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오랜만이다.”
에반을 다시 만난 것은 그날 황궁에서였다.
“한 달 만이지?”
그가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이 환하게 웃었다.
“한 달 만에 보는 조카인데…….”
“…….”
“연애하느라 정신이 없네.”
그 말에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내 손을 맞잡은 샤를마뉴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델라윈 공작, 그건…….”
“죄송하지만 이건 가족 문제라서요, 전하.”
“…….”
“라파엘, 말해봐. 어떻게 한 달 만에 출소에서 찾아가는 사람이 가족이 아니라 애인일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에반의 목소리가 배신감에 작게 떨렸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에반이 저렇게 분노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내가 출소한다는 소식을 변호사로부터 전해 들은 에반은 고문 후유증 치료를 위해 예약해 두었던 병원까지도 취소하고 곧장 내게 달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엔 이미 내가 떠난 뒤였고, 그는 패닉에 빠졌다고 했다. 어디로 갔는지, 누구와 함께 갔는지 알 수 없는 조카가 어떻게 되지나 않았을까 심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황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여기 있으니 삼촌인 당신이 와서 데려가라는 연락이었다고 했다.
연락을 받은 에반은 미친 듯이 황궁으로 달려왔고, 그가 본 것은.
“미안해.”
……붉은 얼굴로 말없이 손만 겹치고 있는 나와 샤를마뉴였다.
아, 부끄러워 죽겠다. 키스하다가 들킨 것도 아니고, 섹스하다가 걸린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다. 안 그러고 싶은데 몸이 절로 배배 꼬였다
에반에게 혼나고 있는데도 혼난다는 사실보다는 손잡고 있다가 걸려서 부끄러운 게 더 컸다.
그 와중에도 샤를마뉴는 계속 내 손을 붙잡고 있어서 더 민망했다. 그와 맞잡은 손이 너무 뜨거웠다. 타버릴 것 같다. 어떡하지.
“……지금 딴생각하냐?”
그런 나를 바라보며 에반이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절대 딴생각 안 했어. 그냥 손이 너무 뜨겁다고…….
“다시는 안 그럴게.”
“뭘.”
“그…….”
가족 버리고 애인한테 달려가는 짓…… 이라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 안 돼. 애인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니 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내가 무슨 연애 처음 하는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렇게 작은 일에도 하나하나 반응하다 보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거다.
진정해. 진정하자, 라파엘 드마뉴.
“……출소하고 바로 당신한테 갈게.”
그 말에 에반이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찼다.
“두 번 복역하시려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열 오른 머리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치겠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이미 한 번 핀잔을 들은 샤를마뉴가 다시금 나섰다.
“공작, 그건 오해입니다.”
“뭐가 오해란 말입니까?”
“이 사람은 제가 불러서 온 게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에반이 잔뜩 비틀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물음에 샤를마뉴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도 내가 여기 왜 온지 몰랐던 것이다.
이걸 어쩐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말해도 되는 건가. 황후 전하께서 나를 불렀다고. 아니, 그건 좀 그런데. 그럼 무슨 얘길 했냐고 물을 거고…….
“머리 굴리지 말고 말해.”
에반이 귀신같이 눈치채고 내게 경고했다. 머리 굴리지 말라고. 그에 결국 나는 한숨처럼 대답하고 말았다.
“그…… 황후 전하께서 부르셔서.”
“황후께서?”
“어머니가?”
물음은 에반과 샤를마뉴 두 명에게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이를 어쩐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잠깐 대화를 했습니다.”
“무슨 대화?”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옛날부터 나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괜히 어설프게 둘러댔다가는 더 큰 문제만 생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침묵했다. 그런 나를 견디지 못한 것은 샤를마뉴였다.
“라파엘.”
“…….”
“어머니와 무슨 대화를 했어?”
“…….”
“말해줘. 부탁이야.”
그의 목소리가 초조했다. 나는 그냥 웃었다. 그냥…… 당신이 무릎 꿇었다는 이야기. 그런 거.
하지만 그 대화가 왜 나왔냐고 묻는다면…… 으음. 역시 여러모로 곤란하다. 두 모자 사이에 끼어서 관계를 악화시키는 이물질 역할을 할 생각은 없었다.
역시 입을 다무는 게 좋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더 단단히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샤를마뉴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나는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떠한 비밀도 만들고 싶지 않아.”
“……?”
“우리는 소통의 부재로 인한 비극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잖아.”
“…….”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라파엘…….”
소통의 부재로 인한 비극.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리석음이 내 두 눈을 가려서…….’
그는 어리석었기에 네가 역모했느냐고 캐묻지 않았고 그로 인해 나는 죽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떠올린 전생을 이야기하지 않아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그건 전부 비극이었으며,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는 그와 같은 경험을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절박한 심정이 내게 그대로 닿아왔다.
그런 상황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정말로 별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
“그냥 전하께서 저를 위한 증거물을 얻기 위해 폐하와 황후 전하께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말에 샤를마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무릎을 꿇었다고요?”
에반이 물었다. 샤를마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무릎까지 꿇으셨습니까? 증거물은 비서실장에게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냥 달라고 하면 될 것을…….”
여기까지 말하던 에반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인상을 확 굳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샤를마뉴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재빨리 샤를마뉴를 변호했다.
“그게 아니라, 에반, 그…… 당신도 알잖아. 황실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고…….”
“최선?”
에반의 푸른 눈이 파랗게 튀었다. 샤를마뉴의 손아귀 힘이 강해진 것도 동시였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샤를마뉴가 그건 아니라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최선이었다고?”
“그…….”
“라파엘 드마뉴.”
에반이 딱딱 떨어지는 말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넌 멍청하고 착해빠져서 네가 처했던 상황을 잘 모르나 본데.”
“에반, 제발…….”
“어떤 일에도, 네 목숨보다 최선인 선택은 없었어.”
망했다. 세 글자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에반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
“넌 알 것 없어.”
“에반!”
“그럼 라파엘을 부탁드립니다, ‘친애하는’ 황태자 전하.”
샤를마뉴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내가 붙잡을 틈도 없이 에반은 쌩하게 황태자궁을 나섰다.
아, 안 돼. 분명 사고를 칠 거다. 이러려고 말한 게 아닌데……!
나는 강한 힘으로 내 팔목을 붙잡은 샤를마뉴를 보며 소리쳤다.
“이거 풀어주십시오, 전하. 에반을 말려야 해요!”
“……미안, 라파엘. 그럴 수는 없어.”
“전하!”
“공작의 말이 맞아.”
그가 참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없었어. 아니, 없어야 했어.”
“…….”
“그건 비단 당신이 내 연인이라서가 아니야. 황제와 황후에게는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지.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도와야지 황실의 안녕을 위해서 억울한 사정을 모른 척한 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니야. 의무를 다하지 못한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도 두 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
“무슨…… 말이요?”
“황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느니 하는 말.”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기 자신부터 생각해. 황실이니 정세니 하는 것은 전부 잊어버려.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자기 자신뿐이야. 그리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도 당신뿐이고.”
그가 느릿하게 내 손을 매만졌다. 연녹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입술도 깨물지 말라며 다른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하…….”
결국 울음 대신 웃음이 터졌다. 내가 웃는 모습을 보며 샤를마뉴도 마주 웃었다.
* * *
황태자궁에서 나간 에반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화가 덜 풀렸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저, 에반.”
“왜.”
뭐 했냐고 묻고 싶은데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지나치게 흉흉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괜히 딴소리를 했다.
“그…… 우리 지금 라윈으로 가는 거지?”
“가기 싫어?”
“어, 어?”
“그런 거 아니면 왜 묻는데.”
왜 저렇게 말에 가시가 섰지? 처음 보는 에반의 날선 태도에 잔뜩 당황해서 어버버하자 그가 억눌린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당장은 라윈으로 안 가.”
“그럼?”
그럼 어디로 가는 건데?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7지구에 공작 전하 소유의 맨션이 있습니다.”
나는 몇 번 본 적도 없는 에반의 비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델라윈 공작의 비서. 에반이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델라윈 가문을 대신 관리하는 것이 저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공작 전하께서는 현재 꾸준한 치료가 필요한 상태인지라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백작께서도 함께하시지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고문 후유증 치료를 위해 예약해 두었던 병원까지 취소하고 내게 왔다고 했다. 뒤늦게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샤를마뉴와 붙어서 손잡고 좋다고 있었다니.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는데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고작 저것뿐이었다. 에반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그 얼굴이 본 적 없이 창백해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
전부 나 때문인데.
“미안해.”
“……뭐가?”
갑자기 튀어나온 사과에 두 눈을 꾹 감고 있던 에반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파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정말로 왜 미안해하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이라 더욱 미안해졌다.
“나 때문이잖아.”
“…….”
“나 때문에…… 안 당해도 될 일 당했잖아, 당신.”
나만 아니었더라면 제정부에서 그 모진 고문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나와 혈연지간이라는 이유로 붙잡혀 불법적인 고문을 받으면서도 내가 부탁한 대사제의 행방에 대해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는 에반이 너무 안타까웠다. 나만 아니었더라면…….
그때 에반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아버지는 널 어떻게 가르친 걸까.”
“……?”
“그냥 네가 구제불능의 멍청이인 건가?”
이건 또 무슨 폭언이람.
“그게 왜 너 때문인데.”
“음?”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야. 너 피해자라고. 가해자 아니고 피해자.”
“…….”
“내가 붙잡혀서 고문당한 건 너 때문이 아니라 널 모함한 시드니 카턴, 그 좆같은 새끼 때문이야. 알아들어?”
“……그.”
“답답하게 굴지 마!”
에반이 짜증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라파엘 드마뉴, 이 자존심이라곤 겨자씨만큼도 없는 새끼야.”
“…….”
“네가 그러고도 백작이냐? 가문에서 그따위로 가르쳤어? 너 죽이려고 했다는 말에도 허허실실 웃으면서 그러시냐고, 다 이해한다고 헛소리나 하고, 피해자인데 가해자인 척 죄책감 느끼라고 배웠냐고.”
“……아니.”
“근데 왜 그래.”
……그러게. 나는 왜 이럴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렀다.
“미안.”
“그놈의 미안하다는 소리 안 할 수는 없냐?”
“…….”
또다시 습관처럼 미안, 하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에반이 후…… 하고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내가 붙잡히고 고문당한 건 너 때문이 아니라 시드니 카턴 때문이고.”
“…….”
“나는 그 개 같은 새끼를 얌전히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고.”
“…….”
“고문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은 건 내 결정이었고.”
“…….”
“거기에 네가 미안해할 일은 전혀 없어. 알겠어?”
알겠어, 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꽉 막혔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에반이 잘했다는 듯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두어 번 도닥였다.
그 손길을 느끼며 생각했다. ……잃어버린 지 너무 오래되어 잊고 있었지만 이런 게 가족이었다고. 부모님을 잃은 후 무정하게 나를 떠나갔던 삼촌이라는 존재가 다시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차가 7지구로 들어갈 때였다. 무심히 창밖을 보고 있던 에반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응?”
“황태자랑 다시 만나기로 한 거냐?”
“아, 그게.”
내 시선이 앞에 앉은 비서에게로 향했다. 백미러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비서가 부드럽게 웃으며 칸막이를 올렸다.
그…… 참…… 고맙습니다, 예.
“……그게, 그렇게 됐어.”
“그 꼴로 당해놓고도. 손잡고 있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에반이 기가 차다는 듯 하, 하고 웃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 당신이 모르는 긴 얘기가 있는데, 그게 잘 풀려서…….”
“됐어.”
“에반.”
“네가 구제불능의 호구라는 건 잘 알겠으니까 더 말하지도 마.”
울컥해서 ‘내가 왜 호구……!’ 하고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어떤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꼴로 당해놓고도.
……그 꼴로 당해놓고도?
“……에반.”
“왜, 이 호구야.”
“당신이 말하는 ‘그 꼴’이라는 게 뭐야?”
그 순간 에반이 입을 딱 다물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었다. 바다를 품은 듯 파랗디파란 눈동자. 나는 그 눈을 멀거니 바라보며 물었다.
“나랑 황태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
“말해봐, 에반.”
에반은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뭔가 알고 있구나.”
“…….”
“……어디까지 알고 있어?”
내가 샤를마뉴와 감정을 나누는 관계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놀랍지 않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와 왜 헤어졌는지, 그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단 세 명밖에 없다.
나와 샤를마뉴, 그리고 시드니 카턴.
우리 셋의 공통점은,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번 생에서 샤를마뉴는 내게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볼 때 갑자기 이별을 통보한 것은 나였다. ‘그 꼴로 당해놓고도’라는 말은 차라리 샤를마뉴한테 어울릴 것이다.
그렇게 무자비한 이별 통보를 받고도 좋다고 내 곁에 있는 샤를마뉴가 차라리 호구에 가깝겠지. 그러니까…….
“……에반.”
“…….”
“에반.”
“…….”
에반은 끝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푸른 눈은 아직도 창밖을 향한 채였다.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날 좀 봐봐.
나, 당신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단 말이야.
“……리안.”
결국 나는 그 이름을 입에 담는다.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섞였다.
에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금발 밑으로 드러난 창백한 얼굴과 날카로운 푸른 눈이 난처함에 물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리안.”
“…….”
“리안.”
재촉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에반은.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듯.
붉어진 귓불을 감추지도 못하며.
“……왜.”
라고 대답했다.
300년 만의 해후였다.
* * *
그래, 이상하다 했어.
내가 돌아왔고, 델루니안이 돌아왔고, 루이 채스터턴도 돌아왔고, 심지어는 일리오니쉬 황후마저도 돌아왔다.
300년 전, 나와 깊게 관계되어 있던 인물들이 모두 돌아왔는데 리안만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절대 밝힐 생각 없었어.”
에반이 말했다. 죽어도 밝힐 생각 없었다고.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이 흘린 거 아니야?”
내가 푸하하 웃으며 말하자, 에반이 붉어진 얼굴로 씨근덕대며 대답했다.
“그건 네가 하도 멍청한 짓을 저지르니까 나도 모르게…….”
“말투가 거칠어졌네요, 리안 경.”
“……이래서 밝힐 생각이 없었다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그가 너무 웃겼다.
“그래서 그때 그렇게 말했구나.”
“뭐.”
“그날 공항에서. 내 죽음을 두 번이나 보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에서야 이해가 갔다.
그랬지. 당신은 내 죽음을 이미 한 번 봤지. 그래서 두 번이 된 거였어.
처음에는 내가 시간을 되돌린 것을 에반이 기억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렸다는 걸 기억하는 건 시드니 카턴, 그 불가사의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에반이 리안이었다. 리안이 에반이었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나를 믿어준 단 한 사람. 그저 반갑고 또 반가워서 계속 웃고만 있는데, 에반이 문득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 잘했다. 안 그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어.”
“응?”
“넌 내 말을 어디로 처먹은 거야.”
역시 이 말투는 영 적응이 안 된다. 이 말투를 쓰는 게 리안이라는 말이지…….
“내가 분명히 멍청한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했지.”
“……그랬지?”
“근데 황태자를 살리겠답시고 그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어가? 까딱해서 총이라도 맞았으면 어쩔 뻔했어!”
어…….
“하지만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
“뭐가 어쩔 수 없어! 내가 아까 말했지. 어떤 상황에도 네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다고!”
“……응.”
“절대로 네 목숨 가지고 도박하지 마. 알겠어? 또 그러면 진짜 가만 안 둬.”
으르렁대는 기세가 사나웠다. 얌전히 알겠다고 대답하자 에반의 사나운 기색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가슴 깊은 곳에 수그리고 있던 불만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샤를마뉴는…….
“샤를마뉴는, 그러니까 델루니안은 당신의…….”
내 입으로 말하려니까 가슴이 욱신 아파왔다. 300년 전의 일이고 지금은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문 나를 보며 에반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너 지금 무슨 거지 같은 상상을 하는 거야.”
“…….”
“델루니안이 나의 옛 연인이라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럼 아니야? 당신과 델루니안이 서로 사랑을 고백하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자 에반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착각하지 마.”
“…….”
“델루니안, 그 멍청이는 몰라도 나는 그 자식 사랑한 적 없었어.”
어?
“전부 너 때문이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문득 그의 파란 눈동자가 내게 와 닿았다. 깊고 파란, 씁쓸한 듯 다정한 푸른 눈동자였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매만졌다. 소중한 것을 만지듯 부드러운 손길.
“라파엘……. 루크.”
“…….”
“너를 지키는 건 내 피에 흐르는 숙명이었어.”
300년 전 여름행궁에서 리안이 했던 말이었다. 나는 멍하니 에반을 바라보았다.
내 피에 흐르는……. 문득 라윈의 고성에서 보았던 가문의 족보가 떠올랐다.
같은 가지에서 뻗어 나온 두 사람.
나와 리안.
“여름행궁에서 너와 델루니안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지.”
“……에반.”
“나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긴 네가, 또다시 나 때문에 델루니안에게 이용당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어.”
그날 델루니안과 내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리안을 사랑하시죠?’
‘제가 그와 닮았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제가 그의 대용품으로 이 궁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질투에 눈이 멀어 잊어버릴 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그가 당신을 마음 깊이 연모하고 있습니다.’
‘대용품은 이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다 들었구나.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들은 당신이.
‘나의 곁에, 영원히 머물러 주겠어?’
그렇게 창백한 낯으로.
‘감히…… 제가 그러고 싶나이다.’
그 말을.
“내가 억지로라도 그 마음을 받아주면 너는 자유로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지.”
에반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게 헛되이 고백한 델루니안은 정작 날 보면서 널 떠올렸고, 널 내보내 달라는 내 간청을 듣고도 계속 망설였어. 그러다가 결국 너는 그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했고…….”
“…….”
“나는 그때부터 그를 용서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그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너는, 내게 남은 단 하나의 혈육이었거든.”
“…….”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가졌을 델라윈의 후계. 나의 가련하고 안타까운…… 동생.”
“…….”
“그게 너였어, 라파엘.”
같은 가지에서 나온 초상화를 보았을 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확인 사살을 당하니 정말로 얼이 빠졌다. 머리가 멍하다.
그런 나를 보며 에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
“들어주겠어?”
다시 만난 세상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