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멀리서부터 회색빛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밝아오는 하늘 아래로 불투명한 검은 차량이 빠르게 빗길을 내달렸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수도였다. 황금빛 돔과 과거의 문명, 현대의 물질들이 합쳐진 제국 최고의 도시.
“건강은.”
그 도시를 생경하게 바라보던 노인이 옆에서 들려온 젊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신경 써주신 덕에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목숨이 이렇게 빠른 시간 동안 회복된 것은 제국 최고의 의료진이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덕이다.
그 덕에 노인은 제법 장시간 동안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고, 말하는 것에도 큰 힘이 들지 않았다.
“급하게 불러내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젊은 남자의 말에 노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같은 죄인에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
“이 한 목숨은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신께서 부덕한 종에게 속죄할 마지막 기회를 내려 주셨으니, 언제라도 기쁜 마음으로 그 길을 따를 겁니다.”
그러니 어떤 미안함도 느끼지 마시지요, 전하. 노인의 말에 남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노인의 말이 가히 틀린 것은 없었다. 그가 살아난 것은 정말로 신의 보호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또한 속죄할 필요가 있었으니.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노인이 꿈결처럼 속삭였다.
“모든 것을 다잡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 * *
8차 공판이 열리는 날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퍼부어대는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지난번 공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법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은 기자였는데, 사건의 핵심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인 만큼 뭐라도 하나 기사거리를 물어 가겠다는 의지가 결연했다.
오늘도 얌전하게 앉아 공판을 대기하고 있는 아인 퍼스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오늘 공판의 쟁점은 아인 퍼스와 렘퍼드 백작의 관련성이다. 아인 퍼스와 소냐 하워드가 서로 공조했음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렘퍼드 백작까지도 관련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모든 게 정황증거에 불과했다.
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증언하기 위해 불려 나온 사람이 나와 렘퍼드 부녀, 그리고 시드니 카턴이다.
“…….”
시드니 카턴과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번 공판에서는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간신히 웃어 보이던 시드니 카턴이 오늘은 마치 모든 것을 달관한 듯 담담했다.
도대체 무슨 계획을 갖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또다시 나를 모함하고 자신은 빠져나갈 증거라도 갖고 있는 건가. 불안감이 스멀스멀 발치로 밀려들었다.
“라파엘.”
“…….”
그때 시드니 카턴이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주의를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지난번 공판, 인상적이었습니다.”
“…….”
“오늘도 기대해 볼게요.”
마치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말에 기자들이 빠르게 펜을 놀렸다. 증인으로 출석한 두 용의자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더라는 기사가 오늘 오후면 나올 것이다.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빌어먹을 새끼.
심장이 불안으로 두방망이질 쳤다. 오늘도 기대하겠다고? 오늘 내가 뭘 준비했는지 알고 하는 말일까.
검사석으로 존 마이너와 지난번 공판에서 나를 추궁했던 검사, 그리고 그 외 다른 검사들이 들어섰다.
존 마이너와 눈이 마주쳤다. 근심 어린 시선이다.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며칠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꼭 그래야만 하냐고 묻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게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각하께 불리한 증거만 될 뿐입니다.’
‘압니다.’
‘이러면 각하의 불기소는 장담할 수 없어요.’
‘……그것도 압니다.’
‘각하.’
‘그래도 존재한다면 밝혀야지요.’
대사제가 죽어버린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밖에 없으니까.
8차 공판은 예정된 시각에 시작되었다. 공판은 지난번과 비슷한 흐름으로 흘러갔다.
“모르는 관계입니다.”
렘퍼드 백작을 아느냐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아인 퍼스는 늘 그래왔던 대로 모르는 관계라고 딱 잡아 부인했다.
아무리 많은 정황증거를 들이대도 모른다고 할 뿐이니 타들어가는 것은 검사의 마음이요,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었다.
피고인에 대한 신문이 끝나자 검사는 증인으로 시드니 카턴을 세웠다.
“증인은 제정부에서 피고인을 추적하는 임무를 담당하였지요?”
“그렇습니다.”
“검찰 조사에서 증인은 ‘그 과정에서 피고인 어머니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그에 관해서 자세한 증언 바랍니다.”
퍼스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시드니 카턴은 담담히 증언했다.
“피고인의 어머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법적인’ 어머니는 제국 서남단 폴랑 지역의 한 요양원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피고인이 황실 수석비서관 노엘 파커를 습격한 이후 바로 그녀의 신병을 확보했죠. 발견 당시 그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니 무슨 뜻인가요?”
“과거 그녀가 겪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퇴행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살던 지역, 남편의 이름과 외동딸의 이름밖에 기억하지 못했으니까요.”
그 말에 판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외동딸이요? 피고인은 남자 아닙니까?”
“예,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판사님.”
검사가 끼어들었다.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피고인은 분명한 남성입니다. 하지만 피고인의 법적 어머니는 자신에게 외동딸이 있었으며, 그 외동딸을 누군가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상태입니다.”
“…….”
“그리고 피고인과 같은 해에 태어난 피의자 소냐 하워드 렘퍼드는 그 어느 산부인과에서도 출생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그녀 부친의 당시 행적이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대한 정황을 나타낼 뿐이죠. 소냐 하워드 렘퍼드의 부친인 렘퍼드 백작은 당시 서른네 살의 젊은 나이로 정부 부처의 요직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당시로써는 규모가 작다 못해 눈에 띄지도 않던 수준인 입양기관을 국가지원 입양기관으로 지정했죠. 그 이후로 렘퍼드 백작은 공직에서 은퇴한 이후로 지난해 10월 피고인이 체포되기 전까지 입양기관에 대한 후원을 지속하였습니다.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아인 퍼스의 변호사가 격하게 반발했다.
“그건 전부 억측입니다! 명백한 증거가 없는 억지 주장을 삼가십시오!”
“과연 억측입니까, 변호인?”
검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봐주십시오.”
“……그게 뭡니까?”
“피고인의 진짜 어머니인 마리아 레브로비치의 산부인과 기록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마리아 레브로비치는 사내아이를 두 번 낳았습니다. 하지만 한 아이의 행적은 출생 직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죠. 그리고 피고인의 법적 어머니는 마리아 레브로비치의 고용인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레브로비치라는 이름에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아인 퍼스의 진짜 어머니가 레브로비치라고? 나 역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급했다. 아인 퍼스가 레브로비치의 후계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준비도 없이 밝혀서는 안 된다.
존 마이너가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잠시, 잠시만요. 지금 검찰 측에서 피고인이 레브로비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주장이 사실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판사의 물음에 흥분하여 제 주장을 이어가던 검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 아인 퍼스가 레브로비치의 후예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시간을 되돌리기 전, 내가 대사제에게서 받은 편지를 세상에 공개한 이후의 일이었다.
그 정도의 결정적인 증거가 없이는 아무리 정황증거가 많아도 그를 레브로비치와 엮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든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흥분하고 만 검사를 보니 마음이 절로 답답해졌다.
존 마이너를 바라보자 이미 나를 보고 있었던 건지 바로 시선이 부딪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존 마이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입니다.”
“……검찰 측에 증거가 있나 보군요.”
“증거와 증인이 모두 있습니다. 라파엘 드마뉴 백작을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시드니 카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어떻게 할지 두고 보겠다는 듯 처진 눈이 아래로 휘었다.
후…… 길게 심호흡하며 천천히 증인석으로 향했다. 느린 걸음과 반대로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증인이 증언하기에 앞서, 증거를 제출하는 바입니다.”
존 마이너가 판사에게 증거물을 넘겼다. 투명한 봉투 속에 담긴 무전기와 녹취록이었다. 판사가 설명을 요구하자 존 마이너는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증인이 송년 축제에서 목격하고 녹음한 것입니다. 증인은 이에 대해서 증언하길 바랍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날…… 저는 담화문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진 황태자 전하를 찾고 있었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찾아 한참을 걸었고, 그러다가 어느 외진 정원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녹취록에서 볼 수 있듯 대화 내용이 지극히 수상하여 나서는 대신 녹음을 하였고, 가능하면 신원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갑자기 무전기가 울려 엿듣고 있던 것이 발각되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당시에는 두 사람의 정체를 전혀 몰랐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한 사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녹취록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쪽…… 그 사람의 정체는 이미 목소리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였습니까?”
이미 다 알면서 부러 확인하는 존 마이너를 보며 나는 숨을 골랐다.
“……산티교의 대사제였습니다.”
방청석이 또다시 술렁였다. 종교계가 관련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빠르게 펜을 놀리는 기자들과 서로 소곤거리는 사람들을 보다가 렘퍼드 백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사람이 나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그가 보였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1심 재판정에서 내란이 아니라 혁명이라 말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미치광이들의 헛된 야망으로 소중한 사람을 두 번이나 잃었던 내 과거가 아직도 발치에 고여 출렁였다.
잊을 수 없다. 용서할 수도 없다. 내가 불리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들만큼은 지옥으로 보낼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자 판사가 되물었다.
“산티교 대사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제가 비서관직에 있을 때 업무상 두어 번 만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상 깊은 대화를 나누었기에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그래요. 그건 그렇다고 하는데…… 그럼 대사제와 대화를 나눈 상대방은 누구입니까?”
“그가 바로 렘퍼드 백작입니다. 증거물에 성문 분석 결과를 첨부했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존 마이너가 대답했다. 성문 분석 결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렘퍼드 백작이 맞았다.
렘퍼드 백작과 아인 퍼스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노려보았다.
아인 퍼스의 변호사가 ‘잠깐만요’라며 끼어들었다.
“이건 산티교 대사제와 렘퍼드 백작 사이의 대화일 뿐입니다! 녹취록에 등장한 아들이 피고인이라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핵심은 저거였다.
산티교 대사제와 렘퍼드 백작의 대화 사이에 등장한 사람이 아인 퍼스인가 아닌가, 그게 이 증언의 핵심. 그리고 나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비록 그게 나의 발목을 잡을지라도.
“증거가…… 있다면요?”
“뭐라고요?”
아인 퍼스의 변호사가 되묻는 것과 존 마이너가 또 다른 증거물을 재판장에게 넘기는 것은 동시였다. 존 마이너가 말했다.
“산티교 대사제가 증인 라파엘 드마뉴에게 남긴 편지입니다.”
“…….”
“쓰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맺음을 맺지는 못했지만, 편지에는 피고인과 렘퍼드 백작의 혈연관계가 명백히 나타나 있습니다. 필적 감정은 이미 완료된 상태입니다.”
저것이었다. 아인 퍼스와 렘퍼드 백작을 모두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증거물. 산티교 대사제가 나에게 보낸 편지.
비록 내가 시간을 되돌리며 사건의 인과가 달라짐에 따라 내용이 조금 변했지만 두 사람 간의 관계를 밝히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증거물이었다.
“백작의 가장 가까운 공모자였던 산티교 대사제가 직접 증인에게 보낸 편지인 만큼 그 신뢰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존 마이너의 말에 심란한 표정으로 증거물을 살펴보던 판사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대사제는 왜 이걸 증인에게 보냈습니까?”
“…….”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증인?”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지만, 내가 차마 준비할 수 없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이전의 편지라면 내가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뒷부분이 끊긴 편지에는 그저 아인 퍼스와 렘퍼드 백작의 관계까지만 설명되어 있었다.
대사제가 어째서 내게 편지를 보냈는가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다.
아인 퍼스의 변호사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진짜 공범이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증거물의 신뢰성을 떨어트려야 하는 아인 퍼스의 변호사의 말에 존 마이너는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라고 묻는 것 같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저걸 증거물로 제출하자는 의견을 냈을 때부터 이미 나 자신의 구명은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소까지는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 없이 살짝 고개를 숙일 때였다.
끼익, 하고 두터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판정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던 공기가 열린 문틈을 타고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그리고 빠져나간 공기만큼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건 저에게 물어보시지요.”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낯익은 목소리.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하나는 지금 이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고.
또 하나의 얼굴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평생을 그리워하게 될 줄 알았던.
샤를마뉴였다.
* * *
시간을 되돌리고 독방에 갇힌 후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내게 벌어진 일들은 과연 불가피한 일들이었는지. 전생의 궤적을 쫓는 내 삶이 도대체 언제까지 시련을 안배할 것인지. 이 일이 끝난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그 많은 생각 중에 샤를마뉴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이다. 사실 그에 대한 생각은 독방에서 한 생각 중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
어째서 나를 돕겠다고 했을까.
나를 보호하려고 구속 압력을 넣었다던 샤를마뉴의 진의는 무엇일까.
내가 자신을 살리려 했음을 믿는 걸까. 아니면 그저 옛 연인에 대한 마지막 인정인 걸까.
내가 떠올린 ‘옛 연인’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나를 찔러왔다.
시간을 되돌리고 그를 되살렸지만 그의 애정을 다시 받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별의 순간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더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
그때는 그의 말이 그저 야속하기만 했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그에게 너무 많은 모욕을 주었다. 어떻게 내가 다시 그 찬란한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그를 살린 것으로 만족하고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왜 그렇게 ‘옛 연인’이라는 말에 가슴이 아픈 건지.
내가 거부한 그의 애정이다. 전생에 사로잡혀 나를 사랑한 그를 내 손으로 내쳤다. 나는 그의 옛 연인이라는 타이틀도 가질 자격이 없었다. 그건 너무 뻔뻔하니까.
생각을 이어갈수록 기분은 바닥을 치다 못해 지옥 저변을 헤맸다.
이러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지금은 오직 내 일에만 집중하자고.
하지만 생각을 끊어내는 일은 마음을 끊어내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생각이란 본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지만 나는 생각을 할수록 점점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가는 실들이 한데 모여 엉킨 것처럼 내 생각은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었으며, 마음 또한 시작과 종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대한 미로 속에 갇혀 버린 듯 막막한 기분.
너는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되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결국 하나였다.
아무래도 좋으니, 그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언제라도 좋으니 그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아인 퍼스의 공판정에서 볼 줄은 몰랐지.
나는 갑자기 나타난 샤를마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
“…….”
정말…… 살아 있구나.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그를 보자 이상하게도 그의 영결식이 떠올랐다.
희고 검은 베일로 치장되어 있던 황금 돔. 금방이라도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올 것 같았던 그.
하지만 그는 없고 대신에 들어온 것은 그의 희고 흰 관이었다.
심하게 훼손된 시체를 공개할 수 없어 프로필 사진으로 대신했던 그의 관 위는 흰 꽃들로 덮였지. 꽃 냄새를 맡은 나비들이 이른 잠에서 깨어 황금 돔 안으로 날아들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아직 떠나지 못한 그의 영혼 같았더랬다.
하지만 그날들은 흘러간 과거이자 오지 않은 미래가 되었다.
샤를마뉴는 살아 있다. 그것도 내 눈앞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 큰 사내가 꼴사납게 눈물을 보일까 두려워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렘퍼드 백작과 시드니 카턴의 얼굴이 걸렸다. 렘퍼드 백작은 유령이라도 본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사제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시드니 카턴은.
“……?”
……왜 저런 얼굴이지?
시선에 힘이 있다면 샤를마뉴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시드니 카턴이 샤를마뉴를 찢어 죽일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시드니 카턴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봤다. 그 강렬한 적의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도대체 왜?
그때 공판정 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에 벌 떼처럼 몰려든 기자들과 그들을 막기 위한 경호관들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방청권을 얻지 못하고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그 틈을 노려 안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사진을 찍어댔기 때문이다.
결국 공판은 현장에서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기자들을 비롯한 방청객이 모두 바깥으로 쫓겨났다.
남은 것은 오직 공판에 관련된 사람들과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황태자 일행뿐이었다.
“…….”
“…….”
공판정 내로 삭막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판사는 할 말은 있으나 무엇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황태자와 대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입구 쪽에 묵묵히 서 있던 황태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제 공판을 재개하죠.”
“아…… 그…….”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그저 이 사람의 보호자로 동석한 것뿐이니.”
그가 말한 이 사람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대사제였다.
대사제가 샤를마뉴에게 예를 표한 뒤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공판 중 무례를 저질러 미안합니다.”
“…….”
“하지만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인인 제가 불참할 수 없다 생각하여 이리 급한 걸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기를 바랍니다.”
판사의 시선이 다시금 샤를마뉴에게로 향했다.
“그…….”
마침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판사가 대답했다.
“이런 경우 증인 신청을 사전에 완료해야 하지만, 참고인의 기록물이 증거물로 제출된 맥락을 고려하여…… 증인으로 채택하겠습니다.”
아인 퍼스의 변호사가 강하게 반박했다.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며 절차에 따라 진행하기를 강력히 요구하는 아인 퍼스의 변호사를 보며 존 마이너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증인은 이 사건의 핵심 인물입니다. 하지만 버젓이 살아 있는 증인의 거짓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 상황에,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살아 있는 증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정에서의 절차는 모두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변호인은 수단과 목적을 헷갈리지 마세요.”
어떻게든 대사제를 증인으로 세우겠다는 존 마이너의 의지가 엿보이는 말에 아인 퍼스의 변호사가 다시금 욱하여 대거리하려고 했으나 판사가 봉을 탕탕 두드리며 말을 끊었다.
“그만들 하세요! 변호 측의 주장도 일리는 있습니다. 물론 적법한 절차가 중요하지요. 하지만 검찰 측의 주장대로 증인의 진술이 한시가 급한 상황인 점을 감안하여 그를 증인으로 채택하겠다는 겁니다. 법률적 절차에만 얽매여 들을 수 있는 증언을 놓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러니 검찰 측에서는 이 시간 이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증인 신청을 해주길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검찰 측에서는 증인 신문을 하세요.”
판사마저 검찰 측의 손을 들어주는데 계속 이의 제기를 할 변호사는 없었다.
아인 퍼스의 변호사가 이를 갈며 자리로 돌아가자 존 마이너가 앞으로 나왔다.
대사제가 증언석에 섰다. 그가 증인 확인 절차를 갖는 동안 나는 눈으로 샤를마뉴를 좇았다. 샤를마뉴는 대사제와 멀지 않은 방청석에 앉아 묵묵히 앞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끼고 있을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증인은 드마뉴 백작에게 보낸 편지를 직접 썼습니까?”
“그렇습니다.”
“편지에 있는 내용은 전부 사실입니까?”
“전부 사실입니다.”
“편지에는 증인과 렘퍼드 백작과의 관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군요. 그 부분에 대한 자세한 증언을 요청합니다.”
대사제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와 처음 알게 된 것은 16년 전의 일입니다. 마리아 레브로비치…… 그녀가 소개해 주었지요. 그 당시 마리아 레브로비치는 한 어린아이와 함께 젊은 청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는 그가 아이의 아버지라고 했지요. 그 청년은 지금 저기 앉아 있는 렘퍼드 백작이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렘퍼드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판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용히 하세요! 증인의 발언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건 모두 모함입니다!”
“모함인지 아닌지는 재판부에서 판단합니다. 증인은 증언을 계속하세요.”
대사제는 차분한 눈으로 렘퍼드 백작을 돌아보았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당시 저는 젊었고, 사제로서의 도덕보다 소수민족이라는 정체성에 갇혀 있었던지라, 마리아 레브로비치의 계획을 모두 들으면서도 그녀를 말리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 레브로비치의 계획이라면?”
“…….”
그 순간 대사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주먹을 꾹 움켜쥐며 일부러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테러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
“모두들 알고 계신 그 사건이지요. 15년 전 발생한 끔찍한 테러.”
드넓은 바다 위에서 추락하여 형체조차 찾을 수 없이 사라진 256명. 고국 땅도 밟아보지 못한 채 죽어간 그들. 그리고 그 테러를 계획한 레브로비치.
심장이 뜨거워졌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들을 때마다 분노가 들끓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제게 아이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호적에 올릴 수 없어 따로 키우고 있지만 대업을 이룰 아이니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잘 돌봐달라고 했지요.”
“그 아이가 피고인이라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인 퍼스가 파란 눈을 번뜩이며 대사제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 줄기를 물어뜯을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대사제는 자신을 노려보는 아인 퍼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를 보는 할아버지 같았다.
존 마이너의 신문은 계속되었다.
대사제는 느린 목소리로, 그렇지만 끊임없이 신문에 응했다.
그의 증언은 편지에 적힌 내용과 동일했고, 렘퍼드 백작과 아인 퍼스가 어떤 경로로 자금을 주고받았는지에 관해서는 편지에 없는 부분까지도 증언하였다.
“기부금이란 말이죠.”
시드니 카턴이 입양기관에 대한 자료를 파기했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입양기관이 자금처였다.
렘퍼드 백작은 자신이 지정한 입양기관에 기부 형식으로 자금을 제공하고, 입양기관은 기부금의 일부를 갖고 나머지를 산티교에 종교기부금 명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산티교에서는 그 자금을 아인 퍼스에게 전달했다.
단순하지만 기부금은 추적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나름 철저한 방식이었다.
대사제에 대한 신문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슬쩍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아인 퍼스의 변호사는 이미 끝났다는 듯 허탈한 얼굴로 자신이 준비해 온 변호 자료만 살피고 있었고, 렘퍼드 백작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고 있었으며, 소냐 하워드는 배터리가 다 닳은 인형처럼 공허한 표정으로 앞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아인 퍼스는 기묘한 표정으로 대사제를 바라보고 있었고 시드니 카턴은 무언가 초조한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 바빴다.
뭐가 저렇게 초조한 거지. 아까부터 영 이상한 그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럼 마지막 질문 드리겠습니다.”
“예.”
“이 편지를 라파엘 드마뉴 백작에게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때 갑자기 내 이름이 들렸다. 존 마이너와 대사제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대사제가 아인 퍼스를 볼 때와는 조금 다른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라파엘 드마뉴 백작은 진실을 알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대답이었다. 뜬금없는 대답에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덧붙였다.
“물론 그는 저와 렘퍼드 백작이 대화하던 것을 목격했지요. 제정부에 투서를 보내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테러를 막지 못했을 경우, 그가 가진 증거와 함께 이 편지를 증거로 삼아 잘못된 것을 다잡아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습니다.”
그래. 이게 원래 목적 아니었나. 내가 알고 있는 건 분명 이러한 이유였는데.
“하지만 그것보다도…….”
“…….”
“그는 제가 젊은 시절 저지른 과오의 피해자로서 모든 진실을 알 자격이 있었습니다.”
아.
……아아.
그런 거였나.
당신은 그래서 내게 편지를 보낸 거였나.
15년 전의 그 테러는 분명 막을 수 있는 테러였다. 막을 수 있었던 참사였다. 싸늘한 바다 밑에서 죽어간 256명의 피해자는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모두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계획을 알고 있던 몇 사람 중 단 한 명이라도 입을 열었다면. 누구라도 그 사실을 외부에 알렸더라면. 나의 부모님은 어린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
억눌린 숨이 목구멍에서 터지듯 흘러나왔다.
부모님을 잃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동정하는 시선도 폭력이라 느껴질 만큼 예민하게 지쳐 있던 사춘기.
슬픔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던 내게 외조부는 많은 신경을 기울였지만 그조차도 딸을 가슴에 묻은 노인이었다.
나까지 힘들다는 티를 내면 안 그래도 지친 그가 무너질까 봐 울음을 삼키길 몇 년.
외조부는 내가 성인이 되던 해에 망자의 강을 건넜고, 나는 진정 혼자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누구도 진심으로 가슴에 담을 수 없었고, 누구도 의지할 수 없었다. 소중한 것을 잃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기에.
진실을 밝힌 대사제를 원망해서는 안 되는 걸까. 성숙한 인격을 가진 어른이라면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줬으니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15년이나 지난 사건의 진실을 이제야 밝히는 대사제를 그저 좋은 마음으로 지켜볼 수가 없었다.
눈가가 뜨끈해져 한 손으로 눈두덩이를 짚었다.
울지 마. 여기서 울면 안 돼. 참아. 우는 건 모든 게 끝난 이후에라도 괜찮아. 아무도 없을 때. 그러니까 혼자 남았을 때…….
공판정 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이 꽂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눈을 가린 손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존 마이너가 숙연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라도 하듯 말했다.
“이상입니다.”
그때였다.
“제가 투서를 보내고도 어째서 따로 편지까지 썼는지는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신문을 끝내고 돌아서려는 존 마이너를 대사제가 붙잡았다. 존 마이너가 조금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테러를 막으려 투서까지 보냈습니다. 그런 제가 왜 편지까지 따로 작성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은 겁니까.”
그 순간 공판정 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대사제가 조금 전과 달리 날카로운 표정으로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대사제의 시선이 머무르는 지점에는 단 한 사람이 있다.
“…….”
일그러진 얼굴로 대사제를 바라보는 시드니 카턴.
문득, 그날 공항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대사제, 맞지.’
대답 없이 나를 노려보던.
‘그는 지금 어디 있어?’
‘…….’
‘말해. 묻잖아. 대사제는 지금 어디 있냐고.’
끝까지 대답하지 않은 시드니 카턴.
“투서를 보낸 것이 테러가 있기 나흘 전이었으나 제정부에서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요. 누군가 나를 찾아올 것을 대비하여 모든 증거서류를 준비해 놓고 있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마침내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게 테러 시도가 있기 하루 전날.”
“…….”
“그 밤, 누군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당신이었구나.
렘퍼드가 아니라…… 당신이 대사제를 죽이려 한 거였어.
“나를 찾아온 사람이 렘퍼드 백작의 사람일지도 몰라 편지와 서류를 한데 숨겨두었지요.”
“……그리고요?”
“그게 끝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끌고 나갔고, 그게 끝이었어요.”
담담한 대사제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저 감각을 잘 알고 있다. 갑작스러운 암전. 강한 힘에 온몸이 끌려가는 그 소름 끼치는 감각.
“그때 본 것은 없습니까?”
존 마이너의 물음에 대사제가 차게 웃었다. 그 짧은 시간 생사를 오간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어린 한기가 낯설었다.
“목덜미에 난 커다란 흉터를 보았습니다.”
“…….”
“……오늘 여기서 또다시 그 흉터를 가진 사람을 마주하는군요.”
공판정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대사제를 살해한 범인이라 내가 굳게 믿고 있었던 렘퍼드 백작이 숨을 들이켰다.
아인 퍼스의 푸른 눈에 이채가 서렸다. 소냐 하워드는 여전히 공허한 눈빛이었으며, 샤를마뉴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무감한 얼굴로 눈만 감았다.
그리고 그는.
목덜미에 커다란 흉터를 가진 시드니 카턴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그러진 얼굴로 대사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시드니 카턴의 민낯이었다.
그린 듯 완벽했던 가면이 벗겨진 그의 민낯은, 상상 이상으로 추했다.
종장
8차 공판이 끝나고 시드니 카턴은 살해 미수 혐의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그에 대한 기사를 마구 써 날랐기 때문에 제정부는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제정부와 렘퍼드 백작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탓이다.
렘퍼드와 무관함을 알리기 위해서 시드니 카턴과의 연결 고리를 모두 잘라낼 필요가 있었던 제정부는 그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검찰에 무조건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대사제의 증언은 대부분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물의 존재로 인하여 법정에서 채택되었고, 아인 퍼스와 렘퍼드 백작의 관계성 또한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렘퍼드 백작의 사생아이자 15년 전 사라진 줄 알았던 레브로비치의 마지막 후계라는 것이 밝혀진 아인 퍼스에게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중간에 낀 산티교는 교단이 파괴될 정도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으며, 그를 따르던 수많은 소수민족은 그들을 타깃으로 한 범죄 행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몸을 수그리고 다니기에 바빴다.
그건 그들의 사정이고, 그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독방을 나서는 길. 그동안 나를 살폈던 교도관과 인사를 했다.
그가 감회 어린 얼굴로 내게 말했다.
“각하께서 무혐의라니.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요.”
정말로? 장난 어린 눈길로 그를 의심하듯 바라보자 그가 정말이라며 웃었다.
뭐, 정말로 믿었든 이제 와서 하는 아첨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깨를 으쓱하며 복도를 걷자 그가 앞서 걸으며 말을 이었다.
“1층에 각하를 마중 나온 차가 대기 중입니다.”
“마중이요?”
에반인가?
나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나를 마중 나올 법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무리 뒤져도 에반 말고는 없다.
내 인간관계가 이다지도 협소했던가.
자조적으로 생각했지만 실제로 협소하긴 했다. 사교계라는 곳에는 애초에 발을 내디딘 적도 없고,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현재 전부 외국에 나가 있는 상태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델라윈 공작가로 들어가 생활하며 백작가에 소속되어 있던 고용인도 전부 정리했으니 나를 마중 나올 가문 휘하의 사람들도 없었다.
가족이라고 할 사람도 그나마 에반밖에 없으니 마중 나왔다는 사람도 에반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1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
익숙한 엠블럼이 눈에 박혔다.
“저 차…… 맞습니까?”
“예.”
교도관이 밝게 웃으며 속삭였다.
“황실에서 엄한 사람 잡아서 미안하긴 했나 봐요. 의전용 차량까지 보내다니 말이에요.”
나는 대답 없이 천천히 대기 중인 차로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손발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다섯 보를 남겨두고 조수석이 열렸다. 낯익은 얼굴의 비서관이 내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에…… 뭐였던 것 같은데.
아인 퍼스와 함께 입사한 신입 비서관인데 내 직속이 아니었던지라 이름 하나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동안 하도 많은 일이 있었어야지.
아무튼 그 신입 비서관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각하.”
“……누가 보낸 겁니까?”
“높으신 분의 요청입니다. 일단 가시지요.”
‘명령’이 아니라 ‘요청’이랬다. 게다가 높으신 분이라고.
나도 한때 비서실에 몸담았던 사람인지라 무슨 의미인지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황후가 어째서 나를?
황실 비서실에서 일하면서도 몇 번 제대로 마주한 적도 없는 황후가 갑자기 나를 부른다는 것이 영 의아했다.
다른 때도 아니고 내가 출소한 날에 바로? 도대체 왜?
차라리 황태자가 나를 부른다고 하면 이해가 될 지경이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알현은 해야겠지.
찝찝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신입 비서관이 직접 차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안에 정복이 있습니다. 예를 갖추기 위함이니 부디 환복하여 주십시오.”
아, 그렇지. 나는 더 이상 비서관이 아니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았다.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황궁에 출입할 때 정복을 갖추어야 했다.
물론 굳이 황실 일가를 알현할 것이 아니라면 정복을 입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으나, 이번처럼 황후를 알현하러 갈 때는 반드시 정복을 입어야 한다.
그게 황궁의 예절이자 규칙이었다.
하지만 역시 정복이란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황태자의 정복이라면 수십 번도 넘게 살폈지만 나 스스로 정복을 입은 적은 전무하여 옷을 마무리하는 손끝이 서툴렀다.
이건 어떻게 매듭짓는 거였더라. 헷갈린다…….
서툰 손으로 간신히 갖추어 입으니 황궁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황후의 요청으로 도착한 터라 방문자 기록을 남길 필요도 없었다. 곧장 황후가 거처하는 제2궁으로 향했다.
응접실 문 바깥에서 대기하자 시종이 나의 도착을 알렸고, 들어오라는 허락에 두 개의 문을 지나 황후가 앉아 있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와요, 드마뉴 백작. 이리 와서 앉아요.”
샤를마뉴의 어머니, 제국의 황후는 반갑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 고운 음성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탁 풀렸다.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하며 권한 대로 맞은편에 앉자 그녀가 손을 뻗어 직접 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바로 오느라 수고 많이 했어요. 많이 피곤하지요?”
“아닙니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예전에 봤을 때는 훨씬 보기 좋았는데.”
그 말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나를 기억한단 말인가. 어떻게? 아무리 황태자의 전담 비서관이었다고는 하나 실제로 황후와 마주한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놀란 기색을 읽기라도 한 건지, 황후가 곱게 웃으며 말했다.
“의외인가요? 내가 백작을 기억하고 있어서?”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아이 참!”
그녀가 명랑하게 웃으며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백작을 잊겠어요? 내 아들이 그렇게나 열렬히 바라보는 사람이었는데.”
“……예?”
뭐라고?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내게 폭탄을 던진 그녀가 호호 웃었다.
“몰랐을 것 같나요? 두 사람 관계?”
“…….”
“너무 놀라지 말아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을 거야. 폐하 빼고요. 아, 아니지. 이제는 폐하도 알고 계시겠네.”
폐하도 알고 계신다고? 맙소사. 머리가 아득해졌다. 뭘 알고 계신다는 거야. 두 사람의 관계라니. 나와 그의 관계…….
나와 그의 관계?
“황후 전하.”
“말해봐요.”
“……어떤 오해를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황태자 전하와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뭐라고요?”
한때는 그랬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럴 리가? 숨기지 않아도 좋아요, 백작. 솔직하게 말해줘요. 정말 아니라고요?”
“……그렇습니다.”
“어째서?”
나의 단호한 대답에 황후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기울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후, 철저한 관리로 인해 30대라 해도 믿을 만큼 고운 황후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그 아이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굴었지……?”
“…….”
“이상하잖아요. 백작이 그 아이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 아이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그랬을 리가 없는데.”
황후의 말에 당황한 건 나였다.
무릎을 꿇었다고? 샤를마뉴가? 도대체 왜?
그가 무릎을 꿇을 일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 절대 없지. 있어서도 안 되고.
황태자는 제국의 자존심이다. 그가 무릎을 꿇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황태자는 무릎에 철심을 박아놓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굴어야 했다.
비록 그가 황태자답지 않게 소탈한 면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자신의 자존심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황후 전하, 조금 전 말씀은…….”
내 경악한 얼굴을 보며 황후가 몰랐냐는 듯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백작이 불기소처분을 받을 수 있었던 증거들, 그게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아.
“수석 비서관…… 그러니까 비서실장은 전적으로 황제 폐하의 지시만을 따르게 되어 있지요. 백작도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예.”
“우리는 사실, 백작을 도울 생각이 없었어요.”
널 도와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황후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백작이 무고하든 아니든 우리는 감히 황실을 공격한 사람을 잡아내어 처단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이해하죠?”
“…….”
이해하느냐고? 글쎄. 나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황실에서 종사했던 비서관 라파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무례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흙덩어리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은 것 같았다.
황후는 나의 무례한 태도에도 크게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
“증거도 당연히 내줄 생각이 없었죠. 잘못하면 황실이 덮어쓰게 생긴 상황인데 감히 어떻게 그러겠어요. 그런데.”
“…….”
“그 아이가 무릎을 꿇으면서 그러더라고요. 단 한 번만 도와달라고.”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어릴 때 말고는 한 번도 부탁이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아이가 울면서 무릎을 꿇는데…… 속은 터지지만 부모가 되어서 어떻게 안 들어주겠어요. 게다가 영영 잃을 뻔했던 아이인데. 그런데…….”
황후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그게 전부 그 아이의 일방적인 감정이라면, 나는 좀 많이 실망할 것 같네요.”
“…….”
“백작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어미 입장인 나는 그래요. 내 아이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수모를 겪나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차라리 잘되었지, 싶기도 하고. 사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황후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앞에 존재하지 않는 그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그랬어? 도대체 왜…….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날 도우려 했던 거야? 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사실 터질 것 같은 것은 심장이었다.
심장이 울렸다.
쿵. 쿵. 쿵. 쿵.
눈가가 뜨거워졌다. 열이 올랐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패일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쥐며 열기를 참아냈다.
“오늘 백작을 부른 건, 내 아이와의 관계를 물으려 함이었어요.”
“…….”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정이 있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어요. 감정이란 게 그렇잖아요. 말린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리면 더욱 불타오르죠. 특히 젊을수록 더욱 그렇고요.”
“…….”
“그런데 그런 고민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었나 보군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황후가 조용히 말을 끝맺었다.
“이만 돌아가도 좋아요, 드마뉴 백작.”
돌아가라니. 어디로?
나는 황망히 황후를 바라보았다.
식은 찻물처럼 냉정하게 가라앉은 황후의 얼굴이 내게 선고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몸을 돌려 나간다면 황태자와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아인 퍼스의 8차 공판정에서 만났던 샤를마뉴를 떠올렸다.
시드니 카턴의 살인미수 혐의가 드러나며 파탄이 나듯 끝났던 8차 공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던 샤를마뉴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
‘…….’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고, 마주친 것은 그저 시선뿐이었다.
그러나 나를 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마치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그 수많은 골이 없어진 것처럼 다정하고 따뜻해서.
나는 차마 왜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냐고 묻지도 못하고 공판 내내 참아내었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고?
아니, 그럴 수 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황후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
모든 것이 나의 오만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그를 되살리고,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가 살아 있으면 되었다고 여겼던 나의 모든 마음이 오만이자 오판이었다.
만나지 못할 거라면 의미가 없어.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시간을 되돌리며 내가 바란 것이 무엇이었던가.
함께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서로 각자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나? 정녕 그것을 바랐던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어. 내가 바란 것은.
“……저는.”
그저.
“전하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그저 비서관이 아니라 감정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로요.”
나눌 수 있기를.
* * *
황후궁을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황궁 곳곳에 위치한 정원에 봄이 찾아들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꽃망울이 하나둘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생경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는 잊고 있었던 봄을 만끽했다.
다시 돌아온 봄. 지난번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세상.
나는 복도 안쪽으로까지 가지를 뻗은 꽃나무를 만지기 위해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슬아슬하게 손끝이 닿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하면 닿을 것 같은데…….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위험해.”
“…….”
가지를 만지려던 손이 그대로 멈추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 그가 서 있었다. 신입 비서관을 옆에 세워두고.
“…….”
“…….”
그와 눈이 마주쳤다. 봄의 적막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 흔한 환대의 인사도, 잘 지냈냐는 안부의 말도 전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우리를 신입 비서관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불편해질 때 즈음, 샤를마뉴가 살짝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무언가 지시하자 그가 묵례한 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막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꽃들이 풍기는 꽃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멀뚱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 둘 중 먼저 정적을 깨뜨린 것은 샤를마뉴였다.
“……몸은 좀 어때?”
저 사람의 목소리가 저렇게 낮았던가.
“……괜찮습니다.”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해 놓고 혀를 찼다. 전하는 어떻습니까, 하고 뻔뻔하게 물을 수 없는 나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대화는 어색하게 끊겼다.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도 많았는데 어째서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겠는지 모르겠다. 황후궁에서 쏟아내고 나온 진심이 명치끝에서 살랑거렸다.
“……그래.”
한참 후, 샤를마뉴가 대답했다. 그래. 그게 끝이었다.
“그럼…… 잘 가.”
작별의 말을 꺼낸 샤를마뉴가 먼저 몸을 돌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인사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전하.”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그가 움찔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
“…….”
불러놓고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입을 다물자 샤를마뉴가 말했다.
“할 말 없으면.”
“할 말 있습니다.”
“…….”
마침내 그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가 묵묵한 시선으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숨기며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가슴속에 뭉쳐두었던 질문을 꺼내었다.
“어째서.”
“…….”
“저를…… 도와주신 겁니까?”
“…….”
“도와주실 필요 없었잖아요.”
황후의 말마따나 내가 유죄인가 무죄인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황태자라는 귀중한 자산을 잃지 않은 한, 황실에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잡아들이는 게 이득이었다. 그래야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째서 그는 나를 도왔을까. 잘못하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내 물음에 한참 동안 침묵하던 샤를마뉴가 대답했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
“내가 해야 할 일.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
……그게 무슨 뜻이지?
이해하지 못한 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샤를마뉴가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야.”
“…….”
“내 개인적인 문제였으니까, 당신은 몰라도 돼.”
다른 건 알아듣지 못해도 이것만큼은 명확하게 알아들었다. 순간 감정이 울컥 치받았다.
“전하의 개인적인 일이니 몰라도 된다고요?”
“응.”
“증거 하나 얻겠다고 무릎까지 꿇은 분이 할 말은 아닐 텐데요.”
그 말에 샤를마뉴가 허를 찔린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왜!”
“…….”
“왜 계속 그렇게 숨기기만 합니까. 왜!”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샤를마뉴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출소를 이틀 앞두고 제정부에서 마리아 카밀라가 나를 찾아왔던 것이 떠올랐다.
‘에반은 오늘 제정부에서 풀려났어요.’
‘꽤 오래 끌었죠. 당신이 체포되던 날 그가 어디에 갔는지를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마리아 카밀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하나 빼고요.’
에반은 오직 마리아 카밀라에게만 자신이 그날 어디에 갔는지를 알렸다고 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대사제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간신히 살려낸 대사제가 언제 또 위험에 처할지 모르니 그를 보호해 달라고.
마리아 카밀라는 오랫동안 지켜봐 온 동료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대사제를 찾아 나섰고, 그의 신병을 확보한 후 에반에게 후처리를 물었더니 그가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황태자를 언급했다고 한다. 황태자라면 그를 보호해 줄 거라고.
‘미친놈인 줄 알았어요.’
마리아 카밀라는 에반이 미친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피해자에게 용의자가 부탁한 사람을 보호해 달라고 하다니 제정신이고서야 할 수 없는 부탁이긴 했다.
하지만 하도 단호한 에반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황태자를 찾아가자, 황태자는 의외로 흔쾌히 대사제의 안전을 약속했다고 했다.
마리아 카밀라 본인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행동.
나 역시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하나 살리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으면서.”
“…….”
“왜…… 계속 아닌 척하는데요.”
그는 계속 숨기려고 한다는 것.
내가 내뱉은 마지막 말은 바닥으로 처박히듯 가라앉았다. 폭발하듯 터져 나온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일렁였다. 감정을 억누르고자 습관처럼 주먹을 꾹 쥐자 주먹 자체가 부르르 떨렸다.
그런 나를 묵묵히 바라보던 샤를마뉴가 대답했다.
“……쓸데없는 희망은 갖고 싶지 않아.”
“…….”
뭐라는 거야.
“당신을 도왔다고 영웅 심리를 느끼고 싶지도 않고.”
“…….”
“그래서도 안 돼. 이건 내 속죄의 일부니까.”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 말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아까부터 자꾸 튀어나오는 속죄라는 단어가 계속 거슬렸다.
도대체 뭘 속죄하겠다는 건데. 무슨 죄를 지었기에 속죄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설마.
샤를마뉴가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라파엘.”
“…….”
“그냥 잊어줘.”
뭘 잊으라는 거야.
“당신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내가 살아 있어서 다행?
“정말로…… 보고 싶었거든.”
“…….”
“살아서 숨 쉬고 웃고 떠드는 당신의 모습이 눈에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어.”
샤를마뉴의 연녹색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한 줄기 눈물이 그의 볼을 가로질러 똑, 떨어졌다.
그 눈물 한 방울에 나는 깨닫고야 말았다.
“……델루니안?”
샤를마뉴는 대답 없이 웃었다. 폭포수처럼 흘러나온 눈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폐병쟁이의 기침처럼 하, 하…… 잔웃음을 내뱉었다.
진짜였어.
진짜 델루니안이었어.
그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확 치고 올라왔다. 억누를 새도 없이 눈가가 붉어졌다. 하지 않겠다던 원망이 가슴속에서 다시 치솟았다.
“어떻게…… 왜…….”
“…….”
“왜 그랬어. 왜…… 나한테 왜…….”
꾹꾹 눌러왔던 300년의 원망이 터져 나오는 순간. 나는 꼴사납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 왜!”
“……미안해.”
“내가 얼마나, 얼마나 아팠는데. 얼마나 괴로웠는데…….”
“내가 잘못했어. 모든 게 내 죄야.”
“왜 그랬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원망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년 만에 만나는 진짜 델루니안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루크가 되었다.
영원히 잠재우려고 했던 루크는 망령처럼 내 주변을 배회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앞이 하얗고 검게 점멸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자 그가 황급히 내 쪽으로 뛰어왔다.
“괜찮아?”
다정한 척 묻는 그의 손을 쳐내며 나는 어린애처럼 눈물을 토해냈다.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랬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는데.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단 한 번도 내 말을 듣지 않았어. 어떻게 사람이 그래. 그러면 안 됐잖아. 정말 그럴 수 없었잖아…….”
응어리를 토해내듯 울부짖자 그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어리석음이 두 눈을 가려서…… 가장 소중한 것을 스스로 내치고도 몰랐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나를, ……나를 용서하지 마.”
용서하지 말라고?
“아아…… 아…….”
“미안해. 미안해, 라파엘.”
그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모든 게 내 죄야. 나를 용서하지 마.”
그 목소리에 심장이 쥐어 짜이듯 아파왔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거야. 300년 전의 일이잖아. 잊겠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원망스럽고 고통스러운 건데.
꽉 막힌 듯한 심장이 증오스러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자 샤를마뉴가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아 말리며 속삭였다.
“차라리 나를 때려.”
“……흐, 으…….”
“아프잖아…….”
그 목소리에 다시금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다정한 목소리가 증오스러웠다.
“울지 마.”
그가 손가락으로 내 얼굴에 흐른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모든 게 어리석은 나의 죄이니 내가 갚을게. 당신은 그저 모든 걸 잊고…… 행복해지면 돼.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없는 곳에서?
그 말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번진 시야에 그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그가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네가 없는 곳에서 행복하라고?
우는 것도 잊고 그저 얼굴만 바라보자 샤를마뉴가 내게서 떨어졌다. 그가 몸을 일으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마치 당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듯.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그는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두어 발자국이었던 거리가 네 발자국으로 멀어졌고, 종내에는 열 걸음으로도 모자라게 멀어졌다.
“이런 말도 염치가 없지만…….”
문득 샤를마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간신히 웃으며 말했다.
“……사랑했어, 많이.”
그게 끝이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도망치려는 듯 등을 돌렸고.
나는 눈물로 번진 시야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사랑했어, 많이.
……사랑했다고. 나를. 과거에?
그럼 지금은?
“가지 마.”
충동적으로 입을 떼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가지 말라고.”
샤를마뉴가 걸음을 멈추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랑했다, 나 없이 행복해라 하면 끝이야? 그게 전부 없었던 일이 되는 거야?”
“…….”
“왜 그렇게 당신은 끝까지 이기적이야.”
“…….”
“날 사랑하고 정말로 그때 일을 반성한다면, 내가 뭘 바라는지는 들어봐야 할 거 아냐!”
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온몸이 떨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라파엘.”
“내가 뭘 원하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고 마음대로 속죄를 해.”
용서는 나의 몫인데. 왜 당신 마음대로 용서의 방식을 정하냐고.
나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계속 등을 돌리고 있던 샤를마뉴가 조용히 되물었다.
“……당신은 뭘 원해?”
“…….”
“당신이 원하는 대로 따를게. 죽으라면 죽고, 제국을 무너뜨리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뭐든지 할 수 있어.”
그 먹먹한 대답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샘이 제멋대로 고장 난 것 같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가 아팠다.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
“…….”
“그때 일을 차마 잊을 수 없어. 너무 아팠고, 괴로웠고, 힘들었으니까. 아직도 당신이 미워. 증오스러워.”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알아.”
그 체념 어린 목소리가 두려웠다. 그래. 이건 두려움이었다.
그가 나를 완전히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뭐?”
그 순간 샤를마뉴가 몸을 돌렸다. 반쯤 돌린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울면서 웃었다.
“내 옆에서, 내 시야 안에서 나와 함께하면서…… 그렇게 있었으면 좋겠어.”
“……라파엘, 그 말…….”
“알아. 미친 것 같겠지. 나도 알아.”
내가 미친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 뜨거운 열기와 가슴을 휘젓는 분노와 지독한 슬픔 속에서 아예 정신을 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나도 당신 못지않게 당신이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빌었으니까.”
당신이 죽은 후 따라서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당신에게 미쳐 있었으니까.
“나는.”
“…….”
“그러니까 나는…….”
우리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미워도 함께 미워하고, 슬퍼도 함께 슬퍼하고, 아무리 증오스러워도 멀어지지 말고.
그렇게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토해내듯 내뱉은 진심은 300년간 쌓인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심이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이제야 그날 밤의 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이다.’
‘……루크.’
그것은 3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내 영혼의 간절한 소원.
나를 보며 웃는 당신과 다시 만나 증오도, 원망도 없이 새로 시작하고 싶었던 나의 소원.
샤를마뉴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
“내가 감히…… 당신 곁에 있어도, 괜찮은 거야?”
갑자기 성이 났다.
“지금 곁에 있으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
샤를마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였다. 붉게 달아오른 눈꺼풀 사이로 연녹색 눈동자가 기적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내 속죄는…… 용서를 구하는 속죄가 아니었어.”
“…….”
“감히 용서를 받겠다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내가 모든 일을 망쳤으니까. ……그래서 당신을 감히 잡을 수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를 안고 싶었다. 이상한 충동이지만 분명 그러했다.
나는 충동에 몸을 맡겼다.
그대로 다가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그의 몸을 껴안자, 그가 감히 마주 안지는 못하고 양손을 허공에 붕 띄운 채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있기를, 염치없는 마음으로 소망했어.”
“……응.”
“내가 죽이지 않은 당신이, 당신을 죽이지 않은 내가, 피 묻지 않은 손으로 서로를 껴안고…….”
그의 말끝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저주를 내뱉지 않은 입으로 서로에게 입을 맞출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나는 그대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 작은 행동에 샤를마뉴가 무너져 내렸다. 차마 나를 마주 안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어린아이처럼 우는 그가 미우면서도 안타까웠다.
“함께, 함께 있어도 될까?”
울음의 끝에서 그가 헐떡대며 물었다. 허락을 구하는 그의 물음에 나는 그의 등을 힘주어 껴안으며 대답했다.
“응.”
함께 있자. 우리 함께 있자. 두 번의 죽음을 건너고 간신히 얻은 기회 앞에서 우리 이제는 떨어지지 말자.
봄의 꽃 내음이 우리 두 사람을 휘감았다.
힘들었다. 정말 많은 번뇌와 고민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두 번의 죽음을 건넜고, 두 번의 모함을 겪었으며, 두 번 사랑을 잃을 뻔했다.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을 수는 없을지라도. 사랑하고, 미워하고, 때로는 원망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하지만 그래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렇게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를 껴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샤를마뉴가 조심스럽게 두 팔로 내 어깨를 잡았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인 것 같았다. 나는 그 품에서 울면서 웃었다.
함께 있자.
다시 만난 세상에서, 우리 함께 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