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장 (23/34)

22장

흰 커튼이 바람에 나부꼈다.

무명천에 얼굴을 파묻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굳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찬란한 빛이 어두운 남자의 세계를 실금처럼 파고들어 밝혔다.

남자가 보는 세계는 마냥 하얗고 순백한 공간. 사실은 주인을 잃은 지 오래되어 가구 위에 하얀 천을 덮어둔 쓸쓸한 방이다.

남자의 하루는 이곳에서 시작되어 이곳에서 끝난다. 차마 흰 천을 거두지 못하여 그 위에서 잠들고 그 위에서 깨는 남자는 절대로 방의 창문을 열지 않는다.

경첩에 먼지가 내려앉은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 방에서 생활하는 남자를 걱정한 다른 이들이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려고 하기만 해도 남자는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았다.

남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하나. 이미 떠난 지 오래된 방주인의 체취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창문을 열었단 말인가. 남자는 그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이미 체취는 많이 흐려져 코를 박지 않으면 맡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다. 그런데 창문을 열다니. 허공중으로 사라졌을 그의 향기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하다.

커튼 너머, 바깥으로 난 발코니 위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그가 창문을 열었으리라 생각하여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를 벌하리라. 하지만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남자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도 힘이 부쳤다.

그가 이를 아득 물며 발코니 쪽을 노려보는 순간.

더 이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금발이 허공중에 나부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남자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한 가지뿐.

너구나.

남자는 왼팔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환희 속에 목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다.

너였구나. 너였어. 네가 왔구나. 네가 다시 돌아왔구나. 네가 창문을 열었구나.

그래, 너는 원래 창가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리는데도 항상 아슬아슬하게 창가에 서서 바람을 맞았지.

나는 다정하게 걱정하는 방법을 몰라 위협하듯 목소리를 낮추곤 했다. 그러면 너는 물기 어린 얼굴로 죄송하다 하였지. 그게 항상 가슴속에 가시처럼 남아 있었는데. 그래, 너구나. 네가 돌아왔구나……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느끼며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쉽지 않은 일이다. 오른팔은 마비된 지 오래라 몸을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왼팔의 몫이다.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두 다리로 몸을 곧추세운 그는 창가로 향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은 혹시라도 그가 사라질까 두려운 그의 마음을 반영하듯 얕게 떨리고 있었다.

기다려 줘. 내가 갈 테니. 단 한 번만 얼굴을 보여줘.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 남자를 그는 기억했다. 매번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를 볼 때마다 그는 가슴을 찌르는 격통에 몸을 떨며 울었다.

가끔 그의 앞에 나타나는 그 남자는 절대로 앞모습만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는 그의 얼굴마저 희미했다.

완전히 그를 잊게 될까. 남자는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

그가 창가에 다다라 커튼을 젖힐 때였다. 거대한 돌풍이 창가를 훑었다. 남자는 돌연 불안감을 느꼈다.

안 돼. 아직은 안 돼.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나를 기다려 줘. 내게 얼굴을 보여줘!

하지만.

……그는 또 사라지고 없다. 그가 사라지고 남은 곳에는 익숙한 꽃향기만 존재할 뿐. 아주 잠시 머물다 떠나는 꽃바람.

남자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희미하게 사라지는 그의 향기를 맡는 남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남자는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그가 나타나 이렇게 창문을 열어버린 것도 남자에 대한 복수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자신을 죽인 남자가 자신을 추억하는 일을 용서하지 않았다.

너는 내 향기조차 맡을 자격이 없어. 발코니에 서서 남자가 자신을 향해 비척대며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그는 그렇게 비웃지 않았을까.

기만이다. 분명한 기만.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자신을 죽인 남자에 대한 복수이자 기만이다.

하지만 그런 기만조차 남자에게는 소중한 순간일 뿐이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평생을 하지 못한 말이다.

이제는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평생 마음속에 묻혀 버린 말인데.

너에게 할 수만 있다면.

……네가 단 한 번만, 그 기회를 내게 허락해 준다면.

남자는 서서히 무너졌다. 그의 세계는 또다시 무너졌다. 내일이면 다시 세워질 그의 세계는 아직도 하얗다. 절망의 하루는 매일 시작되고 매일 끝난다. 그것이 그의 형벌이다.

그리고 샤를마뉴는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느끼다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들어 볼을 닦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팔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멀쩡한 오른손이 익숙한 듯 낯설다. 먼 시간을 한달음에 건너온 것처럼 오른손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생경했다.

……아주 오래전에 그는 이 팔을 쓰지 못했다.

“하…… 하하.”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눈물과 함께 어깨가 조용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 * *

300년간 닫혀 있던 기억의 문이 열렸다. 막혀 있던 시간이 범람하여 해일처럼 그를 삼켰다.

제일 처음에 떠올린 기억은 그가 자신의 오른팔을 베던 날의 아릿한 통증,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던 누군가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이런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습니까?”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완전히 잘려 나가지 못해 덜렁대는 팔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으나, 자신의 팔을 자른 그도, 그것을 보며 차갑게 말을 잇는 남자도, 아무도 그것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너무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그 소년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향해 뻗어 나가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멀쩡한 왼팔이 그에게 닿기도 전에 남자는 그 손을 피했다.

“과거에는 그분에게서 저를 보시더니, 이제는 저에게서 그분을 찾으십니까.”

“…….”

“참으로 이기적이십니다.”

그는 말없이 팔을 내렸다. 남자의 말이 옳았다. 그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기적인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유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팔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장을 옥죄어오는 고통 속에서, 그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다.

“폐하께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십 년 전 그에게서 하사받은 검을 그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영지도, 작위도 모두 가져가십시오. 어차피 그것은 원래 저의 것이 아니었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리안.”

“이제 저는 떠납니다. 다시는 뵐 일이 없을 겁니다.”

가지 마라,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는 그 대상이 눈앞의 남자인지, 아니면 사라진 지 오래인 그 소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소년이라면, 그는 남자를 보내주어야 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여 그 대신 옆에 다른 사람을 두는 어리석은 짓을 두 번이나 할 수는 없었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그를 바라보던 남자는 등을 돌려 방을 나서려다 말고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반쯤 잘려 피가 흐르는 그의 팔이 있었다.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 친구였던 사람이라 완전히 남인 것처럼 돌아설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남자는 자신의 옷을 찢어 붕대를 만든 후 그의 팔을 붙잡고 꾹 싸매었다. 의원이 아닌지라 제대로 된 치료는 아니었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 죽지 않을 정도로는 지혈을 해줄 것이었다. 그가 또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죽지 마십시오.”

대충 처치를 끝낸 남자가 방을 떠나며 말했다.

“어차피 저질러진 일입니다. 죽지 말고 주어진 삶을 사세요.”

주어진 삶을 살라? 그는 그 삶이 버거워 견딜 수 없었다.

이때까지 무엇 하나 손쉽게 얻어본 적 없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공허를 채워줄 무언가를 찾으리라.

그리고 한때 그는 그것을 찾았다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손에 든 것을 무가치하다 구겨 버렸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찾던 것인 줄 모르고.

희망은 없다. 희망을 가질 자격도 없다. 어리석음이 저지른 과오로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전부를 놓쳤다. 그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특히 혐오스러운 것은 그의 손이었다.

그를 죽인 오른손.

어리석은 죄악의 상징.

어느 혼몽한 새벽. 아침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쓸쓸한 추위 가운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 검을 찾아 든 것은 자신의 몸뚱어리에 붙어 있는 팔의 존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개 밑에 두었던 검을 들어 닥치는 대로 팔을 찔렀다. 칼이 팔뚝을 파고들어 근육을 가르자 당연하게도 고통이 따라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내었다. 잠에서 깨기 전 꾸었던 악몽의 잔재가 생생한데, 고작 이까짓 고통으로 아프다 할 수 없었다.

“살면서 폐하께서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고 그 결과를 곱씹으며.”

남자는 잠시 무언가 망설이듯 말을 끊었다. 그 후에 이어진 말은 비가 온 후 굳어진 땅처럼 서늘하고 단단했다.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사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폐하께서 비참히 죽은 제 동생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니까요.”

기억은 조금 더 먼 예전의 일로 이어졌다. 그가 과오를 저지르기 이전. 아마도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을 시기.

‘생일……이요?’

‘예, 이때까지 한 번도 루크 님의 생일을 축하드린 적 없었던 것 같아서요.’

문 밖으로 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황제의 출입을 알리려는 시종을 막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정확하게는 잘 모르지만, 아마 이런 계절이었을 거예요.’

아버지가, 그러니까 양아버지가 저를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에 숲에서 거두었다고 하셨거든요. 소년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는 항상 그 목소리가 작은 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조만간 연회를 준비해야겠군요.’

‘아,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저는 괜찮아요. 연회라는 게 익숙하지도 않고…….’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리안 경.’

그는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머릿속으로 선물하기에 좋은 것들을 떠올렸다.

뭐가 좋을까. 생각해 보니 7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생일을 챙겨준 적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그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상당히 바빴고, 자주 황성을 비웠으며, 그 소년이 생일을 챙겨줄 만큼 그렇게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다는 변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튼 7년 내내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황제가 나서서 후궁의 생일 연회를 준비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라 조용히 지나가야겠지만 선물 정도는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7년 동안 말썽 없이 잘 지냈으니까. 그 정도는.

“……이게 좋겠군.”

그는 시종장이 간추려 온 목록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했다. 검을 다룰 줄 모르니 무기나 방어구를 선물로 주는 것은 돼지 목에 다이아를 거는 것만큼 쓸모없는 짓이고, 그렇다고 말을 선물로 주자니 말을 탈 줄 아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다고 작위를 주자니 후궁에게 정신이 팔려 작위까지 주냐는 귀족들의 원성이 안 들어도 훤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결국 선택한 것은 목걸이였다. 그의 눈동자를 닮은 초록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

보석이 조금 크기는 했지만 촌스럽게 화려한 세공이 들어가지 않은 남성용 목걸이라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깨끗하게 세공된 초록색 보석은 금발과도 잘 어울릴 터였다.

이걸 언제 줘야 할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어차피 곧 여름행궁으로 휴가를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그때가 좋겠다. 굳이 분위기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복잡한 황궁 안에서 옜다 먹어라 식으로 뜬금없이 던져주는 것보다야 경치 좋고 괴롭히는 사람 없는 피서지에서 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장인에게 목걸이 세공을 맡겼다.

선물을 받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태어나서 생일 연회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그는, 아마도 생일선물을 받는 일 또한 처음일 것이다.

파티조차 어색하다는 사람이니 분명 선물을 받으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버버하겠지. 그러다가 곧 볼을 붉히며 감사하다 할 것이다. 그의 얼굴에 어떤 식으로 미소가 어릴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그러다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잘 어울리나요?’ 하고 생각지도 못한 물음을 되돌릴 수도 있겠다. 그는 가끔 엉뚱한 곳에서 맹랑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영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아니었다.

상상은 즐거웠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다가올 행궁행이 무척 기대되었다. 즐거운 나날이 되리라. 7년 만에 맛보는 휴식, 그 상상의 끝에는 당연하다는 듯 소년이 함께였다.

……차라리 시간은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이제 기억은 마구잡이로 튀어나온다. 행복한 기억은 사라지고 끔찍한 기억이 머리를 헤집었다.

살인의 밤. 수면향 없이는 잠 못 들던 나날들. 밝혀진 진실. 가슴을 짓누르는 공허함. 죄책감. 충동. 분노. 절망. 그리고…… 생의 최후의 순간들까지.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였다. 하지만 이럴 바에야 안 태어나는 것이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니지?’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전생 타령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지?’

그 순간 깨어지던 그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그것이 운명이 준 마지막 기회였음을, 놓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천형처럼 존재할 뿐.

그는 얼룩진 얼굴을 닦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똑같은 듯 조금은 다르게 생긴 또 다른 자신이 서 있었다.

붉은 흰자위 사이로 보이는 연녹색의 눈동자는 그가 강렬히 바랐던 소년의 눈동자였다. 자신이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을 때 절망으로 탁해지던 연녹색 눈동자. 이후 그 눈동자가 다시 뜨여 세상을 바라보기를, 염치없는 소원으로 빌고 또 빌었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는 다시 태어난 소년을 떠올렸다. 과거 자신의 모습과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지만, 영혼은 달라지지 않은 채로 태어난 그 소년, 아니, 그 남자. 그를 생각하자 심장 속으로 격통이 내달렸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많이 괴로웠겠구나.

홀로 기억하는 과거 속에서, 너는 많이 고통스러웠겠구나.

우리 둘 중 꼭 한 명은 과거를 기억해야 했다면 그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어차피 그는 신의 품에 안기지 못할 죄인이었다. 망각은 인간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이다. 그는 신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라파엘은 그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모든 세상 사람이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하더라도 라파엘만큼은, 라파엘 본인을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잊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고, 이제는 자신도 모든 것을 떠올렸다.

이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 번째 삶에서 그는 또다시 마지막 기회를 저버렸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태어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지난 삶은 저지른 죄를 모두 갚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속죄.

두 글자를 떠올리며 그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른 새벽 막 떠오른 푸른 태양빛에 비친 얼굴, 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온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 * *

1983년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황궁은 이른 아침부터 손님맞이로 정신없이 바빴다.

공식적인 행사는 오후 12시에 예정된 오찬부터지만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황실출입기자단과 방송국의 경쟁은 새벽부터 치열했다.

어차피 그래 봤자 그들이 취재할 수 있는 것은 오후 11시에 예정된 황제의 신년 담화문뿐이고, 황실 일가의 조찬이나 고위급 인사들로 구성된 오찬, 신년 담화 이후의 파티는 황실 소속 기자만이 촬영이 허가되기 때문에 그저 죽치고 기다리기에는 상당히 체력 소모가 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신년 담화문은 취재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983년을 어떻게 정의하고 새로 다가오는 1984년을 어떤 태도로 맞이할 것인지 황실이 내린 결론에 따라 다가오는 3월 의회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분열이냐 통합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 제국의 미래가 오늘 예정된 황제의 담화문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일정이 바뀌었다고?”

“응.”

“갑자기 왜?”

“혹시 폐하께서 식중독이라도 걸리셨어? 아니면 급체라도……?”

조찬 때 황제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일정이 바뀔 리 없다. 하지만 나단은 그런 게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그럼 뭔데? 나단이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한참 동안 주변을 경계하던 그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더니 목소리를 낮춘 채 말을 이었다.

“어디 말하지 마. 아직 확실한 거 아니니까”

“뭔데 그래?”

“그게…… 양위 문제야.”

뭐?

“양위라니?”

“야, 야, 목소리 낮춰. ……그냥, 최근에 그런 소문이 좀 있었거든. 요즘 하도 시국이 뒤숭숭하고 그러니까 젊은 피를 수혈해서 이미지 쇄신을 하려는 것 같다는, 그런.”

“나는 몰랐는데?”

“너야 당연히 몰랐겠지.”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말에 뒤늦게 깨달았다. 맞다, 나 나갈 사람이었지. 나갈 사람한테 굳이 황실 내부에 도는 소문을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나만 몰랐던 거구나.

내 표정이 어두워졌는지 나단이 황급하게 덧붙였다.

“아, 근데 너만 몰랐던 건 아닌 것 같아. 황태자 전하께서도 많이 놀라셨거든. 아무래도 그렇겠지. 요즘 그분도 제정신이 아니었잖아.”

‘너 때문에.’

나단이 웅얼거리듯 마지막 말을 입안으로 삼켰지만 내 귀에는 다 들렸다.

나 때문에…… 라. 모두들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나 보다. 이래서 사내 연애는 지양해야 한다니까. 그걸 연애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는 아인츠만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잖아……. 황실이 이렇게 공격을 받는데도 국민들이 냉담한 거 보면 딱 보이지.”

“그래서 양위로 이미지 쇄신을 하시겠다……?”

“응.”

머리 좀 쓰셨네. 정치적으로 보면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다. 현 황제는 정권의 시작을 아인츠만과 함께했다.

다시 말해, 일리오네 사태와 소수민족 탄압사건, 무정부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가해진 인권 탄압이 모두 현 황제 시기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집권 중후반기에 아인츠만이 실각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개혁이라기보다는 보수정권 내의 알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뿐이라 국민들이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이었다.

바뀌지 않는 구태 정치권을 보며 투표권조차 없는 국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이놈의 나라 콱 망해 버려라, 욕이나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런 모든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였을 때, 구태정치의 대표인 황제가 물러난다는 것은 제법 괜찮은 전략이었다. 황제에 비해 황태자는 그나마 이미지가 괜찮은 편이었으니까.

뒤늦게 사춘기를 맞으며 잠깐 망나니짓을 하기는 했지만 사춘기를 맞기 전 황태자는 나름대로 국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 알려져 있었다.

노동법 개정이 그 대표적인 예로, 그 일로 상원 의원들과의 관계는 틀어졌지만 황실의 지지도가 14%에서 28%로 두 배가량 치솟았던 적도 있다.

황태자를 위시하여 정치권을 개혁하는 척한다. 등 돌린 민심을 되돌리며 이전보다 더 교묘하게 제국의 안녕을 꾀한다.

능구렁이 황제의 의중이 무엇인지는 잘 알겠다. 귀족의 한 명으로서 그의 선택을 지지하기도 했다.

나 역시 제국이 무너지는 건 바라지 않는다. 정치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기득권인지라 상황이 급변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황제의 결정을 지지한다.

지지는 하는데…… 그런데.

대관식은, 황태자의 혼례와 같이 치러지잖아.

“…….”

“…….”

오찬을 끝내고 나오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지, 말은 정확히 하자. 마주친 건 아니다. 마주쳤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했고 그곳에 우연히 내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 시선은 나를 투시해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으니 마주쳤다고 할 수 없다.

마치 복도에 놓인 조각상을 보는 것처럼 무심히 투과하는 눈길에 나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었다.

차가운 서리가 그의 눈동자 위에 한 꺼풀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지나쳤다. 복도 끝으로 그의 모습이 점멸해 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상상했다.

대관식의 날. 황제의 금관을 물려받는 그. 그 옆에 선 누군지 모를 황태자의 약혼녀. 두 사람의 결혼식. 먼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 나.

……아, 정말 재미없다. 이런 진부한 결말이라니. 300년의 시간을 두고 당신의 결혼식을 두 번이나 보는 나라니.

재미없다. 재미없어.

* * *

파티 전에 잡혀 있던 송년 담화는 자정 가까이로 늦춰졌다. 갑작스럽게 변경된 일정에 기자단 쪽에서 원성이 튀어나왔지만 별 방도는 없었다. 카메라를 따로 두고 파티장에 출입을 허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파티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두문불출하던 귀족들이 전부 참석한 것 같다.

우리는 보낸 적 없는 초대장을 어떻게 구해 들어온 유명 연예인들도 있어(세드릭 채스터턴의 무리에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쪽을 통해 들어온 것 같다)파티장은 그 자체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다들 즐거워 보인다. 표정이 굳어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도 좀 웃으면 좋으련만,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몸을 짓누르는 건 지독한 피곤. 이게 마음의 피로인지 육체의 피로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오랜만입니다.”

파티장을 둘러보며 작게 한숨을 짓고 있던 내게 누군가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제님.”

“잘 지냈나요?”

오늘도 어김없이 자주색 복식을 입은 산티교 대사제가 합장하며 온화하게 웃었다. 나 역시 마주 합장을 하며 꽤 오랜만에 보는 그에게 예를 갖췄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사제님께서는 평안하신지요.”

“물론이지요. ……그런데 아주 성대한 파티로군요.”

대사제가 신기하다는 듯 파티장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파티에 처음 와보는 것 같다, 고 생각하다가 이때까지 그가 황실 파티에 초대에 응한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송년의 날에 그는 자신의 법륜성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까지 산티교 측에서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었는데, 올해는 의외다.

“특별히 사제님께서 자리를 빛내주신 덕분이지요.”

약간의 아첨을 섞어 넌지시 떠보자 대사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참석한 게 그렇게도 신기한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하하, 그냥 노인네의 바람입니다. 그뿐이에요.”

그럴 리가. 추도회 참석도 정치적으로 이용될까 봐 꺼리던 대사제가 이 시국에 뜬금없이 안 하던 파티에 참석한다는데 그게 노인네의 바람일 리가 없다.

하지만 더 캐묻기도 이상해서 그저 ‘그런가요’ 하고 말았더니 대사제가 기나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눈이 파티장 안을 하염없이 맴돌았다.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를 따라 파티장 안을 훑었다. 못 보던 얼굴이 점점 불어난다. 이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내가 사교계에 발을 딛지 않았다 해도 이렇게 몰라도 되는 건가…… 싶을 때쯤.

“내 어릴 적에 말입니다.”

“……예?”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영애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황태자가 시야에 걸린 것과 대사제가 입을 뗀 것은 거의 동시였다. 황태자를 보느라 한 박자 늦게 대답했지만 대사제는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졌는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는 산티교가 이렇게 교세가 크지 않을 때였어요.”

“그랬지요.”

“무슨 패기였는지, 아니면 열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젊었을 때는 민족종교의 한계를 뛰어넘어 만민의 애환을 굽어살피고 진정한 화합을 이루는 교두보가 되겠다, 다짐했었지요.”

저 영애는 누구더라. 뭔가 얼굴이 낯이 익은데……. 그때 덤프셔 후작이 그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갔다.

저 영애, 덤프셔 후작을 꼭 빼닮았네. 아, 알겠다. 덤프셔 후작의 외동딸인 다이애나 양이구나. 이번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런 생각을 이어나가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점점 교세가 커지고…… 여러 가지 일이 있으면서, 아무래도 나도 소수민족 출신의 사람이다 보니 팔이 점점 안으로 굽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지요.”

두 사람은 무슨 사이지? 게이인 황태자는 영애들과 어울린 적이 거의 없다. 친구라면 몇 있지만 이렇게 파티에서 단둘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이의 여성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다가 말입니다. 지난번 추도회 때…… 백작의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요.”

“…….”

……설마 저 영애가 약혼녀 후보인가?

“내가 너무 본분을 잊고 살지 않았나, 초심을 잃지 않았나…… 그런 생각들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왔습니다. 초심을 되찾기 위해서요. ……피를 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니.”

피?

그제야 정신이 되돌아왔다. 방금 무슨 말을 했지?

“죄송하지만 방금 뭐라고…….”

“아, 이제 가봐야겠네요.”

“사제님?”

대사제가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잊어버리세요.”

“하지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라쉬네.”

‘라쉬네’.

또다시 듣는다. 아인 퍼스의 새파랗게 벼려진 얼굴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라쉬네. 그게 무슨 의미라고 했더라?

‘축복한다는 의미도 있고, 무운을 빈다는 의미도 있지. 하지만 마지막 의미는 뭔 줄 알아?’

‘명복을 빈다는 의미야, 루크.’

* * *

시간은 흘러 자정에 가까워졌다.

무전기를 타고 송년 담화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기자단을 불러 모아 준비시키자 파티장의 열기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엄숙해지는 분위기.

모든 사람이 송년 담화를 기다리는 가운데, 사람들의 기대를 깨고 공식석상에 나타난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였다.

일순 파티장 안이 술렁였다. 시간만 늦춰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나 역시 갑작스럽게 나타난 황태자의 모습에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간신히 눈이 마주친 나단은 놀라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술렁이던 파티장이 조용해졌다.

그는 한순간에 조용해진 내부를 둘러보았다. 연녹색 눈동자가 좌중을 압도하듯 묵직한 무게감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던 와중,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눈동자가 내가 있는 곳에서 잠시 멈추었다. 잠시 시선이 얽힌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멀어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시선에 힘이 있는 것 같다. 어째서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지.

잠시 후 그가 내 쪽으로 꽂혀 있던 시선을 떼며 입을 열어 천천히 담화문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앞부분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제국의 유구한 역사에 대한 짧은 찬사와 함께 시작된 담화문은 비서실에서 작성한 대로 물 흐르듯 흘러갔다. 중반부로 가서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단 한 가지, 황태자의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는 것을 제외하면.

황태자의 담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자들도 카메라에서 눈을 떼며 불안한 눈빛으로 황태자를 보았다. 그의 담화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는 실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나단이 곤란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의 영광스러운 통일제국은…….”

불안하게 이어지던 황태자의 말이 뚝 끊겼다. 원래대로라면 ‘우리의 영광스러운 통일제국은 영원할 것이며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어떠한 세력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지극히 호전적인 문장이 연회장 내부에 퍼졌어야 했다.

정적이 흘렀다. 팽팽한 긴장감이 연회장 내부에 감돌았다.

황태자는 고장 난 인형처럼 우두커니 단상 앞에 서 있었고, 비서관들은 잔뜩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으며, 기자들은 아예 카메라를 내리고 황태자를 살피기 여념이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결국 한참 동안 이어진 정적에 참다못한 귀족들이 헛기침을 하며 황태자를 재촉할 때였다.

침잠한 눈빛으로 담화문을 내려다보던 황태자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얼굴은 결연했으며, 알 수 없는 의지로 단단했다.

그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강이 흘러 바다로 향하듯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를 것입니다. 각개 민족은 그들의 자유를 되찾을 것이요, 폭력과 억압으로 칠해진 과거는 빛을 잃을 것입니다. 거짓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될 것이며 통치의 시대는 막을 내릴 것입니다.”

끔찍한 정적이 폭탄처럼 연회장 안에 떨어졌다.

나는 말을 잃고 멍하니 단상을 쳐다보았다. 그때 또다시 힘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의 근원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도대체, 당신은 왜 나를 보는 거야.

이번만큼은 착각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 * *

연회장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취재를 끝낸 기자단들은 이거 제목을 어떻게 지어야 하냐고 곤란해하며 식은땀을 흘렸고, 사태 파악을 끝낸 귀족들은 이게 말이나 되는 담화냐며 당황하긴 피차 마찬가지인 서로서로에게 성을 내었다.

폭탄을 터뜨린 황태자는 담화문 이후 행방을 찾을 수 없는데 난데없이 찬물을 맞은 다른 사람들만 난리다.

안면 익은 몇몇 귀족이 내게 다가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나라고 알 리 있나.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확인 후 다시 안내를 하겠다는 식상한 대답을 내뱉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더 이상은 피할 자리도 없을 무렵, 사라진 황태자를 찾아내라는 비서실장의 짜증 섞인 무전을 받았다.

방에도 없다는 황태자를 도대체 어디서 찾으라는 거야.

황궁은 넓다. 멀리 벗어나지는 못했겠지만 숨으려면 얼마든지 숨을 수 있는 곳이 또 황궁이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길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폈을 테니, 나는 조금 먼 곳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물어 몸을 숨기기에 좋을 법한 곳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을 법한 곳에 도달했을 때였다. 설마 이런 곳에 있겠어, 싶어서 몸을 돌리려던 찰나.

“……만둡시다, 백작.”

작디작은 목소리가 귀에 걸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이제 와서 그만두잔 말입니까?”

두 번째 목소리가 잇따랐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막연한 예감이지만 차갑고 잘 벼려진 칼과 같은 사람일 것 같다.

“굳이 피를 봐야겠습니까?”

“그럼 어떤 방법이 좋겠습니까?”

“담화문을 들었잖아요. 조금 더 온건한 방법으로…….”

“하하…… 사제님, 사제님.”

남자가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저자들이 원하는 반응이라는 걸 왜 모르십니까.”

“하지만 이때까지의 방법으로 얻은 게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백작.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녀의 순교로 얻은 게 뭐가 있습니까? 탄압뿐이었지요? 또 그녀가 낳은 그 아이는 어떻습니까? 그 아이는, 그 아이는 ……결국 괴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내 아들을 욕되게 부르지 마시오!”

멀리서 듣는 내가 흠칫할 정도로 분노에 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인기척을 최대한 줄이며 무전기에 붙은 작은 버튼을 눌렀다. 무전기 상단의 작은 램프가 붉게 반짝였다.

“……괴물이라 한 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 역시 그 아이가 그렇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내 아들을 안타깝게 여기지 마시오. 그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포기했을 뿐이오.”

“그래서 괴물이라 하는 겁니다, 백작. 당신의 그런 사고방식이 그 아이를 괴물로 만들었어요. 대의, 그거 좋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인생까지 포기하는 것이 정상입니까? 그게 백작의 상식이에요?”

백작이라 불린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대사제는 말을 이었다.

“소수민족도 아닌 백작이 여기까지 같이 발을 맞춰 준 것,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방식을 달리할 때가 되었어요.”

“……내 젊은 시절을 전부 바쳤는데, 돌아오는 건 배제로군.”

“배제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백작이 위험한 곡예를 그만두고 이젠 마음 편하게 뒤로 물러났으면 하는 것뿐이에요.”

숨소리를 죽인 채 그들의 대화를 녹음하며 머릿속으로 내용을 정리했다.

……대사제와 저 누군지 모를 ‘백작’은 공모 관계였다. 무엇을 공모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무언가 위협적인 것을 공모하였다. 그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지금 대사제는 백작에게 모의하던 것을 그만두자고 설득하고 있다. 아까의 대화와 지금의 말들을 종합해 볼 때 대사제는 피를 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피를 보는 행동이라. 그게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테러인데…….

그때였다.

-라파엘 비서관, 들립니까?

치직- 무전이 울렸다. 그리고 이어지던 대화가 끊겼다. 심장이 차게 식는다. 황급히 무전기를 틀어막았지만 이미 흘러나온 소리는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얼어붙은 정적을 깨고 두 사람 중 누군가의 것으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점점 더 가까워진다. 도망가야 하는데 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들킨다. 들키고 만다!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앞만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커다란 손에 세상이 가려지며 시야가 어둡게 물들었다. 곧이어 강한 힘에 몸이 들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익숙한 향이, 익숙한 숨소리가 코와 귀를 가득 채웠기에. 쿵쿵대는 심장을 감추려 눈을 질끈 감았다.

특공무술을 포함해 온갖 무술이란 무술은 전부 섭렵했다는 황태자가 발소리조차 죽인 채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덕분에 다가오던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종내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황태자가 나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을 때까지 나는 감긴 눈을 뜰 수 없었다.

* * *

황태자가 나를 내려놓은 곳은 파티장과 그리 멀지 않은, 그러나 역시 인적이 드문 외딴 정원이었다. 벤치 한 개와 작은 대리석 분수가 전부인 조촐한 정원.

황태자는 나를 벤치 위에 앉히고 자신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려 했다. 그 모습에 안 그래도 머리가 혼란스러웠던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만요.”

돌아서려는 그의 몸이 움찔하더니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그 상태로 굳어버린다.

멈춰 선 그를 보며 나 역시 적잖이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불렀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머릿속에 여러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들었는지, 아니, 그것보다는 우선 어디에 있었는지, 담화문 내용은 그게 뭔지, 왜 마음대로 담화 내용을 바꾼 건지, 생각이라는 게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등등.

하지만 정작 내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이 상황에 하등 쓸모가 없는 멍청한 물음뿐이었다.

“왜…… 나를 구했습니까.”

황태자가 고개를 돌린다. 그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눈빛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멀리 있을 때는 나를 향했던 시선이 가까이 있을 때는 정작 내 발치 어딘가를 헤매었다.

“……당신 얼굴이 창백했어. 숨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그게 전부야?

“그럼…… 혹시 그들의 대화는 들었습니까?”

“아니.”

황태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시선은 내 발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울컥했다.

“그럼 그동안 어디 있었습니까?”

“…….”

“파티장을 그 모양으로 뒤집어놓고, 혼자 속 편하게 어디 있었느냐고요!”

그때 황태자가 맥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늦가을의 낙엽처럼 쓸쓸한 미소였다.

“그냥…… 이곳저곳.”

“이곳저곳?”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러니까 그 생각할 게 뭔데. 남들 머리 터지게 한 주제에 자기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산책을 했단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이기적이지? 하도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그때 황태자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점성 높은 시선이 달라붙었다.

“……당신이 화를 내는 모습이 좋아.”

한참 후에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잖아. 그래서…… 이런 모습도 미치도록 눈에 겹다.”

그 말을 듣는 나는 미치도록 어이가 없었다.

화를 낸 적이 없었다고? 아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어제 나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화를 냈다.

근데 처음 본다고? 치매라도 걸린 거야? 아니면 어제 내가 들려준 진실에 너무 충격받고 훼까닥하기라도 한 건가? 이러나저러나 악취미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괜히 말 돌리지 마세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담화문 내용을 제멋대로 바꾼 겁니까? 이 일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지는 알고 한 일이에요? 전하가 앱니까? 양위 문제까지 거론되는 시점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철부지예요?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 생각도 좀 해야죠. 사람 나가는 날까지 이렇게 귀찮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립니까? 예?”

양위라는 말이 나오자 황태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을 귀찮게 만들려던 건 아니야.”

“그럼요?”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어.”

“그 미친 짓이 전하께서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고요?”

“그래.”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점멸하듯 사라졌다 나타나는 연녹색 눈동자는 언제 바닥을 헤맸냐는 듯 이번에는 내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시선이 조금 답답했다.

도대체 당신은 왜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는 거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전혀 모르는 주제에 왜 눈빛이 그를 닮았냔 말이야.

내 과거의 삶을 부정할 거면 그냥 멍청한 황태자로 남아야지, 어째서 눈빛은 그를 닮은 건데.

숨을 고른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말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모두, 내가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야. 모두 내가 시작한 일이었으니, 내가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게 전부야.”

황태자가 제멋대로 바꾼 담화문의 내용을 떠올렸다.

‘강이 흘러 바다로 향하듯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를 것입니다. 각개 민족은 그들의 자유를 되찾을 것이요, 폭력과 억압으로 칠해진 과거는 빛을 잃을 것입니다. 거짓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될 것이며 통치의 시대는 막을 내릴 것입니다.’

자유를 잃은 민족. 폭력과 억압으로 칠해진 과거. 거짓된 평화. 통치의 시대. 그 모든 것을 네가 시작했다고? 그게 무슨 말…….

혹시…….

그때 멀지 않은 파티장에서 음악 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하늘에서 전투기들이 현란한 빛과 함께 나타났다.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자리 위에 붉은 구름이 나타났다. 붉은 구름은 ‘1984’라는 숫자를 이루었다.

곧 황궁의 돔 위로 폭죽이 쏘아 올려졌다.

피융- 펑! 피융- 펑!

Happy new year!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년이다. 새로 다가온 1984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황태자가 말했다.

“미안해.”

“……뭐가.”

“모든 게 미안해.”

“그러니까 뭐가 미안한데.”

“전부. 내가 저지른 모든 것들.”

네가 뭘 저질렀는데?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도대체 너는 뭐가 미안한 건데.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건데. 어제까지는 전생 타령이라며 내 상처를 헤집던 네가, 이제 와서 뭐가 미안한 건데?

황태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 터지는 폭죽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이 그림처럼 망막에 달라붙었다. 그의 연녹색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말 돌리지 마. 뭐가 미안한 거냐고.”

“자격이 없다는 건 나도 알지만,”

“샤를마뉴!”

“한 번만 말해도 될까?”

말하지 마.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다.

싫어. 듣기 싫어. 너는 누구야? 지금 너는 누구지? 너는 샤를마뉴야, 아니면 델루니안이야? 네가 샤를마뉴라면, 그 멍청한 황태자라면, 어쩌면 들어줄 수도 있겠지만, 네가 델루니안이면 안 돼. 듣기 싫어. 하지 마. 안 들을 거야.

나의 거부에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 고통이 번지는 것을 보며 나는 더욱더 귀를 꽉 틀어막았다. 거대한 폭죽 소리도 멀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황태자가 아무리 크게 외쳐도 들리지 않을 것 같다.

한참을 지나도 손을 떼지 않는 나를 보며 황태자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을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어?

불신으로 고개를 젓자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겨 정원을 떠났다. 내게서 멀어졌다.

……정말로 마지막이 될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귀를 막았던 손을 살며시 뗐다.

거대한 폭죽음이 다시금 귀를 가득 채웠다. 폭죽 소리 때문에 말해봤자 아무것도 안 들렸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자 문득 궁금해졌다. 어차피 듣지 않은 말이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들을 일이 없겠지만, 그래서 이제 와서 뒤늦게 궁금해진 것이지만 말이다.

샤를마뉴인지 델루니안인지 모를 당신은.

당신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그때, 모르기를 원하는 두려움과 알고 싶은 호기심과 알 길 없는 아쉬움에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나는 몰랐다.

그것이 정말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이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나는 그것이 너무 늦은 후회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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