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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떠나간 봄 (34/34)

외전 5 떠나간 봄

의식이 멀게 느껴졌다. 꺼져 가는 촛불을 보며 남자는 가는 숨을 내뱉었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멀지 않았다. 남자의 생은 곧 끝난다. 죽음이 밀물처럼 다가왔지만 삶이 아쉽지는 않았다.

사십 년의 인생.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남자에게만큼은 충분히 길었다. 생을 갉아먹는 짙은 후회 속에서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 남자는 다가올 죽음이 기꺼웠다.

몇 번이나 이 순간을 바랐던가.

지난 십 년 동안 남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죽음을 생각했다. 남들이 알면 경악할 일이다.

만인지상의 황제, 세상 그 누구보다 존엄한 자. 그런 자가 어째서 죽음을 꿈꾸는가? 세상이 그의 것이었고, 그가 마음만 먹으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등의 초자연적인 일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인간의 권력으로 과오를 돌이킬 수 없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그러나 쉬운 죽음은 그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쉬운 죽음은 속죄가 아닌 안식이며, 그가 죽인 자에 대한 기만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후회로 얼룩진 10년 동안 가장 비참한 죽음을 찾아다녔다. 자신이 저지른 죗값의 반의반이라도 치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어떤 죽음도 자신이 저지른 짓에 비하면 가벼워 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어도 죗값을 치르지 못한다면, 그대로 사는 것이 형벌이리라.

절망의 끝에서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이 고통이 아닌가. 죽지 못해 사는 것이 형벌이라면 그보다 부합할 것도 없었다.

고통의 밤이 저물면 절망의 아침이 밝았다. 잊히지 않는 기억은 그림자처럼 그를 쫓아다녔다. 흘려보내지 못한 무수히 많은 날이 발치에 고였다. 피고름 섞인 시간은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들어갔다.

썩어 가는 것은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떨어뜨린 소중한 추억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추억을 건져내었다. 그러고는 마치 진귀한 보석을 닦듯이 조심스럽게 오물을 닦아내는 것이었다.

소중한 추억이다.

그리고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몇 안 되는 찬란한 기억이기도 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제가 가진 첫 번째 추억을 회고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그때의 그는 거짓된 열기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친구를 향한 풋내 나는 사랑에 몸이 달아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만 한 감정이지만, 그때는 퍽 절실했다. 절실했으니 그런 곳까지 발을 딛게 된 것이다.

남자를 파는 곳으로 유명한 13번가의 파란 대문 집. 그는 제 친우처럼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사내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친우와 똑같은 자를 찾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순간 쾌락을 풀기에 좋은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제 친우와 똑같이 생긴 자가 있었다.

쓸 만한 물건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를 지목했더니 오늘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는 녀석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해서 몸값을 더 받으려는 포주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남창이 처음이든 아니든 그건 크게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남창의 얼굴이었으므로.

‘이름은 뭐지?’

남창은 열일곱이었다. 그가 제 친우를 만났던 나이도 열일곱이었다. 나이를 듣고 나니 남창의 얼굴 위로 친우의 앳된 얼굴이 겹쳤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름을 물었다. 설마 이름까지 똑같을까? 아니, 그럴 리 없지. 이름은 다를 것이다.

남창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루크입니다.’

남창의 이름은 루크. 루카스의 남부식 이름이었다. 친우와 이름은 달랐지만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이름이 달라서 더 좋았다. 이름까지 똑같았으면 기쁨보다는 찝찝함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기쁘게 남창을 안았다. 루크라는 이름의 남창은 꽤나 어색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처음이라고 했던가. 그 말이 영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그는 힘들어하는 남창을 바라보았다.

손님인 자신이 남창에게 봉사하는 상황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마치 친우를 안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령 없고 고지식한 친우도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몸짓이 다정해졌다.

두 번의 정사를 끝내고 남창이 지쳐서 헐떡대는 모습을 보며 그는 결심했다.

이자를 데려가야겠다. 그것은 사실 꽤 단순한 결정이었다. 감히 친우를 건드리지는 못하겠고, 이자는 친우를 닮았으니 대용품으로 삼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그가 이 남창을 보고 질투라도 할지.

그때의 그는 타인을 이용한다는 것에 거침이 없는 거만한 남자였다. 그는 황제였고, 만인을 지배하는 가장 고귀한 자였다. 만인의 꼭대기에 선 그에게 남창이 어떤 가치가 있었을까? 그에게 있어 남창은 그저 말을 알아듣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황제인 자신도 사람이고, 도구에 불과하다고 여긴 남창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외로운 두 사람이 만났다. 의지할 곳이 없어 힘겹게 살아가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온기를 나누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고독한 마음에 타인의 온기가 젖어 드니 사람이 아니라 여긴 이에게 마음이 향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정작 아집에 사로잡힌 그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 * *

남창은 후궁이 되었다. 그는 제 친우를 후궁에게 붙여주었다. 친우가 제 마음을 깨닫기를 바라고 한 짓이었으나, 고지식한 친우 리안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후궁을 알뜰히 살폈다.

오히려 눈치를 챈 것은 그 후궁이었다. 그는 제법 영민했고, 제 위치를 알았으니 분수에 맞게 행동하겠다고 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리안과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일부러 후궁의 일을 들먹여 그를 불러냈다.

리안은 착실하게 후궁의 하루 일과를 읊었다. 자신이 요구하긴 했으나 사실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후궁이 무엇을 하고 살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에게 중요한 것은 후궁보다 그 후궁의 일을 전하는 리안의 단정한 입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리안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루크 님께서…… 글을 배우고 싶어 하십니다.’

‘글을?’

‘예. 워낙 성정이 얌전하신 분이라 차마 전하께 말씀을 못 드리는 것 같아서 대신 전해 드립니다.’

이해가 안 갔다. 그게 뭐 어려운 말이라고 직접 말도 못한단 말인가.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말하면 될 것이지.’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좋은 글 선생을 구해보겠습니다.’

리안의 사려 깊은 말에 불쑥 가슴 깊은 곳에서 짓궂은 마음이 튀어 올랐다. 그는 삐뚜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

‘내게 직접 부탁하라고 해.’

그러고 보니 후궁과 대화를 나눈 지도 꽤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섞었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후궁이 어떻게 부탁을 해올지 궁금해졌다. 덜덜 떨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것은 그만의 착각이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작은 청이 하나 있습니다.’

후궁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결코 시선을 피하지는 않으며 제 부탁을 꺼냈다.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는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후궁의 눈을 마주 보다가 처음으로 깨달았다. 눈동자가 연녹색이구나. 마냥 파랗지는 않았어.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홀린 듯 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한발 늦게 대답했다.

‘그래. 배우면 좋지.’

후궁이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였다. 금빛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연녹색 눈동자를 숨겼다.

‘하지만 적당히 하도록. 괜히 설쳐대면 골치 아프니.’

괜히 퉁명스럽게 덧붙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의외로 점성이 높은 그 눈동자를 조금 더 보고 싶은데 자꾸만 숨기는 후궁에게 어린아이처럼 심통이 나서.

그런데 후궁이 정말로 기쁜 듯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

‘절대 폐하께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놀라웠다.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이였구나. 저렇게 화사하게. 저렇게 섬세하게.

……저렇게 어여쁘게.

그는 생경한 기분이 되어 제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후궁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그가 리안이 아닌 낯선 사람으로 보였다. 한동안 머리에서 잊고 지냈던 이름이 갑자기 가슴에 팍 꽂히듯 새겨졌다.

루크.

그의 이름은 루크였다.

* * *

그때 제 마음을 깨달았으면 좋으련만. 그는 가는 숨을 내뱉으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목젖 바로 아래가 쑤시듯 아파왔다. 그의 생명을 갉아먹는 ‘후회’라는 이름의 벌레가 목젖 바로 아래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풀었다. 지독한 벌레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제 몸을 갉아먹도록 말이다. 그리하여 벌레가 육신을 전부 갉아먹으면, 그 끝에는 오로지 죽음만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아직 더 많은 후회가 필요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벌레야. 어서 오렴. 너를 위한 후회가 여기 있으니…….

* * *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보고하라.’

루크의 시종을 불러 그가 무엇을 하는지 전부 보고하라고 지시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루크에 관한 것은 리안이 전부 보고하지 않는가. 구태여 두 번 보고받을 필요는 없는데도 굳이 시종을 부리려는 제 마음을 그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울의 끝자락, 봄이 문을 두드리는 환절기의 어느 날이었다. 그때 그는 새로운 전투를 위하여 영주들과 전술을 구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아도 뾰족한 수가 없어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루크의 시종이 다가와 그가 아프다고 알렸다. 회의에 지쳐 있던 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요 며칠 날이 좋아졌다고 옷을 얇게 입고 다니더니 아플 줄 알았다. 의원을 부르라 명했지만 리안이 이미 불렀다는 답변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속이 답답해졌다. 왜 그렇게 어리석은 고집을 피우는지 그때의 그는 알지 못했다. 그게 모두 ‘리안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자신의 말 때문인 줄 어찌 알았으랴.

그는 결국 회의를 물리고 루크에게로 향했다. 시종의 말마따나 루크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리안을 보내고 그는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열에 들뜬 루크가 내뱉는 밭은 숨소리만이 가득 채운 방 안. 그는 점점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멍청하긴.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고작 감기였지만, 사람은 감기로도 죽을 수 있는 나약한 존재였다.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목숨을 잃지 않아도 장애가 생길 수 있었다.

그는 루크가 기절한 틈을 타 의원을 불러 진찰을 하였다. 의원은 약차를 처방한 후 우유에 설탕을 섞어 조금씩 마시게 하면 금방 기운을 차릴 것이라 일렀다.

그 모든 작업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착실히 의원의 지시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루크가 정신을 차렸다.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는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골랐다.

몸은 좀 괜찮으냐. 머리는 아프지 않고? 열이 많이 올랐다. 의원은 무슨 생각으로 물렸어. 죽기라도 할 셈이었나.

그러게 내가 옷 좀 잘 챙겨 입으라 했지. 몸이 다 나을 때까지는 방 밖으로 나오지 마라. 또 아프면 힘든 건 너뿐이야…….

적당한 말을 골라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순간이다.

루크가 사부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갑자기 제 옷을 훌훌 벗는 것이다. 그는 다급히 루크의 손목을 붙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루크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중을…….’

그 순간 그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시중? 시중이라고? 자신이 알아들은 게 맞다면, 그는 지금 제 침실 시중을 들겠다고 한 것이다. 가슴 속에서 불꽃이 확 피었다.

‘지금 그 꼴로 내게 안기려는 건가.’

‘…….’

‘어리석은 놈.’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분명 자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픈 사람을 안을 정도로 무뢰한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지금 이 상황은 충분히 모욕적이었으며 그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잔뜩 비틀린 말을 내뱉었다.

‘거슬리게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지.’

‘…….’

‘아파도 조용히 아프고, 죽어도 조용히 죽어. 괜히 여러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란 말이다. 알아들어?’

루크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 모습을 보자 더욱 화가 났다. 그는 거칠게 트레이를 잡아끌어 루크의 앞으로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끝까지 다 먹어라. 그리고 다 나을 때까지는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마.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긴다면 용서치 않을 거다.’

‘……예.’

‘쯧.’

그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벗어났다. 계속 있으면 더욱 모진 말만 내뱉을 것 같았다. 뜨끈해진 머리가 차가운 공기를 맞아 점점 식어 내렸다.

복도를 따라 걷는 그의 걸음걸음마다 루크의 얼굴이 피어올랐다. 모진 말을 듣고 표정이 사라진 루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짜증 나.’

그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가슴께가 거치적거렸다. 무언가 작고 날카로운 것이 심장에 박혀 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은 아픈 이에게 그런 모진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얄팍한 후회였다.

비록 그 후회는 곧이어 따라온 ‘그래도 그놈이 자초한 거야’라는 치졸한 변명에 묻혀 사라졌지만 말이다.

* * *

루크가 앓았던 봄과 지나치게 무더운 여름이 지났다. 대지가 무르익는 가을이 황궁으로 찾아왔다.

가을은 수확제의 계절이다.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며 그 풍요로움을 즐기는 시기. 전시만 아니었다면 황궁도 수확제 준비로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때가 어느 때인데 한가롭게 먹고 마시고 즐길 수는 없지 않은가. 궤도에 오른 정복전쟁은 한창 이어지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황궁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다.

숨죽인 황궁의 침묵은 견고했다. 전쟁의 종식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깰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황제조차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황궁의 침묵은 아주 작고 작은 존재로 인하여 허물어졌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떠돌이 강아지였다.

‘강아지를 주웠다고?’

‘예, 폐하.’

‘…….’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산책 중에 떠돌이 강아지를 주웠다는 루크의 소식을 전하며 시종은 빙그레 웃었다. 어지간하면 표정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훈련을 받은 하급 귀족의 자제들이다.

도대체 얼마나 좋아했으면 이야기를 전하는 시종마저도 웃음 짓게 하는 걸까.

그는 루크가 기뻐했다는 소식이 달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불쾌했다. 저 시종은 그가 웃는 모습을 보았겠군. 그 모습이 인상 깊었으니 저도 모르게 웃는 거겠지. 그래, 그런 거겠지.

‘알겠다. 나가 보도록.’

‘예, 폐하.’

‘그리고…….’

‘……?’

그는 시종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법 멀끔하게 생긴 사내놈이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그리고 허리가 튼튼하며 다리 근육이 도드라진 사내 말이다.

좋지 않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그는 시종을 어디로 보내버릴지 생각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니, 되었다.’

다음 시종은 조금 더 비리비리한 놈으로 골라야겠어. 키가 매우 작고, 어깨가 좁고 허리가 날렵하며 다리 근육도 없어 발받침대로 쓰면 후들거리는 그런 사내로 말이야. 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괜히 초조한 마음이 들어 남은 일은 대강 처리하고 후궁으로 향했다. 루크의 방 앞에 선 시종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지 말라 이른 그는 제 손으로 직접 문을 열었다. 잘 짜인 문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방 안으로 발을 딛자 책상 앞에 앉아 골똘히 책을 읽는 루크의 뒷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폐-’

쉿. 그는 자신을 알아본 리안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며 루크의 뒤로 다가갔다. 독서에 빠져 주위 환경에 무감해진 그를 놀려줄 생각이었다.

기겁하겠지. 놀라는 모습이 기대된다. 그는 짓궂게 웃으며 루크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보는 거지?’

‘……!’

우당탕.

커다란 소리와 함께 루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작은 얼굴 위로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어지럽게 섞였다.

그 와중에 다리가 꼬인 건지 뒤로 휘청하는 루크의 허리를 잡아채자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조심해.’

‘소, 송구합니다, 폐하.’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얼굴이 우스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으며 재차 물었다.

‘무슨 책을 그리 골똘히 보는 거냐 물었다.’

루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신화집을 읽고 있었습니다.’

‘신화집? 갑자기 그건 왜?’

강아지를 주웠다며 신화집은 왜 읽는 걸까. 종잡을 수 없는 행태에 물음을 되돌리자 루크가 리안 쪽을 바라보다가 아주 어렵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 오전에 산책을 하다가.’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풀숲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뛰쳐나왔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모른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아지 한 마리. 그래서?’

‘강아지는 주인이 없는 것 같았고…….’

루크는 자꾸 그의 눈치를 보았다. 제 마음대로 강아지를 기르려 했다고 하면 혼이라도 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마저도 우스워서 그는 계속 모른 척을 했다.

‘감히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려 하였는데…….’

‘그런데?’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서.’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서?

‘그래서 신화집을 보았다?’

고작 강아지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 결국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 맹랑한 것. 하여튼 우습기 짝이 없구나. 그는 루크의 머리칼 사이로 코를 박으며 중얼거렸다.

‘한낱 미물의 이름에 그리 공을 들이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그저 아무렇게나 불러도 모를 미물이다. 공들여 짓든, 대충 짓든 개는 그저 제 이름이라 생각되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그런데 어찌 이리도 열성일까. 어쩐지 조금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계속 품에 끌어안고 있는데, 가슴팍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에게는 한낱 미물이 아니니까요.’

‘음?’

이건 무슨 소리인가. 그는 살짝 몸을 떼어 루크의 얼굴을 살폈다. 루크는 가을 하늘처럼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뭐가 아니란 거야. 말해봐.’

‘정말 별것 아닙니다, 폐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왜 한낱 미물이 아니라는 거지?’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일까? 하지만 오늘 하루 본 강아지한테 그렇게 정이 들 리는 없었다. 어째서 한낱 미물이 아닌 걸까. 계속되는 그의 추궁에 루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잔뜩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아이, 떠돌이 개였습니다.’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어쩌다 황궁에 들어오게 된 것이…….’

‘…….’

‘닮은 것 같아서요.’

그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어릴 적부터 전장을 떠돌아온 관계로 언어에 서툰 그로서는 확실히 정의 내릴 수 없지만, 그것은 굳이 따지자면 ‘충격’에 가까웠다.

충격.

그래, 충격이었다.

루크가 스스로를 떠돌이 개와 비슷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자신이 루크의 출신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것 두 가지 모두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루크는 그저 루크였다. 대용품으로 데려왔으나 언젠가부터 그의 위로 리안을 겹쳐 볼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해가 갈수록 달라지는 두 사람의 외모 때문일지도 몰랐다.

기사인 리안은 갈수록 얼굴이 남자답게 변하는 반면, 후궁에서 생활하는 루크는 온갖 관리를 받으며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루크는 루크, 자신의 후궁.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가 길거리 남창 출신이었다는 것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길거리를 떠돌던 루크를 주워 황궁에 앉힌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루크는 루크고, 자신의 후궁이니까.

있어야 하는 물건이 제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가 제 옆에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깊이 생각할 가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루크의 입장에서 듣게 된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루크는 자신이 어쩌다 황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의 의지는 하나도 없이 그저 상황에 휘말려서 들어오긴 했는데, 벗어날 방법이 없어서 남아 있는 거라고?

순간 가슴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당장에라도 루크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은 자신을 간신히 억누르며 뜨거운 말을 삼켰다.

아니라고 말해. 벗어날 수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그저 내 옆에 있고 싶어서, 이 황궁이 마냥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 당장 말해!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온 제국이 황제의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황궁은 황제를 상징하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황궁을 거부하는 것은 곧 황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감히 누가 황제를 거부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제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라도 그를 거부할 권리 따위는 없다.

그날의 작은 소동 이후로 그는 루크를 찾아가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면 저도 모르게 이 황궁을 떠나고 싶은 거냐고 추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당연히 눈치를 살피며 아니라고 대답하겠지. 아니, 어쩌면 그렇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싫었다.

그는 루크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바랐다. 루크가 제 발치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영원히 황궁을 떠나지 않겠다고 빌었으면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찾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오라는 루크 대신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린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새로 바꾼 루크의 시종이었다. 시종은 침통한 낯으로 루크의 소식을 전했다.

‘강아지가 죽었다고?’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어쩌다가.’

‘그것이…….’

시종은 몹시도 곤란한 낯으로, 체드윈 백작의 서녀이자 그의 후궁이기도 한 영애가 사람을 부려 강아지를 때려죽였다고 고했다.

체드윈 백작의 서녀? 그게 누구지? 체드윈 백작은 알지만 그 딸에 대해서는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그는 짜증이 났다. 도대체 백작은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모르겠다.

그는 시종장을 부려 체드윈 백작을 불러오라고 지시한 후 루크의 시종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루크는 뭘 하고 있지?’

‘강아지의 무덤을 만들고 있습니다.’

‘무덤? 어디에?’

‘제3정원입니다.’

‘그렇군.’

개집이 있던 그 자리에 만들려나. 그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시종에게 돌아가라고 명했다. 그러자 시종이 머뭇거리며 입을 떼었다.

‘……저, 폐하. 송구하오나 루크 님께 가보시는 건 어떠실지.’

‘뭐?’

‘루크 님의 상심이 큰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당연히 크겠지. 하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까지 봐줘야 할 만큼 내가 한가하지는 않다.’

뭐라고 더 말하려던 시종은 차가운 그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조아리며 제 생각이 짧았다며 사죄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뒤를 돌아 집무실을 벗어나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

‘잠깐.’

문을 열고 나가려던 시종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시종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잔뜩 표정을 구기고 물었다.

‘……많이 힘들어하고 있나.’

자존심을 못 이긴 퉁명스러운 물음에 시종은 조용히 대답했다.

‘예.’

‘…….’

‘죽은 강아지의 이름을 루카스라고 지을 정도로요.’

* * *

하나의 이름이 천 번을 불리면, 그건 한 사람의 운명이 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때때로 이름은 가장 짧은 축복도, 가장 강렬한 저주가 되기도 한다.

그의 이름은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루카스라는 이름을 강아지에게 붙였기 때문에 강아지가 그렇게 죽어버린 걸까, 아니면 루카스라는 이름의 강아지가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그도 그런 결말을 맞게 된 걸까?

그는 고통스러운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두 눈 가득 차올랐던 눈물이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흘러내렸다.

루크.

루카스.

운명은 어느 쪽에 달려 있었지?

“하하…….”

그는 고통스러운 웃음을 내뱉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의 운명은, 다름 아닌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름이 아니라 그를 죽인 자신의 손 말이다.

루크가 강아지에게 루카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가 강아지를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게 실제로 드러나자 참을 수 없었다.

왜 하필 죽은 생명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였을까.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유를 묻는 대신 그저 그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강아지를 잃은 루크를 달래기 위함이었지만, 사실 진짜로 달랜 것은 불안에 질려 있던 자신의 마음이었다.

루크, 억지로 곁에 머물게 된 그가 강아지처럼 떠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공포를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으면 그는 아직도 자신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는 그 공포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지 못했고 알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는 루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했으니까. 아니, 사랑한다고 믿었으니까. 루크는 대용품이고, 평민인데다 길거리 남창 출신이었다. ‘황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때는 몰랐다. 사랑하지 못할 만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랑은 종종 불청객처럼 찾아온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뒤늦은 후회를 하는가 보다. 그는 지독한 고통 속에 눈을 감았다. 아직도 회상할 것이 많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자 절망이었다.

* * *

겨울행궁으로의 피한은 사실 불필요한 결정이었다.

‘레이비크요?’

‘그래.’

‘레이비크라면…….’

오로라. 루크가 입안으로 단어를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가볍게 웃었다.

‘싫으냐?’

‘예?’

‘싫으면 말고.’

싫다고 대답할 리가 없었다. 근래 계속 신화집의 한 페이지만 뚫어져라 보던 루크였다. 알고 던진 미끼에 루크가 걸려서 파닥거렸다.

‘싫, 싫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평소 조용조용하던 말투에 미미한 열감이 돌았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지.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루크를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강아지가 죽은 이후로 루크가 계속 우울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전장의 막사에서도 계속 우울해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 집중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강아지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루크가 요즘 오로라에 집중한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오로라. 그래, 그걸 보여주면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겨울행궁으로 왔으나, 막상 도착하고 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건물 곳곳에서 보이는 선대 황제의 흔적 때문이었다. 몸이 약해 겨울이면 반쯤 죽어지내던 그가 지은 곳이니 당연히 그의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선대 황제이자 그의 친형이었던 그자는 예민하고 폭력적인 이였다. 몸이 약해서 그런 걸지 모르지만 걸핏하면 물건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릴 적에는 형제랍시고 그의 폭언과 폭행을 모두 받아들였지만 그가 유모를 매수하여 자신을 죽이려 했음을 깨달은 이후로는 모든 기대를 버렸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순간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형제의 관계까지 사라지자 남은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지켜주는 이 하나 없는,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선 고목.

루크와 그의 호위기사 리안을 밖으로 보낸 후 그는 홀로 행궁 내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일을 하려고 했으나 계속해서 떠오르는 불쾌한 기억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착각일는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몸이 저렸다. 어릴 적 제 형이 보낸 독을 먹고 중독 증세에 시달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 견딜 수 없었다.

그때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

찬란한 금발과 푸른 호수를 담아놓은 듯 반짝이는 두 눈동자를 가진 사람. 웃을 때면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고, 울 때면 제 마음까지 저릿저릿해지는 그 사람.

그는, 그러니까.

‘……리안.’

리안일 것이다. 아마도.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 리안이니까.

되새기듯 스스로 마음을 다잡자 순간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래. 그 사람은 리안이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친우. 목숨을 걸고 자신의 곁에 선 우직한 사내.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던 고목에 울타리를 둘러준 파수꾼.

생각해 보면 그가 리안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리안은 지체 높은 귀족이었고 아름다웠으며 행동거지가 우아했다. 마음씨는 너그러웠으나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철두철미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리안을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고 믿었다.

울타리는 그저 경계하는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을 뿐, 결코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외로운 고목에게 필요한 것은 맹수의 침입을 막는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라, 온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작은 새였다.

무지했던 그는 루크에게서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아내는 동시에 리안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내려 애썼다. 모든 것이 헛수고였지만 그때는 몰랐다. 몰랐으니 그렇게 모진 짓을 한 것이다.

‘리안!’

리안이 쓰러졌다. 처음 만난 열일곱 살의 그때처럼 눈앞에서 허물어졌다. 형제에게 쫓겨 목숨의 위협을 받던 그때의 상황이 재현되자 그는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급히 의원을 부르고 리안을 직접 들쳐 안았다. 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심각한 얼굴로 리안을 진료한 의원은 몸이 상한 상태에서 찬바람을 오래 쐬어 열이 올랐으니 일단 열을 내리고 차후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 해답이라고 했다.

어찌하여 몸이 상했는지 물어도 의원은 알 수 없다는 대답만 돌렸다. 평소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했지만 그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의원이 약차를 처방하는 동안 방을 나와 루크를 찾았다. 루크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열이 확 올랐다.

‘날이 춥다 싶으면 썰매를 타지 말았어야지!’

‘소, 송구…….’

‘송장이라도 치를 생각이었나? 응?’

루크는 바들바들 떨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절대 그런 의도는 없었다는 말에도 열은 식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화가 났다. 추우면 궁으로 돌아올 것이지 굳이 꾸역꾸역 썰매를 탄 그가 어리석고 미련해 보였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의 루크의 목이 점점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 모습도 보기 싫어 그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타박했다.

‘미련한 놈.’

‘…….’

‘너같이 한심한 놈은 처음이다. 지긋지긋해.’

지긋지긋하다는 말에 루크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속으로 혀를 차곤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제 집무실이었다. 리안은 어차피 의원이 간호할 터이니 그가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등 뒤로 달라붙은 습기 어린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명치 쪽이 따끔거렸다.

* * *

앓다 깨어난 리안과 마주쳤다. 그는 괜찮으냐고 물었고, 리안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무심결에 툭 내뱉었다.

‘다행이군. ……다시는 그렇게 멍청한 짓은 하지 마라.’

그러자 리안은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대들었다.

‘멍청한 짓이라니요?’

‘…….’

‘제가 루크 님께 망토를 벗어드린 것이 멍청한 짓입니까, 폐하?’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가 망토를 벗지 않았더라면 분명 루크 님이 호되게 앓았을 겁니다.’

‘…….’

‘저는 루크 님의 호위기사입니다. 루크 님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망토를 벗지 않아 루크 님께서 쓰러지셨다면 저는 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겁니다. 또한 기사가 되어 추위 따위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으니 모두 저의 불찰 아니겠습니까?’

리안의 말에 틀림이 없었다. 그는 일단 루크의 호위기사였으니까. 만약 그가 일신의 안위를 위하여 루크를 등한시했다면 기사의 자질이 없다고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회전하던 칼날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리안은 자신이 분노를 굳이 숨기지 않고 그를 매섭게 질책했다.

‘폐하께서도 그 추궁이 부당하였다는 것은 아시지요.’

‘…….’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그분이 상처받을 것을 진정 모르셨습니까.’

그는 자신의 추궁에 죽을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떨어뜨리던 루크를 떠올렸다. 지긋지긋하다는 말에 마치 작살에 꿰인 물고기마냥 몸을 떨어대던 모습. 또다시 명치가 아파왔다.

‘……나는 그저, 네가 걱정이 되었다.’

‘예?’

‘네가 내 앞에서 쓰러진 것은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지. 그래서 놀랐을 뿐이야.’

그는 망막 위로 진득하게 달라붙는 루크의 모습을 지워내려 애쓰며 애써 변명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리안의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 친우와 연인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뭐?’

‘폐하께서 저를 걱정하셨다지만 저는 폐하의 친우일 뿐입니다. 그리고 루크 님은 폐하의 연인이지요. 친우가 쓰러져 심려하신 폐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화풀이를 연인인 루크 님께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연인이라니. 그 단어가 퍽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고개를 홰홰 젓자 리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도 귀애하시면서 연인이 아니라는 소리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귀애한다고? 자신이 루크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는 리안을 따라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근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루크 님께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하루 종일 상심한 채로 계셨습니다. 부디 그분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마음이 여린 분 아닙니까.’

연인 삼고 싶은 자는 눈앞에 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다른 이에게 가라고 재촉하는 무정한 남자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아야 할 때라고, 자신이 연인 삼고 싶은 사람은 루크가 아니라 리안, 바로 너라고, 그렇게 말해야 할 때가 도래했음을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

부끄러움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결코 루크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자신을 기다렸다는 그 때문은, 절대 아니어야 했다.

그는 리안을 지나쳐 복도를 걸었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걷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연인. 연인 삼고 싶은 자. 리안. 대용품. 루크.

……상처받았을까.

그는 굳게 닫혀 있는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몸에 밴 습관처럼 그는 또다시 루크의 방으로 오고야 말았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그는 생각에 빠졌다.

상처받았을까. 하루 종일 기다렸다는데. 분명 상처받았겠지. 억울하기도 했을 거야.

사과를, 해야 할까.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흥분해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는 도구일 뿐인데?

결국은 자존심이 문제였다. 그는 황제인 자신이 고작 이런 실수로 사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쉽게 사과의 말을 올린다면 제국은 그 기운이 쇠하여 통일을 이루기도 전에 망국의 길을 걷고야 말 것이다.

어차피 루크도 사과를 받을 수 없음은 인지하고 있을 터. 그는 제 머릿속에서 ‘사과’라는 단어를 지우며 문을 열었다.

불빛 한 점 없는 방 안은 깜깜했다. 방 안의 형체를 밝히는 것은 작은 창문으로 들어온 부드러운 달빛뿐이다.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잠시 서 있던 그는 달빛에 의지해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폐하?’

과연 깊게 잠들지 못했는지 작은 인기척에도 루크는 기민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루크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울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다 깨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눈이 부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어찌……!’

제멋대로 빨아들인 입술은 달았다. 당황한 듯 잠시 버둥거리던 루크가 이내 몸에 힘을 풀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고분고분하게 얽혀오는 혀가 마음에 들어 머리칼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더 깊숙이 빨아들이자 루크가 약간 힘이 드는지 약한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그들은 침대 위에 함께 누워 있었다. 루크의 옷은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고, 그 역시도 전라의 상태가 되어 루크의 육체를 탐했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억눌린 신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마음껏 제 욕심대로 움직이던 그는 문득 루크의 연한 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아픈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허릿짓을 약간 늦추며 몸을 굽혀 루크의 눈가에 입술을 찍었다. 마치 울지 말라고 달래기라도 하듯.

‘폐하…… 읏, 으응, 폐, 하…….’

그 몸짓에 신음을 억누르고 있던 루크가 토해내듯 가릉거리며 그를 불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중에’라고 짧게 중얼거린 후 그의 몸 안에 자신의 흥분을 쏟아내었다. 아래에 깔린 육체가 경련하듯 잘게 떨렸다.

그는 손을 뻗어 눈을 감은 채 그의 흥분을 받아들이고 있는 루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문득 그가 어제에 비해 조금 여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저…….’

‘넌 괜찮은 거냐?’

‘예?’

한참 동안 참았던 말을 꺼내던 루크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되물었다. 그는 루크의 뺨을 매만지며 다시 물었다.

‘아픈 곳은 없고?’

‘아, 예. 예, 폐하. 무탈합니다.’

‘눈이 빨간데.’

‘……별것 아닙니다. 그보다는 폐하.’

루크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후들거리는 몸으로 바닥으로 내려가더니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벌을 주십시오.’

‘…….’

‘미련하고 어리석어 생각이 짧았습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정신이 팔려 날이 춥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리안 경은 말렸지만 타자고 고집을 부린 것은 저였으니 모두 제 잘못입니다.’

벌을 달라고 청하는 루크는 나신이었다. 옷 한 자락 걸치지 않아 희게 빛나는 육신이 바들바들 떨리는 모습을 보자 알 수 없이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는 소파에 놓여 있던 담요를 집어 루크의 위로 던지며 중얼거렸다.

‘벌 같은 소린 집어치워. 몸이나 덮어라.’

‘…….’

‘너까지 아프면 정말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루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더니 제 어깨 위로 걸쳐진 담요를 집었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얼굴이 의아함과 두려움, 그리고 혼란스러움으로 얼룩졌다.

그는 담요를 들고도 멍청히 앉아 있는 루크를 보자 속이 답답해져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어서 두르지 않고 뭐 해.’

‘아…….’

‘날이 차다. 아프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빨리 덮어.’

그제야 루크가 쭈뼛쭈뼛 제 몸 위로 담요를 둘렀다. 은여우 털 담요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폐하, 저어…….’

여우 털을 뒤집어쓴 루크가 한 마리의 작은 동물처럼 속삭였다.

‘정말로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까?’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큰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질 것 같았다.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그는 루크의 허리를 잡아 제 옆으로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로 용서치 않을 거다.’

그 말에 루크가 작게 숨을 토해냈다. 안도하는 것 같았다. 은여우 털 담요에 둘러싸인 채 고개만 빼꼼 내민 그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 순간, 우물 바닥처럼 깊었던 하늘이 밝아졌다.

‘아……!’

작게 터져 나온 탄성에 의아해진 그가 고개를 돌렸다. 작은 창문으로 색색의 아름다운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오로라인가? 그는 제 품에 안긴 루크를 끌어안고 창가로 향했다. 창밖으로 빛의 커튼이 넘실거렸다.

‘오로라…….’

그는 하늘에서 춤을 추는 듯한 빛의 산란을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루크를 바라보았다.

루크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뜬 채로 정신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로라는 황제인 그에게도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루크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찬란한 빛을 받아 더욱 오묘하게 빛나는 얼굴.

‘참 예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루크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을 때, 그리고 그의 연녹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 참 예쁘구나.

* * *

전장에서의 시간은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매복을 하면서 보내는 하룻밤은 한 달처럼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급하게 칼을 부딪치고 창을 찔러 넣을 때는 한나절이 일 초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기나긴 시간 동안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생존뿐이다.

오로라를 본 겨울이 끝나고 그는 또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치열한 살육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른 이의 목을 베고 심장을 찌르는 동안 그는 오직 단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살아남는 것. 살아남아서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황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황제가 죽는다는 것은 곧 제국의 패배를 의미한다. 제국의 패배는 곧 치욕적인 종전을 의미하고, 그것은 더 나아가 제국의 쇠락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황제인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결코 죽어서는 안 되었다.

목숨조차도 자신의 것이 아닌 삶. 삶은 때로 지루했고, 폭력적이었으나 그는 그것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가 모든 것을 감내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폐하.’

열흘하고도 이틀을 달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찾은 곳은 후궁이었다. 후궁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리안과 함께 앉아 지도를 보고 있던 루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혈관 속에서 날뛰는 피를 느끼며 루크에게 다가가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작은 신음과 함께 부드러운 육체가 안겼다. 루크에게서는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마치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것 같은 루크만의 독특한 향기였다.

하아. 그 향기를 폐부 깊숙이 닿도록 들이쉬며 그는 눈을 감았다. 코끝에서 진동하던 피 냄새가 이제야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 끝에 찾아오는 것은, 꿀처럼 달콤한 휴식.

삶의 폭력성도, 전장의 살육도 모두 감내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짤막한 휴식뿐이었다.

‘개선식은 어찌하시고 벌써…….’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항상 내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거지. 안 그런가, 리안?’

끌어안은 두 사람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리안이 천천히 대답했다.

‘……이번에는 하렐 백작이 개선식을 맡아도 괜찮겠지요.’

‘그래. 그 또한 고생을 많이 했으니.’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루크를 고쳐 안았다. 날카로웠던 신경이 점점 무뎌지는 것을 느낀다.

언젠가부터 그는 휴식을 취할 때마다 루크를 곁에 두곤 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독특한 향기를 맡으면 죽은 이들의 원한과 증오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도 많지 않고 귀찮게 칭얼거리는 성격도 아니니 곁에 두어 나쁠 것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몸을 떼었다. 루크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쩡히 살아 돌아왔는데 무엇이 저리도 걱정스러운 것인지 모르겠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루크의 얼굴을 마주 보며 찬찬히 살폈다.

못 본 사이에 또 달라졌다. 성장기는 지난 지 오래인데, 그동안 못 먹고 살았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루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키가 자라는 것은 물론이요, 뼈대조차도 튼튼해져 처음 만났을 때의 연약한 이미지는 많이 사라졌다. 이제 겉보기엔 어엿한 귀족 가문의 공자처럼 보인다.

변화는 그쯤 해도 좋으련만. 그는 손가락 끝으로 루크의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육체의 변화만 허락했지 타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까지 허락한 적은 없건만 루크는 어느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루크의 소식은 먼 전장에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돌았다.

황제의 남자 후궁이 그렇게 요사하게 생겼다지. 남색에 취미가 없는 사람도 한 번 보면 아랫도리가 동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던데. 언제까지 폐하께서 품으시려나. 언젠가 기회만 닿는다면 나도…….

그런 소리가 귀에 들릴 때면 그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렸다. 적진을 앞에 두고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적이 아니라 아군을 벨 놈들이라 정신을 차리도록 벌을 내린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그저 괘씸했기 때문이다. 제까짓 것들이 감히 자신의 것을 탐하려 하다니.

‘……폐하?’

이글이글 끓는 시선을 마주하던 루크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는 흥, 하고 낮게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절대 안 되지.’

‘예?’

그게 무슨 뜻이냐고 루크가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 없이 이마에 입술을 찍고는 몸을 돌렸다. 급하게 돌아오긴 했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전쟁은 곧 종식된다. 일리오니아가 화친을 빙자한 항복을 해올 것이라는 추측이 내부에서 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사실 그가 개선식을 하렐 백작에게 맡긴 채 먼저 황궁으로 돌아온 것은 그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산악국가 일리오니아의 대다수를 이루는 일리오니쉬 민족은 자존심이 강한 만큼 끈질겼다. 항복에 가까운 화친이라고는 하나 그들이 체면을 차릴 수 있는 조건을 약속해 주지 않는다면 또다시 그 힘겨운 저항을 이어나갈 것이었다.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 더 이상 질질 끌 수 없었다. 7년에 걸친 전쟁은 인적으로도, 물적으로도 많은 손실을 내었다. 올해는 반드시 끝내야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

그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지에 매달린 이파리들이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다. 모든 생명이 시들어가는 시기.

전쟁이 끝나면, 좀 쉬러 갈까.

이번 겨울에는 아무래도 처리할 일이 많아 가지 못하겠지만, 내년 여름에는 여름행궁으로 피서를 갈 수 있을 것이다.

라윈의 푸른 호수를 보며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고 보니 루크는 라윈에 가본 적이 없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여름행궁에서의 피서를 상상하던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신기해하겠지. 눈을 빛내며 좋아할 거야. 수영을 가르쳐 볼까. 물에 빠진 생쥐 같겠군.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수영은 빼는 게 좋겠어. 다른 놈들이 볼 테니까.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

* * *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은 끝이 났다. 완전한 종식이었다. 평화의 대가로 일리오니아의 공주인 안나 레브로비치가 황비의 지위를 받으며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황제와 일리오니아 출신 황비가 사실 전쟁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으며 적국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거리를 맴돌았다.

물론 그것은 황실 측에서 퍼뜨린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일리오니아와의 완전한 융합을 위해서는 법률이나 제도적인 면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정서적인 측면의 동화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안나 레브로비치와 사랑은커녕 만난 적도 없었다. 혼인식을 치르기 나흘 전 황궁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녀와는 말도 통하지 않았으니 연애는 애당초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정한 남편의 가면을 뒤집어써야 했다. 우매한 백성들과 달리 귀족들은 혼인의 내막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연극을 그만둘 수 없었다.

허례와 허식, 그리고 명분만이 전부인 황궁이다. 모두가 연극임을 알고 있지만, 그가 황비를 대접하는 것에 소홀함이 있다면 융합을 시도하기도 전에 벽이 세워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황비를 에스코트하며 밝게 미소 지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행동했다. 그녀의 밤하늘 같은 검은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만지듯 손을 잡았다.

만약, 그녀가 돌발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날의 혼인식은 무사히 끝났을 것이다.

‘저 천한 것과 춤이라니!’

‘황비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얼어붙은 것은 눈이었을까, 마음이었을까.

일리오니쉬 황비가 루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을 추자는 뜻이었다. 멀리서도 붉게 달아오른 루크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잡지 마. 옆에 서 있던 황후가 ‘예?’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잡지 마. 거절해.

한참 망설이던 루크가 결국 조심스럽게 황비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그는 눈앞이 새빨개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불꽃이 심장을 태운다. 분노는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누르기 위해 유리잔을 집었다. 잔에 담긴 와인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얕게 진동했다. 황후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 시선조차 느낄 수 없었다.

춤을 춘다. 다른 여인과. 손을 맞잡고. 즐거운 듯 웃으며.

저도 남자라고 즐거운 건가. 남자에게 안기기만 하다가 여자를 품어보니 좋았던가. 그래서 저렇게 웃는 건가. 행복하게.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갑자기 속에서 울컥 피가 솟구쳤다. 그것은 파괴적인 본능이었다.

감히 제 것을 탐하는 저 여인의 눈동자를 뽑아버리고 싶다는 충동. 여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주제도 모르고 즐겁게 춤을 추는 저 건방진 것을 끌어다 밀실에 가두고픈 강렬한 욕구.

만약 그에게 이성이 조금만 더 부족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눌렀다. 참아야 했다. 여인의 눈동자를 뽑기에는 지켜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춤이 끝났다. 황비가 루크의 뺨에 입을 맞추며 무어라 속삭였다. 루크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는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황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정작 황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황비가 사라지자 시종장이 다가와 그녀의 침소로 가야 한다고 일렀다. 합방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바야흐로 황비의 첫날밤이다.

후궁도 아닌 정비의 첫날밤만큼은 황제가 동석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기에 그는 새까만 분노를 억누르며 황비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첫날밤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그분께는 죄송하다 전해주세요.’

‘하?’

‘제가 그 여린 분을 흔들어놓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옷을 벗기도 전에 그녀가 전한 말 때문이었다. 말을 전한 시종은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고, 그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간신히 억누른 분노가 다시금 역류하여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흔들었다니?’

황비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 순간, 황비를 보고 어쩔 줄 몰라 얼굴을 붉히던 루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흔들었다. 여인을 처음으로 품에 안은 그를.

뺨에 입을 맞추며, 달콤한 말을 흘려서.

그 이후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르겠다. 방을 박차고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흐릿했다. 누군가 그를 말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악……!’

정신을 차리자 그는 루크를 범하고 있었다. 밑에 깔린 그가 잔뜩 고통스러운 낯으로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을 보며 그는 허리를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으나 이성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짐승처럼 헐떡대며 가슴속에 응어리진 말을 내뱉었다.

감히, 네가, 어떻게, 말해, 말해 보아라, 네가, 나를 두고, 감히.

그 밤, 지옥은 범해지는 루크에게만 펼쳐진 것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했던 자에게 지옥은 아가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 지옥은 그날 이후로 닫힌 적이 없었으니…….

비극은 이미 그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 * *

시간이 흐르며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불신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구체적인 대상을 염두에 둔 불신은 아니었으나 루크가 다른 여성, 혹은 남성을 마음에 둘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뿌리를 깊게 내렸다. 외면하려고 해도 외면할 수 없을 지경으로.

그리고 결국, 불안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전하? 왜…….’

‘……전하라고?’

그는 대공 시절 외에는 단 한 번도 전하라고 불려본 적 없는 사내였다. 황제인 그에게 전하라고 부르면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간주되어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황궁 내에 아무도 없었고, 루크 또한 단 한 번도 그를 전하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네가 미친 걸까, 아니면.’

‘이……!!’

‘다른 놈팡이가 있는 걸까.’

‘……!’

‘전하라니.’

애써 처박아두었던 불신이 형체를 갖고 수면 위로 드러났다. 루크의 목을 쥔 손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용서할 수 없었다. 황제의 후궁이라는 신분으로 다른 사내를 만나 자신을 기만한 루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자신의 것임을 알면서도 손을 댄 그 ‘전하’라는 자였다. 결코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는 자.

그놈을 찾는다면 자신의 것을 탐한 두 눈을 뽑고 손발을 잘라 들개의 먹이로 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루크에게 말했다.

‘꿈이든 아니든, 감히 황제의 후궁과 사통한 그놈은 죽는다. 그러니 말해. ‘전하’가 누구지?’

그 순간, 루크가 몸을 구부리며 욱, 욱- 속을 게워냈다. 그 모습이 마치 결코 입을 뗄 수 없다는 의지처럼 보여 또다시 눈앞이 핑글 돌았다.

절절한 연심이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서,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어.

만약 루크가 그 ‘전하’라는 자의 이름을 밝혔다면, 그는 이렇게까지 화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하’의 정체를 밝히고, 그가 자신을 겁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결코 그를 마음에 품은 것이 아니었다고 빌었다면 그자는 죽이되 루크만은 처벌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것이니까.

하지만 루크는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것이라 믿었던 이가 다른 자의 품을 선택했다.

피가 혈관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 같다. 뜨거워진 머리는 차갑게 식었고, 그러다가도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손은 북풍에 얼린 것처럼 버석거렸고, 눈가는 불덩이처럼 화끈거렸다. 온갖 모순적인 감정이 그의 내부에서 날뛰었다. 웃고 싶기도 했고,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자기 자신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먼저 자신의 것에 손을 댄 자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침실에서 나온 그는 루이 채스터턴을 불러 루크의 방에 드나든 모든 귀족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늦어도 상관없다. 모두 불러.’

‘예, 폐하.’

‘명단을 넘겨라.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중에는 분명 그 ‘전하’라는 작자가 있겠지. 선뜩한 의지를 담은 그의 말에 루이 채스터턴이 묘하게 웃으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혼란스러운 표정의 리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상을 하시든 그건 전부 오해입니다, 폐하. 루크 님께서는 누구와도 부정을 저지른 적 없고, 오직 폐하 한 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건 제가 잘 압니다.’

피가 끓는 듯한 리안의 발언에 그가 차게 웃었다.

‘오해라? 하. 어떤 오해가 있어 그가 나를 전하라고 부른 거지?’

‘그건…….’

‘말해봐, 리안. 오해라고 하지 않았나.’

오해일 리가 없다. 아니, 오해일 수가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리안이 명쾌한 답을 내주길 바랐다. 하지만 리안은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고, 마지막 희망마저 없어진 눈동자는 새까맣게 죽어버렸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그는 냉기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하라…….’

‘…….’

‘감히 내 뒤에서 다른 자와 사통하였단 말이지. 감히.’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것은 분노에 찬 웃음이었다.

‘그자를 찾아낸다면.’

‘…….’

‘내 것을 탐한 그 손과 발을 잘라 들개들의 먹이로 줄 것이고.’

‘…….’

‘눈은 뽑아 까마귀 둥지에 던져놓을 것이며.’

‘…….’

‘나를 두고 감히 다른 이와 사통한 그는 밀실에 가두어 평생 나 이외의 다른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래야겠다. 그게 좋겠다. 아무도 볼 수 없게 밀실에 가두고, 아무와도 접촉할 수 없게 묶어두고. 자신만 보고 웃고 울게 만들어야겠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아, 안 됩니다, 폐하!’

돌연 무릎을 꿇은 리안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분을 가두시면 안 됩니다, 폐하. 그분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루크 님은, 그분은 어떠한 부정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그분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는데 어찌 부정을 저지를 수 있었겠습니까? 제발 그분의 진심을 의심하지 말아주십시오. 가두시면 안 됩니다, 폐하!’

어쩌면 그때.

그는 리안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 믿고 의심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전하라는 말은 그저 잠에서 덜 깨어 한 실수라고 여기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노와 불신, 그리고 두려움은 때때로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합리적이지 못한 추론이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지며, 비상식적인 결론이 가장 그럴듯한 결론으로 둔갑한다.

그래서 그는.

‘……그렇군.’

자신이 만들어낸 함정에 스스로 발을 집어넣었고, 그렇게 완전히 추락하고 말았다.

* * *

루크, 리안의 대용품으로 들여온 그가 리안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리안, 제가 사랑하는 기사 역시 루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루크는 아니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릴 것인지. 두 사람을 함께 보내준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도저히 두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다. 대용품 주제에 진짜를 사랑해 버린 루크를, 그리고 지키기만 하랬는데 마음까지 줘버린 리안을. 그래서 그는 벌 아닌 벌로써 그들을 떼어놓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당연하게도 리안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는 진짜고, 루크는 가짜였으니까. 진짜를 두고 가짜를 선택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폐하, 어찌하여 이곳에…….’

‘너를 찾았다.’

바람결에 리안의 옷자락이 흩날렸다. 그리고 그 옷자락을 타고 리안만의 향기가 실려 왔다. 루크의 것과는 다른 향기였다. 꽃향기에 가까운 것이 루크의 향기라면, 리안의 것은 숲 냄새에 가까웠다. 청량하고 묵직하지만, 어딘가 습한.

‘7년 전, 나는 이곳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했지.’

‘……무엇을 다짐하셨습니까.’

‘대륙을 통일하는 것.’

‘…….’

‘그리고 그것은 모두 너를 위함이었다, 리안.’

그는 7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리안을 향한 열기에 취해 들뜬 머리로 전쟁의 완전한 종식을 꿈꾸었던 그날.

‘네가 검을 들지 않아도 되는 날을 소망했다.’

‘…….’

‘너를 위험에서 지켜주고 싶었어. 12년 전, 그때의 약속처럼.’

분명 그랬다. 그때의 그는 분명 그런 마음이었다.

‘너를 다치게 하는 것이 나라면 나 자신조차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루크를 불러들였다. 자신의 무절제한 정욕과 불안정한 환경으로부터 리안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너를 지킬 수 있게 되었어.’

‘…….’

‘그러니…….’

그러니까 이제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는 더 이상 이십 대의 철없는 애송이가 아니고, 상황은 안정적이었다. 리안은 이제 그의 품에서 완벽히 보호받을 것이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걸까. 그는 이상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의 곁에, 영원히 머물러 주겠어?’

그 말을 들어야 할 대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건 모든 비극이 휘몰아친 후, 홀로 남은 핏빛 무대에서였다.

* * *

리안은 루크를 내보내기를 청했다. 굳이 그를 황궁에 잡아둘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말은 분명 옳았다. 루크는 그 용도가 다했으니 버려 마땅한 존재였다. 매정하게 내쫓기에는 황제의 체면이 있으니 적당히 돈을 주어서 쫓아내면 될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취할 수 없었다.

‘……아직은 안 돼.’

‘어째서입니까.’

‘…….’

‘폐하!’

어째서냐고? 그 질문에는 그조차도 대답할 수 없었다. 저 스스로도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답 대신 회피를 선택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원망 어린 시선을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그에게는 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루크를, 버린다.

지난가을 수확제의 밤에 리안을 끌어안은 이후로 그는 루크를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치가 다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실제로 루크를 보낼 곳도 생각했다. 황도에서 먼 곳, 굳이 찾지 않는다면 소식조차 들리지 않을 먼 남쪽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한 것은 알 수 없는 망설임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비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머릿속을 점령하는 것은 루크의 얼굴과 그를 향해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냈던 다른 귀족들의 눈이었다.

루크를 향한 총애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뱀 같은 작자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불 보듯 훤했다. 분명 너나없이 달려들어 그를 탐하겠지.

귀족도 아닌 평민, 황제에게 오랫동안 몸을 바쳤다는 루크는 지켜줄 세력 하나 없이 이리저리 휘둘릴 것이다. 그는 루크의 몸을 탐하는 얼굴 모를 귀족들을 상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내치더라도 루크를 비호하는 세력을 만들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적당히 괜찮은 귀족가 하나를 찾아내어 그 가문의 양자로 들여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어차피 실제 아들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니 봉토는 황제인 자신이 떼어주고, 그 가문의 영향력하에서 살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 또한 썩 달갑지는 않았으니…… 그것은 그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감 때문이었다.

루크는 결혼적령기였다. 지금은 황제의 후궁이라 여인과 결혼할 수 있는 몸이 못 되지만, 후궁을 벗어난다면 당장 결혼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 상황에 귀족까지 된다면? 일반적인 귀족가의 영애들이야 시집을 오려 하지 않겠지만, 사생아로서 좋은 혼처를 구할 수 없는 처지의 영애들은 얼마든지 그의 손을 잡을 것이다.

다른 여인의 손을 잡고 가족을 일구어 살아가는 루크의 모습을 상상한다. 상상의 첫머리가 시작되는 순간, 온몸에 털이 쭈뼛 설 정도의 불쾌감을 느낀 그는 몸서리를 치며 눈을 떴다.

용납할 수 없다. 그의 곁에 다른 누군가가 선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황제가 품었던 사람이다. 그가 다른 이의 곁에 선다는 것은 그 자체야말로 그에 대한 기만이었다.

평생을 홀로 살게 할 방법이 어디 없을까.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지나친 월권이었다. 그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기에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축내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갔고 겨울이 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려 퍼진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 * *

루크가 반역을 꾀했다는 말을 처음부터 믿은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7년 동안 지켜본 루크는 소심하다 못해 한심하고, 대범함이라고는 간혹 보이는 맹랑함밖에 없는 소인배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람의 믿음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루크가 그럴 인물이 못 된다는 믿음은 7년에 걸쳐 쌓아온 것이었지만, 단 세 번의 모함으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레드럼 공작…….’

문득 자신을 ‘전하’라고 부르던 루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단어.

‘……그가 황후를 자주 찾았던가.’

‘자주는 아니지만 찾을 때면 늘 독대를 하였습니다.’

‘하.’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전하라고 부른 자의 정체. 황후와의 독대. 그가 진정으로 가슴에 품었던 자. 그래서 그때 내보내 달라고 한 거였구나. 그런 거였어.

가슴속에 곱게 간직하고 있던 무언가가 일그러졌다. 그것은 욕심도 야망도 없이, 그저 조용한 꽃처럼 그리 피어 있을 줄 알았던 루크의 허상이었다.

그런 자는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만들어낸 환상이었을 뿐.

그때 리안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급히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캐물었더니 루크가 보낸 엽차를 마시고 쓰러졌다는 이야기만 되돌아왔다.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자신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까지도 이용하여 죽이려 하는 악하고도 악한 사람이었어.

깊은 배신감은 지독한 잔인함으로 화하여 루크의 심장에 내리꽂혔다. 루크의 심장을 찌를 때의 그는 ‘델루니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아니라 적군을 베어 넘기는 제국의 황제였다. 비정하고도 잔혹한 황제.

그렇게 세상이 닫혔다. 7년 동안 조심스럽게 열렸던 거대한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묵직하게 닫혔다.

그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안으로 단단히 빗장을 걸어 잠갔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누구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까마득한 외로움 속에서 그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닫혀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문은 그 후로 3년 뒤에나 열리게 되었으니…… 문이 다시 열렸을 때, 들어올 자격을 가진 유일한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 * *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하는 자, 그리고 진실이 밝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

그는 그 경계에 서 있었다.

처형의 날이 지나고 새빨개진 시야가 조금쯤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 사건에 놓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채스터턴은 이런 허점을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 알면서도 은폐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는 채스터턴에게 소식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사건을 다시 수사했다. 루크가 처형된 이후로 잠시 정신을 놓았던 리안이 합세하며 수사는 더욱 빠르게 진척되었다.

그리고 수사가 진행될수록 진실은 하나로 좁혀졌으니, 그것은 바로.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

‘이제는…… 그분의 결백을 믿으시겠습니까?’

제 손으로 죽인 그 사람이, 순결했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

‘당신의 어리석은 욕심으로 궁에 끌려 들어와서 이용만 당하다 그렇게 억울하게…… 그렇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겁니다.’

‘…….’

‘이제 만족하십니까?’

그는 까맣게 죽어버린 눈으로 제 앞에 내팽개쳐진 증거물을 바라보았다. 만족하느냐고? 만족……?

‘내 동생을 죽여놓고 이제 만족하느냐고 묻잖아!’

믿을 수 없는 단어가 울려 퍼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리안을 바라보았다.

동생? 동생이라고? 리안은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루크는 내 동생이었어.’

‘……뭐?’

‘나와 같은 배에서 태어난 내 친동생이었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사생아로 먼저 태어난 나만 아니었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을 사람은 루크였어. 그는 진정한 델라윈의 적통이자, 나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불쌍한 아이였으니까.’

‘…….’

‘그래서…… 그래서 지켜주려고 했는데, 너는…… 너는!’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귀로 들은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자가 어떻게 델라윈의 적통이, 리안의 친동생이 될 수 있는가? 그는 평민이었다. 가문의 성도 없는 비루한 평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데려온 대용품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리안의 대용품이었다.

그러니까 리안의 말은 사실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니, 사실이 아니어야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게 진실이라면…….

‘……안, 돼.’

‘…….’

‘아니…… 아니야.’

‘…….’

‘그럴 리가 없어.’

차라리, 진실은 밝혀지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대답에 눈이 뒤집힌 리안이 멱살을 잡아챘다. 당장에라도 목을 졸라 죽일 것처럼 부들대는 리안의 악력은 보통이 아니었으나,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저 숨을 쉴 수 없었다. 누군가 명치를 칼로 찌른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그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황망히 뜨여 있던 눈에서도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나는…… 어떡해.’

그저 악하다 하여, 그저 천하다 하여 단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그럼 나는 어떡해.

걸어 잠갔던 빗장이 힘을 잃고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힘없이 양옆으로 열렸다. 그 속에 갇힌 채 홀로 넘실대던 증오가 이때다 싶어 바깥으로 흘러넘쳤다. 양수처럼 그를 감싸고 있던 증오마저 빠져나간 문 저변의 세계는 지독하게도 추웠다.

그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떨었다. 추워. 너무 추워. 추워서 견딜 수 없어…….

진실이 밝혀진 계절은 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끝나지 않을 영원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그는 겨울 속을 헤매었지만, 결코 오로라를 찾지는 않았다.

오로라는 빛을 잃었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렇게 겨울행궁은 폐쇄되었다.

* * *

강아지 루카스의 무덤은 황제의 집무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제1정원의 정 중앙으로 이장되었다. 무덤 주위로 봄이면 아네모네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황제는 하루 두 번, 그 정원을 산책했다.

황제는 더 이상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여인을 안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후궁의 어느 주인 없는 방에서 잠만 청하였다.

후사 문제가 논의되자, 그는 조카를 제 양자 삼아 그에게 태자의 자리를 주었다. 조카는 그가 제위에 오르던 시기, 산욕열로 세상을 떠난 누이의 아들이었다.

한때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일리오니아 공주 안나 레브로비치는 다 무너져 가는 사원에서 황제가 내린 독배를 마시고 나흘을 고통스러워하다가 눈을 감았다.

황제는 그녀의 시체를 끌어내어 황성 앞,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밟고 지나다니는 대로 밑에 묻었다. 많은 일리오니쉬들이 반발하였지만 이미 광증이 돋은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

안나 레브로비치의 시신이 다시금 사원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델피온 2세 시기의 일이다. 그는 일리오니아와의 갈등을 풀고자 사원을 개축하였으며, 후대에 남기는 기록에는 황제 델루니안이 황후의 죽음을 기리기 위하여 개축하였다고 적었다.

* * *

시간이 다 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형벌은 이제 곧 끝이 난다.

“이 숨이 멎거든.”

야코비 백작이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는 노쇠한 신하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지하 감옥의 바닥을 들어내어, 그곳에 나를 묻어라.”

장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안락한 무덤은 그가 묻힐 장소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묻힐 곳으로 지하 감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하 감옥은 루크가 숨을 거둔 곳이며, 그의 억울한 피가 땅에 스며든 곳이다. 루크의 흔적이라곤 주지 못한 선물밖에 없으니 그가 마지막으로 피를 흘린 곳에라도 눕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야코비 백작은 그럴 수 없다고 통곡했지만, 그는 자신의 명을 따르라 일렀다.

사흘 뒤, 황제는 숨을 거두었다.

* * *

만약에.

나 같은 죄인에게도 다음 삶이 허락된다면.

너를 품에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새벽, 잠든 내게 몰래 입을 맞추던 너를 보며 맹랑하다고 비웃는 것이 아니라, 나도 너를 끌어안고 열렬하게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내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만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

사랑한다.

나의 봄, 나의 영혼, 나의 숨결. 나의…….

외전 5 떠나간 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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