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찾았답니다.”
“…….”
샤를마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로 밝혀지자 피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칩을 제거하는 수술까지 마친 후 신병을 인도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소냐 하워드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탄창이 빈 총을 들고 굳이 자신을 위협하던 그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살하려는 군인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이미 발포된 총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비명에 순간 손이 흔들린 군인이 심장 대신 어깨를 쏘았고, 그녀가 총을 떨어뜨린 순간 다른 이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제압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지막 계획까지 빗나가자 그녀가 혀를 깨물고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흐르는 선혈을 바라보며 샤를마뉴는 차갑게 말했다.
“살리세요.”
죽으면 안 돼. 살아야 한다. 그녀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그녀 본인의 단독 행동인지 혹은 그녀와 공모한 다른 사람이 있는지 밝히기 전까지 그녀는 죽어서는 안 되었다.
긴급히 병원으로 후송되는 그녀를 보며 샤를마뉴는 다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심장 부근을 조사해요. 분명 뭐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을 쏴 죽이라 한 사람이니 분명 심장 부근에 뭔가를 설치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의 생각은 빗나감이 없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지 2시간 만에 그녀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심장에서는 칩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그건 분명 외부 충격에 의해 폭발하는 칩이리라. 그런 것이 있다는 소식은 듣도 보도 못했지만, 군수업체를 소유한 그녀의 아버지가 이 일에 동조한 것이라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요즘 암암리에 새로 개발하는 것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샤를마뉴는 흐릿한 기억 속, 아주 짧게 스치고 지나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일단 칩을 꺼내고 확인해 볼 일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또 다른 용의자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샤를마뉴의 물음에 경호과장은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긴급체포 후 구속되어 독방에 있습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
“곧 정식으로 영장이 청구될 겁니다.”
서늘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 한기가 깃들었다. 그것을 보는 경호과장의 얼굴에 일순 분노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람마저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
“그래도 전하를 3년이나 곁에서 모신 사람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배신도 그런 배신이 없지.”
어쩌면 자신도 그 사람과 얽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치자 절로 분노가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공항에서 자신을 찾았다던 라파엘을 떠올리며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거칠게 쏟아냈다.
그의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 오늘 그 모든 일을 겪은 황태자라는 것을 잠시 망각한 채로.
줄곧 눈을 감고 있던 샤를마뉴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조용히.”
“아…….”
“그만하고 나가보세요.”
실수했다. 피로감에 지친 황태자를 보니 자신이 경황없이 떠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경호과장은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남은 것은 희게 질린 얼굴로 굳게 눈을 감은 샤를마뉴뿐.
“…….”
그는 오늘 하루 그에게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소냐 하워드를 체포한 후의 일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를 체포하고도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안전구역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샤를마뉴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누구를 찾으시려는 겁니까?”
한시가 급했다. 주동자는 잡혔지만 그녀가 또 어떤 장치를 설치해뒀을지 모르는 일이기에 안전구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는 꿋꿋하게 사람을 찾아야 한다며 버텼다.
“아니요, 내가 직접 가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서 찾아오라 하겠다는 말에도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자신이 직접 가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안전구역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그의 주장대로 공항경찰대 사무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추가 용의자라니?”
그 사람이, 소냐 하워드 렘퍼드와 공모한 혐의로 현장에서 긴급체포가 될 줄은.
공모라…….
소냐 하워드가 노린 것은 황가의 미래이자 곧 제국의 미래인 황태자다. 그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제국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법학도이자 한때 입법 활동까지 했던 샤를마뉴는 내란죄의 형량을 잘 알고 있었다.
내란죄는 매우 엄중히 다스려지는 중범죄로, 최소 15년 이상의 유기징역, 최고로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어 있다.
사실 말이 좋아 최소 15년 이상의 유기징역이지 혐의가 입증되면 그냥 사형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사형 판결이 떨어지면 일주일 내로 형이 집행되기로 유명했다.
해외 유명 법학자들은 최종 사형판결과 형 집행 사이의 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며 인권 탄압의 악법이라 비판했지만 그것이 바로 제국의 법이다.
샤를마뉴는 눈을 떴다. 차갑게 가라앉은 연녹색 눈에서는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이 찾자면 그것은 분노에 가까우리라.
하얗게 굳어 있던 손이 오래된 해골처럼 삐걱대며 움직였다.
톡, 톡.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 끝이 날카로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눈빛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찢어발기듯 사나웠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독방 안이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에반이 선임한 변호사 중 한 명이 찾아와 내가 황태자를 죽이고 렘퍼드 백작을 총통에 올리려던 내란용의로 긴급 체포된 상태라고 알렸다.
말도 안 돼. 내가 왜.
하얗게 질린 채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변호사가 물었다.
“각하, 어째서 공항에 나타나신 겁니까?”
“……그럴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럴 사정이 있었다는 내 말에 변호사가 난처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유를 명백히 밝혀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변호사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며 초조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변호사가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상황이 무척 안 좋습니다.”
“…….”
“각하께서 그 일당과 공조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고 있어요.”
“어째섭니까?”
변호사가 한숨을 쉬었다.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인 피의자 아인 퍼스와 소냐 하워드 렘퍼드가 공조관계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
“그러면서, 외람되지만 각하께서 그 두 사람과 비서실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고…….”
더 듣지 않아도 알겠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기묘하게 맞아떨어지긴 한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뒤가 구릴 수도 없을 정도다. 아인 퍼스를 비서관으로 발탁하라 추천한 것도 나, 소냐 하워드 렘퍼드를 후임인사로 지목한 것도 나.
두 명의 테러범이 모두 나와 관계가 되어있으니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게 더욱 이상할 지경이다. 설령 그 기저에는 무지만이 있을지라도.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에반이 떠올랐다. 그에게 에반은 어디 있냐고 묻자 변호사는 어두운 낯빛으로 대답한다.
“공작께서도 현재 조사 중에 있습니다. ……직업적 특성상 조사는 현재 제정부에서 맡고 있고요.”
제정부에서 조사라니. 일전에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순백의 조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나 때문에 그까지 피해를 입고 있다. 그는 정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인데.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으려나.
고문. 두 글자만 떠올려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저희에게만큼은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
무엇을 솔직하게 말할까. 그날 왜 공항에 갔냐고? 그가 죽을 것을 미리 알았기에, 그 테러가 미리 일어날 것을 알았기에 그것을 막기 위해 갔다고 말하면 믿으려나?
아니, 믿는 것은 둘째 치고, 그것이 내 재판 과정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나 않을까.
제정부 요원, 그것도 첩보를 받은 소수의 요원만이 알고 있었던 사태를 아무것도 아닌 전직 비서관이 어떻게 알고 있었냐고 역공이라도 받으면 할 말이 없다.
“……정말로, 테러하러 간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은 사실이에요.”
“각하…….”
“믿어주십시오.”
절대 그런 사실 없습니다. 내 대답에 답답하단 듯 나를 바라보던 변호사가 일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가 ‘아 참’ 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의 담당 검사는 존 마이너입니다. 아시지요?”
존 마이너라.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아인 퍼스의 조사 과정 중 참고인으로 불려간 기억이 있다.
“이틀 내로 구속영장이 청구될 겁니다. 불구속을 요청해보기는 하겠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그쪽에서도 포기를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조사한다면 공모에 적극 가담하였는지, 아니면 소극적 방조였는지 시시비비를 가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니 조사가 진행되어도 최대한 말을 아끼며, 혹시라도 불리한 질문일 경우 묵비권을 행사하고 저희를 불러주십시오.”
공모에 적극 가담이었는지, 소극적 방조였는지를 가린다고?
둘 중 무엇도 아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몰랐던 멍청이였을 뿐이라고. 멍청한 것도 죄라면 죄겠지만.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변호사가 츳, 하고 혀를 찼다.
“그럼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가 면회실을 빠져나갈 때였다.
“……잠깐.”
“예?”
그를 불러놓고도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가장 궁금한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십시오.”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변호사가 최대한의 아량을 발휘한다는 듯 되물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나는 물었다.
“……황실에서도 이 사건을 압니까?”
어찌 보면 멍청한 질문이었다. 변호사가 물어 무엇 하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부 알지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돕니다.”
“…….”
암담함에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전부…… 안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변호사가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듯 내일 뵙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되돌아온 독방, 가로세로 3미터 남짓한 좁은 방에 갇혀 나는 300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지하 감옥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며 보냈던 투옥 첫날 밤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지상으로 난 창살을 통해 기울어진 초승달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던 그날.
나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황제가 나를 구해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고문은 그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그땐 몰랐지만 그날은 내가 지하 감옥에서 보낸 날 중 가장 평온한 날이었다. 희망이 부서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눈을 감았다. 샤를마뉴의 얼굴이 검은 망막에 떠올랐다.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지금 어떤 기분이지?
나를 의심할까, 아니면 나를 믿을까?
300년 전, 불같이 화를 내며 결국 나를 죽이고 가버린 델루니안과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믿겠다던 샤를마뉴의 간절한 얼굴이 눈꺼풀 안쪽에서 겹쳤다.
똑같은 듯 조금은 다른 두 사람의 얼굴을 그리며 나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았다.
나는 어느 쪽에 의지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정말, 잘 모르겠다.
* * *
검찰 측에서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변호인의 예상대로 그대로 들어맞아, 긴급체포 사흘째 되던 날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단 한 차례의 조사도 없었고 명확한 증거가 나왔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당연히 기각될 거라 생각했지만, 변호인은 안심할 때가 아니라며 한숨을 쉬었다.
“황실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
“재판부에서도 황실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을 거예요. 일단 잡아놓고 조사하라는데 별수가 있겠습니까.”
새삼스럽게 이 나라가 황제의 권한을 헌법 1조에 명시해 놓은 제국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황실의 눈치를 보는 검찰이라. 엄밀히 따지자면 황가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므로 사법기관에 압력을 행사할 수 없어야 하지만, 그것은 법전의 내용일 뿐이고 사실 아직도 황가는 제국 많은 부분에 간섭하고 있었다.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접 당하고 보니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기가 막혔다.
긴급체포 닷새째 되던 날, 재판부에서는 대략적인 서류심사 후 구속영장 청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검찰은 변호인을 통해 1차 소환 기일을 통보했다. 구속 후 첫 조사라니. 우습지도 않았다.
어쨌든 증거 불충분의 선구속 후조사라는 기묘한 처분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조사를 받는 날이 다가왔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대기실에서 대기 명령을 받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방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존 마이너 검사의 목소리다.
다른 사람을 취조하고 있는 건지 목소리가 사나웠다. 폭력성이 깃든 목소리에 절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참고인으로 왔을 때와 용의자로 왔을 때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한층 위압적인 공기가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돼. 나는 죄가 없다. 의식적으로 어깨를 폈다. 태연함을 가장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기하라는 말은 했지 무조건 앉아 있으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조사 전 몸도 풀 겸 창가로 다가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검찰청 앞에는 공안검사 존 마이너에 대한 고발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문구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수사과정 중 고문과 협박을 일삼은 공안검사 존 마이너를 파면하라!’
……고문과 협박. 창틀을 짚은 손이 잘게 떨렸다.
고문과 협박이라면 이골이 날 만큼 지긋지긋했다. 300년 전, 그 먼 옛날의 일이라지만 폭력의 기억은 내 영혼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때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 지금, 내 사건을 담당하게 된 검사가 고문과 협박을 일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숨이 턱 턱 막혔다.
그나마 ‘고문을 할 거면 다른 은밀한 장소에서 할 거야’라는 희미한 이성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것마저도 없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창을 등지고 서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고문의 공포에 잠식되었던 몸에 천천히 이성이 돌아왔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변호인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감히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까?
진정해. 라파엘 드마뉴.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여성 수사관이 나타나 나를 불렀다.
“안쪽으로 오세요.”
이제 시작인가. 조사실 안쪽으로 향하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일종의 다짐이었다.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만은 않겠다는 다짐.
안쪽에서는 존 마이너 검사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깍듯하게 인사하는 그가 낯설다. 참고인으로 왔을 때에야 이상할 게 없다지만 지금은 피의자로 조사받으러 왔는데 저렇게 정중한 인사라니.
무슨 저의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수사관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나가며 문을 닫는다.
“안색이 많이 상하셨군요.”
“…….”
“아무래도 귀하신 분이니 독방이라 하더라도 불편하시겠지요.”
“지금 나를 조롱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뜻을 왜곡하지 말라 하는 존 마이너를 나는 불가해하게 바라보았다.
왜 저러지? 존 마이너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다. 출세지향적 인물이지. 귀족들과 연을 닿으려 노력하고.
그리고 나는 백작이다. 내 혈육인 에반은 공작이고. 그가 바라는 연줄이 되기에 부족한 점은 없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전혀 소용이 없다.
그런데 왜 저렇게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거지?
아무래도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경계심을 풀지 않자 존 마이너가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각하의 구속영장 청구는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압니다. 황실에서 지시가 있었다지요.”
“예. 특히 이 사건의 피해자인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지시한 사항인지라…….”
황태자가 직접?
그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입을 꾹 다문 나를 보며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존 마이너가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조사실 안에 내려앉았다.
……결국 이런 결말이군. 변한 게 없어.
300년 전에도 내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은 황제는 내 말을 들어볼 생각도 없이 나를 지하 감옥에 처넣었다.
그리고 300년이 지난 오늘, 이번에도 황태자는 내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 착각하여 나를 구속시킨다.
도대체 내가 뭘 기대했던 걸까. 도대체 나는 왜 그를 살린 거지?
그를 살린 일에 후회하지는 않지만, 고작 이런 결말을 보려고 시간을 되돌렸나 싶어 허탈하기도 했다.
“……그래요, 그럼 조사나 시작하죠.”
“각하.”
“긴말 하고 싶지 않군요.”
“그게 아니라…….”
급격히 피로감을 느낀 내가 차갑게 말하자 존 마이너가 조금 당황한 듯 나를 붙들었다.
또 왜. 또 무슨 말을 하게.
그냥 조사나 시작했으면 좋겠다. 내가 배신했다고 믿는 황태자에게 이번에야말로 나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도록.
그때 뭔가 당황한 듯 존 마이너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뭘 말입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각하의 구속을 요청한 것은…… 각하의 안전을 위해서였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자세히 설명하라고 채근하는 나를 두고 존 마이너가 말을 이었다.
“그게 말입니다…….”
* * *
“오랜만이야.”
“앉아.”
샤를마뉴는 눈앞에서 빙그레 웃는 친구를 보며 같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부름으로 황궁에 들어온 시드니 카턴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며 그저 반가워할 뿐이었다.
“잘 지냈어?”
샤를마뉴의 맞은편에 앉으며 시드니 카턴이 물었다. 샤를마뉴가 농담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최근 내게 일어난 일을 너도 알잖아, 시드니.”
최근 그에게 일어난 일을 시드니 카턴이라고 모를 리 없다. 시드니는 아하, 하고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맞다. 내가 괜한 질문을 했네.”
“골치가 아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내 곁에 두었나 싶고…….”
샤를마뉴가 정말로 머리가 아프다는 듯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시늉을 하자 시드니 카턴이 안타깝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잖아, 샤를.”
“그렇지만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내 과실이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고. 이제라도 큰 사고 없이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그래서 어떻게 할 예정이야?”
친구의 부드러운 위로에 다시금 웃음을 회복한 샤를마뉴가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일단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어. 기소가 된다면 내달 중순쯤 1심이 있을 거야.”
“꽤 빠른데.”
“그래야 이 혼란스러운 정국이 빠르게 수습될 거 아냐.”
“그건 그렇지.”
“사실은 그래서 너를 부른 거야.”
뜻밖의 말이었던 걸까. 시드니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나를 왜?”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나한테?”
“응.”
샤를마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체포했잖아, 라파엘 드마뉴.”
“……다 알고 있었구나.”
시드니가 한쪽 눈썹을 꿈틀하더니, 못 이기겠다는 듯 한숨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샤를마뉴가 나를 뭐로 보냐는 식으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모를 수가 없지. 내 친구 시드니 카턴이 대학교수이자 나를 지키는 제정부 요원이라는 것쯤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알았어.”
“그래.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고…… 그래서 뭘 알고 싶은데?”
“이것저것. 일단은 어떤 경위로 라파엘 드마뉴를 체포하게 됐는지. 아직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거든.”
그 이야기는 라파엘 드마뉴를 직접 체포한 시드니 카턴밖에 모르는 이야기다. 샤를마뉴가 궁금해할 법도 했다. 시드니 카턴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풀었다.
“뭐부터 말을 해야 할까…… 첩보를 받았어. 네가 순방을 떠나는 날 테러가 있을 거라는 첩보였지. 누가 보낸 건지는 알 수 없었는데, 일단 첩보를 받았으니 방비는 해야 했어.”
“그리고?”
“공항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데 누군가 게이트를 넘으려다 잡혔다는 소식을 접했어. 가보니까 라파엘 드마뉴, 네 전직 비서관이더라. 무슨 일이냐고 하는데 대답을 안 하는 거야.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 전직 비서관이 왜 여기를 왔을까. 어떤 이유로 몰래 넘으려고 했을까. 추궁하는데 굉장히 초조해하는 기색을 보이며 계속 안쪽으로 가려고 했어. 마치 무슨 일이 있을 것을 안 사람처럼 말이야.”
그 말에 샤를마뉴의 표정이 알 만 하다는 듯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 얼굴을 보며 시드니 카턴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안쪽에서 그 난리가 났어. 라파엘 드마뉴가 말했지.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고. 그는 테러가 있을 줄 미리 알았던 거야. 도대체 라파엘 드마뉴는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 첩보를 준 사람과 같은 편이 아니고서야?”
“그럼 라파엘 드마뉴는 오히려 날 살리려고 했다는 건가?”
“글쎄. 그건 확실하지 않아. 오히려 그런 식으로 병력을 돌린 후 너를 죽이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가 정말로 너를 구하려 했다 하더라도 이때까지는 그들과 같은 편이었을 수 있지. 그렇기에 용의자와 한패로 확신하고 체포했어.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보내버린다면 그가 도주해도 붙잡을 방법이 없잖아.”
“흐음…….”
샤를마뉴의 냉소적인 얼굴이 깊이 침잠했다. 그 얼굴은 일견 깊은 배신에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라앉은 연녹색 눈동자를 보며 시드니 카턴이 옅게 웃었다.
“그다음은? 뭐가 궁금해?”
“……그 투서를 보낸 사람은 찾았어?”
투서를 보낸 사람이라. 시드니 카턴은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그것도 라파엘 드마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질 거라고 예상해. 그는 놀랍게도 투서의 존재까지도 알고 있었거든. 누가 보냈는지, 어떤 과정으로 전해졌는지 그는 알 거라고 제정부에서는 판단하고 있어.”
“……그렇군.”
“너무 심란해하지 마, 샤를. 네 잘못이 아니니까.”
시드니 카턴은 진심으로 샤를마뉴를 위로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진심이다.
과거를 되돌린 건 라파엘이니까. 모든 것은 그의 잘못이다. 애초에 그가 과거를 돌리지 않았다면 순결한 샤를마뉴는 그저 영문도 모르고 죽음을 맞았을 것이고, 제국은 슬픔 속에서 밝은 미래로 나아갔겠지.
이 모든 것을 망친 사람은 라파엘이다. 그는 벌을 받아야 한다. 시드니 카턴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샤를마뉴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시드니 카턴은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무엇이든 대답할 용의가 있었다. 그게 상처 입은 샤를마뉴를 더욱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래서 그가 조금 더 성숙한 제국의 황태자가 된다면야 못할 것이 없다.
그 순간, 샤를마뉴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때 내가 보낸 독배는 어땠어?”
빙그레 웃고 있던 시드니 카턴의 얼굴이 쩡, 하고 금이 갔다. 얼어붙은 시드니 카턴을 가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샤를마뉴가 작은 비웃음을 매달고 속삭였다.
“제법 효과 좋은 놈으로 골라서 보냈는데…….”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네.”
“그래?”
시드니의 부정에 샤를마뉴가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와인 잔을 매만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모른다니 좀 슬프네. 널 위해 엄선한 독배였는데 하나도 기억을 못한다니.”
“샤를마뉴.”
“그래서 이런 짓을 또 벌인 걸까.”
시드니 카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시드니 카턴이 샤를마뉴를 노려보았다.
샤를마뉴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마셔볼래? 시드니? 어쩌면 기억이 날 수도 있잖아.”
“…….”
“아니, 루이 채스터턴이라고 해줄까?”
* * *
“구속은 각하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달칵,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조사실 안과는 달리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깊이 찔러왔다.
어지럼증이 몰려와 벽을 짚고 서자, 장시간 바깥에서 대기하던 변호인이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
“조사는 무사히 마치셨고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답변에 변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검찰 측에서 무엇을 물었습니까?”
“…….”
“각하.”
조사 내용이 무엇이었더라.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
“전혀, 모르겠습니다.”
조사를 시작하기 전, 존 마이너가 전한 말은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 공습처럼 내 머릿속을 초토화로 만들었다.
‘일단 구속이 된 동안에는 외부에서 접근할 방법이 없어요.’
‘모양새는 좀 빠지지만, 각하의 안전만큼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황실보다 더 안전하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를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분께서 고개를 숙여 부탁한 일인 만큼 저희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고 했다. 나는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샤를마뉴 멜링턴. 평생을 황태자로 살아온 사람이다. 황태자답지 않게 소탈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다.
고개를 숙인다는 것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온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테러 공범이라고 지목된 나를 위해서 머리를 숙였다고?
‘최선을 다해, 지는 싸움이 되도록.’
존 마이너는 황실과 검찰이 지는 싸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최선을 다해 내 무죄를 입증하겠다는 뜻이다.
변호 측과 검찰이 같은 입장에 섰다.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무고한 사람을 기소하여 재판까지 끌고 갔는데 무죄로 판명 날 경우 황실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할 게 뻔했다.
테러 사건을 이용하여 무고한 사람까지 엮어 안보광풍을 일으킨다는 여론의 역풍을 맞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비난의 화살은 분명 샤를마뉴가 될 터다.
‘기소하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애초에 불기소처분을 내리면 된다. 그럼 재판까지 가지 않으니 황실도 안보광풍이네 뭐네 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나도 혐의를 벗고 자유인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존 마이너는 고개를 저었다.
‘기소까지는 가야 합니다. 구속기간이 너무 짧아요.’
‘…….’
‘기소 전 최대 구속기간이 30일이에요. 그 말은 즉 30일 동안은 각하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지만, 그 이후로는 장담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기소가 된다면 1심 판결이 떨어지는 날까지 최대 구속 기간이 6개월로 연장됩니다.’
‘그래서요.’
‘다른 범인들이 30일 안에 잡힌다면야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조금 벅차니까요.’
결국 나를 보호하기 위해 기소까지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기소까지 해서 나를 법정에 세우고, 검찰 측에서는 지는 싸움을 하고 나는 예정대로 이기면.
그러면.
……너한테는 뭐가 남는데, 샤를마뉴?
“……변호사님.”
“예.”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말씀만 하세요. 힘닿는 대로 도와드리겠습니다.”
벽을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지럼증이 조금 가셨다. 이제야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명백히 보였다.
“여기서 나가는 즉시 황태자에게 알현 요청을 넣으세요.”
“……예?”
“그리고…….”
죽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를 비난의 화살받이로 이용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판은 나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두 번은 당하지 않아. 소중한 사람을 잃을 생각도 없다. 내가 떨쳐내야 할 것은 죽지도 않고 300년을 쫓아온 과거의 망령뿐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라는 오래된 격언을 되새기며 나는 웃었다.
* * *
“……각성했구나, 샤를마뉴.”
그렇게 되묻는 시드니 카턴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마 그까지 각성할 줄은 몰랐다. 이건 그가 본 미래에 없었던 부분이다.
예지를 비켜 간 샤를마뉴의 각성에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샤를마뉴는 더욱 진하게 웃었다.
“응. 덕분에.”
“…….”
“네가 그때 라파엘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깨닫지 못했겠지.”
라파엘의 전생 이야기를 듣고 그와 한바탕 다툰 후에 황궁으로 돌아와 불편한 마음으로 잠을 청하다가 그는 전생의 단편을 보고 말았다.
그러니까 샤를마뉴가 각성한 것은 시드니 카턴의 도움이 컸다.
“그 은혜를 갚으려고.”
“……무슨 은혜?”
“내게 과거를 떠올리게 한 답례로 너에게 또 다른 술을 한 잔 줄까 하는데.”
시드니 카턴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전부 너를 위함이었어.”
“그때도 넌 그렇게 말했지.”
“너와 제국을 위해서라고.”
샤를마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
“제국을 향한 너의 충성심을 잘 알아서 내리는 술이야. 받으라고.”
그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종을 울리자 밖에 서 있던 시종이 와인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와인에 붙은 라벨을 알아본 시드니 카턴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저것을 알고 있다. 300년 전, 그의 목숨을 앗아간 와인을 어찌 못 알아볼 수 있겠는가.
샤를마뉴가 잔에 와인을 3분의 1 정도 채웠다. 시드니 카턴은 가만히 와인 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샤를마뉴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무서워?”
“…….”
“너는 고작 사흘 아프다가 죽었잖아. 근데도 이게 그렇게 무섭나? 손도 뻗지 못할 만큼?”
샤를마뉴는 300년 전 루이 채스터턴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내린 독배를 마시고 사흘간 각혈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그의 죽음은 병사로 처리되었다. 그가 죽인 사람들에 비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쉬운 죽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간 독주를 보며 두려워한다. 그 광경이 우스웠다. 남의 죽음은 그리도 쉽게 계획하면서 자신의 죽음은 아쉽다 이거지.
시드니 카턴이 조용히 대답했다.
“이걸 마시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덧 그는 루이 채스터턴이 되어 있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폐하께서 마시라 하신다면 마시겠습니다.”
“아하.”
“하지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군요.”
델루니안은 말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 루이 채스터턴이 물었다.
“제가 이걸 마시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건 네 알 바가 아니야.”
“아니요, 그걸 알아야겠습니다. 제가 죽으면 그자를 살려두실 겁니까? 폐하의 목숨을 노린 자입니다. 도대체 무얼 믿고 그를 살려두신단 말씀입니까.”
델루니안의 연녹색 눈이 차게 식었다. 300년의 시간을 넘어 망령처럼 되살아온 루이 채스터턴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지독히 교활했다.
그의 이면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말투에 깜빡 넘어가고 말았으리라.
델루니안은 억울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 채스터턴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대답했다.
“설령.”
“…….”
“그가 나를 정말로 죽이려 했고.”
“…….”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 이제 와서 발뺌하는 거라고 해도.”
“…….”
“그래도 괜찮다. 그는 내게 그럴 자격이 있어.”
델루니안의 답변에 루이 채스터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 충격받은 듯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나마 그의 심경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루이 채스터턴이 황당하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많이 변하셨군요.”
델루니안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네 덕분에.”
“놀랍습니다. 그렇게 타인을 불신하던 폐하께서 이제는 무턱대고 타인을 신뢰하신다니…….”
“신뢰하지 않는 삶이 어떤 파국을 불러오는지 직접 배웠으니까. 머리가 있고 학습능력이 있는 자라면 당연히 알겠지.”
그 말에 루이 채스터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습니다.”
“…….”
“제 오판이었군요.”
루이 채스터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인 잔으로 손을 뻗은 그가 망설임 없이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델루니안의 눈이 날카로웠다.
“아십니까, 폐하?”
“…….”
“저는 그때 얼마든지 독배를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 델루니안이 내린 독배지만 이미 영지로 돌아간 이후였으니 얼마든지 마시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어차피 황제는 황도에 묶여 있으니 독배를 마시지 않았다 하여 채스터턴의 영지를 쳐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독배를 마셨던 이유는.
“폐하께서 그 사건을 고작 독배로 덮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황제였던 폐하께서는 얼마든지 사건을 다시 파헤칠 수 있었죠. 사건을 다시 파헤쳐 진짜 공모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여, 불명예스럽게 죽은 이들을 다시 복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지요.”
델루니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사건의 주동자인 저와 황후를 은밀히 독살하는 것으로 폐하는 자신의 짧은 복수를 끝낸 겁니다. 왜였을까요.”
루이 채스터턴이 빙그레 웃었다.
“그건 바로, 폐하께서 제국을 지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틀린가요?”
그 순간 델루니안은 입을 다물었다. 과거의 기억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왜…… 그를 그런 방식으로 죽였더라. 어째서였지. 엄청나게 분노했다는 사실은 떠오른다.
하지만 어째서 독배라는 방식으로 그를 죽였는지에 관해서는 떠오르지 않았다. 델루니안이 작게 동요한 틈을 타 루이 채스터턴이 그를 흔들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분노했으면서도, 기껏 안정시켜 놓은 제국을 다시 흔들 자신은 없었던 거죠.”
“그 입 다물어.”
“저는 그것을 알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독배를 들었습니다. 저는 죽지만 저의 죽음으로 제국은 안정을 얻기에.”
탁, 와인 잔을 내려놓은 루이 채스터턴이 돌연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너는.”
“…….”
“고작 라파엘 드마뉴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려고 하네.”
샤를마뉴는 급작스럽게 시드니 카턴으로 돌변한 그를 노려보았다.
“날 때부터 가진 권력과 당연히 네 것이어야 하는 제국…… 그 모든 것을, 고작 그 사람 한 명 때문에.”
그가 불타는 눈동자로 샤를마뉴를 노려보며 짓씹듯 내뱉었다.
“너와 함께 만든 이 제국은 온전히 너만의 것이 아니다. 내 피가 흐른 것이기도 해.”
“……미쳤군.”
“나는 이 제국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절대로. 라파엘 드마뉴를 다시 한번 희생시키는 결과가 있더라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시드니 카턴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만 가봐야겠어. 라파엘 드마뉴…… 그 사람을 위한 만찬을 준비해야 하거든.”
자리에서 일어난 시드니 카턴이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과장된 인사를 샤를마뉴에게 전하며 그가 속삭였다.
“그럼 안녕히, 친애하는 황태자 전하.”
몸을 일으킨 그가 샤를마뉴를 바라보다가 당당하게 등을 돌렸다. 문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은 거침이 없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응접실 안. 샤를마뉴는 조용히 손을 뻗어 와인 잔을 움켜쥐었다. 와인 잔을 움켜쥐는 그의 손이 분노로 하얗게 질려 있다.
그가 와인 잔을 기울였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와인은 씁쓸하고 또 지독했다.
한순간 와인 잔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쨍그랑! 파열음을 내며 깨진 와인 잔을 보며 샤를마뉴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종을 흔든 그가 시종이 들어오자마자 명령했다.
“총무 비서관에게 연락해요. 지금 당장 ‘그 사람’을 부르라고.”
“예.”
“최대한 빨리.”
시종이 알겠다며 고개를 수그리고 응접실을 나섰다. 샤를마뉴는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눈을 감았다 떴다. 연녹색 눈동자에 잠시 흔들렸던 의지가 다시금 깃들었다.
‘고작 라파엘 드마뉴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려고 하네.’
‘날 때부터 가진 권력과 당연히 네 것이어야 하는 제국…… 그 모든 것을, 고작 그 사람 한 명 때문에.’
틀렸어, 시드니.
라파엘 드마뉴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애초에 망가져 있었다. 이미 망가진 것을 붙잡고자 가장 소중한 사람을 또다시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리라.
그로 인하여 세상 제일의 멍청이라 불려도 상관없었다. 그 사람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시드니 카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