대답하고는 바닥에 깔린 러그를 바라보았다. 심정 같아서는 물만 마셔도 체할 것 같았다. 어쩔 도리가 없던 일이라지만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제 발로 여길 또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하나 약속대로 그가 입만 다물어 준다면 이대로 걱정 없을 것 같았다. 들이닥치는 초조함에 펠라든 대딸이든 못 해 줄 건 뭐냐는 대담한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저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커다란 커피 머신이 원두 가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우두커니 선 지한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깐씩 비추는 옆모습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라도 하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앉아요.”
그가 등을 보인 채 말했다. 지한은 쇳덩이 같은 발을 찬찬히 움직였다. 소파 위로 지그시 걸터앉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는 상체를 비스듬히 숙인다. 괜스레 짧게 자른 엄지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제 입으로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당차게 말했으나, 초조하지 않을 리 없었다.
어떤 말을 할까. 지난번엔 좆을 빨아 달라고 했으니 같은 요구를 하려나. 아니, 어쩌면 그것 이상을 바랄지도 모른다. 그게 당연한 일일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끔찍할 만큼, 눈도 마주치기 싫을 만큼 저를 혐오한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 지금처럼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진 않았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요.”
지한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김신우가 서 있었다. 손에 든 머그잔을 내밀며 지한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컵 안에서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당돌하게 굴 땐 언제고, 죽을상을 하고 있네.”
“…….”
“짜증나게.”
기다란 눈매가 잠시 가느스름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심각한 낯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팔을 뻗어 머그잔의 손잡이를 잡자, 차갑고 매끄러운 도자기 표면이 닿았다. 컵을 힘주어 당겼으나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지한은 의아하게 눈을 치켜떴다. 문득 눈이 마주친다. 김신우는 지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서늘한 적막이 둘 사이로 흘렀다.
“……!”
불시에 컵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입구까지 넘실대던 새카만 액체는, 말릴 새도 없이 지한에게로 쏟아졌다.
새카만 액체가 흰 와이셔츠를 삽시간에 축축이 물들였다. 눈앞에서 본 것을 머리로 이해하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다.
“아. 실수.”
전혀 실수라고는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척척하게 젖어든 셔츠가 아랫배 위로 들러붙었고, 곧 가랑이까지 빠르게 스며들었다.
굳은 시선을 들자 김신우가 기울여놨던 컵을 바로 들었다.
“다 젖었네.”
“…….”
“어쩌죠. 그걸 입고 있을 수도 없고.”
황당함에 화조차 나지 않았다. 애당초 제가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어떤 음료를 쏟아부을지 고민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 김신우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허벅지를 타고 번지는 액체를 보며 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 소파에 스며들까 싶어서였다. 왜 이런 유치한 짓을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도 즐겁지 않았다.
“옷 줄 테니까 씻고 와요, 욕실은 저쪽.”
그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디론가 걸어 나갔다. 지한은 그의 뒷모습을 그저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하….”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부딪쳤던 어깨가 이제야 욱신욱신 조여 왔다.
혼자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기에도 지쳐버렸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켜켜이 쌓인 짙은 피로가 온몸에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지한이 까맣게 물든 셔츠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 꼴로 나갈 수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반 체념 상태로 터벅터벅 욕실을 향해 걸었다. 문을 열자 제 집의 세 배, 아니 네 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넓은 욕실이 드러났다.
안으로 들어서자, 독특하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이 보인다. 유난히 휘황찬란하고 커다란 욕조까지 겸비한 곳이었다.
욕실에 이런 커다란 전신 거울이라니. 민망하지도 않나.
눈가를 찡그리며 재킷을 벗고는 넥타이를 끌렀다. 언제고 그가 허튼 말을 뱉지는 않을까, 종일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온몸이 뻑적지근하다.
지저분하게 물들고 구겨진 셔츠 단추를 풀었다. 벨트 버클을 푼 뒤 축축한 바지도 벗었다. 마지막으로 드로즈까지 벗을 때는 저도 모르게 문 쪽을 살폈다. 하나 그가 들어오는 흉측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거울 속의 자신이 오늘따라 더 초라해 보였다. 피곤함에 잔뜩 절은 얼굴은 수척해 보일 정도였다. 꼴이 아주 엉망이었다.
언뜻 등을 비춰 보니 빗맞은 곳이 불그스름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나중에 냉찜질이라도 해 줘야 할 듯했다.
유리 칸막이가 세워진 샤워 부스 밑으로 들어가 수전을 틀었다. 바로 뜨끈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한은 양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머리칼을 따라 얼굴로 흘러드는 세찬 물줄기에 정신이 좀 또렷해졌다.
김신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생각에 잠긴 채 샴푸질을 하고 바디 클렌저를 문질렀다. 저와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니, 쓸데없이 추측해 봐야 헛수고였다. 코끝으로 향긋한 향기가 스친다. 뜨거운 온수로 몸을 데우니 피로가 좀 가시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방 침대에 널브러져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은 마음이 물밀 듯 몰려왔다.
“하아….”
근래 몇 년 치 한숨을 몰아쉬는 듯했다. 이 상황에 느긋하게 샤워할 순 없어 군 생활하듯 빠르게 헹군 뒤 수전을 닫았다.
금세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맞닿았다. 흘러내리는 물방울에 눈가를 찡그린 채 수건을 찾았다. 서랍을 열자 텅 비어 있었다. 칫솔도, 치약도 없는 걸 보니 주로 사용하는 욕실이 아닌 듯했다.
멍청함에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미리 확인하고 씻을걸. 문틈 사이로 수건을 달라고 소리라도 쳐야 할 판이었다. 그가 망연자실해 있을 때에, 돌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에 수건이랑 가운 걸어 놨으니 입고 나와요.”
문 쪽을 돌아보자 김신우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행히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그가 돌아가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달칵 문을 열었다. 끄트머리에 보송한 목욕 가운과 수건이 걸려 있었다. 손만 뻗어 그것을 빼 들고는 바로 문을 닫았다.
전에 김신우가 입었던 하얀 것과는 다른, 블랙 색상의 가운이었다. 먼저 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 가운을 걸치자 보드라운 극세사가 피부에 착 감겨 왔다. 수건을 목에 건 채 젖은 머리를 털며 생각에 잠겼다.
뭘 어쩌자는 거지….
암만 생각해 봐야 원점이었다. 가지런히 벗어 놓은 옷을 주섬주섬 포개어 들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습한 욕실 속에서 걸어 나오니 찬 공기가 피부에 훅 와 닿았다.
“이쪽으로 와요.”
가운의 끈을 잘 여민 뒤 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러보니 거대한 크기의 호화로운 침대가 놓인 침실이었다. 블랙과 화이트로 다소 딱딱하게 디자인해 놓은 거실과 달리, 방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따뜻했다. 두껍게 쳐 놓은 크림색 커튼이나 벽지 색 등이 그랬다.
한눈에도 값이 꽤 나갈 듯한 최고급 침구와 폭신한 의자, 도톰하고 부드러운 호텔용 수건부터 가운까지 이곳엔 어느 하나 대충 들여놓은 것이 없는 듯했다.
머뭇거리며 문지방을 넘어서자 무엇을 찾는 듯하던 그가 침대 옆 의자로 눈짓했다.
“앉아요.”
지한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목에 걸어 놓은 수건으로 물기를 꾹꾹 눌러내며 의자 위에 걸터앉고는, 김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티셔츠와 검정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늘 잘 꾸민 모습만 보다가 저런 편안한 옷차림을 보아하니 분위기가 또 확 달라 보였다.
“표정 좀 풀죠. 누가 잡아먹는대?”
그가 피식 웃어 보였다. 그 은근한 목소리가 너무도 상냥하고 부드러워서, 순간 지한은 그가 친절한 사람이라 착각할 뻔했다.
“내가 억지로 들여놓은 거 아니잖아.”
“…….”
“안 그래요?”
뚜벅뚜벅 다가온 김신우가 상체를 비스듬히 숙였다. 의자에 앉아 있던 지한과 눈높이를 맞춘다. 온화하게 웃을 때완 달리 무표정한 얼굴은 싸하기만 했다.
뜨끈하게 열이 올랐던 몸이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다. 답 없이 그를 응시하자, 그가 지한의 어깨를 짚었다. 목덜미에 부드럽게 맞닿은 손바닥이 차츰 옆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귀밑으로 기다란 손가락이 스쳐 지나갔다. 오랜 운동으로 굳은살이 박인 제 손과는 달리 부드럽고 매끈했다.
내심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검지로 느릿하게 지한의 가운을 끌어 내렸다. 극세사 가운이 스르륵 흘러내려 가며, 지한의 한쪽 어깨가 드러났다. 잠시 침묵을 잇던 김신우가 심상하게 말했다.
“가운 더 내려요.”
“…….”
“내가 남자 옷 벗기는 취미는 없어서.”
지한은 굳은 눈가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체를 펴고 팔짱을 낀 김신우가 얼어붙은 지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개의 건조한 시선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부딪쳤다.
스트립쇼라도 하라는 건지. 기가 찼다. 그는 그저 제 수치를 즐기는 듯 보였다. 지한은 옅은 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움직여 가운을 내렸다. 진득한 시선이 목선을 따라 어깨와 팔로 이어졌다.
상체를 훤히 드러낸 채 가만히 남의 눈길을 받는 일은 생각보다 더 껄끄러웠다. 상대가 김신우라면 더더욱.
가만히 눈을 내리깔자, 옆 시야로 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빳빳이 세운 등줄기 뒤로 차고 축축한 것이 닿았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순식간에 어깨와 등을 타고 화한 느낌이 번졌다. 손바닥으로 가만히 어깨 부근을 문지르는 손길에 살갗이 싸하게 식어 갔다.
이건…. 아마 액체형 파스인 듯했다.
뭐 하는 거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친 걸 기억하고 치료해 주니 고맙게 여겼을 테지만, 이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
“착한 척하는 놈보다, 그냥 착한 놈이 더 병신 같은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등 뒤에서 나직한 들려온 목소리는, 어깨에 스며든 척척한 액체보다 차가웠다.
“기억 안 나요?”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이 돌연 어깨 위를 꾹 눌렀다. 욱신대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작은 신음이 샜다.
“…납니다.”
인상을 찡그린 지한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김신우가 직사각형의 끈적한 스티커형 파스를 지한의 등 위로 덧대기 시작했다. 잠자코 고개를 비튼 지한이 물끄러미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떨떨하게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가 저를 위해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쌍으로 지랄을 하지.”
“…….”
“병신같이.”
행동과는 달리 고압적으로 읊조린다. 짓씹듯 내뱉는 상스러운 말투는 분명히 김신우였다. 언행 불일치라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말인 듯했다.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는 사이, 일을 마친 김신우가 수건에 손을 닦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팔오금까지 걷어붙인 소매에 단단한 팔뚝이 드러난다. 매끄럽고 곱상한 외모와 상반되는 거친 몸이 아이러니하게도 잘 어울렸다.
“공지한 씨.”
“…예.”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준다고 했죠.”
뚜벅뚜벅 걸어간 김신우가 제 침대 헤드에 느슨하게 기대앉았다. 길쭉한 두 다리를 쭉 뻗으며 지한을 마주 본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깔보는 시선은 건방지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 해 봐요.”
제게 와 닿는 짙은 시선이 적나라했다. 생각지 못한 호의에 정신 못 차리던 차에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그가 문질렀던 어깨가 뜨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뭘.”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지한을 조롱하듯, 턱을 비스듬히 든 김신우가 낮게 중얼거렸다.
“자위, 해 보라고.”
표정 변화 하나 없는 평온한 얼굴로.
머릿속에서 파삭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뭐든 해 주겠다며 내뱉던 제 발언이 귓가에 웅웅 울리는 듯했다. 손쉬운 다짐은 아니었으나 늘 제 예상보다 한 뼘, 아니 수백 미터는 족히 뛰어넘는 그의 행보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게….”
눈썹을 찡그렸다. 다리를 쭉 뻗고 팔짱을 낀 김신우는 여전히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보고 싶으십니까?”
왜?
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으나 도저히,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동요를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에서 제가 뭘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문득 그가 낮은 실소를 터뜨렸다. 하나 전혀 웃지 않는 낯이었다. 김신우는 그저 고요히 지한을 응시했다.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눈앞에 쭉 뻗은 발이 천천히 까닥, 까닥 움직인다. 따라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질문이 좀 이상하네.”
“…….”
“원하는 걸 다 들어주겠다고 한 건 공지한 씨 아닌가?”
침대 헤드에 뒤통수를 기댄 그가 비스듬히 턱을 들었다.
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걸 예상한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그 선에서 국한된 일 따위를 시키리라 생각했다. 지난번 펠라티오를 시킨 일 또한 그랬다. 남자인 제게 그런 걸 받고 싶은지 아닌지를 떠나, 끝내 사정까지 마쳤으니 결국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
괴로운 순간은 길지 않았다. 한정원과의 사이가 소원해져 평생 후회하기보다는, 그쪽을 택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판단한 이래에 벌인 일이었다.
“내가 공지한 씨가 좆 잡고 흔드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지, 그게 궁금해요?”
지한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왜. 보고 싶다고 하면 좀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라도 생기나? 그래서 물었어요?”
그는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나긋하게 물어왔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부드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팔 중간 즈음까지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돋아난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건… 아닙, 니다.”
지한은 작게 턱을 가로저었다. 몰아붙이는 듯한 위압감에 눈가를 찡그렸다. 허공에서 얽힌 시선이 뜨겁다. 아니 차가웠다.
“하기 싫으면 관둬요. 괜히 어쭙잖은 핑계 대지 말고.”
깔아보는 듯 하찮게 보내오는 시선에, 뜨거운 열기가 와락 몰아쳤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때면 자꾸만 원치 않는 방향으로 말려들어 버린다.
궁금했던 건 그저 그의 의도였다. 제가 자위하는 모습을 봄으로써 그가 얻을 수 있는 것, 제게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나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니, 묻지 않아도 답은 나와 있었다.
그는 그저.
그저.
“제가 수치스러워하는 걸 보고 싶으신 거죠?”
지한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입술 사이로 식은 숨이 흘렀다.
“이런 짓들로 능욕하고, 치욕스럽게 무너지는 걸 보고 싶으신 거잖아요.”
지한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었다. 정치 신념이 강하지도, 유달리 가치관이 뚜렷하지도 않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부딪히지 않으며 한 걸음 물러선 채 물 흐르듯 살면 그만이었다.
하나 지한에게도 극명하게 싫은 것은 있었다. 불합리와 부당한 처사. 불의, 강자가 약자를 대하는 비열한 자세 등이 그랬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고용주의 입장에 선 김신우는 그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화가 났다.
“그렇다면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꽉 동여매어 있던 가운의 끈을 스르륵 풀어 내렸다.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저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시기는 힘드실 테니까요.”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다리를 벌렸다. 남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속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나 그가 원하는 대로 무너진 얼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늘어진 살덩이를 쥐자 살갗 위로 솜털이 바짝 섰다. 김신우는 말없이 그의 얼굴부터 좆을 쥔 손까지 찬찬히 훑어 내려갔다. 지한의 눈길 또한 그의 시선을 끈덕지게 따라갔다.
양어깨까지 흘러내린 가운은 앞을 풀어헤친 탓에 거의 벗고 있는 꼴이 되었다. 열 받은 상태에서 성기를 주물러댄 경험 또한 없으니 힘도 잘 받지 않았다. 달궈진 팬에 물을 부어 놓은 듯 속이 자글자글 끓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물방울들이 이따금 따갑게 튀어 오르며 솟구쳤다. 그러나 작게 눈가를 찡그릴 뿐이었다.
지한은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적당히 다리를 벌렸다. 기분이 더러웠지만 참았다. 생각할수록 아래가 사그라들 것 같아 분노를 삭인다.
입술을 지그시 문 지한은 김신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차피 모든 퇴로가 막힌 상황에선 최대한 받아들이는 것이 제게도 좋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손으로 여러 번 훑다 보니 아래에 피가 몰렸다. 손아귀에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꾸 숨소리가 새어 나오기에 입술을 짓물었다. 김신우는 마치 석고상처럼 아무런 미동 없이 지한을 지켜보기만 했다. 마치 AV 배우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나 반대로 생각하면 김신우에게도 지금 자신이 느끼는 기분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
지한은 턱을 살짝 든 채로 그를 빤히 주시했다. 어릴 적 티브이에서 우연히 보았던 적나라한 성인 영화를 보듯 느리게 손을 움직이며, 그의 얼굴에 오롯이 집중했다.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칼과 날카롭게 뻗은 콧대, 속 쌍꺼풀이 진 기다란 눈매와 가느다란 턱선을 차례로 훑는다.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작은 머리 크기와 대조되는 다부진 어깨, 굳건히 엮은 채 움직이지 않는 단단한 팔뚝을 보았다. 옷을 입고 있지만 판판한 근육이 보이는 듯한 복부, 쭉 뻗은 채로 발목만 살짝 꼬아 놓은 발바닥까지 차례로 시선을 옮겼다. 좆을 잡은 오른손은 위 아래로 착실하게 움직였다.
금세 아랫배가 묵직해지고 빠듯한 성감이 올라왔다. 휘몰아치던 분노가 사그라들고 육체의 본능이 정신을 어지러이 흔들었다.
“하.”
묵묵히 지한의 행동을 보던 김신우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불현듯 터뜨린 비소는 황당해 보이기도,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도 했다. 팔짱을 낀 그대로 오른손만 올려 제 입가를 감싸 쥔다. 이윽고 섬세한 눈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대단하네….”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낮게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상황에 맞지 않았다. 지한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저라고 이런 대치 상황을 즐기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일은 그의 뜻대로 아주 안 좋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내뱉는 숨이 뜨거웠다. 뜨겁다 못해 습하게 느껴졌다. 적정선까지 끌어 올라온 불쾌한 쾌감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못 할 것, 같았습니까?”
신음처럼 물으며 다시금 이맛살을 좁혔다. 아랫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허벅지 근육도 함께 딱딱해졌다. 적막한 방 안에는 살갗 문질리는 소리만 외설적으로 울렸다.
요도에서 흘러나온 말간 액이 손가락을 적신다. 지한은 엄지로 귀두를 둥글리며 속도를 좀 더 빨리했다. 거칠어진 움직임에 철퍽철퍽 질척한 소리가 났다. 치닫는 성감에 이를 꽉 물자 턱이 절로 비스듬히 들렸다. 딱히 무언가를 상상하거나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오른손과 본능에 모든 것을 맡겼을 뿐이었다.
김신우는 여전히 입가를 감싸 쥔 채로 답 없이 지한을 주시했다. 골몰하는 박사처럼, 또는 고사 중인 학생을 지켜보는 선생처럼, 풀벌레를 잡는 아이처럼, 그렇게 지한을 보고 또 보았다. 어느새 웃음기는 말끔히 지워진 채였다.
“후우…. 읏.”
지한은 젖은 숨을 내쉬었다. 고양된 흥분에 뺨이 붉게 물든다. 그는 찌푸린 듯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마치 성인 영화를 보듯, 또는 열렬히 섹스를 갈구하는 상대를 보듯 김신우를 주시했다. 어찌 보면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 같기도 했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타는 듯 달아오른 시뻘건 감정이 머리끝에 치닫는 찰나, 귀두 끝에서 정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새카만 불꽃이 파박 튀어 올랐다.
“큿….”
지한은 목구멍을 꽉 조이며 눈가를 찡그렸다. 간헐적으로 움칠움칠 떨리는 몸과 함께 목에 핏대가 섰다. 마지막까지 좆을 쥐어짜듯 잡은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뺨, 귀 끝은 물론이고 목까지 붉게 물든 채였다.
육체의 배설과 감정의 분출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간의 숱한 경험들 사이에서, 지한은 순응으로도 상대를 누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의 그 또한 순응했으므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멋대로 자위(自慰)한 밤이었다.
***
그리 덥지도 않은데 한껏 땀이라도 흘린 양 살갗이 끈적거렸다. 와중에도 사정 후의 탈력감이 찾아와 긴 숨을 내쉬었다. 혼자서 이 짓을 해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사정의 궤적이 가슴께까지 튀어 있었다. 정액이 번들번들한 손도 진득거렸다.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난 김신우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지한은 딱딱하게 굳은 채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김신우를 응시했다. 그는 말없이 지한의 목에 걸려 있던 수건을 스르륵 빼냈다. 상체를 숙이며 무릎을 짚고는, 지한과 눈높이를 마주했다.
두 남자의 눈동자가 가까운 틈에서 마주쳤다. 또렷하게 빚어 놓은 듯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비현실적이었다.
“공지한 씨.”
“…….”
“화났어요?”
그는 마치 달래듯 고요히 물으며, 정액이 튄 명치 위를 느릿하게 문질러 주었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축축한 수건이 닿았다. 긴장한 지한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칠 떨었다. 그는 제 몸을 닦는 손길을 멀거니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화 풀어요.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나긋하게 조곤대는 김신우의 눈매가 섬세하게 휘어졌다. 매끈한 얼굴 위로 피어오른 은근한 미소에 지한은 할 말을 잃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형형한 눈동자가 유난히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생애 느껴 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당혹스럽기도,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전과 확연히 상반되는 태도는 제게 모욕이자 기만이었다.
지한은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의 입맛대로 이리저리.
“장난은… 그만두시죠.”
지한은 한쪽 눈가를 찌푸린 채, 낮게 잠긴 목소리를 끌어냈다. 물기 어린 머리칼이 눈을 쿡쿡 찔렀다.
세상 어느 누구도, 친해지기 위해 자위를 권하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고개를 살짝 숙이곤 옅은 숨을 내쉬었다. 몹쓸 흥분이 사라진 자리에는 불덩어리 같은 분노가 자리 잡았다.
“제가, 우스우십니까?”
별수 없는 걸 알고 있었다. 자업자득, 인과응보, 전부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둔 결과였다. 그 사실이 몸서리치도록 소름 끼쳤다. 온몸의 신경이 불쾌하리만큼 요동치고 있었다.
“음….”
목을 울리다, 짧게 웃어 보인 김신우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옅은 밤색의 눈동자가 지한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다리를 벌린 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를 보는 시선에 기가 찼다. 세상만사 무신경한 이미지완 달리 확실히 웃기는 새끼였다.
어디까지 하나 싶었다. 저 무감한 얼굴에 금이 가고 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나 금세 꼬리를 말고 도망갈 거란 김신우의 예상은 진즉 엇나갔다. 무리한 요구도 전부 해내는 모습은 실로 무식해 보일 정도였다.
김신우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늘 예상을 깨부수는 반응에 오기마저 들었다.
한정원이 대체 뭐기에.
같은 남자에게 품는 역겨운 감정놀음에, 출처 모를 감정이 불쾌히 섞여들었다. 이제는 그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끝을 보고 싶었다.
“우스운 놈이랑 웃기는 놈이 한 끗 차이긴 한데.”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손에 쥔 수건을 복부까지 찬찬히 미끄러뜨렸다. 지한의 눈동자도 그의 손길을 따라 옮겨 갔다.
“확실히, 당신은 웃기는 놈 쪽이죠.”
말을 맺고는 허리를 펴 일어난다. 희미한 웃음기가 배인 시선은 여유로웠다. 지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할 말이 있는 듯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시키실 거 없으시면, 좀 씻어도 됩니까?”
고개를 돌리곤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젖은 머리칼에선 아직도 달큼한 샴푸 향이 풍겼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꽉 막힌 길이었다.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았다. 어차피 자신이 그를 이길 방법은 없는 듯했다.
순응. 그것이 제가 택할 유일한 기로였다.
한정원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래요, 씻고 눈 붙이다 가요. 이제 네 시간도 안 남았으니까.”
가운을 추스르며 일어나는 지한을 보며 김신우가 말했다. 하지만 지한은 이곳에서 단 5분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김신우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왔다.
“공지한 씨는,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네요.”
팔짱을 낀 채 싸한 음색을 드러낸다. 그 목소리에 지한이 눈을 들었다.
“꼭 강제로 시켜야 듣는 버릇이 있나? 혹시 뭐 페티시, 그런 거 있어요?”
김신우가 빈정거리며 눈가를 찌푸렸다. 가벼운 차림이라 그런지 김신우의 유난히 너른 어깨와 두터운 흉곽이 눈에 들어왔다.
“…씻고 오겠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대화를 더 잇고 싶지 않았다. 굳이 맞서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진즉에 깨달은 차였다.
걸음을 내디딘 지한이 문턱을 지나 종전에 나왔던 욕실을 향해 걸었다. 뒤를 따르는 진득한 시선은 그가 문 뒤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졌다.
***
띠리리리. 띠리리리.
머리 위에서 전자 알람이 날카롭게 울렸다. 깜빡, 깜빡. 지한은 뻑뻑한 눈꺼풀을 떴다 감기를 반복했다.
비스듬히 쳐 놓았던 커튼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방이 많으니 손님방에서 자라는 말에도 지한은 굳이 거실 소파를 고집했다. 그냥 그의 호의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원치 않아도 아침은 찾아왔다. 생각에 잠겨 잠이 들었었는지, 그대로 밤을 새웠는지도 모를 만큼 혼몽한 정신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눈을 붙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멍한 정신으로 눈가 위에 손등을 얹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뜰 때마다 저를 주시하던 짙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생판 관계없는 남자 앞에서 그런 짓을 벌여 놓고 정신이 멀쩡할 리 없었다. 숫제 싸구려 감정에 대한 대가로 몸이라도 판 기분이었다.
“하아….”
가만히 누워 긴 숨을 내쉬었다. 새카만 시야로 말갛게 웃는 한정원의 얼굴이 떠오른다. 순간 가슴이 지끈 움직였다. 손바닥으로 명치를 느릿하게 문지른 지한은 복잡한 감정 속에서도 그를 떠올렸다.
보고 싶다.
이제는 그를 보기 위해 갖은 핑계를 댈 이유가 없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매일 한정원을 만날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제겐 과분한 사치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사치를 누리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속이 울렁였다. 깊게 생각할수록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소파 위에서 상체를 일으키자 김신우가 건네주었던 푹신한 침구가 바스락거렸다.
“안 잤어요?”
“…아.”
기척 없이 나타난 김신우가 물었다. 뒷머리가 부스스하게 뻗친 지한과는 달리, 그는 방금 일어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무섭게.”
그가 리모컨을 누르자 닫아두었던 커튼이 스르르 열렸다. 동시에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방금…. 일어났습니다.”
목이 칼칼하게 잠겨 있었다. 지한은 부스스해진 뒷머리 칼을 만지작거렸다. 누군가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은 익숙지 않았다.
“곧 한정원 올 텐데 정신 차려요. 예쁘게 보여야지.”
멀찍이 선 김신우가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건드리는 시늉을 했다. 그 말에 지한은 양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눌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신우의 얼굴에 약간의 웃음기가 배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무표정한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뚱해 보인 탓이었다.
“커피 할래요?”
묻는 말에 지한이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또… 부으시려는 거면 사양하겠습니다.”
“하하, 미안해요.”
시원스레 웃어 보인 그가 부엌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지한은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통유리 아래 펼쳐진 서울의 아침을 보았다.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햇볕이 새하얗게 내리쬔다. 40층이 넘는 초고층이라 그런지 창문으로 스며드는 일조량이 만만치 않았다. 그제야 한 번 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커피 향이 풍겼다. 고개를 돌린 지한이 부엌에 서 있는 김신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제는 욕하다가 말고 파스를 발라 주지 않나, 느닷없이 자위를 시키더니 재워 주고 커피까지 내려준다. 확실히 이중인격에 변태 사이코가 분명했다.
생각을 깨우듯 전자음이 울렸다. 맑은소리와 함께 아트월에 붙은 인터폰 화면에 한정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잠도 거의 못 잤을 텐데 부지런하기도 했다.
힐긋 뒤를 돌아본 김신우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곧 도어락 해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현관에서부터 우렁찬 인사말이 들려왔다. 가만히 시선을 들자 쫄래쫄래 들어오던 한정원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소파에 앉아 있는 지한을 본 그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어… 한이도, 여기서 잤나 보네.”
시선은 지한이 입고 있는 옷차림에 머무른 채였다. 지한은 턱을 당기곤 넉넉한 핏의 티셔츠를 만지작거렸다. 김신우가 포장도 뜯지 않고 건네준 새 티셔츠는 지한이 건장한 체격임에도 품이 낙낙했다.
“응… 어쩌다 보니.”
괜스레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까 김신우가 머리를 가리키던 것이 떠오른 탓이다.
“그건 뭐예요?”
어느새 다가온 김신우가 지한에게 머그잔을 건네며 물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커피를 받아 든 지한이 다시 한정원을 바라보았다. 잔을 들어 보이며 먹겠냐는 듯 눈짓하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 팬분이 주신 선물이요. 주차장에서 만났어요.”
품에 네모난 선물 상자 같은 것을 들어 보인다. 둘의 행동을 주시하던 김신우는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는 눈썹을 치켜떴다.
“주차장? 아무나 못 들어올 텐데.”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입주민인가?”
한정원이 샐쭉 웃으며 상자를 내밀었다. 협탁 위에 머그잔을 내려놓은 김신우가 한정원에게서 상자를 받아 들었다. 왜인지 오늘은 그의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지한은 가만히 그 알록달록한 상자를 응시했다. 베이지색 상자의 뚜껑 위에는 리본이 예쁘게 달려 있었다. 새벽부터 집까지 찾아와서 선물 주고 갈 정도면 대단한 팬심이다. 저를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는 팬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기다란 손가락이 상자의 뚜껑을 열려는 찰나 지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잠깐만요.”
빠르게 팔을 뻗은 지한이 상자를 낚아챘다. 거친 행동에 뚜껑이 바닥에 탁 떨어졌다. 불시에 눈을 치켜뜬 김신우가 놀란 듯 지한을 쳐다보았다. 가벼운 쇳소리와 함께 상자에서 튀어나온 것이 지한의 눈가를 따끔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 한아!”
일순 간질거리는 것이 지한의 왼쪽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굳은 눈빛으로 상자를 내려다본 김신우의 얼굴이 서서히 딱딱해졌다. 상자 속에는 엉망으로 난도질하여 죽어 있는 쥐의 시체가 있었다. 가운데에는 고정된 스프링이 보였다. 상자가 열리면 커터 칼날이 튀어나오게 조립해 놓은 듯했다.
“괜찮아?! 피, 피가 나는데!”
지한은 하얀 뺨에 흘러내린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조금 놀란 차였다.
큰일 날 뻔했다. 한정원이 열었다면, 아니 김신우가 다쳤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터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형. 일단 경찰에 신고해 줘.”
“어, 어. 잠깐. 일단 신고를…. 아니 치료를….”
눈을 크게 뜬 한정원이 등에 멘 커다란 가방을 부산스레 뒤적거렸다. 가만히 상자를 들여다보던 지한이 인상을 찡그렸다. 상자 안에 피로 쓴 듯한 글씨가 남겨져 있었다.
[ㅋㅋㅋ]
누가 이런 짓을.
튕겨 나온 칼날에 쥐의 사체까지, 이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상자를 보던 지한이 시선을 들어 김신우를 바라보았다. 본인에게 보낸 것이니 그 또한 놀랐을 터였다.
“괜찮으세요?”
그리고 생각지 못한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석고상처럼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한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생경한 모습에 지한이 눈썹을 치켜떴다.
많이 놀랐나.
지한은 쥐가 든 상자와 머그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조심스레 그의 어깨 위를 짚으며 얼굴을 살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의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김신우 씨, 괜찮아요?”
그림 같은 얼굴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흔들리는 시선은 지한의 눈가에 고정된 채였다. 직설적인 눈길에 지한은 손등으로 제 뺨을 문질렀다. 흘러내린 피가 금세 말라붙어 살갗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아무래도 평소 이런 걸 볼 일이 없을 테니, 비위가 약한 듯했다.
“…김신우 씨.”
지한은 심각한 낯빛으로 그의 어깨를 약하게 흔들었다. 이윽고 숨도 쉬지 않는 사람처럼 멈춰 있던 김신우가 헛숨을 터뜨렸다. 멀거니 마주하던 시선을 옆으로 홱 돌린다. 어깨에 닿은 팔은 신경질적으로 탁, 쳐냈다.
“괜찮아요.”
지한은 그가 밀쳐낸 제 손과 김신우의 얼굴을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지 그가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보였다. 제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에 지한은 다시 상자를 쳐다보았다.
한쪽 무릎을 땅에 붙이고 앉아 바닥에 떨어진 뚜껑을 주워 덮었다. 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난도질당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비웃는 듯한 자음 세 개도 마찬가지였다.
지한은 깊은숨을 삼켰다. 이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 놈이면, 필시 남 괴롭히기 좋아하는 놈일 것이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이자, 제정신이 아닌 놈이 분명했다.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한아, 한아…!”
어느새 신고 전화를 마친 한정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잔뜩 울상인 얼굴로 더듬더듬 지한의 얼굴을 짚기 시작했다.
“어디 봐 봐. 어떡해.”
“응. 괜찮아. 살짝 베인 거야.”
검지로 상처 부근을 살짝 매만진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맞기라도 했다면 큰일 날 뻔했지만, 다행히 광대 부근에 조금 스친 정도였다.
“너는 뭐 다 괜찮다 그래!”
그가 평소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성마른 손길로 커다란 가방을 뒤적거리며 생수병과 구급 약통을 꺼냈다. 어딘가 부산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괜히 이런 걸, 무턱대고, 받아 와서…. 어떡해.”
무릎으로 선 한정원이 바짝 다가왔다. 소독약에 적신 솜으로 뺨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조심스레 닦아내기 시작했다. 따끔거리는 느낌에 지한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눈앞에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조심조심 피를 닦아내는 손길 또한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멈칫 눈썹을 치켜뜬 지한이 한정원의 손목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형.”
나직한 목소리에 한정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어. 아파? 따갑니?”
“아니.”
“처, 천천히 할게. 피가….”
말까지 더듬으며 머뭇대는 손길에 지한의 눈가가 살짝 어그러졌다.
“왜 이렇게 떨어. 그냥 조금 스친 거라니까.”
낮은 목소리가 달래듯 속삭였다. 겁먹은 토끼 같은 얼굴에 옅은 한숨을 삼킨다. 별것 아닌 일로 놀라는 건 여전했다.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은 편이니 놀란 것이 당연했다. 지한은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감싸 쥔 그의 손목을 살살 흔들었다.
불현듯 마주친 한정원의 눈망울에 물기가 어렸다. 대수롭잖게 시선을 맞추던 지한의 눈동자가 멈칫 흔들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방울을 떨어낼 듯 보였다.
“…아.”
당혹스러움에 뭐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굵은 눈물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지한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번지기 시작했다.
뭐라 말릴 새도 없이, 투명한 눈물방울이 흰 뺨을 타고 미끄러졌다. 턱에 맺힌 액체는 금세 바닥으로 뚝뚝 추락했다.
한정원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그러나 마치 투명한 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지한은 당황했다. 그는 눈물에 약했다. 특히 한정원의 눈물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형, 형.”
달래듯 어깨를 짚는 손길에 그의 고개가 푹 떨궈졌다. 한정원은 아이처럼 소매로 눈가를 드세게 문질렀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점점이 번졌다. 그런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지한이 조급하게 중얼거렸다.
“왜 울어. 울지 마. 괜찮다니까.”
상체를 낮춰 눈을 마주치려 했으나, 팔뚝으로 가려진 탓에 볼 수 없었다. 당황한 손길로 토닥이며 시선을 돌리다 김신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 또한 알 수 없는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희게 질렸던 낯빛은 평소처럼 돌아온 채였다.
“나 때문, 에. 끅. 그래서….”
울음소리에 다시 시선을 내리자, 눈가를 눌러놓은 팔 아래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익숙하게 그를 토닥이던 지한의 품에 한정원이 툭 이마를 기대 왔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으나, 지한은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김신우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으. 흐윽.”
지한은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잖아도 자신과 한정원의 사이를 고깝게 보는 사람이다. 멀쩡히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는 한정원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은 이미 마음을 들켜 버린 상황이었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최대한 한정원과 붙어 있지 않아야 했으나, 울고 있는 한정원을 억지로 떼어 놓을 수도 없었다.
갈등의 기로에서 망설이는 찰나, 머리 위에서 그가 낮게 뇌까렸다.
“씨발…. 유난 떨지 좀 말아요.”
“…….”
“누가 보면 목에 칼이라도 박힌 줄 알겠네.”
싸하게 내뱉은 말에 한정원이 작게 딸꾹질을 했다.
“으, 죄송. 흐으.”
찬찬히 시선을 들자 그가 무정한 눈길로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어 욕을 읊조리는 소리에 지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알았으면 앞으로 아무거나 주워 오지 마.”
고개를 돌린 김신우는 찌푸린 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부드러운 고동색 머리칼이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스치듯 지한의 얼굴을 훑은 눈동자가 시리기만 했다.
“네, 조심, 하겠, 습니다….”
지한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피하지 않고 그 눈동자를 마주하던 김신우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지한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울렁이며 차오르는 감정에 주먹을 말아 쥔 순간, 인터폰이 울렸다. 신고를 받고 찾아온 경찰이었다.
***
“당분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이거 시시티브이에도 안 잡히고. 하는 짓 보니 악질입니다, 악질. 이렇게 동물 가지고 장난질하는 놈들이 또 금방 큰일 벌이거든요. 놈인지 년인지는 모르겠다만….”
상자 뚜껑을 열어 보던 경찰이 혀를 찼다. 선물을 건네받은 곳은 지하 주차장에서도 사각지대라 영상에 잡히지 않았다. 같은 시각 다른 영상도 돌려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여자인 것 같았어요…. 회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고 머리가 어깨까지 길었거든요. 키는 저랑 비슷하거나 조금 작아요. 바지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한쪽에선 눈이 퉁퉁 부은 한정원이 이리저리 손짓하며 설명했다. 지켜보던 지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김신우도, 김신우의 곁을 항상 따라다니는 한정원에게도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김신우 씨, 증거물은 일단 수사 맡길 텐데 너무 기대는 마세요. 이런 거 보내는 놈들이 또 어지간히 치밀하거든요.”
“어쩔 수 없죠. 하시는 데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심각한 얼굴의 김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말을 내뱉는 중년의 수사관 옆에 선 젊은 경찰은 신기한 듯 김신우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아. 그리고 이런 부류가 사건 이후 또 금방 나타나요. 당분간은 몸 좀 사리고 조심해야 한다고. 옆에 혹시 가드예요?”
그가 손짓으로 지한을 가리키자, 넥타이를 고쳐 매던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한정원이 진술하는 사이 제 옷으로 갈아입은 차였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수사관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훤칠하니 쌈도 잘할 것 같으시네. 가능하면 24시간 붙어 다녀요. 요 아파트, 방도 많은 것 같은데 당분간 좀 같이 사시든가. 보안 빵빵한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좀 위험한 놈이거든. 요새 이게이게, 제정신 아닌 놈들이 어지간히 많아야 말이지.”
검지로 관자놀이 옆을 빙빙 그린 수사관이 혀를 내둘렀다. 굳은 얼굴의 지한이 김신우를 보자,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어 보였다.
“고려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예에, 또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결과 나오는 대로 매니저님 쪽으로 연락 갈 겁니다. 그동안 몸조리 잘하시고요, 김신우 배우님.”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들이 집을 나서자마자, 김신우는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웠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집 안은 적막했다. 뻐근한 듯 고개를 좌우로 꺾던 김신우와 지한의 시선이 마주쳤다.
“밴드 잘 어울리네. 날건달 같고.”
빈정대는 말에 지한이 눈 밑의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대충 약만 발라 놔도 되건만 한사코 우기는 한정원 탓에 억지로 붙여놓은 차였다. 그는 쓸데없이 이런 곳에서 고집이 셌다.
“저, 촬영 팀에 늦는다고 말은 해 놨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아서요. 이제 준비하시고 출발하셔야 할 것 같아요.”
멀리서 전화를 받고 온 한정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붉게 부어오른 눈가는 물론 코까지 발갛게 부어 있었다. 어깨가 축 늘어져 위축된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요. 옷 갈아입고 내려갈게요.”
“네. 아래에 먼저 차 대기해 두겠습니다.”
등을 돌려 나가는 한정원을 지한이 따라나섰다. 김신우의 눈치를 보느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겸사겸사 신경 쓰지 말라고 위로해주고, 운전은 제가 대신해야겠단 생각이었다.
“어디 가요.”
등 뒤에서 김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차에….”
꼬리를 흐리는 말에 뚜벅뚜벅 다가온 김신우가 팔짱을 꼈다.
“방금 경찰 말 못 들었습니까?”
“…….”
“24시간 집중 경호. 여기 40층이에요. 지하까지 혼자 가다가 그 새끼가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신경질적인 어조에 지한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누가 덮쳐도 불안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외려 신경 써야 하는 쪽은 지금 혼자 나간 한정원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놈이 노리고 있는 건 한정원이 아니라 김신우였고, 제 임무는 김신우의 경호였으니까. 적어도 함께 있을 때는 놈도 나타나지 않을 터였다.
“그럼,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생각을 마친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답을 듣고 등을 돌리려던 김신우가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공지한 씨.”
“예.”
“상자는 갑자기 왜 뺏었어요?”
물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나직하게 묻는 목소리에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그제야 제가 본 것이 떠올랐다.
“표면에…. 피 얼룩 같은 게 보여서.”
다른 생각은 없었다. 베이지색 상자 모서리에 언뜻 붉은 얼룩이 보였을 뿐이었다. 불안한 직감은 늘 들어맞는 편이었다. 본능적으로 머리보다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그래요. 이제야 돈 쓴 보람이 있네.”
흠, 하고 헛숨을 내쉰 김신우가 앞으로 바짝 걸어왔다. 평소엔 누군가를 올려다볼 일이 거의 없는 지한이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들었다.
“아파요?”
그가 눈가의 상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조롱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예상 밖의 물음에 잠시 말을 멈춘 지한이 곧 고개를 저었다. 실로 조금 베인 게 다였다. 찢어지고 부러지며 이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했던 상처도 별 대수롭지 않아 하던 그였다.
“아, 아뇨 이건….”
“알아요, 안 아픈 거.”
말을 뚝 끊어먹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지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얼떨결에 말문이 막힌 지한이 설핏 눈가를 찡그렸다. 그의 입가에 띤 희미한 미소를 발견한 탓이었다.
“그 정도 다친다고 사람 안 죽어요.”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각 잡힌 자세로 눈을 내리깐 지한이 무심하게 답했다.
“…저도 압니다.”
딱딱한 답에 김신우가 픽 웃었다. 돌연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김신우가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한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닥 어딘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과 있을 땐 최대한 말을 아껴야 한다는 걸 이미 여러 번 깨달은 차였다.
“고마워요.”
예상치 못한 말에 지한은 제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지한은 눈을 치켜뜨곤 떨떠름하게 김신우를 보았다.
“고맙다고요. 나 대신 다친 거니까.”
“…….”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밴드 아래를 톡 건드렸다. 지한은 당혹스러움에 섣불리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인사가 가식이 아니라 진심처럼 들려온 탓이었다.
“앞으로도 나 대신 많이 다쳐 줘요.”
“…….”
“엄한 새끼 말고.”
그런 지한의 생각을 조롱하듯,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또한 정말로 진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눈이 마주치자 김신우는 담담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지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는 역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