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선악설. 고자는 인간의 본성엔 선도 악도 없다고 했다. ‘성은 선해질 수 있고 불선해질 수도 있다.’ 맹자의 제자 공도자(公都子) 또한 말했다. 고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지한 또한 그 의미를 여러 번 되새길 만한 일들을 자주 겪었다. 고등학교 담임, 대학교 직속 선배, 몰염치하게 사람을 패던 군대 선임과, 마지막으로 전 회사 소속 팀장까지.
따라서 지한은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눈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선악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아서, 선한 사람이 악해질 수도, 악한 사람이 선해질 수도 있다는 것. 온화한 얼굴로 악수를 청해도 이면에서는 칼을 가는 이들이 허다하다는 것 또한.
“매니저님, 나 견과류 알레르기 있는 거 모르셨나 봐요.”
지한이 배우 김신우의 경호를 시작한 지도 한 달째다. 그는 ‘선한 영향을 주는 배우 1위’ 타이틀로 아주 유명한 연예인으로, 길거리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알아주는 배우였다.
“죄, 죄송합니다. 알고는 있었는데, 매장에서 고구마 샌드위치라고 했는데. 호, 호두가….”
매니저 한정원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쩔쩔맸다. 김신우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초조한 얼굴의 한정원은 어찌할 줄 모르고 굽신거렸다.
“제가 다른 거로, 금방 다시 사 오겠습니다!”
숨을 몰아쉬는 그의 하얀 얼굴 위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 말에 김신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가지런한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간다.
“감독님이 찾던데, 다녀올 시간 있어요?”
“아, 그럼 제가.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크게 손사래를 친 한정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한은 건조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묵묵히 응시했다.
한 시간 전, 입맛이 없다던 김신우는 촬영팀에서 배급해 준 점심 도시락을 거절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끝난 후 30분도 지나지 않아 허기가 진다며 눈치를 주었다.
촬영장은 인적 없는 산골이었다. 한정원은 부랴부랴 그가 먹을 샌드위치를 사기 위해 시내까지 멀리 다녀왔고, 김신우 또한 주변에 마땅히 먹거리를 살 만한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됐어요, 한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대표님한테 전화해서 저녁 약속 시각이나 좀 당겨 줘요.”
나긋나긋 이야기한 김신우가 우아하게 웃었다.
“아니, 그래도 배고프시면 뭘 좀 드, 드셔야….”
“아. 점심 못 먹었으니까 비싼 거로 사 달라고 꼭 전해 주고.”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에 지한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언뜻 봐선 무던히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한은 김신우가 호의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점심을 못 먹었다고 하면 박 대표가 이유를 물을 것이고, 순진한 한정원 성격에 제 불찰인 걸 실토할 테지. 앞으로 벌어질 일이 눈에 훤했다.
근 한 달간 지켜본 결과, 김신우는 널리 알려진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속내를 알 수 없는 음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첫째, 조금만 신경 써서 지켜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한정원을 싫어했다. 하나 일을 시작한 지 3년 차임에도 실수가 잦은 한정원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늘 미묘하게 한정원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여 지한은 그가 ‘싫어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괴롭히기 좋아하는 변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가 대신 사 오겠습니다.”
나직이 중얼거린 지한이 김신우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치켜든 한정원이 마구 손을 저었다.
“아, 아니. 한아, 이건 내가….”
“공지한 씨.”
한정원의 말을 뚝 끊으며 김신우가 픽 웃었다. 짧은 순간 그의 눈빛이 싸하게 빛난다.
“그 스토커가 어디서 튀어나올 줄 알고 자리를 비워요.”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웃음기 어린 얼굴로 지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샌드위치나 사 오라고 고용한 가드가 아닌데 말이야.”
어느새 바짝 다가온 그가 지한의 귓가에 장난스레 속삭였다. 고개를 드니 김신우의 등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팔을 크게 휘적거리는 한정원이 보였다. 당장 눈물이라도 터뜨릴 듯, 완전히 울상이다. 끼어들지 말란 소리였다.
정자세로 뒷짐을 진 지한이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흘긋 보았다. 속으론 짧은 욕을 지껄였다.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 고용주는 한정원이 아닌 김신우였으니까.
“…그럼 있겠습니다.”
“그래요.”
지한의 어깨를 짚고 허리를 편 김신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요, 공지한 씨.”
곱게 휘어지는 눈매에 환한 빛이 드리운다. 살짝 어린 웃음기 하나로 그는 불경한 죄인을 용서한 자애로운 신이 되었다.
물론 저 아름다운 미소 뒤의 내면이 얼마나 새카말지 모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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