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장 (25/34)

24장

검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익숙한 어둠이다.

춥고, 외로운 어둠.

그곳에 나는 혼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기 때문이다.

영혼의 회랑. 모든 곳으로 연결되는 어둡고 외로운 세계. 이곳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나는 모든 시간 속에 존재하며, 동시에 모든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한 지점의 빛이 나타났다. 나는 어둠을 헤치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어느 번잡한 거리. ‘나’는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다. 분명 상대방이 잘못한 일인데 그가 먼저 주먹을 치켜들었다.

거참, 성질도 급하시네.

원래대로라면 그를 간단히 제압했겠지만, 선발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나는 그냥 한 대 맞아주기로 결심했다.

“폭력은 좀 곤란하죠, 아저씨.”

그때 어디선가 낯선 사내가 튀어나와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누구지? 운동선수인 나보다 한 뼘이나 더 큰 사내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남자를 단숨에 제압했다. 주먹이 잡힌 남자가 꼴사납게 버둥거렸다.

“가세요.”

한참 동안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던 사내가 남자를 놓아주자 남자가 아픈 팔목을 붙잡고 구시렁대며 재빨리 사라졌다.

얼씨구. 재미있는 상황이다. 운동선수가 낯선 사람에게 보호받는 경험도 드물다. 특히 나처럼 격투를 주종목으로 하는 경우는 더욱.

사내가 뒤를 돌며 내게 물었다.

“괜찮아요?”

“보다시피.”

“다친 곳은 없죠?”

멀쩡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자 남자가 또다시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다행이에요. 선발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내가 누군지 알아요?”

“그럼요. 이안 맥길이잖아요.”

어라라.

“팬이에요.”

“……내 팬이 있을 줄은 몰랐네.”

어릴 적부터 격투기를 해왔고, 지역 단위의 대회에서는 늘 금상을 쓸어 갔지만 이상하게 선발전에서 좋은 성과를 낸 적이 없다.

벌써 세 번이나 선발전에서 떨어진 전적이 있었다. 올해까지 떨어지면 나는 그냥 동네 학원 관장이나 해야 한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은 삶이지. 하지만 스포츠맨으로 태어났는데 가슴에 국기 한 번은 달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성과가 뚜렷한 선수는 아닌데 내 팬이 있다니 의외였다.

“저는 에드가 와일드예요.”

남자가 자신을 밝혔다.

에드가 와일드. 흔한 이름이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첫 번째 팬의 이름 아닌가.

나는 그 이름을 곱씹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드가 와일드가 내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기쁘다는 듯 눈웃음을 치며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잡는 순간, 나는 느꼈다. 이 사람을 예전에 만난 적 있다고. 아주 먼 옛날이었지만 분명 만난 적 있다고.

시야는 다시 어두워졌다. 몇 번의 삶이 그렇게 눈앞을 지나갔다. 샤를마뉴는, 아니, 샤를마뉴의 영혼을 가진 그는 몇 번이고 내 눈앞에 나타났다.

눈앞에 나타나서 운명처럼 사랑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행복하게 입을 맞추고, 살을 섞고, 어느 때에는 그가 여자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여자로 태어나기도 하고, 그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째서 이번 생에서는 그럴 수 없었을까.

수많은 생이 있지만, 라파엘과 샤를마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다.

루크와 델루니안의 이름으로 만나는 일이 다시는 없는 것처럼 이 삶은 두 번 돌아오지 않는다. 매 순간순간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했지?

라파엘의 삶은 라파엘의 삶으로, 루크의 삶은 루크의 삶으로. 그렇게 남겨뒀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 오랫동안 루크를 놓지 못했다. 그래서 라파엘의 삶을 버렸다.

허공중에 몸을 던지는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짙은 후회였다. 뛰어내린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닌, 이번 삶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다음 생을 기약하며 뛰어내렸지만 그래도 가장 애달프고 아쉬운 것은 내가 끝낸 지금의 삶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원망도, 증오도, 슬픔도 모두 잊고 그저 행복하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아니, 그냥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 살았어야 했다. 그렇게 그가 허무하게 갈 줄 알았으면 그 짧은 시간만큼이라도 행복하게 보냈어야 했다.

모든 것을 후회한다.

그를 원망한 것. 그를 저주한 것. 그를 무시한 것. 그를 보며 전생을 떠올린 것. 그에게 가슴 아픈 이별을 준 것. 그의 마음에 칼을 꽂은 것. 그에게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화를 낸 것.

그리고,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말 돌리지 마. 뭐가 미안한 거냐고.’

‘자격이 없다는 건 나도 알지만.’

‘샤를마뉴!’

‘한 번만 말해도 될까?’

그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것.

한 번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단 한 번만, 그가 살아 있는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후회도, 원망도 남지 않게 단 하루라도 살아 있는 그와 만날 수 있다면.

그 순간 영혼의 회랑이 사방으로 밝아졌다. 반점처럼 보이는 빛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마치 선택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위를 밝히는 빛들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언제라도 갈 수 있어. 가장 돌아가고 싶은 때는 언제야?

모든 시간 속의 내가 물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형체 없는 눈물이 볼을 적셨다.

가장 돌아가고 싶은 날은.

그날은…….

* * *

눈을 떴다. 코끝에 와 닿는 공기부터 달랐다. 몸을 일으키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날이다. 그날. 두 계절 전의 어느 날. 먹고, 자고, 일어나고, 에반과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경치를 구경하며 책을 읽고, 공부하고. 그게 전부였던 나날 중의 어느 날.

샤를마뉴가…… 죽은 날.

그날로 돌아왔다. 바닥으로 처박혔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비명이 터질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날이야. 정말로 돌아왔어.

믿을 수 없었다. 이때까지 영혼의 회랑을 건넌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내 의지대로 건넌 적은 처음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어두운 사위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아직 새벽 4시 45분이었다. 그의 비행기는 아침 8시 30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다.

아직 시간이 있어.

울음이 터질 것 같다. 안 돼. 울면 안 돼. 진정해. 차분하게 생각해. 이건 마지막 기회다. 살아 있는 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어쩌면, 정말 어쩌면 미래를 바꿀 수도 있을지 몰라.

놓칠 수 없어.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마지막이야. 마지막마저 허무하게 놓친다면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다급히 옷을 꿰어 입고 에반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잠들어 있던 그가 내 기척에 놀라 깨었다.

“무슨 일이야.”

“차 좀 빌려줘.”

“뭐?”

“급한 일이야. 제발!”

그가 황당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상할 거다. 알아.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여기서 공항까지 전력으로 달리면 2시간 30분이 걸린다. 당장 달려 나간다고 해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제발 부탁이야. 한 시가 급하단 말이야.

잠시 후 에반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운전이나 할 수 있어?”

“…….”

그때 깨달았다. 내가 운전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작년 여름 교통사고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겨 못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택시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맞아. 그랬지. ……나 운전할 수 있을까? 운전대를 잡는다는 생각만 해도 손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내 차를 들이박던 맥케인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의 그 충격도 함께.

하지만.

“하지만…… 가야 해.”

나는 가야 해. 목소리가 인정사정없이 떨렸다. 엉망이다. 내 얼굴도 목소리 못지않게 엉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해. 또다시 사고가 나서 내가 죽더라도 나는 가야 해.

그런 나를 보며 에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어?”

“너 지금 그 상태로 가면 죽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려다줄게. 가자.”

그가 열쇠를 집는다.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았다.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는 에반에게 수도 인근 공항의 이름을 대었다.

그가 잠시 멈칫하는 게 보였다. 오늘 샤를마뉴가 해외 순방을 떠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타부타 묻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에반의 차는 빠르게 도로 위를 달린다. 동쪽 끝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검은 하늘이 푸르게 질려갈수록 손발은 차게 식어갔다.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이제는 비서관도 무엇도 아닌 내가 만나고 싶다고 들여보내 줄 경호관들이 아니다.

만약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가설만으로도 심장이 떨어지는 상상. 싫어. 이런 상상은 하지 않을 거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이번에 그를 만나지 못하면 ‘샤를마뉴’라는 이름의 그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마침내 차는 전력으로 달려 7시 45분경 공항에 도착했다. 전용기의 출국 때문에 모든 비행 일정이 뒤로 늦춰져 있어 경호관과 공군들, 그리고 경찰들 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경찰이 나를 붙잡았다.

“출입하시면 안 됩니다.”

“잠시, 잠시만요. 지금 꼭 들어가 봐야 합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잠깐.”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 나를 부드럽게 밀치며 에반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아마도 악명 높은 제정부의 표식인 듯, 경찰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안에 용무가 있어서 꼭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하, 하지만…….”

“못 믿겠나?”

믿게 해줄까? 에반이 사납게 웃었다. 그 모습에 경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경찰이 살짝 문을 열었다. 자기는 모른 척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에반이 ‘고맙네’ 하고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게이트 안으로는 나도 못 뚫어.”

공항 안으로 들어온 에반이 말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 나 혼자였으면 공항 안으로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황태자는 이미 게이트 안에 있을 텐데.”

“…….”

그 부분이 사실 제일 막막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단에게 연락해도 그는 황후 전담 비서관이라 게이트를 통과시켜 줄 수 없다. 비서실장에게 연락하면 자초지종을 모조리 납득할 만하게 설명해야 하는데 그가 납득할지 미지수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따졌을 때, 지금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샤를마뉴와 함께 순방을 갈 비서관. 소냐 하워드.

……하지만 그녀에게는 연락할 수 없다. 어떻게 그녀에게 연락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그를 죽였는데.

‘백작의 정체를 찾아냈어.’

‘렘퍼드였어.’

‘……소냐 하워드 렘퍼드의 아버지 말이야.’

렘퍼드 백작이 젊은 시절 입양한 진짜 아인 퍼스. 어릴 적부터 받아온 세뇌로 인해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른다던 ‘딸’.

아인 퍼스가 비서실장을 피습하던 날, 그가 가스탄을 터뜨리지 않았더라면 본당 안에서 황실 일가를 습격할 예정이었던 사람. 가스탄이 터지며 경호원이 들이닥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고 했지.

이후 아인 퍼스가 잡혀 들어가고 마지막의 마지막을 기하여 더욱 철저히 신분을 숨긴, 레브로비치 고유의 폭탄 제조 방식과 새로 개발된 신소재를 응용하여 폭탄을 제조한 샤를마뉴의 비서관. 소냐 하워드 렘퍼드.

……그리고 그녀를 후임으로 지목한 나.

죄책감에 또다시 심장이 욱신 아파왔다.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감상은 그만. 나는 지금 그를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한다면 최소한 통화라도 해야 해.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그를 느끼고 싶어.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같이 죽고 싶다. 더 이상 혼자 남는 건 싫어.

그가 죽은 후의 세상을 이미 한 번 겪었다. 그 깊은 절망과 고독을 두 번은 겪을 자신이 없었다.

방법을 찾으려 궁리하며 에반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할게.”

“……말해봐.”

“산티교 대사제를 찾아줘. 그가 위험해.”

“뭐?”

“살해당할 거야. 아니, 이미 당했을지도 몰라. 최대한 그를 빨리 찾아내야 해.”

어쩌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 몰라. 간절한 희망을 담아 그에게 부탁했다. 에반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떼었다.

“너…….”

“부탁이야.”

갑자기 그가 나를 껴안았다.

“라파엘.”

“응.”

“혹시라도 멍청한 생각은 하지 마.”

“…….”

“마지막 부탁이 아닐 거라 믿는다.”

네 죽음을 두 번이나 보게 하지 마.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뭐라고? 그가 멀어졌다. 에반, 하고 부르려는데 그가 손을 저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테니.”

“…….”

“이따가 보자.”

그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네 죽음을 두 번이나 보게 하지 마. 그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네 죽음을 보게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두 번이나 보게 하지 말라니.

그렇다면 이미 한 번 봤다는 얘기일까.

언제? 내가 뛰어내릴 때?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걸 기억하지? 도대체 어떻게……?

그때 공항 중앙에 설치된 시계탑에서 종이 울렸다. 8시를 알리는 종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이제 시간은 30분이 남았다.

* * *

그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어딘가 기억이 불분명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같이 의전 차량을 탄 것은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기억을 잘라낸 것처럼 그 지점이 흐릿했다. 차 안에서 잠이라도 들었던 걸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요즈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터라 그는 틈만 나면 깜빡깜빡 졸곤 했다. 매일 밤 찾아오는 악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악몽의 내용은 300년 전 자신의 팔을 베던 때와 똑같다. 거짓된 배신감에 미쳐서 가장 귀한 사람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한다는 내용.

그것이 마냥 꿈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어째서 300년 전의 기억은 조금도 희석되지 않는 걸까.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으니 조금쯤 희석될 법도 하건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그는 매번 새롭게 괴로워했다.

가끔은 꿈이 지나치게 생생해 꿈과 현실이 분간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오른팔을 움직일 수 있으면 현실이다. 오른팔을 움직일 수 없으면 악몽의 연장이었다. 그 사람을 죽인 이후의 일이 꿈속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 사람의 환영이 눈앞에서 맴도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육체 속에 갇힌 영혼은 아무리 용을 써도 몸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멍청한 육체는 오른팔을 쓸 수 없어 버둥대는 사랑을 이어갔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이 꿈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걸까. 이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지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쓰게 웃었다.

모든 시름을 잊고 평온을 취해야 하는 밤마다 끔찍했던 전생을 떠올리는 것은 신이 내린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그는 자신이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을 떠올리면 가슴이 턱 막히기도 했다.

어쩌면 내일.

어쩌면 평생.

아니지. 어쩌면 다음 생까지 이어질 수도 있겠군.

그는 눈을 감으며 멍하니 다음 생을 상상했다. 사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생이라니. 아직은 멀고 먼 이야기다.

신체 건강한 청년인 그가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아주 먼 이야기인데 다시 태어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를까.

황제 델루니안으로 죽었다가 황태자 샤를마뉴로 태어나기까지 300년의 시간이 걸렸으니 이번에도 30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그때, 감히 내가 또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송년 축제의 밤을 회상했다. 계획에 없던 담화문을 발표한 후 모든 사람이 놀라 그에게 달려든 밤이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랬냐는 질문이 잇따랐지만 그는 대답 없이 자리를 피했다. 그 모습에 다들 한순간 충동적으로 헛소리를 한 거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사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300년 전 자신이 완성한 제국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친 제단 위에 지은 것이었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완성되지 않았을 제국의 근본 속성은 결국 희생이었다.

그 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국의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희생되었던가.

피를 흘리고, 배를 굶고, 기아와 역병에 시달리며 뼈 빠지게 일했지만 투표권 하나 없는 국민들은 썩어가는 황실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하에 온갖 탄압을 받고 있었다.

언제까지 희생을 자양분으로 삼아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근본부터 잘못된 제국은 없어져야 하는 게 맞다. 자신이 만든 제국이니 자신의 손으로 그 문을 닫아야 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예정에 없었던 담화문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담화문을 발표하며 그는 계속해서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보지 않으려 해도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계속해서 그 남자를 향해 시선이 흘렀다.

그 남자는, 자신이 만든 제국만 아니었다면 부모님을 잃는 슬픔을 겪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만든 제국만 아니었다면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자신이 만든 제국만 아니었다면 전생을 깨닫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찬란할 수 있었던 그 남자의 삶은 모두 자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가장 견딜 수 없었다.

어째서 당신의 삶은 항상 나로 인해 더럽혀지는가.

그는 더 이상 그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조용히. 아무런 잡음도 만들지 않고. 그가 바라던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지만 마지막까지 염치가 없었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는 창피한 자기 자신을 가리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말 돌리지 마. 뭐가 미안한 거냐고.’

‘자격이 없다는 건 나도 알지만.’

‘샤를마뉴!’

‘한 번만 말해도 될까?’

그때 남자는 귀를 틀어막았다. 무슨 예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듣기 싫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는 남자의 모습에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야. 나는 죄인이다. 용서를 받기 전에는 어떤 짐을 지우는 말도 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는 용서받기를 포기한 지 오래였으므로,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됐다. 그런데 염치없이 감히 그 말을 하려고 했다니. 짙은 자기혐오가 밀려왔다.

미안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내 말로 인해서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없도록 할 거야. 당신은 그저 나를 잊고 편안히 살아가면 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속죄를 다할 테니…….

그 밤이 가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는 홀로 앉아 그런 다짐을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송년 축제가 마지막 출근이었던 그는 비서실을 관두자마자 피붙이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떠나 버렸고, 그는 홀로 남아 자신의 담화문 때문에 몸져누운 황제를 대신하며 황궁을 지켰다.

홀로 남아 황궁을 볼 때면 그는 문득 300년 전과 현실이 헷갈렸다. 그는 없고 자신만 홀로 남은 현실이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다시금 오른팔을 살핀다. 혹시 이게 지독한 악몽은 아닐까 싶어서.

물론 악몽은 아니다. 악몽보다 더한 현실일 뿐.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그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자 옆에 시립해 있던 비서관이 말을 걸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괜찮아요. 그런데 점검은 언제 끝나는 겁니까?”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어제 시험 비행은 안 했나요?”

“분명히 했고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는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8시 30분 이륙이니 8시 15분인 지금 그는 이미 탑승을 완료했어야 한다. 하지만 기체에 문제점이 발견되며 다시금 점검을 하게 되어 아직도 라운지에서 탑승을 대기하고 있었다.

8시 30분이 넘어서도 점검이 끝나지 않으면 그는 다른 전용기를 타고 가야겠지만, 다른 전용기는 아직 시험 비행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다. 여차하면 일정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 그럼 일이 많이 복잡해지지만.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한숨 소리에 옆에 선 비서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따지고 보면 비서관의 잘못도 아니다. 그는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 미치도록 밝은 날이다. 크게 춥지도 않고 바람도 선선한 날.

당신은 뭘 하고 있을까? 그의 생각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남자에게로 튀었다.

오늘 날이 아주 좋아. 산책하는 건 어떨까? 당신의 건강이 괜찮은지 모르겠다. 병원은 정기적으로 가고 있어? 라윈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이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아플까 봐 걱정이야. 아프지 마.

이젠 옆에서 지켜볼 수도 없는데 그 남자가 아플 것까지 걱정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그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면 그가 계속 옆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얼마 안 가 깨어질 행복이지만.

……보고 싶어. 보고 싶다는 바람조차 주제 넘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 보지 못한다면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나를 부르는, 당신의 목소리를…….

그때였다.

-……뉴!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소리는 벌써 온데간데없었다.

“방금.”

무슨 소리 듣지 못했냐고 비서관에게 물으려던 그는 다시금 들려오는 무전 소리에 입을 닫았다. 무전은 옆에 선 경호관으로부터 들려왔다.

-치직…… 여기는 C5, C5. 괴한 난입, 출입 통제ㅈ…… 어이! 치지직 ……샤를마뉴!

그 순간 그는 무전기를 낚아채고 있었다. 경호관이 당황해서 이러시면 안 된다 소리쳤지만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착각이 아니야.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황태자다.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이지?”

-죄송합니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괴한이 들어와서…… 곧 제압하겠습니다.

“제압?”

그때 무전을 타고 탕! 소리가 들렸다. 총소리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건드리지 마! 그 사람에게 발포하지 마라, 이건 명령이다!”

-하지만 원칙상…….

“하지만이고 뭐고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알아들어?!”

망할. 그는 입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음이 급했다.

C5랬지. C5면 게이트라는 뜻이다.

게이트 앞에서 난입하려는 괴한.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누구일지 확신이 섰다. 그 사람이 맞을 거다. 어째서 여기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가 자신을 찾으러 왔고, 아무런 신분도 아닌 그는 지금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 가서 빨리 그를 구해줘야 하는데.

그 순간.

“어딜 가시는 겁니까?”

비서관이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히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봤을 텐데도 여상한 목소리다.

그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비서관은 상황에 맞지 않게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전하께서는 가실 수 없습니다.”

“뭐?”

“곧 점검이 끝납니다. 탑승하실 시간이에요.”

“잠깐이면 돼. 아주 잠깐만 다녀올 테니…….”

“안 됩니다. 아주 잠깐도 안 돼요.”

어째서? 그는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점검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곧 끝난다니? 그리고 어째서 아주 잠깐도 안 된다고 저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는 거지?

“……넌 뭐야. 내가 급한 일이라 하잖아.”

“저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왜.”

“이유는 없습니다. 가실 수 없어요. 지금, 탑승하셔야 합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하다. 그는 눈으로는 비서관을 바라보며 온 감각으로는 자신의 옆에 붙어선 경호관들을 체크했다.

라운지에 함께 선 경호관은 두 명. 그들은 지금 비서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경계하는 태세도 아니다.

자신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저들이 단체로 수상한 걸까.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물었다.

“내가 가야겠다면?”

“정 가셔야겠다면…….”

비서관이 그의 옆에 선 경호관에게로 다가갔다. 아까 무전기를 빼앗긴 그 경호관이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검은색 무언가를 꺼냈다. 두말할 것 없이 총이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장전한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를 쏘고 가세요, 전하.”

그는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향해 빙그레 웃는 비서관을 바라보았다.

“쏘고 가라고?”

“예.”

“진심이야?”

소냐 하워드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샤를마뉴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소냐 하워드의 단호한 대답에 잠시 침묵하던 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

“총, 내놔.”

소냐 하워드가 멈칫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인 듯 일순간 당황한 기색이 그녀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곧 원래의 표정을 회복한 그녀가 샤를마뉴에게 총을 내밀었다.

“전하께서 기어코 가신다니 어쩔 수 없네요. 여기를 쏘셔야 합니다. 정확히 여기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두툼한 겨울 코트에 가려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분명히 심장 위였다.

……심장을 쏘란 말이지.

묵직한 질량의 총은 보지 않아도 탄환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을 꿰뚫는 데에는 한 발이면 족하다. 한 발. 이 한 발이면 그녀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

총구는 그녀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었다. 방아쇠를 건 검지에 힘이 들어갔다. 당길까, 말까. 망설임은 짧았다.

탕!

검은 총신이 반동으로 크게 튀었다. 그는 반동을 억누르며 연속으로 총을 쏘았다.

탕! 탕! 탕! 탕!

귀를 찢는 총성이 라운지 안을 휩쓸었고, 총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잠시 그의 시야를 가렸다. 총성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끔찍한 정적이다.

그리고 정적마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상하잖아.”

단 하나의 상처도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샤를마뉴를 노려보는 소냐 하워드다.

그녀는 자신을 단 한 번도 맞추지 않고 피해 간 다섯 개의 총탄을 보며 분노인지 경악인지 모를 얼굴로 되물었다. 어째서 자신을 쏘지 않았냐고.

그는 마지막 한 발을 남겨둔 채 대답했다.

“이 총 말이야.”

“…….”

“분명 보안 검사 때 기내에 탑승하는 경호관들은 총기류를 전부 회수해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의 시선은 느릿하게 경호관을 향해 돌아갔다. 두 명의 경호관은 파란 낯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걸리지도 않고 이걸 들고 들어올 수 있었을까.”

게다가 말이지.

“이건 경호실에서 지급하는 권총이 아니잖아.”

“…….”

“용도를 알 수 없는 무허가 권총 한 자루와 함께 들어온 경호관. 그리고 그의 품에서 당연하다는 듯 권총을 뽑아 쓴 비서관. 비서관은 그게 거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게다가 나더러 비행기는 꼭 타야 한다며 총으로 쏴서 죽이라니, 앞뒤가 좀 맞아야지.”

황태자라고 살인에 대한 면죄부를 얻는 것은 아니다. 비서관의 행동이 의심스럽다 하여 그녀를 쏘아 죽일 권리를 가질 수는 없다.

소냐 하워드를 쏘아 죽인다면 어쨌든 그는 순방을 가지 못하고 살인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된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어째서 자신을 쏴 죽이라는 걸까.

……분명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도 바로 그녀의 왼쪽 가슴에.

탕!

마지막 한 발을 바닥에 박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뭘 계획하고 있든,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

“비켜.”

이미 바깥은 여섯 발의 총성으로 소란스러웠다. 문을 어떻게 잠근 건지 열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덜컹대기만 하지만, 머지않아 다른 경호관들과 경찰 군인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때까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경호관 두 명과 여성 비서관 한 명.

총은 아마도 이 한 자루가 전부일 것이고(그렇지 않다면 이미 다른 총을 꺼냈겠지), 체술로는 자신도 밀리지 않으니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이 상황을 완전히 제압했다는 자신이.

문을 지키고 선 경호관들이 파랗게 질린 낯으로 저들끼리 눈을 굴렸다.

낭패감과 패배감으로 얼룩진 얼굴들을 보며 그는 싸늘하게 웃었다. 저들에 대한 조사는 일단 라파엘을 찾고 난 이후에 진행해도 늦지 않다.

그는 탄창이 모두 빈 권총을 그녀의 발치에 집어 던진 후 몸을 돌렸다.

마음이 급했다. 라파엘이 왔다. 어째서 이렇게 다급하게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생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자신을 찾아왔으니 그로서는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 때였다.

“과연 그럴까?”

“……뭐?”

문이 열리는 것과 군인들이 들이닥친 것은 동시였다. 소냐 하워드의 의미심장한 말에 샤를마뉴가 고개를 돌렸다. 탄창이 빈 총을 든 소냐 하워드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그는 어리둥절해진다. 뭐 하는 거야. 저걸 들어서 어쩌겠다고? 어차피 총탄은 없어. 모르지 않을 텐데…….

……그때 문득, 조금 전 그녀가 한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하께서 기어코 가신다니 어쩔 수 없네요. 여기를 쏘셔야 합니다. 정확히 여기요.’

정확히 ‘여기’를 쏘라던 그녀의 말. 어째서 정확히 그곳이었을까? 다른 곳을 쏴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급소는 여러 군데다. 심장보다 더 위험한 급소도 많다. 그런데 하필 왜 심장이야.

소냐 하워드가 총을 들자 경호관들이 달려들어 그를 감쌌다.

순식간에 달려드는 인파에 그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수많은 머리통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 소름 끼치는 웃는 얼굴은 바로 이 순간을 바랐다는 듯 형형히 빛났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바라던 것을 이루게 된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 그것은…….

“발포해!”

사살 명령이 떨어진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멈춰……!”

탕!

그의 명령과 발포가 이루어진 것은 동시였다.

* * *

애초부터 내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비서실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을 포기한 시점부터 내 목표는 오직 경호실이었다.

민간인을 안에 막 들여놓을 정도로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3년 동안 비서실에서 일하며 안면을 익혀온 경호관이 수십이다. 그들 중에는 나와 제법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내 신분을 알고 내가 그의 전직 비서관이었다는 것을 아는 자들. 그들을 찾아야 했다.

C5 지점에서 그 야단법석을 피운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보통의 소란으로는 경찰 선에서 처리되고 마니까.

내가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가장 안쪽에 황태자와 함께 있는 자들-VIP 의전에서 모든 경호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경호실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지간한 소란으로는 절대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공항경무대 사무실에 끌려와 잠시 대기하고 있으려니 익숙한 얼굴의 경호실 직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내가 기대한 것은 경호과장이지만 나쁘지 않다. 단번에 나를 알아본 그들은 놀라움 반, 원망 반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런.”

“급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지금 잡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말을 끊으며 용건부터 꺼냈다.

“예?”

“지금 당장 경호 책임자를 만나야 합니다.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요.”

이 상황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 이제 이륙까지는 5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경무청 사무실로 끌려올 때쯤 얼핏 무전으로 탑승이 지연되고 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심장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황당한 기색이었던 경호관들이 서로에게 의견을 구하듯 시선을 교환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고민하는 것 같다. 이윽고 결론을 내린 그들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돌아가 상황을 전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경호관들이 돌아섰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들을 보며 애타는 심정으로 시간을 헤아렸다.

탑승이 얼마나 지연될까. 십 분? 이십 분? 순방 때 일정이 지연된 적이 거의 없어 가늠하기 어려웠다.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샤를마뉴는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탑승하면 내리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150명에 가까운 수행원의 보안 검사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탑승하기 전에 막아야 했다.

그래서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실제 시간은 오 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체감으로는 다섯 시간이나 지난 것 같다.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기다렸지만 경호 총책임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빨리 좀 와. 시간이 없다고!

그때였다. 마침내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모든 경찰이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경호 총책임자인가 보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

너무 놀라서 순간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 있어?

“저를 찾았다고요?”

시드니 카턴이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경호 책임자라고?”

“그렇습니다.”

“말도 안 돼. 당신은.”

당신은 경호실 사람이 아니잖아, 라고 말하려던 순간, 시드니 카턴이 웃으며 내 말을 끊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하죠. ……이 사람은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시드니 카턴의 말에 이때까지 나를 붙잡아두고 있던 경찰들이 그러시라며 길을 텄다. 그가 따라오라는 식으로 고갯짓을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경찰들이 순순히 길을 트는 걸 보면 그가 총책임자는 맞는 것 같은데, 경호실 사람도 아니고 신분을 숨긴 제정부 요원이 총책임자인 상황이 나로서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일단 그를 쫓아 사무실을 나왔다. 앞서가는 시드니 카턴은 따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를 멈춰 세우며 물었다.

“이봐, 시드니 카턴!”

“예.”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지? 총책임자라는 말도 안 되는 직책은 뭐고?”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라파엘 당신은 여기에 왜 온 겁니까?”

“내가 먼저 물었어! 대답해.”

시드니 카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명칭부터 수정하는 게 좋겠네요. 이곳에서는 저를 시드니 카턴이라 부르면 안 됩니다.”

“뭐?”

“저는 지금 경호과장인 루이 레비스거든요.”

“……뭐라는 거야, 당신이 왜 루이 레비스야.”

루이 레비스는 나도 익히 아는 경호과장이다. 그는 어디 가고 시드니 카턴이 그를 자처하는가? 자세히 설명하라고 재촉하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수사할 때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밝혀서야 쓰겠습니까.”

“수사라니?”

“며칠 전, 익명의 투서가 도착했습니다. 황태자를 노린 테러가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죠.”

익명의 투서라고? 눈이 번쩍 뜨였다. 시드니 카턴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투서는 아닙니다. 사실 그런 투서를 요즘 일주일에 몇 번씩 받거든요. 그래도 일단 정보를 받았으니 만일을 대비해 수사하러 나온…….”

“아니, 당신이 얻은 정보는 전부 사실이야.”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그가 답답했다. 그의 말을 끊으며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황태자가 위험해. 지금 당장 그를 구해야 해. 탑승을 중지시키고, 당장 그의 비서관부터 조사해.”

“……예?”

“시간이 없어! 빨리 탑승부터 중지시키라고!”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시간이 없다니까? 시드니 카턴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근거라도 있습니까?”

마치 내가 헛소리라도 한다는 식이었다. 그 안일한 반응에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근거? 지금 근거 찾게 생긴 상황이야? 일단 내 말대로 해. 그 이후에 아무 일도 없으면 나를 잡아 처넣든 말든 하라고!”

이렇게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샤를마뉴는 언제라도 죽음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안 돼. 결코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내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시드니 카턴에게 이번에는 매달리듯 말했다.

“내가 헛소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그럴 수 있는데, 지금 헛소린지 아닌지 따질 상황이 아니야. 정말로 시간이 없다고!”

그때, 시드니 카턴이 갑자기 픽, 웃었다.

“압니다.”

“……뭐?”

“헛소리 아닌 거, 알아요.”

그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샤를마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겠죠. 그건 다름 아닌 소냐 하워드 렘퍼드 때문이고요. 지금 탑승을 막지 않으면 그는 죽게 되겠죠. 공중에서 그대로 폭파되면서.”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알고 있냐고요?”

“…….”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니? 나는 시간을 돌렸어. 나는 미래를 본 사람이라고. 설마, 당신도 미래를 봤다는 거야? 내가 시간을 되돌린 것을…… 당신은 기억한다는 말이냐고.

토막 난 생각이 더듬더듬 머릿속을 헤집었다. 말도 안 돼. 시간을 되돌린 걸 어떻게 다른 사람이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공항 내부에 찢어지는 비상벨이 울렸다. 비상벨……?

하얗게 비었던 머리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곤두섰다. 갑자기 비상벨이 왜 울리는 거지?

“이런.”

시드니 카턴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일이 조금 틀어지는 것 같네요.”

“일이 틀어지다니.”

“미래가 바뀌고 있어요.”

미래가 바뀌고 있다……? 그 말에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날, 샤를마뉴가 죽음의 여행을 떠나던 그날. 공항에서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사건 발생 이후로 모든 뉴스를 이 잡듯 샅샅이 살폈지만 그날 공항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랬기에 그는 정시에 이륙했고, 허공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미래가 바뀌고 있다. 비상벨이 울린다는 것은 그 전조였다. 그게 좋은 전조일지 나쁜 전조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때 시드니 카턴이 차고 있던 무전기에서 무전이 울렸다.

-총격 사태 발생, 공 내 폐쇄, 비상 2단계 발령한다.

진짜 루이 레비스의 목소리였다. 샤를마뉴와 함께 안쪽에 있었을 경호과장.

그가 말한 총격 사태는 분명 샤를마뉴와 얽힌 일일 테다. 그러니까 비상 2단계가 발령되었겠지.

비상 2단계는 5등급 체계로 나눠진 비상 관리 체계 중 두 번째로 높은 것으로, 발령 즉시 영장 없이 긴급체포를 할 수 있으며 필요시 사살도 가능한, 어지간해서는 발령되지 않는 등급이었다.

바꿔 말하면 황태자가 그만큼 위험하다는 소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당장, 당장 그를 구해야 해. 패닉 상태에 빠진 채로 생각했다. 그를 구해야 해. 살려야 한다고.

그때 시드니 카턴이 여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총격 사태라니. 아무래도 그녀가 먼저 사고를 친 것 같죠.”

그 평이한 목소리에 기가 막혔다. 지금 저게 할 소리인가?

“……지금 제정신이야? 당신도 미래를 봤으면 알잖아! 이대로 있으면 샤를마뉴가 죽어! 당신 친구가 죽는다고!”

나는 도저히 시드니 카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평온할 수가 있지? 그가 미래를 몰랐다면 모를까 미래를 아는데도 저렇게 평온하다는 것을, 아직도 그의 관이 눈앞에 생생한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때 문득 1심 재판정에서 렘퍼드 백작의 천인공노할 발언에 홀로 무심했던 시드니 카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맞다. 그랬지. 모든 사람이, 심지어는 황실을 싫어하던 대학생들도 황태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슬퍼하는데 그의 친구라는 당신은 저 홀로 고고했어.

나는 그때도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넘어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신 친구잖아. 300년 전에도 함께 제국을 건설한, 나보다도 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잖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할 수 있냐고. 어떻게 그래.

따지고 보면 그날 샤를마뉴가 죽은 것에는, 투서가 들어왔는데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 당신 책임도 있는데 어떻게…….

“……잠깐.”

“뭡니까?”

시드니 카턴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말끔한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잖아.

“투서를 받았다 했지.”

“예, 그렇습니다만.”

“그 투서.”

“…….”

“누가 보낸 거야?”

그 순간, 태연자약하던 시드니 카턴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건 왜 묻습니까.”

“말해봐. 그거, 누가 보낸 거지?”

“모릅…….”

“모를 리가 없잖아. 투서를 받아놓고 발신인이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바로 수사하러 왔다고?”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서 온 투서겠지. 합리적인 의심도 없이 무작정 일단 수사하라고 요원을 보낼 제정부가 아니다.

내가 알기로 그런 투서를 보낼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대사제, 맞지.”

시드니 카턴은 대답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지금 어디 있어?”

“…….”

“말해. 묻잖아. 대사제는 지금 어디 있냐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설마.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그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지만, 친구의 예정된 죽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리가 없어.

아닐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아무리 부정해도 머릿속에는 이미 시놉시스처럼 사건의 개요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째서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했을까.

투서를 받았고 제정부에서 그 일로 시드니 카턴을 수사요원으로 파견했다면, 황태자 사망 사건의 이차적 책임은 시드니 카턴에게 있다.

테러 예고가 있었는데도 막지 못했으니 시드니 카턴은 무능에 대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겠지. 황실이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아무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때 어땠던가. 제정부는 그 사건에 대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그러니까…… 정말로 제정부에서는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투서를 받지 못했으니까. 대사제는 투서를 보냈지만, 그들은 받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된 일일까.

답은 명백했다.

투서를 작성한 대사제는 그것을 먼저 제정부에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투서를 받아 본 사람은 시드니 카턴. 그는 투서의 발신인을 추적해서 대사제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투서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겠지. 그다음에 그는 어떻게 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저 묵과했을 것이다. 왜냐면.

“……샤를마뉴가, 당신의 제국을 해체하려고 해서, 그래서…… 그를 죽인 거야?”

그 말에 시드니 카턴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죽인 건 아니죠.”

“…….”

“렘퍼드가 죽였지 않습니까.”

“당신이 방조한 건 사실이잖아.”

“글쎄요, 방조라고 할까…….”

잠시 고민하던 그가 차게 웃었다.

“대의를 위한 샤를마뉴의 작은 희생이었다고 하는 게 좋겠네요.”

그 순간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그에게 주먹을 날린 상태였다.

“……주먹이 꽤 아프네요.”

시드니 카턴이 붉게 물든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를 내려친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한 대로는 풀리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당장 죽여 버리고 싶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제국이 뭐라고, 이 썩어빠진 제국이 뭐라고 그를 죽여.

“그렇게 화가 납니까?”

“닥쳐.”

“이해는 합니다. 당신은 그가 죽었다고 따라 죽을 정도로 그를 좋아했으니까요.”

“한마디만 더해.”

그 입을 아주 찢어버릴 테니.

“하지만 라파엘, 그렇게 분노할 필요는 없습니다.”

“닥치라고 했지.”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미래가 바뀌고 있다고.”

시드니 카턴은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무전기에 무전이 다시금 울렸다.

-사태 클리어, VIP 안전 구역으로 이동 중. 용의자 신병 확보.

“그는 살아 있습니다.”

“…….”

“죽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를 살렸습니다. 시드니 카턴의 말에 순간적으로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안전 구역으로 이동 중인 샤를마뉴. 그는 살아 있다. 살아…… 있어.

그때였다.

“B0 구역, 용의자 추가 검거 성공. 지원 부탁 바랍니다.”

시드니 카턴이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무전을 쳤다. 뭐라는 거야?

나는 멍하니 시드니 카턴을 바라보았다. 무전을 끝낸 시드니 카턴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싸늘한 표정이 어느 때와 굉장히 비슷했다.

“당신의 추측은 전부 맞습니다.”

“너, 지금 뭘 한 거야.”

“하지만 그건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죠.”

“닥치고 말해! 지금 뭐라고 한 거냐고!”

“당신이 놓친 것을 하나 알려줄까요?”

그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명치에 강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

헉, 하고 비명 지를 새도 없이 의식이 흐려졌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나를 받은 것은 시드니 카턴이었다.

그가 뱀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번에는 왜 투서를 상부에 올렸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테러 때문이라고 했잖아.

“그러게 무작정 쫓아오지 말았어야지.”

“……시드니, 카턴…….”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요.”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시드니 카턴의 싸늘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300년 전 나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던 채스터턴의 표정과 똑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의식이 끊어지기 전, 그 찰나였다.

“……어리석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신이 자초한 겁니다, 라파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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