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만약
만약.
친아버지든 양아버지든 나를 사랑해 주는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며, 나는 동생과 잔디밭을 뒹굴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날이 내게 허락되었다면.
* * *
무더운 여름이었다. 대지를 달구는 열기에 만물이 생동하여 성장하는 시기.
“델라윈 경! 델라윈, 헉, 델라윈 경!”
그때 나는 라윈의 후작저 복도를 거의 뛰듯이 걷고 있었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델라윈 경!”
열흘간의 전지훈련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신입 기사들이 기사도를 지킬 수 있을지를 시험하기 위한 전지훈련은 지독히도 힘들었다.
영지 북부에 위치한 험준한 산맥에서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그저 생존만을 위한 사투를 벌였던 열흘.
기사도는커녕 인간성의 밑바닥을 보기 직전까지 가서야 나를 포함한 신입 기사들은 다시금 기사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 말 안 들리십니까!”
북부에서 라윈까지는 말을 타고도 사흘이 걸린다. 먼 훗날 내가 다스려야 하는 후작가의 영지가 그만큼 넓다는 뜻이다.
라윈으로 돌아오는 사흘 내내 기사들은 영지가 크다는 둥, 땅이 좋아 흉년은 걱정할 것도 없겠다는 둥 아첨을 늘어놓았다. 정작 후작의 후계자인 나는 아무리 달려도 줄어들지 않는 거리를 저주하며 말을 재촉하기 바빴는데도.
내가 그렇게 말을 재촉하여 달린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지금 내 뒤를 헉헉대며 쫓아오는 어떤 멍청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한 것이다.
“아드리안 델라윈 경!”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 결국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별일 아니면 가만 안 둬.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리자, 나와 함께 전지훈련을 떠났던 평민 출신 기사 발터가 헉헉대다 말고 얼굴을 붉혔다.
“무슨 일입니까.”
감히 나를 멈춰 서게 하다니.
“제 말 안 들리시는 줄 알았습니다.”
“저도 귀가 있습니다, 발터 경.”
“그런데 왜 계속 무시하셨습니까?”
“대답하기 싫어서요. 그래서 뭡니까, 용건은?”
발터 경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 표정이 더 큰 짜증을 불러 일으켰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지. 나는 지금 당장 가봐야 한다고.
말 안 할 거면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보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저, 그, 저, 델라윈 경!”
“예, 발터 경. 듣고 있으니 말하세요.”
“오늘 시간 괜찮으십니까?!”
음?
“시간이라뇨?”
“그, 그게…… 오늘 전지훈련도 끝난 기념으로 신입 기사들끼리 모여서 회포를 풀기로 했습니다! 델라윈 경도 시간이 있으시다면……!”
아아. 그런 거였군.
나는 웃는 낯 그대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예?!”
“시간 없어요. 바쁩니다.”
“어, 어, 어째서…… 오늘은 전지훈련에서 돌아온 날이 아닙니까?!”
“그래서 없다는 겁니다. 오늘이 전지훈련에서 돌아온 날이라.”
“그럼 내일은요? 내일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레, 아니, 글피는…….”
“영원히 없을 겁니다, 발터 경.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 바쁘다고요.”
발터 경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꼴을 보며 나는 경쾌하게 몸을 돌렸다.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다. 회포라니. 무슨 놈의 회포를 풀자는 말인가. 열흘 동안 볼 꼴, 못 볼 꼴 다 봐놓고 이제 와서 허허실실 웃으면서 체면 차리자고?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오늘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 있거든.
그대로 다시 뛰듯이 걸었다. 본성에 가까워지자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문 앞에 집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네. 아버지, 어머니는요?”
“각하께선 서재에 계시고, 부인께선 둘째 도련님과 함께 정원에 계십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정원으로 향했다. 본래대로라면 아버지부터 만나야겠지만 지금 그런 사사로운 예법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정원으로 들어서자 여름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나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비호감에 가까웠다. 한 철만 지나면 시들어 볼품없어지고, 뾰족뾰족한 가시도 있어 만질 때 특히 조심해야 하는 꽃 따위를 그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보다 더 예쁜 생명체를 알고 있는데? 심지어 그 애한테는 가시도 없는데? 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원을 제법 자주 찾았다. 그 이유는 별것 없다.
“어?”
꽃을 유달리 좋아하는 내 동생.
“형!”
“루크.”
……루카스 델라윈 때문이다.
어머니 품에서 뛰듯이 내려와 내게 달려드는 동생의 작은 몸을 마주 껴안으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내 사랑스러운 동생. 나의 루크. 열흘 동안 누구보다 보고 싶었던 내 사랑. 아이 특유의 폭신한 향을 풍기는 금발 머리에 코를 박았다.
바로 이거거든. 내가 바랐던 건 회포 따위가 아니라 이거라고. 열흘간의 피로를 풀기에 이 아이만큼 좋은 약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을 부비자 아이가 기분 좋게 웃었다.
“보고 싶었어, 형아.”
“……나도.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고작 열흘 떨어져 있었는데 십 년은 못 본 것처럼 그리움을 토해내는 우리를 보며 어머니가 혀를 찼다.
“이 어미는 보이지도 않니, 아드리안?”
“아, 어머니.”
“자식 헛 키웠어, 정말…….”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실제로 타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머니는 이런 우리 형제를 주변에 은근히 자랑하고는 하셨다.
“다른 집안 형제들 보면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가 많다던데 너희는 어쩜…….”
이거 봐. 나는 피식 웃으며 루크를 껴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워할 구석이 있어야 미워하지요.”
매일매일 자고 일어나면 어제까지는 몰랐던 사랑스러운 부분이 눈에 띄었다. 어제는 저래서 귀여웠다면 오늘은 이래서 사랑스러운데 이런 아이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상상도 불가능하다. 어머니가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내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킁킁대던 루크가 말했다.
“형아한테서 냄새 나.”
“응?”
냄새? 땀 냄새라도 나는 걸까? 뜬금없는 말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흘 동안 달려오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까.
이런. 씻고 와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루크를 품에서 떼어놓을 때였다. 루크가 두 팔로 내 목을 강하게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햇빛 냄새, 풀 냄새, 바람 냄새, 물 냄새.”
“…….”
“형아한테 자연이 딸려왔네.”
그리고 맑은 웃음.
가슴이 찡 울렸다. 형한테서 온갖 이상한 냄새가 나, 라는 말을 저렇게 예쁘게 돌려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루크밖에 없을 거다.
내 동생은 어쩜 이렇게 천사 같을까. 어떻게 이런 아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지. 정말 믿을 수 없어. 이런 아이가 내 동생이라니. 뒤늦게나마 동생을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루크를 안은 채로 감동받아 굳어버린 나를 보며 어머니가 징글맞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둘이서 씻기라도 하렴.”
“예?”
“루카스도 아까 꽃밭에서 뒹굴어서 지저분해졌으니 함께 목욕이라도 하면 되겠구나.”
목욕? 그 말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함께 목욕이라니, 이게 얼마 만이야.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루크가 혼자 목욕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서부터는 함께 목욕한 적이 없다. 귀족가의 예법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아이를 씻기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내가 원하기도 했고, 루크도 유모보다 나를 편하게 여겼으니까.
어머니가 마음을 바꿀까 얼른 좋다고 대답한 후 루크를 안고 날듯이 성안으로 들어갔다. 행복함에 웃음이 절로 흘렀다. 내 목을 껴안은 루크도 오랜만에 같이하게 된 목욕에 신이 난 건지 복숭아빛으로 오동통한 뺨을 부풀리며 웃었다.
* * *
루크는 올해 열 살이다. 내가 열일곱 살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편이었다.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은 계획에 의한 것은 아니고, 어쩔 수 없었던 사정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열여섯의 나이로 아버지와 혼인할 때부터 이미 그 미모로 제국 만방에 이름을 알릴 정도였다. 그런 어머니와 혼인을 하고자 선택을 기다리는 남자들은 수많았지만, 그중 아버지의 조건이 가장 좋았다. 아버지가 가장 열렬히 구애하기도 했고.
어머니를 부인으로 맞이한 아버지는, 나이는 조금 많았으나 어머니를 존중할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열여섯의 나이에 자신에게 시집온 어머니를 배려하여 그녀를 위해 온실을 만들고 정원을 꾸렸으며, 그녀가 진정으로 자신에게 마음을 열 때까지 동침은커녕 손만 겨우 잡았다고 한다.
제국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델라윈 후작가의 수장, 나이가 많다는 것을 제외하면 부와 권력, 그리고 외모와 인품까지 어느 한구석 빠짐이 없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사랑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머니는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겨울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받아들였고, 그 첫 번째 밤에 나를 잉태했다.
너무 쉬운 임신이었다. 아마 열렬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너무 쉽게 이루어진 임신이라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에게는 씨가 적다는 사실을.
내가 태어난 이후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수히 많은 밤을 보냈지만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다. 어차피 아들인 내가 태어났으니 꼭 자식을 보아야 하는 의무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어머니는 자식이 들어서지 않는 것이 자신 때문인가 두려워하여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문제의 원인이 아버지에게 있음을 알렸다.
아버지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자신에게 남성성이 부족하다니! 어머니는 크게 상심한 아버지를 헌신적으로 위로했다.
당신이 남자로서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해요, 뭐 그런 말이었겠지. 아버지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위로로 금방 충격을 극복했다고 한다.
다른 정략 부부에게 성애란 후계를 잇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그들의 성애는 말 그대로 사랑으로 이루어진 행위였다. 씨가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성애는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였으니까.
여섯 살 때, 공놀이를 하다가 실수로 들어가게 된 어머니의 온실에서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것을 목격했으나 그 모습에 크게 거부감을 갖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사랑을 나누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극히 행복해 보였으므로.
그리고 어머니는 드디어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했고, 어머니 역시 행복한 얼굴로 내게 배를 보여주었다. 이 배 속에 네 동생이 있단다, 하면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아이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아이가 미웠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그 쪼글쪼글한 아이가 너무너무 싫었다.
네가 뭔데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빼앗아? 하지만 그런 치기 어린 질투는 금방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루카스라는 이름을 받은 아이가 자다 말고 눈을 번쩍 떠서 그 어여쁜 연녹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을 때. 그러다가 갑자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어 내 손가락을 쥐었을 때.
그때, 나는 그 아이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형아.”
“응?”
“……형아는 왜 혼자 털 났어?”
목욕하다 말고 루크가 뜬금없이 물었다.
털? 그게 무슨 말이지? 멍하니 루크의 시선을 쫓았다. 아이의 연녹색 눈동자가 내 중요 부위를 향해 있었다.
“어…… 어?”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난 없는데, 왜 형아 혼자 털이…….”
“루크!”
“응?”
“그, 그,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야!”
“왜?”
루크가 순진한 연녹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왜 안 되는데?
“헤일리는 자기 털 났다고 나한테 자랑했어.”
“뭐?”
“털 나면 여자애들이 좋아한댔어.”
맙소사. 목욕 중인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헤일리, 이 못된 녀석을 그냥……!
그러고 보니 루크는 열 살이었다. 루크의 친구인 헤일리는 열두 살. 한창 그런 쪽으로 관심이 생길 나이였다.
나야 원체 그런 것에 흥미가 없고, 성적으로 호기심이 생길 나이에 루크가 보이는 재롱에 푹 빠져 있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루크와 그 또래 아이들은 나와 다르다. 이게 정상적인 성장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너, 너도 곧 날 거야.”
“진짜?”
“응. 멋진 남자가 되면 날 거야. 정말이야.”
나는 아이가 계속 순수하게 남아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헤일리, 그 못된 녀석과는 거리를 두기를 바랐고.
……근데 차라리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공 전하.”
“음?”
“형이 그랬는데, 멋진 남자한테는 털이 난대요.”
“……?”
“그럼 전하도 털…….”
“안, 안 돼!”
일주일 후, 후작저에 멜링턴 대공이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 * *
황제의 친동생인 멜링턴 대공이 델라윈 후작가를 찾아왔다. 아무도 몰랐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그저 쉬러 왔을 뿐이오.”
아버지는 혼비백산해서 대공을 맞이했으나, 대공은 무덤덤한 태도로 쉬러 왔을 뿐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대답했다. 쉬러 왔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라윈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는 황제의 여름행궁에서 지낸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여름나기를 힘들어해 올해도 걱정을 했더니 폐하께서 특별히 행궁을 내어주셨소. 이곳에 온 김에 라윈의 영주인 후작께 인사나 하러 온 것이니 놀라지 마시기를.”
“그, 그러십니까, 전하.”
그 성정 예민하다던 황제가 행궁을 내주었다니. 과연 친형제는 친형제인가 싶다. 나는 내 손을 잡고 꿈틀대는 루크를 흘끗 바라보았다.
……내가 황제고 루크가 대공이라면 행궁이 대수랴. 황궁 집무실이라도 내어줄 거다. 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대공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이들은 후작의 아들들이오?”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께 인사 올리거라.”
루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나는 기사인지라 한쪽 무릎을 꿇었고, 루크는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대공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드리안 델라윈입니다.”
“저는 루카스 델라윈이라고 합니다, 대공 전하.”
루크가 제법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영특하기도 해라. 역시 내 동생이 최고야. 대공이 루크를 보며 작게 웃었다.
“각각 나이가 어떻게 되지?”
그 물음에는 아버지가 대답했다.
“큰 아이가 대공 전하와 같은 열일곱이고 작은 아이는 열 살입니다.”
“열 살이라. 열 살치고는 많이 작군.”
그 말에 살짝 울컥했다. 루크가 작다니요. 지극히 정상입니다만.
……그런데 가만 보니 나와 같은 열일곱이라는 대공이 지나치게 크다. 나도 작은 편은 아닌데 나보다 머리 한 개는 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흠. 저 정도라면 어릴 적에도 제법 컸겠다. 자기 어릴 적이랑 루크를 비교하기라도 하는 건가. 좀 웃기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공이 루크에게 말했다.
“이리로.”
그러면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 황당해서 눈만 부릅떴는데 루크가 잔뜩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가도 되냐고 묻는 것이다.
아니, 안 돼. 가지마.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나는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건 숫제 본능이었다. 루크가 대공의 손을 잡으면, 머지않아 동생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 거라는 본능적 경고.
“대공 전하께서 부르시잖니.”
그때 눈치 없는 아버지가 루크의 등을 밀었다. 루크가 주춤주춤 대공에게 향했다.
안 돼. 가지마. 내 옆에 있으라니까? 아이가 손을 내밀어 대공의 손을 맞잡았다. 아이의 보드라운 손을 잡은 대공이 환하게 웃었다.
“예쁘구나.”
자기가 뭔데 예쁘다고 해?
나도 모르게 불쑥 비틀린 생각이 튀어나왔다. 스스로 생각하고도 놀라서 주먹을 꽉 움켜쥘 정도였다.
아드리안, 너 미쳤어? 저분은 대공 전하야. 대공 전하께서 아이를 칭찬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것 갖고 그렇게 불충한 생각을…….
“이름이 뭐라고?”
“루카스입니다.”
“루카스…… 루카스라. 그럼 이쪽에서는 루크라고 부르겠구나.”
“예.”
“그래, 루크. 나는 델루니안 멜링턴이다. 편하게 델루니안 님이라 불러도 좋아.”
자기가 뭔데 루크라고 불러? 그리고, 뭐? 델루니안 님? ……아주 웃기지도 않아.
“저, 으음…….”
“델루니안 님. 불러봐.”
“……델루니안 님.”
“옳지.”
대공이 잘했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도닥였다. 나는 점점 불쾌해졌다. 그런데 그 불쾌함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왜 그러지. 왜 이렇게 불쾌하지. 이런 일이 처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후작저에 놀러온 귀족들은 하나같이 루크를 예뻐했다. 루크는 사랑받을 만한 아이였으니까.
루크의 머리를 도닥이고 엉덩이를 두드리고 뺨에 입을 맞추는 일은 예사였고, 심지어는 어떤 귀족은 아이의 콧망울을 잘게 씹기도 했다.
물론 그는 두 번 다시 후작저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내가 반대했으니까. 아무튼 대공의 태도는 루크에게 있어 지극히 일상적인 반응인데.
왜 이렇게 곱게 기른 딸자식 시집보내는 기분이지?
* * *
그날 이후로 대공은 후작저에 자주 찾아왔다. 거의 이틀에 한 번 꼴이었다. 그가 올 때마다 바짝 긴장했던 아버지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방문에 점점 평정을 되찾아갔다.
그것은 대공이 후작저에 와서도 별다른 일 없이 루크하고만 놀다 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호수에 갔다고?”
“예.”
“……대공 전하와 함께?”
“그렇습니다.”
시종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이가 빠득 갈렸다.
훈련을 마치고 부리나케 성으로 돌아왔으나 루크는 오늘도 대공과 놀러 나간 상태였다. 텅 빈 루크의 방을 보며 허탈감을 느낀 것도 잠시. 허탈감이 사라진 자리에 분노가 차올랐다.
자기가 뭔데 계속 루크를 데리고 놀아. 루크는 내 동생이란 말이야.
그때 즈음의 나는 더 이상 불충한 생각을 바로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공의 존재가 무척이나 거슬렸기 때문이다.
루크를 찾아 남쪽 호수로 향했다. 호수의 반대편에는 황제의 여름행궁이 있다. 현재 대공이 머무르는 곳.
나는 여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대공이 하루라도 빨리 황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대공 전하.”
“음?”
대공의 호위기사들과 눈짓으로 인사하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호숫가 바로 옆에 차양을 치고 그 밑에서 놀고 있던 두 사람은 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느긋하게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영이라도 한 걸까? 상체를 탈의한 대공이 다리 사이에 루크를 앉혀두고 수건으로 아이의 머리를 말리고 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분노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에라도 루크를 빼내야겠다 생각하며 조금 더 다가간 순간.
“대공 전하.”
“응.”
“한 가지 여쭈어도 될까요?”
“물론.”
여쭙다니? 무엇을?
간혹 맹한 모습을 보이는 루크가 생각에 빠졌을 때 특유의 몽롱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이 그랬는데, 멋진 남자한테는 털이 난대요.”
“……?”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야. 그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 루크.
분노는 이미 휘발되었다. 아이를 빼내겠다는 생각보다 아이의 입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으로 치고 올라온 순간, 루크가 기어코 그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럼 전하도 털…….”
“안, 안 돼!”
“……!”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대공이 눈을 부릅떴다. 나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루크에게 달려가 그 입을 틀어막았다.
루크가 커다랗게 뜨인 연녹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형아, 왔어? 그렇게 묻는 것 같다. 너 지금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니야, 이 망아지 같은 녀석아!
“……이게 무슨 짓이지, 아드리안 공자?”
아이의 입을 틀어막은 나를 보며 대공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차.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이가 망령된 말을 하는 것 같아 그만 무례를 범하였나이다.”
“망령된 말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한다. 그리고 일단 그 손부터 떼지 그래.”
“아…….”
그 순간에도 나는 루크의 입을 막고 있었다. 손을 떼자 아이가 ‘푸하!’ 하고 숨을 몰아쉬며 밝게 웃었다.
“형아, 왔어?”
역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는 인사다. 그래, 왔다 이 녀석아…….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자 눈치 없는 루크가 대공을 보며 말했다.
“전하, 저희 형은 기사님이에요.”
“그래.”
“기사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누가?”
“예법 선생님이요. 기사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약자를 지키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요.”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니, 참으로 똑똑하구나.”
나를 상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다정한 목소리에 또다시 짜증이 차올랐다. 왜 저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건데. 네 동생 아니고 내 동생이라고.
“그래서, 아까 말하려던 게 무엇이지?”
대공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 내가 막기도 전에 루크가 발랄하게 입을 떼었다.
“형이 저보고 멋진 남자가 되면 털이 난다고 했는데, 대공 전하는 이미 멋진 남자시잖아요. 그럼 대공 전하도 거기에 털이 있나요?”
……망했다. 대공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 시선이 수치스러워 나는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동생이 미웠다.
* * *
우습게도 그날 이후로 대공은 나를 리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만만해진 거다.
나는 그 애칭을 듣고도 모른 척하며 그를 대공 전하라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럴 때마다 대공은 픽 웃고 말았다.
어느 날, 대공이 내게 말했다.
“여름 축제에 갈 생각이다. 소공자와 함께.”
뜬금없는 말이었다.
“여름 축제…… 말입니까?”
“그래.”
“루크를 데리고 가신다고요?”
“그럼 안 되나?”
안 됩니다만. 나는 이를 빠득 갈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대공은 그런 나를 못 본 척하며 잠든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항상 내 무릎 위에서 잠들곤 했던 아이는 이제는 나보다 대공이 더 편한지 대공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배신이야, 루크.
여름을 거치며 루크는 나보다 대공을 더욱 따르게 되었다. 그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막 기사서임을 받은 나는 빌어먹게 바빴고, 한량 같은 대공은 하릴없이 후작저에 놀러 와 하루 종일 아이와 놀았으니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그래도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인파로 불쾌하실까 저어됩니다.”
“상관없어.”
“……아이가 너무 작아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두렵기도 하고요.”
“불안하다면 내가 안고 다니지.”
“제 의견 따위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으셨지요?”
그 말에 대공이 환하게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나?”
“…….”
정말 싫다.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공은 루크의 손을 잡고 여름 축제로 나섰다. 영지 중심부의 시장에서 열리는 여름 축제는 여름 도시 라윈의 명물이다. 그만큼 외지인도 많이 찾아오는 행사.
나는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누가 우리 루크를 보고 너무 예뻐서 덜컥 납치라도 하면 어쩌지.
훈련이 끝나자마자 대공과 루크가 탔을 법한 호화로운 마차를 찾았다. 근데 어디에도 없다.
마차는커녕 말 한 마리도 지나가지를 못하는구나. 말 그대로 인파였다. 아마 마차에서 내려 호위와 함께 길을 걷고 있으리라.
어디서 찾는담. 루크가 불안하기도 했지만, 루크와 단둘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대공이 질투 나서 뱃속이 끓었다.
그리고 드디어, 광장 한구석에서 두 사람을 찾았다.
“루크, 아.”
“아아.”
……뭐 하니, 정말.
마술쇼가 열리는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식당 앞, 야외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이 호위들에 둘러싸여 저들만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공이 샌드위치를 작게 잘라 마술쇼에 여념 없는 루크의 입에 어미새처럼 넣어주는 모습이 푹푹, 표창처럼 눈에 박혔다.
나도 못해본 짓을 감히. 시야가 새빨갛게 변했다.
그대로 테이블로 쳐들어갔다. 검집으로 나를 막던 호위들이 이내 나를 알아보고는 당황스럽게 눈을 굴렸다. 그들을 향해 밝게 웃어주며 발끝으로 테이블을 걷어찼다. 그 충격에 또다시 샌드위치를 썰던 대공이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다.
“아, 송구합니다, 전하. 실수로 그만.”
“실수?”
“예.”
뭐. 실수라는데 뭐 어쩔 건데. 죽이기라도 하시게? 그런 의미를 담아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노려보는데 귓가에 루크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형아!”
아이고, 예쁜 내 새끼.
“루크!”
“형아, 왜 이제 왔어.”
‘기다렸잖아’ 하고 루크가 양팔을 내게 뻗었다. 안아달라는 뜻이다.
하…… 귀여워서 심장이 다 아프다. 예쁜 것. 미안하다는 의미로 뺨에 뽀뽀를 쪽쪽 날리자, 루크가 간지럽다고 까르르 웃었다.
“루크, 마저 식사해야지.”
그때 대공이 묘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루크를 불렀다. 내게 안겨 있던 루크가 아, 하고는 바르작거리며 내려갔다.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자리에 앉히자 대공이 화사하게 웃으며 루크의 입에 샌드위치를 먹인다.
“맛있니?”
“예!”
“나도 먹여주련?”
먹여달라고? 황당해서 쳐다보자 대공이 ‘뭐 문제라도?’ 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허, 참. 루크, 먹여주지 마. 굶어 죽으라고 해. 하지만 루크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따위 없다. 아무리 작고 귀엽더라도 요정은 아니었다.
아이가 제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대공이 했던 것처럼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샌드위치를 어설프게 썰었다.
“드세요, 대공 전하.”
그래도 차마 제가 먹여주는 것은 못하겠는지 그릇을 쓱 내민다.
그래, 잘했어. 역시 내 동생이야.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대공이 ‘그게 아니지’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했던 것처럼 먹여주지 않을래?”
“예?”
“칼질을 너무 오래 했더니 손목이 아프구나…….”
거짓말하네. 기사인 나보다 손목이 두꺼우면서 고작 샌드위치 몇 번 썰었다고 팔목이 아플 리가 없다.
저건 그냥 개수작이야. 루크, 넘어가면 안 돼. 형이 옛날에 동화 읽어준 거 기억하지? 과자를 쫓다가 마녀한테 잡아먹히고 만 이야기. 그 마녀가 바로 대공이야. 너를 홀리는 대공이라고!
한참을 망설이던 루크가 문득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녹색의 어여쁜 눈동자가 내게로 향한다. 마치 답을 구하듯. 형아, 믿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루크가 활짝 웃었다. 그러더니.
“대공 전하.”
“응?”
“실은 이 포크와 나이프는 저에게 너무 커요.”
“……응?”
“그러니 저희 형이 대신 해드리면 어떨까요?”
“……뭐?”
“뭐?”
……천인공노할 말을 내뱉는다.
대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흑갈색 눈동자에 극렬한 거부감이 서려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더러 어미새처럼 대공의 입에 샌드위치를 넣어주라고?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대공도 마찬가지였는지 순식간에 새파래진 낯빛으로 냅킨을 집었다. 마치 토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 와중에도 루크는 눈치 없이 ‘네? 네?’ 하고 우리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소름 끼치는 식사 시간이 끝나고, 대공과 나는 각각 루크의 왼쪽과 오른쪽에 서서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인파 속을 헤치고 걸었다. 물론 진짜로 인파를 헤친 것은 호위 기사들이지만 아무튼 그랬다는 거다.
하늘에서 여름꽃을 가득 담은 박이 터졌다. 하늘거리는 푸른 꽃이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거리에서는 하얀 실을 얽어 만든 팔찌와 여름 과일로 만든 주스를 팔았다.
대공이 보더니 팔찌가 마음에 든다 하여 루크와 하나씩 나눠 차고 (그 와중에 내 것은 없었다) 주스를 한 잔씩 사서 마시며 걸었다.
그러기를 반나절. 어린아이의 몸으로 성인의 보폭을 따라잡던 루크가 발이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형이 안아줄게, 하고 허리를 굽히기도 전에 대공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컵이 손안에서 부서졌다.
밤이 무르익자 광장에서는 댄스 파티가 열렸다. 어차피 우리는 끼어들 생각이 없어 성으로 돌아갈 마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공이 문득 제 손목에 찬 팔찌를 보며 루크에게 말을 걸었다.
“인연 팔찌라고 하였지?”
“예?”
“이것 말이다. 똑같은 매듭으로 묶은 팔찌를 찬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고 했지 않느냐.”
……또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고?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대공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듯 루크를 껴안았다.
아이는 내가 자신을 껴안았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제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공이 그런 아이의 머리를 도닥이며 한숨처럼 웃었다.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
“정말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 * *
여름이 다 지나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대공이 돌아간다는 소식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지만 대공은 가을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한여름이라는 듯 이틀에 한 번, 아니, 하루에 한 번씩 후작저를 찾아 루크와 놀고 갔다.
어느새 루크는 대공이 찾아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아이가 되었다. 나 따위는 홀라당 잊어버리고. 그래서 나는 정말로 대공이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웬일로 대공이 루크를 찾아오지 않은 날. 훈련이 끝나고 부리나케 루크의 방으로 찾아간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상인 루크를 보고야 말았다.
“왜 그런 얼굴이야.”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늘 방긋방긋 웃는 아이가 울상이라니. 오늘은 검술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루크? 형한테 말해봐. 왜 그래?”
“…….”
“루크? 우리 아가?”
우리 아가라는 말은 루크가 아주 어릴 적, 내가 어른들을 흉내 낸답시고 한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루크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내가 우리 아가라고 부르는 것을 특별히 좋아했다. 아이가 조금 큰 이후로는 그렇게 부른 적이 없는데, 하도 우울해 보여 일부러 아가라고 부르자 루크가 금세 커다란 눈에 눈물을 방울방울 맺었다.
“왜, 왜 우는 거야. 응?”
“흐…….”
“루크? 이유라도 알려줄래?”
아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하기 싫다는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럴까. 도대체 무슨 일인데 우는 거야. 심장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헤일리인가. 또 그놈의 헤일리가 루크에게 헛소리를 한 건가. 이놈을 당장 요절을 내야지. 남모르게 다짐하는데 결국 루크가 엉엉, 꼭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어 울음을 토해냈다.
“흐윽, 윽, 으응…… 으어엉…….”
아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대공이 돌아간 것이다. 하필 검술 수업 중에 찾아와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달랑 메모 한 장을 남겨놓고.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나쁜 새끼. 메모를 와작 구기며 나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루크는 사람을 좋아한다. 하는 짓이 딱 새끼 강아지였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한 번 마음에 들이면 오래도록 기억하는 강아지.
루크는 아마도 그 여름 내내 자신과 함께한 대공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영특한 아이니 꽤 오랫동안 기억하겠지. 자신을 그렇게 어여쁘다 애지중지한 사람이 달랑 메모 한 장 남겨두고 떠나버렸으니 분명 큰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그럴 거면 차라리 정이나 주지 말든가. 그렇게 말도 없이 떠나갈 거면서 왜 그 여름 내내 아이를 갖고 놀았는지.
그날 하루 종일 대공을 욕한 나는 울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루크가 우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쁜 새끼. 내 소중한 아이를 상처 입혔다. 용서 못해. 절대 용서 안 한다.
대공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삼 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의 소식이 들려왔다. 황제가 일으킨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황도로 돌아왔다는, 조금은 우울한 소식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스물세 살이 되었고, 열 살이었던 루크는 열여섯이 되었다.
마차는 황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새로 뚫린 대로를 통해 빠르게 달리는 마차는 반나절만 더 있으면 황도에 도착할 터였다.
“루크, 뭘 그리 유심히 봐?”
이른 새벽부터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한 마차 안에서 루크는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창밖을 봤다가 제 손목을 봤다가, 한숨 한 번 내쉬고는 다시 바깥을 볼 뿐이다.
“아니, 아무것도.”
루크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소매를 내려 손목을 감춘다. 그 손목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기 사흘 전이었다. 병약한 선황이 숨을 거둔지 석 달 만에 거행되는 대관식.
황제의 봉신으로서 초대장을 받은 아버지는 최근 건강이 부쩍 나빠져 차마 황도까지 갈 여력이 없었고, 그에 나는 후작 대리인 자격으로 대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루크에게까지 초대장이 온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초대장을 받은 날, 루크는 제 앞으로 도착한 금박 입힌 초대장을 보고 멍한 얼굴을 했다. 새로이 황제가 되는 이의 이름이 무척 낯익었던 탓이리라. 한때 멜링턴 대공이라고 불렸던 자. 이제는 황제 델루니안이라고 불러야 할 그 사람.
“……후우.”
그날부터 루크는 부쩍 웃음을 잃었고 종종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 손목에 탯줄처럼 달린, 색이 바란 흰 팔찌를 자주 바라보았다.
6년 전, 대공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루크의 손목에 감아준 그 팔찌였다. 똑같은 매듭의 팔찌를 찬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상술에 속아 넘어간 팔찌.
너는……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니?
루크에게 대공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가끔 궁금했다. 6년 전 한 계절에 잠깐 만난 대공.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던 사람.
이후 루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 정서적으로 교류했으며 친구도 제법 많이 사귀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대공은 ‘옛날에 우리 영지에 놀러 왔던 한 사람’쯤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잊지 못하는 걸까.
마차는 황도 안으로 들어섰다. 황실에서는 황도에 저택이 없는 우리를 배려해 황실 손님 자격을 부여했기에 황도에 들어선 마차는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의 문이 열렸다. 금빛 밀림이라 불리는 이곳.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황궁의 시종장이라 불리는 야코비 백작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후작 대리인.”
“환대에 감사할 뿐입니다.”
“각별히 모시라는 폐하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지요.”
각별히 모시라고? 우리를 기억하기라도 하는 건가. 루크의 손을 잡고 야코비 백작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일반적인 손님들이 머무는 외궁을 지나 내궁에 도착했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그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내궁.
내궁이라니. 조금 당황한 나를 보며 야코비 백작이 온화하게 웃었다.
“후작 대리인께서는 오른쪽 방을 쓰시면 됩니다.”
“……소공자는요?”
“소공자는 다른 곳에 거처하게 될 겁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루크가 당황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야코비 백작을 쫓아갔다. 다른 곳을 쓰게 된다고? 보통 가족의 경우는 방을 붙여 주곤 한다. 내궁에 방이 모자란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걸까. 황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렇게 사라진 루크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다음 날 아침의 일이었다.
“루크.”
“……형.”
내궁에서도 가장 깊은 곳. 황제가 머무는 제1궁에서 머물렀다는 루크는, 한참을 울었는지 부은 눈으로 나를 맞이했다.
* * *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리 캐어도 루크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어. 분명해. 가슴이 찌릿찌릿하게 아파 왔다. 나이가 들며 루크에 대한 애정은 이전에 비해 온화한 방식으로 표출되었지만, 그 애정의 총량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루크가 울면 내 가슴이 더욱 아팠다.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혼인조차 하지 못한 것이지만, 아무튼.
함께 식사를 끝낸 루크는 산책이 하고 싶다며 길을 나섰다. 내궁에서 가장 가까운 제3정원에 도착하자 하루 종일 어두웠던 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꽃을 보는 소년의 먹구름 개인 얼굴이 유려하다. 내궁을 산책하던 다른 사람들이 루크를 보며 저들끼리 소곤대는 것이 보였다. 그래, 내 동생이 좀 잘나긴 했지.
열여섯이 되며 마냥 귀엽기만 했던 루크의 외모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그 불안정한 시기. 아기천사 같던 얼굴이 점점 단단해지며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지. 나야 매일같이 루크와 얼굴을 맞대니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지만, 그를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루크가 ‘아름다워졌다’고 말했다.
아름답다라. 그 말을 듣는 루크도, 그를 매일같이 지켜본 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친척들은 와하하 웃었다.
조금 더 자라면 제 어머니보다 더한 꽃이 될 것이라는, 사내에게 하기에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하며.
루크는 황궁에서도 빛을 발하는구나. 역시 내 동생이야.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던 우리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반짝반짝 빛나는 백색 정복을 입은 그들. 황제의 근위기사들이었다.
“함께 가시지요.”
가다니, 어디로? ……라고 묻지 않아도 어디일지는 뻔했다. 황제의 근위기사들이 모시러 왔으니 당연히 황제에게로 가겠지. 그래도 의아한 것은 왜 우리를 부르냐는 것이다. 공식적인 알현은 내일부터 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근위기사들을 따라 제1궁으로 향했다. 내궁 안에도 알현실은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웬걸.
알현실도 아니고 가장 깊은 곳, 황제의 개인 서재로 불려갔다. 여기까지 들어와도 되는 건가 싶어서 약간 긴장한 채로 바라보는 와중, 기어코 서재의 문이 열렸다.
“들어와.”
6년 만에 듣는 대공, 아니, 황제의 목소리. 내 옆에 서 있던 루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이가 입술을 질끈 무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루크. 아이가 두려워하는 걸까 싶어 그 손을 잡고 서재 안으로 향했다.
6년 만에 보는 황제는 내 기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열일곱이었던 그때에는 이제 갓 소년의 티를 벗은 모습이었다고 하면, 지금은 정말로…… 완연한 사내라고 해야 할까. 조금 덜 여물었던 턱선이 단단해졌고, 깊은 눈은 그때보다 더욱 짙어진 것 같다.
선황의 명을 받아 전쟁터를 뛰어다녔다더니 몸도 훨씬 좋아진 것 같고…….
아니, 일단 그런 외적인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때에도 열일곱 살 답지 않게 중압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차원이 다르다.
중압감은 물론이요, 그에게서는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사람을 수도 없이 베어 넘긴 자의 위태롭고도 위험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구나. 이제는 그때처럼 실수인 척 테이블을 걷어차지는 못하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황제의 시선이 곧바로 루크에게 향했다.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위협적인 분위기가 갑자기 눈 녹듯 사라진다.
뭐야.
“오랜만이구나, 루크.”
“…….”
“나를 기억하고 있니?”
황제의 목소리가 퍽 달았다. 듣는 이가 다 소름 끼칠 정도로. 설마…… 설마 아직까지도 내 동생을…….
그때까지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루크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그와 시선이 마주친 황제의 눈이 크게 뜨인다.
“……예, 기억합니다.”
“…….”
“폐하께서는 잘 지내셨는지요.”
황제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건 뭔가에 홀린 얼굴이었다. 마녀가 지은 과자집을 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이와 같을까, 아니면 꿈에서나 보던 미인을 직접 만난 몽상가 청년의 시선이 이와 같을까.
그 시선이 누군가와 유독 닮아서 나는 불안해졌다. 저 얼굴. 그러니까 저 얼빠진 얼굴 말이야.
“음, 나는.”
“…….”
“그러니까…… 나는…….”
저렇게 말을 더듬는 모습과 더불어.
“잘 지내셨으면, 편지 한 통이라도 써주시지 그러셨어요.”
“……응?”
“……참으로 밉습니다.”
“뭐?”
“송구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폐하.”
“루크!”
뒤돌아 나가는 아이를 초조하게 바라보는 모습까지도.
……내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았다고.
26년을 같이 살아놓고 아직도 어머니를 볼 때면 눈에서 사랑이 떨어지는, 내 아버지를.
* * *
황제는 루크의 무례함에 대해 질책하지 않았다. 질책이 뭐야. 아이를 뒤쫓아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아이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묻는 꼴을 보니 나는 점점 내 예상대로 들어맞는 것 같아서 두려워졌다.
“저는 모릅니다.”
“왜 몰라. 그러고도 그대가 루크의 형인가.”
“…….”
“쓸모없기는.”
“…….”
“그럼 루크는 어떻게 지냈는지라도 말해봐.”
싫은데요.
아까 홀로 생각했던 분위기가 달라졌네 마네 하는 말들 다 취소다. 전혀 안 달라졌어. 루크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그때와 똑같다. 아니, 그때보다 더욱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친구는 많이 사귀었나?”
“그럼요.”
“공부는 곧잘 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준은 됩니다. 본인이 흥미가 없는 것 같아서 굳이 강요는 하지 않지만…….”
“그렇군. 그럼 혹시 연인은 있나?”
“예?”
연…… 인이라고?
순간 얼굴 모르는 여성, 혹은 남성의 손을 붙잡고 하하 호호 웃는 루크가 떠올랐다. 그 혹은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다정하게 웃는 루크, 제가 좋아하는 꽃을 한 아름 따서 그 혹은 그녀에게 안겨주는 루크, 꽃사슴처럼 우아한 두 팔로 그 혹은 그녀를 품 안 가득 껴안는 루크……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솟는다.
안 돼. 절대 안 돼. 가만 안 둬. 다 부숴 버릴 거야.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십니까.”
사람 짜증 나게.
내 반응에 황제가 조금 안심했다는 듯 얼굴을 풀고 웃었다.
“그대의 못 말리는 형제애가 지금처럼 마음에 든 적이 없어.”
“…….”
저는 폐하가 마음에 든 적이 없었거든요.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
“돌아가도 좋다, 리안.”
내 이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짧게 묵례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득 황제의 손목이 시야에 걸렸다.
……저게 아직도 있네.
전쟁터를 전전하며 큰 부상도 입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던 황제의 손목에는 루크의 것과 똑같은 흰 팔찌가 언제 끊겨도 무방할 지경으로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갈색 가죽끈이 덧대어 있다. 끊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 모습이 어쩐지 루크에 대한 황제의 집착 같아서……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 * *
황제의 서재를 벗어나 곧장 루크에게 향했다.
“루크.”
루크는 드넓은 방, 창가에 놓인 붉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등을 돌린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우울한 상태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휴……. 분명 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황제한테 태도가 그게 뭐냐고 따끔하게 혼을 낼 생각이었는데, 또 저 모습을 보자마자 마음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루크, 형 좀 봐봐.”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정한 목소리를 내고 마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아드리안 델라윈이다. 동생한테는 껌뻑 죽는 한심한 기사.
그 다정한 목소리에 루크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거봐. 우울하다 못해 땅을 파고 드러눕기 일보 직전이다. 굳이 타이르지 않아도 제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을 터.
굳이 첨언하여 타박하고 싶지는 않아 그저 옆자리에 앉자, 루크가 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몸을 기댔다.
“아까 왜 그랬어?”
“…….”
“마음이 많이 상했어?”
“……미안.”
“미안할 게 뭐 있어.”
물론 그가 일반적인 황제였다면 너와 내 목은 이미 날아갔겠지만.
“왜 그랬는데? 응?”
“…….”
“형한테도 못 털어놓을 이야기야?”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말해주지 않을래? 어제 왜 그렇게 울었는지, 그리고 오늘 폐하께 왜 그랬는지.”
내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던 루크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어여쁜 얼굴에 망설임과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모르겠어, 나도 모르게 그냥 화가 나서.”
“음?”
“어제…… 황비마마를 뵈었거든.”
황비마마? 뜬금없이 튀어나온 황비마마의 존재에 깜짝 놀라자, 루크가 또다시 습관처럼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분을 뵙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가슴이 너무 아파서.”
“…….”
“그냥 울었어. 왜 울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그냥 눈물이 막 나왔어.”
“…….”
“그리고 오늘은 폐하를 뵈었는데, 또 그냥 막 가슴이 아픈데 화가 나는 거야.”
“응.”
“나는 그분이 내게 편지 한 장 못 보낼 정도로 바쁜 줄 알았어.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나 따위는 잊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근데 안 잊으셨잖아. 나 기억하고 계셨잖아.”
그랬지. 그는 널 잊지 않았어. 그 짜증 나는 집착도 여전하더라.
“날 잊지도 않으셨고 혼인할 정도로 시간도 넉넉하셨으면서 왜 편지 한 장도 써주지 않은 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어…… 내 잘못이지. 나도 알아.”
“아니야, 이해해.”
별로 이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한 말이니까 이해해. 다정하고 정이 많은 너는 그 짧은 시간을 함께한 황제도 그리워했겠지. 혼인할 정도면 그래도 엄청 바쁘지는 않았다는 뜻일 텐데 너한테는 편지 한 장 없는 그를 보며 가슴도 아팠겠…… 아니, 가슴은 아프지 말자, 동생아.
가만히 루크의 머리를 도닥였다. 루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내게 머리를 맡겼다.
귀여운 것. 그러고 보니 루크는 한창 열여섯이었다. 풋내 나는 사랑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나이. 루크가 연애하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사랑을 느낄 수 있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하필 풋사랑의 대상이 황제라니.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그러고 보면 징조는 있었다.
대공이 떠나고 난 후 괜히 대공과 닮은 사람을 보며 얼쩡대던 루크. 대공의 소식이 들릴 때면 부리나케 달려와 캐묻던 루크.
대공의 전세가 좋지 않음을 듣고는 갑자기 강한 사람이 되겠다며 기사수업을 받게 해달라고 아버지를 조르던 루크.(물론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기사가 될 체격이 아니므로.)
선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를 듣자 불충하게도 ‘그럼 전쟁은 더 이상 없는 거지요?’ 하면서 환하게 웃던 루크…….
그때는 그저 꼬마의 동경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풋사랑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환상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까.
어쩌면 루크가 좋아하는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환상 속의 대공일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크가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봐. 폐하께 나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을 텐데.”
아니, 그건 아닐걸.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면 애초에 너를 제1궁에 두지도 않았겠지. 그 팔찌도 계속 차고 있지는 않았을 거고. 그는 아마도 루크를 그리워하긴 했을 거다. 동생 같은 이를 향한 애정인지, 유혹하고 싶은 이를 향한 정욕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전자였지만 지금은 후자가 된 것 아닐까. 루크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치 사랑에 빠진 아버지처럼 홀린 듯 지켜보던 황제, 루크에게 연인이 있느냐고 묻던 그를 떠올리며 나는 이를 갈았다.
절대 못 줘. 다른 사람도 안 되지만 특히 황제 당신에게만큼은 절대 안 돼. 루크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
“…….”
“폐하께 화를 내지도 않을 거고, 형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
그래. 잘 생각했다. 칭찬의 의미로 이마에 쪽 입술을 맞추자 루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힘이 없어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 * *
황제는 저녁 만찬에 우리를 초대했다.
“이것도 먹어보아라, 루크.”
“예, 감사합니다.”
분명 제 접시에 있는 것과 루크의 접시에 있는 것이 똑같은데도 황제는 루크에게 이것저것을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포도주와 소금으로 익힌 오리고기지. 어릴 적 네가 좋아하던 것인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다.”
“맛이 좋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황공합니다, 폐하.”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겠다던 루크는 과연 아까 전과 판이한 의젓한 태도로 황제의 말에 화답했다.
역시 내 동생이야. 기특하구나. 그 모습이 흐뭇하여 와인잔을 기울이는데, 문득 루크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이 눈에 걸렸다.
묘하게 어두운 표정. 제 말에 공손하게 대답하는 루크가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한 걸까. 음울한 시선으로 루크를 바라보던 황제가 억지로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듣지를 못하였구나.”
“폐하께서 보살펴주신 덕에 무탈하게 지냈나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겠니? 무척 궁금하구나. 친구는 얼마나 있고, 공부는 어떤지. 아직도 그 호수를 좋아하는지, 또…… 나이도 적당히 찼는데 마음에 둔 이는 있는지 말이다.”
그 말에 루크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황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친구는 보통 제 나이 또래 아이들만큼 있습니다. 공부는 그리 영민하지 못하여 간신히 따라가는 수준이고요. 아직도 그 호수는 좋아합니다. 여름에는 수영도 하고…….”
“수영? 친구들과?”
“예.”
끼이익-
황제의 나이프가 접시를 긁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순간 깜짝 놀라 인상을 찌푸리자 황제가 ‘아, 손이 미끄러져서’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여름에는 수영도 하고. 또?”
“아…… 그리고…… 마음에 둔 이는.”
없겠지. 나는 여유롭게 다시금 와인잔을 기울였다. 루크는 아직 제 풋사랑을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분명 없다고 할 거야. 자기가 왜 가슴이 아픈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있습니다.”
“푸훗!”
챙그랑!
내가 와인을 뱉은 것과 황제가 나이프를 떨어뜨린 것은 동시였다. 루크가 깜짝 놀라서 나와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이야? 하고 묻는 것 같다. 아……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아닐 리가 없잖아!
“그게 누구야?!”
“그게 누구지?”
황제와 내가 동시에 물었다. 잠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흑갈색 눈동자를 일렁이며 나를 노려본다.
‘연인 따위 없다며.’
내게 마음을 읽는 능력 따위는 없는데 왜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모르겠다.
루크가 부끄러운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게 그…….”
“…….”
“…….”
“아주…… 예쁜 사람이요.”
예쁜 사람.
예쁜…… 사람.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입가에 묻은 와인을 닦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예쁜 사람이라니. 예쁜 사람이라니! 멋진 사람도 아니고 예쁜 사람이란다. 예쁘다는 말은 남성에게 쓰지 않는 말이니 분명 루크가 좋아하는 사람은 여자란 소리였다.
황제가 아니었다. 가슴이 아프다고 해서 당연히 황제일 줄 알았는데, 그 풋사랑의 대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았다. 루크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일차 충격,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다고 내게 알리지 않은 데에서 오는 이차 충격, 루크가 다른 이의 품으로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삼차 충격…….
정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너 형이랑 약속했잖아. 형이랑 천년만년 평생 같이 살기로 약속했잖아! 이 배신쟁이야!
가슴이 미어진다.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다. 황제도 나 못지않게 충격 받은 표정으로 망연히 루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에게 충격을 안긴 루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오리고기를 썰 뿐이었다.
마음에 둔 이가 있습니다. 예쁜 사람이에요. 단 두 문장에 나름대로 단란했던 저녁 식사는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
* * *
대관식의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황궁은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제국 방방곡곡에서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이 몰려들었고, 대관식 이후의 축제를 기다리는 백성들이 거리를 맴돌았다.
“그래서 누군데.”
“비밀이야.”
“숨기지 말고 말해봐, 누군데?”
“아, 글쎄, 비밀이라니까?”
“형이 아는 사람이야?”
“그것도 비밀이야.”
“루카스!”
“아, 시작한다.”
루크가 조용히 하라는 듯 의자 밑으로 내 손을 잡았다. ‘당장 말하지 못해?!’라고 소리치려다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곧 높게 뜬 태양빛을 받아 찬란한 황금문이 열렸다. 황금색 정복에 길고 긴 붉은 망토를 걸친 황제가 위풍당당하게 황금돔 안으로 입장했다. 루크와 함께 일어나며 예를 갖춰 그를 맞이했다. 그가 제단 앞에 다다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사제가 길고 긴 축사를 읊었다.
지루하다. 루크가 먼저 잡은 손이 아니었더라면 지루해서 견디질 못했을 거다. 살짝 고개를 돌려 루크를 바라보자,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렇게 슬픈 눈이지.
그때 황제의 대관식이 끝났음을 선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귀족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우리도 무릎을 꿇자. 다른 귀족들을 따라 무릎을 꿇고 새롭게 황제가 된 그에게 축복의 말을 읊었다. 그 상태로 기다리고 있으려니 귓가에 사락사락,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지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뻔했다. 황제의 대관식 도중 당당히 황금돔을 걸어갈 수 있는 여인은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으니까.
황비. 황제가 대공일 시절 맞이한 정실부인.
이제 곧 황후가 될 여자.
그때 내 손을 맞잡은 루크의 손아귀 힘이 거세졌다.
“황후 전하께 온 지상의 축복과 영광을.”
새롭게 황후가 된 여인에게 축복의 말을 내뱉고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티아라를 쓰고 황제의 옆에 선 여인은 제법 아름다웠다. 루크의 시선이 그 여인에게 박혀 있다.
황비…… 그러니까 황후를 보았댔지. 가슴이 너무 아파서 울었댔지. 자신한테 편지를 쓸 정신은 없으면서 혼인은 한 황제에게 화를 냈어.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대답했잖아, 너.
……그런데 왜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니. 사람 마음 아프게.
대관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연회장으로 향했다. 황궁의 연회장은 아무래도 일반 귀족들의 파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규모부터 방대하다고 해야 할까. 그 덕에 전혀 모르는 귀족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평소라면 이후 후작가를 물려받을 때를 생각해서 그들과 안면을 터놓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루크.”
“……응.”
“이것 좀 마실래?”
침울한 루크에게 부러 달달한 향이 나는 과실주를 내밀었다. 우울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루크가 응, 하고 작게 대답하더니 과실주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단번에 쭉.
“아, 독하다.”
“조금 그런 편이지.”
“근데 나 이런 거 마셔도 괜찮아?”
“오늘은 괜찮아.”
평소 루크가 술을 마시는 것을 엄격히 통제한 나다. 식사할 때 곁들이는 와인이야 술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 그냥 마시게 했지만, 루크의 친구들이 즐기는 서민적인 맥주라든가 백주같이 ‘술’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것들은 모두 금지해 왔다.
술은 인간의 정신을 해치는 독이다. 기사 수업을 받으며 술과 식탐, 무절제한 정욕을 금하라 배운 내가 루크에게 술을 허락할 리 없다.
하지만 까닭 없이 힘들어하는 오늘은 차라리 취해도 좋지 않을까.
내 허락을 받은 루크는 계속해서 과실주를 마셨다. 아이의 얼굴이 점점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조차 예뻐서 나는 오히려 술을 내려놓고 아이의 주변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파티에서 취하는 일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영애들은 물론이고 루크처럼 예쁜 영식들도 마찬가지다. 사고는 한순간에 발생하지만 상처는 영원하며 뒷수습은 불가능하다.
내 동생한테 함부로 접근하지 마. 가시를 세운 채 둘러보자, 루크를 노리고 있던 몇몇 귀족과 영애들이 입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저어, 공자님.”
“예?”
“……소녀와 함께 춤을 추지 않으시겠어요?”
그것은 루크 또래로 보이는 소녀. 옅은 갈색 머리를 어여쁘게 틀어 올린 모 귀족의 영애였다.
아…… 이런. 난감해진다. 눈치껏 물러나면 좋으련만 루크 또래의 이 영애는 눈치도 없는 건지, 기어코 루크에게 춤 신청을 걸었다.
“저어, 레이디? 제 동생은 지금 술에 과하게 취하여…….”
“아, 아, 안 되나요?”
“아니요, 같이 춰요, 춤.”
레이디의 춤 신청을 거절하는 것은 남성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지만 이대로 인파에 휩쓸렸다가는 루크를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에 대신 거절하려 했더니, 루크 이 망아지 같은 녀석이 무슨 정신인지 영애의 손을 꽉 붙잡았다.
“루크.”
“한 곡 정도야 뭐.”
“너 지금 취했잖아.”
“아직 괜찮아. 별로 안 취했어.”
“……너.”
“다녀올게.”
그러더니 그대로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저 녀석이 정말……! 너 내 속 안 썩인다며! 널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답답함에 가슴만 퉁퉁 두드리며 루크의 작은 머리통을 노려볼 때였다. 시야 끝에 황제가 걸렸다. 황후와 함께 상석에 앉아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연회장을 둘러보던 황제.
그가 사나운 표정으로 루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크는 한 곡이 끝나고도 돌아오지 못했다. 소녀가 물러가기 무섭게 다른 영애들이 다가와 춤 신청을 걸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지. 루크는 어쩔 줄 몰라 그들의 춤 신청을 전부 받아주고 말았다. 물러 터진 녀석. 루크의 가슴에 기대는 영애들의 볼이 새빨갰다.
좋겠지. 저렇게 예쁘고 잘생긴 사내와 함께 춤을 추는 일이 어디 흔하겠어? 그 와중에 누군가 다가와 내게도 춤 신청을 걸었다. 쳐다보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하자 무례하다는 핀잔을 듣는다. 알 게 뭐야.
그렇게 일곱 곡이 흘렀다. 루크는 잔뜩 지친 표정이었다. 제가 무용수도 아니고 일곱 곡이나 연달아 추는데 피곤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결국 일곱 곡이 끝나자마자 제게 달려드는 소녀들을 물리치고 루크가 내게 돌아왔다.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형아 말 안 들어서 벌 받은 거야. 목이나 축이라고 물을 건네주자 아이가 꼴깍, 꼴깍 잘도 마셨다. 예쁜 것.
그때였다.
갑자기 인파가 갈라지더니 한 사람이 우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동시에 장내가 고요해진다. 나는 본능적으로 루크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물잔을 내려놓은 루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는.
“……폐하?”
멍하니,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보며 황제를 불렀다. 황제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와 함께 춤을 춰주지 않겠나? 델라윈 소공자.”
“……예?”
“무척 즐거워 보여서 말이야.”
마지막 말에 뼈가 있다고 느낀 건 나만이 아니겠지. 루크가 망설이며 되물었다.
“하지만 사내인 제가 어찌 감히…….”
그러나 그 망설임은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참을성이라곤 쥐뿔만큼도 없는 황제가 루크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겨 제 품에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고는 말릴 틈도 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루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황제에게 끌려갔다. 황제가 루크의 허리를 한 팔로 강하게 감싸 안으며 경쾌한 스텝을 밟는다.
루크는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착실하게 황제의 스텝을 따라갔다. 황제가 즐겁게 웃으며 루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힌다.
“잘…… 어울리네요.”
어느 부인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리자, 내 손에 들려 있던 루크의 물잔이 박살 나있었다. 깨진 파편이 손에 박혔다. 아프다.
* * *
황제와 함께 두 곡을 춘 루크는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 황제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대로 함께 나간 것이리라.
“하…… 하하…….”
가슴속에 활화산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인파를 헤치고 바깥으로 향했다. 정원 어딘가에는 있겠지. 아마도 인적이 드문 곳. 능구렁이 같은 황제가 루크를 잡아먹기에 그만큼 좋은 곳도 없다.
가만 안 둬. 루크한테 손 하나 까딱해봐. 황제고 나발이고 다 부숴 버릴 거야. 멸문, 까짓것 당하고 말지 뭐.
그렇게 얼마나 찾았을까.
바람결에 루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워요.”
루크! 나는 헐레벌떡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기둥만 돌면 바로 보일 위치까지 다다랐을 때.
“왜 그러셨어요, 저한테.”
“…….”
“왜 편지도 한 장 안 써주셨어요?”
루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황제를 추궁했다.
뭐…… 뭐야. 이건 무슨 상황이야. 절로 발걸음이 멈추었다.
“……미안하다.”
“…….”
“그때는 사정이 있었어.”
“무슨 사정이요.”
“…….”
“말해보세요. 무슨 사정이었는데요.”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크가 거의 울듯이 소리쳤다.
“저한테 그런 말까지 남겨두고, 그래서 사람 기다리게 해놓고! 왜 편지도 안 써주셨냐고요!”
“……루크.”
“정말 미워요. 폐하 정말 미워요.”
그런 말? 그런 말이란 게 뭐지. 그때 황제가 루크에게 남긴 말은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게 전부였는데. 그거 말고 또 다른 말이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결국 울음을 터뜨린 루크가 기억의 단편을 끄집어냈다.
“아네모네 아가씨처럼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는데.”
아네모네 아가씨?
그때 황제가 대답했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몰랐다.”
“흑…….”
“너는 어리니까 편지만 보내지 않으면 기억 속에서 금방 잊힐 거라고 생각했어.”
“으으…….”
“네가 아직까지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래서 편지도 안 보내셨어요?”
“그래. 네가 내 죽음으로 상처받는 게 싫었거든.”
그랬던 건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6년 전, 후작저를 떠나며 정 없는 메모 하나 남겨둔 대공이 처음에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음에 꼭 보자도 아니고,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같은 무심한 문장이라니.
어떻게 저렇게까지 정이 없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삼 개월 후, 그가 전쟁터에서 큰 부상을 입고 황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어쩌면……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황제의 대답에 루크는 훌쩍이면서 대답했다.
“저는 폐하께서 저를 완전히 잊은 줄 알았어요.”
“그랬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너무 슬펐어요. 저는 잊으시고 황후 전하랑 혼인까지 하셔서…….”
“혼인?”
“예.”
황제가 조금 당혹스러운 듯 되물었다. 혼인이 왜?
“기억 안 나세요?”
“음?”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
“제가 다 크면, 멋진 남자가 되면 폐하랑 결혼하자고요.”
뭐야!
순간 뛰쳐나갈 뻔했다. 황제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필히 그랬으리라.
“내, 내가?”
“예.”
“……정말로?”
“기억 못하시나 보네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요. 그러실 것 같았어요.”
“루크!”
“저한테 다 크면 혼인하자 하시고, 아네모네 아가씨처럼 기다리게 하시고, 열심히 목이 빠져라 기다렸더니 저 몰래 혼인까지 하셔놓고…….”
몰라요. 루크가 쌩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헉. 기둥 뒤에 딱 붙어 모습을 감추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지금 들통 나면 안 될 것 같다. 달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었다.
황제가 다급히 루크의 손목을 붙잡았다.
“루크, 그게, 그게 말이다.”
“됐어요. 저도 아무나하고 결혼할래요.”
“뭐?”
“아버지가 안 그래도 계속 약혼하지 않겠냐고 물어보셨어요. 형이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저라도 보내겠다고요.”
아버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이때까지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안 되겠다고 거절해 왔는데…….”
“루크, 얘야. 내가 잘못했다. 응? 내가 잘못했어.”
“그냥 할래요.”
“안 돼!”
그 말은 내가 외치고 싶은 말이었다. 안 돼!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황제가 쩔쩔매는 목소리로 루크에게 사과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녀와는 혼인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형님이 억지로 연을 맺어주셔서 어쩔 수 없었다. 네가 생각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황제 폐하의 명령이니 거절할 수가 없었어. 그녀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내 마음에 둔 것은 오직 너뿐이었어. 응? 이것 보아라. 이 팔찌도 아직 차고 있질 않아…….
“팔찌요?”
“그래.”
“……정말요?”
“정말로. 이것 봐.”
황제가 팔을 쑥 내밀었다. 드러난 손목 위로 너덜너덜한 하얀 팔찌와 가죽끈이 함께 보였다. 그것을 본 루크가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타고 황제가 루크를 껴안으며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황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황후를 마음에 두지 않은 것처럼, 황후 역시 나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따로 연인이 있어. 그는 나의 근위기사단장이다.”
“예?”
“그리 놀랄 것 없어. 그들의 관계는 내가 인정했다. 언젠가 그 두 사람을 함께 보내줄 예정이야.”
“하, 하, 하지만 어떻게요? 이미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않으셨어요?”
“내게 계획이 있어.”
그리고 황제가 루크의 귓가에 뭐라 뭐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는 루크의 몸이 화들짝 튀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하지만 폐하! 그것은!”
“쉬이……. 아무튼 네가 걱정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 너는 그저 얌전히, 약혼 따위는 집어치우고, 기다리기만 하면 돼.”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형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
“나를 믿지?”
믿지 마. 믿으면 안 돼, 루크. 절대,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한참을 갈등하던 루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폐하를 믿지 못하겠어요? 이 팔찌도 계속 잊지 않고 차고 계신 분을요.”
“그래, 잘했…….”
“하지만 증거가 필요해요.”
“음?”
“증거 말이어요.”
증거? 증거라니. 무슨 증거가 필요하다는 걸까, 내 동생은. 약속 어음이라도 써줘야 하나? 그때 루크가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안아주세요.”
“……!”
“저를 안아주세요, 폐하.”
뭐!
“왜요, 못 해주시겠어요?”
충격에 말이 나오질 않는다. 심장이 멈춘 것 같다. 아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지금 저 아이가 뭐라고 한 건가. 안, 안, 안, 안아달라고? 아. 신이시여, 맙소사.
“너 지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황제도 나 못지않게 당황한 듯, 되묻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루크가 맹랑하게 대답했다.
“예. 교접하자고요.”
“…….”
교…… 교접이래. 교접이래. 어머니. 아버지. 장남 여기서 죽어요. 심장 멎어서 죽는다고요! 미쳤어. 미쳤나 봐. 내 동생 미쳤나 봐, 어떡해…….
나는 점점 돌이 되어 굳어갔다. 지금 당장 뛰쳐나가서 루크 저 망아지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온몸이 소금기둥이 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다.
그때 황제가 말했다.
“안 돼. 그럴 수 없다.”
“왜요?”
“……교접이니 뭐니 하기엔 너는 너무 어려. 고작 열여섯 아니냐.”
“벌써 열여섯이죠. 혼인도 가능한 나이인 걸요.”
“그래도 안 돼. 적어도 성년은 넘기고…… 그래. 성년은 넘기고 하자.”
“저보고 3년이나 더 기다리란 말씀이세요? 제 첫 몽정이 언제였는데요?”
아아아악……. 몽정이라니. 몽정이라니! 그만해! 그만하라고! 내 안에 있던 천사 같은 모습의 루크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나도 차마 몰랐던 악동 같은 루크. 그 와중에 또 내 동생의 첫 몽정은 언제였을까 싶은 나도 구제 불능이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버릇없어졌구나.”
“폐하께만 이래요.”
“맹랑한 것.”
“그래서 싫으세요?”
“…….”
“싫으시면 말고요.”
그럼 아버지께 혼인이나 해야겠다고 말해야지. 루크가 몸을 돌린 것과 동시에 황제가 그의 팔을 낚아챘다. 그러더니 으르렁거리며 말하기를.
“혼인은 안 돼.”
“…….”
“그렇다고 안아줄 수도 없다. 너는 아직 너무 어려. 대신…….”
그렇게 말한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어. 어어. 어어어어……! 황제와 루크의 입술이 겹친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루크가! 루크가……!
“……이것으로 만족해라.”
한참 후, 입술을 뗀 황제가 그렇게 말했을 때 루크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작 한 번으로요?”
“뭐?”
“3년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한 번은 좀 너무하잖아요.”
“……!”
그러더니 황제의 목을 끌어당겨 다시금 입을 맞춘다. 그것도 무척 진하게.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드디어 정신이 터지고 말았다.
“그만해!”
* * *
라윈으로 돌아온 루크가 제일 처음으로 선언한 것은 황립 아카데미로의 진학이었다.
“아버지가 말리셔도 갈 거예요.”
“…….”
나로부터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아버지는 나 못지않게 핼쑥한 얼굴로 루크를 노려보았다.
“무조건 갈 거예요.”
황제와 사랑에 빠진 루크는 겁이 없었고, 모든 일에 당당했다.
……내가 알던 루크가 아닌 것 같다.
루크의 황립 아카데미로의 진학을 찬성한 사람은 유일하게 어머니밖에 없었다.
“어쩌겠어요. 저맘때의 아이들이 눈 돌아가면 보이는 게 없는데.”
“……부인.”
“딱 당신 닮았네요. 사랑에 빠지면 앞뒤 가리지 않는 게 말이죠.”
그 말에 아버지가 부끄러운 듯 은은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어머니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아, 안 돼. 이대로 가다가는 루크의 고집대로 된다. 어머니에게 유독 약한 아버지가 허락하면 내가 막을 방법 따위는 없으니까.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너, 너는 황제의 남총이 되어도 좋아?! 온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한 몸에 받을 텐데?!”
“응?”
“정신 차리라고, 이 멍청한 자식아!”
나름대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거친 말을 내뱉었는데, 루크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눈만 동그랗게 떴다.
“내가 왜 황제의 남총이 돼?”
“뭐?”
“폐하께서 그렇게 두실 리가 없잖아.”
“그럼 네가 황후라도 되겠다는 말이냐?”
“에이, 설마.”
루크가 달콤하게 웃었다.
“다 계획이 있거든.”
무슨 계획? 시원하게 웃는 루크의 뒤로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내 동생 천사 아니냐고 외쳤던 게 6년 전인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악마의 꼬리다. 그것도 매우 사악한.
결국 루크는 본인의 고집대로 황립 아카데미에 진학하게 되었다. 4년 과정의 아카데미는 기숙사제로, 여름과 겨울에 주어지는 한 달의 방학을 제외하면 외부로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다.
그 까닭에 귀족 영식들은 황립 아카데미로의 입학을 꺼려했다. 어차피 그런 곳에 가지 않아도 알아서 영지와 작위가 주어지는데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곳에 가면서도 루크는 신이 났다. 들떴다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왜 그런지야 뻔했다. 황립 아카데미는 말 그대로 황립이다. 인재들의 교육을 위해 황실에서 세운 아카데미.
분기별로 황제의 시찰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황궁과도 매우 가까워 황제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었다.
……사심이 가득하다 이 말이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제법 착실히 공부하나 싶었던 루크는, 방학 때에도 고향에 내려오지 않고 황궁에 눌러붙었다. 황제의 손님 자격으로 내궁에 머무르면서. 그때마다 나는 고향에 내려오지 않는 동생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지만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루크의 얼굴을 못 본 지 3년이 지났을 때,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양위요?”
3년 차 황제 델루니안이 갑작스럽게 양위를 선포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 이유는요?”
“글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생식기에 문제가 있다나.”
생식기?!
“아무튼 폐하께서 자신은 황제를 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고 대통을 잇지도 못하니 외사촌인 벡스턴 공에게 양위하시겠다는데, 이미 준비는 다 된 모양이더라고.”
마치 3년 내내 양위만 준비한 사람처럼 말이야. 아버지의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다 계획이 있거든.’
그렇게 말한 루크가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탓이다.
설마, 이거였나.
양위한 황제는 선황이 되지만 그 지위는 무척 모호해진다. 이때까지 양위한 황제가 극히 드물다 보니 선례랄 것도 없어 그의 혼례나 장례와 같은 대사도 임의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황후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황제. 언젠가는 그들을 보내주려고 했다던 황제.
생식기에 문제가 있다고 은근슬쩍 소문을 퍼뜨려놨으니 이혼한 황후는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 그리고 한때 황후였던 이를 부인으로 맞아들일 근위기사단장도 치욕스럽지 않겠지.
황후와 이혼한 황제는 선황이 되어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힌다. 그리고 그 옆자리는 루크가 차지한다.
선황의 혼례나 장례에 대한 조례가 없는 상황이니 루크와의 결혼도 흥미로운 소문은 될지언정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다.
이거였구나! 하나하나 들어맞는 가설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맙소사…… 정말로 황제는 루크와 혼인할 생각이구나. 어린 시절에 했던 그 장난 같은 말을 책임지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루크. 내 동생. 내 천사 같던 아이. 그 아이가 변한 것은 모두 대공이었던 황제를 만나고부터다.
그때 내 예감이 맞았어. 대공이 불렀을 때 아이를 보내지 말 걸 그랬어. 그때 느꼈던 불안감은 사실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곱게 기른 딸자식 시집보내는 상황.
나는 차마 울 수도 없어서, 그저 입술만 물어뜯을 뿐이었다.
* * *
그리고 일 년 후.
황립 아카데미 앞에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멈추어 섰다. 아카데미 수료증을 품에 안고 각자 제 갈 길을 떠나던 학생들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저 안에는 누가 타고 있을까. 평민이 다수인 아카데미에서 호화로운 귀족 마차는 볼 일이 드물다.
그때 아카데미 안쪽에서 누군가 뛰어나왔다. 수료증을 품에 안고 헐떡이며 뛰어나오는 금발의 미청년.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청년이 뛰어나오기 무섭게 마차의 문이 열렸다. 아무도 내리지 않지만 문이 열린 마차를 보며 청년은 더욱 밝게 웃는다.
“델루니안 님!”
마차 안으로 뛰어들며 청년이 소리쳤다. 그늘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얼굴이 다정하게 풀린다. 그 모습을 본 청년이 포슬포슬 웃으며 사내의 품에 달려들듯 안겼다. 사내가 청년의 머리칼에 입을 맞춘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어.”
“수료식이 얼마나 오래 걸리던지……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멎으면 큰일이지. 그럼 나는 어떻게 살라고.”
“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죠.”
시종이 문을 닫은 마차는 빠르게 황도를 가로질렀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황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멜링턴 대공, 아니, 멜링턴 선황의 저택. 빠르게 달리는 마차 안. 사내의 품에 안긴 청년이 쪽쪽,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제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는지 아시죠?”
“알다마다.”
“오늘은 안 봐드릴 거예요.”
그 말에 사내가 가볍게 웃으며 청년의 얼굴을 돌렸다. 탐스러운 입술 위로 제 입술을 진하게 찍은 사내가 그 귓가에 속삭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고.”
푸하하, 청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생식기에 문제가 있다던 사내가 할 말은 아니다. 물론 그게 헛소문이라는 것은 자신이 잘 알지만…… 그래도. 청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려 세상에서 최고로 존엄하다는 위치에서 내려온 사내.
그 사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청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청년의 얼굴 위로 행복이 가득했다. 청년이 웃는 것을 보며 사내 역시 따라 웃었다.
그저 행복한 나날의 시작이었다.
외전 4 만약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