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후일담 (31/34)

외전 2 후일담

그날은 하늘이 파랗고 간밤에 비가 내려 공기가 서늘한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좋은 아침.

이른 아침부터 전화벨이 울렸다. 구치소에서 나온 이후로 부쩍 아침잠이 많아진 탓에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도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힘겹게 수화기를 들자, 그곳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

-자고 있었어?

예, 라고 짧게 대답하며 한쪽 눈만 떴다. 현재 시각 8시 23분. 마냥 이른 아침도 아니었다.

내가 아직도 비서관이었다면 벌써 출근해서 일정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 사람이 부지런해지기는 어려워도 게을러지기는 쉽다니까.

들리지 않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파랬다. 좋은 날이구나.

“그곳은 지금 12시 25분이죠?”

-응. 시차 적응이 안 돼.

“무슨 네 시간 갖고 시차 적응을 논합니까.”

하여튼 엄살도 심하다. 피식 웃으면서 타박하자 그도 낮은 웃음을 흘렸다. 문득 그가 있는 블루독 제도도 황도처럼 날이 좋을까 궁금해졌다.

이틀 전, 샤를마뉴는 올해로 150주년을 맞이한 해군 창설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국 극동부의 블루독 제도로 날아갔다.

블루독 제도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두 개의 큰 섬과 여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섬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마치 개가 앉아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블루독이라 이름 붙은 곳. 제국의 중심부인 수도와는 네 시간의 시차가 날 정도로 먼 곳이었다.

그가 블루독 제도로 가게 되었다고 처음 말했을 때, 나는 깜짝 놀라서 스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블루독이요?’

‘응. 일정이 그렇게 잡혔어.’

‘…….’

안 가면 안 됩니까, 라는 철없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황실의 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스푼을 줍는 손이 덜덜 떨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서버를 불렀다. 스푼을 바꿔 달라고 요청하는데 샤를마뉴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쓰게 웃으며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내 손을 도닥였다.

‘라파엘.’

‘…….’

‘아무 문제 없을 거야.’

‘…….’

‘꼭 돌아올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그런다고 걱정이 안 될 리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샤를마뉴는 그런 내 눈치를 보면서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말로 괜찮을 거야, 그때 이후로 황실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게, 제발, 라파엘…….’

결국 그가 떠나는 날 공항까지 함께하는 것으로 합의는 이루어졌다.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갈 수는 없으니 공항까지라도 함께하자고.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자고.

‘……다녀오세요.’

게이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 입구에서 배웅하던 중이었다. 억지로 웃는 나를 보며 샤를마뉴가 어두운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닿은 곳은 내 경직된 뺨. 단단한 엄지가 내 뺨을 훑었다.

‘다녀올게.’

한참 동안 소중한 것을 만지듯 뺨을 어루만진 샤를마뉴는 일순간 손을 떼고 몸을 물렸다. 그가 등을 돌리기 전에 내가 먼저 몸을 돌렸다. 그가 떠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그의 등이 아니라 다정한 얼굴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날아서 블루독에 무사히 도착한 샤를마뉴는 그 날 이후로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걸려오는 전화에 공포에 질려 있던 심장이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로, 한 손가락으로는 전화선을 배배 꼬며 물었다.

“블루독의 날씨는 어떻습니까?”

-완벽해. 한 가지만 빼면.

한 가지?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그게 뭡니까?”

내 물음에 샤를마뉴가 킥킥 웃으며 속삭였다.

-라파엘 드마뉴.

“……예?”

-모든 게 완벽한데, 글쎄, 당신이 없지 뭐야.

당신만 있으면 완벽할 텐데, 정말 아쉬워. 그가 바람처럼 덧붙였다.

아……. 맙소사. 이런 낯간지러운 말이라니. 나도 모르게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수화기에서 얼굴을 떼었다. 귀가 화끈화끈했다.

“이런 말을 할 때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응. 전혀?

“…….”

뻔뻔한 목소리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못 말려, 진짜.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달아오른 목덜미를 매만질 때였다.

-고작 이걸로 부끄러워하면 300년 동안 묵혀둔 고백은 어떻게 하겠어.

“……전하.”

갑자기 치고 들어온 그의 말에 몸이 잠시 굳어버렸다.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화석처럼 딱딱하게 식었다.

-아, 레이가 찾는다. 이만 끊을게.

“…….”

-사랑해.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뚜, 뚜- 전화가 끊겼음을 알리는 신호음을 들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대답했어야 하지. 저도 사랑합니다? 아니면, 그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요?

모르겠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화창한 길거리가 보였다.

4개월 전만 해도 꽃이 올망졸망 맺혀 있던 가로수에는 이제 푸른 이파리가 싱그럽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에게 전생의 일은 가급적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게 어제 일 같은데.

‘전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응, 뭔데?’

‘……가급적 지난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에반에게서 내가 몰랐던 과거의 이면을 듣고 난 이후로 오랫동안 고민했다. 에반도, 샤를마뉴도 모두 전생을 기억하는 상태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전생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

이런 상황에 우리에게 과연 밝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 없다.

나는 델루니안을 용서할 수 없었다. 진실을 몰랐을 때도 용서할 수 없었고, 진실을 안 이후에는 더욱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에반이 들려준 진실이 사실이라면, 델루니안은 나를 사랑했으나 제 감정도 깨닫지 못해 그토록 처참하게 나를 죽였다는 것이 된다.

그게 말이나 되냐고. 처음에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더욱 미울 것 같았다. 제 멍청함 때문에 나를 죽였다는 그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미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부탁했다. 전생의 일을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네가 델루니안이라는 것을 굳이 내게 상기시키지 말라고.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데, 굳이 말을 꺼내서 나를 더욱 화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나는 샤를마뉴가 당연히 동의할 것이라 생각했다. 원만하게 흘러갈 수 있는 관계에 굳이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샤를마뉴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어째서?’

‘…….’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긴 했다. 맞다 틀리다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샤를마뉴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지 마, 라파엘.’

‘…….’

‘상처가 곪으면 나중에는 더 아프잖아.’

‘…….’

‘마음껏 원망하고, 마음껏 저주해. 욕하고 때려도 좋아.’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한 것인데, 그는 내 속도 모르고 속절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그냥, 당신이 혼자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느 것이 더 아플까? 과거를 덮는 쪽? 아니면,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분노에 몸을 내맡기는 쪽?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비서관직을 관둔 탓에 샤를마뉴와는 자주 만날 수 없었지만 가끔이라도 만날 때면 그는 평소처럼 다정하게 대하다가 문득 ‘이제라도 이렇게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든지,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사랑스러워’와 같은 말을 내뱉어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내 가슴속에는 묻고 싶은 말이 생겼으니, 그건 바로.

“정말로…….”

나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내가 죽고 후회하긴 했는지. 묻기에는 두렵고, 묻지 않자니 고통스러운 의심들이었다.

* * *

점심시간이 지나갈 무렵, 에반이 집으로 돌아왔다.

“왔어?”

“응. 기다렸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의 시선이 식탁으로 향했다. 가사도우미 카멜리아 씨가 만들어 놓은 점심이 식어가고 있었다. 그가 외투를 벗어 옆 의자에 걸어놓으며 중얼거렸다.

“먼저 먹고 있지.”

“아니야. 그보다 일은 어떻게 됐어?”

“……뭐, 항상 그렇지.”

한 박자 느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말없이 웃으며 식은 수프를 데우기 시작했다. ‘항상 그렇지’라는 말은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뜻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참.”

그런 내 뒷모습을 보며 에반이 말을 꺼냈다.

“오늘 네 앞으로 우편물 하나 왔더라.”

“뭐?”

우편물? 설마!

“그거야?!”

에반이 씩 웃었다.

“응.”

“뜯어 봤어?”

“아니, 네가 먼저 뜯어봐야지.”

맙소사. 수프를 데우던 것도 잊고 에반에게 달려갔다. 그가 품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앞면에 독수리 문양의 황립 대학 마크가 찍혀 있는 그것은, 나의 합․불합 통지서였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른 박자로 뛰었다. 붙었을까? 떨어졌을까? 설마 떨어지지는 않았겠지. 설마……!

“아.”

내 짤막한 신음에 에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떨어졌어?”

“…….”

“라파엘?”

끼익, 의자를 뒤로 밀며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초조한 얼굴로 다가왔다. 저 얼굴에 서린 것이 걱정과 염려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봐봐.”

그에게 통지서를 내밀었다. 그가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친애하는 라파엘 D. 드마뉴 씨에게……』

라고 시작하는 통지서를 꼼꼼히 읽는 에반. 그가 이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뭐야. 너 지금 나 속인 거야?”

기가 차다는 듯 허탈하게 웃는 그를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나 합격했어.”

합격했다. 제국에서 경영대학원으로는 제일이라는 달턴 스쿨에!

기뻐서 입이 안 다물어진다. 마음 같아서는 방방 뛰면서 자랑하고 싶었다.

합격했어요! 합격했다고요!

준비도 제대로 못했는데 합격할 줄은 몰랐지.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면서도 올해는 글렀다는 생각밖에 안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터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합격했다!

“그렇게 신나?”

식사하는 내내 헤실헤실 웃는 나를 보며 에반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응, 하고 가볍게 대답하자 그가 되물었다.

“근데 갑자기 무슨 경영대학원이야? 너 경영에는 뜻이 없었잖아.”

물론 없었지. 근데 없던 뜻이 생기기도 하는 게 사람 인생이더라고.

“갑자기 생겼어.”

“……?”

에반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내가 당신의 버팀목이 되어줄게.

5개월 전, 내가 구치소에서 출감했던 날 황후를 알현하고 온 에반은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서 뭔가 일을 벌이겠구나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미 오래전 손을 뗀 가업에 개입해 황실을 압박하는 일일 줄은 몰랐다.

델라윈은 오래전부터 교통과 통신 쪽으로 사업을 발전시켰으며 최근 신기술 개발과 함께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이 개발한 신기술은 다름 아닌 황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무선식 이동 전화기’로, 쉽게 말해 휴대폰이라고 부르는 물건이었다.

휴대폰은 황실과 극히 일부의 부처에서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황실이 신기술 개발에 많은 부분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투자금을 받은 델라윈은 황실에 개인용 전화기의 독점적 사용을 인정했고, 그 기한을 10년으로 한정했다.

말이 10년이지 만약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델라윈에서는 독점권을 계속 연장했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황실에서 받는 특혜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실은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 약속된 10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 독점권으로는 부족하다 여긴 황실은 나를 이용하여 에반을 사로잡고, 에반을 이용하여 델라윈을 압박하려 했다.

실제로 내가 구속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델라윈의 주가는 폭락했다. 내가 기소까지 갔더라면 다시 회복할 수 없었겠지.

황실이 덮어쓸까 무서워 나의 증거물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던 황후의 말은 진실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기술의 영원불멸한 독점권이었다. 델라윈이 무너지면 투자금 회수를 명분으로 신기술을 빼앗아갔을 것이다.

샤를마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자식이 무릎까지 꿇고 간곡하게 빌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을 그들의 욕심을 알고 나니 황실에 대한 티끌만도 못한 정이 뚝 떨어졌다.

내가 저런 이들을 이해한답시고 면전에서 그 모욕을 당하고도 배알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구나. 샤를마뉴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황가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나보다 먼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에반은 그때부터 10년 한정의 기술 독점권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제정부는 어차피 황제의 직속 부처이니 결국 황제를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다.

황실은 크게 동요했다. 그냥 덮을 줄 알았던 건가. 착각도 유분수지. 신분으로 따지면 공작에, 제정부에서 20년에 가깝게 헌신적으로 몸 바쳐 일한 사람을 완전히 매장할 생각으로 고문해놓고 바라는 것도 많다.

황제는 몇 번이나 에반을 황궁으로 초청했지만 에반은 칼같이 거절했다.

그러자 나중에는 협박성 짙은 편지가 도착했다. 문구는 정중하기 그지없으나 핵심 내용은 하나였다.

‘계속 이런 식이면 델라윈에 대한 특혜는 모두 사라질 거요.’

에반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그것을 불에 태웠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일종의 무력감을 느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우울했다.

비서관직도 그만두었고, 그러면서 그동안 쌓은 인맥은 모두 휘발되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 해봐야 에반의 등원을 돕는 정도였다.

짧은 시간이나마 악착같이 공부하고 서류를 준비한 것은 그 때문이다. 델라윈을 이어받아서 그를 돕고 싶었다. 어차피 길어질 소송이고, 소송에서 이기든 지든 델라윈은 한 차례 위기를 맞이할 터였다.

그때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준비를 해야 했다. 에반 혼자서 그 모든 풍파를 맞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첫걸음으로 드디어 달턴 스쿨에 합격한 것이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에반.”

“음?”

“나 열심히 할게.”

식사가 끝나갈 무렵, 맥락 없이 다짐하자 에반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열심히 할게.”

당신과 나, 300년 전처럼 억울하게 당하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

잠시 후, 에반이 대답했다.

“그래.”

“…….”

“열심히 하자. 너도, 나도.”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시선만은 다정했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파란 눈을 마주하며 나는 밝게 웃었다.

* * *

그렇게 또 사흘이 흘렀다. 온 제국이 아침부터 들썩였다. 어제저녁에 나온 아인 퍼스와 소냐 하워드 렘퍼드, 그리고 렘퍼드 백작의 1심 선고 결과 때문이었다.

황실의 압박을 잔뜩 받은 재판부는 세 사람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실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사건을 맡은 변호인단은 지나치게 무거운 결과라며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항소한다는 소리였다.

국민들은 테러리스트보다 그들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들이 더 문제라며 야유를 퍼부었다.

“그런 놈들은 재판이고 뭐고 싹 다 사형시켜야 해!”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두 노인이 보였다. 둥근 베레모를 쓴 노인이 머리가 벗겨진 노인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며 타박했다.

“어딜 감히 내란을 모의해? 이 망할 놈들! 전부 총살시켜!”

흥분한 채로 바락바락 소리치는 노인은 아무래도 극우 보수주의자인가 싶다. 베레모를 쓴 노인이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빙그레 웃었고, 그는 멋쩍게 웃으며 모자를 들어 소란에 대해 사과했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숙여 읽고 있던 신문을 마저 살폈다. 헤드라인은 주요인물 세 명의 1심 선고 결과지만, 정작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따로 있었다.

3면의 한쪽 구석을 장식한 작은 기사에는, 세 명의 사형 선고와 같은 날에 떨어진 누군가의 재판 결과가 실려 있었다.

내란 방조와 살인 미수 등의 죄목으로 징역 17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한 시드니 카턴의 재판 결과가 말이다.

“항소하지 않겠다…… 라.”

징역 17년은 결코 가벼운 형이 아니다. 간신히 사형은 면했지만, 죄목이 죄목인지라 특별사면이나 가석방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감옥에서의 처우가 좋으면 또 몰라.

하지만 제국의 수감시설은 열악한 환경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위생은 말할 것도 없고 수감시설 내의 치안도 그리 좋지 않다. 잘못하다가는 죽어 나오기 십상인 곳이 바로 제국의 감옥이다.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시드니 카턴은 내게 있어 불가사의한 존재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또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내가 시간을 되돌릴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하여 자신이 구속되리라는 것은 몰랐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도저히 그 사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이것도 계략이면 어쩌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상대를 적으로 두면 항상 이런 두려움이 밀어닥친다.

이것도 속임수면 어쩌지. 이것도 계략이면 어쩌지. 내가 잘못 움직여서 또 일을 그르치는 건 아닐까.

여러 차례 증인 출석 요구를 받았지만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은 그러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그의 계략에 말려들까 봐.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는데, 그가 항소도 하지 않고 징역형을 그대로 받는다니 계속 찝찝했다. 아직 풀리지 못한 많은 의문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았다.

갈까, 말까.

1심 선고에서 항소까지의 기간은 2주일. 그 기간을 넘어서 항소하지 않으면 그는 구치소에서 형무소로 이감된다.

시드니 카턴과 같은 중범죄자들은 제국 최북단에 위치한 제17형무소로 보내지니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만날 일은 요원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결론을 내렸다. 일단 가자. 아직 풀리지 못한 의문이 너무 많았다. 따지고 싶은 것도 있었다.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시도라도 해보는 편이 언제나 낫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구치소로 향한 나는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면회 신청을 넣었다. 한참 후에야 응답이 돌아왔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바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면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면회 신청에 응한 것도 내심 당혹스러웠는데, 그것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드니 카턴?”

“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이 시드니 카턴이 맞아? 스스로 확신할 수 없어서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분명 시드니 카턴이 맞았다.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흉터가 그를 증명했다. 그런데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서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면이 부서진 한 사내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깨진 가면 밑으로 드러난 얼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공허하고 쓸쓸한 얼굴이었다.

혼자서 300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건너온 것처럼 텅 빈 얼굴을 한 시드니 카턴은 일견 백발 성성한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외양적으로는 달라진 점이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깜짝 놀란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시드니 카턴이 흐릿하게 웃었다.

“왜요, 놀랍습니까?”

“……조금.”

“비웃고 싶다면 비웃어도 됩니다.”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아.”

애초에 비웃으려고 온 게 아니었다. 나를 이곳까지 이끈 감정은 증오가 아니라 두려움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두려움도 사라지고 없었다. 두려움이 휘발된 자리에 남은 것은 오로지 당혹스러움뿐이다.

“비웃으려고 온 게 아니라면 왜 왔습니까.”

비웃고 싶지 않다는 말에 희미한 웃음마저 거둔 시드니 카턴이 물었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은 역시나 공허하고 삭막하다. 폐허가 된 도시처럼 쓸쓸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한 그 얼굴을 마주하며 힘겹게 대답했다.

“당신이 항소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어.”

“…….”

“도대체 무슨 저의야?”

그 말에 시드니 카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의요?”

그러고는 맥없는 웃음.

“……저의 같은 건 없습니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정말입니다.”

“…….”

“이제는 그럴 힘도 없거든요.”

힘이 없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를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믿겠는가. 300년 전부터 끈질기게 나를 괴롭힌 인간이 이제 와서 힘이 빠졌다고 하는데 믿는 게 더 이상했다.

“사실입니다.”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는 나를 보며 시드니 카턴이 덧붙였다.

“운명에 패배했음을 깨달았는데…… 내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

운명에 패배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고작 징역형 하나 받은 거로 운명 타령을 하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기도 차지 않는다.

시드니 카턴이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역시 보이지 않는군요.”

“무슨 소리야.”

“모든 게 끝났나 봅니다.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어떤 것도요.”

……보이다니?

보인다는 말은 피동의 뜻을 가진 시각적인 동사다.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눈앞에 형상화된다는 말. 근데 뭐가 보인다는 거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가 눈을 천천히 떴다. 옅은 파란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보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가 대답했다.

“당신이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저는 이따금 미래를 봤습니다, 라파엘.”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설마는 역시로 끝나고 만다.

“미래를…… 봤다고?”

“예.”

“어떻게?”

“저도 모릅니다. 그냥 이따금 보였어요. 당신과 샤를마뉴가 행복해하는 모습이나, 당신이 샤를마뉴를 잃고 그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미래를요.”

말도 안 돼. 경악한 나를 보며 시드니 카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못 믿을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미래를 볼 수 있어.”

“글쎄요……. 아마도 영혼의 회랑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느새 그의 말투는 추측으로 변해 있었다.

“당신이 시간을 되돌린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

“영혼의 회랑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그 속에서는 모두 현재일 뿐이죠. 언제의 시점을 선택하느냐는 회랑을 여행하는 영혼이 하는 일이고요.”

문득 죽음 이후의 검은 세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곳이 영혼의 회랑이란 말이지. 샤를마뉴를 따라서 죽음을 선택했을 때, 그곳에서 많은 삶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시간 속의 내가 나에게 물었다.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간은 언제야?’

나는 가장 절실했던 시간을 선택했다.

“그럼 당신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말인가?”

내 물음에 시드니 카턴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저에게 허락된 방식이 아니었어요.”

“그럼?”

“저에게는 오로지 보는 것만이 허락되었죠.”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알아듣게 설명해.”

“……좋습니다. 제가 일전에 말한 적 있지요? 영혼은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되돌아온다고요.”

그랬지. 내가 처음으로 루크의 환생임을 알았던 그날이었다.

“영혼은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 종종 영혼의 회랑을 이용하곤 합니다.”

“…….”

“그리고 영혼의 회랑을 이용하는 방법은 각자 다르죠. 당신처럼 시간을 돌릴 수도 있고, 저처럼 미래를 훔쳐볼 수도 있고……. 그러니까 당신이 시간을 되돌렸다고 남들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건 아마도 당신의 과제가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에 의해서만 완수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내 목적이……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에 의해서만 완수될 수 있었다고?

“저는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게 제가 영혼의 회랑을 이용하는 방식이었죠. 제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당신의 과제가 뭐였는데?”

“……제국을 지키는 일이요.”

갑자기 시드니 카턴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전부 실패했어요.”

“…….”

“나는 과제를 완수하는 데 실패했고, 운명에 패배했습니다, 라파엘.”

“…….”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내 미래, 당신의 미래, 샤를마뉴의 미래, 아니, 제국의 미래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젠 바꿀 수 없어요.”

그가 수갑 찬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 틈새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

“매 순간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운명에서 승리하고자 무던히도 노력했어요.”

“…….”

“그런데…… 결과는 고작 이따위군요.”

‘고작 이따위’라고 다시 한번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자괴감에 젖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시드니 카턴과 함께 운명에 대하여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그날.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운명이 있죠. 하지만 운명은 길 위에 박혀 있는 이정표와 같은 겁니다. 그 이정표는 뽑을 수도, 없애버릴 수도 없죠. 하지만 그 이정표대로 따라가느냐, 아니면 길도 없는 곳을 개척하느냐는 사람의 자기 의지에 달려 있는 겁니다. ……대부분은 그저 따라가지만요.’

운명과 자기 의지의 대립에 대해 떠들어대던 그 목소리는 분명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자신만은 운명을 벗어나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자신감. 무엇을 믿고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궁금했었지.

운명에 승리하려면 일단 자신의 운명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여름행궁에서 루크로 깨어났을 때 운명을 바꾸고자 노력했으나 그것마저도 운명의 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내 운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운명에 휩쓸리고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오만했던 거 아니야?”

당신도 휩쓸렸을지도 모른다.

내 말에 시드니 카턴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공허한 얼굴 위로 옅은 분노가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신이 지나치게 오만했던 거 아니냐고.”

“제가요?”

“그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국을 지키는 것이 당신의 과제라고 했어.”

“…….”

“그래서 미래를 봤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운명에 맞섰다고 했지.”

“…….”

“근데 지금 결과를 봐. 나는 여기 있고, 당신은 거기 있잖아.”

비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흘렀다. 시드니 카턴이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간단해. 당신이 틀린 거야.”

“……뭐라고요?”

“당신은 애초에 자기 자신이 부여한 과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라고.”

그 순간 시드니 카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생각해 본 적 없어? 제국을 지키는 게 당신의 과제가 아니었다면? 만약 다른 과제가 있었다면?”

“…….”

그가 입을 다물었다. 텅 빈 얼굴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가끔 보였던 미래가 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진짜 과제를 위한 것이었다면 어쩔래?”

존재하지도 않는 과제를 완수하겠다고 평생 동안 헛손질을 해온 사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물론 이건 전부 내 추측이야. 아닐지도 모르고.”

“…….”

“하지만 항상 궁금했어. 당신은 어떻게 영혼에 대해 그리도 잘 알까.”

“…….”

“그래 봤자 똑같은 환생체일 뿐인데, 뭘 알아서 저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걸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역시도 각성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코끼리의 다리를 더듬는 장님과도 같은 존재. 코끼리의 전체를 알 수 없다면 단정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만진 다리가 코끼리라고 믿었다.

그것 또한 오만이었다.

“당신은 지나치게 오만했던 거야. 그리고 그 오만함이 당신의 삶을 파괴한 거고.”

“그럴…… 그럴 리가.”

그가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하나 알려줄까?”

“…….”

“당신은 내가 내 의지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고 했지.”

시드니 카턴이 힘겹게 대답했다.

“그랬죠.”

“그것도 당신이 틀렸어.”

어쩌면 시드니 카턴은 누군가에 의해 끌려왔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렇게 돌아왔기에 나 역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그만의 착각이다.

깊고 깊은 고독. 홀로 남아 있던 시간.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 끝에 빛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발을 딛기로 한 것은 순전히 나의 의지였다.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의지대로 돌아온 거야. 나에게 부여한 과제를 끝내기 위해서.”

영혼은 결국 자기 영혼의 성장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며, 귀향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결정이다.

나는 내 의지대로 돌아왔고, 한때는 그것을 후회했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당신의 삶에는 당신 영혼이 부여한 과제가 있겠지. 제국을 지키는 것과는 다른, 당신만을 위한 과제가.”

“…….”

“뭐였을지는 스스로 생각해 보기를.”

어차피 스스로 생각한다고 해도 늦었겠지만.

하얗게 표백된 채로 굳어버린 시드니 카턴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던 두려움은 이제 완전히 녹아 없어졌다.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증오했다. 300년 전, 아무 죄도 없었던 나를 모함해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 샤를마뉴의 죽음을 알면서도 묵과했던 그. 시간을 되돌린 나를 모함하여 또다시 법정에 세운 시드니 카턴.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

저렇게 멍청하게 앉아 있는 그를 보니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용서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가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한다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마당에 사과조차 받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 감정은 그저 씁쓸함이라고밖에 이름 붙일 수 없다.

평생 자신의 오만함으로 스스로를 기만한 자. 그래놓고도 끝까지 자신이 오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자. 운명조차 자신을 버린 지금에 와서야 자신의 지난 삶을 회고할 기회를 가진 자.

그는 이때까지 내가 봐온 어떤 사람들보다 멍청한 자였다. 그래서 입안이 씁쓸했다. 막연히 두려워했던 사람이 고작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기인하는 패배감이었다.

내가 고작 저런 사람을 두려워했구나. 참 우습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시드니 카턴.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릴 때였다.

“당신은…… 당신의 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황망한 목소리였다. 나는 구태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 과제?

내 과제라…….

“글쎄,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

“아마도…….”

이거 아닐까?

“……용감하게 사랑하고, 거침없이 사랑받는 것.”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

* * *

구치소에서 나오자마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 왔어.”

일부러 밝은 척 웃으며 귀가를 알렸는데,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너, 어디 다녀왔어.”

“……어?”

“바른대로 말해. 다 알고 있으니까 숨길 생각은 하지도 말고.”

……다 알고 있다고?

“어떻게?”

잔뜩 당황한 채로 묻자 에반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넌 내가 너 같은 바보인 줄 알아? 구치소에 사람 한 명 안 심어놨겠냐?”

“…….”

“거긴 왜 갔어? 정신이 있어, 없어?”

사람을 심어놨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게…… 그럴 사정이.”

“사정은 무슨 사정!”

“에반…….”

“내가 위험한 곳은 가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했지. 하긴 했는데.

“……구치소가 뭐가 위험해.”

“충분히 위험해! 그 새끼가 있는 곳은 다 위험하다고!”

“…….”

정말 싫어하는구나. 물론 싫어할 만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에반은 시드니 카턴이 루이 채스터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을 것 같긴 한데.

“에반.”

“말 돌리지 마.”

“아니, 궁금한 게 있는데.”

“……뭐.”

“당신은 시드니 카턴이 루이 채스터턴이라는 거 알고 있었지?”

그 말에 에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몰랐겠어?”

“역시…….”

“그 좆같은 흉터만 봐도 딱 알잖아.”

좆같은 흉터라니. 공작이 쓰기에는 너무 상스러운 단어다. 말 좀 가려서 하라고 타박하자 에반이 ‘흥’ 하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그게 언젠데?”

“그게 왜 궁금한데.”

아니, 그냥……. 시드니 카턴이나 루이 채스터턴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보니 조금 궁금해졌을 뿐이다. 별거 아니라고 어깨를 으쓱하자, 에반이 흠, 하고는 대답했다.

“16년 전.”

“……어?”

“그 새끼가 열한 살 때.”

그렇게 빨리 만났다고?

“뭘 그렇게 놀라.”

“어…… 아니, 생각보다 빨리 만났네 싶어서.”

“당연하지. 그 새끼는 ‘훈련원’ 출신이거든.”

‘훈련원’? 그게 뭔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자 에반이 작게 한숨 쉬었다.

“있어, 그런 게.”

“뭐야, 제대로 설명해 줘.”

“귀찮아.”

“안 알려줄 거면 애초에 말도 하지 말았어야지!”

입에서 불을 내뿜듯 성을 냈다. 실랑이가 이어졌다. 뭔데 그러냐, 별 거 아니다,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지 않느냐, 몰라도 되는 거다, 자꾸 이러면 곤란해지는 수가 있어, 집만 안 나가면 된다…… 결국 항복한 쪽은 에반이었다.

“이거 비밀이니까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비밀이라고?”

“응. 아니, 뭐 이젠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내가 다 부술 건데.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늘하게 웃었다.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정말 이런 에반은 적응이 되질 않는다.

다 부수다니……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이야. 두어 걸음 또 물러서자 그가 나를 잡아당겨 제 옆자리에 앉혔다.

곧 마흔이 다 되는 사람이 힘도 세다. 어이쿠, 하고 자리에 앉자 그가 커다란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훈련원’이란 건 말이야…….”

* * *

타인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다는 뜻이다.

설령 함께 짊어질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순간 그가 짊어진 무게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거운지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고 싶지 않고, 공감하고 싶지 않은 상대의 삶은 함부로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 어쭙잖은 공감과 동정이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 나는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오후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

‘훈련원은 제정부에서 만든 양성기관이야. 부모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어릴 적부터 철저히 세뇌하고 훈련시켜 국가의 개로 만드는 곳이지.’

‘…….’

‘시드니 카턴도 고아원 출신이었어. 훈련생이 되면서 입양되기는 했지만 말이야.’

에반은 먼 과거를 회상하듯 침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자식을 만난 건…… 훈련생 한 명이 사고로 죽다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였어.’

‘사고?’

‘추락 사고였지. 레펠 훈련 중에 끈이 풀어졌다나 봐. 그땐 그러려니 했어. 그런 일이야 비일비재하니까. 다만 내 주의를 끈 건 그 훈련생이 내 선임인 제이크 카턴의 수양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사고 이후로 인격 장애가 생겼다는 점이었지.’

‘인격장애라니?’

시드니 카턴의 성격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인격장애라 할 수준은 아닌데 무슨 소리일까. 멍청하게 되묻자 에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자각 말이야.’

‘……아.’

‘다른 인격이 나타났다는 훈련생에게 호기심이 생겼어. 제이크의 허락을 받고 훈련생을 찾아갔지. 내 추측이 맞다면 그는 내가 발견한 최초의 환생자니까.’

‘그래서?’

‘병실 문을 열자마자 내가 뭘 봤는지 알아?’

그때 일을 회상하는 듯, 에반의 얼굴 위로 씁쓰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제 페어의 목을 조르는 미치광이 소년이었어.’

‘…….’

‘두 녀석을 떼어놓자마자 미치광이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어. 고작 열한 살짜리 꼬마의 시선에 살기가 가득하더라. 놀라웠어. 크면 쓸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서 다음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알아봤구나.’

‘……흉터 때문에.’

‘시드니도 당신을 알아봤어?’

‘알아봤어. 날 보고 놀라더니 이내 웃으면서 인사했거든.’

‘인사를?’

‘오랜만입니다…… 라고 했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까지 제 페어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소년이 갑자기 웃으며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한다면?

에반도 나와 다르지는 않았는지, 다른 손으로 어깨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대답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어. 목이 졸린 훈련생이 살아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거든.’

‘아…… 그 훈련생은 어떻게 됐어?’

‘기절했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어.’

‘다행이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시드니 카턴은 왜 그 훈련생의 목을 조른 거야?’

‘…….’

‘에반?’

에반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뭔가 짐작하는 것은 있는 표정이었지만 말하기는 꺼리는 것 같았다. 참을성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시선으로 허공을 짚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려워서가 아닐까.’

‘……음?’

‘증오와 공포는 종이 한 장 차이지. 제 페어의 목을 조르는 시드니 카턴은 그를 증오하고 있었어. 하지만 분명 두려워하기도 했지.’

‘왜? 뭐가 무서워서?’

‘글쎄. 그것까진 몰라. 내가 그걸 알 정도로 그 새끼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에반이 손을 뻗어 내 앞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기는 순간이었다.

‘루이 채스터턴이 증오하던 사람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루이 채스터턴이 증오하던 사람? 그런 사람도 있었단 말인가. 항상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고 가벼이 보던 자라, 경멸하는 사람은 있어도 증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게 누군데?’

에반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어딘지 모르게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

‘……어?’

‘제 형 말이야. 루이 채스터턴의 형.’

‘형? 형을 왜?’

‘…….’

‘에반?’

왜라는 질문에 에반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품에 껴안은 후,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너 같을 순 없어.’

‘무슨 소리야?’

‘고맙다는 뜻이야. 날 받아줘서.’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끊겼지만, 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의 실제 의미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말하고자 싶었던 것은…… 루이 채스터턴과 내가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에반의 말이 맞았다. 모든 사람이 나 같을 순 없다. 나처럼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형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특이한 경우였다. 권력욕이 없기도 했고, 권력보다는 생존이, 생존보다는 타인의 온기가 더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에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다. 3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를 외롭게 방치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가족이라고 나타난 그를.

하지만 루이 채스터턴, 그 오만하고 욕심 많은 남자는 차마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제 자리를 빼앗은 형을 죽어서도 용서하지 못하여, 환생해서까지 죽이려 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비슷한 환경, 다른 선택. 갑자기 알 수 없이 기분이 가라앉아서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창을 등지고 눕자 달빛에 내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길게 늘어졌다.

문득 의아해졌다.

형이 그의 자리를 빼앗았다면 채스터턴은 어떻게 백작이 된 거지?

“……이상한데.”

만약 그가 백작이 되지 못했더라면 형에 대한 증오, 혹은 공포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는 형을 누르고 백작이 되었다. 그럼 다 끝난 것 아니야? 환생해서까지 형을 죽이려 할 필요가 있었을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그자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는 나와 너무나도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생각하지 말자. 나는 일부러 생각을 끊어내며 눈을 감았다. 잠을 자야 했다. 내일은 샤를마뉴가 돌아오는 날이다.

* * *

늦은 오후, 누군가 맨션의 문을 두드렸다.

“라파엘.”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지라 직접 나가서 문을 열자, 며칠 새 피부가 살짝 그을린 샤를마뉴가 밝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다고 마주 웃자 그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잘 있었어?”

“예. 잘 있었습니다. 전하께선…….”

“나는 잘 못 지냈어.”

샤를마뉴가 투덜댔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고.”

“하하…….”

“당신은? 나 안 보고 싶었어?”

으음. 나는 대답 대신 모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갑다.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샤를마뉴가 등 뒤에 선 에반을 보더니 아, 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에반은 싸하게 웃으며 고개를 꺾었다.

“평생 안 봐도 괜찮습니다만.”

“에반.”

무례한 태도를 질책하듯 이름을 부르자 에반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샤를마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의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백작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공작께서도 함께하시겠습니까?”

“싫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샤를마뉴가 내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마치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에반이 인상을 구기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백작과 식사를 하는 데 공작의 허락이 필요합니까?”

“나는 그의 보호자……!”

“백작은 이미 성인이지요. 보호자의 동의는 수술실 앞에서만 필요할 겁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샤를마뉴의 반박에 에반의 푸른 눈이 타다닥 불타올랐다. 금방이라도 싸움을 걸 기세였다.

하여튼 저 성질머리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는 샤를마뉴의 팔을 붙잡아 그를 만류하면서, 동시에 에반에게 고개를 돌렸다.

“함께 식사하지 못해서 미안해, 에반.”

“……진짜 가려고?”

“응. 일찍 돌아올게.”

일찍 돌아온다는 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에반의 불만스러운 시선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따 봐.”

“늦게 돌아오면 혼날 줄 알아.”

“응응…….”

엄한 아버지 같다. 문을 닫고 나서자 샤를마뉴가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공작은 아직도 자기가 당신 형인 줄 아나 봐.”

“……그러게 말입니다.”

“과보호가 지나쳐. 예전에는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나는 말없이 웃었다. 사실 이런 얘기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전생을 떠올리게 하는 대화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샤를마뉴가 델루니안이었다는 암시를 주는 대화만큼이라도 피할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자, 샤를마뉴가 말을 돌리듯 내 어깨를 잡고 앞으로 향했다.

“가자. 당신을 위해서 환상적인 곳을 예약해 뒀어.”

그와 함께 간 곳은 과거 조부와 함께 온 적 있었던 레스토랑이었다. 철저한 회원제에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제국의 황태자는 과연 어디에서나 프리패스였다.

“나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어?”

전채를 막 끝내갈 무렵, 샤를마뉴가 부드럽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별것 없었습니다. 평소와 똑같았어요.”

“똑같았어?”

“아, 하나 달라진 게 있긴 하군요.”

“뭔데?”

샤를마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는 비쭉 샘솟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달턴 스쿨에 합격했습니다.”

그 순간 샤를마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정말?”

“예.”

“맙소사.”

그의 손이 테이블을 건너 내 쪽으로 향했다. 내 손을 감싼 그의 손이 따뜻했다.

“당신 정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웃기만 하는 그를 보자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생각해 보니 달턴 스쿨에 합격했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건 좀 아니었던 것 같다.

샤를마뉴는 내가 무엇을 하든 그저 지지하는 입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황실과 싸우기 위해서 내린 결정을 자랑하듯 말하는 건 조금 너무했지 싶었다.

“……싫습니까?”

저도 모르게 풀 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샤를마뉴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을 리가 없잖아.”

“…….”

“난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어. 황실에 대적해도 괜찮고, 나에게 칼을 겨누어도 괜찮아.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

다정한 목소리. 그 이면에 깔린 다정하고도 슬픈 진심. 그것을 알아챈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샤를마뉴는 엄지로 내 손등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수고했어. 축하해.”

“……고맙습니다.”

“정말 멋있다, 당신.”

“멋있긴요.”

“아니, 진심으로 멋있었어. 심장이 막 철렁했다니까. 이런 사람이 내 남자라니…….”

칭찬이 과하다. 멋쩍게 웃으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하자 그가 조금 강하게 느껴지는 힘으로 내 손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사랑이 흘러넘치는 시선은 마주할 때마다 피부가 간질거린다.

“이제 많이 바빠지겠네.”

“예, 아무래도 그렇죠.”

“아쉬워.”

“어차피 전하께서도 바빠지시잖아요.”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또다시 수확제의 계절이다. 준비야 비서실에서 한다지만 황태자도 바쁘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는 지난겨울 거한 사고를 치지 않았던가. 그 충격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황제는 현재 하루의 절반 이상을 침상에 누워서 보냈다.

그 탓에 황제가 처리해야 하는 집무는 온통 샤를마뉴가 처리하는 상황이다.

제국도 싫고 황제의 자리도 싫다는 샤를마뉴는 아이러니하게도 황제의 업무를 떠맡게 되었다. 그게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운명이 참 얄궂지. 황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는 걸 보면 말이야.

“바빠 죽어도 당신 만날 시간은 있다고.”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 될 때 만나면 되죠.”

“무정하기는.”

샤를마뉴는 무정하다고 투덜대었지만 눈으로는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진짜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매시간 매 순간을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을 아쉬워할 뿐이다.

“당신이 내 비서관이었을 때가 좋았어.”

“하하…….”

“스스로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것이 변했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우리의 관계였다.

아주 먼 과거에 나는 그의 후궁이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 나는 그의 비서관이었다.

과거 나는 항상 그에게 종속되었고, 그는 나를 소유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당당한 한 사람으로서 그와 함께 발을 맞춰 걸을 뿐이다.

이때까지 존재한 적 없었던 파트너 관계. 서로에게 예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니까.

* * *

편안한 침묵 속에서 그의 어깨를 베개 삼아 잠시 눈을 붙였던 나는 차가 멈추는 느낌에 눈을 떴다. 창밖을 보니 맨션 앞이었다.

도착했구나.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자, 흔들리지 않도록 내 어깨를 붙잡고 있던 그가 조용조용하게 물었다.

“깼어?”

“예. 도착했나 보군요.”

“많이 피곤했나 봐. 잠 못 잤어?”

“아…… 예, 뭐.”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자 샤를마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 때문에?”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무슨 일 있었어?”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단지 시드니 카턴의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을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은 어제 에반과 시드니 카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드니 카턴에 대해서?”

“예. 그를 만나고 왔거든요.”

“뭐?”

샤를마뉴가 황급히 내 몸과 얼굴을 확인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

과보호는 비단 에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누가 누굴 과보호라고 비난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의 찌푸려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음……. 그의 삶에 대해서요. 그러다가 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뭐가 신경 쓰였어? 말해봐. 내가 아는 거라면 대답해줄게.”

이걸 물어봐도 괜찮으려나. 아니,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알아서 뭐하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입을 떼었다.

“그…… 루이 채스터턴 말입니다. 그 사람이 형을 증오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음. 그랬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에반은 그와 제 삶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고요.”

“…….”

“혹시 뭐 알고 계신 것 있습니까? 괜히 찝찝하네요.”

샤를마뉴는 잠시 침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는 연녹색 눈을 몇 번 깜빡인 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가 제 형을 증오한 건 사실이야.”

“…….”

“당신은 몰랐겠지만…… 당시의 그는 제 가족을 죽이고 백작위를 차지한 냉혈한으로 유명했지.”

“죽였다고요?”

“그래. 전부.”

전부 죽였다고? 가족을? 샤를마뉴는 깜짝 놀란 내 얼굴을 보며 쓰게 웃었다.

“당신과 완전히 똑같은 삶을 산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보면 비슷하기도 해. 그는 백작의 적자였지만, 앞서 태어난 사생아 형에게 모든 권리를 빼앗겼거든.”

“…….”

“열한 살 때까지 골방에 갇혀서 자랐다고 들었어. 그러다가 후계자 자리에 문제가 생기자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래서 형을 증오한 건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래도 형을 포함해서 가족을 전부 죽이고 백작위에 올랐으면 전부 끝난 것 아닌가? 굳이 환생해서까지 또 죽이려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형을 ‘위선자’라고 불렀어.”

“……위선자요?”

어째서 위선자라고 불렀는지 묻자, 샤를마뉴는 그것까지는 자신도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이렇게 덧붙일 뿐이었다.

“듣기로 채스터턴의 형은 백치였다고 해. 물론 진짜 백치였다는 건 아니야. 권력욕이나 야망이 없고, 아랫사람이 무례하게 굴어도 허허실실 웃고 넘길 정도로 성품이 온화해서 조롱조로 백치라고 했을 뿐이지.”

“……그렇습니까?”

“그래서 위선자라고 불렀을지도 모르지.”

그랬던 걸까. 그래서……?

“아무튼 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 시드니 카턴은 당신과 달라.”

“…….”

“아무리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도 당신은 결코 그와 동급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와 나는 다르다. 아무리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도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잔혹한 살인마고, 나는 선량한 피해자에 불과하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푹 쉬어.”

……그가 나의 거울 같아서, 매 순간 최악의 선택을 거듭하다 보면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래서 신경이 쓰일 뿐이다.

* * *

그날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시드니 카턴이 17형무소로 이감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아침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각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마리아 카밀라가 손을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마주 잡으며 웃었다.

“잘 지냈습니까?”

“보시는 대로요. 누구 덕에 바빠 죽겠네요.”

“바쁜 분을 괜히 오라 가라 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일단 앉아서 얘기하죠.”

마리아 카밀라가 맞은 편에 앉고, 나 역시 따라 앉았다. 테이블 위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를 위해 대신 커피를 주문한 내가 운을 뗄 때까지 그녀는 계속 말이 없었다.

“그래서, 요즘 회사는 어떻습니까?”

“말해 무엇하겠어요. 벌집 쑤셔놓은 꼴이죠.”

“그런가요.”

“그 인간이 독하긴 또 어지간히 독하잖아요. 아주 박살을 낼 기세로 몰아붙이는데…… 이번엔 재판부에서도 우리의 손을 들어주지 못할 거예요. 뿌린 대로 거두는 셈이죠.”

“…….”

“뭐, 그 덕에 작업은 쉬웠지만요.”

그녀가 가방에서 꾸깃꾸깃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부탁하신 자료입니다. 다행히 최근까지의 기록이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정말 고마우시다면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마리아 카밀라가 서류봉투의 겉면을 매만지며 물었다.

“갑자기 이 사람을 찾는 목적이 뭡니까? 시드니 카턴과의 접점은 이미 몇 년 전에 끊겼고, 이제는 제정부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인데요.”

“……글쎄요.”

그 질문에는 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조차도 그 목적을 뚜렷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을 찾아서 뭐하지? 어차피 시드니 카턴은 17형무소로 떠났고,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인데…….

“그냥, 호기심이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호기심이요?”

“예. 호기심.”

마리아 카밀라가 약간 혼란스러운 듯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아무튼 도와주신 건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그럴 것까진 없습니다.”

“아니요, 은혜는 갚아야지요.”

“……굳이 갚고 싶다면 그러시든지요.”

용건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리아 카밀라가 따라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아, 각하.”

“예?”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마리아 카밀라가 약간 초조한 목소리로 나를 멈춰 세웠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녀는 묘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에반은…… 잘 지내나요?”

“아…… 먼저 그의 안부부터 전했어야 했는데 제가 잊었군요. 에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요. 덕분에 잔소리도 늘었습니다.”

“……다행이네요.”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마리아 카밀라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옛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구나, 하고 생각할 때였다. 그녀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에반에게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아프지 말고, 무리하지도 말고. 제발 사람답게 살라고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까지 불안해지니까.”

“아…….”

“그럼 이만.”

말을 마친 마리아 카밀라가 등을 돌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의 등을 보며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동료가 아니었구나.

새로운 깨달음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지만 나는 확신했다. 적어도 마리아 카밀라에게 에반은 단순한 동료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럼 에반은?

“……말해 뭐해.”

곧 마흔이 다 되는 에반이 어떨지는 눈에 선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맹목적인 남자였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외골수.

그는 자신이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나라고 직접 밝힌 바 있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고 말이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과 연애를 했을 리가 없다.

“멍청이.”

나도 모르게 멍청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대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 * *

알렌 커티스. 과거 제정부 훈련원의 27기 훈련생이었으며 19세가 되던 해 최종시험에 탈락하여 퇴소함.

최종 시험의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으며, 현재 모 장애인 복지관에서 소일거리를 도맡아 처리한다고 서류에는 적혀 있었다.

그가 일한다는 장애인 복지관은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에반의 눈을 피해 택시를 잡아타고 복지관으로 향했다.

무엇을 하겠다는 거창한 의지의 발로는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루이 채스터턴이 증오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지 말이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두 눈을 꼭 감은 채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며 남자가 말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라파엘 드마뉴입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불구하고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남자는 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시드니 카턴에 대해서 여쭈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

“시드니 카턴을 아시지요?”

시드니 카턴이라는 이름에 놀라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남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압니다. 한때 제 페어였습니다.”

순순히 흘러나온 인정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나는 당혹스러운 기운을 간신히 숨기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

“……드마뉴 씨는 수사기관의 사람입니까?”

알렌 커티스는 침착하게 나에 신원을 확인하려고 했다. 수사기관의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하지만 왠지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거짓으로 신분을 속인다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기자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해드릴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냉정하게 대답한 알렌 커티스가 휠체어를 돌렸다. 나는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잠시, 잠시만요! 저는…… 저는 시드니 카턴과 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무슨 관계요?”

“…….”

“무슨 관계입니까?”

고민의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저는…… 그가 일으킨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

“이미 한 번 그로 인하여 인생이 파괴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뻔했고요. 그래서 그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알렌 커티스가 휠체어를 다시 돌렸다.

“피해자…… 라고요.”

“……예.”

“이미 한 번 인생이 파괴된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전생과 환생을 믿는 사람은 드물었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를 미치광이로 볼 것이 분명했다.

알렌 커티스는 말이 없었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사실인데.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설명하자면 너무 복잡하고 긴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절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그 때문에 인생이 파괴된 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때였다. 알렌 커티스가 내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예?”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이 없는 갈색 눈동자가 허공에 드러났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그가 내 쪽으로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군요. 그렇지요?”

“그게 무슨…….”

“환생체 말입니다.”

“……!”

나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알렌 커티스가 잔잔하게 웃었다. 물이 마른 호수에 바람이 부는 형상과 닮은 미소였다.

“그래서, 제 동생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 * *

알렌 커티스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건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어머니를 고발한 사람이 저였습니다.”

“고발이요?”

“그녀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

“그 일로 인하여 그의 어머니는 처형을 당했고, 그는 지하 골방에 가두어졌지요.”

알렌 커티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덧붙였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건 모함이었습니다.”

“예?”

“저의 어머니가 꾸민 흉계였죠.”

“그럼…….”

“저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뒤늦은 깨달음이었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마른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린 동생의 삶을 파괴했다는 죄의식이 저를 좀먹었어요. 그러다가 그에게 삶을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부러 백치처럼 행동하고 몸을 해쳤어요. 그러자 그가 골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요?”

“이때까지 해주지 못한 만큼 잘 대해줬습니다. 아껴주었어요. 어머니는 저더러 미쳤다고 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가 갑자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처음에는 절 어려워하던 루이도 점점 마음을 열더군요.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가 알았습니까?”

“예. 모든 걸 알았어요. 그리고 저를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헛웃음이 나왔다. 제 어머니를 모함했다고 형을 증오한 루이 채스터턴이 나에게 어떻게 했더라? 내 웃음소리를 들은 알렌 커티스가 조용히 말했다.

“선행은 배우기 어려워도 악행은 배우기 쉬운 법이지요. 그는 저를 따라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요?”

“후계자 위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아버지께선 본인이 사랑하지 않는 아들에게 백작위를 물려주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루이는 저를 더욱 증오했고…….”

“위선자.”

문득 루이 채스터턴이 자신의 형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것이 떠올라 중얼거리자, 알렌 커티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를 위선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저는 루이의 증오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서 미움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는 내 동생이자,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예?”

믿을 수 없는 말이 고막을 강타했다. 알렌 커티스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어요.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어요.”

“……!”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루이 채스터턴이 죽인 게 아니란 말인가?

“듣기로는 루이 채스터턴이 죽였다고 하던데요.”

“아닙니다. 그는 절 죽이지 않았어요. 네 뜻대로 하겠다고 하자 그는 칼을 내렸죠. 차마 찌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의 칼로 제가 자결했습니다. 그가 보는 앞에서요.”

“미쳤……!”

“미쳤죠. 압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 방법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는 제 존재 자체를 견디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없어지는 것만이 그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미치광이처럼 보였다. 루이 채스터턴을 미치광이로 만든 사람이 바로 이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형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칼을 내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차마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골방에서 자신을 꺼낸 형. 모두가 멸시할 때 따뜻하게 보살펴준 사람. 비록 제 어머니를 모함했지만 그래도 증오는 애정만 못했을 것이다.

문득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폐하의 처분을 기다릴 생각입니다.’

그때 루이 채스터턴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경멸과 비웃음,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증오가 함께 버무려진 기묘한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가 나에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루크 님은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모든 권리를 폐하께 맡기는 식으로요.’

그는 설마 나도 위선자라고 생각했던 걸까. 악역은 타인에게 떠맡기는 위선자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그 결정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째서요?”

“어리석었어요. 그가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 몰랐습니다. 제가 죽으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타인을 모함하여 죽이고 그 자신마저 파멸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알렌 커티스의 목소리는 점점 울음으로 젖어 들었다.

“그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결코 위선이 아니었다고.”

“왜 진즉 하지 않았습니까? 전생을 자각하고 나서는 할 수 있었잖아요.”

“전생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이후였어요.”

그러면서 그는 제 양팔을 뻗어 보였다.

“시력을 잃었고, 하체가 마비되었습니다. 최종 시험에서 생긴 일이었어요. 최종 시험은 훈련생들이 거치는 마지막 관문입니다. 매번 방식은 다르지만 주제는 똑같아요. 몇 년을 함께한 페어와의 상호 신뢰도를 평가하는 거죠.”

“상호 신뢰도…….”

“우리는 전기의자에 묶여 있었고, 버튼을 누르면 상대방의 의자에 전기가 흐른다고 들었습니다. 제한 시간은 30분이었고 아무도 누르지 않을 경우 두 사람 모두 전기가 통하는 게 룰이었어요.”

“……그럼 그가 버튼을 누른 건가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누른 건 저였습니다.”

“…….”

“입으로는 그에게 누르라고 해놓고, 정작 누른 건 나였어요…….”

고통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버튼을 누르면 상대방의 의자로 전기가 흐른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어요. 전기는 자신의 의자로 통했습니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했어요. 몸이 부르르 떨리고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죠. 그대로 몇 분이 지속되었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

“정신을 잃은 동안 많은 것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시드니가 저를 적대시하던 이유를 말입니다. 미안했습니다. 사과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저는 빛을 잃었고 자유롭게 운신할 능력도 잃었습니다. 제 앞으로 내밀어진 것은 죽지 않고 살아갈 정도의 보상금과 훈련원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함구하라는 각서였어요. 시드니의 행방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사과할 기회조차 놓쳐 버린 알렌 커티스는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이젠 행방을 알지만, 만날 수가 없네요.”

“커티스 씨.”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습니다. 무지에서 비롯된 죄와 그에게 보인 행동들, 그리고…….”

그의 말은 맥없이 끊겼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 겁니까?”

알렌 커티스의 초점 없는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오랜 세월의 한을 품은 눈물이 곧 대답이었다.

* * *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해야 했다. 루이 채스터턴과 나, 루크의 삶은 시작부터 매우 비슷했다.

그와 나 모두 버림받은 적통이었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위로는 사생아인 형이 있었으며, 두 형은 모두 동생을 지극히 아꼈다. 결말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었다.

물론 차이점도 명백히 존재한다. 나는 철저히 버림을 받았지만 그는 다시 백작가로 돌아갔다.

나는 끝까지 내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그는 끝내 백작위를 손에 거머쥐었다.

그리고 나는, 비록 300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형제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제 형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에반.”

내 부름에 신문을 읽고 있던 에반이 고개를 들었다.

“왜?”

“…….”

“불렀으면 말을 해.”

“아무것도 아니야.”

에반이 눈썹을 꿈틀대더니 고개를 살짝 젓고는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생각했다.

어째서 이렇게 비슷한 듯 다른 걸까.

알렌 커티스는 에반과 닮았다. 자신이 아끼는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거의 영혼의 쌍둥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나와 시드니 카턴은.

“다른 걸까…….”

“뭐가?”

“아니야.”

이어지는 공허한 대답에 에반이 인상을 찌푸리며 신문을 덮었다.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닌데. 뭔데. 말해봐.”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자꾸 숨길래?”

아, 이런. 에반이 진짜로 짜증이 났다. 이를 어쩌나. 나는 괜히 시선으로 허공을 짚었다가 땅을 보며 대답을 피했다.

“별건 아니고…….”

“말해.”

“…….”

“어서.”

어쩔 수 없지. 한숨을 푹 쉬면서 대답했다.

“당신은…… 사람의 성격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내가 만약에 버림받지 않고 델라윈의 루크로 자랐더라면 내 성격이 좀 달랐을까? 하고 묻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역시 그런가.”

“분명 더 귀여웠겠지. 무섭도록 사랑스러웠을 거고.”

“…….”

맙소사, 에반. 사람 앞에 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런 나를 보며 에반이 짓궂게 웃었다.

“물론 넌 그 자체로도 귀여웠어. 그놈한테 주기 아까울 정도였지.”

“에반.”

“어찌나 강아지처럼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는지. 누가 훔쳐갈까 무서워서 감히 한눈을 팔 수도 없었다.”

“제발 그만…….”

“식사하는 모습은 귀엽고 궁금해하는 모습은 사랑스럽고, 자는 모습은 마치 요정 같았지…….”

나이가 들더니 사람 놀리는 재주만 늘었다. 제발 그만하라고 입을 틀어막자 에반이 킥킥대며 웃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아니, 그냥 궁금해져서.”

“왜?”

“…….”

만약에 내가 루이 채스터턴 같은 환경에 처했다면 그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스스로 묻는 것과 동시에 답이 나왔다.

그가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으면 루크가 되었을 것이고, 내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루이 채스터턴이 되었을 것이다.

……이래서 타인의 삶은 함부로 들여다보는 게 아닌데.

나는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씹으며 나 자신을 책망했다.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

궁금해하지 말걸. 괜히 신경 쓰인다고 들쑤셨다가 어쭙잖은 동질감만 느끼게 되었다.

동질감.

그 순간 문득 무언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에 우리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면, 그래서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그도 나와 비슷한 과제를 가진 것이 아닐까?

‘저는 이따금 미래를 봤습니다, 라파엘.’

‘미래를…… 봤다고? 어떻게?’

‘저도 모릅니다. 그냥 이따금 보였어요. 당신과 샤를마뉴가 행복해하는 모습이나, 당신이 샤를마뉴를 잃고 그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미래를요.’

비슷한 과제를 가졌지만 또다시 실패한 그에게, 내 미래가 마치 거울처럼 비추어진 거라면…….

‘당신의 과제는 무엇입니까?’

‘용감하게 사랑하고, 거침없이 사랑받는 것.’

그런 거라면.

* *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알 수 없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별로 안 기다렸어.”

거짓말. 나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미 약속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나 지났다. 적어도 약속 시간 20분 전에는 와 있는 사람이니 제법 오래 기다렸을 것이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일단 앉아. 목마르겠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서버가 다가와 물을 따랐다. 목을 축이고 있으려니 샤를마뉴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딜 다녀온 거야? 아까 그 번호는 뭐고?”

“아…… 일이 있어서요.”

“장애인 복지센터 번호던데?”

그새 번호 추적을 했나 보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봉사활동이라도 다녀온 거야?”

“뭐…… 비슷합니다.”

“음?”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고 왔다고 해야 할까요.”

일부러 농담처럼 던진 말에 샤를마뉴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멋진데.”

“그렇죠?”

“그래서 정확히 뭘 하고 온 거야?”

아, 이런. 절대 쉽게 안 넘어간다니까. 오늘 내 무릎 위에 엎드려 눈물을 터뜨리던 알렌 커티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태연한 척 대답했다.

“비밀입니다.”

“아, 너무해. 알려주지?”

“비밀이라니까요.”

“다른 남자라도 만났어?”

“오.”

정답. 짤막한 감탄사에 웃고 있던 샤를마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진짜야?”

“진짜면 어떻게 할 겁니까?”

“어떻게 하긴.”

그가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해졌다. 에반에게서 들은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착각한 델루니안이 나를 가두려고 했다지. 이번에는 어떨까.

“일단은 구애하겠지. 날 떠나지 말라고 말이야.”

“그다음에는요?”

“그래도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샤를마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섬으로 갈 거야.”

“……섬이요?”

“그래. 당신과 나 단둘이. 그리고 평생 나오지 않을 거라고.”

“맙소사.”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샤를마뉴는 내가 농담으로 받아들인 줄 아는 건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웃어? 이거 농담 아니야.”

“아하하…….”

“진심인데.”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니까 섬에 갇히기 싫으면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도 마. 알겠어?”

너무 웃어서 눈물이 고였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샤를마뉴가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정말 웃겨 죽을 것 같다. 어쩜 저럴까. 어떻게 사람이 저러지?

“어떻게…… 그런 점은 하나도 안 변했습니까?”

“음?”

“아니지. 안 변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발전한 걸까요. 섬이라니…… 하하.”

샤를마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흠흠. 나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옛날에 말입니다.”

“응.”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착각한 적 있죠?”

그 말에 샤를마뉴가 ‘아’ 하고 짤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친다.

“……그랬지.”

그랬지,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그 오해로 인하여 어떤 결과가 도출되었는지 떠올린 탓이리라. 나는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도 절 가두겠다고 하셨다면서요?”

“…….”

“자기만 들어갈 수 있는 밀실에 가두겠다고 그랬다 들었습니다.”

샤를마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슬프게 하려고 꺼낸 말은 아닌데. 하지만 그가 스스로를 탓하는 것을 내가 막을 수는 없었다.

“미안해.”

샤를마뉴가 또다시 사과했다.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를 사과였다.

우리 사이에는 이렇게 아슬아슬한 경계가 있었다. 과거의 일을 상기시키면 그와 나 둘 중에 한 명은 꼭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일을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 그냥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드니 카턴과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예?’

‘그에게 사과하고 싶다면서요. 그와 만나서 사과하고 과거의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째서…… 어째서요? 왜 당신이 저를 돕는 겁니까?’

나는 알렌 커티스를 떠올렸다. 시드니 카턴을 만나 사과하고 싶다는 남자. 적어도 과거를 마주할 용기는 있는 사람.

‘그와 다음 생에서도 만나고 싶지는 않거든요.’

‘…….’

‘이 방법이 과연 정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죠. 안 그렇습니까?’

내 말에 알렌 커티스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알렌 커티스와 시드니 카턴이 만나더라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다음 생에도 그를 만날지 모른다. 그는 또다시 내 인생을 망치려 들 수 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를 돕기로 한 것은, 알렌 커티스의 용기 때문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생은 전생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전생에 자신이 어떠한 짓을 저질렀든 모른 척하고 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알렌 커티스는 과거를 외면하지 않았다. 신체적 장애 때문에 행동에 옮길 수 없었을 뿐이지, 그는 언제라도 시드니 카턴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과거를 들추는 일이 두렵지도 않은가? 어차피 이미 끊어진 인연이었다. 이대로 모른 척하고 살아도 괜찮았다. 형무소로 옮겨진 시드니 카턴은 17년 후에나 세상 빛을 볼 것이고, 알렌 커티스는 이대로 세상과 유리되어 살아갈 것이다.

굳이 그를 찾아가 사과를 하는 것은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짓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과거를 들추는 일이 두렵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그가 대답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생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떠올린 상황에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그때 샤를마뉴가 떠올랐다. 굳이 과거를 덮으려 하지 않는 그.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치고, 화가 나면 원망해도 좋다고 말한 내 사람.

……그는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가?

그리하여 지금.

과거의 일을 변명하지 않고,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샤를마뉴를 보며 나는 결심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그때 저를 가두려 했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과거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떠들 수 있는 날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아팠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드러내면 어떨까? 환부가 곪지 않을 정도로만. 너무 아파서 울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정도로만.

샤를마뉴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연녹색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말할 수 없어.”

“왜요?”

“너무 멍청했으니까.”

“그래도 말해주세요. 그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재촉에 샤를마뉴가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뼈마디가 드러난 손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에 또 마음이 쿡쿡 아파왔다.

“나도 몰랐던 마음이었고, 그래서 당신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지만.”

“…….”

“……사랑했어.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상상만 해도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처음 듣는 델루니안의 고백이었다. 300년이 지나서야 들을 수 있었던 고백에 심장이 철렁하고 가라앉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미칠 것 같았어. 왜 그렇게 분노하는지도 모르면서 분노했지. 그 와중에도 당신을 쫓아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 내가 떠나보내면 정말로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살 것 같았거든. 어떻게 그 꼴을 두고 볼 수 있겠어.”

“…….”

“붙잡자. 가두자. 나만 볼 수 있도록 만들자. 머리카락 한 올도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말자. 그런 생각만 했어.”

그래놓고 사랑인 줄 몰랐다고?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샤를마뉴도 고통스럽게 웃었다. 주먹 쥔 손은 떨리고 있었다.

“사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그런 것 같네요.”

섬으로 가겠다고 했지. 그 발언이 농담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절대 그때처럼 아프게 하지는 않을게. 영혼을 걸고 맹세해.”

“…….”

“더 이상 후회할 짓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말에 나는 손을 뻗어 샤를마뉴의 주먹을 감쌌다.

“후회했습니까?”

“많이.”

“어느 정도로요?”

“…….”

“얼마나 후회했는데요?”

샤를마뉴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흑갈색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바랐어.”

“…….”

“하지만 자살은 할 수 없었어. 너무 쉬운 방법이었거든.”

“그래서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을 찾았는데…… 어떻게 해도 내가 당신에게 저지른 것보다는 못하더라. 그래서 그냥 살았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는 당신의 흔적을 찾으면서, 그냥 그렇게.”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샤를마뉴가 말을 이었다.

“……그게 나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었거든.”

내가 없는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그의 말에 숨통이 턱 막혔다. 그가 겪은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겪었던 그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심장이 녹는 것 같았던 고통. 300년 전 지하 감옥에서 겪은 고통보다 더 컸던 괴로움.

당신은 그런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았구나. 죽음을 바라면서, 하지만 죽지 못하고…….

“샤를마뉴.”

문득,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

“잘 참았습니다. 잘 견뎠어요.”

그건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동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죗값을 치른 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가여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라파엘.”

“다 끝났으니까…….”

하지만 그냥 다독여주고 싶었다. 다 끝났다고. 이젠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건 먼 과거의 일일 뿐이고, 이제는 행복할 일만 남았으니까.

“날 봐요. 고개를 드세요.”

날 보라는 재촉에 샤를마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안쓰러웠다. 손가락으로 그의 눈물을 닦으며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

“그때도,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요.”

눈물로 가득 찼던 샤를마뉴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슬픔에 젖은 연녹색 눈동자에 점점 환희가 차올랐다.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예뻤다.

당신이 사랑한 연녹색 눈동자를 이제는 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답 안 해줄 겁니까?”

“어?”

“너무하네요.”

기껏 사랑한다고 했더니 놀라서 말을 잊은 샤를마뉴에게 장난스럽게 질책하자 그가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나, 나도, 사랑해.”

“얼마나요?”

“많이. 정말 많이.”

“영혼을 걸고요?”

그가 자주 쓰는 수사적 표현을 들먹이며 묻자, 샤를마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영혼을 걸고.”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그의 손을 잡아당겨 입술을 묻었다.

“……섬에 갈 필요는 없겠네요.”

“응?”

“영혼을 걸지 않으면 섬에 데려갈 생각이었거든요. 전하와 저, 단둘이서만요.”

“뭐?”

“농담 아닙니다.”

순도 100%의 진심이다. 날 이렇게 홀려놓고 영혼을 걸지 않으면 섬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나만 보게 만들어야지.

“무섭네, 당신.”

“그래서 싫습니까?”

“아니.”

샤를마뉴가 다른 손으로 내 턱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환장하게 좋아.”

언어 선택하고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환장하게 좋습니다.”

“하하…….”

내 대답에 그가 밝은 웃음을 토해냈다. 잠시나마 슬픔에 젖어들었던 분위기가 햇살처럼 따뜻하게 변했다. 그를 따라 마주 웃으며 생각했다.

처참한 과거를 그저 덮으려 했던 나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그가 나를 사랑하기는 했는지, 내가 죽고 후회하기는 했는지 궁금해서 안절부절못했으면서 막상 묻기는 두려워했던 내 모습이 한심했다.

샤를마뉴의 말이 옳았다. 상처는 덮어둔다고 낫지 않는다. 모른 척 외면하면 그저 안으로 썩을 뿐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소리쳐야 한다. 그러다가 부정적인 감정이 모두 사라지면 그때부터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해. 우리 이제 행복해지자.

들리지 않는 고백을 또 한 번 읊으며 나는 최대한 밝게 웃었다. 샤를마뉴가 별이 부서지는 것처럼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당신.”

“……?”

“오늘 누구 만나고 왔어?”

……집착은 조금, 줄이고.

* * *

이감된 지 4개월이 지나도록 찾아오는 이 한 명 없던 수감번호 2274에게 첫 번째 면회 신청이 들어왔다.

중범죄자로 분류된 2274는 형무소 내에서도 제법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다. 지난해 벌어진 내란모의 사건의 한 주축이었다는 화려한 이력과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단정하고 수려한 외모, 얌전한 언행 등은 같은 수감자는 물론이고 교도관들의 이목까지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악질 수감자라고 해도 찾아오는 이 한 명쯤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2274는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언젠가 한 교도관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들어온 면회 신청에 교도관들이 더 흥분했다.

누굴까? 어떤 관계의 사람이지? 혹시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테러조직의 인물이 아닐까? 신고하면 포상금이 어마어마하던데.

교도관들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나타난 사람은 장애인이었다. 그것도 눈이 멀고, 하반신이 마비된 중증 장애인. 절대 테러조직의 배후일 수 없는 그가 나타났을 때 모두들 내심 실망했다. 재미없게 됐네.

그러나 재미있는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으니, 어떤 일에도 초연하던 2274가 면회실에서 크게 흥분하여 면회 신청인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뒤에 앉아 있던 교도관이 아니었더라면 면회 신청인은 분명 살해당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말썽을 일으킨 2274에게는 혹독한 매질이 떨어졌다. 몽둥이로 얻어맞으면서도 2274는 왜 그랬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지쳐 나자빠진 것은 교도관들이었다. 그들은 2274의 지독한 성격에 혀를 내두르면서, 한편으로는 그 면회 신청인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이 주일 후, 목에 든 푸른 멍이 사라질 때 즈음 그가 다시 면회를 온 것이다.

“도대체 누구야?”

“글쎄…….”

2274는 면회 신청을 거부했다. 만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에 면회인은 크게 실망하여 돌아갔지만 일주일 뒤에 또 찾아왔다.

그런 식의 실랑이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었다.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면회인은 어느새 17형무소의 명물이 되었다.

그가 찾아오는 매주 화요일마다 교도관들은 내기를 걸었다. 2274가 면회 신청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에 대한 내기였다.

이때까지는 면회를 거부한다는 쪽에 판돈을 건 교도관들이 이겼다. 이제는 아무도 면회 신청을 받아들인다는 쪽에 돈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기가 시들해질 때 즈음이었다.

첫 면회 신청으로부터 4개월하고도 3주가 지났을 때, 이변이 생겼다.

* * *

그날은 하늘이 파랗고 간밤에 비가 내려 공기가 서늘한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5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으로 흥분하지 않고 대화했어요.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꽤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러냐고 대답하자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드마뉴 씨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고작 대화 한 번에 이렇게 기뻐하는데, 용서받으면 울겠구나. 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감사할 건 없습니다. 아무쪼록 잘 해결하길 바랍니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잠시간의 전화를 끊고 내려오자 에반이 물었다.

“누구야?”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는 사람.”

“표정이 꽤 밝은데.”

“응. 좋은 소식을 들었거든.”

“흠. 그래? 결혼 소식이라도 되나?”

“아니. 그건 아니고…… 있어, 그런 게.”

에반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괜히 코트 자락을 만지며 옷차림에 신경 쓰는 그를 보며 말했다.

“준비 다 됐으면 가자.”

“……가기 싫은데.”

올해로 마흔이 다 된 에반이 마치 당근이 먹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툴툴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밀었다.

“자꾸 이러기야?”

“내가 왜 그 자식이랑 식사를 해야 하냐고.”

“이제 인정하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저번에 그랬으면서.”

“난 그런 적 없어.”

술 먹고 한 주사에 불과하니 인정한 적 없다며 고집을 부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치 애를 키우는 것 같았다.

“한입으로 두말하는 남자는 추하답니다. 공작 전하.”

“흥.”

“나가자. 이제 곧 도착할 거야.”

안 가겠다고 생떼를 쓰는 그를 억지로 끌어내자 곧 검은 세단이 도착했다. 황실의 독수리 앰블럼이 붙어 있지 않은 샤를마뉴의 개인 차량이었다.

“라파엘.”

계단을 내려가기 무섭게 그가 차문을 열고 나를 맞이했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는 샤를마뉴를 보며 에반이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있었어?”

“물론이죠. 전하는요?”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저도요.”

“……그만 좀 하지?”

별것도 아닌 안부 인사에 에반이 짜증을 냈다. 샤를마뉴는 새침하게 그를 무시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옷은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이제 3월인 걸요.”

“3월이라도 밤에는 쌀쌀하다고.”

그가 제 목도리를 풀러 내게 둘러주었다. 회색 목도리에서 그의 향기가 풍겼다.

음, 좋다. 일부러 킁킁거리고 냄새를 맡자 샤를마뉴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마음에 들어?”

“네.”

“한 병 줄까?”

샤를마뉴의 향수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제품이 아니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제작된 커스텀 제품이었다. 그 탓에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었는데, 준다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옷마다 뿌려놔야겠네요.”

“음? 왜?”

“그러면 전하와 함께 있는 느낌이 들 거 아닙니까.”

내 대답에 샤를마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렇죠?”

“그럼 난 당신이 쓰는 향수를 뿌리고 다녀야겠어.”

“향수 교환이라도 할까요?”

“응, 그러자.”

그때 또다시 에반이 끼어들었다.

“작작하라고. 작작!”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것 같다. 에반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샤를마뉴가 짓궂게 웃었다.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나도 킥킥 웃었다.

샤를마뉴와 사귄 지 2년이나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에반은 아직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놈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다는 것이 에반의 주장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난처해졌다. 어차피 성인이니 삼촌의 인정이 무슨 상관이겠냐만, 그래도 그는 나의 하나뿐인 혈육이 아닌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애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에반이 샤를마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황실 출입기자들까지 참관하는 회의에서 정략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밝힌 것이다.

황실의 혼사는 정치․경제적 결합이게 마련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알면서 쉬쉬할 뿐이다.

세기의 로맨스인 것처럼 꾸며야 황실의 일을 가십으로 소비하는 국민들이 만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샤를마뉴는 그의 혼사가 ‘정략’임을 밝혔다. 이제 그가 결혼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정략혼이라고 의심부터 할 것이다. 혼인하는 상대방만 우스워지는 꼴이다.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입장을 밝힌 샤를마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에반조차도 그의 진심에 할 말을 잃었다.

샤를마뉴의 입장 발표가 있었던 그날 밤에 홀로 술을 먹고 와서 주정을 부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난 정말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놈은 싫은데, 정말 싫은데……네가 좋다니까. 그러니까 봐주는 거야. 알겠어?’

‘멍청한 새끼. 또 등신 같은 짓 하면 나한테 말해. 이번에야말로 아주 죽여 놓을 테니까.’

이게 인정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샤를마뉴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제 가죠.”

에반의 시선 끝이 뾰족해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속으로 킥킥거리고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자, 에반.”

한껏 날카로워졌던 에반의 시선이 약간 풀어졌다. 애도 아니고, 은근히 단순하단 말이야.

차에 올라타 샤를마뉴의 옆에 앉았다. 맞잡은 손가락에 낀 반지가 반짝였다.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지는 이 반지는 지난여름, 내가 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당신과 함께 행복해지겠다는 약속의 증거.

“……어?”

그런데 반지의 위치가 영 이상하다. 나는 오른손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연인의 반지였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샤를마뉴는 내 오른손을 맞잡은 왼손에 반지를 끼고 있다.

왼손 약지에 끼운 반지의 의미는.

“…….”

그 순간 샤를마뉴와 시선이 닿았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각자의 손에 끼운 반지가 덜그럭거리며 얽혔다.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왼손 약지에 끼운 반지. 영원히 함께하자는 의미를 담은 샤를마뉴의 작은 변칙.

사랑해.

사랑한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의 고백이 가슴속에서 술렁였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샤를마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옆에서 에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뺨에 하는 키스 따위로는 내 마음을 전부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샤를마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반지를 매만지며 웃었다. 그러자 내 키스의 의미를 알아챈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내 뺨에 키스를 되돌려주었다.

“애정행각은 남들 안 보는 곳에서 해!”

에반의 일갈이 날아들었지만 우리 둘 중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노을에 두 개의 반지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나는 그 빛을 눈에 새겼다. 평생, 아니, 죽어서도 잊지 않도록.

영원히 함께하자.

우리, 함께 행복해지자.

외전 2 후일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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