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샤를마뉴의 마사지를 받았다지만 뭉친 근육은 쉽게 풀리지 않아 토요일 아침에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주말 내도록 집안에서 끙끙 앓으며 아침, 점심, 저녁으로 걸려오는 샤를마뉴의 전화에 응하는 것만 하며 누워 있으니 월요일에는 그럭저럭 움직일 상태가 되었다.
출근하기 위해 아파트에서 나오자 누군가 나를 불렀다.
“비서관님!”
지난번에 샤를마뉴에게 그토록 눈총을 받았으면서도 카풀을 포기하지 않은 아인 퍼스였다. 저것도 참 근성이란 말이지.
샤를마뉴는 퇴근까지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는 건 싫다며 자신이 직접 차를 운전하려고 했지만, 나로서는 경호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아인 퍼스가 여러모로 편했다.
“어, 왔어?”
“괜찮으세요? 금요일에 아프셨다면서요!”
“응, 이젠 괜찮아.”
“감기라도 걸리신 거예요?”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뭐, 비슷해’라고 말을 돌렸다. 아직까지 칼칼한 목에 대한 변명이 되리라. 아인 퍼스는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몸이 많이 약해지셨나 봐요. 요즘 보약은 드세요?”
“아…….”
그러고 보니 한동안 안 마신 것 같다. 사실 마실 정신도 없었다. 미안하다고 중얼거리자 아인 퍼스가 마치 초등학생 아이를 교육하는 부모처럼 엄한 목소리로 ‘오늘부터 꼭 챙겨 드세요. 드셨는지 확인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우습다. 귀엽기도 하고. 알겠다고 대답하며 그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자 녀석이 금세 풀어진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차를 새로 사야 하는데.”
한창 내선 순환도로를 달릴 때였다.
차창 밖을 바라보다 중얼거리자 아인 퍼스가 ‘네?’ 하며 되물었다.
“언제까지 너한테 신세를 질 수도 없잖아.”
“신세라뇨.”
“신세지, 뭐. 일할 때도 필요하고.”
제2비서실 소속 비서관의 일은 잡다하다. 이것이 비서관의 직무다, 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황실 사무 전반에 관한 것을 제2비서실에서 통제한다고 보면 된다.
제1비서실은 말이 좋아 비서실이지, 정부의 장차관과 같은 위상을 지닌 황제 임명의 별정직 공무원이었기에 우리와는 맡은 업무가 전혀 달랐다.
현재 제2비서실의 주요 업무는 황실 일가 관리다. 황실 일가의 스케줄 관리부터 경호, 행사 주최, 재정관리 일부, 피부미용과 헤어 세팅, 메이크업, 손톱 발톱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2비서실의 비서관들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일은 외부 전문가와 협력해서 이루어지지만, 외부 전문가를 발굴하고 계약을 맺는 것이 비서관의 일이었다. 차가 필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차를 사기는 사야 하는데……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인 퍼스가 묻는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음, 조금?”
“뭔데요?”
말하려니 좀 민망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대답했다.
“차를 운전하기 힘들어서.”
“네?”
“사고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겼나 봐.”
목요일, 샤를마뉴와 함께 유가족을 찾아갈 때 나는 당연히 내가 운전석에 앉으려 했다. 그러나 운전석의 문을 열고 앉으려는 나를 말린 것은 샤를마뉴였다.
“괜찮겠어?”
그때까지도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뭐가 말입니까, 하고 묻자 샤를마뉴가 영 걱정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혹시 힘들면 말해. 바꿔 줄게.”
힘들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것은, 운전한 지 십 분이 지나서였다.
빨간 불에 걸려 정차 중인데 뒤로 트럭이 와서 멈춰 섰다. 백미러로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보인 순간 숨통이 꽉 조여 왔다.
핸들을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곤두서는 두려움. 숨도 쉬지 못하고 파랗게 질려 덜덜 떠는 나를 발견한 것은 샤를마뉴였다.
“라파엘!”
유가족의 정보를 확인하고 있던 샤를마뉴는 나를 발견하고는 내 뺨을 두드렸다.
정신 차려. 라파엘? 라파엘! 내 목소리 들려?
잠시 후 내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안전벨트를 풀며 내게 말했다.
“내려.”
“……예?”
“내가 운전할게. 내려.”
“아, 아닙니다. 괜찮습…….”
“내가 안 괜찮으니까 내리라고.”
결국 그와 자리를 바꾸고 말았다. 핏기가 빠져 하얀 손을 주무르며 슬쩍 바라보자 그가 혀를 찼다.
“그런 경우가 왕왕 있지. 정신적 외상이야.”
“…….”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가 어깨를 두드렸다.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급적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그 일 때문에 잠깐 잊어버렸지만.
지난 목요일의 일을 차근차근 떠올리던 나는 번뜩 떠오른 생각에 아, 하고 물었다.
“아, 맞다. 아인, 나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네?”
“저번에 나한테 부전자전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미소가 살짝 걸려 있던 아인 퍼스의 얼굴이 일순간 무표정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찰나였고, 내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무표정은 사라지고 그린 듯 예쁜 웃음이 얼굴에 서렸다.
“그랬나요?”
“저번에 병원에서.”
“아하.”
“……아버지를 알아?”
그 말에 아인 퍼스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뜻 모르게 웃었다.
“음…….”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아버지와 관련된 말이니 의뭉스럽게 넘어갈 수는 없어서 대답을 기다리자 한참 후 그가 대답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마련이죠.”
“…….”
“비서관님도 돌아가신 아버님을 닮아 무척 귀족적이라는, 뭐 그런 뜻 아니었을까요.”
아니, 분명히 그런 말은 아니었던 거로 기억한다. 부전자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뭐 이런 말이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그런데 그것보다 말이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내가 언제 말했던가.”
나는 아인 퍼스에게 단 한 번도 내 가정사를 말한 적 없다. 나는 내 이야기를 남에게 떠벌릴 정도로 친근한 성격이 아니었다.
이미 아는 사람이야 아는 거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구구절절 부모님이 비행기 테러로 돌아가셨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너는 알고 있는 걸까.
그때 문득 저택에서 나누었던 아인 퍼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사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이렇다 할 친척도 없어서 그냥 혼자 살게 되었죠.’
‘아…….’
‘그래서 저는 차라리 이렇게 함께 있는 게 더 좋아요. 여러 가지 기회도 많고.’
‘저도 그랬어요.’
그때 아인이 뭐라고 했더라?
“아인.”
“네?”
“……너 말이다.”
아인 퍼스가 고개를 돌렸다.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예쁘장한 청년은 웃는 낯이었다.
“말씀하세요.”
그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찜찜한 기분을 털어 내듯, 입안에서 뱅뱅 맴돌던 물음을 토해냈다.
“너, 나를 알고 있었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던진 내 물음은 아인 퍼스의 호쾌한 웃음으로 돌아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알고 있었다뇨?”
“네 말, 마치 나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려서.”
“설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지만 나로서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신발에 모래가 섞여 들어간 듯 그의 말이 묘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가 중요한가요?”
아인 퍼스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일리오니쉬 얘기를 꺼낼 때와 같은 날카로움이었다.
역시, 이상해.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
“네 말대로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그래서 아버지 문제가 나오면 더 신경 쓰게 되는 게 있어.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미안하다.”
아인 퍼스가 침묵 끝에 대답했다.
“네.”
그 짧은 대답도 역시 낯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어쩐지 이 모습이 그의 본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짐짓 모른 척,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아인 너도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나?”
그는 잠시 침묵했다.
“네.”
“어쩌다가?”
“……사고였습니다.”
말투가 달라졌다.
“사고라. 어떤?”
“교통사고요.”
“아하. 고생이 많았겠네.”
“…….”
그는 이제 대놓고 ‘이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적당히 말을 골라 가며 대화를 이끌었지만 더 이상의 대답은 그에게서 끌어낼 수 없었다.
역시 이상해. 나는 그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화제를 바꿨다.
“본격적인 추도식 준비는 오늘부터지?”
“네.”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할 거야. 종교인 초청은 누가 맡았지?”
“소냐 하워드 비서관과 저입니다.”
“산티교에서도 오나?”
“아니요, 빼려고 합니다만…….”
“넣어.”
“예?”
아인 퍼스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맥을 눈으로 그리며 대답했다.
“추도회는 애도의 의미도 있지만 제국의 민족 종파가 테러 사태에 의해서도 분열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쇼이기도 하니까, 산티교도 넣는 게 좋을 거야.”
산티교는 일리오니쉬의 전통 종교로 원래는 세력이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인츠만 집권 시기 박해받았던 소수민족이 산티교를 중심으로 뭉치며 세력이 확산되었고, 명실상부한 소수민족의 대표자가 되었다.
소수민족에 의한 테러이니 산티교는 추도회에서 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아인들의 생각은 나쁘지 않지만, 그건 정말 추모회의 일차적인 기능에만 집중한 생각이다.
추도회는 추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근본적인 목적은 제국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 테러가 소수민족의 의지와는 별개로 단 한 사람의 우발적인 범행이었다고 치부하는 것만이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할 방법이다.
이번 사건이 소수민족 대 제국이라는 구도로 가면 불리한 것은 제국이었다.
그래서 추도회에는 산티교의 사제가 필요했다. 소수민족의 집합으로 알려진 산티교의 사제가 와서 희생자들을 위로한다면 그 행위는 곧 소수민족의 의지가 된다.
물론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파멸 직전까지 몰려놓고 우리는 괜찮아 하고 자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우선 나는 공무원이고 공무원은 최대한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일을 수행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아인 퍼스가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조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그 날 이후로 나는 쉴 새도 없이 추도회 준비에 나서야 했다.
황실 주관 행사는 일정한 가이드라인이 있어 그리 힘들지는 않았지만 십여 년 만에 처음 열리는 추도회인 탓에, 유행에 뒤떨어진 테이블 웨어 교체와 같은 사소한 일거리들이 많아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샤를마뉴는 비척비척 말라 가는 나를 보며 비서실장을 향해 애 좀 그만 괴롭히라며 이를 드러냈지만 추도회 준비 말고도 이래저래 바쁜 비서실장은 (당연하게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인 퍼스가 준 보약을 마시며 집에 갈 시간도 부족해 당직실에서 쪽잠을 자는 것으로 보낸 일주일.
아인 퍼스와 함께 법륜성에 다녀온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 곤란해 하는 기색으로 일이 조금 꼬였다고 말했다.
뭐가 문제냐고 물으니 산티교에서 추도회 참석을 거부했단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한동안 뒷목을 잡았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비서실장에게 산티교 측에서 추도회 참석을 거부한다고 보고했더니 애초부터 나와 생각이 똑같았던 비서실장은 이번에도 나에게 일을 떠맡겼다.
“믿습니다.”
그 말이 제일 증오스러웠다.
이명이 울릴 정도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산티교 대사제가 머무는 법륜성으로 향했다.
황궁에서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는 법륜성은 산티교의 본당으로, 원형의 거대한 건축물에 출입구가 단 하나밖에 없는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자주색 복식의 대사제는 합장하며 나를 반겼다.
이국적인 외모의 대사제는 온후한 노년의 사내로 내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왔음을 알면서도 나를 쫓아내지 않았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추도회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좁혀 갔다.
의외로 대사제는 추도회 참석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가족을 위로하고 희생자 영혼의 안식을 빌어주는 것이 사제의 의무가 아니겠냐는 대사제는, 그러나 그 의무 이행이 소수민족을 옥죄는 데에 이용되는 것이 싫을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추도회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나보다 수십 년은 더 오래 산 대사제에게, 특히 소수민족의 애환을 직접 어루만졌을 그에게 간교한 말솜씨로 추도회 참여를 종용할 수는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사실 대사제께서 이번 추도회에 참석하시더라도 그건 황실에서 의도한 대로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겁니다.”
“호오……?”
“제국의 분열은 머지않았습니다. 아인츠만 집권 시기 이래로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요구가 강해졌고, 제국민들도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와서 산티교의 사제가 참석해 희생자 유가족을 위로한다 하더라도 소수민족이 제국 쪽으로 마음을 돌릴 리도 없고, 제국민들도 속내가 뻔히 보이는 쇼맨십에는 관심이 없을 겁니다.”
대사제가 옅게 웃었다.
“그렇다면 사제가 필요한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
“사실 정치적으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잠시 고민했다. 대사제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온화한 얼굴에는 어딘지 사람의 닫힌 마음을 어루만지는 면모가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걱정되는 건 유가족입니다.”
“…….”
“저도 예전에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십여 년 전의 비행기 테러로요.”
대사제의 얼굴에 얼핏 안타까움이 스쳤다. 그런 식의 시선에는 익숙했다.
“주변 사람들이 위로를 해주었지만, 그 위로는 사실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속세의 사람이고, 어쨌든 저보다는 행복하니까요. 눈물도 나오지 않을 만큼 괴로웠던 시간이었습니다.”
“…….”
“그때 제게 필요했던 것은 품에서 눈물을 쏟아도 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쌍하다, 안타깝다 동정을 했지만 정작 가슴을 내준 사람은 없었고요. 이해는 합니다. 동정은 쉽지만 포용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거든요.”
그래서 울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없을 걸 알았기에 울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슴이 메마른 것처럼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았다.
그러다가 샤를마뉴, 그 사내의 품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쏟아 냈다. 12년 만에 쏟아 낸 눈물이었다.
“유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사람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고통스러운 사람을 안아주는 그런 사람들이요.”
“……그렇습니까.”
“물론 사제님들도 사람이라는 건 잘 압니다. 부담스러우리라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단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제국민과 소수민족을 구분 짓지 말고, 단 한 번만 그들을 위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국적이라 몽환적인 외모의 대사제는 세로로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잔잔한 사랑으로 가득했다. 대사제는 내 손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것이 종교의 본질인데 무엇이 부담스럽겠습니까.”
“…….”
“사제씩이나 되어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싫다며 오히려 제가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대사제는 추도회에 꼭 참여하겠다는 말과 더불어 아픈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아주어 고맙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부끄러워 재빨리 훔쳤지만 대사제는 그럴 것 없다며 손을 잡아주었고, 나는 수치도 모르고 두 번째로 남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산티교 대사제의 참여까지 확답을 받아 놓은 상황. 몇 시간의 종교적 평화는 뒤로하고 다시금 전쟁 같은 추도회 준비가 계속되었다.
당직실 소파는 이제 물릴 지경이었다. 맛대가리 없는 보약을 쏟아붓다시피 했지만 계속해서 체력은 떨어졌고 추도회가 이루어지는 아침에는 샤를마뉴의 강압에 못 이겨 링거를 맞아야 했다.
지루한 세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쓰러지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커피를 네 잔쯤 들이붓고 기둥 뒤에 숨어 추도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망자의 영면을 기원하는 종교인 몇몇과 유가족 그리고 황실 일가와 허가증을 소유한 황실 출입 기자단만을 동석한 추도회는 황제의 심심한 위로와, 앞으로는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와 같은 테러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다짐으로 끝이 났다.
모든 참석자가 돌아간 오후. 대사제는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와 머리에 성수를 끼얹으며 말했다.
“라쉬네, 라쉬네.”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니 ‘신의 축복을 받으라’라는 뜻이라고 했다. 신의 축복이라.
성수가 똑똑 떨어지는 머리를 말릴 생각도 없이 비서실로 돌아와 자리에 주저앉으니 잠시 후 샤를마뉴가 찾아왔다.
“……고생 많았어.”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 뼈만 남았네.”
손목을 조심스럽게 쥐며 혀를 찬 샤를마뉴는 괜찮냐고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내 이마 위를 배회하는 샤를마뉴의 손을 잡아 얼굴에 문지르며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그 대답에 샤를마뉴가 인상을 찌푸렸다.
“해골바가지 주제에 괜찮은 척은.”
“……해골.”
해골이라니…… 너무하네. 애인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요. 조금 먹었던 감동을 토해 내며 퉁퉁 부은 눈으로 노려보자, 샤를마뉴가 안타까운 웃음으로 내 시선을 넘기며 물었다.
“집으로 갈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가야지. 하루만 더 당직실에서 자면 이번에야말로 심정지로 사망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퇴원하면서 의사가 빠른 시일 내로 정밀 검사를 받으러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선 좀 쉬고, 내일이든 모레든 가 봐야겠다.
어쨌든 집으로 가야 한다. 귀가를 제일의 목표로 두고 몸을 일으키자 샤를마뉴가 나를 다시 앉히며 말했다.
“데려다줄게. 차 가져올 동안 누워서 잠 좀 자고 있어.”
“아…… 안 그러셔도 됩니…….”
“내가 불안해서 그래. 지금 얼굴이 장난이 아니라고.”
내가 정말로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순수한 불안이 드러난 얼굴을 보니 더 이상 고집을 부리는 것도 무리다 싶었다.
결국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당직실에서 눈 좀 붙이고 있겠다고 말한 후 당직실로 기어들어 갔다.
비서실 옆 쪽방에 위치한 당직실의 소파는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날 정도였다.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눈을 감은 지 몇 분.
그리 두껍지 않은 당직실의 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아무도 없는 비서실에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발걸음이 가벼운 것으로 보아 샤를마뉴는 아니었다.
누구지? 다른 사람들은 지금 모두 퇴근한 상태였다. 움직일 기운은 없고 발소리로만 상대를 추측하고 있는데, 또 다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서실장의 개인 룸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그때쯤 되자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비서실장은 지금 황궁 안에 없었다. 그는 추도회 이후로 개인적 용무로 인해 황궁을 비운 채였다.
그렇다면 비서실장의 개인 룸에 함부로 들어가는 저자는 누구인가.
비서실장의 개인 룸은 나도 알지 못하는 문서들로 가득했다. 워낙 성격이 꼼꼼한 비서실장은 자신의 캐비닛에 보안장치를 다 해두었지만, 사실 보안장치는 풀려는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풀 수 있다.
막고자 하는 것보다 뚫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하면 세상에 못 뚫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소파에서 일어나 당직실의 문을 열었다. 비서실장의 개인 룸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별일이 아니길 바라지만, 혹시라도 별일이라면…… 나는 체술에는 능하지가 않은데. 걱정이다.
다행히도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정말 절묘한 각도다. 비서실장의 캐비닛과 그 앞에 선 사람이 보이는 각도.
문틈에 얼굴을 갖다 대고 그를 확인했다. 캐비닛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 순간 몸이 움직였다. 스스로를 저지할 틈도 없이 나는 문을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여긴 함부로 출입하면 안 돼, 아인.”
아인 퍼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가 놀란 기색도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퇴근 안 하셨어요?”
“여긴 왜 들어왔어?”
“아…… 좀 찾을 게 있어서요.”
그가 꺼내려던 서류를 다시 캐비닛 안에 넣으며 민망한 듯 웃었다. 제일 위 칸이다.
보안벨이 울리지 않은 거로 봐서는 그렇게 중요한 문서가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흐음. 나는 그에게 손짓하며 그를 방 밖으로 불러 냈다. 그가 순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왜 퇴근 안 하고 엄한 곳에서 기웃거려. 의심받게.”
“의심하셨어요?”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하하, 죄송해요. 사실 송년축제와 관련된 자료를 좀 찾아보고 싶었거든요.”
“송년축제는 왜?”
“추도회 준비를 하면서 제가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요. 송년축제만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그 마음은 참 기특한데 말이야. 나는 웃으며 아인 퍼스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런 건 나한테 부탁해. 내가 관리하고 있으니까.”
“아, 정말요?”
“지금 줄까?”
“그럼 감사하고요.”
아이처럼 활짝 웃는 그를 보니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내 캐비닛으로 가서 송년축제와 관련된 자료를 꺼내 넘겨주며 말했다.
“꼼꼼히 읽어, 꼼꼼히. 시험 낼 거야.”
“악, 너무하세요!”
“퇴근 안 하고 얼쩡댄 벌이다.”
그렇게 투닥대고 있을 때였다. 샤를마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멀쩡히 서 있는 나를 보고 일차로 놀랐다가, 그 옆에 서 있는 아인 퍼스를 보고 이차로 인상을 찌푸렸으며, 우리가 붙어 있다는 사실에 삼차로 짜증을 냈다.
둘이 왜 붙어 있냐는 둥, 라파엘 당신 그 손 안 치우냐는 둥, 머리를 만질 거면 내 머리나 만지라고 머리통을 들이밀질 않나 아인 퍼스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먼저 쫓아내질 않나, 하여튼 정신이 없었다.
아인 퍼스가 제 차를 타고 퇴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샤를마뉴의 차에 올라탔다. 샤를마뉴는 계속 구시렁대었다.
“저 자식 정말 맘에 안 들어. 남의 남자한테 막 들러붙기나 하고.”
“…….”
“당신도 다 받아주면 안 돼. 알았어? 저거 완전 맹수라니까? 언제 당신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할지 모른다고.”
“전하.”
“응?”
방금 전까지 신경질을 부리던 샤를마뉴가 금방 온순해져서 대답했다. 나는 멀어져 가는 아인 퍼스의 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 분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응?”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요.”
요 며칠 아인은 계속 내 신경을 깔짝깔짝 긁어 대었다. 이상하다 느끼지 못할 때는 몰랐으나, 한 번 인식하고 나자 계속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방금 비서실장의 개인 룸에 들어가 캐비닛을 열어 본 것으로 의심의 최고점을 찍었다.
송년축제라. 급조한 변명치고는 나쁘지 않았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 비서실장의 개인 룸을 들어간다고 하기에는 너무 앞뒤가 맞질 않았다. 의심하지 않는 척 애쓰느라 힘들었지.
……역시, 확인해야 할 것 같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샤를마뉴를 등 뒤에 남겨 두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 * *
첫 번째 캐비닛. 눈대중으로 대략 어디에 넣었는지 확인해 두었기에 그가 찾고 있던 서류를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음, 이거였다. 나는 재빨리 파일을 넘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족 관계 증명서?”
아인 퍼스 자신의 가족 관계 증명서였다.
“이걸 왜…….”
가족 관계 증명서는 비서실에 취직할 때 필수로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황가를 보필하는 직업이다 보니 신분을 철저하게 밝히는 것이다.
물론 가족 관계 증명서는 형식에 가깝긴 하다. 누가 누구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그 가족이 테러리스트만 아니라면야 가족 관계 증명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용 증명서다. 아마 비서실장도 받아 놓고 읽어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둑고양이처럼 남몰래 들어와 보려 했던 것이 고작 가족 관계 증명서란 말인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아인 본인의 이름이 제일 위에 있었고, 그 밑으로는 부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인은 미혼이니 가족 구성원에 부인과 자식이 아니라 부모님이 적혀 있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아인의 말이 떠올랐다. 일리오니쉬 쿼터라고 했었지. 부모님 중 어느 쪽이 일리오니쉬였더라? 가물가물했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몰두해 무심결에 종이를 넘겼다가, 순간 눈을 의심하고 다시 앞장으로 돌렸다.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비고란이었다.
“……어째서.”
그는 분명히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하지만 이 증명서에는 부모 모두 살아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망 표시가 따로 되어 있지 않다. 그가 이 서류를 제출하고 난 이후에 돌아가신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입사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저번에 분명 어릴 적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 말이 거짓일 리는 없다. 제 부모가 죽은 시기도 헷갈릴 머저리 천치는 없으니까.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뭐지? 뭐가 있는데, 분명 뭐가 있는 것 같은데…….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헉.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개인적 용무로 비서실을 비웠던 비서실장이 서 있었다.
인기척이나 내고 다니시라고요. 아까 아인 퍼스도 이만큼 놀랐을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뭘 보고 있어요?”
“아, 이건…….”
망할. 아인 퍼스의 꼬리를 잡으려 했다가 되레 내 꼬리가 밟혔다. 뭐라고 대답하지? 있는 그대로 말해도 믿어줄지가 의문이다.
이 공간은 아인 퍼스에게만 출입 금지인 게 아니다. 선임이라지만 일개 비서관에 불과한 나 역시 특별한 용무 없이는 출입 금지인 것이다.
까이겠네. 속으로 혀를 차며 말을 고를 때였다. 비서실장이 내 손에 들린 서류를 빼앗아가며 말했다.
“아인이 이걸 찾습디까?”
“……예?”
멍해졌다. 얼빠진 되물음에 비서실장이 은테를 반짝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요 며칠 이 방을 얼쩡대기에 수상하다 생각했죠. 이걸 찾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한 소릴.”
그가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액자로 눈길을 던졌다. 한 여인의 초상이 그려진 액자였다.
“왼쪽 눈을 잘 보십시오.”
“……맙소사.”
검은 눈동자인 줄 알았던 왼쪽 눈에 렌즈가 반짝이고 있었다.
‘지독한 인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하다. 벽에 저런 초소형 카메라를 달고 있을 줄 누가 알았나. 괜히 걱정한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였다. 비서실장이 아인 퍼스의 가족 관계 증명서를 읽으며 몸을 틀자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서류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르륵. 몇 장의 종이와 사진들이 쏟아진다.
“……이건.”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다가 문득 시선을 잡아채는 것이 있어 살펴보았다.
그것은 낡은 사진이었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허리춤까지 오는 한 소년이 서 있는 사진.
부부는 웃고 있는데 소년은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이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다. 단박에 알아보았다.
“레브로비치의 사진 아닙니까?”
내 물음에 당연한 듯 앉아서(서류를 떨어뜨린 장본인이었지만 그는 결코 주우려 하지 않았다) 가족 관계 증명서를 읽어 보던 비서실장이 고개를 들었다.
“알아보겠습니까?”
“……못 알아볼 수가 없죠.”
사진을 보며 씁쓸하게 대답했다. 못 알아볼 수가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자들이 내 부모님을 죽인 사람인데.
나는 사진 속 세 가족을 바라보며 그때 일을 회상했다. 비행기가 피랍되고 폭발로 추락하기 전까지 TV에서는 용의자 신상에 관해서 떠들어 댔다.
용의자는 일리오니아 출신의 귀족인 레브로비치 부부였다. 무정부주의자로 유명한 부부는 체크인 기록에 따르면 외동아들까지 데리고 탄 상태였다.
그 비행기 안에 죄 없는 아들까지 같이 묶인 것이다. 사람들은 맹렬히 부부를 비난했다. 죽으려면 자기들이나 죽지 왜 애먼 자식과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느냐.
출국 직전 찍힌 사진이 공개되자 비난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 사진이 바로 이 사진이다.
부부는 웃고 있지만 곧 죽을 운명임을 아는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사진.
사람들의 비난에도 부부는 대답이 없었고, 그들은 검색대에서도 걸리지 않은 수제 폭탄을 터뜨려 비행기를 추락시켰다.
신물이 날 만큼 본 사진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상하단 말입니다.”
비서실장이 내 손에 들린 사진을 보며 툭 하고 내뱉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오늘 경무청장과 만나고 왔습니다.”
그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을 파고드는 형사처럼 답답한 얼굴로 넥타이를 푸르며 말을 이었다.
“이번 폭탄 테러에 무척 이상한 점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상한 점이요?”
“이번에 사용된 폭탄의 종류가 그 비행기 테러 때 이용된 폭탄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면이 굳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폭탄은 레브로비치 가문의 사람만이 제작하는 방법을 안다는 수제 폭탄이에요. 화약과 촉매제의 비율이 조금만 틀려도 터지지 않는, 레브로비치 고유의 섬세한 조작이 필요한 폭탄인데…….”
“실장님, 그 말씀은.”
내 말을 끊고 실장이 대답했다.
“하지만 레브로비치의 혈통은 이 아이를 마지막으로 끊겼죠.”
그는 사진 속 울상을 짓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이 아이는 테러 당시 비행기 안에 있었고, 아이가 죽으면서 레브로비치의 혈통은 영원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폭탄의 제조 방식을 아는 레브로비치는 이제 없다는 뜻이죠.”
“…….”
“그런데…… 이상한 소릴 들었어요.”
이상한 소리?
비서실장이 ‘정말 말도 안 되는데’라고 운을 떼었다.
“레브로비치의 또 다른 후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소리.”
“예?”
“확실하진 않아요. 등록된 바로는 분명 레브로비치의 아들은 케런 레브로비치가 전부입니다.”
다만.
“다만…… 마리아 레브로비치라고 밝혀진 익명 여성의 산부인과 출입 기록을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비서실장은 한숨을 쉬었다. 냉철한 비서실장도 지금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것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레브로비치의 또 다른 후계라니. 연좌제는 곤란하지만 그가 폭탄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순한 사고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는 일들이 레브로비치와 얽히면 황가를 위협하는 반체제 세력의 테러로 거듭나는 것이다.
“점점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군요.”
피곤한 듯 안경을 벗고 눈가를 주무르며 비서실장이 말했다. 동의합니다. 나도 정말 지친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 건지.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그래도 내가 모시는 사람의 일이고 또 내 생명과 관련된 일이니 신경을 아예 꺼 버릴 수도 없다. 돌겠다, 정말.
나와 비서실장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분명 복지 좋고 안정적인 직업이라 비서관이 되기로 결심했는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3D 직업일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조만간 이 바닥 떠야겠다. 이놈의 황궁 정말 지긋지긋하다.
잠시 후 비서실장이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이건 경무청과 함께 조사해 볼 일이니 라파엘 비서관은 퇴근하세요.”
퇴근.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네.”
뭐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고 꺼지라면 꺼지는 것이 황실 비서관의 삶이다. 설령 내 생사가 걸렸다고 해도 말이다.
서글프고 착잡한 마음으로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차 지붕에 등을 기대고 서서 나를 노려보는 샤를마뉴를 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쓰러진 줄 알고 찾아갔을 거야.”
“아…… 실장님과 얘기를 좀 하느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장? 그 너구리?”
너구리라뇨. 순간 픽 웃음이 나왔다. 비서실장을 너구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전 제국을 통틀어 샤를마뉴밖에 없을 것이다. 너구리라.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힘없이 킥킥 웃는데 점점 힘이 빠졌다. 정말 한계치에 다다른 것이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아, 쉬고 싶다.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고 눈을 감았다. 샤를마뉴가 말했다.
“너구리랑 무슨 얘길 한 거야? 안색이 더 안 좋아졌어.”
“……별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레브로비치의 자식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 정도. 기진맥진한 내 대답에 샤를마뉴가 혀를 차며 한 손으로 내 눈을 지그시 눌렀다.
“좀 자.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깜빡 눈을 붙이고 일어났더니 벌써 집 앞이었다. 지나치게 피곤하다 보니 오히려 깊게 잠들지 못한 나는 차가 멈추는 감각에 잠에서 깨어났다.
주섬주섬 내릴 준비를 하는데 샤를마뉴가 진지한 목소리로 내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일 무조건 병원 가자.”
“……병원이요?”
귀찮아 죽겠는데 병원은 무슨. 졸려서 퉁퉁 부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자 샤를마뉴가 달래듯 내 뺨을 한 손으로 쓸며 속삭였다.
“내가 불안해서 그래. 당신 또 쓰러질까 봐. 응?”
“…….”
“라파엘, 착하지? 병원 가자?”
누굴 애처럼 취급하고 있어. 손을 휘저어 샤를마뉴의 손을 떼어내고 대충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가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는데도 불안한지, 샤를마뉴는 아파트로 올라가는 와중에도 곁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과잉보호야. 과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샤를마뉴도 따라 들어왔다.
“왜 들어오십니까?”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
“예? 누구 마음대로요?”
“내 애인 집에 가는 것도 허락 맡아야 해?”
“당연하죠!”
“몰라. 아무래도 당신 이러다가 병원 가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단 말이야. 지켜봐야겠어.”
“……정말 괜찮습니다만.”
“하루만. 정말 맹세코 당신 자는데 손 안 댈게. 응?”
그 말을 믿으라고? 마음이 통한 그 날 이후로 샤를마뉴는 툭하면 내게 스킨십하려고 했다.
물론 내가 미친 듯이 바쁜 터라 농밀한 스킨십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손이라도 잡으려고 했다.
손 안 댄다는 말을 어떻게 믿어. 불신의 뜻을 담아 노려보자 샤를마뉴가 패잔병처럼 양손을 들었다.
“정말이야.”
“…….”
결국 포기한 건 내 쪽이었다. 그와 믿네 못 믿네 설전을 벌일 정도로 나는 지금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아인에 비서실장에 레브로비치에, 아주 정신이 탈탈 털리다 못해 바짝 말라 버렸다.
절대안정이 필요하다. 알아서 하시라고 대충 손을 젓자 샤를마뉴가 내 팔을 잡아당겨 침실로 이끌었다.
어어?
“손 안 댄다고 했…….”
“자.”
“…….”
손 안 댄다고 했지 않느냐고 따지려다가 말이 쑥 들어갔다. 샤를마뉴는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한 나를 침대로 처박더니 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이를 어르는 엄마처럼 가슴팍을 도닥여 주는 것이 아닌가.
“코 주무세요.”
……그러면서 허밍으로 자장가를 부르는데,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이불 속에 파묻힌 채로 샤를마뉴를 올려다보았다.
내 옆에 누워 비스듬히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로 자장가를 부르며 내 가슴팍을 두드리는 샤를마뉴는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평생의 소원이라도 이룬 것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자장가 따윈 집어치우라고 면박을 줄 수도 없었다.
갈아입지 못한 수트가 이불 밑에서 부스럭댔다. 옷은 좀 갈아입고 싶은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쩌면 자장가 때문일지도 모른다. 점점 눈이 감겼다. 수마에 휩쓸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잘 자’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는 샤를마뉴의 얼굴이었다.
* * *
어느 순간 나는 황궁에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나는 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다.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꾸는 과거의 꿈. 그리고 지금의 나는 루크가 아닌 라파엘이었다.
라파엘의 정신으로 루크일 적의 꿈을 꾸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 낯설었지만 루크가 나고 내가 루크였으니 또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마음대로 깨어나지도 못하는 꿈, 옛날 황궁 구경이나 해보자 싶어 루크일 적에도 가 보지 못한 곳을 찾아갈 때였다.
그때 어디에선가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뭐지? 고개를 돌려 비명이 들려온 곳을 찾았다.
바닥에 격자무늬로 조그맣게 창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다. 그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나는 흡수되듯 그 안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어째서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 격자형의 창문은 내가, 그러니까 루크일 적에 지하 감옥에서 바깥을 그렸던 창문이다.
안쪽에서 보는 것과 바깥쪽에서 보는 시선의 괴리인가. 나는 내가 갇혀 있던 곳에 갇힌 자를 바라보았다.
핏물과 진물에 뒤덮인 남자는 이미 끔찍한 고문을 당한 후였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당한 고문들이 떠올랐다. 피부가 찢기고 피가 흐르는 곳에 소금을 치고, 그거로도 모자라 불로 지지고 뜨거운 물을 퍼부어대는 끔찍한 고문들.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자 꿈인데도 속이 메스꺼웠다. 나가자. 굳이 볼 필요 없잖아. 고개를 돌리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려는 참이었다.
“누가 사주하였느냐.”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아채었다.
“으…… 아악!”
“누가 사주하였는지 말하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우선 고문관이 보였다. 나도 익히 아는 이였다.
내 몸을 즐겁게 헤집었던 자. 그리고 그 뒤로 어두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화려한 금빛 머리칼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리안.’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 순간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어차피 혼의 목소리인지라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리안은 내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고문을 당하는 이를 노려보았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냉랭한 파란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차라리 ……차라리 죽여!”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음의 자비도 없다. 사주한 자가 누구냐.”
달군 인두가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지졌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귀를 찢을 것처럼 거대한 비명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싫다. 이곳은 싫어. 리안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가야겠다. 이번에야말로 고문실을 나가려고 그 자리에서 박찼을 때였다.
“루, 루크! 루크라는 그 남창! 그자가 사주를…… 아아아악!!”
……나? 그 순간 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가시가 박힌 채찍을 들고 선 리안이 보였다.
채찍이 할퀴고 간 남자의 가슴은 피와 뜯긴 살점으로 너덜너덜했다.
“그분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 마라.”
‘그분.’
그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지금 이 상황은 아무래도 내가 죽고 난 이후의 일인 것 같다. 내가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하고 난 이후의 상황.
반역자에게 존칭을 쓰는 것만으로도 참형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리안은 나를 ‘그분’이라고 부른다.
……정말로 리안 만큼은 나를 믿었던 모양이다. 박복하다 여겼던 루크의 삶에도 단 한 명의 믿음직한 사람은 있었던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가 맞소! 그가 사주했단 말이오!”
피울음이 섞인 남자의 비명에 리안이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고문관이 커다란 가위 같은 것을 들고 남자에게 향했다. 저건 무엇이지?
저건 내가 당해 본 적 없는 고문 기구다. 저 가위는 어디에 쓰려고…….
그때였다. 가위의 끝이 남자의 사타구니로 파고들었다. 히익! 남자가 오줌을 지리며 무릎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나 역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성기를 자르려고……?
고문관이 가위를 놀리기 직전, 리안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그리고 남자가 소리쳤다.
“사실, 사실대로 말하겠소! 사실대로!”
“말해라.”
그때부터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내게 자금을 모으라 한 것은 남ㅊ…… 아니, 그분이 맞소. 맞는데, 얼굴을 본 적은 없소! 그분이 물건을 구입할 때면 부리는 이를 통해 지시를 받았고,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
“그래서?”
“그게 전부요! 전부란 말이오!”
리안이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남자의 얼굴에 절망적인 기색이 어렸다.
“빠뜨린 게 있지 않나.”
“아, 아무것도 없소! 정말 아무것도 없소!”
“없다고? 그럼 내가 묻지. ……네놈이 도망치면서 쓴 호화로운 귀족용 마차와 가짜 신분 증명서. 그것은 어디서 얻은 것이냐.”
리안의 지적에 남자의 얼굴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건……!!”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네 그 조막만 한 성기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흐으,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안 돼. 말할 수 없어. 남자는 웅얼대며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고문관의 가위가 사타구니에 바짝 와 닿자 콧물을 흘리며 이실직고를 했다.
“나…… 나도 잘 모르오. 그저 헬라이너로 오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뿐이오. 그곳에 오면 도망치기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다 해준다고 그래서!”
“그 말을 전해 준 이의 인상착의는?”
“전서구였소. 다만…….”
“다만?”
남자가 잠시 뜸을 들였다.
“……언젠가 목 언저리에 긴 상처가 있는 자를 보았소. 마차 안에 앉아 있었고, 아주 잠시였지만 분명히 보았소.”
그 순간 리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 언저리에 긴 상처가 있는 자? 내가 알기로 그런 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리안도 마찬가지였던 듯싶다. 리안이 짓씹듯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채스터턴이로군.”
시드니 카턴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되면 당신이 저를 더 이상 만나려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말은 이런 뜻이었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지금까지의 말을 조합해 보면 결국…….
채스터턴이 나를 죽이려고 내 밑에 있는 사람을 부려 역모하는 것처럼 자금을 모았다는 것 아닌가.
개자식.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갈 때였다. 리안이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그럼 최종 목적지는 어디였지?”
남자가 침통하게 대답했다.
“아이젠이오.”
아이젠은 일리오니아와 제국의 경계에 있는 광산 도시였다.
현재에는 광산 채굴량이 줄어들고 은행과 다른 상업 기관들이 다른 도시로 이전해 가고 없어 유령도시나 마찬가지지만, 광산 채굴이 본격화된 300년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아이젠은 선진화된 부의 중심지였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지난번 꿈에서 본 기억의 한 조각. 델루니안이 광산 채굴권과 관련된 서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 모습.
그때 서류에는 분명 ‘황비의 지참금인 아이젠 광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인즉…….
“레브로비치 황후도 관련이 되어 있다는 소리군.”
일리오니쉬 황비도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다는 소리다. 아이젠은 황비가 가져온, 황비 소유의 땅이니까.
그녀가 비호를 해준다면 그곳으로 도망을 치는 것이 가장 안전할 터였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리안이 방금 그녀를 ‘레브로비치 황후’라고 불렀다는 것을.
레브로비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웃고 있는 부부와 울상을 지은 꼬마의 사진이 떠오르고 그 위로 황비의 얼굴이 겹쳤다.
레브로비치! 그랬다. 황비의 성은 레브로비치였다. 일리오니쉬 황비라고 불러서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식 명칭은 레브로비치 황비였다.
그리고 ……부모님을 죽인 테러범의 성도 레브로비치였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어떤 운명의 장난일까.
점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꿈에서 깨려는 신호다. 몸이 점점 뒤로 밀려났다.
너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하고 알 수 없는 거대한 손이 나를 이 세계로부터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때 리안이 소리쳤다.
“폐하께 간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서 깨었다.
눈을 뜨니 푸른 새벽이었다. 동쪽으로 난 창에서 창백한 새벽이 밀려들고 있었다. 현실이다. 시계 초침이 째깍대는 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잠들어 있는 샤를마뉴를 보았다. 눈을 감은 샤를마뉴는 델루니안을 닮았다.
‘폐하께 간다!’
리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리안은 델루니안을 만났을까? 그에게 내가 무죄였음을 밝혔을까? 델루니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말 모르겠다. 놀랐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게 뭐 어때서?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손으로 샤를마뉴의 얼굴을 그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내 삶은, 전생의 궤적을 따라가는 별똥별의 꼬리일지도 모르겠다고.
* * *
나보다 늦게 잠들었음 직한 샤를마뉴는 해가 동창을 가득 채웠지만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잠든 나를 잠옷으로 갈아입힌 샤를마뉴는 정작 본인은 수트 차림으로 불편하게 잠들어 있기에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옷을 갈아입히자니 잠에서 깰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재우기에는 미안하고.
결국 양말을 벗기고 갑갑하게 목까지 채워진 셔츠의 단추를 풀어주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샤를마뉴의 얼굴이 한결 편해진 것을 보며 문을 닫고 나와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는 잡다한 책이 많다. 주로 아버지의 책들이다. 장서가이자 애서가인 아버지는 온갖 종류의 책을 사 모아 그의 서재에 꽂아두곤 했다.
원목으로 만든 책장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던 아버지의 모습이 오래된 사진처럼 아련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함께 지내던 저택은 처분했으나 책들만은 남겨둔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책들은 분명 거추장스러웠지만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라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장서 목록에는 역사책도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책이 제일 많다.
정치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역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더라면 역사가가 되었을 것이라 농담처럼 말한 적도 있다.
‘라파엘. 이 책을 읽어 볼래?’
‘뭔데요?’
‘『이민족의 역사』라는 책인데, 제국의 역사를 소수민족의 시각에서 기술한 책이다. 역사 점수가 C인 네가 읽기 좋은 책이야.’
‘……참 재미있겠네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추천 목록에는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될 법한 책도 있었다.
‘그렇게 뚱한 표정 짓지 마렴. 지금은 관심 없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도움이 될 거란다. 이민족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지는 날이 있을 거야. 언젠가는.’
“찾았다.”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책. 세월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 주는 변색된 책을 손에 쥐며 공허한 감상에 젖었다.
내게 이 책을 추천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홀로 남아 그때는 읽지 않은 이 책을 필요에 의해 찾았다.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이렇게 불현듯 나타나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지. 마치 모든 것이 잘 짜인 운명처럼 흘러간다.
운명…… 문득 시드니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만물은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온다.’
과연?
책을 펼쳤다. 목차 부분에서 일리오니아 부분을 찾아 보았다. 소수민족 중 세력이 큰 축에 속하는지라 할애한 페이지가 제법 되었다.
그 부분을 펼치고 과거 아버지가 읽었던 것처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백에 쓰인 흐릿한 메모에서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뻔했기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곧 옆자리가 묵직해졌다. 어깨에 그의 머리칼이 닿았다.
“……왜 나 안 깨웠어.”
샤를마뉴가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내 어깨에 제 볼을 부비적대었다. 잠투정은 참 귀엽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비실비실 웃음이 흘렀다.
“졸리면 주무세요.”
“……싫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눈을 떠 내 책을 훑어보았다.
“……‘이민족의 역사’?”
“아, 예.”
“재미있어?”
어딘지 뾰로통한 목소리다. ‘잠든 날 혼자 두고 읽어야 할 정도로 재미있어?’라고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일까.
음. 뻐근한 목을 풀며 애매하게 웃었다.
“별로 재미는 없네요.”
일리오니쉬의 민족적 특성과 그 유래에서부터 시작한 글은 그들의 간략한 역사와 사회 문화적 특징, 그리고 현재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솔직히 재미는 없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졸 뻔했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또 아니었다.
산속에 위치한 일리오니아는 광물자원이 풍부해 무기를 생산하는 데에 있어 기술력이 우수하며 척박한 환경 때문에 전투에 능하다.
또 약재가 풍부해 제약 쪽으로도 기술력이 뛰어나다고 되어 있다. 광산 부분을 읽을 때는 델루니안의 문서가 떠올랐고, 제약 부분을 읽을 때는 일리오니쉬 의사가 떠올랐다.
그렇게 연관시켜 읽으니 지루한 부분도 참고 넘길 수 있었다.
그중 제일 주의 깊게 읽은 부분은 일리오니쉬 황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리오니쉬 황비, 후에 황후가 된 안나 레브로비치는 일리오니아의 역사에서 이름을 남긴 유일한 여성이다.
통일 황제 델루니안의 황비가 된 안나 레브로비치는 그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며 잠깐 동안 일리오니아에 영광을 주었지만, 곧 병으로 사망하며 이후 일리오니아 부흥의 맥이 끊어졌다.
황제는 알 수 없는 병증으로 사망한 그녀를 위해 사원을 개축할 정도로 그녀를 총애했지만, 그들 사이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일리오니아는 황실의 외척이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델루니안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델피온 2세는 일리오니쉬 혼혈이 아닌 순수 제국의 혈통이다.
그 부분을 읽으며 비소를 금치 못했다.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내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리안은 황제에게 간다고 했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전 황후와 나의 죽음의 뒤에 채스터턴과 일리오니쉬 황비가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황제는 분명 진실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죄도 없었음을.
……하지만 일리오니쉬 황후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책에 쓰여 있지 않은가. 그녀는 황제의 지극한 총애를 받다가 병으로 죽었으며, 황제는 그녀를 위해 사원까지 개축해서 주었다고.
리안을 사랑한 황제가 그녀를 총애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지극히 행복한 삶을 살다 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죽어야 했는데.
가슴을 불사르고 피어나는 분노. 그것은 사실 나를 향한 분노였다.
도대체 뭘 기대했어. 그가 채스터턴과 그 여자를 응징했을 것 같아?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인간이. 사람 목숨 따위는 파리처럼 생각하는 인간인데.
귀족도 아닌 평민, 그것도 7년이나 가지고 놀던 남창. 그에게는 그 정도의 가치밖에 못 되었을 나 때문에 반성하고 후회할 인간이 못 되었다, 델루니안은.
어리석은 기대였다.
간신히 분노를 삭이고 레브로비치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일리오니아의 왕가였던 레브로비치 가문은 제국에 흡수되고 백작위를 받았다.
그들의 근거지는 아이젠이었다. 왕가일 적보다 가세는 기울었지만 그들은 아이젠에 있는 대규모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일리오니쉬의 영역 안에서는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광산이 제국 황실에 넘어가기 전까지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여 년 전 경제 위기 때 아이젠의 광산은 완전히 제국 황가의 소유가 되었다.
광산을 인수받은 황가는 채굴량을 줄이고 산업자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제국은 경제 부흥에 성공했지만, 아이젠은 광산으로 부를 쌓은 도시였기에 산업자본이 모두 빠져나가며 도시 전체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제국에서 차별받으며 간신히 아이젠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일리오니쉬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소요 사태를 일으켰다.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차라리 분리 독립을 시켜달라고 소리친 일리오니쉬.
그리고 아인츠만은 군대를 동원해 그들을 일리오네에서 무자비하게 때려잡았고…….
그때부터 레브로비치는 일리오니쉬 반군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책은 일리오니쉬들의 미래에 대해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이 책은 비행기 테러 사건 이전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예측한 긍정적인 미래는 오지 않았다.
레브로비치의 비행기 납치 테러 사건으로 인해 일리오니쉬는 그 이전보다 더한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이제 제국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었다.
최근 델루니안의 제국 통일에 관한 영화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 시대의 영광을 떠올리며 분열된 제국을 다시 모으려는 문화적 시도라고 할까. 하지만 효과는 없는 듯하다.
……당신의 제국이 분열되고 있어, 델루니안.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시대의 흐름이지만 기분은 이상했다.
통쾌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복잡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어깨에 기댄 샤를마뉴를 살짝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부분은 다 읽었으니 이 책은 이제 되었다. 또 다른 책을 찾아봐야겠다.
이왕이면 레브로비치에 관해 자세히 설명된 책으로. 어디 있지 않을까? 『이민족의 역사』를 꽂아 두고 다른 책을 찾으러 책장 앞에서 서성댈 때였다.
“……전하.”
어느새 다가온 샤를마뉴가 단단한 두 팔로 허리를 휘어 감았다. 그러고는 상체를 구부려 내 등에 제 몸을 기댔다. 무겁다.
“팔 좀 치워 주시겠습니까. 방해됩니다.”
“……싫어.”
“저 책 찾아야 돼요.”
“찾아.”
“무겁다니까요.”
“내 사랑의 무게라고 생각해.”
“…….”
막무가내로 나오는데 이길 방법이 없다. 고개를 젓고 무시했다. 도움이 될 만한 책은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를 한참.
그때 하반신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매우 이질적인 느낌이다.
“…….”
고개를 돌려 밑을 바라보자, 슬금슬금 앞섶을 향해 기어가는 하얀 손이 보였다. 꾸물꾸물. 이런 못된 손.
나는 손으로 그의 손등을 짝! 하고 때렸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던 손이 움찔했다.
“손 떼세요.”
웃으며 말하자, 발갛게 부어오른 손등을 다른 손으로 슬슬 어루만지며 샤를마뉴가 웅얼댔다.
“내가 뭘.”
“신성한 서재라고요.”
“서재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
“아침이잖아요!”
“그럼 밤에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밤에도 안 됩니다.”
“……너무해.”
“뭐가 너무합니까. 받아들이는 쪽이 얼마나 힘든지 전하가 아세요?”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제가 내킬 때까지요.”
“맙소사.”
샤를마뉴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죽을 때까지 못 하겠군.”
“…….”
“그게 마지막 만찬이었던 셈인가.”
참내.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누굴 무성욕자로 알고 있어.
내가 남들에 비해 성욕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 흥분할 때는 있다. 그러니 그때 하자고요. 예?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의 엉덩이를 토닥이자 그가 불퉁한 얼굴로 내게 투정을 부렸다.
“나는 이런 거 저런 거 많이 해보고 싶다고.”
“……?”
“집에서만 하는 건 식상하잖아.”
집에서만 하는 건 식상하다니, 도대체 뭐가…… 까지 생각하다가 그 말의 진의를 깨닫고 주먹으로 그의 팔을 퍽 내려쳤다. 아야! 그가 울상을 지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전하.”
집에서 만나는 것도 충분히 위험한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는 지금 굳이 따지자면 사내 연애를 하고 있다. 헤어지면 서로 보기 껄끄러워진다는 그 사내연애.
게다가 내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의 황태자다. 제국 역사상 게이 황태자는 없었으니, 난 역사상 최초로 황태자의 남자친구가 된 셈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러운데 이 사실이 바깥으로 알려진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뭐가 문젠데?”
샤를마뉴가 팔을 매만지며 물었다.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말인가. 이 답답한 사람.
“전하는 본인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으시군요.”
“나?”
“전하는 황태자십니다. 그리고 전 당신의 비서고요.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어떤 의혹을 받을지 모르겠습니까?”
샤를마뉴는 황태자. 나는 그의 비서.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잘못 돌면 그는 부하 직원 성추행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힘과 권력으로 가여운 비서를 농락했다고 알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대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내가 아무리 우리의 관계는 그런 힘에 의한 굴복 관계가 아니라고 소리쳐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저 때문에 당신이 그런 오해를 받게 되는 게 싫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스킨십이나 애정 표현을 자제해 주십시오. 제발요.”
샤를마뉴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세웠다. 정면으로 마주친 그의 얼굴이 서서히 기쁨으로 물들었다.
왜 저런 표정이지? 의아함도 잠시.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내 머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헉. 깜짝 놀라 굳은 내 혀를 부드럽게 휘감은 샤를마뉴의 혀가 천장을 두드리자 간지러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바람에 입술이 떨어지자 그가 눈웃음을 치며 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가 다시 입술을 겹치기를 몇 차례.
“왜 이렇게 예쁜 말만 하는 거야.”
샤를마뉴가 뜬금없이 내뱉었다.
“……제가요?”
방금 애정 표현 하지 말라고 못된 말 내뱉은 것 같은데.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그가 양손으로 내 귓가를 어루만지며 반짝이는 웃음을 흩뿌렸다.
행복해서 미치겠다는 남자의 얼굴이다. 그 웃음에 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의 주변으로 금가루가 반짝거리는 것 같다.
“그럼 예쁘지 안 예뻐?”
“…….”
“당신 자신의 명예도 아니고 나를 위해서라는데.”
“…….”
“하여튼 예뻐 죽겠어.”
그가 양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품속에서 그의 체향이 흘러나왔다. 어리둥절해서 눈만 깜빡이고 있으려니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어떤 오해를 사더라도 상관없어.”
“…….”
“당신만 내 곁에 있어주면 돼. 당신만 날 믿어주면 세상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해도 괜찮아.”
“당신이 내 삶의 원동력이자, 나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버팀목이니까.”
그가 달콤하게 덧붙인 말에 그저 행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내 속은 바짝 타들어 갔다.
나는 두 팔을 뻗어 나를 껴안은 그의 팔을 붙잡고 상체만 살짝 떼었다. 행복에 겨운 그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싫습니다.”
“……응?”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전하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거, 제가 용납 못 합니다.”
자기들이 뭔데 감히 내 사람에게 비난을 한단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실체도 없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분노로 바르르 몸을 떠는 나를 샤를마뉴가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툭 내뱉기를.
“안 되겠어.”
“……?”
“오늘은 해야겠어.”
“예?”
“이건 전부 당신 잘못이야. 당신이 예쁜 말만 하니까…….”
“…….”
“탓하려면 당신의 예쁜 입을 탓하라고.”
그가 나를 끌어당겨 급하게 서재를 벗어났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침실이다.
맙소사. 내가 아무래도 그를 자극한 모양이다. 이 아침에? 미약하게나마 저항했으나 내 저항은 곧 그의 농밀한 입맞춤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잠시 후, 집안에 신음이 울려 퍼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 *
이른 아침에 시작한 정사는 다행히 정오가 되기 전에 끝났다. 자제심을 발휘한 것은 의외로 샤를마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
“병원에 가자.”
관계 도중에도 잠깐잠깐 내 마른 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샤를마뉴는 가만히 내버려 두기에는 영 걱정이 되는지 후희를 즐기다 말고 내 몸을 일으켰다.
갈 힘이 없다는 나를 번쩍 들어 욕실로 데려가 씻기는 손길에서는 나를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까지 느껴졌다.
“다음에 가면 안 됩니까? 오늘은 진짜 피곤한데…….”
“안 돼. 하루라도 빨리 검사받아야지.”
“…….”
“착하지? 응?”
뭔가 엄마한테 병원 가기 싫다고 징징대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다. 약간 자괴감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마뉴가 직접 차를 몰아 그때 내가 실려 간 병원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환자가 많을 줄 알았는데 VIP로 분류되어 금방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검사에는 총 두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샤를마뉴는 뭘 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돌아왔을 때 샤를마뉴는 의사와 무척 친해진 듯 화기애애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샤를마뉴와 농담을 주고받던 의사가 차트를 훑어본 후 은테 안경 너머로 나를 쏘아보았다.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겁니까?”
“네?”
“몸이 더 안 좋아졌네요.”
“아…… 요즘 좀 바쁘긴 했는데요.”
추도회 준비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몸이 안 좋아진 것도 이해는 간다, 하고 납득할 때였다. 의사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과로와는 다른 문제예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렇게 간 손상이 심합니까?”
“……예?”
“음독자살이라도 하려고 했어요?”
샤를마뉴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음독자살이라니…….
“그 정도로 심합니까?”
“과장 조금 보태자면 이대로 가다가는 1년 안에 죽을 겁니다.”
“…….”
“환자분은 못 느끼셨어요? 구토나 오른쪽 배가 아프다든가 그런 거요.”
추도회를 준비할 때 종종 속이 메스껍고 배가 아팠다. 왜 이러지, 하면서도 단순히 나이가 들고 피로가 쌓여서 그런 줄 알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이래. 잠만 제대로 자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간 손상 때문이라니…….
“원인이…… 뭡니까?”
“원인은 다양하죠. 대표적으로는 약인성 간 손상이라고, 약물을 잘못 복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약물…….”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약물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내가 주기적으로 섭취한 것.
‘그래서 말인데요, 비서관님.’
‘응?’
‘보약 드실래요?’
보약.
‘요즘 보약은 드세요?’
‘오늘부터 꼭 챙겨 드세요. 드셨는지 확인할 거예요.’
아인…….
“약물이라는 거에 보약도 포함됩니까?”
“보약이요?”
의사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소수민족 고유의 민간의학이라고 하던데요.”
“흠?”
의사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그가 살짝 내려온 안경을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민간의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대체로 사이비 의학입니다. 어떤 효능이 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에요.”
“아…… 그렇습니까?”
“예. 혹시 그 보약이라는 걸 드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 있던 샤를마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샤를마뉴는 모르겠구나. 아인이 보약을 지었을 때 샤를마뉴는 그곳에 없었으니까.
……그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나와 아인과, 일리오니쉬 의사뿐.
일리오니쉬.
그 말이, 가시처럼 입안을 맴돌았다.
“혹시 그게 지금 있나요?”
나는 가방에서 캡슐형 보약을 꺼내어 의사에게 건넸다. 의사는 조수를 부르더니 성분 감식을 맡기라고 지시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최대 몇 주가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될 수 있으면 여기 적힌 것들 외에는 드시지 마세요. 그 보약이라는 건 끊으시고요.”
“……알겠습니다.”
“한 번 손상된 간은 회복하기가 힘들어요. 약물치료도 쉽게 할 수 없으니 더 이상 안 상하는 게 최선입니다. 아셨죠?”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무리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돌아가도 된다고 허락했다.
샤를마뉴와 함께 진료실을 나와 병원의 복도를 걸었다. 뚜벅뚜벅. 네 개의 발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머리가 아파.
보약, 아인 퍼스, 의사, 일리오니쉬.
일리오니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레브로비치 황후.
투명한 가시덤불이 몸을 옥죄고 있는 것 같다. 일리오니쉬라는 가시덤불이.
아인 퍼스는 유달리 그 약에 집착했다. 끼니마다 약 드셨냐고 물어봤을 정도로 그는 내가 보약을 복용하는지 여부에 관심을 쏟았다.
그게 정말 선의였을까? 그 일리오니쉬 의사는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했다.
그렇게 유명하다는 의사가 어째서 내게 그런 독약을 처방했을까?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었지만 본능은 내게 그 약이 원인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일리오니쉬 얘기만 나오면 예민해지는 아인. 내 아버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아인. 비서실장실에 몰래 들어가 자신의 가족 관계 증명서를 훔치려고 했던 아인. 아인. 아인. 아인!
의심과 불신의 씨앗이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다. 배반의 덩굴은 무럭무럭 자라나 가슴과 뇌를 지배한다.
지옥의 서막이 올랐다. 타인을 의심하고 불신하고 감시하고, 나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고 염려하고 몸을 숨겨야 하는 연옥.
딱딱하게 굳은 채 얼어 있는 내 몸을 샤를마뉴의 팔이 덮었다. 그는 강한 팔로 내 어깨를 잡더니 자신 쪽으로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
“너무 걱정하지 마. 곧 회복될 거니까.”
내가 건강에 대해 염려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아니야. 내가 고민하는 건 그것보다 더욱 복잡한 거야.
불신에 대해. 배반에 대해.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어. 의심의 늪에 빠졌다.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아인 퍼스.
너는…… 도대체 뭐지?