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파수꾼 (30/34)

외전 1 파수꾼

어머니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백작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델라윈 후작의 정실부인이 된 내 어머니는 혼인 당시에 이미 호사가들이 목소리를 높여 칭송하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꿀처럼 농밀한 금발과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 복숭아처럼 은은한 뺨과 언제나 장미꽃색으로 물들어 있던 입술은 제국 내에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이었으며, 그 아름다움을 직접 본 사람들은 마치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계속해서 어머니를 찾았다.

아버지는 집착이 많은 남자였다.

스무 살이나 어린 소녀에게 첫눈에 반하여 반강제로 혼인한 아버지는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을 싫어했다.

아직 피도 비치지 않는 덜 여문 소녀를 강제로 취한 밤, 아버지는 자신의 천사가 날아갈까 두려워 황금으로 만든 족쇄를 여린 발목에 채웠고 그녀를 위해 제작한 온실 속에 가두었다.

열여섯의 소녀는 쾌활했으나 온실 속에서 그녀는 점점 말 없는 화초가 되어갔다.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억압된 환경 속에서 또래 소녀들보다 훨씬 늦게 피가 비친 소녀는 마침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몇 번이나 어머니를 안았다. 아니, 그건 겁탈에 가까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의 일들을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아버지가 찾아오는 밤을 유독 두려워했던 어머니의 태도로 보아 그랬으리라 추측된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밤을 고통 속에서 보냈지만 어머니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처음에는 모두들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모의 땅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으나, 이후 아버지가 불러온 유명한 의원이 문제의 원인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있음을 시사하며 상황은 반전되었다.

아버지에게는 씨가 없었다. 원래도 씨가 적은 편이었지만 마흔을 넘기며 씨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충격에 빠졌다.

귀족가의 수장에게는 후사를 이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물론 법적인 의무는 아닌지라 후사를 보지 못해도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는 않지만, 그것은 귀족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였다.

씨가 없어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니. 그것은 남성성에 대한 조롱이며, 너는 남자로서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낙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사를 보지 못하는 귀족은 대개의 경우 아내를 쫓아내었다. 그것이 설령 아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쫓겨 나가는 것은 항상 여성이었다.

남성성을 중시하는 제국에서 자신이 더 이상 남성이 아님을 인정하는 귀족은 드물었고, 여성을 쫓아냄으로써 모든 책임을 쫓겨난 부인에게 전가하려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갈등에 휩싸였다. 후사를 이을 수 없다. 하지만 아내를 버릴 수도 없다.

아내를 버리기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지나치게 사랑했다.

남들의 시선이 닿는 것으로도 불쾌해서 미칠 것 같은데 그녀를 쫓아낸다고? 아버지의 사고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입덧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거의 없는 씨로써 아이를 잉태시킨 것이다. 아버지는 이건 모두 신의 뜻이라며 생전 나가지도 않던 사원에 막대한 양의 공물을 헌납까지 하며 새 생명의 잉태를 축하했다.

그의 기쁨은 얼마나 유효했을까.

아마도 배가 부푼 아내의 몸에서 다른 남자의 흔적을 찾아내기 전까지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그러니까 내 ‘친아버지’는 선대 후작의 서자이자 아버지의 늦둥이 동생이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어 북쪽 탑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고 시나 쓰던 사람.

특별할 것 없는 동생은 스물 몇 해가 지나도록 사고도 치지 않아 아버지는 그의 존재마저 거의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해 아버지는 때아닌 기근으로 부쩍 바빠졌다. 어머니가 갇혀 있는 온실을 찾는 횟수가 이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지났기에 감시는 요원해졌고, 그래서 아버지는 부정의 냄새를 전혀 맡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가진 열아홉의 어머니. 그리고 그런 그녀를 증오하지만 놓아줄 수 없었던 아버지.

앞뒤 가릴 것 없이 어머니를 사랑했던 나의 멍청한 친아버지는 그렇게 비극의 서막을 올렸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정을 모른 척했다.

10개월이 지나고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를 똑 닮은 나를 보며 아버지는 일부러 다정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의 부정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조차 못 했다.

멍청한 친아버지는 조카이자 아들인 나를 보기 위해 이전보다 더욱 뻔질나게 온실에 찾아들었고.

“이런.”

……그렇게 아버지의 검에 유명을 달리했다.

“도둑인 줄 알았지 뭐요.”

부정에 대한 복수를 성공시킨 아버지는 피가 튄 뺨을 문지르며 잔혹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망가졌다. 사랑하던 사람을 눈앞에서 잃은 어머니는 점점 백치가 되어갔다. 제정신일 때도 있었지만 제정신이 아닐 때가 더욱 많았다. 나를 보면서 울고 웃는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내게 있어 가장 힘든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는 나를 아들로 인정했다. 어쨌든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델라윈의 씨였다. 자신이 씨가 없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데 무턱대고 죽일 정도로 앞뒤 모르는 사내는 아니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자라 일곱 살이 되었다.

어머니는 변함없이 아름다웠으나 그것은 그녀의 정신이 열아홉의 그때에서 멈춰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어머니를 안았다. 자신에게 씨가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부정을 저지른 어머니에 대한 응징이었으며, 성적으로 가해진 폭력이었으니까.

아버지의 겁탈은 종종 내 눈앞에서도 이루어지고는 했다. 어머니 위에서 헐떡대는 아버지의 증오심 어린 눈을 보면 나는 그만 등이 오싹해져 방으로 도망을 치곤 했다. 그는 비록 나를 아들로 인정하기는 했으나 그만큼 증오했던 것이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아버지가 언제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유모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몇 번이고 나를 달랬지만.

그런 일은 생기고 말았다.

“……아이를 가졌다고?”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 혼비백산한 아버지는 의원을 불렀다. 의원은 어머니를 진찰한 후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했다. 의원의 말을 듣는 아버지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어머니가 임신을 했다. 누구의 아이인지는 확실했다. 열아홉의 그날 이후로 어머니를 안은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으므로.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유아기를 헤매던 어머니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나를 끌어안은 그녀의 작은 몸이 주체할 수 없는 공포로 덜덜 떨렸다.

“아드리안…… 내 아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부정으로 태어난 첫째 아들 따위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임을.

“엄마가…… 엄마가 꼭 지켜줄게. 엄마가 꼭 지킬게. 내 아들.”

그녀에게 있어 아들은 나밖에 없었다.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사내아이라 하더라도 아들은 오직 나뿐이었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를 죽인 남자의 아이는 그녀에게 자식이 아니었으며 그저 살인마의 씨일 뿐이었다.

그녀는 유산을 시도했다. 하지만 유산은 쉽지 않았다. 독을 먹으려고 해도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 독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고, 계단에서 일부러 구르려고 했으나 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다치기라도 할까 두려웠던 아버지는 성안에서조차 어머니를 가마에 태웠다.

결국 무식한 방법으로나마 침대 기둥에 배를 찧으려 했으나 그것마저도 감시하는 눈들 때문에 용이하지 않았다.

결국 출산 예정일은 가까워 왔고 어머니는 점점 히스테릭하게 변해갔다.

“아드리안! 아드리안!”

“……어머니?”

“어딜 갔었어! 엄마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를 죽일까 두려워했다. 그녀는 아마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사내아이라는 것을. 나는 미친 사람처럼 거품을 물며 소리치는 어머니가 두려웠다.

어머니의 히스테리는 점점 심해졌다. 신경 안정 효과가 있는 차를 마셔도 소용이 없었다. 발작하는 정신은 점점 포악해졌으며, 종내에는 그 발작이 아버지에게까지 향했다. 고민하던 아버지는 의원에게 상담했고, 의원은 아마도 임신 중 우울증 때문인 것 같다며 휴양을 권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양지는 어머니의 고향인 마뉴였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쫓아갈 수 없어 대신 수많은 호위기사를 붙였다.

“아드리안은 두고 가는 게 어떻소?”

휴양을 떠나는 날. 마차에 앉은 나를 보며 아버지가 넌지시 물었고 어머니는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싫어요! 아드리안은 제가 데려갈 거예요! 절대 손대지 말아요!”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마뉴로 향했다. 마뉴는 라윈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고, 하루 하고도 반나절 후 우리는 마뉴에 도착했다.

마뉴의 옛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바로 자신이 쓰던 방에 틀어박혔다. 그 방에는 나도 함께였다.

“걱정 말렴, 아드리안.”

“…….”

“엄마가 지켜줄게. 엄마가 꼭 지켜줄게…….”

그리고 나흘 후, 출산은 시작되었다. 지독한 난산이었다. 그때만큼은 방에서 쫓겨난 내가 하릴없이 손장난하다가, 외조부 무릎에 앉아서 동화를 읽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옆방에 기어 들어가 잠을 자고 일어날 때까지도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어머니를 괴롭히는 동생의 존재에 대해 슬슬 화가 날 때 즈음.

응애, 응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참으로 작았다. 갓 태어나 쪼글쪼글한 얼굴과 손발이 이상했다. 어머니가 괴물을 낳은 것 같았다. 나는 까닭 모르게 시무룩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얘가 제 동생이에요?”

그 말에 난산으로 지쳐 있던 어머니가 눈을 부릅떴다.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니, 아드리안.”

“…….”

“너는 동생이 없어. 얘는 네 동생 아니야.”

하지만…… 어머니가 낳았잖아요.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말없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으니 아이가 그 쪼글쪼글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꽉 붙잡았다. 그것이 묘하게도 감동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예쁘다.”

참 이상한 일이지. 분명 이상하게 생겼는데도 그 아이가 예뻤다. 생김새가 괴물 같기는 했으나 이런 괴물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아이는 갓 태어난 아기답지 않게 머리칼이 금발이었다. 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아직 눈을 뜨지 않아 눈동자 색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눈동자도 나와 비슷할 것 같았다. 동질감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나와 비슷한 존재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눈을 떠봐, 아기야.

아직 이름조차 짓지 못한 아이는 내 손가락을 꼭 붙든 채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나는 해죽 웃었다.

어머니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 아기는 누가 보나 내 동생이 맞았다. 아이가 빨리 자랐으면 좋겠다. 이름도 생겼으면 좋겠고. 같이 말을 탔으면 좋겠어. 검술 훈련을 받아도 좋겠지.

아버지에게 외면받고 어머니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심적 부담을 지고 있었던 나는 갑자기 나타난 동생의 존재가 그저 기꺼웠다. 이 아이라면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고작 일곱 살이었고, 동생의 존재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에는 어렸다. 그런 내 모습이 어머니의 눈에는 얼마나 위험하게 비치었을지.

“애나.”

어설프게 아이를 안고 어르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던 어머니가 뜬금없이 애나를 불렀다. 애나는 어머니가 이 아이만큼 작던 시절부터 어머니의 곁에서 수발을 들어온 사람이었다.

“바깥에 전해요.”

“무엇을 말입니까, 부인?”

어머니의 검지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품에 안긴 아이에게로.

“저것.”

애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것이 죽어서 태어났다고.”

“부인!”

“계집아이가 죽어서 태어난 것이 흉하여 그 시체를 바로 묻었다고 전해요.”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죽어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잠들어 있긴 했으나 분명히 건강했고, 눈을 뜬다면 분명 별이 쏟아지는 것처럼 까르르한 웃음소리를 낼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했다. 저것을 당장 내다 버리라고.

애나는 덜덜 떨면서도 후작 부인이 된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갓 태어난 계집아이는 죽었다고 발표되었다. 죽어서 태어난 계집아이가 흉하여 시체를 바로 묻었다는 것은 당시 무지했던 사람들에게 빈번히 일어났던 일인지라 슬퍼할지언정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세 명이었다.

어머니와 애나, 그리고 나.

아이를 갖다 버리고 온 애나는 어머니의 손에 곧 죽음을 맞았으니 진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나와 어머니뿐이었다.

몹시 충격받아 말을 잃은 나를 보며 어머니는 속삭였다.

“다 너를 위해서야, 아드리안.”

“…….”

“저것이 죽어야 네가 살아. 알겠니?”

그 말이 내게 얼마나 깊은 죄책감을 남겼는지 어머니는 평생 모르셨을 것이다.

* * *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어머니의 편을 들었으나 아버지만큼은 어머니를 믿지 않았다.

떠날 때와 같이 둘이서 돌아온 우리 모자를 보며 아버지는 크게 분노하여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했다. 처음이었다.

“분명 아들이었지! 아들이라 죽이고 온 거지!”

뺨을 맞은 어머니는 도리어 차갑게 웃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셔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고, 그럴수록 어머니는 날로 꽃이 피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아졌으며, 어머니에게 휘두르는 성적, 육체적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드리안!”

“……예.”

내가 열다섯쯤 되었을 때.

“이리 와!”

늦게까지 검술 연습을 하다 돌아온 나를 보며 술에 취한 아버지가 크게 소리쳤다.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래봤자 술에 중독된 아버지는 잠시간은 분노하겠지만 이윽고 자신이 나를 불렀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반항 대신 얌전히 부르는 대로 다가갔다.

반항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반항을 하기에 나는 몇 년간 이어진 파탄적인 가족 분위기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아버지가 강한 힘으로 내 턱을 잡아채었다. 뱀 같은 눈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새끼가…… 제법 제 엄마를 닮았어.”

그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처음으로 폭력이 내게도 향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심지어 일반적인 폭력도 아니었다.

어릴 적, 어머니 위에서 헉헉대며 증오심 어린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놔, 놔주세요.”

“가만히 있어!”

“아버지!”

“누가 네 아버지야? 새끼가, 흐으…….”

열다섯 소년은 충분히 강했으나 술에 취해 욕망대로 움직이는 성인 남성을 밀쳐낼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남자의 밑에 깔렸다. 두려움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으나 남자는 그런 모습마저도 흐뭇한지 침을 흘릴 뿐이었다.

싫어. 싫다고. 누가 좀 도와줘. 제발 아무나 날 좀 도와줘……!

그러나 그곳은 후작저였다. 그리고 나를 겁탈하는 사람은 후작. 설령 누군가 본다 하더라도 나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싫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휘둘렀고.

쨍그랑!

내 셔츠를 찢어발기던 남자는 몸을 크게 경련한 후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자가 쓰러지고 난 이후에야 내가 휘둘렀던 것이 테이블에 놓인 도자기 화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파편에 남자의 머리에서 튄 핏방울이 묻어 있다는 것도 나중에 깨달은 사실.

사람을 죽였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살인. 내가 저지른 첫 번째 죄악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아드리안.”

“흐…… 으읍, 윽…….”

“울지 말렴, 아드리안.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가 죽인 후작의 시체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나를 향해 다정히 웃었다.

그 웃음이 광기에 젖어 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벌벌 떠는 나를 보며 그녀가 속삭였다.

“일단 여길 나가서 네 방으로 돌아가렴.”

“어, 어머니…….”

“놀랐을 텐데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차를 마시는 게 좋겠다.”

“무서워요, 무서, 무서워요, 어머니…….”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괜찮을 거야. 아드리안.”

너는 괜찮을 거야.

그 말이, ‘너만은 괜찮을 거야’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줄 알았더라면 나는 죄를 자백했을 것이다.

평생을 매 맞고 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남편을 살해한 후 죄가 두려워 자살한 후작 부인과 그의 남겨진 아들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촌극의 주인공이 되느니 차라리 그랬을 거다.

* * *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렀다. 성인이 되지 못한 나를 대신해서 델라윈의 원로들이 후작 대리인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하에 가문을 통치했다.

나는 열일곱이 되었고, 남들보다 빠른 나이에 기사가 되었으며, 출신으로 말미암아 평기사가 아닌 기사단장의 부관으로 기사 생활을 시작했다. 원치 않는 배려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른 평기사들과 함께 뒤섞이는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하며 출신에 상관없이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고, 전투를 나서면 등을 맡길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

어릴 적부터 정상적인 관계를 아예 형성하지 못하고 자란 나에게 그런 관계는 혼자서 쓰는 호화로운 숙소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델라윈 경은 좀…….”

“좀 그렇지?”

“빼는 게 좋지 않을까. 본인도 우리 같은 평민들이랑 같이 술 마시고 싶진 않을 거 아냐?”

“그렇지? 맞아, 그럴 거야.”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그들은 끝끝내 나를 자신들의 무리에 넣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내게 호감을 보이는 자는 많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감히 나를 ‘아드리안’이라 부르지 못했고, 혹여 자신이 실수라도 할까 봐 나와 술자리를 가지려 하지 않았으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무표정이라도 지을 때면 바짝 긴장하여 죄송하다 말하기 바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들과 나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분적 격차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그들과 내가 생각했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아예 포기했다.

고립. 외로움.

그것은 익숙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외로움이 뼛속까지 치미는 날이면 나는 단 하루 보았던 동생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의 끝은 항상 똑같았다. 죽었겠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버림받은 아이가 살아날 확률은 희박하다 못해 0에 수렴했다. 애나가 아이를 어디에 버렸는지 모르나 숲에 버렸다면 산짐승에게 뜯어 먹혔을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살아나기는 쉽지 않았을 거고.

……내 손가락을 붙잡았던 작고 쪼글쪼글했던 손. 눈도 뜨지 못한 채 행복하게 잠들어 있던 아이.

만약 네가 살아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나는 이렇게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이곳에 없었으리란 것을.

하지만 상상은 자유라지 않은가. 한기처럼 스며드는 외로움에 잠을 설치는 밤이면 나는 비단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친아버지든 양아버지든 나를 사랑해 주는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며, 나는 동생과 잔디밭을 뒹굴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그저 행복한 상상을…….

“그대가 차기 델라윈 후작인가.”

그리고 그때쯤 만난 것이 그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

“꼭 계집애처럼 생겼군.”

“…….”

못된 말을 내뱉는 그는 선황의 아들이자 현 황제의 동생인 멜링턴 대공이었다. 듣자 하니 나와 동갑이라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미움을 사서 어릴 적부터 전쟁터를 떠돌아다녔다더니, 그 지난한 삶의 과정이 눈빛으로 흉흉하게 드러났다.

“아무쪼록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할 말이 없어서 그저 입에 발린 말을 내뱉고 돌아서자 그가 차게 웃었다.

“그래, 편히 지내다 가지.”

그 말에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었는지는 금방 알게 되었다.

“이거 봐.”

“……이게 무엇입니까?”

“뭐일 것 같은데?”

찻잎 아닌가.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티스푼을 흔들었다. 자세히 보니 티스푼이 검었다. 독이다. 화들짝 놀라 소리치고 말았다.

“스푼이……!”

“놀라는 연기는 제법이야.”

연기가 아니었다. 어찌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단 말인가.

나는 덜덜 떨며 무릎을 꿇었고, 멜링턴 대공은 그런 나를 신랄하게 비웃었다.

“죽, 죽여주시옵소서.”

“죽여달라?”

하하하…… 그가 웃었다.

“네 죽음 따위로 이 죄를 갚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이 오만한 것.”

“……하찮은 목숨이나마 바치겠나이다.”

“닥치고 내 눈앞에서 꺼져라.”

그가 찻잔을 집어 던졌다. 찻잔은 나를 피해갔지만 독이 든 찻물은 그대로 뒤집어썼다.

뚝, 뚝…… 찻물이 떨어지는 머리를 넘기며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나왔다. 그리고 모든 고용인을 소집하여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추궁하고 있을 때.

“공자.”

“……뭡니까.”

“일을 크게 만들지 맙시다.”

나를 대신하여 후작 대리인 노릇을 하고 있던 원로회의 수장이 나타나 조용히 타일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공 전하께서 목숨의 위협을 받았어요! 이 일을 황제께서 아시면 사달이 나도 날…….”

“사달이요?”

주름진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나타났다. 그 미소가 소름 끼쳤다.

“황제 폐하의 지시였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드리안 공자.”

* * *

세상의 모든 형제가 사이가 좋을 수는 없다. 권력을 가질수록 형제들의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은 높아진다. 황실의 형제들이 사이가 좋은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내 눈앞에서 동생이 버림받는 것을 봤을 때와 비견하는 충격이었다.

어떻게 자기 동생을 죽이라 할 수 있지?

황제와 대공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친형제였다. 나처럼 아버지만 다른 동복형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같은 진짜 형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대공을 싫어했고, 대공이 자신의 권세를 탐할까 경계했다.

그가 자신의 동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세에 관심이 없는 나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그래도 나는 설마, 황제가 직접 동생을 죽이려 할 줄은 몰랐다.

대공이 독살의 위협을 받은 것을 알면 그래도 형제인데 크게 분노하지 않을까 생각했지, 이 일을 사주한 사람이 황제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대공은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겠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비틀린 목소리를 냈겠지. 편히 쉬다 가라는 내 말이 기만처럼 들렸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절대 기만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저녁 만찬에 대공은 내려오지 않았다. 하인에게 물으니 몸이 좋지 않아 식사할 생각이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는 전언을 들었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대공을 찾아갔다. 그의 방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흔한 호위 기사 한 명도.

“대공 전하, 아드리안 델라윈입니다.”

“…….”

방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금 소리를 높였다.

“잠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대화를 청하여도 될는지요.”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몸이 안 좋다더니 사실이었나? 잠이라도 든 건가?

귀를 쫑긋 세웠다. 안에서 묵직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쿨럭…… 큽!”

피가래 끓는 소리였다. 검게 변색된 티스푼을 흔들던 그가 떠올랐다. 그는 그 차를 마시지 않았지만 또 다른 음식에서 자기도 모르게 독을 섭취했을 수 있다.

나는 하얗게 질린 채로 무례하게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안쪽 너른 침대에 엎드려 반쯤 기절한 그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하얀 시트 위에 점점이 찍힌 붉은 것들이 보였다. 피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하, 전하! 대공 전하!”

멜링턴 대공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분명 다른 독을 섭취했으리라. 이를 어쩌면 좋을까.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던 나는 일단 의원을 부르기로 했다. 원로회에 알려서는 안 되었기에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바깥에서 의원을 데려왔다.

의원은 중독 증세가 맞다며 그가 섭취한 독의 종류까지도 상세히 설명했다.

멜링턴 대공은 이런 상황을 대비한 것인지 여러 종류의 해독제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의원 덕에 적합한 해독제를 사용할 수 있어 큰 고비는 넘겼다.

새벽 내내 대공은 신음을 흘렸다. 열이 올랐다 떨어지기를 반복했고, 나는 그 옆에서 대공을 간호하며 신새벽을 지냈다.

다른 사람에게는 맡길 수 없었다. 원로회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 후작가에서 대공을 해칠 사람과 그러지 않을 사람을 가리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지금처럼 다급한 상황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밤을 지새우기를 몇 시간. 마침내 대공의 열이 완전히 떨어졌다.

그의 숨소리가 한결 편해졌고 식은땀은 이마 위에 촉촉하게 내려앉았다. 그 땀을 닦아주며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쉴 수 있겠구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묵직한 손아귀 힘이 나를 붙잡았다.

“……아.”

그의 손이 내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휘감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10년 전의 상황이 망막 위로 겹쳤다.

내 손을 붙잡던 쪼글쪼글한 아이의 손.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던 아이.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아 죽었음이 거의 확실한, 이름도 모르는 내 동생.

남의 영지와 전쟁터를 전전하며 형제가 보낸 독약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이 불쌍한 대공.

분명 다른 사람인데 어찌하여 그 두 사람이 똑같이 보이는 건지.

나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손가락이 잡힌 채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아기……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열 살이었겠지.

열 살이면 키는 얼마나 되었을까. 내 허리쯤에는 왔을까? 생김새는 어땠을까? 어머니를 닮았을 것 같긴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성격은 또 어땠을까. 명랑했을까? 차분했을까? 아니면 사고뭉치였을까? 괴짜였을지도 몰라.

젖니가 났겠지. 조금 더 자라면서 유치가 빠졌을 거고. 통통한 볼살은 어머니를 닮은 복숭앗빛이었을 거다. 덜 여문 혀로 형아, 하고 부르면 세상 무엇보다도 귀여웠겠지.

……사랑해 주고 싶었다.

단 하루뿐이었지만 예민하게 지쳐 있던 일곱 살의 내게 먼저 휘감겨오는 동생의 존재란 평생 잊을 수 없는 위안이었다.

아버지도 내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도 위안이 될 수 없는 상황에 갑자기 나타난 동생은 내게 있어 최초의 가족이었다. 사랑스러웠다. 애정을 주고 싶었다. 그 존재가 내게 준 위로만큼 나도 그 아이에게 애정을 쏟아붓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죽어버렸고, 내가 애정을 쏟아부을 대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일곱 살 때 차마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죄책감과 함께 갈 곳 잃은 애정이 독이 되어 내 몸에 쌓였다. 그와 함께 외면했던 외로움이 나를 덮쳤다. 나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그리우면서도 원망스러웠다.

꼭 그랬어야 했어요? 그 아이를 꼭 죽였어야 했냐고요. 그 아이를 죽일 거면 어머니라도 곁에 있어줬어야지 왜 혼자 가버렸어요. 갈 거면 차라리 나도 데려가지, 왜 나만 홀로 남겨두어 이 사무치는 외로움을 알게 한 거예요? 대답해 봐요, 어머니…….

흐으, 억눌린 신음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울고 싶지 않은데 울음이 터졌다. 대공의 손을 붙잡은 채 엎어져서 발작하듯 울기를 몇 분.

“…….”

그때, 머리에 따뜻한 손이 와 닿았다.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자 잠에서 깬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대공은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떼었다.

“……그.”

“깨, 깨셨습니까.”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이 알 수 없이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 태도가 하도 이상하여 괜찮은지 물으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편찮으신 곳은 없는 거지요?”

“……없다.”

“……다행입니다. 어젯밤에 계속 열이 끓었다 식었다 하기에 많이 놀랐습니다.”

그 말에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간밤에…… 계속 옆에 있었던 게 너였나.”

“그렇습니다.”

“왜?”

왜…… 냐고?

“아픈 사람을 간호하는 일에 이유가 필요한 겁니까?”

“…….”

“저는 기사입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가 힘없이 코웃음을 쳤다.

“네 눈에는 내가 약자로 보이나.”

“……적어도 지금은요.”

“건방진 것.”

건방지다고 타박하는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 있지는 않았다. 이때를 틈타 어제의 일을 설명하고자 입을 열었다.

“전하, 어제의 일은…….”

“됐다.”

“예?”

“……되었다고.”

되긴 뭐가 되었다는 말인가. 내가 어리둥절하여 바라보자 대공이 한숨을 쉬었다.

“네가 이제껏 봐온 인간 중 가장 한심한 인간이라는 것은 알았으니 구태여 사과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예?”

“사내가 되어 고작 그까짓 일로 벌벌 울기나 하고, 부끄러운 줄 알아라.”

대공은 내가 그를 독살하려 한 것이 미안해서 울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런 것이 아닌데. 내가 운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닌데…….

하지만 나를 당황스럽게 한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오해보다는 대공이 내뱉은 말의 요지였다.

자신을 독살하려 한 나의 유약함을 타박하고, 자신이 당한 일을 ‘그까짓’ 일이라 폄하하는 대공은…… 이 일을 덮을 생각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차마 이해하지 못하고 어째서냐는 말을 반복하자 대공이 비리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

“그러니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

축객령과 동시에 내 손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풀려난 손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었을 것 같으냐고? 그 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말인가?

……그럼 당신은 이때까지 이런 죽음의 위협을 수백, 수천 번씩 겪은 거야? 친형제가 보낸 독약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면서?

방을 나왔다. 등 뒤로 문이 쿵, 닫혔다. 나는 멍하니 내 손을 어루만졌다. 나를 붙잡았던 그 손의 감촉이 잊히질 않았다.

* * *

그날 이후 나는 자주 대공을 찾아갔다.

“……또 왔군.”

처음에는 신경질을 내며 꺼지라고 소리치던 대공은, 박대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찾아오는 나에게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오늘도 왔냐고 체념 어린 목소리를 내는 대공을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오늘은 어떠십니까.”

“그럭저럭.”

“별다른 이상은 없으시고요?”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그저 걱정이 되어서요.”

그날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기침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걱정이 되었다. 대공은 혀를 찼다.

“처음에는 독을 주더니 이젠 걱정을 하는군. 우습지도 않아.”

“그건…… 정말 몰랐던 일입니다.”

“됐어.”

“믿어주십시오, 전하. 절대 전하를 기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픽, 웃을 뿐이었다.

사람에 대한 대공의 불신은 뿌리가 깊었다.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대공에 대한 현 황제의 암살 시도는 그의 나이 열 살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태자위를 둘러싼 선황과 현 황제의 갈등이 사건의 시발점이었단다.

현 황제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선황은 몸이 약한 장남보다 어리지만 신체 강건한 차남이 대업을 이루기에 적합한 인물이라 여겼다. 차남에 대한 선황의 공공연한 편애를 현 황제가 몰랐을 리 없다.

대공을 암살하려 한 사람은 그를 기른 유모였다. 하지만 그녀가 현 황제의 지시를 받았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선황은 차마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일 수 없어 유모를 처형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했지만 그 선처로 인하여 그는 훗날 아들의 손에 죽었다.

현 황제가 선황을 독살하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유난히 정세에 둔한 나만 몰랐던.

아버지를 죽인 형과 그 밑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동생.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그의 파탄적인 가족사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엄하게도 그가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누군가를 가엾어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파탄적인 가족사라면 나도 할 말은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공이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예?”

“넌 가끔 그런 식으로 나를 바라보더군.”

그런 식이라니? 얼굴에 의아함이 그대로 드러났나 보다. 대공이 옅게 웃었다.

“모르면 됐어.”

모르면 된 게 아닌 것 같은데. 내 시선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불경한 시선이라면 고쳐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그가 오해할 수 있으니까. 이에 자리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자 그가 웃던 얼굴 그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고치겠습니다.”

“…….”

“하지만 결코 전하를 해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대공은 말이 없었다. 나는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깊은 그가 내 말을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의심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머리 위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에게는…… 무슨 말을 못 하겠어.”

“…….”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해칠 의도는 없다, 믿어달라 하는데…….”

살짝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대공이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눈까지 휘며. 그 얼굴이 제법 소년다워서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처음으로 그가 나와 같은 열일곱 살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정말 지독하게도 겁이 많군.”

“…….”

“역시 한심해.”

그가 내뱉은 말은 폭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어째서일까? 글쎄.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막연히 느꼈다. 한심한 인간만이 그의 가시를 걷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반박하는 대신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한심한 인간입니다.”

그 말에 대공이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 * *

대공이 후작저에 머무른 지 6개월이 되었다. 계절은 완연한 여름이 되었다. 그사이 그는 나와 제법 친해져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할 정도는 되었고, 혹여 그때와 같은 불상사가 또 생길까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다행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봐, 아드리안.”

“예?”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물어보십시오.”

“너는 친구 없어?”

의자에 반쯤 누워 책을 읽던 대공이 무심하게 물었다. 그런 질문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내가 입을 다물자 그가 책에서 시선을 떼며 다시 물었다.

“없어?”

……도대체 이건 왜 묻는 걸까. 묵묵히 그 시선을 마주했지만 뭔가 부끄러웠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왜?”

“……상황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귀족가의 자제들이 친구를 맺는 방식은 한정적이다. 신분적 격차를 뛰어넘기는 힘드니 같은 귀족들끼리 친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대부분은 또래의 친척들과 친구가 되고는 했다. 친척의 경우 서로의 영지를 왕래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또래의 친척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오명을 쓴 채 자살한 이후로 원로회에서 외가와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다.

전대 델라윈 후작, 그러니까 내 양아버지에게는 형제랄 사람이 죽은 친아버지밖에 없었으니 나의 친인척 관계는 매우 협소했으며, 따라서 나는 혼자였다. 기사단원들과 친해지겠다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고.

“흠. 파티 초대장 같은 건 안 받나?”

“……받지만 간 적은 없습니다.”

“어째서?”

시선들이 불편해서요, 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냥 웃었다. 파티의 초대장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은 없다. 안 가도 뻔했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서는 순간 이목이 집중되겠지. 어디에도 얼굴을 비친 적 없는 촌극의 주인공이 나타났으니 오죽할까. 그런 시선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아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대답 대신 웃어넘기는 나를 보며 대공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표정이었다.

요 근래 대공은 저런 표정을 자주 지었다. 나로서는 뜻 모를 얼굴이다.

“그럼 내가 오기 전에도 계속 이런 생활을 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훈련하고 책이나 읽고 후계 수업을 받고.”

“예.”

저렇게 말하니 굉장히 단조롭군. 하지만 실제로 단조로운 생활이었다. 대공이 온 이후로야 그와 함께 사냥도 나가고(그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의 말상대를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가 오기 전에는 훈련하고 책 읽고 수업을 받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재미없는 생활이지만 불만을 가진 적은 없다. 내 몫이 아니었던 자리를 강탈해 놓고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훌륭해.”

대공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칭찬했다. 비웃는 건지 정말로 칭찬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만인의 귀감이 되는 기사다.”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들려?”

“아닙니까?”

“맞아.”

요즘 들어 대공이 자꾸 장난을 쳤다. 그러한 태도의 변화가 달갑기도 했지만 가끔 벅차기도 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이럴 때 어떻게 반응을 해야 자연스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대공 또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내가 어색한 반응을 보여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여름의 정원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공의 장난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모르는 내가 입을 다물자 대공 또한 익숙하다는 듯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3단 분수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이 존재하는 한여름의 정원.

한참 후 대공이 침묵을 깨었다.

“나는 곧 여기를 떠날 거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예?”

“내가 이곳에 온 지 6개월이나 지났지. 곧 황제의 대사가 이곳을 찾아올 거야.”

그의 시선은 여전히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심하게 페이지를 넘기며 그가 말을 이었다.

“괜한 오해를 사기 싫다면 ……한 번은 눈감아주마.”

무슨 말이지. 무엇을 눈감아준다는 걸까. 어리둥절한 채로 눈만 깜빡이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책을 덮었다. 탁, 하고 책장이 덮이는 소리가 울렸다. 그의 흑갈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네가 한심한 짓을 해도 한 번은 눈감아주겠다고.”

아. 그 말에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 * *

황제의 대사가 찾아왔다. 대공이 후작저에 온 지 6개월 하고도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원로회는 나를 앞세워 대사를 맞이했다. 곧 가주가 될 터인데 미리미리 안면이라도 터놓으라는 뜻이었다.

응접실에 앉아 어색하게 가주의 노릇을 하며 그와 대화를 나누기를 십여 분.

“황제 폐하께서는 차기 후작의 충성심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한참 동안 델라윈 후작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던 대사가 은근한 어조로 운을 띄웠다.

“충성심…… 이라면.”

“공자가 폐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궁금해하시는 거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르고 싶었다.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저는 폐하의 봉신이며 기사입니다. 주군에 대한 충성은 저의 의무라는 것을 폐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지요, 공자.”

“…….”

“공자는 황제 폐하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칼 엘버트의 사람입니까.”

칼 엘버트는 황제의 이름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황제의 사람이냐, 칼 엘버트의 사람이냐. 두 사람은 동일인물이다. 하지만 구태여 분리해 물어본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

그는 나를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황제라는 신분의 사람에게 충성할 것인지, 아니면 칼 엘버트 자신에게 충성할 것인지.

“저는…….”

문득 대공이 떠올랐다. 며칠 전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이 생생했다.

‘네가 한심한 짓을 해도 한 번은 눈감아주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엄하게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답 없이 정원을 돌아 나서는데 손이 벌벌 떨렸다. 정원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서야 나를 잠식한 것이 분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어떻게 자신에게 독을 먹이라 할 수 있어? 이때까지 내가 그에게 보인 진심이 쓰레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당신을 걱정해서 한 행동들이 전부 호의를 얻기 위해 벌인 수작질로 보였던가. 내 진심이 그렇게 가벼웠던가.

나는 당신이 불쌍했다. 못난 형 때문에 늘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살아야 하는 당신이 진심으로 가여웠다. 당신을 볼 때면 계속 그 아이가 겹쳤다. 그래서 더욱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 그 아이도 천국에서나마 나를 용서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어떻게 사람 행동을 그렇게까지 곡해해.

나는 당신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로 대공을 찾아가지 않았다.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독을 먹이기 위한 수작쯤으로 보였을 거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겼다. 대공도 나를 찾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날 이후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

‘저는’까지 말한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자 대사가 나긋하게 웃었다.

“어렵지요?”

“…….”

“당장 이 자리에서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무엇인지는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가 그것을 지팡이 끝으로 살짝 밀어 내 쪽으로 보내며 말을 이었다.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폐하께서는 참으로 흡족해하실 겁니다.”

행동으로 보이라?

……저렇게 사고방식이 똑같다니 형제는 형제로구나. 작은 병을 노려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동생에게 독을 먹여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라는 형과 자신에게 독을 먹여 형의 의심을 피하라는 동생은 거울처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대사가 돌아간 후 원로회의 수장이 나를 찾아왔다.

“폐하의 뜻대로 따르는 게 좋을 겁니다.”

“…….”

“공자는 정세에 어두워 잘 모르겠지만, 요즘 폐하께서 정복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리가 암암리에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아마 이전에 있던 전쟁들과는 비견할 수 없는 전쟁일 겁니다. 규모부터 다를 거예요.”

“빙빙 돌리지 말아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가문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

“전쟁의 선봉에 서게 되는 것이 우리 후작가가 될 수 있어요. 폐하의 뜻을 따르는 게 최선입니다, 아드리안 공자.”

황제가 원군을 요청하면 그의 봉신인 나는 거부할 수 없다. 작위와 영지를 받은 대가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봉신은 황제의 원군 요청을 꺼려 했고, 미룰 수 있을 때까지 파병을 미루었다.

운이 없을 경우 기사단의 궤멸은 물론이요, 가문 전체가 파괴되어 사라질 수도 있는데 누군들 나서고 싶겠는가.

게다가 전쟁의 선봉으로 서게 될 경우 가문의 피해는 막대해진다. 적의 전력을 알 수 없는 개전 초기에는 일단 부딪치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죽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까 괜히 황제의 미움을 사서 선봉이 되지 말자는 원로회의 주장은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가문을 위해 존재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나는.

애초의 가문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었던 나는.

‘저것이 죽어야 네가 살아. 알겠니?’

‘네가 한심한 짓을 해도 한 번은 눈감아주겠다고.’

또다시 그래야 하는 걸까.

* * *

일주일간 후작저에서 머문 대사가 돌아가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안주인이 없는 나를 대신하여 원로회에서 대사의 환송회를 준비했다. 급하게 준비한 터라 간신히 구색만 맞춘 파티였지만 인근 지역의 영주들을 모두 불렀으니 궁상맞아 보이지는 않았다.

후작의 대리인으로서 파티에 참석한 내 모습은 상당히 이색적이었을 것이다. 이때까지 파티 따위에는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파티를 주최했으니 얼마나 신기할까.

굳이 보려 하지 않아도 내게 꽂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모른 척 넘기며 홀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사가 도착한 날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대공이지만 그가 떠나는 날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는지 파티에 참석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그늘 속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알아본 몇몇 영주는 저들끼리 쑥덕대었으나 연회장 정 중앙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대사를 의식한 듯 먼저 다가가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대공은 혼자였고, 모두가 즐거운 연회장 속에서 홀로 그늘을 담당하고 있었다.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의 표정이었다.

이런 상황 따위는 익숙하다는 듯 홀로 무심한 그 표정. 그것은 하루 이틀 멸시당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습관처럼 배신당하고 은근한 멸시와 기만에 길들여져 어떻게 하면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을지 몇 년 동안 궁리한 사람이나 지을 수 있을 법한 표정이다.

이 연회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고귀한 신분의 대공이 짓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당신은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얼굴을 갖게 되었을까.

상상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머릿속의 그의 과거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죽인 형과 그 형에 의해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동생. 감히 슬프다고 할 수 없는 비극.

그때 연회장 정중앙에 서 있던 대사가 잔을 들며 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좋은 날에 이처럼 좋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준 델라윈 후작 대리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황급히 잔을 들며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대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황제 폐하의 대사로 이 자리에 선 지금, 저는 세상 누구보다 영광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를 빌려 황제 폐하의 무궁한 영광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폐하의 무궁한 영광을!”

“무궁한 영광을!”

보지 않으려 했으나 나도 모르게 절로 시선이 대공에게 향했다.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그늘 속에서 대공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과연 제 형의 무궁한 영광을 기원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사의 벙그레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또 다른 고귀한 분이 계셨지요.”

“…….”

“황제 폐하의 영광은 저보다는 멜링턴 대공께서 기원하는 것이 도리에 맞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중이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서 대공에게로 옮겨 갔다. 연회장 안은 음악소리조차 멎었다.

고요한 연회장. 홀린 듯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 호기심과 악의가 어우러진 시선 끝에 존재하는 대공. 상처받은 짐승처럼 파랗게 굳어 신경을 곤두세운 채 주변을 둘러보는 그 사람.

모든 것이 악몽 같았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혓바닥이 굳은 것처럼 뻣뻣해졌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아둔한 머리가 생각을 멈추었다.

잠시 후, 대공이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꼭 그랬어야 했을까.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조롱해야만 했을까.

어차피 외로운 사람이다. 어차피 힘이 없다. 몇 년에 걸친 황제의 견제로 인하여 그는 허울뿐인 대공이 되었다.

그렇게 조롱하지 않아도 그의 편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꼭 그래야 했을까. 꼭 조롱해야 했을까.

아무것도 들지 않은 대공에게 시종이 다가간다. 은쟁반에 놓인 단 하나의 유리잔. 그 안에 담긴 것은 피처럼 붉은 와인이다. 붉은…… 와인.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폐하께서는 참으로 흡족해하실 겁니다.’

나에게 내밀어진 작은 병.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치명적인 독. 한참을 망설인 끝에 병을 품속에 넣은 나.

……꼭 그래야 했을까.

아무리 그가 눈감아주겠다고 했어도,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 순간 내 손에서 힘이 빠졌다.

챙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요한 연회장 안을 울렸다. 대공을 향하던 시선들이 내게 꽂힌다. 나는 실수라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순간 손에 힘이 빠져 그만.”

“…….”

“새 잔을.”

시종이 망설이는 얼굴로 나와 대공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놔. 그것을 나에게 줘. 결국 그의 발걸음은 내게로 향한다. 은쟁반 위에 놓인 유리잔을 집어 들며 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그는 결국 다른 잔을 손에 쥔다.

“황제 폐하께 무궁한 영광을.”

“무궁한 영광을!”

무궁한 영광을. 그대로 잔을 기울여 와인을 삼켰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화끈한 독극물이 몸을 달구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대로 비워내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후회하는가? 내 시선은 대공에게로 향했다. 대공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 그 묘한 표정이다. 그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웃었다. 웃는 낯과 다르게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10년 전의 나는 너무 어렸고 힘이 없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사정으로 내게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될 뻔했던 아이를 앗아 갔다. 그리움과 죄책감은 외로움과 섞여 손톱 밑 가시처럼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하리라. 이번만큼은, 내게서 소중한 존재를 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내게 있어 최초의 ‘친구’이려니.

* * *

맹독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다.

대사를 돌려보낸 직후 쓰러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 일주일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일전 대공을 치료한 의원을 미리 불러놓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대로 망자의 강을 건넜을 것이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실체가 없는 환각과 환청들이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현실이었다.

어머니가 나왔다. 나를 끌어안은 그녀는 뱀처럼 차가운 혀로 내 볼을 핥았다. 그녀가 혀를 내밀 때마다 쉿, 쉿 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생토록 그녀를 사랑했으나 그 순간만큼은 미치도록 두려웠다. 그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어머니는 나를 강하게 얽어맸다.

아버지가 나왔다. 내가 죽인 양아버지였다. 깨진 머리에서 뇌수가 흘러나왔다.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내 몸이 천 갈래로 찢어졌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아버지는 양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나를 보며 울면서 웃었다. 내 아들. 그가 계속 내게 손짓했다. 이리 오렴. 아빠와 함께 가자.

친아버지의 손을 잡을 때 즈음 어머니가 나타나 내 손을 후려쳤다. 그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녀는 나를 맹렬히 비난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여길 오니, 이 배은망덕한 것.

살아생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나를 그렇게 비난한 적 없었지만 위화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마 내 마음속 어머니가 그러한 모습이었겠지.

나는 아이를 찾았다. 어머니, 양아버지, 친아버지 모두 필요 없었다. 이 상황에 나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아이뿐이었다. 아가리를 쩍 벌린 지옥 속에서 나는 흰 천에 감싸인 아기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아이는 없었다.

도대체 너는 어디 있는 걸까.

이름이라도 알면 목소리 높여 불러보기라도 할 텐데 이름도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동생인지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한이었다.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때처럼 내 손가락을 꼭 쥐여 주며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의식은 점점 회복되었다. 빛이 돌아왔다. 아가리 벌린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나를 제일 처음 반긴 사람은 의외로 대공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지.”

나를 간호하느라 일주일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대공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난부터 했다.

“그걸 왜 네가 먹어.”

알고 있었구나. 알면서도 마시려고 한 거였구나. 내가 보낸 독임을 알고 있었을 텐데. 가물가물한 의식 사이로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사과하려고 입을 떼었으나 일주일 내내 타올랐던 목구멍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뱉지 못했다. 색색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내는 나를 보며 대공이 얼굴을 찌푸렸다.

“말하지 마라. 이 천하의 구제불능 같으니.”

한심한 놈에서 천하의 구제불능으로 전락했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웃는 일밖에 없었다. 그 얼굴을 보고 대공이 혀를 찼다.

“뭐가 좋아서 웃어.”

그냥 당신이 살아서 좋습니다, 라고 대답해 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날부터 대공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찾아왔다. 침상에 누워 있던 내가 원래대로 말하고 듣고 걷고 뛰고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꼬박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나 그는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나를 찾아와 병수발을 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손을 저어도 멍청한 것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는 적반하장식의 말만 늘어놓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그의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큰 변화는 호칭이었다.

“리안.”

그것이 나를 부르는 호칭임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끄러운 듯 귀를 붉혔으나 대수롭지 않은 척 행동했다.

“……리안.”

처음이었다.

태어난 이래 내 호칭은 변한 적이 없다. ‘아드리안.’ 나를 낳은 친어머니조차 나를 리안이라고 친근하게 부른 적 없으니 누가 감히 나를 ‘리안’이라고 불렀겠는가.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가 아니고서야 부를 수 없는 호칭을 처음으로 부른 것이 대공, 델루니안이었다.

만난 지 7개월하고도 반이 지나서야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통상적인 기준에 따르면 늦어도 한참 늦은 관계 형성이었으나, 인간을 불신하던 델루니안의 입장에서는 빠르다 못해 기적인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는 말로 하지 않았지만 종종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새로운 관계를 신기해했듯 그 역시 그랬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친구가 되었다고 공표한 것은 아니고 암묵적으로 그런 관계가 된 것뿐이지만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 주는 충족감은 대단했다.

말하지 않고도 편한 관계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 상상치도 못했는데 델루니안의 존재로 처음 깨달았다.

곧 후작저를 떠난다던 델루니안은 또다시 계절이 두 번 바뀌도록 후작저를 떠나지 않았고, 우리는 여름에는 정원에서, 겨울에는 온실에서 조용히 우정을 쌓았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평화로울 것 같았다.

겨울이 끝나고 꽃이 피는 계절, 황제의 칙사가 후작저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기어코 원군을 요청했단 말이지.”

내게 온 칙서를 읽은 델루니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깍지를 낀 채 이마를 대고 있을 뿐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훗날 황제가 된 델루니안이 일으킨 정복전쟁의 서막이 될 전쟁이었다. 황제가 전쟁에 선봉에 설 가문들을 공개했다.

가장 첫 줄에 델라윈이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 모르겠습니다.”

그때 나는 고작 열여덟 살이었다. 기사 서임을 받은 지 2년이 되었지만 실제 전투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 전쟁에 뛰어들기에는 무리였다.

가문의 기사단을 이끌어야 하는 수장이 이렇게 경험이 부족할 경우 황제와 그 측근이 알아서 명단에서 빼게 마련이다. 도움도 안 되는데 괜히 목숨만 버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나는 경험이 없고, 황제는 그것을 잘 알아서 나를 선봉에 넣었다. 황제는 그냥 나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하려고 했으나 손발이 덜덜 떨렸다. 전쟁이라. 전쟁. 일개 병사로서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기사단을 이끄는 입장으로 나가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내 휘하 기사들의 목숨이 어깨에 달린 것이다.

노련한 수장이 지휘하는 기사단은 살아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병사들은 몰살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델루니안이 손을 뻗어 덜덜 떨리는 내 손을 붙잡았다. 따뜻한 손이 차갑게 식은 내 손을 녹였다.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린 나를 보며 그가 강하게 나를 붙들었다.

“진정해.”

“…….”

“내가 도우마.”

당신이 돕는다고? 흐린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옅게 웃었다.

“전쟁터를 괜히 떠돈 게 아니야. 전쟁의 생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전하.”

“널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다.”

원군 요청을 거부하면 황명 불복의 죄로 바로 처형당한다.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델루니안은 확신에 찬 말투로 나를 안심시켰다.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고.

눈물이 나왔다. 나는 그 손을 붙잡은 채 또다시 엉엉 울고 말았다. 델루니안이 내 머리를 도닥였다. 그 손이 따뜻했다.

그때는 그게 우정이 아닌 다른 감정일 줄 몰랐지. 내가 그에게 우정을 느꼈기에 그 또한 내게 우정만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내 감정이 이렇다고 그 사람의 감정마저 그러라는 법은 없다. 이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았다. 그게 문제였다.

* * *

델루니안과 함께 전쟁터를 떠돌았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전쟁의 생리를 잘 알았고, 나는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내 생각보다도 제법 유능했다.

물론 처음에야 이런저런 사고도 많이 겪었고 실수도 많이 저질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는 점점 더 냉철해졌고 사태를 파악하는 눈은 여물어갔다.

열여덟,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불안정한 소년이 청년이 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적을 베는 데에만 집중했더니 어느새 나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기사가 되어 있었다. 비록 델루니안은 동의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델루니안과 내가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황제가 갑작스럽게 서거했다. 전쟁은 중단되었다. 서거한 황제는 후계가 없어 그의 친동생인 델루니안이 엉겁결에 황제가 되었다.

나는 그의 대관식을 지켜보며 인생사가 한 치 앞도 모르게 흘러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근위기사단이요?”

“싫어?”

“아니요, 싫다기보다는…… 갑작스러워서요.”

황제가 된 델루니안은 나를 근위기사단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스물세 살의 젊은 기사가 근위기사단장이라니. 이건 너무 파격적인 대우가 아닌가 싶어 망설이자 델루니안이 말했다.

“너 말고 내가 등을 맡길 사람이 또 누가 있지?”

“…….”

‘그’ 델루니안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못 하겠다고 버틸 수 없었다. 나는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근위기사단장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후작 각하.”

내가 근위기사단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화살보다 빠르게 퍼져 이튿날 다시금 입궁했을 때는 이미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었다. 국무대신 루이스 채스터턴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축하의 말을 전해왔다.

“……고맙소, 백작.”

“폐하의 총애가 이리도 두터우니 앞으로 각하의 앞날에 영광만이 있을 겁니다.”

총애라니. 후궁에게나 어울릴 법한 단어 선택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총애가 아니라 신뢰지요.”

“아, 그런가요.”

“…….”

“실언했습니다, 각하. 용서하여 주십시오.”

용서해 달라?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어 홀로 삭일 뿐이지만 사실 나는 채스터턴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델루니안을 향한 충성심만큼은 하늘을 찔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인간적인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동지적 관계다 보니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게다가 델루니안이 그를 신뢰하지 않는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가 신뢰하는 극히 드문 사람 중 한 명이다 보니 싫어도 곁에 둘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된 델루니안은 아예 종결시킬 줄 알았던 전쟁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정하며 체계적으로 준비했다. 대륙 정복전쟁의 본격적인 막이 오른 것이다. 그 동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그의 뜻을 항상 지지했다.

1년 동안 중단되었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황제의 근위기사가 된 터라 전쟁터를 직접 누빌 일은 전보다 훨씬 줄었다. 대신 나는 황궁 안에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델루니안은 기반이 약한 황제였다. 그가 황제가 된 것은 그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제국을 지배하려던 몇몇 유력 가문의 합의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델루니안은 의외로 강한 사람이었고 그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차라리 델루니안을 몰아내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고 하였으며, 그것을 막기 위한 나의 전쟁은 물밑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밀려난 황제의 말로가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기 때문이다.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던 델루니안처럼, 나 역시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깊은 우정 때문이었지만 그 우정의 발로는 태어난 지 하루 만에 버림받아 죽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아이.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와 델루니안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델루니안이 내 동생인 셈이다.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내 피에 흐르는 숙명이었다. 나 때문에 죽은 아이가 내게 부여한 숙명 말이다.

그때까지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란 델루니안 한 명밖에 없었다. 최초의 친구이자 유일하게 등을 맡길 수 있는 상대인 델루니안, 오직 단 한 명.

적어도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남자 후궁이요?”

추운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 맴돌았다. 간밤에 황제가 어디에선가 평민 출신의 남자를 데리고 와서 후궁으로 삼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 말이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전쟁터에서 남색이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델루니안이 남자를 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감춘다고 감춰질 일도 아니고, 이때까지 내가 봐온 델루니안이라면 설령 남자를 안는다 하더라도 감출 리 없었다.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델루니안이 그럴 리가…….

하지만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내가 아끼는 이다.”

“예?”

“네가 그의 호위를 맡아. 여린 사람이니 각별한 보호가 필요하다.”

나를 부른 델루니안은 다짜고짜 그 후궁의 호위를 내게 부탁했다. 지엄한 근위기사단장이 평민 남자 후궁의 호위가 된 것이다.

그 명령이 불쾌할 법도 한데 나는 불쾌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델루니안이 남자를 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몇 년이나 함께해 놓고 그의 이면을 몰랐다니. 남색에 큰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격은 충격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지엄한 황제의 부탁 아닌 부탁이니 거절할 수 없어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후궁을 만나러 가는 길이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 후궁이라…… 그것도 평민 출신.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민과 황제가 우연히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여러 모로 충격적이었다.

복도를 돌아 후궁이 거처하고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선 시종에게 내가 그의 호위를 맡게 되었음을 알리자 시종이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놀랐다고 보기에는 과한 반응이었다.

왜 저런 얼굴일까.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앉은 사람을 보자 그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따위는 홀라당 잊고 말았다.

“아…… 그.”

비단처럼 떨어지는 찬란한 금발.

호수를 담은 듯 푸른 눈동자.

복숭앗빛 뺨과 하늘거리는 가느다란 몸.

기억 속 어머니와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안…… 안녕하세요.”

장미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조금 높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자 그가 바짝 긴장한 듯, 긴 속눈썹을 팔락이며 눈을 깜빡였다.

“……저는…… 루크라고 합니다.”

루크.

17년 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의 이름이었다.

* * *

“……저는…… 루크라고 합니다.”

소년은 수줍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내게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얼굴이 한창 아름다웠을 시기의 어머니의 얼굴과 똑같아서 나는 감히 착각도 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 미모로 소문난 어머니. 그 외모를 저렇게 완벽히 재현한 사람이 다른 배에서 태어났을 리가 없다. 그는 내 동생이었다. 분명했다.

17년 전 버림받은 불쌍한 아이. 나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죽을 고비를 넘겼던 진정한 델라윈의 후계. 그가 내 눈앞에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버려진 아이다. 어머니의 젖 한 번 물어보지 못한 아이. 그런 아이가 살아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버림받는 아이는 수없이 많았고, 그 아이들이 살아나서 멀쩡히 인간 구실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니까. 굳이 찾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바쁘기도 했지만, 어차피 죽었을 텐데 찾아서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살아 있었다. 살아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열일곱의 싱그러운 꽃이 되어 황궁으로 날아들었다.

그를 마주하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았는데 정작 목구멍에서는 아무런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저…… 저는.”

더듬더듬, 백치처럼 입을 떼었다. ‘저는’까지 말해놓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설픈 미소인데도 장미꽃이 만개하듯 아름다웠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 미소를 보며 생각한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저는 아드리안 델라윈입니다.

개국공신 델라윈 후작가의 수장이자, 황제페하의 근위기사단장입니다.

다른 귀족들이 자신을 뽐내듯 나를 떠벌려야 할까, 아니면.

저는 당신의 형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앗아 간 자입니다.

내 죄를, 천형처럼 타고난 내 죄를 고백해야 할까.

손이 떨렸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7년 전, 델루니안을 대신해서 독을 먹었을 때처럼 목구멍이 화끈했다.

“저는, 당신의…….”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피가 밑으로 쏟아지는 것처럼 머리가 아찔했다. 발작하듯 심장이 펄쩍펄쩍 뛴다. 전쟁터에서도 느끼지 않았던 공포가 나를 잠식했다.

공포.

그래, 그건 공포였다.

“당신의…….”

“……?”

소년의 의아한 얼굴이 내게 꽂혔다. 그 시선이 지나치게 순수했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도저히 입을 뗄 수 없어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가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리안?”

그때 뒤에서 델루니안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필히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말하자마자 바로 오다니, 빠르기도 하군.”

“…….”

“인사는 나누었나?”

델루니안이 나를 지나쳐 소년에게 향했다. 복숭앗빛 뺨에 짧게 키스한 그가 팔을 뻗어 소년의 허리를 감쌌다.

“이자는 내 근위기사단장이자 오늘부로 네 호위를 맡게 된 아드리안 델라윈 후작이다. 편하게 리안이라고 부르면 돼”

“……저 같은 평민이 어찌 감히.”

후작이라는 말에 놀란 것인지 소년이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속삭였다. 그 말에 델루니안이 옅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시선인지는 바로 알아차렸다.

스스로 나서서 호칭을 정리하라는 것이다. 쓰러지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십시오.”

“…….”

소년이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얼굴을 눈에 새기며 고개를 숙였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며, 핏덩이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그 소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크 님.”

그때.

‘루크 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그에게 모든 것을 고백했더라면.

그 순간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고해의 기회였음을 그때 알았더라면.

* * *

소년이 황궁에 날아든 겨울이 끝자락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제국 북부에 위치한 황도에도 봄이 찾아왔다. 따뜻한 봄바람에 꽃이 망울을 틔우기 시작하며 황궁이 온통 꽃밭으로 뒤덮였다.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라, 겨우내 후궁에 틀어박혀 황궁의 법도를 익히던 소년이 아이처럼 기뻐하며 정원으로 나섰다.

꽃에 고개를 파묻은 채 향기를 음미하는 소년은 아름다웠다. 흔한 비유로 누가 꽃인지 모를 정도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나비가 날아 그의 황금빛 머리칼 위에 앉았다. 소리 없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는 꽃이 아니란다.

그의 머리에 앉은 나비를 쫓아내고 손을 내린 순간,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저, 리안 경.”

“예, 루크 님.”

“그……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묻고 싶은 것이 있다는 소년의 얼굴은 드물게도 진지했다. 그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묻고 싶다는 게 뭘까. 혹시 자신의 출신에 대해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어떤 의심이라도?

요 근래 나는 소년의 표정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아해하는 기색이 보이면 두려움부터 들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질문이 자신의 출생에 관한 질문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런 나 스스로가 환멸스러워 자책하기를 수십 번. 나로서는 도저히 두려움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후작위에 대한 집착은 분명 아니었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작위를 넘길 수 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되돌려 주는 것이 아쉬울 리가 없다. 그러니 그 알량한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대한 욕심은 아닌데.

그런데 왜 이렇게 두려울까.

“그…… 아니, 아니에요.”

“……무엇이든 하문하셔도 됩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소년이 결국 아니라고 입을 다물었다.

비열한 마음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흘렸지만 동시에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무엇이든 물어도 되는데. 무엇이든 대답해 줄 수 있는데.

하층민으로 자란 소년은 질문하는 법보다는 호기심을 거세하는 방법부터 익힌 것 같았다. 그게 제일 안타까웠다. 누구보다 당당히 자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소년이 다시금 갈등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질문이기에 저러는 걸까. 재촉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다리자 그가 까닭 모르게 붉어진 얼굴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 리안 경은 글을 배우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예?”

“……그게 궁금해서요.”

글을 배우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물음이다. 알 수 없이 불안에 떨었던 내가 허탈해질 정도로 뜬금없는 질문.

나는 당황한 채로 멍하니 대답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만, 크게 의식하지 않고 글을 썼는데 어긋남이 없게 된 것은 열다섯 즈음이었습니다.”

그 말에 소년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드러났다. 내가 무슨 말 실수라도 한 건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파서 우는 병사를 달랜 적은 있어도 실망한 동생을 다독이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다. 어쩌지.

“혹시 글을 배우고 싶으신 겁니까?”

어쩔 줄 모르고 일단 되는대로 물었다. 그런데 그게 정곡을 찔렀던 것 같다.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 그것이…….”

“…….”

“……예, 그렇습니다. 과한 욕심인 것은 저도 알지만요.”

소년이 한숨처럼 덧붙였다. 과한 욕심이라니. 고작 글 하나 배우는 것이 뭐가 과한 욕심이라고 벌써 체념하는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족으로 나고 자란 나는 평민에게 글을 배우는 것은 불필요한 사치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일반적으로 글을 배우려면 도시의 아카데미에 입학하거나 가정교사를 불러야 한다. 하지만 그 비용은 일반적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평민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자유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이나 자식을 아카데미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야 어릴 적부터 가정교사가 와서 글을 가르쳤고 비용이야 후작가에서 대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황궁에는 책이 많으니 혼자서라도 배워볼까 했는데.”

“…….”

“리안 경께서 십오 년이나 걸렸다니 아무래도 포기하는 게 좋을 성싶습니다.”

소년이 민망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 모습에 또다시 가슴이 아려왔다.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야. 배우게 해달라고, 그렇게 말해볼 수는 있잖아. 내게 요청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당신의 호위기사인데. 뭐든지 들어줄 수 있는데.

그 대화를 끝으로 소년은 다시금 후궁으로 돌아갔다.

그가 방 안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델루니안을 찾아갔다. 집무실에 있던 델루니안은 언제나 그렇듯 나의 방문을 환영했다.

“그래, 오늘은 뭘 했지?”

요즈음 부쩍 바빠진 델루니안은 내게 소년의 일과를 지켜보고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으며 심지어는 무엇을 먹고 마셨는지까지 전부 말하고 나면 두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눈을 빛내며 내 이야기를 들었고, 간혹 웃음을 터뜨렸으며,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그는 정말로 소년에게 빠져 있었다. 그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묘하게 싫었다.

“오늘은 제3정원을 산책하셨습니다.”

“제3정원?”

“후궁에서 가까운 곳이니까요. 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흐음. 어떤 꽃이 제일 예뻤지?”

“모든 것을 다 좋아하셨지만 특히 오래 즐긴 것은 아네모네였습니다.”

“아네모네라…….”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델루니안이 갑자기 물었다.

“너도 아네모네가 예뻤어?”

“예?”

“네 눈에 제일 아름다운 꽃은 무엇이었지?”

“……글쎄요, 저는 꽃은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제일 눈길이 가는 꽃이 있었을 거 아냐.”

제일 눈길이 가는 꽃이라. 사실 그런 꽃 따위는 기억에 없다. 내가 본 것은 꽃이 아니라 소년이었으므로. 그래도 굳이 하나만 꼽자면.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노란색 꽃이 참 예뻤습니다.”

“노란색?”

“예. 아네모네 화단 뒤에 있던 것입니다만…… 화초에는 무지하여 이름은 모르겠군요.”

“아네모네 화단 뒤. 노란색 꽃.”

델루니안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무심히 흘리며 집무실로 오는 내내 가슴에 품어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저, 폐하.”

“음?”

“루크 님께서…… 글을 배우고 싶어 하십니다.”

“글을?”

“예. 워낙 성정이 얌전하신 분이라 차마 전하께 말씀을 못 드리는 것 같아서 대신 전해 드립니다.”

그 말에 델루니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말하면 될 것이지.”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좋은 글 선생을 구해보겠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다. 그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 내일부터라도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델루니안이 허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

“……?”

“내게 직접 부탁하라고 해.”

델루니안의 흑갈색 눈이 짓궂게 빛났다.

“네 뒤에 숨기만 하는 건 황궁에서 살기에 좋은 태도가 아니지. 직접 난관을 극복하는 연습도 해야 해.”

“아…….”

그렇군. 그 말이 틀린 게 없어서 나는 그 말씀이 옳다고 고개를 조아렸다.

소년은 내게 아픈 손가락과도 같아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지만 사실 그게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황궁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황금 밀림이라 불리는 곳이 황궁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형제가 형제를 견제하는 곳.

스스로 난관을 극복할 줄 알아야 목숨을 오래 부지할 수 있다. 황제에게 글을 배우고 싶다 청하는 것은 난관 축에도 끼지 못한다.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다 해주고 싶어서.

“직접 말씀드리면 된다고요?”

내가 전한 소식에 소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역시 무서운 걸까. 평민으로 자란 그가 황제에게 대놓고 글을 배우게 해달라 요청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나에게야 델루니안이 친구지만 그에게는 지엄한 황제가 아닌가.

그에 ‘부담스러우시다면 제가 다시 요청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당황한 채로 눈만 깜빡이던 소년이 갑자기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

벚꽃이 만개하듯 포근하고 어여쁜 미소였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리안 경. 리안 경이 아니었다면 절대…… 절대 불가능했을 거예요. 진심입니다.”

“……루크 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뭘 했다고 저런 반응이지. 심장이 다시금 아파왔다. 칼에 베이듯 아린 통증이다. 소년을 볼 때면 계속해서 가슴이 아파왔다.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날뛰어 온몸을 찌르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갑자기 울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소년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델루니안에게 직접 부탁하여 허락을 받은 것이다. 그는 영리했고 내가 글을 배운 것보다 훨씬 빨리 글을 익혀 나갔다.

그가 즐겁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점점 내 몸을 찌르는 감정들을 알아차렸다. 글을 배우는 것은 소년인데 어째서 감정을 알아가는 것은 나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지독히도 비겁한 감정.

“……루크 님?”

산책하러 갈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는 그를 찾아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엎드린 채로 잠든 그가 보였다. 세상모르고 곤히 잠든 그의 모습에 또다시 심장이 뻐근해졌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를 깨우기 위해 다가간 순간이었다.

“…….”

그가 글자 연습을 한 종이가 시야에 걸렸다. 너른 종이 위에는 익숙한 글자가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최대한 예쁘게 쓰려고 연습한 듯 이런저런 필체를 바꿔가며 노력한 글자. 아니, 이름.

“……Adrian.”

그 순간, 나는 심장을 공격해 온 감정을 깨달았다. 내 두려움의 근원도 함께.

누군가에게 애정을 품는다는 것은 그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이 죽음보다도 두려운 것을 의미한다.

원망을 듣고 미움을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절박한 마음. 그러니 나를 떠나가지 말라는 절실한 애원.

스물넷의 봄, 내가 깨닫고 만 감정은.

어떤 존재에 대한 맹목적 애정…… 사랑이었다.

* * *

사랑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유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리안 경.”

전쟁터에서의 나는 잔혹하기 짝이 없는 기사였으나 그 모든 악명은 소년의 앞에서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 좀 보세요, 리안 경.”

“……강아지 아닙니까? 어디서 온 겁니까?”

“모르겠어요, 불쑥 튀어나와서는 이렇게 막 꼬리를 흔드는데…….”

오늘은 말해야지, 오늘은 꼭 모든 진실을 밝혀야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결심했으나, 소년을 보는 순간 그 모든 결심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은 깊어졌고,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려움은 커졌다.

“새끼인 것 같지요?”

“……그렇군요.”

“어디서 온 아이일까…….”

……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나를 원망하면 어쩌지.

모든 게 당신 때문이었다고, 당신이 내 인생을 망친 주범이라고, 그렇게 탓하면 어쩌지.

꼴도 보기 싫으니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당신이 떠나지 않을 거면 내가 떠나겠다고, 그렇게 나를 떠나가면 어쩌지.

“품종 견은 아닌 것 같고 떠돌이 개인 것 같습니다. 어쩌다 들어왔나 봅니다.”

“……그런가요? 얘 아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 응?”

차라리 그때 밝혔어야 했는데.

이렇게 사랑이 깊어지기 전에, 너를 처음 본 순간 모든 것을 밝혀야 했는데.

“……여기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새끼 강아지를 품에 끌어안고 그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는 너를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래서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것이 이토록 두려워질 줄 알았더라면 그때 말했을 텐데.

후회한다. 너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은 것을.

증오한다. 너를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을.

* * *

소년은 강아지를 거두었다. 델루니안이 자주 찾아오는 방에서 키울 수는 없어 후궁에서 가장 가까운 제3정원 한쪽 구석에 개집을 마련했다.

시종들은 강아지가 도망갈지 모르니 말뚝을 박고 목줄을 채워 묶어두자고 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가고 싶다면 도망가게 두어야지요. 어지간해서는 제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소년이 그리도 완강히 버티니 시종들도 하는 수 없이 개집만 짓고 말았다.

“이름은 뭐가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흔하디흔한 이름은 싫고, 또 거창하게 지어주자니 아이가 하도 천방지축이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그저 강아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성의가 없는 것 같아 고민이 많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강아지가 선물이라도 되는 듯 소년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근래 소년의 낯빛이 어두워 내심 걱정하던 중이었는데 금세 밝아진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아무렇게나 막 지어도 되는 강아지의 이름 따위를 두고 그는 하루 종일 고뇌했다.

시종을 시켜 황실 서고에서 신화집까지 빌려 오게 한 그는 더듬더듬 책을 읽으며 강아지에게 어울릴 이름을 찾았다. 그러기를 몇 시간. 얼마나 집중했는지 델루니안이 찾아온 것도 모를 정도였다.

“폐―”

폐하, 라고 부르려던 나를 델루니안이 저지했다. 손을 뻗어 내게 입 다물라는 제스처를 취한 그가 조용한 걸음으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문에서 등을 돌리고 있던 소년은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보는 거지?”

“……!”

우당탕.

갑자기 귓가를 때린 델루니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소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다가 발이 꼬였는지 으악, 하고 뒤로 넘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소년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나보다 먼저 델루니안이 그를 낚아챘다.

“조심해.”

그의 품에 안긴 소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더듬더듬 사죄했다.

“송, 송구합니다, 폐하.”

델루니안의 무뚝뚝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그와 10년을 함께한 나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웃음이었다. 아마도 델루니안 자신도 몰랐을 미소.

“무슨 책을 그리 골똘히 보는 거냐 물었다.”

“신화집을 읽고 있었습니다.”

“신화집? 갑자기 그건 왜?”

그 말에 소년이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걸 말해도 되느냐고 묻는 것 같다.

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어차피 델루니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터다. 요즈음 그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소년의 소식을 찾았다. 내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처음에는 소년에 대한 델루니안의 총애가 식은 줄 알았다. 소년의 소식을 전하면 그저 심드렁하게 그런가,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모습에 나는 헛된 기대를 품었다. 만약 총애가 식은 것이라면 적당한 때에 부탁하여 소년을 후궁에서 데리고 나가리라. 이제 와서 진실을 밝히지는 못하더라도 평생 누리지 못한 것을 다 하게 해줄 것이라 다짐했지.

이후 알게 되었다. 그가 다른 시종을 통해 내가 보고하기도 전에 소년의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는 것을. 총애는 식은 게 아니었다.

내가 보고하러 가는 그 잠시간도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깊어진 것일 뿐. 그래놓고 친구 보기 민망하여 내게는 모른 척했던 것 같다.

그것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내가 데리고 나갈 수 없다면 소년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편이 좋다. 현재 소년은 법적으로 황제의 사람이었다. 그의 생사는 황제에게 달려 있으며,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는 죽어서도 황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소년뿐만이 아니다. 후궁의 삶이란 으레 그렇다. 그녀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황제의 총애에 집착하는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어차피 벗어나지 못할 거라면, 총애라도 받아 권세라도 누리자고.

어차피 소년은 남성인지라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총애를 받아도 권세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보호는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소년은 모르겠지만 그를 노리는 자는 제법 많았다.

그에게 접근하는 귀족들이 전부 좋은 마음이었겠는가. 소년은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귀족 중에는 남색가가 많았다.

그들은 호시탐탐 소년을 취할 기회를 노렸다. 지금이야 황제의 총애가 있으니 감히 무서워 노리지 못하지만, 만약 황제의 총애가 떨어진다면…….

총애를 잃은 여성 후궁이 외간 사내와 부정을 저질러 아이를 가질 경우, 후궁은 물론이거니와 부정의 상대방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소년은 그럴 걱정이 없는 사내다. 권력자의 후궁을 탐한다는 비틀린 쾌감과 타인을 겁탈하는 데에서 오는 역겨운 지배욕 모두를 채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하겠지만, 사건은 언제라도 발생하게 마련이니까.

현재 소년을 지킬 수 있는 존재는 델루니안이 유일했다. 그를 지킬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오직 델루니안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친형이자 호위기사인 나는 델루니안의 총애가 부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총애가 떨어질 경우, 내가 그를 데리고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기를 바랐고.

“그…… 오전에 산책을 하다가.”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풀숲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뛰쳐나왔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 그래서?”

“강아지는 주인이 없는 것 같았고…….”

델루니안에게 혼이라도 날까 두려웠던 것인지 소년이 잔뜩 위축된 채로 말을 이었다. 정작 델루니안 본인은 혼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내가 보기에 델루니안은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소년의 허리를 붙잡아 껴안은 팔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감히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려 하였는데…….”

“그런데?”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서.”

“그래서 신화집을 보았다?”

그가 낮게 웃었다. 소년의 귀가 붉어졌다. 델루니안이 소년의 금발에 코를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한낱 미물의 이름에 그리 공을 들이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저에게는 한낱 미물이 아니니까요.”

“음?”

소년이 쓸쓸하게 웃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뭐가 아니란 거야. 말해봐.”

“정말 별것 아닙니다, 폐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왜 한낱 미물이 아니라는 거지?”

소년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괜히 말했다고 자책하는 것 같았다. 그가 연녹색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렸다. 어떻게 대답을 회피할 방법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찾을 수 없었던지 그가 마침내 한숨처럼 대답하고 말았다.

“그 아이, 떠돌이 개였습니다.”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어쩌다 황궁에 들어오게 된 것이…….”

“…….”

“닮은 것 같아서요.”

누구와 닮았는지.

그것은 말하지 않았지만 델루니안과 나는 그가 지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델루니안의 얼굴이 굳었다. 내 얼굴도 그 못지않게 굳었으리라.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떠돌이 개.

어쩌다 황궁에 들어오게 된.

‘……여기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 * *

그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그날의 대화로 나는 이때까지 내가 간과해 왔던 것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그가 이 황궁에서의 생활을 행복해하는지 여부였다.

어째서 한 번도 의문을 가진 적이 없지?

나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는 남성이다. 손꼽히는 미녀였던 어머니처럼, 아니, 그보다 아름답다지만 그래도 성별은 분명히 남성이었다.

남성성을 중시하는 제국에서 남자 후궁으로 사는 일이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남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그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한 적이 없다. 어째서? 정말 어째서지?

“……무슨 일입니까?”

그런 생각에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를 근 일주일.

“강아지가…….”

오전에 입궁하자마자 내가 마주한 것은, 싸늘하게 죽어 있는 강아지와 그를 보며 차마 울지도 못하고 파랗게 질려 주먹만 움켜쥐고 있는 소년이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루크 님.”

“……모르겠어요.”

소년은 강아지의 시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아침에…… 강아지에게 식사를 챙겨주려고 갔는데…… 개집에 없기에 다른 곳으로 가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꽃밭 사이로 꼬리가 보이기에 다가갔는데.”

호되게 걷어차였는지 배 부분이 아예 찢어져 내장이 쏟아진 강아지가 거기 있었다고 소년은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강아지를 덮은 천을 들었다. ……끔찍했다.

“누가. 왜.”

“…….”

“왜, 이 아이를.”

문장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소년은 부들부들 떨었다. 공포라기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3년 동안 함께하며 그가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 역시 화가 났다. 누군가의 악의로 인해 죽어간 강아지, 그 위로 소년이 겹쳐 보였기에.

“내가 싫으면 차라리 나를 걷어차지.”

“루크 님.”

“도대체 왜!”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뱃속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감히. 누가 그를 울렸는가. 내 소중한 사람을 울린 이가 누구인가. 그를 찾아내어 보복하리라. 소년의 앞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악명 높은 기사의 면모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 마지막으로 강아지를 보았던 이들의 행방을 좇았다. 예상외로 범인은 쉽게 밝혀졌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 한 마리 죽인 걸로 나를 처벌하진 못할걸요.”

남자 시종을 시켜 강아지를 죽인 사람은, 평소 소년을 싫어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던 백작의 영애였다. 후궁에 들어온 지 3년이 되었지만 이때까지 델루니안과 동침 한 번 하지 못한 여인.

그녀는 자신과 같은 시기에 후궁에 들어온 소년이 자신이 받을 수 있었던 총애를 앗아 갔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소년만 사라지면 자신의 세상이 올 것처럼 굴었다.

작년 겨울에 그에게 화로를 뒤집어씌워 하마터면 화상을 입힐 뻔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던가. 그때 분명 주의를 주었는데.

“왜 강아지를 죽였습니까?”

“천한 것이 겁도 없이 황궁 안을 싸돌아다니는데 보기에 좋지 않아서요.”

“……하.”

“제깟 것이 분수를 알아야지요, 분수를. 감히 여기가 어디랍시고 함부로 들어온답니까? 더러운 암내나 풍기면서.”

그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참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 입 닥쳐.”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떠들어대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역겨웠다.

“더러운 암내라고 했습니까.”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천한 것이라고?”

하하…….

“감히 네까짓 게.”

그가 마땅히 누릴 것을 누리고 자랐더라면 감히 얼굴조차 마주할 수 없었을 백작의 서녀 따위가.

“델라윈 경! 그대는 기사예요! 여인에게 이런 말투를 쓸 수는…….”

“그 입 다물라고 했습니다.”

“…….”

“내가 분명히 말했지.”

지난겨울. 네가 화로를 뒤집어씌워 그가 어쩔 수 없이 머리카락을 잘랐을 때.

“한 번은 모른 척 넘어가겠지만 두 번은 못 봐준다고.”

“…….”

“그게 너를 위한 처사인 줄 알았나.”

그때 그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넘어간 것은, 소란을 만들기 싫어하는 그가 직접 부탁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는데 고작 후궁의 일로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던 그의 부탁 때문에. 분노로 속이 끓었지만 억지로 참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아비의 목을 치는 사람이 그의 딸이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켜보면 알게 될 겁니다.”

“델라윈 경! 델라윈, 델라윈 각하! 후작 각하!”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그녀가 악을 쓰며 나를 쫓아왔지만 나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아직도 분이 풀리질 않았다.

감히. 제까짓 것이 그를 모욕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지옥을 보여줄 것이다.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빌게끔.

일단은 그녀의 아비 체드윈부터. 체드윈 백작이 일리오니아와 내통하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아직 일리오니아와의 전면전을 선포하지 않아 조금 더 지켜본 후 잡아들이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딸이 저렇게 아비의 목을 쳐달라고 간청을 하는데 안 들어줄 수는 없는 법.

분노로 달아오른 상태로 차마 그를 마주할 수 없어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 그의 방을 찾아가자, 그는 이미 슬픔과 분노를 씻어낸 담담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루크 님, 그 아이는…….”

“묻어주고 왔습니다.”

“…….”

“좋은 곳 가라고 비석도 세워주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까지도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어서.”

“…….”

“그냥 루카스라고 했습니다.”

루카스.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루카스는 루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같은 이름을 북부에서는 루카스라고 하고, 남부에서는 루크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그는 죽은 강아지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왜 하필 자신의 이름을 붙였단 말인가.

내 경악한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가 너무 놀라지 말라며 말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루카스라는 이름밖에 안 떠올랐어요.”

“루크 님.”

“하지만 조금…… 그렇잖아요. 너무 노골적이고.”

떠돌이 개, 어쩌다 황궁에 들어온 개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너무 노골적이라 차마 루카스라고 부를 수 없었다는 그는.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좋은 곳 가라고.”

“…….”

“이렇게 위험한 황궁 말고 좋은 곳 가서 행복하게 잘 지내라고…….”

……그는 행복한 걸까?

“루크 님.”

충동적으로 입을 떼었다. 강아지를 떠올리며 감상에 젖어 있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그 눈을 마주하며 나는, 이때까지 내가 간과해 온,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던 질문을 던졌다.

“루크 님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 * *

눈이 내린다.

마차는 덜컹대며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세 대의 화려한 마차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깃발을 펄럭이며 눈 쌓인 침엽수림 한가운데를 지나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오르막길의 끝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이때껏 왔던 길을 돌아보니 길고도 멀었다. 이제 곧 있으면 내리막길이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니 내리막길 위로 푸르다 못해 눈이 부신 하늘이 펼쳐 있었다.

후……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동화 속에 등장하는 요정들의 마을처럼 아름다운 레이비크. 제국의 동북단에 있는 얼음 온천의 도시다. 그리고 황제의 겨울행궁이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한파가 몰아치며 박차를 가하던 정복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최근 일리오니아를 공격하여 몰아치던 제국군은 갑작스러운 한파에 일단 산맥 밑으로 퇴각하여 진을 이루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는 산악국가인 일리오니아를 상대로 겨울에, 그것도 산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날이 풀리면 다시금 공격할 예정이지만, 이번 겨울은 예년에 비해 제법 길 것이라 예상되었기에 델루니안은 뜻밖의 휴식 시간을 갖게 되었다.

황도로 돌아온 그가 제일 처음으로 벌인 일은 뜻밖에도 겨울행궁으로의 피한이었다.

더위는 잘 타지만 추위는 잘 타지 않는 델루니안이다. 게다가 겨울행궁은 몸이 약했던 선황이 직접 지은 곳이었다.

선황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델루니안이 그곳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런 탓에 즉위한 이래 겨울행궁을 쓴 적이 없는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곰곰이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 직접 묻기도 했지만 그는 별것 아니라고 대답할 뿐, 자세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의문이 깊어지고 있던 찰나.

‘정말로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요?’

‘예?’

‘아, 레이비크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사시사철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들어서요.’

답은 의외의 곳에서 떨어졌다.

‘갑자기 오로라는 왜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그 순간 소년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였고, 금세 밝은 얼굴을 회복한 소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때 루카스의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보았던 신화집에서 오로라 여신의 신화를 보았습니다.’

‘아…….’

‘삽화도 보았지만 차마 상상이 가질 않았는데, 폐하께서 황송하게도 저까지 대동하고 가신다니 조금 기대가 되네요.’

델루니안이 왜 갑작스럽게 레이비크에 가겠다고 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최근 소년에 대해 부쩍 관심이 많아진 그가 오로라에 대한 소년의 관심을 몰랐을 리가 없다.

루카스의 죽음 이후로 소년은 안 그런 척하면서도 종종 우울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제대로 다독이기도 전에 전쟁터로 향한 델루니안은 전서구를 통해 매일같이 소년의 소식을 받아 보았다. 어쩔 수 없이 떠나놓고 분명 눈에 밟혔던 것이겠지.

소년이 죽은 강아지의 이름을 루카스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초조한 눈길로 허공을 쏘아보던 델루니안을 잊을 수 없다.

내가 그러했듯 그도 불안했던 것이리라.

자신에게 지친 소년이 떠나 버릴까 봐.

그러니까 그렇게 부리나케 레이비크행을 결정했겠지. 나는 그를 이해했다.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했다. 그의 애정이 지나치게 깊어지는 것 같아서. 이러다 평생 소년을 놔주지 않을까 봐.

‘루크 님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루카스가 죽은 날, 나는 그렇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냐고. 내 물음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는 것처럼.

나도 안다. 분명 상황에 맞지 않는 물음이었다. 방금 강아지를 잃어 슬퍼하던 사람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또 있을까.

그렇지만 내뱉고 나니 가슴속에서 갈팡질팡하던 결심은 확고해졌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다짐했다.

만약 그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당장 그를 데리고 떠나리라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소년의 행복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리안 경.’

‘…….’

‘하지만…… 음.’

잠시간 대답을 고민하던 그가 문득 눈가를 휘며 웃었다.

‘저는 지금…… 충분히 행복해요.’

‘…….’

‘비록 루카스는 죽었고, 가끔 이런 상황들에 지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때 방문이 열렸다. 나를 보고도 인사조차 하지 않은 그는, 강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라도 한 건지 굳은 낯빛으로 소년에게 곧장 다가갔다. 소년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그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 폐하께서 보살펴 주시니까.’

그 말에 쌓아 올린 결심이 뭉근히 무너져 내렸다. 허탈했다. 델루니안에게 안겨 이마에 키스를 받는 소년이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묻고 싶었다. 너 정말로 행복한 거 맞아?

네가 진정으로 행복하다면, 네 얼굴은 왜 그렇게 슬픈 건데?

“리안 경.”

그때 일을 상기하자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우…….”

또다시 뭉게구름 같은 한숨을 피워내는데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마차의 창문을 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루크 님?”

말머리를 돌려 소년이 탄 마차에 가까이 대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이거 받으세요.”

그러면서 내게 내미는 것은 따뜻하게 달군 돌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

“마차 안에서 계속 달구었으니 한동안은 따뜻할 거예요. 조금 무겁겠지만 추운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

“온 만큼 더 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추위 많이 타시잖아요. 품에 넣어두세요.”

나는 멍하니 그가 내민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함께한 지 벌써 3년이었다. 그 사이 그는 기민하게 추위를 많이 타는 내 속성까지도 파악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겨울철 칼바람에 베이는 것처럼 아렸다.

다정한 아이. 부모에게 버림받고 평민으로서 힘들게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내 동생.

나와 함께 자랐더라면, 아니, 굳이 나와 함께 자라지 않았더라도 누릴 것을 누리고 자랐더라면 이보다 더 다정하고 사랑스러웠겠지. 천성이 착한 아이니 분명 그랬을 터다.

만약 그가 누릴 것을 누리고 자랐다면.

마땅히 자신의 것이어야 할 지위와 재산,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을 가졌다면…… 지금처럼 황제의 남첩이 되어 보호를 받으며 느끼는 행복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행복함을 느꼈을 테지.

사실, 그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감히 묻고 싶었다.

네가 진짜 행복이 뭔지 알기나 하냐고. 네가 느끼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그건 전부 너의 불운한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기만당한 행복일 뿐이라고.

……나는 너에게 진정한 행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소년이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나는 그가 준 돌을 가슴팍에 넣었다. 뜨끈한 돌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가슴을 달구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맞닿은 열기로 펄떡였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못한 것은, 그 말이 그의 삶에 대한 조롱이나 마찬가지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삶을 그렇게 망친 것은 나.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조롱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가 행복이라 믿는 것을 존중하기로 했다.

언제라도 그가 ‘이제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면 그때 진정한 행복을 보여주겠다 다짐하며.

……비겁했고, 어리석었다.

* * *

레이비크에 도착했다. 지붕이 높고 창문과 문이 커다래 통풍이 잘 되도록 설계한 라윈의 여름행궁과 달리 레이비크의 겨울행궁은 지붕이 낮고 벽이 두꺼웠으며, 창문과 문이 작아 바람이 잘 들지 않았다.

이런 식의 건축 형태는 황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지라 소년은 무척 신기해했다.

레이비크의 겨울행궁에는 노천 온천이 있다. 사시사철 뜨거운 용천수가 솟아오르는 곳으로 뜨거운 열기로 인해 한겨울에도 목욕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유달리 목욕을 좋아하는 소년은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밖에도 레이비크에는 소년이 즐길 법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레이비크는 겨울 도시로서 지금 이 시기에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많은 곳이었다.

“협만이 얼어붙었다는군.”

“협만이요?”

“썰매를 타고 놀 수도 있을 정도라고 하니, 심심하면 리안과 함께 다녀와도 좋아.”

전시에 본의 아니게 휴가를 얻은 델루니안은 레이비크까지 와서도 안심하고 쉴 수 없는지 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오자마자 겨울행궁 안 집무실에 틀어박힌 델루니안은 자신이 데려온 소년마저 그렇게 방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놀 만한 거리들을 알려주었다.

자신은 일할 테니 너희들끼리 알아서 놀라는 말에 소년은 조금 망설였으나, 결국 그의 조언대로 썰매를 타러 협만 쪽으로 향했다.

썰매라고 해서 일반적인 평민 아이들이 나무를 잘라다가 만드는 썰매일까 생각했더니 웬걸. 세 마리의 덩치 큰 개가 끄는 개썰매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동물을 워낙 좋아하는 소년은 제 몸집만 한 개들을 보자마자 예뻐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들이요, 루카스를 닮지 않았나요?”

“……예?”

“특히 두 번째 아이요. 아무리 봐도 루카스를 닮았어요.”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루카스는 털이 하얀 새끼 강아지였다. 귀도 서지 못해서 반쯤 접혀 있던 새끼 강아지.

하지만 이 개들은…… 아무리 봐도 새끼는 아니었다. 새끼여도 루카스와 닮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사자처럼 긴 털을 위풍당당하게 내뿜는 저것들이 어떻게 그 작은 강아지와 닮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동물을 좋아한다지만 이건 너무 억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갑자기 소년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썰매 타요, 리안 경.”

“……정말 타시려고요?”

“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옆에서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던 썰매 주인이 끼어들었다.

“위험할 것 하나 없습니다. 이놈들이 보통 영리한 게 아니라, 위험한 쪽은 아예 발도 딛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만 쏙쏙 피해 다니거든요. 게다가 고삐만 살짝 틀어쥐어도 속도를 늦출 수 있으니 안심하고 타셔도 됩니다.”

“그렇대요, 리안 경!”

“……하아.”

“같이 타요, 네?”

낯선 곳에 놀러 와서일까, 소년은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연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조르는 모습이 황궁에서 얌전하게 따르던 모습과 대조적이라 조금 신기했다.

어쩌면 이게 소년의 본성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자 또다시 가슴이 아파왔고, 그만큼 소년이 사랑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썰매에 올라탔다. 고삐는 당연히 내가 쥐었다. 칼바람이 불 것을 염려해서 내 망토를 벗어 소년에게 둘러주었다. 소년은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내가 부득불 우기자 어쩔 수 없이 망토를 꼭 붙잡았다.

“이랴!”

고삐를 당기며 소리치자 세 마리의 개가 빙판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협곡에서 불어온 찬바람이 뺨을 갈겼다. 소년에게 망토를 벗어준 터라 순식간에 체온이 떨어졌다.

그래도 춥다고 티를 낼 수는 없는 일. 일부러 속도를 내어 달리자 소년은 우와…… 하며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웅장하고 장엄한 협곡.

시선의 끝에 위치하는 만년설과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절벽. 온 세상이 얼음과 눈의 왕국인 것 같다.

“리안 경, 리안 경!”

“예?”

“저것 좀 보세요!”

무엇이 또 그리 신기한 걸까. 고삐를 쥔 채로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손을 뻗어 산자락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을 자세히 보니 바람이 불어 눈가루가 흰 비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고작 저게 신기한 걸까. 정말 호기심 많은 새끼 강아지 같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렀다.

“예쁘다…….”

소년은 모든 것을 신기해했고,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했다. 그의 시선에 흉한 것은 없었고, 악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년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항상 올곧았다. 그것은 그 자신이 올곧은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소년은 솔직했고, 단순했으며 직선적이었다. 그는 타인을 비틀어 꼬아 보지 않았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면 호의로 답했고, 자신을 싫어하면 같이 싫어하기보다는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며칠 전 후궁에서 쫓겨난 채드윈 백작의 서녀가 그런 경우다. 그녀는 그를 싫어했지만, 그는 그저 한숨 한 번으로 그녀를 잊었다.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

‘그런가요?’ 하고 무심하게 대답한 그는 아예 그녀의 존재를 잊었다. 역시 타고난 그릇이 다르다.

강한 듯 약하고, 약한 듯 강하고.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비굴하게 부끄러워하지는 않고. 호의에는 호의로, 악의에는 무시로. 강자에게는 의연하게 대하며 약자에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세를 낮추어주는 그는 평민으로 자랐지만 태생부터 진짜배기 귀족이었다. 어설픈 사생아인 나와는 달리.

그런 그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잘 자랐더라면 제국에서 가장 우아한 귀족이 되었을 그.

경치 구경에 여념 없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자, 그가 그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고개를 돌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나를 살핀다.

무슨 일 있나요? 그렇게 묻는 것 같다. 나는 온 힘을 짜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 마리의 개는 능숙하게 협곡을 돌아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위험할 것 없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소년은 썰매에서 내리자마자 망토를 벗어 내게 다시금 둘러주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날이 추우니 계속 둘러매고 있으라고 해도 소년은 완강했다. 내 어깨에 망토를 둘러주던 그가 문득 내 목덜미를 한 번 짚더니 속삭였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요, 리안 경.”

“예?”

“찬바람을 너무 오래 쐬었나 봐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열이라고? 아…… 그런가?

나는 유독 추위에 약했다. 체질적으로 몸이 차서 그렇다. 제국민들은 주로 몸이 뜨거운 편이었지만 나는 내 친아버지를 닮아 몸이 찬 편이었다. 그래서 사실 엽차 같은 것은 마시면 안 되었다. 엽차는 대표적인 냉차니까. 하지만 부러 엽차를 마신 것은, 소년이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엽차를 즐기는 소년과 취향을 공유하고 싶어 억지로 마셨던 그것.

그때는 그것이 독이 되어 돌아올 줄, 상상도 못했다.

겨울행궁으로 돌아가자 소년의 말마따나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날이 추워 열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따뜻한 행궁 안에 들어오자 열이 끓는 것이 느껴졌고, 그런 나를 보며 소년은 안절부절못했다.

일단 소년을 돌려보내기 위해 소년이 쓰기로 한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그를 들여보내려는데 그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안 되겠어요. 여기서 쉬세요. 제가 의원을 부를게요.”

“아니,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럽니다. 지금 당장 의원을 부르는 것이 좋겠어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리안 경…….”

우리의 실랑이는 그렇게 이어졌다. 그동안에도 나는 점점 몸에서 힘이 빠졌다. 머리를 달군 열 때문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기사인데 보기 흉하게 쓰러질 수 없어 정신력으로 버티고 서 있기를 수어 분.

“둘이서 뭘 하고 있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아, 맙소사. 이런 보기 흉한 꼴을 하필 황제인 델루니안 앞에서 보이는 건가. 곧 다가올 충격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리안?!”

다행인지 불행인지, 델루니안이 쓰러지는 나를 받았고.

“무슨 일이냐! 리안, 정신 차려라! 리안!”

그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깜깜한 새벽이었다. 눈을 떠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제일 처음으로 화려한 금발이 눈에 띄었다.

“……루크 님.”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으나, 내 침대에 엎드린 그는 깊은 잠에 빠지기라도 한 건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를 간병이라도 한 걸까. 그의 옆에는 물그릇과 반쯤 줄어든 약차가 놓여 있었다. 입안이 껄끄러운 것을 보아 기절한 채로 저것을 마신 것 같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쉬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열은 떨어진 것 같지만 그래도 한나절 꼬박 앓았다가 깨어났는데 완전히 멀쩡할 수는 없었던 모양.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으로 돌아 그에게 다가갔다. 불편하게 잠든 그를 깨울 수 없어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아기를 안는 것처럼 그를 들어 안았다.

갑작스러운 자세의 변화가 불편했던지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잠에서 깨지는 않는다. 음……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 그가 참으로 귀여웠다. 최근 젖살이 빠지며 날렵해진 턱선이 자느라 조금 부었다. 아기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갓 태어났을 때가 떠올랐다.

흰 천에 감싸인 채 잠들어 있던 너.

아이를 안는 법을 몰라 어설프게 품에 안았던 나.

내 손가락을 꼭 붙잡은 너.

네가 깰까 두려워 차마 손도 빼지 못하고 그저 예쁘다고 중얼거리기만 한 나.

“……예쁘구나.”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어여쁘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니?

그를 침대에 뉘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아기를 대하듯 가슴을 도닥이자 그가 색색, 느린 숨을 내뱉으며 더욱 깊은 수면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그저 행복한 꿈이기를 바란다. 그것이 무엇이든, 네가 바라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꿈이기를.

“……잘 자렴, 루크.”

내 사랑하는 동생.

* * *

이튿날이 밝았다. 열은 올랐던 적이 없던 것처럼 금방 떨어졌다. 금세 건강해진 나는 보무도 씩씩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이 시간이면 델루니안과 소년이 함께 아침을 먹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폐하께선 오지 않으셨습니다.”

식당으로 들어서려는 내게 델루니안의 시종인 야코비 백작이 속삭였다.

“어째서요?”

“……어제 그 일 이후로 폐하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루크 님을 추궁하셨습니다.”

“추궁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쩌다 쓰러졌는지…….”

말도 안 돼.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나의 불찰이었지 그의 불찰이 아니었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다. 망토를 벗어준 것도 나, 입지 않겠다는 그를 설득하여 부득불 입힌 것도 나.

기사 주제에 허약하여 고작 그 정도 찬바람 맞았다고 쓰러진 것도 나의 잘못이지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델루니안은 그를 추궁했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긴 테이블 끝에 소년이 홀로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든 그가 ‘아……’ 하고는 억지로 웃어 보인다.

“오셨습니까.”

“루크 님.”

“몸은 이제 괜찮으시고요?”

“폐하께서 어제 그 일로 루크 님을 추궁하셨습니까?”

그 말에 소년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해주십시오. 폐하께서 루크 님을 추궁하였습니까.”

“리안 경. 그것은 그저…….”

그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이라니요.”

“리안 경은 모르는 일입니다. 폐하와 저의 일이니 개의치 마세요.”

“루크 님!”

“이리 오셔서 식사나 하시지요. 리안 경을 위해 특별히 닭고기를 넣은 수프를 끓이라 언질을 넣었으니…….”

억지로 말을 돌리는 그를 보니 델루니안이 그를 추궁하였다는 것은 사실인 성싶었다.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도대체 왜? 무엇을 잘못하였다고 그를 추궁하였나. 그대로 식당을 벗어나려 몸을 돌리자 그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리안 경!”

“…….”

“정말 별것 아니었습니다. 리안 경의 일이 아니라 다른 일로 제가 폐하께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역정을 내신 겁니다. 그러니 리안 경은 제발…….”

소년이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제발…… 가만히 계세요. 부탁입니다.”

가만히 있으라? 그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화가 풀린 것이 아니라 너무 어이가 없어서 힘이 빠진 것이었다. 허탈감에 고개를 돌리자, 그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매단 채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할 터이니, 리안 경께서는 그저 모른 척해주시면 됩니다.”

“…….”

“……외람되지만, 리안 경이 나서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그러니 부디.”

도대체 그가 무엇을 사죄하고 무엇 때문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나를 막았고, 내가 가만히 아무것도 모른 척하기를 바랐다. 지금 이렇게 화가 나서 델루니안에게 따지러 가는 내가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는 듯. 마치 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처럼.

‘리안 경은 제발…… 가만히 계세요. 부탁입니다.’

그저 너를 위했을 뿐인데.

“……제가.”

“…….”

“루크 님께 폐가 됩니까?”

그 물음에 소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는 이삼 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에도 심장은 까맣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이 힘겹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

“리안 경께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폐가 될 리 없지요. 오히려 제가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걸요. ……다만 이번 일은 정말로 제 잘못이었고, 리안 경과는 무관한 일이니 그저 모른 척해주십사 부탁드린 겁니다.”

폐가…… 아니라고.

우습게도 그 말 한마디에 말라 비틀어가던 숨통이 트였다. 뭍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가 다시금 물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나는 되살아났다.

나의 애정과 호의와 그로 인한 분노가 폐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죄책감과 분노에 잠식되던 나를 구원했다.

“그러니 리안 경, 부디 모른 척해주세요.”

“…….”

“그렇게 해주실 거죠?”

소년의 말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델루니안에 대한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가서 따져 묻고 싶다. 왜 그를 추궁했느냐고. 그의 죄가 아닌 것을 알지 않느냐고.

하지만.

“리안 경…….”

저리도 간절히 부탁하는데.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는 나를 보며 그가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다.

* * *

델루니안은 하루 종일 집무실에 틀어박혀 보이지 않았다. 나의 임무는 소년을 호위하는 것. 소년 또한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경치 구경만 하고 있었으니, 그의 곁에서 떠날 수 없는 내가 델루니안을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사이에 밤이 깊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사시사철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듯, 창밖의 하늘이 어둡다 못해 검었다. 별들만 총총 떠 있는 깊고 깊은 밤.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멍하니 경치를 구경하던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세요, 리안 경.”

그러면서 반쯤 남은 초를 들어 침대 옆 탁자에 가져다 놓는 모습이 아무래도 자려는 것 같다.

촛불에 비친 소년의 얼굴이 피로에 지쳐 창백했다. 피곤할 법도 하지. 지난 새벽 나를 간병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터인데 낮에도 눈을 붙이기는커녕 오지 않는 델루니안을 기다리지 않았나.

그런 그가 안타까워 델루니안이 오면 깨울 터이니 잠시 눈을 붙이라 권했으나 그는 한사코 ‘폐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경치가 예뻐서 그렇습니다’라며 잠을 청하길 거절했다.

방 안에서 보는 경치야 좁은 창밖으로 보이는 한정된 부분에 불과하니, 그것이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저도 이젠 좀 쉬어야겠습니다. ……경치가 물리네요.”

그렇게 하루 종일 기다렸음에도 델루니안은 찾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드디어 포기한 모양이었다. 끝내 경치 핑계를 대는 소년이 안타까웠다. 잘 가라고 배웅하며 소년이 쓸쓸하게 웃었다.

소년의 방을 돌아 나오는 길.

“……폐하를 뵙습니다.”

하루 종일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볼 수 없었던 델루니안과 마주쳤다.

얼굴조차 비추지 않고 일만 했다는 델루니안의 얼굴은 소년 못지않게 창백했다.

그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느릿하게 걸어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리안. ……몸은 좀 어때. 열은 없나?”

열은 없냐고? 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무탈합니다.”

무탈하지. 밤새워 나를 간병한 내 동생 덕에.

내 분노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슴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을 뿐이다. 그건 전부 소년의 부탁 때문이었다.

델루니안과의 우정은 소중하다. 그는 나의 첫 번째 친구고, 10년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소년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내게는 그가 전부가 아니었다. 내게는 소년이 있었다.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소중한 내 동생.

델루니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와 소년이 동시에 물에 빠진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년부터 구할 것이다.

그런 소년을 델루니안은 부당하게 괴롭혔다. 그의 잘못이 아닌 일로 그를 추궁하였다.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소년이 덮자고 했으니 덮을 뿐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목을 내어놓고 그에게 대거리를 하였을 것이다.

“다행이군. ……다시는 그렇게 멍청한 짓은 하지 마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 없는 델루니안은 그렇게 말했다. 제 딴에는 걱정을 하겠답시고 한 말이겠지만, 나는 또다시 화가 나고 말았다.

멍청한 짓?

“멍청한 짓이라니요?”

“…….”

“제가 루크 님께 망토를 벗어드린 것이 멍청한 짓입니까, 폐하?”

델루니안의 얼굴이 당황스럽게 굳었다.

“제가 망토를 벗지 않았더라면 분명 루크 님이 호되게 앓았을 겁니다.”

“…….”

“저는 루크 님의 호위기사입니다. 루크 님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망토를 벗지 않아 루크 님께서 쓰러지셨다면 저는 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겁니다. 또한 기사가 되어 추위 따위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으니 모두 저의 불찰 아니겠습니까?”

탓하려면 차라리 나를 탓해라. 그 말은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델루니안을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모르는 척하기로 소년과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델루니안이 말문이 막힌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나타난 당혹스러움이 지난밤, 그가 소년을 추궁할 때 지독히도 감정적이었음을 반증했다.

그래, 감정적이었겠지. 그러니 앞뒤 생각하지 않고 소년을 추궁했겠지. 평소 이성적인 델루니안은 가끔 이해할 수 없이 감정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말이다. 그가 감정을 폭발시킬 때마다 고생하는 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소년이 그 폭발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은 괜찮다. 나에게 패악을 부려도 된다. 뭐든 괜찮다. 그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니까. 델루니안이 무고한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을 정도로 나는 그에게 관대했다. 그의 화살은 누구에게나 향해도 된다. 그 과녁이 내 소년만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내 소년은…… 귀하고 소중한 내 소년은 제 폭발하는 감정이나 받아주라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 소년은 그보다 훨씬 더 나은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다. 사랑만 받고 좋은 것만 보고, 부드러운 말만 들으며 행복한 일만 겪어야 하는 내 소년. 내 동생.

그를 부당하게 추궁한 델루니안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난밤 그분을 추궁하셨다지요.”

“……그가 말하던가.”

“아니요. 그분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알아내어 그분께 물은 것일 뿐.”

“…….”

“루크 님이 그러시더군요. 제 일 말고도 다른 일로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추궁받아 마땅했다고요. 그분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제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습니까? 알고 보니 루크 님께서 제 음식에 독이라도 탔던 겁니까?”

델루니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생각에 잠기는 침잠한 눈빛. 그의 얼굴에 언뜻 후회라는 감정이 스쳤다. 제 추궁이 부당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 같다. 고집 센 그는 절대로 미안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폐하.”

“…….”

“폐하께서도 그 추궁이 부당하였다는 것은 아시지요.”

“…….”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그분이 상처받을 것을 진정 모르셨습니까.”

그는 분명 상처받았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추궁을 당하고 하루 종일 찾아오지도 않는 델루니안에게 상처를 받았다.

억울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하였다고 나에게 이러시나, 그런 생각을 했겠지.

하루 종일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던 그의 맞은편에 채워지지 못한 찻잔이 놓여 있었다는 것을 델루니안 너는 알까. 그가 하루 종일 네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너는 알까.

델루니안이 대답했다.

“……나는 그저, 네가 걱정이 되었다.”

“예?”

“네가 내 앞에서 쓰러진 것은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지. 그래서 놀랐을 뿐이야.”

그때 이후로? 그때라니. 언제를 말하는 거지…… 라고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10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델루니안 대신 독을 먹고 쓰러져 의식을 차리지 못했던 열일곱의 어느 날을.

쓰러진 나를 보며 델루니안은 그때를 회상한 건가.

가슴속에서 울렁이던 분노가 순간 하얗게 식어 내렸다.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했지만.

10년을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쌓아 올린 우정이다. 그가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단번에 이해하고 만 나는, 더 이상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10년 전 그날, 자신 대신 독을 먹고 쓰러진 나를 일주일 동안 간병한 델루니안이다. 우리는 그 일을 계기로 친구가 되었다. 쓰러진 나를 일주일 동안 간병한 델루니안은 이후 그때 일을 회고하며 내가 죽을까 몹시도 두려웠다고 고백한 적 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랬을 것이다. 갑자기 쓰러진 나를 보며 10년 전의 일을 떠올린 것은 무리가 아니다. 너무 두렵고 당황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추궁했겠지.

이해를 한다는 것은 분노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가 왜 그렇게 감정을 폭발시켰는지 이해하자마자 분노는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폐하.”

하지만.

이해했다고 해서 그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

“……친우와 연인은 다르지 않습니까.”

“뭐?”

“폐하께서 저를 걱정하셨다지만 저는 폐하의 친우일 뿐입니다. 그리고 루크 님은 폐하의 연인이지요. 친우가 쓰러져 심려하신 폐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화풀이를 연인인 루크 님께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연인이라니.”

“그리도 귀애하시면서 연인이 아니라는 소리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델루니안이 무언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허가 찔린 것처럼 눈을 부릅뜬 모양새가 우스웠다.

“루크 님께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하루 종일 상심한 채로 계셨습니다. 부디 그분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마음이 여린 분 아닙니까.”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던 소년은 결국 포기한 듯 침대로 향했지만 잠들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자존심 센 델루니안이 미안하다, 실수였다고 말하지는 않을 터, 그저 그를 기다린 소년에게 찾아가 따뜻하게 안아주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것만으로도 소년은 충분히 위로를 받을 터였다.

델루니안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와 10년을 함께한 나도 알 수 없는 그의 표정.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그가 나를 지나쳐 소년의 방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후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불편했던 마음이 드디어 평온해졌다. 이제 잘 수 있겠군. 자기 전 커튼을 치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을 때였다.

오로라가.

초록빛. 보랏빛. 분홍빛. 황금빛 빛의 커튼이 눈부시게 하늘을 뒤덮었다.

“…….”

오로라가 보고 싶다던 소년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이것을 보고 있을까? 델루니안과 함께?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부디, 그가 바랐던 것을 이룰 수 있기를.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나는 곧장 소년의 방으로 향했다. 시종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소년의 방으로 간 델루니안이 그와 함께 밤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함께 있는 거겠지. 시종들이 웃는 것을 보니 분위기가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아 마음이 놓였다.

“루크 님.”

오후가 되어 델루니안이 방을 비웠다. 소년은 살짝 피곤해 보이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로 나를 맞이했다. 다행이다. 화해한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젯밤의 일을 얘기했다.

“간밤에 보셨습니까?”

“무엇을요?”

“오로라가 찾아왔습니다. 못 보셨습니까?”

그 말에 소년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피었다.

“봤습니다. 똑똑히 봤어요.”

“폐하께서도 보셨습니까?”

“예. 저와 함께 보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하늘의 여신이 행복한 꿈을 대지에 흩뿌린다는 신화가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하늘의 여신이 행복한 꿈을 대지에 흩뿌린다. 그것이 그가 읽은 오로라 여신의 신화. 행복한 꿈이라.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루크 님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리고 그가, 이때까지 본 적 없는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로, 정말로 행복합니다.”

* * *

그 행복한 시간이 계속 지속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겨울행궁에서 보낸 겨울이 지나고 또다시 봄이 찾아왔다. 한파로 중단되었던 전쟁이 재개되었다.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다시금 시작된 것이다.

전쟁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정의들이 있지만, 내가 직접 겪은 전쟁은 쉽게 말해 인간성 말살의 과정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지고, 어제까지 함께 전진하던 동료가 비참하게 죽었음에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쩔 수 없지, 라고 체념하며 묵묵히 식사할 수 있게 되어가는 과정.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이 자랑스러워지고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적을 보며 희열을 느끼게 되는 과정.

전쟁터에서 오래 머문 사람 중에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뛰어들고 소년을 만나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을 전쟁터에서 떠돌며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감정들을 점점 잃어갔다.

처음에는 죄책감을 잃었고, 그다음에는 연민을 잃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던 적군의 병사를 단숨에 찔러 죽였을 때, 나는 내 안에 있던 고결한 기사도와 그것보다 더욱 고결한 인간성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격이었다. 약자를 수호하고 설령 적이라 하더라도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자는 쫓아가지 말라던 가르침은 살육전 속에서 휘발되었다.

하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나의 인간성에 대해서 고찰하기도 전에 전쟁은 다시 내 등을 떠밀었고, 나는 점점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망가졌다.

하지만 황궁으로 돌아와 소년을 만나고 나의 인간적인 감정은 점점 회복되기 시작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와 더불어 행복과 두려움을 깨달았다.

연민이라는 감정은 소년을 한정으로 다시금 꽃을 피웠다. 피로 물들어 있던 마음이 소년이라는 성수로 깨끗하게 씻긴 것이다.

……내가 그러했기에, 델루니안도 그럴 줄 알았다. 그가 반평생 전쟁터를 떠돌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전쟁이 다시 시작된 봄. 황도로 돌아온 델루니안은 곧바로 전쟁터로 떠났고, 이전보다 오래 전쟁터에서 머물렀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넉 달씩 전쟁터에서 머물던 그가 돌아올 때면 소년은 기뻐하면서도 묘하게 긴장했는데, 환도할 때마다 점점 더 거칠어지는 델루니안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런 그가 안타까워 힘들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었지만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힘들지 않습니다. 기쁘기만 한걸요. 안 다치고 무사히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소년을 보며 몇몇 호사가는 황제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후궁이라 칭찬했지만, 나는 그가 혼자서 너무 많은 것을 감내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환도한 델루니안은 소년의 품에서 안정을 되찾았다. 살육의 스트레스로 피를 본 짐승처럼 한껏 예민해진 그가 안정을 찾기까지는 대략 한 달에서 두 달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나면 다시 출정이었다.

석 달에서 넉 달 가까이 전쟁터에서 지낸 델루니안은 소년이 위로한 것이 무색할 만큼 예민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런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4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고, 그사이 나는 서른이 되었다. 더 이상 소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다.

황제 델루니안은 지난겨울 마침내 정복전쟁을 종식시켰고, 대륙의 유일무이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측근인 나와 채스터턴, 그리고 전쟁 공신들의 작위를 올려주었다. 나는 공작이 되었고, 채스터턴은 후작이 되었다.

그리고 여름이 찾아왔다.

“여름행궁…… 말입니까?”

“그래.”

나를 부른 델루니안은 이번 여름을 라윈의 여름행궁에서 보낼 것이니 사람을 보내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날이 더워서 견딜 수 없어.”

몸에 열이 많은 델루니안은 여름을 유독 힘들어했다.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라윈은 내게 있어 그다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향이다. 절로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라윈이라.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어느 분과 동행하실 겁니까?”

부디 그는 아니기를. 델루니안이 그를 데려가지 않는다면 그의 호위인 나 역시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준비야 사람을 시켜 하면 될 일이니까. 이왕이면 황후 전하나 일리오니쉬 황비 마마를 데려갔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을 담아 물었으나, 델루니안은 내 기대를 무참히 박살 냈다.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

“그에게도 채비하라 일러둬. 어차피 준비야 시종이 하겠지만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알고 있는 게 좋지 않겠나.”

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를 향한 델루니안의 총애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변함이 없는 게 아니라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 같다.

정복 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출정할 필요가 없어진 델루니안은 이전보다 자주 후궁에 드나들었고, 그와 시간을 보냈으며, 함께 밤을 지새웠다.

황후나 황비, 다른 무수히 많은 후궁은 안중에도 없었다. 황제의 시선에 담기는 것은 오로지 그뿐.

이 총애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권력자의 총애란 부질없다고들 하지만 7년이나 이어진 총애다.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델루니안이 7년이나 질리지 않고 품어온 상대.

아이도 낳지 못하는 남성에,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언젠가는 시들 아름다움이 전부인 사내를 7년이나 귀애한 델루니안은 분명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델루니안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고.

남자 후궁인 그의 처지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그를 후궁에서 빼내어 억압하는 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델라윈 후작가는 이미 내가 승계했으므로 이제 와서 후작가를 넘겨줄 수는 없겠지만 내 영지를 떼어 일평생 불편함 없이 살도록 해줄 수는 있다.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고 하면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렇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 기준의 행복일 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해서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그 생각이야말로 말로 나만의 착각이었다.

여름행궁에 도착하자마자 폭풍이 몰아쳤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이 델루니안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여 잘못 부른 것이다.

자신을 껴안은 사람을 보고 전하라고 했다지. 폐하와 전하. 절대 헷갈릴 수 없는 호칭이다. 소년은 이때까지 한 번도 그를 전하라고 부른 적 없었기에 헷갈렸다는 말로도 변명이 불가능했다.

“다른 분과 부정이라도 저지른 것 아니겠습니까……?”

불같이 화를 내며 방을 뛰쳐나온 델루니안은 그의 방에 드나들었던 모든 귀족을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채스터턴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입조심하세요, 후작.”

“…….”

“그분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그거야 누구도 모르지요, 공작 전하.”

“뭐?”

“부정을 저지른다 하여 증거가 남는 분도 아니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루이 채스터턴!”

“아무튼 제법 흥미롭군요. 폐하께서 저리 역정을 내시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만…… 이 황궁에 피바람이 불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렇게 말한 채스터턴은 내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일단 저는 루크 님을 뵙고 그 이후의 일을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작 전하께서는 부디 폐하의 어지러운 심기를 다독여 주세요. 그래도 공작 전하의 말은 듣는 분이 아닙니까.”

“…….”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건방진 것. 나는 등 돌려 소년의 방으로 향하는 채스터턴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묘하게 소년을 싫어하는 채스터턴은 늘 저런 자세로 나를 긁었다.

그가 부정을 저질렀을 거라고? 헛소리하지 마라. 그의 결백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채스터턴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델루니안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고 알리기 위하여.

그러나.

“폐하,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상을 하시든 그건 전부 오해입니다, 폐하. 루크 님께서는 누구와도 부정을 저지른 적 없고, 오직 폐하 한 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건 제가 잘 압니다.”

“오해라?”

하.

내 이야기를 듣던 델루니안이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에 나는 어쩌면 이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오해가 있어 그가 나를 전하라고 부른 거지?”

“그건…….”

“말해봐, 리안. 오해라고 하지 않았나.”

그 말에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나조차도 납득이 안 가는 상황이었으니까. 그의 주위에는 전하라고 부를 사람이 없다.

그는 귀족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려 했고 황궁의 연회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으며 사사롭게 누군가와 친하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전하라고 부를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때까지 입에도 올린 적 없는 호칭, 전하. 그 말은 어떤 연유로 튀어나왔단 말인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는 나를 보며 델루니안이 냉기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하라…….”

“…….”

“감히 내 뒤에서 다른 자와 사통하였단 말이지.”

감히.

“그자를 찾아낸다면.”

“…….”

“내 것을 탐한 그 손과 발을 잘라 들개들의 먹이로 줄 것이고.”

“…….”

“눈은 뽑아 까마귀 둥지에 던져놓을 것이며.”

“…….”

“나를 두고 감히 다른 이와 사통한 그는 밀실에 가두어 평생 나 이외의 다른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 말에 이때까지 담담하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밀실에 가둔다?

‘아드리안.’

눈앞에 환영처럼 라윈의 온실이 떠올랐다.

‘저것이 죽어야 네가 살아, 알겠니?’

그 안에서 화초처럼 시들어가던 어머니도 함께.

“아, 안 됩니다, 폐하!”

그녀가 떠오른 순간, 나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델루니안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덜덜 떨면서 부탁했다. 제발 그를 가두지 말라고. 그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그는 아무런 부정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그의 곁에 붙어서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는데 그가 부정을 저지를 틈이 어디 있었겠느냐고. 제발 그를 의심하지 말고, 밀실에 가두지도 말라고.

그 말을 듣는 내내 델루니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군.”

그게 전부였다.

쫓겨나듯 델루니안의 집무실에서 나온 후, 나는 정처 없이 떠돌다 그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밤이 깊은 시각, 채스터턴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그는 알 수 없이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

“…….”

무슨 대화를 나누었던 걸까.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이지? 채스터턴이 네게 상처라도 주었나? 모욕이라도 당했어?

괜찮아. 나중에 내가 전부 갚아주마.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지금 당장은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에 가만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리안 경.”

“예.”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울기라도 했던 걸까. 마음이 좋지 않다.

“우리…… 좀 걸을까요?”

그가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산책을 하자는 말인가. 지금 이 시점에? 그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델루니안이 크게 화를 낸 게 조금 전의 일이다.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는데 방에 있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수를 걷고 싶다며 간절한 표정으로 간청했다.

……어쩔 수 없지. 그가 바라면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다.

“날이 좋네요.”

호숫가를 따라 걷던 그가 중얼거렸다.

“여름철의 라윈은 항상 그렇습니다. 습도도 낮고 바람은 시원하지요.”

“잘 아시는군요.”

잘 알다마다.

“제 고향이니까요.”

그리고 네 고향이기도 하지. 그 말은 안으로 삼킨다. 내 말에 그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런가요.”

“……루크 님은 마뉴가 고향이시라 들었습니다.”

일전에 그는 자신의 고향이 마뉴라 밝힌 적 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내 동생임을 또다시 확인했다. 마뉴는 어머니의 고향이었으니까.

“예. 마뉴가 고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도 한때 마뉴에서 살았으니 어쩌면 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그때 저는 평민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평민이지만 그때는 감히 귀족 나리를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없는 신분이었어요.”

“……그런가요.”

아니, 우리는 보았어.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널 보았지. 너는 잠들어 있었으니 나를 보지 못했지만 말이야. 힘없는 웃음이 흘렀다. 그가 그런 내 얼굴을 보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예?”

“항상 고맙습니다. 리안 경.”

고맙다고……?

“귀족이자 기사의 신분으로 평민 후궁의 호위를 맡아주어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

“항상 부족한 나를 보살펴 주고, 아껴주어서 고맙습니다.”

“루크 님.”

“그리고…… 믿어줘서.”

소년이 웃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것 때문에 ……고작 그것 때문에 고맙다는 거야?

내가 너한테서 무엇을 빼앗아 갔는데.

내가 심장을 바쳐도 너는 고마워하지 않을 자격이 있는데.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에게는 무릎이 아니라 머리를 박아도 수치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복종의 대상. 나의 경애하는 소년. 내 심장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사람.

“저는 항상 루크 님을 믿습니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제가 압니다.”

“…….”

소년이 문득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나를 믿는 겁니까.”

왜냐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왜냐고. 내가 너를 그렇게까지 믿는 이유가 뭐냐고?

“그것이 제 피 속에 흐르는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

그래. 바로 그것 때문이다.

너를 믿는 것은 내 피에 흐르는 숙명. 너를 지키는 것도 내 피에 흐르는 숙명. 내가 너의 자리를 빼앗고 태어난 이상, 나의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 머리털 한 올, 피 한 방울까지 전부…….

“저는 루크 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루크 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빈말은 아니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가 내 심장을 원한다면 가슴을 갈라 꺼내줄 것이며, 그가 힘들다고 눈물이라도 흘린다면 제국을 등지더라도 그를 위해 도망칠 수 있었다. 그게 나의 사랑이었고, 속죄였다.

그 말에 소년이 슬프게 웃었다.

“……일어나세요. 우리 조금 더 걸어요.”

우리의 산책은 조금 길게 이어졌다. 얼마 후 시종이 다가와 알리기를, 델루니안이 그를 찾아왔고, 그가 없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그가 창백한 낯으로 돌아가겠다고 대답했다.

걱정스러웠다. 낮에 보았던 델루니안이 떠올랐다. 폭발하는 감정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 밀실을 만들어 가두겠다던 미치광이의 눈빛.

그를 방으로 되돌려 보내고 내 방으로 돌아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두고 감히 다른 이와 사통한 그는 밀실에 가두어 평생 나 이외의 다른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어.

이제는 모든 것을 밝힐 때가 왔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소년의 방에 있을 델루니안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가 나오면 소년의 출생에 대해 밝히고, 내가 그의 친형임을 밝히고, 귀족가의 영식인 그가 후궁에 있을 수 없음을 밝히고…… 그를 밀실에 가두지 말고 자유롭게 풀어달라고,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리안을 사랑하시죠?”

여름행궁의 얇은 문틈으로 소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그와 닮았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제가 그의 대용품으로 이 궁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질투에 눈이 멀어 잊어버릴 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그가 당신을 마음 깊이 연모하고 있습니다. 대용품은 이제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용…… 품?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용품이라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루크.

* * *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루크가…… 그 소년이 나를 대신해서 델루니안의 후궁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저는 지금…… 충분히 행복해요.’

‘비록 루카스는 죽었고, 가끔 이런 상황들에 지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폐하께서 보살펴 주시니까.’

그렇게 말했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행복합니다.’

오로라를 본 것보다 델루니안과 화해해서, 그와 밤을 함께해서 더 행복하다고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힘들지 않습니다. 기쁘기만 한 걸요. 안 다치고 무사히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한껏 가시를 세운 델루니안을 버거워하면서도 그가 온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던 너였기에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네가 델루니안을 사랑하고, 델루니안 역시 너를 사랑한다는 그 명제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데.

대용품이었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대용품이었다고.

델루니안이 나를 사랑한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니, 지금도 상상이 안 간다.

어떻게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잘못 안 걸 거야.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그를 우정으로 품었는데, 그가 어찌 나를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들이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나둘씩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너도 아네모네가 예뻤어?’

‘예?’

‘네 눈에 제일 아름다운 꽃은 무엇이었지?’

소년이 좋아하는 꽃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취향을 물었던 델루니안.

‘……글쎄요, 저는 꽃은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제일 눈길이 가는 꽃이 있었을 거 아냐.’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노란색 꽃이 참 예뻤습니다.’

‘노란색?’

‘예. 아네모네 화단 뒤에 있던 것입니다만…… 화초에는 무지하여 이름은 모르겠군요.’

‘아네모네 화단 뒤. 노란색 꽃.’

그리고 며칠 후부터 그의 집무실에 놓여 있던 노란색 꽃다발.

‘……나는 그저, 네가 걱정이 되었다.’

‘네가 내 앞에서 쓰러진 것은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지. 그래서 놀랐을 뿐이야.’

내가 쓰러졌을 때, 뜬금없이 소년을 추궁한 델루니안.

‘매일 일과를 보고해. 무엇을 먹고 마셨는지, 어떤 걸 보고 들었는지. 그에 관한 것이라면 전부 말해라.’

그렇게 말해놓고, 그의 일과보다는 일과를 읊는 내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욱!”

갑자기 속이 메슥거렸다.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을 수 없었다. 나무를 붙잡고 격렬히 토악질을 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서 토사물이 쏟아졌다.

한참 속을 게워내자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방으로 돌아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쓰러졌다. 세상이 핑글핑글 돌았다.

‘정말로, 정말로 행복합니다.’

……그 웃음도 전부 가짜였구나.

너는 행복하지 않았던 거야. 행복할 수가 없었겠지. 황제의 남첩. 사랑으로도 견딜 수 있을까 말까 한 그 위치에서 너를 향한 사랑도 전부 거짓이었으니 어찌 행복할 수 있었겠니. 대용품이라니. 나의 대용품이라니.

너는 얼마나 내가 미웠을까.

나 때문에 황제에게 사로잡혀 그 위험한 황궁 밖으로 벗어나지도 못하고, 황제가 원하는 대로 몸을 내주며 얼마나 나를 원망했을까.

나만 아니었더라면…….

눈물이 왈칵 솟았다. 어째서 나는 항상 그의 걸림돌이 되고 마는가. 내가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나는 오히려 그의 버팀목이 되고 싶었는데. 그의 삶은 항상 나로 인하여 망가졌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내가 전부 잘못했어.

울다 지쳐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나는 목줄을 쥐고 있었다. 그 목줄 끝에 매달린 것은 작은 강아지, 털이 하얗고 귀가 반쯤 접힌 루카스였다.

오랜만이야. 그 작은 강아지가 반가워 손을 내밀었더니 루카스가 으르렁대며 내 손을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서 손을 물리자 루카스가 왕왕 짖었다. 강아지의 검은 눈동자가 제 목을 틀어쥔 목줄로 향했다.

아. 이것을 풀어달라는 뜻이구나.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리렴. 풀어줄게. 네가 자유롭게 도망칠 수 있도록 풀어줄 터이니…… 그런데 이상하지. 풀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목줄은 점점 루카스의 목을 파고들었다. 숨통이 죄인 작은 강아지가 발버둥을 쳤다.

아, 안 돼. 이러면 안 되는데. 줄을 푸는 손길이 다급해졌지만 그럴수록 목줄은 강아지의 목을 파고들었다.

안 돼. 이러면 안 되는데. 왜 풀리지 않는 거야. 나는 널 풀어주려고 하는 건데. 그 와중에도 줄은 점점 더 강아지의 목을 파고들었고 종내에는.

끼잉, 소리를 낸 루카스가 혀를 빼물고 죽어버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리안 경, 리안 경?”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헉…… 헉…….”

악몽에 쫓겨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자 그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더니 수건을 내밀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루크, 님.”

“늦게까지 오지 않으시기에 와 봤습니다. 괜찮으세요?”

그의 연녹색 눈동자가 다정히 나를 훑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청년이 되어 훤칠해진 몸이 내게 폭삭 쓰러졌다.

“리안 경?!”

당혹스러워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었다.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미안…… 미안해.”

“……리안 경?”

“다시는…….”

다시는 너의 인생을 가로막지 않을게.

내 인생을 걸고서 맹세할게.

너를…… 풀어줄게.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네가 작은 새처럼 날아간다면 나는 내 온몸을 불사르더라도 바람이 되어 너를 도울게.

미안해. 미안하다.

* * *

황도로 돌아왔다. 가을에 접어든 황궁에서는 수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소년은 행궁에서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평소처럼 천진하게 행동했고, 그런 그를 볼수록 내 마음은 초조해졌다.

그를 내보내야 해.

그의 신분을 밝혀 후궁에서 빼내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것은 그리 안전한 방법은 아니었다. 남자가 후궁이 된 것이 처음이라 남자 후궁에 대한 성문화된 율례가 없는 상태였다.

남자는 후궁이 될 수 없다는 법도가 없었던 것처럼, 귀족 영식이 후궁이 될 수 없다는 법도 또한 없으므로 델루니안이 내보내지 못하겠다고 강짜를 부리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나는 그가 델루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

나를 사랑해서 대용품까지 들였던 델루니안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

수확제의 날이 밝았다. 7년에 걸친 전쟁을 완전히 종식하는 것을 기념하는 파티였다. 현란한 음악과 맛있는 음식,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황금 돔을 오가며 와인잔을 기울이는 수확제.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던 소년은 황제와 황후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바로 자신의 궁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를 뒤쫓았다. 그의 호위기사가 아닌가. 어차피 연회 같은 것은 흥미가 없었으므로 소년의 곁을 지키는 편이 여러모로 더 나았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궁 주위를 호위했다. 어디선가 그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자 그의 방 테라스와 가까운 정원 창문이 열려 있었다. 감기에 걸린 것 같다더니 창문을 열어두었는가. 그러다 정말로 아프면 어쩌려고. 안타까운 마음에 혀만 차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풀을 밟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델루니안이 서 있었다.

“폐하, 어찌하여 이곳에…….”

그날 이후로 일부러 피했던 델루니안이다. 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거지? 내 소년에게 어떤 위해라도 가할 생각인가?

소년을 대용품으로 취급해 왔다는 것을 안 이후로 델루니안은 내 마음속의 적이 되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고작 나 따위를 사랑하여 내 귀한 소년에게 상처 입힌 델루니안을. 그리고 나 자신을.

화려한 연회복을 차려입은 델루니안이 묘하게 굳은 낯으로 대답했다.

“너를 찾았다.”

나를?

그 순간 델루니안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올 게 왔다는 것을.

“7년 전, 나는 이곳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했지.”

“……무엇을 다짐하셨습니까.”

7년 전이면 그의 정복전쟁이 한창 궤도에 올랐을 때였다. 그리고 소년이 이곳에 들어온 해기도 했다.

델루니안이 말을 이었다.

“대륙을 통일하는 것.”

“…….”

“그리고 그것은 모두 너를 위함이었다, 리안.”

나를 위함이었다고…….

“네가 검을 들지 않아도 되는 날을 소망했다.”

“…….”

“너를 위험에서 지켜주고 싶었어. 12년 전, 그때의 약속처럼.”

12년 전, 선황의 칙서를 받고 전쟁터로 내몰린 나에게 한 약속.

‘널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다.’

나를 위험에서 구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그를 나 대신 위험에 처하게 했단다.

“너를 다치게 하는 것이 나라면 나 자신조차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 소년을 다치게 한 거구나.

“이제는 너를 지킬 수 있게 되었어.”

“…….”

“그러니…….”

그가 기대에 들뜬 청년의 말투로 물었다.

“나의 곁에, 영원히 머물러 주겠어?”

영원히…… 영원히?

그 순간, 열린 그의 방 창문으로 화사한 금발이 스쳤다. 창가를 등지고 선 델루니안은 못 봤겠지만 나는 똑똑히 봤다.

창가에서 나부끼는 화사한 금발. 창에서 등을 돌리고 선 것인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창에서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내 소년. 나의 동생 루크. 그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일지도 모른다. 평생 그의 인생을 망쳐온 나라는 죄인이 할 수 있는 속죄.

“감히…… 제가 그러고 싶나이다.”

이것으로 네가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 * *

속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안 돼.”

“어째서입니까.”

“…….”

델루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확제의 그 밤으로부터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소년의 호위기사에서 근위기사단장으로 복귀했다. 소년의 호위기사는 채스터턴 후작의 사람으로 교체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소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나는 소년의 출궁을 부탁했다. 일부러 질투심 많은 사내의 가면을 쓰며 그를 궁에서 내보낼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델루니안은 아직은 그럴 수 없다며 차일피일 시간만 늦추었다. 도대체 왜. 무엇이 더 남아서 그를 놓아줄 수 없단 말인가.

그날 이후로 델루니안은 소년을 찾아가지 않았다. 매일같이 황제가 드나들던 소년의 방은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은 냉궁이 되었다. 그런 그를 두고 사람들이 쑥덕대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렸다.

총애를 잃은 것이다. 이제 버림받은 것이다. 조금 있으면 완전히 내쳐지겠지. 그럼 그때를 도모하여…….

안 돼. 그럴 수 없어. 그가 험한 일을 당하기 전에 내보내야 했다. 나는 몇 번이나 간청했다. 제발 그를 내보내라고. 하지만 그때마다 델루니안은 아직은 안 된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답답함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 소년으로부터 선물이 도착했다.

“엽차…… 로군.”

“후궁의 루크 님께서 보내셨습니다.”

“…….”

엽차. 두 달째 얼굴도 보지 못한 내게 보내는 그의 선물. 몸이 찬 나는 사실 엽차를 즐기지 않지만, 소년은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 여기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엽차 따위겠지만 이 선물이 그에게 있어 최선의 호의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것을 보자,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다정한 소년. 그날 황제와 내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다 들었을 텐데 나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신경 쓰는구나. 왜 이렇게 다정한 거니. 왜 이렇게 선량한 거니. 네 인생을 망친 게 나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대하는 거니.

“감사하다고…… 그리 전하거라.”

“예.”

시종을 물리고 엽차를 뜯었다. 평민들이 주로 즐기는 엽차에서 퀘퀘한 냄새가 올라왔다. 평소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지만 일부러 크게 한 티스푼 떠서 넣었다. 나는 차를 우리며 소년을 생각했다.

곧…… 나갈 수 있을 거야. 곧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야.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라윈보다 조금 더 남쪽, 너른 바다가 펼쳐진 곳에 삼 층짜리 석조 저택이 있다. 그곳을 단장해 두라 지시했다. 소년의 수발을 들 눈치 빠른 시종도 배치해 두었다.

아직 원로회에는 알리지 않았지만, 그가 무사히 출궁하여 안전이 보장된 이후 신분을 회복시킬 생각이었다. 작위도 주고 싶었다.

백작쯤은 어떨까. 내 영지의 절반을 떼어주자. 아니, 전부 주어도 좋다. 그가 공부를 하고 싶다면 선생을 구해줄 것이고, 악기를 배우고 싶다면 가장 비싼 악기를 사줄 것이며,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면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배를 지어 함께 떠날 것이다.

그렇게 행복한 미래를 그렸다. 계획대로 풀렸다면 언젠가 일어났을 미래였다. 그러나.

쿠당탕!

“델라윈 경! 정신 차리십시오, 델라윈 경!”

차를 마시고 일어나는데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독이구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그가 오해를 받는데. 쓰러지는 와중에도 손을 뻗어 차를 엎었다.

쨍그랑……! 파열음이 귀를 찔렀다. 두어 발자국을 걷기도 전에 몸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생각했던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다.

* * *

숨을 쉴 수 없다.

가슴이 뜨겁다 못해 끓었다.

이 감각을 나는 잘 알고 있다.

13년 전, 델루니안을 대신하여 맹독이 든 술을 마셨을 때.

그때도 이렇게 아팠다.

“당장…… ……왜……!”

“송구…….”

“……안! 리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열이 끓어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의식이 돌아왔다 꺼지기를 수백 번 반복했다. 누군가 뱃속을 갈고리로 할퀴는 것 같고, 심장을 잡아채어 터뜨리는 것 같은 감각이 생생했다. 끔찍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혼몽한 와중에도 몸이 점점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프게 뛰다 멈추길 반복했던 심장이 느리지만 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갈고리로 할퀴는 것 같던 뱃속도 한결 편해졌다. 아직도 손끝과 발끝의 감각은 없었지만 점점 사람의 몸이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시간이 더욱 흐르자 청력이 되돌아왔다. 동굴에서 웅얼대는 것 같던 소리가 점차 명확하게 귀에 걸렸다.

독. 해독제. 엽차. 체질…….

그 네 글자를 알아듣는 데에 한나절이 꼬박 걸렸지만 드디어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을 먹었다. 독은 그날 내가 마신 차에 있었다. 엽차와 비슷하게 생긴 독초들이 엽차와 함께 섞여 들어갔다고 했다. 그래도 독 자체가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 의원은 곧바로 해독제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해독제가 듣지 않았다고 했다. 그 원인은.

내가 소년과 함께 마신 엽차…… 때문이었다고.

나는 몸이 찬 편이다. 엽차는 대표적인 냉차였다. 몸이 찬 사람에게 냉차는 독약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그 독약을 7년이나 마셨다.

7년 동안 독약을 섭취한 셈이다. 그렇게 독약 아닌 독약에 길들여진 몸이 독약만큼 강한 해독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 까닭에 해독제 한 병이면 일주일만 앓다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삼 주나 앓았다고 했다.

삼 주? 눈이 번쩍 뜨였다. 아직 시력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의원은 곧 시력도 돌아올 것이라 했다. 그때까지는 절대 안정이라며 의원은 침대 밖에서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 소년. 그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폐, 하.”

삼 주 동안 쓰지 않아 굳어 있던 혀가 힘겹게 델루니안을 불렀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온 델루니안이 나를 보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 팔을 간신히 붙잡으며 나는 되물었다.

“루, 크.”

“……뭐?”

“루크, 님, 은, 어떻, 게…….”

그 물음에 델루니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표정에 순간 불안함이 몰려들었다.

아니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내 차에서 독초가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의도한 일이 아닐 터였다. 설마 이까짓 일로 그를 추궁하였다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설마.

델루니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쉬어라.”

“폐, 하.”

“다 나을 때까지 이 방밖으로는 못 나갈 줄 알아.”

안 돼.

그럴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델루니안은 일부러 못 본 척했다. 나를 떼어두고 돌아서며 델루니안이 시종에게 말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알겠습니다.”

“어떤 소식도 들어와서나 나가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복명.”

쿵.

문이 닫혔다. 그 문소리에 간신히 진정했던 심장이 아파왔다.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어떤 소식도 들어와서나 나가서는 안 될 것이라는 그의 명령이 의미심장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소식까지 차단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해독제 없이 독약을 버틴 육체는 회복이 더뎠다. 굳어 있던 혀가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 닷새가 걸렸고, 청력과 시력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팔과 다리는 움직일 때마다 끔찍한 통증이 밀려들었으며, 근육이 빠져 스푼만 들어도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무리해서 움직였다. 억지로라도 몸을 회복시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하루는 꿈에 루크, 내 소년이 등장했다. 내 불안감 때문일까. 꿈속에서의 그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우는지 그의 눈물로 내 발목이 다 젖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가 안타까워 눈물의 강을 헤치고 다가갔더니 그가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한마디 말을 던졌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나는……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바라보자, 그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더니 손톱으로 제 목을 찢었다.

안 돼!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찢어진 동맥에서 피가 흘러넘쳤다. 안 돼, 안 돼…… 죽지 마. 안 돼.

“……루크!”

문이 열리고 시종이 들어왔다. 약차를 들고 온 그가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공작 전하.”

무슨 일 있냐고? 나는 그의 손에서 약차를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릇이 깨졌고, 시종이 당황하여 두어 걸음 물러난 틈을 타 그릇의 파편을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 목에 갖다 대었다.

“공작 전하!”

시종이 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색색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

“루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해, 당장!”

불안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다. 직감이 그렇게 소리쳤다. 내 협박에 시종이 말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다? 그럼 말하게 해주지.

파편으로 목줄기를 뚫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맥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콸콸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시종을 협박하기에는 충분했다. 내 몸을 회복시키는 임무를 지닌 시종은 벌벌 떨며 땅에 엎드렸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공작 전하. 그러니까, 그것이…… 루크 님이.”

“그분이?”

그리고 듣게 된 진실은, 차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반역이라니. 역모라니.

그가…… 내 소년이, 지하 감옥으로 잡혀갔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방을 뛰쳐나왔다. 시종이 이러시면 안 된다고, 제발 방으로 들어가시라 부탁했지만 모두 뿌리쳤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지하 감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소년을 본 순간.

“루크 님…….”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

저 사람이 과연 내 소년인가?

저렇게……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망가진 사람이, 과연 내 소년이 맞는가?

끼이익…….

귀를 긁는 이명이 울렸다. 눈앞에 하얗고 검게 점멸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처참하게 일그러진 사람이. 내 동생이라고?

“……어떻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저 사람은…….

내 소년이면 안 되는데.

덜덜 떨리는 몸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악취가 풍겼다. 죽어가는 시체에게서나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아, 아…… 도대체…… 어떻게…….

내 시선의 끝에 그의 손가락을 야금야금 씹어 먹고 있는 불개미들이 보였다. 죽어가는 송장에게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벌써부터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조심스럽게 불개미들을 떨쳐내고 그의 손을 잡았다. 뼈가 드러난 손이 흉측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 없어.

“당장, 당장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루크 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당장 말씀드려서──”

그때.

“여긴 왜 온 거냐, 리안.”

귓가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열화와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폐하!”

“몸도 좋지 않으면서 여기까지는 왜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소년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내게 물었다.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내 동생에게, 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이럴 수 있어! 네가!

“폐하, 루크 님이 그러실 리가 없다는 건 폐하께서 더 잘 알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이렇게까지 모질게,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대하시는 겁니까!”

“당장 돌아가.”

“아니요, 못 돌아갑니다. 루크 님을 풀어주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리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 7년이나 아끼고 귀히 여긴 분입니다. 폐하께서 더 잘 알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대용품이라지만 7년을 그의 곁에서 지킨 소년이다. 그렇게 한결같이 자신만을 바라본 사람. 그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도 황제에 대한 소년의 마음이 진실 되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정작 당사자인 그는 이렇게 잔혹하게 소년을 내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잔혹하게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어. 어떻게 사람이 그래.

델루니안이 이를 뿌득 갈며 대답했다.

“……그는 반역자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모든 증거가 그를 반역자라 가리킨다. 안 그래도 오늘 마지막 처분을 내렸지.”

처분이라니. 처분이라니?

“즉결 처형이다.”

“……!”

“그러니 이제 돌아가서 쉬어라. 나도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즉결 처형? 처형당한다고?

내 소년이? 내 동생이? 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가?

아. 아아. 아…….

“아, 아, 안, 안 돼, 안 돼! 루크 님! 루크 님……!”

안 돼. 그럴 수 없어. 죽일 수 없어. 내 동생이야.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동생이라고. 내가 지켜야 하는 내 동생이란 말이야. 차라리 나를 죽여. 내가 대신 죽을 테니 나를 죽이라고……!

델루니안이 옆에 선 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팔과 다리가 구속되었다.

안 돼. 놔, 나를 놔, 이 새끼들아!

“루크……!”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악을 쓰는 나를 보며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놓으라고 발버둥치는 나를 보며 델루니안이 기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품에서 흰 천을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쏟아붓는다. 달콤한 향이 확 피어올랐다. 수면향이다.

안 돼. 싫어. 발버둥 치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수면향을 적신 천이 내 코와 입을 막는 것은 피할 방도가 없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피에 젖은 금발.

그것이 마지막으로 본 루크의 모습이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정신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 * *

지키지 못했다.

……지켜야 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즉결 처형. 델루니안의 검에 유명을 달리한 소년의 시체는 보름 동안 성벽에 매달려 있다가 벌판에 버려졌다.

그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황궁을 뛰쳐나갔지만 이미 썩어 문드러진 시체는 짐승의 먹이가 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리안.”

“…….”

“리안.”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흑갈색 머리칼에 마찬가지로 흑갈색 눈동자를 한 누군가가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였더라…… 익숙한 얼굴인데. 누구였더라. 정말 누구였지.

“……아직도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남자의 옆에 서 있던 뚱뚱한 노인이었다.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함묵증이라고.”

“예, 폐하.”

“알겠다. 이만 나가도 좋아.”

뚱뚱한 노인이 문을 닫고 떠났다. 방 안에 남은 것은 나와 남자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누구였지. 너, 굉장히 익숙한 얼굴인데…… 누구였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

“그는 반역자였다. 그렇게 죽어 마땅한 자였어. 그런데 너는 왜!”

반역자…….

“……왜 그렇게 나를 비난하는 건데. 왜.”

비난…….

내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 소년을 사랑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금발을 가진, 라윈의 호수를 닮은 연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복숭앗빛 뺨과 장밋빛 입술을 가진, 다정한 소년을.

나를 ‘리안 경’이라고 부르던 그 소년을.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가 원하면 해도 달도 따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애욕을 품은 적은 없었으나 어떤 연인을 만나도 그보다 더욱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사랑이라는 말로도 정의할 수 없는 절대자였다. 내가 모든 것을 망친, 그리하여 미안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소년.

내…… 루크.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눈물은 이윽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마음이 흘러내렸고, 내 세상도 무너져 내렸다.

남자는 그런 나를 보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나는 그대로 엎어져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루크. 내 아이. 내 동생. 내 사랑하는…….

방에서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멈춘 곳은 소년이 머물던 방이었다. 방문은 밧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풀지 못할 것은 없었다. 밧줄을 뜯어내듯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엉망이 된 그의 방이 눈앞에 나타났다.

땅바닥을 뒹구는 찻잔. 차를 마시다 끌려간 듯 카펫의 어느 한 부분이 얼룩져 있다. 그가 한 권, 두 권 책을 사 모은 책장도 앞으로 쓰러져 있다. 반역의 증거라도 찾으려 했던 모양이지. 책장을 들어 그가 사 모은 책이라도 찾으려 했으나 한 권도 없었다.

어떡하지.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너는 성품이 검소하여 소지품이랄 게 책 몇 권밖에 없었는데, 그 밖의 모든 것은 내가 사다 채워 넣은 것이었는데, 그것마저 남아 있지 않으니 나는 어쩌면 좋지.

그가 있던 방에 그가 쓰던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방에서 나와 또다시 정처 없이 걸었다. 그가 자주 가던 제3정원이 나타났다. 봄이 되면 아네모네가 피어날 꽃밭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네모네가 예쁘다고 했는데. 나는 도통 예쁜지 모르겠는 그 꽃을 참으로 좋아했는데.

너를 위해 마련한 남부의 저택에 아네모네 꽃밭을 심었는데. 그 꽃이 필 때 즈음에는 우리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참 예쁘지 않니, 하면서 네 머리에 꽂아줄 생각이었는데. 그럼 너는 민망하게 웃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길을 걸었다. 걷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걸었다. 그런데 걸을 때마다 그가 튀어나와서 더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었으면 했다. 그럼 그 외로운 길을 혼자서 걷게 하지는 않을 테니.

그래, 정말 그게 좋겠다. 우리 함께 가자. 내가 따라갈게. 내가, 이 형이 널 따라갈게 루크.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그때였다.

“…….”

눈앞에, 작은 무덤이 나타났다.

[루카스(Lucas)]

4년 전 죽은 강아지가 잠든 곳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곳에 멈춰 섰다. 달빛이 호젓하게 무덤을 적셨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작은 봉분…… 그 안에 잠들어 있을 작은 강아지. 루카스.

“……루카스.”

그 순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루크가 죽은 이후로 나오지 않던 목소리였다. 오랜만에 듣는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나는 다시금 멍하니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카스.”

……너 여기 있니?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끝자락에 익숙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루크의 향기였다.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비석을 붙잡았다. 루카스라는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이 기이하게 따뜻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처럼. 그 온기를 느끼며 나는 뜨거운 울음을 토해냈다.

루카스. 루카스. 루카스…….

미안하다는 말도, 나를 용서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그를 구하지 못했다. 나는 죄인이다. 저주받아 마땅할 죄인. 나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지금 당장에라도 스스로 목을 졸라 죽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그런데 그 무덤이, 계속해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 그러지 말라고 다독이는 것 같아서.

괜찮다고…… 그러는 것 같아서.

한참을 울다가 지쳐 쓰러졌다. 한겨울이었으나 춥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하게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 나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꿈을 꾸었다. 루카스가 등장했다. 루카스, 하고 부르자 강아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강아지는 나를 보자마자 꼬리를 흔들었다. 거기 있었냐고 반기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내게 깡충깡충 뛰어와 폭삭 안겼다.

루카스.

강아지가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강아지가 혀를 내밀어 내 뺨을 핥았다.

꼭, 복수할게.

강아지가 왕! 하고 짖었다. 그게 좋다는 의미인지, 그럴 것 없다는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모든 진실을 밝혀서…… 꼭, 복수할게.

강아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또다시 혀로 뺨을 핥았다.

* * *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슬픔에 파묻혀 있던 이성도 돌아왔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고. 복수를 하겠다고.

그날부터 나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 일은 나의 복수니까.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신다지요.”

그 말에 황제가 움찔 몸을 떨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흑갈색 눈동자가 소리 없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루크 님의 반역사건 말입니다. 그걸 재조사하고 계신다지요.”

“…….”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를 죽인 건 너였잖아.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삼키며 묻자,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가 펜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

“뿌리까지 확실히 찾아낼 생각이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그래서 재조사를 한다고.

그럼 그때 했어야지. 그를 그렇게 무참하게 살해하기 전에 했어야지. 그랬으면 살릴 수 있었잖아. 적어도 고문이라도 하지 말았어야지.

나를 보며 황제가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

“대답해.”

황제의 재조사는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의 최측근인 채스터턴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일. 아무도 몰라야 하는 일을 내가 알다니 의아하기도 하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 역시 그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요.”

“……뭐?”

“그러다가 폐하께서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무척…… 놀랍더군요.”

황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 얼굴을 보며 그가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줄곧 해오던 생각을 내뱉었다.

“폐하를 돕겠습니다.”

“네가?”

“예, 제가 폐하를 도와 사건을 파헤치겠습니다.”

어차피 혼자서는 사건을 완전히 파헤칠 수 없었다. 루크에게 덧씌워진 반역의 혐의는 견고하게 잘 짜인 속임수였다. 이것을 뿌리까지 파헤치려면 어쩔 수 없이 황제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 역시 내가 필요할 터이고.

그가 증오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루크의 무고함을 밝히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델루니안…… 내 동생을 살해한 자에 대한 단죄는 이후, 루크의 무죄가 모두 밝혀진 이후에 행하여도 될 터. 그때까지 나는 충실한 심복의 가면을 뒤집어쓸 것이다.

그가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을 때까지.

황제와 내가 합심하자 일의 속도는 빨라졌다. 루크가 죽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루크가 좋아하던 아네모네가 활짝 만개하던 날, 나는 조작된 역모사건의 실마리를 처음으로 찾아냈다. 그가 내게 선물한 엽차의 판매상을 찾아낸 것이다.

엽차는 평민들의 기호 식품인지라 특정한 판매상을 찾기가 힘들다. 그러나 내게 선물로 온 엽차는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저품질의 엽차가 아니었다.

저품질의 둥근 이파리가 아닌, 상품질의 뾰족한 이파리였던 것이다. 그런 이파리는 일리오니아에서밖에 생산되지 않는다.

황실에 납품하는 차 판매상 중 일리오니쉬와 거래하는 자가 있는지를 캐었더니 단 두 명으로 추려졌다.

여름이 찾아왔다. 루크 앞으로 배정된 내탕금이 반역의 자금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흔적을 역추적했다.

그러자 세 명의 중개상인이 걸렸다. 그들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 찾아야 했다. 사병을 꾸려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가을이 왔다. 반역의 죄로 멸문당한 레드럼 공작가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반역이 조작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

“폐하.”

“…….”

황제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는 시선에 의문이 서려 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라, 나는 조금 기분이 묘해졌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의 침실은 그쪽이 아닙니다.”

그 말에 황제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이 향하던 방향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내뱉기를.

“……길을 헷갈리다니, 나도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군.”

황제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오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당혹이 서려 있었다. 심장이 지끈거렸다. 분노인가, 슬픔인가. 알 수 없다.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그분을.”

네가 죽인 내 동생을.

“그분을…… 잊지 못하셨습니까?”

잊지 못한 거냐고…….

1년. 루크가 죽은 지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황제와 나의 관계는 한때 친구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건 나의 감출 수 없는 증오 때문이기도 했지만, 황제의 알 수 없는 기피 때문이기도 했다.

나를 사랑해서 루크를 대용품 취급했던 그는, 루크가 죽고 난 이후로 오히려 나를 피했다.

어째서일까. 정말 어째서일까.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증오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를 사랑했다며. 그래서 내 동생을 그렇게 잔혹하게 죽였다며. 그러면 내게 구애해야 하는 것 아닌가. 죽은 루크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내게 달라붙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는 나를 피했다. 구애는커녕 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동선을 최대한으로 좁혔고,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할 때도 알게 모르게 눈을 피했다. 마치 내 얼굴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그리고 그는 매일 밤 수면향을 피웠다. 사람을 원체 경계하는 탓에 이때까지 한 번도 피운 적 없는 수면향을. 왜일까. 정말 왜일까.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정작 그는 그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분이라니?”

“…….”

“네가 말하는 ‘그분’이 그자인가?”

그는 아직도 루크가 반역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멸했고, 경멸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양껏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대꾸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 그런 헛소리를 할 거면 이만 물러가라.”

과연 헛소리일까. 조금 전까지 무의식적으로 그의 방으로 찾아가던 너는 그게 정말로 헛소리라 생각하는 건가. 나를 지나쳐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델루니안. 네가, 네 손으로 직접 죽인 남자 후궁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어.

우스웠다. 화가 났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루크를 그리워해, 싶기도 하고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도록 자신의 마음 하나 깨닫지 못한 그가 한심해서 불쌍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일 불쌍한 건 역시 루크였다. 끔찍하게 살해당한 내 동생. 지켜주지 못해서 서러운 루크. 그래서 나는 또다시 복수의 칼을 갈았다.

루크가 무죄로 밝혀지는 날, 그의 가슴에 찔러 넣을 칼을.

* * *

모든 진실이 밝혀진 그날은 되돌아온 봄, 꽃피는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

잘 조작된 반역. 채스터턴과 일리오니쉬 황후의 계략. 모든 증거를 들고 와 책상에 던지는 나를 보며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분의 결백을 믿으시겠습니까?”

끝의 끝까지 루크가 반역자라고 믿었던 황제는, 까맣게 죽어버린 눈으로 내가 던져놓은 증거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우습고 경멸스러웠으며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그분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

“당신의 어리석은 욕심으로 궁에 끌려 들어와서 이용만 당하다가 그렇게 억울하게…… 그렇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겁니다.”

“…….”

“이제 만족하십니까?”

그 아이를.

“내 동생을 죽여놓고 이제 만족하느냐고 묻잖아!”

그 말에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깨진 눈동자가 황망히 나를 향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야 밝히는 진실. 9년 전, 그가 궁에 들어왔을 때 진즉 밝혔어야 했던 진실.

“루크는 내 동생이었어.”

“……뭐?”

“나와 같은 배에서 태어난 내 친동생이었다고.”

나를 증오한다. 그까짓 작은 두려움에 눈이 멀어 너를 그 고통 속에 잠들게 한 나를, 용서할 수 없이 증오한다.

“사생아로 먼저 태어난 나만 아니었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을 사람은 루크였어. 그는 진정한 델라윈의 적통이자, 나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불쌍한 아이였으니까.”

“…….”

“그래서…… 그래서 지켜주려고 했는데, 너는…… 너는!”

네가 그를 죽였어.

고문으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의 심장을 네가 찔렀어. 전쟁으로 무너진 인간성을 기어코 회복하지 못한 너는 무자비하게 내 아이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었어.

그 아이는 적군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너를 해치려 한 네 형도 아니었다.

그 아이는 그저 사랑스러운 한 소년이었다. 무심하고 잔혹한 너를 7년이나 사랑한 다정한 소년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너를 그런 식으로 사랑한 적 없었다.

너의 유일한 친구였던 나조차도 너를 그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너를 사랑해 주던 유일한 사람. 그런 사람을 네가 죽였다. 세상에 다시없을 귀중한 아이를 네 손으로 직접 죽여 버렸다.

그래서 이젠 만족해?

“……안, 돼.”

기어코 황제가 입을 떼었다.

“아니…… 아니야.”

“…….”

“그럴 리가 없어.”

부정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서 처음으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랬을 리 없다’는 부정.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럴 리가 없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 죄로 처형을 당한다 해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죽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나는.”

멱살을 잡은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는…… 어떡해.”

처음으로 죄를 인지한 자의 황망한 속삭임. 나는 어떡하냐는 그 이기적인 말에 멱살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울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14년 만에 처음 본 눈물이었다.

……역겨운 새끼.

던지듯 그 멱살을 풀고 물러났다. 아니, 그건 도망이었다. 무엇으로부터의 도망이었을까. 그저 그 자리가 버거웠다. 루카스의 무덤으로 달려갔다. 강아지의 무덤 곁으로 호젓하게 꽃이 피었다.

“루카스.”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꽃바람이었다.

“모든 걸…… 밝혔어. 네 억울함을 그에게 알렸어. 그가 울었어. 제가 뭐라고 우는지 몰라.”

대답은 없었다.

“하하…….”

웃음과 함께 울음이 나왔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은 채로 나는 속삭였다.

“곧…… 이 일이 마무리되면 따라갈게. 혼자 두지 않을게. 함께 가자. 형이랑 함께…… 같이 떠나자.”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 * *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황제는 진노했다. 루이 채스터턴을 불러 그를 매섭게 추궁했으며, 일리오니쉬 황후의 궁을 초토화시켰다.

모든 황궁이 숨을 죽이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2년 만에 드러난 진실. 간신히 안정되었던 황실이 또 한 번 파란을 맞이했다.

나는 그들에 대한 황제의 처분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칼을 갈았다. 루크가 당한 것만큼 갚아주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직접 그들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한참 동안 분노 속에 침묵하던 황제는 처분을 내렸다.

루이 채스터턴이 국무대신의 위치에서 파면당했다. 후작으로 올랐던 작위는 다시금 백작으로 강등되었고, 그는 황도에서 추방당해 제 영지에 영원히 구금당했다. 시체조차 영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일리오니쉬 황후는 황후궁에서 쫓겨나 사원으로 향했다. 말이 좋아 사원이지 다 쓰러져가는 폐가나 다름없는 곳이라 일리오니아에서부터 따라온 시종들은 눈물로 강을 이룰 만큼 서글피 울었다. 황후의 지위를 삭탈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황궁에 발을 딛지는 못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황제는 명령했다.

“모든 기록을 삭제하라.”

루크의 조작된 반역사건과 그와 관련된 채스터턴, 일리오니쉬 황후의 이야기까지 모두 삭제하라는 명령이었다. 마치 애초부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리고 나는, 검을 빼어 들었다.

고작 그따위 처분으로 루크의 죽음을 덮으려 한단 말이지. 내 동생을 죽인 자들의 목숨은 하나도 거두지 않는구나.

참을 수 없었다. 루크가 죽었을 때 느꼈던 분노가 머릿속을 달구었다. 10년 전 그에게 하사받은 검이 번뜩였다.

죽이자. 그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자.

새벽이었다. 감시가 허술해지는 새벽. 그의 근위기사단장인 나의 출입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폐하께 긴히 아뢸 말씀이 있다 하니 침실의 문까지 열렸다. 그 방 안으로 발을 들이며 결심했다. 검을 뽑았다. 심장을 찌르자. 그가 내 동생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랬는데 방 안에는 이미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처음에는 나 외의 다른 사람이 먼저 찾아와 그를 찔렀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를 찌른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은빛 단검을 꺼내 들고 자신의 오른팔을 찌른 황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잔뜩 흐트러진 얼굴에는 이성이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짙은 죄책감과 같잖은 그리움뿐.

“……이런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습니까?”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다. 그렇게 팔을 찔러봤자 루크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 말에 남자가 멍하니 자신의 왼팔을 뻗었다. 나를 붙잡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선의 끝에는 내가 없었다. 죽어가는 그의 시선 끝에 위치하는 것은 내가 아닌 루크. 기가 막혔다. 우습지도 않다.

“과거에는 그분에게서 저를 보시더니, 이제는 저에게서 그분을 찾으십니까.”

“…….”

“참으로 이기적이십니다.”

그는 말없이 팔을 내렸다.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들은 그의 눈에 천천히 이지가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다가 칼을 집어 던졌다.

“폐하께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

그를 죽이려 왔으나, 내가 찌르지 않아도 이미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자신만 몰랐던 그리움에 잠식되어 천천히.

머지않아 그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영지도, 작위도 모두 가져가십시오. 어차피 그것은 원래 저의 것이 아니었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리안.”

“이제 저는 떠납니다. 다시는 뵐 일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자. 이 황궁을 떠나자. 내 동생을 죽인 자들로 득실거리는 이 황궁을 떠나 라윈으로 돌아가자. 최초의 죄악이 탄생한 그곳에서 생을 끝내자. 망가지는 것은 그의 속죄다. 나의 속죄는 나의 방식으로 이루어야 할 터.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아직도 피가 흐르는 그의 팔이 계속 눈에 걸렸다.

“…….”

14년을 함께한 사람이라 그런 걸까. 그가 미치도록 증오스러운데, 또 그 팔이 안쓰럽기도 했다.

……어리석은 인간.

최초로 친구가 되었던 자를 버리는 일은 내게도 쉽지 않았다. 루크를 사랑한 것에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지만, 델루니안은 나에게도 소중한 친구였다.

14년 동안, 방향은 다르더라도 감정을 쌓아 올린 존재. 그런 사람을 무정히 끊어내는 일이 쉬웠을 리가 없다. 그를 양껏 증오하지 못하는 내가 또 증오스러웠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옷자락을 길게 찢었다. 피가 흐르는 황제의 팔을 단단히 감싸 동여매며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죽지 마십시오.”

황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차피 저질러진 일입니다. 죽지 말고 주어진 삶을 사세요.”

그가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손에 죽은 루크를 생각하면 그가 처절하게 고통스러워하다가 죽기를 바랐지만, 죽음조차 그에게는 사치일 것 같아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14년 간 함께해 온 사람에 대한 아주 작은, 티끌만 한 안타까움도 있었다.

반평생 전쟁터를 떠돌며 손쓸 수 없이 망가진 황제. 타인을 죽이는 것에 무감해진 자.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감정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 바뀔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사람.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제 잘못으로 잃어놓고 남 탓하기 바빴던 그. 하지만 이제는 남 탓도 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 처해 버렸으니.

평생 정신적 불구로 살아갈 그가…… 아주 조금, 안타까웠다.

“살면서 폐하께서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며, 그 결과를 곱씹으며.”

하지만 이미 죄를 저질렀으니.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사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폐하께서 비참히 죽은 제 동생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니까요.”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속죄는 해야 할 거다, 델루니안.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 * *

황제는 델라윈의 작위를 걷어 가지 않았다. 나는 먼 친척을 찾아내어 작위를 그에게 물려주었다. 갑작스러운 횡재에 그는 뛸 듯이 기뻐했지만 작위를 넘겨주는 내가 오히려 그보다 더욱 홀가분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자리. 동생의 피를 먹고 자란 내 삶.

드디어…… 해방될 수 있겠구나. 그 저주로부터.

채스터턴을 찾아갔다. 내 동생을 모함한 자. 그를 잔혹하게 고문한 자. 똑같이 죽여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영지와 그의 영지는 거리가 제법 있었고,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채스터턴은 황제가 보낸 독주를 먹고 숨을 거두었다.

허탈했다.

“하…… 하하.”

나는 평화롭게 파묻히는 그의 시체를 보며 검을 집어 던졌다.

루크의 죽음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를 직접 죽인 황제는 제 팔만 찌르고 말았으며,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채스터턴은 고작 독주를 마시고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일리오니쉬 황후는 사원에 유폐되어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가니 내가 죽일 수도 없었다. 저승에서 루크가 땅을 치고 울고 있을 일이었다.

채스터턴의 영지에서 라윈으로 돌아오며, 나는 생각했다. 그 책임…… 나라도 지자고.

그의 죽음을 방조한 나 역시 죄인이니, 나라도 죗값을 치르자고.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게 시켰다. 귀족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야 흔한 일이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초상화를 완성시키기까지는 꼬박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매일 그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점을 더 그려주었으면 하는데.”

초상화를 완성시킨 화가에게 한 점을 더 부탁했다. 한 달 동안 이루어진 작업에 잔뜩 지쳐 있던 화가는 내 부탁에 노골적으로 힘들다는 기색을 보였으나, 이전 작업의 두 배로 돈을 주겠다고 하니 당장에 수락했다.

그렇게 한 달이 또 지나고 화폭 안에 루크가 탄생했다. 살아생전과 똑같은 모습이 무척 흡족했다. 약속된 돈의 두 배를 더 주니 화가가 뛸 듯이 기뻐하며 내게 절을 했다. 그가 돌아가고 라윈의 성에 두 점의 그림을 걸었다.

하나는 죄악으로 얼룩진 나의 것이고, 또 하나는 순결한 루크의 것.

그 두 개를 같은 가지로 이어 엮으며 나는 그의 이름을 밑에 새겨 넣었다.

“루크…… 델 라윈.”

라윈의 루크.

드디어 완성된 사랑하는 동생의 이름.

……전생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 * *

자살.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 같은 죄인에게 너무 쉬운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때는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먼저 떠난 동생의 걸음을 쫓으려면 당장 출발해도 늦었다.

루크의 이름을 새겨 넣은 그 방에서 창을 열고 뛰어내렸다. 창을 열면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릴 만큼 높은 곳이었다. 낙하감. 머리가 깨졌고, 그대로 한참 동안 고통에 바르작거리다 숨이 멎었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쫓고 쫓았다.

나 혼자밖에 없는 어둠 속에서 그 아이를 쫓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루크가 있는 곳은 어디야?

어둠 속에서 물었고, 그러자 한 점의 빛이 나타났다. 빛 덩이는 찬란했고, 루크의 향기가 짙게 풍겼다. 여기 있구나. 네가 여기 있구나.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또다시 델라윈이었다. 지긋지긋한 이름. 물론 처음에는 전생을 떠올리지 못했다. 전생을 떠올리는 것은 신의 섭리에 도전하는 일. 한 사람이 죽음을 맞닥뜨릴 때 정도의 강렬한 충격에나 우연히 떠오르는 일이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연못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적이 있다. 익사 직전까지 간 나를 구한 것은 나와 나이 차이가 제법 나던 누나였다. 사흘을 꼬박 앓다가 깨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전생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리안으로서의 삶의 기억과 에반으로서의 삶의 기억이 뒤섞였다. 리안처럼 의젓하게 행동하다가 일곱 살의 에반으로 돌아와 철부지처럼 뛰어다니기를 몇 달. 정신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고, 리안의 삶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겠지만 에반의 삶은 행복했다.

나이 많은 아버지는 가정에 헌신적이었고, 어머니는 노산으로 인해 몸이 약해졌지만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누나는 어린 동생을 예뻐했으며, 늦둥이 아들인 나는 이전의 삶과 달리 모든 이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전생에 그리도 고통을 받은 것이 이번 삶을 위해서였나, 싶을 정도로.

루크, 300년 전 불쌍한 삶을 살다 간 내 동생은 점점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사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하니까.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과 고통을 주는 그 아이의 존재를 잊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 누나가 결혼 상대를 데려왔다. 상대는 드마뉴 백작이었다.

드마뉴…… 300년 전 어머니의 가문이다. 아직까지도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구나. 아홉 살 어린이답지 않게 시니컬한 감상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드마뉴 백작이 다정하게 시선을 맞춰왔다.

드마뉴 백작은 다정하고 살뜰한 남자였다. 누나를 바라보는 눈에 사랑이 꿀처럼 뚝뚝 떨어졌다. 작위가 낮다 하여 은근히 반대하던 아버지도 저런 사람이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결혼을 허락했다. 누나는 그와 축복 속에 결혼했으며, 일 년 후 아이가 태어났다.

제 아버지를 닮아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한 조카.

라파엘 드마뉴의 탄생이었다.

“에반, 이리 와.”

“…….”

“안 무서워해도 돼. 응?”

두 번째 목격하는 아기의 탄생.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동생을 빼앗겨 결국 비극에 이른 전생이 망령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내가 주춤대며 차마 다가가지 못하자, 드마뉴 백작이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조카의 앞까지 당도했다.

“안아보렴.”

누나가 아이를 넘겨주었다. 또다시 얼떨결에 아이를 안았다. 내 품에 안긴 작은 아이는 갑자기 바뀐 자세가 불편한 것인지 작게 칭얼대며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

아이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어머, 라파엘은 삼촌이 좋은가 보네.”

누나가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멍하니 내 손을 잡은 아기,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풀잎처럼 작은 손바닥. 내 손가락을 감싼 온기. 300년 전과 똑같은 이 상황.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루크?”

너…… 루크 맞지?

내 물음에 아이가 또다시 환하게 웃었다.

* * *

라파엘은 무럭무럭 자랐다.

“혀엉아…….”

아직 세 살에 불과한 라파엘은 삼촌과 형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볼 때면 형아라고 불렀고, 누나는 그때마다 형이 아니라 삼촌이지, 라고 정정했지만 라파엘의 형아 타령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 라파엘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전생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형이라는 소리.

단순히 인지능력이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형이라 부르는 것 같아서. 그래서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가 내 죄를 용서했다는 뜻 같아서.

“형아, 티비!”

“응?”

“티비 볼래!”

TV를 보자고? 봐도 되는 거야? 고개를 돌려 누나를 보자 누나가 봐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TV를 틀자 바로 뉴스부터 흘러나왔다. 재미없어. 다른 걸 보는 편이 낫겠다. 채널을 돌리려 TV에 다가갔을 때였다.

“안 돼!”

하고, 라파엘이 제법 강한 힘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안 된다니? 뭐가 안 된다는 거야……? 그러자 누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라파엘의 말을 통역해준다.

“라파엘은 뉴스 보는 거 좋아해.”

“응?”

“특이하지? 근데 뉴스만 나오면 그렇게 시선을 못 떼더라. 다른 프로그램을 보여주면 시큰둥하면서 말이야.”

뉴스를 좋아한다고? 의아하게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검은 눈을 반짝이며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뭐, 저 모습도 귀엽긴 하네. 나는 얌전히 라파엘의 옆에 앉았다. 재밌어? 하고 간간히 묻기도 하며.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라파엘이 짤막한 탄성을 내지르며 눈을 크게 떴다. 뭔가 기다리던 것이라도 본 모양이다. 도대체 뭐기에 저러나.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TV에는 황실 일가가 나오고 있었다.

황실…… 일가?

“예뻐!”

라파엘이 갑자기 소리쳤다. 예쁘다고. 나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소리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에.

“라파엘.”

“응!”

“너…… 황태자 전하가 좋아?”

“좋아!”

예뻐!

라파엘은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도대체 너는…… 너는 왜…….

황망히 뉴스 화면을 바라보았다. 흑갈색 머리카락에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두 살배기 황태자 샤를마뉴가 황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저 아이가, 델루니안은 아니기를.

부디…… 루크가 또다시 그런 멍청한 사랑을 하지 않기를.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라파엘과 화면 속에서 아장아장 움직이는 황태자를 번갈아 보며, 나는 그렇게 간절히 빌었다.

비록 그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 * *

스무 살이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제정부에 입사했다.

그맘때 정국은 심상치 않았다. 무정부주의자와 손을 잡은 소수민족은 활개를 치며 분리 독립을 요구했고, 그들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은 점점 거세어졌다.

그리고 누나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남편이자 라파엘의 아버지인 드마뉴 백작은 최근 계속 테러 위협을 받고 있었다. 경무청장의 아들인 로렌츠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일이다. 그만큼 그가 티를 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아인츠만의 핵심 참모로서 소수민족 탄압 정책의 골자를 만들었다. 젊은 참모의 이름은 비공개였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제정부에 입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를 지키고 싶었다. 그의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아니, 행복하게 자라고 있는 라파엘을 위해서라도 그 가정을 지켜야 했다. 천진난만한 그 웃음을 위해서라면 내게는 못할 일이 없었다.

제국정보부의 작전 요원에게는 늘상 죽음의 위험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신원을 함부로 밝힐 수 없고, 가족들과도 연락을 줄이는 편이 좋았다.

소식 없이 사라졌다가 소식 없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새 내 주특기가 되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음을 졸였고 누나 또한 걱정을 늘어놓았으며 라파엘은 심지어 가지 말라고 울먹이기까지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모두 그들을 위함이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스물다섯이 되었다. 테러는 계속해서 일어났고, 그것을 막는 일은 끊이질 않았다. 점점 지쳐갔다. 언제쯤이면 이 싸움이 끝날까. 언제쯤이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때 소수민족과 손을 잡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수장이 붙잡혔다. 나와 페어로 활동하던 마리아 카밀라의 공로였다. 포상이 내려왔다. 일 계급 특진과 함께 한 달의 휴가였다.

이제 쉴 수 있겠군. 황도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언제라도 다시 테러가 발생할 수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는 못하겠지만 당분간은 쉴 수 있겠어…….

그게 속임수일 줄은.

비행기가 추락했다. 화국에서 돌아오던 제국의 비행기가 드넓은 망망대해에 추락하고 말았다. 내부에 탑승해 있던 256명의 사람은 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수장되었다.

그리고 그중에…… 그들이 있었다.

“삼촌!”

라파엘의 부모. 나의 누이와 그녀의 남편인 드마뉴 백작.

“…….”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삼촌, 나──”

나 어떡해? 엄마 아빠 모두 없어졌는데, 나 어떡해? 나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삼촌.

부모의 가묘를 보며 떨고 있던 라파엘이 내게 안겼다. 그 작은 육체는 겁에 질려 있었다. 혼자 남았다는 두려움. 한순간에 사라진 부모에 대한 그리움. 막막함. 슬픔. 공포.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막을 수 있었는데.

막을 수 있던 테러였는데.

함정에 빠졌다. 무정부주의자의 수장을 쫓는 대신 소수민족의 정신적 수장을 쫓았어야 했다. 그들이 벌인 짓이었다. 진즉 그들을 잡았다면, 라파엘은 또다시 혼자 남지 않았을 텐데.

내 잘못이다. 내 불찰이다.

나는 또다시 그의 걸림돌이 되었다.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놔.”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라파엘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젠 너 혼자야.”

“……삼촌?”

“난 너까지 돌볼 자신 없어. 나 한 몸으로도 힘들어.”

아이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 일부러 모진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해야 했다. 그래야 아이가 나에게서 정을 뗀다. 라파엘은 루크일 적과 마찬가지로 다정하고 정이 많은 아이였다. 한 번 사람을 마음에 들이면 잘 내보내지 않는 외골수.

그런 그에게, 죽기를 각오한 나는 위험한 존재일 뿐이다.

아이를 떼어놓고 몸을 돌려 바로 제정부로 향했다. 내게 주어진 포상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들을 쫓을 생각이었다. 설령 내 목숨을 내어놓는 한이 있더라도, 라파엘의 행복을 망친 이들을 가만히 살려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레브로비치를 쫓을 겁니다.”

제정부장에게 통보했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레브로비치의 후예가 있는 것 같다는 추측은 내부에서 계속 제기되었지만 아무도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또다시 테러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민중을 동요시킬까 봐.

그리고 증거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냥 묻을 생각이었겠지. 모른 척할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잡아넣겠습니다.”

라파엘. 내 소년.

300년 전 지키지 못한 내 아이.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았다. 그건 내 피에 흐르는 숙명이었다. 또다시 델라윈으로 태어나고 만 나의 숙명. 너에게 복종하고, 너를 위해 숨쉬고,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누군가에게는 맹목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사랑이다.

네가 작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면, 이번에야말로 내 한 몸 불사르더라도 바람이 되어 너를 도우리라.

스물다섯, 에반 델라윈의 몸으로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이제 알겠어?”

길고 긴 이야기는 끝이 났다. 300년에 걸친 긴 이야기였다. 라파엘은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검은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나는 쓰게 웃었다. 이제 나를 원망하겠지. 저주하겠지. 네가 그러고도 내 앞에 나타날 용기가 있었냐고 외치겠지. 피하지 않겠다. 그 원망을 모두 받아주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런데.

“라파엘?”

“…….”

“어디 가는 거야!”

라파엘은 원망도, 비난도 하지 않은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곧장 뛰쳐나가 버렸다.

“라파엘!”

어차피 목적지에 다다른 차는 주차된 상태였으니 위험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어딜 간다는 거야. 그를 쫓아서 차에서 내리다가 휘청,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윽―!”

무릎이 지끈거렸다. 고문의 후유증이다. 빌어먹을.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너무 급하게 뛰쳐나온 게 문제다. 타는 듯 아파오는 고통에 조금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바닥을 뒹굴자, 저 멀리 도망쳤던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도와줘야 하나, 어쩌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튼 착해 빠져서는.

“뭐가 좋다고 웃어?!”

거봐. 도망을 칠 거면 내가 쓰러지든 말든 그냥 가버렸어야지. 뭐가 좋냐고 타박하면서도 재빠르게 다가오는 라파엘을 보니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싶어 웃음이 짙어졌다.

“웃지 마.”

“그래.”

“웃지 말라고!”

“알았어.”

조심스럽게 나를 일으킨 라파엘은 내가 또 쓰러질까 두려운지 차마 멀리 가지도 못한 채 시선만 피했다. 그러면서 입술만 잘근잘근 씹는다.

정리가 안 되는 모양이지. 저러다가 또 혼자 삭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에야말로 네가 나한테 원 없이 비난하고 저주할 기회인데.

일단은 맨션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부축해 소파에 앉힌 라파엘은 정작 자신은 앉지도 않고 거실을 서성대기만 했다.

“라파엘.”

“……말 걸지 마.”

“…….”

자리에 좀 앉으라고 말하려 했더니 말 걸지 말라는 일갈부터 날아온다.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먼저 입을 떼겠지.

그렇게 묵묵히 시간만 흘렀다. 삼십 분쯤 흘렀을까? 300년보다 길게 느껴지는 30분이 지나갔을 때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하고, 라파엘이 입을 떼었다.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데.”

“…….”

“내가 당신의 동생이었고, 당신은 나를 무척 아꼈고, 그래서 오히려 아무 말도 못 했다고?”

“…….”

“조금 전 당신이 제일 많이 한 말이 ‘나를 용서할 수 없었어’였지.”

라파엘이 기가 차다는 듯 하…… 하고 웃었다.

“그래서 나더러 용서해 달라는 거야? 당신은 용서할 수 없으니 나라도 해달라고?”

“……아니.”

“그럼 뭔데!”

나를 용서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용서를 받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오지 않았던가. 용서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다. 그것은 제 살을 파먹고 뼈를 깎아내는 과정일 터. 그런 짐을 그에게 지우고 싶지 않았다.

“나도…… 잘 모르겠어.”

“…….”

“속죄인가.”

……용서를 바라지 않는 속죄?

그 말에 라파엘이 눈을 부릅떴다.

“속죄…… 라고?”

“…….”

“속죄…… 속죄란 말이지.”

속죄라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린 라파엘이 하하, 하하하…… 황망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너희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이기적이야.”

“…….”

“너도, 샤를마뉴도! 왜 다들 속죄의 방식을 제멋대로 정하는 건데!”

그도 속죄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던 건가. 델루니안, 제 감정도 몰랐던 우둔한 자.

그가 너에게 속죄를 말했어?

……많이 성숙해졌나 보구나. 사람의 감정을 많이 알았나 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라파엘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폭풍처럼 감정을 쏟아냈다.

“속죄라고? 용서를 바라지 않는 속죄를 하려고 했다고? 진짜 이기적이다.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지? 차라리 숨기려고 했으면 끝까지 숨길 것이지, 왜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나를 사랑했다고? 나를 아꼈다고? 그래서 말을 못 했다고? 그거 다 변명이잖아!”

“…….”

“당신이 정말로 나를 아꼈고 나를 위했으면, 내게 말했어야 해. 내가 너의 형이다, 가족이랄 게 없어서 빌어먹고 살던 너의 친형이다!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고. 알아?!”

“……미안하다.”

“7년이야! 당신이 내 곁에서 나와 함께한 게 7년이라고! 그동안 진실을 밝힐 기회는 무수히 많았어. 왜 말하지 않은 건데? 아, 두려워서? 내가 당신을 원망할까 봐 두려워서?!”

그래. 두려워서. 네가 나를 원망하고 저주할까 봐.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가 나를 원망하고 저주하면서 떠나갈까 봐. 간신히 생긴 가족이라는 존재를 다시 잃을까 봐.

“내가 당신을 원망할 거라 생각했어?”

“…….”

“그때의 내가,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 델루니안을 사랑할 정도로 외로웠던 내가! 갑자기 나타난 형제의 존재를 원망하고 저주할 것 같았냐고!”

라파엘이 뚝뚝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차라리 리안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

“델루니안과는 다른 마음이었지만, 나는 그 정도로 당신을 좋아했어. 그때의 당신은…… 리안은 무조건적으로 나를 위하던 사람이었으니까.”

“…….”

“당신이 내 형제라고 밝혔으면, 내가 사실은 네 형이다- 밝혔으면, 나는 그 자리에서 좋아서 울지언정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았을 거야. 델라윈의 후계자? 사생아?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어. 인생을 통째로 빼앗았대도, 빼앗아 간 사람이 당신이었다면 괜찮았을 거라고. 오히려 당신의 손을 붙잡고 황궁을 쏘다니면서 이 사람이 내 형이라고 자랑하고 다녔을 거야. 내 형이 이렇게 멋진 사람이고, 나를 잊지 않았으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어도 끝내 되찾았다고.”

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상상한 것과 라파엘이 직접 들려준 그의 본심은 판이하게 달랐다.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그의 본심.

내가 형이라고 밝혔으면 오히려 기뻐했을 거라는 루크의 마음.

“당신은 결국 나를 위한다는 자기만족에 빠져서 내 상황이나 진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던 거네.”

“라파엘.”

“그리고 그 빌어먹을 자기만족은 이번 생에서도 못 고쳤고.”

그가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계속해서 볼을 타고 흘러 넘쳤다.

“하루에 몇 번이나 울어야 하는 거야.”

그가 이를 갈듯 중얼거렸다. 아까 또 울었어? 왜? 샤를마뉴 그 자식 때문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을 꺼냈다. 라파엘이 매섭게 그 손을 쳐 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언제부터 날 그렇게 신경 썼다고 손수건이야, 손수건은.”

“…….”

“왜, 이것도 날 위한다는 당신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건넨 거야?”

아니,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손을 물리지도, 그렇다고 얼굴을 닦아주지도 못하는 나를 보며 라파엘이 비웃듯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자조적으로 중얼거리기를.

“정말 당신과 델루니안이 친구기는 친구인가 봐.”

“…….”

“어떻게 이렇게 사고방식이 똑같을 수 있지?”

“…….”

“한 놈은 내 의사 따위는 물어보지도 않고 속죄를 하겠다느니 뭐라느니 하질 않나, 또 한 놈은 자기만족에 빠져 사람 맘에 상처를 주고 혼자서 가련한 척을 하질 않나……. 진짜 정 떨어진다.”

그가 중얼거렸고, 그와 동시에 가슴 한쪽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원망하고 저주할 것이라 예상하고 각오를 했는데, 왜 고작 정 떨어진다는 한마디에 심장이 떨어지는 건지.

“아까 용서를 바라지 않는다 했지.”

“…….”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난 당신 용서 안 해.”

“……그래.”

“그리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속죄도 안 받아줄 거야.”

“…….”

“내 의사와 상관없는 속죄는 또 다른 폭력이라는 생각 안 들어?”

그런가. 그것 또한 폭력인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너에게 이 죄를 갚을 수 있지. 나는 뭘 어떻게 해야…….

그때 라파엘이 몸을 돌렸다. 현관으로 가는 것이다. 떠나는 건가? 나를 완전히 떠나는 거야? 나를 용서할 수 없어서, 속죄를 받아줄 수도 없어서 그냥 모른 척하겠다고 떠나겠다는 거냐고.

그럴 수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가지 마.”

또 이기적인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다.

라파엘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가지 마.”

“…….”

“내가, 내가 어떻게든 네 마음에 들어맞는 속죄를 할 테니.”

“…….”

“가지 마, 라파엘.”

그리고 그 말에, 라파엘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내 마음에 드는 속죄를 한다고?”

“……그래.”

“그 허약해 빠진 몸으로 어떻게?”

허약해 빠진 몸.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는 허약하지 않다. 충분히 강하다. 다만 고문으로 인하여 잠시 망가졌을 뿐이다. 금방 회복시킬게.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게. 그래서…….

라파엘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나와.”

“……뭐?”

“나오라고. 병원이라도 가야 할 것 아니야.”

그러면서 눈짓으로 내 무릎을 가리킨다. 무릎? 내 무릎은 왜…… 하고 멍하니 고개를 떨구었다. 무릎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고문당해서 만신창이가 된 주제에 무릎까지 다치고 속죄는 무슨.”

라파엘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발코니에 비서가 서 있었다. 그에게 차를 대라고 지시한 라파엘이 다시금 내게 다가왔다.

“잡아.”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잡으라고.”

얼떨결에 그의 팔을 붙잡자 나보다 키가 조금 더 큰 그가 나를 안다시피 부축한 채로 집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타서 병원으로 가는 길. 라파엘이 칸막이를 올린 후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델루니안을 용서하지 못해.”

“…….”

“용서를 하려고 해도 내가 당한 일이 계속 생각이 나서 치가 떨려.”

그러겠지. 나도 그를 용서하지 못했는데, 네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 라파엘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샤를마뉴를 보면…….”

“…….”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

“다시 시작한다고?”

“샤를마뉴는 델루니안이자 델루니안이 아니기도 하니까. 내가 루크이자 루크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말도 안…….”

“그래서 당신도.”

말도 안 된다고 따지려던 내 말을 끊으며 라파엘이 끝까지 말을 이었다.

“리안이자 리안이 아닌 당신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는 중이야.”

뭐?

“근데 리안이 아닌 에반은 델루니안이 아닌 샤를마뉴보다 나한테 잘못한 게 더 많아서…….”

“……라파엘.”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내가 더 잘못한 게 많다고? 황망히 바라보는 내게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어린 조카를 혼자 버려두고 떠났잖아. 그게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는 그냥 서로 노력하자고 하고 말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당신은 좀…… 자기만족을 버리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어. 남이 뭘 원하는지 좀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팔을 퍽! 쳤다. 그 주먹이 제법 아팠다. 아무래도 한이 실린 펀치 같은데……. 운동을 해도 잘하겠군. 멍하니 생각했다.

그사이 병원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내린 라파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저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아까까지는 부축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잡았던 손인데, 왠지 지금은 잡기가 망설여진다. 내가 잡아도 되는 걸까. 감히 내가?

“뭐 해? 안 잡고.”

라파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국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내게 내밀어진 너의 손을 모른 척할 수 없는 나는, 에반임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리안이었다.

너의 손을 꼭 붙잡는다. 따뜻한 손. 루크일 적의 부드럽기만 했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뼈마디가 굵어진 남성의 손.

라파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맞잡은 손을 잡아끄는 부드러운 힘이 나를 차에서 끌어낸다. 물 흐르듯 흘러나온 나를 부축하며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가자, 형.”

……뭐?

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두 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앞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겠다. 돌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굳은 나를 보며 라파엘이 조금 전 했던 말이 꿈인 양 인상을 찌푸렸다.

“안 가?”

“라파엘, 너 방금.”

“방금 뭐.”

“방금…….”

“뭐라는 거야. 아무 말도 안 했어.”

“거짓말.”

“진짜야. 빨리 오기나 해. 팔 아파.”

분명히 들었는데.

분명, 네가 형이라고 하는 걸 들었는데.

꿈이었나?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뭐지? 분명 그가 형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멍하니 생각했다. 정말 꿈이었나.

라파엘이 나를 재촉했다. 빨리 가자, 좀. 꿈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얼빠진 나를 보며 그가 또다시 옅게 웃었다. 맞닿은 어깨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 열감에 현실로 돌아왔다.

형이라고 불렀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따뜻한 체온.

살아 있는 라파엘의 온기였다.

외전 1 파수꾼 <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