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장 (27/34)

26장

아인 퍼스가 자신의 6차 공판에서 나와 공모했음을 시인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첫 번째 조사 후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때까지 한사코 다른 누군가와 공모 사실이 없음을 주장하던 아인 퍼스인지라 그의 갑작스런 시인을 두고 이런저런 추측이 떠돌았다.

가장 터무니없는 것은 최후 보루인 나까지 잡히자 자포자기해서 모든 것을 시인했다는 것이다.

아주 우습지도 않아. 사실 아인 퍼스가 거짓 시인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존 마이너 대신 아인 퍼스의 사건을 떠맡은 담당 검사가 나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할 때까지도 나는 아인 퍼스의 이상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검찰에 도착하여 조사실로 향할 때 존 마이너가 나타났다. 담당 검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시간을 번 존 마이너가 속삭였다.

“아인 퍼스가 최근 변호인을 통해 신원 미상의 남성을 만났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신원 미상이요?”

“피고인이 제 담당이 아닌지라 확실하지는 않은데 교도관들의 말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특징은요?”

“흔한 생김새라 특징적인 건 딱히 없었는데 큰 흉터가 하나 있었다고는 합니다.”

큰 흉터.

얼굴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검은 분노가 뱃속에서 끓었다.

그래……. 이런 일을 할 사람은 그놈밖에 없지.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내게 아인 퍼스의 자백을 부탁하던 그가 이제 와서 아인 퍼스를 구슬렸다는 게 의외기는 했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존 마이너가 이번 조사는 힘들 거라며 경고했다. 이번 조사에서 나는 그저 피의자로 취급받을 거라고.

최대한 폭력은 지양하라 하겠지만 아인 퍼스의 담당 검사가 실적 올리기에 급급한 인물이라 어떻게 나올지는 장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변호인과 동석하기로 했다.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법률지식을 가진 변호인의 앞에서 폭력을 쓸 수 있는 검사는 없으니까.

그리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존 마이너의 말마따나 내가 어째서 구속된 건지 내막을 모르는 검사는 권위적인 태도로 나를 추궁했다.

일전에 아인 퍼스의 참고인으로 불려갔을 때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와 언제 처음 만났는지, 어째서 그를 비서관으로 발탁했는지 등등.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한 마디 대답할 때마다 열 문장은 족히 넘게 태클을 거는 검사의 존재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게 아닐 텐데요?”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겁니까.”

“에드가 맥케인. 기억합니까?”

에드가 맥케인? 그게 누구더라. 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검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피의자의 차량을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낸 후 사망한 남성입니다. 기억 안 납니까?”

“…….”

그 말에야 기억이 떠올랐다. 맞다. 그게 에드가 맥케인이었지. 아인 퍼스를 감시하다가 갑자기 내 차에 달려들어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죽음을 맞이한 제정부 요원.

근데 그 사람이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 거지? 내게 적대적인 검사가 꺼낸 이름인지라 안다고 대답하기 꺼려졌다.

내가 머뭇거리는 것을 본 검사가 비웃었다.

“피의자는 그가 제정부 요원인 것을 알고 있었죠?”

“잠시만요, 검사님. 그런 유도신문은 적절치 않…….”

“변호인은 가만히 계세요! 피의자, 대답하세요. 알고 있었죠?”

변호인이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검사는 그를 무시하며 내게 대답을 재촉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인상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하던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알고는 있었습니다. 다만 알게 된 시점은 그 후의 일로…….”

“그게 언제입니까?”

나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아인 퍼스가 제정부에 끌려와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알았다고 대답해야 하나.

그럼 내가 왜 제정부에 있었는지 밝혀야 하고, 에반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에반과 모든 접촉이 불가능한 지금, 내 진술 하나하나가 그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다.

자칫하면 에반도 공모자로 얽혀 나와 함께 내란죄로 기소될 수도 있었다.

시드니 카턴이 활개를 치는 제정부가 에반에게 호의적인지 적대적인지 알 수 없어서 내 행동은 극도로 조심스러워졌다.

어떡할까.

검사가 말했다.

“왜 대답을 못합니까?”

“…….”

“피의자는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검사님.”

결국 입을 다물고만 나를 대신하여 변호인이 검사에게 제동을 걸었다. 검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류철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

“그가 제정부 요원인 줄 몰랐다던 피의자는 왜.”

그건 사진이었다. 먼 거리에서 찍혔지만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는 명확하게 찍힌, 나와 아인 퍼스가 꽃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이 담긴 사진.

“에드가 멕케인의 집으로 향했습니까?”

이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정부는 에반을 잘라낼 생각이다. 나는 책상 밑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사진을 노려보았다.

“그럼 그때 그 꽃가게에서는 무슨 얘기를 했지?”

아인 퍼스가 체포된 그날, 에반은 내게 꽃가게에서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음으로서 제정부에서 나와 아인 퍼스를 감시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그러니까 저 사진은 그때 나를 감시하던 제정부의 요원이 찍은 사진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이걸 검찰에 넘겼다는 것은…… 나를 피의자로 확정 지으며 나의 혈육이자 제정부 소속인 에반까지도 잘라내겠다는 뜻이었다.

“그저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럼 아인 퍼스는 왜 이곳에 왔습니까?”

“모릅니다.”

“모를 리가요? 피의자가 가게로 들어간 후 아인 퍼스가 시간 차를 두고 따라 들어갔다는 사실은 사진에 담겨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아인 퍼스가 처음부터 의도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유달리 친근한 척 굴었던 것이 사실은 나를 공범으로 몰아넣으려고 작정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피의자는 아인 퍼스와 공범이 아니라고 계속 주장하는 겁니까? 피의자와 아인 퍼스가 같은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이 이렇게도 많은데요?”

검사는 나를 몰아붙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서류 봉투에서 우수수 사진을 쏟아내었다.

모두 아인 퍼스와 내가 함께 찍힌 사진들이었다. 그중 한 사진을 집어 든 검사가 내 코앞에 사진을 들이대며 말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

그건 마치 귓속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에게 고개를 숙인 나였다.

배경은 차 안. 저건 언제 찍힌 사진이지? 순간 아연해진 내가 멍하니 눈만 깜빡이자 검사가 그다음으로 초점이 나간 사진을 내게 내밀었다. 멀어지는 아인의 차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문득 저게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비서관님, 죄송한데요. 제 뺨에 머리카락이 붙은 것 같은데 좀 떼어주실 수 있나요?’

‘음?’

‘간지러워서 운전에 집중을 못하겠어요.’

……그랬구나.

‘죄송한데 속도 좀 올릴게요.’

‘그놈들이에요.’

그때, 네가 노린 건 내가 맞았구나.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내게 접근한 거였어.

나를 공모자로 만들기 위해. 그렇지, 아인 퍼스?

제정부 밀실에서 나를 추궁하던 에반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었던 거였다. 내가 조카라서 모른 척했겠지.

시드니 카턴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노린 건 나였을지 모른다는 말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던 걸 떠올리면.

하얗게 굳어버린 나를 보며 검사가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그 이후로도 그는 계속 나를 몰아붙였다.

소냐 하워드 렘퍼드가 아인 퍼스의 공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몰랐다면 델루니안 탄신 기념일의 일은 어떻게 설명할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면서 왜 그녀를 후임 비서관으로 지정했는지 등등.

검사는 이미 나를 공모자로 확정 지은 상태였다.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방어했지만 내게 공모혐의가 있다고 기정사실화한 검사에게는 그다지 통하지 않았다.

6시간에 걸친 조사 끝에 간신히 풀려난 내게 검사가 말했다.

“7차 공판 때 증인으로 소환할 겁니다. 변호할 게 있다면 제대로 준비하는 게 좋을 거예요.”

변호할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웃듯 내 머리 위로 떨어진 말에 변호인이 울컥하여 그를 노려보았지만 검사는 의기양양하게 문을 닫았다.

쾅,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지지 않아. 절대로.

“……변호사님. 그때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습니까.”

내 물음에 변호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대답했다.

“내일 다시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고 있는 건 맞죠.”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변호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끌었다.

“그분께서 협조를 할까요?”

이 사건의 피해자인데. 내막을 모르는 변호인의 말에 나는 그저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불이 밝게 켜진 검찰청의 복도에 나와 변호인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렸다.

며칠 전, 변호인을 통해 샤를마뉴에게 부탁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비서실장이 가지고 있을 증거들.’

‘……그게 필요합니다.’

30일 안에 모든 공범을 잡으려면 그것이 필요했다.

나는 애초에 기소까지 갈 생각이 없었다. 오늘의 일로 조금 더 복잡하게 얽혀들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무죄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터였다. 억지로 꿰어맞춘 증거에는 반드시 허점이 있게 마련이니까.

조금 전 조사만 봐도 그렇다.

‘……아닙니까?’

‘……맞지요?’

‘……그렇지요?’

계속해서 나를 떠보는 말투를 쓰는 검사를 보며 그에게 결정적인 증거가 없음을 확신했다.

가슴에 박혀 있던 폭발용 칩을 제거한 소냐 하워드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들었다. 렘퍼드 백작은 현재 도주 중이다.

존 마이너가 말한 공범은 렘퍼드 백작과 나머지 일당들이지만 그에 대해서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겪은 과거이자 미래에서도 렘퍼드 백작은 진실이 밝혀지자마자 도주했고 보름 만에 붙잡혔다.

과거가 바뀌었으니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곧 체포되리라는 데에 나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신경 쓰는 공범은 따로 있다.

‘어째서 아인 퍼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를 파기했습니까?’

‘예?’

‘비서실장 노엘 파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피의자에게 서류를 맡겼는데 검찰 측에서는 받은 적이 없다고요. 그의 증언에 따르면 피의자 말고는 서류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지요?’

그 자료가 있었으면 렘퍼드 백작을 빨리 체포할 수 있었을 거라는 검사의 말을 듣고 나는 그를 공범이라 지목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시드니 카턴. 그가 바로 공범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아인 퍼스와 작당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랬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인 퍼스의 자금줄을 알아내어 렘퍼드 백작을 조금 더 빨리 찾아낼 수 있었던 서류들을 파기한 사람은 시드니 카턴이 확실했다.

자신이 대신 검찰에 넘기겠다고 내게서 서류를 가져갔으니까. 그래놓고 몰래 서류를 파기한 거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 그는 몰랐을 것이다.

“……변호, 잘 부탁드립니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는 다른 눈이 있었다는걸.

* * *

아인 퍼스의 7차 공판일이 다가왔다. 그사이 존 마이너와의 2차 조사가 있었으나 예상했던 대로였기에 나는 별다른 동요 없이 7차 공판의 증인으로 참석했다.

사실 말이 좋아 증인이지, 공모 혐의로 출석하는 재판인지라 이번 공판은 나와 아인 퍼스의 공모 관계를 입증하는 재판이 될 거라고 존 마이너는 말했다. 그러니까 아인 퍼스의 재판임과 동시에 나의 재판이라는 소리다.

결코 질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공모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면 아무리 존 마이너가 막는다고 해도 기소는 불가피하고, 향후 재판의 결과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있던 아인 퍼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주위의 웅성거림으로 내가 왔음을 알 텐데도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뭐, 좋아. 얼굴 봐서 뭐 하겠어. 이제 와서 주먹다짐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무심히 지나쳐 지정된 자리에 앉으니 기자들이 빠르게 펜을 놀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청석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기 시작했다. 아는 얼굴도 있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7차 공판은 예정된 시각에 시작되었다. 피고인에 대한 신원확인 절차를 마친 후 검찰 측에서 지난 공판에서 다루어진 내용과 아인 퍼스의 혐의에 대한 모두 발언을 진행하였다.

아인 퍼스의 혐의 중에는 알고 있던 사실도 있고, 몰랐던 사실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렘퍼드 백작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 것보다 자발적으로 행동한 정황이 포착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렘퍼드 백작을 체포하여 조사하면 낱낱이 밝혀지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밝혀진 정황으로는 아인 퍼스의 개별적 동기에 의한 범죄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문득 송년축제 때 대사제와 이야기를 나누던 렘퍼드 백작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아들을 모욕하지 말라고 했지.

총통이 되겠다는 야망은 소냐 하워드를 통해 이루려고 했고, 친아들은 그가 원하는 대로 지원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인 퍼스의 공판은 존 마이너가 예상한 대로 공모 관계에 대한 혐의로 이어졌다.

아인 퍼스의 변호인 측에서는 급하게 말을 맞추기라도 한 건지, 이때까지의 모든 범죄 사실들은 현재 피의자 신분으로 체포된 드마뉴 백작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비서실장 노엘 파커의 피습 사건과 관련해서는 심지어 내가 종용했다고도 주장했다.

어떻게든 형량을 줄여보겠다는 속셈이다.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순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변호 측에서는 현직 제국정보부 소속 요원의 진술서를 제출하는 바입니다. 증인의 신분은 직업적 특성상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변호 측에서 진술서랍시고 내놓은 종이 한 장에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아인 퍼스가 체포된 당일, 나와 아인 퍼스가 제정부 지하에서 단둘만의 접견 시간을 가졌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당시 조사실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인 퍼스가 순순히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으며 모든 사실을 혼자서 기획했다고 진술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6차 공판에서 아인 퍼스가 나와의 공모 사실을 시인했음으로 미루어볼 때 내가 그를 설득하여 나의 존재를 은폐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변호 측은 주장했다. 아주 교묘하게 짜 맞춘 억지 주장이었다.

“증인, 변호 측의 주장이 사실입니까?”

판사가 물었다.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백히 밝힐 수 있습니까?”

명백히 밝힐 수 있겠냐고?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적당한 수위 내에서 잘라내야 했다.

“예.”

나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진술서에는 제가 어째서 제정부 조사실까지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황이 적혀 있지 않군요. ……그것이 없다면 제 증언은 무의미할 따름입니다. 그날 제가 제정부 조사실까지 가게 된 경위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보세요.”

“그날, 피고인을 추적하여 체포한 제정부의 요원이 있습니다. 그의 직업적 특성상 이름을 그대로 노출할 수는 없지만, 그는 제 혈육이며 저는 그가 제정부의 요원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말하면 알 만한 사람은 그 혈육이 에반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피고인의 체포 과정에서 그가 큰 부상을 입었고, 이전부터 알고 있던 제정부 요원이 그 사실을 제게 알렸습니다. 그와 동석하여 혈육의 수술과정을 지켜보았고, 이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동석한 제정부 요원은 피고인이 체포된 사실을 밝히며 저에게 제정부까지 동석할 것을 권했습니다. 피고인이 자백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죠. 그는 제가 가면 피고인이 자백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왜죠?”

“그건…… 아마도.”

아인 퍼스는 흥미롭다는 듯 살짝 웃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부 밝히려고?’ 그렇게 묻는 것 같다. 나는 아인 퍼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피고인이 제게 유감이 아주 많기 때문일 겁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날 조사실 안에서 피고인은 저에게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제 존재가 황태자 전하를 시해하려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었다고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직속 비서관이었던 저를 못마땅하게 여긴 피고인이 실제로 저를 없애려고도 했으니까요.”

방청석이 술렁였다. 아인 퍼스의 변호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증인을 해치려고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피고인이 제게 처방한 보약과 성분 분석표, 그리고 약을 복용한 이전과 이후의 진료기록과 주치의의 진단서를 증거물로 제출하는 바입니다.”

“보약이요? 그게 뭡니까?”

판사가 되물었다. 방청석에서도 그게 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대부분의 제국인은 보약이라는 것을 모른다.

나 역시 아인 퍼스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건 일리오니쉬들 고유의 의학으로 제국 의학계에서는 치료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를 테면 사이비 의학이었으니까.

“일리오니쉬 고유의 의약입니다. 지난 8월, 교통사고를 겪은 이후로 심신미약의 상태였던 저에게 피고인이 처방한 것이었습니다. 진료기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복용한 이후로 건강 상태가 크게 나빠져 입원과 통원치료를 반복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치의는 진단서에서 약을 지속적으로 섭취할 경우 심장 기능을 저하시켜 사망할 수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진단서는 며칠 전 변호사를 통해 받아온 것이었다. 혹시 몰라 받아온 것인데 이렇게 쓰이다니. 발언을 끝낸 후 판사를 바라보니 그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증인의 주장은 알겠지만…… 이것으로 증인과 피고인의 공모혐의를 전면 부인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검찰 측의 주장을 들어보는 게 좋겠군요. 검찰 측은 증인 신문을 하십시오.”

검사가 드디어 때가 왔다는 듯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담담히 그를 바라보았다. 존 마이너가 조용히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은 방금 전 증언에서 피고인이 본인을 해치려 하였음을 주장하며 피고인과의 공모 관계가 없음을 주장하였습니다. 맞습니까?”

“예.”

“그렇다면 피고인과의 평소 관계는 어떠하였습니까?”

“평범한 직장 동료의 관계였습니다.”

“그럼 증인은 피고인의 정체를 전혀 몰랐다는 뜻이겠군요?”

“그렇습니다.”

“확실합니까?”

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검사가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증언할 겁니까?”

그가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판사에게 제출하였다. 앞서 변호 측에서 제출한 것과 똑같은 양식의 종이, 즉 진술서였다.

“이것은 황실 수석비서관 노엘 파커의 진술서입니다. 이 진술서에서 노엘 파커는, 피고인에게 피습을 당한 이후로 거동할 수 없어 자신이 확보한 피고인에 대한 증거물을 증인인 라파엘 드마뉴에게 부탁하였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증거물은 금고의 특성상 증인밖에 확보할 수 없었으며, 이후 참고인이 금고를 확인하였을 때 증거물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검찰 측 어느 누구도 피고인에 대한 증거물을 취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진술서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그는 마치 희곡작품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방청석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증인은 피고인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밝힐 수 있는 증거물을 찾아내자 피고인을 위해 증거물을 은폐한 겁니다!”

검사가 아니라 배우를 해도 되겠어. 그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상황에 안 맞게 떠오르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판사를 바라보았다.

판사는 흠, 하고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증인, 이에 관하여 증언할 것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검찰 측의 주장을 인정합니까?”

“인정하지 않습니다.”

검사가 작작하라는 식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증거물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저 말고도 또 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앞선 증언에서 저와 함께 제정부로 동행하였던 제정부 요원입니다. 그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언급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면, 신원을 밝히겠습니다.”

듣기로 제정부 요원의 신분은 제국정보부법에 의하여 임의로 밝힐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그 점을 꼬집어 언급하자, 판사가 뒤에 선 사람에게 뭐라고 작게 지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분을 밝히세요, 증인.”

“알겠습니다. …… 그는 현직 제국대학교수이며, 또한 제국정보부의 정보요원인.”

그때 방청석에서 누군가 조용히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시드니 카턴입니다.”

시드니 카턴? 몇몇 사람이 웅성거렸다. 시드니 카턴은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젊은 학자로서 어느 정도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을 바라보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신들이 이야기하고 있던 그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판사가 봉을 두드려 방청석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가 어떻게 접근이 가능했다는 겁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증언보다 증거물로 보여드리는 편이 빠를 것 같습니다.”

나는 여전히 시드니 카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시드니 카턴은 우두커니 선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당신 탓이야.

“증거물을 제출하세요.”

판사의 요청에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내가 아니라 존 마이너였다. 나를 신문하고 있던 검사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존 마이너를 바라보았다.

존 마이너는 자신이 들고 있던 증거물을 판사에게 제출하며 대답했다.

“저희 측에서 입수한, 증거물을 획득하던 날의 녹화본과 녹취록입니다.”

“…….”

“보시다시피 증인 외에도 다른 사람이 함께 찍혀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녹취록에서 확인하실 수 있듯, 증거물은 제정부 요원인 시드니 카턴의 손에 들어간 이후로 행방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를 신문하던 검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드니 카턴의 얼굴도 차갑게 굳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몰랐겠지.

그날, 우리를 지켜보던 눈이 따로 있었다는걸.

비서실장의 사무실에는 그림이 세 점 걸려 있다.

각각 『계몽』, 『영혼』, 그리고 『지혜로운 여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림으로,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그림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500년 전 처음 황궁을 건축한 이후로 계속 증축을 하며 그 시대의 최신 기술을 도입한 금고 트릭이었다. 그 시대의 지식을 알지 못한다면 절대 풀 수 없는 고도의 트릭.

그리고 그 사실을 뻐기듯 알려준 건 시드니 카턴 본인이었다.

……그럼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했어야지.

우리 시대에도 얼마든지 최신의 기술을 도입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지 못한 그가 나는 너무나도 우스웠다.

왼쪽 눈동자에 감시 카메라가 박혀 있던 『지혜로운 여인』을 떠올리며 나는 밝게 웃었다.

황실을 제외한 어떤 곳에도 아직 도입되지 않은 소형의 카메라는 황실에서밖에 사용하지 않는 개인용 전화기와 함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우리 시대 최고 기술의 집약체였다.

그것들이 황실에서밖에 사용되지 않는 것은 황실이 신기술 개발에 많은 부분을 투자했기 때문도 있지만 정보를 통제하겠다는 황실의 어리석은 아집 때문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새로운 기술과 함께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그릴 것이다. 어리석음과 무지에 머물렀던 과거는 퇴색하여 사라지겠지.

당신처럼 말이야, 루이 채스터턴.

* * *

그날의 공판은 나의 유죄 대신 새로운 공모자의 존재를 암시하며 끝이 났다.

내가 재판정을 벗어날 때까지 꼿꼿하게 서 있던 시드니 카턴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새파랗게 웃었다. 그 웃음이 벼랑에 몰린 날짐승 같아서 나는 그저 마주 웃어줄 뿐이었다.

재판정을 벗어나는데 복도에서 존 마이너와 나를 추궁한 검사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증거를 숨기면 어쩌자는 거야!”

나를 추궁했던 검사가 무서운 기세로 존 마이너에게 소리쳤다. 존 마이너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그래서 무리한 신문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했잖아. 난 분명히 말했어. 반박의 여지가 많으니 합리적으로 생각하라고. 내가 획득한 증거물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건 너야.”

“닥쳐!”

“나라면 이럴 시간에 시드니 카턴이나 수사하겠어. 네 빈약한 실적에 한 줄이라도 남겨야지. 아, 빨간 줄 말고.”

비꼬는 말이 수준급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잊고 있었지만 존 마이너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같은 팀인 검사도 깔아뭉갤 수 있는 무자비한 사람.

증거품을 획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거들떠보지 않은 것은 저 검사의 잘못이지만, 이미 며칠 전 증거품을 획득해놓고도 공판 하루 전인 어젯밤에야 그 사실을 알린 존 마이너도 제정신은 아니다.

경쟁 관계의 검사와 실적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존 마이너의 야심찬 의도는 그대로 이루어져, 나를 증인석에 세운 검사는 오늘 공개적인 망신을 당하고 발언의 신뢰성을 잃고 말았다.

아무튼 그 덕에 상황은 내 쪽으로 유리하게 흘렀다.

구치소 독방으로 돌아온 지 이틀 후, 변호사가 찾아와 긍정적인 소식을 전했다.

“시드니 카턴에 대한 조사가 제정부에서 검찰로 이관되었답니다.”

제정부 요원에 대한 조사는 보통 제정부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곤 했다. 국가 기밀이 외부로 유출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조사는 항상 많은 문제점을 양산해 냈다. 세간에서는 제정부의 자체 조사를 금지하고 모든 수사는 검찰에 일임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이때까지 달라진 적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시드니 카턴에 대한 조사가 검찰로 이관된 것이다.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꼬리 자르기.

“구속은 될 것 같답니까?”

“그건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그자야말로 소극적 공모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데 지금까지 나온 증거랄 게 그 서류 파기밖에 없어요. 보다 확실한 증거가 나와야 구속기소가 가능할 겁니다.”

“……보다 확실한 증거라.”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건 나조차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시드니 카턴이 언제부터 그들과 공모했는지도 모르겠고, 정말로 공모를 한 것인지도 사실은 의아했다.

그저 나를 모함하기 위하여 서류를 파기했을지도 모르는 일. 이런 상황에 보다 확실한 증거가 나타날지, 그건 미지수였다.

차라리 그가 투서를 상부에 올리지 않아 테러를 방조했다고 하면 명백한 증거가 될 터인데, 과거와 달리 그는 투서를 올려 테러를 방지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

비록 그게 나를 잡기 위한 함정이었다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볼 때는 그렇다.

과연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싶은데, 잘못하면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는커녕 구속도 안 될 수도 있겠다.

심란하다. 그를 어떻게 잡아넣어야 할까. 그가 설령 공모혐의가 없다 하더라도 내게 있어 그는 유죄다.

복수하고 싶었다. 그 잔인한 전생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뇌리에 떠오르지 않은 ‘복수’라는 단어가 이제야 선연히 빛을 발했다.

복수를 곱씹으며 책상만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변호사가 말했다.

“각하, 그리고 또 다른 소식이 있습니다.”

“……뭡니까?”

“그 무전기 녹취록의 대사제 말입니다.”

그 순간 신경이 팽팽히 곤두섰다. 녹취록. 비서실장이 넘긴 증거품 중 아직 존 마이너가 공개하지 않은 것이었다.

언제고 대사제의 행방을 찾으면 그와 함께 공개하여 대사제에게 증언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공모 사실과 그 오래된 계획에 대하여 샅샅이 증언해 달라고.

그것은 나를 위한 증언은 아니었으나, 렘퍼드의 손에 무참히 죽은 내 부모님과 그날의 희생자를 위한 증언이었다.

그런데 그 대사제가 왜.

“사망했답니다.”

“……!”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패해서 발견 당시 입고 있던 의복과 시신의 키 등으로 알아봤다고 합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참담함에 눈을 감았다. 에반에게까지 부탁해서 살리려 했던 대사제는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가 없어도 내 혐의에 대한 결과는 변하지 않겠지만, 그가 있어야 모든 것을 밝힐 수 있었다.

답답했다.

“렘퍼드는요?”

“최근 일리니아 인근에서 목격담이 있습니다. 곧 체포될 것 같습니다.”

일리니아 인근. 과거에도 렘퍼드 백작은 그쪽에서 체포되었다. 멀지 않았다. 그가 체포된 후 시드니 카턴의 혐의가 입증되어 구속기소가 된다면 나는 자유의 몸이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

보다 확실한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절대로 부인하지 못할, 확실한 증거를…….

* * *

며칠이 더 흘렀다. 렘퍼드 백작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체포와 함께 구속영장이 청구된 그는 청구된 지 하루 만에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놀라운 속도였다.

“오늘이 마지막 조사일 겁니다.”

그 와중에 나는 세 번째 조사를 받았다. 존 마이너는 오늘이 마지막 조사일 거라고 말했다.

곧 증거불충분으로 인한 불기소처분이 떨어질 것이다. 이미 내 혐의는 대부분 무혐의로 입증되었다. 검찰 측에서 나를 아인 퍼스의 동조자라 의심했던 가장 결정적 계기는 갑자기 나타난 시드니 카턴의 존재로 인하여 힘을 잃고 말았다.

그 외의 것은 의심하려면 의심할 수 있으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고, 또 아인 퍼스가 나를 해치려 했다는 주장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는 무마가 된 상태였다.

다 좋았다.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다만 걸리는 것은 아직까지도 불구속 상태인 시드니 카턴이었다.

“시드니 카턴 말입니다.”

“예.”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 말에 존 마이너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별다를 게 없습니다.”

“…….”

“서류를 파기한 점에 대해서는 제정부에서 추가로 조사하려다가 시일이 늦춰졌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그 외의 의문에 대해서는 직업상의 이유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어요.”

전망이 좋지 않다. 이 상태로 계속 지속된다면 시드니 카턴의 혐의는 흐지부지하게 끝날 것이 분명했다. 잘못하면 시드니 카턴에게서 뽑아낼 게 없다는 것을 핑계로 또다시 나를 걸고 넘어질 수도 있다. 그걸 노리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있고.

내 표정이 어두워지기라도 한 걸까, 존 마이너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위로했다.

“각하의 불기소만큼은 제가 꼭 책임지겠습니다.”

내게 중요한 건 나의 불기소처분이 아니라 시드니 카턴의 구속기소다. 시드니 카턴이 하늘 아래 존재하는 한 나 역시 속 편하게 살 수 없다.

두 번의 죽음을 건너고 두 번 모함을 당하고 나서야 나는 증오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착잡해질 수 있을 마음이 미움이라면, 증오는 그의 시체에 침을 뱉을 수 있는 감정이다. 시드니 카턴의 시체에 침을 뱉을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존 마이너는 나의 불구속 방침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었다.

어떤 증거를 어떻게 써서 혐의를 부정하고 어떤 명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내릴 건지 설명하는 그를 보다가 되물었다.

“무전기 녹취록은 어떻게 쓸 예정입니까?”

그의 설명 어디에도 무전기 녹취록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비서실장이 넘긴 증거물 중 하나인데 어디에라도 쓸 데가 있지 않을까. 내 물음에 존 마이너가 흐음, 하며 대답했다.

“그건 다른 일에 쓰일 겁니다.”

“……?”

다른 일?

“아인 퍼스의 8차 공판 말입니다.”

“아…….”

“아인 퍼스와 렘퍼드 백작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증거 중 하나니까요.”

모든 정황이 다 드러난 마당에 아인 퍼스는 아직까지도 렘퍼드 백작과의 관련성을 적극 부인했다.

그것이 그의 재판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으나 아버지를 지키겠다는 일념인지, 레브로비치의 자존심인지, 아인 퍼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와의 관련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인 퍼스의 산부인과 기록과 진짜 퍼스 부인의 진술서, 그리고 렘퍼드 백작이 공직에 있을 시절 국가 지원 기관으로 인정한 입양원에 대한 기록을 모두 포함한다면 퍼즐을 맞추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비록 모든 게 정황증거에 그치지만.

아인 퍼스의 8차 공판은 불기소처분을 내리기 이틀 전에 이루어진다고 했다. 증인으로는 나와 시드니 카턴, 렘퍼드 백작과 소냐 하워드가 채택되었다.

여기서 아인 퍼스와 렘퍼드 백작과의 관계가 밝혀지면 아인 퍼스는 소냐 하워드의 혐의와 함께 인정되어 내란죄 또는 국가전복죄로 1심 선고를 받게 된다.

렘퍼드 백작의 재판은 그 후에 이루어지겠지만 아인 퍼스가 1심 선고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면 렘퍼드 백작 또한 사형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렘퍼드 백작의 사형은 이 혼란스러웠던 정국에 대한 마침표가 되겠지.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상상인가. 샤를마뉴는 죽지 않고 테러의 위협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니. 상상은 언제나 달콤하다. 너무 달콤해서 이루어지지 못할까 봐 두려울 정도로.

결국 이 모든 상상은 아인 퍼스와 렘퍼드 백작 간의 관계성이 입증될 때의 이야기다.

“아인 퍼스와 렘퍼드 백작이 부자지간이라는 것이 인정될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반반입니다. 인정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죠. 모든 건 정황증거니까요.”

존 마이너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적인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죽어버렸다.

그를 죽인 것은 아무래도 렘퍼드 백작일 것이다. 살인에 대한 혐의도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 대사제와 렘퍼드 백작이 나눈 녹취록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시점에 대사제를 살해한 혐의로 조사할 수는 없었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대사제가 죽지 않았더라면…….

존 마이너와의 마지막 조사를 끝내고 독방으로 돌아온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드니 카턴. 대사제. 렘퍼드 백작. 구속. 불기소. 재판. 사형선고…… 무작위로 떠오르는 단어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시드니 카턴이 소극적으로 공모, 혹은 방조했음에 대한 결정적으로 어디서 찾으며, 렘퍼드 백작과 아인 퍼스가 부자지간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딱 하나만 아귀가 맞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답답했다. 한숨이 안개처럼 창문으로 흩어졌다.

시간이 죽은 듯 흘러갔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 나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 퍼즐 한 조각.

그것이 이미 내 손에 있었음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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