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악몽(惡夢)
악몽은 가장 달디단 꿈을 꿀 때 찾아오게 마련이다.
* * *
“폐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눈을 떠 보세요, 폐하.”
단잠을 깨우는 목소리에 검게 죽어 있던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이 뿌예 제 앞에서 어른거리는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홀로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상대가 명랑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
“…….”
“섭섭해요.”
그 순간 고요하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알던 것과 다른 말투를 써서 금방 알아채지 못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루크?”
“예, 폐하.”
연기가 낀 것처럼 뿌옇던 시야가 맑아졌다. 맑아진 시야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태양처럼 찬란한 금발이었다.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빛.
“말도 안 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남자가 만개한 꽃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네가…….”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문 그를 보며 루크가 재미있다는 듯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양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돌아왔어요.”
“돌아왔다고?”
제 품으로 파고든 루크를 반사적으로 끌어안으며 그가 되물었다. 루크는 그의 목덜미에 제 머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폐하가 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
“저 안 반가우세요?”
그는 생경한 시선으로 제 품에 안긴 루크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그것도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는 루크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루크의 시체가 뿌려졌다는 벌판으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간혹 보이는 들짐승들의 발자국만이 그를 반길 뿐이었다.
눈가가 파르르 경련하듯 떨렸다. 이건 모두 거짓이다. 미친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얼마나 그를 그리워했던가. 그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 수 있었지만, 죽은 이를 되살리는 일은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을 다 가졌다는 황제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리움이 지나쳐 병이 되었구나. 그는 그렇게 자조하면서도 제 품에 안긴 루크의 마른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다정하게 품어주지 못한 몸이 비단처럼 감겨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온기가 지나치게 따뜻했다. 살아 있는 사람, 아니, 막 태어난 갓난아기처럼 높은 체온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대답해 주세요, 폐하.”
대답 없이 어깨만 쓰다듬는 그를 향해 루크가 대답을 재촉했다. 고개를 쳐든 루크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연녹색 눈동자는 그를 떠나보낸 지 몇 년이 흐른 지금, 남자가 명확히 기억하는 루크의 몇 안 되는 흔적이었다.
루크가 죽은 이후 그가 쓰던 물건은 모두 사라졌다. 몇 가지는 소각되었고, 몇 가지는 황궁 안의 시종들이 나누어 가졌다.
이후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뒤늦게 찾았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남자가 루크에 대해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은 오직 단 하나. 주지 못한 선물, 그의 눈동자를 닮은 연녹색 보석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 속 루크의 얼굴은 점점 흐려졌다. 그가 좋아했던 것, 그가 즐겨 입었던 옷, 그가 사랑했던 강아지, 그가 좋아했던 꽃, 좋아했던 차, 그가 먹지 못했던 양파 등 그에 관한 모든 것을 기억했지만 정작 루크의 얼굴만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와 함께 오로라를 본 기억도 생생했다. 그가 어떤 소리를 내며 웃었는지, 자신의 밑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몸을 떨었던 것까지 전부 생생했다.
그런데 얼굴만이.
오로지 그의 얼굴만이 떠올리려면 더 아득히 멀어졌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루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 바로 이런 얼굴이었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 얼굴을 잊었을까. 어떻게 이 사람을 잊을 수 있었지?
“……보고, 싶었어.”
울음처럼 튀어나온 대답에 루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햇살처럼 밝고 따뜻한 미소였다. 그 미소에 기어코 남자의 눈에서 농도 짙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환상이라도 좋다. 미친 마음이 만들어낸 거짓이라도 상관없다. 이 얼굴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뭐든 괜찮다.
외로웠으니.
보고 싶었으니.
단 한순간 머물다 가는 꽃바람이라도, 괜찮았다.
돌아온 루크는 원래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남자의 곁을 맴돌았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그가 남자의 곁을 떠나는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주인을 잃었던 내궁의 방은 원주인을 되찾았고, 온갖 진귀한 보석과 아름다운 꽃들이 그의 방을 장식했다.
떠나갔던 봄이 다시 돌아왔다. 마치 꿈결과도 같은 나날들이었다.
“루크.”
“예, 폐하.”
“무엇을 그리 골똘히 보고 있어?”
남자의 물음에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루크가 시선을 들었다. 웃음기 없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남자의 가슴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왜 저런 표정이지? 무엇이 마음에 안 들기라도 한 건가?
그때 루크가 대답했다.
“폐하의 팔이요.”
“응?”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가요?”
조심스러운 손길이 남자의 오른팔에 와 닿았다. 루크가 왜 그리도 어두운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깨닫게 된 남자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럴 리가요. 감히 어떤 자가 폐하께 이런 상처를 남겼습니까?”
계속되는 걱정 어린 추궁에 남자는 결국 한숨처럼 대답하고 말았다.
“그자는 바로 나다.”
“예?”
“네게 저지른 짓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어서 내 팔을 내가 찔렀지.”
“…….”
“이것으로 죄를 전부 씻을 수는 없겠지만…….”
남자의 무릎에 누워 있던 루크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아마도 걱정 때문이리라. 남자는 쓰게 웃으며 루크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이제는 괜찮다. 네가 돌아왔으니까.”
“…….”
“죄는 앞으로 살면서 평생 갚을 테니……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남자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루크가 돌아왔다. 평생 살아서는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던 그가 돌아왔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형벌이었으나, 그가 돌아왔으니 이왕이면 그에게 직접 속죄를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한 남자의 청원에 루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죄는 살면서 평생 갚겠다고요?”
“그래.”
“팔은요?”
“이 팔은 내 속죄의 일부분일 뿐이야.”
“…….”
그 순간 루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남자는 크게 당황했다.
“루크?”
루크는 차가운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팔은 속죄의 일부분이라 하셨죠.”
“…….”
“증명해 보세요.”
증명? 무엇을 증명하란 말인가? 남자는 멍하니 루크를 바라보았다. 루크는 싸늘하게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증명하지 않는다면 저는 떠날 거예요.”
“안 돼!”
떠난다는 말에 남자가 발작처럼 소리쳤다. 무슨 말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떠난다는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떠나지 마. 제발. 내가 뭐든지 할게. 발치에 엎드려 개처럼 빌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그는 루크를 바라보았다.
루크는 크게 동요하는 남자를 보며 잘 벼려진 칼날처럼 차게 말했다.
“심장을 찔러요.”
“뭐?”
“내게 그랬던 것처럼 심장을 찌르라고요.”
그 말에 남자가 경악하여 입을 떡 벌렸다. 그 모습에 루크가 겨울바람처럼 찬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왜, 못하겠어?”
“루크.”
“그럼 나는 갈 거야.”
영원히 떠날 거야. 네 앞에서 사라질 거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 네가 증명하지 않았으니까!
루크의 차디찬 미소는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남자의 심장이 지옥 저변으로 빠르게 추락했다.
안 돼. 제발. 증명할게. 증명할 테니까 제발 가지 마. 떠나지 마. 내 곁에 있어. 부탁이야…….
또다시 그를 잃을 순 없었다.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할게. 내가 속죄할게.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오른편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냈다.
“심장을 찌르면 된다고 했지.”
“예.”
“그리 하마.”
루크의 연녹색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는 잘 벼려진 은빛 단검을 고쳐 쥐었다.
찌르자. 심장을 찌르자. 단 한 번이면 된다. 그러면 그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두려움은 한순간이었다. 자꾸만 망설이는 칼끝에 그는 자신이 루크의 심장을 찌를 때 품었던 비정한 단호함을 실었다. 날카로운 단도가 옷자락을 찢고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고통. 대번 눈앞이 흐려졌다. 갑작스럽게 칼에 꿰인 심장이 미친 듯이 펄떡였다. 아프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입에서도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도 그는 루크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세 걸음 밖에 있는 그가 사라질까 두려웠다.
“이, 제…… 만족……?”
토막 난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니, 추락하는 것은 몸이었다. 어느새 그는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과 처절함에 신체를 벌벌 떨면서.
“가지, 마…….”
“…….”
“제발.”
말 한마디 내뱉는 것이 끔찍하게도 힘들었다. 너는 이런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았구나. 그는 아직도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는 루크를 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미안하다. 널 그렇게 고통스럽게 보내서 미안해.
그때 루크의 차가운 얼굴이 허물어졌다. 햇살 같은 온기를 품은 미소가 되돌아왔다.
“정말로 심장을 찌르셨네요, 폐하.”
“……그래.”
“기뻐요.”
네가 기쁘다니 되었다.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자 입을 뗄 때였다. 루크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어요.”
“……뭐?”
“이렇게 망가지는 폐하의 모습이 보고 싶었거든요.”
눈앞이 하얗게 질려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날 죽여 놓고 혼자서만 행복하면 억울하잖아. 그렇죠?”
“루, 크…….”
“내 이름 부르지 마. 더러우니까.”
한순간 무섭도록 차가운 목소리를 냈던 루크가 다시금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저는 떠나요.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을 거예요.”
“제발, 가지, 가지 마…… 제발!”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 우리는 영원히 남으로 지내게 될 겁니다.”
그 말과 함께 루크의 형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안 돼! 가지 마, 제발 돌아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전부 잘못했으니까!
설탕으로 만든 인형이 비에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발끝부터 녹아내린 루크가 두 개의 연녹색 눈동자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럼 안녕.”
단 두 마디를 남기고.
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생각했다. 아니, 소리쳤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내가 심장을 찔렀잖아. 네게 했던 것처럼 그대로 내 심장을 찔렀잖아. 그럼 떠나지 않기로 했으면서. 내게 머물겠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나를 떠나.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니다. 내가 다 잘못했다. 탓하지 않을게. 내 속죄가 부족했던 탓이라 생각할게. 심장으로 부족하다면 내 다리를 잘라 줄게. 그게 싫다면 내 눈을 파서 줄게. 장님이 되어도 좋다. 다리를 절어도 좋아.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가 되어도 괜찮다. 권력도 다 내려놓고, 너만을 위해서 살아갈 테니.
제발 나를 떠나지 마.
돌아와. 가지 마.
안 돼…….
“안 돼!”
세상이 뒤집어졌다. 빛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무너지고 그 순간 암흑 같은 현실이 밀어닥쳤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심장이 발작하듯이 거세게 뛰었다.
“헉…… 헉.”
폐부에 잔뜩 억눌려 있던 숨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하아…… 하.”
이건 뭐였지? 꿈인가? 꿈이었을까?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가슴을 만졌다. 멀쩡했다. 단검은커녕 핏방울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다. 지나치게 생생한 꿈이었다.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제 오른손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아, 아아…….”
악몽은 끝나지 않았던 것일까.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마치 마비라도 된 것 같았다. 팔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악! 아아아악!”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전하!”
바깥에 서 있던 경호관이 놀라서 달려올 때까지 그의 발작은 이어졌다.
* * *
“……그래서, 일이 그렇게 된 거란 말이지요.”
한숨처럼 흘러나온 내 대답에 샤를마뉴의 전담 비서관인 레이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새벽에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리 약을 써도 진정이 되질 않아 부득이하게 각하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멜슨 박사께선 뭐라고 했습니까?”
“지난달 정기검진 결과에 따르면 건강에 큰 문제는 없으니, 아마도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단발성 발작 같다고 했습니다.”
“발작…….”
“아무래도 최근 상황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나는 또다시 작게 한숨을 쉬며 침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기절한 채 잠든 샤를마뉴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묵직하게 아파왔다.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 할 논문이 있어 잠들지 못하고 작업하고 있던 내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밤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늦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누구인가 싶어서 전화기를 들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의 전담 비서관직을 맡은 레이였다.
그는 굉장히 당황한 목소리로 지금 당장 황궁으로 와주십사 부탁했다. 차량은 이미 보내놨으니 최대한 빨리 오라고 말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그는 일단 빨리 오셔야 한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때 수화기 건너편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비명 같았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사람의 비명.
무슨 정신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건지 모르겠다. 허둥지둥 황궁에 도착해 황태자의 방으로 향하자마자 문 앞에 서 있던 레이가 나를 붙잡고 사정을 설명했다.
갑자기 황태자가 발작을 일으켰는데 수면제를 먹여도 듣질 않는다고, 그 와중에도 계속 나만 찾으니 얼굴이라도 비쳐 달라고 말이다.
그의 말이 영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상황 설명을 듣는 그 와중에도 방 안에서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계속 들렸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수라장도 그런 아수라장이 없었다. 방 안에서 날뛰는 샤를마뉴와 그를 붙잡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는 경호관들, 그리고 주사기를 든 채 곤란해 하는 주치의 멜슨 박사와 간호사.
‘아아아악! 아악!’
‘전하, 제발!’
‘팔이 안 움직여, 안 움직인다고! 아악!’
‘제대로 붙잡아!’
‘라파엘 어디 있어? 라파엘! 라파엘!’
샤를마뉴는 미치광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나를 찾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저 여기 있습니다, 전하.’
‘라파엘!’
‘괜찮으세…… 윽!’
여기 있다고 말을 떼기 무섭게 내게로 고개를 훽 돌린 샤를마뉴가 성난 물소처럼 달려들었다. 충돌 같은 포옹에 뒤로 휘청거릴 때였다.
‘라파엘…….’
마치 결박이라도 하듯 내 허리를 강하게 껴안은 샤를마뉴가 눈물 젖은 얼굴을 내 목덜미에 파묻고 비볐다. 뜨끈한 열기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가지 마. 제발 날 떠나지 마.’
‘전하?’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제가 어딜 간다고 이러십니까. 전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부탁이야. 날 떠나지 마.’
조금 전까지 샤를마뉴를 붙잡으려 용쓰던 경호관들과 멜슨 박사 일행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냐는 의심 가득한 눈빛들이 날아들자 나는 조금 억울해졌다.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이별은커녕 이번 주말에 뭐 하고 놀지 고민하기 바빴는데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부들부들 떨던 샤를마뉴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는 내 답변을 서른 번쯤 듣고 나서야 진정했다. 침대로 데려가 진정제를 투여하고 몇 분이 흐르자 잠이 들었다. 잠이 든 모습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참 여러 사람 놀라게 한다. 나는 땀에 젖은 샤를마뉴의 머리칼을 넘기며 속으로 그를 타박했다. 왜 아프고 그럽니까. 사람 무섭게. 그때 레이가 물었다.
“돌아가실 계획이면 차량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다 깨서 제가 없는 걸 보면 또 난리가 날지 모르니까요.”
그 말에 레이가 ‘아’ 하고 짤막하게 신음을 토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은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그냥 방 한구석에 있는 소파를 쓰겠다고 했더니 그가 간이침대를 넣어주겠다고 했다. 굳이 거절할 일은 아닌지라 알겠다고 대답하자 그가 방을 나섰다.
레이마저 나간 방. 그와 나, 단둘만이 존재하는 너른 방을 둘러보다가 다시금 샤를마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직도 죽은 듯이 잠자고 있었다.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오른팔을 바라보다가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팔이 안 움직이기는.”
아까 잘만 움직였거든요. 마사지를 하듯 조물조물 팔을 매만지자 샤를마뉴가 약한 신음을 흘렸다.
“아픕니까?”
“…….”
“아파도 참아요. 당신은 좀 혼날 필요가 있어.”
나는 조금 더 강한 힘으로 팔을 꾹꾹 눌렀다. 아프긴 아팠는지 샤를마뉴가 신음과 함께 몸을 뒤척였다. 어휴. 나는 결국 손을 떼고 말았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정말…….”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나는 슬슬 내 가슴께를 쓸었다. 아까 바닥까지 철렁 떨어진 것 같았던 심장이 용케도 제 자리에 붙어 있었다. 정말 심장 떨어져 죽는 줄 알았지.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진짜 놀라 죽을 거다.
창백한 샤를마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날카로운 코끝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깊게 잠든 샤를마뉴는 그 손짓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왜 혼자 힘들어해. 내가 괜찮다는데.”
“…….”
“어차피 언젠가 밝힐 일이었잖아.”
지난봄, 정략혼 거부를 천명한 샤를마뉴는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반대라기보다는 기득권층인 귀족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반대였다.
혼인하지 않을 거면 황태자의 자리 또한 내려놓으라는 귀족들의 반발에 샤를마뉴는 묵묵부답을 지켰다.
그러던 와중에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다. 며칠 전 한 매체에서 샤를마뉴의 성 정체성을 폭로한 것이다. 황태자가 사실은 게이이며, 그에게 죽고 못 사는 동성의 연인이 있다는 내용의 기사는 제국 전역을 달구었다.
자신의 폐위 주장에는 초연하던 샤를마뉴가 뒤집어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는 감히 누가 이런 기사를 썼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며 매체를 고소하기에 이르렀고, 동성의 연인이 누구인지 밝히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만 하면 재빨리 법적 대응에 나섰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는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죄책감에 고사해가는 그를 보며 그저 웃었다.
‘어쩔 수 없죠. 평생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
‘전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어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괜찮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늦게 터졌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귄 것이 벌써 3년이었다. 굳이 숨겨가면서 만난 것도 아니니 터지려면 언제든지 터질 수 있었다.
남성 간의 혼인이 합법화된 제국은 실제로 꽤 많은 게이 커플이 결혼했다. 무가사회 특유의 남성우월적인 분위기 때문에 여성 간의 혼인은 아직까지 합법화되지 않았으나 적어도 30년 안에는 합법화가 이루어질 것이라 전문가들은 예상했다.
사회가 이러하다 보니 국민들은 동성혼에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물론 보수적인 상류층에서는 아직까지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지만 말이다.
최초의 동성애자 황태자. 그리고 그의 연인. 내 존재로 이러쿵저러쿵 입방아 찧을 것을 생각하면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 정도는 무시할 수 있었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떠들든 그건 내 인생에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나는 일단 물려받은 유산으로도 이미 부자였고, 사교계 인맥 따위는 전무해 나를 면전에서 조롱할 사람도 없는 상류층이었다.
유일한 가족인 에반은 이미 우리의 관계를 인정한 지 오래였고, 최근 황실에 독점적으로 제공했던 신기술에 대한 권리까지 회수하면서 통신 사업은 호황을 맞이했으니 나로서는 거칠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괜찮았는데, 샤를마뉴는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트레스로 인한 발작이라니. 어쩌면 내 몫의 짐까지 그에게 떠넘겨서 이 사달이 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힘들어하지 말아요.”
“…….”
“나는 정말 괜찮고, 당신도 괜찮기를 바라.”
그의 코를 꾹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밑으로 향했다. 모양 좋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함께 노력하기로 했으니까.
반지는 아직도 우리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었다.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약속의 증거. 그 난리통 속에서도 빠지지 않은 반지를 기특하게 바라보다가 그의 거친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잘 자요.”
좋은 꿈만 꾸기를.
* * *
샤를마뉴는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한낮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 일은 내게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미안해.”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와 털썩 주저앉는 샤를마뉴를 보자 마시던 커피가 기도로 들어갔다.
“컥, 큽…… 콜록! 콜록! 뭐 하는, 콜록!”
“괜찮아?”
“휴지, 휴지 좀, 콜록!”
샤를마뉴가 재빨리 휴지를 내밀었다. 커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내며 그를 살폈다. 그는 울적한 얼굴로 내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나라라도 잃었나. 힘없는 모습에 괜히 화가 났다. 나는 휴지를 내던지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뭘 잘못했다고 일어나자마자 무릎을 꿇습니까?”
“……새벽에 말썽 피워서 당신 힘들게 했잖아. 미안해.”
“아니, 뭐 사람이 살다 보면 발작도 하고 난동도 부리고 그러는 거지, 그게 죽을죄도 아니고 무릎을 꿇을 건 또 뭐랍니까?”
“라파엘…….”
“기가 막혀서 진짜.”
황태자 무릎이 저렇게 가벼워서 쓰냐고. 내 짜증에 샤를마뉴가 쭈뼛대며 말했다.
“미안.”
“뭐가요.”
“그냥, 전부.”
미안할 것도 참 많다. 3년 동안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만큼 벽돌을 쌓았으면 이미 50층짜리 빌딩을 짓고도 남았을 것이다.
진짜 미안할 짓을 저지르고 미안하다고 하면 몰라. 물론 그랬다면 진즉 헤어졌겠지만, 그가 사과하는 것은 주로 300년 전 먼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였다.
사과받기엔 너무 늦었고, 이제는 떠올려도 예전만큼 아프고 화나지는 않는 일들 말이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뭡니까.”
“…….”
“듣자 하니 자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던데요. 무슨 나쁜 꿈이라도 꿨어요?”
나쁜 꿈이라는 단어에 샤를마뉴의 얼굴이 장마철의 하늘처럼 암울하게 젖어들어갔다. 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응. 악몽을 꿨어.”
“무슨 꿈이었는데요?”
“당신이 날 버리고 떠나는 꿈.”
“흠.”
개꿈이네. 나는 심드렁하게 시선을 돌렸다. 샤를마뉴가 일어나기 전까지 읽고 있던 신문이었다. 오늘 자 신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매번 비슷한 일들의 연속일 뿐이다.
“내가 가지 말라고 빌었는데도 당신이 떠나서…….”
“그랬습니까.”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이번 생은 물론이고 다음 생, 다다음 생에도 절대 만나지 않을 거라고 해서.”
“음. 제가 잘못했네요.”
꿈속의 내가 나쁜 새끼네. 왜 그런 말을 했담. 전생의 일 때문인지 이별에 대해 거부감을 넘어 공포를 느끼는 샤를마뉴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수그렸다.
“나 버리지 마…….”
“어제 안 버린다고 서른 번은 말한 것 같은데요.”
“안 떠날 거지?”
“서른한 번째 말하겠습니다. 안 떠나요.”
어차피 내 인생은 샤를마뉴한테 저당 잡혔다. 나는 샤를마뉴에게 보이지 않게 내 사진이 나온 페이지를 접어 신문을 갈무리하며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완전히 정체가 밝혀졌다. 라파엘 드마뉴라는 이름부터 마뉴의 백작위를 계승한 인물이라는 정보, 현재 달턴 스쿨 최고경영자 과정을 다니고 있다는 근황과 혈족으로는 삼촌인 라윈의 공작, 에반 델라윈이 있다는 가족 사항까지 모두 말이다.
당분간 좀 귀찮아지게 생겼다. 일단 함부로 내 사진과 정보를 공개한 신문사를 고소할 계획부터 세우며 나는 샤를마뉴에게 못을 박듯 말했다.
“안 헤어진다고요.”
샤를마뉴가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내가 눈앞에 있는데도? 흐음. 이를 어쩐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지?
그때 내 시선의 끝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그것은 내가 접어놓은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광고면이었다.
문득, 예전에 그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벌써 3년도 전의 일이지만 그날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내 멋대로 약속을 깨버리고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영화. 영화라.
“전하.”
“응?”
나는 손끝으로 신문을 톡톡 두드리며 그에게 웃어 보였다.
“오늘 시간 괜찮으면, 영화 한 편 보러 갈까요?”
* * *
그와 함께 도착한 곳은 9지구에 새로 생겼다는 자동차 극장이었다.
“39루블입니다.”
“아, 뒤에 선 차들 것까지 계산할게요.”
“예?”
“총 다섯 대요.”
지갑을 꺼내 뒤에 따라온 경호 차량의 입장권까지 결제하자 매표소 직원이 별 희한한 사람을 다 본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오늘 신문에까지 내 얼굴이 실렸지만 누군지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내가 결제하는 동안 조수석에 앉은 샤를마뉴는 짙게 선팅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웃팅을 당한 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결제를 마치고 창문까지 올리자 샤를마뉴가 다시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운전해도 괜찮아?”
벌써 세 번째 듣는 말이었다. 나는 스크린 앞쪽에 차를 주차하며 대답했다.
“괜찮다니까요. 나름대로 베스트 드라이버라고요.”
3년 전 교통사고로 트라우마가 생겨 한동안 운전을 그만두었다가 최근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달턴 스쿨이 위치한 대학 도시에서 수도까지 자유롭게 운신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에반은 운전기사를 고용하라고 했지만, 주말에 수도로 올 때만 차를 쓸 텐데 굳이 운전기사를 고용할 필요는 없었다. 또, 주말에는 샤를마뉴와 단둘이서 편안한 시간을 갖고 싶었고 말이다.
하지만 샤를마뉴는 아직도 내가 운전하는 것이 영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이미 주차까지 끝낸 마당에 계속 자리를 바꾸자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안전 벨트를 풀고 조수석에서 내리려는 샤를마뉴의 팔을 붙잡아 앉히며 속삭였다.
“이제 곧 시작할 텐데, 영화에나 집중합시다. 예?”
“내가 불안해서 그래.”
“그렇게 불안하면 이따가 돌아갈 때 바꾸든가요. 지금은 아닙니다.”
나는 창밖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의 차 전후좌우로 일반 세단으로 위장한 경호 차량이 철통 방어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언제 어디서 기자들이 나타날지 몰랐다.
내 만류에 샤를마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영화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영화 시작 전에 틀어주는 음악을 들으며 의자를 젖혔다. 샤를마뉴가 내 쪽으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밖에서 영화를 보자고 했어?”
“으음…… 그냥요. 갑자기 보고 싶더라고요.”
“이때까지는 맨날 필리프 홀에서만 봤잖아.”
“그게 안전하니까요.”
“오늘은?”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 샤를마뉴의 손을 붙잡아 깍지를 끼우며 대답했다.
“가끔은 이렇게 밖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죠.”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 대답에 하루 종일 어둡던 샤를마뉴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데이트를 즐기고자 하는 것은 그의 오랜 소망이었다. 이때까지 실제로 평범한 데이트를 즐긴 적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그가 평범한 데이트, 평범한 연애에 집착하는 이유는 모르겠다. 어차피 황태자로 태어난 이상 평범한 연애는 글러 먹었다.
데이트만 하려고 해도 이렇게 사복 경호관을 주렁주렁 달고 다녀야 하는데 어떻게 보통 사람들처럼 연애를 할 수 있겠는가.
그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연애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하물며 나도 포기했을진데, 샤를마뉴는 아직도 평범한 연애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이 300년 전 본인이 이룩한 통일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황태자라는 지위에 대한 거부감으로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음악이 흐르던 라디오에서 영화의 오프닝곡이 흘러나왔다. 나는 깍지를 낀 상태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바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오프닝 화면이 떴다.
『영원한 계절』
샤를마뉴가 보고 싶다고 했던 로맨스 영화의 제목은 퍽 낭만적이었다. 영원한 계절이라. 나는 어두워지는 창밖을 흘낏 바라보았다가,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며 다시금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영화가 끝나자 이미 밤이 깊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우리는 내가 해주는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샤를마뉴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맨션으로 왔다.
“마땅한 재료도 없는데 역시 외식이 낫지 않을까요?”
간단한 요리라도 할까 싶어 냉장고의 문을 열었지만 주말에만 오는 집인 터라 냉장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를 어쩐다. 오기는 왔는데 딱히 만들 수 있는 게 없다. 맨션으로 오면서 근사한 저녁 식사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미리 포석을 깔아두었지만 이렇게까지 대접할 게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던지라 매우 난처했다.
곤란해하는 나를 보며 샤를마뉴가 대답했다.
“음, 아냐. 안 먹어도 돼.”
“예?”
“굳이 나가서 먹을 정도로 배가 고픈 건 아니니까.”
그럼 여기까진 왜 왔어? 냉장고 문을 붙잡은 채로 어이없어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그냥 이리 와서 앉아.”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지독히도 피곤해 보였다. 지난밤에 발작을 일으킨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그의 옆에 앉는 대신 의자에 올려두었던 외투를 걸쳐 입었다.
“어디 가게?”
“잠시 식료품점에 다녀오겠습니다.”
“난 정말 괜찮다니까? 나가지 마.”
“전하 안색을 보니 뭐라도 드셔야 할 것 같아서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나가지 말라고 나를 말리는 샤를마뉴를 다독인 후 나는 재빨리 인근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문을 닫지는 않았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가게는 열려 있었다. 당근과 양파와 양배추 등을 잔뜩 담고 계산을 하는데 식료품점의 주인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왜 그러십니까?”
긴가민가하며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식료품점 주인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누구랑 좀 닮은 것 같아서.”
“그런가요?”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있을 걸요. 나는 속으로만 대꾸하며 그가 넘겨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제가 바로 그 라파엘 드마뉴입니다. 황태자의 애인이죠. 이런 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다른 가게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돌아오는 길. 오늘 하루 TV를 틀지 않아 뉴스에도 내 얼굴이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신문을 통해 제국 전역으로 퍼진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샤를마뉴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개성 있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들 긴가민가하면서 저 사람이 그 사람인가 하고 의심하다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무심하게 행동하면 아닌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귀찮다. 과일과 채소가 든 봉투를 고쳐 잡으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불편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나 혹시나 하는 의심들은 귀찮은 날파리처럼 나를 맴돌았다. 손을 아무리 휘저어도 떨어지지 않는 왜곡된 시선들. 지금이야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래서 샤를마뉴가 그토록 예민하게 굴었나 보다. 제국에서 황태자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보다 수십 배, 아니, 수천 배는 더 시달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샤를마뉴가 가여워졌다.
내가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맨션의 문을 열었을 때다.
“……전하?”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어쩔 줄을 모르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샤를마뉴와 눈이 마주쳤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라파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필요한 물건을 사서 돌아오기까지는 대략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맨션 앞을 지키고 선 경호관들이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던 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 텐데 갑자기 왜 이러나 싶다.
사 온 물건들을 내려놓고 다가가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자 샤를마뉴가 억눌린 숨을 토해냈다.
“내가…… 나 때문에.”
“예?”
“이러려고 당신의 곁에 남은 게 아닌데.”
“전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책임질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내가 다 책임지고 지켜줄게. 그러니까 라파엘. 제발 나 버리지 마. 그러면 안 돼. 못 견뎌. 심장이라도 줄 테니까.”
횡설수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샤를마뉴를 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발작이 떠올랐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데. 떠나지 않는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야? 답답해진 나는 그대로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에 벌벌 떨고 있던 샤를마뉴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속눈썹에 눈물이 대롱대롱 맺혀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게 참 예뻐 보였다.
그가 진정이 되자 입술을 떼고 물었다.
“도대체 왜 이래.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힘들어서 이러는 건데?”
“…….”
“말해봐, 샤를마뉴. 응?”
아이를 달래듯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촉하자, 샤를마뉴가 다시 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신문.”
“응?”
“신문에 당신이 나왔어. 나 때문이야.”
땅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신문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펼쳐진 페이지는 내 얼굴이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찍혀 있는 이슈 면이었다.
이걸 봤구나. 갑자기 그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지 전부 이해가 갔다. 샤를마뉴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나를 끌어안으며 울음을 토해냈다.
“내가 책임질게. 당신 사진 퍼뜨린 놈들, 내가 싹 다 잡아넣을 거야. 당신한테 피해가 가는 일 없도록 할게.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테니까.”
“…….”
“……버리지 마. 나 버리면 안 돼.”
그는 필사적으로 나를 붙들었다. 버리지 말라는 속삭임은 애원에 가까웠다.
하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책임을 진다고요.”
“그래.”
“어떻게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끔찍하게 차가웠다. 일부러 그렇게 낸 것은 아니었지만,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고 하는 샤를마뉴가 조금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나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 어디가 샤를마뉴를 자극한 걸까. 내 목소리를 들은 그의 얼굴이 일순 흐트러지더니,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갔다.
“……심장을, 원해?”
그리고 튀어나온 뜬금없는 말. 나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예?”
“심장을 찌르면 떠나지 않을 건가?”
“그게 무슨 소리…….”
“그래도 떠날 거잖아!”
갑자기 그가 천둥처럼 크게 소리쳤다. 순간 깜짝 놀라 말을 잊을 정도였다. 아니,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무래도 조짐이 좋지 않았다. 또다시 발작을 할 모양이었다.
“심장을 찔러도 떠났으면서!”
“전하!”
“다리? 다리를 원해? 아니면 눈알? 뭘 바라는 거야! 뭘 찌르면 안 떠날 거냐고!”
“찌르긴 뭘 찌릅니까! 정신 좀 차리세요!”
그 순간 샤를마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털썩,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그가 두 손으로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전부 다 줄게. 당신이 원하는 거 뭐든 다 줄 테니까!”
“전하!”
“떠나지 말란 말이야!”
비명 같은 외침이었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내 다리를 끌어안고 엎드려 우는 샤를마뉴를 바라보았다. 그의 넓은 등이 경련하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흐느끼는 숨소리가 그가 만든 둥그런 동굴 속을 튀어 올랐다.
미칠 것 같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거야.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야. 내가 너에게 그토록 신뢰를 주지 못했나? 그래서 그런 건가?
“전하.”
“가지 마…….”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가지 말라고.”
“안 갑니다. 안 간다고요. 평생 전하의 곁에 있을 겁니다. 영원히요.”
그래도 샤를마뉴의 굽은 등은 펴질 줄을 몰랐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그의 등을 껴안고, 나의 진심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며 속삭였다.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신가요.”
“…….”
“언제라도 금방 떠날 것 같습니까?”
떠난다는 말에 샤를마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또 우는 건 아니겠지. 울지 마. 머리 아프다. 재빨리 그의 등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절대로 전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
“이런 일로 헤어질 거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고작 이런 일로 허무하게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두 번의 죽음을 겪고 나서야 간신히 시작한 사랑이다. 그가 없으면 곤란한, 아니, 살 수 없는 사람은 나였다. 아직도 그가 비행기만 탄다고 하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불안한데 그를 두고 내가 어떻게 헤어지자고 할 수 있겠는가.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믿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혼자서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건, 누구 한 명에게 기생해서 살아가겠다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의미였으니까.
“전하, 저는 괜찮아요.”
“……라파엘.”
“제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샤를마뉴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경악스러운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왜 말 안 했어?”
“전하께서 지금처럼 반응할까 봐서요.”
“라파엘 드마뉴!”
“전 괜찮습니다. 크게 신경 안 써요. 어차피 다 고소해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샤를마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가 터질 만큼 세게 깨무는 꼴이 보기 싫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살살 매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런 일 때문에 전하를 떠나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누구 좋으라고 헤어집니까?”
나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는 꼴 보면 속이 뒤집어질 거다. 아니, 어쩌면 진짜로 납치해서 섬으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나도 몰랐던 사실이지만, 나는 욕심이 꽤 많은 사람이었다.
내 말에 샤를마뉴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 안 떠나?”
“예. 안 떠납니다.”
“모든 게 내 잘못이라도?”
“전하께서 뭘 잘못했습니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샤를마뉴가 뭘 잘못했지? 그는 잘못한 게 없다. 그리고 나도 잘못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사랑했을 뿐이다.
“전하께선 잘못한 게 없습니다.”
“…….”
“잘못한 건 자기들 마음대로 우리를 흔들려는 사람들이죠.”
우리의 관계를 끄집어내어 함부로 상처를 주고 제 마음대로 뒤흔들려는 자들. 그들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잘못이 없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내 대답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울먹이는 샤를마뉴를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아까 사 온 우유를 꺼내 데우고 꿀을 살짝 탔다.
어릴 적, 내가 악몽을 꾸고 무서워서 울고 있으면 엄마는 이렇게 우유를 타서 주곤 했다. 그걸 마시면 아무리 무섭고 두려운 악몽이라도 잊고 꿈결처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걸 마시고 내가 떠나는 악몽일랑 한시라도 빨리 잊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으면 한다. 자신의 앞에,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나를.
“드세요.”
따끈하게 데운 우유가 가득 담긴 머그잔을 내밀자 샤를마뉴가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그가 우유를 마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꿈속의 제가 전하께 심장을 찌르라고 했나요?”
머그잔을 내려놓던 샤를마뉴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전하는 또 곧이곧대로 심장을 찔렀고요?”
조금 전, 발작에 가까웠던 그의 상태를 상기하며 묻자 샤를마뉴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약간 화가 났다.
“찌르라고 찌릅니까? 바보예요?”
“안 찌르면 당신이 떠난다고 했으니까.”
뭐 그런 개 같은 새끼가 다 있어. 나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앞으로는 찌르지 마세요. 그 새끼는 저 아닙니다.”
“…….”
“전 전하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심장을 요구하지도 않고, 눈을 찌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사람을 뭐로 봤으면 심장을 찌르랬다고 진짜 찔러.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그런 짓 안 해도 곁에 있을 거라고요. 알아들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친 말투에 샤를마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도 울어 새빨개진 눈가가 어울리지 않게 토끼를 연상시켰다. 저 모습까지 귀엽다니 나도 참 중증이다.
“알아들었으면 웃어요. 웃는 얼굴이 훨씬 보기 좋으니까.”
“응.”
놀랐던 것도 잠시. 샤를마뉴의 눈이 곱게 휘었다. 반달이 뜬 연녹빛 호수 같았다. 그 눈을 보며 나도 마주 웃었다. 문득 낮에 본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다.
‘아무리 추운 바람이 불어도 너와 함께하는 계절은 언제나 봄일 것이다.’
너와 함께하는 계절은 언제나, 봄.
* * *
악몽은 끝나지 않는다.
* * *
“폐하.”
달콤한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를 울렸다.
“눈을 떠 보세요, 폐하.”
눈을 뜨기 전에도 알 것 같았다. 너구나. 너로구나. 네가 다시 돌아왔구나. 남자는 재빨리 눈을 떴다. 눈앞이 흐렸지만 단 하나, 화려한 금발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물론이다.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재빨리 손을 뻗어 제 앞에 선 남자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꽃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돌아왔구나, 루크.”
루크가 명랑하게 웃으며 남자의 목덜미에 코끝을 문질렀다.
“폐하가 보고 싶었어요.”
남자는 루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나도 보고 싶었다.”
정말로 많이 보고 싶었노라고.
돌아온 루크는 원래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남자의 곁을 맴돌았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그가 남자의 곁을 떠나는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주인을 잃었던 내궁의 방은 원주인을 되찾았고, 온갖 진귀한 보석과 아름다운 꽃들이 그의 방을 장식했다.
떠나갔던 봄이 다시 돌아왔다. 마치 꿈결과도 같은 나날들이었다.
“폐하.”
“응?”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느 한낮. 긴 소파에 앉아 남자의 머리를 제 무릎에 누이고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루크가 뜬금없이 말했다.
“왜 이렇게 저에게 잘해주세요?”
루크의 물음에 남자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왜 이렇게 잘해주느냐고? 그는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를 그렇게 보내고, 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너는 결코 모를 거다.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시시각각으로 떠올랐다. 푸른 하늘을 보면 이렇게 맑은 날에 그와 함께 산책 한 번 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러웠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와 창가에서 비 구경을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따뜻한 차를 보면 그가 좋아했던 엽차를 함께 마셔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고, 책을 보면 더듬더듬 글을 읽는 그에게 칭찬 한 번 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모든 게 후회였고, 죄책감이었다.
“……네게 해주지 못한 것이 많다.”
“해주지 못한 것이요?”
“그래.”
“그래서 이렇게 잘 대해주시는 거예요?”
“……그래.”
루크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는 돌연 불안해졌다. 왜 그런 표정이야. 뭐가 불만인데?
“그거 정말로 저를 향한 게 맞나요?”
“뭐?”
“폐하께선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으셨잖아요.”
그 순간 남자의 심장이 철렁,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남자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마음에 품은 사람은 너였어.”
달콤한 수사 없이 튀어나온 고백은 초라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진심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뚱한 루크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어요? 7년이나 저를 대용품으로 쓰셨잖아요.”
“제발 믿어다오. 나는 너만을…….”
“증명해 보세요.”
증명?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를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 보시라고요.”
“……어떻게?”
“흐음. 글쎄요.”
루크의 커다란 눈이 야살스럽게 휘었다.
“저를 위해서 심장을 찌르실 수 있나요?”
“심장을?”
“예. 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주실 수 있죠?”
심장을 찌르라? 남자는 당혹스러운 기분에 루크를 돌아보았다. 심장을 찌르면 사람은 죽는다. 아무리 만인지상의 황제라 하여도 목숨은 하나뿐이다. 한데 심장을 찌르라니. 남자의 망설임을 눈치챈 루크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왜요, 못 하시겠어요?”
“루크.”
“증명하지 못한다면 제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네요.”
그렇게 말을 끝낸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별을 고하기라도 할 듯 단호한 행동에 남자가 다급하게 루크를 붙잡았다.
“기다려!”
“증명하실 거예요?”
“그래. 증명하마.”
남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증명하지 않으면 루크가 떠난다. 심장을 찔러 죽는 것보다 루크가 떠나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끔찍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선택은 불가피했다.
루크는 행복하게 웃으며 날듯이 다가와 어디에서 난 건지 모를 단검을 내밀었다. 남자는 단검을 받아 들고 검을 빼었다. 은빛 칼날이 햇빛에 시리게 반짝였다.
찌르자. 한 번에 심장을 꿰뚫자. 그러면 루크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봄에 머무를 수 있다. 행복해질 수 있다.
그가 단검을 높게 쳐들 때였다.
[……마세요. 그 새끼는 저 아닙니다.]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 전하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가슴을 찌르려던 검이 허공에 우뚝 멈추었다.
[심장을 요구하지도 않고, 눈을 찌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 목소리는 뭐지? 남자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낯선 목소리다. 분명 낯선 목소리인데, 어쩐지 많이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짓 안 해도 곁에 있을 거라고요. 알아들어?]
심장을 찌르지 않아도 자신의 곁에 남아주겠다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왜 멈추세요? 증명 안 하실 거예요?”
“…….”
“이럴 줄 알았어. 폐하께서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제가 아닌 거죠.”
“…….”
“됐어요. 폐하의 마음도 알았으니 전 이제 떠날 거예요.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요.”
떠난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루크의 말은 일견 협박처럼 들렸다. 자신이 떠나려고 하니까 붙잡아 달라고 보채는 것 같기도 했다.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굳어버린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는 절대로 전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환청처럼 들리는 그 목소리는 마치 무형의 사슬 같았다. 보이지 않게 그를 옭아매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주술.
이상한 것은 그 목소리에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그 자신이었다. 남자는 눈만 껌뻑이며 이 상황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루크는 떠나려고 하고, 자신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를 붙잡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렵거나 초조하지 않는 이 상황은 뭘까.
“……너무하세요.”
끝끝내 자신을 붙잡지 않는 남자를 보며 루크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원망했다.
“이젠 정말로 절 잊으셨군요.”
아니야. 남자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내가 널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고. 너만큼 내 인생에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사람이 없다고. 네가 있어 내 인생이 밝게 빛났노라고.
그런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혀가 굳어버린 것처럼 그는 눈알을 굴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방의 문고리를 잡은 루크가 울듯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차라리 잊어버리세요.”
“…….”
“저도, 그때의 일도, 폐하의 오른팔도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찬란하다 못해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똑바로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는 섬광에 남자가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휘몰아치는 꽃향기가 바람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럼 안녕히.”
그리고 사라지는 그의 체취.
쿵.
문이 닫혔다. 바람은 사라졌다. 꽃향기도 남지 않았다. 남자는 눈을 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방. 그의 손 위에서 번쩍대며 빛나던 검이 쨍그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라졌다. 루크가 사라졌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남자의 눈에서 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 아아…….”
잡아야 했는데. 붙잡았어야 했는데. 가지 말라고,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붙잡고 빌었어야 했는데. 갑자기 몸이 움직이질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떡하지. 네가 진짜로 가버렸는데 나는 이제 어떡하지. 아직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은데. 이까짓 심장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줄 수 있었는데. 네가 행복해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못할 것이 없었는데.
남자는 고통스럽게 주저앉았다. 아까까지 움직이지 않던 몸이 이제는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것마저도 원망스러워 남자는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어떻게 하면 널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돌아와.”
내게로 돌아와.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널 실망시키지 않을게.
“부디.”
그러니까 부디.
“떠나지 마.”
나를 떠나지 마.
그때였다.
“전하?”
끼익, 굳게 닫혔던 방의 문이 다시 열렸다.
“어째서…….”
그리고 다시금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남자는 고개를 쳐들었다. 빛을 등진 형체가 보였다.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리고 검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
“왜 울고 계신 겁니까?”
그는 분명 루크가 아니었다.
“자꾸 울면 머리만 아파요.”
루크가 아닌데…….
“그만 웁시다. 예?”
어째서 당신에게서, 그의 향기가 나는 거지?
“제가 안 떠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검은 머리칼의 사내는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빛이 희미해지며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루크와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사내였다. 난처하게 웃는 모습이 어여쁜 게 전부인 그런 사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심장은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떨림이 마치 주인을 되찾은 개가 날뛰는 것과 비슷해서 남자는 당혹스러웠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저 남자는 루크일 수가 없어. 루크와 닮은 면이 하나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거야. 그러나 그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그의 다정한 시선이 너무나도 닮아서 남자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저 사내가 루크라면.
돌아오라는 간곡한 청원에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거라면.
남자는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크?”
그러자 사내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이윽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기를.
“예, 전하.”
남자의 심장이 기어코 멈추고 말았다. 그는 허둥지둥 양팔을 뻗어 스스로 루크라고 밝힌 남자를 끌어안았다.
“가지 않았구나. 가지 않았어.”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떠나지 않는다고요.”
“맞아. 그랬지.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했지.”
“예. 그러니 안심하고 주무세요. 저는 항상 여기 있습니다.”
“정말로 떠나지 않을 거야?”
“절대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눈을 감으세요.”
쉬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남자의 지친 몸을 감싸 안았다. 남자는 사내가 이끄는 대로 눈을 감았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선 남자가 눈을 감기 무섭게 세상은 따뜻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면…… 루크가 아니라 라파엘이라고 불러주셔야 합니다.”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에 그런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 * *
그리고 이른 새벽. 그는 눈을 떴다.
새벽 내내 악몽에 시달린 탓에 상의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머리카락도 불쾌하게 착 달라붙은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몸부림을 쳤구나 싶었다.
그는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쓸어넘기려고 했다. 품 안에 안긴 한 사람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남자의 체중. 그리고 따뜻한 온기. 제 팔뚝을 베개 삼아 잠든 검은 머리통을 보자 갑자기 현실감이 몰려들었다.
“라파엘.”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곤히 잠든 라파엘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잠투정이라도 하듯 제 겨드랑이 사이로 조금 더 파고들었을 뿐이다. 그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당신이었구나.
악몽 속에 무형의 사슬처럼 목소리 하나만으로 자신을 옭아맨 남자. 그때는 그저 저주인 줄 알았으나 깨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것은 구원이었다.
만약 그때 그가 심장을 찔렀더라면, 끔찍한 악몽은 언제고 계속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구했어.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제 품에서 잠든 라파엘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나를 구해줘서. 내 꿈에 나타나 줘서.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영원히 그 지옥을 헤맸겠지. 떠나간 봄을 그리며, 영원한 겨울을 살았을 거야.
악몽은 끝났다. 형체 없는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져 증발했다. 남은 것은 사랑스러운 이에 대한 깊은 애정뿐이다. 현실에서도 자신을 구원하더니 꿈에서까지도 자신을 구제해준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이에 대한 연정.
이 연정만 있다면, 그는 두려울 게 없었다.
“사랑해.”
그는 라파엘의 귓가에 달콤한 진심을 속삭였다. 이 속삭임이 그의 꿈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를 기원하며.
“잘 자.”
좋은 꿈 꾸기를.
외전 3 악몽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