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창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눈을 뜨지 않아도 알 것 같다.
태양의 금빛 입자가 감긴 두 눈으로 파고들어 끊긴 필름처럼 어두웠던 정신을 깨웠다.
천천히 눈을 뜨자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천장이 보였다. 커튼. 천장.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멍했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다가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비단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초점이 흐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넓은 침대 한쪽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곱게 빚어놓은 듯 다부진 옆모습. 샤를마뉴였다.
그 얼굴을 보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영 이상한 곳에 홀로 뚝 떨어진 건 아니구나 싶은 안도감.
그러면서도 역시 의아했다. 왜 샤를마뉴가 여기 있지? 여기는 어디고?
사방은 고요했고 여기가 어디냐고 묻기에는 샤를마뉴는 손가락 하나 갖다 대기 무서울 정도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벗어났다.
침대 밖에는 여덟 개의 아드리안식 기둥이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 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역시 낯선 공간이다. 황궁도 아닌 것 같다. 커다란 발코니 쪽으로 창이 열려 있기에 그쪽으로 다가갔다.
창밖의 풍경은 몹시도 아름다웠다. 하늘로 높게 치솟은 산맥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진 곳.
여행 잡지에서나 볼 법한 광경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근사한 곳이다.
휴가로 오기에 딱 좋은…… 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여길 휴가로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 내가 휴가를 왔던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이렇게 평화로운 휴가를 보낼 리가…….
“위험해.”
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등을 껴안는 누군가의 강한 두 팔도 함께였다. 조금 당황해서 물었다.
“깨셨습니까?”
“응…….”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마도 내 탄성에 깬 거겠지. 조금 미안해졌다. 그냥 더 자지 그랬어.
등을 껴안은 그의 팔을 도닥이며 ‘더 주무세요’라고 말했다. 그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그러면서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윽. 소름이 돋는다. 아무데서나 이러지 말라니까, 진짜. 그의 팔을 풀어내며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제발 이러지 마시라고요.”
그 순간 등 뒤에 있는 샤를마뉴가 우뚝,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보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딥니까?”
황궁은 아닌 게 확실한 이곳은 도통 어디란 말인가? 내 물음에 샤를마뉴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여름행궁. 잠이 덜 깬 건가.”
아니, 잠은 확실히 다 깼는데. 근데 여름행궁이라고?
“여름행궁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황제 폐하의 개인 재산인가요?”
“……그래.”
“꽤 멋지네요.”
황제의 개인 재산이었구나.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황실 비서관이라고는 하지만 재산 부분은 황가에서 직접 고용한 법률 전문가들이 관리하는 터라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샤를마뉴의 개인 재산 목록 정도에 그쳤다.
황태자이자 일리아 대공인 샤를마뉴는 봉토와 남부의 별장 몇 개가 부동산의 전부인데…….
역시 황제는 다른가 보다. 이런 여름 행궁도 있다니. 새삼 샤를마뉴가 부러웠다. 나중에 황제가 되면 물려받는 거구나. 좋겠다, 너.
나도 형식적이지만 백작인 까닭에 재산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태자에게 비할 바는 아닌지라 부럽긴 했다.
“근데 어쩌다가 여길 왔죠? 기억이 안 나는데…….”
내심 부러운 기색을 숨기며 물었다. 사실 이게 제일 궁금했다.
휴가였나? 아니면 탈주? 탈주라면 문제가 있다. 까라면 까야 하는 공무원의 입장에서 무단결근은 최악이란 말이지…….
악독한 비서실장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하다. 비서실장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을 쉴 때였다.
‘지금 당장 본당으로 돌아가세요. 얼른!’
악몽 같은 비명이…… 고막을 긁었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
‘본당으로 돌아가세요. 얼른!’
그건 분명 비서실장의 목소리였다. 다급하고 또 위급한 상황에 처한 목소리.
그건 뭐였지? 무슨 일이 있었지? 기억의 한 부분이 잘려 나갔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기억에 공백이 있다. 그 목소리는 뭐였지?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뭔가 이상했다. 부자연스럽다. 이렇게 평화로운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 샤를마뉴가 내 몸을 돌려세웠다. 그의 얼굴은, 차갑고 싸늘했다.
“전하? 왜…….”
“……전하라고?”
샤를마뉴가 눈썹을 찌푸렸다. 마치 무언가를 의심하는 듯. 그리고 다음 순간, 차가웠던 그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넌 또 왜 그래, 라고 생각하는 찰나.
“큭!”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작스럽게 그의 손에 목이 졸린 나는 강한 압력에 짧은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샤를마뉴가 이를 갈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미친 걸까, 아니면.”
“이……!!”
“다른 놈팡이가 있는 걸까.”
“……!”
“전하라니.”
샤를마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사나운 웃음에 머릿속에 빨간불이 깜빡거렸다.
이상하다. 전하라고 불렀다고 분노하는 샤를마뉴는 낯설었다.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질감의 정체는 뭐지? 샤를마뉴가 샤를마뉴가 아닌 것 같은 이 미묘한 이질감은 도대체…….
설마.
“이 나라에서 ‘전하’라고 불릴 수 있는 자는 몇 없지.”
“…….”
“내게는 태자가 없으니, 기껏해야 공작쯤이겠군. 누구냐?”
독을 바른 것처럼 매끄럽고 지독한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검은 피가 묻어나올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검고 깊은 눈이 이글거렸다. 그것은 정복자의 눈이었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으며, 굽힐 줄도 모르고 물러서지도 않는 오만함의 결정체. 나를 사로잡은 그것.
샤를마뉴가 아니다. 그는…….
“감히 황제와 착각한 그놈이 누구냐고 물었다.”
덫에 채인 짐승처럼 몸이 덜덜 떨렸다. 악몽 같은 비서실장의 비명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앞에 악몽이 펼쳐졌는데 떠오르지도 않는 비명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아아. 그래. 이것은 악몽이다. 악몽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신이 내 눈앞에 있을 수 있지?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검은 눈은 내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그는…….
“……델루니안.”
그는, 델루니안이었다.
“이제 알아보겠나?”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봤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여기 있지?
말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샤를마뉴가, 아니, 샤를마뉴와 똑 닮은 얼굴을 한 델루니안이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 내 뺨을 툭 쳤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다. 이번 일은 못 넘어가. 감히 나와 착각한 자가 누구냐?”
“……착각?”
“전하라고 부른 놈이 누구냔 말이다.”
전하…… 전하.
늘 그렇게 부른 사람이 있다.
전하. 전하라고 부르면 기쁜 듯 연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게 고개를 돌리는 사람.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다가도 욕망에 앞설 때는 누구보다도 정열적이고, 그러면서도 나를 생각하는 사람.
당신과 똑 닮은 당신의 후손. 샤를마뉴.
“……꿈입니까?”
“뭐?”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거죠?”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아니, 당신이 어떻게 내 앞에 있어? 그렇다. 이건 분명 꿈이다. 꿈이어야 한다.
훗, 하고 델루니안이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그가 빗어 넘긴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허공에 나부꼈다. 찬란한 금발이다. 내가 잊고 살았던 전생의 나의 빛깔.
“꿈이길 바라겠지만.”
“…….”
“꿈이든 아니든, 감히 황제의 후궁과 사통한 그놈은 죽는다. 그러니 말해. ‘전하’가 누구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뿌리쳤다. ‘죽는다’는 말에 그가 샤를마뉴가 아닌 델루니안임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나를 죽인 사람.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폭군.
내 심장에 칼을 꽂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해. 그때의 고통도 생생히 떠올라!
갈퀴가 달린 채찍과 불에 달군 인두. 뼈와 뼈 사이를 벌리는 지렛대와 상처에서 올라오는 진물과 혀가 잘릴 때의 고통.
하지만 그 무엇보다 아픈 것은 심장이 찔릴 때의 고통이었다.
그때의 고통을 잊지 못해. 당신이 나를 죽인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그를 보고만 있어도 토할 것 같았다. 그에게서 몸을 돌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욱, 욱- 먹은 것도 없는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웅크린 등 위로 사나운 델루니안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말할 수 없다?”
“…….”
“아주 절절한 연심이로군.”
제발 내 앞에서 사라져.
두 눈을 꾹 감고 대답하지 않자, 델루니안이 비릿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놈을 찾아.”
“…….”
“네 앞에서 감히 내 것을 탐한 그놈의 눈알을 뽑아주겠다.”
욱. 정말로 속이 뒤집혔다. 눈알을 뽑는다고? 나는 실제로 눈알을 뽑힌 적은 없지만, 그 고통이 가히 짐작이 되었다.
혀를 잘릴 때의 고통과 비슷하겠지. 불에 지진 듯 화끈하며 세상이 뒤집히는 고통이겠지.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몸을 파드득 떨고 있는데 빌어먹을 머리가 샤를마뉴의 녹색 눈동자를 뽑는 델루니안의 모습을 상상해 버리고 말았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의 눈알을 뽑으며 희열에 젖은 델루니안이라니.
벌벌 떨며 속을 게워 내는 나를 보며 델루니안이 상냥한 척 등을 다독였다.
“기대해도 좋아.”
그러고는 델루니안이 쌩하니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자리로 주저앉고 말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어떻게 그가 내 앞에 있는 걸까.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샤를마뉴는 어디에 있는 거야.
지독한 악몽이다. 눈을 떴더니 델루니안이 샤를마뉴의 목숨을 뺏겠노라 선포하는, 지독한 악몽.
빨리 꿈에서 깨야 해. 꿈이라기엔 지독한 현실처럼 느껴지는 이 순간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그 방법은, 나도 알지 못했지만.
* * *
델루니안이 나가고 여름행궁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평화로운 침묵은 물론 아니었다. 이를테면 폭풍 전야와도 같은 불길한 고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까지 시종들은 연신 내 눈치를 보았다.
그들 중 한 명은 내게 다가와 ‘폐하께 사죄를 하라’고 청하기도 했다.
사죄? 나는 멍청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사죄? 내가 사죄를 해야 할 것이 있었나.
멀쩡한 사람 붙잡아 고문하고 죽인 것은 그였는데,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
그나저나,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루크인 나는 죽었다. 델루니안이 죽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 시간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곳에 있는 걸까.
기억 속에는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있다. 본당으로 돌아가라고 했지. 본당이 어디지? 무슨 일이 있었더라?
어렴풋이,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떠오르는데 그 외에는 기억이 잘려 나간 듯 흐릿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결국 기억 되새김질을 포기하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하지만 이게 악몽이라면 언젠가는 깰 것이다. 꿈에서 깨면 돌아갈 수 있겠지. 라파엘의 시간으로. 내 삶으로. 샤를마뉴의 곁으로.
그때 시종이 작게 문을 두드렸다.
“국무대신 각하께서 드셨습니다.”
국무대신?
한순간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온몸의 근육들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시드니 카턴, 아니지, 채스터턴이다. 반쯤 늘어져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채스터턴 후작 각하.”
“이틀만이니 오랜만은 아닌 것 같군요.”
채스터턴의 목소리가 쌩하다. 그의 얼굴이 푸석하게 일어난 것이 보였다.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그에게서 얼핏 바람 냄새도 났다.
“급하게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질문이 겹쳤다. 누가 먼저 대답해야 하는지 몰라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채스터턴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맞아. 이런 상황에는 내가 먼저 대답해야 했다. 나는 고작 후궁이고, 그는 국무대신이니까. 익숙하지 않다, 정말.
“별일 없었습니다.”
“……별일 없어서 폐하께서 모든 귀족을 소집하셨습니까?”
믿을 소리를 하라는 듯 채스터턴이 비아냥대었다.
“소집이요?”
“루크 님의 궁에 든 귀족들을 모두 소집하셨습니다. 루크 님의 궁에 들지 않은 귀족이 없으니 모든 귀족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죠.”
“……어째서.”
“그걸 묻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더라. 바로 한나절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델루니안의 검은 눈동자만 떠올랐다. 살기로 가득했던 눈동자. 그것을 앞에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번에는 또 누굴 죽인답니까?”
절로 비틀린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루크 님?”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나도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분의 성정은 워낙 고귀하여 자주 심사가 틀리지 않습니까.”
“…….”
채스터턴은 당황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이 빠르게 나를 훑었다. 그 표정만 보면 마치 ‘저게 미쳤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시선을 피할 이유가 내게는 전혀 없다.
마침내 채스터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체념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방금 발언은 못 들은 거로 해드리지요.”
“말씀하셔도 됩니다.”
“루크 님.”
“얼마든지 가서 말씀드리세요. 그게 각하의 특기 아닙니까.”
독기 어린 말이 불쑥 튀어 나갔다. 채스터턴의 얼굴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각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후 내내, 멍하니 창밖을 보고 앉아 있으면서 시종을 통해 올해가 몇 년도인지 들었다. 173년이라고 했다.
173년. 내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던 해다. 여름행궁이라고 했으니 시기는 여름.
반년 뒤에 나는 잔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죽는다. 그리고 나에게 역모의 죄를 씌우는 것은 채스터턴과 일리오니아 출신의 레브로비치 황후다.
그들은 지금도 역모를 짜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아니, 이가 갈리는 정도가 아니라 속이 끓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먼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잊어보려고도 했지만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루크의 몸으로 되돌아온 지금에는 더욱 그렇다. 내 현실이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내가 이 시간대에서 숨을 쉬는 한 그것은 내 현실이다.
“뭐든 구미에 맞는 대로 지어내십시오.”
“제가 마치 협잡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하하.”
협잡꾼. 그 말이 딱 맞지. 채스터턴, 너는 협잡꾼이다. 일리오니쉬 황비와 손을 잡아 황후를 몰아내고 나를 죽이는 당신을 그 외에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왜 그랬습니까.”
“예?”
“벌집을 치우려면 여왕벌만 잡으면 됩니다. 어째서 애꿎은 일벌까지 잡으려 하는 겁니까.”
그 물음에 채스터턴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싸늘하고 차가운데 어딘지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엿보이는 아주 묘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럽니다. 대답해 주시지요.”
잠시 후 그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그린 듯한 미소였다.
“글쎄요…… 제가 농부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
“잡은 게 여왕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여왕벌이, 여왕벌이 아니다?”
“아니면 두 마리던가요.”
두 마리?
여왕벌이 두 마리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글쎄요.”
채스터턴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다가왔다. 그의 목덜미에 난 기다란 상처가 옷깃 사이로 보였다.
항상 궁금했다. 저 상처는 왜 생긴 건지.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물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채스터턴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루크 님께서는 신경 쓰실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
“그것은 모두, 경애하는 농부들의 일이니까요.”
“…….”
“농부의 일은 농부의 것. 루크 님의 일은 그저 이 궁 안에서 폐하를 상대해 주시는 겁니다. ……폐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요.”
그가 내 머리칼로 손을 뻗었다. 긴 금발에 입을 맞춘 그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후 채스터턴이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유유자적한 뒷모습이다. 그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언제부터.”
“……예?”
“언제부터 농부의 일을 겸직하셨습니까. 각하?”
문을 열려던 채스터턴이 우뚝 멈추어 섰다.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그는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잠시 굳어 있다가 곧 조용히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
“그럼 쉬시기를 바랍니다.”
달칵, 문이 열린다. 그가 물처럼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혔다. 쿵. 그리고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여왕벌. 두 마리.
……어째서 내가 여왕벌이란 말인가.
* * *
밤이 깊은 시각. 방을 찾아온 것은 델루니안도, 채스터턴도 아닌 리안이었다.
“…….”
“…….”
어서 오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와 눈이 마주친 금발의 기사는 침통하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델루니안이나 채스터턴을 볼 때는 끔찍한 공포와 분노가 밀려들었지만 리안에게서는 그중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끝까지 나를 비호하고, 역모로 처형당한 이후에도 나를 ‘그분’이라 부른 유일한 사람이다.
한때는 그를 질투했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도 사라졌다. 끝까지 나의 편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을 어떻게 질투할 수 있겠는가.
내가 델루니안이라도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저렇게나 맑고 아름다운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까. 이런 기회가 두 번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건 꿈이지만 현실이다. 시간의 회랑을 건너 루크의 몸을 빌려 이 시기로 온 것이다. 나는 그것이 리안을 보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믿어줘서 고맙다고, 함께 연좌되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를 위해 싸워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리안 경.”
“예.”
침통한 표정으로도 충직하게 대답하는 리안은 선한 눈망울에 오롯이 나에 대한 걱정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나는 괜찮습니다.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지만.
괜찮아야 합니다. 반년 뒤에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 좀 걸을까요?”
리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폐하께서 몹시 진노하셨다며, 행궁 안에 있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호수를 걷고 싶었다. 이른 아침에 본 에메랄드빛 호수를 걸으면 이 근심, 이 고통이 모두 사라질 것 같았다.
그리고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고집을 부리자 리안은 곤란해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사람. 차라리 리안을 사랑할 걸 그랬다. 그랬더라면 훨씬 마음이 편했을 텐데.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물론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안다. 리안은 루크일 시절의 나와 거의 똑같이 생겼으니,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르시즘에 가까웠으리라.
하지만 정말로 당신을 사랑했더라면 내 마음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거다.
“날이 좋네요.”
“여름철의 라윈은 항상 그렇습니다. 습도도 낮고 바람은 시원하지요.”
“잘 아시는군요.”
그러자 리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 고향이니까요.”
그의 고향? 라윈이 그의 고향이었나?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그의 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항상 리안 경이라고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으니까.
“그런가요.”
“……루크 님은 마뉴가 고향이시라 들었습니다.”
그랬던 것 같다. 먼 옛날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마뉴 인근의 숲에서 발견되었으니 그랬겠지.
내가 나무꾼의 집에서 나온 것이 열두세 살 즈음이니 어느 마을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예. 마뉴가 고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도 한때 마뉴에서 살았으니 어쩌면 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그때 저는 평민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평민이지만 그때는 감히 귀족 나리를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없는 신분이었어요.”
“……그런가요.”
리안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지금이 딱 좋았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예?”
“항상 고맙습니다. 리안 경.”
“…….”
“귀족이자 기사의 신분으로 평민 후궁의 호위를 맡아주어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것 같았다.
“항상 부족한 나를 보살펴 주고, 아껴 주어서 고맙습니다.”
“루크 님.”
“그리고 ……믿어줘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를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정말로.”
그 말에 리안이 무릎을 꿇었다.
“저는 항상 루크 님을 믿습니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제가 압니다.”
“…….”
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는 항상 그랬다. 항상 나를 믿고, 지지하고, 지켜 준다. 단순히 호위라고 보기에는 과한 면이 있다.
내가 반역의 죄를 쓰고 죽었을 때 까딱하면 리안도 얽혔을지 모른다.
물론 황제가 그렇게 두지는 않았겠지만 리안은 그때도 나를 믿었다.
그게 믿기지가 않았다. 도대체 당신은 왜 나를 그렇게 믿는 거지?
“왜…… 그렇게 나를 믿는 겁니까.”
리안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것이 제 피 속에 흐르는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루크 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루크 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당신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건 알아. 피 속에 흐르는 숙명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맹세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
그래서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루크의 인생이 헛산 건 아니었구나 싶어서.
당신이 있어서 내 삶이 가엾지만은 않았다.
“……일어나세요. 우리 조금 더 걸어요.”
밤 산책은 늦도록 이어졌다. 내 방에 온 델루니안이 역정을 내며 나를 불러오기 전까지.
* * *
델루니안이 역정을 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어느 정도 각오를 했지만, 막상 방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소리를 지르지도, 화를 내지도 않으며 그저 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부르셨습니까.”
“…….”
침묵이 못내 불편했던 내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나를 살펴보는 그의 눈빛이 깊어졌을 뿐이다.
그 눈빛이 나는 부담스러웠다. 아니, 사실은 두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오전 나절 그렇게 역정을 내며 나갔던 사람이 저렇게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것인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델루니안이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네가 전하라 부를 수 있는 놈들을 모조리 불러다가 조사를 했지.”
“…….”
“철저하게도 숨기셨더군.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
델루니안이 냉소를 지었다.
“시종 없이는 독대한 적도 없고, 공식적으로 초대된 행사도 거부. 선물이며 무엇이며 모조리 거절한 네가 도대체 어디서 그놈의 ‘전하’를 만났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델루니안은 나를, 그러니까 루크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루크일 적의 나는 단 한 번도 부정을 저지른 적 없었다. 그저 쥐 죽은 듯 조용히 사는 것이 나의 목표였으니까.
흠이 잡힐 만한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의 무죄를 증명하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은 시간 내에 당신은 나를 죽일 거다. 사사로운 정조 따위가 무엇이 중요할까.
침묵을 지키는 사이, 델루니안이 뜬금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리안과 무슨 얘기를 했지.”
“……예?”
“아주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들었다. 무슨 얘기를 했어.”
무슨 얘기를 했냐고?
“왜 물으시는 겁니까?”
“대답해. 무슨 얘기를 했지?”
“……폐하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건 전부 사사로운 이야기였다. 어릴 적 이야기들, 마뉴에서 자란 이야기, 리안이 기사가 된 이유, 먼 미래에 대한 현실적 공상 같은 것들.
미래에는 전서구 대신 마법 같은 에너지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고 했을 때 리안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며 옅게 웃었다.
이런 것들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였다.
“밀어라도 나누었나.”
“……예?”
“아니면, 몸의 대화였던가.”
“지금, 그게 무슨…….”
끼익, 델루니안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나에게 다가왔다.
“네가 전하라고 부를 수 있으며, 세간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붙어 다닐 수 있는 사람. 단 한 명밖에 없지 않나.”
맙소사.
델루니안은 웃고 있었지만, 나는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지금 리안을 나의 정인이라 의심하는 것인가.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음에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가 내 턱을 붙잡았다. 강한 악력에 절로 신음이 흘렀다.
“그래, 내 뒤에서 나의 가신과 붙어먹은 즐거움은 어땠지?”
심장이 뛰었다. 그는 미쳤다. 진정으로 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와 리안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리안은 나와 외모가 거의 흡사했다. 그를 사랑하여 그와 몸을 나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델루니안에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질투로 미쳐 버린 눈. 그 검은 눈을 보며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당신은 그렇게까지 그를 사랑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가설을 사실이라 믿을 정도로?
하긴. 당신은 그랬지. 애초에 나를 죽일 때도 역모가 아니라 내가 그를 해치려 했다는 이유를 들어 내 심장을 갈랐어.
아주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지만, 그는 리안에 미친 남자였다.
더는 그 눈을 마주 볼 수 없어서 내가 눈을 감았다. 정말로 싫었다.
지긋지긋하다.
“말해봐, 어땠냐고 묻…….”
“폐하. ……델루니안.”
내 부름에 그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리안을 사랑하시죠?”
“…….”
“제가 그와 닮았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제가 그의 대용품으로 이 궁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질투에 눈이 멀어 잊어버릴 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 제가 알고 있습니다.”
리안에게 미친 당신. 그런 당신에게 휘말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야 하는 나.
……너무 가엾지 않은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만약 과거가 아니라 나의 현재라면, 어쩌면 이번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시드니가 말하지 않았던가. 영혼의 세계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지금은 나의 현재였다.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눈을 떴다. 델루니안의 검은 눈동자 속에 내가 비쳤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
“그가 당신을 마음 깊이 연모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어붙는 것이 생생히 보였다. 나는 웃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을 내가 조금 더 앞당기는 것뿐이다.
몇 달 뒤, 당신은 리안에게 사랑을 고백할 거야. 그리고 나는 그 장면을 내 방 발코니에서 지켜보게 되겠지.
그 시기를 조금 더 앞당기는 것으로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대용품은 이제 필요하지 않습니다.”
“……뭐?”
“저를 보내 주십시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찾아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 3개월간 꺼내지 못하였던 나의 마지막 말뿐.
* * *
어쩌면 살 수 있을지 몰라. 침대에 누우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의 마지막 말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얼어 있던 델루니안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내 방을 벗어났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은 어쩌면 그가 무척 당황했음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리안에게 갔으려나. 리안을 찾아 사랑을 고백할까. 300년 전 그날처럼.
그날은 수확제가 열리던 날이었다. 7년에 걸친 전쟁을 완전히 종식하는 것을 기념하는 파티 날이기도 했다.
감기 기운이 있었던 나는 파티에 얼굴만 비치고 바로 내 궁으로 들어와 시종에게 발을 씻을 물을 부탁하고 창가에 앉았다.
열이 올라 더웠던 나머지 창을 열었던 것이 화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폐하, 어찌하여 이곳에…….”
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라는 말에 귀가 쫑긋 섰다. 한참 파티를 즐기고 있어야 할 황제가 여기에는 왜 왔단 말인가.
밖을 내다보자 과연 파티복을 차려입은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는 무척 아름다웠다.
“너를 찾았다.”
황제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호사스러운 생활의 끝이 온 것이다.
비죽 웃음이 나왔다. 열에 들뜬 머리가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7년 전, 나는 이곳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했지.”
“……무엇을 다짐하셨습니까.”
듣기 싫었다. 하지만 창문을 닫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인기척을 죽이고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대륙을 통일하는 것.”
“…….”
“그리고 그것은 모두 너를 위함이었다, 리안.”
황제는 속삭였다. 네가 검을 들지 않아도 되는 날을 나는 소망했다고. 너를 위험에서 지켜주고 싶었다고. 너를 다치게 하는 것이 나 자신이라면 나 자신조차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그래서 그는 나를 선택한 것이었다. 자신의 욕정으로 리안을 상처 주지 않기 위해. 그와 똑 닮은, 상처를 입어도 상관없는 나를.
황제가 물었다.
“나의 곁에, 영원히 머물러주겠어?”
기대에 들뜬 청년의 말투였다. 그건 그의 모든 모습을 알고 있다 자부하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심장 한 구속이 아려와 주먹을 꾹 쥐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웃어, 루크. 웃는 거야. 이제 끝났잖아. 너 이제 힘들지 않아도 돼.
그리고 한참 후, 리안이 대답했다.
“감히……제가 그러고 싶나이다.”
그건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내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지상 최고로 아름다운 장면. 한 폭의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이야기.
이젠 더 이상 그 날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아마도 황제는 지금 그때 했던 고백을 리안에게 하고 있을 것이며, 두 사람은 행복에 겨워 서로를 품에 안았을 거고, 나는.
나는…….
“짐을…….”
……꾸려야겠지.
이제는 살아날 시간이다.
* * *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벌써 아침이 밝은 건지 강한 빛이 감긴 눈꺼풀 사이로 파고들었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정신이 깨어나자 가장 먼저 들린 것은 두 남녀의 두런두런한 목소리였다.
“마취약이 너무 강했던 거 아니야?”
“글쎄…….”
“글쎄라니, 당신 조카인데 너무 무신경하네.”
“과로했나 보지. 푹 자고 있을 텐데 내버려 둬.”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납치를 해, 납치를.”
납치?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하얀 천장이 보였다. 병원과는 다른 무기질적인 흰색.
“납치라니. 말이 좀 그렇네. 보호라고 하지?”
“보호자도 모르는 보호?”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보호자야, 마리아 카밀라. 삼촌이잖아.”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이것이 라파엘의 현실이라는 것과 동시에 저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하도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지만, 그는 그러니까, 내 법적인 ‘삼촌’이었다.
“삼촌 같은…….”
“삼촌 같은, 소리하네.”
여자와 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오랜만이다.”
그가 눈웃음을 치며 말을 걸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대뜸 내 눈앞에 나타난 그를 살펴보았다.
어머니를 닮은 금발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똑같이 눈부셨지만, 몇 년의 공백은 과거 속 그의 모습과 약간의 괴리를 만들어 내었다.
어릴 적 당신은 내게 든든한 형이자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늙은 기색이 역력한 한 남자일 뿐이다.
“인사는 집어치워. 이게 무슨 상황이야? 왜 당신이 여기 있어요? 여긴 또 어디인데.”
“보호 중.”
“납치라고 하는 걸 들었어.”
“뭐…… 그거나 그거나.”
그 순간 마리아 카밀라라고 불린 여자가 끼어들었다.
“완전 다르지. 에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그럼 당신이 하든가?”
에반의 무신경한 반응에 마리아 카밀라는 한숨을 쉬었다. 마치 ‘질렸다, 질렸어’ 하고 체념하는 듯.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좋아요. 반갑습니다, 드마뉴 백작 각하. 제정부 대테러정보과 소속 요원 마리아 카밀라 블랑코입니다. 마리아 카밀라라고 불러 주세요.”
제국정보부? 습관처럼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하며 나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제국정보부라니. 국내외 사회정치적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이 아닌가.
제국 내에서 비서실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황제가 직접 운영할 수 있는 기관으로, 황권이 과거에 비해 많이 추락한 황제가 그나마 아직까지 직접적인 영향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부처였다.
하지만 워낙 수수께끼라, 같은 직속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제외하고는 제정부의 규모나 활동 범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잠깐. 그렇다면 당신도 설마.
“뭘 봐?”
“……에반, 당신도 설마 제정부 소속이야?”
에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그런데?”
“이때까지 그런 말 없었잖아!”
“네가 말할 기회나 줬어?”
“…….”
순간 당황해서 대거리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심드렁했다. 그 대답에 정말로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부모님의 장례식 이후로 간혹 내게 연락을 취한 그였지만, 그 연락을 번번이 무시한 것은 나였다.
“언제부터……제정부에서 일했어?”
“스무 살.”
스무 살이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5년 전이었다. 그때부터 제정부에서 일했단 말이지.
비행기 테러가 발생했을 때 그는 이미 무언가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언반구도 없이 자기 한 몸 챙기기 힘들다며 사라졌지.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을 눈치챈 마리아 카밀라가 끼어든 것도 그때였다.
“각하,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에반은 당시에 지금과 같은 정보 요원이 아니라 작전 요원이었어요. 작전 요원은 가족이라도 신분을 밝힐 수 없으니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오해는 무슨. 나는 에반에게서 시선을 떼며 차갑게 대꾸했다.
“오해할 것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마리아 카밀라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일단, 여기 오기 전 상황을 기억하시나요?”
“…….”
여기 오기 전?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전생의 기억, 아니, 전생의 현실이 장애물처럼 기억의 추적을 가로막았다.
델루니안을 봤지. 채스터턴도 만났어. 리안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니, 그전에. 더 이전에. 여름행궁에서 깨어나기 전, 라파엘인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델루니안 황제의 탄신 기념…….”
기억이 어렴풋이 피어올랐다. 사원. 제단. 피어오르던 향. 색색의 휘장. 비서실장을 찾아 회랑을 걸었고, 그리고 또…….
“……폭발. 그 폭발은 어떻게 됐습니까?”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던 하얀 연기가 떠올랐다. 맞아. 폭발이 있었다. 1사원 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물음에 마리아 카밀라가 대답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문제는…….”
문제는? 순간 샤를마뉴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샤를마뉴는 무사합니까?!”
내 물음에 마리아 카밀라와 에반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마치 ‘지금 황태자를 이름으로 부른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든 좋다. 지금 그런 의심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원으로 향하며 느꼈던 불안감이 실제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아니겠지. 무사하겠지?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자, 마리아 카밀라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행히, 황태자 전하는 무사하십니다.”
아, 다행이다.
한순간 맥이 탁 풀렸다. 한숨을 푹 몰아쉬며 안도할 때였다.
“다만, 비서실장 노엘 파커 씨가.”
“……?”
“피습을 당했습니다. 현재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 * *
마리아 카밀라의 설명에 의하면, 그때 그 폭발은 비서실장이 일으킨 모양이었다.
일종의 가스탄이라고 하는데 어째서 그가 그런 것을 지니고 다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에 발견된 가스탄에서 비서실장의 지문이 나왔다고 그녀는 말했다.
폭발이 발생하자마자 황실 일가는 경호 속에 대피했고, 수습 과정에서 피습된 비서실장이 발견되며 황실은 발칵 뒤집혔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이 바로 드마뉴 경이더군요.”
마리아 카밀라는 비서실장의 통화기록 내용을 보여 주며 내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을 상기하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무슨 대화를 했습니까?”
“……실장님이 제가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본당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죠.”
“그리고요?”
“그리고…….”
‘아인 퍼스를──!!’
“……아인 퍼스라고.”
“아인 퍼스를요? 무슨 말을 하셨죠?”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정신을 잃어서…….”
내 대답에 마리아 카밀라가 거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에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에반이 ‘오, 이런’ 하며 과장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털었다.
“난 조카를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럼 말로 했어야지! 중요한 증언을 놓쳤잖아!”
“이 녀석이 말로 하면 잠자코 따라왔을 것 같아? 게다가 폭발이 있었잖아. 한 방에 끌고 오는 게 최선이었다고.”
“내가 이래서 작전 요원 출신이 싫어! 단순하고 멍청하다고!”
마리아 카밀라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신경질을 내었다.
나는 도저히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신을 잃은 건 에반이 나를 기절시켰기 때문이라는 건데, 증언을 놓쳤다는 건 뭘까.
“증언이라뇨? 무슨 말입니까.”
알아듣게 설명해 달라고 재촉하자 마리아 카밀라가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 비서실장 피습 사태는, 아마도…… 아인 퍼스의 소행인 것 같다는 것이 제정부의 판단입니다.”
“……아인 퍼스가요?”
“사태 직후, 현재까지 아인 퍼스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무언가 한기가 몸을 감쌌다. 파노라마처럼 이때까지의 아인 퍼스의 행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분명 의심스럽기는 했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여럿 있었다. 그렇지만.
“증거는 있습니까?”
“……정황상의 증거는 있죠.”
‘정황상?’
“그렇다면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결정적인 증거는 노엘 파커 비서실장이 갖고 있었습니다.”
“갖고 있었다니요. 그 말은…….”
그때 밀실의 문이 열렸다. 끼익, 하는 소리에 나와 에반, 그리고 마리아 카밀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나도 잘 아는 한 남자였다.
“모두 사라졌다는 얘기죠.”
목을 타고 흐르는 긴 상처가 있는 남자.
“……시드니?”
“오랜만입니다, 라파엘.”
시드니 카턴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