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4)

1.

어릴 적부터 지한은 운동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없이 에너지를 소비한 이후의 개운함을 좋아했다. 또래보다 늘 체격이 컸던 그는 어머니의 격려하에 태권도부터 유도, 검도, 합기도, 그리고 복싱까지 여러 운동을 섭렵하였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딱히 꿈 같은 건 없었다. 하나 몸을 쓰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진학은 큰 고민 없이 경찰 경호학과에 입학했으며, 그 어렵다는 특전사로 입대해 몸 멀쩡히 만기 전역을 했다.

졸업 후에는 알고 지내던 체육관 관장님을 통해 소개받은 회사의 면접을 보았다. 전문적으로 VIP들을 밀착 경호하는 큰 규모의 가드 회사라, 학벌은 물론 고난도의 체력이 필요했으나 지한은 별 어려움 없이 입사에 성공했다.

그는 불합리한 걸 아주 싫어했다. 평소 과묵하고 무심한 편임에도, 불의를 보면 욱하여 오지랖을 부리곤 했다. 하여 군기가 꽉 잡힌 경호과 재학 때나, 부조리가 판치는 군 생활 중엔 정말 많이 맞았다.

도와주다 맞고, 반항하다 맞고, 밉보여서 맞고, 그냥 맞고, 또 맞았다. 물론 간혹 이성을 잃을 땐 상대를 때리기도 했다.

졸업 후 사회로 나가면 그런 일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나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부터도 엇비슷한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어딜 가나 부조리는 존재했다. 권력으로 잣대질하고 이유 없이 업신여기거나, 부당하게 억누르는 놈들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지한은 차츰 피로를 느꼈다. 수년간 연이어 벌어진 학번, 군번, 입사 연도 따위의 불합리한 일들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고 딱 그때쯤, 한정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아, 좀 만날 수 있어?]

느닷없는 연락에 가슴이 설렜다. 유명한 연예인 매니저 일을 시작했다는 이후, 간간이 잡던 약속조차 끊겼던 참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연락의 요지는 제 소속 배우 김신우의 경호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김신우는 요즘 한창 주가를 치고 있는 탑 배우다. 아역으로 데뷔한 그는 남자 주인공의 아들로 출연했던 히트작 ‘탐사’ 이후로 매년 시상식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다. 특출나게 잘생긴 외모는 물론, 뛰어난 연기력까지 겸비한 그에게 모두가 열광하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티브이 채널을 한 바퀴 돌릴 때 꼭 한 번은 그가 나왔다. 영화, 드라마, 광고 등 분야도 다양했다. 포털 사이트에도 마찬가지였다. 뉴스 기사, 동영상, 촬영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패션 코디, 열애설, 출연 예정작 등으로 항간을 늘 소란스레 달구는 사람이었다.

지한은 한정원이 맡은 담당 연예인이 무척 바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김신우라니, 그건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지한이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연말 북적이는 인파를 피해 방문한 작은 호프집에서 동기 이현우와 맥주잔을 기울이던 때였다. 호프집 주인장이 보던 낡은 티브이 화면 속에 김신우가 있었다.

“아이고, 저 청년이 상을 또 탔구먼.”

화면 속에서 그는 유리알처럼 말간 눈망울로 수상 소감을 이야기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모습은 고상하고 우아한 천인 같았다.

“에휴, 씨발. 김신우는 다 가져서 좋겠다.”

이현우가 맥주를 들이켜며 투덜거렸다. 그제야 그가 왜 그리 인기가 많은지, 지한은 조금 알 것 같았다.

***

“그래서, 이게 엄청 좋은 기회라고 생각이 든 거야! 내가 대표님한테도 네 자랑 엄청나게 했거든?”

쿠션이 꺼진 카페 소파에 앉은 지한이 미지근한 빨대를 물었다. 시선은 한정원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이며 말하는 그는 8년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웃을 때 꼭 손뼉을 마주치는 버릇도 여전했다. 꼭 혼자서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유도에 합기도에 검도에 각종 띠란 띠도 다 있는 데다, 키도 크고 싸움도 잘하고, 또 얼굴도 엄청나게 잘생겼다고!”

열심히 조잘대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지한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김신우의 경호를 구하는 이유는, 최근 화두가 되었던 한 극성팬의 칼부림 사건 때문이었다. 가해자의 사유는 정신 착란이었다.

다행히 김신우가 무사히 피한 덕에 약간의 타박상으로 그쳤지만, 그 일로 한 달 내내 언론이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다. 하물며 그는 그 광증 있는 팬을 선처까지 해 주는 아량을 베풀었다.

“진짜 얼마나 소름 끼쳤는지 몰라. 요즘 사람들 정말 무섭다니까….”

그런 유난한 부류의 사생 팬부터, 악의 가득한 스토커까지 김신우의 주변에는 늘 많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고 했다. 편지 안에서 발견된 핏자국이나, 저주가 깃든 인형 따위를 이야기할 때 그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지한아. 할 거지? 응?”

그는 김신우의 전담 경호에 필요한 모든 조건에 지한이 꼭 부합한다고 했다. 입이 무겁고 진중한 성격까지 제격이라며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지한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그가 속한 YNH 엔터테인먼트는 김신우 외에도 쟁쟁한 인물들을 배출해 낸 소속사다. 제안해 준 연봉이나 복지, 조건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개중에도 가장 마음에 든 점은, 신규 채용할 밀착 경호 인원이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이었다. 한 명. 그 말은 박 대표와 김신우 외에 누구와도 엮일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질서의 불합리에 지친 지한에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얼마 후, 지한은 한정원과 함께 YNH 엔터 본사로 향했다. 사장 박 대표는 그의 경력, 체격, 외모 등을 사방팔방으로 칭찬하며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지한 또한 만족스러운 조건에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었다.

***

한정원과 처음 만났던 것은 하굣길에서였다. 길을 걷던 지한은 우연히 들려온 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들려온 고양이 울음소리 탓이다.

평소 동물을 좋아했던 지한은 길고양이들을 발견하면 소시지나 캔을 사 까 주곤 했다. 홀쭉하게 마른 동물들을 보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하여 어디선가 웅크리고 있을 고양이를 찾아 찬찬히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곧 시야에 들어온 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콘크리트가 부스러진 인적 없는 골목 안에 누군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덩치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누가 보아도 폭행 현장이었다. 소년, 아니 한정원은 펑펑 울고 있었다. 한눈에도 벌겋게 부은 뺨과 헝클어진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지한은 눈가를 찌푸렸다. 서럽게 울고 있는 가엾은 모습에 잠재되어 있던 이성의 끈이 우지끈 끊어졌다.

더 생각할 새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간 지한은 한정원 앞에 서 있던 놈의 등을 망설임 없이 후려 찼다. 불시에 얻어맞은 그는 바닥으로 거칠게 나동그라졌다.

곧바로 무릎을 꿇은 지한이 한정원의 어깨를 짚었다. 사방에 흐트러진 가방과 필기구를 주워 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감, 감사해요….”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던 한정원이 지한을 끌어안았다. 지한은 돌연 제 품에 폭 안긴 낯선 이를 얼떨떨하게 내려다보았다. 얼핏 내려다본 얼굴은 붉은 상처로 엉망이었다.

그 가여운 얼굴을 보는 찰나, 심장이 덜컹 움직였다. 한정원의 모습이 덮어 두었던 보호 본능을 와르르 폭발시킨 탓이다. 눈썹을 찌푸린 지한은 낮게 침음했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을 끌어안고는 어정쩡하게 등을 쓸어 주었다. 생전 해 본 적도 없던 일이었다.

그로부터 시작이었다. 몇 번 마주쳐도 기억에 남지 않던 그를 지한이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안녕하세요, 형.”

한 학년 아래의 지한과 한정원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점 외에는 교집합이 없었다. 처음 동정심으로 시작한 관심은 어느새 의무감 엇비슷한 것으로 뿌리를 내렸다. 낯선 감정은 끝을 모르고 제 크기를 부풀려 갔다.

“어? 어어. 안녕….”

먼저 인사를 건넬 때마다 그는 의아해하는 듯했다. 똑같은 인사가 두 번, 세 번… 열 번이 반복되어도 제 인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복슬복슬하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과 어울리는 커다란 눈망울, 말랑하고 하얀 피부. 어리바리하다 못해 칠칠찮아서 툭하면 넘어지고 다치던 그는, 작고 연약한 초식동물 같았다.

학창 시절 지한은 교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다. 하나 연애 경험이라곤 그렇게 다가온 여자들과 몇 번 사귀어 본 것이 다였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저 좋다는 이들과 굴곡 없는 연애를 몇 번 겪었다. 만나는 상대에겐 늘 최선을 다했으나, 그다지 큰 감흥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한정원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자, 일생일대의 큰 깨달음이었다.

한정원을 마주할 때마다 울렁대던 마음이 성애적 감정이었단 걸 인정하기까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뒤늦은 자각 후엔 이미 타이밍을 놓쳐 버린 뒤였다. 졸업 후 한정원은 아담하고 어여쁜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그의 첫 연애는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건너 듣기로 그녀는 천성이 착하고 여린 한정원에게 딱 알맞은 상대였다.

오래 사귀었으니 아마 결혼도 할 것이다.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사람이란 걸 떠올릴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해 볼 걸 그랬나. 그러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때면 고개를 저었다.

그와 멀어지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다. 차라리 평생 옆에서 지켜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길이었다.

“한아.”

어느새 다가온 한정원이 해사하게 웃었다. 이 짓도 근 십 년째건만, 아직도 숨이 가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번 싹을 튼 감정은 우직하게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쉬이 죽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우리 한이, 안 힘들어?”

금세 곁으로 다가온 한정원이 지한의 팔뚝을 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멀리 시선을 둔 지한은 대수롭잖게 턱을 끄덕였다.

“하는 일도 없는데, 뭐.”

“그래도 힘든 거 있으면 바로 말해 주기다! 형이 그래도 짬밥이 있잖아!”

그가 하나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지한은 픽 헛웃음을 흘렸다.

김신우가 맡은 의류 브랜드 ‘심폴리’의 화보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번 해 배우 출연료의 최고가를 갱신했다던 그는, 명성에 걸맞게 뚜렷한 존재감을 뽐냈다. 지한은 그의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네가 진짜 내 은인이라고 생각해. 아니지. 귀인이라고 해야 되나? 나 얼마 전에 사주 봤었는데, 청년기에 서쪽에서 귀인이 나타났다고 했거든. 혹시 예전에 네가 나 구해 줬을 때 걸어왔던 방향이 서쪽이 아니야? 어때? 기억나?”

눈을 동그랗게 뜬 한정원이 생뚱맞은 말을 종알거렸다.

“…갑자기 무슨 귀인.”

정면에 시선을 둔 지한이 조용히 답했다. 나이를 먹어도 엉뚱한 것은 변함이 없었다.

“왜, 나 괴롭히는 애들 엄청 많았는데, 너랑 친해지고 나서 아무도 안 건드렸잖아. 네 덕분에 학교도 무사히 졸업했지. 너 없었으면 나 자퇴하고 대학도 못 갔을걸? 그때 정말 그만둘까 생각 많이 했거든. 아마 지금까지 완전 백수처럼 살았을지도 몰라.”

동그란 얼굴을 찡그린 채 웅얼거린다. 힐긋 그를 내려다본 지한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본래 업무 중에는 경호 대상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되건만, 그와 함께 있을 땐 저도 모르게 시선이 툭툭 흐트러졌다. 확실히 업무 중엔 기피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몰라서 그래. 사실 나 네 이름 엄청나게 팔아먹었거든.”

그가 손바닥을 모아 지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학창 시절 유난히 그를 괴롭히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 말랑하고 고운 외모가 남들에게 어떠한 가학적인 욕구를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이따금 김신우가 그를 붙들어 놓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뭐, 추측만으로 진저리치게 싫으면서도.

“내 이름?”

슬쩍 내려다본 얼굴이 어이없을 정도로 귀엽다. 그 말간 웃음을 볼 때면, 마법의 양탄자라도 올라탄 듯 심장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나 주책맞은 속마음과는 다르게 지한의 낯빛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응, 애들 오는 거 보이면 바로 너한테 전화 걸어서 ‘지한아!’ 소리쳤거든. 그럼 막 우르르 사라졌어. 몰랐지?”

웃으며 하는 말에 지한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 한정원은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놓고 횡설수설하며 끊곤 했다. 그 때문에 수업 시간마다 꼬박꼬박 반납하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 두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었다.

“…말을 하지.”

그게 그런 이유였다고 생각하니 또 픽 웃음이 샜다. 거의 10년 전 일임에도 그는 변한 것이 없었다.

“너 신경 쓸 텐데 미안하잖아. 나 맨날 너한테 폐만 끼쳤는데. 아무튼, 그때 네 이름 잘 써먹었다. 대신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게! 나 이제 돈 많으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알겠지?”

그가 방실대며 웃었다. 맑은 눈동자가 반짝반짝하다. 하나도 어울리지 않건만 늘 형 흉내를 내려고 하는 게 하찮고 귀엽게만 느껴진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우리 매니저님 돈 많았구나.”

불현듯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한정원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따라 지한도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같이 좀 끼워 줘요. 나도 먹고 싶은 거 많은데.”

어느새 다가온 김신우가 서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온화한 얼굴로 웃었다. 깔끔히 손질해 올린 머리칼 밑으로 매끈하게 뻗은 이마가 보였다. 매번 봐도 적응되지 않을 만큼 우아한 외모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아, 네에. 네! 그럼요! 언제든지!”

당황한 얼굴의 한정원이 허둥지둥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한은 언짢은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며 입을 다물었다. 3년이나 일해놓고 어찌 저리 불편해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좋아요.”

김신우가 지한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지한의 시선이 그를 손을 타고 올라갔다. 명치까지 풀어 내린 와이셔츠 사이로 탄탄하고 굴곡진 가슴께가 얼핏 드러난다. 김신우는 180이 넘는 지한보다 키가 크고 흉통이 두꺼웠다. 가히 예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견고한 체격이었다.

“그럼 내일 저녁은 어때요, 지한 씨?”

색이 옅은 다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어느 방향으로 보나 흠잡을 곳 없는 이목구비는 마치 잘 그려 놓은 명화 속 인물 같았다. 가까이서 보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한에게는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아뇨.”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어깨 위에 얹힌 손목을 살짝 쥐고는 조심스레 떨어뜨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여전히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전 괜찮습니다. 혹시 경호가 필요하신 거라면 같이 가드리고요.”

눈을 내리깐 지한이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맸다. 망설임이라곤 없는 답에 김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힐긋 올려 본 시야엔 눈을 커다랗게 치뜬 한정원이 들어왔다. 하지만 정말로 그와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겉치레일 뿐인 가식은 이쪽에서 먼저 사절이다. 지한은 김신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또 오버타임이다. 김신우 주연의 일일 드라마 ‘파고’의 밤샘 촬영 때문에 어제도 새벽까지 근무를 섰던 차라 온몸이 찌뿌둥했다.

애당초 최고 주가를 달리는 인기 배우의 일정이 정해 놓은 스케줄대로 흘러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건너 밤을 새워야 하는 일정은 월초에 받았던 스케줄 표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야 워낙 체력이 좋고 오티 수당도 넉넉히 받으니 상관없었으나, 한정원은 사정이 달랐다. 지한은 부쩍 수척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앙다문 입술과 살짝 휘어진 눈가엔 다행히도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가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인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지한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파고’ 시나리오 중 절정을 맞는 전개 구간으로, 주인공 김신우가 빗속을 내달리다 오토바이에 치이는 장면이었다.

카메라 너머의 김신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인공 빗속에서 처절한 절규를 토해내는 그를 보며 지한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명실상부 최고 주가를 달리는 배우다웠다.

“거기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물이나 가져다주실래요, 매니저님.”

“아. 네, 잠시만요!”

물론 이건 카메라가 꺼지기 전까지의 생각이다. 아무래도 본래 그의 모습엔 영 정이 가질 않았다.

“배우님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이도 고생 많았어.”

운전대를 잡은 한정원이 즐거운 듯 흥얼거렸다. 다소 강도 높았던 촬영 덕에 김신우의 스케줄은 앞으로 이틀간 공백이었다. 그 말인즉슨, 오래간만에 지한에게도 휴무가 주어졌단 소리였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고 있어야 할 시간에 그는 여전히 밴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전부 김신우 때문이었다.

“매니저님이 사 주는 거니까, 메뉴는 제가 골라도 되죠?”

뒷좌석에서 김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음색마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문득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동기 이현우가 구시렁대던 말이 떠오른다.

김신우는 다 가졌다. 외모, 체격, 능력은 물론이고 목소리마저 좋다. 이쯤 되면 뭐 하나 빠지는 곳 찾기가 더 힘든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말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네, 네. 그럼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룸미러로 김신우를 쳐다본 한정원이 씩씩하게 물었다. 그러자 김신우가 소리 내어 하하, 하고 웃었다.

“매니저님 돈 많나 보다. 있으면 다 데려가 주시게요?”

나긋하게 묻는 말에 그다지 돈이 많을 것 같지 않은 한정원의 뺨이 붉어졌다. 역시나 신은 공평했다. 김신우에게 인성까지 주진 못한 것 같았다.

김신우는 흠, 콧숨을 내쉬었다.

“어디가 좋을까.”

목 안에서 울리듯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대본을 보는 중인지 사그락사그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일희일비로 가죠.”

“…….”

“조용하니 좋잖아요. 마침 비도 오겠다.”

그의 말에 한정원이 움찔했다. 따라 지한도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일희일비는 대부분 비즈니스용 식사 접대를 위해 이용하는 곳으로, 프라이빗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지한은 김신우의 광고 미팅 때 대기조로 한번 가 본 경험이 있었다. 어딜 가나 시선을 끄는 김신우가 사람들 눈을 피하기 딱 알맞은 곳이었지만, 일반인이 식사하기에는 가격이 지나치게 비싼 게 문제였다.

돈이야 벌써 죽을 때까지 펑펑 쓰고도 남을 텐데, 월급쟁이 매니저에게 그런 고가의 대접까지 받으려 하다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네! 그럼 제가 전화해서 예약을…. 잠시만요.”

“할 필요 없어요, 내가 출발 전에 전화해 놨으니까.”

그는 대본을 넘기며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일 좋은 자리로, 제일 비싼 코스로.”

담백한 어조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예약까지 해 놓고 어디 갈 건지는 왜 물어본 거지. 속으로 혀를 찬 지한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셋이서 못해도 수십은 훌쩍 넘을 텐데, 가난한 직장인에게 하는 짓을 보아하니 악질 중의 악질이다.

아무래도 잘못 따라왔지. 같이 식사를 하는 건 영 불편할 듯해 피하려 했건만, 한정원의 울상에 억지로 따라 나선 차였다. 역시 끝까지 오지 않는 것이 좋았을 뻔했다.

‘공지한 씨. 둘이 먹다가 한정원 씨가 나를 때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 다치면 계약 위반 아닌가?’

그는 팔짱을 낀 채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지한은 무의식적으로 한정원의 손바닥을 흘긋 바라보았다. 저 조막만 한 솜방망이 주먹으로 맞아 봐야 아프지도 않을 텐데, 그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근무 중 타당한 과실엔 위약금도 있을 텐데요. 아. 설마 계약서 안 읽고 도장 찍은 건 아니죠?’

턱을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눈썹을 까닥였다. 물론 다 읽었다. 하나 위반 내용은 정해진 근무 시간에 무단으로 이탈하거나, 상호 협의 없이 대상에게서 멀어져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경우가 다였다. 그러므로 이번 일은 전자에도, 후자에도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지한은 쓸데없이 불화를 만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고용주에게 힘 빼 가며 굳이 자존심을 세우는 타입도 아니다. 하여 그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귀찮아서 그렇지 식사 한 번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오늘 밤도 사랑합니다, 사랑하세요! 안녕하세요, 사사 가족 여러분, 디제이 이하윤입니다. 또 비가 오기 시작하네요. 퇴근길 운전 중이신 분들 많으실 텐데, 미끄러지지 않게! 빗길 조심, 또 조심하셔야겠어요….’

정적 사이로 나긋한 라디오 디제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 시트에 등을 기댄 지한이 한정원을 슬쩍 바라보았다. 시야가 어두운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앞을 훑고 있었다. 상체를 바짝 세운 채 양손으로 커다란 운전대를 꽉 쥐고 있는 모습이 꼭 아빠 차를 모는 어린 아들 같다.

지한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기야 김신우를 대할 때 태도를 보면 근무 3년 차가 아니라 사흘 차라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하다. 뭘 해도 엉성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이렇게 부슬비 내리는 날 제가 자주 듣는 곡이 있는데요. 조금 올드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아하하. 너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곡이라, 여러분들과도 꼭 함께 듣고 싶어요. 네에, 카릴 덴버의 Let me down, baby. 듣고 올게요!’

“어! 나 이 곡 진짜 좋아하는데!”

샐쭉 웃어 보인 한정원이 손을 뻗어 라디오 볼륨을 조금 높였다. 익숙한 멜로디긴 했지만 80년대에나 나왔을 법한 블루스, 포크 느낌의 올드한 팝송이었다. 기타 소리와 함께 함께 푸근한 선율이 밴 안에 울려 퍼졌다.

“으음. 흠.”

그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지한은 문득 그를 바라보았다. 과장을 좀 보태서 하는 짓을 보면 동요나 만화 오에스티를 좋아할 것 같은데 취향 참 아이러니했다. 말갛게 웃음기 어린 눈매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불현듯 옆 시야로 김신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짙은 시선에 지한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과 한정원의 콧노래가 섞여 퍼진다. 습해진 공기에 공연히 목이 칼칼했다.

***

“감사합니다.”

한정원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술을 받아 들었다. 그는 도수가 얼마인지도 모를 술을 주는 대로 꼬박꼬박 받아 마시고 있었다. 주량이 쥐꼬리만 한 그가 금세 픽 고꾸라질 것이 눈에 훤했다.

동그란 호리병에 손을 뻗는 한정원에게 됐다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인 김신우가 홀로 제 잔을 채웠다.

“공지한 씨는 술 못해요?”

눈을 내리깔곤 나긋하게 물어온다. 지한은 먹던 걸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 그다지 술을 즐기지도 않을뿐더러, 그와 맘 편히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할 사이도 아니었다.

“아뇨, 근무 중이니까.”

단호한 답에 술잔을 든 김신우가 낮게 웃었다.

“공지한 씨, 이제 보니 정말 칼 같은 사람이네.”

“…….”

“밥 한 끼 먹기도 어렵고, 술도 어렵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술을 넘겼다. 지한은 뒤늦게 잔 부딪치는 시늉을 하던 한정원을 흘긋 바라보곤 무심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한정원 씨가 취중에 주먹질할지도 모르니, 제가 맨정신에 잘 지켜봐야죠.”

푸웁. 술을 조금씩 들이켜던 한정원이 기침을 했다. 눈을 살짝 치켜뜬 지한이 티슈를 뽑아 그에게 건넸다. 비어 있는 물잔도 채워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는 늘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었다.

“콜록, 콜록. 죄송, 콜록.”

그는 눈꼬리에 눈물까지 찔끔 매달고는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지한은 말없이 그의 등을 살살 쓸어 주었다.

괜한 말을 했나? 벌게진 얼굴을 보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눈치를 살핀 한정원이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두 분이 많이 친하신가 봐요.”

김신우가 한정원의 빈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희고 기다란 손가락 탓일까. 단순한 손길이 퍽 우아하게 보였다.

“아, 예! 친합니다, 많이!”

“매니저님이 공지한 씨를 그렇게 추천했다던데.”

한정원이 후다닥 술잔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걸 또 주는 대로 쭉 들이켰다.

“아아, 네 맞아요. 이 일에 지한이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 같아서요…. 다행히 대표님이 조건도 크게 제안해주셨고, 지한이가 워낙 착하고 성실한 데다…. 절 엄청나게 도와주기도 해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실력은 믿으셔도 됩니다! 얘 꾀어내느라 엄청 힘들었거든요.”

한정원이 지한을 보며 샐쭉 웃었다. 바르게 젓가락질을 하던 김신우가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뭘 도와줬어요?”

그의 말에 초밥을 우물대던 한정원이 꿀꺽 삼켰다. 상대는 편안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으나, 지한은 피치 않게 과거사를 드러내는 것 같아 영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 첫 만남이 소매치기한테서 저 구해 주면서 만났어요. 제가 좀 왜소하고 그래서 괴롭힘도 많이 당했는데…. 학교 다닐 때 그런 놈들 다 쫓아내 줬고요, 한이가 어릴 때부터 체격이 좋아서 싸움을 진짜 잘했거든요, 아. 그런데 공부도 잘했어요!”

그는 벌써 발그레해진 뺨을 문질렀다. 이미 취기가 오르고 있는 듯했다.

“어릴 때부터.”

고개를 살짝 끄덕인 김신우가 슬며시 웃었다.

“네, 한이는 학생 때도 난동 피우는 아저씨들 혼내주고, 성추행범도 여럿 잡아서 경찰 아저씨들이 엄청 좋아했….”

“형.”

짧게 부르며 그의 말을 끊었다. 이 자리에서 과거를 줄줄이 늘어놓는 게 불편해진 탓이었다.

“응?”

배시시 웃는 한정원의 눈이 조금 풀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거푸 몇 잔 받아먹더니만 곧 맛이 가기 직전인 듯했다. 짧게 혀를 찬 지한이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술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돌연 앞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니저님은 만나는 사람 있어요?”

문득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로 팔을 괸 김신우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저요! 네 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한 살 많고요, 음. 디자인 쪽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만난 지 6년, 아니 이제 7년 됐어요.”

허리를 꼿꼿이 세운 한정원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지한은 묵묵히 물을 들이켰다. 일한 지 3년이나 됐는데 그걸 이제야 묻나. 보다시피 남에게 통 관심이 없는 사람인 듯했다.

“오래 만났네요. 좋겠다.”

김신우의 눈가가 예쁘게 휘었다. 언뜻 그의 시선이 지한을 지나쳐갔다. 눈을 내리깐 지한은 묵묵히 초밥을 씹었다. 입 안에 굴러다니는 밥알이 버석버석했다.

“네, 예쁘고. 정말 착해요. 제 생각도 많이 해 주고…. 자리를 잡으면…. 꼭 결혼도, 하고 싶습니다!”

수줍은 듯 웅얼거리던 한정원이 씩씩하게 외쳤다. 불현듯 심장이 내려앉았다. 목이 콱콱 막히는 듯해 연신 물을 들이켰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찼고, 연애 기간도 오래되었으니 곧 하진 않을까 이따금 생각하긴 했으나, 그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매니저님 로맨티시스트였네요. 여자 친구분 복 받았어요.”

“아닙니다…. 저한테는, 과분해요…. 과분한 사람입니다.”

한정원이 물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김신우의 시선이 잠시 지한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한정원에게로 돌아갔다.

“결혼 일찍 해요. 제가 대표님한테 축의금 빵빵하게 뺏어 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인 김신우가 상냥하게 말했다. 지한은 강한 흡연 욕구를 느꼈다. 창가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곤 머리를 쓸어 올렸다. 술도 마시지 않은 몸에서 열이 오르는 듯했다.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다. 역시 이 자리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헤헤,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 한이도 그렇고, 정말 저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진짜로오….”

한정원의 말꼬리가 차츰 늘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예상했던 대로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금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하나 저런 상태로 해롱대는 한정원과 속내를 알 수 없는 김신우를 두고 나가기엔 영 걱정스러웠다.

지한은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음식도 거의 다 먹었고, 슬슬 자리를 파해도 될 만한 타이밍이었다.

생각하는 찰나, 무언가 어깨에 톡 와 닿았다. 고개를 돌리자 가슴께로 기다랗게 내려앉은 한정원의 속눈썹이 보였다. 그는 금세 눈을 감은 채 색색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런. 술이 약한가 보네요.”

김신우가 술을 들이켜며 웃었다. 한정원의 어깨를 감싼 지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주량도 약하면서 이기지도 못할 술을 홀짝홀짝 받아 마시는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이제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공지한 씨는 애인 있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지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에 팔을 괸 김신우가 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지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아, 없구나.”

기분 탓일까, 감탄처럼 내뱉는 어투가 왜인지 즐거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서는 평소와 달리 묘하게 날이 선 말투를 듣지 못했다. 지긋이 보내오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지한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혹시 짝사랑 중?”

다시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썹을 치켜뜬 김신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웃음을 머금었다. 지한을 응시하던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작거린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음. 내가 맞춰 볼까요.”

“…….”

“내가 또 이런 거 전문이거든.”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짙은 갈색 눈동자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테이블에 팔을 괸 김신우가 양손을 모아 쥐었다. 코끝을 주먹 위로 살짝 기대며 느른하게 웃는다.

고요한 사위에는 한정원의 규칙적인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창문 틈으로 타닥거리는 빗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한정원이죠?”

중저음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지한은 답 없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제법 당황스러웠으나 표정 관리는 완벽했다. 하나 저도 모르게 움칠해 버린 어깨가 문제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눈동자에선 감정이 드러난다. 지한은 느리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행동에 김신우가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지한에게 기대 잠든 한정원을 훑더니 다시 그를 응시한다.

“지한 씨.”

담백한 부름에 지한이 딱딱해진 얼굴을 들었다. 김신우는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곤,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티 나요.”

“…….”

“엄청.”

옅은 밤색 눈동자가 반짝인다. 여유로운 낯빛 위로 가지런한 입술이 호를 그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지. 알 수 없는 불쾌함과 함께 안면 근육이 딱딱해졌다. 느리게 눈꺼풀을 닫았다가 열고는 고개를 틀어 창가를 응시했다. 담배가 절실하다. 혼잡한 생각을 억누르며 지한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바라본다. 저도 모르게 노려본 것 같기도 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김신우 씨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건조하게 답하자 김신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매니저님이랑, 경호원 씨 일이면 내 일이나 마찬가지죠.”

“…….”

“안 그래요?”

그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입매는 올라가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다. 이질적인 표정에 지한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매고 있는 넥타이가 불편하게 목을 조여 온다. 집게손가락을 걸고는 조금 느슨하게 끌어 내렸다.

“저한테 이런 얘길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일순 한정원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손바닥으로 받친 지한이 다시 올려놓았다. 자그마한 머리통에 손을 고정한 채 그는 말없이 김신우를 응시했다.

“이유요? 음……. 이유. 이유라.”

두 손가락으로 턱을 짚은 그가 미간을 모으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지한을 바라본다. 이내 눈가가 살며시 휘어졌다.

“좆같아서?”

온화한 미소완 달리 짓씹듯 뱉는 말에 지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 귀를 의심할 뻔했지만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알코올 한 방울 없이도 속이 울렁거렸다.

섣불리 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잠식한다. 진득하게 내려앉는 적막 속에서 지한은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한정원을… 좋아하는 일이.”

‘좋아하는’에서는 절로 목소리가 줄었다. 혹여 깰까 봐 아래를 흘긋 내려다본다. 곤히 잠든 얼굴에 저도 모르게 조금 목이 메였다.

“왜 김신우 씨에게, 좆같은 겁니까?”

그저 김신우의 말일 뿐인데 왜인지 가슴이 쿡 쑤셨다. 고작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던 감정이 초라하게 툭 나동그라진다. 심장이 꽉꽉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싫어서요, 한정원 씨가.”

김신우는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지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혹시나 하던 의심들이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한정원을 싫어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싫은 사람을 왜, 3년씩이나 붙들고 있는 걸까. 정말 옆에 두고 괴롭히고 싶어서?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려고?

“그래서 그런가. 한정원 좋다는 티를 질질 흘리는 당신도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볼 때마다 짜증이 나는 걸 보니.”

그가 피식 웃으며 지한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힌다. 혹여 한정원이 듣기라도 할까 자꾸 아래로 눈길이 갔다.

김신우가 한정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충 추측은 했으나, 이렇게까지 까뒤집고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

“얼마나 좋아해야 그런 안달 난 눈빛으로 보는 거지.”

탐구하듯 묻는 말에 지한은 턱을 꽉 물었다.

티가 났나. 둔한 한정원 탓에 제 경계가 허술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그가 지나치게 눈치가 빠른지도 몰랐다. 이제 와 후회해봐야 그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아니라고 둘러대고 넘기거나, 끝까지 모른 척 잡아뗄 수는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닿지도 못할 마음마저 부정하긴 싫었다.

지한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형한텐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들키긴 싫었다. 한정원은 저를 의지하고 있었고, 결혼까지 마음먹은 사람에게 불필요한 혼란을 줄 이유는 없었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가 얼마나 신경 쓰고 불편해할지 눈에 훤했다. 고작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사람 때문에 모든 걸 망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은 다 알아도.

한정원은 안 돼.

“싫은데.”

김신우가 단조롭게 답했다. 흥미로운 시선이 지한을 훑는다.

“지금 이러시는 거 이해 안 됩니다.”

지한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슬금슬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김신우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최악의 사람인 듯했다. 지한은 전보다 빨라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술에 취하신 거라면,”

“나 술 잘해요.”

김신우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지한은 이를 꽉 물었다. 지금 자신은 농락당하고 있었다. 하나 쓰린 속과는 달리 상황이 조금은 절박해지고 있었다.

“그럼 왜….”

“말했잖아요. 한정원이 싫다고.”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나긋하게 답했다. 불시에 닥쳐온 혼란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온몸의 피가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 일이 좋다며 방글대던 한정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일에 대한 애착이 컸고,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불필요한 일을 시켜대며 묘하게 빈정대는 김신우 밑에서도 불평 한번 없이 수발을 들지만, 제게도 불만한 번 내비친 적 없는 사람이었다. 실수가 조금 잦더라도 이렇게까지 미움받을 사람은 아니었다.

“왜…. 착한 사람이잖아요.”

지한이 눈가를 찌푸리자, 그가 짧게 웃었다. 혼자서 잔을 채우곤 지그시 입술에 대어놓은 술잔을 찬찬히 들이켰다. 시선은 여전히 지한에게로 향한 채였다.

“아직 공지한 씨가 세상 물정을 모르나 보네.”

탁, 그가 내려놓은 잔 밑바닥이 테이블에 닿았다. 김신우의 눈가가 작게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착한 척하는 놈보다, 그냥 착한 놈이 더 병신 같은 거예요.”

“…….“

“그딴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든.”

***

한정원의 집은 늘 그렇듯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꼭 저 같은 향기였다.

그는 이따금 술을 마시다 뻗기 직전 지한에게 연락을 해 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지한은 그를 익숙하게 둘러업곤 집에 데려다주었다. 무방비한 그를 침대에 뉜 후 발길을 돌릴 때면, 그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걸 되짚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으음….”

아래로 흐트러진 머리칼이 간지러운지 눈을 찡긋거린다. 지한은 조심스레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달빛에 어린 하얀 얼굴은 잠든 아기 같았다.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곤 몸을 일으켰다. 밴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김신우 탓에 느긋하게 굴 시간이 없었다.

“잘 자, 형.”

새근대는 숨소리를 뒤로하고 그의 집을 나섰다. 무거운 걸음을 내딛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지한 씨는 내 경호원이 아니라 한정원 씨 경호원 같네요.’

한정원을 안아 들고 내리는 지한을 보며 김신우가 빈정거렸다. 그는 이제 지한에게도 대놓고 싫은 티를 내고 있었다.

급격히 찾아온 피로감에 눈가를 꾹꾹 누른다. 여기서 김신우의 집까지 멀지 않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심호흡을 내쉰 지한이 차 문을 덜컥 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어느새 완전히 멎어 있었다. 어색한 적막에 라디오라도 틀까 생각해 봤지만, 둘만 있는 공간에서 굳이 분위기를 내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다. 김신우는 지금 자신에게 최악의 사람이었다.

“생각 좀 해 봤어요?”

스치듯 훑어본 룸미러 속에서 그가 지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희일비를 나오기 전, 그가 건넸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입 다물면, 공지한 씨는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는데요? 난 밑지는 장사 싫어해서.’

어처구니없는 억지였다. 제 짝사랑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밑지는 건 없었다. 그러나 말문이 막힌 지한을 두고 그는 룸을 나가 버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지한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여지없이 약점을 잡혀 버렸다. 그가 했던 말을 조금만 더듬어봐도 원하는 일이 뻔하게 보였다. 일차적으로 눈엣가시인 제게 일을 그만두라고 할 심산이 컸다. 입사한 지 겨우 한 달 차인데 그것만큼은 아니길 바랐다.

박 대표는 정규직 지원을 원했으나 지한의 의사에 따라 계약 기간은 3년이었다. 특별히 후한 조건을 거는 대신에 계약 기간 만료 전 퇴사 요청을 할 경우, 무리한 위약금을 무는 특약을 걸었다. 지한을 놓치기 싫은 박 대표의 잔머리였다.

지한이 원한다면 재계약이나 매년 갱신도 가능하다고 했으나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우선 몇 년간 바짝 돈을 모은 후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은 게 목표였다. 적성에 맞게 아이들을 가르칠 작은 체육관 같은 걸 열어도 좋을 듯했다.

돈을 모으는 기간은 3년이면 충분하고도 넘칠 것이다. 혹시 모를 상황까지 고려하여 세운 계획이었다.

그러니 약점을 빌미 삼아 먼저 그만두라고 한다면, 그땐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된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이미 다 가지고 계실 텐데, 뭘 해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원하는 건 다 가진 사람이었다. 돈이라면 차고 넘치게 있을 테니 갖고 싶은 것도, 더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불현듯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협박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뿐더러, 제게 어떠한 요구사항을 내밀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한정원이 싫고, 그를 좋아하는 자신이 역겨울 순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도를 넘는 적대감 표출에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음. 그거 유감이네요.”

그는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한정원과의 관계와 일,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한정원이었다.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퇴사를 원한다면 그만두는 것이 나았다. 그만큼 지한에게 한정원은 큰 존재였다.

“혹시 저에게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지한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딜 가나 불합리한 상황은 존재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곳에 왔다고 생각했건만, 생각지 못한 곳에서 거대한 걸림돌을 만난 꼴이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퇴사한다 해도 이직은 가능했지만, 위약금이 걱정이었다. 그걸 지불하게 된다면 모아 놓은 돈과 앞으로의 일정이 전부 틀어지게 된다. 최대한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원하신다면 오티 청구 없이 24시간 상시 경호해 드릴 수 있습니다. 두세 시간 정도 잘 틈만 주신다면요. 체력 됩니다. 휴무 신청도 하지 않겠습니다.”

지한은 낮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무작정 뱉어 놓고 보니 멍청한 소리다. 싫다는 사람한테 더 오래 곁에 있어 준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눈에 보이는 게 싫으시다면 무전, 리시버로 원거리 경호 가능합니다. 장비 제가 다 준비하겠습니다. 멀리서라도 얼굴 보기 싫으시다면 마스크, 선글라스 착용하겠습니다. 달리기 빠릅니다. 백미터 11.6초 가능합니다.”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할 수 없이 제가 가진 패는 이것뿐이었다. 김신우는 모든 방면에서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긴장했는지 핸들을 쥔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뒤에서 낮은 실소를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바라본 룸미러 속에 김신우가 눈을 접으며 소리 내어 하하, 웃고 있었다. 지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죽 이어지던 그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다른 건 됐고.”

“…….”

깊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 다정한 목소리도, 고운 얼굴도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가면을 뒤집어쓴, 속이 시커먼 악마가 더 잘 어울렸다.

“좀 빨아 줄래요?”

룸미러 속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거칠 것 없는 직설적인 시선과 곧은 눈빛은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에 지한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뭘….”

평소보다 더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값비싼 가정부를 고용한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빨아 달라는’ 말이 소위 세탁물 따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못 들었어요?”

턱을 비스듬히 든 김신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입매를 단단히 굳힌 지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좆 빨아 달라고.”

짓씹듯 내뱉는 음란한 어투는 다소 위압적이었다. 하나 곱상한 외모는 잠시 재킷이라도 받아달라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핸들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싫어요?”

재차 묻는 말에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뜬 지한은 그가 그저 술에 취해 있기를 바라며 잠긴 목소리를 끌어 올렸다.

“…장난치시는 거라면, 재미없습니다.”

바싹 긴장하는 바람에 초라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그 답에 김신우가 소리 내어 짧게 웃었다. 부드럽고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지고,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장난 같아?”

금세 웃음기를 싹 지운 얼굴이었다. 서늘한 눈빛에 목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꾸만 거울 속에서 그와 시선이 얽혔다.

혀가 굳어 버린 듯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짧은 순간 여러 가지 감정과 추측들이 머릿속으로 난잡하게 섞여들었다. 지한은 입술을 꽉 닫았다가 느릿하게 열었다.

“저한테, 왜….”

액셀을 밟는 오른발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밴은 그의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차 세우기 전까지 생각할 시간 줄게요.”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시트에 기댄 김신우는 표정 없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뜻하지 않게 밴은 벌써 그의 전용 주차선 앞에 이르렀다. 뻣뻣해진 등 뒤로 식은땀이 죽 흘렀다.

그가 바란다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저보다 잘난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 게다가 여자도 아닌 남자인 저에게, 체구까지 커 성적인 매력이라곤 없는 자신에게 그런 괴상한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성적 쾌감을 얻기 위하여 그가 이런 제안을 했을 거란 생각은 가당치도 않았다. 동성을 좋아한다고 하니 부러 수치스러운 요구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욕을 주기 위함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기어를 R로 바꿨다. 손이 조금 떨리는 듯해 잠시 그대로 브레이크를 밟고 서 있었다. 차라리 몇 대 맞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걸 바라는 거라면 원하는 만큼 종일 밟혀 줄 수도 있었다.

“음. 한정원 반응을 보는 쪽도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웃음기 어린 어조에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놨음에도 목구멍이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주차선에 맞추어 핸들을 왼쪽으로 세 번 돌렸다. 여전히 페달에선 발을 떼지 않은 채였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사이, 머릿속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와 함께 한정원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겁먹은 표정, 곤란한 얼굴, 조금 더 가서 눈물 맺힌 동그란 눈까지. 현실이 아님에도 가슴 한쪽이 지끈거렸다. 찰나의 허상에 숨까지 턱 막혀 왔다.

‘한이는 내 은인이야.’

10년 가까이 한결같이 곁을 지켜 온 사람이었다. 제가 다른 마음을 품고 옆에서 버텨왔다는 사실에 실망할지도, 최악의 상황에는 다시는 보기 싫어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어느 방향이든 그가 제게 좋지 않은 편견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축 늘어진 심장이 물먹은 솜처럼 먹먹했다. 그에게 일말의 생채기라도 주기 싫었다. 보잘것없는 마음이다. 저 때문에 그가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이었다.

찬찬히 눈살을 찌푸렸다가 피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지한은 겨우 입술을 열었다.

“…그냥.”

“…….”

“빨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목구멍에 흙모래가 낀 듯 따끔거렸다. 빌어먹을. 처음부터 업무를 핑계로 옆에 붙어 있겠다는 욕심 따위 갖지 말았어야 했다. 주제넘은 욕심은 화를 불러온다. 이제 와선 한정원 때문에 일을 택한 것이 아니라는 부정과 합리화가 거짓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하하, 그럼 뭐 대 주기라도 하려고?”

“…….”

“공지한 씨 생각보다 대담한 사람이었네요.”

부드러운 음색 사이로 빵,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힐긋 바라본 사이드미러에 뒤따라 들어오는 차가 보였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안쪽으로 찬찬히 차를 주차하고는 기어를 파킹으로 바꿨다.

달칵. 안전벨트 버클을 푸는 불길한 소음이 짧게 울렸다. 김신우는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손잡이를 잡았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그의 미지근한 시선이 지한을 훑듯이 바라보았다.

지한은 그제야 고요히 눈을 내리깔고는, 차 시동을 껐다.

***

김신우의 집은 말 그대로 으리으리했다. 거실만으로도 삼사십 평은 훌쩍 되어 보이니 여러 개의 방까지 합하면 백 평은 족히 될 듯했다.

훤하게 트인 통유리 너머로 도심의 야경이 별빛처럼 흩날렸다. 몇십억을 훌쩍 호가하는 값어치를 할 만큼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상황만 아니었다면 부의 상징인 이곳에서 서울 시내의 흐드러진 야경을 감탄하며 보고 있었을 것이다.

김신우는 씻고 올 테니 편하게 있으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편하게. 편하게라니. 애초에 이 상황에서 편하게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우두커니 서 있던 지한이 소파에 걸터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꾹 짓눌렀다. 굴곡 없이 무던하게 지내 오던 일상이 별안간 하강 곡선을 그리며 곤두박질친다. 겪어온 일 중 가장 최악이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난데없이 김신우의 집에 앉아 있다. 연말 방송 삼사 시상식에서 온갖 상을 휩쓸어 모으는 그 톱스타 김신우의 집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거실에 세워 두곤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성적인 행위를 요구할 것이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간에.

“…….”

곱씹을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현실이었다. 지한은 망연히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평소 동성과의 관계에도 관심이 있었던 걸까. 연예계에도 드물지 않게 그런 이들이 있다고 하니 이쪽의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하나 그간 여자 연예인들과도 스캔들이 자주 터졌었고, 실제로 모델 이소윤과의 열애설도 인정한 바가 있었으니 최소한 게이는 아닐 테다.

그럼 바이? 아니지, 변태적인 성향에 남 괴롭히기 좋아하는 사람이니, 그저 모욕을 주고픈 심산일 수도 있었다.

씻고 나와선 눈웃음을 지으며 ‘설마 진짜 빨려고 했어요?’ 따위의 말로 모욕을 줄지도 몰랐다. 그는 지독하게 싫어하는 한정원을 굳이 옆에 두고 있는 사람이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 하나로 얹힌 듯 갑갑했던 속이 조금은 나아졌다. 하나 여전히 긴장한 근육들은 바싹 경직되었다. 괜히 혼자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걸까. 한낱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자꾸만 속이 탔다.

“안 도망갔네.”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지한이 더디게 눈을 들었다. 그는 새하얀 목욕 가운을 입은 채 물기 어린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어내고 있었다.

호기로운 시선이 지한을 주시한다. 살풋 끌어 올라간 입매와 함께 그린 듯한 미소가 영화 속 장면 같았다. 저도 모르게 멀거니 바라볼 뻔했으나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마실 것 좀 줘요?”

그가 찬찬히 걸음을 옮기며 지한을 흘긋 바라보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지한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목이 마른 차였다.

“그럼 물 좀….”

꼬리를 흐리는 답에 피식 웃은 김신우가 널찍한 아일랜드형 테이블로 향했다. 머그잔에 물을 졸졸 따르는 모습조차 어이없으리만큼 우아했다. 보고 있을수록 긍정적인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 하나는 인정해야 했다.

“마셔요.”

그가 테이블에 머그잔을 놓았다. 지한은 눈을 내리깔고는 컵을 들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속은 시커멓게 물이 든 사람인 걸 알면서도 그를 좋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최선이다.

“감사합니다.”

차가운 냉수가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지한은 컵에 든 물을 두어 모금 만에 다 비우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한 컵 다 비우고 나니 그나마 정신이 좀 맑아졌다.

“공지한 씨.”

반대편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김신우가 지한을 응시했다.

“…예.”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지한이 그를 쳐다보았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가죽 소파 위에 늘어지게 앉은 김신우가 손바닥을 위로한 채 두어 번 까닥였다. 제 앞으로 오라는 손짓이었다.

찬찬히 자리에서 일어난 지한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린 채 두 손을 등 뒤로 마주 잡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워낙 표정 변화가 잘 없는 탓에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으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그러고 서 있으니까 내가 혼내는 것 같잖아요.”

짧게 웃은 김신우가 고요히 지한을 응시했다. 밀도 높은 공기에 지한은 또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에 더욱 긴장되었다.

“꿇어요.”

나직하지만 강압적인 어투에 지한이 숨을 들이켰다.

하룻밤 새에 완전히 을의 처지가 되었다. 우스운 일이다. 불합리가 싫어 찾아온 곳에서, 살아온 인생 중 가장 불합리한 일을 당하고 있었다. 하나 한정원을 인질로 삼은 이상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은 그가 하라는 대로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입술을 꾹 다문 지한이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여전히 턱을 숙이고 시선은 아래로 향한 채 허벅지 위에 팔을 세워 놓았다. 눈을 내리깔자 극세사 가운 아래로 그의 하얗고 매끈한 종아리가 보였다. 기다란 발가락과 단정하게 깎은 발톱까지 평소 보이지 않는 부분도 모난 곳이 없었다.

“거기서 내 좆 빨 수 있겠어요?”

“…….”

“더 가까이 와.”

끝이 뚝 잘려 나간 듯 강압적인 어조였다. 지한은 발바닥 위로 붙여 놓았던 엉덩이를 들고, 무릎걸음으로 그의 앞에 바짝 다가갔다.

시선을 들자, 그가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무감한 눈빛으로 지한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만으로도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온몸이 무겁게 늘어졌다.

“음. 영 밋밋해서 할 맛이 안 나네.”

“…….”

잠연히 그를 내려다보던 김신우가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벗어요.”

그리고 툭 던지듯 뱉었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는 충동과 한정원의 얼굴이 동시에 머릿속을 흔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지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결과가 어떻든 차선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는 묵묵히 새카만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죽 끌어 내리곤 성의 없이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목 끝까지 잠가 두었던 와이셔츠 단추를 툭, 툭. 풀어 내리며 시선을 들어 김신우와 눈을 마주했다.

속이 뭉개진 밀가루 반죽처럼 울렁거렸다. 불손한 감정이 온몸을 뜨끈하게 잠식하기 시작했다.

화가 났다. 김신우가 아닌, 저 자신을 향한 화살이었다.

한정원을 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같은 직장에 이직한 것, 그것도 모자라 남 눈에 띌 만큼 멍청하게 감정을 드러낸 것, 그런 이에게 쥐꼬리만 한 반항조차 못 할 만큼, 그저 저를 보는 시선이 변할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할 만큼, 한정원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불필요한 감정에 잠식되고 만 심장이 불현듯 따끔거렸다.

흥미롭게 지한을 내려다보던 김신우의 눈동자가 점점 짙은 욕망을 담아 갔다. 지한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망설임 없이 마지막 단추까지 끌어 내렸다.

남고, 체대, 군대, 경호 회사까지 수컷들만 가득한 곳에서 살아왔다. 동성 앞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는 일은 부지기수였으니 아직 수치스럽진 않았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망설임 없이 벌어진 와이셔츠 양쪽을 잡고 스르륵 내린다. 사이로 단단한 살결이 드러났다. 찬찬히 내려간 김신우의 시선이 지한의 복부에 닿았다.

“아래도 벗습니까?”

벨트 버클에 손을 얹은 채 묻는 지한의 무심한 어조에, 김신우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글쎄요. 그거까지 보면 섰던 것도 죽을 것 같은데.”

단조로운 말투에 지한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그런 심리를 가지고 제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김신우가 가운을 동여맨 매듭을 풀며,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남자 좆 빨아 본 적 있어요?”

벌어진 가운 틈으로 그의 가슴께가 보인다. 빈틈없이 살을 가르는 복근과 제법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견고한 가슴이었다. 일정이 꽉 찬 날에도 늘 회사 헬스장에서 시간을 보낸다더니 허투루 가는 것은 아닌 듯했다.

“없습니다.”

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김신우는 늘어지게 기대앉은 자세로 고개를 까닥였다. 이어 수치라고는 모르는 사람인 양 거만하게 다리를 벌렸다.

“…….”

눈앞에 적나라한 광경이 펼쳐졌다. 지한은 그의 불룩한 허벅지 근육과 잔털 하나 없이 매끈한 성기를 바라보았다. 아직 발기 전임에도 존재감이 선연한 그것은 못해도 한정원 손목만큼 부풀어 오를 것이 분명했다. 문득 저걸 입에 넣을 생각을 하니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뭐 해요. 자지 구경하러 왔어?”

답할 새도 없이 손을 뻗은 김신우가 지한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지한은 엉거주춤 소파에 바짝 붙어 앉은 채 손바닥으로 그의 무릎을 짚었다. 졸지에 다리 사이에 갇힌 꼴로 눈가를 찡그린다.

“입 벌리고 빨아요.”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지한의 뒤통수를 짓눌렀다. 엉겁결에 가랑이 사이로 얼굴이 처박히고, 입술 위로 그의 말캉한 성기가 문질렸다.

“……!”

지한은 반사적으로 그의 무릎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김신우는 악력으로 지한의 후두부를 내리누르며 낮게 속삭였다.

“입 벌려.”

눈을 질끈 감은 지한이 찬찬히 입술을 벌렸다. 생각 외로 부드러운 살덩이가 입 안으로 퉁 밀려들어 왔다. 살갗에선 바디 워시 향이 났다. 막 씻고 온 데다 체모가 없어 그런지 예상했던 것만큼 역하진 않았으나,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머리를 누르는 그의 힘이 차츰 강해지기 시작했다.

“혀 굴려요, 사탕 빨듯이.”

강압적인 손짓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고 버티니, 지한의 등 뒤로 날개뼈가 툭 불거졌다. 한껏 인상을 찡그리고는 어느새 입 안을 가득 점유한 말캉한 살덩이를 쭉 빨아올렸다. 금세 경도가 단단해지며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 위로 그가 낮게 내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입 안에서 발기하며 차츰 제 크기를 찾아가는 좆으로 목구멍이 틀어막혔다. 숨이 막혔다. 본능적으로 목을 뒤로 물리자, 그가 또 악력으로 뒤통수를 짓눌렀다. 자비 없는 손길에 두툼한 귀두가 목젖을 콱 쑤셨다.

“컥….”

헛구역질이 났다. 벌게져 시큰거리는 눈가에 자연스레 눈물이 맺혔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요. 공지한 씨.”

“으욱…!”

김신우가 짙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한의 양쪽 귀와 뺨을 그러쥐곤 제멋대로 들었다 올리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 강압적인 행위에 코끝이 뭉개지고 뺨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이렇게 대충 때우려고 하면, 씨발 내가 또,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르잖아. 안 그래요?”

얼굴에 열이 몰렸다. 끝도 모르고 크기를 키워 가는 좆이 입 안을 틀어막았다.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든 지한이 괴로운 숨을 내뱉었다. 버거운 호흡에 컥컥대며 잔기침을 억지로 삼킨다. 그는 대충하려는 게 아니라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코로 숨 쉬어. 이 세우지 말고.”

혼미한 정신을 붙들며, 그의 말대로 코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의지대로 다물리지 못하는 입술 사이로 타액이 뚝 뚝 떨어졌다. 제자리를 잃은 혀가 이리저리 방황하다 좆의 표면을 스치자, 입 안에서 커다란 살덩이가 꺼덕거렸다. 불현듯 제가 하는 행위 자체에 소름이 끼쳐 왔다.

“하아.”

짧은 숨을 뱉어낸 김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한은 입 안 가득 그의 좆을 문 채, 벌겋게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김신우는 평온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돌연 지한의 머리채를 강하게 쥐어 잡았다.

“읏.”

강한 악력에 지한이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모자란 호흡 사이로 단발의 신음이 샜다. 세워 앉은 무릎이 찌릿찌릿하게 쑤셔온다. 저도 모르게 온몸이 잘게 떨려 왔다.

“억울해요?”

부드럽게 물어온 그가 느릿느릿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굵고 두꺼운 기둥이 더디게 빠져나가더니 다시 푹 쑤시고 들어왔다. 안이 헐어 버릴 듯 따끔거렸다. 별것 아닐 거라 생각했던 것이 큰 오산이었다.

“그러게, 왜, 내 앞에서 쓸모없는 감정놀음을 하고 그래.”

“컥, 으욱….”

“꼴 보기 싫게.”

그가 짓씹듯 중얼거렸다.

입가가 찢어진 듯 쓰라렸다. 하나 머리채를 단단히 붙든 악력에 어느 방향으로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강압적으로 지한을 통제하고 있었다.

“목구멍 열어.”

김신우의 손짓대로 지한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턱, 턱. 일정한 박자에 맞춰 젖은 살 부딪치는 소리가 척척하게 퍼졌다. 눈을 질끈 감자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턱 끝에 맺혔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침인지, 흘러내린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눈 떠.”

강압적인 어조에 붉어진 눈을 치켜떴다. 김신우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지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뒷머리를 움켜쥔 악력이 스르르 풀렸다. 부드럽게 미끄러진 김신우의 손이, 지한의 앞머리를 이마가 보일 정도로 쓸어 올리다 그대로 꽉 그러쥐었다. 당기는 힘에 턱이 절로 들렸다.

“하아….”

김신우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끝나기는 하는 걸까. 짧은 시간이 억겁만큼 길게 느껴진다. 돌연 그가 식도 끝까지 찔러 넣을 기세로 허리를 쳐올렸다.

“욱….”

지한은 고통스러움에 인상을 한껏 찡그렸다. 수치스러운 성행위라기보다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폭행처럼 느껴졌다. 이러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의 허릿짓이 점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지한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인정사정없이 입 안을 헤집는 좆 때문에 입가가 투둑 찢어지는 느낌이 났다. 그 배려 없는 몸짓에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상했다.

“우윽, 읍….”

일순 두피를 드세게 당기는 어릿한 고통과 함께, 그가 목구멍 끝까지 좆을 콱 박아 넣었다.

“읍, 욱…!”

“큿….”

숨구멍이 턱 막히며 절로 잔기침이 터졌다. 코로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술 사이로 타액이 줄줄 흘렀다.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밀며 고개를 마구 젓자, 그가 더 강한 힘으로 압박해왔다.

“하아…. 가만히, 있어요.”

입 안의 좆이 울컥대며 요동쳤다. 뜨끈하고 끈적한 것이 식도를 따라 흘러내려 갔다. 보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김신우는 집요하게 목 끝 여린 살덩이에 제 귀두 끝을 문질러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흘려보낼 작정인지 머리를 놔주지 않았다. 지한은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급히 그의 정액을 꿀꺽대며 삼켰다.

목구멍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혼몽한 정신에 난생처음 맛본 정액에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입꼬리가 찢어졌는지 어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혀 위부터 목젖까지 커다란 달팽이가 기어 다니는 듯 미끈하고 불쾌한 촉감이 안을 가득 채웠다.

“후우….”

느릿하게 후희를 즐기던 그가 머리채를 쥔 손을 찬찬히 뒤로 물렸다. 그 손짓에 따라 자연스레 턱이 위로 들렸다. 여전히 단단함을 자랑하는 살덩이가 뱀처럼 스르륵 빠져나갔다. 입가로 출처 모를 타액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뺨을 사정없이 얻어맞기라도 한 양 입 안쪽이 얼얼했다. 턱이 빠진 건 아닐까. 오랜 시간 무리하게 벌리고 있던 탓에 뻐근해진 입을 찬찬히 다물었다. 다행히 아무 이상 없는 듯했다.

뜨끈한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종전에 파정한 사람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지한을 보고 있었다.

두피가 어릿어릿했다.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던 악력이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한에게서 손을 뗀 김신우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다시 여민다.

말끔하게 매듭을 지은 그가 지한을 응시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서늘한 눈길이, 당장 쪼아대기라도 할 듯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우스운 꼴로 헐벗고 있는 것은 지한 혼자가 되었다. 저릿한 두통과 함께 격한 회의감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공지한 씨, 생각보다 순진한가 봐요.”

그가 느릿하게 지한의 턱을 쥐었다. 미처 닦지 못한 타액을 엄지로 지우듯 쓸어내렸다.

“뭘 믿고 하라는 대로 해 줘.”

일자로 다물린 입매에 희미한 조소가 깃들었다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한은 일순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런 괴롭힘은 한 번이면 족했다. 아니, 족한 걸 넘어 차고 넘쳤다. 그러나 여유롭게 치켜뜬 눈썹을 보니, 제 예상이 빗겨 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한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김신우는 생각보다 더 상종 못 할 개새끼였다.

뾰족해진 말들이 목 끝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솟구치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당장 주먹을 치켜들고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참았다.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무릎 꿇은 패배자였고, 그는 멍청한 자신을 손쉽게 짓누르고 우위를 선점한 승리자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참담한 패전이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

“영 말이 없네.”

지한은 긴 호흡을 느리게 내쉬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곤 찬찬히 머리를 쓸어 올린다. 다시 눈을 치켜뜨고는 그의 얼굴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럼, 다음에 또 부탁해요.”

부드러운 미소를 띤 김신우가 비스듬히 지한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가 찍었던 에스프레소 머신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지한은 분하게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러그 위에 맞닿은 무릎이 어릿하게 저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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