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장 (19/34)

18장

“당신이 어째서 여기…….”

시드니 카턴,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밀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드니 카턴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답 없이 예의 그 진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나도 어딘지 모르는 이곳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라 마치 이 상황이 실험적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시드니 카턴이 왜 여기에 있지.

그때 에반이 여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늦었어.”

“죄송합니다. 생각 외로 처리할 게 좀 있어서.”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까지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곳은 아마도, 아니, 거의 분명히 제정부의 은신처일 것이다. 두 명의 제정부 소속 요원과 창문 하나 없는 밀실이 나의 추측을 뒷받침했다.

그렇다면 이곳을 알고 찾아온 사람은 분명 같은 제정부 요원일 테지. 경계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마리아 카밀라와 에반의 반응이 설명해 주지 않는가.

“……아주 기가 막히게 속았네.”

당신도 제정부 요원이었단 말이지. 그저 순진한 대학 교수일 줄 알았다.

델루니안 시절, 정국을 제 손아귀에 휘어잡고 황제를 보필하던 국무대신 채스터턴을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도.

“화내지 마십시오. 황태자 주위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친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샤를마뉴도 이 사실을 알아?”

“그 친구는 모를 겁니다.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으니까요.”

그럴 줄 알았다. 시드니 카턴의 말마따나 샤를마뉴는 황태자로 자랐지만 은근히 순진한, 자칫하면 뒤통수 얻어맞기에 십상인 타입이었다. 나는 차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을 친구라 생각하는 샤를마뉴가 안타까울 따름이군.”

“친구긴 친구죠.”

“…….”

“아직 새로 넣은 치아가 아프긴 하지만요.”

시드니가 킥킥 웃으며 빈 의자에 앉았다.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반이 물었다.

“아는 사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시드니 역시 의뭉스럽게 웃으며 넘어갈 따름이었다.

에반이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듯 흐음, 하며 팔짱을 끼었다.

“그건 그렇고.”

“예.”

“그 결정적 증거란 게 뭡니까?”

시드니 카턴에게 속아 넘어간 샤를마뉴가 안타깝고 그 때문에 짜증이 조금 났지만, 일단 중요한 일은 이거였다. 그래서 그 결정적인 증거가 무엇일까.

내 질문에 시드니 카턴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릅니다.”

“……?”

모른다고?

“비서실장이 가져간 서류가 원본이었는데, 그걸 준 사람이 죽었거든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아인 퍼스가 태어난 산부인과의 의사입니다. 닷새 전 사망했더군요. 사고사입니다.”

사고사라. 경악스러운 마음과는 반대로 머리는 차갑게 식어 갔다.

사고사. 유독 근래 사망 사고가 잦다. 정말 사고일까. 에반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래서 허탕이야?”

“결정적 증거 확보에는 그렇습니다만…….”

“넌 할 줄 아는 게 뭐야, 이 새끼야.”

에반이 거칠게 시드니 카턴을 타박했다. 아마도 에반이 그의 상사쯤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저렇게 거친 모습은 처음 보는 터라 나는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왜 저렇게 시드니 카턴을 싫어하지?

시드니 카턴은 에반의 타박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다만 오늘 그 실마리를 찾긴 했습니다.”

“실마리?”

“찾는 데에 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 산간 오지에 처박아놨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 순간 에반이 낯을 바꿨다.

“찾았냐?”

“예. 선수를 쳤습니다. 3호실에 있어요.”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지? 흥분한 마리아 카밀라와 에반, 그리고 은근히 의기양양한 시드니 카턴을 보며 나 혼자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뭘 찾았다는 겁니까?”

내 물음에 시드니가 나를 슬쩍 바라봤다.

“궁금합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내가 들어도 되는 건가. 제정부의 일 같은데.

내 고민을 눈치챈 건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에반이 사납게 끼어들었다.

“넌 몰라도 돼.”

뭔데 이래. 에반의 태도에 궁금함은 더욱 커졌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대답을 납득했다. 제정부의 일이니까 내가 전부 알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아뇨, 라파엘 당신은 볼 자격이 있습니다.”

“……?”

“당신이야말로 관련인이니까요.”

“시드니 카턴!”

에반이 경고하듯 시드니 카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시드니는 완강했다.

“어떻습니까, 라파엘? 보러 가시겠습니까?”

에반이 나를 바라보았다. 시드니 역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에반은 저렇게 강하게 나를 막는가.

나는 시드니를 믿지 않는다. 채스터턴인 과거를 제외하더라도 의뭉스러운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봐도 됩니다’라고만 했다면 나는 본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영악하게도 나를 관련인으로 정의 내리며 볼 자격이 있다고 했다.

……독사의 꾐 같다.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럼 보죠.”

내가 관련인이라면, 보는 게 맞겠지. 나와 관련된 일을 나만 모르는 것도 멍청한 일이니까.

에반이 시드니를 죽일 듯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 * *

시드니를 따라 또 다른 밀실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내가 있었던 밀실과 마찬가지로 복도에도 창문은커녕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시계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하인지, 아니면 지상인지도 알 수 없는 기묘한 공간.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다리, 왜 그래?”

내 물음에 다리를 절던 에반이 우뚝 멈춰 섰다.

“별거 아니야.”

“다쳤어?”

아무리 인연을 끊다시피 한 삼촌이라지만 하나뿐인 혈육인지라 다리를 저는데 타인을 대하듯 무심할 수는 없었다.

작전 요원이었다고 했지. 설마 작전 중에 다친 건가? 은연중에 걱정하는 기색이 드러났는지 에반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도박 빚 져서 도망치다가 린치당한 건데.”

“…….”

내가 저 인간을 두 번 걱정하면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털 때였다.

그때 시드니가 검은 문 앞에 멈춰 섰다.

“여깁니다.”

그가 문을 열었고, 내가 있던 방과 비슷하게 하얗지만 가운데가 유리창으로 나뉘어 마치 취조실처럼 구성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서자 유리창 건너편으로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분은……?”

시드니는 대답 없이 유리창 너머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나는 에반의 옆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노부인은 시드니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미동 하나 없이, 마치 밀랍 인형처럼 우두커니 앉아 탁자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퍼스 부인.”

시드니가 입을 떼었고, 그 말에 퍼스 부인이라 불린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멍하게 시드니를 향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 소리에 반응하는 인형처럼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퍼스 부인’

그 말은 곧, 저 부인이 아인 퍼스의 어머니, 아니, ‘법적’ 어머니라는 뜻일 게다. 아인 퍼스는 자신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고 했으니까.

“퍼스 부인,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퍼스 부인은 대답 없이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드니는 계속 질문을 이어 나갔다.

“지금은 몇 월이죠? 원래 계시던 곳을 기억하십니까?”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허공을 그렸다.

“혹시 고향이 어디인지는 기억하세요?”

시드니가 고향을 물었을 때, 퍼스 부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아이젠.”

처음 듣는 대답이었다. 아이젠이라. 그녀는 아마도 과거를 그리는 듯 머나먼 곳을 보았다.

인형처럼 생기 없던 눈동자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이제야 좀 산 사람 같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계속 지켜보자, 시드니가 질문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남편분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홀우드 퍼스…….”

한 번 말문이 트인 여자는 순순히 시드니의 질문에 대답했다. 홀우드 퍼스. 그때 잠깐 보았던 가족 관계 증명서에 분명 그런 이름이 있긴 했다.

“그럼 자녀분은요?”

그 순간 퍼스 부인이 멈칫한다. 어라. 그 작은 변화에 시드니를 제외한 모든 이가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녀를 주의 깊게 바라봤다.

“……아인, ……아인 퍼스.”

퍼스 부인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행복한 과거를 그리던 그녀의 얼굴에 음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니, 불안이다. 음울한 기운이 아니라 저것은 감출 수 없는 불안에 가까웠다.

뭐가 불안한 거지?

아인 퍼스라는 이름을 들은 시드니가 질문을 이었다.

“그럼 자녀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내 아기.”

부인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아인, 내 아기, 내 아기…….”

그리고 이어지는 작지만 빠른 말들.

“내 아기, 우리 아기, 내 작은 공주님, 우리 아이 어디로 갔을까. 내 공주님 어디로 갔을까…….”

공주님?

공주님이라니. 어떻게 된 일이지. 놀란 것은 나뿐이 아닌지, 에반은 경직된 얼굴로, 마리아 카밀라는 경악한 얼굴로 시드니와 퍼스 부인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인 듯, 시드니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따님은 어디로 갔나요?”

“내 아기. 내 아기…….”

“누가 데려가기라도 했습니까?”

그 순간 부인이 ‘아아악!’ 하며 새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실핏줄이 터지며 누렇던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갔다.

“악귀 같은 년! 천하의 악귀 같은 년! 내 아기, 내 아기 돌려줘! 내 아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비명을 지르는 부인의 모습에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아기를 돌려달라니. 누군가 그녀의 아이를 납치라도 했단 말인가? 누가? 아니, 그렇다면 아인 퍼스는?

생각이 엉긴 실타래처럼 꼬였다. ……침착하자. 처음부터 생각해.

저기 앉은 여자는 아인 퍼스의 법적 어머니.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아인 퍼스는 여자아이며, 정황상 누군가 그 아이를 데려갔다.

그리고 세상에 돌아다니는 아인 퍼스는 분명한 남자. 그리고 그가 말한 가족 관계와 호적상의 가족 관계는 다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잖아.

그때, 세상이 떠나가라 울부짖으며 자신의 아이를 찾던 부인이 결국 실성하여 쓰러졌다.

시드니는 침착하게 벽에 붙은 벨을 눌렀고, 어디선가 흰 가운을 입은 남자 두엇이 들어와 부인을 들것에 실어 날랐다. 아마도 이곳에서 전담으로 일하는 의사들인 것 같았다.

그들이 사라지고 취조실에서 나온 시드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제 알겠지?’ 하고 되묻는 것 같았다.

“이게 전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에반이 나를 대신하여 물었다.

“아인 퍼스가 여자였나?”

“‘실제’ 아인 퍼스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여자아이는 다른 곳으로 보내진 모양입니다.”

“누가 보냈는지는 알아?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도…… 부인의 전 주인인 마리아 레브로비치겠지요.”

마리아 레브로비치. 오래된 사진 속 활짝 웃고 있던 이국적으로 생긴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여자가 퍼스 부인의 주인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왜 그 여자가 퍼스 부인의 딸, 아인 퍼스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고 생각하는 걸까.

……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그때 비서실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레브로비치의 산부인과 기록.”

그 말에 시드니가 너도 알고 있었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레브로비치 부부의 호적에는 분명 사내아이가 하나인데, 레브로비치가 가장한 익명 여성의 산부인과 기록에는 사내아이가 하나 더 태어났다고 적혀 있었죠.”

“…….”

“그리고 법적인 아인 퍼스는, 그 아이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요.”

“…….”

“아마도 실종된 아인 퍼스의 산부인과 기록에는 여아라고 적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드니가 그렇게 말하며 확실하진 않지만요, 라고 덧붙였다.

그래. 비서실장이 가져간 서류의 원본이 나타날 때까지는 이 모든 게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만약 당신의 추측이 맞다면.

“그렇다면, 아인 퍼스는…….”

“레브로비치의 후계라는 뜻이지. 예상은 했지만.”

에반이 짜증 난다는 식으로 머리를 긁으며 내 말을 끊었다.

“그럼 그 딸은 어디 갔어? 진짜 아인 퍼스 말이야.”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안나 레브로비치가 죽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

그래서 나보고 관련자라고 했구나. 레브로비치의 일이라서. 그래서.

내 부모님을 죽인 자들의 끊이지 않는 복수극이라서.

말도 안 돼.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하지만 퍼즐은 자석처럼 제자리를 찾아갔고, 어깨의 떨림은 강해졌다.

떨지 마. 진정해. 떨림을 진정시키고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내 부모님을 죽인 자의 아들을 내가 곁에 두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하얗게 굳은 채 파들파들 떠는 나를 억누른 것은 에반이었다.

“일단 진정해.”

“…….”

“진정하고……너한테 물어볼 게 있다.”

물어볼 것?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에반이 나 못지않게 굳은 얼굴로 천천히 질문을 꺼내놓았다.

첫 질문은 아인 퍼스와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였다.

나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여느 때와 같았던 출근길, 미행을 당하고 있다며 잠시 태워줄 수 있냐고 물었던 아인.

평소 같았으면 무시하고 갔겠지만 선해 보이는 앳된 얼굴이 마음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타라고 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에반의 질문에 대답하며 어쩌면 그 첫 만남 역시 의도된 첫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에반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때 그 꽃 가게에서는 무슨 얘기를 했지?”

꽃 가게? 무슨 꽃……설마.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맥케인의 꽃 가게에 간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지? 설마 날 미행이라도 한 건가?

잔뜩 경계하며 되묻자 에반이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 대답해’라며 대답을 재촉했다.

나중에 설명한다는 말은 결국 미행을 했다는 소리다. 기가 막히네. 이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짜인 판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내 교통사고에 관해서 들을 게 있었을 뿐이야.”

그래도 일단 이들이 나에게 해가 되는 세력이 아니라는 믿음은 있었기에 대답을 내놓았다. 에반이 곧바로 되물었다.

“그럼 아인 퍼스는 왜 거길 갔어?”

“……전부 지켜보고 있었군.”

“대답해.”

“나를 미행한 거야, 아니면 아인 퍼스를 미행한 거야?”

“답.”

“…….”

“…….”

잠시간의 기 싸움 후,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몰라. 그저 부인과 대화하는 도중 그가 들어왔어.”

“아인 퍼스는 부인과 아는 사이였나? 아니면 처음?”

“아는 사이였어.”

그때 마리아 카밀라가 끼어들었다.

“아는 사이였다고요?”

“예.”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모조리 꺼내놓았다.

부인과의 대화, 아인 퍼스가 들어온 일, 부인과 아인 퍼스가 알고 있는 연유, 나나라는 이름의 아들과 심지어는 그가 부인에게 백합 한 송이를 준 것까지 모두.

내 설명이 끝나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후 침묵을 깬 것은 에반이었다.

“……사고 당일 그가 나나 맥케인과 함께 있었다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순간 마리아 카밀라가 폭발하듯 소리쳤다.

“맥케인을 그렇게 만든 게 그 새끼였어…… 그 새끼였다고!”

마리아 카밀라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터뜨리는 바람에 맥케인에 대한 설명은 그녀가 진정하기 위해 취조실 밖으로 나갔을 때야 들을 수 있었다.

교통사고를 일으킨 맥케인은 페이퍼 컴퍼니로 위장한 제국정보부 소속 정보 요원이었다고 한다.

그의 임무는 아인 퍼스를 사찰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인 퍼스를 감시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고 한다.

그저 황제의 직속 기관인 비서실에 지원한 일리오니쉬 쿼터 출신이었으니 그가 공직 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가리는 정도의 목적으로, 아인 퍼스가 원서를 접수하고 최종 심사가 마치기 전까지의 통상적인 사찰 기간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황태자가 탄 차, 그러니까 내 차를 들이박았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스키드 마크조차 없었던 사고에 경무청이 함구한 것은 그가 민간인을 사찰하는 제정부 소속 요원이라는 것이 밝혀져 황가가 역풍을 맞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제정부에서는 이 일을 철저히 개인의 일탈이라 치부했고, 맥케인의 장례는 동료 한 명 없는 쓸쓸한 장례식이 되었다. 그 일을 제일 슬퍼한 것은 마리아 카밀라였다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늦둥이 아들을 이용해서 맥케인을 협박하고, 황태자를 죽이려 했겠다…….”

에반이 그렇게 말하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나는 영 이상했다.

내 차에 황태자가 타고 있는 것을 맥케인이 어떻게 알았을까.

내 차는 의전용 차량도, 황태자의 개인 소유 차량도 아니었다. 내 차를 백 번 천 번 들이박아도 황태자는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아인은 내게 보약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간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

아인을 사찰하던 맥케인이 친 것도 내 차였다. 황태자가 있을지 없을지는 순전히 우연에 따른다.

어쩌면.

“어쩌면, 그가 노린 건 나였을지도 몰라.”

“……뭐?”

에반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시드니가 끼어들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시드니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그는 내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눈빛으로 어떤 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니, 문득 심장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불현듯 어떠한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은 지금 채스터턴의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어. 시드니 카턴이 아닌, 채스터턴.

어째서? 갑자기 왜 전생의 눈으로 날 보는 거…….

……전생?

그 순간 에반이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렸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뭐?”

“괜히 들쑤시지 말라고.”

또다시 튀어나온 에반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순간 몸이 움칫 굳었다.

에반의 팔에 가린 탓에 시드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와의 접속이 끊어지자 조금 전까지 이어나가던 생각의 고리가 휘발되어 날아갔다.

한참 후 에반의 팔이 떨어져 나갔을 때, 시드니는 에반을 보며 묘하게 웃고 있었다.

* * *

아인 퍼스에 대한 추측은, 시드니의 말마따나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정황상의 증거 때문에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충격적이었다. 그가 준 보약이 내 건강을 갉아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무언가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가 레브로비치의 후계자라는 것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진실이었다.

아인이 레브로비치의 후계라면, 어째서 나를 해치려고 했던 걸까.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부전자전이라고 했지. 제 부모가 내 부모님을 죽였던 것처럼 그도 나를 그렇게 죽이려 했던 걸까.

하지만 이유는? 굳이 나를 해치려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나를 노린 게 아니었던 걸까. 내가 아니라 황태자를 죽이려 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아인츠만의 장례식 때 샤를마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지 않았던가.

내가 정신을 차려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내가 깨어난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은 며칠이지?”

내 물음에 홀로 앉아 밀실을 지키던 시드니가 대답했다.

“사건 발생 후 이틀이 지났습니다.”

“이틀!”

맙소사. 이틀이라니.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샤를마뉴는 알아?”

만약 그가 이 사실을 모른다면, 나는 비서실장 피습 후 이틀째 실종상태가 된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내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충격받았을 샤를마뉴를 상상하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걱정 많이 할 텐데. 내가 무사하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하는데…….

“글쎄요. 아마 모를 겁니다.”

빌어먹을.

“전화기 내놔!”

“예?”

“뭐 하고 있어?!”

전화기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자 시드니가 약간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알게 뭐야. 지금 그게 중요한가? 망했다는 생각만 머리에서 맴돌았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분명 걱정하고 있겠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간이 철렁할 정도였다.

나는 멀쩡한데 샤를마뉴가 실종되었다고 생각하면…… 등줄기가 오싹하다. 그가 죽었을지 살아 있을지 모르는 이틀은 지옥에 가까우리라.

시드니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었다. 제정부 요원이라더니 황실 배급품을 쓰고 있었나 보다.

휴대폰을 넘겨받은 나는 빠르게 샤를마뉴의 번호를 눌렀다. 시드니가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뚜르르. 신호음이 흘렀다. 샤를마뉴는 한동안 받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안 받는 거야, 하면서 초조하게 주먹을 움켜쥘 때였다.

“결국 그와 사귀기로 했습니까?”

시드니가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데.”

“물론 제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긴 하죠.”

시드니가 선선하게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묻지 마. 짜증 나니까. 아, 그나저나 얘는 왜 전화를 안 받아?!

그때였다.

-……여보세요.

신호음이 끊기고, 바닥을 뚫을 듯 낮은 목소리로 샤를마뉴가 전화를 받았다.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부끄럽게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보따리를 내려놓듯 탁, 풀리며 가벼워졌다.

당신 정말 살아 있구나.

“접니다, 라파엘.”

그를 달래듯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하자, 수화기 건너편으로 정적이 흘렀다.

-……라파엘?

“예.”

그리고 곧 이어지는 우당탕탕, 가구가 넘어가는 듯한 소리.

-뭐야. 당신 어디야. 지금 어디에 있어!

초조한 듯, 빠르게 이어지는 그의 물음에 나는 상황도 잊고 비식 웃었다.

그러나 그저 즐거운 웃음은 아니었다. 거칠게 갈라지는 샤를마뉴의 목소리에서 이틀간 마음고생한 흔적이 느껴졌다.

잠은 제대로 잤을까. 먹긴 제대로 먹었어? 분명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미안해. 나 때문에 걱정시켜서 정말 미안합니다. 깨어나자마자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그 본당을 나가면 안 됐는데.

“지금…….”

여기가 어디지. 잘 모르겠다. 나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일단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제정부의 은신처니까 안전하긴 하지. 샤를마뉴를 안심시키려 그렇게 말했으나 그다지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었나 보다. 샤를마뉴가 벌컥 성을 냈다.

-안전한 곳 어디! 잠깐, 근데 이 번호는 뭐야? 당신 번호는 아니잖아.

“아…….”

나는 시드니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통화하는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시드니는 알아서 대답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걸 어쩐다.

“……시드니 카턴 씨의 전화입니다.”

-뭐?

“그게 사정이 좀…….”

변명을 늘어놓는 내 말을 끊으며 샤를마뉴가 무지막지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드니 바꿔 봐. 당장.

샤를마뉴는 화가 난 것 같다…….

나는 시드니를 바라보았다. ‘또 왜요?’ 시드니가 나를 보며 입 모양으로 물었고, 나는 그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나다. ……여기? 네가 말해도 모를 곳. 이유는 묻지 마. 그럴 사정이 있었어. ……무사해. 응.”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 시드니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샤를마뉴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헛소리 마!

시드니는 수화기를 잠깐 귀 옆에서 떼었다가 다시 갖다 대며 말했다.

“돌려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내가 물건이냐. 돌려주고 말고 하게.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곧 샤를마뉴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사소한 것쯤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던 시드니와 샤를마뉴는 일정한 타협점을 찾은 건지 오케이,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10시에 그레고리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드니가 말을 이었다.

“샤를마뉴가 애타게 찾네요. 반미치광이처럼.”

그 말투가 어쩐지 조금 묘하게 들렸다. 대답 없이 나갈 준비를 하자(그래 봤자 한쪽 구석에 놓인 겉옷을 주워 입는 것이 끝이었다), 시드니가 경고하듯 속삭였다.

“밖으로 내보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나가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말마따나, 어쩌면 아인 퍼스가 당신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가 은근한 말투로 나를 붙잡았다.

“여기는 안전합니다.”

“…….”

“여기 있으면 사태가 진정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어요. 그런데도 나가고 싶습니까?”

늘 생각하지만, 시드니 카턴은 사람을 꾀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안전한 공간. 그 말에 솔깃하지 않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 챙길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니까.

그러니까, 몇 달 전이면 그랬을 것이다. 몇 달 전이면 나는 분명 이곳에 남는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들은 샤를마뉴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나를 찾느라 이틀 동안 목소리가 쉬어 갈라질 때까지, 쉬지도 못하고 반미치광이처럼 나를 찾았다는 샤를마뉴.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놀람과 동시에 안도하는 기색이 보였던 그 사람.

그는 무척 놀랐을 것이다. 비서실장이 피습당한 와중에 자신마저 없어졌으니 오죽 놀랐을까.

나 역시 폭발을 떠올리자마자 샤를마뉴부터 떠올렸으니,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나를 봐 왔다는 샤를마뉴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야 해.”

가야 했다. 내 자신의 안전과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지만, 그래도 가야 했다.

가서 놀란 샤를마뉴를 진정시키고, 내가 무사한 것을 알리고, 그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했다.

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에는 이틀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그에게 나는 괜찮으니 이제 자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친 그를 다독여 주고 싶었다.

“샤를마뉴가 무사한지 직접 봐야겠어.”

“…….”

내 대답에 시드니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샤를마뉴와 꽤 마음이 깊어졌나 봅니다.”

“당신이 알 바 아니라고 했지.”

“물론 그렇긴 하죠. 그렇긴 한데…….”

말이 길어. 그렇게 생각하며 시드니를 지나쳐 먼저 앞장설 때였다.

밀실의 문을 여는 순간 시드니가 말했다.

“어떻게 자신을 죽인 남자를 또다시 사랑할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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