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장 (24/34)

23장

퇴사하며 수상한 대화가 녹음된 무전기와 배급품이었던 휴대폰을 비서실장에게 넘겼다. 어차피 퇴사할 때 넘겨야 하는 물건이었다.

녹음된 내용을 들은 비서실장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퇴사할 사람에게 구구절절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이라는 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할 터였다.

에반의 퇴원 수속을 돕고 아파트에서 짐을 뺀 바로 며칠 후에 라윈으로 향했다.

라윈에 있는 오래된 성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오래된 만큼 기품이 있었고, 주위에 침엽수림이 있어 외부와 단절된 채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았다.

여러모로 루크일 적 바랐던 여생을 대신 살기에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번잡한 수도에서 벗어나자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을 정도로 평온한 시간이었다.

먹고, 자고, 일어나고, 에반과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경치를 구경하며 책을 읽고, 공부하고. 그게 전부였다.

TV는 에반의 서재에만 있었기에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신문뿐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우연인지 고의인지 에반이 재깍재깍 치워 버렸기 때문에 내가 접한 세상 소식은 황태자의 발언으로 정국이 무척 혼란스러워졌다는 짧은 사설뿐이었다.

그래서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조로운 일상 속, 여느 때와 같았던 어떤 하루.

‘그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초상화.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날, 나는 그림이 많은 방에 서 있었다. 방의 이름이 뭔지는 모른다. 사실 그 방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규모가 작다지만 그래도 성 아닌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방이 더 많았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어마어마한 초상화들에 약간 압도당하고 말았다.

역대 델라윈 공작가 일원들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익숙한 외조부의 초상화도 있었다.

외조부의 초상화에서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옮겼다. 내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선대 공작들의 얼굴이 줄을 이었다.

델라윈 공작가는 유서가 깊은 가문이다. 이제는 에반에게서 그 명맥이 끊기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섰지만, 한때는 델라윈 공작가의 영지를 거치지 않고서는 수도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영지도 광활했다.

그런데 그 위세는 언제부터 시작했지?

델라윈 영광의 기원을 찾아서 시선은 계속 위를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보고야 말았다. 금발의 푸른 눈을 한, 어떤 아름다운 남자의 초상화를. 초상화의 밑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드리안 델 라윈(Adrian del Lawin).

……라윈의 아드리안.

나를 루크 님, 이라고 부르던 남자. 그가 거기 있었다.

시선은 옆으로 향했다. 그 옆에 똑같은 얼굴을 했지만 다른 옷을 입은 남자의 초상화가 보였다.

저 사람은 뭐지? 얼굴이 쌍둥이처럼 똑 닮았다. 리안과 똑 닮은 사람이라니. 그건 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자세히 보니 리안과 그 남자의 초상화는 똑같은 나무줄기에서 나온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 뜻은, 그러니까…….

“루크 델 라윈…….”

루크 델 라윈(Luke del Lawin).

라윈의 루크.

아드리안 델 라윈과 한배에서 태어나,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면 그대로 자라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가졌을 자.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춥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나무꾼의 아내에게 눈칫밥을 얻어먹었던 기억.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속이 꼬여 고통스러워했던 길바닥 시절. 스스로 몸을 팔기 위해 파란 대문집을 찾아갔던 날의 비참함. 황제를 만났던 것. 그와 몸을 섞었던 것. 그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받고도 평민이라 감내했던 것.

수난. 고통. 죽음.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 삶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애초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그 상태 그대로 멍하니 방을 빠져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성안을 배회하는 창백하고 공허한 망령처럼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나는 에반의 서재 앞에 서 있었다.

서재다. 내가 선 곳이 서재 앞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이런 서재에는 보통 가문의 족보가 보존되어 있게 마련이다.

확인해 봐야 했다. 내가 왜 리안과 형제로 표시되어 있는지, 누군가 나를 일부러 그려 넣은 거라면 족보에도 분명 나와 있을 테니까.

문을 열었다. 시끌시끌한 TV 소리가 들렸다. 에반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닌데?

웬일로 이 시간에 집에 있냐고 물으려던 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얗게 질린 에반의 얼굴이 보인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시끌시끌한 소리에 이상하게도 데자뷔가 일었다.

어릴 적의 어떤 날이 눈앞에서 겹쳤다. 모두가 수업 중이던 그때, 나를 부르던 교장의 하얗게 질린 얼굴. 파들파들 떨리던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진정시키려던 그녀. 에반의 모습이 딱 그것과 비슷했다.

눈이 마주치자 에반은 서둘러 TV를 껐다. 불길함이 나를 덮쳤다. 재빨리 다가가 리모컨을 빼앗아 다시 TV를 켰다.

안 돼……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고, 그 목소리를 건조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덮었다.

[……황태자 샤를마뉴 멜링턴이 탑승한 전용기 RH488기가 아이젠투니아 폴리네 산맥 동북 방향 145㎞ 지점에서 실종된 지 3시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교신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오전 황태자는 새해 첫 순방국인 화국으로 향하던 중이었으며, 그가 탄 RH488기는 갑자기 레이더상에서 사라지며 교신이 두절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황실에서는 아이젠투니아에 수색 작업의 협조를 요청했으며, 아이젠투니아는 이런 일이 발생해서 매우 유감이라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수색에 전력을 다하겠다 밝혔습니다.]

비행기. 교신 두절. 실종. 사라진 황태자 샤를마뉴 멜링턴.

……지금 뭐라는 거야. 뭐가 어쨌다고?

토막 난 단어들이 연관성을 잃은 채 귓가를 맴돌았다. 현실이 아득히 멀어졌다.

에반이 내게서 리모컨을 빼앗아 TV를 껐다.

“보지 마.”

“에반, 방금 그거…….”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저거 다 헛소리지? 에반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수색 중이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라파엘.”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돼. 황태자가 탄 전용기는 일반 여객기와 다르다. 제국 최고의 군수업체에서 특수 제작한 전용기는 어지간한 결함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레이더상에서 사라진 것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다른 곳으로 경로를 바꿔서 생긴 해프닝일 것이다. 그거 말고는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왜 교신이 끊긴 걸까. 단순히 경로를 바꾼 것이라면, 그래서 다른 공항에 불시착이라도 했다면 이미 연락이 되었어야 했잖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파고든다. 끊어진 교신. 갑작스럽게 사라진 기체. 행방불명. 어쩌면…….

아니, 아니야. 이런 생각은 하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각도 조심해야 했다. 희망적인 생각만 하자. 희망적인 생각만.

그러나 내 다짐과는 달리 그날 TV에서는 하루 종일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몇 가지 시뮬레이션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잘 날아가던 비행기 위에 갑자기 빨간 물음표가 뜬다. 녹지 않는 만년설이 온통 눈부신 거대한 산맥, 레이더상에서 갑자기 비행기가 사라진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들 말을 아꼈지만 심중에 내린 결론은 동일한 것 같았다.

왜,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닐 수도 있잖아. 추락이 아닐 수도 있잖아. 왜 다들 시간이 지날수록 추락에 가능성을 싣는데? 그렇게도 그를 죽이고 싶은 건가?

그러지 마.

‘엘! 곧 돌아갈게!’

제발, 그러지 마.

‘다음에는 같이 가자.’

다음은 없었잖아. 내게 다음이라는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잖아.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자격이 없다는 건 나도 알지만.’

‘한 번만 말해도 될까?’

……아직 그 말조차 듣지 못했는데,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마.

* * *

그 이후로 어떻게 됐더라?

암흑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됐더라.

눈을 뜨고 있되 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숨을 쉬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시간이 흘러갔다.

TV를 보았지만 실종된 비행기를 찾아내지 못해 시뮬레이션만 반복하는 영상은 망막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사라졌다.

비행기가 실종된 지 3일째 되던 날, 우편이 도착했다.

보낸 사람의 정보는 하나도 없고 받는 사람의 정보만 나와 있는 우편은 내 것이었고, 내 앞으로 온 우편을 받은 것은 에반이었다.

그는 멍하니 TV만 바라보는 내게 우편을 건네주며 말했다.

“곧…… 발표가 있을 거야.”

무슨 발표? 에반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실종된 기체를 찾았어.”

박차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시 말해봐. 찾았다고?

“모두 사망했어.”

“……뭐?”

“승무원, 파일럿, 비서관, 외교관, 그리고 황태자 샤를마뉴 멜링턴까지 모두, 사망했다고.”

……사망했다고?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이야.”

“라파엘.”

“닥쳐, 에반. 그런 농담 재미없으니까.”

나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시 TV에 집중했다. 아직도 실종이라는 단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 거봐. 농담이라니까. 에반은 무슨 저런 농담을 저렇게 진지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재미없어. 다른 데 가서 해봐. 나는 안 믿으니까.

아직 기체는 찾지 못했다. 찾지 못한 거다. 생존자가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 있을 거야. 모두 살아 있을 거야. 추락했더라도 다 죽으란 법 있나?

아, 어쩌면 한두 명은 불운하게 죽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꼭 그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는 강하니까, 온갖 무술과 체술에 능한 사람이니까, 발소리까지 죽이고 살금살금 걸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살아 있을 거야. 살아서 구해주기를 바라겠지.

그 순간 뉴스 자막 위로 붉은색 속보 표시가 떴다. 나는 속보 표시가 뜨자마자 채널을 돌렸다. 다른 채널에서도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에는 아직도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아니, 또 뜬다. 푸른색 속보 표시. 또 채널을 돌렸다. 여기도. 또. 저기도. 또. 이곳도.

미친 듯이 채널을 돌린다. 빌어먹을 속보 표시는 모든 채널에 떠 있었다.

말도 안 돼. 왜 다들 기체를 찾았다는 거야. 왜 전원 사망이라고 하냐고. 안 죽었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야. 이건 못 믿겠어. 내가 직접 물어봐야겠어.”

“뭐?”

“나단, 나단의 직통 번호가 뭐였지? 아, 뭐였더라.”

나단에게 물어봐야겠다. 황후 전담 비서관인 그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저게 말도 안 되는 오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곧 정정 기사를 내보낼 것이다. 그 전에 먼저 물어봐야겠어. 말도 안 되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전화기를 찾아 나단의 직통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많이 바쁜가? 그래, 바쁠 만도 하지. 정정 기사 내라고 목이 쉬어라 소리 지르고 있을 테니 이해를 해야겠다. 그래도 전화 좀 받아. 제발!

마침내 나단이 전화를 받았다.

-지금 전화를 받을 상황이…….

“나단? 나야, 라파엘.”

-라파엘?

신경질적이던 나단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변했다. 그래. 나야. 나는 곧바로 입을 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라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어떡해…… 어떡하면 좋냐.

나단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 입속에 진흙이 가득 찬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전하께서, 전하께서…….

“…….”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거짓말이야. 전부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그가 죽을 리가 없다고. 너희들 전부 짜고 치는 거짓말이지, 그렇지?

아, 이제 알겠다. 그가 주동한 거구나. 내가 그에게 전생을 들먹이면서 화를 내고 그랬으니까 그가 화가 나서, 아니, 어쩌면 나더러 돌아오라고 이렇게 짜고 사기를 치는 거구나.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내가 기억 잃은 틈을 타서 사기를 치던 그 습관 어디 안 갔다. 이번에도 그런 거지? 그렇지?

알았어. 돌아갈게. 너한테 돌아갈게. 그럼 됐지? 전생 일 들먹이는 것도 그만할게. 어차피 너는 기억도 못 하잖아.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만 기억하고 나만 힘드니까 나도 잊을게. 그럼 된 거잖아.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번호를 눌렀다. 눈 감고도 누를 수 있는, 습관이 되어버린 번호였다.

뚜르르- 두어 번 울리던 신호음이 끊겼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어째서? 자고 있기라도 한 거야?

다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은 역시 두 번을 넘기지 못했다.

이제 그만 받아. 이렇게 계속 안 받으면 안 돌아갈 수도 있어. 내 성격 그렇게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거 이젠 알 때도 됐잖아.

전화를 다시 걸었다. 받지 않았다. 계속 걸어보았다. 계속 받지 않았다. 어째서. 왜.

……왜 안 받는 건데. 정말로 죽은 사람처럼. 전화기가 떨어졌다. 더 이상은 전화를 걸 자신이 없었다. 정말로 안 받을까 봐. 평생을 그렇게 외로운 번호로 남을까 봐.

* * *

기체는 찾았지만 수습하는 과정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산산이 부서진 기체의 수습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시신이었다.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은 사항이지만 시신의 훼손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고 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에 치여도 몸이 갈가리 찢기는데 하물며 비행기임에야 말할 것도 없겠지.

그나마 훼손 정도가 덜한 것이 샤를마뉴라고 에반은 쓸모없는 말을 덧붙였다.

“훼손 정도가 덜하면 뭐 해?”

“…….”

“그럼 살아 돌아오기라도 해?”

찢긴 팔다리 이어붙인다고 멈춘 심장이 다시 뛰는 거 아니잖아. 내 대답에 에반이 실언했다며 입을 다물었다.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나는 곧 눈을 감고 말았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항공 전문가들은 추락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기체가 갈가리 찢긴 것이 문제였다.

어느 정도로 형체가 남아 있어야 외부 격추인지, 내부 폭발인지, 아니면 단순 기체 결함인지 확인할 수 있는데, 너무 잘게 쪼개져 버리니 그것마저도 확인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단순 기체 결함으로는 RH488기가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럼 내부 폭발이냐 외부 격추냐의 문제가 남아 아무도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그가 죽었는데 아무도 그 죽음의 원인을 모른다. 그런 상황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영결식이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그의 먼 친척으로서 영결식에 참여하게 된 나는 멍하니 거울 속의 나를 본다. 검은 옷을 입은 내가 낯설다.

……나 지금 어디에 가는 거지?

예전에 황궁을 나오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굳이 만나게 된다면 당신의 대관식 때나 보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일 겁니다.’

‘영원히 남으로 살아가게 될 거예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건 변하지 않는데, 그가 그저 먼 곳으로 갔을 뿐인데, 뭐가 이렇게 달라.

대관식이 아니라 영결식에 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모든 결말을 상상했지만, 그 끝이 죽음일 줄은 정말로 몰랐다.

수도로 들어가자 검은 리본을 단 나무들이 나를 맞이했다. 추모의 의미를 담은 나무들이 황궁으로 가는 대로변에 쭉 늘어서 있다. 영결식 중에 운구차가 지나갈 길이다.

운구차라니. 나도 모르게 메마른 웃음을 뱉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오는구나. 그 기가 막힌 감정의 모순을 지금 알았다.

황태자의 먼 친척이라는 자격으로 황궁에 들어간다. 영결식이 열리는 황금돔은 바깥과 마찬가지로 검고 흰 베일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베일들을 보자 옛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 발생한 사건들로 인하여 잊혔지만, 소소하고 즐거웠던 기억이다.

델루니안 탄신일을 기념하여 사원으로 행차했던 날, 빈번하게 발생하는 테러로 잔뜩 긴장한 나를 보며 그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지껄였더란다.

엉덩이에 별 모양의 점이 있다나 뭐라나. 참 예쁘다면서 언젠가는 그걸 보여주겠다고 했었다. 나는 싫다고 했지. 보고 싶지 않다고 했어.

……사실은 자신이 제일 불안했을 텐데. 자신을 노린 테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테니, 정말로 불안했을 텐데.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그의 노력이었는데.

한참 동안 그런 상념에 빠져 있노라니 운구차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도착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 그의 관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아는데, 어째서인지 관 대신 그가 두 발로 걸어 들어올 것 같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상태로 두 발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면서, ‘놀랐지?’ 하고 물으며 눈웃음을 칠 것 같은, 그런 착각이…….

그때 문이 열렸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눈부시게 하얀 관이 보였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의 관을 들고 천천히 입장했다. 내 옆으로 그의 관이 지나간다. 꽃을 달아놓은 그의 관…….

그가.

정말로…… 죽었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두 눈으로 확인한 잔인한 현실에 세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소리 없이 통곡하는 황후의 모습이나 며칠 새 머리가 하얗게 센 황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나와 그, 아니, 그의 관만이 남은 것 같다.

불쑥, 원망의 말이 가슴속으로 튀어 올랐다.

내가 언제 죽으라고 했어? 그냥 잘 살라고 했잖아. 두 번 다시 볼 일 없겠지만 잘 살라고, 그냥 우리 서로 몰랐던 사람처럼 완전히 잊고 잘 살라고 그랬잖아. 죽으라고 한 적 없잖아.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았어야지, 왜 죽어. 너 혼자 편한 곳으로 도망치면 다야? 죽으면 내가 용서할 것 같았어? 틀렸어. 나는 너 용서 안 해. 죽었으니까 더 안 해. 이 뻔뻔한 자식아.

나만 남겨두고…… 이 지옥 같은 현실에 나만 남겨두고 훌쩍 떠났으면서 용서를 바라지 마.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가 어떤 고통을 겪으면서 죽었더라도. 절대로…….

영결식이 끝나고 그의 관 위에 꽃을 두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가까워졌다. 훼손된 시체를 공개할 수 없어 뚜껑을 덮어놓은 관 위에 그의 사진이 있었다.

공식 프로필 사진 속 그는 은은하게 웃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는 웃지 못했겠지.

에반의 말이 떠올랐다.

‘추락할 때의 충격으로 시신의 훼손이 심해…….’

추락하는 기체의 충격을 모두 받았을 그. 몸이 갈기갈기 찢긴 수준이랬지. 온전한 시체가 아니라 조각난 시체를 찾아서 꿰어 맞춰야 했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다고.

그의 사진 위로 꽃을 올려놓는다. 꽃을 놓고 떠나는 손이 떨렸다.

많이, 아팠…… 겠다.

……정말 많이, 아팠겠다.

명치끝이 아려왔다. 누군가 심장을 잡아채는 것처럼 아팠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울지 않으려고,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쳐드는데 그럴수록 그가 생각이 났다.

무서웠겠지.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많이 무서웠을 거야. 강한 사람이라지만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가 없잖아.

아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강한 사람도 아니었다. 몸만 강하지 은근히 여린 구석도 있었는데. 황태자답지 않게 눈물도 쉽게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넌 지금 어디 있을까. 망자의 강을 건넜을까. 아니면, 아직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까.

한때 내가 갇혀 있었던 죽음의 암흑을 떠올렸다. 춥고 외로운 곳이었다. 빛도 한 점 찾을 수 없고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알 수 없는 좁은 듯 광활하고 막막한 공간. 너도 그곳에 혼자 있을까.

네가 거기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거긴 너무 춥고 외롭잖아. 네가 따뜻한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따뜻하고 사람도 많고 편한 곳에. 꽃도 있고 나비도 있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곳에.

아니, 아니, 사실은.

……내가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나를 데려가.

나를 이 지옥 속에 혼자 두지 마.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내 세계는 무너졌다. 억지로 날 세웠던 자아가 형편없이 허물어졌다. 눈물이 폭발하듯 터졌다. 힘이 풀려 주저앉은 날 보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였지만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데려가.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이나 잃고는 살 수 없어. 그러니 제발 나를 데려가.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이번에는 나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게. 이번에는 정말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내가 바랐던 세상은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야. 내가 바란 세상은, 그저 내가 바란 세상은…….

‘오랜만이다, 루크.’

다른 누구의 대용품이 아니라 나와 너, 너와 나로, 그저 우리 둘만이 행복한 그런 세상이었어. 나를 사랑하는 당신과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함께 행복한 세상에서…… 그렇게 살고 싶었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째서 내 두 번째 삶은 이렇게 허무한 걸까.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영혼이 뒤흔들리는 감각이 나를 덮쳤다. 하얗게 질린 에반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잠들 뿐이야.

하지만 이게 영원히 깨지 않을 잠이었으면 좋겠다. 새로 시작하고 싶어. 이 삶은 지쳤어.

* * *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내 방이다. 라윈의 오래된 성에 있는 내 방.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몸이 놀랍도록 가벼웠다. 탈수라도 온 걸까.

멍한 머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새벽인 것 같다. 시야가 어두웠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전등을 켰다.

어두운 방 안,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봉투에 시선이 간 것은 우연, 혹은 필연이었다.

저게 뭐지. 멍하니 생각하다가 문득 저것이 그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도착한 우편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뜯어봐야겠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걷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간신히 우편을 뜯어 확인한다. 죽어버린 눈에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이건…….

“……에반, 에반!!!”

목이 터져라 에반을 불렀다. 멀리 있지 않았는지 그가 달려왔다. 내가 읽은 것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게 어째서 내 손에 있는지 모르겠다.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린 에반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고가 아니었어.”

RH488기의 추락은 사고가 아니었다. 잘 짜인 테러였을 뿐. 내게 전달된 우편은 그에 관한 양심 고백이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한 귀족 청년이 있었다. 사회정의와 인권, 특히 소수민족의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그 청년은 의협심이 강했고 자신의 신분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 청년은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여자는 굉장히 똑똑하고 매력적이었으며 자신의 신념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귀족 청년은 그 여자에게 반하고 말지만 그 여자는 이미 유부녀였으며, 청년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한다.

남자는 끊임없이 여자에게 구애했고, 한사코 거절하던 여자는 어느 날 남자의 구애를 받아들여 그와 하룻밤을 보낸 후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남자에게 알렸는데, 그것이 곧 소수민족의 독립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계획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고, 중간에 여자는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아이를 가졌음을 남자에게 알리고, 아이를 맡아서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그 아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남자는 그러겠다고 맹세했다.

이야기는 그렇게 순애보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영원할 수 없어서, 이야기는 남자에 의하여 중간에 바뀌게 되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다른 아이를 입양하여 자신의 딸로 키웠고, 그 딸을 어릴 적부터 세뇌, 학습하여 자신의 명령이라면 모두 따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젊은 시절의 의협심도 사라지게 되자 남자는 다른 야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내전을 일으켜 제국을 분열시키고, 새로 태어나는 공화정의 총통이 되겠다는 야망을…….

이야기의 끝은 남자에 대한 폭로로 이어졌다.

남자는 군수업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송년 축제에서 전투기를 동원하여 황실을 습격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소수민족의 테러라고 위장하려고 했었지만, 그날 황태자의 담화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자 계획을 포기한 척 수정했다고 한다.

발신인 자신도 그의 속내를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그가 언제까지나 순수하게 소수민족의 독립을 바라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지만 그가 변했음을 깨닫고, 또 그의 테러 계획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막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분명 이번 사건을 소수민족과 그를 지원하는 아이젠투니아의 합작이라고 발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전을 넘은 국제전이 발생할 것이며, 국제전이 발생하면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군수업체의 수장인 그 남자 하나뿐이다.

편지의 발신인은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며. 목숨을 걸고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당신이 그날 우리의 대화를 녹취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당신이 이 편지를 볼 때 즈음에 자신은 살해당해 자살로 위장되어 있을 거라고. 부디 이 편지를 당신의 녹취록과 함께 증거로 채택해 진실을 밝혀달라고.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막아달라고 적혀있는 편지의 뒤에는 발신인이 평생 동안 그 남자와 나누어온 편지와 그 외 다른 서류들이 동봉되어 있었다.

……대사제는 지금 어디 있지?

에반이 재빨리 뛰쳐나갔다.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하니 대사제를 생각했다. 그 밤. 자신이 초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던 대사제는 피를 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인적 드문 곳에서 이루어지던 어떤 이름 모를 ‘백작’과의 대화.

나는 그때 그가 백작을 설득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 그게 사실이었다.

대사제는 백작에게 더 이상 피를 보는 방법을 취하지 말자고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말자고.

하지만 백작은 끝끝내 그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때 그 남자의 얼굴을 봤어야 했다. 누구랑 대화하는지, 그걸 봤더라면.

……샤를마뉴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하하.”

또다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냥 이 상황이 웃겼다.

내가 그를 죽였구나. 내 어리석음이 그를 죽였구나.

그때 조금 위험하더라도 그 백작의 얼굴을 확인했더라면, 무전기를 반납하면서 대사제와 어떤 백작이 대화하고 있었다고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그가, 샤를마뉴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죽였구나.

내가 죽였어.

샤를마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내 눈앞에서 웃고 있다.

아니다. 저건 샤를마뉴가 아니다. 델루니안이다. 그가 나를 보며 울고 있다.

샤를마뉴일 때는 웃다가 델루니안일 때는 우는 게 무슨 조화람. 나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비겼어. 당신이 나를 죽였고, 내가 당신을 죽였으니까 비긴 거야.”

“울지 마! 왜 울어! 당신도 나한테 잘못한 게 있잖아! 나만 당신한테 잘못한 거 아니잖아!”

“꺼져! 사라지라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다음에는 뭐라고 소리쳤는지 기억이 안 난다. 미안하다고 했던가, 꺼지라고 했던가. 잘 모르겠다. 밖에 있던 에반이 뛰어 들어와 나를 붙잡은 것까지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에반이 와서야 환영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부들부들 떨었다.

에반, 그가 나를 원망해. 왜 살려주지 않았냐고, 나를 원망해…… 내가 그를 죽였어. 내가 죽인 거야.

그런 나를 보며 에반은 그저 따뜻한 손으로 내 등을 쓸어줬을 뿐이었다. 마치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하듯.

하지만 그는 몰랐던 것 같다. 그의 위로가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는 것을.

* * *

그 이후로 내 기억은 드문드문 잘려 나갔다.

자고 일어나니 방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적도 있고, 분명 식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서재에 있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에는 맨발로 정원을 헤집고 다녀서 발바닥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제일 심각했던 것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니 발코니 가장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너 미쳤어?!”

에반이 발코니 끝에서 나를 잡아채고 나서야 나는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미쳐가고 있다. 그리고 나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건 죄책감이다.

“네 잘못 아니야. 네가 죽인 거 아니라고!”

그런 나에게 에반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도 안다. 그의 말이 옳다.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를 죽인 것은 ‘백작’이다. 이상한 야망에 불타올라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의 총통이 되겠다는 미치광이. 그가 샤를마뉴를 죽였다. 나도 알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달랐다. 이성과 논리로는 내가 그를 죽였다는 근거 없는 죄책감이 나를 좀먹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대신해서 에반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편지를 읽은 에반이 바로 제정부 요원에게 연락해 대사제의 행방을 살폈지만 그는 이미 사망한 이후였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비행기 추락 사고가 발생한 직후 일어난 일이라 세간의 주목을 못 받았을 뿐이다.

그의 소지품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필체를 확인할 수 있는 노트 몇 권밖에.

그의 유품 목록을 훑어본 에반이 말했다.

“가지고 있는 중요한 자료는 전부 이쪽으로 보냈나 보네.”

정국은 대사제의 말마따나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요즘 추락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는 식의 루머가 국민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었다. 분명히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루머가 퍼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루머가 계속해서 퍼졌고, 최근 한 전문가가 외부 격추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루머는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격추의 주체는 소수민족과 그들을 지원하는 아이젠투니아란다.

이 루머가 사실로 굳어지면 전쟁은 불가피하다. 누가 소문을 퍼뜨리는지는 자명했다.

“준비가 끝났어.”

“…….”

에반이 서재로 들어왔을 때 마침 TV에는 그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TV 속에서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비행기 사고로 잃었지만,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 제국의 황태자가 ‘공격’을 받은 것을 슬퍼하는 애국주의자로 비추어졌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자산을 털어서라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겠다며, 만약 거리에 떠도는 흉측한 루머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전쟁도 불사하는 게 아니라 당신은 전쟁을 바라고 있잖아. 그의 모습을 씹어 먹듯 바라보며 에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제로부터 모든 자료를 넘겨받은 에반은 바로 백작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했고, 워낙 자료가 많았던 터라 금방 그를 찾아냈다.

처음 그에 대해 알았을 때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모든 증거를 다 찾아냈다. 남은 것은 그를 거둬들이는 것뿐. 그는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고, 전쟁 직전까지 갔던 제국은 슬픔 속에서 평화를 맞이할 것이다.

그는 불운하게 죽은 황태자로 영원히 기억되겠지.

먼 미래에는 그의 삶을 토대로 한 다큐멘터리나 영화 같은 것이 제작될지도 모르겠다.

그래 봤자, 죽은 그가 되살아나는 건 아니지만.

* * *

그 후로 에반의 계획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세상이 뒤집혔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식을 잃어 슬퍼하던 사람이 테러리스트가 되어 만천하에 그 정체가 들통 났다.

한 사람의 미친 야망에 황태자를 잃은 제국은 분노와 충격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검찰청으로 압송되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머리가 터지면서도 그는 사납게 웃었다.

“내란을 모의했다고? 내가?”

“내란이 아니야.”

“혁명이지.”

1심 재판정에서 그가 내뱉은 말은, 그 자신에게는 전혀 유리하지 않은 발언이었으나 사형을 확정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형식적인 항소심이 뒤를 잇따랐지만 황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 감형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감형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사형도 부족해. 죽음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다지만 죽기까지의 과정은 공평하지 않다.

샤를마뉴가 찢겨 죽었다면, 백작 역시 찢겨 죽어야 공평하다. 얌전하게 목매달려 죽는 것은 너무 편한 죽음이었다.

방청객석에 앉아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나를 보며 에반이 참으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손을 붙잡았다.

추락의 원인은 내부 폭발로 밝혀졌다. 그와 함께 폭발물의 정체도 함께 밝혀졌는데, 일반인들에게는 그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악용의 소지가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금속이되 금속의 성질을 갖지 않는 신소재는 이점보다 단점을 먼저 드러낸 셈이다.

사형 선고 이후 백작의 군수업체에서 진행한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한 연구원들이 실종되었다. 그것으로 신소재 개발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

백작의 사형선고와 함께 거리에는 비운의 황태자에 대한 그림과 글이 나붙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황태자의 죽음으로 황실의 지지율이 급등했다. 황실 폐지론은 쏙 들어갔고, 그 대신 새로운 황위계승권자가 거론되었다.

황실에서는 시기상조라며 선을 그었지만 새로운 황태자가 탄생할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황태자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둘 수 없으니까. 그가 황위에 등극하면 황가는 바뀌겠지만 제국은 영원할 것이다.

세상은 점점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상처를 안고, 과거를 흘려보내며 미래로 향하는 강물처럼 순조롭게.

그렇게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 * *

“오랜만입니다.”

“…….”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어느 날 아침, 시드니 카턴이 나를 찾아왔다.

“요즘은 어떻게 지냅니까?”

어떻게 지냈더라.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려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냥.”

그냥 그렇게, 숨이 붙어 있어서 살아. 시간이 흐르니까, 따로 하는 건 없는데 시간은 흘러가니까. TV는 켜지 않은 지 오래되었어. 책을 읽으려니 머리가 아파서 내려놓고, 웃으려니 힘이 없어서 웃지 못해. 하늘을 보려니 지나가는 비행기라도 있을까 싶어 하늘을 보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

“여기는 무슨 일이야.”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고요.”

“……마지막?”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회사도 그만뒀어요.”

회사라면 제정부를 말하는 건가. 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왜?”

“제 역할은 끝났으니까요. 열심히 항해를 마친 배는 다음 항해를 위해 쉬어야죠.”

역할이 끝났다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고장 난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시드니 카턴은 의뭉스러운 말에 대한 해설은 덧붙이지 않은 채 말했다.

“라파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의 삶은 더 많이 있습니다. 간 사람 생각을 너무 오래 하는 것도 안 좋아요. 떠난 사람은 흘려보내고, 남은 사람은 살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말없이 시드니 카턴을 바라보았다. 1심 재판정에서 본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란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헛소리를 늘어놓은 백작에게 모든 사람이 경악했지만 시드니 카턴은 홀로 담담했다.

“그래서 너는 그렇게 담담했던 건가.”

“예?”

“재판정에서 봤어. 홀로 담담하더군. 친한 친구의 죽음을 겪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담담하던데…… 떠난 친구를 흘려보내서 그랬던 건가.”

시드니 카턴이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곧 예의 그린 듯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고작 표정 하나로 사람을 매도하지 마세요. 저는 분명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

“하지만 언제까지 그를 슬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떠난 사람은 잊고 사는 게 최선입니다.”

그 말까지 내뱉은 시드니 카턴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

“잊으세요, 라파엘. 더 이상은 그를 기억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혹여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당신의 삶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다음 생에서도 만날 수 있어요.”

방을 떠나면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신신당부를 했다.

“어리석은 생각은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절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 * *

늦은 밤, 눈을 떴다. 오랜만에 몸이 개운했다. 약물 없이 잠 못 드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오늘만큼은 정신이 멀쩡했다. 간밤에 약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몽하던 정신은 맑게 갰다. 창밖에는 달빛이 찬란했고 밤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약간 추웠다. 완연한 가을이다.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여름의 끝에 사고를 당한 나는 가을을 온통 샤를마뉴와 함께했다. 그의 저택에서 머무르며 짧지만 평온한 휴식을 얻었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평온한 시간이었다.

천천히 발을 옮겨 그림의 방으로 향했다. 리안과 나의 초상화가 보였다.

아니, 내가 아니다. ‘루크’의 초상화였다.

300년 전 죽은 가련한 남자. 나이지만 내가 아닌 저 사람.

나는 그의 얼굴을 눈에 오랫동안 담았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할 일 없는 사람이다.

안녕. 외로운 사람아. 300년의 시간을 지나 망령처럼 깨어났던 사람아. 이제 다시는 깨어날 일 없을 거야. 시간 속에서 영원히 잠들자.

에반은 집에 없었다. 이틀 전 수도로 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달빛에 비친 세상이 아름다웠다. 물들어가는 갈빛 산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강.

그의 눈동자가 저런 색이었다. 흑갈색이 아닌, 아름다운 연녹색이었다.

발코니로 발을 내디뎠다. 슬리퍼를 어디에 잃어버렸는지 맨발에 와 닿는 대리석의 느낌이 차가웠다. 나는 오랜만에 웃었다. 새로운 희망이 가슴속에서 샘솟았다.

‘어리석은 생각은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절대.’

이건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아마 이번 생에서 저지른 것 중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난간 위에 몸을 걸쳤다. 밤공기가 서늘했다. 가을꽃 향기일까.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의 향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마음으로 빌었다. 지옥과 천국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그에게 닿기를 기원하며. 우리 다시 태어나자고. 이번에는 증오와 미움을 모두 버리고 살자고. 다시 만난 세상에서는 백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그리 살자고.

그때 문이 열렸다.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는 에반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라파엘!”

나는 찢어지는 에반의 비명을 들으며 허공중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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