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장 (17/34)

16장

아인 퍼스에 대해 쉽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지만 내가 취해야 할 한 가지 행동만큼은 명확했다.

샤를마뉴를 황궁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집으로 들어와 아인 퍼스가 준 보약을 모두 갖다 버렸다.

그건 나 스스로의 다짐과도 같았다. 앞으로는 절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믿지 않겠다는 다짐.

이런 다짐은 황실 비서관이라는 지위와 서른 줄에 가까운 나이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턱없이 늦은 깨달음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다 차치하더라도 말이야.

그런 깨달음은 진즉에 깨달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300년 전에 내가 황제의 손에 심장을 찔려 죽었을 때, 나는 황제를 믿었다. 그에게 있어 나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지만 어쨌든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건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보다는 굳이 버러지를 밟아 죽일 정도로 그가 잔인한 인간은 아닐 것이라는, 그의 인간성에 대한 희망에 기생하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결말은 어땠던가. 그렇게 당하고도 사람을 믿을 수 있었다니, 새삼 나 자신이 놀랍도록 한심하게 느껴졌다.

두 번의 삶, 두 번의 목숨. 전생에서는 끔찍한 결말을 맞았지만 현생에서조차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다.

타인에게 휘둘리고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은 전생의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얻은 삶만큼은 누릴 대로 누리다가 죽을 생각이었다. 삶에 있어 생존만큼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없으니.

그래서 끝까지 파헤칠 생각이었다. 아인을, 나를 위협하는 것들의 뿌리를.

* * *

“좋은 아침.”

주차된 차의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자 아인 퍼스가 차 문을 열며 반색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활기찬 인사에 마주 웃어주며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착용하기 무섭게 그가 말을 걸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추도회 준비한다고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잖아요.”

“응. 주말 내내 푹 쉬었더니 쌩쌩해. 아인 너는 괜찮고?”

“저야 남는 게 체력인 걸요. ……아, 참. 보약은 드셨어요?”

보약이라.

“참, 잊어 먹을 뻔했네.”

깜빡했다는 듯 응수하며 가방에서 작은 캡슐을 꺼냈다. 그가 내게 주었던 캡슐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사실은 사탕이었다.

아인 퍼스는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별다른 기색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게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출근하는 길. 어쩐지 길이 막힌다 싶었는데 공사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가야 했다. 서북쪽 방면 도로로 차를 돌리는 아인 퍼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가져간 파일은 봤는지 모르겠네.”

“파일이요?”

“송년축제 준비한다며 가져간 파일 있잖아. 시험 본다고 했는데, 봤어?”

“아아. 그거요.”

가족 관계 증명서를 훔치려다가 발각돼 그저 변명이랍시고 둘러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궁금한 점을 묻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경호 인력의 배치나 축제에 앞선 황제의 송년 감사 연설을 생방송으로 찍기 위한 방송국의 대열, 하객 리스트의 작성과 초대장 발송 등에 대한 질문은 그저 둘러대기 위해 파일을 얻어 낸 사람이 할 법한 질문은 아니었다.

뭐지? 그의 모든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 나는, 하나하나 성심껏 대답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우지를 못했다.

“……래서, 모든 초대장은 11월 마지막 주까지 발송하는 거지.”

“아아, 그렇군요. 꽤 복잡하네요.”

“12월에는 명부에 오른 사람들과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니까. 사실 그때가 제일 복잡해. 너무 호화스럽지 않으면서도 적정한 수준을 지키는 선에서 선물을 골라야 하니까.”

매년 송년축제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하사하는 황제의 선물은 그해의 마지막 핫이슈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사람들이 보기에 품격 있는 선물이다 싶으면 그것이 얼마이든지 품귀 현상이 일어난다.

반대로 성에 차지 않는 선물을 골랐을 때는 온갖 조롱을 사게 마련이다.

그래서 황실의 품격에 걸맞는 선물을 고르는 것이 비서실의 가장 골치 아픈 사업이었다.

“그렇군요.”

“이미 1차 명단은 뽑아 놨는데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다시 검토해 봐야 할 거야.”

‘이런저런’ 일의 대표적인 사례는 폭탄 테러였다. 명단에는 기껏해야 백오십여 명 안팎이 올라가는데 그중 열댓 명이 죽었으니 일이 복잡하게 됐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카드를 제작하기 전이라는 사실이었다. 백금에 장인들이 손수 이름을 새기는 초대장인지라 미리 제작해 놨더라면 곤란할 뻔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어 섰다.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길이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길 언제 왔더라? 온 적 있었던 것 같은데…… 길눈이 어두운 편은 아닌지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왜 그러세요?”

창밖으로 작은 꽃집이 보였다. 그곳이다. 맥케인의 집.

“……꽃 가게네요.”

내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아인 퍼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꽃 좋아하세요?”

“……아니, 별로.”

“전 무척 좋아해요. 특히 백합이요.”

“어울리네.”

“그렇죠?”

신호가 다시 바뀌었다. 차가 앞으로 나아가며 맥케인의 꽃 가게가 점점 멀어졌다.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은 아인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맥케인과 정체불명의 회사. 남편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부인.

그녀는 매몰차게 나를 배척했지만 한 번 거부당했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잊지 말자. 그 역시 나를 위협하는 것 중 하나니까.

그리하여 오늘, 나는 오랜만에 칼퇴근을 했다.

“퇴근하겠습니다.”

어차피 샤를마뉴의 일정은 모두 끝난 상태였다. 공식 일정은 끝났으니 그 이후로는 뭘 하든 내 알 바는 아니다.

……사고를 치면 곤란하겠지만.

비서실에 들러 가방을 챙기고 퇴근하겠다는 말을 하러 샤를마뉴를 찾았다.

“아, 마침 잘 왔어.”

“……예?”

“영화 보러 가자.”

그가 싱그럽게 웃으며 티켓 두 장을 흔들었다. 영…… 화요?

“갑자기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꼭 보고 싶은 영화라서.”

그가 보고 싶다고 말한 영화는 개봉한 지 한 달이나 지난,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본 영화였다.

게다가 재미없다고 소문이 자자하기까지 했다. 이게 꼭 보고 싶은 영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온갖 좋은 것은 다 보고 자란 그의 취향이 새삼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취향은 취향이고.

“이게 그렇게 보고 싶다면 미리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응?”

“이번 주 안으로는 힘들겠지만, 다음 주면 필름을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으응?”

“마침 잘됐네요. 이번 달 문화의 날에 무슨 영화를 상영할지 결정 못 했다 들었는데.”

황실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문화의 날을 맞이해 필리프 홀에서 최신 영화를 상영했다.

지난달은 테러 사건 때문에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 달에는 열릴 것이라 예상되었다.

행정실에서 아직 영화를 못 정했다 들었으니 이걸로 추천하면 괜찮지 않을까.

재미없다고 욕을 먹으면 황태자의 취향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니…….

그때 샤를마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지금 모르는 척하는 거지?”

“예?”

“내가 데이트 신청하니까 괜히 모르는 척하는 거 맞지?”

뭘 물어. 당연한 것을.

“네.”

“…….”

“조금만 더 하면 진짜로 배급사에 전화할 생각이었습니다.”

“왜 그래? 정말.”

제 성의를 무시한 것이 못내 서운한지 샤를마뉴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쓰는 것이 분명 유혹의 손짓이었다.

이 사람이 정말 정신을 못 차렸네.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치워 냈다.

“전하랑 저랑 단둘이서만 영화를 보자고요? 제정신이십니까.”

“뭐가 문제야?”

“그렇게 사람이 많은 영화관을, 경호 인원도 없이 가겠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아무리 봐도 샤를마뉴는 본인에 대한 자각이 없다.

그가 인간 병기라고 해도 샤를마뉴는 보호받아야 할 황태자다. 바깥으로 나가는 모든 일정은 경호 인원과 함께해야 하며, 영화관 같은 곳을 가려면 최소 이틀 전에는 장소를 섭외하여 미리 경호 인원을 배치해 놔야 했다.

……물론, 이때까지 샤를마뉴는 많은 경우 경호팀을 버리고 단독 행동을 일삼긴 했다.

하지만 그게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고, 그게 무척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샤를마뉴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반경은 좁은 편이었다.

그랬으니 이때까지 비교적 큰일 없이 넘어갔던 거다.

하지만 영화관은 다르지 않은가. 사전 검문도, 경호 인원도 아무것도 없이 남들처럼 단둘이 데이트를 하자고?

“그냥 황궁에서 얌전히 계세요.”

“아, 낭만이 없어. 낭만이.”

“낭만 같은 걸 저한테서 찾지 마세요. 그리고 저 약속 있습니다.”

샤를마뉴가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물었다.

“약속?”

“네, 약속이요.”

“누구랑.”

“……지금 추궁하시는 겁니까?”

“누구냐고 묻잖아.”

순식간에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티켓을 와작 구기며 샤를마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문득 내가 왜 이 인간한테 겁을 먹어야 하나 싶어 인상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전하께서 알아서 뭐 하시게요.”

“지금 내 남자가 데이트 신청은 거부하고 누굴 만나러 간다는데 신경 안 쓰게 생겼어?”

“전하, 목소리 좀…….”

‘내 남자’ 같은 단어를 저렇게 큰 목소리로 소리치면 곤란하지. 샤를마뉴가 씩씩대며 나를 노려봤다.

“누군데? 어서 말해봐.”

“하…… 그냥 여자예요.”

“여자?!”

이제 됐지,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샤를마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여자라니까…… 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원래 이성애자였던 것을 떠올렸다.

맞다. 샤를마뉴를 좋아하기 전까지 나는 이성애자였다. 그리고 지금도 이성애자이긴 한데…….

“당신 지금 바람피운다고 나한테 당당하게……!”

“노부인이에요, 노부인!”

노부인? 내 다급한 대답에 야차처럼 일그러진 샤를마뉴의 얼굴에 물음표가 찍혔다.

“늙은 여자가 취향이야?”

“미쳤습니까? 제가 전하 같은 인간인 줄 아세요?”

“내가 뭘.”

“전하의 옛 파트너 스티븐이 몇 살이었는지 잊으신 모양이죠.”

“……그래서 그 노부인이랑은 왜 만나는 건데?”

3년 전, 내가 처음으로 비서실에 들어왔을 때 그의 섹스 파트너 중 한 명이었던 스티븐을 떠올리며 반박하자 샤를마뉴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이기지도 못할 인간이 사사건건 태클이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안 알려 줄 거야?”

“개인적인 일이라니까요? 전하랑은 상관없는.”

너랑은 상관없다고 강조하자 샤를마뉴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덩치도 산만한 인간이 그러고 있으니 하나도 안 귀엽…… 솔직히 귀엽긴 했다.

역시 개 같단 말이야. 피식 웃으면서 그가 구겨 버린 티켓을 빼앗아 툭툭 폈다.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응?”

“다음에…… 영화관은 힘들겠지만 자동차 극장이라도 가죠.”

경호팀들을 물리치고 갈 수는 없겠지만 서로 다른 차에 타니 단둘만이 온 것 같은 느낌은 들겠지.

이걸로 만족하라는 듯 바라보자 샤를마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홍조로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딴소리하기 없기야.”

“예, 예.”

“오늘만 봐준다. 가도 좋아.”

드디어 떨어진 허락에 몸을 돌리자 샤를마뉴가 ‘어허’ 하면서 팔을 잡아끌었다. 응? 또 뭐야.

“아무리 가라고 해도 그렇지, 작별인사를 잊어버렸잖아.”

“…….”

“뽀뽀.”

그가 제 볼을 쭉 내미는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옛다 먹어라 식으로 입술을 쪽 부딪치자 그가 목 안으로 웃었다.

정말 갑니다. 입술을 떼고 손을 흔들자 샤를마뉴가 행복하다는 듯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내가 늙지, 늙어. 애랑 연애하는 기분이다.

* * *

“계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게 안쪽에서 화분을 나르던 맥케인 씨의 부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그쪽은.”

“노엘 파커입니다.”

또다시 비서실장의 이름을 주워 삼키며 인사하자 그녀가 ‘알고 있어요’ 하면서 당황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또 여길 왜…….”

“그때 그렇게 돌아간 게 너무 죄송해서요. 꼭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할 만한 사람이 못되나 보다. 가슴이 세차게 방망이질 했다.

만약 그사이 회사 사람들이 다녀갔다면…… 그래서 노엘 파커라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면…….

그녀는 굳은 얼굴로 나를 훑어보았다. 원망하는 듯, 속임수를 꿰뚫어 보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의 속내를 읽을 수 없어 나는 더욱 긴장했다.

잠시 후.

“일단…… 들어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가 졌어요, 라고 말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게 내부는 집과 연결되어 있었다. 거실과 가게 양쪽으로 가까운 응접실에 앉아 그녀가 차를 내오기를 기다렸다.

오각형의 응접실 천장에는 맥케인 씨로 보이는 중년 남성의 사진 한 장과 가족사진, 그리고 다른 몇 장의 무의미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맥케인 씨의 사진 밑으로는 별 모양의 메달이 걸려 있었다. 이게 뭐지?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자 어느새 차를 들고 온 부인이 말했다.

“그건 20년 전 그이가 사격 대회에서 받아 온 메달이에요. 우승했죠.”

“아…… 굉장한데요.”

“그이는 사격을 무척 잘했죠. 한때 사격 클럽의 회장을 맡았어요. ……직장을 가진 이후로는 그만뒀지만요.”

“그렇습니까.”

그녀의 표정이 추억을 그리듯 아련하게 변했다.

“한 번은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무기라는 걸 깨달았거든.’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때도 몰랐지만 지금도 모르겠어요. 물어볼 수만 있다면.”

“…….”

“그냥 혼자 생각하기로는, 총이라는 게 어쨌든 무엇을 죽이고자 만들어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 아닐까 싶어요. 둔하면서도 굉장히 여린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아시겠지만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무척 다정한 분이셨지요.”

“맞아요. 무뚝뚝했지만 다정했어요. 무슨 일을 하는지 매일 야근에 출장을 반복하면서도 주말이 되면 가게 일을 돕곤 했죠. 피곤할 테니 들어가서 쉬라고 해도 이게 자신의 유일한 행복이라며…… 그래서 저는 도저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차를 내려놓으며 그녀가 물기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도 그래요.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그 마음을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걸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언제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으니까.

“그때는 미안했어요. 다들 사정이 있었을 텐데, 너무 서럽고 화나서 그랬네요.”

“괜찮습니다. 저희가 잘못한걸요.”

그녀가 ‘그래도 사과를 받으니 좋네’ 하며 힘없이 웃었다. 역시 그 이후로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정말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는 회사였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으면 동료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는 건지.

그녀와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빙빙 돌려서 캐물었지만 그녀는 아는 게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별 소득이 없다. 그럼 사고가 난 당일의 일이라도 물어야지. 문득 생각난 듯 목소리를 달리하며 물었다.

“……그런데 맥케인 씨는 어쩌다 사고를 당하신 겁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경무청에서는 급발진이라는데, 그런가 하고 생각하기에는 그날 그이의 태도가 좀 이상했고…….”

“태도요?”

뜻밖의 말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도대체 뭐가 이상했다는 걸까. 그녀가 그때를 떠올리듯 곰곰이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그이는 휴가를 썼다며 집에서 쉬고 있었죠. TV도 보고, 가게 일도 돕고 그랬어요. 오후까지는 분명 괜찮았는데…… 갑자기 전화를 받고는 사색이 되더니 뛰쳐나가더라고요.”

“어디서 걸려 온 전화였습니까?”

“그건 몰라요.”

“경무청에서 보여 달라고 하면 보여 줄 텐데요.”

“경무청에서는 급발진에 의한 사고라면서 전화와 관계가 없다고 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황태자가 탄 차량이 사고가 났고, 사고를 낸 차량 주인은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고 나간 길이었다.

경무청에서 조사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정말로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단정 지어서 말할 리는 더욱 없다.

정말 이상했다. 경무청에서 뭔가를 덮으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 그렇게 무마하려고 하지 않을 텐데…….

그때였다.

딸랑, 하고 가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내가 문을 안 잠갔나? 영업시간 지났는데…….”

그녀가 가게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응접실을 지나쳐 가게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들을 것은 다 들었고, 더 이상 그녀를 캐물어 봤자 나올 것은 없어 보였다. 적당히 인사를 하고 돌아가면 될 일…….

“어머, 퍼스 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아주머니?”

적당히 인사를 하고 돌아가면 될 일인데.

……어째서, 네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아인.

* * *

“영업 끝났나요?”

그건 분명 아인이었다. 여름날의 계곡 바람처럼 시원한 저 목소리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고, 약간 말끝을 끄는 말버릇까지 더한다면 아인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재빨리 장식장 옆으로 몸을 숨겼다.

왜 몸을 숨겼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감각이, 그러니까 육감에 가까운 것이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도망가라고. 숨으라고. 이야, 우연이네,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인사하지 말라고. 그저 없는 것처럼 몸을 숨기라고.

“끝나긴 했는데 퍼스 씨라면 괜찮아요.”

“하하, 죄송해요. 퇴근 시간이 늦어져서 일찍 올 수가 없었어요…… 근데 영업도 끝났는데 왜 문을 안 닫으셨어요?”

“아, 손님이 와 계셔서 깜빡했네요.”

그 말에 아인이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님이요……?”

어쩐지 보이지 않는 시선이 등 뒤로 박히는 것 같았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어째서 이렇게 긴장하게 되는 걸까.

“으응. 그 사람 회사 동료래요.”

“아하…….”

웃음기가 섞인 말끝은 부드러웠지만 미묘하게 껄끄러웠다.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장식장 뒤로 몸을 숨기며 숨을 죽였다.

뚜벅, 뚜벅.

“백합 있나요?”

“음, 있어요. 얼마나 줄까요?”

“그냥 적당히 포장해서 주세요.”

아인의 목소리가 응접실 입구 쪽에서 가까이 들렸다. 도대체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

아침에 이 가게 앞을 지나갔을 때 아인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곳인 것처럼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알고 보니 부인과 아는 사이였다? 굳이 숨기려 한 것이 아니라면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온통 수수께끼다.

“나나는 잘 있나요?”

“뭐, 그냥 그래요…… 사실, 안 돌아간다고 방 안에 틀어박혔어요.”

“많이 충격이었나 봐요.”

“당연히 그렇겠죠. 어찌어찌 끌어내서 다시 돌려보내는데도 얼마나 우는지.”

갑자기 튀어나온 ‘나나’라는 이름에 의아해졌다. 나나가 누구지? 내 의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밖에서는 가위질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포장지 소리가 들렸다.

“자, 다 됐어요.”

“예쁘네요. 얼마죠?”

“퍼스 씨한테는 안 받아요.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까요.”

“아니, 그래도…….”

“에이, 됐다니까요.”

아인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세히 보니 건너편 액자에 아인의 모습이 비쳤다.

꽃다발을 받아 든 아인이 그중 한 송이를 빼서 부인에게 주는 것이 보였다.

“그럼 이거 받으세요.”

“네?”

“아주머니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아인이 그렇게 말하며 부인의 머리에 백합을 꽂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으응, 그래요. 잘 가요 퍼스 씨.”

부인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인을 배웅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장식장 뒤에서 나왔다.

짤랑, 문이 닫히고 아인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야 나는 부인에게 내가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었다.

“아는 분이신가요?”

“아아, 죄송해요. 파커 씨. 아는 분이 와서 잠깐……”

부인이 백합을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참 좋은 청년이에요. 알고 지낸 기간은 얼마 안 되었는데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죠.”

“그런가요?”

“나나, 그러니까 우리 아들도 친형처럼 믿고 따르는 사람이고요.”

나나가 아들이었어? 딸이 아니라? 이건 이거대로 충격이다. 나나라는 이름의 아들이라니.

이름으로 놀림 좀 받겠는데.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아들이 나나라니.

“특히 남편이 사고를 당한 날…… 저 청년이 나나 옆에 있어줬어요.”

“네?”

“나나는 다른 지역 김나지움에 다니고 있어서 제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늦게 들었거든요. 뒤늦게 소식을 듣고 도착했을 때 이미 시신 수습은 끝났고 장례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죠. 뭐 이렇다 할 피붙이가 없어서 저 혼자 장례 준비를 하고 그러느라 바빴는데, 나나를 챙겨 준 게 저 청년이에요. 계속 옆에서 챙기고 돌봐 줬죠. 그것만으로도 정말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셈이에요.”

부인이 그렇게 말하며 결국 백합을 머리에서 빼내었다. 표정이 쓸쓸했다.

“남편은 떠나갔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답니다.”

“…….”

“그러니까 파커 씨도 이제는 미안해하지 마세요. 정말로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차마 알겠다고 할 수 없었다. 단순히 둘러대고자 한 거짓말이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맥케인의 회사 동료도 아니고 노엘 파커도 아니다.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회사 동료들을 향한 그녀의 분노는 나로 인해 가라앉았지만 그것은 기만이었다. 실제로 회사 동료들은 아무도 오지 않은 셈이니까.

사실 나는 노엘 파커도, 맥케인 씨의 회사 동료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입이 달싹였다. 내 마음 편하고자 그녀에게 잔인한 진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사실 나는 라파엘 드마뉴라고. 당신 남편이 들이박아 죽다 살아난 그 사람이라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진실을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밝히지 않은 채 그저 몸을 돌려 가게를 나왔다.

하늘은 어두웠고, 퇴근 차량도 다 빠져나간 도로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곧 비라도 올 참인지 코끝에 닿는 바람이 서늘하고 눅눅했다.

그녀가 쓸쓸하게 머리에서 빼낸 백합이 떠올랐다.

백합. 남편을 잃은 여자의 슬픈 꽃.

그때 말했어야 했을까. 말했더라면 결과가 좀 달라졌을까.

아니,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에는 원인이 앞서는 법이다.

어느 밤 갑자기 꽃가게가 화염에 휩싸이는 것은 인과와 무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아주 지독한 우연.

늦은 밤, 화끈한 화염을 발견한 그녀가 소화기를 들고 가게에 들어갔다가 무너진 기둥에 깔려 숨지는 것 또한 지독한 우연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사고의 피해자이며 당신 남편의 죽음이 뭔가 수상하다는 말을 해봤자 그녀가 겪을 비참한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말했어야 했을까.

이것은 그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마음에 진득하게 남은 누군가를 속여 거짓된 위안을 주었다는 죄책감은 어떻게 해야 할까.

* * *

그녀의 부고를 알린 것은 비서실장이었다. 그날로부터 이 주일가량이 흐른 날의 일이었다.

나는 그때 황가의 중시조 격인 델루니안의 탄신일을 맞아(도대체 이걸 왜 준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놈이 중시조든 고시조든 알 게 뭐람?) 델루니안이 묻힌 사원으로의 행차 일정을 조정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서실장의 호출에 또 뭐가 문제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린 것도 잠시.

“지난 밤 4지구에서 화재 사고가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예?”

“건물 두 채가 전소했다고 하는군요.”

그렇습니까…… 사실 그때까지 별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기가 소방청도 아니고 알 게 뭡니까.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심드렁한 기색이 드러났는지, 비서실장이 짧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맥케인의 부인이 사망했습니다.”

“……예?”

“간신히 불을 끈 수준이라 정확한 발화 원인은 모르지만 방화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방화라니. 나는 순간 아연해져서 되물었다.

“누가……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는 겁니까?”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죽였죠.”

“어째서.”

“이전에 그녀와 만났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서실장이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며 물었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대답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비서실장이 또다시 물었다.

“또 다른 건 없었습니까?”

그때 아인이 떠올랐다. 아인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아인이 그날 왔었다고. 그 가족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고. 맥케인이 죽던 날에도 같이 있었다고…….

아, 나나. 나나라는 이름의 아들은 이번에는 또 어떻게 있을까 모르겠다.

아버지도 죽고 어머니도 죽다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인을 만났습니다. 아니, 봤습니다.”

“……아인 퍼스 말입니까?”

“예. 부인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 아인 퍼스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저를 보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그때 장식장 뒤에 숨어 있었거든요. 비서실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인과는 무슨 관계였습니까.”

“……그 가족과 무척 친밀한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맥케인 씨 사고가 있었을 때도 부인을 대신해서 아이를 돌보았다고 하더군요. 그 아이의 이름은 나나. 아들이랍니다.”

비서실장은 아들의 이름이 나나라는 것 따위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안경을 추켜세웠다.

“사고 때에도 있었다……?”

“부인과 무척 친밀한 것 같았습니다.”

비서실장은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더니 ‘이만 나가 봐도 좋습니다’라며 축객령을 내렸다. 뒤돌아 나오는데도 비서실장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실장실에서 나오자 바로 아인이 보였다.

아인은 역시 델루니안 탄신일 준비로 바빴다. 신입인지라 선임들의 보조에 불과했지만 바지런히 움직이는 모습만 보면 총괄지휘 같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해맑은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 한구석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를 믿지 않는다.

보약의 성분 중에 나와 상극인 성분이 있어 장기간 섭취 시 정말 요절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은 이후로 그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해맑은 얼굴을 하더라도 어떤 칼을 그 속에 감춰 두고 있을지 모르는데. 그래서 한동안 그와의 접촉을 꺼린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인.”

“네?”

“…….”

“비서관님?”

이름만 부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아인 퍼스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마음속에서 뱅뱅 떠도는 말은 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방화, 네가 저질렀니?

이런 의심을 하는 내가 너무한 걸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열심히 하라고.”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아인 퍼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대답했다.

“예!”

* * *

델루니안의 탄신일 기념 사원 행차는 그리 큰 행사는 아니다. 수확제나 송년축제처럼 초대장을 발송해야 할 필요도 없고 입장객을 하나하나 체크해야 할 필요도 없다.

참석하는 인원은 오로지 사제들과 황실 일가, 그리고 델루니안 이후로 황실과 연을 맺은 인척들뿐이라 경호만 철저히 하면 준비는 끝이었다.

테러 사건이 있었으니 경호를 철저히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건 경호실 소관이지 비서실이 진두지휘할 사항이 아니다.

경호실과 힘을 합쳐 경호 인원 배치와 제례 때 본당 안에 들어갈 경호인을 뽑는 등, 겨우 준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못 받았다. 재빨리 슬리퍼로 갈아 신고 달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라파엘 드마뉴입니다.”

-…….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숨소리로 추정되는 가는 바람 소리가 들릴 뿐.

변태인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져서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였다.

-나야.

짧은 목소리에 심장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뭡니까.”

-여전하구나.

“뭐냐고요.”

수화기 건너편의 남자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게 들렸다. 아주 불쾌한 웃음소리다. 가능하다면 평생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

“용건 없으면 끊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걸지 마라. 인연을 끊어 내듯 딱딱하게 내뱉자 남자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리로 올래?

순간 와장창 얼굴이 구겨졌다.

“뭐라고요?”

-할 말이 있어. 이리로 와.

남자는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얘기하듯 거리낌 없이 나를 불러냈다. 그게 더 어이가 없었다.

“싫은데.”

-오라니까.

“내가 당신이 오라고 하면 오고, 꺼지라고 하면 꺼지는 똥개인 줄 알아?”

-아니.

남자가 피식 웃으면서 덧붙였다.

-너는 굳이 따지자면 품종견이지. 똥개 따위랑 비교를 할 수가 없…….

“끊겠습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요.”

쾅!

부서져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벽을 발로 걷어찼다.

품종견? 품종견이라고? 거지같은 자식! 나보다 열 살은 많은 남자를 거리낌 없이 욕하며 씩씩대었다.

그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제멋대로 나타났다가 제멋대로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철면피.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기를 반복한 탓에 노쇠한 외조부와 외조모는 늘 속을 끓였다.

그러다 언젠가 한 번은 칼에 찔려서 실려 온 적도 있었지, 아마. 새벽에 보호자라고 불려 나간 어머니는 칼침을 맞고 피범벅이 된 채로 ‘난 괜찮아, 누이’라며 씨익 웃는 동생을 보고 비명도 못 지르셨다.

그래도 나는 그가 좋았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가끔 우리 집에 들를 때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나와 놀아주는 그가 싫을 수 없었다.

그가 우리 가족을 보는 시선만큼은 올곧고 따뜻했으므로 좋아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에게 그는 가족이고, 형제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내 형제가 아니었다. 내 가족도 아니었다.

“삼촌!”

시체도 찾지 못한 부모님의 가묘를 쓰던 날. 뒤늦게 찾아온 그는 백합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외할아버지의 품에서 덜덜 떨고 있던 나는 그를 발견하고 본능처럼 달려갔다.

“…….”

“삼촌, 나…….”

나 어떡해? 엄마 아빠 모두 없어졌는데, 나 어떡해? 나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삼촌.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한 번 돌아본 후, 백합 한 송이를 가묘에 던졌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나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무서워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삼촌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했다.

언제 말없이 사라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삼촌이니까. 유일하게 남은 내 가족이니까.

“놔.”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했을 때,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밀어내었다.

“이젠 너 혼자야.”

“……삼촌?”

“난 너까지 돌볼 자신 없어. 나 한 몸으로도 힘들어.”

그렇게 그는 내 손을 뿌리치고 사라졌다. 그게 그와 나의 관계의 끝이었다.

몇 년 후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면서 나를 찾아왔지만, 이미 끝난 관계를 어떻게 이어붙일 수 있겠는가.

당장 꺼지라는 내 말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그게 정말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무슨 염치로.”

무슨 염치로 당신이 전화를 걸어.

* * *

사원은 수도 외곽에 있었다. 샤를마뉴와 내가 잠깐 머문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황실 일가의 차량이 움직이는 동안 교통은 통제되었고 어디에 누가 탔는지 알 수 없도록 창문이 가려진 의전 차량 여섯 대가 뒤를 이었다.

누가 어떤 차에 탔는지는 나도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나와 샤를마뉴가 탄 차가 네 번째 차량이라는 것뿐이었다.

“라파엘.”

옆에 앉은 샤를마뉴가 손을 살짝 건드려 왔다. 왜요? 시선으로 대답하자 샤를마뉴가 눈웃음을 친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긴장 풀어. 답지 않게 왜 그래. 샤를마뉴는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긴장을 풀 상황이 아니었다.

테러 사건 이후로 샤를마뉴가 바깥으로 출입하는 첫 공식 행사였다. 물론 비공식 외출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의전 차량을 줄줄이 달고 이동하는 것은 그때 이후로 처음이다.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으면 이상했다. 게다가 그때 그 테러가 레브로비치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긴장을 풀겠는가.

“괜찮아. 무슨 일 없을 거야.”

그런 말이 더 불안하다고.

“나 좀 봐, 라파엘.”

결국 고개를 돌려 샤를마뉴를 바라보았다. 강하면서 부드러운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예쁘다.”

그가 씩 웃으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설레기보다는 운전기사가 신경 쓰였다.

흘끗 바라보자 백미러로 시선이 마주친 운전기사가 타이밍 좋게 차단벽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남자한테 예쁘다는 말은 쓰는 게 아니라니까요.”

“예쁜데 예쁘다고 하지 뭐라고 해?”

“됐습니다. 아무튼 예쁘다고 하지 마세요.”

샤를마뉴가 흐음, 하고 신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렇게 긴장돼?”

“당연하죠.”

“긴장 좀 풀어줄까?”

어떻게? 흘끗 바라보자 샤를마뉴가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전래동화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말이야…….”

“비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까딱거렸다. 가까이 오라고? 귓속말을 할 것처럼 한 손을 입가에 대고 있기에 귀를 가져다 대자 그가 속삭이길.

“내 엉덩이에 별 모양으로 점이 있어.”

“…….”

“굉장히 예뻐. 다음에 보여 줄게.”

샤를마뉴한테 속은 내가 병신이다. 인상을 확 찌푸리고 귀를 닦아 내자 샤를마뉴가 킥킥 웃었다.

“별게 다 비밀이네요.”

“안 믿겨?”

“믿는 거랑은 별개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치이. 샤를마뉴가 아인을 따라하듯 치이, 하고 투정을 부렸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둡게 코팅된 창문 밖으로 사원의 돔이 어렴풋이 보였다. 델루니안이 묻혀 있다고 알려진 사원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항상 궁금했는데, 어째서 델루니안 황제는 여기에 묻힌 겁니까?”

그 물음에 샤를마뉴가 아아, 하면서 대답했다.

“이 사원은 일리오니쉬 황후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개축한 사원이야. 처음에는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더군.”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황후가 죽고 황제는 그녀를 이곳에 묻었다고 해. 그리고 죽을 때 그녀 옆에 같이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더군.”

아하. 그런 거로군.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민족의 역사’라는 책에서 본 내용이 떠올랐다. 여기가 그 사원이었다니. 황제가 묻힌 사원이 그 사원일 줄은 몰랐다.

행복한 삶을 누리다가 죽은 그녀를 위한 사원.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델루니안을 기리기 위해.

“근데 말이야.”

“……예.”

“사실 황제의 시체는 없어.”

뭐? 의외의 말에 그를 돌아보자 샤를마뉴가 씩 웃었다.

“이건 진짜 비밀인데.”

“……황제가 여기 없다고요?”

“응.”

“그럼 왜 저 사원으로 가는 겁니까?”

“황제는 없지만 황제의 보물은 있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해 달라고 바라보자 샤를마뉴가 ‘이거 진짜 일급 비밀인데’라고 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황후를 사랑했다지만 황제가 고작 사원에 묻혀서야 쓰겠어? 델피온 2세는 일리오니아의 반발 조짐을 눈치채고 그걸 무마하기 위해서 델루니안의 시체를 이곳에 묻었다고 거짓으로 발표했다고 해.”

“그럼 진짜 황제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데요?”

“그건 몰라. 기록이 소실되었거든. 아마 황실 묘지 어딘가가 아닐까 싶은데.”

그럼 이건 사기잖아. 인상을 팍 찌푸리자 샤를마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관광 수입이지 뭐. 그리고 델루니안의 보물이 여기에 있는 건 사실이야.”

델루니안의 보물이라. 델루니안은 없고 델루니안의 보물과 레브로비치 황후의 시신이 있는 사원으로 달려가며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델루니안의 보물. 뭐가 있지? 델루니안은 무엇을 딱히 아끼는 성미가 아니었다. 황제라는 기반 때문에 아낄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보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기껏해야 그가 항상 차고 다닌 검 정도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원에 도착했다. 여섯 대의 의전 차량이 모두 통과한 후 사원의 문은 폐쇄되었다.

이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명단에 있는 황실 인척과 혈족뿐.

삼엄한 경호 속에 사제의 뒤를 따라 황실 일가가 7겹 베일 속 본당으로 들어갔다.

폐쇄된 사원 안에는 경호원들과 비서관들도 있을 수 있지만 본당에는 정말로 딱 사제와 혈족과 인척만 출입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비서실에서 본당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소냐 하워드 비서관밖에 없었다.

나는 드마뉴 백작이고 델라윈 공작의 외손자다. 호적상 삼촌이 있는 까닭에 공작위는 물려받지 못했지만 드마뉴 백작가는 델루니안 이후로 종종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따지고 보면 샤를마뉴와 나는 먼 친척인 셈이다. 소냐 하워드 비서관도 마찬가지인지라 비서실장도 들어가지 못하는 본당에 나와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 들어가게 되었다.

본당의 출입문은 7겹 베일이지만 본당 내부는 색색의 베일들로 가득했다. 제단 위에서 피워 올린 향이 본당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제례를 지내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므로 서 있었지만, 멀리 보이는 황제와 황후, 그리고 샤를마뉴와 혈족 인척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제단 앞에 앉은 채였다.

샤를마뉴의 진지한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여기에 없긴 하지만 예는 갖춰야 한다 이건가. 그냥 우스웠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제단 위에 놓인 항아리와 붉은 쿠션이 보였다.

항아리는 레브로비치 황후의 유골함일 것이고, 붉은 쿠션 위에 놓인 것은 아마도 델루니안의 보물이겠지.

멀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보석 같았다. 살짝 초록빛이 돌기도 하고.

……초록색 보석이라. 델루니안은 보석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도 저것은 델루니안의 보물이 아닐 것이다. 아마 후대에 지어 내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델루니안의 보석이든 아니든 알 바 없다. 무슨 상관인가. 그는 죽었고, 모든 것은 이미 옛날 옛적의 일이다.

전생의 내가 왜 죽었는지 대충은 알게 된 지금 델루니안에 대해서 더 알 필요는 없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했는지 알아봤자 뭐 하겠는가. 어쨌든 그는 내게 있어 살인자일 뿐이다.

문득 본당의 공기가 무척 답답하게 느껴졌다.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황실 일가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들은 정성껏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벽을 붙잡고 서서 앞을 바라보다가 소냐 하워드 비서관과 눈이 마주쳤다.

‘어지러워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입 모양으로 벙끗대었다.

‘잠깐 밖에 다녀오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향했다.

7겹 베일을 지나 바깥으로 나오자 좀 살 것 같았다. 베일이 향냄새를 차단하는지 바깥으로는 향이 퍼지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다가 문득 본당 앞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할 비서실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딜 가셨을까.

맥케인 부인의 사망 이후 비서실장은 자기 혼자 심각했다. 뭔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은데 내게는 언질도 없었다.

물론 나는 그의 부하 직원일 뿐이고 내게 말을 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 무슨 실마리를 어떻게 얻은 걸까. 가능하다면 이번 기회에 얘기를 해보고 싶다.

비서실장을 찾아 회랑을 조금 걸었다. 경호관 몇 명과 만났다.

“어딜 가십니까?”

그들의 물음에 비서실장님을 못 보았냐고 되묻자 그들은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쉽게 자리를 비울 사람이 아니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랑을 따라 계속 걷자 본당이 있는 1사원을 벗어나 평신도들이 주로 이용하는 2사원으로 연결된 복도가 나왔다. 저쪽으로 간 건가. 복도를 따라 중간쯤 갔을 때였다.

삐리릭, 하고 품 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냐 하워드 비서관인가 싶어 보았지만 발신자는 공교롭게도 비서실장이었다.

“예, 라파엘 드마뉴입니다.”

-어디 있습니까?

휴대폰을 타고 흐르는 비서실장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리고 조급하다. 무슨 일이지?

“잠시 바깥 공기를 쐬러 나왔습니다. 지금 2사원으로 향하는 복도입니다.”

-지금 당장 본당으로 돌아가세요. 얼른!

“예?”

무슨 일이지? 그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1사원의 정원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지직거리는 소음이 휴대폰을 타고 흘렀다.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휴대폰을 쥐고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으려던 순간,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뒤통수를 잡아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불현듯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뚜벅, 뚜벅.

나는 멈춰 있는데.

왜……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에서 날카로운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인 퍼스를──!!

비서실장의 목소리를 미처 다 듣기도 전에 탁, 휴대폰이 바닥에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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